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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아그리콜라 傳記 (De Vita Iulii Agricolae)와 팍스로마나
라벨:
역사,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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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03-04-01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제목
아그리콜라 傳記 (De Vita Iulii Agricolae)
순서
- 팍스 로마나
- 칼가쿠스 vs. 아그리콜라
AD 2세기 초, 하드리아누스 황제 치세의 로마제국 영토 / Wikimedia Commons
1. 팍스 로마나
가끔씩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읽을 때마다 이 소위 철인황제의 이중성에 놀라곤 한다. 전투가 없는 밤에는 등잔불 아래서 관용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을 적던 스토아 철학자가, 낮이 되어 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전쟁터에 나갔을 때는 정반대로 잔혹한 로마군단의 통솔자로 돌변한 점 말이다.
로마인들은 침략전쟁을 늘 대의명분 이행과 선진문명 전파란 프로파겐다와 연관지었다. 그러나 비단 로마 만의 특징은 아니다. 역사상 거의 모든 세계제국의 공통점인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문명을 전파하겠다는 갸륵한 정신이 늘 대규모 정복전쟁과 맞물려 있다는 점은 간과될 수 없다.
자유/평등/박애의 프랑스 대혁명 정신을 전파하겠다며 '황제' 나폴레옹은 프랑스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전 유럽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소련과 미국은 각각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전파/수호하겠다며 침략을 수행했다. 물론 로마인들이 문명을 전파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사실상 이 논리는 모든 제국의 식민통치를 변호하기 위해 사용된다. 마케도니아는 헬레니즘 세계에, 로마는 속주들에, 중국은 변방 오랑캐들에, 영국은 인도와 아프리카에, 일본은 동아시아 일대에 소위 "선진적 가치" (혹은 문명)를 이식하겠다며 침략을 정당화했다. 로마인들은 피정복민을 노예로 부려, 대규모 콜로세움과 목욕탕을 세우고, 수도교를 건설하고, 길을 닦고나서는 그것을 '문명'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것이 또 '문명'이 아닌 것도 아니고, 또 정복자들이 그런 것을 "문명"이라고 생각했다는 이유 만으로 그들이 비난 받을 이유는 또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건설된 문명을 일컬어 로마인들은 그것을 로마의 평화 (Pax Romana)라고 불렀다. 그리고서 그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제국이 쓰러질 때까지 피나는 전쟁을 계속해야 했다
2. 칼가쿠스 vs. 아그리콜라
서기 98년,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Cornellius Tacitus)는 브리타니아에서 활동한 로마제국의 장군이자 정치가였던 아그리콜라(Cnaeus Julius Agricola)의 삶을 칭송하고 폭군이었던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격하시키기 위해 {아그리콜라 전기(De Vita Iulii Agricolae}를 썼다. 이 역사물은 로마제국의 권력암투와 중앙정부와 속주 간의 알력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들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 작품의 백미는 이미 로마화 되어가고 있던 브라티니아에서 로마의 지배에 저항한 브리톤인을 규합한 칼레도니아의 지도자 칼가쿠스(Calgacus)가 아그리콜라와의 일전을 앞두고 브리톤인들에게 하는 연설이다. 이것은 30장에서 32장에 걸쳐 나온다. 거기서 칼가쿠스는 피지배자의 입장에서 지배자들이던 로마인들에 대해 이렇게 독설을 퍼붓는다.
Auferre, trucidare, rapere, falsis nominibus imperium, atque, ubi solitudinem faciunt, pacem appellant.
약탈과 강탈, 살육. 이것들은 로마인들이 제국이란 위선적인 이름으로 자행하는 일이다. 황무지를 만들어놓고 로마인들은 그것을 '평화'라 부른다.
한편 그 반대편에서는 아그리콜라가 로마군단을 독려하고 있다.(33-34장). 아그리콜라의 연설을 들은 8000명의 중무장 보병과 3000명의 기갑병은 열정적으로 그의 연설에 환호를 보냈고 이어지는 전투는 전적으로 로마군단의 일방적 우세로 이어진다.
그런데 나는 이 부분에서 대단히 미묘한 인상을 받았다. 칼가쿠스의 연설을 인용한던 타키투스는 왠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브리톤인들의 주장에 상당한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타키투스가 그의 연설을 직접 받아적었을리는 없으니 칼가쿠스의 연설은 다소 간의 윤색을 통한 그의 창작일 것이다. 그렇다면 타키투스는 로마의 정복전쟁이 가지는 이중성을 얼떨결에 고백해 버린 셈. 그래서인지, 타키투스의 이 책은 그의 원래의 목적과는 달리 주인공인 아그리콜라보다, 칼가쿠스가 이끈 브리톤인들의 저항기록에 대한 자료로 더 많이 인용된다.
타키투스가 이 책에 남긴 최고의 문장이 아그리콜라의 적인 칼가쿠스의 독설이라는 점은 매우 아이러니 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팍스 로마나'는 그저 '로마'의 평화일 뿐.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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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최광민, Kwangmin Choi, 2003-04-01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제목
아그리콜라 傳記 (De Vita Iulii Agricolae)
순서
- 팍스 로마나
- 칼가쿠스 vs. 아그리콜라
AD 2세기 초, 하드리아누스 황제 치세의 로마제국 영토 / Wikimedia Commons
1. 팍스 로마나
가끔씩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읽을 때마다 이 소위 철인황제의 이중성에 놀라곤 한다. 전투가 없는 밤에는 등잔불 아래서 관용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을 적던 스토아 철학자가, 낮이 되어 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전쟁터에 나갔을 때는 정반대로 잔혹한 로마군단의 통솔자로 돌변한 점 말이다.
로마인들은 침략전쟁을 늘 대의명분 이행과 선진문명 전파란 프로파겐다와 연관지었다. 그러나 비단 로마 만의 특징은 아니다. 역사상 거의 모든 세계제국의 공통점인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문명을 전파하겠다는 갸륵한 정신이 늘 대규모 정복전쟁과 맞물려 있다는 점은 간과될 수 없다.
자유/평등/박애의 프랑스 대혁명 정신을 전파하겠다며 '황제' 나폴레옹은 프랑스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전 유럽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소련과 미국은 각각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전파/수호하겠다며 침략을 수행했다. 물론 로마인들이 문명을 전파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사실상 이 논리는 모든 제국의 식민통치를 변호하기 위해 사용된다. 마케도니아는 헬레니즘 세계에, 로마는 속주들에, 중국은 변방 오랑캐들에, 영국은 인도와 아프리카에, 일본은 동아시아 일대에 소위 "선진적 가치" (혹은 문명)를 이식하겠다며 침략을 정당화했다. 로마인들은 피정복민을 노예로 부려, 대규모 콜로세움과 목욕탕을 세우고, 수도교를 건설하고, 길을 닦고나서는 그것을 '문명'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것이 또 '문명'이 아닌 것도 아니고, 또 정복자들이 그런 것을 "문명"이라고 생각했다는 이유 만으로 그들이 비난 받을 이유는 또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건설된 문명을 일컬어 로마인들은 그것을 로마의 평화 (Pax Romana)라고 불렀다. 그리고서 그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제국이 쓰러질 때까지 피나는 전쟁을 계속해야 했다
2. 칼가쿠스 vs. 아그리콜라
서기 98년,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Cornellius Tacitus)는 브리타니아에서 활동한 로마제국의 장군이자 정치가였던 아그리콜라(Cnaeus Julius Agricola)의 삶을 칭송하고 폭군이었던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격하시키기 위해 {아그리콜라 전기(De Vita Iulii Agricolae}를 썼다. 이 역사물은 로마제국의 권력암투와 중앙정부와 속주 간의 알력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들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 작품의 백미는 이미 로마화 되어가고 있던 브라티니아에서 로마의 지배에 저항한 브리톤인을 규합한 칼레도니아의 지도자 칼가쿠스(Calgacus)가 아그리콜라와의 일전을 앞두고 브리톤인들에게 하는 연설이다. 이것은 30장에서 32장에 걸쳐 나온다. 거기서 칼가쿠스는 피지배자의 입장에서 지배자들이던 로마인들에 대해 이렇게 독설을 퍼붓는다.
한편 그 반대편에서는 아그리콜라가 로마군단을 독려하고 있다.(33-34장). 아그리콜라의 연설을 들은 8000명의 중무장 보병과 3000명의 기갑병은 열정적으로 그의 연설에 환호를 보냈고 이어지는 전투는 전적으로 로마군단의 일방적 우세로 이어진다.
그런데 나는 이 부분에서 대단히 미묘한 인상을 받았다. 칼가쿠스의 연설을 인용한던 타키투스는 왠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브리톤인들의 주장에 상당한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타키투스가 그의 연설을 직접 받아적었을리는 없으니 칼가쿠스의 연설은 다소 간의 윤색을 통한 그의 창작일 것이다. 그렇다면 타키투스는 로마의 정복전쟁이 가지는 이중성을 얼떨결에 고백해 버린 셈. 그래서인지, 타키투스의 이 책은 그의 원래의 목적과는 달리 주인공인 아그리콜라보다, 칼가쿠스가 이끈 브리톤인들의 저항기록에 대한 자료로 더 많이 인용된다.
타키투스가 이 책에 남긴 최고의 문장이 아그리콜라의 적인 칼가쿠스의 독설이라는 점은 매우 아이러니 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팍스 로마나'는 그저 '로마'의 평화일 뿐.
草人
이렇게 건설된 문명을 일컬어 로마인들은 그것을 로마의 평화 (Pax Romana)라고 불렀다. 그리고서 그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제국이 쓰러질 때까지 피나는 전쟁을 계속해야 했다
2. 칼가쿠스 vs. 아그리콜라
서기 98년,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Cornellius Tacitus)는 브리타니아에서 활동한 로마제국의 장군이자 정치가였던 아그리콜라(Cnaeus Julius Agricola)의 삶을 칭송하고 폭군이었던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격하시키기 위해 {아그리콜라 전기(De Vita Iulii Agricolae}를 썼다. 이 역사물은 로마제국의 권력암투와 중앙정부와 속주 간의 알력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들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 작품의 백미는 이미 로마화 되어가고 있던 브라티니아에서 로마의 지배에 저항한 브리톤인을 규합한 칼레도니아의 지도자 칼가쿠스(Calgacus)가 아그리콜라와의 일전을 앞두고 브리톤인들에게 하는 연설이다. 이것은 30장에서 32장에 걸쳐 나온다. 거기서 칼가쿠스는 피지배자의 입장에서 지배자들이던 로마인들에 대해 이렇게 독설을 퍼붓는다.
Auferre, trucidare, rapere, falsis nominibus imperium, atque, ubi solitudinem faciunt, pacem appellant.
약탈과 강탈, 살육. 이것들은 로마인들이 제국이란 위선적인 이름으로 자행하는 일이다. 황무지를 만들어놓고 로마인들은 그것을 '평화'라 부른다.
한편 그 반대편에서는 아그리콜라가 로마군단을 독려하고 있다.(33-34장). 아그리콜라의 연설을 들은 8000명의 중무장 보병과 3000명의 기갑병은 열정적으로 그의 연설에 환호를 보냈고 이어지는 전투는 전적으로 로마군단의 일방적 우세로 이어진다.
그런데 나는 이 부분에서 대단히 미묘한 인상을 받았다. 칼가쿠스의 연설을 인용한던 타키투스는 왠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브리톤인들의 주장에 상당한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타키투스가 그의 연설을 직접 받아적었을리는 없으니 칼가쿠스의 연설은 다소 간의 윤색을 통한 그의 창작일 것이다. 그렇다면 타키투스는 로마의 정복전쟁이 가지는 이중성을 얼떨결에 고백해 버린 셈. 그래서인지, 타키투스의 이 책은 그의 원래의 목적과는 달리 주인공인 아그리콜라보다, 칼가쿠스가 이끈 브리톤인들의 저항기록에 대한 자료로 더 많이 인용된다.
타키투스가 이 책에 남긴 최고의 문장이 아그리콜라의 적인 칼가쿠스의 독설이라는 점은 매우 아이러니 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팍스 로마나'는 그저 '로마'의 평화일 뿐.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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