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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슈거블루스}, 백설탕의 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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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2015-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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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백설탕의 흑역사



William Dufty, {Sugar Blues}

{슈거블루스} , 최광민 / 이지연 번역:



대학시절, 군 복무를 마친 한 친구가 동기들 최초로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친구의 ‘미국물 먹고 온’ 이야기라도 들을 겸 함께 학교 앞 ‘다방’에 갔는데, 커피를 받아 든 그 친구는 ‘커피는 역시 블랙!’이라고 말하며 설탕도 넣지 않은 쓴 커피를 들이키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은 나도 그 후부터 ‘정통 블랙’만 마셔보려고 꽤나 노력했지만, 설탕 빠진 커피의 쓴 맛이 한동안 익숙하지 않았다. 대신 기왕 설탕을 넣을 바엔 색깔이라도 맞춰볼 생각으로 살짝 ‘흑설탕’을 넣어 마셨다. 내 주변에선 다들 흑설탕이 백설탕보다 원당에 가깝다고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나도 흑설탕이 백설탕보다 건강에 좋으려니 생각했다.

흑설탕의 정체를 비로소 알게 된 것은 2002년 초반, 뉴욕포스트 기자 출신인 윌리엄 더프티가 1975년에 발표한 {슈거 블루스} 란 책을 통해서 였다. ‘흑설탕’의 원래 이름은 ‘정제삼온당 (三溫糖)’. 이름이 암시하다시피, 정제설탕 제조과정에서 원당에서 정백당, 황백당, 그리고 바로 이 삼온당 (=흑설탕)이 차례로 나온다. 당류는 가열하면 점차 누르스름하게 변색되는데, 흑설탕을 만들 때는 이보다 더 어두운 색상을 내기 위해 캐러멜 색소를 쓴다. 잠깐, 많은 소비자들은 이 제조공정을 정반대 순서로 알고 있지 않은가? 원당에 가까운 흑설탕이 먼저 나오고 마지막으로 가장 순수한 순백의 백설탕이 나온다고 말이다. 책에 언급된 흑설탕 제조법에 대한 설명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아 사실을 재확인하기 위해 자료를 찾다가 방문한 곳이 대한제당협회의 웹페이지였다.

대한제당협회 웹페이지 (www.sugar.or.kr)에 올려져 있는 홍보자료는 “(흑설탕은) 강한 단맛, 감칠 맛과 원료당의 냄새를 내고 싶은 경우 사용을 하게 되는 설탕입니다. 흑설탕에 카라멜을 넣는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단지 삼온당의 색상을 내기 위해 첨가한 것입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결국 흑설탕은 백설탕에 색을 입힌 것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투박한 짙은 갈색과 거친 입자 때문에 흑설탕이 백설탕보다 더 원당에 가깝고, 따라서 왠지 더 몸에 좋으려니 착각했던 소비자들에게는 이 사실이 당혹스러우리라.



역사상 설탕업계는 엄청난 수익을 거둬들인 고부가 산업이었으며, 가공식품업계와 다양한 이해관계로 얽혀져 있다. 더프티의 {슈거 블루스}는 정제설탕이 인류의 식단 속에 들어오게 된 이래로 설탕산업이 정치, 과학, 보건-의학계와 유지해 온 달콤한 밀월관계를 폭로하면서, 정책, 과학, 식품, 보건, 의학 분야의 소위 전문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설탕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왜곡시켜왔는지를 비판한 책이다. 특별히 설탕업계와 전문가들이 기술적 용어들을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뒤틀어 결과적으로는 설탕 소비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킨 사례들을 예리하게 짚어낸다.

가령, 대한제당협회의 홍보자료는 설탕을 “인류 최초의 가공식품”, “순수한 자연식품”, “인체의 성장 및 활동에 필수적인 에너지원으로서 3대영양소의 하나인 탄수화물의 원천”, “영양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식품”, “안전한 자연 건강식품” 등으로 소개한다. 정제설탕에 관한 위의 진술들이 얼마나 타당한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자.

첫째, 설탕은 인류 최초의 가공식품일까? 인간은 고대로부터 식물의 단 맛을 즐겼다. 그러나 정제 설탕은 서구의 식민지배가 만들어낸 근대의 상품이다. 단 맛의 역사는 길지만, 정제설탕이 인류의 식단을 장악하게 된 역사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고대 인도에서는 사탕수수를 씹어 단맛을 느끼는 수준에 머무르다가, 기원후 4세기가 되어서야 설탕을 결정분말로 만드는 법이 인도에서 비로소 발명되었다. 7세기 무렵에는 중국과 이슬람 세계로 설탕정제법이 퍼져나갔고, 이슬람 세계를 침략한 십자군 전쟁을 전후로 설탕은 서유럽에 본격 상륙한다. 이로써 설탕은 유럽인들은 식민지 지배 욕망을 부추긴 강력한 동기 중 하나가 되었다. 유럽인들은 사탕수수를 재배할 수 있는 새로운 땅 (브라질, 쿠바, 바베이도스 등)을 정복한 후, 원주민 혹은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동원해 대규모 사탕수수 집단농장을 식민지에 건설했다. 이렇게 신세계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정제설탕은 이른바 ‘문명’사회에 대량 유입되었는데, 따라서 사람들이 설탕을 지금처럼 과잉 섭취하게 된 것은 지난 300년 동안 일어난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특히 지난 100년 동안 놀랍게 발전한 가공식품의 발전/전파와 함께, 정제설탕의 생산과 섭취량은 전 지구적으로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상당수의 가공식품에 정제설탕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배후에는 식약품규제기관과 정치, 보건정책, 과학, 의학계에 대한 제당 및 가공식품업계의 공개적인 혹은 은밀한 로비와 압력이 있었다.



둘째, 정제설탕은 “자연식품”일까? 틀린 말은 아니다. 정제설탕의 원료가 되는 사탕수수나 사탕무는 물론 자연의 산물이다. 하지만 ‘자연식품’인 소금도 많이 먹으면 죽는다. “자연산은 몸에 좋고, 합성물은 몸에 해롭다”라는 사고방식을 걷어내고 자연을 바라보자. 자연이 생산한 천연물질에는 맹독성 물질도 존재하며, 또 인간이 만든 합성물이라고 몸에 해롭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과연 설탕이 자연의 산물로부터 비롯했다는 사실이 “안전한 자연 건강식품 ”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될까?

“자연식품”이라는 이 정제설탕은 또 “순수”하기까지 하다. 원당으로부터의 정제과정과 숯 (활성탄)을 사용한 표백과정을 거쳐 탄생하는 백설탕은 포도당-과당으로 구성된 높은 순도를 자랑하는 수크로스 결정체다. ‘순수’라는 단어에는 한가지 함정이 있다. ‘순수’라는 단어를 들으면, 일반인들은 종종 “순수한 것은 좋고, 불순한 것은 나쁘다”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럼 ‘순수한 정제 백설탕’은 ‘덜 순수’한 원당이나 혹은 캐러멜 색소를 섞어 ‘덜 순수해진’ 정제 흑설탕보다 더 ‘순수하기 때문에’ 몸에 더 좋을까? 사실 정제 백설탕은 거의 100% 수크로스일 뿐이지만, 비정제 설탕에는 칼슘, 마그네슘, 비타민 A-B 등의 미네랄이 함께 들어 있다.



화학물질의 ‘순도’는 종종 그 효력에 비례한다. 다이아세틸모르핀 (diacetylmorphine) 은 ‘천연’의 재료에서 만들어지는데, ‘자연산’ 양귀비의 유액을 말려 얻은 아편을 정제해 순도를 높인 향정신성 마약이다. 다른 말로는 ‘헤로인’이다. ‘천연’의 ‘자연산’ 코카나무 잎을 따서 순도 높게 정제한 결정형 분말 역시 ‘코카인’이라는 일급 마약이 된다. 물론 마약과 설탕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대단히 부당하다. 신경계나 다른 신체부위에 작용하는 기작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제설탕이 오늘날과 같은 광범위한 식품첨가물이 되기 이전에는, 역사적으로 약품으로도 간주되었다는 점을 한번 생각해 보자. 고대 인도, 중세의 이슬람 및 유대인 의사들은 다양한 질병을 고치거나 증세를 완화하기 위해 설탕을 약으로 ‘미량’ 처방했다. 이는 첫째 설탕이 비쌌기 때문이고, 둘째 설탕을 조금만 먹여도 눈에 띄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제 설탕에 과량노출되어 본 적이 없었기에 이런 효과가 가능했다. 현대인들이 식사나 간식을 통해 섭취하는 (정제)설탕은 그 환자들에게 약으로 처방되었던 양보다 수 십, 수 백배 많다. 설탕이 잔뜩 든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현대인들은 당시 의사들의 눈에는 흡사 약물중독자처럼 보일 것이다.



셋째, 정제설탕은 인체에서 “중요한 영양소”의 역할을 할까? 물론 정제설탕은 대한제당협회의 자료에서도 언급하듯 고순도의 ‘탄수화물’이다. 그리고 탄수화물은 분명히 “인체의 성장 및 활동에 필수적인 에너지원으로서 3대영양소의 하나”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제설탕을 “탄수화물의 원천”이자 “영양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식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마치 “(1) 정제설탕= 탄수화물. (2) 탄수화물= 필수영양소 (3) 그러므로 정제설탕= 필수영양소”란 식의 어설픈 삼단논법과 유사하다.

인간의 몸은 설탕 말고도 보다 다양한 형태의 탄수화물들을 변환시켜서 생명유지에 필수적인 생체분자와 에너지를 얻는다. 그러나 설탕이 아닌 다른 형태의 탄수화물을 이용해도 우리 몸은 필요한 탄수화물 대사를 할 수 있다. 그래서 설탕은 인체의 탄수화물 대사에 ‘필수적’이지도 않고, ‘영양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식품’이라고 말하기 곤란하다. 사실 가장 단순한 형태의 탄수화물 가운데 하나인 설탕의 경우는 체내에서 포도당으로 분해되어 혈류 속으로 들어가는 속도가 다른 당류 (가량, 꿀)에 비해 매우 짧기 때문에, 설탕을 섭취하는 즉시 혈류를 타고 그 효과가 온 몸으로 급속히 퍼져 나간다. 설탕이 약품으로 간주한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동일한 이유 때문에 잠재적 위험성도 있는 것이다.



책 머리에서 인생의 반을 정제설탕의 피해자로 살아왔다고 고백하는 더프티가 자신의 책을 통해 주장한 결론은 꽤 과격하다. 더프티는 개인마다 민감도의 차이는 있으나, 정제설탕은 독이자 중독성 약물이기에 식단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우리는 더프티의 결론에 따라 정제설탕이 들어간 모든 종류의 가공식품을 끊어야 할까? 유감스럽게도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거의 모든 가공식품과 외식을 포기하고 음식을 스스로 만들어 먹지 않으면 안될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강문제에 민감한 소비자들은 정제설탕의 섭취량을 가급적 조절하거나 혹은 정제설탕 대신 비정제설탕을 섭취하는 쪽의 선택을 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이 입장은 현실에 일정 정도 굴복하는 것인데, 현대의 식품생태계 안에 사는 이상 입안에 들어가는 정제설탕의 섭취량을 소비자가 완벽히 통제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설탕을 많이 먹든, 적게 먹든, 혹은 완전히 끊든 간에,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설탕논쟁을 둘러싼 기초적인 과학 원리를 소비자 각자가 이해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싶다. “정제설탕은 생명력을 상실한 해로운 물질”이란 말과 “정제설탕은 천연재료로 만든 자연식품”이란 말은 둘 다 과학적 이해를 놓치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크지 않다. 특정음식이 몸에 좋고 나쁘다는 주장은 한국사회에 늘 있어왔다. 문제는 그 좋고 나쁘다는 근거를 충분히 이해하고 대중이 지갑을 여는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시중에는 사람 몸의 독소를 제거한다는 음식만 해도 수십 가지가 나와 있는데, 독소를 제거한다는 과학적 근거는 모호하지 않은가? 어떤 식품이 ‘몸에 좋다’나 ‘나쁘다’라는 말에 휩쓸리기 보다, 좋고 나쁘다는 주장의 근거가 어디에 바탕하고 있으며 그 한계는 무엇인지 과학적으로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비단 음식에 관련된 논란이 아니더라도 과학을 등에 업은 어떤 주장이 단정적으로 유행될 때는, 어느 정도 경계심을 가지고 차분히 지켜보는 것이 현명하다.



왜일까.

첫째, 한 시절을 풍미하던 과학적 ‘사실’도 나중에 철회될 수 있다. 반 세기 이상 발암물질로 낙인 찍혔던 사카린이 오히려 항암물질일 수도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온 게 바로 얼마 전이다. 이런 소식에 일반인들은 도대체 뭘 믿어야 할지 기가 막히겠지만, 재실험과 반박의 과정을 통해 조금씩 앎의 지평을 넓혀가는 것이 과학이다.

둘째, 과학적 발견은 통계와 확률에 기대어 설명된다. 생쥐에게 무엇을 먹이니 어떠한 조건하에서 평균적으로 몇 퍼센트 정도 어떤 증상이 일어나더라는 발견은, 무엇을 먹으면 어르신 십 년 더 장수하실 거라는 건강식품 광고문의 장담과는 또 다른 것이다. 과학적 설명이 대중이 보기는 답답하게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단정적이지 않은 약간은 지루한 설명이 사실은 오히려 정상이다. 과학은 설탕처럼 마냥 자극적이고 달콤하지도, 순백처럼 마냥 단순명료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최광민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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