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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타고르와 "동방의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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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05-05-07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제목

타고르와 "동방의 등불"

순서
  1. 인도로부터
  2. 타고르
  3. 최남선, 주요한, 동아일보
  4. 잃어버린 성궤를 찾아서
  5. 점입가경
  6. Truth is out there.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Wikimedia Commons


# 인도로부터

미국에 유학와 한 사설기숙사에서 임시로 기거하던 첫 보름 동안 나의 룸메이트는 인도 벵골지방에서 온 경제학도였다. 두 손을 든 채 한 발을 들고 파괴의 춤을 추고 있는 시바신과 시바신의 아들이자 코끼리 머리를 가진 가네쉬 신상을 늘 자기 침대 머리맡에 고이 올려놓는 이 이국적 취향 물씬한 친구와 한 방을 배정받은 첫 날, 마치 온몸에 문신이 가득한 "야만인" 퀴퀘그와 같은 선실을 쓰던 소설 {모비딕}의 이슈마일이 된 것 같던 기억이 지금까지 생생하다. 아울러 그의 충격적인 카레향 체취와 함께.

인도의 민중들을 부유하게 만들 경제관료가 되기 위해 미국에 경제학을 공부하러 왔다는 이 친구는, 심각한 인도의 빈부격차 문제에 관해 인도의 초대 수상이었던 자와할랄 네루의 경제철학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네루는 인도의 경제방향을 결정하는 중대한 시점에서 어짜피 인도인 모두가 잘 살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전면적 근대화 대신 특정분야의 산업화만 집중한 결과, 현대의 인도는 원자탄과 첨단 소프트웨어의 생산국이면서도 대부분의 인도인들이 문명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괴상한 국가가 되어버렸다며 한탄하면서 "한국의 영웅"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 운동"이야말로 인도가 따라가야했을 모델이라고 역설했다. 나는 그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는 박정희와 그의 새마을 운동이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각광받는 경제모델로 연구 중이라는 사실을 거의 모르고 있었는데, 그에게 있어 "독재자 박정희"는 그다지 중요한 이슈가 아니었다.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한번은 저녁을 같이 먹는 도중에 이 친구가 그와 동향 벵골인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시 가운데서 한국에 대한 시를 알고 있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물론이지, 한국인이라면 그 시를 모를 리가 없지.

일찌기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린 등촉의 하나인 코리어,
그 동불 한 번 다시 껴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그는 이 시를 영어로 기억하고 있었다. 한국 관련 도서에서 읽었다고 했다.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 bearers
And the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of the East

하지만 나는 타고르가 이 시를 쓰게 된 배경에 대해서 다만 3.1 운동과 관련된 무엇이 있었다는 것만 개괄적으로 알고 있었을 뿐, 한국에 대해 과연 타고르가 무엇을 알았기에 그와 같은 시를 쓰게 되었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시를 잊고 있은지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 오늘 이번에는 봄베이에서 온 인도인 친구와 한국과 인도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다시 타고르의 그 시에 대한 주제로 옮겨갔다. 그러나 그 싯구를 영어로 기억할 수가 없었던 탓에, 내 오피스로 돌아와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인도의 왠 토론싸이트에서 이 시의 영문판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게다가 내가 미처 몰랐던 몇가지 재미있는 사실도 아울러서.



# 타고르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일본을 1916년, 1917년, 1924년, 1929년, 이렇게 네번 방문했다. 그가 일본을 첫 방문한 1916년, 타고르는 일본인 청중을 대상으로 [일본의 민족주의 / Nationalism in Japan]란 제목으로 강연했다. "인도 독립주의자" 타고르의 이러한 "친일적" 행동은 내막을 정확히 이해하기 전에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이런 즉각적인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1910년 조선의 국권을 강탈한 일본을 칭송하는 듯한 입장을 취한 타고르가 어떻게 조선에 대해 "동방의 등불"을 운운할 수 있는가?

가령, 199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아마르티야 센의 강연에서, 센 교수가 일본에 대한 타고르의 양가적 입장을 비판한 부분은 그의 1916년과 1924년 일본방문 사이에 있던 어떤 사건을 고려해야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노벨상 위원회 강연록 : http://nobelprize.org/literature/articles/sen/

오랫동안의 내 의문이기도 했지만, 과연 인도의 벵골지방에서 "조선"이란 나라를 알고 있던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사실 타고르가 일본을 방문하던1916년 당시 인도의 독립주의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나라는 일본이었다. 그 이유는 당시 인도와 다른 아시아 지역을 300년 동안 식민화시켜온 세력은 영국으로 대표되는 서구열강이었고, 따라서 그 서구열강과 대등하게 대결하고 있던 거의 유일한 아시아 국가였던 일본이란 나라가 인도의 독립운동에 주는 심오한 상징성 때문이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그 일본이 식민화시킨 조선은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타고르를 비롯한 다른 인도의 독립주의자들이 비로소 조선이란 나라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919년에 있었던 3.1 운동이었다. 3.1 운동이 이미 식민화 되어 있던 다른 아시아 제 국가에 미친 영향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화자찬이 아니라 세계사적인 사실이다. 3.1 운동은 아시아 일대에서, 특별히 인도와 중국에서 있었던 민중봉기에 직접적 영향을 주었는데, 인도에서는 모한데스(마하트마) 간디가 이끄는 인도국민회의의 비폭력(사티그라하) 강령에 따라 영국의 식민지배에 항의하는 비폭력평화시위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해 4월 19일에 펀잡지방에서 영국군과 굴카용병이 시위대를 진압하면서 총을 난사해 400명이 즉사하고 1200명이 중상을 입은 (이 수는 공식발표 수이므로 더 많을 수도 있다.) 소위 "암리챠 학살" 이란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본의 3.1 운동진압이 서구세계에 그다지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반면, 암리챠 사건은 유럽에서 엄청난 비난을 초래하여 결국은 영국이 인도를 독립시킬때까지 아킬레스 건으로 남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그해 5월 4일, 5.4 운동이 일어난다.

고등학교 때 세계사 교과서 대신 자와할랄 네루의 [세계사 편력]을 한동안 읽은 적이 읽었는데, 그 글 속에서도 한국의 3.1. 운동이 인도국민회의의 투쟁방향에 준 영향이 암시되어 있었다. 딸 (인드라 간디)에게 보내는 옥중서신 속에서, 네루는 "한국의 3.1 운동을 본받을 것"을 언급하고 있다.

해당부분을 찾아 적는다

"... 상쾌한 아침의 나라라는 뜻을 지닌 조선은 일본의 총칼아래 민족 정신을 무참하게 유린당했다. 일본은 처음 얼마간 근대적인 개혁을 실시했으나 곧이어 마각을 드러냈고 조선 민족은 독립의 항쟁을 줄기차게 계속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1919년의 독립만세 운동이었다. 조선의 청년들은 맨주먹으로 적에 항거하여 용감히 투쟁했다. 3.1운동은 조선 민족이 단결하여 자유와 독립을 찾으려고 수없이 죽어 가고, 일본 경찰에 잡혀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았던 숭고한 독립 운동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이상을 위해 희생하고 순국했다. 일본인에 억압당한 조선 민족의 역사는 실로 쓰라린 암흑의 시대였다. 조선에서 학생의 신분으로 곧장 대학을 나온 젊은 여성과 소녀가 투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듣는다면 너도 틀림없이 깊은 감동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1916년 일본에 갔던 타고르가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은 정황상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게다가 타고르는 개인적 성향을 보더라도 특별히 정치적인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그가 인도 독립운동에서 지도적 위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훨씬 종교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내면에 침잠한 인물로 분류될 수 있으며, 이것은 그가 인도독립과 관련해서 그다지 글로 논평을 남기지 않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를 두고 비판을 가한 인도독립주의자도 있었음은 물론이다. 일반적으로 타고르는 인도독립을 추구하되 덜 정치적 노선을 걸었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1919년 암리챠 사건이 타고르에게 준 충격을 주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1913년에 있었던 그의 노벨문학상을 수상을 축하하며 당시 인도의 황제를 겸하고 있던 영국국왕은 타고르에게 훈장과 기사작위를 하사하고자 했으나, 암리샤 학살을 비난하며 타고르가 작위를 거부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이런 정황을 고려한다면, 3.1 운동과 암리챠 학살사건 10년 후인 1929년, 점차 군국주의가 노골화되어가던 일본에 대한 타고르의 관점이 1916년 첫 방문때의 강연 내용 속에 담겼던 일본에 대한 동경에서 큰 선회가 있었다고 보는 것은 전혀 무리한 생각이 아니다. 실제로 타고르는 일본이 침략전쟁에 올인하게되는 1930년 경부터는 일본의 침략팽창을 점진적으로 강력하게 비판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1916년 일본에서 한 타고르의 강연에서 타고르는 일본의 "민족주의"를 높게 평가한 반면, 일본의 "제국주의"는 온건하게 비판했다는 점도 지적해야겠다.

그럼 이제 1929년 도쿄로 돌아가 본다. 1913년 시집 [기탄잘리]로 아시아인 중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타고르는, 두번째로 1929년 일본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당시 동아일보 도쿄 지국장이었던 이태로가 (아마도 당시 동아일보 평양지국장이었던 시인 주요한의 부탁을 받아) 타고르에게 한국 방문을 요청했는데, 타고르는 일정상 갈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영문으로 된 [동방의 등불/The Lamp of The East] 시를 3월 28일 이태로에게 전달한다. 이 시는 다시 당시 시인 주요한에게 보내져 번역되었고, 그해 4월 2일에 동아일보에 발표된다.

아래는 해당 일자 동아일보의 스캔화면


다른 자료에 따르면 (http://www.lgpress.org/download/13_hong.pdf) 타고르는 이때 동아일보측의 다른 인물인 설의식에게 이 시와 매우 유사한 말을 했다고도 한다.

".... 미국에 가는 길에 일본의 동경에 들렀을 때 동아일보의, 아마 그때 설의식 씨였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를 방문해서 '나는 한국사람입니다. 한국사람에게 무엇인가 이야기해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까?' 하고 말하니까 타고르 그 분이“동방의 별은, 빛은, 광명은 한국으로부터”라는 한마디를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우리나라의 3.1 운동이 세계의 약소민족들에게 새로운 광명의 횃불을 높이들어준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일반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타고르는 이 시 말고도 한국에 대해 시를 하나 더 썼다고 한다. 잘 알려져있지 않은 [패자의 노래]란 시로, 3.1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육당 최남선의 요청을 받고 쓴 시라고 항간에 알려져 있다. 이 시의 한국어 번역 전문은 아래와 같다. 이 시에서 타고르가 "선생"이라고 부르던 그 사람은, 1919년 3.1 운동의 기폭제가 된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육당 최남선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패자의 노래

- 라빈드라나스 타고르

퇴각의 길목을 지키면서 패자의 노래를 부르라고 선생은 나에게 요구하나니,
패자란 남몰래 선생이 사랑하는 약혼녀이기 때문이어라.
어두운 빛 너울을 그녀가 쓰고서 사람에게 얼굴을 가리우나,
가슴 안에는 어두움 속에 빛나는 보배를 간직하였도다.
그녀는 밝은 햇빛에 버림당했거니와 밤에는 반짝이는 눈물 흘리며
이슬에 젖은 꽃 손에 들고 바라고 있네.
신에게 광명을 가져다 주기를 말없이 눈을 내리감은 채로
바람과 함께 불평의 소리 나도는 그의 집을 그녀는 뒤로 하였네,
그러나, 별들은 고욕을 나타내는 사랑스런 얼굴을 지닌
그녀의 영원한 사랑의 노래에 억양을 준다.
고독의 방문이 열렸구나, 부름이 왔네.
그래서 가슴을 두근거리네, 어두운 가운데서, 뜻 있는 시각의 불안 가운데서.




# 최남선, 주요한, 동아일보


3.1 운동 좌절로 실의에 빠진 조선민족을 격려하기 위해 타고르에 시를 요청하였다는 육당 최남선,

도쿄에서 날아온 타고르의 시를 훌륭하게 번역하였다는 동아일보 평양지국장이자 시인 주요한,

일본의 점령상황에서도 그 시를 신문에 실을 배짱을 지녔던 민족지 동아일보.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슬로건으로 만주사변 (1931)을 일으키면서 본격적인 대륙침략을 시작하기 2년 전인 1929년 무렵, 이들은 정말로 조선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고 있었을 것이다 . 하지만 십여 년이 지난 후, 최남선과 주요한과 동아일보는 일본군국주의의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하는 길을 따라 나서고 있었다.

한때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했던 육당 최남선은, 이제 전혀 다른 얼굴로 호기있게 말한다

"….제군! 대동아의 성전은…세계 역사의 개조이다. 바라건대 일본 국민으로서의 충성과 조선 남아의 의기를 발휘하여… 한 사람도 빠짐없이 출진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 {매일신보} - 가라! 청년 학도여, 1943년 11월 20일

한편,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의 이념이었던 '팔굉일우(八紘一宇)/ 천황이 우주를 지배한다'에서 두글자를 따서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로 창씨개명한, 일전의 바로 그 시인 주요한은 이런 시를 지어 천황에게 바친다.

나는 간다, / 만세를 부르고/ 천황폐하 만세를 / 목껏 부르고 /
대륙의 풀밭에 / 피를 부리고 / 너보다 앞서서 / 나는 간다.... ---- 첫피 - (1941년. 3월)

'그동안 나에게 속삭이던 사랑의 밀어는 무엇이었냐'며 바람 난 여자친구에게 따져묻는 옛 남자를 돌아보며 "그땐 정말 당신을 사랑했었지"라고 쌀쌀맞게 말하는 못된 여자처럼, 혹은 그 배신을 두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그를 사랑했기에 떠날 수 밖에 없었어요"라며 거짓눈물을 흘리는 나쁜 여자처럼, 최남선과 주요한은 그렇게 민족을 떠나갔다. 최남선과 주요한의 변신을 타고르도 알고 있었을까?

유치한 삼류드라마 치고는,
아, 이것은 너무나 현기증나는 대반전이다.




# 잃어버린 성궤를 찾아서

그동안 내가 접했던 자료에는 [동방의 등불]의 4절만이 적혀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주 최근까지도 동아일보에 실린 저 위의 4절이 타고르가 쓴 시의 전부라고 여겨왔었다. 하지만 이것은 왠지 시적감흥을 일으키기에는 너무 짧았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찾게 된 이 시의 "원문"은 훨씬 길었고, 시어는 더할 나위없는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동방(東方)의 등불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에는 두려움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작 갈라지지 않는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하여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 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
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자연스럽게 나의 관심은 이 "원문"의 영시 원문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 시의 영시 전문은 인터넷에서 검색이 되지않고 어디에나 위 4절만 검색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곳에서 아래와 같은 영문전문을 발견하게 되었다.

The Lamp of the East

- Tagore, Rabindranath(1861-1941), 1929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bearers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ghtened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 .
Where the mind is without fear and the head is held high ;
Where knowledge is free ;
Where the world has not broken up into fragment by narrow domestic walls ;
Where words come out from the depth of truth ;
Where tireless striving stretches its arms towards perfections ;
Where the clear stream of reason has not lost its way into dreary desert of death habit ;
Where the mind is led toward by thee into ever-widening thought and action - -
Into that heaven of freedom, my Father, let my country awake.

지금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어보인다. 그런데 내게 그토록 감동을 받았던 5절 이하를 주의깊게 읽다보면,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에게 1913년 노벨문학상을 안겨주었던 시집 [기탄잘리]의 제35번째 송가와 한 글자도 틀림없이 똑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Gitanjali 35

- Rabindranath Tagore

Where the mind is without fear and the head is held high
Where knowledge is free
Where the world has not been broken up into fragments
By narrow domestic walls
Where words come out from the depth of truth
Where tireless striving stretches its arms towards perfection
Where the clear stream of reason has not lost its way
Into the dreary desert sand of dead habit
Where the mind is led forward by thee
Into ever-widening thought and action
Into that heaven of freedom, my Father, let my country awake

Original text: Rabindranath Tagore, Gitanjali (Song Offerings): A Collection of Prose Translations Made by the Author from the Original Bengali, intro. by W. B. Yeats (London: MacMillan, 1913): 27-28. PR 6039 A2G6 1913 Robarts Library. First publication date: 1913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타고르가 1929년 이태로를 통해 주요한에게 주었다는 시는, 타고르가 일본을 방문하는 동안 작성한 최초 4절에다가, 이미 1913년에 발표된 [기탄잘리]의 한 구절을 짜깁기한 일종의 윤색된 작품이었단 뜻인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나는 타고르의 이 시가 발표된 1929년 4월 2일자 동아일보의 마이크로필름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그 마이크로필름 상에는 5절 이후가 역시 나타나 있지 않았다.



심지어 해당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이렇게 언급되어 있기도 하다.

"…아래와 같은 간단한 의미의 메시지를 써주며 동아일보를 통하여.."

타고르의 시가 "간단한 메시지"였으나 시인 주요한에 의해 보다 더 시적언어로 윤색되었을 가능성은 안병욱 교수의 2002년 조찬강연에도 등장한다.

http://www.hanbal.com/review/review115/jochan.htm

"… 라빈라트 타고르는 일본에 세 번 왔으나 한국에는 오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東亞日報의 편집국장으로 있던 朱燿翰 선생님이 타고르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우리 한국 국민들이 당신의 강연 듣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데 한번 방문해 주십시오"라고 정중히 초청편지를 보냈는데 "바빠서 갈 수가 없습니다. 대단히 미안합니다"라는 답장과 한국에 관한 詩를 하나 보냈습니다. 그 시는 밝은 한국을 예찬한 것으로 여러분도 다 아실 것입니다. '일찌기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는 등불의 하나였던 한국, 그 등불이 다시 켜지는 날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영어 번역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n the golden age of AsiaKorea was one of the lampbeares(아시아의 황금시대에 빛나는 등불을 들고 있는 나라의 하나였던 한국은)and that lamp is wa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 (동방의 등불이 되기 위해서 다시 빛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은 동방의 등불이 되기 위해서, 다시 한번 빛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타고르의 문장은 한 문장으로 별로 시적인 표현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요한 선생은 천재적인 시인으로서 그 분이 번역한 표현이 더 좋았습니다…."

2002년 안병욱 교수의 글 속에 오직 4절만이 언급되는 반면, 왠일인지 1975년 6월 7일 100만명이 여의도에서 모여 가졌다고 주장하는 통일교의 반공구국세계대회의 연설문 (http://delta.sunmoon.ac.kr/sunmoonboard/sinhak/25/303.htm) 속에는, 문제의 5절 이하가 온전히 포함되어 있는 [동방의 등불]이 등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1929년 4월 2일자 동아일보에는 등장하고 있지 않는 5절 이하의 구절, 즉 타고르의 [기탄잘리] 제35번째 송가는 누가 가져다 붙인 것인가? 타고르 본인인가? 주요한인가? 무명의 통일교도인가? 그렇다면 5절 이하가 붙은, 윤색된 [동방의 등불]은 언제 어디에 처음으로 소개된 것인가? 누군가의 자의적인 창작이었다면 그 시점은 적어도 1975년 이전에 이미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적어도 첫번째 의문은 타고르가 동아일보에 직접 보냈다는 타고르의 원본을 확인할 때에나 풀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위에 인용한 안병욱 교수의 2002년 조찬강연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었다.

"....제(안병욱 교수)가 동아일보에 전화해서 타고르의 시가 동아일보의 금고 속에 있을 텐데 좀 볼 수 없느냐고 하니까 6•25 때 피난 다니는 사이에 잃어버린 것 같다고 했습니다...."

과연 동아일보의 "잃어버린 성궤"는 언젠가 발견될 것인가? 아니면 이 시의 오리지널리티는 영원한 미궁 속에 갇히고 말 것인가?



# 점입가경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 것 같다. 이번에는 육당 최남선이 3.1 운동의 실패로 실의에 빠진 조선민족을 위로하기 위해 타고르에게 "요청"해서 씌여졌다는 또다른 타고르의 시 [패자의 노래]의 오리지널리티에서도 비슷한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그 시로 돌아가 보자

패자의 노래

- 라빈드라나스 타고르

퇴각의 길목을 지키면서 패자의 노래를 부르라고 선생은 나에게 요구하나니,
패자란 남몰래 선생이 사랑하는 약혼녀이기 때문이어라.
어두운 빛 너울을 그녀가 쓰고서 사람에게 얼굴을 가리우나,
가슴 안에는 어두움 속에 빛나는 보배를 간직하였도다.
그녀는 밝은 햇빛에 버림당했거니와 밤에는 반짝이는 눈물 흘리며
이슬에 젖은 꽃 손에 들고 바라고 있네.
신에게 광명을 가져다 주기를 말없이 눈을 내리감은 채로
바람과 함께 불평의 소리 나도는 그의 집을 그녀는 뒤로 하였네,
그러나, 별들은 고욕을 나타내는 사랑스런 얼굴을 지닌
그녀의 영원한 사랑의 노래에 억양을 준다.
고독의 방문이 열렸구나, 부름이 왔네.
그래서 가슴을 두근거리네, 어두운 가운데서, 뜻 있는 시각의 불안 가운데서.

이것의 원전은 무엇인가? 아마도 벵갈어에서 타고르 본인에 의해 영역된 아래의 시가 바로 그 [패자의 노래]인 듯하다.

http://terebess.hu/english/tagore11.html

LXXXV

THE SONG OF THE DEFEATED

My Master has bid me while I stand at the roadside, to sing the song of Defeat, for that is the bride whom He woos in secret.
She has put on the dark veil, hiding her face from the crowd, but the jewel glows on her breast in the dark.
She is forsaken of the day, and God's night is waiting for her with its lamps lighted and flowers wet with dew.
She is silent with her eyes downcast; she has left her home behind her, from her home has come that wailing in the wind.
But the stars are singing the love-song of the eternal to a face sweet with shame and suffering.
The door has been opened in the lonely chamber, the call has sounded, and the heart of the darkness throbs with awe because of the coming tryst.

from “FRUIT-GATHERING”, Rabindranath Tagore
Translated from Bengali to English by the author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16

이번 문제는 더 심각하게 보인다.

기존에 상식에 따르면, 최남선은 1919년 "3.1운동의 실패"로 낙담에 빠진 조선민족을 위로하기 위해서 타고르에게 이 시를 "요청"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 시는 1916년 영역되어 뉴욕에서 출판되었다. 그럼 도대체 타고르가 최남선의 요청을 받아서 썼다는 그 시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번 경우에는 타고르가 어떤 경로로 최남선에게 시를 보냈는지조차 분명치 않다. 가히 점입가경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Truth is out there

결국 다음과 같은 몇가지 잠정적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다.

  • 타고르는 "예전에 자기가 쓴" 시들을 최남선과 주요한에게 보내면서, 이 시들 속에 "한국의 억압받는 현실"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을 수 있다. 이럴 경우, 시 창작상의 오리지널리티는 없을 지라도 (시인과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분명히 "유의미"한 시일 수 있다.
  • 최남선 / 주요한은 위의 두 시의 배경에 "자신의 역할"을 억지로 끼워넣었다. 이 경우 최남선은 타고르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남의 시를 무단도용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주요한의 경우라면 남의 작품을 무단개작한 것과 같다. (주요한이 짜깁기를 했다는 가정 하에서)
  • 두 작가의 과도한 민족주의적 열정이 타고르의 두 시에 대한 아전인수식 해석, 개작, 도용을 낳았을 수 있다.

진실은 무엇인가?

The Truth is out there.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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