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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tist. Husband. Daddy. --- TOLLE. 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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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1950년 12월 23일 흥남철수: SS 메러디스 빅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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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10-10-02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제목

1950년 12월 23일 흥남철수: SS 메러디스 빅토리

순서
  1. 최후의 흥남철수
  2. 뒷 이야기


며칠 전, 아내가 근무하는 대학에서 한국전 60주년 컨퍼런스를 준비하는 중에 만난 한국인 노부부 이야기를 처로부터 들었다. 두 분은 흥남철수 때 우연히 같은 배를 타고 월남했고, 한분은 연세대, 한분은 이화여대를 졸업한 후 만나 결혼해서 미국에 건너와 각각 의사와 약사로 사셨다 한다.

아래는 그들이 함께 타고 있었던 한 화물선에 대한 이야기.


{Ship of Miracles} --- Bill Gilbert


  • "the greatest rescue operation ever by a single ship". --- {The Guinness Book of World Records}
  • ''the greatest rescue by a single ship in the annals of the sea.'' --- (The United States Maritime Administration




1. 최후의 흥남철수

1950년 12월 8일. 한국전에 개입한 중공군에 밀려 유엔군 사령부는 흥남철수를 결정했고, 12월 15일부터 105000 여명의 미군과 한국군 해병들이 흥남에서 열흘 간의 철수작전에 돌입했다.



{굳세어라 금순아}

- 작사 : 강사랑- 작곡 : 박시춘 
- 노래 : 현인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데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러  
이 내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생달만 외로히 떴다. 

철의장막 모진설음 받고서 사랑을 한뒤
천지 간에 너와 난데 변함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북진통일 그날이 오면 손을잡고 웃어나보자 
얼싸안고 춤도춰 보자.

12월 20일 저녁, 중공군이 밀어닥치기 직전의 흥남부두에 SS 메러디스 빅토리 (Meredith Victory) 라는 배가 입항한다. 선장은 필라델피아 출신의 37세의 레너드 P. 라루 (Leonard P. LaRue). 라루 선장은 제 2차세계대전 중에도 군사작전 중인 대서양을 오가며 군수물자를 나르던 민간 화물선의 선장이었다.

이 배는 미국 태평양 사령부와 계약을 맺고 미군의 해외 군사시설에 보급품 및 무기를 수송하는 1만 톤급 민간 화물선이었다. 한국전 초반 SS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인천-부산-일본을 오가며 미군 군수물자를 공수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가장 최근 임무는 도쿄에서 항공유를 싣고 연포공항의 미 해병대 항공단까지 안전하게 공수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1950년 11월 장진호 전투 후 12월 8일 유엔사령부와 미 해병대가 퇴각을 결정했기 때문에, 사령부는 연료를 흥남 대신 부산에 하역하라고 재주문했다. 부산으로 선수를 돌린 배는 하역을 하던 도중 철수작전을 돕기 위해 다시 흥남을 향하게 된다.



원래 흥남 철수작전 계획에 대규모 민간인 소거계획은 들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미 육군 통역이자 민간고문으로 있던 의사이자 세브란스 교수였던 현봉학씨가 에드워드 포니 대령과 함께 제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을 찾아가 피난민들을 함께 소거시켜 달라는 요청을 하게 된다. 세브란스 의대 출신 현봉학씨는 전쟁 직전 버지니아 리치몬드 의대에서 연수를 받고 귀국한 터였는데, 공교롭게도 알몬드 장군의 고향이 리치몬드 였고, 현봉학씨의 고향은 알몬드 장군의 제 10군단 주둔지 함흥이었다.

이에 동의한 알몬드 장군은 미 육군 제 10군단의 존 H. 차일즈 대령을 라루 선장에게 보내 혹시 배에 피난민을 얼마라도 탑승시킬 수 있는지를 타진해 보았다. 물론 군 당국은 민간인인 선장과 승무원에게 피난민을 탑승시키라는 명령을 내릴 권한은 없었다.

라루 선장은 가능한 많은 피난민을 태우겠다고 즉시 답했다. 문제는 이 배가 총 60명의 승선자 만을 위해 설계된 전형적인 화물선이란데 있었다. 이 배에는 이미 12명의 사관과 35명의 승무원이 탑승했기 때문에 13명의 여유공간 만 있었다. 여분의 물과 식량은 말할 것도 없고, 구명보트나 구명구도 없었다. 여분의 탑승자를 위한 화장실을 포함한 위생시설도 전무했다.

더 큰 문제는 항공유 하역작업 중 흥남으로 복귀했기 때문에 화물선 안에는 여전히 300톤 가량의 항공유가 남아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연근해 10킬로미터 안쪽으로는 북한 측이 설치한 기뢰가 촘촘히 부설되어 있었고, 북측의 잠수정도 빈번히 활동하는 중이었다. 기뢰탐지장비가 없는 메러디스 빅토리호로서는 군사보안 때문에 무선교신이 차단된 상태로 기뢰탐지장비가 있는 호위함도 없이 기뢰가 부설된 해역을 빠져나가야 하는 위험을 스스로 감수해야 했다. 라루 선장은 배에 실려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피난민을 최대한 태우라고 명령했다. 이제 배에 남은 무기는 선장이 가진 권총 한 자루 뿐이었다.

피난민의 탑승은 12월 22일 저녁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이어졌으며, 한 치의 공간도 없는 가운데 17명의 부상자와 5명의 만삭의 임산부를 포함해 무려 14000 명의 피난민이 탑승했다. 피난민이 승선하는 동안 미 육군 3사단은 후방을 방어하다 세 명이 죽었다. 28시간의 항해 끝에 크리스마스 이브에 부산에, 크리스마스 당일에 거제도에 도착했다. 이 항해 동안 부상자는 발생했지만 단 한명도 죽지 않았고, 대신 5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흥남 소거가 완료된 후, 알몬드 장군은 흥남부두에 내려놓은 무기를 중공군에게 뺏기지 않도록 흥남부두를 폭파시켰다. 열흘 간의 철수작전을 통해, 대한민국 국군 제1군단과 미군 제10군단은 병사 10만명과 차량 17000천대, 35만 톤의 군수품을 안전하게 동해상으로 철수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 뒷 이야기

전쟁이 끝난 직후, 라루 선장은 1954년 뉴저지 뉴튼에 있는 베네딕트회 소속의 세인트 폴 수도원에서 이제 "마리너스/ Marinus 형제"라는 이름으로 수도사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2001년 10월에 87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수도사로 지내며 크리스마스 트리 농장을 가꾸거나 성물판매일을 하면서 수도원에서만 살았다.

미국 내 로마카톨릭 수도자의 감소로 이 수도원은 1970년 대 말부터 심각한 운영난을 겪고 2000년 무렵에는 폐쇄결정이 내려지게 된다. 이 수도원의 현황을 조사하기 위해 독일에서 온 예레미아스 슈뢰더 대수도원장은 한국의 왜관에 있는 분도수도원에서 도움을 청하게 되었고, 분도 수도원은 수도사들을 보내 세인트 폴 수도원의 재건을 돕겠다는 약속을 한다. 이로부터 이틀 후, 마리너스 수도사는 세상을 떠났다.

훗날, 라루 선장은 자신이 종전 후 수도사가 된 배경에 대해 아래와 같은 짧은 코멘트를 남겼다.

''I think often of that voyage. I think of how such a small vessel was able to hold so many persons and surmount endless perils without harm to a soul. The clear, unmistakable message comes to me that on that Christmastide, in the bleak and bitter waters off the shores of Korea, God's own hand was at the helm of my ship.''

나는 종종 그 항해에 관해 생각합니다. 그렇게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끊없는 위험을 헤쳐나가면서도 한 명의 생명도 잃지 않았다는 점을 말입니다.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는, 그때 그 크리스마스 무렵 한국의 그 황량하고 매서운 바다 가운데서 신의 손이 나의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 번역: 최광민

이 배의 일등항해사로 동승했던 로버트 러너의 증언에 따르면, 배에 탔던 사관 한 명이 그에게 왜 그때 그렇게 위험한 결정을 내렸느냐고 물었을 때, 라루는 예수의 말을 빌어 짧게 답했다고 한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누가 나의 친구인가?
나는 누구의 친구인가?




P.S.

흥남 철수 작전 후, 메러디스 빅토리는 워싱턴 주 시애틀로 가서 브레머턴 항에 정박해 있다가 베트남전에 일시 투입되었다. 미국 의회에서 갤런트상(Gallant Award)을 받은 이 배는, 1971년에 퇴역한 후 1993년에 중국에 고철로 팔렸다.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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