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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야훼 vs. 아후라마즈다 #2: 바빌론 유수에서 귀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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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草人 최광민 2011-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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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최광민] 야훼 vs. 아후라마즈다 #2: 바빌론 유수에서 귀환까지 

요약

제1성전기와 제2성전기 유대교의 중간기인 바빌론 유수시절을 전후해 유대교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인지 검토한다.

순서
  1. 바빌론 유수에서 제2성전기까지
  2. 바빌론 유수기 유대인 압송자들의 종교적 상황
  3. 키루스의 해방령과 귀환
    1. 제1차 귀환
    2. 제2차 귀환
    3. 제3차 귀환
  4. 창시자 효과 (Founder Effect)?

티아마트를 죽이는 바빌로니아의 주신 마르둑 -- Wikimedia Commons



# 바빌론 유수에서 제2성전까지


(신) 바빌로니아 제국 군주 네부카드네자르 (=느부갓네살)의 침공으로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 파괴되고 (BC 597년) 이후 유다왕국이 완전히 멸망한 후 (BC 586년)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 인근으로 일군의 유대인들이 사로잡혀 가 70여 년간 유배지에서 살았던 사건을 "바빌론 유수"라고 부른다.

소위 "바빌론 유수"는 단일사건이라기 보다는 3차에 걸쳐서 일어난 사건으로, BC 605년 바빌로니아가 유다 왕국 사이에서 벌인 갈그미스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다수의 상류층 유대인들을 압송해 갔고 (1차), BC 597년 (2차)에 이어 예루살렘이 함락된 BC 586년 (3차)에 치드키야를 포함한 다수의 유대인들이 강제이주 당했다. 이때 솔로몬이 세웠던 야훼성전도 파괴되었다.  보통 히브리 정경에서 본격적인 '종말론'을 언급하는 선지자들 혹 예언자들 가운데 대표격인 다니엘과 에제키엘 (에스겔)은 각각 제 1차와 2차 압송 때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것으로 여긴다.

이 바빌론 유수는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고레스)가 선포한 해방령 의해 BC 538년에 끝이 났고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유배지에서 귀한한 이들이 주축이 되어 야훼의 두번째 성전을 재건한 BC 516년, 헤롯대왕이 이를 증축해 재봉헌한 BC 18년, 로마장군 티투스가 이끈 로마군단이 AD 70년 예루살렘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파괴되기까지의 약 600년을 학자들은 보통 "제2성전기"라 부른다.

현재 전승된 문서들과 고고학 자료로 재구성해 볼 때 "제2 성전기"의 유대교는 "제1성전기"의 유대교와 현저하게 대비되는 몇가지 교리적 요소가 있다.

이런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가지 가설들이 제시되었는데, 특별히 제 2성전기 유대교의 몇몇 설화적 모티크와 핵심교리들이 유대인들이 70년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거주하면서 경험한 메소포타미아/칼데아 종교, 또 특별히 아케네메스 왕조 페르시아의 대표 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를 차용하거나 영향을 받은 것이란 주장이 19세기부터 대두되었고, 특별히 영국 런던대학교의 이란/페르시아학 교수였던 Mary Boyce가 1970년대 부터 이 분야에서 두드러진 연구성과를 냈다.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유대교의 대표적인 교리는 (1) 유일신관, (2) 선/악의 대비, (3) 천국/지옥의 내세관 (4) 천사론, (5) 종말론, 그리고 (6) 메시아론이다.

제2성전기 유대교가 페르시아 왕실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정황"은 나름 타당한데, 그것은 이 왕조의 초대 군주이자 유대인들을 유배해서 해방한 키루스가 히브리 성서에서 '기름부어 세운 자' 즉 '메시야 מְשִׁיח'라 불린 유일한 이방인일 정도로 유대인의 기저심리에 중대한 인물이었고, 또 제 2성전기 유대교 - 특별히 종말론적 묵시문학의 특징을 잘 반영하는 선지자/예언자들의 활동시기 후반이 대략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전반부와 겹치기 때문이다.

כֹּה־אָמַר יְהוָה לִמְשִׁיחוֹ לְכוֹרֶשׁ אֲשֶׁר־הֶחֱזַקְתִּי בִֽימִינוֹ לְרַד־לְפָנָיו גּוֹיִם וּמָתְנֵי מְלָכִים אֲפַתֵּחַ לִפְתֹּחַ לְפָנָיו דְּלָתַיִם וּשְׁעָרִים לֹא יִסָּגֵֽרוּ׃

야훼 (יְהוָה )께서 당신이 기름 부어 세우신 ( לִמְשִׁיחוֹ) 고레스 (לְכוֹרֶשׁ)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오른손을 잡아주어 만백성을 네 앞에 굴복시키고 제왕들을 무장해제 시키리라. 네 앞에 성문을 활짝 열어 젖혀 다시는 닫히지 않게 하리라.  -- 한국어 공동번역, {이사야} 45:1

페르시아는 BC 538년 바빌론을 점령하고 패권을 장악했으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동방원정으로 BC 330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킬 때까지 유대인들은 반자치적인 지위를 누리긴 했지만 여전히 페르시아 총독에게 정치적으로 예속되어 있었다. 






# 바빌론 유수기 유대인 압송자들의 종교적 상황

앞서 BC 722년에 앗시리아 제국에게 멸망당한 북부 왕국 이스라엘인들의 경우는 이와 달랐다. 앗시리아의 세나케립 (=산헤립)은 북 이스라엘 정복 후 저항세력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정복지 주민들을 앗시리아 제국 전역에 강제로 흩어버렸다. 이런 민족재배치 정책은 앗시리아의 주특기였다. 북 이스라엘에 재배치되어 현지화 한 사마리아인이 바로 그런 결과물이다.

그런데 남부 유다왕국이 망하면서 압송된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 제국 전역에 흩어진 것이 아니라 네부카드네자드가 지정한 곳에 정착했다. 또 '바빌론 유수'란 말에서 당시 패망한 유다왕국 사람 전원이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것으로 흔히들 잘못 생각하는데, 유다왕국을 멸망시킨 바빌로니아 제국의 네부카드네자르 (= 느브갓네살) 는 유다왕국의 지배층인 귀족들과 사제계급, 전문인, 장인 등을 바빌론 압송대상에 넣었지만 소위 '암 하레즈, (= 땅의 사람들)'이라 불린 일반 백성들은 본토에 남겨두고, 압송시킨 지배계급이 소유했던 땅을 빈민들에게 분배시켰다. 당시 압송된 사람은 1만 - 5만 명 정도로 보통 추정된다. 바빌론으로 압송된 유대인들은 일종의 '지배계급' 혹은 '엘리트 그룹'이다. 

따라서 바빌론 유수기의 유다왕국 출신 유대인들은 앞서 패망한 북 이스라엘의 10부족과는 사뭇 다른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데, 우선 (1) 남부 유다왕국 백성 상당수는 원래 땅에 남아 있었고, (2) 압송된 자들도 할당된 정주지에서 살게 되었다. 즉, 그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유대인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로 그들 만의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아래 지도는 유다왕국을 정복한 네브카드네자르 2세가 지배한 최대 판도를 보여준다.  강제이주된 유대인들은 지도의 동쪽에 있는 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 바빌론 인근인 니푸르와 그 일대에 재배치 되었다. 동쪽 끝에 있는 엘람 지역의 도시 수사는 두 세대 후 바빌로니아를 정복할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가 된다. 유대인들이 정착했던 니푸르는 메소포타미아 / 엘람의 경계 지역에서 그리 멀지 않다.




수메르와 고-바빌로니아 왕국 시절의 니푸르는 수메르의 바람의 신이자 우주의 지배자인 엔릴이 숭배되던 도시국가였고, 이후 신-바빌로니아 종교가 마르둑/벨을 정점으로 하는 체계로 발전되면서 마르둑이 니푸르의 주신이 되었다. 

"마르둑"과 그의 호칭 가운데 하나인 "벨"은 그 이름으로 {이사야}, {예레미야} 등의 예언서에 등장한다. 여기서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유다왕국의 패망 이전에 바빌로니아의 운명을 예언한 "예언"에 해당한다.

벨 신이 엎드러진다. 느보 신이 거꾸러진다. 그 우상들이 짐승과 가축에게 실려간다. 들어다 올려놓으면, 짐승이 싣고 가다가 지치도록 무거운 짐이 된다. 다 함께 거꾸러지고 엎드러져 짐을 건지기는커녕, 저희들 자신이 귀양살이로 끌려가는구나. -- 한국어 공동번역, {이사야} 46장 

바빌론 나라와 그 백성의 운명을 두고 야훼께서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 하신 말씀. "깃발을 올려 만방에 소식을 전하여라. 바빌론이 함락되리라.
벨 신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마르둑 신은 파랗게 질리리라. 그 신상들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우상들도 파랗게 질리리라. 북녘에서 한 민족이 바빌론을 쳐 그 땅을 광야로 만들 것이다. 사람도 짐승도 도망쳐 버려 폐허가 되리라. 그 날이 오면, 그 때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은 돌아오리라. 유다 백성도 함께 돌아오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울며 돌아와 저희의 하느님, 야훼를 찾으리라. 시온으로 가는 길을 물어 찾아오며 '영원한 계약을 다시는 저버리지 말자.'고 서로 다짐하리라. --- 한국어 공동번역, {예레미야} 50장

"내가 바빌론에서 벨 신을 벌하여 삼켰던 것을 토하게 하리니, 다시는 뭇 민족이 그에게 몰려들지 않으리라. 바빌론 성은 무너졌다. 내 백성아, 너희는 바빌론 성에서 빠져 나와 내가 터뜨리는 화를 입지 말고 목숨을 건져라.  (중략)  바빌론의 신상들을 벌할 날이 이제 다가왔다. 그 나라 방방곡곡 주검들이 뒹굴어 온 국민이 얼굴을 들 수 없게 되리라. 바빌론을 무너뜨릴 자 북녘에서 오리니,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바빌론이 망하는 모양을 보고 즐거워하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온 세상에서 숱한 사람을 죽인 바빌론, 그 바빌론이 이스라엘 백성을 마구 죽인 죄벌로 망할 때가 되었다. 그런즉, 칼을 피한 자들아 빠져 나오너라. 머뭇거리지 말고 어서 떠나거라. 멀리서라도 이 야훼 생각을 하고 예루살렘을 너희 마음에 두어라."  (중략) 예레미야는 바빌론에 내릴 이 모든 재앙을 한 책에 기록하여 주며 스라야에게 일렀다. "그대가 바빌론에 가거든, 이 모든 말씀을 반드시 다 읽도록 하시오. 그리고 야훼께 이렇게 아뢰시오. '야훼여, 주께서는 이 곳을 송두리째 뿌리뽑아 사람도 짐승도 살 수 없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빌론이 영원토록 폐허로 남아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거든 책에 돌을 달아 유프라테스 강 물 속에 던지시오. 던지며 이렇게 말하시오. '이처럼 바빌론은 물에 가라앉으리라. 내가 내리는 재앙을 당한 후에,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여기까지가 예레미야의 말이다.  --- 한국어 공동번역, {예레미야} 50장

이 내용이 먼 훗날 페르시아가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다는 제1성전기 시절의 진짜 "예언"이든 혹은 제2성전기 유대교가 그 내용을 "창작"한 것이든지 간에, 유대교가 마르둑으로 대표되는 바빌론 종교는 당연히 지극히 부정적으로 묘사되며, 따라서 유대인들이 마르둑으로 대표되는 바빌론의 종교를 긍정적으로 수용했다고 보긴 어렵다.



한편, 당시 바빌로니아의 중심지역인 메소포타미아 남동부로 이주된 BC 6/5세기 유대인들의 생활상에 대한 바빌로니아 측 자료가 약 200개의 알-야후다 점토판 (Al-Thuda tablets)에 기록되어 남아있다. 이 점토판에 따르면, 당시 유대인들의 정착한 지역의 중심지는 바빌로니아의 언어인 아카드어로 "유다(인들)의 도시"를 뜻하는 "알-야후다"이며 니푸르 남동부에 있던 도시였다.

첫 기록은 BC 572년, 즉 예루살렘의 제1성전이 파괴된 후 약 15년 후인 신-바빌로니아 네부카드네자르 2세 시절에 기록된 내용이고, 마지막 자료는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귀환하기 시작한 BC 536년 부터  60년 후이자 에즈라의 등장 시기 20년 전에 해당하는 아케메네스 왕조 크세스세르 1세의 치세에 해당하는 BC 477년이다.

이 문서 속의 유대인 포로들은 "슈샤누"라 불리는데, 다른 바빌로니아 문서의 용례를 본다면 이 계층은 주로 전쟁으로 망가진 도시와 지역을 수복하는데 투입되었다. 이들은 땅을 소작하여 농사를 짓기도 했지만 노예는 아니라서 거주와 이전의 자유를 가졌고, 이런 지위로 인해 바빌로니아나 페르시아에 동화되는 것도 가능했다. 노예가 아니기에 징세의 의무도 졌다.

점토판에 등장하는 이름으로 봐서는 유대인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은 지켜졌다고  보여지나, 유대인의 명절이라든지 안식일이 언급되어 있지는 않아서 종교적 정체성이 어떠했는지를 재구성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들이 종교적 정체성 역시 유지했을 가능성은 작지 않은데, 특별히 압송된 지배층에 사제계급이 포함되기 때문에 바빌로니아 유배지에서도 이들은 종교적 정체성을 일정 정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이 유대인 공동체가 바빌로니아 제국의 심장부에 위치했더라도 대략 70년 간 바빌론 종교의 침투에 그렇게 취약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바빌론 종교에 대해 대립각을 세움으로써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정체성을 유지하려 했을 수도 있다. (일부 학자들은 {히브리 성서}에 등장하는 "배타적 야훼 유일신 신관"은 바빌론 종교에 대한 대응으로 이 시절 등장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따라서 바빌론 유수' 70년 동안 유대인들은 두개의 지리적 축에 존재했던 셈이지만, 이 70년 동안 본토에 남겨졌던 유대인들에 대해선 사료상 남아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예레미아 애가}는 바빌론 유수기에 예루살렘에서 씌여진 것으로 문서 안에 등장하는데, 아마도 국가시스템 붕괴로 인해 이 지역은 거의 황폐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패망한 국가의 백성이 타국으로 끌려가는 것은 슬픈 일인게 분명하지만, 오히려 끌려가지 않고 본토에 남은 자들의 운명이 더 가혹할 것이라고 야훼는 다짐한다.

{예레미야} 29장은 제 1차 압송 때 바빌론으로 끌려간 포로들에게 본국에 있던 예레미야가 보낸 편지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한번 읽어보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사로잡아 간 장로들을 비롯하여 사제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에게 예언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편지를 띄운 일이 있었다. 그 편지는 여호야긴 왕과 그의 어머니와 내시들과 유다 및 예루살렘의 고관들과 은장이와 대장장이들이 예루살렘에서 끌려간 뒤에 띄운 것인데,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키야의 아들 그마리야가 유다 왕 시드키야의 사명을 띠고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을 알현하러 바빌론으로 갈 때 가지고 갔던 것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나 만군의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사로잡혀 간 모든 사람에게 말한다. 너희는 거기에서 집을 짓고 살아라. 과수원을 새로 마련하고 과일을 따먹으며 살아라. 장가 들어 아들딸을 낳고 며느리와 사위를 삼아 손자 손녀를 보아라. 인구가 줄어서는 안 된다. 불어나야 한다. 나에게 쫓겨 사로잡혀 가 사는 그 나라가 잘되도록 힘쓰며 잘되기를 나에게 빌어라. 그 나라가 잘되어야 너희도 잘될 것이다. 나 만군의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말한다. 너희 가운데 있는 예언자들과 박수들한테 속지 않도록 하여라. 그 꿈쟁이들의 꿈이야기를 곧이듣지 마라. 그것들은 내가 보낸 것들이 아니다. 내 이름을 팔아 거짓 예언을 하는 것들이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나 야훼가 말한다. 너희가 바빌론에서 칠십 년을 다 채운 다음에야 약속대로 나는 너희를 찾아가 이 곳으로 다시 데려오리라.

너희에게 어떻게 하여주는 것이 좋을지 나는 이미 뜻을 세웠다. 나는 너희에게 나쁘게 하여주지 않고 잘하여 주려고 뜻을 세웠다. 밝은 앞날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나를 부르며 나에게 와서 빌기만 하여라. 그렇게 하면 들어주리라. 마침내 너희는 일편단심으로 나를 찾게 되리라. 그렇게 나를 찾으면 내가 만나주리라. 똑똑히 일러둔다. 너희는 나를 만날 것이며 나는 너희를 고국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너희는 나에게 쫓겨 세계만방에 포로로 끌려갔지만, 나는 너희를 거기에서 모아들여 이 곳으로 되돌아오게 하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야훼께서는 바빌론에서도 우리에게 예언자들을 일으켜주셨다.' 하고 너희가 말한다마는, 다윗 왕위를 이었다는 왕과 너희 동족 가운데 함께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이 성에 남아 있는 온 백성을 어떻게 할 것인지 나 야훼가 말한다. 나 만군의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말한다. 내가 전쟁과 기근과 염병을 겪게 하리니, 이 백성은 형편없이 썩어 먹지 못할 무화과처럼 되리라. 내가 전쟁과 기근과 염병으로 이 백성의 뒤통수를 치리니, 세상 모든 나라들이 보고 놀랄 것이다. 나에게 쫓겨 여기저기 가서 사는 그 끔찍한 꼴을 보고 모든 민족들은 저주하며 빈정거리고 조롱하리라. 내가 똑똑히 일러둔다. 나의 종 예언자들을 거듭거듭 보내어 말을 전하게 하였는데도, 듣지 않았으므로 너희가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이다. 내가 다시 말한다. 너희는 나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 너희는 모두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쫓아보낸 자들이니,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그들은 내 이름을 팔아서 거짓말을 내 말인양 전하는 것들이다. 그 거짓 예언자 콜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키야를 어떻게 할 것인지 나 만군의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말한다. 나는 그들을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 너희가 보는 앞에서 죽게 하리라. 그리하여 바빌론에 사는 모든 유다인 포로들이 그들을 저주받은 자의 본보기로 삼을 것이다. 그리고 남에게 악담을 할 때에 '너도 천벌을 받아 시드키야나 아합처럼 바빌론 왕에게 화형이나 받아라.' 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에서는 있을 수 없는 불미스러운 일을 한 것들이다. 남의 아내와 간통하면서 내가 시키지도 않은 말을 하는 것들이다. 그렇게 내 이름을 팔아 거짓말을 하였으니 결국 그렇게 되는 것이다. 내가 다 알고 하는 말이니, 틀림이 없다."

여기서 왜 야훼는 본토에 남았던 자들의 운명이 더 가혹할 것이라 말하는가? 사실 본토에 남겨 버려지는 것은 "타락한 자"들에 대한 처벌이고, 사실 바빌론 유수는 야훼가 의도적으로 유대인 일부를 뽑아서 타향으로 보냄으로써 의도적으로 본토인 및 그들의 '타락한' 문화와 한시적 분리시킨 조치인 셈이다.

여기서 당시 유대인들이 '바빌론 유수'란 경험을 어떻게 해석했는지가 드러난다. 즉, 바빌론 유수는 '징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들을  '(종교적으로) 타락한 본국인'들과 구별시켜 '성별'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 키루스의 해방령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창건자 키루스 (고레스)가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유대인 해방령을 선포할 때, 두 세대 전 바빌로니아로 끌려와 있던 유대인들이 일시에 고향으로 귀환한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히브리 성서}에 따르더라도 유대인들의 귀환은 한번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적어도 세번에 걸친 단계적 귀환이 있었고, 본토로 이주한 집단의 성격도 그 기간동안 약간 달라졌을 수 있다.

세번에 걸친 귀환시점은 아래와 같다. 이 내용은 {히브리 성서} 중에서 {에즈라}, {느헤미아}, 그리고 같은 시기에 활동한 소-선지자 (학개, 즈카리야 (스가랴)) 몇몇의 글에서 정리해 보았다.


헤롯대왕이 증축한 제2성전기 야훼성전 (모형) -- Wikimedia Commons 


## 제1차 귀환

제1차 귀환은 BC 537년 키루스의 칙령에 따라 총독으로 임명된 유다 왕조의 왕족 출신 스룹바벨  (즈루빠벨)의 지휘 하에 시작되었고, 이들은 귀환 후 예루살렘에 정착한 지도부가 BC 536년 부터 솔로몬이 지은 제1성전터에 야훼의 성전을 재건하려 했으나, 비-유대계 선주민들의 반대와 주민들의 시큰둥한 반응으로 지연되다가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촉구로 다시 가속되어 BC 520년 전후에 완공되었다.

바빌론 황제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빌론으로 갔다가 예루살렘이나 유다 각 성읍에 돌아와 사는 백성은 아래와 같다. 이들은 즈루빠벨, 예수아, 느헤미야, 스라야, 르엘라야, 모르드개, 빌산, 미스발, 비그왜, 르훔, 바아나와 함께 돌아온 사람들이다. 

바로스의 일가 이천백칠십이 명, 스바티야의 일가 삼백칠십이 명, 아라의 일가 칠백칠십오 명 ... [ 중략] .. 스나아의 일가 삼천육백삼십 명이었다.

사제는 여다야의 일가로서 예수아의 가문 구백칠십삼 명, 임멜의 일가 천오십이 명, 바스훌의 일가  이백사십칠 명, 하림의 일가 천십칠 명이었다.

레위인은 예수아의 일가, 곧 카드미엘과 빈누이와 호다야의 일가 칠십사 명이었다.

합창단은 아삽의 일가 백이십팔 명이었다.

수위는 살룸의 일가, 아텔의 일가, 탈몬의 일가, 아쿱의 일가, 하티타의 일가, 소배의 일가, 모두 백삼십구 명이었다.

[중략]

성전 막일꾼과 솔로몬의 종들의 후손은 모두 삼백구십이 명이었다.

델멜라, 델하르사, 그룹, 아딴, 임멜에서 돌아온 사람들로서 족보를 밝힐 수 없어 이스라엘 후손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아래와 같다.

들라야의 일가, 토비야의 일가, 느코다의 일가 육백오십이 명이었다.

사제 가문 사람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호바야의 일가, 하코스의 일가, 바르질래의 일가가 그러했다. 바르질래는 길르앗 사람 바르질래 가문에 장가들어 처가의 성을 받은 사람이었다.

호적부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이 사람들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아 이 사람들은 부정한 사람으로 인정받아 사제직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대사제가 임명되어 우림과 둠밈으로 이 일을 결정짓기까지 거룩한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총독의 지시가 있었다.

온 회중을 합계하니 그 수효가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이었다. 그 밖에도 남녀 종 칠천삼백삼십 명이 있었고 남녀 가수 이백 명이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여러 마을에 흩어져서 자리를 잡은 지 일곱째 달이 되었을 때에, 일제히 예루살렘으로 모였다.  --- 한국어 공동번역, {에즈라} 2장

이 기록에 따르면 스룹바벨 (즈루빠벨)의 지휘 하에 본토로 귀향한 유대인과 기타인들은 총 42360명이고 거기에 기타 7330 + 200명이다. 즉, 5만 명 정도가 제1차 귀환의 규모다.



이 5만 명의 귀환자들이 본토에 돌아갔을 때, 그곳에는 패망한 남 유다왕국의 잔존민들과 그 이전 북 이스라엘이 멸망했을 당시 앗시리아가 민족재배치령으로 북 이스라엘 지역에 이식된 후 수 백년 간 지인과 동화된 인구그룹이 살고 있었다. 후자는 훗날 사마리아인으로 불릴 사람들의 조상이 된다.

이들과 귀환자들 사이에는 상당한 갈등이 벌어졌는데, 귀환자들은 우선 숫자 상으로도 밀렸을 것이다.

이 갈등은 {에즈라} 4-5장에 기록되어 있다.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게는 원수가 있었다. 그들은 포로들이 돌아와서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의 성전 본관을 짓는다는 말을 듣고, 즈루빠벨과 예수아와 각 가문의 어른들을 찾아와서 청하였다. "우리도 함께 성전을 짓게 하여주시오. 우리는 아시리아 황제 에살하똔에게 이리로 끌려온 날부터 당신들 못지않게 당신들의 하느님을 찾아 제사를 올려 왔소."

즈루빠벨과 예수아와 그 밖에 각 가문의 어른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우리 하느님의 성전을 짓는데 당신들은 상관할 일이 아니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의 성전은 우리끼리 짓겠소. 페르시아 고레스 황제의 어명이오."

그들은 제 땅을 갈아먹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유다 백성의 기를 꺾어주고 겁을 주어 성전 짓는 일을 방해하는 한편, 고문관들을 매수하여 성전을 지으려는 계획을 꺾고 말았다. 그리하여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가 죽고 다리우스가 페르시아 황제가 되기까지 일은 중단되어 있었다.

원수들은 아하스에로스가 등극하자마자 유다 주민과 예루살렘 성민을 고발하는 글을 올렸고, 아르닥사싸가 위에 있을 때에도 미드르닷과 타브엘은 동료 관리들과 함께 페르시아 황제 아르닥사싸에게 예루살렘을 고발하는 글을 올렸다. 그 글은 아람 말로 고쳐 아람 글자로 쓴 글이었다. 예루살렘을 고발하여 황제 아르닥사싸에게 올린 이 장계는 사령관 르훔과 비서 심새가 쓴 것으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령관 르훔, 비서 심새, 동료 관리들은 오스나빨 황제 폐하께서 사마리아를 비롯한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에 이주시키신 디나인들, 아발사드가인들, 다르불라인들, 아바르사인들, 우룩인들, 바빌론인들, 엘람인 곧 수산인들, 그 밖의 모든 민족들과 함께 상소합니다."  --- 한국어 공동번역, {에즈라} 4장

이로 인해 제2성전의 건설은 아닥사스사르 시절에 중단되었는데,  다리우스가 등극한 제 2년에 재개된다.

그 때에 예언자 하깨와 이또의 아들 예언자 즈가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인들에게 이스라엘을 거느리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의 뜻을 일러주었다. 그러자 스알디엘의 아들 즈루빠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는 곧 예루살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을 다시 세우기 시작하였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의 끊임없는 격려를 받으며 일을 진행하는데,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 총독 다뜨내가 스달보즈내를 비롯한 동료 관리들을 거느리고 와서 이렇게 물었다. "누구의 허락을 맡고 재목을 제대로 써가며 이 집을 짓고 있느냐? 이 공사 감독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중략]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 총독 다뜨내가 스달보즈내를 비롯한 동료 관리들과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에 사는 아바르사인들과 함께 다리우스 황제에게 장계를 올렸다. 그 장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리우스 폐하, 만수무강을 빕니다. 폐하께 아뢰옵는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우리가 유다 도에 가서 큰 신전을 보았습니다. 유다인들은 장로들의 지휘 아래 돌을 다듬어 벽을 쌓고 안에는 널빤지를 입히고 있었습니다. 빈틈없이 건축이 진행되고 있기에, 장로들에게 누구의 허락을 받아 재목을 제대로 써가며 집을 짓느냐고 물었습니다. 또 폐하께 알려드려야 하겠기에 그 공사를 책임진 두목들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그 명단을 적어올립니다.

그들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우리는 하늘과 땅을 내신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로서 이 전을 다시 세우는 중이오. 오래 전에 이스라엘의 대왕께서 완공하셨던 것인데, 하늘을 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선조들의 죄 때문에 화가 나시어 우리 선조들을 갈대아인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넘겨주셨소. 그리하여 이 전은 헐리고 백성은 바빌론으로 사로잡혀 갔던 것이오. 고레스 폐하께서는 바빌론 왕이 되시던 제일년에 이 하느님의 성전을 다시 세우라는 칙령을 내리셨소. 그 때 바빌론 신전 본관에는 느부갓네살이 이 예루살렘 하느님의 성전 본관에서 가져간 금은 기구들이 보관되어 있었소. 고레스 폐하께서는 세스바쌀을 총독으로 임명하시고 바빌론 성전에 있는 그 기구들을 꺼내주셨소. 폐하께서는 그 기구들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에다 두라고 하시면서, 하느님의 성전을 제자리에 다시 세우라고 하셨던 것이오. 그리하여 세스바쌀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하느님의 성전터를 잡아놓았소. 그 후로 이제까지 일을 하였지만,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소.'

그러하오니 폐하께서만 좋으시다면, 예루살렘에 있는 이 신전을 다시 세우라고 고레스 폐하께서 칙령을 내리신 일이 과연 있는지, 바빌론 황실 문서고를 찾아보심이 좋을 줄로 아룁니다. 그리고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폐하께서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다리우스 황제의 어명을 받들어 그 곳 바빌론 나라 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는 황실 실록을 조사하다가, 메대 도에 있는 요새 도시 아흐므다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찾았는데 거기에 아래와 같은 비망기가 적혀 있었다.

"고레스 황제 제일년에 황제 폐하께서는 예루살렘 신전을 두고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리시다. '그 신전을 다시 세우고 거기에서 제물을 잡아 살라 바치도록 하여라. 신전은 높이도 육십 자, 나비도 육십 자로 하여라. 돌을 세 겹으로 쌓아 올리고 나무를 한 겹 대는데, 그 비용은 국고에서 지불하도록 하여라. 그뿐 아니라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신전 본관에서 바빌론으로 가져온 신전의 금은 기구들을 되돌려주어라. 모두 예루살렘 신전 본관 제자리에 가져다 두도록 하여라.'"

이것을 보고 다리우스 황제는 아래와 같은 영을 내렸다. "이제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 다뜨내 총독과 스달보즈내와 동료 관리들과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에 있는 아바르사인들은 유다 총독과 유다 장로들이 신전을 짓는 일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그러나 그 신전을 다른 자리에 세워서는 안 된다."   -- 한국어 공동번역, {에즈라} 5-6장

키루스의 야훼성전 재건 허가령을 확인한 다리우스는 제2성전의 건축을 재허가 했고, 다리우스 제위 6년에 제2성전은 완공된다.



## 제2차 귀환

제2성전기 유대교의 기초를 놓은 가장 핵심 중의 핵심으로 늘 언급되는 유대교 사제이자 학자인 에즈라는 키루스 당시의 제1차 귀환 후 약 70년 후에 본토로 귀환했다. 

이 제2차 귀환은 '아하수에로' (= 크세스크세스 1세) 페르시아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멸족을 당할 뻔한 내용을 담은 {에스텔 (=에스더)} 속 사건 (bc 478년) 이후, 당시 바빌론에 거주하던 에즈라가 페르시아의 '아르닥사싸' (=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재위 7년인 BC 457년 예루살렘으로 파견될 때 바빌론에 거주하던 유대인들과 함께 귀환할 무렵이다. 예루살렘에서 에즈라는 그곳의 유대인들이 비-유대인 여자들과 결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죄로 규정하면서 종교적 정화작업을 이끌었다.

{에즈라} 7장의 기록이다

이런 일이 있은 뒤 페르시아를 아르닥사싸 황제가 다스리던 때, 에즈라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비는 스라야, 할아버지는 아자리야, 그 윗대는 힐키야, 그 윗대는 살룸, 그 윗대는 사독, 그 윗대는 아히툽, 그 윗대는 아마리야, 그 윗대는 아자리야, 그 윗대는 므라욧, 그 윗대는 즈라히야, 그 윗대는 우찌, 그 윗대는 북키, 그 윗대는 아비수아, 그 윗대는 비느하스, 그 윗대는 엘르아잘, 그 윗대는 대사제 아론이었다.

이 에즈라가 바빌론에서 돌아왔는데, 그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 받은 모세의 법을 통달한 선비였다. 그를 택하신 하느님 야훼께서 살펴주셨으므로 황제는 그의 청을 다 들어주었다. 이스라엘 일반인 일부와 사제 일부와 레위인들과 합창대원들과 수위들과 성전 막일꾼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니, 때는 아르닥사싸 황제 제칠년이었다. 그들은 황제 제칠년 오월에 예루살렘에 다다랐다. 에즈라는 정월 초하루를 출발일로 정하고 그 날 떠나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다다랐다. 하느님께서 잘 보살펴 주셨던 것이다.

에즈라는 야훼의 법을 깨쳐 몸소 실천할 뿐 아니라, 그 법령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마음 밖에 없었다. 에즈라는 사제면서 선비였다. 이스라엘이 야훼께 받은 계명과 법규를 통달한 선비였다. 그는 아르닥사싸 황제에게서 아래와 같은 칙령을 받았다.

"아르닥사싸 황제는 하늘을 내신 하느님의 법을 가르치는 선비 에즈라 사제에게 칙령을 내린다. 이에 짐은 아래와 같이 지시하는 바이다. 짐의 나라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사제든지 레위인이든지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대와 함께 가도 좋다. 짐은 일곱 고문관과 함께 그대를 파송한다. 그대는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가서 모든 일이 그대가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법대로 돌아가는지 살피도록 하여라. 짐은 예루살렘에 계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일곱 고문관과 함께 금과 은을 성금으로 바치고자 하는 바이니, 그것도 가지고 가거라."

그대의 백성과 사제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정성껏 바칠 예물뿐 아니라 바빌론 온 도에서 성금으로 받은 금과 은도 모두 가지고 가거라. 짐의 뜻이 이러하니, 그대는 그 돈으로 어김없이 소와 숫양과 어린 양을 사고 그와 곁들여 바칠 곡식예물과 제주를 사서 예루살렘에 있는 그대들의 신전 제단에 바치도록 하여라. 그렇게 쓰고 남은 금과 은은 그대들의 하느님의 뜻을 따라 그대와 그대의 동료들이 마음대로 쓰도록 하여라. 그대의 하느님의 전에서 쓸 기구들도 받아가지고 가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하느님 앞에 차려놓도록 하여라. 그 밖에도 그대의 하느님의 성전에 아쉬운 것이 있거든 무엇이든지 국고금에서 타다가 마련하도록 하여라.

아르닥사싸 황제는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 재무관들에게 지시한다. 하늘을 내신 하느님의 법을 가르치는 선비 에즈라 사제가 청하는 것이 있거든 무엇이든지 어김없이 들어주어라. 은은 백 달란트까지, 밀은 백 섬까지, 술은 백 통까지, 기름도 백 통까지, 소금은 무제한으로 대어주어라. 하늘을 내신 하느님께서 당신 성전에 필요하여서 지시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어김없이 수행하여, 이 황실에 하느님의 진노가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또 그 신전에서 봉직하는 사제나 레위인이나 합창대원이나 수위나 막일꾼뿐 아니라 모든 참배자들에게서도 조공과 세금과 관세를 거두지 못한다. 에즈라, 그대는 그대의 하느님의 슬기로운 지시를 따라 관리들과 판사들을 세워라. 그리하여 그대의 하느님의 법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로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에 사는 그대의 온 백성을 다스리게 하여라. 그 법을 소중히 알지 않는 사람이 있거든 그대가 가르쳐주도록 하여라. 그대의 하느님
의 법과 짐의 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거든 사형이나 추방형, 벌금형이나 징역형을 내려 엄하게 다스려라."  --- 한국어 공동번역, {에즈라} 7장

{에즈라} 8장은 그와 함께 귀환한 가문들을 기록하는데, 5만 명에 달하는 제1차 귀환에 비해 그 수가 매우 적다. 약 1500명 규모인데 기타 종들을 포함하면 2-3천까지 되었을 수도 있다.
 
에즈라는 이렇게 적는다.

아르닥사싸 황제가 다스릴 때 나와 함께 바빌론에서 돌아온 각 가문 어른들로서 등록된 사람은 아래와 같다.

비느하스 일가 중에서 게르솜, 이다말 일가 중에서 다니엘, 다윗 일가 중에서 스가니야의 아들 하투스, 바로스 일가 중에서 즈가리야, 그의 이름 아래 남자 백오십 명이 등록하였다. 바핫모압 일가 중에서 즈라히야의 아들 엘요에내, 그의 이름 아래 남자 이백 명이, 자뚜 일가 중에서 야하지엘의 아들 스가니야, 그의 이름 아래 남자 삼백 명이, 아딘 일가 중에서 요나단의 아들 에벳, 그의 이름 아래 남자 오십 명이, 엘람 일가 중에서 아달리야의 아들 여사이야, 그의 이름 아래 남자 칠십 명이, 스바티야 일가 중에서 미가엘의 아들 즈바디야, 그의 이름 아래 남자 팔십 명이, 요압의 일가 중에서 여히엘의 아들 오바디야, 그의 이름 아래 남자 이백십팔 명이, 바니 일가 중에서 요시비야의 아들 슬로밋, 그의 이름 아래 남자 백육십 명이, 베배의 일가 중에서 베배의 아들 즈가리야, 그의 이름 아래 남자 이십팔 명이, 아즈갓 일가 중에서 하카탄의 아들 요하난, 그의 이 름 아래 남자 백십 명이, 아도니캄 일가 중에서 작은 아들들, 그들의 이름은 엘리벨렛, 여이엘, 스마야인데 그들의 이름 아래 남자 육십 명이, 비그왜의 일가 중에서 우대와 자붓, 그들의 이름 아래 남자 칠십 명이 등록하였다. 나는 이들을 아하와로 흐르는 강가에 모은 다음 거기에 천막들을 치고 사흘을 묵으며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일반인도 있고 사제들도 있는데 레위인만은 하나도 없었다
. --- 한국어 공동번역, {에즈라} 8장

바빌론 유수 이후 한 세기 이상이 지나면서 1차 귀환에 동참하지 않는 유대인들이 페르시아 제국 내에 생업의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는 점과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당시 본토에 제2성전을 건립하고 재정착을 시작한 제1차 귀환자들 보다) 심지어 더 강렬하게 지키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 두자.

# 제3차 귀환

에즈라에 이어  BC 444년 페르시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가신 (헌작시종)인 느헤미아가 황ㅈ[의 지시로 총독으로 부임해 예루살렘으로 왔다. 이를 제3차 귀환이라고 부르지만 대규모 귀환이라고 보긴 힘들다. 

총독 느헤미아와 에즈라는 제 2차 성회로 제2성전기 유대교 개혁을 마무리 한다. 그 가운데 대미는 혈통적 "정화"였다. 이것은 종교적 정화에 해당하기도 한다.

이 일을 모두 마친 다음이었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찾아와서 나 (= 에즈라) 에게 밀고를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제나 레위인마저도 이 지방에 사는 여러 민족, 가나안족, 헷족, 브리즈족, 여부스족, 암몬족, 모압족, 이집트족, 아모리족과 관계를 끊지 않고 하느님께 역겨운 일을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민족들의 딸을 아내로 맞는가 하면 며느리를 삼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거룩한 씨가 이 땅의 여러 민족의 피와 섞이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지도자들과 관리라는 것들이 이런 짓에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겉옷과 속옷을 찢고 머리와 수염을 뜯으며 넋을 잃고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을 어렵게 아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포로 생활까지 겪은 사람들이 이렇듯이 엄청난 배신을 하다니 될 말이냐고 분개하여 나에게 모여들었다. 나는 저녁 제사 때까지 그대로 넋을 잃고 있었다. --- 한국어 공동번역, {에즈라} 9장

느헤미야는 에즈라에게 모세 율법 (토라)을 모은 책을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 읽게 했고, 성회에 모인 백성들과 제사장들은 율법을 지키고 향후 다른 민족들과 섞이지 않겠다는 배타적인 신앙언약을 맺었다.

1차 귀환 때 돌아온 유대인의 경우는 유배지에서 페르시아의 문화에 현지에서 직접 노출된 기간이 짧다. 귀환은 키루스가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바로 이듬 해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차 귀환과 2/3차 귀환 사이에 있던 유대인들은 거의 한 세기 가량 페르시아 제국에서 다양한 제국민들의 문화에 노출되어 살았다. 강제이주기간이 두 세대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미 그 지역에서 생활터전을 닦은 유대인들이 본토로 귀환하는 대신 메소포타미아 (바빌론)와 페르시아 지역에 잔류했고, 이후 이 동방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오랫동안 본토의 유대인 사회와 지속적으로 교류했다. 가령, 예수의 전 세대 인물로 샴마이와 더불어 바리새파 유대교의 최고 권위로 군림했던 힐렐은 바빌론 즉 메소포타미아에서 BC 110년 경 태어나 예루살렘으로 이주했다.   

그래서 제2성전의 재건 후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권 안에 있다가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으로 페르시아가 멸망한 AD 330년 까지의 200년 정도를 페르시아의 정치적/문화적 영향을 직접 받은 기간으로 상정해 볼 수 있다. 만약 아케메네스 왕조 시절의 조로아스터교가 유대교에 영향을 줬다면, 그래서 제2성전기 유대교가 조로아스터교로 부터 핵심교리와 상징을 차용한 것이라면 바로 이 기간을 집중적으로 조사해야 한다. 

조로아스터교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붕괴와 함께 몰락해 AD 3세기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다시 국가종교로 채택될 때까지 기나 긴 몰락기를 겪었기 때문이다



# 창시자 효과 (Founder Effect)?

다신교 전통이 강렬한 메소포타미아 한 가운데로 유배된 소수민족 공동체가 처하게 될 상황은 두가지다.

(1) 주변 문화에 동화되어 서서히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한가지 일 것이고, 또 한가지는 (2) {다니엘}이나 {에스델 (에스더)}에 등장하는 방식으로 (종종 종교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본인들의 문화를 지켜 침투해 들어오는 외부의 "도전"에 "응전"을 취하는 방식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네부카드네자르는 유대교 사제계급을 포함하는 지배층을 바빌론 인근으로 압송해 한 지역에 배치시켰고, 이 유민 공동체 집단이 바빌론 유수기를 겪은 자들이다.

따라서 이 집단은 종교엘리트가 포함된 아주 "특수한" 집단이며, 그 이전 유다왕국에 살던 대중의 종교적 성향과 다른 패턴을 보일 수 밖에 없다. 즉, 대중적인 습합적 형태의 "느슨한 유대교"가 아니라, 종교 엘리트에 의해 다듬어진 형태의 유대교가 그들의 기층종교 행태였을 테니 말이다. 패망 직전의 유다왕국은 요시야의 개혁조치로 한시적이나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배타적 야훼 유일신앙이 회복된 상태였다. 따라서 바빌론으로 압송된 종교 엘리트들은 바로 이런 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제2성전기 유대교는 바로 이들이 본토에서 전수받았고 또 유배지에서 발전시킨 '특정종파 형태' - 즉, 배타적 야훼 유일신앙을 전면에 내세운 형태의 유대교에 기반한 것이라 봐야 한다. 마치 예루살렘의 제2성전이 건재했던 AD 70년 무렵까지의 유대교에 여러 분파가 있었지만, AD 70년의 성전파괴 이후 현대까지 전수된 형태의 유대교는 기본적으로 '바리새파'에 기반한 '랍비 유대교'인 것과 같다.

그러니 제2성전기 유대교가 제1성전기 유대교와 차이를 보인다면, 그건 꼭 어떤 "새로운 교리"가 "외부에서 유입"되어서라기 보다는, 특정종파 집단이 '바빌론 유수'란 시간/공간에 갇히면서 그들 만의 특징이 폭발적으로 그리고 주도적으로 대표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집단이 바빌론에서 유대아로 돌아와 그들의 종교관을 본토에 재이식시켰다.

그 결과만 외부적 시선으로 보면, 마치 "제1성전기와 제2성전기 간의 불연속"이 있는 것처럼 관찰되게 된다. 내 생각에 이 현상은 집단유전학과 진화론의 개념인 "창시자 효과" (Founder Effect)로 아주 잘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아래 내가 만든 도식에서 (1) 장소 A는 각각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다왕국 지역, (2) 장소 B는 유배된 바빌로니아 동부 지역을 뜻한다. 시간축은 바빌론 유수를 기준으로 (3) 전, (4) 후로 나뉜다.



가설 #1: 창시자 효과? -- © 최광민

집단유전학에서의 "창시자 효과"란 한 개체군에서 "낮은 빈도"의 대립인자를 가진 몇몇 개체들이 새로운 곳으로 이주했을 때, 원래 장소에서는 희석되었을 대립인자가 이주지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효과를 말한다. 

이주한 지역에는 유전자 풀을 섞을 새로운 개체의 유입이 제한되기 때문에 이 새로운 개체군은 이전 지역의 총 개체군과 현저한 차이를 갖는 특징적인 그룹이 되어 새 지역에서의 소진화를 주도한다. 여기서 기억할 점은, 이 새 개체군의 대립인자는 "갑자기 새로 생긴게 아니"라 "원래 있던" 인자였다는 점이다. 새로운 환경에서 두드러지게 대표성을 드러내게 되었을 뿐이다.

창시자 효과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우는, 원래는 총 인구집단을 대표하지 않던 소수의 이주자가 고립된 장소로 이동하는 경우다. 이 경우 새로운 개체의 외부유입이 거의 없고, 근친교배가 증가하여 상대적으로 유전적 변이가 작기 때문이다. 이를 "유전자 풀의 갈라파고스화"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 과정이 심화되면 개체군의 형질이 완전히 달라지는 "종 분화"로 이어진다.

이 개념을 '바빌론 유수'로 바빌론 지역에 국지적 소수민족 공동체를 구성한 구 유다왕국 출신자들에게 적용해 보자.

히브리인들이 모세의 영도 하에 이집트를 탈출해 카나안에 정착한 이후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게 패망할 때까지, 유대인들이 강고한 야훼 유일의 유일신교를 고수한 일종의 신정일치국가를 고수한 것처럼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히브리 성서}를 읽어보면 그런 기간은 전체 기간 중 아주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야훼 사제 계급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종교 엘리트 그룹과 그와 연결된 지배층 일부를 제외하면, 상당수의 일반인들과 다수 지배층은 야훼 신앙 + 다신교 체계를 혼합한 형태로 종교생활을 했을 것이다. 이런 패턴은 특별히 북 이스라엘 지역을 중심으로 한 고고학적인 증거에서도 나타난다. 즉, "야훼 만이 세상의 유일한 창조자이자 신"으로 믿는 형식의 배타적 야훼 유일신교 형태의 유대교를 믿는 그룹은 아주 "낮은 빈도의 대립인자를 가진 개체군"이었다는 뜻이다.



# 습합과 재창조?

물론 다른 견해도 가능하다. 

가설 #2: 습합? -- © 최광민

즉, '바빌론 유수를 거치'면서 '비로소 배타적 유일신교'가 되었다"고 해석하는 견해다. 이 견해는 또한 {모세오경}을 비롯한 히브리 정경문서의 핵심문서들이 이때 편집과 삽입 등을 거쳐 유일신 이데올로기로 편집/삽입되어 정리 혹은 (처음으로) 작성되었다는 견해와 맞닿아 있다. 

이런 주장에서는 바빌로니아의 설화들이 {히브리 성서}의 설화적 요소로 윤색되어 정착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히브리 성서}의 유일신관은 바빌론 유수기를 거치며 바빌로니아 등 다른 주변 민족의 다신교 설화를 극단적으로 탈신화한 것이라 주장하며, 탈신화화에도 불구하고 그 흔적이 {히브리 성서} 안에 소수 남아있다고 본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히브리 성서}는 바빌론 종교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런 유대인들이 그들의 정복자의 종교에서 모티프를 취해 왔을까? 게다가 유대인들의 선조인 아브라함과 그 가족의 출신지가 메소포타미아였다. 따라서 히브리 설화와 바빌론 신화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어떤 신화적 모티프가 있다고 해서, 그걸 한 측이 다른 측을 베꼈다고 단정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아래 글을 읽어보도록 하자.


또 다른 주장은, 바빌론 지역의 이 유대인 공동체가 바빌로니아를 패망시키고 들어온 페르시아의 종교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마즈다 신앙에 영향을 받아, 야훼를 "보편적 유일신/최고신"인 아후라마즈다에 대응시키고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를 흡수한 형태로 재창조한 것이 바로 제2성전기 유대교라고 해석하는 것으로, 20세기 들어서 많은 지지를 받는 이론이 되었다. 이 주장에 대한 검토가 지금 작성하는 일련의 글들의 주요 주제이기도 하다.

그럼 이 주장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확정적인가?

그렇지 않다. 사료와 고고학적 증거가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이 주장들과 그에 대한 반박 모두, 상당한 '가정'을 전제한 추론이란 점을 일단 기억하자.

이 주장의 진위를 파악하려면, 키루스 이후 아메케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종교적 지형과 군주들의 종교관을 먼저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제 3부에서는 제2성전기 유대교 초반과 겹치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종교적 지형을 살펴보겠다.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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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tist. Husband. Daddy. --- TOLLE. 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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