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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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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Kwangmin Choi, 2003-12-06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제목
운명
순서
- 도서관
- 1980년대
- 시대정신 / Zeitgeist
- 운명
{산문 에다}, 16세기, 아이슬란드 사본
1. 도서관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심지어 '3류'도 아닌) '오류'중학교의 까까머리 중학생이었고, 방과 후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던 같은 반 친구를 도와 가끔씩 학교 도서관 서고 정리를 도와주곤 했다. 그때 출판사와 전집명을 정확히 기억할 수 없는, 거친 녹색 하드커버로 두껍게 장정된 {세계의 신화}라는 오래된 20권여권 짜리 시리즈물을 발견하고 중학생 시절 내내 그 전집에 푹 빠져지냈었다. 그 당시 나를 사로잡은 다른 시리즈로는 일본의 과학문고 {블루백스 시리즈} 그리고 폰 데니켄의 {신들의 전차} 및 자카리아 시친 같은 작가의 외계문명 및 오컬트에 대한 것들이 있었다. 당시 나는 괴력난신/怪力亂神 의 열렬한 팬이었다.
다른 국가와 민족의 신화와 전설도 흥미로왔지만, 내게는 특별히 두개의 신화가 특히나 흥미로왔다. 그 하나는 마야의 일족인 키체인들의 경전 {포폴 부} (이 책은 특히 폰 데니켄의 책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모티프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북유럽 신화였다. 북유럽 신화 가운데서도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내용을 담은 라그나로크 혹 라그나뢰크와 관련 부분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불핀치류의 그리스/로마 신화에 그다지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리스/로마 신화 속에 등장하는 (그리스인들 입장에서) 이민족 신화의 요소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고나 할까? 그러던 중에 발견한 이들 이질적인 신화는 전혀 다른 세계에 발을 내딛는 탐험가처럼 나를 매우 흥분시켰다.
2. 1980년대
그때가 1980년대 중반이었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그 무렵 길거리에서는 1988년 무렵에 세계 제3차대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전단과 책자를 나눠주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丹}과 {환단고기}와 단전호흡에 열광하고 있었고, 그 여파로 道에 대해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은 사람들 붙들고 "궁금해야만 한다"며 강짜를 쓰며 상제님의 천지공사와 후천개벽이 임박했으니 조상님께 서둘러 제사를 올려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소위 '길거리 도인'들이 슬슬 고개를 들고 있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400여 년 전에 1999년 7월에 공포의 대왕이 내려올 것이란 음산한 예언을 해 두었고, 일본인 고도 벤이 쓴 노스트라다무스 관련된 책자가 서점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일부 교회에서는 1992년 무렵에 휴거가 있을 것이란 소문이 나돌고 있었고, 가사상태에서 천국을 다녀왔다는 퍼시 콜렛 같은 사람의 경험담 같은 것이 매우 보수적이던 내가 다니던 교회의 뒷좌석에 슬그머니 등장하고 있었다. 프랭크 커머드가 그의 책 {Ending Sense, 종말의식과 인간적 시간} 속에서 "종말의식"이라 부르던 그 분위기가 사회로 침투해 오고 있었다.
냉전의 마지막 절정이자, 20세기의 종착역이자, 한 밀레니엄이 끝나가는 "Fin de siècle" 그 자체였던 1980년대는, 어린 내가 보기에도 음습한 기운으로 충만하던 시절이었다. TV를 켜면 늘 "땡!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이란 변함없는 멘트로 시작되는 뉴스 속에서 대학생들은 늘 붉은 머리띠와 깃발을 휘두르며 "폭력"시위를 하고 있었고, 드라마는 늘 가정파괴범 사건을 선정적으로 다루거나 운동권 학생을 자녀로 둔 이유로 불행해지는 모범적인 가정의 비극을 주로 다루었다. 그러다 학교에 가면,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독재]"라고 가르치던 사회 선생님은 군사정권을 비난하다가 수업 중에 들이닥친 교장/교감을 따라 어디론가 사라져 돌아오지 않았고 (나중에 유학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 수업시간에 독립군가를 가르치던 물상 선생님은 운동권이던 후배를 하루 재워준 죄로 수업 중 들이닥친 형사에게 체포되어 안기부에 끌려갔다가 두어달 후 퉁퉁 불은 얼굴의 미친 사람이 되어 돌아와 학교 근처를 유령처럼 배회했으며, 우리는 별다른 이유없이도 교장과 교감, 학생주임이 휘두르는 삽자루로 두들겨 맞거나, 체육교사의 이유없는 이단 옆차기에 줄줄이 쓰러지는 인간 도미노의 삶을 살고 있었다.
폭력은 어디에나 있었고, 그 악취는 공기 속에 녹아 있었다. 폭력에 길들여진 우리는 폭력에 대한 저항이란 말에 생소했다. 폭력은 우리의 일상이었다.
방과 후 서고에 쭈그리고 앉아 북유럽 신화를 읽다가, 세상이 이상해져가는 이유를 문득 깨달았다. 이유는 너무나 명료했다. 문제는 다른데 있지 않았다.
세상은 다만 종말을 향해 통제불능의 폭주기관차처럼 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3. 시대정신 (Zeitgeist)
스칸디나비아 신화 속의 "Ragnarök"는 바그너의 악극 {반지}의 제 4부 "Götterdämmerung"과는 의미 뿐 아니라 그 내용에서도 차이가 있다.
우선 라그나뢰크는 "신들의 황혼 / Twilight of the Gods"을 뜻하는 독일어 "Gotterdammerung"의 의미와 조금 다르다. 라그나로크라는 말의 뜻은 정확히는 "권력(신)들의 죽음/종말"을 말한다. 바그너는 악극 {반지}를 꾸미면서, 12-14세기에 아이슬란드에서 기록된 두 종류의 서사시인 {산문/운문 에다/Edda}를 독일의 지크프리트 영웅전설인 {니벨룽의 노래/Nibelungenlied}와 오버랩 시켰는데, 그 결과로 바그너의 {반지}에서의 그 "신들의 황혼"은 지크프리트의 죽음에 이어지는, 혹은 연관된 귀결로 묘사된다. 그러나 {에다}가 묘사한 세상의 종말로서의 그 라그나뢰크는 지크프리트-군터/하겐의 갈등과는 상관없으며, 오히려 오딘-로키/거인족 간의 갈등에서 벌어지는 우주적 종말을 그리고 있다.
{운문에다} : http://www.sacred-texts.com/neu/poe/index.htm
Voluspa ("Sibyl's Prophecy") from the Poetic Edda.
Vafthrudnismal ("Vafthrudnir's Sayings") from the Poetic Edda.
Grimismal ("Grimnir's Sayings") from the Poetic Edda.
{산문에다} : http://www.sacred-texts.com/neu/pre/index.htm
Gylfaginning, from the Prose Edda, written by Snorri Sturluson.
{니벨룽의 노래} : http://www.sacred-texts.com/neu/nblng/index.htm
오랫동안 잊혀져가던 북유럽 신화는, 18-19세기 사분오열된 독일의 정신적 통일/재건이라는 명분을 건 대독일 주의라는 정치/사회적 분위기와, 진부한 그리스/로마-유대/기독교적 모티프에서 탈피하고자 몸부림 치던 문학적 낭만주의와 가운데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바그너는 이런 문화사조의 중심에 서서 좀더 게르만적적인, 좀더 아리안적인 "정신/Geist"을 독일인들에게 고취시키고 싶어했다. 이 정신은 하나의 자아정체성에 대한 갈망같은 것이었고, 일종의 강력한 시대적 요청, 혹은 "시대정신(Zeitgeist)"이라 불릴만 했다.
한 세대 후 히틀러는 그 시대정신의 정점에 서길, 혹은 시대정신의 화신이 되기를 자처했고, 실제로 그러했다. 히틀러는 뉘른베르크에서 침을 튀기며 열정적으로 연설하는 자신의 당당한 모습을 바그너의 악극에 묘사된 오딘(보탄)과 오버랩시켰는 지도 모른다. 어쩌면 운명 앞에 무릎꿇어버린 게르만 신들의 전철을 밟는대신, 1차세계대전의 패전이라는 자신들의 운명을 거부함으로써 오딘(보탄)을 뛰어넘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유감스럽게도 히틀러는 자신의 조상들이 믿던 신들을 뛰어넘지 못하고 오히려 라그나뢰크의 예언을 실현시킬 뻔 했다. 그가 5년 동안 유럽과 아프리카와 중동과 아시아에 가져다 준 것은, 결국 라그나로크로 질주하는 음울한 전주곡일 뿐이었다.
4. 운명
재미있게도 북유럽의 신들, 즉, 오딘, 토르, 로키, 그리고 모든 신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알고 있다. 그것도 어렴풋하게가 아니라 아주 분명히, 가령 누가 누구에게 죽음을 당할 것이라든지, 라그나뢰크는 어떻게 진행될 것이라든지, 라그나뢰크가 마친 후 이 세상에 살아남는 신들과 인간이 누구일 것인지에 대해 너무나 구체적으로 알고 있다. 게다가 그 이야기는 신도 아닌 인간에 의해 예언되고 또 기록되었다.
결국 오딘과 로키를 비롯한 신들이그들 간의 알력으로 인해 결국 둘을 포함한 거의 모든 신들이 전멸당할 것이란 점을 알면서 왜 그들은 서로 화해하지 않을까? 그들은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운명 앞에 멈추어 섰는가? 그렇다면 신 조차 따라야 하는 운명은 도대체 누가 만들었단 말인가?
하긴 이것은 북유럽 신화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힌두교와 불교의 神들은 영생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보다 오래살 뿐, 결국 죽는다는 면에서는 인간과 같으며, 따라서 {베다}와 {불경} 속의 신들은 인간, 축생, 수라와과 마찬가지로 카르마와 윤회라는 거대한 바퀴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카르마의 바퀴는 도대체 누가 제작했단 말인가? 확실히 이들 종교쳬계에서 그 주체는 신들은 아닌 듯 싶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서 그들보다 더 상위의 신, 혹은 그 무엇을 설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결국 모든 논리가 순환할 뿐이니까.
{구약성서}의 많은 예언은 너무나 흥미롭게도 완료시제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시제가 종종 혼란스러운 히브리어의 특징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언이 실현될 확실성"이라는 신학적 의미를 함축하기도 한다. 그것은 확실히 실현될 것이므로, 마치 과거에 일어난 일을 기술하는 것 만큼이나 너무 분명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신약성서의 대표적인 예언서인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느끼는 아이러니 역시 북유럽 신화의 그것과 같다. 신으로 대표되는 정의와 사탄으로 대표되는 악의 최종 대결에서 종국적으로 정의의 승리를 묘사하는 이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사탄이 모를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사탄은 인간보다 지식에서는 훨씬 월등한 존재로 표상된다.), 사탄은 신에게 종말이 올때까지 끊임없이 도전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인간과 달리 神으로부터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다는 점을 인지한 사탄의 일종의 자포자기와 같은 것인가? 사탄이란 결국 자신의 운명 앞에 무릎 꿇어버린 존재일까?
神 홀로 운명을 만들고, 예언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다. (꼭 그럴 필요는 없지만) 신은 계획하고 종종 인간을 통해 운명을 완성한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섭리/운명의 파트너이다. 특히 완성된 예언/신탁(oracle)의 특징을 주의깊게 반추해 본다면, 우리는 그런 예언/신탁의 속성이 놀랍게도 "자기실행적(self-fulfiling)"이란 점을 분명히 발견한다.
예언의 출처는 신과 섭리이지만, 그 실행의 주체는 인간이다. 특히 예언의 확실성이 크면 클수록, 그 예언을 완성하고자 한 인간의 의지도 강하게 나타났다는 점을 역사를 통해 배운다. 그 의지가 "의식적"이었든 "무의식적"이었든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인간이 과거와 역사의 주체였던 것 만큼이나, 역시 예언의 실현에도 주체로서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이다. 북유럽 신화는 바로 이 관점을 분명하게, 그것도 아주 비극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들 신의 이름이 오딘이든 토르이든, 프레야이든, 발퀴레이든, 로키이든, 펜리르이든, 스콜이든 그들은 결국 "운명"의 들러리였을 뿐이다. 신들과 영웅들이 이런데, 하물며 범인들의 운명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북유럽 신화의 신들과 영웅들은 참으로 묘한 방식으로
"패배적"이다.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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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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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제목
운명
순서
- 도서관
- 1980년대
- 시대정신 / Zeitgeist
- 운명
1. 도서관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심지어 '3류'도 아닌) '오류'중학교의 까까머리 중학생이었고, 방과 후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던 같은 반 친구를 도와 가끔씩 학교 도서관 서고 정리를 도와주곤 했다. 그때 출판사와 전집명을 정확히 기억할 수 없는, 거친 녹색 하드커버로 두껍게 장정된 {세계의 신화}라는 오래된 20권여권 짜리 시리즈물을 발견하고 중학생 시절 내내 그 전집에 푹 빠져지냈었다. 그 당시 나를 사로잡은 다른 시리즈로는 일본의 과학문고 {블루백스 시리즈} 그리고 폰 데니켄의 {신들의 전차} 및 자카리아 시친 같은 작가의 외계문명 및 오컬트에 대한 것들이 있었다. 당시 나는 괴력난신/怪力亂神 의 열렬한 팬이었다.
다른 국가와 민족의 신화와 전설도 흥미로왔지만, 내게는 특별히 두개의 신화가 특히나 흥미로왔다. 그 하나는 마야의 일족인 키체인들의 경전 {포폴 부} (이 책은 특히 폰 데니켄의 책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모티프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북유럽 신화였다. 북유럽 신화 가운데서도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내용을 담은 라그나로크 혹 라그나뢰크와 관련 부분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불핀치류의 그리스/로마 신화에 그다지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리스/로마 신화 속에 등장하는 (그리스인들 입장에서) 이민족 신화의 요소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고나 할까? 그러던 중에 발견한 이들 이질적인 신화는 전혀 다른 세계에 발을 내딛는 탐험가처럼 나를 매우 흥분시켰다.
2. 1980년대
그때가 1980년대 중반이었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그 무렵 길거리에서는 1988년 무렵에 세계 제3차대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전단과 책자를 나눠주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丹}과 {환단고기}와 단전호흡에 열광하고 있었고, 그 여파로 道에 대해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은 사람들 붙들고 "궁금해야만 한다"며 강짜를 쓰며 상제님의 천지공사와 후천개벽이 임박했으니 조상님께 서둘러 제사를 올려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소위 '길거리 도인'들이 슬슬 고개를 들고 있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400여 년 전에 1999년 7월에 공포의 대왕이 내려올 것이란 음산한 예언을 해 두었고, 일본인 고도 벤이 쓴 노스트라다무스 관련된 책자가 서점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일부 교회에서는 1992년 무렵에 휴거가 있을 것이란 소문이 나돌고 있었고, 가사상태에서 천국을 다녀왔다는 퍼시 콜렛 같은 사람의 경험담 같은 것이 매우 보수적이던 내가 다니던 교회의 뒷좌석에 슬그머니 등장하고 있었다. 프랭크 커머드가 그의 책 {Ending Sense, 종말의식과 인간적 시간} 속에서 "종말의식"이라 부르던 그 분위기가 사회로 침투해 오고 있었다.
냉전의 마지막 절정이자, 20세기의 종착역이자, 한 밀레니엄이 끝나가는 "Fin de siècle" 그 자체였던 1980년대는, 어린 내가 보기에도 음습한 기운으로 충만하던 시절이었다. TV를 켜면 늘 "땡!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이란 변함없는 멘트로 시작되는 뉴스 속에서 대학생들은 늘 붉은 머리띠와 깃발을 휘두르며 "폭력"시위를 하고 있었고, 드라마는 늘 가정파괴범 사건을 선정적으로 다루거나 운동권 학생을 자녀로 둔 이유로 불행해지는 모범적인 가정의 비극을 주로 다루었다. 그러다 학교에 가면,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독재]"라고 가르치던 사회 선생님은 군사정권을 비난하다가 수업 중에 들이닥친 교장/교감을 따라 어디론가 사라져 돌아오지 않았고 (나중에 유학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 수업시간에 독립군가를 가르치던 물상 선생님은 운동권이던 후배를 하루 재워준 죄로 수업 중 들이닥친 형사에게 체포되어 안기부에 끌려갔다가 두어달 후 퉁퉁 불은 얼굴의 미친 사람이 되어 돌아와 학교 근처를 유령처럼 배회했으며, 우리는 별다른 이유없이도 교장과 교감, 학생주임이 휘두르는 삽자루로 두들겨 맞거나, 체육교사의 이유없는 이단 옆차기에 줄줄이 쓰러지는 인간 도미노의 삶을 살고 있었다.
폭력은 어디에나 있었고, 그 악취는 공기 속에 녹아 있었다. 폭력에 길들여진 우리는 폭력에 대한 저항이란 말에 생소했다. 폭력은 우리의 일상이었다.
방과 후 서고에 쭈그리고 앉아 북유럽 신화를 읽다가, 세상이 이상해져가는 이유를 문득 깨달았다. 이유는 너무나 명료했다. 문제는 다른데 있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심지어 '3류'도 아닌) '오류'중학교의 까까머리 중학생이었고, 방과 후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던 같은 반 친구를 도와 가끔씩 학교 도서관 서고 정리를 도와주곤 했다. 그때 출판사와 전집명을 정확히 기억할 수 없는, 거친 녹색 하드커버로 두껍게 장정된 {세계의 신화}라는 오래된 20권여권 짜리 시리즈물을 발견하고 중학생 시절 내내 그 전집에 푹 빠져지냈었다. 그 당시 나를 사로잡은 다른 시리즈로는 일본의 과학문고 {블루백스 시리즈} 그리고 폰 데니켄의 {신들의 전차} 및 자카리아 시친 같은 작가의 외계문명 및 오컬트에 대한 것들이 있었다. 당시 나는 괴력난신/怪力亂神 의 열렬한 팬이었다.
다른 국가와 민족의 신화와 전설도 흥미로왔지만, 내게는 특별히 두개의 신화가 특히나 흥미로왔다. 그 하나는 마야의 일족인 키체인들의 경전 {포폴 부} (이 책은 특히 폰 데니켄의 책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모티프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북유럽 신화였다. 북유럽 신화 가운데서도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내용을 담은 라그나로크 혹 라그나뢰크와 관련 부분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불핀치류의 그리스/로마 신화에 그다지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리스/로마 신화 속에 등장하는 (그리스인들 입장에서) 이민족 신화의 요소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고나 할까? 그러던 중에 발견한 이들 이질적인 신화는 전혀 다른 세계에 발을 내딛는 탐험가처럼 나를 매우 흥분시켰다.
2. 1980년대
그때가 1980년대 중반이었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그 무렵 길거리에서는 1988년 무렵에 세계 제3차대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전단과 책자를 나눠주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丹}과 {환단고기}와 단전호흡에 열광하고 있었고, 그 여파로 道에 대해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은 사람들 붙들고 "궁금해야만 한다"며 강짜를 쓰며 상제님의 천지공사와 후천개벽이 임박했으니 조상님께 서둘러 제사를 올려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소위 '길거리 도인'들이 슬슬 고개를 들고 있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400여 년 전에 1999년 7월에 공포의 대왕이 내려올 것이란 음산한 예언을 해 두었고, 일본인 고도 벤이 쓴 노스트라다무스 관련된 책자가 서점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일부 교회에서는 1992년 무렵에 휴거가 있을 것이란 소문이 나돌고 있었고, 가사상태에서 천국을 다녀왔다는 퍼시 콜렛 같은 사람의 경험담 같은 것이 매우 보수적이던 내가 다니던 교회의 뒷좌석에 슬그머니 등장하고 있었다. 프랭크 커머드가 그의 책 {Ending Sense, 종말의식과 인간적 시간} 속에서 "종말의식"이라 부르던 그 분위기가 사회로 침투해 오고 있었다.
냉전의 마지막 절정이자, 20세기의 종착역이자, 한 밀레니엄이 끝나가는 "Fin de siècle" 그 자체였던 1980년대는, 어린 내가 보기에도 음습한 기운으로 충만하던 시절이었다. TV를 켜면 늘 "땡!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이란 변함없는 멘트로 시작되는 뉴스 속에서 대학생들은 늘 붉은 머리띠와 깃발을 휘두르며 "폭력"시위를 하고 있었고, 드라마는 늘 가정파괴범 사건을 선정적으로 다루거나 운동권 학생을 자녀로 둔 이유로 불행해지는 모범적인 가정의 비극을 주로 다루었다. 그러다 학교에 가면,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독재]"라고 가르치던 사회 선생님은 군사정권을 비난하다가 수업 중에 들이닥친 교장/교감을 따라 어디론가 사라져 돌아오지 않았고 (나중에 유학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 수업시간에 독립군가를 가르치던 물상 선생님은 운동권이던 후배를 하루 재워준 죄로 수업 중 들이닥친 형사에게 체포되어 안기부에 끌려갔다가 두어달 후 퉁퉁 불은 얼굴의 미친 사람이 되어 돌아와 학교 근처를 유령처럼 배회했으며, 우리는 별다른 이유없이도 교장과 교감, 학생주임이 휘두르는 삽자루로 두들겨 맞거나, 체육교사의 이유없는 이단 옆차기에 줄줄이 쓰러지는 인간 도미노의 삶을 살고 있었다.
폭력은 어디에나 있었고, 그 악취는 공기 속에 녹아 있었다. 폭력에 길들여진 우리는 폭력에 대한 저항이란 말에 생소했다. 폭력은 우리의 일상이었다.
방과 후 서고에 쭈그리고 앉아 북유럽 신화를 읽다가, 세상이 이상해져가는 이유를 문득 깨달았다. 이유는 너무나 명료했다. 문제는 다른데 있지 않았다.
세상은 다만 종말을 향해 통제불능의 폭주기관차처럼 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3. 시대정신 (Zeitgeist)
스칸디나비아 신화 속의 "Ragnarök"는 바그너의 악극 {반지}의 제 4부 "Götterdämmerung"과는 의미 뿐 아니라 그 내용에서도 차이가 있다.
우선 라그나뢰크는 "신들의 황혼 / Twilight of the Gods"을 뜻하는 독일어 "Gotterdammerung"의 의미와 조금 다르다. 라그나로크라는 말의 뜻은 정확히는 "권력(신)들의 죽음/종말"을 말한다. 바그너는 악극 {반지}를 꾸미면서, 12-14세기에 아이슬란드에서 기록된 두 종류의 서사시인 {산문/운문 에다/Edda}를 독일의 지크프리트 영웅전설인 {니벨룽의 노래/Nibelungenlied}와 오버랩 시켰는데, 그 결과로 바그너의 {반지}에서의 그 "신들의 황혼"은 지크프리트의 죽음에 이어지는, 혹은 연관된 귀결로 묘사된다. 그러나 {에다}가 묘사한 세상의 종말로서의 그 라그나뢰크는 지크프리트-군터/하겐의 갈등과는 상관없으며, 오히려 오딘-로키/거인족 간의 갈등에서 벌어지는 우주적 종말을 그리고 있다.
한 세대 후 히틀러는 그 시대정신의 정점에 서길, 혹은 시대정신의 화신이 되기를 자처했고, 실제로 그러했다. 히틀러는 뉘른베르크에서 침을 튀기며 열정적으로 연설하는 자신의 당당한 모습을 바그너의 악극에 묘사된 오딘(보탄)과 오버랩시켰는 지도 모른다. 어쩌면 운명 앞에 무릎꿇어버린 게르만 신들의 전철을 밟는대신, 1차세계대전의 패전이라는 자신들의 운명을 거부함으로써 오딘(보탄)을 뛰어넘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유감스럽게도 히틀러는 자신의 조상들이 믿던 신들을 뛰어넘지 못하고 오히려 라그나뢰크의 예언을 실현시킬 뻔 했다. 그가 5년 동안 유럽과 아프리카와 중동과 아시아에 가져다 준 것은, 결국 라그나로크로 질주하는 음울한 전주곡일 뿐이었다.
4. 운명
재미있게도 북유럽의 신들, 즉, 오딘, 토르, 로키, 그리고 모든 신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알고 있다. 그것도 어렴풋하게가 아니라 아주 분명히, 가령 누가 누구에게 죽음을 당할 것이라든지, 라그나뢰크는 어떻게 진행될 것이라든지, 라그나뢰크가 마친 후 이 세상에 살아남는 신들과 인간이 누구일 것인지에 대해 너무나 구체적으로 알고 있다. 게다가 그 이야기는 신도 아닌 인간에 의해 예언되고 또 기록되었다.
결국 오딘과 로키를 비롯한 신들이그들 간의 알력으로 인해 결국 둘을 포함한 거의 모든 신들이 전멸당할 것이란 점을 알면서 왜 그들은 서로 화해하지 않을까? 그들은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운명 앞에 멈추어 섰는가? 그렇다면 신 조차 따라야 하는 운명은 도대체 누가 만들었단 말인가?
하긴 이것은 북유럽 신화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힌두교와 불교의 神들은 영생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보다 오래살 뿐, 결국 죽는다는 면에서는 인간과 같으며, 따라서 {베다}와 {불경} 속의 신들은 인간, 축생, 수라와과 마찬가지로 카르마와 윤회라는 거대한 바퀴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카르마의 바퀴는 도대체 누가 제작했단 말인가? 확실히 이들 종교쳬계에서 그 주체는 신들은 아닌 듯 싶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서 그들보다 더 상위의 신, 혹은 그 무엇을 설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결국 모든 논리가 순환할 뿐이니까.
{구약성서}의 많은 예언은 너무나 흥미롭게도 완료시제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시제가 종종 혼란스러운 히브리어의 특징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언이 실현될 확실성"이라는 신학적 의미를 함축하기도 한다. 그것은 확실히 실현될 것이므로, 마치 과거에 일어난 일을 기술하는 것 만큼이나 너무 분명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신약성서의 대표적인 예언서인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느끼는 아이러니 역시 북유럽 신화의 그것과 같다. 신으로 대표되는 정의와 사탄으로 대표되는 악의 최종 대결에서 종국적으로 정의의 승리를 묘사하는 이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사탄이 모를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사탄은 인간보다 지식에서는 훨씬 월등한 존재로 표상된다.), 사탄은 신에게 종말이 올때까지 끊임없이 도전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인간과 달리 神으로부터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다는 점을 인지한 사탄의 일종의 자포자기와 같은 것인가? 사탄이란 결국 자신의 운명 앞에 무릎 꿇어버린 존재일까?
神 홀로 운명을 만들고, 예언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다. (꼭 그럴 필요는 없지만) 신은 계획하고 종종 인간을 통해 운명을 완성한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섭리/운명의 파트너이다. 특히 완성된 예언/신탁(oracle)의 특징을 주의깊게 반추해 본다면, 우리는 그런 예언/신탁의 속성이 놀랍게도 "자기실행적(self-fulfiling)"이란 점을 분명히 발견한다.
예언의 출처는 신과 섭리이지만, 그 실행의 주체는 인간이다. 특히 예언의 확실성이 크면 클수록, 그 예언을 완성하고자 한 인간의 의지도 강하게 나타났다는 점을 역사를 통해 배운다. 그 의지가 "의식적"이었든 "무의식적"이었든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인간이 과거와 역사의 주체였던 것 만큼이나, 역시 예언의 실현에도 주체로서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이다. 북유럽 신화는 바로 이 관점을 분명하게, 그것도 아주 비극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들 신의 이름이 오딘이든 토르이든, 프레야이든, 발퀴레이든, 로키이든, 펜리르이든, 스콜이든 그들은 결국 "운명"의 들러리였을 뿐이다. 신들과 영웅들이 이런데, 하물며 범인들의 운명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북유럽 신화의 신들과 영웅들은
3. 시대정신 (Zeitgeist)
스칸디나비아 신화 속의 "Ragnarök"는 바그너의 악극 {반지}의 제 4부 "Götterdämmerung"과는 의미 뿐 아니라 그 내용에서도 차이가 있다.
우선 라그나뢰크는 "신들의 황혼 / Twilight of the Gods"을 뜻하는 독일어 "Gotterdammerung"의 의미와 조금 다르다. 라그나로크라는 말의 뜻은 정확히는 "권력(신)들의 죽음/종말"을 말한다. 바그너는 악극 {반지}를 꾸미면서, 12-14세기에 아이슬란드에서 기록된 두 종류의 서사시인 {산문/운문 에다/Edda}를 독일의 지크프리트 영웅전설인 {니벨룽의 노래/Nibelungenlied}와 오버랩 시켰는데, 그 결과로 바그너의 {반지}에서의 그 "신들의 황혼"은 지크프리트의 죽음에 이어지는, 혹은 연관된 귀결로 묘사된다. 그러나 {에다}가 묘사한 세상의 종말로서의 그 라그나뢰크는 지크프리트-군터/하겐의 갈등과는 상관없으며, 오히려 오딘-로키/거인족 간의 갈등에서 벌어지는 우주적 종말을 그리고 있다.
{운문에다} : http://www.sacred-texts.com/neu/poe/index.htm오랫동안 잊혀져가던 북유럽 신화는, 18-19세기 사분오열된 독일의 정신적 통일/재건이라는 명분을 건 대독일 주의라는 정치/사회적 분위기와, 진부한 그리스/로마-유대/기독교적 모티프에서 탈피하고자 몸부림 치던 문학적 낭만주의와 가운데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바그너는 이런 문화사조의 중심에 서서 좀더 게르만적적인, 좀더 아리안적인 "정신/Geist"을 독일인들에게 고취시키고 싶어했다. 이 정신은 하나의 자아정체성에 대한 갈망같은 것이었고, 일종의 강력한 시대적 요청, 혹은 "시대정신(Zeitgeist)"이라 불릴만 했다.
Voluspa ("Sibyl's Prophecy") from the Poetic Edda.
Vafthrudnismal ("Vafthrudnir's Sayings") from the Poetic Edda.
Grimismal ("Grimnir's Sayings") from the Poetic Edda.
{산문에다} : http://www.sacred-texts.com/neu/pre/index.htm
Gylfaginning, from the Prose Edda, written by Snorri Sturluson.
{니벨룽의 노래} : http://www.sacred-texts.com/neu/nblng/index.htm
한 세대 후 히틀러는 그 시대정신의 정점에 서길, 혹은 시대정신의 화신이 되기를 자처했고, 실제로 그러했다. 히틀러는 뉘른베르크에서 침을 튀기며 열정적으로 연설하는 자신의 당당한 모습을 바그너의 악극에 묘사된 오딘(보탄)과 오버랩시켰는 지도 모른다. 어쩌면 운명 앞에 무릎꿇어버린 게르만 신들의 전철을 밟는대신, 1차세계대전의 패전이라는 자신들의 운명을 거부함으로써 오딘(보탄)을 뛰어넘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유감스럽게도 히틀러는 자신의 조상들이 믿던 신들을 뛰어넘지 못하고 오히려 라그나뢰크의 예언을 실현시킬 뻔 했다. 그가 5년 동안 유럽과 아프리카와 중동과 아시아에 가져다 준 것은, 결국 라그나로크로 질주하는 음울한 전주곡일 뿐이었다.
4. 운명
재미있게도 북유럽의 신들, 즉, 오딘, 토르, 로키, 그리고 모든 신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알고 있다. 그것도 어렴풋하게가 아니라 아주 분명히, 가령 누가 누구에게 죽음을 당할 것이라든지, 라그나뢰크는 어떻게 진행될 것이라든지, 라그나뢰크가 마친 후 이 세상에 살아남는 신들과 인간이 누구일 것인지에 대해 너무나 구체적으로 알고 있다. 게다가 그 이야기는 신도 아닌 인간에 의해 예언되고 또 기록되었다.
결국 오딘과 로키를 비롯한 신들이그들 간의 알력으로 인해 결국 둘을 포함한 거의 모든 신들이 전멸당할 것이란 점을 알면서 왜 그들은 서로 화해하지 않을까? 그들은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운명 앞에 멈추어 섰는가? 그렇다면 신 조차 따라야 하는 운명은 도대체 누가 만들었단 말인가?
하긴 이것은 북유럽 신화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힌두교와 불교의 神들은 영생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보다 오래살 뿐, 결국 죽는다는 면에서는 인간과 같으며, 따라서 {베다}와 {불경} 속의 신들은 인간, 축생, 수라와과 마찬가지로 카르마와 윤회라는 거대한 바퀴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카르마의 바퀴는 도대체 누가 제작했단 말인가? 확실히 이들 종교쳬계에서 그 주체는 신들은 아닌 듯 싶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서 그들보다 더 상위의 신, 혹은 그 무엇을 설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결국 모든 논리가 순환할 뿐이니까.
{구약성서}의 많은 예언은 너무나 흥미롭게도 완료시제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시제가 종종 혼란스러운 히브리어의 특징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언이 실현될 확실성"이라는 신학적 의미를 함축하기도 한다. 그것은 확실히 실현될 것이므로, 마치 과거에 일어난 일을 기술하는 것 만큼이나 너무 분명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신약성서의 대표적인 예언서인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느끼는 아이러니 역시 북유럽 신화의 그것과 같다. 신으로 대표되는 정의와 사탄으로 대표되는 악의 최종 대결에서 종국적으로 정의의 승리를 묘사하는 이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사탄이 모를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사탄은 인간보다 지식에서는 훨씬 월등한 존재로 표상된다.), 사탄은 신에게 종말이 올때까지 끊임없이 도전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인간과 달리 神으로부터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다는 점을 인지한 사탄의 일종의 자포자기와 같은 것인가? 사탄이란 결국 자신의 운명 앞에 무릎 꿇어버린 존재일까?
神 홀로 운명을 만들고, 예언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다. (꼭 그럴 필요는 없지만) 신은 계획하고 종종 인간을 통해 운명을 완성한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섭리/운명의 파트너이다. 특히 완성된 예언/신탁(oracle)의 특징을 주의깊게 반추해 본다면, 우리는 그런 예언/신탁의 속성이 놀랍게도 "자기실행적(self-fulfiling)"이란 점을 분명히 발견한다.
예언의 출처는 신과 섭리이지만, 그 실행의 주체는 인간이다. 특히 예언의 확실성이 크면 클수록, 그 예언을 완성하고자 한 인간의 의지도 강하게 나타났다는 점을 역사를 통해 배운다. 그 의지가 "의식적"이었든 "무의식적"이었든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인간이 과거와 역사의 주체였던 것 만큼이나, 역시 예언의 실현에도 주체로서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이다. 북유럽 신화는 바로 이 관점을 분명하게, 그것도 아주 비극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들 신의 이름이 오딘이든 토르이든, 프레야이든, 발퀴레이든, 로키이든, 펜리르이든, 스콜이든 그들은 결국 "운명"의 들러리였을 뿐이다. 신들과 영웅들이 이런데, 하물며 범인들의 운명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북유럽 신화의 신들과 영웅들은
참으로 묘한 방식으로
"패배적"이다.
草人
草人
Scientist. Husband. Daddy. --- TOLLE. 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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