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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tist. Husband. Daddy. --- TOLLE. 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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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바울 vs. 바울 #3: {호세아} 6:1-3절의 화자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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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草人 최광민 2026-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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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최광민] 바울 vs. 바울 #3: {호세아} 6:1-3절의 화자는 누구일까?

순서
  1. 질문 (구사)
  2. 누구의 독법인가?
  3. 성서 장/절 구분의 역사
  4. {호세아} 6:1-3절 앞뒤의 맥락
  5. 6:1-3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심어린 회개"일까?
    1. # 6:1-3절은 백성들의 피상적이고 가벼운 회개를 풍자하는 말일까?
    2. 6:1-3절은 회개하지 않는 백성들을 향한 호세아의 촉구일까?
    3. "야훼를 알자"


    원글: https://kwangmin.blogspot.com/2026/01/61-3.html





    # 질문 (구사)

    *** [최광민] 이 글에서 다룰 내용은 붉은 색으로 하이라이트 함.


    성서를 비판적으로 세심하게 분석하고 읽어 본 사람들은 기독교의 교리를 대부분 뼈대를 만든 자칭 사도 바울이 얼마나 궤변론자(詭辯論者)인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4절에서 "성경(구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언급했을 때, 학자들은 바울이 염두에 둔 가장 유력한 '성경' 구절로 호세아 6장 2절을 꼽는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세아6:2)...배경의 이해 없이 보면 바울의 주장처럼 예수의 삼 일만의 부활을 예언한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호세아 선지자(BC 8세기)가 활동하던 당시,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위협 속에 있었고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영적으로 타락해 있었다고 호세아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호세아 본문의 '우리'는 메시아 한 사람(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받아 상처 입은 이스라엘 공동체(북이스라엘/에브라임)를 지적하는 글이다.

    여기서 "살리시며", "일으키시리니"는 죽은 시체가 무덤에서 나오는 생물학적 부활이 아니다. 이는 전쟁이나 재난으로 인해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인 국가적 위기에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회복되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히브리 문학(구약)에서 "이틀 후"와 "셋째 날"이라는 표현은 숫자 2와 3을 나열하여 "아주 짧은 시간 내에" 혹은 "속히"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시적 관용구다. 즉, 하나님이 징계하시더라도 우리가 회개하면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기대감을 나타낸 글이다.


    바울은 이글을 삼일만에 예수 부활을 구약이 예언한 것으로 원래 문맥과는 전혀 다르게 인용하는 해석으로 자신의 신학을 만들어 낸다.

    상당수 구약학자들은 호세아 6:1-3의 고백이 호세아 선지자의 진심 어린 권면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피상적이고 가벼운 회개를 풍자하는 말이라고 본다.

    근거는 바로 이어지는 6장 4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탄식한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돌아가자! 그러면 금방 낫게 해주시겠지(이틀 뒤, 삼일 째)"라고 가볍게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런 '값싼 회개'를 거부하신다는 문맥이다. 즉, 원래 본문은 "하나님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백성들의 안일한 태도"를 보여주는 구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성서학자들의 해석이다.

    바울은 해당 구절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다음 문장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결론적으로,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징계를 받아도 하나님이 속히(3일쯤에)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다소 안일할 수도 있는) 기대를 말했지만바울은 이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예수를 문자 그대로 3일 만에 다시 살리심으로써, 참된 회복을 시작하셨다"는 구속사적 성취로 재해석했다.
    그럴싸한 문장만 찾으면 족했던 것이다.  [... 후략 ...] 


    # 호세아 6:1-3절에 대한 유대교와 기독교의 독법

    {호세아} 6:1-3절에 대해 이병태 교수는 "상당수 구약학자들의 해석"이라며 이렇게 적는다.

    상당수 구약학자들은 호세아 6:1-3의 고백이 호세아 선지자의 진심 어린 권면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피상적이고 가벼운 회개를 풍자하는 말이라고 본다.

    근거는 바로 이어지는 6장 4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탄식한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돌아가자! 그러면 금방 낫게 해주시겠지(이틀 뒤, 삼일 째)"라고 가볍게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런 '값싼 회개'를 거부하신다는 문맥이다. 즉, 원래 본문은 "하나님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백성들의 안일한 태도"를 보여주는 구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성서학자들의 해석이다.  
     --- 이병태

    그의 이 진술 속에 등장하는 "상당수 구약학자"를 어떻게 잡느냐가 또 하나의 문제이긴 하겠지만, {호세아} 6:1-3절은 대략 두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 한가지는 (1) "회개하지 않는 백성을 향한 호세아의 촉구"로 해석하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기독교 측 해석이고, 다른 한가지는 (2) "백성들의 피상적 회개를 풍자한 (야훼의) 말"이라고 보는 견해로 주로 히브리어 표준 맛소라 사본에서 유추한 유대교 측의 해석이다. 물론 이 두 해석이 기독교-유대교 사이에서 칼 같이 딱 나뉘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는 원래 장/절 구별이 없던 히브리어 원문이나 그리스어 원문을 어떤 문장 단위로 끊어 읽어야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고, 각각의 해석은 각각의 다름대로의 근거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우선은 {성서}란 텍스트의 문단구조에 대해 먼저 이해해 보자. 


    # 성서 장/절 구분의 역사

    히브리 {구약성서}나 그리스어 {신약성서}가 씌여질 시기에는 원래 단어나 문단을 나누는 띄어쓰기가 전혀 없었고, 오늘날 읽는 식의 장/절은 한참 후대에 가서야 고안된 것이다. "장 chapter"은 기독교의 발명품이고, "절 verse"은 유대교/기독교의 공동발명품이다. 

    본격적인 장별 구별이라하기는 불충분하지만, BC 2세기 ~ AD 1세기 사이에 제작된{사해사본}군의 여러 필경사들은 그들이 전승받은 히브리/구약사본을 필사하면서 내용의 흐름에 따라 후대의 사본학자들이 (라틴어) "바캇 vacat"이라 부르는 공란을 넣어 각자의 방식으로 대략의 문단을 나눴다. 그런데 이건 필경사들 간에 통일된 원칙이 있던 것이 아니라 과도적인 형태다. 

    유대교 정경과 기독교 정경이 확립된 지 여러 세기가 지난 후인 AD 5-10세기,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티나 티베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히브리 정경을 필사/주석/전승한 유대교의 맛소라 (=전승자) 학파는, 오늘날 "절"이라 불리는 단위로 히브리 문장 구절들을 나누고 이를 "페수킴 pesukim"이라 불렀다. 각 절의 끝에는 "소프 파수크 Sof Pasuq"라 불리는 표시 (:)를 달았지만, 각 절에 일련번호를 붙이지는 않았다.  

    또 이들 맛소라 계열 필경사들은 "세투마 Setuma (닫힘, 멈춤)" 와 "페투카 petuchah (열림)"을 사용해 대략적인 흐름과 문단을 구분했다.  "페투카"는 내용의 큰 차이를 보이는 새 문단 앞 마지막 문장 뒤를 공란으로 남기고 새롭게 줄이 시작되는 지점이고, "세투마"는 내용상 맥락이 (살짝) 멈추는 지점에 (종종 칸 수가 통일되어 있지 않는) 공란을 삽입하지만, 문장은 줄 바꿈 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역시 이런 문단들에 일련번호를 붙이지는 않았다.

    기독교 초기 교부들의 경우에도 각자의 방식으로 성서의 단락을 구분했는데, 가령 그리스어 {70인역}에 기초한 구-라틴어 성서를 대체하기 위해, 그리스어가 아닌 히브리어 본문에서 직접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 성서를 작업한 AD 5세기의 히에로니무스 같은 경우는, 라틴어로 "카피툴룸 capitulum"이라 불리는 단위로 성서의 문맥을 구별하곤 했는데, 이건 본격적인 "장"의 개념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요약/요점" 같은 의미로서 맥락을 구분해 본 것일 뿐, 오늘날 처럼 본문 자체를 일련번호로 나눈 것은 아니다.

    현재 사용되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본문의 장별 구분과 일련번호는 훨씬 후대의 기독교 측 발명이다. 

    우선 "장"은 AD 1205년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 스티븐 랭턴 (Stephen Langton)이 성서 구절의 학술적 인용과 교회예전에 쉽게 사용하기 위해 도입했다. 종교개혁 이전의 영국은 로마카톨릭 국가였기 때문에 이 작업은 로마카톨릭의 표준성서였던 라틴어 {불가타} 역본에 바탕해 이뤄졌다. 랭턴의 장별 구분은 맛소라 학파의 세투마/페투카 방식에 기초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랭턴 식 장의 구분과 맛소라 학파의 구분은 대개 일치하지 않는다. 

    각 절 마다 일련번호를 붙이는 시스템은 1550년대에 프랑스 출판업자 로베르 에스티엥 (= 라틴어명, 스테파누스)의 작업이었는데, 1551년에는 그리스어 {신약성서}에 1555년에는 라틴어 {불가타} 구/신약성서 인쇄본 각 절에 숫자를 도입했다.

    즉, 현재 유대교 혹은 기독교의 정경의 "표준/정본"으로 대체로 인정되는 유대교의 맛소라나 기독교의 그리스어 {구/신약}에 사용된 장/절의 구분은 필사자/주석가/학자/출판업자들의 필요와 편의에 의해 후대에 "임의로" 도입된 것임을 기억해야 하고, 따라서 성서 내용의 흐름이 반드시 현재의 장/절에 따라 나뉜다고 보아선 안된다. 

    아울러 현대 유대교/프로테스탄트/로마카톨릭이 히브리 정경의 "표준정본"으로 간주하는 맛소라 계열 필사본에 사용된 세투마/페투카 같은 필경기호는 "맛소라 학파의 해석과 전승"에 따른 "끊어읽기"란 점을 기억해야 하며, 참고는 하되 원래부터 그렇게 읽혔다고 확정할 이유는 없다. 또한 현재의 "표준사본"은 말 그대로 표준사본일 뿐, 소수사본들과 개인사본들이 표준사본과 모든 면에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 {호세아} 6:1-3절 앞뒤의 맥락

    그럼 다시 {호세아} 6장 1-3절로 돌아가 앞뒤의 맥락을 살펴보자.

    현재 사용되는 랭턴의 방식으로는 {호세아} 5:15절과 6:1절이 다른 장에 속하지만, 사실 원문을 읽어보면 6:1절은 그 앞 장인 5:8부터 내용 상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6:1-3절의 화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하려면, {호세아} 전체에 등장하는 야훼, 호세아, 백성들의 말과 화법을 우선 모두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유대교 정경 소예언서들의 기본구조는, (1) 야훼가 "나"란 화자로서 말하거나 (2) 예언자 본인이 화자로서 야훼 또는 본인의 말을 전하거나, 혹은 (3) 야훼와 예언자가 대화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고, 가끔씩 "백성"이 (인용의 형식를 취해) 화자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말들이 종종 뒤섞여 등장하기 때문에, 화자를 정확히 분별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한국어 {새번역}으로 {호세아} 5/6장을 읽고 화자를 구분해 보자. 가장 문제가 되는 지점은 6:1-3절이다.

    제 5장 (= 랭턴)

    [야훼] 1 "너희 제사장들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 이스라엘 백성아, 똑똑히 들어라! 너희 왕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너희가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너희는 미스바에 놓은 덫이고, 다볼 산 위에 펼쳐 놓은 그물이다. 2 반역자들이 살상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모두 징벌하겠다. 3 나는 에브라임을 잘 안다. 앞에서는 이스라엘이 숨지 못한다. 에브라임이 몸을 팔고 있고, 이스라엘이 몸을 더럽히고 있다." 

    [호세아] 4 그들의 온갖 행실이 그러하니, 하나님께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음란한 생각이 그들 속에 가득 차서, 주님을 알지 못한다. 5 이스라엘의 교만이 이스라엘에게 불리하게 증언한다. 이스라엘 곧 에브라임은 저의 죄에 걸려서 넘어질 것이다. 유다도 그들과 함께 넘어질 것이다. 6 양 떼와 소 떼를 몰고 주님/야훼을 찾아 나선다고 하여도, 주님/야훼께서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셨으니, 그들이 주님/야훼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7 그들이 주님야훼께 정조를 지키지 않고 사생아를 낳았으니, 그들이 지키는 새달 절기가 밭과 함께 그들을 삼킬 것이다.

    [야훼] 8 "기브아에서 전쟁을 알리는 나팔을 불어라! 라마에서도 비상 나팔을 불어라! 벳아웬에서도 전쟁이 터졌다고 경보를 알려라! 베냐민아, 적군이 네 뒤를 쫓는다. 9 에브라임이 벌을 받는 날에는, 온 나라가 황무지가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게 이미 확정된 일을 내가 선포한다. 10 유다의 통치자들은 경계선을 범하는 자들이니, 내가 그들 위에 나의 분노를 물처럼 쏟아 부을 것이다. 11 에브라임이 도움을 구하러 허무한 것을 뒤쫓아갔으니, 에브라임이 심판을 받아, 억압을 당하고 짓밟혔다. 12 그러므로 나는 에브라임에게는 좀으로 유다 가문에게는 썩이는 것으로 칠 것이다. 13 에브라임이 자기의 중병을 깨닫고 앗시리아로 가고, 유다는 제 몸에 난 상처를 보고 그 나라의 대왕에게 특사를 보냈다. 그러나 그 대왕이 너희의 중병을 고치지 못하고, 그가 너희의 상처를 치료하지 못한다. 14 내가 사자처럼 에브라임에게 달려들고, 젊은 사자처럼 유다 가문에 달려들어 그들을 물어다가 갈기갈기 찢을 것이니, 아무도 입에서 그들을 빼내어 건져 주지 못할 것이다. 15 나는 이제 내 곳으로 돌아간다. 그들이 지은 죄를 다 뉘우치고, 나를 찾을 때까지 기다리겠다. 환난을 당할 때에는, 그들이 애타게 나를 찾아 나설 것이다."

    제 6장 (= 랭턴)

    [호세아? 백성들? 야훼?] 1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2 이틀 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니, 우리가 주님/야훼 앞에서 살 것이다. 3 우리가 주님/야훼을 알자. 애써 주님을 알자.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님/야훼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

    [야훼] 4 "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나를 사랑하는 너희의 마음은 아침 안개와 같고,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과 같구나. 5 그래서 내가 예언자들을 보내어 너희를 산산조각 나게 하였으며, 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로 너희를 죽였고, 나의 심판이 너희 위에서 번개처럼 빛났다. 6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엘로힘을 알기를 더 바란다. 7 그런데 이 백성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나를 배반하였다. 8 길르앗은 폭력배들의 성읍이다. 발자국마다 핏자국이 뚜렷하다. 9 강도 떼가 숨어서 사람을 기다리듯, 제사장 무리가 세겜으로 가는 길목에 숨었다가 사람들을 살해하니, 차마 못할 죄를 지었다. 10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소름 끼치는 일들을 보았다. 거기에서 에브라임이 몸을 팔고, 이스라엘이 몸을 더럽힌다. 11 유다야, 너를 심판할 시기도 정하여 놓았다. 내가 내 백성의 운명을 바꾸어 주고자 할 때마다,

    제 7장 (= 랭턴)

    [야훼]1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여 주고자 할 때마다, 에브라임이 지은 범죄가 드러나고 사마리아가 저지른 죄악이 드러난다. 서로 속이고, 안으로 들어가서 도둑질하고, 밖으로 나가서 떼지어 약탈한다. 2 내가 그들의 죄악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전혀 마음에 두지도 않는다. 이제는 그들이 저지른 모든 잘못이 그들을 에워싸고 바로 내 눈 앞에 있으니, 내가 안 볼 수 없다."

    [야훼] 3 "왕을 갈아치울 자들이 악한 음모를 품고서도 겉으로는 왕을 기쁘게 하며, 온갖 기만으로 대신들을 속여 즐겁게 한다. 4 그들은 성욕이 달아오른 자들이다. 그들은 화덕처럼 달아 있다. 빵 굽는 이가 가루를 반죽해 놓고서, 반죽이 발효될 때를 제외하고는 늘 달구어 놓은 화덕과 같다. 5 드디어 우리 왕의 잔칫날이 되면, 대신들은 술에 만취되어 곯아 떨어지고 왕은 거만한 무리들과 손을 잡는다. 6 새 왕을 세우려는 자들의 마음은 빵 굽는 화덕처럼 달아 오르고, 그들은 음모를 품고 왕에게 접근한다. 밤새 그들의 열정을 부풀리고 있다가 아침에 맹렬하게 불꽃을 피워 올린다. 7 그들은 모두 빵 굽는 화덕처럼 뜨거워져서, 그들의 통치자들을 죽인다. 이렇게 왕들이 하나하나 죽어 가는데도 어느 누구도 나 주/야훼에게 호소하지 않는다."

    [야훼] 8 "에브라임은 다른 민족들 속에 섞여서 튀기가 되었다. 에브라임은 뒤집지 않고 구워서 한쪽만 익은 빵처럼 되었다. 9 온갖 외세가 국력을 삼키는데도 에브라임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도 깨닫지 못한다. 10 이스라엘의 교만이 이스라엘에게 불리하게 증언한다. 이 모든 일을 겪고도, 주/야훼 하나님/엘로힘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 나를 찾지도 않는다. 11 에브라임은 어리석고, 줏대 없는 비둘기이다. 이집트를 보고 도와 달라고 호소하더니, 어느새 앗시리아에게 달려간다. 12 내가 그들이 가는 곳에 그물을 던져서, 하늘에 나는 새를 잡듯 그들을 모조리 낚아챌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죄악 그대로 내가 그들을 징계하겠다. 13 나를 떠나서 그릇된 길로 간 자들은 반드시 망한다! 나를 거역한 자들은 패망할 것이다. 건져 주고 싶어도, 나에게 하는 말마다 거짓말투성이다. 14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나, 거기에 진실이 없다. 오히려 침상에 엎드려 통곡한다. 곡식과 포도주를 달라고 빌 때에도 몸을 찢어 상처를 내면서 빌고 있으니, 이것은 나를 거역하는 짓이다. 15 그들의 두 팔을 힘있게 기른 것은 였지만, 그들은 나를 해치려고 음모를 꾸몄다. 16 허망한 것에 정신이 팔린 자들, 느슨하게 풀어진 활처럼 쓸모 없는 자들, 대신들은 함부로 혀를 놀렸으니, 모두 칼에 찔려 죽을 것이다. 이것이 이집트 땅에서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이견의 여지없이 정확히 댓구가 되는 모티프는 5:14절과 6:1절에서 나타난다. 6:1-3은 내용 상 한 단위이기 때문에, 6:1-3은 그런 의미에서도 5장의 연속선 속에 있다.

    • (5:14) 나 (야훼)는 "사자처럼" 이스라엘을 물어 갈기갈기 찢을 것이다.
    • (6:1) 야훼는 "우리"를 찢으셨지만 (회개하면) 치유하실 것이다

    자, 그럼 {호세아} 6:1-3의 화자와 발언의 의미를 둔 모든 가능성을 하나씩 풀어보자.


    # 6:1-3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심어린 회개"일까?

    해당 부분을 5장부터 읽지 않고 6장부터 맥락없이 읽을 때 일반 독자들이 흔히 이해하는 방식으로,  6:1--3절의 화자를 회개 대상자들인 이스라엘 백성 (=우리)라 보고, 해당 발언을 백성들의 "진심어린 회개"라 보는 경우다. 

    이 경우에 6:2절을 "회개한 자들의 회복" 혹은 "부활"에 대한 "예언"이라고까지 해석해 볼 수 있는 해석공간이 생기겠지만, 여기엔 한가지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사실 {호세아} 전체를 읽어보면, 그 어디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현 시점"에 진정한 회개를 하고 있다고 보여지는 지점이 없다. (1) 아예 회개를 하고 있지 않거나, (2) 혹은 회개를 하더라도 "야훼를 제대로 아는 방식이 아닌" 잘못된 방식으로 엉뚱하게 회개하는 것으로 야훼로부터 질타받고 있다. 그래서 "야훼를 알자"란 정확한 메시지가 명시된 6:3절을 백성들의 진심어린 회개라고 보게 되면 {호세아} 전체의 흐름이 매우 이상하게 틀어져 버린다.

    6:1-3절이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심어린 회개가 되기 힘든 문맥적 배경은 사실 충분하다. {호세아} 7장에 보면, 그동안 이스라엘이 (마지못해) 해 온 회개가 어떤  성격인지 정확히 묘사되어 있다.

    (7:13) 나를 떠나서 그릇된 길로 간 자들은 반드시 망한다! 나를 거역한 자들은 패망할 것이다. 건져 주고 싶어도, 나에게 하는 말마다 거짓말투성이다. 14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나, 거기에 진실이 없다. 오히려 침상에 엎드려 통곡한다. 곡식과 포도주를 달라고 빌 때에도 몸을 찢어 상처를 내면서 빌고 있으니, 이것은 나를 거역하는 짓이다.  -- 한국어 새번역

    {호세아}에서 야훼가 이스라엘인들을 비판하는 지점은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는다"거나 혹은 "가볍게 야훼에게 회개하고 돌아와 다시 죄를 짓는다"는 것 정도가 아니다. 그들은 "야훼에게 회개한다" 하면서도 몸에 상처를 내고 통곡하며 바알에게 기원하는 바알신앙 같은 "이방종교의 방식"으로 회개한다는 걸 지적한다. 즉, 회개를 "가볍게" 여긴다는 수준이 아니라, 회개의 "방식 자체" 부터 잘못되어 있다는 지적이다. 즉, 백성들은 야훼를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지적은 {호세아} 전체를 관통하는, 그리고 6:1-3에 가장 잘 명시된 "우리가 야훼를 알자"라는 메시지와 일맥상통한다. 그 회개는 6:6절에 한번 더 강조된 대로 (1) 야훼를 올바로 "알"고, (2)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이어야 한다. 심지어 야훼는 모세가 전수한 "올바른 제사방식"인 번제보다도 "야훼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런 이유로 {호세아}전체 맥락에서 제대로 회개한 적도 없는 백성들이, 뜬금없이 6:3절에서만 (1) "야훼를 알자"란 제대로 된 메시지를 담아 고백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어색하다.  

    참고로, 

    이 7:14절은 사용된 히브리어/그리스어 사본에 사용된 단어형태에 따라 두가지 전혀 다른 번역이 가능하다. 

    AD 10-11세기에 제작된 "표준" 맛소라 사본인 알레포/레닌그라드 맛소라 사본에 사용된 단어는 " יִתְגּוֹרָרוּ 잇고라루"인데, 이 뜻에 따르면 굶주린 백성들이 음식과 포도주를 두고 "모여드는" 것이 된다. 여기 "모여든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3자 어근은 גּוּר (G-W-R) 인데, 그 의미는 좀 불분명 하다. 대체로 (1) 모여들다 (2) 걱정하다 (3) 떨다/흥분하다에 해당한다. 

    עַל־דָּגָן וְתִירֹושׁ יִתְגּוֹרָרוּ   (‘al-dagan vetirosh yitgoraru)

    곡물과 새 포도주를 두고/때문에 그들이 모여든다

    이 해석은 이 "표준" 맛소라 사본에 바탕한 영문번역인 KJV, NKJV, NASB, JPS 등의 번역본이 사용한다. 

    그런데 BC 2세기 경에 히브리어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인역}에 따르면, 해당 단어에 위치할 단어가 "κατετέμνοντο 카테템논토"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 단어는 "모여든다"는 뜻이 아니라 "벤다/찢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바알 신앙을 포함한 고대 오리엔트 종교에서 신에게 청원할 때 울부짖으며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며 기원하는 장면이 된다. 가령, 카르멜산에서 엘리야와 기도 대결 때 바알 신관들이 하던 장면과 같다.

    ἐπὶ σίτῳ καὶ οἴνῳ κατετέμνοντο  (epi sito kai oino katetemnonto)

    밀과 포도주를 두고/때문에 그들 몸을 벤다/찢는다 (=자해한다)

    그럼 도대체 그리스어 {70인역}이 번역에 사용한 BC 2세기의 히브리어 사본은 뭐란 말인가?

    영국의 벤자민 켄니콧 (Benjamin Kennicott (1718-1783) )과 이탈리아의 지오반니 데 로시 (Giovanni Bernardo de Rossi (1742–1831))는 18세기에 맛소라 계열 사본들을 포함해 각각 615개 (Vetus Testamentum Hebraicum)와 731개 (Variae Lectiones Veteris Testamenti)의 히브리어 사본들과 인쇄본을 수집해 발표했는데, 이 사본들의 {호세아} 7:14절에는 "표준 (알레포/레닌그라드)" 맛소라 히브리어 사본에 "모인다"란 뜻으로 사용된 " יִתְגּוֹרָרוּ 잇고라루 / 어근 גּוּר (G-W-R)" 뿐 아니라, "레쉬 (ר)"가 아닌 "달렛 (ד)"이 사용된 형태인 "יִתְגּוֹדָדו 잇고다두 / 어근 גָּדַד (G-D-D)"도 발견된다. 

    켄니콧 (Kenicott)는 3종의 맛소라 사본 (MSS 150/154/176)을 포함한 히브리어 사본 25종에서, 데 로씨 (De Rossi)는 맛소라 사본 36종 (e.g.  MSS 2/405/596) + 1400년대 말 최초 히브리어 인쇄본 6종 (e.g. Soncino Bible 1488), Brescia Bible (1494))에서 이 패턴을 발견했다. 그런데 이 "잇고다두"가 "벤다/찢는다"란 의미로, 바로 그리스어 {70인역}에 등장하는 그 의미이다. 

    עַל־דָּגָן וְתִירֹושׁ יִתְגּוֹדָדוּ

    곡물과 새 포도주를 두고/때문에 그들 몸을 벤다/찢는다

    그리고 이 표현 그대로 후대의 AD 1/2세기에 히브리어에서 아람어/시리아어로 번역된 {페쉬타}에도 나타난다.

    ܥܠ ܚܛܐ ܘܥܠ ܚܡܪܐ ܡܬܚܪܥܝܢ  (‘al hete wa‘al hamra methar‘in)

    밀과 포도주를 두고/때문에 그들 몸을 벤다/찢는다

    이것은 BC 2세기 그리스어 {70인역}과 AD 1/2세기 아람-시리아어 {페쉬타}의 번역자가 사용한 {호세아}서의 고대 히브리어 사본과 현재 "표준"으로 간주되는 AD 10/11세기 알레포/레닌그라드판 맛소라 사본에 사용된 단어 중 어느 한쪽의 전승과정에서 필사오류 혹은 철자오독에서 발생했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번역을 취하는 영어 번역본에는 NRSV, ESV, NIV, NET 등이 있고, 위의 한국어 새번역, 공동번역, 가톨릭 성경도 이 {70인역}과 소수 맛소라 사본, 그리고 {페쉬타}의 독법을 따른다. 

    한편, AD 5세기에 히브리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된 히에로니무스의 {불가타}의 번역은 이 둘과도 꽤 다른데, {불가타}는 이렇게 번역했다.

    super triticum et vinum ruminabant

    곡식과 포도주 위에서 그들은 되새김질했다 / 곰곰이 생각했다.

    그럼 도대체 히에로니무스가 사용한 히브리어 사본은 또 뭐란 말일까? 아마도 AD 5세기 히에로니무스가 라틴어로 직역할 때 사용한 히브리어 사본의 단어는 오늘날 "표준" 맛소라 사본에 사용된 "잇고라루"가 아니었나 싶은데,  이 어근 גּוּר (G-W-R)이 뜻하는 (1) 모이다 (2) 걱정하다 (3) 흥분하다 중에서, 아마도 굶주린 동물들이 모여서 먹이를 게걸스럽게 먹는 장면을 히에로로니무스가 연상해 번역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어 번역본들도 두 계열로 갈라져 있는데, 각 번역본들의 선택은 아래와 같다.

    한국어 개역개정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로 말미암아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

    한국어 (표준)새번역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나, 거기에 진실이 없다. 오히려 침상에 엎드려 통곡한다. 곡식과 포도주를 달라고 빌 때에도
    몸을 찢어 상처를 내면서 빌고 있으니, 이것은 나를 거역하는 짓이다.

    한국어 공동번역 (개정)

    진심으로 나를 부르기는커녕, 기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뒹굴기나 하는 것들, 곡식과 포도주를 달라고 하면서도
    몸에 칼자국을 내며 나를 거스른다.

    한국어 가톨릭 성경

    그들은 진실한 마음으로 나에게 부르짖지 않고 오히려 침상에 드러누워 울부짖는다. 곡식과 햇포도주를 달라고
    제 몸에 상처를 내고 있으니 이 또한 나를 거스르는 것이다.

    어떤 번역이 옳은 것인가? 

    개인적으론 {70인역}의 독법이 맥락 상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우선 (1) {호세아}에서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따른다는 점이 비판되어 있고 (...13:11 "에브라임이 말만 하면 모두 떨었다. 온 이스라엘이 그렇게 에브라임을 우러러보았는데, 바알 신을 섬겨 죄를 짓고 말았으므로, 이제 망하고 말았다.....) (2) 그들이 "엎어져" 통곡하는 "침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מִשְׁכָּב (mishkāv) 은 여기선 잠자는 가구를 뜻하는 게 아니라, (바알)종교의 통곡의식에 사용되는 걸 의미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럼 뒤에 (3) 자해하는 장면이 따라 나오는게 자연스럽다.

    가령, 앞에 말한 {열왕기상} 18장의 아래 장면에서 바알 의식의 한 장면을 읽어보자. 여기에선 "표준" 맛소라 사본에서도 위에 언급한 " (히브리어) 잇고다두 / 몸을 벤다"가 등장해서, "비-표준" {호세아}와 완전히 일치한다. 그리스어 {70인역}에서도 역시 {호세아}와 동일하게  "카테템논토 / 몸을 벤다"가 사용되었다.

    25 엘리야가 바알의 예언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수가 많으니, 먼저 시작하시오. 소 한 마리를 골라 놓고, 당신들의 신의 이름을 부르시오. 그러나 불은 지피지 마시오." 26 그들은 가져 온 소 한 마리를 골라서 준비하여 놓은 뒤에, 아침부터 한낮이 될 때까지 "바알은 응답해 주십시오" 하면서 부르짖었다. 그러나 응답은 커녕,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바알의 예언자들은 제단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었다. 27 한낮이 되니,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면서 말하였다. "더 큰소리로 불러보시오. 바알은 신이니까, 다른 볼일을 보고 있을지, 아니면 용변을 보고 있을지, 아니면 멀리 여행을 떠났을지, 그것도 아니면 자고 있으므로 깨워야 할지, 모르지 않소!" 28 그들은 더 큰소리로 부르짖으면서, 그들의 예배 관습에 따라,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르도록 자기 몸을 찔렀다 (וַיִּתְגֹּדְדוּ 잇고다두, κατετέμνοντο 카테넴논토).  -- 한국어 새번역


    # 6:1-3절은 백성들의 피상적이고 가벼운 회개를 풍자하는 말일까?

    6:1-3절의 화자를 "백성"들이라 볼 때의 두번째 해석은, 이 절들이 백성들의 회개이긴 하되 진심이 담기지 않은 가벼운 회개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 6:1-3절은 야훼가 백성의 말을 비꼬아서 하는 경우가 된다.

    이병태 교수의 글에서 "상당수의 구약학자"의 해석이라며 등장한 독법이 바로 이것으로, 사실은 유대인 랍비들이 보통 취하는 해석이다. 

    그 이유는? 

    표준 맛소라 사본에서는 6:3과 6:4절 사이에 세투마/페투카가 없이 글이 계속 이어지는데, 그래서 랍비들은 6:4절에 등장하는 야훼의 질책은 바로 (불성실한 회개에 해당하는) 6:1-3절에 대한 야훼의 즉각적인 반응이라고 이해한다. 이 경우 6:1-3절은 진정한 회개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 구절을 기독교 식으로 "구원받은 자들의 회복 혹은 (심지어) 부활"이란 해석을 유도하면 넌센스가 되는 셈이다.

    다시  이병태 교수의 글을 인용하겠다. 

    상당수 구약학자들은 호세아 6:1-3의 고백이 호세아 선지자의 진심 어린 권면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피상적이고 가벼운 회개를 풍자하는 말이라고 본다.

    근거는 바로 이어지는 6장 4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탄식한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돌아가자! 그러면 금방 낫게 해주시겠지(이틀 뒤, 삼일 째)"라고 가볍게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런 '값싼 회개'를 거부하신다는 문맥이다. 즉, 원래 본문은 "하나님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백성들의 안일한 태도"를 보여주는 구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성서학자들의 해석이다.  
     --- 이병태

    이 독법에서는 다음의 두 구절이 "댓구"라고 이해한다. 즉, (가을비/봄비)에 바로 이어 (아침안개/이슬)과 대조했다는 것이다.

    • (6:3)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님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
    • (6:4) 나를 사랑하는 너희의 마음은 아침 안개와 같고,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과 같구나.

    이럴 경우, 6:3절은 회개에 대한 백성의 "안일한" 자세를, 6:4절은 그에 대응하는 야훼의 즉각적 반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히게 된다. 

    그런데 이 대조구문을 꼭 6:4절이 6:3절을 치고 받는다는 식으로 이해해야 할까? 

    내 생각에 이 독법에는 몇가지 결정적 문제가 있다.

    우선, 야훼는 이 "아침안개"와 "이슬"이란 모티프를 13장 3절에도 사용하지만, 여기서는 가을비/봄비에 대응하는 댓구가 없다. 그래서 앞의 6:3/6:4를 꼭 댓구로만 이해할 이유는 없다.

    13:11 "에브라임이 말만 하면 모두 떨었다. 온 이스라엘이 그렇게 에브라임을 우러러보았는데, 바알 신을 섬겨 죄를 짓고 말았으므로, 이제 망하고 말았다. 2 그런데도 그들은 거듭 죄를 짓고 있다. 은을 녹여 거푸집에 부어서 우상들을 만든다. 재주껏 만든 은 신상들, 그것들은 모두 세공업자들이 만든 것인데도, 그들은, 이 신상 앞에 제물을 바치라고 하면서, 송아지 신상들에게 입을 맞춘다.3 그러므로 그들은 아침 안개처럼 되고, 이른 새벽에 사라지는 이슬처럼 될 것이다. 타작 마당에서 바람에 날려 나가는 쭉정이처럼 되고,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처럼 될 것이다.

    또, 6:1-3절에서 백성들이 "현재" "말로만 저렇게" 혹은 "피상적이고 가볍게" 회개하는 것을 6:4절에서 야훼가 비판하는 것이라면, 최소한 그 백성들은 "올바른" 방식 - 즉, "야훼를 올바르게 알고" 회개해야한다는 점을 인지하고는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백성들이 현재 그렇다는 암시는 {호세아} 어디에도 없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어지는 7장에서 야훼는 백성들의 상태를 이렇게 비꼬았기 때문이다.

    7:14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나, 거기에 진실이 없다. 오히려 침상에 엎드려 통곡한다. 곡식과 포도주를 달라고 빌 때에도 몸을 찢어 상처를 내면서 빌고 있으니, 이것은 나를 거역하는 짓이다.  

    백성은 "야훼를 알"고있는게 아니라 야훼를 "바알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회개는 (이병태 교수가 이해하는 것 같은) "피상적이고 가볍고 안일한 회개"가 아니라 "회개 조차"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아무리 피상적이고 가볍다 한들) 아래와 같이 회개한단 말인가?

    6:1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2 이틀 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니, 우리가 주님/야훼 앞에서 살 것이다. 3 우리가 주님/야훼을 알자. 애써 주님을 알자.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님/야훼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


    # 6:1-3절은 회개하지 않는 백성들을 향한 호세아의 촉구일까?

    기본적으로 그리스어 {70인역}을 표준정경으로 사용한 초기 기독교는 초기 교부들의 시절부터 이 6:1-3절을 호세아의 "촉구"로 이해했다. 즉, 회개하지 않는 백성을 향한 호세아의 "회개 촉구"라고 보는 경우다. 따라서 6:1-3절은 "올바른 회개"를 말하는 것이 된다.

    가령, AD 4세기 말 히브리어에서 직접 라틴어로 성서를 번역했던 히에로니무스 (AD 342-420)는 {호세아 주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In fine superioris capituli dixerat: 'In tribulatione sua mane consurgent ad me.' Nunc Propheta ostendit quid dicere debeant, et quomodo ad Dominum revertantur."

    "앞선 단락 (Capituli) 의 마지막 부분 (= 5장 말미)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고난 속에서 새벽에 나를 간절히 찾으리라.' 이제 (= 6:1-3) 예언자는 그들이 마땅히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주님께 돌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 AD 5세기 안티오키아 학파의 신학자이자 퀴로스 주교였던 테오도레토스 (AD 393–457)는 {12 예언서 주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Ὁ προφήτης, τὴν τοῦ Θεοῦ φιλανθρωπίαν ἐπιστάμενος, παρεγγυᾷ τοῖς Ἰουδαίοις τὴν ἐπάνοδον·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아는 그 예언자는 유대인들이 돌이킬 것을 촉구했다.

    이 경우 6:4절은 (야훼의 비판 - 호세아의 회개 촉구 - 야훼의 비판) 이란 {호세아}서의 반복해서 등장하는 구성을 따르는 것으로 읽혀진다. 즉, 6:3절에서 호세아가 "회개하지 않고 있는" 백성들의 올바른 회개를 "촉구"하고 그에 따른 야훼의 풍성한 은혜 (가을비/봄비)를 강조한 직후, 6:4절에서는 야훼가 동일한 "회개하지 않고 있는" 백성들의 자세를 자신의 풍성한 은혜와 대조시켜 (아침안개/이슬) 비판하는 것이 된다. 즉, 5장에 이어서 6장에서도 호세아와 야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번갈아 가며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독법을 취하면, 6:1-3절은 "진정한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기에, 이 구절을 기독교 식으로 "구원받은 자들의 회복 혹은 부활"이란 해석을 유도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랍비들 혹은 그들의 독법을 지지하는 "상당수(?)의 구약학자"들의 해석과 기독교 교부들의 상반된 해석 가운데 누가 더 {호세아} 전체의 내용에 부합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이번에는 "백성들의 말"로 특정된 구절들을 {호세아} 전체에서 찾아, 이 말투가 야훼나 호세아의 말투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도록 하자.

    각 장별로 등장하는 화자는 대략 이렇게 된다. 여기서 확실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로 등장하는 구절은 파란색으로, 확실히 "예언자 호세아의 촉구"로 등장하는 구절은 붉은색으로 강조하겠다.

    • 1장: 야훼 (=나)
    • 2장: 야훼
    • 3장: 야훼, 호세아
    • 4장: 야훼, 호세아
    • 5장: 야훼, 호세아 (5:4-7)
    • 6장: 호세아?/백성? (6:1-3), 야훼 (4-11)?
      • [???] 1 이제 야훼/주님께로 돌아가자. 야훼/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2 이틀 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니, 우리가 주님 앞에서 살 것이다3 우리가 야훼/주님을 알자. 애써 야훼/주님을 알자.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야훼/주님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  -- 한국어 새번역
    • 7장: 야훼
    • 8장: 야훼
    • 9장: 호세아, 야훼 (10-12), 호세아 (13-14), 야훼 (15-17)
      • [백성] 7: 너희는 말하기를 "이 예언자는 어리석은 자요, 영감을 받은 이 자는 미친 자다"라 하였다
    • 10장: 호세아 (1-2), 백성 (3), 호세아 (4-8), 야훼 (9-15)
    • 11장: 야훼
    • 12장: 야훼 (1), 호세아(2-6), 야훼 (7-11), 호세아 (12-14)
      • [백성] 8. 그러면서도 에브라임은 자랑한다 9 '아, 내가 정말 부자가 되었구나. 이제는 한 밑천 톡톡히 잡았다. 모두 내가 피땀을 흘려서 모은 재산이니, 누가 나더러 부정으로 재산을 모았다고 말하겠는가?'
    • 13장: 야훼
    • 14장: 호세아 (1-3), 야훼 (4-7), 호세아 (8)

    보다시피 {호세아}에서 백성이 직접 말하는 내용들은 모두 저런 식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로 명백히 등장하는 (파란색) 구절들을 읽어보면, 이건 회개를 하겠다는 사람들의 말투가 전혀 아니다. 이런 맥락을 볼 때, 6:1-3이 백성들이 (진심이든 건성이든)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는 장면이라면 전체 흐름 상 무척 뜬금없이 들릴 수 있다. 그리고 {호세아}에서 호세아나 야훼가 백성의 말을 "비꼬아" 인용할 때에도 저런 말투를 벗어나지 않았다.

    반면, 6:1-3절을 앞서 5:15의 야훼의 비판에 이어 호세아가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로 읽으면 흐름이 자연스러울 뿐더러, 이어지는 6:4절의 야훼의 비판과 그대로 이어져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어쨌거나 현 시점에서 백성들은 회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14:2절에서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호세아의 다른 말과도 분위기가 유사하다. 

    14:2 너희는 말씀을 받들고 주님께로 돌아와서 이렇게 아뢰어라.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우리를 자비롭게 받아 주십시오. 수송아지를 드리는 대신에 우리가 입술을 열어 주님을 찬양하겠습니다. 3 다시는 앗시리아에게 우리를 살려 달라고 호소하지 않겠습니다. 군마를 의지하지도 않겠습니다. 다시는 우리 손으로 만들어 놓은 우상을 우리의 신이라고 고백하지도 않겠습니다. 고아를 가엾게 여기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이 문장과 6:1-3절을 다시 비교해 보자. 

    6:1 이제 야훼/주님께로 돌아가자. 야훼/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2 이틀 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니, 우리가 주님 앞에서 살 것이다. 3 우리가 야훼/주님을 알자. 애써 야훼/주님을 알자.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야훼/주님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

    이것이 호세아의 "촉구"로 들리는가? 아니면 (야훼가 비꼬는) 백성들의 (피상적) 회개로 들리는가?


    # "야훼를 알자"

    사실 6:1-3에서 가장 눈에 띄는 표현은 3절의 "우리가 (야훼/주님을) 알자. 애써 야훼/주님을 알자." 란 구절이다. 

    "야훼를 앎 'לָדַעַת אֶת־יְהוָה"이 예언서 {호세아}에만 등장하는 주제는 아니지만, {호세아}는 이 모티프를  다른 모든 예언서들 가운데 가장 강렬히 그리고 자주 본문 여기저기에 사용한 예언서이다. 

    여기서 '야훼를 안다'는 말은 신에 대한 "철학/신학적 탐구"를 하자는 뜻이 아니다. "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 (יָדַע)"가 성관계를 암시하기도 하거니와 이는 야훼-백성 간의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한 강한 친밀감과 결속을 의미한다. {호세아}의 도입부에 호세아와 바람난 아내 고멜의 이야기를 야훼-백성의 메타포로 이용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러니까 "믿"는게 전부가 아닌 것이다. 우선 "올바로 아"는 것이 핵심이다.

    해당 구절의 화자를 글 머리에 표기한다.

    [야훼] 2:16 그 날에 너는 나를 '나의 남편'이라고 부르고, 다시는 '나의 주인/바알'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17 그 때에 나는 그의 입에서 바알 신들의 이름을 모두 없애고, 바알 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다시는 없도록 하겠다. 18 그 날에는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고,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벌레와 언약을 맺고, 활과 칼을 꺾어버리며 땅에서 전쟁을 없애어,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 놓고 살 수 있게 하겠다. 19 그 때에 내가 너를 영원히 아내로 맞아들이고, 너에게 정의와 공평으로 대하고, 너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을 보여 주고, 너를 아내로 삼겠다. 20 내가 너에게 성실한 마음으로 너와 결혼하겠다. 그러면 너는 나 주/야훼를 바로 알 것이다.

    [야훼] 4:1 이스라엘 자손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주님께서 이 땅의 주민들과 변론하신다.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사랑도 없고, 하나님/엘로힘을 아는 지식도 없다. 2 있는 것이라고는 저주와 사기와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다. 살육과 학살이 그칠 사이가 없다. 3 그렇기 때문에 땅은 탄식하고, 주민은 쇠약해질 것이다. 들짐승과 하늘을 나는 새들도 다 야위고, 바다 속의 물고기들도 씨가 마를 것이다."

    [야훼] 4:4 "그러나 서로 다투지 말고, 서로 비난하지도 말아라. 제사장아, 이 일로 네 백성은 너에게 불만이 크다. 5 그래서 낮에는 네가 넘어지고, 밤에는 예언자가 너와 함께 넘어질 것이다. 내가 너의 어머니 이스라엘을 멸하겠다. 6 내 백성이 나를 알지 못하여 망한다. 네가 제사장이라고 하면서 내가 가르쳐 준 것을 버리니, 나도 너를 버려서 네가 다시는 나의 성직을 맡지 못하도록 하겠다. 네 하나님의 율법을 네가 마음에 두지 않으니, 나도 네 아들딸들을 마음에 두지 않겠다.

    [호세아] 5:4 그들의 온갖 행실이 그러하니, (그들의) 하나님께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음란한 생각이 그들 속에 가득 차서, 주님/야훼을 알지 못한다.

    [호세아?] 6:1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2 이틀 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니, 우리가 주님 앞에서 살 것이다. 3 우리가 주님을 알자. 애써 주님/야훼을 알자.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님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

    [야훼] 6:4 "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나를 사랑하는 너희의 마음은 아침 안개와 같고,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과 같구나. 5 그래서 내가 예언자들을 보내어 너희를 산산조각 나게 하였으며, 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로 너희를 죽였고, 나의 심판이 너희 위에서 번개처럼 빛났다. 6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엘로힘을 알기를 더 바란다.

    {호세아} 전체에서 "야훼/주님을 알자"라는 모티프는 늘 이런 맥락으로 야훼와 호세아의 비판과 촉구 속에 녹아 들어가 있다. 그럼 이 모티프가 핵심을 이루는  6:1-3절은 누구의 말이며, 또 어떤 의도에서 나온 말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까?

    판단은 각자의 몫.


    草人 최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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