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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을씨년스럽다"는 과연 1905년 을사년의 을사조약에서 유래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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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草人 최광민 2025-01-01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글들에 대해 저자의 동의없는 전문복제/배포 -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를 금하며, 인용 시 글의 URL 링크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 최광민] "을씨년/스럽다"란 표현은 1905년 을사년의 을사조약에서 유래했을까?
순서
- "을씨년/스럽다"란 표현은 1905년 을사년의 을사조약에서 유래했다?
- 1989년 연변 조선족 학자 안옥규의 {어원사전}, "을씨년스럽다"
- 1938년 문세영의 {조선어사전}, "을시년스럽다"
- 1920년 조선총독부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 "을시년스럽다"
- 1908년 이해조의 신소설 {빈상셜}, "을사년시러"
- 1897년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한영자전}, "을ᄉᆞ"
- 1855년 조재삼의 {송남잡지 松南雜識}, "을사년 乙巳年"
- 1725-1761년 구상덕의 {승총명록 勝聰明錄}
- 1785년 을사년의 {정감록} 역모사건
- 맺음말
# "을씨년/스럽다"란 표현은 1905년 을사년의 을사조약에서 유래했다?
2024년 12월 초에 벌어진 윤석열 대통령의 뜬금없는 비상계엄선포/친위쿠데타에 이어 연말에는 무안공항에서 벌어진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로 인해 흉흉하고 을씨년스런 연말을 보내서인지, 옛 친구로부터 을사년과 관련된 YTN 유투브 영상과 함께 새해 메시지를 받았다.
그 중에서 일부만 인용한다.
영상의 내용을 채록한다.
".... 지금 들어도 이렇게 화가 나는데 그 당시 조선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우리나라가 일본의 속국이 된 거나 다름없었으니 국민들의 마음이 얼마나 슬프고 흉흉했을지 짐작이 가고 남습니다.
폭우 피해 소식을 전하는 뉴스인데, ‘을씨년스럽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춥다? 무섭다? 의심스럽다?
정확히 무슨 뜻일까요? 사실 ‘을씨년스럽다’는 우리말에는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1905년 11월 17일! 이날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정말 치욕스러운 날이죠. 지금 들어도 이렇게 화가 나는데 그 당시 조선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우리나라가 일본의 속국이 된 거나 다름없었으니 국민들의 마음이 얼마나 슬프고 흉흉했을지 짐작이 가고 남습니다.
그 해 1905년이 을사년이었습니다. 그 뒤 몹시 쓸쓸하고 어수선한 날을 맞으면, 사람들은 그 분위기가 마치 ‘을사년과 같다’해서 ‘을사년스럽다’라는 말을 썼습니다.
실제로 1908년에 나온 이해조의 소설 ‘빈상설’에는 ‘을사년스럽다’라는 표현이 나오고요, 1920년판 ‘조선어사전’에는 ‘을시년스럽다’로 표기되었다가, 1957년 ‘큰사전’에 지금과 같은 ‘을씨년스럽다’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한마디로 ‘을씨년스럽다’는 날씨나 분위기가 몹시 스산하고 쓸쓸한 것을 뜻하는 말로, 1904년 을사늑약(1905년야 4년야 확인) 이 체결되던 을사년의 침통한 분위기를 비유한 표현입니다....."
정말???
꽤 예전에 논파된 잘못된 어원설명인데 참 생명력 질긴 오해라고 하겠다.
반박 이유를 몇가지 들 수 있는데, 일단 1989년부터 이 표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도록 하자.
# 1989년 연변 조선족 학자 안옥규의 {어원사전}, "을씨년스럽다"
"을씨년스럽다"란 표기법은 해방 이후엔 "을시년스럽다"에서 저 형태로 고정되어 현재까지 내려왔는데, 난 사실 "을씨년스럽다"의 어원을 1905년 을사년과 연관짓는 해석을 1990년대 이전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 주장이 꽤 현대적 해석이라고 늘 생각해 왔다.
그럼 "을씨년스럽다"의 어원을 1905년 을사조약과 연결짓는 (최근의) 주장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내가 아는 한 그 최초의 출처는 1989년 중국 연변 조선족 학자인 안옥규가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를 통해 출판한 {어원사전}이다. 안옥규는 '을씨년스럽다'의 어원을 이 사전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아마도 북한의 관점이 반영된 듯 하다.
"일제가 리조봉건 통치배들을 위협 공갈하여 한일협상조약을 강압적으로 체결한 해이다. 참으로 을사년은 조선인민에게 있어서 가장 치욕스럽고 저주로운 해였다. 여기로부터 마음이나 날씨 같은 것이 어수선하고 흐린 기운을 나타내는 것을 을씨년스럽다고하는데, 이것은 을사년스럽다라는 말이 변한 것이다."
흠 .... 그럼 한번 일제시대이던 1930년대 말로 시간여행을 해보도록 하자.
# 1920년 조선총독부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 "을시년스럽다"
조선총독부가 1920년 3월 30일 간행한 {조선어사전}은 조선어를 배우고자 하는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표제어는 한국어로 쓰고 설명은 일본말과 그림으로 하였다. 어휘수는 약 5만이다.
"을시년스럽다"란 형식으로 기록에 남은 첫번째 사례다. 어원설명은 없다.
그런데 이 "을시년"이 "을사년"이고, 또 이 "을사년"이 1905년의 그 을사년이라면, 1919년 3.1운동 직후인 1920년 {조선어사전}을 펴낸 조선총독부는 이 불경스런 "을시년스럽다"를 사전에서 제외시키고 싶지 않았을까?
# 1908년 이해조의 신소설 {빈상셜}, "을사년시러워"
1905년 을사조약 후 3년 뒤인 1908년 이해조(李海朝)가 발표한 신소설 {빈상셜}은 {제국신문}에 연재되다가 1908년에 광학서포(廣學書鋪)에서 책으로 간행하였다.처첩의 갈등을 주요 줄거리로 하여 혼인제도에 숨겨져 있던 계급성을 비판하고 신학문을 장려하는 전형적인 신소설이다.
이 책에 '을사년시러워'라는 표현이 한번 나온다. 평양집 안어사에게 빠져 재산을 탕진한 주인공 서졍길이 텅 빈 자기 집이 "을사년시러워 꿈에도 가기 싫"어하는 장면에 등장한다 ("졍길이가 만장 갓흔 져의 집은 을사년시러워 ᄭᅮᆷ에도 가기 실코 = 정길이가 만장 같은 자기 잡은 을씨년스러워 꿈에도 가기 싫고").
시장도 ᄒᆞ시겟구려 일 것 집이라고 와 보시니 이 모양이 되여 누구다려 슉ᄂᆡᆼ ᄒᆞᆫ 그릇 달나ᄒᆞᆯ ᄃᆡ가 업스니 에그 가이업셔라
이ᄋᆡ 놈아 뎌 짐 지어 가지고 ᄯᅡ라오너라 셔방님을 ᄂᆡ가 뫼시고 가셔 진지나 지어 드리겟다
셔방님 너모 락심ᄒᆞ시지 말고 우리 집으로나 가십시다 빈집에 혼ᄌᆞ 계시면 무엇 ᄒᆞ시오 마암만 상ᄒᆞ시ᄂᆞᆫᄃᆡ 어셔 이러나시오 어셔
졍길이가 져의 부모 초상을 ᄉᆡ로 맛ᄂᆞᆫ 듯시 한숨을 치 쉬고 ᄂᆡ리쉬며 검다쓰다 말 ᄒᆞᆫ 마듸 안이 ᄒᆞ고 화슌집을 ᄯᅡ라가더라
안이 되ᄂᆞᆫ 놈은 잡바져도 코가 ᄭᆡ아진다고 졍길이 일이 졈졈 억쳑이 되노라고 차집마루라가 일것 밥 가지고 갓다가 그 즁에 밥을 눗게 ᄒᆡ 왓ᄂᆞ니 반찬이 업나니 ᄒᆞᄂᆞᆫ 가진 포달을 평양집에게 당ᄒᆞ고 원통하고 분ᄒᆞᆫ 마암이 뭇득 나셔 혼ᄌᆞ말로 에그 밋살 것 ᄒᆡ라 ᄂᆡ 륙신 놀니고 어ᄃᆡ 가면 두 ᄯᆡ 밥 못 엇어먹을나구
못 들을 말 들을 말 다 듯고 오날ᄭᅡ지 참은 것은 아모 ᄃᆡ나 ᄒᆞᆫ곳에 업ᄃᆡ려 잇다 오날 쥭던지 ᄅᆡ일 쥭던지 죵질을 ᄒᆡ도 ᄒᆞᆫ집 죵질이나 ᄒᆞᄌᆡ더니 갈ᄉᆞ록 못 견ᄃᆡ겟다
ᄒᆞ고 그 길로 다른 집으로 가셔 발길을 ᄯᅮᆨ ᄭᅳᆫ으니 평양집 소식을 누가 잇셔 졍길이에게 젼ᄒᆞ야 쥴이요
졍길이 졔 마음에도 얼마ᄶᅳᆷ 의심이 나던 차에 화슌집이 엇더케 살마 노앗던지
놈이ᄭᅡ지 ᄃᆡ리고 화슌집에 와 눌너 잇스니 그럼으로 평양집이 삭군을 몇 차례 보ᄂᆡ여도 거취를 통치 못ᄒᆞ고
복단 어미 아비가 졔 ᄌᆞ식 쥭엇다ᄂᆞᆫ 말은 듯고 눈이 뒤집혀서 경무청으로 ᄌᆡ판소로 돌아ᄃᆡᆼ기며 원슈 갑하달나고 발괄을 ᄒᆞ며 안동 병문이 달토록 드나들어 상젼 셔방님을 맛나 보면 넉풀이를 실컨 ᄒᆞ랴 ᄒᆞ나 된장 항아리에 풋고초 ᄇᆡᆨ이듯 ᄒᆞᆫ 졍길이를 어ᄃᆡ 가 맛나 보리요
졍길이가 만장 갓흔 져의 집은 을사년시러워 ᄭᅮᆷ에도 가기 실코 화슌집 건너방에 게 발 물어 더진 드시 누엇스니 평양집 ᄒᆞ든 말과 일이 ᄌᆞ초지죵으로 력력히 ᄉᆡᆼ각이 나셔 두 눈이 반반ᄒᆡ지며 잠이 오지를 안이ᄒᆞᄂᆞᆫᄃᆡ 화슌집이 건너오더니 졍길이 가삼이 시원ᄒᆡ지며 셰상 근심이 봄눈 슬 듯 ᄒᆞᆫ다
(화) 왜 밤이 ᄉᆡ로 두셰 시가 되도록 안이 줌으시오
그갓짓 의리부동ᄒᆞᆫ 년을 못 니져 그리ᄒᆞ시오 사ᄂᆡᄃᆡ장부가 죨직ᄒᆞ기도 ᄒᆞ시오 이쳔만 동포에 계집이 부용이 ᄒᆞ나ᄲᅮᆫ으로 아시구려
그년을 ᄂᆡ가 즁ᄆᆡᄒᆡ 드린 ᄭᅡ닭에 마암에 미안ᄒᆞ고 붓그러워 셔방님 ᄃᆡᄒᆞᆯ 낫이 업소 ᄂᆡ가 나흔 ᄌᆞ식이라도 속을 모로ᄂᆞᆫᄃᆡ 외양이 하 흉치 안이ᄒᆞ닛가 것볼안이라고 속이 그다지 고약ᄒᆞᆯ쥴이야 누가 알아 그러기에 여러 놈에 코김 쏘인 것은 한ᄆᆡᆺ ᄃᆡᆼ이로 졔 틔를 ᄒᆞᆷ닌다
졀무나 졀문 량반이 혼ᄌᆞ 사시겟소 헌 고리도 ᄶᅡᆨ이 잇다ᄂᆞᆫᄃᆡ 에그 셔방님은 쳐복도 업셔 졍실부인은 그럿코 별실 아씨ᄂᆞᆫ 져러니 팔ᄌᆞ도 드셰기도 ᄒᆡ라
초부득삼이라니 셰 번 만에야 셜마 찰ᄯᅥᆨ근원을 못 맛나릿가 참ᄒᆞ게 잘 기른 녀렴집 ᄉᆡᆨ시에게 량별실 장가나 드러보시오
(졍) 무던ᄒᆞᆫ 쳐녀가 맛참 어ᄃᆡ 잇스라ᄂᆞᆫ ᄃᆡ도 업고 팔ᄌᆞ 사오나온 놈이 계집은 ᄯᅩ 엇어 무엇을 ᄒᆞ겟소
(화) 망칙시러워라 아모리 화김에 ᄒᆞ시ᄂᆞᆫ 말이지만 인물이 못낫소 ᄌᆡ산이 업소 이팔쳥츈에 홀아비로 늙을 일이 무엇이오
(졍) 그ᄂᆞᆫ 그럿소만은.................................
(화) ᄂᆡ가 즁ᄆᆡ를 ᄯᅩ ᄒᆞ기ᄂᆞᆫ 무안시러오나 일이 ᄒᆞ도 분ᄒᆡ셔 기를 쓰고 됴흔 ᄃᆡ 즁ᄆᆡ를 ᄒᆡ셔 금슬이 남 불지 안이케 잘 사시ᄂᆞᆫ 양을 죰 보겟소 팔문장안 억만 가구에 셜마 쳐녀 업슬나구 구ᄒᆞ지 안아셔 업지
나 알기에 위션 휼륭ᄒᆞᆫ ᄉᆡᆨ시가 잇ᄂᆞᆫᄃᆡ요 나도 알맛고 키도 다 잘아고 마암도 무던ᄒᆞᆫ걸 수족은 죠고마ᄒᆞ야 보기 실치 안코 눈ᄆᆡ라든지 니 모슴이라든지 ᄯᅥᆨ으로 빗기로 그러케 마암ᄃᆡ로 ᄒᆞᆯ 수 잇나
평양집 열 쥬어 안이 밧구지 말이 낫스니 말이지 자셰자셰 ᄯᅳᆺ어보면 평양집 인물이 한 곳 된 데 잇ᄂᆞᆫ 쥴 아시오 곱ᄑᆡ눈은 살긔가 다락다락ᄒᆞ고 ᄆᆡ부리코에 눈셥은 마죠 붓고 ᄲᅭ죡ᄒᆞᆫ쥬등이에 살빗은 웨그리 파르죡죡ᄒᆞᆫ지
그ᄅᆡ도 돌구 돌아셔 옷 ᄆᆡ암도리와 몸가츅을 ᄒᆞᆯ 만치 ᄒᆞ닛가 가진 흉이 다 뭇치고 번지구러ᄒᆡᆺ지 실상 볼 것 잇다구
졍길이가 열ᄲᅡ진 쟈 모양으로 화슌집 흐들갑 불이ᄂᆞᆫ 것을 듯더니 평양집 ᄉᆡᆼ각은 쳔리만리 밧그로 왼발 굴너 쑥엑ᄒᆞ게 되고 목구멍에 침이 말으게 화슌집을 죨으더라
1905년 을사년이 떠오르는가? 이 소설이 처음 연재된 {제국신문}이 이승만이 주필로 있던 민족주의적 성격의 일간지였긴 하지만, '을사년시러워'란 표현이 1905년 을사조약과 관련되어 있거나 반일감정과 연관되어 등장하진 않는다.
# 1897년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한영자전}, "을ᄉᆞ"
캐나다 출신으로 토론토 대학교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이어 신학을 공부한 후 토론토 YMCA를 통해 1889년 한국에 선교사로 부임했던 제임스 게일은, 1890년 부터 서울 예수교학당 (이후 경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후일 교장이 되었다. 만주 쪽에서 조선인들을 상대로 선교하면서 성서의 조선어 번역사업을 하던 존 로스 목사를 만난 후 미국 북장로회 선교회로 소속을 옮기고 1892년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 회원 자격으로 성서번역에 참석했다. 1894년 부터 1928년 은퇴할 때까지 서울 연동교회 1대 담임목사로 활동하고 캐나다/영국으로 은퇴해 1937년 별세했다.
바로 이 제임스 게일이 한국 개신교에 "하나님"이란 용어를 도입해 정착시킨 인물이다.
- [© 최광민] 천주, 상제, 하늘님, 하느님, 하나님
- https://kwangmin.blogspot.com/2013/03/blog-post_24.html
학부시절 문학과 여러 언어를 공부했기 때문에 언어학에 일가견이 있던 게일은, 1890년대 한국인들 상대로 영어를 가르치고 또 로스 및 언더우드 등과 조선어 성서번역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한영사전의 필요성을 느끼다가 지금봐도 꽤 방대한 조선어를 수집해 최초의 한영사전인 {한영자전}을 1897년 영국 런던의 Crosby Lockwood & Son 출판사를 통해 출판한다.
탈고와 인쇄는 1987년 1월 21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했다. 서문 마지막 부분에서 게일은 한국인 조력자들의 이름을 소개하고 있다.
지금 이 사전에서 찾아볼 곳은 제 57쪽의 12번째 표제어인 "을ᄉᆞ/을사 (아래 아)"다.
게일은 당시 이 "을ᄉᆞ" 가 60갑자의 "뱀 (비암)" 해라고 풀이했다. 그리고 영어로 이렇게 해설한다.
을사 s, 乙巳 (새) (뱀)
The 42nd year of the cycle 1845; 1905, 1965. A year of famine (1785) -- used now as an expression for poverty, suffering etc.
(60갑자)주기의 42번째 해. 1845년, 1905년, 1965년에 해당. 대기근이 들었던 해 (1785)였으며, 현재는 가난, 고난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 번역: 최광민
보다시피 게일은 '을사'란 표현이 1785년 정조 시절에 있었던 을사년 대기근과 관계있다고 풀이해 놓았다.
한국에서의 활동 거의 전부를 서울에서만 했던 게일의 이 사전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발음과 표현과 해석을 담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 두자. 게일이 1785년의 일을 자세히 알리는 없으니, 이 해석은 그의 조선인 조력자들에게서 듣고 게일이 받아 적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 1855년 조재삼의 {송남잡지 松南雜識}, "을사년 乙巳年"
{송남잡지 松南雜識}는 19세기 선비 조재삼(趙在三 1808-1866)이 다양한 주제를 33부로 분류하고 각각의 표제어를 설명해 14권으로 1855년 편찬한 책이다. 두 아들을 교육할 목적으로 씌여진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야단법석' 같은 단어들의 어원설명들이 등장하기도 해서 어원연구에도 흥미로운 책인데, 이 책에서 조재삼은 "을사년 乙巳年"이란 표제어에 대해 이런 해설을 달았다.
乙巳年 | 俗以乙巳年凶為畏故今無生歲樂者言之
을사년 | 세간에선 을사년을 흉하게 여겨 두려워하기 때문에, 낙이 없는 현재의 삶을 두고 이렇게들 말한다 / 번역: 최광민
그러니까 1905년 을사늑약이 있기 전 8년 전에도 (게일의 {한영자전}) 그리고 50년 전에도 (조재삼의 {송남잡지}) 사람들은 "을사년"을 흉한 해라 여기고 있었단 뜻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런걸까?
역사상 기록을 보면 '을사년'이라고 해서 늘 흉흉했던게 하니고, 또 '을사년'이 아닌 나머지 59해가 을사년보다 더 길했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 1725-1761년 구상덕의 {승총명록 勝聰明錄}
조선 중기 인조 시절 병정대기근 (1626-1627)과 계갑대기근 (1653-1654), 현종 시절 경신대기근 (1670-1671), 숙종시절 을병대기근 (1695-1696) 등이 전대미문의 대기근으로 회자되지만, 18세기 지구 북반구가 소빙하기에 접어들면서 발생한 기후변화로 흉년과 기근과 민란이 전 세계에서 발생했던 영/정조 시절의 가뭄과 홍수와 대기근도 무시할 수는 없다.
{승총명록 勝聰明錄}은 조선 영조 원년인 1725년에서 영조 37년 1761년까지 37년간 경상도 고성의 재지사족인 월봉 구상덕(具尙德)이 쓴 개인일기다.
그는 이 시절 조선에 해마다 찾아든 가뭄, 홍수, 흉년, 기근과 관련된 재난기록을 비중있게 기록했는데, 이 일기의 특징은 단편적 날씨 위주의 서술 뿐 아니라 그에 따른 작황내역, 물가변동 등의 내용도 추적하여 당시의 상황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는데 있다.
이 일기가 영조 재위기인 1761년까지의 기록만 담기 때문에, 아쉽게도 제임스 게일의 {한영자전}에서 언급한 1785년 임진년의 대기근 상황을 알 방법은 없지만, 대략 그 무렵 평민들의 삶이 어떠했을지 한번 가늠해 보자. 기후변화로 인해 농사가 잘 된 해가 거의 없다.
1755년
금년 농사는 대부분 흉작이다. … 온갖 곡식이 모두 여물지 않았는데 오직 메밀[木 麥]만 조금 여물었다. … 농사까지 또 큰 흉년을 당하고 染疾이 크게 퍼져 사망자가 매우 많다. 5, 6월 사이에는 큰 홍수가 져서 강에 연해있는 열읍에서 떠내려가고 매 몰된 사람이 부지기수이며, 시체와 집, 소나 말, 닭, 개가 강에 가득 떠내려 와 바다 어귀에 흩어져 있으며 어부의 그물에 걸린 수도 셀 수가 없다. … 날씨조차 매우 추워 서 道에 굶주려 얼어 죽은 사람이 있으니 지금 세상의 액운이 참혹하다고 할만하다
1756년
금년 봄에는 돌림병이 근래 없이 심하여 마을마다 골짜기마다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고 온 가족이 다 죽은 경우도 셀 수 없이 많다. 봄과 여름 사이에 사 람들이 살아갈 마음이 없으니 전쟁 없는 난리라고 이를 만하다. … 벼농사는 旱災에 상하긴 했지만 때맞춰 김매고 북돋운 곳은 거둘 것이 있다. 그러나 초상과 질병을 치 르느라 정신 없었던 자는 전부 때를 놓쳤기 때문에 절반이나 농사를 망쳐 흉년을 면치 못하였고, 온갖 밭곡식은 원래 여문 것이라곤 없었다.
1757년
금년 농사는 모든 곡식이 풍년이었는데, 들깨만 도리어 지난해에 미치지 못했다. 6ㆍ 7월 사이에 보리의 궁핍이 특히 심했고, 지금 시가는 7ㆍ8말에 지나지 않는다. 목화 는 처음에는 잘 되다가 장맛비에 손해를 입어 6ㆍ7斤에 지나지 않는다. 금주령이 여 전히 매우 엄격한데 歲時를 앞두고 성상의 하교가 거듭 내렸다. 민간에 질병이 없고 기아가 없어 태평시절이라고 말할 만하다.
1758년
(4.21) 가뭄으로 농가에서 비가 내리길 간절히 기다렸다. (7.16) 비가 내리지 않는 날이 없었다. (8.22) 지난번 내린 큰 비로 과거에 응시하러 가던 선비 중에 물에 빠 져 죽은 사람이 많다고 한다. (12.30) 올해는 풍년도 아니고 흉년도 아니지만 시가가 크게 올라 지금 正租는 15ㆍ16말로, 거의 全石의 비용이 된다. 쌀은 6말 몇 되이기에 농가의 불행이 심하다.
1759년
금년 농사는 곡식이 잘 여물긴 했는데 벼멸구 피해를 입어 흉년을 면치 못했다.
1760년
(6.21) 날씨가 비가 오지 않는 날이 없어 사람들이 모두 괴롭게 여겼다 (12.6) 못된 호랑이가 횡행하여 사람을 삼 베듯이 많이 죽였으니, 이 역시 시대의 변고이다. (12.30) 금년에는 모든 곡식이 고루 잘 여물어서 민간이 편안하고 화평하니, 풍년 들어 즐거운 해라고 할만하다. 그러나 금주령이 오히려 엄중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감히 술자리를 마련해 맘껏 마시지 못하니 나이 젊고 호탕한 사람들이 자못 원망스럽게 여겼다.
1761년
(5.1) 올 봄 모맥이 처음에는 잘 자란다고 칭했는데, 병충해로 피해를 당해 행인들도 흉흉했다. (5.14) 각지 마을의 개들이 발광하여 혹은 사람을 물거나 소를 물었는데 대부분의 소가 죽고 말았다. 어떤 사람이 전하기를, 호남 지역이 특히 심한데 많은 農牛가 미친개에게 물렸기 때문에 인부들이 직접 밭을 갈고, 보리농사 흉년이 또 심하여 사람들이 모두 허둥지둥 불안하다고 한다. (7.15) 올해 여름 두 차례 혹독한 가뭄을 겪으니 실로 괴이한 재앙이다. (7.22) 근래에 괴질이 있는데 걸린 사람은 번번이 혼절하고 숨이 막히기에 반드시 酒醋를 바르거나 마시는데 그런 연후에 효험이 없으면 사망에 이르니, ‘司理治只’라고 이름 했는데 괴이하고 괴이하도다. (8.12) 농사가 이미 흉작으로 판명되었지만, 장맛비가 이처럼 지루하게 내리니 필시 목화에 피해를 끼칠 것이다.
# 1785년 을사년 기근과 {정감록} 역모사건
그럼 혹시 조재삼의 {송남잡지}에서 가까운 을사년인 1785년 무렵에 사람들에게 큰 고통의 기억을 남긴 사건이 있었나 살펴보자. {송남잡지}가 나온게 1855년인데 그로부터 10년 전 1845년이 을사년이었고, 또 그보다 60년 전인 1785년이 게일의 {한영자전}에 등장하는 1785년 을사년이다.
게일의 {한영자전}에 실린 1785년에 해당하는 {정조실록 正祖實錄} 9년 기록엔 딱히 대기근이라 불릴 만한 사건이 없다. 다만 그보다 앞선 1783-1784년 두해 연달아 전국에 큰 흉년이 들어 조정에서 구휼사업을 실시했는데, 2년에 걸친 그 기근의 최종 여파가 1785년 을사년 - 특별히 을사년 봄의 보릿고개 - 까지 이어졌을 수도 있다.
1785년 을사년 당시 최고의 대형사건은 예언서 {정감록 鄭鑑錄}을 추종하는 세력이 기획했다 실패한 소위 "{정감록} 역모사건"이다. 이씨(李氏) 왕이 망하고 정씨(鄭氏) 왕이 나라를 세운다는 주장을 담은 {정감록}은 영조 15년인 1739년 5월 15일 자 {승정원일기 承政院日記}에 처음 등장하는데, 영조가 대신들에게 {정감록}이란 책이 어떤 책인지 묻고 대신들이 이를 예언서인 참서 혹은 비기의 한 종류라고 답하는 걸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 영조는 이 책자가 도적들 - 즉, 잠재적 반조정세력 -에게 널리 퍼져있음을 알고 경계할 것을 지시했다.
1785년 을사년의 역모사건은 3년 전인 1782년 진천에서 있었던 이경래와 문인방의 {정감록} 역모사건에 이어 발생한 또 하나의 {정감록} 역모사건으로, 경상도 하동과 충청도 당진 지역의 주형채, 문양해, 양형 등 평민들과 (정조의 외가인) 좌의정 홍낙순 아들 홍복영, 실세 노론 벽파임에도 중앙권력에서 소외된 이율, 훈련도감 구선복 등이 가담했고, 피의자를 친국한 정조는 이 역모사건들의 배후가 외가인 홍국영 등 홍씨 일가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의 실상은 {정조실록} 권 19, 1785년 2월 29일, 3월 8일, 3월 16일조, {승정원일기} 제1577책, 1785년 2월 29일조, 그리고 {정조대왕 행장}에 기록되었으며, 홍국영은 홍복영이 1785년 을사년 3-4월에 거병을 계획했다고 자백했다. 공초를 종합해 보면, 하동의 {정감록} 역모사건 가담자들은 1781년을 전후하여 동지를 모으고, 새 왕조를 개창할 의도로 참서/비서들인 {정감록}, {진정비결 眞淨秘訣}, {국조편년 國朝編年} 연구하며 세력을 확장하려고 한 것이다.
특별히 문광겸과 양형의 공초를 보면, 이들이 역모의 근거로 사용한 참서들 가운데 조선의 멸망과정을 예언한 {국조편년} 내용 중에는 1785년 을사년 봄에 대홍수가 발생해 임주(林州)와 옥구(沃溝) 사이가 몇 자 깊이로 물에 잠기는 사태를 필두로 각종 재해가 이어지다가 1792년부터 1807년까지 잇달아 전쟁이 벌어진 후 조선이 세 나라로 갈라질 것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승정원일기} 제1577책 1785년 2월 29일에 보면 을사년 전년인 1784년에, "소설(騷說)이 낭자(狼藉)하여 대소민인(大小民人)이 다투어 지리산 아래로 피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고 적고, 또 3월 10일에는 "전설이 낭자하고 떠들썩하기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아 지리산은 달아나 도망한 자의 소굴이 되었다"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1785년 을사년에 대한 흉흉한 소문은 이미 평민들 가운데 깊이 퍼져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1785년 "을사년 {정감록} 역모사건"은 이후, 역시 {정감록}에 바탕한 홍경래의 난과 동학농민봉기로 이어진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 맺음말
물론 1905년 을사년이 "을씨년"스럽긴 했을 것이다. 게다가 을사조약이 맺어진 날이 겨울로 접어든 11월 17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을씨년"의 어원이 "을사년"이긴 하되, 그 을사년은 1905년 대한제국/일본제국 간 을사조약이 맺어진 그 "을사년"은 아니라고 보는게 각종 자료를 살펴볼 때 훨씬 타당하다. 따라서 이 주장은 거의 확실히 민간어원설이라 나는 생각한다.
생각해 보자.
(일반 백성의 삶에 큰 영향은 없던)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1905년 을사년의 한이 "을사년/스럽다"란 표현으로 남았다면,
아예 조선/대한제국이 망해버린, 그래서 1905년 을사년의 충격보다 몇배는 컷던 1910년 경술년의 한은
왜
"경술년/스럽다"란 표현으로 남지 않았을까?
판단은 각자의 몫.
草人 최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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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草人 최광민 202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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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최광민] "을씨년/스럽다"란 표현은 1905년 을사년의 을사조약에서 유래했을까?
순서
- "을씨년/스럽다"란 표현은 1905년 을사년의 을사조약에서 유래했다?
- 1989년 연변 조선족 학자 안옥규의 {어원사전}, "을씨년스럽다"
- 1938년 문세영의 {조선어사전}, "을시년스럽다"
- 1920년 조선총독부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 "을시년스럽다"
- 1908년 이해조의 신소설 {빈상셜}, "을사년시러"
- 1897년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한영자전}, "을ᄉᆞ"
- 1855년 조재삼의 {송남잡지 松南雜識}, "을사년 乙巳年"
- 1725-1761년 구상덕의 {승총명록 勝聰明錄}
- 1785년 을사년의 {정감록} 역모사건
- 맺음말
폭우 피해 소식을 전하는 뉴스인데, ‘을씨년스럽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춥다? 무섭다? 의심스럽다?
정확히 무슨 뜻일까요? 사실 ‘을씨년스럽다’는 우리말에는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1905년 11월 17일! 이날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정말 치욕스러운 날이죠. 지금 들어도 이렇게 화가 나는데 그 당시 조선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우리나라가 일본의 속국이 된 거나 다름없었으니 국민들의 마음이 얼마나 슬프고 흉흉했을지 짐작이 가고 남습니다.
그 해 1905년이 을사년이었습니다. 그 뒤 몹시 쓸쓸하고 어수선한 날을 맞으면, 사람들은 그 분위기가 마치 ‘을사년과 같다’해서 ‘을사년스럽다’라는 말을 썼습니다.
실제로 1908년에 나온 이해조의 소설 ‘빈상설’에는 ‘을사년스럽다’라는 표현이 나오고요, 1920년판 ‘조선어사전’에는 ‘을시년스럽다’로 표기되었다가, 1957년 ‘큰사전’에 지금과 같은 ‘을씨년스럽다’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한마디로 ‘을씨년스럽다’는 날씨나 분위기가 몹시 스산하고 쓸쓸한 것을 뜻하는 말로, 1904년 을사늑약(1905년야 4년야 확인) 이 체결되던 을사년의 침통한 분위기를 비유한 표현입니다....."
정말???
꽤 예전에 논파된 잘못된 어원설명인데 참 생명력 질긴 오해라고 하겠다.
반박 이유를 몇가지 들 수 있는데, 일단 1989년부터 이 표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도록 하자.
# 1989년 연변 조선족 학자 안옥규의 {어원사전}, "을씨년스럽다"
# 1920년 조선총독부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 "을시년스럽다"
# 1908년 이해조의 신소설 {빈상셜}, "을사년시러워"
시장도 ᄒᆞ시겟구려 일 것 집이라고 와 보시니 이 모양이 되여 누구다려 슉ᄂᆡᆼ ᄒᆞᆫ 그릇 달나ᄒᆞᆯ ᄃᆡ가 업스니 에그 가이업셔라
이ᄋᆡ 놈아 뎌 짐 지어 가지고 ᄯᅡ라오너라 셔방님을 ᄂᆡ가 뫼시고 가셔 진지나 지어 드리겟다
셔방님 너모 락심ᄒᆞ시지 말고 우리 집으로나 가십시다 빈집에 혼ᄌᆞ 계시면 무엇 ᄒᆞ시오 마암만 상ᄒᆞ시ᄂᆞᆫᄃᆡ 어셔 이러나시오 어셔
졍길이가 져의 부모 초상을 ᄉᆡ로 맛ᄂᆞᆫ 듯시 한숨을 치 쉬고 ᄂᆡ리쉬며 검다쓰다 말 ᄒᆞᆫ 마듸 안이 ᄒᆞ고 화슌집을 ᄯᅡ라가더라
안이 되ᄂᆞᆫ 놈은 잡바져도 코가 ᄭᆡ아진다고 졍길이 일이 졈졈 억쳑이 되노라고 차집마루라가 일것 밥 가지고 갓다가 그 즁에 밥을 눗게 ᄒᆡ 왓ᄂᆞ니 반찬이 업나니 ᄒᆞᄂᆞᆫ 가진 포달을 평양집에게 당ᄒᆞ고 원통하고 분ᄒᆞᆫ 마암이 뭇득 나셔 혼ᄌᆞ말로 에그 밋살 것 ᄒᆡ라 ᄂᆡ 륙신 놀니고 어ᄃᆡ 가면 두 ᄯᆡ 밥 못 엇어먹을나구
못 들을 말 들을 말 다 듯고 오날ᄭᅡ지 참은 것은 아모 ᄃᆡ나 ᄒᆞᆫ곳에 업ᄃᆡ려 잇다 오날 쥭던지 ᄅᆡ일 쥭던지 죵질을 ᄒᆡ도 ᄒᆞᆫ집 죵질이나 ᄒᆞᄌᆡ더니 갈ᄉᆞ록 못 견ᄃᆡ겟다
ᄒᆞ고 그 길로 다른 집으로 가셔 발길을 ᄯᅮᆨ ᄭᅳᆫ으니 평양집 소식을 누가 잇셔 졍길이에게 젼ᄒᆞ야 쥴이요
졍길이 졔 마음에도 얼마ᄶᅳᆷ 의심이 나던 차에 화슌집이 엇더케 살마 노앗던지
놈이ᄭᅡ지 ᄃᆡ리고 화슌집에 와 눌너 잇스니 그럼으로 평양집이 삭군을 몇 차례 보ᄂᆡ여도 거취를 통치 못ᄒᆞ고
복단 어미 아비가 졔 ᄌᆞ식 쥭엇다ᄂᆞᆫ 말은 듯고 눈이 뒤집혀서 경무청으로 ᄌᆡ판소로 돌아ᄃᆡᆼ기며 원슈 갑하달나고 발괄을 ᄒᆞ며 안동 병문이 달토록 드나들어 상젼 셔방님을 맛나 보면 넉풀이를 실컨 ᄒᆞ랴 ᄒᆞ나 된장 항아리에 풋고초 ᄇᆡᆨ이듯 ᄒᆞᆫ 졍길이를 어ᄃᆡ 가 맛나 보리요
졍길이가 만장 갓흔 져의 집은 을사년시러워 ᄭᅮᆷ에도 가기 실코 화슌집 건너방에 게 발 물어 더진 드시 누엇스니 평양집 ᄒᆞ든 말과 일이 ᄌᆞ초지죵으로 력력히 ᄉᆡᆼ각이 나셔 두 눈이 반반ᄒᆡ지며 잠이 오지를 안이ᄒᆞᄂᆞᆫᄃᆡ 화슌집이 건너오더니 졍길이 가삼이 시원ᄒᆡ지며 셰상 근심이 봄눈 슬 듯 ᄒᆞᆫ다
(화) 왜 밤이 ᄉᆡ로 두셰 시가 되도록 안이 줌으시오
그갓짓 의리부동ᄒᆞᆫ 년을 못 니져 그리ᄒᆞ시오 사ᄂᆡᄃᆡ장부가 죨직ᄒᆞ기도 ᄒᆞ시오 이쳔만 동포에 계집이 부용이 ᄒᆞ나ᄲᅮᆫ으로 아시구려
그년을 ᄂᆡ가 즁ᄆᆡᄒᆡ 드린 ᄭᅡ닭에 마암에 미안ᄒᆞ고 붓그러워 셔방님 ᄃᆡᄒᆞᆯ 낫이 업소 ᄂᆡ가 나흔 ᄌᆞ식이라도 속을 모로ᄂᆞᆫᄃᆡ 외양이 하 흉치 안이ᄒᆞ닛가 것볼안이라고 속이 그다지 고약ᄒᆞᆯ쥴이야 누가 알아 그러기에 여러 놈에 코김 쏘인 것은 한ᄆᆡᆺ ᄃᆡᆼ이로 졔 틔를 ᄒᆞᆷ닌다
졀무나 졀문 량반이 혼ᄌᆞ 사시겟소 헌 고리도 ᄶᅡᆨ이 잇다ᄂᆞᆫᄃᆡ 에그 셔방님은 쳐복도 업셔 졍실부인은 그럿코 별실 아씨ᄂᆞᆫ 져러니 팔ᄌᆞ도 드셰기도 ᄒᆡ라
초부득삼이라니 셰 번 만에야 셜마 찰ᄯᅥᆨ근원을 못 맛나릿가 참ᄒᆞ게 잘 기른 녀렴집 ᄉᆡᆨ시에게 량별실 장가나 드러보시오
(졍) 무던ᄒᆞᆫ 쳐녀가 맛참 어ᄃᆡ 잇스라ᄂᆞᆫ ᄃᆡ도 업고 팔ᄌᆞ 사오나온 놈이 계집은 ᄯᅩ 엇어 무엇을 ᄒᆞ겟소
(화) 망칙시러워라 아모리 화김에 ᄒᆞ시ᄂᆞᆫ 말이지만 인물이 못낫소 ᄌᆡ산이 업소 이팔쳥츈에 홀아비로 늙을 일이 무엇이오
(졍) 그ᄂᆞᆫ 그럿소만은.................................
(화) ᄂᆡ가 즁ᄆᆡ를 ᄯᅩ ᄒᆞ기ᄂᆞᆫ 무안시러오나 일이 ᄒᆞ도 분ᄒᆡ셔 기를 쓰고 됴흔 ᄃᆡ 즁ᄆᆡ를 ᄒᆡ셔 금슬이 남 불지 안이케 잘 사시ᄂᆞᆫ 양을 죰 보겟소 팔문장안 억만 가구에 셜마 쳐녀 업슬나구 구ᄒᆞ지 안아셔 업지
나 알기에 위션 휼륭ᄒᆞᆫ ᄉᆡᆨ시가 잇ᄂᆞᆫᄃᆡ요 나도 알맛고 키도 다 잘아고 마암도 무던ᄒᆞᆫ걸 수족은 죠고마ᄒᆞ야 보기 실치 안코 눈ᄆᆡ라든지 니 모슴이라든지 ᄯᅥᆨ으로 빗기로 그러케 마암ᄃᆡ로 ᄒᆞᆯ 수 잇나
평양집 열 쥬어 안이 밧구지 말이 낫스니 말이지 자셰자셰 ᄯᅳᆺ어보면 평양집 인물이 한 곳 된 데 잇ᄂᆞᆫ 쥴 아시오 곱ᄑᆡ눈은 살긔가 다락다락ᄒᆞ고 ᄆᆡ부리코에 눈셥은 마죠 붓고 ᄲᅭ죡ᄒᆞᆫ쥬등이에 살빗은 웨그리 파르죡죡ᄒᆞᆫ지
그ᄅᆡ도 돌구 돌아셔 옷 ᄆᆡ암도리와 몸가츅을 ᄒᆞᆯ 만치 ᄒᆞ닛가 가진 흉이 다 뭇치고 번지구러ᄒᆡᆺ지 실상 볼 것 잇다구
졍길이가 열ᄲᅡ진 쟈 모양으로 화슌집 흐들갑 불이ᄂᆞᆫ 것을 듯더니 평양집 ᄉᆡᆼ각은 쳔리만리 밧그로 왼발 굴너 쑥엑ᄒᆞ게 되고 목구멍에 침이 말으게 화슌집을 죨으더라
1905년 을사년이 떠오르는가? 이 소설이 처음 연재된 {제국신문}이 이승만이 주필로 있던 민족주의적 성격의 일간지였긴 하지만, '을사년시러워'란 표현이 1905년 을사조약과 관련되어 있거나 반일감정과 연관되어 등장하진 않는다.
# 1897년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한영자전}, "을ᄉᆞ"
캐나다 출신으로 토론토 대학교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이어 신학을 공부한 후 토론토 YMCA를 통해 1889년 한국에 선교사로 부임했던 제임스 게일은, 1890년 부터 서울 예수교학당 (이후 경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후일 교장이 되었다. 만주 쪽에서 조선인들을 상대로 선교하면서 성서의 조선어 번역사업을 하던 존 로스 목사를 만난 후 미국 북장로회 선교회로 소속을 옮기고 1892년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 회원 자격으로 성서번역에 참석했다. 1894년 부터 1928년 은퇴할 때까지 서울 연동교회 1대 담임목사로 활동하고 캐나다/영국으로 은퇴해 1937년 별세했다.
바로 이 제임스 게일이 한국 개신교에 "하나님"이란 용어를 도입해 정착시킨 인물이다.
- [© 최광민] 천주, 상제, 하늘님, 하느님, 하나님
- https://kwangmin.blogspot.com/2013/03/blog-post_24.html
학부시절 문학과 여러 언어를 공부했기 때문에 언어학에 일가견이 있던 게일은, 1890년대 한국인들 상대로 영어를 가르치고 또 로스 및 언더우드 등과 조선어 성서번역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한영사전의 필요성을 느끼다가 지금봐도 꽤 방대한 조선어를 수집해 최초의 한영사전인 {한영자전}을 1897년 영국 런던의 Crosby Lockwood & Son 출판사를 통해 출판한다.
탈고와 인쇄는 1987년 1월 21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했다. 서문 마지막 부분에서 게일은 한국인 조력자들의 이름을 소개하고 있다.
지금 이 사전에서 찾아볼 곳은 제 57쪽의 12번째 표제어인 "을ᄉᆞ/을사 (아래 아)"다.
게일은 당시 이 "을ᄉᆞ" 가 60갑자의 "뱀 (비암)" 해라고 풀이했다. 그리고 영어로 이렇게 해설한다.
을사 s, 乙巳 (새) (뱀)The 42nd year of the cycle 1845; 1905, 1965. A year of famine (1785) -- used now as an expression for poverty, suffering etc.(60갑자)주기의 42번째 해. 1845년, 1905년, 1965년에 해당. 대기근이 들었던 해 (1785)였으며, 현재는 가난, 고난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 번역: 최광민
보다시피 게일은 '을사'란 표현이 1785년 정조 시절에 있었던 을사년 대기근과 관계있다고 풀이해 놓았다.
한국에서의 활동 거의 전부를 서울에서만 했던 게일의 이 사전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발음과 표현과 해석을 담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 두자. 게일이 1785년의 일을 자세히 알리는 없으니, 이 해석은 그의 조선인 조력자들에게서 듣고 게일이 받아 적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 1855년 조재삼의 {송남잡지 松南雜識}, "을사년 乙巳年"
{송남잡지 松南雜識}는 19세기 선비 조재삼(趙在三 1808-1866)이 다양한 주제를 33부로 분류하고 각각의 표제어를 설명해 14권으로 1855년 편찬한 책이다. 두 아들을 교육할 목적으로 씌여진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야단법석' 같은 단어들의 어원설명들이 등장하기도 해서 어원연구에도 흥미로운 책인데, 이 책에서 조재삼은 "을사년 乙巳年"이란 표제어에 대해 이런 해설을 달았다.
乙巳年 | 俗以乙巳年凶為畏故今無生歲樂者言之을사년 | 세간에선 을사년을 흉하게 여겨 두려워하기 때문에, 낙이 없는 현재의 삶을 두고 이렇게들 말한다 / 번역: 최광민
그러니까 1905년 을사늑약이 있기 전 8년 전에도 (게일의 {한영자전}) 그리고 50년 전에도 (조재삼의 {송남잡지}) 사람들은 "을사년"을 흉한 해라 여기고 있었단 뜻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런걸까?
역사상 기록을 보면 '을사년'이라고 해서 늘 흉흉했던게 하니고, 또 '을사년'이 아닌 나머지 59해가 을사년보다 더 길했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 1725-1761년 구상덕의 {승총명록 勝聰明錄}
조선 중기 인조 시절 병정대기근 (1626-1627)과 계갑대기근 (1653-1654), 현종 시절 경신대기근 (1670-1671), 숙종시절 을병대기근 (1695-1696) 등이 전대미문의 대기근으로 회자되지만, 18세기 지구 북반구가 소빙하기에 접어들면서 발생한 기후변화로 흉년과 기근과 민란이 전 세계에서 발생했던 영/정조 시절의 가뭄과 홍수와 대기근도 무시할 수는 없다.
{승총명록 勝聰明錄}은 조선 영조 원년인 1725년에서 영조 37년 1761년까지 37년간 경상도 고성의 재지사족인 월봉 구상덕(具尙德)이 쓴 개인일기다.
그는 이 시절 조선에 해마다 찾아든 가뭄, 홍수, 흉년, 기근과 관련된 재난기록을 비중있게 기록했는데, 이 일기의 특징은 단편적 날씨 위주의 서술 뿐 아니라 그에 따른 작황내역, 물가변동 등의 내용도 추적하여 당시의 상황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는데 있다.
이 일기가 영조 재위기인 1761년까지의 기록만 담기 때문에, 아쉽게도 제임스 게일의 {한영자전}에서 언급한 1785년 임진년의 대기근 상황을 알 방법은 없지만, 대략 그 무렵 평민들의 삶이 어떠했을지 한번 가늠해 보자. 기후변화로 인해 농사가 잘 된 해가 거의 없다.
1755년
금년 농사는 대부분 흉작이다. … 온갖 곡식이 모두 여물지 않았는데 오직 메밀[木 麥]만 조금 여물었다. … 농사까지 또 큰 흉년을 당하고 染疾이 크게 퍼져 사망자가 매우 많다. 5, 6월 사이에는 큰 홍수가 져서 강에 연해있는 열읍에서 떠내려가고 매 몰된 사람이 부지기수이며, 시체와 집, 소나 말, 닭, 개가 강에 가득 떠내려 와 바다 어귀에 흩어져 있으며 어부의 그물에 걸린 수도 셀 수가 없다. … 날씨조차 매우 추워 서 道에 굶주려 얼어 죽은 사람이 있으니 지금 세상의 액운이 참혹하다고 할만하다
1756년
금년 봄에는 돌림병이 근래 없이 심하여 마을마다 골짜기마다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고 온 가족이 다 죽은 경우도 셀 수 없이 많다. 봄과 여름 사이에 사 람들이 살아갈 마음이 없으니 전쟁 없는 난리라고 이를 만하다. … 벼농사는 旱災에 상하긴 했지만 때맞춰 김매고 북돋운 곳은 거둘 것이 있다. 그러나 초상과 질병을 치 르느라 정신 없었던 자는 전부 때를 놓쳤기 때문에 절반이나 농사를 망쳐 흉년을 면치 못하였고, 온갖 밭곡식은 원래 여문 것이라곤 없었다.
1757년
금년 농사는 모든 곡식이 풍년이었는데, 들깨만 도리어 지난해에 미치지 못했다. 6ㆍ 7월 사이에 보리의 궁핍이 특히 심했고, 지금 시가는 7ㆍ8말에 지나지 않는다. 목화 는 처음에는 잘 되다가 장맛비에 손해를 입어 6ㆍ7斤에 지나지 않는다. 금주령이 여 전히 매우 엄격한데 歲時를 앞두고 성상의 하교가 거듭 내렸다. 민간에 질병이 없고 기아가 없어 태평시절이라고 말할 만하다.
1758년
(4.21) 가뭄으로 농가에서 비가 내리길 간절히 기다렸다. (7.16) 비가 내리지 않는 날이 없었다. (8.22) 지난번 내린 큰 비로 과거에 응시하러 가던 선비 중에 물에 빠 져 죽은 사람이 많다고 한다. (12.30) 올해는 풍년도 아니고 흉년도 아니지만 시가가 크게 올라 지금 正租는 15ㆍ16말로, 거의 全石의 비용이 된다. 쌀은 6말 몇 되이기에 농가의 불행이 심하다.
1759년
금년 농사는 곡식이 잘 여물긴 했는데 벼멸구 피해를 입어 흉년을 면치 못했다.
1760년
(6.21) 날씨가 비가 오지 않는 날이 없어 사람들이 모두 괴롭게 여겼다 (12.6) 못된 호랑이가 횡행하여 사람을 삼 베듯이 많이 죽였으니, 이 역시 시대의 변고이다. (12.30) 금년에는 모든 곡식이 고루 잘 여물어서 민간이 편안하고 화평하니, 풍년 들어 즐거운 해라고 할만하다. 그러나 금주령이 오히려 엄중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감히 술자리를 마련해 맘껏 마시지 못하니 나이 젊고 호탕한 사람들이 자못 원망스럽게 여겼다.
1761년
(5.1) 올 봄 모맥이 처음에는 잘 자란다고 칭했는데, 병충해로 피해를 당해 행인들도 흉흉했다. (5.14) 각지 마을의 개들이 발광하여 혹은 사람을 물거나 소를 물었는데 대부분의 소가 죽고 말았다. 어떤 사람이 전하기를, 호남 지역이 특히 심한데 많은 農牛가 미친개에게 물렸기 때문에 인부들이 직접 밭을 갈고, 보리농사 흉년이 또 심하여 사람들이 모두 허둥지둥 불안하다고 한다. (7.15) 올해 여름 두 차례 혹독한 가뭄을 겪으니 실로 괴이한 재앙이다. (7.22) 근래에 괴질이 있는데 걸린 사람은 번번이 혼절하고 숨이 막히기에 반드시 酒醋를 바르거나 마시는데 그런 연후에 효험이 없으면 사망에 이르니, ‘司理治只’라고 이름 했는데 괴이하고 괴이하도다. (8.12) 농사가 이미 흉작으로 판명되었지만, 장맛비가 이처럼 지루하게 내리니 필시 목화에 피해를 끼칠 것이다.
# 1785년 을사년 기근과 {정감록} 역모사건
게일의 {한영자전}에 실린 1785년에 해당하는 {정조실록 正祖實錄} 9년 기록엔 딱히 대기근이라 불릴 만한 사건이 없다. 다만 그보다 앞선 1783-1784년 두해 연달아 전국에 큰 흉년이 들어 조정에서 구휼사업을 실시했는데, 2년에 걸친 그 기근의 최종 여파가 1785년 을사년 - 특별히 을사년 봄의 보릿고개 - 까지 이어졌을 수도 있다.
1785년 을사년 당시 최고의 대형사건은 예언서 {정감록 鄭鑑錄}을 추종하는 세력이 기획했다 실패한 소위 "{정감록} 역모사건"이다. 이씨(李氏) 왕이 망하고 정씨(鄭氏) 왕이 나라를 세운다는 주장을 담은 {정감록}은 영조 15년인 1739년 5월 15일 자 {승정원일기 承政院日記}에 처음 등장하는데, 영조가 대신들에게 {정감록}이란 책이 어떤 책인지 묻고 대신들이 이를 예언서인 참서 혹은 비기의 한 종류라고 답하는 걸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 영조는 이 책자가 도적들 - 즉, 잠재적 반조정세력 -에게 널리 퍼져있음을 알고 경계할 것을 지시했다.
1785년 을사년의 역모사건은 3년 전인 1782년 진천에서 있었던 이경래와 문인방의 {정감록} 역모사건에 이어 발생한 또 하나의 {정감록} 역모사건으로, 경상도 하동과 충청도 당진 지역의 주형채, 문양해, 양형 등 평민들과 (정조의 외가인) 좌의정 홍낙순 아들 홍복영, 실세 노론 벽파임에도 중앙권력에서 소외된 이율, 훈련도감 구선복 등이 가담했고, 피의자를 친국한 정조는 이 역모사건들의 배후가 외가인 홍국영 등 홍씨 일가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의 실상은 {정조실록} 권 19, 1785년 2월 29일, 3월 8일, 3월 16일조, {승정원일기} 제1577책, 1785년 2월 29일조, 그리고 {정조대왕 행장}에 기록되었으며, 홍국영은 홍복영이 1785년 을사년 3-4월에 거병을 계획했다고 자백했다. 공초를 종합해 보면, 하동의 {정감록} 역모사건 가담자들은 1781년을 전후하여 동지를 모으고, 새 왕조를 개창할 의도로 참서/비서들인 {정감록}, {진정비결 眞淨秘訣}, {국조편년 國朝編年} 연구하며 세력을 확장하려고 한 것이다.
특별히 문광겸과 양형의 공초를 보면, 이들이 역모의 근거로 사용한 참서들 가운데 조선의 멸망과정을 예언한 {국조편년} 내용 중에는 1785년 을사년 봄에 대홍수가 발생해 임주(林州)와 옥구(沃溝) 사이가 몇 자 깊이로 물에 잠기는 사태를 필두로 각종 재해가 이어지다가 1792년부터 1807년까지 잇달아 전쟁이 벌어진 후 조선이 세 나라로 갈라질 것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승정원일기} 제1577책 1785년 2월 29일에 보면 을사년 전년인 1784년에, "소설(騷說)이 낭자(狼藉)하여 대소민인(大小民人)이 다투어 지리산 아래로 피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고 적고, 또 3월 10일에는 "전설이 낭자하고 떠들썩하기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아 지리산은 달아나 도망한 자의 소굴이 되었다"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1785년 을사년에 대한 흉흉한 소문은 이미 평민들 가운데 깊이 퍼져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1785년 "을사년 {정감록} 역모사건"은 이후, 역시 {정감록}에 바탕한 홍경래의 난과 동학농민봉기로 이어진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 맺음말
물론 1905년 을사년이 "을씨년"스럽긴 했을 것이다. 게다가 을사조약이 맺어진 날이 겨울로 접어든 11월 17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을씨년"의 어원이 "을사년"이긴 하되, 그 을사년은 1905년 대한제국/일본제국 간 을사조약이 맺어진 그 "을사년"은 아니라고 보는게 각종 자료를 살펴볼 때 훨씬 타당하다. 따라서 이 주장은 거의 확실히 민간어원설이라 나는 생각한다.
생각해 보자.
(일반 백성의 삶에 큰 영향은 없던)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1905년 을사년의 한이
"을사년/스럽다"란 표현으로 남았다면,
아예 조선/대한제국이 망해버린,
그래서 1905년 을사년의 충격보다 몇배는 컷던
1910년 경술년의 한은
왜
"경술년/스럽다"란 표현으로 남지 않았을까?
판단은 각자의 몫.
草人 최광민
Scientist. Husband. Daddy. --- TOLLE. 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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