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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예수 vs. 붓다 #8: 붓다는 어쩌다 예수가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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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신화/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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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11-03-11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글들에 대해 저자의 동의없는 전문복제/배포 -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를 금하며, 인용 시 글의 URL 링크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예수 vs 붓다 #8: 붓다는 어쩌다 예수가 되었을까? - 보디사트바 (보살)에서 예수까지
요약
페르시아와 아랍권을 거쳐 기독교화 된 고타마 붓다의 일대기를 통해 고타마 싯달타가 중세 유럽에서 성인 요사파트가 된 과정을 우선 설명한다. 아울러 한 아랍어 판본이 인도에 재수입되어 봄베이에서 출판되는 과정에서 식자오류로 인해 이 고타마 붓다가 엉뚱하게 카슈미르와 연결되고, 다시 이 연결을 통해 서북인도의 이슬람 이단인 아마디야 이슬람이 카슈미르 슈리나가르 지역 성인 유자사프와 예수를 연결하게 된 과정을 설명한다.
목차
- 성 "보살" 요사파트
- 보디사트파에서 부다사프/유다사프까지:이슬람 계통
- 부다사프에서 요사파트까지: 마니교/기독교 계통
- 아랍어 판본의 인도 역수입: 유자시프와 카쉬미르
- 아랍어 봄베이판의 조판오류: 카시나라에서 카쉬미르로
- 유자사프에서 유즈아사프, 유즈 아사프, 이사/예수까지: 서북 인도 이슬람 이단 아마디야 이슬람
- 맺음말
§ 성 "보살" 요사파트
이번에는 "불제자 예수"가 아니라, 그 반대로 "붓다가 예수가 된" 엉뚱한 경우를 하나 설명해 보겠다.
https://archive.org/stream/barlaamjosaphate00jacouoft#page/n7/mode/2up
Barlaam and Josaphat. English lives of Buddha. Edited and induced by Joseph Jacobs (1896)
고1 때던가?
교보문고에 갔다가 집어든 책 가운데 독일 작가 홀거 케르스텐 (Holger Kersten)이 1983년에 출판한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 Jesus Lived in India}란 책 (장성규 번역 / 고려원)이 있었다. 이런 류의 책 가운데서는 내가 읽어 본 첫 책이었기에 교보문고 바닥에 앉아서 2시간 정도 꼼꼼히 읽고 왔던 기억이 난다.
Holger Kersten, {Jesus in India}
이 책의 주장은 대체로 두 축 위에 서 있는데, (1) 티벳에서 예수의 12-30세 시절의 인도/티벳 방문기록을 찾아냈다는 러시아 작가 니콜라스 노토비치의 {예수의 알려지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 (이하, 이사傳) / The Unknown Life of Jesus Christ}와 (2) 서북인도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교 이단인 아마디야 이슬람의 교조 (자칭, 재림 예수이자 재림 이맘인 마흐디) 미즈라 굴람 아흐마드가 펼쳤던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소생한 예수의 카시미르 도래/사망설"이 그것이다.
노토비치의 소위 {이사전}에 대해서는 이미 자세히 언급했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다루지 않겠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살아 인도 카쉬미르에서 여생을 마쳤다"는 주장을 덥썩 물기 전에,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싯달타가 몇세기 지나 서방세계의 성인전/발라드 {발람과 요사파트}의 주인공 요사파트로 둔갑하게 된 역사부터 이해해야 한다. 현재까지 확립된 학계의 설명은, AD 2-4세기에 유통되던 마하야냐 불교의 산스크리트어 문헌을 당시 중앙아시아에 퍼져있던 기독교 이단인 마니교가 흡수한 후, (1) AD 8세기에 이슬람화 한 페르시아와 바그다드를 통해 서방에 전수된 한 경로와, (2) 조지아 (구, 그루지야)의 수도사들을 통해 일차로 기독교화되어 서방에 전달된 두 경로로 보고 있다.
이 글에서는 불교를 개창한 고타마 붓다를 지칭한 산스크리트어 "보디사트바 (=보살)"와 그의 출가설화가 어떤 연유로 중세기 기독교권에서 "기독교 성자 요사프/요사팟"의 이야기로 둔갑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짤막하게 설명하는 동시에, 또 어떤 과정을 거쳐 AD 19세기 인도 서북부의 한 이슬람 이단종파에 의해 "유즈 아사프", 더 나아가 "인도로 간 예수 본인"으로 재창조되었는지를 설명해 보겠다.
산스크리트어 단어 "보디사트파"의 변형/진화는 (1) 서방 기독교 계통과 (2) 페르시아-아랍 이슬람 계열 두가지 지류로 나뉜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 가운데 후자의 이슬람 계통 "변형 보디사트파"는 결국 인도에서의 조판실수 및 왜곡을 통해 전혀 엉뚱한 "예수"가 되어버렸다.
§ "보디사트파" 에서 "부다사프/유다사프" 까지: 이슬람 계통
일단 불교설화가 이슬람 세계로 흘러들어가게 된 과정을 설명해 보겠다.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싯달타의 대승불교 버전의 출가 및 입멸설화는 사산조 페르시아 시절인 AD 2-4세기에 당시 페르시아어인 팔라비어로 번역된 {비라우하르 우 부드사프 / Bilauhar u Buddsaf}의 형태로 탈-불교화되어 등장한다. 이후, 이슬람교가 출범한 이후인 AD 8세기 경에는 그리스어, 시리아어, 페르시아어 문헌들의 아랍어 번역을 국가적으로 장려했던 이슬람 칼리프 국가인 압바스 칼리프국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페르시아어에서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아랍어 판본 (Kitab Bilawhar wa-Yudasaf (Book of Bilawhar and Yudasaf))의 모체인 페르시아어 판본의 붓다설화는 AD 2-4세기의 인도 산스크리트어 불교 작품인 {랄리타비스타라 Lalitavistar}나 아쉬바고사 (=Asvaghosa, 馬鳴)의 {붓다차리타 Buddhacarita, 佛所行讚}를 엄격하게 따른 것이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한 당시의 여러 대중적인 전설들까지 함께 모아 편찬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페르시아어 "부드사프"는 산스크리트어 "보디사트바" (बोधिसत्त्व bodhisattva), 팔리어 "보디사타" (बोधिसत्त bodhisatta), 즉 "보살"을 뜻한다. 참고로, 출가해서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기 전까지의 고타마 싯달타는 아직 '붓다'가 아닌 '보디사트바', 즉 '보살'이다. AD 8-10세기에 페르시아어에서 아랍어로 번역될 때는 페르시아어 제목인 {비라우하르 우 부드사프}가 {빌라우하르 우 부다사프}가 된다. 아랍어 "부다사프"는 역시 페르시아어 "부드사프"의 음차다. 그래서 산스크리트어 "보디사트파"는 페르시아어 "부드사프"를 거쳐 아랍어 "부다사프"가 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이 단어의 형태에 있어서 아주 큰 변화는 없다.
한편, AD 991년에 사망한 이슬람교 시아파 학자인 이븐 바바위야 (Ibn Babawayh)는 그의 {카말 웃 딘, Kamal ut Din}에 이 붓다설화를 삽입했는데, 이번에는 B 음가가 탈락하여 그 표기가 "유다사프 Yūdāsaf" 가 되었다. 1883년의 테헤란 판에서도 "유다사프"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본래의 페르시아어 음차인 아랍어 "부다사프"가 "유다사프"로 변형된 이유는 부주의한 필사오류라고 여겨지는데, "B" 음가를 가진 아람어 자음 " ﺑ " 에 점 하나만 더 찍으면 Y"음가를 가진 "ﻳ"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다사프에서 "유"다사프로 변형된 과정을 추측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이 유"다"사프의 이형인 아랍어 유"자"사프는 다시 19세기 인도에서 유자"시"프가 된다. 이 유"자"사프의 형태는 페르시아 및 인근 힌두스탄 (오늘날의 파키스탄과 카쉬미르 지역)에 널리 퍼진 형태가 된다.
이 문건은 서북 인도 발 이슬람 이단인 아마디야 이슬람의 창교자이자 재림 예수 혹은 재림 이맘 (마흐디)를 자처한 인물인 굴람 아흐마드 (Gulam Ahmad)의 저작인 우르드어 판 {인도에서의 예수 Jesus in India} (1899)에 인용되었는데, 바로 이 굴람 아흐마드가 "서북 인도 카시미르 지방 스리나가르의 로자 발에 안치된 "인도성자 유자사프 (~유즈 아사프?)"가 사실은 "2000년 전 십자가형 이후에 인도로 와서 살다가 죽은 예수"란 주장의 비조가 된다.
이 주장은 1980년 중반에 고려원 출판사에서 번역출판한 홀거 케르스텐의 책을 통해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바 있고, 이를 받아 서북인도 대승불교의 중심지 간다라 및 근방의 카쉬미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불문학자이자 불교저술가인 민희식씨와 UFO, 외계문명, 고대문명 등에 관련된 일련의 출판을 해 온 증산도 측에서 주장을 더욱 확대해서 한국에 소개했다.
§ 부다사프/유다사프 (아랍어)에서 요다사프 (조지아어), 요사프 (그리스어), 요사파트 (라틴어)까지: 마니교/기독교 계통
이번에는 이 설화가 기독교로 유입된 과정을 설명해 보겠다.
고타마 싯달타의 출가설화를 기독교화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조지아 (구, 그루지야)의 수도사들은 이 전설의 주인공을 요다사프 (당시 아랍어 유다사프 혹은 부다사프)로 적었다. 그래서 인도에서 시작된 '보디사트바'는 그리스와 서부 유럽에 이르를 때까지 단계적인 어형 변형을 겪는다. 아마도 초기 형태는 중앙아시아에서 한때 번성했으며 불교에 한 발을 걸쳐두었던 기독교 이단 마니교에 의한 것이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여기고 있다.
- 보디사트바 / 산스크리트어
- 보디사브, 부드사프 / 페르시아어 / 6-7세기
- 부다사프 Būdhasaf / 아랍어 / 8세기
- 유다사프 Yūdhasaf / 아랍어 / 8세기
- 유자사프 Yuzasaf / 페르시아어 / 10세기
- 요다사프 / 조지아어
- 요사프 / 그리스어
- 요사파트 / 라틴어
일단 이렇게 철자가 변경된 아랍어 "유다사프"를 모체로 해서 이미 아랍세계에 유통되던 이 설화는 다시 한번 기독교화 된 후 서방으로 전해진다. 아르메니아 동쪽의 기독교권인 조지아 (구, 그루지야)에서는 AD 10세기에 "요다사프 Iodasaph, "가 되었고. 다시 AD 11세기에 그리스로 넘어가 "요사프 Ioasaph)"가 된 후, 다시 라틴어로 옮겨져 "요사팟 Iosaphat"이 된 것이다.
당시 이슬람 지배권 아래 있던 아르메니아와 조지아의 문헌에 이 이야기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AD 10세기 조지아의 민족서사시 {발라바리아니, Balavariani} 를 통해서였다. AD 1028년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다 죽은 조지아 출신 수도사였던 아토스의 유티미오스 (Euthymius)는 이 작품을 조지아어에서 그리스어로 번역해 남긴 인물이었고, 이 작품은 다시 1048년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바를라암과 요사파트}란 제목으로 서구 유럽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이후 십자군 전쟁 후 중세기의 서부 유럽에까지 로망스 형태로 전파된 이 작품은 대중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어, 여러 변형된 로망스 소설들에 재등장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바를라암 (발람)과 요사팟은 성인으로 "공경"되기에 이르른다. 물론 로마카톨릭교회가 이들을 "공식"으로 시성한 것은 아니었지만, 초기에는 11월 27일이 비공식적인 순교자 축일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리스 정교회는 8월 26일을, 러시아 정교회는 11월 19일을 각각 전례에 포함시켰다.
이렇게 해서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싯달타는 출처확인 없이 다단계를 거쳐 기독교의 성인으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
§ 아랍어 판본의 인도 역수입: 유자시프와 카쉬미르
아랍어 판 "부다사프/유다사프/유자사프" 이야기는 후대에 (불교가 소멸해 버린 후) 인도로 역수입되어 출판된 후, 인도 무슬림들에 의한 출판 상 조판오류 탓에 이번에는 그 주인공이 "유자시프"로 불려지기 시작했다가, 다시 19세기 말 서북인도 카쉬미르를 기반으로 하는 이슬람교 이단인 아마디야 이슬람의 교조 미르자 굴람 아흐마드에 의해 분철되어 셈계 이름처럼 들리는 "유즈" + "아사프" = "유즈 아사프"가 되고, 다시 이 "유즈"에서 아랍어 "이사" 혹은 "예수"가 추출되어 궁극적으로는 "서북인도 카쉬미르에서 여생을 보내고 죽은 유즈 (예수)" 이야기로 재조합된다.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종합적인 분석은 {발람과 요사팟} 문건의 역사적 변형을 연구한 권위자인 영국 런던 대학의 코카서스학 (아르메니아~조지아 일대 역사를 연구하는 분야 / 필자 주) 교수 David Marsahll Lang의 논문들, 특별히 {The Life of the Blessed Iodasaph: A New Oriental Christian Version of the Barlaam and Ioasaph Romance} (Jerusalem, Greek Patriarchal Library: Georgian MS 140), BSOAS 20.1/3 (1957)와 조지아어 판본의 전문 번역인 {The Balavariani}(1966) 등에 자세히 발표되어 있다. 그러나 아무도 학술논문을 읽으려고는 않고, 그저 흥미위주의 음모론 저작들만 읽으려 할 뿐이다.
그럼 이번에는 고타마 붓다의 설화가 페르시아-아랍권에서의 변형을 거쳐 인도로 역수입되는 과정을 설명해 보자.
§ 19세기 인도 봄베이 판의 아랍어 조판오류: "카시나라"에서 "카쉬미르"로
이슬람 권에 이 설화가 들어온 기록은 AD 965년에 사망한 바그다드 출신의 무슬림 역사가이자 지리학자 알-마수디의 {황금들판, The Meadows of Gold}에 등장한다. 이 저작은 다양한 지역전설들을 수집해서 편집한 문건이다.
아울러 Lang은 "유자사프 / Yuzasaf"란 아랍어 표기법이 등장한 최초의 문건으로 AD 960년 경 이라크 바스라에 근거를 둔 이슬람 비밀결사인 '정결형제단'의 신비주의 가르침이 결집된 일종의 백과사전인 {라사일 이칸 알-사파 Rasail Ikwan al-Safa / 정결형제단의 총록}을 들었다. 이 문서는 영국령 인도 캘커타에서 1812년에 아랍어 판본으로 첫 출판된 후 여러 판을 거듭하는데, 1887-1888년에 발간된 봄베이 판이 인도에서 널리 유통된 판본이다.
다음은 1887-1888년 인도 봄베이에서 출판된 아랍어 판의 영문판이다. 아랍어 원본의 "유다사프"는 이 봄베이 판에서는 "유자시프"로 또 다시 변형된다. 붉은색으로 강조한 몇몇 단어와 문장을 주의깊게 읽어보자. "유자시프", "사울라바트", "카쉬미르" 이 세 단어가 "인도 카쉬미르에서 생애를 마친 예수" 설화가 창조되는 다단계 진화의 핵심열쇠를 쥐고 있다.
Yuzasif... After that he departed from the land of Saulabath and traveled to many areas propagating religion and reached the land of Kashmir. He toured the place andgave a new life to the dead hearts of the people of this country and he died during this period. Leaving the mortal body his soul flew up to the ethereal world. Before his death he summoned his disciple named, Ayabad who was serving him in sincerity and was a perfect man in all regards. He made a bequest to him in which he stated that it was time for him to depart from the world. You must fulfill all your duties. You must never give up truth and continue to remain on piety and worship. Then he ordered Ayabad to prepare a place for him to lie. Then he stretched out his legs and turned his head to the west and his face to the east. He died in this position.--- Ibn Babawayah "Ikmal uddin", Vol2. pp275 Section [[Yuzasif entering Kashmir]]
"유자시프"는 사울라바트 (=Kapilavastu / 카필라성?) 땅을 떠나 종교를 전파하며 여러 지방을 여행하였고, 마침내 "카쉬미르" 지방에 이르렀다.그는 그 땅을 두루 다니면서 그 지역 사람들의 죽은 마음에 새로운 생명을 되살렸다. 그는 이 무렵에 죽었다. 육체를 떠난 그의 영혼은 천계로 올라갔다. 죽기 앞서, 그는 정성껏 시중들던 제자이자 모든 점에서 완벽했던 제자 아야바드 (=아난?)를 불렀다. "유자시프"는 지금이 그가 이 세상을 떠날 순간이라고 말하며, "너는 네 임무를 완수해야 하며, 진리를 결코 포기하지 말것이며, 경건과 예배를 게을리해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아야바드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나서 아야바드에게 자신이 누울 곳을 치우라고 한 후, 그의 다리는 쭉 펴고, 머리를 서쪽으로 얼굴은 동쪽을 향했다. 이 자세로 그는 세상을 떠났다..... --- 이븐 바다와야, {카말 웃딘} / 영문판에서 번역: 최광민
불교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던 페르시아와 바그다드의 이슬람 작가들은 잘 모르고 있었겠지만, 이 장면 자체는 고타마 싯달타, 즉 붓다의 말년과 입멸장면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이다. 물론 불교의 원래 이야기에서 붓다는 머리를 북쪽으로 얼굴을 서쪽으로 향하고 누워 입멸하지만, 이븐 바다와야의 진술에서는 얼굴을 동쪽으로 하고 있는 점 등에서 다르긴 하다.
고타마 붓다의 입멸을 다루는 불교의 경전들, 즉 {열반경}들에는 여러 종이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팔리어로 된 테라바다 (=상좌부, 소승)불교의 {마하-파리니르바나 수트라}와 마하야나 (=대승) 불교 측 설명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마하파리니르바나 수트라}가 가장 대표적이며 한역으로는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14권과 이 밖에 이역본 2종이 있다. 붓다가 옆으로 (횡와 橫臥) 누워 입멸하는 장면은 서북인도 간다라의 열반도상에 잘 표현되어 있다.
고령의 고타마 붓다는 생의 마지막에 그는 파바 (Pava) 마을에 들러서 쿤다 (춘다)란 대장장이/세공업자에게서 이 "수카라-마다바 Sukara-maddava"란 음식을 공양받은 직후 식중독 증세를 보인 후 쿠시나라로 이동해 거기서 열반에 들었다. 팔리어인 "수카라-마다바"는 직역한다면 "부드러운 돼지고기"가 된다.
육식에 대한 계율의 이해 차이가 있는 남방 (테라바다)/북방불교 (마하야나) 교단에 따라 이 음식의 정체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 실제 "부드러운 돼지고기" 혹은 "돼지(의) 별미 (아마도 버섯)"으로 판이하게 해석이 갈리기 때문이다.
고타마 붓다는 승려들에게 탁발로 음식을 공양받은 경우 그 음식에 고기가 보이거나, 고기가 들었다고 들었거나 혹은 승려들에게 먹일 목적으로 동물이 도살된 것이라 의심되지 않는 경우엔 공양받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고 보는 남방불교의 경우, "수카라-마다바"는 그저 "돼지고기 요리"로 이해한다. 반면, 엄격한 채식을 승가에 부과하는 북방불교의 경우는 돼지가 좋아하는 "버섯"으로 만든 요리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일반적인 "돼지고기"는 "수카라-마다바" 보다는 "수카라-맘사"여야 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자세한 내막은 팔리어 삼장 (Tipitata)의{디가 니카야 Digha Nikaya}의 {마하파나니바나 숫타Mahaparanibbana Sutta}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인용해 보겠다.
15. Then Cunda spoke to the Blessed One, saying: "May the Blessed One, O Lord, please accept my invitation for tomorrow's meal, together with the community of bhikkhus." And by his silence the Blessed One consented.
쿤다는 세존에게, "세존이시여, 내일 스님(비쿠)들과 함께 저의 식사초대를 받아주소서"라고 청했고, 세존께서는 잠잠히 이를 수락하셨다. / 번역: 최광민
16. Sure, then, of the Blessed One's consent, Cunda the metalworker rose from his seat, respectfully saluted the Blessed One, and keeping his right side towards him, took his departure.
세존의 수락을 받고, 대장장이 쿤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춰 세존께 인사하고 오른편을 세존에게 향한 자세로 돌아 나와 자리를 떴다. / 번역: 최광민
17. And Cunda the metalworker, after the night had passed, had choice food, hard and soft, prepared in his abode, together with a quantity of sukara-maddava, [38] and announced it to the Blessed One, saying: "It is time, O Lord, the meal is ready."
밤이 지난 후 대장장이 쿤다는 그 지역에서 나는 딱딱하거나 부드러운 음식들 및 수카라-마다바를 준비해 세존께 "세존이여, 식사하실 시간입니다"라고 알렸다. / 번역: 최광민
18. Thereupon the Blessed One, in the forenoon, having got ready, took bowl and robe and went with the community of bhikkhus to the house of Cunda, and there sat down on the seat prepared for him.
세존께서는 아침에 다른 비구들과 함께 발우와 장삼을 갖추고 아침에 쿤다의 집으로 가서 그를 위해 준비된 자리에 앉으셨다. / 번역: 최광민
And he spoke to Cunda, saying: "With the sukara-maddava you have prepared, Cunda, you may serve me; with the other food, hard and soft, you may serve the community of bhikkhus."
세존께서는 쿤다에게, "네가 준비한 수카라-마다바는 나에게 주고, 다른 음식으로 비구들을 공양하도록 하라"라고 말했다. / 번역: 최광민
"So be it, Lord." And with the sukara-maddava prepared by him, he served the Blessed One; and with the other food, hard and soft, he served the community of bhikkhus.
쿤다는 "세존이여, 그리하겠습니다"이라 답한 후, 그가 준비한 수카라-마다바로 세존을 공양하고, 딱딱하거나 부드러운 다른 음식들로 비구들을 공양하였다. / 번역: 최광민
19. Thereafter the Blessed One spoke to Cunda, saying: "Whatever, Cunda, is left over of the sukara-maddava, bury that in a pit. For I do not see in all this world, with its gods, Maras, and Brahmas, among the host of ascetics and brahmans, gods and men, anyone who could eat it and entirely digest it except the Tathagata alone." And Cunda the metalworker answered the Blessed One saying: "So be it, O Lord."And what remained over of the sukara-maddava he buried in a pit.
이후 세존께서는 쿤다에게, "쿤다야, 수카라-마다바 남은 것이 있다면 모두 구덩이에 묻어라. 온 세상의 신들이나, 악마나, 브라흐마 (범천)이나, 혹은 어떤 수도자나 브라만들이나, 신들이나 사람이나 그 누구라도, 이 음식을 여래 (Tathagata) 이외엔 능히 소화해내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쿤다는 "그리하겠습니다. 수카라-마다바 남은 것은 모두 구덩이에 파묻겠습니다"라고 답했다. / 번역: 최광민
20. Then he returned to the Blessed One, respectfully greeted him, and sat down at one side. And the Blessed One instructed Cunda the metalworker in the Dhamma, and roused, edified, and gladdened him. After this he rose from his seat and departed.
이어 쿤다는 세존에게로 돌아와 예를 갖춰 인사하고 그 곁에 앉았다. 세존께서는 대장장이 쿤다에게 불법을 설하시고, 쿤다를 일깨우시고 감화하시고 기쁘게 하신 후,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떠나셨다. / 번역: 최광민
21. And soon after the Blessed One had eaten the meal provided by Cunda the metalworker, a dire sickness fell upon him, even dysentery, and he suffered sharp and deadly pains. But the Blessed One endured them mindfully, clearly comprehending and unperturbed.
세존께서 세공업자 쿤다가 공양한 음식을 드신 직후 끔찍한 증세와 설사가 엄습했고 큰 통증을 느꼈지만, 세존께서는 담담하게 동요치 않고 깊이 참아내셨다. / 번역: 최광민
22. Then the Blessed One spoke to the Venerable Ananda, saying: "Come, Ananda, let us go to Kusinara." And the Venerable Ananda answered: "So be it, Lord."
그리고 세존은 아난(다) 존자에게, "아난다야, 이제 쿠시나라로 가자"라고 말씀하셨고, 아난다 존자는 "그리하소서, 스승님"이라고 답하였다. / 번역: 최광민
이번에는 실제 열반 장면을 확인해 보자. (http://www.accesstoinsight.org/tipitaka/dn/dn.16.1-6.vaji.html)
22. Then the Blessed One spoke to the Venerable Ananda, saying: "Come, Ananda, let us go to Kusinara." And the Venerable Ananda answered: "So be it, Lord." 23. When he had eaten Cunda's food, I heard, With fortitude the deadly pains he bore. From the sukara-maddava a sore And dreadful sickness came upon the Lord. But nature's pangs he endured. "Come, let us go To Kusinara," was his dauntless word. [39] ....[중략]....1. Then the Blessed One addressed the Venerable Ananda, saying: "Come, Ananda, let us cross to the farther bank of the Hiraññavati, and go to the Mallas' Sala Grove, in the vicinity of Kusinara." "So be it, Lord. 2. And the Blessed One, together with a large company of bhikkhus, went to the further bank of the river Hiraññavati, to the Sala Grove of the Mallas, in the vicinity of Kusinara. And there he spoke to the Venerable Ananda, saying: 3. "Please, Ananda, prepare for me a couch between the twin sala trees, with the head to the north. I am weary, Ananda, and want to lie down."[41] "So be it, Lord." And the Venerable Ananda did as the Blessed One asked him to do. Then the Blessed One lay down on his right side, in the lion's posture, resting one foot upon the other, and so disposed himself, mindfully and clearly comprehending. 4. At that time the twin sala trees broke out in full bloom, though it was not the season of flowering. And the blossoms rained upon the body of the Tathagata and dropped and scattered and were strewn upon it in worship of the Tathagata. And celestial mandarava flowers and heavenly sandalwood powder from the sky rained down upon the body of the Tathagata, and dropped and scattered and were strewn upon it in worship of the Tathagata. And the sound of heavenly voices and heavenly instruments made music in the air out of reverence for the Tathagata. --- 테라바다 (소승) 불교 팔리어 본, Maha-parinibbana Sutta: Last Days of the Buddha, tr. Sister Vajira & Francis Story
세존께서 아난다에게 "아난다야, 이제 쿠시나라로 가자"라고 말씀하자, 아난다는 "스승이여 그리하소서"라고 답했다......[중략].....쿠시나라의 살라(Sala) 숲에 도착한 붓다는 아난다에게 “아난다야, 한 쌍의 살라나무 사이에 침상을 북쪽으로 향하도록 놓도록 해라. 피곤하니 누워야겠다.” 아난다는 붓다의 뜻대로 침상을 준비했다.......[중략]....그때 세존은 우협으로 사자처럼 웅크리고 (사자와 獅子臥 siha-seyyam)를 하고 한 발을 다른 한 발에 포갠 채 정념(正念 sato)/정지(正智 sampajano) 하여 있었다....[후략] -- 팔리어 {마하-파리니르바나 수트라 / 열반경} / 번역: 최광민
앞서 인용한 이븐 바다와야가 묘사한 '유다사프' (봄베이판에선 '유자시프')의 임종장면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지명이 좀 이상하다. 불교의 {열반경}에 따르면 고타마 싯달타는 여러 해 동안 여러 곳을 여행하며 설법을 한 후 고향인 "카필라성 (Kapilavastu)"으로 돌아가던 중, 말라족이 다스리는 "쿠시나라"에서 제자인 "아난(다)"의 돌봄 가운데 열반에 든다. 팔리어 "쿠쉬나라"는, 세상을 떠난 붓다의 시신이 화장 때까지 살라(Sala trees) 나무 사이에 안치되어 수제자 "카쉬야파 (=마하가섭)"를 기다리며 일 주일 간 뉘어져있던 곳의 지명이다. 아랍어 원본에서는'카필라바스투'가 '사울라바트'로, '쿠시나라'가 '카쉬나라'로, "아난"이 "아야바드"이다.
그런데 왜 뜬금없이 19세기 인도 봄베이 아랍어 판에서는 아랍어 원본의 '카쉬나라'가 '카슈미르'가 되었는가? 산스크리트/팔리어 원본의 '쿠시나라'와 아랍어 원본의 '카쉬나라"는 (현재 지명은 쿠쉬나가르, Kushnagar) 네팔 아래 쪽 동북 인도의 같은 지역이지만, 이 둘과 파키스탄에 인접한 서북인도 '카쉬미르'는 전혀 다른 지역이며, 또한 고타마 붓다 일대기를 담은 산스크리트어 판본에는 고타마 붓다의 마지막 생애와 카쉬미르를 연결하는 고리는 등장하지 않는다. 짦게 말해 고타마 붓다는 '카쉬미르'가 아닌 '쿠시나라'에서 입멸했다.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오류를 뜻하는지를 지도 상에서 확인해 보자. 고타마 싯달타가 한 사람이라면 이처럼 멀리 떨어진 두 지역에서 동시에 입멸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구글 지도 / 편집: 최광민
그럼 원작에도 없는 "카쉬미르"가 어쩌다 등장하게 된 것인가?
우선, 힌두스탄 지역에는 페르시아 판에 영향을 받은 "유자사프" 전설이 탈-불교화된 전설의 형태로 최소한 18세기 이전부터 구전되고 었었던 듯 하다. 또한 이 이야기의 한 아랍어 판본이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던 인도 무굴제국에 도입되었고, 1880년대에 영국령 봄베이 (현, 뭄바이)에서 출판된 것이 일반에 널리 퍼진 형태의 판본이었다.
문제는 이 봄베이 판의 식자오류였다. David Marshall Lang은 1960년대에 발표한 연구를 통해, 아랍어 판에 등장하는 "카쉬미르에서 죽었다는 유자사프" 이야기는 1886-7년 인도 봄베이에서 인쇄된 아랍어 판의 식자오류에서 처음 등장하게 되었다는 명쾌한 증거를 제시했다. 이 봄베아 아랍어 판본에서 드디어 "유자사프"가 "카쉬미르"에서 죽은 것으로 처음 등장한다.
그럼 어쩌다가 팔리어/산스크리트어 "쿠쉬나라"에 대응하는 아랍어 "카시나라"가 이 봄베이 판에서는 "카쉬미르"가 된 것일까? 두 단어의 아랍어 철자를 보면 식자오류가 난 곳을 가늠할 수 있다.
우선 아랍문자로 적은 "카시나라"다.
كوشينر
다음은 1886년 봄베이 아랍어 판본에 등장하는 "카쉬미르"다.
كشمير
어디서 조판자가 오독으로 인한 조판오류를 일으켰는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유자사프에서 유즈아사프, 유즈+아사프,..., 마침내 이사/예수까지
Lang의 연구가 밝힌 바 처럼, 바로 1880년대 인도 봄베이에서 처음으로 인도 서북부 지방의 "카쉬미르"와 "유자사프/유자시프"란 인물이 연결되는 일이 발생한다. 그래서 갑자기 붓다의 입멸 이야기의 배경이 동북인도가 아닌 서북인도 카쉬미르로 옮겨진다.
여기서 이 설화가 다시 한번 진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서북인도를 거점으로 한 19세기 이슬람 이단인 "아마디야 이슬람"을 창교한 재림 예수이자 재림 이맘 마흐디인 미즈라 굴람 아흐마드다.
이슬람 이단 아마디야 이슬람의 교조, 자칭 재림 예수, 재림 이맘 마흐디인 Mirza Ghulam Ahmad
미즈라 굴람 아흐마드는 자신의 근거지인 카쉬미르 일대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십자가 처형 후 예수는 죽지않았고 (부활한 것이 아니라) 기적적으로 소생해 사라진 이스라엘의 10부족이 뿌리를 내린 서북인도 카쉬미르 지역에 왔고, 거기서 죽었다는 결론을 이끌어 냈다. 이런 연결을 하기 위해 그는 그 지역 슈리나가르의 로자 발 (Roza Bal) 사당에 안장되어 있는 지역 성인 "유즈아사프"를 끌어들였다. 왜? 왠지 아랍어 봄베이 판에 오기되어 등장하는 "카쉬미르"에서 죽은 "유자사프"가 "유즈아사프"처럼 들리지 않는가?
잠깐 여기서 아흐마드의 비약과정을 한번 정리해 보자.
- 인도 서북부 카쉬미르에서 천수를 누리고 별세한,
- 유자사프?
- 유자사프 Yuzasaf ?
- 유즈+아사프 Yuz + Asaf ?
- 유즈 Yuz? (아랍어) 이사 Isa ?
- ..............혹시 (아람어) 예수 Yeshua ?
그런데 "유즈" 아사프는 원래 아람어 "예수(아)"란 아람어 이름과 관련있던게 아니라, 원래 산스크리트어 "보디사트파"의 "보디"가 페르시아어와 아랍어를 거치면서 "부드/부다"로 표기되어 "부드사프"가 된 후, 인도에 다시 흘러들어온 후, 인도에서 다시 철자와 발음이 크게 변형되어"유즈"가 된 후 최종적으로 "유즈"와 "아사프"가 분철되어 생긴 해프닝일 뿐이다. 여기서 "유즈"가 분철된 이유는, "예수" 혹은 예수의 아랍어 어형인 "이사"에 억지로 끼워맞추기 위한 것이다.
로자 발 사당에 묻혀있는 "유자사프" 혹은 아마디야 식으론 "유즈 아사프"란 인물의 정체는 매우 모호하다. 카쉬미르 지역은 14세기 이슬람 지배권에 들어오기 전에 불교와 시바파 힌두교가 차례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곳이었다. 이슬람이 들어오기 전에도 사당은 존재했던 듯 하다. 그러므로 이 인물은 불교도였거나 혹은 힌두교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스리나가르의 로자 발 사당에 묻힌 인물의 이름을 처음으로 명시한 것은 스리나가르 지역의 이슬람 수피이자 지역 역사가인 카와자 무함마드 아잠 (Khwaja Muhammad Azam)이 1747년에 출판한 {카쉬미르 역사 Wagi'at i Kashmir} 혹은 {아잠의 역사서 Tarikh Azami} 불리는 책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로자 발에 묻힌 인물이 타지 출신의 예언자이자 귀인인 "유자수프 Yuzasuf"라고 (두 단어가 아닌) 한 단어로 적었다. 이 책은 1747년 페르시아어로, 1846년에 우르두어로 출판되었다. 이 기록 이전에 로자 발에 묻힌 인물에 대한 신뢰할 만한 정보는 거의 없으며, 사실은 아마디야 이슬람이 발흥해서 미즈라 굴람 아흐마드가 이 사당을 "예수의 무덤"으로 지목하기 전까진 해당 지역에서조차 그리 알려진 장소도 아니었다.
잘 알려져있지는 않지만, 사실 예수의 "잃어버린 17년 간의 기록"을 티벳에서 찾아냈다고 주장한 니콜라스 노토비치도 1887년에 바로 이 스리나가르를 두차례 경유해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그 유명한" {이사전}에서 스리나가르에서 예수의 무덤에 관련된 풍문을 들었다는 보고를 전혀 적지 않는다.
참고: http://kwangmin.blogspot.com/2011/08/blog-post_5980.html
아울러 노토비치의 진술을 검증하기 위해 1895년 직접 히미스 사원을 답사하고 주지를 인터뷰한 제임스 아치발드 더글라스 역시 스리나가르를 통과했지만, 그 역시 스리나가르에서 예수의 무덤 같은 풍문을 들었다는 보고를 전혀 하지 않았다.
왜 그는 이토록 중요한 정보를 누락한 것인가?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노토비치가 스리나가르를 방문했던 1887년과, 더글라스가 방문했던 1895년은, 미즈라 굴람 아흐마드가 로자 발의 주인공이 "예수"라고 선언한 해로부터 각각 12년 전과 4년 전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때 만해도 아직 "스리나가르 로자 발의 예수 무덤"의 전설이 생겨나기 전이었단 뜻이다.
https://archive.org/stream/JesusInIndiaMirzaGhulamAhmad/Jesus%20in%20india#page/n1/mode/2up
Mizra Ghulam Ahmad, {Jesus in India}
(비약이 심하지만 읽기에 재미는 있는) 미즈라 굴람 아흐마드의 책을 읽어보면, 예수가 카시미르에서 죽었다는 - 정확히는 로자 발 사당에 묻혀있는 유자사프란 인물이 예수라는 - 더 다양한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글에서 하나씩 설명하고 반박하도록 하겠다.
이 "유자수프"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그런데 혹시 아는가? 로자 발에 묻혔다는 "유자수프" 혹은 "유자사프"는 그저 이슬람이 들어오기 전에 스리나가르로 이주해 살았던 타지 출신의 덕망높은 불교도 "보살"이었을지도. 그러니까 이 로자 발에 누워있는 "유자수프" 역시 {발람과 요사파트}의 해프닝처럼 "인명"이 아니라 그저 "보살/보디사트바"가 부다사프 > 유다사프 > 유자수프로 변형되었을 뿐이었을지도 모른단 뜻이다.
1891년 무렵까지만해도 메시아이자 (시아파의 사라진 마지막 이맘인) 마흐디를 자처했던 아흐마드는 점차 자신이 이슬람교의 창교자 무함마드의 재림이라고 주장했는데, 너무 많은 무슬림들의 반감을 사자 이번에는 재림 예수를 자처했고 1904년에는 힌두교의 신 크리슈나의 화신임을 선언하기도 했다. 이런 아흐마드의 숙적은, 같은 시기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미국과 호주 등에서 활약한 부흥사이자 재림 엘리아를 자처했던 (사이비) 종교가 존 알렉산더 도위 (John Alexsander Dowie)였다.
"재림 엘리아" John Alexander Dowie (출처:Wikimedia Commons)
임박한 예수의 재림을 준비할 재림 엘리아로 자처한 도위는 재림예수가 이슬람을 멸망시킬 것을 호언장담했는데, 이에 맞서 아흐마드는 자신이야말로 (영적인) 재림 메시아이며 따라서 누가 진짜 신의 사도인지는 기도대결을 공개적으로 해보자고 제안했다. 1903년에 시작된 이 대결은 그저 편지를 통한 기싸움으로만 끝났다. 1907년엔 "재림 엘리야" 도위가, 1908년엔 "재림 예수" 아흐마드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 맺음말
한 10여 년 전 쯤의 일이다. 파키스탄 출신의 물리학과 대학원생 가운데 아마디야 무슬림을 만난 적이 있었다. 본인이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그저 "이슬람"으로만 밝혔기 때문에, 나는 그가 파키스탄의 주류파인 수니 아니면 소수파인 시아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와 어느날 기독교와 이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가 예수/이사와 관련된 이슬람 정통교리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가령,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고 (이것은 다른 무슬림들도 믿는 바다), 기적적으로 소생한 후 서북인도에 와서 여생을 살다 죽었다는 것이다 (수니/시아파 무슬림은 물론 이를 믿지 않고 대신 승천했다고 믿는다). 게다가 예수와 (시아파의 마지막 이맘인) 이맘 마흐디는 19세기 말에 어떤 '아흐마드'를 통해 재림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다른 무슬림 학생들이 그를 경원시하는 것을 알고 물어보니, 그가 바로 말로만 듣던 "아마디야 무슬림"이었던 것이다. 물론 파키스탄 정부 뿐 아니라 대개의 이슬람 국가들은 아마디야 이슬람을 이단으로 간주해 탄압한다. 더 정확히는 이슬람교로조차 인정하지 않고 이교도로 간주한다. 아마디야 무슬림이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단정짓지는 말자. 1979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압두스 살람은 아마디야 무슬림 가운데 대표지성이었다.
"예수가 청소년 기에 인도에 다녀왔다"라거나 "여생을 서부 인도 카쉬미르에서 보내고 죽었다"는 식의 주장을 인터넷에 유포하는 사람들 가운데 과연 얼마나, 이 주장의 원 출처가 이슬람 이단의 재림예수/재림이맘 마흐디인 미즈라 굴람 아흐마드가 조합한 것이란 것을 알고 있을까?
파키스탄 간다라와 카쉬미르를 오가며 "예수, 간다라 도래설"을 더 불교적으로 발전시켜 한국에 널리 전파한 민희식씨는 왜 이런 점을 보다 명시하지 않을까? 이 주장이 그 지역 아마디야 무슬림들의 주장이란 것을 모르지 않을텐데 말이다.
물론... 모르신다면 더 큰 일이다.
판단은 각자의 몫.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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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신화/종교
© 최광민, Kwangmin Choi, 2011-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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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 vs 붓다 #8: 붓다는 어쩌다 예수가 되었을까? - 보디사트바 (보살)에서 예수까지
요약
페르시아와 아랍권을 거쳐 기독교화 된 고타마 붓다의 일대기를 통해 고타마 싯달타가 중세 유럽에서 성인 요사파트가 된 과정을 우선 설명한다. 아울러 한 아랍어 판본이 인도에 재수입되어 봄베이에서 출판되는 과정에서 식자오류로 인해 이 고타마 붓다가 엉뚱하게 카슈미르와 연결되고, 다시 이 연결을 통해 서북인도의 이슬람 이단인 아마디야 이슬람이 카슈미르 슈리나가르 지역 성인 유자사프와 예수를 연결하게 된 과정을 설명한다.
목차
- 성 "보살" 요사파트
- 보디사트파에서 부다사프/유다사프까지:이슬람 계통
- 부다사프에서 요사파트까지: 마니교/기독교 계통
- 아랍어 판본의 인도 역수입: 유자시프와 카쉬미르
- 아랍어 봄베이판의 조판오류: 카시나라에서 카쉬미르로
- 유자사프에서 유즈아사프, 유즈 아사프, 이사/예수까지: 서북 인도 이슬람 이단 아마디야 이슬람
- 맺음말
https://archive.org/stream/barlaamjosaphate00jacouoft#page/n7/mode/2up
Barlaam and Josaphat. English lives of Buddha. Edited and induced by Joseph Jacobs (1896)
Holger Kersten, {Jesus in India}
"유자시프"는 사울라바트 (=Kapilavastu / 카필라성?) 땅을 떠나 종교를 전파하며 여러 지방을 여행하였고, 마침내 "카쉬미르" 지방에 이르렀다.그는 그 땅을 두루 다니면서 그 지역 사람들의 죽은 마음에 새로운 생명을 되살렸다. 그는 이 무렵에 죽었다. 육체를 떠난 그의 영혼은 천계로 올라갔다. 죽기 앞서, 그는 정성껏 시중들던 제자이자 모든 점에서 완벽했던 제자 아야바드 (=아난?)를 불렀다. "유자시프"는 지금이 그가 이 세상을 떠날 순간이라고 말하며, "너는 네 임무를 완수해야 하며, 진리를 결코 포기하지 말것이며, 경건과 예배를 게을리해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아야바드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나서 아야바드에게 자신이 누울 곳을 치우라고 한 후, 그의 다리는 쭉 펴고, 머리를 서쪽으로 얼굴은 동쪽을 향했다. 이 자세로 그는 세상을 떠났다..... --- 이븐 바다와야, {카말 웃딘} / 영문판에서 번역: 최광민
육식에 대한 계율의 이해 차이가 있는 남방 (테라바다)/북방불교 (마하야나) 교단에 따라 이 음식의 정체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 실제 "부드러운 돼지고기" 혹은 "돼지(의) 별미 (아마도 버섯)"으로 판이하게 해석이 갈리기 때문이다.
고타마 붓다는 승려들에게 탁발로 음식을 공양받은 경우 그 음식에 고기가 보이거나, 고기가 들었다고 들었거나 혹은 승려들에게 먹일 목적으로 동물이 도살된 것이라 의심되지 않는 경우엔 공양받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고 보는 남방불교의 경우, "수카라-마다바"는 그저 "돼지고기 요리"로 이해한다. 반면, 엄격한 채식을 승가에 부과하는 북방불교의 경우는 돼지가 좋아하는 "버섯"으로 만든 요리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일반적인 "돼지고기"는 "수카라-마다바" 보다는 "수카라-맘사"여야 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자세한 내막은 팔리어 삼장 (Tipitata)의{디가 니카야 Digha Nikaya}의 {마하파나니바나 숫타Mahaparanibbana Sutta}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인용해 보겠다.
15. Then Cunda spoke to the Blessed One, saying: "May the Blessed One, O Lord, please accept my invitation for tomorrow's meal, together with the community of bhikkhus." And by his silence the Blessed One consented.쿤다는 세존에게, "세존이시여, 내일 스님(비쿠)들과 함께 저의 식사초대를 받아주소서"라고 청했고, 세존께서는 잠잠히 이를 수락하셨다. / 번역: 최광민
16. Sure, then, of the Blessed One's consent, Cunda the metalworker rose from his seat, respectfully saluted the Blessed One, and keeping his right side towards him, took his departure.
세존의 수락을 받고, 대장장이 쿤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춰 세존께 인사하고 오른편을 세존에게 향한 자세로 돌아 나와 자리를 떴다. / 번역: 최광민
17. And Cunda the metalworker, after the night had passed, had choice food, hard and soft, prepared in his abode, together with a quantity of sukara-maddava, [38] and announced it to the Blessed One, saying: "It is time, O Lord, the meal is ready."
밤이 지난 후 대장장이 쿤다는 그 지역에서 나는 딱딱하거나 부드러운 음식들 및 수카라-마다바를 준비해 세존께 "세존이여, 식사하실 시간입니다"라고 알렸다. / 번역: 최광민
18. Thereupon the Blessed One, in the forenoon, having got ready, took bowl and robe and went with the community of bhikkhus to the house of Cunda, and there sat down on the seat prepared for him.세존께서는 아침에 다른 비구들과 함께 발우와 장삼을 갖추고 아침에 쿤다의 집으로 가서 그를 위해 준비된 자리에 앉으셨다. / 번역: 최광민
And he spoke to Cunda, saying: "With the sukara-maddava you have prepared, Cunda, you may serve me; with the other food, hard and soft, you may serve the community of bhikkhus."
세존께서는 쿤다에게, "네가 준비한 수카라-마다바는 나에게 주고, 다른 음식으로 비구들을 공양하도록 하라"라고 말했다. / 번역: 최광민
"So be it, Lord." And with the sukara-maddava prepared by him, he served the Blessed One; and with the other food, hard and soft, he served the community of bhikkhus.
쿤다는 "세존이여, 그리하겠습니다"이라 답한 후, 그가 준비한 수카라-마다바로 세존을 공양하고, 딱딱하거나 부드러운 다른 음식들로 비구들을 공양하였다. / 번역: 최광민
19. Thereafter the Blessed One spoke to Cunda, saying: "Whatever, Cunda, is left over of the sukara-maddava, bury that in a pit. For I do not see in all this world, with its gods, Maras, and Brahmas, among the host of ascetics and brahmans, gods and men, anyone who could eat it and entirely digest it except the Tathagata alone." And Cunda the metalworker answered the Blessed One saying: "So be it, O Lord."And what remained over of the sukara-maddava he buried in a pit.
이후 세존께서는 쿤다에게, "쿤다야, 수카라-마다바 남은 것이 있다면 모두 구덩이에 묻어라. 온 세상의 신들이나, 악마나, 브라흐마 (범천)이나, 혹은 어떤 수도자나 브라만들이나, 신들이나 사람이나 그 누구라도, 이 음식을 여래 (Tathagata) 이외엔 능히 소화해내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쿤다는 "그리하겠습니다. 수카라-마다바 남은 것은 모두 구덩이에 파묻겠습니다"라고 답했다. / 번역: 최광민
20. Then he returned to the Blessed One, respectfully greeted him, and sat down at one side. And the Blessed One instructed Cunda the metalworker in the Dhamma, and roused, edified, and gladdened him. After this he rose from his seat and departed.이어 쿤다는 세존에게로 돌아와 예를 갖춰 인사하고 그 곁에 앉았다. 세존께서는 대장장이 쿤다에게 불법을 설하시고, 쿤다를 일깨우시고 감화하시고 기쁘게 하신 후,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떠나셨다. / 번역: 최광민
21. And soon after the Blessed One had eaten the meal provided by Cunda the metalworker, a dire sickness fell upon him, even dysentery, and he suffered sharp and deadly pains. But the Blessed One endured them mindfully, clearly comprehending and unperturbed.
세존께서 세공업자 쿤다가 공양한 음식을 드신 직후 끔찍한 증세와 설사가 엄습했고 큰 통증을 느꼈지만, 세존께서는 담담하게 동요치 않고 깊이 참아내셨다. / 번역: 최광민
22. Then the Blessed One spoke to the Venerable Ananda, saying: "Come, Ananda, let us go to Kusinara." And the Venerable Ananda answered: "So be it, Lord."
그리고 세존은 아난(다) 존자에게, "아난다야, 이제 쿠시나라로 가자"라고 말씀하셨고, 아난다 존자는 "그리하소서, 스승님"이라고 답하였다. / 번역: 최광민
22. Then the Blessed One spoke to the Venerable Ananda, saying: "Come, Ananda, let us go to Kusinara." And the Venerable Ananda answered: "So be it, Lord." 23. When he had eaten Cunda's food, I heard, With fortitude the deadly pains he bore. From the sukara-maddava a sore And dreadful sickness came upon the Lord. But nature's pangs he endured. "Come, let us go To Kusinara," was his dauntless word. [39] ....[중략]....1. Then the Blessed One addressed the Venerable Ananda, saying: "Come, Ananda, let us cross to the farther bank of the Hiraññavati, and go to the Mallas' Sala Grove, in the vicinity of Kusinara." "So be it, Lord. 2. And the Blessed One, together with a large company of bhikkhus, went to the further bank of the river Hiraññavati, to the Sala Grove of the Mallas, in the vicinity of Kusinara. And there he spoke to the Venerable Ananda, saying: 3. "Please, Ananda, prepare for me a couch between the twin sala trees, with the head to the north. I am weary, Ananda, and want to lie down."[41] "So be it, Lord." And the Venerable Ananda did as the Blessed One asked him to do. Then the Blessed One lay down on his right side, in the lion's posture, resting one foot upon the other, and so disposed himself, mindfully and clearly comprehending. 4. At that time the twin sala trees broke out in full bloom, though it was not the season of flowering. And the blossoms rained upon the body of the Tathagata and dropped and scattered and were strewn upon it in worship of the Tathagata. And celestial mandarava flowers and heavenly sandalwood powder from the sky rained down upon the body of the Tathagata, and dropped and scattered and were strewn upon it in worship of the Tathagata. And the sound of heavenly voices and heavenly instruments made music in the air out of reverence for the Tathagata. --- 테라바다 (소승) 불교 팔리어 본, Maha-parinibbana Sutta: Last Days of the Buddha, tr. Sister Vajira & Francis Story
세존께서 아난다에게 "아난다야, 이제 쿠시나라로 가자"라고 말씀하자, 아난다는 "스승이여 그리하소서"라고 답했다......[중략].....쿠시나라의 살라(Sala) 숲에 도착한 붓다는 아난다에게 “아난다야, 한 쌍의 살라나무 사이에 침상을 북쪽으로 향하도록 놓도록 해라. 피곤하니 누워야겠다.” 아난다는 붓다의 뜻대로 침상을 준비했다.......[중략]....그때 세존은 우협으로 사자처럼 웅크리고 (사자와 獅子臥 siha-seyyam)를 하고 한 발을 다른 한 발에 포갠 채 정념(正念 sato)/정지(正智 sampajano) 하여 있었다....[후략] -- 팔리어 {마하-파리니르바나 수트라 / 열반경} / 번역: 최광민
앞서 인용한 이븐 바다와야가 묘사한 '유다사프' (봄베이판에선 '유자시프')의 임종장면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지명이 좀 이상하다. 불교의 {열반경}에 따르면 고타마 싯달타는 여러 해 동안 여러 곳을 여행하며 설법을 한 후 고향인 "카필라성 (Kapilavastu)"으로 돌아가던 중, 말라족이 다스리는 "쿠시나라"에서 제자인 "아난(다)"의 돌봄 가운데 열반에 든다. 팔리어 "쿠쉬나라"는, 세상을 떠난 붓다의 시신이 화장 때까지 살라(Sala trees) 나무 사이에 안치되어 수제자 "카쉬야파 (=마하가섭)"를 기다리며 일 주일 간 뉘어져있던 곳의 지명이다. 아랍어 원본에서는'카필라바스투'가 '사울라바트'로, '쿠시나라'가 '카쉬나라'로, "아난"이 "아야바드"이다.
그런데 왜 뜬금없이 19세기 인도 봄베이 아랍어 판에서는 아랍어 원본의 '카쉬나라'가 '카슈미르'가 되었는가? 산스크리트/팔리어 원본의 '쿠시나라'와 아랍어 원본의 '카쉬나라"는 (현재 지명은 쿠쉬나가르, Kushnagar) 네팔 아래 쪽 동북 인도의 같은 지역이지만, 이 둘과 파키스탄에 인접한 서북인도 '카쉬미르'는 전혀 다른 지역이며, 또한 고타마 붓다 일대기를 담은 산스크리트어 판본에는 고타마 붓다의 마지막 생애와 카쉬미르를 연결하는 고리는 등장하지 않는다. 짦게 말해 고타마 붓다는 '카쉬미르'가 아닌 '쿠시나라'에서 입멸했다.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오류를 뜻하는지를 지도 상에서 확인해 보자. 고타마 싯달타가 한 사람이라면 이처럼 멀리 떨어진 두 지역에서 동시에 입멸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구글 지도 / 편집: 최광민
그럼 원작에도 없는 "카쉬미르"가 어쩌다 등장하게 된 것인가?
우선, 힌두스탄 지역에는 페르시아 판에 영향을 받은 "유자사프" 전설이 탈-불교화된 전설의 형태로 최소한 18세기 이전부터 구전되고 었었던 듯 하다. 또한 이 이야기의 한 아랍어 판본이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던 인도 무굴제국에 도입되었고, 1880년대에 영국령 봄베이 (현, 뭄바이)에서 출판된 것이 일반에 널리 퍼진 형태의 판본이었다.
문제는 이 봄베이 판의 식자오류였다. David Marshall Lang은 1960년대에 발표한 연구를 통해, 아랍어 판에 등장하는 "카쉬미르에서 죽었다는 유자사프" 이야기는 1886-7년 인도 봄베이에서 인쇄된 아랍어 판의 식자오류에서 처음 등장하게 되었다는 명쾌한 증거를 제시했다. 이 봄베아 아랍어 판본에서 드디어 "유자사프"가 "카쉬미르"에서 죽은 것으로 처음 등장한다.
그럼 어쩌다가 팔리어/산스크리트어 "쿠쉬나라"에 대응하는 아랍어 "카시나라"가 이 봄베이 판에서는 "카쉬미르"가 된 것일까? 두 단어의 아랍어 철자를 보면 식자오류가 난 곳을 가늠할 수 있다.
우선 아랍문자로 적은 "카시나라"다.
كوشينر
다음은 1886년 봄베이 아랍어 판본에 등장하는 "카쉬미르"다.
كشمير
어디서 조판자가 오독으로 인한 조판오류를 일으켰는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유자사프에서 유즈아사프, 유즈+아사프,..., 마침내 이사/예수까지
Lang의 연구가 밝힌 바 처럼, 바로 1880년대 인도 봄베이에서 처음으로 인도 서북부 지방의 "카쉬미르"와 "유자사프/유자시프"란 인물이 연결되는 일이 발생한다. 그래서 갑자기 붓다의 입멸 이야기의 배경이 동북인도가 아닌 서북인도 카쉬미르로 옮겨진다.
여기서 이 설화가 다시 한번 진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서북인도를 거점으로 한 19세기 이슬람 이단인 "아마디야 이슬람"을 창교한 재림 예수이자 재림 이맘 마흐디인 미즈라 굴람 아흐마드다.
이슬람 이단 아마디야 이슬람의 교조, 자칭 재림 예수, 재림 이맘 마흐디인 Mirza Ghulam Ahmad
미즈라 굴람 아흐마드는 자신의 근거지인 카쉬미르 일대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십자가 처형 후 예수는 죽지않았고 (부활한 것이 아니라) 기적적으로 소생해 사라진 이스라엘의 10부족이 뿌리를 내린 서북인도 카쉬미르 지역에 왔고, 거기서 죽었다는 결론을 이끌어 냈다. 이런 연결을 하기 위해 그는 그 지역 슈리나가르의 로자 발 (Roza Bal) 사당에 안장되어 있는 지역 성인 "유즈아사프"를 끌어들였다. 왜? 왠지 아랍어 봄베이 판에 오기되어 등장하는 "카쉬미르"에서 죽은 "유자사프"가 "유즈아사프"처럼 들리지 않는가?
잠깐 여기서 아흐마드의 비약과정을 한번 정리해 보자.
- 인도 서북부 카쉬미르에서 천수를 누리고 별세한,
- 유자사프?
- 유자사프 Yuzasaf ?
- 유즈+아사프 Yuz + Asaf ?
- 유즈 Yuz? (아랍어) 이사 Isa ?
- ..............혹시 (아람어) 예수 Yeshua ?
그런데 "유즈" 아사프는 원래 아람어 "예수(아)"란 아람어 이름과 관련있던게 아니라, 원래 산스크리트어 "보디사트파"의 "보디"가 페르시아어와 아랍어를 거치면서 "부드/부다"로 표기되어 "부드사프"가 된 후, 인도에 다시 흘러들어온 후, 인도에서 다시 철자와 발음이 크게 변형되어"유즈"가 된 후 최종적으로 "유즈"와 "아사프"가 분철되어 생긴 해프닝일 뿐이다. 여기서 "유즈"가 분철된 이유는, "예수" 혹은 예수의 아랍어 어형인 "이사"에 억지로 끼워맞추기 위한 것이다.
로자 발 사당에 묻혀있는 "유자사프" 혹은 아마디야 식으론 "유즈 아사프"란 인물의 정체는 매우 모호하다. 카쉬미르 지역은 14세기 이슬람 지배권에 들어오기 전에 불교와 시바파 힌두교가 차례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곳이었다. 이슬람이 들어오기 전에도 사당은 존재했던 듯 하다. 그러므로 이 인물은 불교도였거나 혹은 힌두교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스리나가르의 로자 발 사당에 묻힌 인물의 이름을 처음으로 명시한 것은 스리나가르 지역의 이슬람 수피이자 지역 역사가인 카와자 무함마드 아잠 (Khwaja Muhammad Azam)이 1747년에 출판한 {카쉬미르 역사 Wagi'at i Kashmir} 혹은 {아잠의 역사서 Tarikh Azami} 불리는 책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로자 발에 묻힌 인물이 타지 출신의 예언자이자 귀인인 "유자수프 Yuzasuf"라고 (두 단어가 아닌) 한 단어로 적었다. 이 책은 1747년 페르시아어로, 1846년에 우르두어로 출판되었다. 이 기록 이전에 로자 발에 묻힌 인물에 대한 신뢰할 만한 정보는 거의 없으며, 사실은 아마디야 이슬람이 발흥해서 미즈라 굴람 아흐마드가 이 사당을 "예수의 무덤"으로 지목하기 전까진 해당 지역에서조차 그리 알려진 장소도 아니었다.
잘 알려져있지는 않지만, 사실 예수의 "잃어버린 17년 간의 기록"을 티벳에서 찾아냈다고 주장한 니콜라스 노토비치도 1887년에 바로 이 스리나가르를 두차례 경유해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그 유명한" {이사전}에서 스리나가르에서 예수의 무덤에 관련된 풍문을 들었다는 보고를 전혀 적지 않는다.
참고: http://kwangmin.blogspot.com/2011/08/blog-post_5980.html
아울러 노토비치의 진술을 검증하기 위해 1895년 직접 히미스 사원을 답사하고 주지를 인터뷰한 제임스 아치발드 더글라스 역시 스리나가르를 통과했지만, 그 역시 스리나가르에서 예수의 무덤 같은 풍문을 들었다는 보고를 전혀 하지 않았다.
왜 그는 이토록 중요한 정보를 누락한 것인가?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노토비치가 스리나가르를 방문했던 1887년과, 더글라스가 방문했던 1895년은, 미즈라 굴람 아흐마드가 로자 발의 주인공이 "예수"라고 선언한 해로부터 각각 12년 전과 4년 전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때 만해도 아직 "스리나가르 로자 발의 예수 무덤"의 전설이 생겨나기 전이었단 뜻이다.
https://archive.org/stream/JesusInIndiaMirzaGhulamAhmad/Jesus%20in%20india#page/n1/mode/2up
Mizra Ghulam Ahmad, {Jesus in India}
(비약이 심하지만 읽기에 재미는 있는) 미즈라 굴람 아흐마드의 책을 읽어보면, 예수가 카시미르에서 죽었다는 - 정확히는 로자 발 사당에 묻혀있는 유자사프란 인물이 예수라는 - 더 다양한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글에서 하나씩 설명하고 반박하도록 하겠다.
이 "유자수프"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그런데 혹시 아는가? 로자 발에 묻혔다는 "유자수프" 혹은 "유자사프"는 그저 이슬람이 들어오기 전에 스리나가르로 이주해 살았던 타지 출신의 덕망높은 불교도 "보살"이었을지도. 그러니까 이 로자 발에 누워있는 "유자수프" 역시 {발람과 요사파트}의 해프닝처럼 "인명"이 아니라 그저 "보살/보디사트바"가 부다사프 > 유다사프 > 유자수프로 변형되었을 뿐이었을지도 모른단 뜻이다.
1891년 무렵까지만해도 메시아이자 (시아파의 사라진 마지막 이맘인) 마흐디를 자처했던 아흐마드는 점차 자신이 이슬람교의 창교자 무함마드의 재림이라고 주장했는데, 너무 많은 무슬림들의 반감을 사자 이번에는 재림 예수를 자처했고 1904년에는 힌두교의 신 크리슈나의 화신임을 선언하기도 했다. 이런 아흐마드의 숙적은, 같은 시기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미국과 호주 등에서 활약한 부흥사이자 재림 엘리아를 자처했던 (사이비) 종교가 존 알렉산더 도위 (John Alexsander Dowie)였다.
"재림 엘리아" John Alexander Dowie (출처:Wikimedia Commons)
임박한 예수의 재림을 준비할 재림 엘리아로 자처한 도위는 재림예수가 이슬람을 멸망시킬 것을 호언장담했는데, 이에 맞서 아흐마드는 자신이야말로 (영적인) 재림 메시아이며 따라서 누가 진짜 신의 사도인지는 기도대결을 공개적으로 해보자고 제안했다. 1903년에 시작된 이 대결은 그저 편지를 통한 기싸움으로만 끝났다. 1907년엔 "재림 엘리야" 도위가, 1908년엔 "재림 예수" 아흐마드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 맺음말
한 10여 년 전 쯤의 일이다. 파키스탄 출신의 물리학과 대학원생 가운데 아마디야 무슬림을 만난 적이 있었다. 본인이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그저 "이슬람"으로만 밝혔기 때문에, 나는 그가 파키스탄의 주류파인 수니 아니면 소수파인 시아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와 어느날 기독교와 이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가 예수/이사와 관련된 이슬람 정통교리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가령,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고 (이것은 다른 무슬림들도 믿는 바다), 기적적으로 소생한 후 서북인도에 와서 여생을 살다 죽었다는 것이다 (수니/시아파 무슬림은 물론 이를 믿지 않고 대신 승천했다고 믿는다). 게다가 예수와 (시아파의 마지막 이맘인) 이맘 마흐디는 19세기 말에 어떤 '아흐마드'를 통해 재림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다른 무슬림 학생들이 그를 경원시하는 것을 알고 물어보니, 그가 바로 말로만 듣던 "아마디야 무슬림"이었던 것이다. 물론 파키스탄 정부 뿐 아니라 대개의 이슬람 국가들은 아마디야 이슬람을 이단으로 간주해 탄압한다. 더 정확히는 이슬람교로조차 인정하지 않고 이교도로 간주한다. 아마디야 무슬림이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단정짓지는 말자. 1979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압두스 살람은 아마디야 무슬림 가운데 대표지성이었다.
"예수가 청소년 기에 인도에 다녀왔다"라거나 "여생을 서부 인도 카쉬미르에서 보내고 죽었다"는 식의 주장을 인터넷에 유포하는 사람들 가운데 과연 얼마나, 이 주장의 원 출처가 이슬람 이단의 재림예수/재림이맘 마흐디인 미즈라 굴람 아흐마드가 조합한 것이란 것을 알고 있을까?
파키스탄 간다라와 카쉬미르를 오가며 "예수, 간다라 도래설"을 더 불교적으로 발전시켜 한국에 널리 전파한 민희식씨는 왜 이런 점을 보다 명시하지 않을까? 이 주장이 그 지역 아마디야 무슬림들의 주장이란 것을 모르지 않을텐데 말이다.
물론... 모르신다면 더 큰 일이다.
판단은 각자의 몫.
草人
Scientist. Husband. Daddy. --- TOLLE. 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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