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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야훼 vs. 아후라마즈다 #1: 제1성전기 유대교에서 바빌론 유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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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草人 최광민 2011-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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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최광민] 야훼 vs. 아후라마즈다 #1: 제1성전기 유대교에서 바빌론 유수까지

요약

제2성전기 유대교는 바빌론 유수를 전후하여 바빌로니아/메소포타미아 종교 혹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아 재구성된 것인지를 검토해 본다.

순서
  1. 제1성전기 유대교의 재구성
  2. 패망 직전 남 유다 왕국의 종교적 지형
  3. 제2성전기 유대교로 진화하는 세가지 가설


제1성전기 이전의 성막, Wikimedia Commons


# 제1성전기 유대교의 재구성

{창세기}가 묘사하는 시대에서 부터 기독교가 출현한 AD 1세기 까지의 유대교의 역사를 재구성해 본다면, 심지어 유대교 측의 자료인 {히브리 정경} 혹은 일명 {타나크 TaNaK}에만 근거해 보더라도 히브리인의 "야훼 (여호와)" 신앙이 변화를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립적인 학문적 입장에서 이를 (1) "종교의 진화"로 볼 것인지, 혹은 종교적 입장에서 (2) "계시의 점진적 완성"으로 볼 것인지의 판단은 각자의 몫.

유대인들이 자신의 직접적 조상으로 여기는 아브라함의 시대를 BC 1800년 언저리로 잡고 그 이후 {히브리 성서}와 일부 {구약 외경}이 다루는 약 1500년 동안의 히브리/유대인 역사가 다 후대의 "창작"이라고 주장해 볼 수도 있겠으나, 이 글에서는 일단 {히브리 정경}이 다소 간의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만 논의를 진행해 보겠다. 이 문서들이 "역사적 사실"이든 혹은 "후대의 윤색"이든지 간에, 적어도 이 문서들의 내용을 히브리/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라고 여겨왔고  유대교 또한 그 문서들을 바탕으로 성립되어 유지되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유대교 - 정확히는 "야훼 신앙" - 의 "다단계 발전"이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서 먼저 정리해 보자.

{창세기}에 따르면 고대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의 직접적인 조상 아브라함이 칼데아, 즉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도시국가 중 하나인 우르 출신이라고 여겼다. 이곳은 수메르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로서, {창세기}의 설화들 속에서 수메르의 그것과 유사한 모티프가 발견되는 이유는 아브라함과 그의 일족이 우르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고향의 설화를 함께 가지고 와 "독립적으로 전수"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문화권이 공통적인 설화를 공유하는 것을 놓고 한 문화권이 다른 문화권을 "표절"이나 "차용"했다고 보는 건 지나치게 초보적인 접근법이다. 가령, 오늘날 서쪽의 소아시아에서 동쪽의 중국 서부까지 넓게 퍼져있는 다양한 투르크족의 후손들에게서 유사한 설화가 등장하는 것은 동/서 투르크 방계부족들이 누구를 표절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 조상들이 공통 설화를 가지고 이동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 공통조상을 가진 설화적 모티프들은 현지에서 독자적인 변형을 겪는다.

참고:

{창세기}에 따르면, 히브리인들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하와의 세번째 아들인 셋의 아들 에노스가 신을 "야훼"란 이름으로 불렀다고 보았다. 즉, '야훼'란 "이름"은 인류가 시작되고 삼대 째 (아담 - 셋 - 에노스) 시절에서야 인간에게 처음 알려진 셈이다.

아담이 다시 아내와 한자리에 들었더니 아내가 아들을 낳고는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죽은 아벨 대신 이제 또 다른 아들을 주셨구나." 하며 이름을 셋이라고 지어주었다. 

וּלְשֵׁת גַּם־הוּא יֻלַּד־בֵּן וַיִּקְרָא אֶת־שְׁמוֹ אֱנוֹשׁ אָז הוּחַל לִקְרֹא בְּשֵׁם יְהוָֽה׃ פ

셋도 아들을 얻고 이름을 에노스라고 지어 불렀다. 그 때 에노스가 비로소 야훼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였다 -- 한국어 공동번역, {창세기}

하지만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보면, 이 "야훼"란 이름은 어느 순간부터 잊혀져 히브리인들이 자신들의 직접적인 조상이라고 공인하는 메소포타미아 (칼데아) 우르 출신 족장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3대 시절 조차도 그들은 자신들의 신을 "야훼"란 이름이 아니라 그저 "엘-샤다이 (בְּאֵל שַׁדָּי)" 즉 "전능한 신"이라 호칭한 듯 하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조차 신은 "야훼"란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진 않았기 때문이다.
 
וַיְדַבֵּר אֱלֹהִים אֶל־מֹשֶׁה וַיֹּאמֶר אֵלָיו אֲנִי יְהוָֽ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야훼다.

וָאֵרָא אֶל־אַבְרָהָם אֶל־יִצְחָק וְאֶֽל־יַעֲקֹב בְּאֵל שַׁדָּי וּשְׁמִי יְהוָה לֹא נוֹדַעְתִּי לָהֶֽם׃

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전능의 신 (=엘-샤다이)  בְּאֵל שַׁדָּי 으로 나를 드러낸 일은 있지만 야훼라는 이름으로 나를 알린 일은 없었다.   --- 한국어 공동번역, {창세기} 6장

{창세기}에 딱 3절에만 등장하다가, 이후 다윗의 {시편}을 거쳐 제2성전기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엄청난 신학적 의미를 가진 인물로 재등장하게 되는 도시국가 살렘의 왕이자 제사장인 멜키세덱과 아브라함의 관계를 보면 이 부분이 더 명확해 진다.

훗날 다윗이 자신의 수도로 삼는 예루살렘 일대를 지배했던 도시국가 살렘의 지배자 멜키세덱의 신은 "지극히 높은 신", 즉 "엘 엘리욘 לְאֵל עֶלְיוֹן" 이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위해 그가 "엘 엘리욘"에게 축복을 기원할 때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그에게 바쳤다. 그리고 훗날 다윗은 멜키세덱이 통치하였고 이후 여부스족이 살던 예루살렘을 빼앗아 수도로 삼았고, 그의 아들 솔로몬은 예루살렘의 시온산에 "야훼"에게 봉헌된 첫 성전을 세웠다. 즉, 히브리인들은 멜키세덱의 신 "엘 엘리욘"과 아브라함의 신 "엘 샤다이"를 동일한 신으로 여겼다는 뜻이다.

וּמַלְכִּי־צֶדֶק מֶלֶךְ שָׁלֵם הוֹצִיא לֶחֶם וָיָיִן וְהוּא כֹהֵן לְאֵל עֶלְיֽוֹן׃

살렘 왕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엘-엘리욘)을 섬기는 사제였다. 

וַֽיְבָרְכֵהוּ וַיֹּאמַר בָּרוּךְ אַבְרָם לְאֵל עֶלְיוֹן קֹנֵה שָׁמַיִם וָאָֽרֶץ׃

그는 아브람에게 복을 빌어주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내리소서.

וּבָרוּךְ אֵל עֶלְיוֹן אֲשֶׁר־מִגֵּן צָרֶיךָ בְּיָדֶךָ וַיִּתֶּן־לוֹ מַעֲשֵׂר מִכֹּֽל׃

그대의 원수를 그대의 손에 부치신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어라." 아브람은 자기가 가진 것 전부에서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 --- 창세기 14장 18-20절(공동번역)

여기서 놓치기 쉬운 포인트는 멜키세덱의 이 신 "엘 엘리욘"이 "하늘과 땅을 만든" 창조주이란 점이다. 고대 종교들에서 그 신의 지위를 살필 때는 그가 "창조주"인지 아닌지가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엘'은 칭호 (epithet)에 해당하며 그 자체로 신명이랄 수는 없다. 

모세가 마주한 불타는 듯한 떨기나무에 나타난 신은 우선 자신을 모세의 '선조'들이 믿던 신,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엘로힘 (אֱלֹהֵי)"이라 밝힌다.

וַיֹּאמֶר אָנֹכִי אֱלֹהֵי אָבִיךָ אֱלֹהֵי אַבְרָהָם אֱלֹהֵי יִצְחָק וֵאלֹהֵי יַעֲקֹב וַיַּסְתֵּר מֹשֶׁה פָּנָיו כִּי יָרֵא מֵהַבִּיט אֶל־הָאֱלֹהִֽים׃

(야훼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선조들의 하느님/엘로힘 אֱלֹהֵי אָבִיךָ 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엘로힘  אֱלֹהֵי , 이사악의 하느님/엘로힘 אֱלֹהֵי , 야곱의 하느님/엘로힘 וֵאלֹהֵי 이다." 모세는 하느님 뵙기가 무서워 얼굴을 가렸다....(중략)....  --- 한국어 공동번역, {창세기} 3장

이집트에 묶여있던 당시 히브리인들 역시 자신들의 "엘-샤다이"을 "야훼"란 이름으로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모세는 자신 앞에 나타난 이 "엘로힘" 혹은 "엘-샤다이"를 동족들에게 소개할 때 누구라 해야 하는가를 신에게 묻는다.



그때 비로소 신은 자신을 '나는 나', 즉 "예흐예 아셰르 예흐예 (אֶֽהְיֶה אֲשֶׁר אֶֽהְיֶה)", 혹은 "야훼 엘로힘 (יְהוָה אֱלֹהֵי)" 이라 스스로 호칭한다.

모세가 하느님 (=엘로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하느님의 (원어: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וַיֹּאמֶר מֹשֶׁה אֶל־הָֽאֱלֹהִים הִנֵּה אָנֹכִי בָא אֶל־בְּנֵי יִשְׂרָאֵל וְאָמַרְתִּי לָהֶם אֱלֹהֵי אֲבוֹתֵיכֶם שְׁלָחַנִי אֲלֵיכֶם וְאָֽמְרוּ־לִי מַה־ שְּׁמוֹ מָה אֹמַר אֲלֵהֶֽם׃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 (אֶֽהְיֶה אֲשֶׁר אֶֽהְיֶה)"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אֶֽהְיֶה )' 하고 말씀하시는 그분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לֵךְ וְאָֽסַפְתָּ אֶת־זִקְנֵי יִשְׂרָאֵל וְאָמַרְתָּ אֲלֵהֶם יְהוָה אֱלֹהֵי אֲבֹֽתֵיכֶם נִרְאָה אֵלַי אֱלֹהֵי אַבְרָהָם יִצְחָק וְיַעֲקֹב לֵאמֹר פָּקֹד פָּקַדְתִּי אֶתְכֶם וְאֶת־ הֶעָשׂוּי לָכֶם בְּמִצְרָֽיִם׃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일러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 (=엘로힘) 야훼 (יְהוָה אֱלֹהֵי)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 이것이 영원히 나의 이름이 되리라. 대대로 이 이름을 불러 나를 기리게 되리라.  -- 한국어 공동번역, {창세기} 3장

따라서 {창세기}에 따르면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의 신 '엘로힘' 혹은 '엘-샤다이'에 대응하는 "야훼"란 이름을 "재발견"한 셈인데, 그래서 "야훼 엘로힘 (יְהוָה אֱלֹהֵי)"이란 용어는, "엘로힘이신 야훼" 혹은 "야훼는 엘로힘이다"란 의미를 가지게 된다. 보다 보편적 의미의 "엘로힘"이 "야훼"란 이름으로 구체화 된 것이다. 보통 종교사적으로 보면 부족신이 보편신으로 "확장"되는 반면, 이 경우는 보편신 개념이 구체적인 신으로 부족화되는 경우라고도 볼 수 있다.

{히브리 정경}에 따르면 이집트를 떠나 카나안에 정착한 히브리인들은, 청동기 부족연맹체가 선출/인준한 사사/판관들이 위기상황에서 일시적으로 부족연맹체의 전권을 대행받는 시대를 거쳐 사울/다윗 시대에 처음으로 군주제 왕국을 건설한 시점까지, 레위 부족 출신의 제사장/사제들이 성별된 천막 (성막) 안에 야훼 신앙을 상징하는 성궤를 모신 지성소를 두고 이를 신앙을 구심점으로 삼았다.

하지만 {히브리 정경}에 따르면, 모세 이전부터 사사/판관 시대를 거쳐 사울/다윗 왕조 성립 전후, 그리고 후대의 북 이스라엘이나 남 유다왕국의 이스라엘인들이 "오직 야훼"만을 "절대적 유일신"으로 섬기지는 않았다. "야훼 이외에 다른 신격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는" 이런 시대는 아주 가끔씩 존재했을 뿐이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선대 다윗이 선주민 여부스족에게서 빼앗은 예루살렘에 첫번째 야훼 성전을 건립했다. 이를 "제1성전"이라 부르는데 이때 유대교는 이전의 부족종교 성격에서 (명목상) 국가종교의 형식으로 변모된다. 이로부터 예루살렘의 제1성전이 파괴될 때까지의 기간을 "제1성전기"라 부른다.

이때 제의 위주의 제1성전기 유대교가 일사분란하게 통일된 형태로 지속되었다고 보기는 매우 곤란하다. 그 이유는 {히브리 정경}의 역사서에 해당하는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 {역대기}를 읽어봐도 금새 알 수 있는데, 제 1성전기 유대교는 거의 대부분의 시기 동안 모세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있었고, 이것이 이스라엘과 유다왕국이 멸망한 주된 원인이라고 {히브리 정경}은 반복해서 가르친다.

당시의 유대교는 예루살렘의 야훼 성전에서 시행되는 제사들이 중심이 된 제의종교였기 때문에 솔로몬의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에서 멀어질 수록 야훼를 절대적 유일신으로 보는 신앙이 약화되거나 변형되는 패턴이 나타났을 것으로 보인다. 카나안 토착종교 영향도 있지만 (e.g. 바알/아세라), 히브리인들은 모세의 영도 하에 있을 때도 이집트에서 가져온 "금송아지" 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심지어 모세의 형이자 최초의 유대교 제사장/사제인 아론이 이를 묵인하기 까지 했다. 이 '금송아지 숭배'는 솔로몬 이후 10개 부족연맹인 북-이스라엘과 2개 부족연맹인 남-유대왕국으로 분열된 이후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가령, {열왕기} 상권 12장에 보면, 솔로몬 사후 2부족 연맹체인 남 유다와 10부족 연맹체인 북 이스라엘이 분리될 때, 북 이스라엘의 초대 군주인 여로보암 1세는 (BC 922년 경) 야훼성전이 남 유다왕국의 근거지인 예루살렘에 있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는 북 이스라엘 왕국이 남 유다왕국에 종속될 것이라 판단하여 베델과 단에 산당을 세우고 금송아지 우상을 봉헌하고 레위부족이 아닌 다른 부족에서 그 산당들의 제사장을 뽑아 임명했다. 

아합으로 대표되는 북 이스라엘 오므리 왕조의 경우 페니키아에서 수입한 바알을 대놓고 숭배 했고, 아합 왕가를 제거하고 왕이 되는 예후 시절에 바알/아세라 신앙이 금지되고 다시 야훼신앙을 국가적으로 백성들에게 다시 강조한 정도다. 그럼에도 배타적 야훼 신앙의 회복을 외친 대표적 선지자/예언자들인 엘리야와 엘리사는 북 이스라엘 출신으로 거기서 활동했다.



금송아지 숭배, Wikimedia Commons


따라서 당시 북 이스라엘 지역에서 발굴되는 유물 가운데 다신교적 암시, 특별히 야훼와 다른 신격이 함께 묘사된 유물을 예로 들면서 "야훼 신앙은 원래는 절대적 유일신교가 아니었다"라고 주장하는 것 약간 넌센스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여기서의 트릭은 "유대교"의 "정의"다.

당시 유대교를 (1) 야훼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사제들이 주축이 된 종교 만으로 한정해 말할지 (2) 아니면 당신 유대아 일대의 남/북 이스라엘인들이 광범위하게 믿던 느슨한 형태의 혼합적 종교를 말할지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장면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때의 "유대교"란 용어는 "포괄적 용어 umbrella term"로 이해되어야 한다. 가령, 심지어 예수 당시의 유대교를 구성했던 사두개파, 바리새파, 엣세네파는 보는 각도에 따라서 과연 이들을 "유대교"라는 한 용어로 묶을 수 있을지 헷갈리는 경우가 있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힌두교"란 말은 인도 아대륙서 믿어지고 있는 "어느 정도 유사한 신앙들"을 뭉뚱그려 말하는 용어지, 어떤 단일한 종교체계를 말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 패망 직전 유다 왕국의 종교적 지형

유다와 벤야민 2부족이 주축이 된 남부의 유다왕국은 그 수도 예루살렘에 야훼 성전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북부 10부족의 이스라엘 왕국보다 상대적으로는 주변 다신교의 영향을 덜 받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혼합적인 성격의 종교가 남 유다왕국의 기층사회에 힘을 발휘했고, 아마 북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유입된 북부의 인구들로 인해 더 넒게 그 패턴이 나타났을 것으로 여겨진다.

가령, 유다 왕국 말기인 BC 700년대 전반부에 집권한 히스키야의 선왕인 아하즈는 페니키아의 바알 뿐 아니라 자식을 인신공양하는 몰렉도 숭배했다.

아하즈는 이십 세에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십 육년간 다스렸다. 그는 태조 다윗처럼 야훼의 눈에 드는 바른 정치를 펴지 못하고 이스라엘 왕들의 전철을 밟아 우상을 부어 만들어 바알들을 섬기기까지 하였다. 그는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면전에서 쫓아 낸 민족들의 역겨운 풍속을 본받아 벤힌놈 골짜기에서 친자식들을 불살라 제물로 바쳤으며 산당과 산마루에서, 또 우거진 나무 아래에서 분향하고 제사를 지냈다. ---- 한국어 공동번역, {역대기} 하편 28장

선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히스키야가 종교개혁을 단행하면서 취한 조치를 보면 당시의 유다왕국의 주민들이 어떤 종교지형 가운데 살았는가를 보여준다.

히스키야는 이렇게 지시한다.

이렇게 말하였다. "레위인들은 내 말을 들어라. 너희는 이제 목욕재계하고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의 전을 깨끗이 하여라. 성소에서 부정한 것을 쓸어 내어라. 우리 선조들은 우리 하느님 야훼께 반역하여 그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였다. 야훼를 저버리고 그가 계시는 곳을 바라보기도 싫어하여 등을 돌리고 말았다. 현관 앞 문들을 봉하고 등을 끄고 성소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분향하지도 않았으며 번제도 드리지 않았다.

사제들은 야훼의 성전 안을 깨끗하게 하려고 들어 갔다. 사제들이 야훼의 성전 본관 안에 있는 부정한 것을 모두 야훼의 성전 밖으로 몰아 내면, 레위인들은 그것을 성 밖 키드론 골짜기에 가져다 버렸다. 제때에 과월절을 지키지 못한 것은 부정을 씻고 하느님께 몸바친 사제가 적었고 백성이 예루살렘에 미처 모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우선 예루살렘에 있는 제단들을 헐고 분향단을 모조리 뜯어내어 키드론 골짜기에 가져다 버렸다. 이 일이 끝나자 거기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유다 성읍들을 찾아 다니며 (기둥형) 석상을 부수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내고 제단과 산당들을 허물었다.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 므나쎄에서 이것들을 모두 없애버린 다음 온 이스라엘 백성은 각기 자기네 농토가 있는 성읍으로 돌아갔다.   ---- 한국어 공동번역, {역대기} 하편 29장

동일한 조치를 {열왕기} 하편 18장은 이렇게 묘사한다. 히스키야는 그 무렵 우상이 되어버린 모세의 구리뱀 조차 파괴시켰다.

아하즈의 아들 히즈키야가 유다 왕이 된 것은 이스라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제삼년의 일이었다. 그는 이십오 세에 즉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간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는 즈가리야의 딸로서 이름을 아비라 하였다. 그는 그의 선조 다윗이 그러하였던 것같이 야훼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다. 그는 산당들을 철거하고 석상들을 부수고 아세라 목상들을 찍어버렸다. 그리고 모세가 만들었던 구리뱀을 산산조각 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때까지 느후스탄이라고 불리우던 그 구리뱀에게 제물을 살라 바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를 의지하였다. 유다 왕들 가운데 전에도 후에도 그만한 왕이 없었다   --- 한국어 공동번역, {열왕기} 하편 18장.




히스키야로부터 100년 정도 지난 후인 BC 600년대 초반에 집권한 남 유다 왕국의 사실상 마지막 왕인 요시아 역시 배타적 야훼 신앙을 다시 재선포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요시야의 개혁조치가 그 이전 히스키야의 개혁과 비교해 가장 흥미로운 점은, 요시야의 개혁이 "모세의 율법을 적은 책"의 발견에 따라 그 책의 내용을 "수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당시 야훼 성전의 대사제이던 힐키야 조차도 이 책을 "우연히 발견"했고 그 내용도 잘 몰랐다는 걸 알 수 있다. (이힐키야가 배타적 야훼 신앙을 전면에 내세우기 위해 위조된 문서를 올렸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아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당시 야훼 성전은 그 경내에 바알과 아세라나 태양신 등을 섬기는데 사용된 각종 성물들이 설치되고, 심지어 아세라 종교의 의례와 연계되어 몸을 팔던 남창들이 거주하기 까지 하는 상태로, 당시의 야훼 신앙과 그 의례는 {모세오경/토라}과 비교할 때 심각하게 오염된 수준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역대기} 하편 34장의 내용이다.

요시야는 팔 세에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삼십일 년간 다스렸다. 그는 야훼의 눈에 들게 바른 정치를 폈다. 모든 일에 태조 다윗을 본받아 한 발짝도 어긋나지 않고 그대로 살았다. 

왕위에 오른 지 팔 년 되던 해 아직 나이 어린 몸으로 그는 태조 다윗의 하느님을 찾기 시작하여 십이년에는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부정한 산당과 아세라 목상, 새긴 우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치워 없애버리기 시작하였다. 그의 앞에서 사람들은 바알의 제단들을 뜯어내고 그 위에 올려놓았던 분향단들을 부수어버렸다. 그는 아세라 목상과 새긴 우상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가지고 그 우상들에게 제사 지내던 사람들의 무덤 위에 뿌렸고 사제들의 뼈를 그 제단 위에서 살랐다. 이렇게 하며 유다와 예루살렘의 부정을 벗겼다. 그는 므나쎄와 에브라임과 시므온 지방을 납달리까지 두루 돌아다니며 각 성읍에서 신전들을 허물었다. 온 이스라엘 땅에서 제단을 뜯어내고 아세라 목상과 새긴 우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때려부수어 가루를 만들고 분향단을 부수어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요시야가 나라와 성전을 깨끗이 하며 다스린 지 십팔 년이 되었다. 그는 아살리야의 아들 사반, 성주 마아세야, 요아하즈의 아들 의전대신 요아를 보내어 그의 하느님 야훼의 성전을 보수하게 하였다. 그 때 사람들이 하느님의 성전에 가져다 바친 헌금이 있었다. 므나쎄와 에브라임을 비롯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과 유다와 베냐민 사람들과 예루살렘 시민이 바치는 것을 성전문을 지키는 레위인들이 모아두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 돈을 대사제 힐키야에게 전하였다. 이 돈은 야훼의 성전 공사 감독의 손을 거쳐 야훼의 성전을 수리하고 복원하는 데 지불되었다.

대사제 힐키야는 야훼의 성전에서 헌금을 꺼내다가 모세를 거쳐 전해진 야훼의 법전을 찾았다. 힐키야는 곧 공보대신 사반에게 야훼의 성전에서 법전 찾은 일을 고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넘겼다. 사반은 그 책을 가지고 어전에 나아가 아뢰었다. "임금님의 신하들은 맡은 일을 잘 해내고 있습니다. 야훼의 성전에 있는 돈은 있는 대로 공사 감독들과 일꾼들에게 지불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뢴 다음 공보대신 사반은 대사제 힐키야에게서 책을 한 권 받았다고 아뢰고 그 책을 어전에 읽어 올렸다. 왕은 그 법전에 있는 말을 듣고 옷을 찢으며 힐키야, 사반의 아들 아히캄, 미가의 아들 압돈, 공보대신 사반, 시종 아사이야에게 영을 내렸다.

"
이번에 찾아낸 이 책에 있는 말대로라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이며, 살아 남아 있는 이스라엘과 유다인들은 어떻게 될 것인지 야훼께 가서 물어보시오. 우리 선조들이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야훼의 말씀을 지켜 그대로 살지 아니하였으니, 야훼의 무서운 진노가 진정 우리에게 내리고야 말 것이오."

힐키야 일행은 어명을 따라 궁중 예복을 책임진 살룸의 아내 여예언자 훌다에게로 갔다. 살룸은 하스라의 손자요 도크핫의 아들이었다. 그들이 예루살렘 신시가에 살고 있는 훌다를 찾아가서 이 일을 묻자, 훌다는 이렇게 말하였다. 

[중략]

왕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장로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왕은 온 유다 국민들과 예루살렘 시민, 사제들과 레위인들, 높고 낮은 백성을 모두 거느리고 야훼의 성전으로 올라가 야훼의 성전에서 찾은 언약법전을 읽어 조목조목 다 들려주었다. 그런 후에 기둥 있는 데로 올라가서, 야훼를 따르며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쳐 주신 계명과 훈령과 규정을 지키며 그 언약법전에 있는 계약 조문대로 살기로 야훼와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베냐민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서약시켰다. 그래서 예루살렘 시민은 그들의 선조들의 하느님과 맺은 계약대로 살게 되었다. 

요시야는 이스라엘에 속한 전지역에서 역겨운 우상들을 없애버리고 이스라엘에 사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하느님 야훼를 섬기게 하였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사람들은 그들의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를 배신하지 않았다.

[중략]

모든 일이 준비되어 그 날 야훼께 예배를 올릴 수 있었다. 요시야 왕의 명령을 따라 과월절 제물을 잡고 야훼의 제단에 번제물을 살라 바쳤다. 거기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때에 과월절을 지키고 칠 일간 무교절을 지켰다. 예언자 사무엘 때 이후로 과월절을 이렇게 지킨 일은 일찍이 없었다. 요시야가 사제들과 레위인들과 거기에 있는 온 유다인과 이스라엘인들과 예루살렘 시민들을 거느리고 지킨 이번 과월절 같은 축제는 일찍이 어느 왕도 지킨 일이 없었다. 이 과월절을 지킨 것은 요시야가 왕이 된 지 십팔 년 되던 해의 일이었다.   -- 한국어 공동번역, {역대기} 하편 34장




유사한 내용을 전하는 {열왕기} 하편 22장을 읽어보자.

요시아 제십팔년에, 왕은 므술람의 손자요 아살리야의 아들인 공보대신 사반을 야훼의 전으로 보내며 일렀다.

"대사제 힐키야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시오. '백성이 야훼의 전에 바친 헌금을 야훼의 전 문지기에게서 받아내어 야훼의 전 공사감독들에게 주어 수리 공사 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하시오. 목수와 돌 쌓는 사람이나 미장이에게 품값을 주고 수리하는 데 쓸 목재와 석재를 사도록 하시오. 그러나 일단 돈을 내준 다음에는 계산하지 마시오. 그들은 정직하게 일할 것이오."

대사제 힐키야는 야훼의 전에서 법전을 찾았다고 하며 그 책을 공보대신 사반에게 주었다. 그것을 읽은 공보대신 사반은 왕에게 나아가 왕의 신하들이 성전 안에 보관되어 있던 은을 쏟아 야훼의 전을 수리하는 공사 감독들에게 넘겨주었다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나서 공보대신 사반은 왕에게 "대사제 힐키야가 저에게 책을 한 권 주었습니다." 하면서 왕의 면전에서 크게 읽었다.

그 율법책의 내용을 듣자 왕은 자기의 옷을 찢었다. 그리고는 대사제 힐키야, 사반의 아들 아히캄, 미가야의 아들 악볼, 공보대신 사반과 시종 아사야에게 명하였다.

"이번에 찾아낸 이 책에 여러 가지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 나와 온 유다 백성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야훼께 나가 여쭈어보시오.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대로 하라고 하셨는데, 우리 선조들이 그 말씀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우리가 불길 같은 야훼의 진노를 사게 되었소."

대사제 힐키야와 아히캄, 악볼, 사반, 아사야는 여예언자 훌다를 찾아갔다. 훌다는 하르하스의 손자요 디크와의 아들인 의상담당관 살룸의 아내였다. 

[중략]

왕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들을 소집하였다. 왕은 유다 국민들과 예루살렘 시민들, 사제들과 예언자들, 높고 낮은 모든 백성들을 데리고 야훼의 전으로 올라가 야훼의 전에서 찾은 언약법전을 읽어 조목조목 다 들려주었다. 그런 후에 기둥 있는 데로 올라가서, 야훼를 따르며 마음을 다 기울이고 목숨을 다 바쳐 그의 계명과 훈령과 규정을 지켜 그 책에 기록되어 있는 언약을 이루기로 야훼 앞에서 서약하였다. 백성들도 모두 따라 서약하였다. 

왕은 대사제 힐키야와 부사제와 문지기들에게 명하여 야훼의 전 안에서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별을 섬기는 데 쓰던 모든 기구들을 치우게 하였다. 그는 그 기구들을 예루살렘 성 밖 키드론 벌판에서 불사르고 그 재를 베델로 가져갔다. 그는 또 유다 각 성읍과 예루살렘 인근 지역에 있는 산당들에서 제물을 살라 바치도록 유다 왕들이 세웠던 가짜 사제들을 파면하고, 바알과 해와 달과 성좌들과 하늘의 별들에게 제물을 살라 바치던 자들을 모두 파면하였다.

아세라 목상을 야훼의 집에서 들어내다가 예루살렘 성 밖 키드론 골짜기에서 불사르고는 가루로 만들어 공동 묘지에 뿌렸다. 왕은 또 여인들이 아세라 대신 음란을 피우던 남창의 집들을 야훼의 전에서 허물어버렸다. 

그는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사제들을 불러들이고 게바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전국에서 그들이 제사 드리던 산당들을 모두 부정한 곳으로 만들었다. 성문으로 들어가면서 왼쪽으로 성주의 이름을 따 여호수아의 문이라 불리는 문이 있는데 그 문 앞에 있던 염소 귀신들을 섬기는 산당을 헐어버렸다. 

산당들에 있던 사제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야훼의 제단에 올라가지 못하게 하였지만 그러나 다른 사제들과 함께 누룩이 들지 않은 떡은 먹게 하였다. 왕은 벤힌놈 골짜기에 있는 도벳을 부정한 곳으로 만들어 아무도 자녀를 몰렉에게 살라 바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 유다 왕들이
태양신을 모시는 말 동상을 야훼의 전 문 어귀에 있는 야훼의 전 내시 나단멜렉의 행랑채 곁에 세웠었는데 그것도 부수고 태양신이 타는 병거는 태워버렸다. 

그는 유다 왕들이 아하즈의 다락방 옥상에 세운 제단들과 므나쎄가 야훼의 전 안팎 뜰에 세운 제단들을 모두 헐어 가루로 만들어 키드론 골짜기에 뿌렸다.

또 왕은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시돈 사람들의 역겨운 아스다롯 여신상과 모압인의 역겨운 그모스 신상과 암몬인의 역겨운 밀곰 신상을 모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마주보는 그 멸망의 산 남쪽에 세웠던 산당들을 부정한 곳으로 만들었다. 석상들을 부수고 목상들은 토막을 내고 사람의 해골을 거기에 너저분하게 널어놓았다. 왕은 또한 이스라엘을 죄에 빠뜨린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베델에 세웠던 산당과 제단도 허물고 돌들을 부수어 가루를 만들었으며 아세라 목상은 태워버렸다.

요시아는 산 위에 공동 묘지가 있는 것을 보고 사람을 보내어 무덤 속에서 해골을 꺼내어 제단 위에 놓고 불살라 그 제단을 부정하게 하였다. 여로보암이 축제 때에 그 제단 앞에서 제사 드릴 때 하느님의 사람이 외친 야훼의 말씀이 이렇게 이루어졌다. 거기에는 그 하느님의 사람이 묻힌 무덤이 있었는데, 요시아는 그 무덤을 보고 저기 보이는 저 비석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 마을 사람들이 "유다에서 온 하느님의 사람의 무덤입니다.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임금님께서 베델의 제단을 이렇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그분을 건드리지 마라. 아무도 그 유해에 손을 대지 마라." 이 말을 따라 그의 유골은 사마리아에서 온 예언자의 유골과 함께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으므로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이스라엘 왕들은 사마리아의 여러 성읍 언덕마다에 산당을 세워 야훼의 속을 썩여드렸는데, 요시아는 베델에서 한 것처럼 그 산당들도 철거하였다. 그는 그 곳 산당들의 사제들을 모두 제단 위에서 죽여 사람의 해골과 함께 그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왕은 또 전국민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언약법전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너희 하느님 야훼께 감사하여 과월절을 지켜라." 그래서 지킨 과월절 축제는 일찍이 판관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나 왕들이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리던 어느 시대에도 없었던 것이었다. 예루살렘에서 야훼를 기려 과월절 축제를 지킨 것은 요시아 왕이 즉위한 지 십팔 년 되던 해의 일이었다.

요시아는 또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도깨비나 귀신을 불러 물어보는 자들과 가문의 수호신과 온갖 역겨운 우상들을 눈에 띄는 대로 쓸어버렸다. 

이렇게 하여 요시아는 사제 힐키야가 야훼의 전에서 찾아낸 책에 기록되어 있는 조문들을 시행하였다. 요시아처럼 야훼께로 돌아가 마음을 다 기울이고 생명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모세의 법을 온전히 지킨 왕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  --- 한국어 공동번역, {열왕기} 하편 22장




힐키야가 요시아에게 제출한 문서들이 위조된 것이 아니라면, 이 문서들은 {모세오경} 특별히 {신명기}에 해당하는 것이라 여겨지고 있으며, 많은 역사가들은, 그의 신명기 개혁운동 과정에서 {모세오경}과 {예언서}에 속한 "기존의" 여러 문서들이 정리/편집되거나 경전으로 확립된 것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제1성전기 "유대교"의 종교적 지형을 재구성 한다면, 모세가 정립한 배타적 야훼 신앙이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예언자들과 남 유다왕국의 예루살렘 솔로몬 성전의 "일부" 제사장들과 선지자/예언자를 통해 수 백년간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모세오경}에서 이탈한 형태의 비정통적 야훼 신앙 (가령, 예루살렘의 공식 야훼성전이 아닌 산당에서의 야훼 제사) 혹은 아예 우상숭배와 혼성된 (가령, 예루살렘 야훼성전 경내의 바알/아세라 + 태양신 숭배) 종교를 수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남 유다의 멸망 직전에 있었던 요시야의 개혁을 주도한 "예루살렘 야훼성전의 사제계급"과 그들에게 정화와 종교개혁 명분을 부여한 "모세의 율법서"가 왜 (1) 바빌론 유수기와 (2) 제2성전기의 유대교의 성격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는지를 일단 염두해두도록 하자.

요약해 보자면, 제1성전기와 제2성전기 "유대교"의 성격이 대비되어 보이는 이유는 (1) 제1성전기 유대교의 실태가 정통적인 배타적 야훼 신앙에 아울러 야훼 신앙을 기조로 한 혼합종교 성격의 "포괄적 개념"으로서 "느슨한" 유대교였던 반면, (2) 히스키야-요시야-바빌론 유수기 - 제2성전기의 "유대교"는 요시아의 개혁으로 일단 한번 크게 "정화"된 형태의 유대교가 패망한 남 유다왕국에서 포로로 강제이주된 예루살렘의 사제계급과 지배계급과 함께 바빌론으로 이동해 거기서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게 되었고, 결국 그 특정집단의 종교이데올로기가 70년 간 확장된 후 본토귀환과 함께 재이식되면서 두번의 "창시자 효과" 발생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해석, 혹은 보다 종교적으로 '정통적' 해석에서는 70년 간의 바빌론 유수는 모세가 가르친 야훼 유일신앙으로의 '강제회귀' 혹은 '강제정화' 과정이 된다.

물론 다른 관점도 가능하다.

이 경우, 히스키야와 요시아의 정화조치로 다시 주도권을 잡은 배타적 야훼 신앙을 가진 그룹이 바빌로니아와 유배를 나감으로써 강제로 정화되는 과정까지는 동일하다. 하지만 이때 또 다른 외부자극 (가령, "바빌로니아 종교" 혹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에 의해 다시 한번 "오염"되거나 혹은 "영향"받지는 않았을까? 바빌론 유수기과 그 이후에 그렇게 한 차례 더 진화된 변종 유대교가 귀환과 더불어 유대아 본토로 재이식 된 결과가 제2성전기 유대교를 형성한 것은 아닐까? 와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더 극단적인 해석도 가능하다.

앞서 말한 히스키야니 요시야니 하는 군주들의 개혁 이야기 뿐 아니라 유대교의 핵심 중 핵심이랄 수 있는 {모세오경} 조차 바빌론 유수기 혹은 그 이후 주변 종교의 모티프를 짜맞춘 허구적 "창작물"이자 프로파겐다일 뿐이라고 보는 견해가 그런 한 예이다.

제2부에서는 이런 관점들을 상호 비교해 보겠다.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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