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oogleSearch



추천영상: 12인치 천체망원경으로 촬영한 토성

Scientist. Husband. Daddy. --- TOLLE. LEGE
외부자료의 인용에 있어 대한민국 저작권법(28조)과 U.S. Copyright Act (17 USC. §107)에 정의된 "저작권물의 공정한 이용원칙 | the U.S. fair use doctrine" 을 따릅니다.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모든 글과 번역문들에 대해 (1) 복제-배포, (2) 임의수정 및 자의적 본문 발췌, (3) 무단배포를 위한 화면캡처를 금하며, (4) 인용 시 URL 주소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후원 | 운영] [대문으로] [방명록] [옛 방명록] [티스토리 (백업)]

이 블로그 검색

[© 최광민] 인디애나에는 인디언이 없다

라벨: ,


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03-11-27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제목

인디애나에는 인디언이 없다. (© 최광민)

순서
  1. 인디애나에는 인디언이 없다
  2. 파테르 노스테르 / Pater noster
  3. 필그림 파더즈 / Pilgrim Fathers
  4. 링컨, 크레이지 호스, 러쉬모어
  5. 신의 명령
  6. 인디애나에는 인디언이 없다.

1. 인디애나에는 인디언이 없다.

11월 4번째 목요일은 미국의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다. 미국에서 기념되는 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은 매사추세츠에 정착한 일군의 영국인들이 북미 원주민 (이하, "인디언")의 전적인 도움을 받아 겨울 동안 생존한 것을 감사하기 위해 시작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제 미국 어디에서도, 심지어 "인디애나/Indiana" 주에서조차 인디언을 보기란 쉽지 않다. 내가 본 것이라고는 그 붉은색으로 염색된 티셔츠를 입고 미식축구 경기장에서, 또 농구경기장에서 "고! 레드, Go! Red!"를 외쳐대는 백인들 뿐이다. '인디애나'에서 '인디언'을 볼 수 없다니! '앙꼬/단팥빵에 앙꼬가 없는 것이나 매한가지가 아닌가.


출처: Wikimedia Commons





2. 파테르 노스테르 / Pater noster

중세/르네상스 폴리포니(polyphony) 작곡가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작곡가를 단 한 명 추리라면, 플랑드르 출신의 15세기 작곡가 조스켕 데프레 (1440-1521)를 고르겠다. 그의 음악(종교음악 뿐 아니라 샹송을 포함한 세속가곡들 역시)은 간결하면서 화려하고, 어두우면서도 밝다. 늘 밝기만한 이탈리아 출신 팔레스트리나의 음악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고나 할까? 그의 음악 가운데서 또 다시 한 곡만 추리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의 모테트 {Pater noster, 우리 아버지}를 고를 것이다. 이 곡은 복음서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기도문, 즉, {주기도문}을 그 가사로 한다. (개인적으로는  {Taverner Consort}의 녹음을 최고로 친다.)



Pater noster, qui es in caelis,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sanctificetur nomen tuum.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고,
Adveniat regnum tuum.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시고,
Fiat voluntas tua, sicut in caelo et in terra.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하소서.
Panem nostrum quotidianum da nobis hodie,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et dimitte nobis debita nostra sicut et nos dimittimus debitoribus nostris.
우리에게 잘못한(빚진) 자들을 우리가 용서(탕감)해 주듯, 우리의 잘못도(빚을) 용서하시며,
Et ne nos inducas in tentationem,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sed libera nos a malo.
우리를 악에서 건지소서.

조스켕 데프레가 이 곡을 작곡한 서기 15세기 말, 당시 그는 바티칸 교황청의 교황전속채플인 시스티나 성당의 전속 음악감독이었다. 이 지위는 장차 르네상스 폴리포니 합창의 최고봉을 이루게 될 알레그리, 빅토리아, 모랄레스, 팔레스트리나가 취하게 될 자리이기도 했다. 이 무렵 1492년 제노바인 콜롬부스는 에스파니아 이자벨라 여왕의 후원 아래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고, 그 이후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에스파니아와 포르투갈은 남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전면적인 식민화 작업에 들어간다.

교황의 전속 예배당인 시스티나 성당에 조스켕 데프레의 이 아름다운 모테트 {파테르 노스테르}가 울려퍼졌을 무렵, 원주민 학살에 대한 교황청의 묵인을 등에 업은 피사로와 코르테즈 등이 이끄는 에스파니아 정복군 앞에 안데스의 잉카, 유카탄의 마야인, 멕시코의 아즈텍인들은 대량학살을 당하고 있었다.

피사로가, 코르테스가 외쳐부르던 "우리의 아버지(Pater noster)"는 피사로와 코르테스의 기도에 귀를 기울였을까? 그들의 학살을 통해 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되었을까? 과연 당신의 뜻(voluntas tuum)이 이 땅(in terra) 위에서 이루어졌을까?

답하기 쉬운 질문은 아니다.

하지만 아주 어려운 질문인 것도 아니다.




3. 필그림 파더즈 / Pilgrim Fathers

아메리카가 '발견'된 지 100여 년이 지나기 전, 로마카톨릭 교회는 종교개혁으로 분열되고, 분리된 프로테스탄트들은 또 다시 각자의 교리적 노선에 따라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헨리 8세의 영국국교회 분리에 이어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칼뱅주의 노선이 강화되던 영국국교회 (Aglican) 내부에는 여전히 불만족스런 수준의 개혁에 불만을 품은 여러 그룹들이 있었다. 그들은 주로 칼뱅의 교리로 무장했고, 여전히 로마카톨릭적 요소가 남아있는 국가교회 (영국국교회)로의 통합을 시도한 엘리자베스 1세의 {통일령}을 거부했다. 영국국교회를 거부하던 이들 그룹에는 칼뱅주의 노선에 입각한 퓨리탄 뿐 아니라 비-칼뱅주의 노선을 취한 퀘이커 등도 있었다.

주류 청교도(Puritan)들은 영국국교회의 (로마카톨릭적) 주교제도를 개혁해서 칼뱅이 도입한 장로제를 도입하려고 했지만, 사실상 국가교회 (state church) 즉, 국교회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들이 올리버 크롬웰 아래 청교도 혁명을 성공시켰을때, 그들의 목표는 그 당시에 상당히 칼뱅주의 교리의 영향권 아래있던 영국국교회를 더욱 칼뱅주의적인 국가교회와 정교일치적 정치구조로 변모시키는데 있었다.

국가교회를 장악하고자하던 주류 청교도와는 달리, 같은 칼뱅주의 노선이면서도 국가교회제도를 부정하고 정교분리를 주장하던 퓨리탄 분리파(Separatist) 들은 영국국교회에서의 완전한 분리를 주장하게 되었는데, 그동안 이들의 분리주의적 경향에 대해 관용적이던 엘리자베스 1세를 이은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와 영국국교회 지도부는 분리파 목사들과 순회설교자들의 투옥과 공직추방이라는 방식으로 강경대응했다. 여러차례 투옥 중 유명한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을 쓴 존 번연 역시 일반적인 청교도라기 보다는 분리파였다.

게인스보와 스크루비 두 곳을 거점으로 하던 분리파 중에서 노팅햄셔의 스크루비 그룹을 이끌던 케임브릿지 대학 출신의 윌리엄 브류스터와 존 로빈스 및 지역의 유지인 윌리엄 브랫포드 등은 1607-1608년에 종교적 자유를 위해 네덜란드 라이덴으로 이주해 공동체를 건설하게 되는데, 이들은 자신들을 '필그림(Pilgrim)'이라 불렀다. 로빈스와 브류스터는 각각 목사와 장로로서 공동체를 이끌었다. (칼뱅파 교단들에서의 목사는 장로의 한 형태이다).

이 분리파는 오늘날 미국에서 볼 수 있는 회중교회(Congregationalist)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추수감사절과 연관되어 흔히 말해지는 필그림 파더즈(Pilgrim Fathers)는 바로 이들 분리파 공동체에서 아메리카로 이주한 그룹이지, 영국에서 직접 이주한 청교도들이 아니다. 영국 본토의 "퓨리턴(청교도)"들은 분리파의 뉴잉글랜드 이주 이후인 1692년부터 북미로 왔으며, 주요 정착지는 매사추세츠와 뉴잉글랜드 일대였다. 이것은 미국의 장로/회중교회가 북동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역사적 이유다.

1620년 무렵, 이 라이덴 공동체는 경제적, 교육적 이유 때문에 아메리카로의 이주를 계획하게 된다. 로빈스 목사는 여러가지 이유로 잔류를 결정한 공동체 일원을 돌보기 위해 라이덴에 남았고 거기서 죽었다. 대신 브류스터 장로가 신대륙으로 이주를 원하는 그룹을 담담하게 되었다. 이들은 투자이민회사와 7년 간의 고용계약을 맺고 메이플라워 (Mayflower)호와 스피드웰(Speedwell) 두 척의 배를 용선계약했다. 추가된 분리파 신자들과 식민투자가들이 고용한 (분리파가 아닌) 이민개척자들이 합승하여 총 120여명이 영국의 사우스햄튼을 출항했지만, 배의 안전문제로 귀항해 결국 메이플라워호만 다시 플리머스(Pylmouth)를 출항하게 된다.



배에 탑승한 분리파는 처음에는 자신들은 필그림(Pilgrims), 기타 이민자를 이방인(Gentiles)로 나누는 배타적 입장을 견지했지만, 북 아메리카 대륙을 눈앞에 둔 11월21일 (그레고리우스력으로 11월 11일에 해당하는데, 분리파들은 (그리고 당시 유럽의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은) 로마카톨릭교회의 교황인 그레고리우스에 의해 개정된 달력을 따르지 않고 여전히 율리우스 달력을 썼다) 양 측의 평화를 도모하기위해 양 측의 법률적 평등을 보장한 '메이플라워 합의문'(Mayflower Compact)을 채택하고 존 카버를 첫 총독으로 뽑았다. 이로써 메이플라워호 승선자 전원이 '필그림'으로 호칭되게 된다. 메이플라워는 그해 (율리우스력) 11월12일에 현 프로빈스타운 항에 도착했다. 플리머스항에 하선을 시작한 것은 11월21일, 탑승자 전원이 상륙을 완료한 것은 12월11일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북아메리카에 첫발을 디딘 백인은 아니다. 그들 이전에 이미 동부 각지에는 식민개척회사가 설치한 정착촌들이 있었다. 미국인들은 이런 정착촌들이 생긴 이유가 경제적인 동기를 가졌고, 따라서 필그림 파더즈 처럼 '신앙의 자유'라는 거창한 명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대체로 이들 "비-종교적" 정착촌의 역사를 애써 무시한다. 그러나 전술했다시피, 메이플라워호에 승선한 필그림들의 이주 동기 역시 경제적 이유가 컸다는 점은 명시해 둘 필요가 있다.

첫 겨울에 몰아친 한파로 이듬해 봄까지 약 절반의 이주민들이 폐렴 등으로 사망했고, 살아남은 사람의 절반 이상이 어린이들이었다. 1621년 3월에 재선된 카버 총독이 재선 후 약 한달 만에 숨지자, 공동체는 브래드포드를 제 2대 총독으로 뽑았다. 한편, 지난 겨울 동안 이들 필그림들의 겨울나기를 감시하던 이 지역의 원주민인 왐파노아그족은 이주민들의 처참한 상황을 동정해 부족차원에서 도와주기로 결의한다. 필그림을 도운 왐파노아그 일족은 마사소이트 추장이 이끄는 파카노켓 부족으로 뉴잉글랜드 남동부 일대에 거주했는데, 필그림들이 오기 전까지는 67개 부족집단을 이루고 있다가 백인개척자들과의 싸움, 자체 내전, 1615-1617년에 걸쳐 백인들로부터 옮은 전염병 등으로 부족원 약 10만명이 감 죽고 5천명만 살아남은 상황이었다.

왐파노와그족의 마을에는 수 년전 백인들에게서 옮은 전염병(아마도 천연두)으로 멸족된 파툭셋(Patuxet)족 출신의 사연많은 스콴토라는 사람이 있었다. 스콴토는 필그림의 도착 15년 전인 1605년 영국으로 건너갔다가 1614년 뉴잉글랜드로 돌아왔는데, 이때 영국 노예상에게 사로잡혀 에스파니아에 팔렸간 후, 그곳에서 수도사들을 통해 기독교로 개종하고 그들의 도움으로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거기서 와바나케족 사모셋(Samoset)을 만나 1620년 둘이 함께 파툭셋으로 돌아왔던 차였다. 그러나 귀향해보니 자기 부족은 전염병으로 몰살당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웃 부족인 피카노켓족에게 귀화했다.

영어를 구사하는 스콴토와 사모셋의 도움을 받아, 필그림들은 4년전 멸족된 파툭셋 족의 밭에 밀과 보리, 그리고 인디언들이 제공해 준 옥수수를 심었다. 다른 곡물의 재배는 실패했지만 옥수수는 인디언 티스콴툼/스콴토의 도움으로 만족스런 수확을 거두게 되어, 도착 약 1년 만인 1621년 9월에서 11월 사이에 수확제를 가지게 된다. 정확한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중세부터 지켜진 '미카엘 대천사 축일'이자 동시에 영국전통의 추수기념제인 9월 29일의 "마이클마스 (Michaelmas)"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생각되어진다.. 총독 브래드포드는 이 기간을 축제일로 선포했고, 선장 스탠디시는 스콴토와 사모셋, 추장 마사소이트와 그들의 친척들을 초대했다. 잔치에 참가한 필그림 생존자는 약 50명, 스콴토 일행이 데려온 마사소이트 추장을 비롯한 인디언 전사들은 90명이었다. 감사축제와 더불어 양측 간에는 파툭셋족의 옛터에 정착한 플리머스 개척지를 인디언들이 공식인정하는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이후 계속된 백인들의 이주로 정착민이 늘어가면서 필그림들은 점차 원주민의 도움이 필요치 않게 되었고, 이후 양측 간에 상호불신감이 커지고 차츰 우호관계가 약화됐다. 결과적으로 양측 간의 긴장이 높아졌고, 이어지는 무력충돌로 인해 50년이 지나기 전에 왐파노아그족 역시 거의 전멸당했다.




4. 링컨, 크레이지 호스, 러쉬모어

일반의 상식과는 달리,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필그림 파더즈의 1621년 첫 수확 이후 계속 지켜져 온 것이 아니다. 실제로 청교도들은 어떤 특정한 날을 축제일로 삼는 전통을 로마카톨릭적 잔재로 여겨 "성서에 명시되지 않은 종교기념일"를 지키는 행위에 대해 심리적으로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축일에는 크리스마스도 포함된다. 매사추세츠 지역의 청교도들은 크리스마스를 "축제일/휴일"로 지정하는 것을 역시 오랫동안 법으로 금지했다..

그러다가 추수감사절이 공식 국경일로 발전하게 된 데는 19세기 잡지편집인이자 미국의 첫 여기자였던 새러 조세파 헤일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성공회 신자였던 헤일은 1840년부터 20년간 추수감사절을 연례행사로 만들 것을 청원하는 전국적 캠페인을 펼쳤는데, 1830년 뉴욕 주가 최초로 공식 감사절을 선포하였고, 1863년 링컨 대통령이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연방국경일로 선포하게 되었다. 한편, 남북전쟁의 참상을 회개하고 국가를 재건하는 계기로 삼기위해 1863년 3월30일 공표되고 4월 30일 시행된 "금식, 겸손, 기도의 날" 선언문에서 링컨은 이렇게 적고 있다.

Proclamation of a National Fast-Day. March 30, 1863.

Washington, D.C.

March 30, 1863

By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 Proclamation.


Whereas, the Senate of the United States, devoutly recognizing the Supreme Authority and just Government of Almighty God, in all the affairs of men and of nations, has, by a resolution, requested the President to designate and set apart a day for National prayer and humiliation.


And whereas it is the duty of nations as well as of men, to own their dependence upon the overruling power of God, to confess their sins and transgressions, in humble sorrow, yet with assured hope that genuine repentance will lead to mercy and pardon; and to recognize the sublime truth, announced in the Holy Scriptures and proven by all history, that those nations only are blessed whose God is the Lord.


And, insomuch as we know that, by His divine law, nations like individuals are subjected to punishments and chastisements in this world, may we not justly fear that the awful calamity of civil war, which now desolates the land, may be but a punishment, inflicted upon us, for our presumptuous sins, to the needful end of our national reformation as a whole People?


We have been the recipients of the choicest bounties of Heaven. We have been preserved, these many years, in peace and prosperity. We have grown in numbers, wealth and power, as no other nation has ever grown. But we have forgotten God. We have forgotten the gracious hand which preserved us in peace, and multiplied and enriched and strengthened us; and we have vainly imagined, in the deceitfulness of our hearts, that all these blessings were produced by some superior wisdom and virtue of our own. Intoxicated with unbroken success, we have become too self-sufficient to feel the necessity of redeeming and preserving grace, too proud to pray to the God that made us! It behooves us then, to humble ourselves before the offended Power, to confess our national sins, and to pray for clemency and forgiveness.

우리는 하늘이 허락한 최상의 혜택을 받아왔고, 이 나라는 오랜 세월 보전되고 평화와 번영을 누려왔다. 인구와 부, 국력 면에서도 여느 나라보다 앞섰다. 그러나 우리는 神을 잊어버렸다. 우리를 평화로써 지키시고 번영과 풍요, 힘을 베푸신 그 은혜의 손을 망각한 채, 이 모든 복이 우리 자신의 탁월한 지혜와 덕목 때문인 줄 착각하는 헛된 망상과 속임수로 지내왔다. 우리는 쉽사리 깨어지지 않는 성공에 도취한 나머지, 구속과 보호의 은총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자만하며 우리를 지으신 神께 기도하기에는 너무나 교만해졌다. 따라서 이제 의무적으로, 우리가 거스른 전능한 분 앞에 겸손히 꿇고, 이 나라의 죄를 자백하여 자비와 용서를 빌고자 한다…."
--- 번역: 최광민

Now, therefore, in compliance with the request, and fully concurring in the views of the Senate, I do, by this my proclamation, designate and set apart Thursday, the 30th. day of April, 1863, as a day of national humiliation, fasting and prayer. And I do hereby request all the People to abstain, on that day, from their ordinary secular pursuits, and to unite, at their several places of public worship and their respective homes, in keeping the day holy to the Lord, and devoted to the humble discharge of the religious duties proper to that solemn occasion. All this being done, in sincerity and truth, let us then rest humbly in the hope authorized by the Divine teachings, that the united cry of the Nation will be heard on high, and answered with blessings, no less than the pardon of our national sins, and the restoration of our now divided and suffering Country, to its former happy condition of unity and peace.

In witness whereof, I have hereunto set my hand and caused the seal of the United States to be affixed.
Done at the City of Washington, this thirtieth day of March, in the year of our Lord one thousand eight hundred and sixty-three, and of the Independence of the United States the eighty seventh.

By the President: Abraham Lincoln
William H. Seward, Secretary of State.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선언문에는 자만과 오만에 대한 '참회'는 있되, 원주민들에게 그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참회'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 링컨이 이런 담화문을 발표하고 전국적인 감사일을 선포할 무렵, 링컨이 조직한 제 7기병대는 미 대륙 중북부 미시시피강 유역을 누비며 원주민들을 살육하며 미시시피강 서쪽으로 몰아내고 있었다. 이 선언문이 선포되기 일년 전인 1862년, 링컨은 미네소타의 삼림 수우족 사형수 303명 가운데 39명을 처형하라고 지시했다. 자신들의 땅 90% 이상을 백인들에게 빼앗기고 미네소타강 연안에 몰려살다가 총궐기한 수우족은 제7기병대와의 전투패배로 포로 600여명 가운데 303명이 미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또한 감사절이 전국적 기념일로 선포된 1년 후인 1864년, 전직 감리교 목사였던 제7기병대의 시빙턴 (John Chivington) 대령은 '샌드 크리크(Sand Creek) 학살'을 자행했다. 미국정부로부터 안전보장약조를 받고 미국기와 백기를 올리고 있었던 샌드 크리크 지역의 남부 샤이엔족 부족민 600여명을 학살한 것이다.

1874년, 남북전쟁의 영웅인 조지 카스터 장군이 이끌던 불패의 제7기병대를 전멸시키고 원주민 지도자로 부상한 수우(Soux) 족 추장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는 원주민들을 결속하여 미국정부에 대항하지만, 그러나 결국 그도 기병대에 의해 살해되고 그의 라코타 수우족 전사 300여명은 1890년 사우스 타코다 서남부의 운디드니(Wounded Knee)에서 전멸한다.


Crazy Horse (출처: Wikimedia Commons)

한때 미국정부와 평화조약을 맺을 때, 왼손으로 악수하면서 크레이지 호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I shake with this hand because my heart is on this side.

"내가 이 손으로 악수하는 것은 내 심장이 이 쪽에 있기 때문이오."

링컨의 얼굴은 사우스 다코다州 러쉬모어산에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테오도어 루즈벨트와 함께 화강암 암벽에 새겨겨 있다. 그런데 바로 이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운디드니(Wounded Knee)가 있다. 러쉬모어의 암벽에 새겨진 링컨의 시선은 남서쪽 운디드니를 외면하고 그들의 선조가 도착한 동쪽을 향하고 있다. 노예를 해방시키고, 미국인의 오만을 참회할 것을 호소하며 감사절을 공표하던 신앙심 깊던 링컨의 심장은 오른쪽에서 뛰고 있었단 말인가?


출처: Wikimedia Commons

물론 북미 원주민이 그렇게 많이 죽어간 것이 모두 "링컨이 조직한" 제 7기병대의 학살 때문은 아니다.

풀리쳐상을 받은 책 {Guns, Germs, and Steel / 총, 균, 쇠}에서 다뤄지고 있는 것처럼, 대부분의 인디언들은 사실 병으로 죽어갔다. 물론 백인들에게서 옮겨진 전염병이긴 해도, 면역이 없던 원주민들이 홍역이나 천연두 등으로 죽은 탓을 모두 백인의 잘못으로 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아메리카의 남북에서 원주민들에게 행한 백인들의 명백한 잘못들이 있다. 민간인 학살, 강간, 노예사냥, 문맹을 이용한 땅의 합법적 탈취, 진실은폐 등은 분명한 비난을 받아야 한다.




5. 신의 명령

금과 은을 노린 에스파니아와 포르투갈의 잔인한 남아메리카 식민화는 로마 카톨릭의 선교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되었다. 북미의 인디언 말살정책은 주로 아메리카를 백인에게 주어진 신의 선물로 여기던 관점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특별히 19세기 중후반에 미국에서 유행했던 "Manifest Destiny, 자명의 운명"이론은 북미대륙에서의 미국의 팽창과 더 나아가 태평양 지역 (특별히 필리핀)으로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뒷받침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즉, 섭리는 자유와 자유정부를 실현하고 실험하기 위해 미국인에게 북미대륙에 뻗어나가고 또한 전 대륙을 소유하도록 명백한 권리를 주었다는 이론이다.

....And that claim is by the right of our manifest destiny to overspread and to possess the whole of the continent which Providence has given us for the development of the great experiment of liberty and federated self-government entrusted to us. --- John L, O'Sullivan, On December 27, 1845, {New York Morning News}  

혹자는 북미의 정복과정이 칼뱅주의적 시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더 자세히 생각해 본다면, 이것은 신의 '뜻'이란 단어의 용례를 혼동하는데서 발생한 문제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남미와 북미에서, 에스파니아, 포르투갈, 미국의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가나안을 정복해들어간 구약성서의 히브리인과 자신들을 같다고 생각하며 정당화하곤 했다. 신자로서 나는 아직도 살인을 금지한 신 야훼가 그토록 잔혹한 방법을 통해 카나안을 정복할 것을 히브리인들에게 지시했는지 정확한 해답을 얻을 수 없다.

토마스 아퀴나스라면 신이 (인간이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어떤 정당성을 가지고 언뜻 보기에 악으로 보이는 일을 인간에게 지시했다고 풀이할 것이고, 오캄의 윌리엄이라면 인간에게 적용되는 선악의 관념을 신에게 적용할 수 없으며 우리는 그저 신의 의지에 복종할 뿐이란 관점을 들어 절대적인 신의 의지를 변호할 것이다. 칼뱅은 이에서 더 나아가 신의 절대적 주권(Absolute soverignity)를 주장할 것이다. 만약 신의 명령이라면, 비록 그것이 인간의 눈에 불합리해 보여도 복종해야 할 것이다. 신을 절대적으로 옳고 정의로운 존재로 정의하는 경우라면 더욱 그러하다. 왜냐면 그러한 신의 명령은 인간의 눈에 불합리해 보이더라도 언제나 옳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기꺼이 복종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주의할 것이 있다. 카나안을 정복하던 히브리인에게는 신에게서 직접 계시를 받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었다. 만약 성서의 기록처럼 모세와 예언자들의 명령이 신의 명령과 100% 같았다고 믿는다면, 인간은 신의 의지를 거역할 아무런 권리도 의지도 가질 수 없고 또 가져서도 않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늘 성서 밖에서 발생한다. 문제는 십자군의 팔레스타인 침공, 에스파니아/포르투갈의 남미정복, 미국인의 아메리카 인디언 학살이 과연 정말로 신의 명령인지, 신의 뜻인지를 분간해 줄, 신의 직접적 계시를 받는 예언자가 이제 더이상 인간세상에 없다는 점이다.

이제 누가 그런 확신을 당신에게 줄 것인가? 교황인가? 목사인가? 달라이 라마인가? 이맘인가? 무당인가? 당신 자신인가? 누구를 믿든 믿는 것은 당신의 자유지만 어느 누구를 선택하더라도 당신은 반드시 이 한가지를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신의 목소리를 들었노라고 하는 사람들 간에 벌어지는 불일치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하나의 신이 여러 사람에게 다른 것을 지시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넌센스다.



1899년, 미국의 맥킨리 대통령은 기도 중 신의 지시를 듣고 그 무렵 에스파니아로부터 독립국을 선언한 필리핀을 식민지화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미국 최초의 제국주의 정복전쟁인 필리핀-미국 전쟁이었다. 이 결과, 일본과 미국은 카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묵인하는 대신, 미국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묵인하기로 했다. 아래는 개전 전인 1898년 11월 21일, 맥킨리 대통령이 미국 감리교회 지도자들을 만나 전쟁의 타당성을 설득한 내용의 일부이다.

Source: General James Rusling, “Interview with President William McKinley,” The Christian Advocate 22 January 1903, 17. Reprinted in Daniel Schirmer and Stephen Rosskamm Shalom, eds., The Philippines Reader (Boston: South End Press, 1987), 22–23.

"...Hold a moment longer! Not quite yet, gentlemen! Before you go I would like to say just a word about the Philippine business. I have been criticized a good deal about the Philippines, but don’t deserve it. The truth is I didn’t want the Philippines, and when they came to us, as a gift from the gods, I did not know what to do with them. When the Spanish War broke out Dewey was at Hongkong, and I ordered him to go to Manila and to capture or destroy the Spanish fleet, and he had to; because, if defeated, he had no place to refit on that side of the globe, and if the Dons were victorious they would likely cross the Pacific and ravage our Oregon and California coasts. And so he had to destroy the Spanish fleet, and did it! But that was as far as I thought then.

When I next realized that the Philippines had dropped into our laps I confess I did not know what to do with them. I sought counsel from all sides—Democrats as well as Republicans—but got little help. I thought first we would take only Manila; then Luzon; then other islands perhaps also. I walked the floor of the White House night after night until midnight; and I am not ashamed to tell you, gentlemen, that I went down on my knees and prayed Almighty God for light and guidance more than one night. And one night late it came to me this way—I don’t know how it was, but it came:
(1) That we could not give them back to Spain—that would be cowardly and dishonorable; (2) that we could not turn them over to France and Germany—our commercial rivals in the Orient—that would be bad business and discreditable; (3) that we could not leave them to themselves—they were unfit for self-government—and they would soon have anarchy and misrule over there worse than Spain’s was; and (4) that there was nothing left for us to do but to take them all, and to educate the Filipinos, and uplift and civilize and Christianize them, and by God’s grace do the very best we could by them, as our fellow-men for whom Christ also died. And then I went to bed, and went to sleep, and slept soundly, and the next morning I sent for the chief engineer of the War Department (our map-maker), and I told him to put the Philippines on the map of the United States (pointing to a large map on the wall of his office), and there they are, and there they will stay while I am President!

“… 필리핀 문제가 우리쪽으로 넘어왔을때, 솔직히 그들이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 하고 처음에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민주당, 공화당을 포함해 백방으로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죠. 처음에는 마닐라만 취하면 된나고 생각했다가 다시 루손섬, 그리고 나아가 다른 섬들도 점령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밤마다 늦은 밤까지 백악관을 서성이며 이 문제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부끄럽지 않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전능한 하느님께 저를 인도해 달라고 여러날 밤을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밤 늦게, 하느님의 응답이 저에게 이렇게 다가왔습니다. 어떻게 그런 응답이 왔는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만, 그것은 분명한 확신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1) 우린 필리핀 제도를 스페인에게 되돌려줄 수 없다. 이것은 비겁하고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2) 그렇다고 동양에서 미국과 사업적 경쟁관계에 있는 프랑스나 독일에게 넘겨줄 수도 없는데 그것은 오판이자 또 잘못된 일이다 (3) 그렇다고 필리핀인들 손에 맡길 수도 없다. 그들은 자치정부를 운영할 자질이 못되고 결국 머지않아 무정부, 무법지대가 되어버려 스페인 지배 때보다 상황이 더 나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4) 결국 우리에 남은 선택은 필리핀 제도 전체를 점령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처럼 그들을 위해서도 죽으셨기에 필리핀 사람들을 같은 동료시민으로서 교육하고 그들을 고양하고 문명화시키는 일 뿐이란 것이었습니다....” --- 번역: 최광민

그런가하면 2003년 5월,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안보작전참모들과 새벽에 바이블 스터디를 하면서 이라크 침공이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란 분명한까 확신을 받았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나는 윌리엄 맥킨리와 조지 W. 부시가 신의 대변자와 예언자라는 것을 믿어야 할까? 그렇다면 맥킨리와 부시와는 다른 목소리를 들었노라고 말하는 사람은 도대체 어디가서 누구에게 엉뚱한 소리를 듣고왔단 말일까?

그러므로 내가 "신의 의지에 복종할 것인가 거역할 것인가?"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과연 신의 명령인지 아닌지?"를 알고 분별함에 있다.

  • 신의 명령이 아닌 것을 멋대로 저질러 놓고서, "Fiat voluntas tua, sicut in caelo et in terra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면,
  • 남의 빵을 실컷 약탈해 놓고서, "Panem nostrum quotidianum da nobis hodie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소서)"라고 기도한다면,
  • 죄없는 사람을 실컷 두들켜 패고서, "et dimitte nobis debita nostra sicut et nos dimittimus debitoribus nostris (우리에게 잘못한 자들을 용서하듯, 우리의 잘못도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한다면,
  • 제발로 유혹에 빠져놓고서, "Et ne nos inducas in tentationem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면,
  • 온갖 악한 일은 다 저질러 놓고서, "sed libera nos a malo (우리를 악에서 건지소서.)"라며 거룩한 표정으로 기도한다면,

이것을 과연 신에게 겸손히 도움을 청하는 기도라 불러야 할 것인가? 아니면 신을 모독하기 위해 작정한 하나의 불경스런 퍼포먼스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예수는 자신이 가르쳐준 기도를 모독하는 이들에게 자비로운 미소로 응할 것인가? 아니면 성전 환전상과 장사치들의 좌판을 뒤집던 분노로 그들을 대할 것인가?

인간의 머리가 신체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이유는 행동하기 앞서 생각하라는 뜻일 것이다. 이 순서가 뒤바뀐다면, 인간은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걷거나, 혹은 네 발로 걸어다니는 것이 합당하다. 이것은 인간에겐 가련한 일이고, 머리를 거기에 만들어 준 신에게는 모독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명령을 "행"하기 앞서, 그것이 과연 신의 명령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것도 어설프게가 아니라 분명하게. 이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6. 인디애나에는 인디언이 없다.

블루밍턴 다운타운에 있는 유명 주점 {Crazy Horse}에는 용감한 추장을 기리는 인디언 대신 온통 백인들 뿐이나, 이 주점마저도 추수감사절에는 문을 닫는다. 휴일을 맞은 고속도로에는, 인디애나폴리스의 자동차 딜러인 Tim Curry가 판매한 중고차들이 범퍼나 트렁크문에 그의 이름 "Curry" 가 적힌 스티커를 붙이고 질주하고 있다.

휴일을 맞아 텅빈 이 대학촌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라고는 인도에서 온 진짜 인디언 학생들 뿐.

Curry.
카레.

콜롬부스가 발견한 이 대륙은 과연 '인도'였던 것이다.


草人





라벨: ,





Scientist. Husband. Daddy. --- TOLLE. LEGE
외부자료의 인용에 있어 대한민국 저작권법(28조)과 U.S. Copyright Act (17 USC. §107)에 정의된 "저작권물의 공정한 이용원칙 | the U.S. fair use doctrine" 을 따릅니다.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모든 글과 번역문들에 대해 (1) 복제-배포, (2) 임의수정 및 자의적 본문 발췌, (3) 무단배포를 위한 화면캡처를 금하며, (4) 인용 시 URL 주소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후원 | 운영] [대문으로] [방명록] [옛 방명록] [티스토리 (백업)] [신시내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