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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예수 vs. 예수들 #1: 요세푸스의 "크리스토스"와 타키투스의 "크레스투스"
라벨:
비교신화/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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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Kwangmin Choi, 2008-07-20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글들에 대해 저자의 동의없는 전문복제/배포 -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를 금하며, 인용 시 글의 URL 링크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 최광민] 예수 vs. 예수들 #1: 요세푸스의 "크리스토스"와 타키투스의
"크레스투스"
순서
- 예수 세미나
- 요세푸스의 "예수들"과 "그리스도라 불린 예수의 형제 야고보"
- 타키투스의 "그리스도 Christus"와 "기독교도 Chrestianos"
# 예수 세미나
우선, 기적담을 제외하고도 "기독교의 메시아" 예수를 역사적인 실존인물이라기 보다
일종의 짜깁기된 가공의 신화적 인물로 보는 {예수 세미나, Jesus Seminar}의 주장을
그대로 옮기고 있는 SBS 다큐멘터리 {신의 길, 인간의 길}의 한 장면을 우선
옮긴다.
{예수 세미나}의 학문적 엄정성에 대해서는 그들의 방법론이 너무 많은 미확인
가정들에 바탕한다는 점에서 보수-진보 학계 모두 다소 간 부정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점을 우선 언질해 두겠다. 그들의 "가정"이 또한 그들의 "결론"이기도 한, 즉
논증에 있어서 순환논리 패턴을 종종 보인다는 점이 비판의 주요 골자다.
인터뷰에 등장하는 {예수 세미나}의 일원인 로버트 프라이스는 한때 침례교단
목사였으나, 현재는 종교적 회의론자이자 울트라-리버럴에 속하는 {예수 세미나}의
핵심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로버트 펑크와 {예수 세미나}를 창립한 인물이자, SBS
다큐멘터리에도 그 인터뷰가 나오는 존 도미닉 크로산은 전직 로마카톨릭 사제
출신이다.
프라이스의 주장처럼 초기 기독교도들은 여러 "예수들"의 이미지를 모자이크해서
자신들의 예수를 창조해 냈을까?
하지만 프라이스의 주장이 수용되려면 다음의 조건들이 우선 충족되어야 한다.
-
AD 33-70년 사이에 유대아 지역의 기독교도들은 자신들의 예수가
'예루살렘의 유대인 지도자들의 기소로 빌라도 총독에 의해 십자가형을
당했다'는 점을
모르고 있어야 하며, (사실에
기반했든 혹은 종교적 믿음에 기반했든) 자신들의 예수가 "육체적으로
부활했다"고도
믿지 않았어야 한다. 혹은
AD 33-70년 사이에 예루살렘과 유대아 일대에 위와 같은 정체성을 가진
기독교도들이 없었거나, 그런 기독교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어야 한다. 왜?
소위 '여러 예수들"의 출현시기는 기독교의 예수로 부터 한 세대 뒤이기
때문이다. 즉, 기독교의 예수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이 이미 AD 60년 이전에
수립된 것이라면 다른 예수들의 행적이 기독교의 예수의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
예수의 십자가형이 있던 AD 33년 이후부터 1세대 뒤인 AD 70년 경에, 제 1차
유대전쟁에 유대인 갈릴리 사령관으로 참전했고 전쟁 중 로마로 투항/귀화한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자신의 글에 언급된 모든 "예수들"과 다른 이름의
"반란지도자들"과 기독교의 "메시아 예수"를
혼동했어야 한다.
-
요세푸스의 저작에 등장하는 기독교의 '메시아/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두가지 진술 ('빌라도에 의해 처형당했고 그의 부활을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라 부르는 예수', '의인 야고보의 형제로 그리스도라 불린 예수'에
대한 진술이
모두 후대 기독교도들의 조작이어야
한다. 혹은 요세푸스가 이 예수와 다른 예수들을 혼동했어야 한다.
첫번째 가정이 성립하려면, AD 70년 이전에 작성되어 회람된 바울의 편지들 및
예수의 형제 (혹은 사촌) 야고보가 지도자로 있던 예루살렘 교회와 바울 사이의
협력과 긴장관계에 대한 {신약성서} 속 기록들을 모두 부정해야 한다. 이
문서들에는 이미 예수의 형제 (혹은 사촌) 야고보가 이끈 예루살렘의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과, 대부분의 유대인이 주축이 된 예루살렘 교회가
할례 등의 유대인 관습의 유지에 있어서 바울과 이견을 보인 적은 있지만 결국 제
1차 예루살렘 회의에서 야고보와 바울 사이에 논점에 대한 합의를 보았으며, 또한
이 문제를 제외하면 예수에 관한 신앙이 예루살렘 측과 바울 사이에서 논란이 된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고한다.
두번째와 세번째 가정이 성립하려면, 요세푸스의 기록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예수들은 요세푸스의 동시대인들로 요세푸스와 개인적인 친분 혹은 원한관계로 묶인
사람들이란 요세푸스 본인의 기록을 모조리 무시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 역시 꽤
무리한 정황이다. 즉, 요세푸스가 자신의 한 세대 전의 인물인 기독교의
예수와 자신의 동시대인인 다른 예수들을 혼동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하스모니안 왕가의 피를 잇고 있는 제사장 출신 요세푸스의 가문은 예루살렘 정치에
정통한 귀족권력층에 속했고, 그의 자서전에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그는
당시 예루살렘과 유대아에서 벌어지는 권력암투에 대해 매우 자세히 알고 있었다.
아울러 제사장 가문인 그의 집안은 하스모니안 왕가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사두개/사두가이파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당시의 민중파/개혁파인
바리새/바리사이파의 일원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동시에 당시 에세네파의
스승을 따라 구도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는 (최소한 자신의 진술에 따르자면),
당시 유대아의 정치상황에 정통했고, 모든 유대교 분파를 직접 경험한 인물인
동시에, 예루살렘에서 파견한 갈릴리 사령관으로서 그 지역에 기반한 혁명분자들인
젤롯과도 (주로 나쁜) 관계를 맺어 젤롯에 대해서도 꽤 정통해 있었다.
# 요세푸스의 예수와 야고보
"예수" 혹은 아람어 "예수아"는 AD 1세기 당시 흔한 이름이었다.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에 등장하는 예수 만도 "가말라의 아들 예수", "사파트의 아들 예수",
"사피아스의 아들 예수", "담네우스의 아들 예수", 그리고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
등등이 있다. 그의 다른 저작까지 모두 합치면 약 20여 명의 예수들이 등장한다.
예수의 처형 대신 풀려난 바라바의 이름도 한 {복음서}에는 "예수 바라바"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예수와 바라바 중에 하나를 빌라도가 선택해야 하는 장면을 되새겨
보면, 결국 "두 예수"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다.
우선 요세푸스의 저작들에 등장하는 예수들을 모두 나열해 보겠다.
요세푸스 전집에서 정리한다. 요세푸스의 저작 가운데 {유대전쟁사}는 AD 75년 경
그의 모국어인 히브리어 혹은 아람어로 기록되어 후에 그리스어로 번역되었고,
{유대고대사}는 AD 94년 경에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
-
The Works of Josephus
Whiston translation
-
The Works of Josephus
Whiston translation
-
Josephus: The Complete Works
Whiston translation
-
The Works of Josephus in Greek
- Flavius Josephus
모세를 이어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인을 이끌던 여호수아를 제외하면, 기독교의
예수가 다른 모든 예수들에 시간상 선행한다.
-
눈(Nun)의 아들 여호스아/요수아(~예수아) – 모세를 계승했던 히브리인의
지도자. Ant 03.049, Ant 03.308; Ant 4.459
-
야고보의 형제이자 – 그리스도(라 불린) 예수. Ant 20.200
-
그리스도라 불렸으며 폰티우스 필라투스가 사형시킨 예수. Ant
18.063
- Phabes의 아들 예수 – 대제사장. Ant 15.322
- Ananus의 아들 예수 – 성전의 파괴를 예언한 평민. War 6.300
- 예수 혹은 이아손 – 대제사장. Ant 12.239
-
Sapphias의 아들 예수 – 티베리아스 지사. War 2.566, War 2.599; Life 1.066,
Life 1.134
-
Onias의 형제 예수 – 대제사장. Ant 12.237, Ant 12.238, Ant 12.239
- Gamaliel의 아들 예수 – 대제사장. Ant 20.213, Ant 20.223
-
예수 – 안나누스 다음으로 연장자였던 대제사장. War 4.238, War 4.316, War
4.325
- Damneus의 아들 예수 – 대제사장. Ant 20.203
-
Gamala의 아들 예수 – 대제사장이자 요세푸스의 지인. War 4.160; Life 1.193,
Life 1.204 J
-
Shapat의 아들 예수 – 티베리아스를 장악한 마적단 두목.. War 3.450
-
Thebuthus의 아들 예수 –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을 로마 사령관 티투스에게
가져간 인물. War 6.387
- Josadek의 아들 – 대제사장. Ant 20.231, Ant 20.234
-
예수 – 안나누스가 요세푸스를 해임시키기 위해 보낸, 600명 추종자를 거느린
갈릴리인. Life 1.200
-
예수 – 요세푸스와 동맹지간이자 프롵타미아스에 투옥된 마적단 두목. Life
1.105
이번에는 요세푸스의 저작별로 살펴보자.
- {유대고대사}, Ant.
- 03:049 Nun의 아들 여호수아 (예수아 / 요수아)
-
11:298 Eliashib의 아들 예수, 대제사장, 지사 바고세스의 친구인 요한의
형제
- 11:299 엘리아쉽의 아들 예수, 대제사장, 요한의 형제
- 11:300 엘리아쉽의 아들 예수
- 11:301 엘리아쉽의 아들 예수, 대제사장, 요한의 형제
- 12:237 Onias III의 아들 예수, 대제사장.
- 12:238 오니아스 III의 아들 예수
- 12:239 Onias (= Menelaus)의 동생 예수
-
12:239 오니아스 III 의 형제 예수, 이아손으로 개명, 오니아스(=
Menelaus)에게 반란
- 15:041 오니아스 III의 형제 예수
- 15:322 Phabes의 아들 예수, 대제사장
- 17:341 Sie의 아들 예수, 대제사장.
-
18:063 폰티우스 필라투스가 십자가형에 처했고, 그리스도인 (혹은 여겨진)
예수
- 20:200 그리스도라 불린 예수, 야고보의 형제
- 20:203 Damneus의 아들 예수, 대제사장
- 20:205 담네우스의 아들 예수, 대제사장.
- 20:213 Gamaliel의 아들 예수, 대제사장
- 20.213 담네우스의 아들 예수.
- 20:223 가말리엘의 아들 예수
- 20:234 Josadek의 아들 예수, 대제사장
- {유대전쟁사}, War
- 2:566 Sapphias의 아들 예수, 티베리아스 지사
- 2:599 사피아스의 아들 예수, 티베리아스 지사
- 3:450 Shapat의 아들 예수, 티베리아스를 장악한 마적단 두목
- 3:452 (샤파트의 아들) 예수
- 3:457 (샤파트의 아들) 예수
- 3:467 (샤파트의 아들) 예수
- 3:498 (샤파트의 아들) 예수
- 4:160 Gamala의 아들 예수
- 4:238 안나누스 후임 대제사장들 중 가장 고령인 예수.
- 4:270 안나누스 후임 대제사장들 중 가장 고령인 예수
- 4:283 안나누스 후임 대제사장들 중 가장 고령인 예수
- 4:316 안나누스 후임 대제사장들 중 가장 고령인 예수
- 4:322 안나누스 후임 대제사장들 중 가장 고령인 예수
- 4:325 안나누스 후임 대제사장들 중 가장 고령인 예수
- 4:459 눈의 아들 여호수아 / 예수아
- 6:114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보내진 대제사장 예수
- 6:300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예언한 평민 안나누스의 아들 예수
- 6:387 Thebuthus의 아들 예수, 티투스에게 보내진 제사장 중 하나.
- {자서전}, Life
- 1:066 사피아스의 아들 예수, 티베리아스 지사.
- 1:067 사피아스의 아들 예수
- 1:105 예수, Ptolemais 근방의 마적단 두목
- 1:108 예수, Ptolemais 근방의 마적단 두목
- 1:109 예수, Ptolemais 근방의 마적단 두목
- 1:110 예수, Ptolemais 근방의 마적단 두목
- 1:134 사피아스의 아들 예수, 티베리아스 지사.
- 1:178 예수, 티베리아스의 유스투스와 형제
- 1:186 예수, 티베리아스의 유스투스와 형제
- 1:193 가말라의 아들 예수, 대제사장, 요세푸스의 친구
- 1:200 요세푸스를 쫓아내려고 한 갈릴리인 600명의 지도자
- 1:204 가말라의 아들 예수.
- 1:246 예수, 큰 성채를 소유한 자, 티베리아스 지사?
- 1:271 티베리아스 지사 예수
- 1:278 티베리아스 지사 예수
- 1:294 티베리아스 지사 예수
- 1:295 티베리아스 지사 예수
- 1:300 티베리아스 지사 예수
- 1:301 티베리아스 지사 예수
일부 예수는 "~의 아들"이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중복된 예수들이
리스트에 존재할 것이다. 이 가운데 "메시아/그리스도'로 자칭했거나 여겨졌던
인물로 요세푸스가 언급하는 유일한 인물은, (1) '현자'요 (2) '기적을 행한
사람'이자, (3) '유대 지도층에 의해 기소되어 죽었고', (4) '빌라도가 사형을
집행했으며', (5) '부활했다"고 추종자들이 믿었고, (6) '그 추종자들은 요세푸스
당시에 크리스티아노스 (그리스도인)이라' 불렸으며, 아울러 (7) 이 예수의 형제는
의인 야고보로 대제사장 안나누스에 의해 불법처형 당했다. 이 조합의 인물이
짜깁기 된 인물이 아니라면, 요세푸스는 기독교의 예수를 아주 정확히 특정하고
있는 것이다.
{플라비우스의 증언}이라고 불리는 논란많은 요세푸스의 기록을 먼저 보자.
요세푸스는 빌라도 시절에 유대인 지배층에 의해 살해당한 이 현자 "예수"을
메시아로 믿고 그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을 그가 살던 당시인 AD 1세기 말의
기독교도 (Χριστιανῶν)로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그리스어로 전해지는 위 진술이 후대에 친-기독교적으로 다소 윤색되었다고
가정하고 예수에 대한 묘사가 중립적으로 처리된 시리아어 번역본에 따라 그 부분을
거두어 내더라도, 당시에 있던 '기독교도'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고
메시아/그리스도로 믿었다는 점을 요세푸스가 진술하고 있다는 점에는 변화가 없다.
즉, 여러 예수들이 활동하던 요세푸스의 시절에, 요세푸스는 이미 한 세대 전부터
"예수를 부활한 메시아로 믿는" 기독교도들이 있었다는 점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AD 4세기 초반의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의 기록이다.
Γίνεται δὲ κατὰ τοῦτον τὸν χρόνον Ἰησοῦς σοφὸς ἀνήρ, εἴγε ἄνδρα αὐτὸν
λέγειν χρή: ἦν γὰρ παραδόξων ἔργων ποιητής, διδάσκαλος ἀνθρώπων τῶν ἡδονῇ
τἀληθῆ δεχομένων, καὶ πολλοὺς μὲν Ἰουδαίους, πολλοὺς δὲ καὶ τοῦ Ἑλληνικοῦ
ἐπηγάγετο:
ὁ χριστὸς οὗτος ἦν.
καὶ αὐτὸν ἐνδείξει τῶν πρώτων ἀνδρῶν παρ᾽ ἡμῖν σταυρῷ ἐπιτετιμηκότος
Πιλάτου οὐκ ἐπαύσαντο οἱ τὸ πρῶτον ἀγαπήσαντες: ἐφάνη γὰρ αὐτοῖς τρίτην
ἔχων ἡμέραν πάλιν ζῶν τῶν θείων προφητῶν ταῦτά τε καὶ ἄλλα μυρία περὶ
αὐτοῦ θαυμάσια εἰρηκότων. εἰς ἔτι τε νῦν τῶν Χριστιανῶν ἀπὸ τοῦδε
ὠνομασμένον οὐκ ἐπέλιπε τὸ φῦλον.
3.3 Now there was about this time Jesus, a wise man, if it be lawful to
call him a man; for he was a doer of wonderful works, a teacher of such
men as receive the truth with pleasure. He drew over to him both many of
the Jews and many of the Gentiles. He was [the] Christ. And when Pilate, at the suggestion of the principal men amongst us, had
condemned him to the cross, those that loved him at the first did not
forsake him; for he appeared to them alive again the third day; as the
divine prophets had foretold these and ten thousand other wonderful things
concerning him. And the tribe of Christians, so named from him, are not
extinct at this day. --- {Antiquities of the Jews} xviii 3.3
이 무렵,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허락된다면 현자라고나 해야 할 예수가
있었다. 그는 기적을 행한 사람이자, 기꺼이 진리를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들의
스승이었다. 그는 많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관심을 끌었다.
그는 그리스도/메시아였다. 유대인 지도층의 요청대로 필라투스는 그에게 십자가형을 언도했는데,
처음부터 그를 사랑하던 자들은 그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죽은지 3일째 다시
살아나 그들 앞에 나타났는데, 이런 일을 신의 예언자들이 예언해 왔으며
수많은 다른 기적들이 그와 관련되어 있다.
그의 이름에 따라 지어진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존재한다
---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 번역: 최광민
이 논란 많은 {플라비우스의 증언} 문구를 처음 인용한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즈음,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 (c. 340 – 397),
(혹은 위-헤게시푸스)는 예수의 신성을 변호하고자 요세푸스의 저작들을
인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요세푸스가 예수를 "메시아"로 호칭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진술은 요세푸스의 표준 그리스어 사본의 내용과 거의
같지만, 여기에 유세비우스가 인용한 것과 같은 "그는 그리스도였다"라는 문장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은 즉, 유세비우스로부터 한 세대 안의 그리스어 사본들에
"그는 그리스도였다"란 문장이 빠져있는 문서군이 있었다는 방증일 수 있다. 즉,
최소한 암브로시우스가 참조한 그리스어 사본에는 그 문장이 없었던 것 같다.
암브로시우스의 진술을 인용해 본다.
The Jews themselves also bear witness to Christ, as appears by Josephus,
the writer of their history, who says thus:
'That there was at that time a wise man, if (says he) it be lawful to
have him called a man, a doer of wonderful works, who appeared to his
disciples after the third day from his death, alive again according to
the writings of the prophets, who foretold these and innumerable other
miraculous events concerning him: from whom began the congregation of
Christians,
yet he was no believer, because of the hardness of his heart and his
prejudicial intention. However, it was no prejudice to the truth that he
was not a believer, but this adds more weight to his testimony, that while
he was an unbeliever and unwilling, this should be true, he has not denied
it to be so.
요세푸스의 경우를 보듯, 그리스도에 대한 유대인들의 증거들이 있다. 그들의
역사를 기록한 요세푸스는 말하길,
"그 무렵, 인간이라 불러야 한다면 현자라고 할 만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기적을 행하는 자였고, 그에 관한 이런저런 수많은 기적들을 예언했던
예언자들의 글에 기록된 바대로 죽은 후 3일 후 살아나 제자들에게 나타났다.
그 제자들로부터 기독교도들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기독교도가 아니었다. 그의 마음이 굳었고 편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신자가 아니었다는 점이 진실을 손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점이 그의 증언에 더 무게를 더하고 있다. 비록 신자가
아니었고 그럴 의도도 아니었을지라도, 자신의 진술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진술은 사실임에 분명하다. / 번역: 최광민
아울러 AD 4세기에 팔레스티나에서 활동하던 히에로니무스 역시 요세푸스의 이 한
문단을 인용하긴 했지만, 유세비우스의 버전과는 다소 다르게 인용했다. 이 경우,
요세푸스는 "그는 그리스도였다"라고 진술한 것이 아니라, "그는 그리스도라
불려졌다" 혹은 "여겨졌다"로 진술한 것이 된다.
히에로니무스의 {DE Viris Illustribus} 라틴어 사본에서 인용한다.
Scripsit autem de domino in hunc modum: Eodem tempore fuit Iesus, sapiens
vir, si tamen virum eum oportet dicere; erat enim mirabilium patrator
operum et doctor eorum qui libenter vera suscipiunt; plurimos quoque tam
de Iudaeis quam de gentilibus habuit sectatores,
et credebatur esse Christus.
cumque invidia nostrorum principum cruci eum Pilatus adfixisset,
nihilominus qui primum dilexerant perseverarunt {in fide}; apparuit enim
eis tertia die vivens; multa et haec et alia mirabilia carminibus
prophetarum de eo vaticinantibus. et usque hodie Christianorum gens ab hoc
sortita vocabulum non defecit. --- De Viris Illustribus 13
”Josephus in the 18th book of Antiquities, most expressly acknowledges
that Christ was slain by the Pharisees, on account of the greatness of his
miracles....Moreover, he wrote concerning
the Lord in this manner: At the same time there was Jesus, a wise man, if
indeed it is proper to say that he was a man; for he was an accomplisher
of marvelous works and a teacher of those who freely receive true things;
he also had very many followers, as many from the Jews as from the
gentiles, and
he was believed to be Christ. When by the envy of our principal ones
Pilate had affixed him to a cross, those who had first loved him
nevertheless persevered {in the faith}; for he appeared to them on the
third day living; many things, both these and other marvelous things, are
in the songs of the prophets who made predictions about him. Even until
today the race of Christians, having obtained the word from him, has not
failed.” (Ben C. Smith, Text Excavation, The Testimonium Flavianum)
“In this same time was Jesus, a wise man, if indeed it be lawful to call
him man. For he was a worker of wonderful miracles, and a teacher of those
who freely receive the truth. He had very many adherents also, both of the
Jews and of the Gentiles, and
was believed to be Christ, and when through the envy of our chief
men Pilate had crucified him, nevertheless those who had loved him at
first continued to the end, for he appeared to them the third day alive.
Many things both these and other wonderful things are in the songs of the
prophets who prophesied concerning him and the sect of Christians, so
named from him, exists to the present day.”
(Marian Hillar, Flavius Josephus and His Testimony Concerning the Historical
Jesus, 2005, p. 6–7)
요세푸스는 그의 {유대고대사} 제 18권에서, 그리스도가 바리새인들에 의해
죽은 것을 명백히 인정하고 있으며, 그의 위대한 기적들에
대해서....[중략]......이제 요세푸스는 이런 식으로 우리 주님에 대해
진술한다. "바로 같은 시절, 사람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현자인 예수가 있었다.
그는 기적을 행한 사람이었고,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들의 스승이었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들 가운데 많은 추종자를 가졌었다.
그는 그리스도라 여겨졌다. 우리의 지도자들은 그를 시기하였고,
필라투스는 그를 기소해 십자가에서 그를 죽였다. 그러나 그를 처음부터
사랑했던 이들은 자리르 지켰고, 그는 3일 째에 살아나 그들에게 나타났다.
이것은 예언자들이 그에 관한 이 일들과 다른 일들에 대해 예언한 바와 같다.
그리고 그를 따라 '그리스도인들'이라 불리는 자들은 오늘날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존재한다 / 번역: 최광민
AD 4세기의 수도사이자 역사가인 루피누스 (Tyrannius Rufinus)는 아래와 같은
라틴어 번역을 남겼다. 이 번역에는 유세비우스가 인용한 그리스어판 처럼
"그는 그리스도였다"가 등장한다.
Fuit autem iisdem temporibus Iesus, sapiens vir, si tamen virum eum
nominare fas est; erat enim mirabilium operum effector doctorque hominum
eorum qui libenter quae vera sunt audiunt, et multos quidem Iudaeorum,
multos etiam ex gentilibus sibi adiunxit; Christus hic erat. hunc accusatione primorum nostrae gentis virorum, cum Pilatus in crucem
agendum esse decrevisset, non deseruerunt hi qui ab initio eum dilexerant;
apparuit enim eis tertio die iterum vivus, secundum quod divinitus
inspirati prophetae vel haec vel alia de eo innumera miracula futura esse
praedixerant. sed et in hodiernum diem Christianorum, qui ab ipso
nuncupati sunt, et nomen perseverat et genus
There was, moreover, in those times Jesus, a wise man, if indeed it is
permissible to name him a man; for he was an effector of marvelous works
and a teacher of those men who freely listen to those things that are
true, and many even of the Jews, and also many from the gentiles, he
joined to himself; this man was the Christ. And, when on the accusation of the first men of our race Pilate had
decreed that this man be led to a cross, those who from the start had
loved him did not desert him; for he appeared to them on the third day
living again, in accordance with what the divinely inspired prophets had
foretold would be, whether these things or other innumerable miracles
concerning him. But even in this very day both the name and the race of
Christians, who have been named from him, persevere.
한편, 유세비우스의 {교회사}가 씌여진 후 얼마되지 않아 이 저작은 AD 4세기 안에
시리아어로도 번역되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가장 오래된 시리아어 사본은 AD
462년의 것인데, 이 사본은 많은 필사오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원본이라고 보기는
힘들고, 따라서 늦어도 AD 5세기 초반기에 이미 유세비우스의 시리아 번역
{교회사}가 유통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리아어 번역은 유세비우스의 그리스어
버전처럼 "그는 그리스도였다"로 설명되어 있다. 또 이 시리아어 번역에서 AD 5세기
초반 아르메니어로 번역된 {교회사}에는 더 나아가 "그는 진실로 그리스도였다"로
등장한다.
AD 10세기 칼케돈 신조를 고수하는 멜키트파 시리아 기독교 주교였던
히에라폴리스의 아가피우스가 쓴 {Book of Title}의 번역에 따르면 "그는 어쩌면
메시아였을 것이다"가 된다. 아가피우스는 이 자료를 시리아 마론파 기독교도였던
에뎃사의 테오필로스 (AD 695-785)의 자료에서 가져왔다. 즉, 그의 자료는 AD 8세기
말의 것이다. 시리아 일대의 이슬람화가 진행되던 시기에 작성된 그의 아랍어
원문을 영어로 번역한 것에서 다시 중역한다.
At this time there was a wise man who was called Jesus. And his conduct
was good, and he was known to be virtuous. And many people from among the
Jews and the other nations became his disciples. Pilate condemned him to
be crucified and to die. And those who had become his disciples did not
abandon his discipleship. They reported that he had appeared to them after
his crucifixion and that he was alive; accordingly,
he was perhaps the Messiah concerning whom the prophets have recounted wonders.
이때에 예수라 불리는 현자가 있었다. 그의 행실은 의로왔으며 모범적인
것으로알려졌다.유대인과 이방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필라투스가 그를 십자가에서 죽게 했다. 그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자신의
제자됨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가 십자가에서 죽은 후 살아나 자신들에게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예언자들이 기적들에 자세히 말한 바대로, 그는 아마 메시아였을 것이다.
/ 번역: 최광민
AD 12세기에 안티오키아의 단성파 총주교인 "시리아인" 미카엘이 편집한 시리아어
문건에는 히에로니무스가 참조한 버전에 흡사한 번역이 등장한다. 미카엘은
9세기 시리아 안티오키아의 총주교였던 텔마레의 디오니시오스 1세 (AD 818–848) 의
연대기에서 해당 내용을 가져왔는데, 서문에 따르면 디오니시오스의 연대기 역시
테오필로스의 자료에서 그 내용을 가져온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는
그리스도도 여겨졌다" 혹은 "사람들은 그를 그리스도로 믿었다"의 표현이 다시
등장한다.
“The writer Josephus also says in his work on the institutions of the
Jews: ’In these times there was a wise man named Jesus, if it is fitting
for us to call him a man. For he was a worker of glorious deeds and a
teacher of truth. Many from among the Jews and the nations became his
disciples.
He was thought to be the Messiah. But not according to the testimony of the principal [men] of [our]
nation. Because of this, Pilate condemned him to the cross and he died.
For those who had loved him did not cease to love him. He appeared to them
alive after three days. For the prophets of God had spoken with regard to
him of such marvellous things [as these]. And the people of the
Christians, named after him, have not disappeared till [this] day.”
-- Michael the Syrian, Chronicle 10:20. Source - The translation from Syriac
is made by Shlomo Pines. (Shlomo Pines, An Arabic version of the Testimonium
Flavianum and its implications, 1971, p. 26).
저자인 요세푸스는 유대인들의 제도에 대한 그의 저작 속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 "이 즈음, 인간이라 부를 수 있다면 현자라고나 할 예수가 있었다.
그는 놀라운 기적을 보인 사람이었고 진리의 스승이었다. 유대인과 이방나라의
사람들이 그의 제자들이 되었다. 그는 메시아라 여겨졌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은 그렇게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그를 사랑했던 자들을 그 사랑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그들 앞세 제 3일째에 다시 나타났다. 신의 예언자들이 그에 관한 그런
놀라운 일에 대해 이야기해 왔었다. 그리스도란 이름에 따라 이름 붙여진
기독교도들은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 시리아인 미카엘, {연대기} 10:20 / 번역: 최광민
라틴어권과 시리아어권의 기독교도들은 서로의 언어를 직접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대신 그들은 그리스어 문헌에 대한 독해는 가능했다. 따라서 역시 유세비우스가
입수한 것과는 조금 다른 버전의 그리스어 사본이 해당 시리아어 본의 기초가
되었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아쉽게도 아가피우스와 미카엘이 인용한 내용의
원자료에 해당할 테오필로스의 시리아어 원저작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였다"라고 진술하는 (현존하는 그리스어본과 동일한)
4/5세기의 시리아어 번역이 8세기의 테오필로스의 저작에서도 등장하는지, 혹은
테오필로스의 저작에는 "그리스도로 여겨졌다"로 되어 있는지 (그래서 혹시
테오필로스가 "그리스도로 여겨졌다"라는 윤색을 처음 시도한 것인지) 직접 비교해
볼 방법은 현재로서는 없다. 하지만 "진실로"란 단어가 삽입된 아르메니아어
번역에서 추측할 수 있듯, 번역자의 종교적 의도가 원문에 수정을 가할 가능성은
열어두어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의 예수에 관한 요세푸스의 진술이 그리스어 사본에 따라 다소의
변형을 보이고 있고, 혹은 후대의 기독교도들이 그의 이 문단에서 일부 문장을
가필했거나 수정했거나 혹은 필사상 오류를 범했을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이
문단에 진술된 핵심적인 내용에는 큰 차이가 없고, 따라서 요세푸스가 예수를
역사적인 인물로 인지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현대 학계의 주류 시각이다.
다음으로는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에 관련된 기록을 보자.
요세푸스는 이 "야고보"가 "그리스도"로 불렸던 "예수"의 형제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 야고보는 모든 고대 기록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기록된다. 당대의 가장
정확한 기록인 요세푸스의 저작 어디에도 AD 1세기 초/중반에 "메시아"를 자처했던
인물들 가운데 "예수"란 이름을 가진 인물은 기독교의 그 예수 밖에는 없다. 예수
이전의 "유다" 혹은 제 2차 유대인 봉기 때의 "시몬" 바르 코크바 등이 "메시아"를
자처한 인물들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요세푸스는 그의 저작에 등장하는 여러
예수들을 혼동하지 않았다.
And now Caesar, upon hearing the death of Festus, sent Albinus into Judea,
as procurator. But the king deprived Joseph of the high priesthood, and
bestowed the succession to that dignity on the son of Ananus, who was also
himself called Ananus. Now the report goes that this eldest Ananus proved
a most fortunate man; for he had five sons who had all performed the
office of a high priest to God, and who had himself enjoyed that dignity a
long time formerly, which had never happened to any other of our high
priests. But this younger Ananus, who, as we have told you already, took
the high priesthood, was a bold man in his temper, and very insolent; he
was also of the sect of the Sadducees, who are very rigid in judging
offenders, above all the rest of the Jews, as we have already observed;
when, therefore, Ananus was of this disposition, he thought he had now a
proper opportunity.
Festus was now dead, and Albinus was but upon the road; so he
assembled the sanhedrin of judges, and brought before them
the brother of Jesus, who was called Christ, whose name
was James, and some
others; and when he had formed an accusation against them as breakers of the law,
he delivered them to be stoned: but as for those who seemed the most
equitable of the citizens, and such as were the most uneasy at the breach
of the laws, they disliked what was done; they also sent to the king,
desiring him to send to Ananus that he should act so no more, for that
what he had already done was not to be justified; nay, some of them went
also to meet Albinus, as he was upon his journey from Alexandria, and
informed him that it was not lawful for Ananus to assemble a sanhedrin
without his consent. Whereupon Albinus complied with what they said, and
wrote in anger to Ananus, and threatened that he would bring him to
punishment for what he had done; on which king Agrippa took the high
priesthood from him, when he had ruled but three months, and made
Jesus, the son of Damneus, high priest.[31] --- {Antiquities} book 20, chapter 9
민[전략]...페스투스가 사망하고 알미누스가 부임 중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나니아) 판관들의 산헤드린을 소집한 후, 그들 앞에 그리스도라 불렸던 예수의
형제로서 그 이름이 야고보인 사람과 또 다른 이들을 끌어다 놓았다. 그들을 율법파괴자란 명목으로 기소한 후, 그
(아나니아)는 그들을 돌로 쳐 사형시켰다.....[후략]
----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제 20권 9장 / 번역:
최광민
SBS 다큐멘터리 {신의 길, 인간의 길}에서는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와
"야고보의 형제이자 그리스도라 불린 예수"를 같이 놓음으로써, 마치 후자가
전자의 모티프에서 따온 듯, 혹은 {신약성서}의 예수가 사실은 그보다 한
세대 정도 뒤에 살았던 "여러 예수"들을 합성한 듯이 암시하고 있다.
게다가 제 1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반란군을 이끌었던 인물 (가령, 시몬 바르
기오라) 등을 언급한 화면과 기독교의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메시아의 도래로 여기고 불렀던 "호산나" 노래의 장면을 중첩시킴으로서,
마치 반란군 지도자들이 "그리스도" 혹은 "메시아"를 자처했거나 혹은 다른
이들이 그들을 메시아로 여겼던 것처럼 착각을 의도하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유대-로마 전쟁에 대한 보고 중 1차 당사자의 진술로서는
유일한 기록인 요세푸스의 저작물에는 이들이 "메시아"를 자처했거나 그렇게
여겨졌다는 기록이 없다. 아울러 AD 1세기 초/중반이란 컨텍스트 상에서
"메시아"란 칭호는 "로마에 맞서 대항 유대인의 지도자"에게 그냥
붙여지기에는 여러 조건이 따라 나온다. 무엇보다 그런 인물이
'메시아'이려면 그는 유다 부족원이면서 다윗 왕가의 혈통을 가지고 있거나
그렇게 주장해야 한다. 시몬 바르 기오라가 유다 부족원이며 다윗 왕가의
혈통을 주장했는가? 요세푸스가 침묵하고 있으니 알 방법이 없다. 요세푸스는
기독교의 예수에게만 그가 "메시아(로 여겨졌)다"란 언급을 하고 있을
뿐이다. 로마와의 저항과정에서 다윗의 혈통으로 여겨진 사람은 AD 132-136년
사이에 벌어진 제 2차 유대-로마 전쟁을 이끌었던 시몬 바르 코크바였다.
그는 랍비 아키바를 포함한 일부 랍비들에 의해 메시아로 인정되었다.
SBS 다큐멘터리의 연대기적 모순도 지적해야 한다. 이 주장이 맞으려면,
복음서의 기록연대는 일단 보류하더라도 기록시기가 분명한 요세푸스와
타키투스의 연대표 자체를 의심해야 하는 무리수를 두어야 한다. 가령,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에 대한 기록을 남긴 요세푸스는 (후대에 문장이 다소
윤색된 듯 하긴 하나), {유대고대사}에서는 "야고보의 형제" 예수 (와 예수의
형제 야고보) 에 대한 간략한 기록을의 남겼는데, "야고보의 형제" 예수의
연대문제를 분명히 기술하고 있다. "그리스도라 불린 예수"가 처형된 시점은
빌라도의 통치기간 (AD 33년 경), {유대전쟁사}에 기술된 대로의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는 그보다 약 30년 후인 AD 62년에 해당한다. 어떻게 두 예수가
혼동될 수 있나? 적어도 요세푸스는 이들을 혼동하지 않았다. 아울러
요세푸스를 제외하면 이들 여러 예수에 대해 기록한 사람은 없다. 그는
정확히 연대기 순서를 따라서 위의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 "예수들"은 모두 "기독교의 예수"가 활동한 한 세대 뒤의 인물들로,
요세푸스는 이들 예수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일부는 그와
아주 개인적인 관계로 묶인 인물들이었다. 요세푸스가 이들 "예수들"을 서로
혼동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제 1차 유대-로마 전쟁 후, 로마는 다윗의 혈통에서 메시아가 출현하리라
믿는 유대인들의 독립의지를 분쇄할 목적으로 다윗의 자손들을 색출해
제거하게된다.
"동쪽"에 대한 고대 지중해 지역의 비상한 관심에 대해서는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을 참조할 수 있다. 특별히 타키투스는
유대아로부터 출현할 인물이 세계를 얻는다는 이 예언의 출처로 유대교의
고대 예언을 들었다. 이 예언은 유대아 지역이 로마의 통치지역으로 편입되는
적어도 BC 1세기 후반 부에는 로마에서도 회람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로마인들은 지중해의 고대종교들의 신탁들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네로와 베스파시아누스는 이 예언을 자신들에게 적용시키려고 했고, 아들
티투스와 함께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베스파시아누스의 경우, 요세푸스를
전략적으로 이용해 효과적으로 자신이 바로 '세상을 얻은' 황제임을
과시했다. 사실 로마에 대한 제 1차 유대전쟁에서 갈릴리 지역 사령관이이도
했던 유대인 제사장 출신 요세푸스는, 거점이 함락한 후 숨어있다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투항한 후 이런 예언이 바로 베스파시아누스에 대한
것이며 그래서 그가 로마의 차기 황제가 될 것이라고 언질해 줌으로써 자신의
목숨만 살린 것이 아니라 아예 베스파니시아누스 가문의 가신이 되었다.
우선 네로와 베스파시아누스에 관한 로마역사가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을
읽어보자.
"...The world, after tolerating such an emperor for little less
than fourteen years, at length forsook him; the Gauls, headed by
Julius Vindex, who at that time governed the province as
pro-praetor, being the first to revolt. Nero had been formerly told
by astrologers, that it would be his fortune to be at last deserted
by all the world; and this occasioned that celebrated saying of his,
"An artist can live in any country;" by which he meant to offer as
an excuse for his practice of music, that it was not only his
amusement as a prince, but might be his support when reduced to a
private station.
Yet some of the astrologers promised him, in his forlorn state,
the rule of the East, and some in express words the kingdom of
Jerusalem.
But the greater part of them flattered him with assurances of his
being restored to his former fortune. And being most inclined to
believe the latter prediction, upon losing Britain and Armenia, he
imagined he had run through all the misfortunes which the fates had
decreed him. But when, upon consulting the oracle of Apollo at
Delphi, he was advised to beware of the seventy-third year, as if he
were not to die till then, never thinking of Galba's age, he
conceived such hopes, not only of living to advanced years, but of
constant and singular good fortune, that having lost some things of
great value by shipwreck, he scrupled not to say amongst his
friends, that (371) "the fishes would bring them back to him." At
Naples he heard of the insurrection in Gaul, on the anniversary of
the day on which he killed his mother, and bore it with so much
unconcern, as to excite a suspicion that he was really glad of it,
since he had now a fair opportunity of plundering those wealthy
provinces by the right of war. Immediately going to the gymnasium,
he witnessed the exercise of the wrestlers with the greatest
delight. Being interrupted at supper with letters which brought yet
worse news, he expressed no greater resentment, than only to
threaten the rebels. For eight days together, he never attempted to
answer any letters, nor give any orders, but buried the whole affair
in profound silence...." [Suetonius, Nero, 40]
"...[IV]....A firm persuasion had long prevailed through all the East [735],
that it was fated for the empire of the world, at that time, to
devolve on some who should go forth from Judaea. This prediction referred to a Roman emperor, as the event shewed;
but the Jews, applying it to themselves, broke out into rebellion,
and having defeated and slain their governor [736], routed the
lieutenant of Syria [737], a man of consular rank, who was advancing
to his assistance, and took an eagle, the standard, of one of his
legions. As the suppression of this revolt appeared to require a
stronger force and an active general, who might be safely trusted in
an affair of so much importance, Vespasian was chosen in preference
to all others, both for his known activity, and on account of the
obscurity of his origin and name, being a person of whom (446) there
could be not the least jealousy. Two legions, therefore, eight
squadrons of horse, and ten cohorts, being added to the former
troops in Judaea, and, taking with him his eldest son as lieutenant,
as soon as he arrived in his province, he turned the eyes of the
neighbouring provinces upon him, by reforming immediately the
discipline of the camp, and engaging the enemy once or twice with
such resolution, that, in the attack of a castle [738], he had his
knee hurt by the stroke of a stone, and received several arrows in
his shield.."
[Suetonius, Vespasian, 4].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유대아로부터 나올 지배자"가 세계를 얻는다는 이
예언의 출처로 유대교의 고대 예언을 들었다.
타키투스의 기록이다.
"....Prodigies had occurred, which this nation, prone to
superstition, but hating all religious rites, did not deem it lawful
to expiate by offering and sacrifice. There had been seen hosts
joining battle in the skies, the fiery gleam of arms, the temple
illuminated by a sudden radiance from the clouds. The doors of the
inner shrine were suddenly thrown open, and a voice of more than
mortal tone was heard to cry that the Gods were departing. At the
same instant there was a mighty stir as of departure. Some few put a fearful meaning on these events, but in most there
was a firm persuasion, that in the ancient records of their priests
was contained a prediction of how at this very time the East was to
grow powerful, and rulers, coming from Judaea, were to acquire
universal empire. These mysterious prophecies had pointed to Vespasian and Titus, but
the common people, with the usual blindness of ambition, had
interpreted these mighty destinies of themselves, and could not be
brought even by disasters to believe the truth. I have heard that
the total number of the besieged, of every age and both sexes,
amounted to six hundred thousand. All who were able bore arms, and a
number, more than proportionate to the population, had the courage
to do so. Men and women showed equal resolution, and life seemed
more terrible than death, if they were to be forced to leave their
country. Such was this city and nation; and Titus Caesar, seeing
that the position forbad an assault or any of the more rapid
operations of war, determined to proceed by earthworks and covered
approaches. The legions had their respective duties assigned to
them, and there was a cessation from fighting, till all the
inventions, used in ancient warfare, or devised by modern ingenuity
for the reduction of cities, were constructed. ..." [Tacitus, History, Book 5, v13].
유대아 외곽에서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베스파시아누스가 AD 69년 7월
로마황제가 된 후 유대아에 남아 토벌작전을 벌이던 그의 아들 티투스는 AD
70년에 예루살렘을 공략하고 그해 9월에 함락시킨다. 이로써 요세푸스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한 예언은 적중(!)되었다.
하지만 베스파시아누스나 티투스가 바보가 아니라면, 문맥상 히브리 성서의
여러 구절들이 예언하는 그 '인물'이 이방인일 수는 없다는 것을 모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예언에서 참고로 여기서 '나온다/떠오른다'는 히브리어
'다라크 דּרך' 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동방 ἀνατελεῖ / Orietur'이란
뜻으로 새겨지기도 했다.)
가령, 히브리 성서 토라의 제 4권째 책인 {민수기}는 이방인 예언자인 발람의
예언을 이렇게 말한다.
אֶרְאֶנּוּ וְלֹא עַתָּה אֲשׁוּרֶנּוּ וְלֹא קָרוֹב דָּרַךְ כּוֹכָב מִֽיַּעֲקֹב וְקָם שֵׁבֶט מִיִּשְׂרָאֵל וּמָחַץ פַּאֲתֵי מוֹאָב וְקַרְקַר כָּל־בְּנֵי־שֵֽׁת׃
--- 히브리어 맛소라, {민수기} 24:17
17 δείξω αὐτῷ καὶ οὐχὶ νῦν μακαρίζω καὶ οὐκ ἐγγίζει ἀνατελεῖ ἄστρον
ἐξ Ιακωβ καὶ ἀναστήσεται ἄνθρωπος ἐξ Ισραηλ καὶ θραύσει τοὺς
ἀρχηγοὺς Μωαβ καὶ προνομεύσει πάντας υἱοὺς Σηθ
--- 그리스어 70인역, {민수기} 24:17
17 Videbo eum, sed non modo: intuebor illum, sed non prope. Orietur
stella ex Jacob, et consurget virga de Israël: et percutiet duces
Moab, vastabitque omnes filios Seth. --- 라틴어 불가타, {민수기} 24:17
17 이 눈에 한 모습이 떠오르는구나. 그러나 당장 있을 일은 아니다. 그
모습이 환히 보이는구나. 그러나 눈앞에 다가온 일은 아니다. 야곱에게서
한 별이 솟는구나. 이스라엘에게서 한 왕권이 일어나는구나. 그가 모압
사람들의 관자놀이를 부수고 셋의 후손의 정수리를 모조리
부수리라. --- 한국어 공동번역
이 경우 베스파시아누스 및 AD 1세기 말 로마제국 전 지역에서 기독교도들에
대한 대규모 탄압을 펼친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취할 수 있는 효과적인(!)
조치는 유대인 (혹은 기독교도) 봉기의 잠정적 원인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다윗의 직계 후손'들을 색출하는 것이다.
게다가 AD 2세기의 유대계 기독교도였던 헤게시포스 (AD 110-180)는 AD 70년
예루살렘 함락 직후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변화를
전해주는데, AD 4세기 초반 카이사리아 주교였던 유세비우스는 그의 {교회사}
제 3권에서 헤게시포스의 기록을 인용한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예루살렘 함락 후, 예수의 사도들과 제자들은
생존해 있던 예수의 친척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만나, AD 62년에 유대인
산헤드린을 통해 불법적으로 사법살해 당한 예루살렘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이던 예수의 형제 야고보에 이어 (부활한 예수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만났던) 클레오파의 아들 시메온을 예루살렘의 제 2대 감독/주교로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전승에 따르면 클레오파가 예수의 양부 요셉의
형제이기 때문에, 이 시메온은 예수와 사촌지간이 된다.
He also relates that
Vespasian after the conquest of Jerusalem gave orders that all
that belonged to the lineage of David should be sought out, in
order that none of the royal race might be left among the Jews; and in consequence of this a most terrible persecution again
hung over the Jews.
--- Eusebius of Caesarea, {Church History}, Translated by Arthur
Cushman McGiffert. From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cond Series,
Vol. 1. Edited by Philip Schaff and Henry Wace
그 (=헤게시포스)는 또
베스파시아누스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후, 유대인들 가운데 (다윗)
왕가의 혈통을 지닌 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제거하기 위해 다윗의
자손들을 색출하도록 명령하였다고 한다.
이 결과로 유대인들에 대한 가장 끔찍한 탄압이 다시 펼쳐졌다.... ---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 {교회사} 제 3권 12장 / 번역:
최광민
다음으론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서 유세비우스는 AD 2세기
작가들인 헤게시포스와 테르툴리아누스를 인용한다.
But when this same Domitian had commanded that the descendants of
David should be slain, an ancient tradition says that some of the
heretics brought accusation against the descendants of Jude (said
to have been a brother of the Saviour according to the flesh), on
the ground that they were of the lineage of David and were related
to Christ himself. Hegesippus relates these facts in the following words.
--- Eusebius of Caesarea, {Church History}, Translated by Arthur
Cushman McGiffert. From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cond Series,
Vol. 1. Edited by Philip Schaff and Henry Wace, CH.19
이 도미티아누스가 다윗의 후손들을 처형할 것을 명령하였고, 고대
자료에 따르면 이때 어떤 이단들들이 ({유다서}의 저자인 / 필자 주)
육체적으로는 우리 구세주의 형제인 유다의 후손들을 다윗의 자손이자
그리스도 본인과 친인척으로 고발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에 관해 (AD 2세기의 / 필자 주) 헤게시포스는 이렇게
말한다: ---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 {교회사} 제 3권 19장 / 번역:
최광민
1. Of the family of the Lord there were still living the
grandchildren of Jude, who is said to have been the Lord's brother
according to the flesh. 2. Information was given that they
belonged to the family of David, and they were brought to the
Emperor Domitian by the Evocatus. For Domitian feared the coming
of Christ as Herod also had feared it. And he asked them if they
were descendants of David, and they confessed that they
were.
Then he asked them how much property they had, or how much money
they owned. And both of them answered that they had only nine
thousand denarii, half of which belonged to each of them. 4. And
this property did not consist of silver, but of a piece of land
which contained only thirty-nine acres, and from which they raised
their taxes and supported themselves by their own labor. 5. Then they showed their hands, exhibiting the hardness of their
bodies and the callousness produced upon their hands by continuous
toil as evidence of their own labor. 6. And when they were asked
concerning Christ and his kingdom, of what sort it was and where
and when it was to appear, they answered that it was not a
temporal nor an earthly kingdom, but a heavenly and angelic one,
which would appear at the end of the world, when he should come in
glory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and to give unto every one
according to his works. 7. Upon hearing this, Domitian did not
pass judgment against them, but, despising them as of no account,
he let them go, and by a decree put a stop to the persecution of
the Church.
8. But when they were released they ruled the churches because
they were witnesses and were also relatives of the Lord. And
peace being established, they lived until the time of
Trajan.
These things are related by Hegesippus. 9. Tertullian also has
mentioned Domitian in the following words: Domitian also, who
possessed a share of Nero's cruelty, attempted once to do the same
thing that the latter did. But because he had, I suppose, some
intelligence, he very soon ceased, and even recalled those whom he
had banished.
10. But after Domitian had reigned fifteen years, and Nerva had
succeeded to the empire, the Roman Senate, according to the writers
that record the history of those days, voted that Domitian's honors
should be cancelled, and that those who had been unjustly banished
should return to their homes and have their property restored to
them. 11. It was at this time that the apostle John returned from
his banishment in the island and took up his abode at Ephesus,
according to an ancient Christian tradition.
--- Eusebius of Caesarea, {Church History}, Translated by Arthur
Cushman McGiffert. From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cond Series,
Vol. 1. Edited by Philip Schaff and Henry Wace, CH.20
"[헤게시포스의 기록] 우리 주님의 가족으로는 육체로는 우리 주님의
형제인 유다의 손자들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들이 다윗의
후손이라는 정보가 전해지자, 그들은 에보카투스에 의해 도미티아누스
황제 앞으로 끌려갔다. 도미티아누스는 헤롯 만큼이나 그리스도의
도래를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도미티아누스는 그들이 다윗의
후손인지를 물었고, 그들은 그렇다고 답했다. 그들 재산이 얼마이며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물었을때, 그 둘은 고작 9천 데나리온을
각각 나눠가지고 있다고 답했다....[중략]....그들은 그들이 고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란 증거로 단단한 근육과 손에 잡힌 굳은 살을
보여주었다.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과 그 왕국의 성격과 언제 어디서 그
왕국이 출현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자, 그들은 그 왕국은 일시적인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천상의 영적인 왕국이라고 답하면서, 왕국은
세상의 마지막에 도래할 것과 그리스도가 영광 가운데 재림하여 산
자와 죽은 자를 그가 한 일에 따라 심판하게 되리라고 답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이것을 듣고나서 그들을 하찮은 사람들이라 경멸하며
처형하지 않고 풀어주었고, 이후 교회에 대한 탄압을 중단할 것을
선포하였다.
그들은 신앙을 증거했고 또 주님의 친척이기에 풀려난 후에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평화가 지속되었고, 그들은 트라야누스 황제의 집권
때까지 살았다."
이것은 헤게시포스가 기록한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도 도미티아누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테르툴리아누스의 기록] 네로의 잔학성을 가진
도미티아누스 역시 네로가 했던 것과 같은 시도를 한때 한 적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는 정신은 어느 정도 온전했기 때문에 탄압을 곧
중단했으며, 그가 처벌한 사람들을 복권해주기도 했다." ...[후략] ---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 {교회사} 제 3권 20장 / 번역: 최광민
## 담네우스의 아들 예수?
이 예수는 대제사장 안나누스가 로마총독의 허가없이 소집된 산헤드린을 통해
"그리스도라 불린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죽인 이유로 총독에게 경질된 후
새로 선출된 대제사장이었다. 이 인물과 "그리스도라 불린 예수", 즉
기독교의 예수와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다.
## 가말라의 아들 예수?
"예수 벤 가말라" 혹은 "가말라의 아들 예수"는 AD 64년에 유대교
대제사장이었던 인물로, 앞서 언급한 담네우스의 아들 예수에 이어
대제사장으로 선출되었다. 다소 내성적인 인물이었으며, 요세푸스에 따르면
1년 후 마티아스 벤 테오필에게 대제사장 직을 넘겼다 ("Ant." xx. 9, § 7).
예수 벤 가말라는 유대교 탈무드에 6세 어린이들에게도 공교육을 실시해야
하는 유대교 규율을 제정한 인물로도 등장한다. 대제사장 직에서 물러난
후에, 그는 계속해서 예루살렘의 지도층의 중심인물이었고, 요세푸스의
자서전에 따르면 (Life, 204-205), 이 예수 벤 가말라는 제사장인 요세푸스
가문의 가까운 친구였다. 따라서 요세푸스가 이 "예수"를 다른 예수와 오판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이 예수는 평화주의자로서 확전을 피하기 위해 열광적인
젤롯들과 이두메/에돔인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을 막으려했는데, 결국
안나누스와 함께 국가반역자로 처단되었다.
## 샤파트의 아들 예수?
이 예수는 "기독교의 예수"보다 한 세대 뒤의 인물로 갈릴리를 배경으로 하는
강도단의 지도자였다. 여기서의 강도단이란 반-로마적 성향의 게릴라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로마의 입장에서는 마적단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이들의 성격은 둘 다 였을 것이다. 요세푸스는 그가 티투스의 정벌군의 추격
중 호수 근방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한다. 요세푸스는 제 1차 유대전쟁에
참전한 장본인이고 누구보다도 전쟁의 정황을 잘 알고 있던 예루살렘의
실력자 집안이자, 유대인 측의 갈릴리 사령관이었다. 그런 요세푸스가 이
"예수"와 다른 "예수"를 혼동했을 가능성은? 없다.
## 사피아스의 아들 예수?
이 "예수"는 당시 갈릴리 사령관이던 요세푸스가 다바리타에서 승전한 후
전리품을 나누는 일로 요세푸스에게 맞선 인물이다. 요세푸스가 전리품을
제대로 분배하지 않은 일로 불만을 품은 티베리아스 사람들을 선동한 이
예수는, 전차경주장에서 모세율법을 손에 들고 나와 요세푸스가 반역을
꾀하고 있으며, 모세율법을 위반했다며 요세푸스의 집을 병사들과 함께
습격했다. 이 인물은 또 티베리아스에 있는 헤롯의 궁전을 약탈하면서
티베리아스에 거주하던 그리스계 주민들을 살해하는 일을 주도한
티베리아스의 실력자였다.
이 "예수"를 요세푸스가 다른 예수와 혼동했을 가능성은? 없다.그럼
기독교도들이 이 예수와 "메시아 예수"와 혼동했을까? 어떤 모티프에서? 이
예수의 낮은 출신? 그가 갈릴리 출신 젤롯들을 이끌었다는 점?
"The principal instigator of the mob was
Jesus son of Sapphias, the chief magistrate of Tiberias, an
unprincipled man who had an instinct for introducing disorder into
matters of consequence, and who exceeded all others in the fomenting
of sedition and revolution. Taking a copy of the laws of Moses into
his hands,
he now stepped into the midst of the people and said: 'Fellow
citizens! If you cannot for your own sakes bring yourselves to
condemn Josephus, then have regard for the laws of your country,
which your commander-in-chief intended to betray -- and for their
sakes hate the crime and bring this insolent criminal to his just
punishment!' When he had said this and the crowd had loudly
applauded him, he took some soldiers and hurried to the house I was
lodging in with the intent to kill me at once. I was wholly
insensible of this, having fallen asleep from fatigue. But Simon,
who was entrusted with guarding my person and had alone remained
with me, seeing the onrushing citizens, awoke me and told me of the
danger, and urged me to die honorably as a general, by my own hand,
before my enemies arrived to force me to it or to kill me
themselves. Such were his words; but I committed my fate to God and
hastened to go out to the people. Changing my garment for one of
black and suspending my sword from my neck, I proceeded, by a
different road on which I expected no enemy would encounter me, to
the hippodrome. I appeared among the people suddenly, flung myself
on my face, and watered the ground with my tears -- and so became to
them all an object of compassion."
--- Josephus The Life 27-28 134-139
#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
아마도 이 예수가 "기독교의 예수"와 중첩되는 부분이 있는 유일한 경우일
것이다.
이 예수는 AD 66년에 시작된 유대전쟁 4년 전에 예루살렘에 와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인물이다. 즉, 요세푸스가 젊었던 시절에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이다. 유대인 지도층은 그를 로마 당국에 넘겨줬다. 당시 총독인
알비누스는 그를 미친 사람으로 간주해서 풀어주었는데, 이 예수는 계속해서
7년 간이나 예언을 하고 다니다가 로마군이 예루살렘 공성전을 벌일 때,
투석기에서 날아온 돌에 맞아 사망했다. 물론 요세푸스는 이 "예수"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
여기 등장하는 총독 알비누스는 자신의 부임 직전, 자신의 동의없이 소집된
산헤드린을 통해 대제사장 안나누스가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불법적으로 처형한 것을 엄중히 처벌한 바로 그 인물이다.
요세푸스나 기독교도들이 이 예수와 그들의 예수를 혼동했을까?
이 예수가 (1)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것, (2) 유대집권층이 그를
로마총독에게 넘긴 점에서는 "기독교의 예수"와 유사하지만, 결국 그는
풀려나서 7년이나 공개적으로 더 활동하다가 사망했다. 당시에 이미
예루살렘에 존재하고 있던 기독교 공동체가 이 "예수"와 자신들의 "메시아
예수"를 혼동했을까?
요세푸스의 기록이다.
But, what is still more terrible, there was one Jesus, the son of
Ananus, a plebeian and a husbandman, who, four years before the war
began, and at a time when the city was in very great peace and
prosperity, came to that feast whereon it is our custom for every
one to make tabernacles to God in the temple, 23 began on a sudden
to cry aloud, "A voice from the east, a voice from the west, a voice
from the four winds, a voice against Jerusalem and the holy house, a
voice against the bridegrooms and the brides, and a voice against
this whole people!" This was his cry, as he went about by day and by
night, in all the lanes of the city. However, certain of the most
eminent among the populace had great indignation at this dire cry of
his, and took up the man, and gave him a great number of severe
stripes; yet did not he either say any thing for himself, or any
thing peculiar to those that chastised him, but still went on with
the same words which he cried before. Hereupon our rulers,
supposing, as the case proved to be, that this was a sort of
divine fury in the man, brought him
to the Roman procurator, where he was whipped till his bones were
laid bare; yet he did not make any supplication for himself, nor
shed any tears, but turning his voice to the most lamentable tone
possible, at every stroke of the whip his answer was, "Woe, woe to
Jerusalem!" And when Albinus [for he was then our procurator] asked
him, Who he was? and whence he came? and why he uttered such words?
he made no manner of reply to what he said, but still did not leave
off his melancholy ditty, till Albinus took him to be a madman, and
dismissed him. Now, during all the time that passed before the war
began, this man did not go near any of the citizens, nor was seen by
them while he said so; but he every day uttered these lamentable
words, as if it were his premeditated vow, "Woe, woe to Jerusalem!"
Nor did he give ill words to any of those that beat him every day,
nor good words to those that gave him food; but this was his reply
to all men, and indeed no other than a melancholy presage of what
was to come. This cry of his was the loudest at the festivals; and
he continued this ditty for seven years and five months, without
growing hoarse, or being tired therewith, until the very time that
he saw his presage in earnest fulfilled in our siege, when it
ceased; for as he was going round upon the wall, he cried out with
his utmost force, "Woe, woe to the city again, and to the people,
and to the holy house!" And just as he added at the last, "Woe, woe
to myself also!" there came a stone out of one of the engines, and
smote him, and killed him immediately; and as he was uttering the
very same presages he gave up the ghost.[5] --- Book 6, Chapter 5, Section 3 of the historian Flavius Josephus'
The Wars of the Jews or History of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누가 누굴 베끼긴 할 것일까?
아울러 SBS 다큐멘터리는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를 언급하면서 요세푸스의
진술을 잘못 번역했다.
해당 진술은 아래와 같다.
Hereupon our rulers, supposing, as the case proved to be, that this
was a sort of divine fury in the
man, brought him to the
Roman procurator, where he was
whipped till his bones were laid bare;
SBS 제작진은 이를,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에게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판단한
유대사제들이 그를 로마 검찰관에게
데려갔다. / SBS {신의 길, 인간의 길}
로 번역했다. 요세푸스의 그리스어 원문은 아래와 같다.
[302] τῶν δὲ ἐπισήμων τινὲς δημοτῶν ἀγανακτήσαντες πρὸς τὸ
κακόφημον συλλαμβάνουσι τὸν ἄνθρωπον καὶ πολλαῖς αἰκίζονται πληγαῖς.
ὁ δὲ οὔθ᾽ ὑπὲρ αὑτοῦ φθεγξάμενος οὔτε ἰδίᾳ πρὸς τοὺς παίοντας, ἃς
καὶ πρότερον φωνὰς βοῶν διετέλει. [303] νομίσαντες δὲ οἱ ἄρχοντες,
ὅπερ ἦν,
δαιμονιώτερον τὸ κίνημα τἀνδρὸς
ἀνάγουσιν αὐτὸν ἐπὶ τὸν παρὰ
Ῥωμαίοις ἔπαρχον
여기서
δαιμονιώτερον
의 의미는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광기/열광/엑스타시로 신들렸거나 혹은 (종종 천재성으로 인해) "미친"
것을 말한다. 고대에는 "미친" 것을 "신으로부터 온 것"으로 여겼다.
또한
Ῥωμαίοις ἔπαρχον 은
"로마검찰관"이 아닌 "총독" 즉 "프로큐라토르"로 번역해야 한다. 여기서는
알비누스 총독을 말한다. 이 프로큐라토르는 시리아 레가투스와 달리
로마군단이 주둔하지 않는 지역에 파견되었고, 징세업무, 계엄통치, 사법업무
등을 담당했고 그 내용을 황제에게 직접 보고했다.
그래서 유대지도자들이 이 "예수"가 무슨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여겨 이를
막기 위해 로마 행정력을 이용한 것이 아니다. 유대지도자들이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를 총독에게 넘긴 직접적인 이유는 그가 성전의 종교의례를
방해하고 공공축제인 오순절 축제를 망쳤기 때문이다. (바로 앞에서
요세푸스가 그렇게 진술한다.) 공공축제를 방해하는 행위는 공권력에 의해
처벌되는 사례에 속한다.
게다가 (후일담일 수는 있지만)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가 등장할 무렵에
발생한 몇가지 음울한 "징조"를 요세푸스는 보고한다. 그는 이것을 임박한
예루살렘의 몰락의 전조로 풀이하고 있는데 가령, (1) 거의 1년 간 상공에서
관측되던 칼 모양의 혜성, (2) 유월절 1주일 전 심야에 성전 제단 주위에
출현해 30분 간 지속된 강렬한 빛, (3) 같은 무렵 유월절 축제에 희생물로
바쳐질 성별된 암소가 괴이하게도 새끼양을 낳은 일, (4) 스무 명이 장정이
달려들어야 간신히 여닫을 수 있는 성전 내측 동쪽의 황동문이 한밤 중에
저절로 열린 일, (5) 유월절 축제 며칠 후 일몰 직후에 천군천사가 전차와
함께 구름 사이에 등장해 예루살렘을 에워싼 일, (6) 이후 오순절 축제를
위한 의식을 진행하던 밤에 성전에서 발생한 지진과 소음과 이상한
목소리들이 그런 것들이다.
요세푸스는 이 중 몇가지는 직접 경험한 듯 하다. 비록 그가 일부 사건의
진위에 대해 다소 회의적이긴 하지만, 이 사건들을 성전파괴에 대한 징조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민중들과 유대인 지도자들 (서기관들,
제사장들)은 동일한 징조를 다르게 해석하고들 있었는데, 유대인 지도자들은
이를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였다. 바로 이 오순절 축제에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가 출현해 예루살렘의 파괴를 소리높여 외치고 다녔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총독 알비누스가 부임 직후 한 첫번째 조치는, 로마총독의
허가없이 산헤드린을 소집하고 그 결정에 따라 역시 로마총독의 허가없이
(기독교의)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사법살인한 당시 대제사장 안나누스를
파직시킨 것이었다. 따라서 안나누스의 아들 예수를 알비누스에게 보낸
유대인 지도부의 행위는 그렇게 복잡하게 해석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알비누스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미리 알아서 조치했을 뿐이다.
아무튼 이 예수는 총독에 의해 죽지도 않았고, 풀려난 후 7년 간 자유롭게
활동하는 동안 예루살렘의 유대인 지도부가 그를 죽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럼 어떻게 이 예수가 기독교의 예수와 오버랩되는가?
# 타키투스의 "그리스도 Christus"와 "기독교도 Chrestianos"
한편,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의 기록은 이렇다. AD 64년 네로
치하에 발생한 로마 대화재의 방화범으로 기소된 기독교도들에 대한
기록이다.
44. Et haec quidem humanis consiliis providebantur. mox petita
[a] dis piacula aditique Sibyllae libri, ex quibus supplicatum
Volcano et Cereri Proserpinaeque, ac propitiata Iuno per matronas,
primum in Capitolio, deinde apud proximum mare, unde hausta aqua
templum et simulacrum deae perspersum est; et sellisternia ac
pervigilia celebravere feminae, quibus mariti erant. Sed non ope
humana, non largitionibus principis aut deum placamentis decedebat
infamia, quin iussum incendium crederetur. ergo abolendo
rumori
XLIV. Such indeed were the precautions of human wisdom. The next
thing was to seek means of propitiating the gods, and recourse was
had to the Sibylline books, by the direction of which prayers were
offered to Vulcanus, Ceres, and Proserpina. Juno, too, was
entreated by the matrons, first, in the Capitol, then on the
nearest part of the coast, whence water was procured to sprinkle
the fane and image of the goddess. And there were sacred banquets
and nightly vigils celebrated by married women. But all human
efforts, all the lavish gifts of the emperor, and the
propitiations of the gods, did not banish the sinister belief that
the conflagration was the result of an order.
Nero subdidit reos et quaesitissimis poenis adfecit, quos per
flagitia invisos vulgus Chrestianos appellabat. auctor nominis
eius Christus Tibero imperitante per procuratorem Pontium Pilatum
supplicio adfectus erat; repressaque in praesens exitiablilis
superstitio rursum erumpebat, non modo per Iudaeam, originem eius
mali, sed per urbem etiam, quo cuncta undique atrocia aut pudenda
confluunt celebranturque.
Consequently, to get rid of the report, Nero fastened the guilt
and inflicted the most exquisite tortures on a class hated for
their abominations, called Christians by the populace. Christus,
from whom the name had its origin, suffered the extreme penalty
during the reign of Tiberius at the hands of one of our
procurators, Pontius Pilatus, and a most mischievous
superstition, thus checked for the moment, again broke out not
only in Judæa, the first source of the evil, but even in Rome,
where all things hideous and shameful from every part of the
world find their [p. 381] centre and become popular.
따라서 네로는 소문을 억누르고자, 혐오스런 행위로 증오의 대상이
된 크레스티아노스/그리스도인이라 불라는 자들을 범죄인으로
잡아들여 극심한 고문을 가했다.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의 어원이 된
'크레(리)스투스'는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 그의 프로큐라토르 가운데
하나인 폰티우스 필라투스에 의해 극형에 처해졌는데, 이 극악한
미신/종교는 이 사악함이 시작된 유대아 뿐 아니라 심지어
로마에까지 등장해, 세상의 모든 음험하고 수치스런 것들이 자리잡고
유행하게 되었다 / 번역:
최광민
igitur primum correpti qui fatebantur, deinde indicio eorum
multitudo ingens haud proinde in crimine incendii quam odio humani
generis convicti sunt. et pereuntibus addita ludibria, ut ferarum
tergis contecti laniatu canum interirent aut crucibus adfixi [aut
flammandi atque], ubi defecisset dies, in usu[m] nocturni luminis
urerentur. hortos suos ei spectaculo Nero obtulerat, et circense
ludicrum edebat, habitu aurigae permixtus plebi vel curriculo
insistens. unde quamquam adversus sontes et novissima exempla
meritos miseratio oriebatur, tamquam non utilitate publica, sed in
saevitiam unius absumerentur.
Accordingly, an arrest was first made of all who pleaded guilty;
then, upon their information, an immense multitude was convicted,
not so much of the crime of firing the city, as of hatred against
mankind. Mockery of every sort was added to their deaths. Covered
with the skins of beasts, they were torn by dogs and perished, or
were nailed to crosses, or were doomed to the flames and burnt, to
serve as a nightly illumination, when daylight had
expired. Nero offered his gardens for the spectacle, and was exhibiting a
show in the circus, while he mingled with the people in the dress
of a charioteer or stood aloft on a car. Hence, even for criminals
who deserved extreme and exemplary punishment, there arose a
feeling of compassion; for it was not, as it seemed, for the
public good, but to glut one man's cruelty, that they were being
destroyed. --- Tacitus, {The Annals} 15.44
여기서 타키투스는 "기독교도"를 뜻하는
그리스어 '크리스티아노스'를 라틴어 표기로 '크레스티아노스'로
적었다.
로마 역사가인 수에토니우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 전기}에서 AD 49년 클라우디우스 황제 당시 로마에서 유대인들이 추방된 사건을 짧게 다루면서 그 배후로 "크레스투스"란 인물을 언급한다. 사실 당시 "크레스투스"란 이름은 그리스계 노예 및 평민 이름으로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이 인물은 예수와 상관없는 "크레스투스"란 유대인으로 새길 수 있다. 혹은 "그리스도"의 그리스어 원음인 "크리스토스"가 오인 된 것일 수도 있다.
Iudaeos impulsore Chresto assidue tumultuantis Roma expulit -- Suetonius, {CLAUDIUS} XXV
크레스투스의 선동으로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소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 (=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다. -- 수에토니우스, {열 두 황제의 전기} / 클라우디우스 편 / 번역: 최광민
적어도 타키투스의 경우는 단순히 발음상의
착각일 뿐으로 보아야 한다. 타키투스의 친구이자 트라야누스 황제 때
비티비아 총독으로 그 지역 기독교도들을 취조했던 (소)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와 기독교도들을 처벌할 프로토콜에 대해 자문을 구하는 편지를
교환하면서 '크리스토 Christo' 와 '크리스티아니 Christiani' 를
사용한다.
타키투스의 저작들에 익숙했고, 그래서 타키투스 등
로마 작가가들이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해 잘못 기술하고 있는 내용들을
비판하기도 했던 AD 2세기 후반의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신
테르툴리아누스는, 그의 변증에서 로마인들이 기독교도들을 탄압하면서도
해당용어조차 제대로 모른다고 비판하고 있다.
"Christianus" vero, quantum interpretatio est, de unctione
deducitur. Sed et cum perperam "Chrestianus" pronuntiatur a vobis — nam
nec nominis certa est notitia penes vos —, de suavitate vel
benignitate compositum est.
But Christian, so far as the meaning of the word
is concerned, is derived from anointing. Yes, and even when it is wrongly pronounced by you Chrestianus
(for you do not even know accurately the name you hate), it comes from sweetness and benignity. ---
Tertullian, {Apology} Chapter 3
....."크리스티아누스
(기독교도)"란 단어의 의미를 따진다면, 그 단어는 '기름부음'이란
단어에서 왔다. (당신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이름 (=그리스도인 / 기독교도 /
크리스티아누스)조차 정확하게 모르면서) 당신들이 그 단어를
"크레스티아누스"라고 잘못 발음할 때 조차, (잘못 발음된 / 필자 주) 그 단어 ("크레스티아누스")는 "달콤한"
혹은 "선한"이란 (좋은 / 필자 주) 뜻을 가진다...... --- 테르툴리아누스, {변증} / 번역: 최광민
AD 4세기에 그리스어로 필사된 성서사본인 {코덱스 시나이쿠스}의 경우,
{사도행전} 11:26, 26:7, 그리고 {베드로전서} 4:16에서 각각
그리스도인들 ("크리스티아노이")를 '에타'를 써서 "크레스티아노이"로
표기한다. 이 세 군데 이외엔 모두 '이오타 (ι)'가 사용된
'크리스티아노이'로 되어 있다. 이 {코덱스 시나이티쿠스}는 많은
필사오류를 가지고 있고, 여러 세대에 걸쳐 오/탈자가 수정된 흔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오타 (ι)'가 사용된 "크리스토스 (Χριστός)"든
'에타 (η)'가 사용된 "크레스토스 (Χρηστός)"든, "크리스티아노스
Χριστιανός"든 "크레스티아노스 Χρηστιανός" 든 모두 동일한
"그리스도"와 "기독교도"를 뜻할 뿐이다.
판단은 각자의 몫.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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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신화/종교
© 최광민, Kwangmin Choi, 2008-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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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최광민] 예수 vs. 예수들 #1: 요세푸스의 "크리스토스"와 타키투스의 "크레스투스"
순서
- 예수 세미나
- 요세푸스의 "예수들"과 "그리스도라 불린 예수의 형제 야고보"
- 타키투스의 "그리스도 Christus"와 "기독교도 Chrestianos"
- AD 33-70년 사이에 유대아 지역의 기독교도들은 자신들의 예수가 '예루살렘의 유대인 지도자들의 기소로 빌라도 총독에 의해 십자가형을 당했다'는 점을 모르고 있어야 하며, (사실에 기반했든 혹은 종교적 믿음에 기반했든) 자신들의 예수가 "육체적으로 부활했다"고도 믿지 않았어야 한다. 혹은 AD 33-70년 사이에 예루살렘과 유대아 일대에 위와 같은 정체성을 가진 기독교도들이 없었거나, 그런 기독교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어야 한다. 왜? 소위 '여러 예수들"의 출현시기는 기독교의 예수로 부터 한 세대 뒤이기 때문이다. 즉, 기독교의 예수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이 이미 AD 60년 이전에 수립된 것이라면 다른 예수들의 행적이 기독교의 예수의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 예수의 십자가형이 있던 AD 33년 이후부터 1세대 뒤인 AD 70년 경에, 제 1차 유대전쟁에 유대인 갈릴리 사령관으로 참전했고 전쟁 중 로마로 투항/귀화한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자신의 글에 언급된 모든 "예수들"과 다른 이름의 "반란지도자들"과 기독교의 "메시아 예수"를 혼동했어야 한다.
- 요세푸스의 저작에 등장하는 기독교의 '메시아/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두가지 진술 ('빌라도에 의해 처형당했고 그의 부활을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라 부르는 예수', '의인 야고보의 형제로 그리스도라 불린 예수'에 대한 진술이 모두 후대 기독교도들의 조작이어야 한다. 혹은 요세푸스가 이 예수와 다른 예수들을 혼동했어야 한다.
첫번째 가정이 성립하려면, AD 70년 이전에 작성되어 회람된 바울의 편지들 및 예수의 형제 (혹은 사촌) 야고보가 지도자로 있던 예루살렘 교회와 바울 사이의 협력과 긴장관계에 대한 {신약성서} 속 기록들을 모두 부정해야 한다. 이 문서들에는 이미 예수의 형제 (혹은 사촌) 야고보가 이끈 예루살렘의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과, 대부분의 유대인이 주축이 된 예루살렘 교회가 할례 등의 유대인 관습의 유지에 있어서 바울과 이견을 보인 적은 있지만 결국 제 1차 예루살렘 회의에서 야고보와 바울 사이에 논점에 대한 합의를 보았으며, 또한 이 문제를 제외하면 예수에 관한 신앙이 예루살렘 측과 바울 사이에서 논란이 된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고한다.
두번째와 세번째 가정이 성립하려면, 요세푸스의 기록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예수들은 요세푸스의 동시대인들로 요세푸스와 개인적인 친분 혹은 원한관계로 묶인 사람들이란 요세푸스 본인의 기록을 모조리 무시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 역시 꽤 무리한 정황이다. 즉, 요세푸스가 자신의 한 세대 전의 인물인 기독교의 예수와 자신의 동시대인인 다른 예수들을 혼동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하스모니안 왕가의 피를 잇고 있는 제사장 출신 요세푸스의 가문은 예루살렘 정치에 정통한 귀족권력층에 속했고, 그의 자서전에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그는 당시 예루살렘과 유대아에서 벌어지는 권력암투에 대해 매우 자세히 알고 있었다. 아울러 제사장 가문인 그의 집안은 하스모니안 왕가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사두개/사두가이파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당시의 민중파/개혁파인 바리새/바리사이파의 일원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동시에 당시 에세네파의 스승을 따라 구도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는 (최소한 자신의 진술에 따르자면), 당시 유대아의 정치상황에 정통했고, 모든 유대교 분파를 직접 경험한 인물인 동시에, 예루살렘에서 파견한 갈릴리 사령관으로서 그 지역에 기반한 혁명분자들인 젤롯과도 (주로 나쁜) 관계를 맺어 젤롯에 대해서도 꽤 정통해 있었다.
# 요세푸스의 예수와 야고보
"예수" 혹은 아람어 "예수아"는 AD 1세기 당시 흔한 이름이었다.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에 등장하는 예수 만도 "가말라의 아들 예수", "사파트의 아들 예수", "사피아스의 아들 예수", "담네우스의 아들 예수", 그리고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 등등이 있다. 그의 다른 저작까지 모두 합치면 약 20여 명의 예수들이 등장한다. 예수의 처형 대신 풀려난 바라바의 이름도 한 {복음서}에는 "예수 바라바"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예수와 바라바 중에 하나를 빌라도가 선택해야 하는 장면을 되새겨 보면, 결국 "두 예수"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다.
우선 요세푸스의 저작들에 등장하는 예수들을 모두 나열해 보겠다.
- The Works of Josephus Whiston translation
- The Works of Josephus Whiston translation
- Josephus: The Complete Works Whiston translation
- The Works of Josephus in Greek
- Flavius Josephus
모세를 이어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인을 이끌던 여호수아를 제외하면, 기독교의 예수가 다른 모든 예수들에 시간상 선행한다.
- 눈(Nun)의 아들 여호스아/요수아(~예수아) – 모세를 계승했던 히브리인의 지도자. Ant 03.049, Ant 03.308; Ant 4.459
- 야고보의 형제이자 – 그리스도(라 불린) 예수. Ant 20.200
- 그리스도라 불렸으며 폰티우스 필라투스가 사형시킨 예수. Ant 18.063
- Phabes의 아들 예수 – 대제사장. Ant 15.322
- Ananus의 아들 예수 – 성전의 파괴를 예언한 평민. War 6.300
- 예수 혹은 이아손 – 대제사장. Ant 12.239
- Sapphias의 아들 예수 – 티베리아스 지사. War 2.566, War 2.599; Life 1.066, Life 1.134
- Onias의 형제 예수 – 대제사장. Ant 12.237, Ant 12.238, Ant 12.239
- Gamaliel의 아들 예수 – 대제사장. Ant 20.213, Ant 20.223
- 예수 – 안나누스 다음으로 연장자였던 대제사장. War 4.238, War 4.316, War 4.325
- Damneus의 아들 예수 – 대제사장. Ant 20.203
- Gamala의 아들 예수 – 대제사장이자 요세푸스의 지인. War 4.160; Life 1.193, Life 1.204 J
- Shapat의 아들 예수 – 티베리아스를 장악한 마적단 두목.. War 3.450
- Thebuthus의 아들 예수 –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을 로마 사령관 티투스에게 가져간 인물. War 6.387
- Josadek의 아들 – 대제사장. Ant 20.231, Ant 20.234
- 예수 – 안나누스가 요세푸스를 해임시키기 위해 보낸, 600명 추종자를 거느린 갈릴리인. Life 1.200
- 예수 – 요세푸스와 동맹지간이자 프롵타미아스에 투옥된 마적단 두목. Life 1.105
이번에는 요세푸스의 저작별로 살펴보자.
- {유대고대사}, Ant.
- 03:049 Nun의 아들 여호수아 (예수아 / 요수아)
- 11:298 Eliashib의 아들 예수, 대제사장, 지사 바고세스의 친구인 요한의 형제
- 11:299 엘리아쉽의 아들 예수, 대제사장, 요한의 형제
- 11:300 엘리아쉽의 아들 예수
- 11:301 엘리아쉽의 아들 예수, 대제사장, 요한의 형제
- 12:237 Onias III의 아들 예수, 대제사장.
- 12:238 오니아스 III의 아들 예수
- 12:239 Onias (= Menelaus)의 동생 예수
- 12:239 오니아스 III 의 형제 예수, 이아손으로 개명, 오니아스(= Menelaus)에게 반란
- 15:041 오니아스 III의 형제 예수
- 15:322 Phabes의 아들 예수, 대제사장
- 17:341 Sie의 아들 예수, 대제사장.
- 18:063 폰티우스 필라투스가 십자가형에 처했고, 그리스도인 (혹은 여겨진) 예수
- 20:200 그리스도라 불린 예수, 야고보의 형제
- 20:203 Damneus의 아들 예수, 대제사장
- 20:205 담네우스의 아들 예수, 대제사장.
- 20:213 Gamaliel의 아들 예수, 대제사장
- 20.213 담네우스의 아들 예수.
- 20:223 가말리엘의 아들 예수
- 20:234 Josadek의 아들 예수, 대제사장
- {유대전쟁사}, War
- 2:566 Sapphias의 아들 예수, 티베리아스 지사
- 2:599 사피아스의 아들 예수, 티베리아스 지사
- 3:450 Shapat의 아들 예수, 티베리아스를 장악한 마적단 두목
- 3:452 (샤파트의 아들) 예수
- 3:457 (샤파트의 아들) 예수
- 3:467 (샤파트의 아들) 예수
- 3:498 (샤파트의 아들) 예수
- 4:160 Gamala의 아들 예수
- 4:238 안나누스 후임 대제사장들 중 가장 고령인 예수.
- 4:270 안나누스 후임 대제사장들 중 가장 고령인 예수
- 4:283 안나누스 후임 대제사장들 중 가장 고령인 예수
- 4:316 안나누스 후임 대제사장들 중 가장 고령인 예수
- 4:322 안나누스 후임 대제사장들 중 가장 고령인 예수
- 4:325 안나누스 후임 대제사장들 중 가장 고령인 예수
- 4:459 눈의 아들 여호수아 / 예수아
- 6:114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보내진 대제사장 예수
- 6:300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예언한 평민 안나누스의 아들 예수
- 6:387 Thebuthus의 아들 예수, 티투스에게 보내진 제사장 중 하나.
- {자서전}, Life
- 1:066 사피아스의 아들 예수, 티베리아스 지사.
- 1:067 사피아스의 아들 예수
- 1:105 예수, Ptolemais 근방의 마적단 두목
- 1:108 예수, Ptolemais 근방의 마적단 두목
- 1:109 예수, Ptolemais 근방의 마적단 두목
- 1:110 예수, Ptolemais 근방의 마적단 두목
- 1:134 사피아스의 아들 예수, 티베리아스 지사.
- 1:178 예수, 티베리아스의 유스투스와 형제
- 1:186 예수, 티베리아스의 유스투스와 형제
- 1:193 가말라의 아들 예수, 대제사장, 요세푸스의 친구
- 1:200 요세푸스를 쫓아내려고 한 갈릴리인 600명의 지도자
- 1:204 가말라의 아들 예수.
- 1:246 예수, 큰 성채를 소유한 자, 티베리아스 지사?
- 1:271 티베리아스 지사 예수
- 1:278 티베리아스 지사 예수
- 1:294 티베리아스 지사 예수
- 1:295 티베리아스 지사 예수
- 1:300 티베리아스 지사 예수
- 1:301 티베리아스 지사 예수
일부 예수는 "~의 아들"이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중복된 예수들이 리스트에 존재할 것이다. 이 가운데 "메시아/그리스도'로 자칭했거나 여겨졌던 인물로 요세푸스가 언급하는 유일한 인물은, (1) '현자'요 (2) '기적을 행한 사람'이자, (3) '유대 지도층에 의해 기소되어 죽었고', (4) '빌라도가 사형을 집행했으며', (5) '부활했다"고 추종자들이 믿었고, (6) '그 추종자들은 요세푸스 당시에 크리스티아노스 (그리스도인)이라' 불렸으며, 아울러 (7) 이 예수의 형제는 의인 야고보로 대제사장 안나누스에 의해 불법처형 당했다. 이 조합의 인물이 짜깁기 된 인물이 아니라면, 요세푸스는 기독교의 예수를 아주 정확히 특정하고 있는 것이다.
{플라비우스의 증언}이라고 불리는 논란많은 요세푸스의 기록을 먼저 보자. 요세푸스는 빌라도 시절에 유대인 지배층에 의해 살해당한 이 현자 "예수"을 메시아로 믿고 그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을 그가 살던 당시인 AD 1세기 말의 기독교도 (Χριστιανῶν)로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그리스어로 전해지는 위 진술이 후대에 친-기독교적으로 다소 윤색되었다고 가정하고 예수에 대한 묘사가 중립적으로 처리된 시리아어 번역본에 따라 그 부분을 거두어 내더라도, 당시에 있던 '기독교도'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고 메시아/그리스도로 믿었다는 점을 요세푸스가 진술하고 있다는 점에는 변화가 없다. 즉, 여러 예수들이 활동하던 요세푸스의 시절에, 요세푸스는 이미 한 세대 전부터 "예수를 부활한 메시아로 믿는" 기독교도들이 있었다는 점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AD 4세기 초반의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의 기록이다.
Γίνεται δὲ κατὰ τοῦτον τὸν χρόνον Ἰησοῦς σοφὸς ἀνήρ, εἴγε ἄνδρα αὐτὸν λέγειν χρή: ἦν γὰρ παραδόξων ἔργων ποιητής, διδάσκαλος ἀνθρώπων τῶν ἡδονῇ τἀληθῆ δεχομένων, καὶ πολλοὺς μὲν Ἰουδαίους, πολλοὺς δὲ καὶ τοῦ Ἑλληνικοῦ ἐπηγάγετο: ὁ χριστὸς οὗτος ἦν. καὶ αὐτὸν ἐνδείξει τῶν πρώτων ἀνδρῶν παρ᾽ ἡμῖν σταυρῷ ἐπιτετιμηκότος Πιλάτου οὐκ ἐπαύσαντο οἱ τὸ πρῶτον ἀγαπήσαντες: ἐφάνη γὰρ αὐτοῖς τρίτην ἔχων ἡμέραν πάλιν ζῶν τῶν θείων προφητῶν ταῦτά τε καὶ ἄλλα μυρία περὶ αὐτοῦ θαυμάσια εἰρηκότων. εἰς ἔτι τε νῦν τῶν Χριστιανῶν ἀπὸ τοῦδε ὠνομασμένον οὐκ ἐπέλιπε τὸ φῦλον.
3.3 Now there was about this time Jesus, a wise man, if it be lawful to call him a man; for he was a doer of wonderful works, a teacher of such men as receive the truth with pleasure. He drew over to him both many of the Jews and many of the Gentiles. He was [the] Christ. And when Pilate, at the suggestion of the principal men amongst us, had condemned him to the cross, those that loved him at the first did not forsake him; for he appeared to them alive again the third day; as the divine prophets had foretold these and ten thousand other wonderful things concerning him. And the tribe of Christians, so named from him, are not extinct at this day. --- {Antiquities of the Jews} xviii 3.3
이 무렵,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허락된다면 현자라고나 해야 할 예수가 있었다. 그는 기적을 행한 사람이자, 기꺼이 진리를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들의 스승이었다. 그는 많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관심을 끌었다. 그는 그리스도/메시아였다. 유대인 지도층의 요청대로 필라투스는 그에게 십자가형을 언도했는데, 처음부터 그를 사랑하던 자들은 그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죽은지 3일째 다시 살아나 그들 앞에 나타났는데, 이런 일을 신의 예언자들이 예언해 왔으며 수많은 다른 기적들이 그와 관련되어 있다. 그의 이름에 따라 지어진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존재한다 ---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 번역: 최광민
이 논란 많은 {플라비우스의 증언} 문구를 처음 인용한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즈음,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 (c. 340 – 397), (혹은 위-헤게시푸스)는 예수의 신성을 변호하고자 요세푸스의 저작들을 인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요세푸스가 예수를 "메시아"로 호칭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진술은 요세푸스의 표준 그리스어 사본의 내용과 거의 같지만, 여기에 유세비우스가 인용한 것과 같은 "그는 그리스도였다"라는 문장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은 즉, 유세비우스로부터 한 세대 안의 그리스어 사본들에 "그는 그리스도였다"란 문장이 빠져있는 문서군이 있었다는 방증일 수 있다. 즉, 최소한 암브로시우스가 참조한 그리스어 사본에는 그 문장이 없었던 것 같다.
암브로시우스의 진술을 인용해 본다.
The Jews themselves also bear witness to Christ, as appears by Josephus, the writer of their history, who says thus: 'That there was at that time a wise man, if (says he) it be lawful to have him called a man, a doer of wonderful works, who appeared to his disciples after the third day from his death, alive again according to the writings of the prophets, who foretold these and innumerable other miraculous events concerning him: from whom began the congregation of Christians, yet he was no believer, because of the hardness of his heart and his prejudicial intention. However, it was no prejudice to the truth that he was not a believer, but this adds more weight to his testimony, that while he was an unbeliever and unwilling, this should be true, he has not denied it to be so.
요세푸스의 경우를 보듯, 그리스도에 대한 유대인들의 증거들이 있다. 그들의 역사를 기록한 요세푸스는 말하길, "그 무렵, 인간이라 불러야 한다면 현자라고 할 만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기적을 행하는 자였고, 그에 관한 이런저런 수많은 기적들을 예언했던 예언자들의 글에 기록된 바대로 죽은 후 3일 후 살아나 제자들에게 나타났다. 그 제자들로부터 기독교도들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기독교도가 아니었다. 그의 마음이 굳었고 편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신자가 아니었다는 점이 진실을 손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점이 그의 증언에 더 무게를 더하고 있다. 비록 신자가 아니었고 그럴 의도도 아니었을지라도, 자신의 진술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진술은 사실임에 분명하다. / 번역: 최광민
아울러 AD 4세기에 팔레스티나에서 활동하던 히에로니무스 역시 요세푸스의 이 한 문단을 인용하긴 했지만, 유세비우스의 버전과는 다소 다르게 인용했다. 이 경우, 요세푸스는 "그는 그리스도였다"라고 진술한 것이 아니라, "그는 그리스도라 불려졌다" 혹은 "여겨졌다"로 진술한 것이 된다.
히에로니무스의 {DE Viris Illustribus} 라틴어 사본에서 인용한다.
Scripsit autem de domino in hunc modum: Eodem tempore fuit Iesus, sapiens vir, si tamen virum eum oportet dicere; erat enim mirabilium patrator operum et doctor eorum qui libenter vera suscipiunt; plurimos quoque tam de Iudaeis quam de gentilibus habuit sectatores, et credebatur esse Christus. cumque invidia nostrorum principum cruci eum Pilatus adfixisset, nihilominus qui primum dilexerant perseverarunt {in fide}; apparuit enim eis tertia die vivens; multa et haec et alia mirabilia carminibus prophetarum de eo vaticinantibus. et usque hodie Christianorum gens ab hoc sortita vocabulum non defecit. --- De Viris Illustribus 13
”Josephus in the 18th book of Antiquities, most expressly acknowledges that Christ was slain by the Pharisees, on account of the greatness of his miracles....Moreover, he wrote concerning the Lord in this manner: At the same time there was Jesus, a wise man, if indeed it is proper to say that he was a man; for he was an accomplisher of marvelous works and a teacher of those who freely receive true things; he also had very many followers, as many from the Jews as from the gentiles, and he was believed to be Christ. When by the envy of our principal ones Pilate had affixed him to a cross, those who had first loved him nevertheless persevered {in the faith}; for he appeared to them on the third day living; many things, both these and other marvelous things, are in the songs of the prophets who made predictions about him. Even until today the race of Christians, having obtained the word from him, has not failed.” (Ben C. Smith, Text Excavation, The Testimonium Flavianum)
“In this same time was Jesus, a wise man, if indeed it be lawful to call him man. For he was a worker of wonderful miracles, and a teacher of those who freely receive the truth. He had very many adherents also, both of the Jews and of the Gentiles, and was believed to be Christ, and when through the envy of our chief men Pilate had crucified him, nevertheless those who had loved him at first continued to the end, for he appeared to them the third day alive. Many things both these and other wonderful things are in the songs of the prophets who prophesied concerning him and the sect of Christians, so named from him, exists to the present day.” (Marian Hillar, Flavius Josephus and His Testimony Concerning the Historical Jesus, 2005, p. 6–7)
요세푸스는 그의 {유대고대사} 제 18권에서, 그리스도가 바리새인들에 의해 죽은 것을 명백히 인정하고 있으며, 그의 위대한 기적들에 대해서....[중략]......이제 요세푸스는 이런 식으로 우리 주님에 대해 진술한다. "바로 같은 시절, 사람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현자인 예수가 있었다. 그는 기적을 행한 사람이었고,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들의 스승이었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들 가운데 많은 추종자를 가졌었다. 그는 그리스도라 여겨졌다. 우리의 지도자들은 그를 시기하였고, 필라투스는 그를 기소해 십자가에서 그를 죽였다. 그러나 그를 처음부터 사랑했던 이들은 자리르 지켰고, 그는 3일 째에 살아나 그들에게 나타났다. 이것은 예언자들이 그에 관한 이 일들과 다른 일들에 대해 예언한 바와 같다. 그리고 그를 따라 '그리스도인들'이라 불리는 자들은 오늘날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존재한다 / 번역: 최광민
AD 4세기의 수도사이자 역사가인 루피누스 (Tyrannius Rufinus)는 아래와 같은 라틴어 번역을 남겼다. 이 번역에는 유세비우스가 인용한 그리스어판 처럼 "그는 그리스도였다"가 등장한다.
Fuit autem iisdem temporibus Iesus, sapiens vir, si tamen virum eum nominare fas est; erat enim mirabilium operum effector doctorque hominum eorum qui libenter quae vera sunt audiunt, et multos quidem Iudaeorum, multos etiam ex gentilibus sibi adiunxit; Christus hic erat. hunc accusatione primorum nostrae gentis virorum, cum Pilatus in crucem agendum esse decrevisset, non deseruerunt hi qui ab initio eum dilexerant; apparuit enim eis tertio die iterum vivus, secundum quod divinitus inspirati prophetae vel haec vel alia de eo innumera miracula futura esse praedixerant. sed et in hodiernum diem Christianorum, qui ab ipso nuncupati sunt, et nomen perseverat et genus
There was, moreover, in those times Jesus, a wise man, if indeed it is permissible to name him a man; for he was an effector of marvelous works and a teacher of those men who freely listen to those things that are true, and many even of the Jews, and also many from the gentiles, he joined to himself; this man was the Christ. And, when on the accusation of the first men of our race Pilate had decreed that this man be led to a cross, those who from the start had loved him did not desert him; for he appeared to them on the third day living again, in accordance with what the divinely inspired prophets had foretold would be, whether these things or other innumerable miracles concerning him. But even in this very day both the name and the race of Christians, who have been named from him, persevere.
한편, 유세비우스의 {교회사}가 씌여진 후 얼마되지 않아 이 저작은 AD 4세기 안에 시리아어로도 번역되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가장 오래된 시리아어 사본은 AD 462년의 것인데, 이 사본은 많은 필사오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원본이라고 보기는 힘들고, 따라서 늦어도 AD 5세기 초반기에 이미 유세비우스의 시리아 번역 {교회사}가 유통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리아어 번역은 유세비우스의 그리스어 버전처럼 "그는 그리스도였다"로 설명되어 있다. 또 이 시리아어 번역에서 AD 5세기 초반 아르메니어로 번역된 {교회사}에는 더 나아가 "그는 진실로 그리스도였다"로 등장한다.
AD 10세기 칼케돈 신조를 고수하는 멜키트파 시리아 기독교 주교였던 히에라폴리스의 아가피우스가 쓴 {Book of Title}의 번역에 따르면 "그는 어쩌면 메시아였을 것이다"가 된다. 아가피우스는 이 자료를 시리아 마론파 기독교도였던 에뎃사의 테오필로스 (AD 695-785)의 자료에서 가져왔다. 즉, 그의 자료는 AD 8세기 말의 것이다. 시리아 일대의 이슬람화가 진행되던 시기에 작성된 그의 아랍어 원문을 영어로 번역한 것에서 다시 중역한다.
At this time there was a wise man who was called Jesus. And his conduct was good, and he was known to be virtuous. And many people from among the Jews and the other nations became his disciples. Pilate condemned him to be crucified and to die. And those who had become his disciples did not abandon his discipleship. They reported that he had appeared to them after his crucifixion and that he was alive; accordingly, he was perhaps the Messiah concerning whom the prophets have recounted wonders.
이때에 예수라 불리는 현자가 있었다. 그의 행실은 의로왔으며 모범적인 것으로알려졌다.유대인과 이방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필라투스가 그를 십자가에서 죽게 했다. 그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자신의 제자됨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가 십자가에서 죽은 후 살아나 자신들에게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예언자들이 기적들에 자세히 말한 바대로, 그는 아마 메시아였을 것이다. / 번역: 최광민
AD 12세기에 안티오키아의 단성파 총주교인 "시리아인" 미카엘이 편집한 시리아어 문건에는 히에로니무스가 참조한 버전에 흡사한 번역이 등장한다. 미카엘은 9세기 시리아 안티오키아의 총주교였던 텔마레의 디오니시오스 1세 (AD 818–848) 의 연대기에서 해당 내용을 가져왔는데, 서문에 따르면 디오니시오스의 연대기 역시 테오필로스의 자료에서 그 내용을 가져온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는 그리스도도 여겨졌다" 혹은 "사람들은 그를 그리스도로 믿었다"의 표현이 다시 등장한다.
“The writer Josephus also says in his work on the institutions of the Jews: ’In these times there was a wise man named Jesus, if it is fitting for us to call him a man. For he was a worker of glorious deeds and a teacher of truth. Many from among the Jews and the nations became his disciples. He was thought to be the Messiah. But not according to the testimony of the principal [men] of [our] nation. Because of this, Pilate condemned him to the cross and he died. For those who had loved him did not cease to love him. He appeared to them alive after three days. For the prophets of God had spoken with regard to him of such marvellous things [as these]. And the people of the Christians, named after him, have not disappeared till [this] day.” -- Michael the Syrian, Chronicle 10:20. Source - The translation from Syriac is made by Shlomo Pines. (Shlomo Pines, An Arabic version of the Testimonium Flavianum and its implications, 1971, p. 26).
저자인 요세푸스는 유대인들의 제도에 대한 그의 저작 속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 "이 즈음, 인간이라 부를 수 있다면 현자라고나 할 예수가 있었다. 그는 놀라운 기적을 보인 사람이었고 진리의 스승이었다. 유대인과 이방나라의 사람들이 그의 제자들이 되었다. 그는 메시아라 여겨졌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은 그렇게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그를 사랑했던 자들을 그 사랑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그들 앞세 제 3일째에 다시 나타났다. 신의 예언자들이 그에 관한 그런 놀라운 일에 대해 이야기해 왔었다. 그리스도란 이름에 따라 이름 붙여진 기독교도들은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 시리아인 미카엘, {연대기} 10:20 / 번역: 최광민
라틴어권과 시리아어권의 기독교도들은 서로의 언어를 직접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대신 그들은 그리스어 문헌에 대한 독해는 가능했다. 따라서 역시 유세비우스가 입수한 것과는 조금 다른 버전의 그리스어 사본이 해당 시리아어 본의 기초가 되었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아쉽게도 아가피우스와 미카엘이 인용한 내용의 원자료에 해당할 테오필로스의 시리아어 원저작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였다"라고 진술하는 (현존하는 그리스어본과 동일한) 4/5세기의 시리아어 번역이 8세기의 테오필로스의 저작에서도 등장하는지, 혹은 테오필로스의 저작에는 "그리스도로 여겨졌다"로 되어 있는지 (그래서 혹시 테오필로스가 "그리스도로 여겨졌다"라는 윤색을 처음 시도한 것인지) 직접 비교해 볼 방법은 현재로서는 없다. 하지만 "진실로"란 단어가 삽입된 아르메니아어 번역에서 추측할 수 있듯, 번역자의 종교적 의도가 원문에 수정을 가할 가능성은 열어두어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의 예수에 관한 요세푸스의 진술이 그리스어 사본에 따라 다소의 변형을 보이고 있고, 혹은 후대의 기독교도들이 그의 이 문단에서 일부 문장을 가필했거나 수정했거나 혹은 필사상 오류를 범했을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이 문단에 진술된 핵심적인 내용에는 큰 차이가 없고, 따라서 요세푸스가 예수를 역사적인 인물로 인지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현대 학계의 주류 시각이다.
다음으로는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에 관련된 기록을 보자.
요세푸스는 이 "야고보"가 "그리스도"로 불렸던 "예수"의 형제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 야고보는 모든 고대 기록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기록된다. 당대의 가장 정확한 기록인 요세푸스의 저작 어디에도 AD 1세기 초/중반에 "메시아"를 자처했던 인물들 가운데 "예수"란 이름을 가진 인물은 기독교의 그 예수 밖에는 없다. 예수 이전의 "유다" 혹은 제 2차 유대인 봉기 때의 "시몬" 바르 코크바 등이 "메시아"를 자처한 인물들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요세푸스는 그의 저작에 등장하는 여러 예수들을 혼동하지 않았다.
And now Caesar, upon hearing the death of Festus, sent Albinus into Judea, as procurator. But the king deprived Joseph of the high priesthood, and bestowed the succession to that dignity on the son of Ananus, who was also himself called Ananus. Now the report goes that this eldest Ananus proved a most fortunate man; for he had five sons who had all performed the office of a high priest to God, and who had himself enjoyed that dignity a long time formerly, which had never happened to any other of our high priests. But this younger Ananus, who, as we have told you already, took the high priesthood, was a bold man in his temper, and very insolent; he was also of the sect of the Sadducees, who are very rigid in judging offenders, above all the rest of the Jews, as we have already observed; when, therefore, Ananus was of this disposition, he thought he had now a proper opportunity. Festus was now dead, and Albinus was but upon the road; so he assembled the sanhedrin of judges, and brought before them the brother of Jesus, who was called Christ, whose name was James, and some others; and when he had formed an accusation against them as breakers of the law, he delivered them to be stoned: but as for those who seemed the most equitable of the citizens, and such as were the most uneasy at the breach of the laws, they disliked what was done; they also sent to the king, desiring him to send to Ananus that he should act so no more, for that what he had already done was not to be justified; nay, some of them went also to meet Albinus, as he was upon his journey from Alexandria, and informed him that it was not lawful for Ananus to assemble a sanhedrin without his consent. Whereupon Albinus complied with what they said, and wrote in anger to Ananus, and threatened that he would bring him to punishment for what he had done; on which king Agrippa took the high priesthood from him, when he had ruled but three months, and made Jesus, the son of Damneus, high priest.[31] --- {Antiquities} book 20, chapter 9
민[전략]...페스투스가 사망하고 알미누스가 부임 중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나니아) 판관들의 산헤드린을 소집한 후, 그들 앞에 그리스도라 불렸던 예수의 형제로서 그 이름이 야고보인 사람과 또 다른 이들을 끌어다 놓았다. 그들을 율법파괴자란 명목으로 기소한 후, 그 (아나니아)는 그들을 돌로 쳐 사형시켰다.....[후략] ----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제 20권 9장 / 번역: 최광민
SBS 다큐멘터리 {신의 길, 인간의 길}에서는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와
"야고보의 형제이자 그리스도라 불린 예수"를 같이 놓음으로써, 마치 후자가
전자의 모티프에서 따온 듯, 혹은 {신약성서}의 예수가 사실은 그보다 한
세대 정도 뒤에 살았던 "여러 예수"들을 합성한 듯이 암시하고 있다.
게다가 제 1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반란군을 이끌었던 인물 (가령, 시몬 바르
기오라) 등을 언급한 화면과 기독교의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메시아의 도래로 여기고 불렀던 "호산나" 노래의 장면을 중첩시킴으로서,
마치 반란군 지도자들이 "그리스도" 혹은 "메시아"를 자처했거나 혹은 다른
이들이 그들을 메시아로 여겼던 것처럼 착각을 의도하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유대-로마 전쟁에 대한 보고 중 1차 당사자의 진술로서는 유일한 기록인 요세푸스의 저작물에는 이들이 "메시아"를 자처했거나 그렇게 여겨졌다는 기록이 없다. 아울러 AD 1세기 초/중반이란 컨텍스트 상에서 "메시아"란 칭호는 "로마에 맞서 대항 유대인의 지도자"에게 그냥 붙여지기에는 여러 조건이 따라 나온다. 무엇보다 그런 인물이 '메시아'이려면 그는 유다 부족원이면서 다윗 왕가의 혈통을 가지고 있거나 그렇게 주장해야 한다. 시몬 바르 기오라가 유다 부족원이며 다윗 왕가의 혈통을 주장했는가? 요세푸스가 침묵하고 있으니 알 방법이 없다. 요세푸스는 기독교의 예수에게만 그가 "메시아(로 여겨졌)다"란 언급을 하고 있을 뿐이다. 로마와의 저항과정에서 다윗의 혈통으로 여겨진 사람은 AD 132-136년 사이에 벌어진 제 2차 유대-로마 전쟁을 이끌었던 시몬 바르 코크바였다. 그는 랍비 아키바를 포함한 일부 랍비들에 의해 메시아로 인정되었다.
SBS 다큐멘터리의 연대기적 모순도 지적해야 한다. 이 주장이 맞으려면, 복음서의 기록연대는 일단 보류하더라도 기록시기가 분명한 요세푸스와 타키투스의 연대표 자체를 의심해야 하는 무리수를 두어야 한다. 가령,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에 대한 기록을 남긴 요세푸스는 (후대에 문장이 다소 윤색된 듯 하긴 하나), {유대고대사}에서는 "야고보의 형제" 예수 (와 예수의 형제 야고보) 에 대한 간략한 기록을의 남겼는데, "야고보의 형제" 예수의 연대문제를 분명히 기술하고 있다. "그리스도라 불린 예수"가 처형된 시점은 빌라도의 통치기간 (AD 33년 경), {유대전쟁사}에 기술된 대로의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는 그보다 약 30년 후인 AD 62년에 해당한다. 어떻게 두 예수가 혼동될 수 있나? 적어도 요세푸스는 이들을 혼동하지 않았다. 아울러 요세푸스를 제외하면 이들 여러 예수에 대해 기록한 사람은 없다. 그는 정확히 연대기 순서를 따라서 위의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 "예수들"은 모두 "기독교의 예수"가 활동한 한 세대 뒤의 인물들로, 요세푸스는 이들 예수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일부는 그와 아주 개인적인 관계로 묶인 인물들이었다. 요세푸스가 이들 "예수들"을 서로 혼동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제 1차 유대-로마 전쟁 후, 로마는 다윗의 혈통에서 메시아가 출현하리라 믿는 유대인들의 독립의지를 분쇄할 목적으로 다윗의 자손들을 색출해 제거하게된다.
"동쪽"에 대한 고대 지중해 지역의 비상한 관심에 대해서는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을 참조할 수 있다. 특별히 타키투스는 유대아로부터 출현할 인물이 세계를 얻는다는 이 예언의 출처로 유대교의 고대 예언을 들었다. 이 예언은 유대아 지역이 로마의 통치지역으로 편입되는 적어도 BC 1세기 후반 부에는 로마에서도 회람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로마인들은 지중해의 고대종교들의 신탁들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네로와 베스파시아누스는 이 예언을 자신들에게 적용시키려고 했고, 아들 티투스와 함께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베스파시아누스의 경우, 요세푸스를 전략적으로 이용해 효과적으로 자신이 바로 '세상을 얻은' 황제임을 과시했다. 사실 로마에 대한 제 1차 유대전쟁에서 갈릴리 지역 사령관이이도 했던 유대인 제사장 출신 요세푸스는, 거점이 함락한 후 숨어있다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투항한 후 이런 예언이 바로 베스파시아누스에 대한 것이며 그래서 그가 로마의 차기 황제가 될 것이라고 언질해 줌으로써 자신의 목숨만 살린 것이 아니라 아예 베스파니시아누스 가문의 가신이 되었다.
우선 네로와 베스파시아누스에 관한 로마역사가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을 읽어보자.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유대아로부터 나올 지배자"가 세계를 얻는다는 이 예언의 출처로 유대교의 고대 예언을 들었다.
타키투스의 기록이다.
유대아 외곽에서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베스파시아누스가 AD 69년 7월 로마황제가 된 후 유대아에 남아 토벌작전을 벌이던 그의 아들 티투스는 AD 70년에 예루살렘을 공략하고 그해 9월에 함락시킨다. 이로써 요세푸스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한 예언은 적중(!)되었다.
하지만 베스파시아누스나 티투스가 바보가 아니라면, 문맥상 히브리 성서의 여러 구절들이 예언하는 그 '인물'이 이방인일 수는 없다는 것을 모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예언에서 참고로 여기서 '나온다/떠오른다'는 히브리어 '다라크 דּרך' 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동방 ἀνατελεῖ / Orietur'이란 뜻으로 새겨지기도 했다.)
가령, 히브리 성서 토라의 제 4권째 책인 {민수기}는 이방인 예언자인 발람의 예언을 이렇게 말한다.
이 경우 베스파시아누스 및 AD 1세기 말 로마제국 전 지역에서 기독교도들에 대한 대규모 탄압을 펼친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취할 수 있는 효과적인(!) 조치는 유대인 (혹은 기독교도) 봉기의 잠정적 원인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다윗의 직계 후손'들을 색출하는 것이다.
게다가 AD 2세기의 유대계 기독교도였던 헤게시포스 (AD 110-180)는 AD 70년 예루살렘 함락 직후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변화를 전해주는데, AD 4세기 초반 카이사리아 주교였던 유세비우스는 그의 {교회사} 제 3권에서 헤게시포스의 기록을 인용한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예루살렘 함락 후, 예수의 사도들과 제자들은 생존해 있던 예수의 친척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만나, AD 62년에 유대인 산헤드린을 통해 불법적으로 사법살해 당한 예루살렘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이던 예수의 형제 야고보에 이어 (부활한 예수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만났던) 클레오파의 아들 시메온을 예루살렘의 제 2대 감독/주교로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전승에 따르면 클레오파가 예수의 양부 요셉의 형제이기 때문에, 이 시메온은 예수와 사촌지간이 된다.
다음으론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서 유세비우스는 AD 2세기 작가들인 헤게시포스와 테르툴리아누스를 인용한다.
## 담네우스의 아들 예수?
이 예수는 대제사장 안나누스가 로마총독의 허가없이 소집된 산헤드린을 통해 "그리스도라 불린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죽인 이유로 총독에게 경질된 후 새로 선출된 대제사장이었다. 이 인물과 "그리스도라 불린 예수", 즉 기독교의 예수와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다.
## 가말라의 아들 예수?
"예수 벤 가말라" 혹은 "가말라의 아들 예수"는 AD 64년에 유대교 대제사장이었던 인물로, 앞서 언급한 담네우스의 아들 예수에 이어 대제사장으로 선출되었다. 다소 내성적인 인물이었으며, 요세푸스에 따르면 1년 후 마티아스 벤 테오필에게 대제사장 직을 넘겼다 ("Ant." xx. 9, § 7). 예수 벤 가말라는 유대교 탈무드에 6세 어린이들에게도 공교육을 실시해야 하는 유대교 규율을 제정한 인물로도 등장한다. 대제사장 직에서 물러난 후에, 그는 계속해서 예루살렘의 지도층의 중심인물이었고, 요세푸스의 자서전에 따르면 (Life, 204-205), 이 예수 벤 가말라는 제사장인 요세푸스 가문의 가까운 친구였다. 따라서 요세푸스가 이 "예수"를 다른 예수와 오판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이 예수는 평화주의자로서 확전을 피하기 위해 열광적인 젤롯들과 이두메/에돔인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을 막으려했는데, 결국 안나누스와 함께 국가반역자로 처단되었다.
## 샤파트의 아들 예수?
이 예수는 "기독교의 예수"보다 한 세대 뒤의 인물로 갈릴리를 배경으로 하는 강도단의 지도자였다. 여기서의 강도단이란 반-로마적 성향의 게릴라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로마의 입장에서는 마적단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이들의 성격은 둘 다 였을 것이다. 요세푸스는 그가 티투스의 정벌군의 추격 중 호수 근방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한다. 요세푸스는 제 1차 유대전쟁에 참전한 장본인이고 누구보다도 전쟁의 정황을 잘 알고 있던 예루살렘의 실력자 집안이자, 유대인 측의 갈릴리 사령관이었다. 그런 요세푸스가 이 "예수"와 다른 "예수"를 혼동했을 가능성은? 없다.
## 사피아스의 아들 예수?
이 "예수"는 당시 갈릴리 사령관이던 요세푸스가 다바리타에서 승전한 후 전리품을 나누는 일로 요세푸스에게 맞선 인물이다. 요세푸스가 전리품을 제대로 분배하지 않은 일로 불만을 품은 티베리아스 사람들을 선동한 이 예수는, 전차경주장에서 모세율법을 손에 들고 나와 요세푸스가 반역을 꾀하고 있으며, 모세율법을 위반했다며 요세푸스의 집을 병사들과 함께 습격했다. 이 인물은 또 티베리아스에 있는 헤롯의 궁전을 약탈하면서 티베리아스에 거주하던 그리스계 주민들을 살해하는 일을 주도한 티베리아스의 실력자였다.
이 "예수"를 요세푸스가 다른 예수와 혼동했을 가능성은? 없다.그럼 기독교도들이 이 예수와 "메시아 예수"와 혼동했을까? 어떤 모티프에서? 이 예수의 낮은 출신? 그가 갈릴리 출신 젤롯들을 이끌었다는 점?
#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
아마도 이 예수가 "기독교의 예수"와 중첩되는 부분이 있는 유일한 경우일 것이다.
이 예수는 AD 66년에 시작된 유대전쟁 4년 전에 예루살렘에 와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인물이다. 즉, 요세푸스가 젊었던 시절에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이다. 유대인 지도층은 그를 로마 당국에 넘겨줬다. 당시 총독인 알비누스는 그를 미친 사람으로 간주해서 풀어주었는데, 이 예수는 계속해서 7년 간이나 예언을 하고 다니다가 로마군이 예루살렘 공성전을 벌일 때, 투석기에서 날아온 돌에 맞아 사망했다. 물론 요세푸스는 이 "예수"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
여기 등장하는 총독 알비누스는 자신의 부임 직전, 자신의 동의없이 소집된 산헤드린을 통해 대제사장 안나누스가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불법적으로 처형한 것을 엄중히 처벌한 바로 그 인물이다. 요세푸스나 기독교도들이 이 예수와 그들의 예수를 혼동했을까?
이 예수가 (1)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것, (2) 유대집권층이 그를 로마총독에게 넘긴 점에서는 "기독교의 예수"와 유사하지만, 결국 그는 풀려나서 7년이나 공개적으로 더 활동하다가 사망했다. 당시에 이미 예루살렘에 존재하고 있던 기독교 공동체가 이 "예수"와 자신들의 "메시아 예수"를 혼동했을까?
요세푸스의 기록이다.
누가 누굴 베끼긴 할 것일까?
현재 전해지는 유대-로마 전쟁에 대한 보고 중 1차 당사자의 진술로서는 유일한 기록인 요세푸스의 저작물에는 이들이 "메시아"를 자처했거나 그렇게 여겨졌다는 기록이 없다. 아울러 AD 1세기 초/중반이란 컨텍스트 상에서 "메시아"란 칭호는 "로마에 맞서 대항 유대인의 지도자"에게 그냥 붙여지기에는 여러 조건이 따라 나온다. 무엇보다 그런 인물이 '메시아'이려면 그는 유다 부족원이면서 다윗 왕가의 혈통을 가지고 있거나 그렇게 주장해야 한다. 시몬 바르 기오라가 유다 부족원이며 다윗 왕가의 혈통을 주장했는가? 요세푸스가 침묵하고 있으니 알 방법이 없다. 요세푸스는 기독교의 예수에게만 그가 "메시아(로 여겨졌)다"란 언급을 하고 있을 뿐이다. 로마와의 저항과정에서 다윗의 혈통으로 여겨진 사람은 AD 132-136년 사이에 벌어진 제 2차 유대-로마 전쟁을 이끌었던 시몬 바르 코크바였다. 그는 랍비 아키바를 포함한 일부 랍비들에 의해 메시아로 인정되었다.
SBS 다큐멘터리의 연대기적 모순도 지적해야 한다. 이 주장이 맞으려면, 복음서의 기록연대는 일단 보류하더라도 기록시기가 분명한 요세푸스와 타키투스의 연대표 자체를 의심해야 하는 무리수를 두어야 한다. 가령,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에 대한 기록을 남긴 요세푸스는 (후대에 문장이 다소 윤색된 듯 하긴 하나), {유대고대사}에서는 "야고보의 형제" 예수 (와 예수의 형제 야고보) 에 대한 간략한 기록을의 남겼는데, "야고보의 형제" 예수의 연대문제를 분명히 기술하고 있다. "그리스도라 불린 예수"가 처형된 시점은 빌라도의 통치기간 (AD 33년 경), {유대전쟁사}에 기술된 대로의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는 그보다 약 30년 후인 AD 62년에 해당한다. 어떻게 두 예수가 혼동될 수 있나? 적어도 요세푸스는 이들을 혼동하지 않았다. 아울러 요세푸스를 제외하면 이들 여러 예수에 대해 기록한 사람은 없다. 그는 정확히 연대기 순서를 따라서 위의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 "예수들"은 모두 "기독교의 예수"가 활동한 한 세대 뒤의 인물들로, 요세푸스는 이들 예수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일부는 그와 아주 개인적인 관계로 묶인 인물들이었다. 요세푸스가 이들 "예수들"을 서로 혼동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제 1차 유대-로마 전쟁 후, 로마는 다윗의 혈통에서 메시아가 출현하리라 믿는 유대인들의 독립의지를 분쇄할 목적으로 다윗의 자손들을 색출해 제거하게된다.
"동쪽"에 대한 고대 지중해 지역의 비상한 관심에 대해서는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을 참조할 수 있다. 특별히 타키투스는 유대아로부터 출현할 인물이 세계를 얻는다는 이 예언의 출처로 유대교의 고대 예언을 들었다. 이 예언은 유대아 지역이 로마의 통치지역으로 편입되는 적어도 BC 1세기 후반 부에는 로마에서도 회람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로마인들은 지중해의 고대종교들의 신탁들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네로와 베스파시아누스는 이 예언을 자신들에게 적용시키려고 했고, 아들 티투스와 함께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베스파시아누스의 경우, 요세푸스를 전략적으로 이용해 효과적으로 자신이 바로 '세상을 얻은' 황제임을 과시했다. 사실 로마에 대한 제 1차 유대전쟁에서 갈릴리 지역 사령관이이도 했던 유대인 제사장 출신 요세푸스는, 거점이 함락한 후 숨어있다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투항한 후 이런 예언이 바로 베스파시아누스에 대한 것이며 그래서 그가 로마의 차기 황제가 될 것이라고 언질해 줌으로써 자신의 목숨만 살린 것이 아니라 아예 베스파니시아누스 가문의 가신이 되었다.
우선 네로와 베스파시아누스에 관한 로마역사가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을 읽어보자.
"...The world, after tolerating such an emperor for little less than fourteen years, at length forsook him; the Gauls, headed by Julius Vindex, who at that time governed the province as pro-praetor, being the first to revolt. Nero had been formerly told by astrologers, that it would be his fortune to be at last deserted by all the world; and this occasioned that celebrated saying of his, "An artist can live in any country;" by which he meant to offer as an excuse for his practice of music, that it was not only his amusement as a prince, but might be his support when reduced to a private station. Yet some of the astrologers promised him, in his forlorn state, the rule of the East, and some in express words the kingdom of Jerusalem. But the greater part of them flattered him with assurances of his being restored to his former fortune. And being most inclined to believe the latter prediction, upon losing Britain and Armenia, he imagined he had run through all the misfortunes which the fates had decreed him. But when, upon consulting the oracle of Apollo at Delphi, he was advised to beware of the seventy-third year, as if he were not to die till then, never thinking of Galba's age, he conceived such hopes, not only of living to advanced years, but of constant and singular good fortune, that having lost some things of great value by shipwreck, he scrupled not to say amongst his friends, that (371) "the fishes would bring them back to him." At Naples he heard of the insurrection in Gaul, on the anniversary of the day on which he killed his mother, and bore it with so much unconcern, as to excite a suspicion that he was really glad of it, since he had now a fair opportunity of plundering those wealthy provinces by the right of war. Immediately going to the gymnasium, he witnessed the exercise of the wrestlers with the greatest delight. Being interrupted at supper with letters which brought yet worse news, he expressed no greater resentment, than only to threaten the rebels. For eight days together, he never attempted to answer any letters, nor give any orders, but buried the whole affair in profound silence...." [Suetonius, Nero, 40]
"...[IV]....A firm persuasion had long prevailed through all the East [735], that it was fated for the empire of the world, at that time, to devolve on some who should go forth from Judaea. This prediction referred to a Roman emperor, as the event shewed; but the Jews, applying it to themselves, broke out into rebellion, and having defeated and slain their governor [736], routed the lieutenant of Syria [737], a man of consular rank, who was advancing to his assistance, and took an eagle, the standard, of one of his legions. As the suppression of this revolt appeared to require a stronger force and an active general, who might be safely trusted in an affair of so much importance, Vespasian was chosen in preference to all others, both for his known activity, and on account of the obscurity of his origin and name, being a person of whom (446) there could be not the least jealousy. Two legions, therefore, eight squadrons of horse, and ten cohorts, being added to the former troops in Judaea, and, taking with him his eldest son as lieutenant, as soon as he arrived in his province, he turned the eyes of the neighbouring provinces upon him, by reforming immediately the discipline of the camp, and engaging the enemy once or twice with such resolution, that, in the attack of a castle [738], he had his knee hurt by the stroke of a stone, and received several arrows in his shield.." [Suetonius, Vespasian, 4].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유대아로부터 나올 지배자"가 세계를 얻는다는 이 예언의 출처로 유대교의 고대 예언을 들었다.
타키투스의 기록이다.
"....Prodigies had occurred, which this nation, prone to superstition, but hating all religious rites, did not deem it lawful to expiate by offering and sacrifice. There had been seen hosts joining battle in the skies, the fiery gleam of arms, the temple illuminated by a sudden radiance from the clouds. The doors of the inner shrine were suddenly thrown open, and a voice of more than mortal tone was heard to cry that the Gods were departing. At the same instant there was a mighty stir as of departure. Some few put a fearful meaning on these events, but in most there was a firm persuasion, that in the ancient records of their priests was contained a prediction of how at this very time the East was to grow powerful, and rulers, coming from Judaea, were to acquire universal empire. These mysterious prophecies had pointed to Vespasian and Titus, but the common people, with the usual blindness of ambition, had interpreted these mighty destinies of themselves, and could not be brought even by disasters to believe the truth. I have heard that the total number of the besieged, of every age and both sexes, amounted to six hundred thousand. All who were able bore arms, and a number, more than proportionate to the population, had the courage to do so. Men and women showed equal resolution, and life seemed more terrible than death, if they were to be forced to leave their country. Such was this city and nation; and Titus Caesar, seeing that the position forbad an assault or any of the more rapid operations of war, determined to proceed by earthworks and covered approaches. The legions had their respective duties assigned to them, and there was a cessation from fighting, till all the inventions, used in ancient warfare, or devised by modern ingenuity for the reduction of cities, were constructed. ..." [Tacitus, History, Book 5, v13].
유대아 외곽에서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베스파시아누스가 AD 69년 7월 로마황제가 된 후 유대아에 남아 토벌작전을 벌이던 그의 아들 티투스는 AD 70년에 예루살렘을 공략하고 그해 9월에 함락시킨다. 이로써 요세푸스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한 예언은 적중(!)되었다.
하지만 베스파시아누스나 티투스가 바보가 아니라면, 문맥상 히브리 성서의 여러 구절들이 예언하는 그 '인물'이 이방인일 수는 없다는 것을 모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예언에서 참고로 여기서 '나온다/떠오른다'는 히브리어 '다라크 דּרך' 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동방 ἀνατελεῖ / Orietur'이란 뜻으로 새겨지기도 했다.)
가령, 히브리 성서 토라의 제 4권째 책인 {민수기}는 이방인 예언자인 발람의 예언을 이렇게 말한다.
אֶרְאֶנּוּ וְלֹא עַתָּה אֲשׁוּרֶנּוּ וְלֹא קָרוֹב דָּרַךְ כּוֹכָב מִֽיַּעֲקֹב וְקָם שֵׁבֶט מִיִּשְׂרָאֵל וּמָחַץ פַּאֲתֵי מוֹאָב וְקַרְקַר כָּל־בְּנֵי־שֵֽׁת׃ --- 히브리어 맛소라, {민수기} 24:17
17 δείξω αὐτῷ καὶ οὐχὶ νῦν μακαρίζω καὶ οὐκ ἐγγίζει ἀνατελεῖ ἄστρον ἐξ Ιακωβ καὶ ἀναστήσεται ἄνθρωπος ἐξ Ισραηλ καὶ θραύσει τοὺς ἀρχηγοὺς Μωαβ καὶ προνομεύσει πάντας υἱοὺς Σηθ --- 그리스어 70인역, {민수기} 24:17
17 Videbo eum, sed non modo: intuebor illum, sed non prope. Orietur stella ex Jacob, et consurget virga de Israël: et percutiet duces Moab, vastabitque omnes filios Seth. --- 라틴어 불가타, {민수기} 24:17
17 이 눈에 한 모습이 떠오르는구나. 그러나 당장 있을 일은 아니다. 그 모습이 환히 보이는구나. 그러나 눈앞에 다가온 일은 아니다. 야곱에게서 한 별이 솟는구나. 이스라엘에게서 한 왕권이 일어나는구나. 그가 모압 사람들의 관자놀이를 부수고 셋의 후손의 정수리를 모조리 부수리라. --- 한국어 공동번역
이 경우 베스파시아누스 및 AD 1세기 말 로마제국 전 지역에서 기독교도들에 대한 대규모 탄압을 펼친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취할 수 있는 효과적인(!) 조치는 유대인 (혹은 기독교도) 봉기의 잠정적 원인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다윗의 직계 후손'들을 색출하는 것이다.
게다가 AD 2세기의 유대계 기독교도였던 헤게시포스 (AD 110-180)는 AD 70년 예루살렘 함락 직후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변화를 전해주는데, AD 4세기 초반 카이사리아 주교였던 유세비우스는 그의 {교회사} 제 3권에서 헤게시포스의 기록을 인용한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예루살렘 함락 후, 예수의 사도들과 제자들은 생존해 있던 예수의 친척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만나, AD 62년에 유대인 산헤드린을 통해 불법적으로 사법살해 당한 예루살렘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이던 예수의 형제 야고보에 이어 (부활한 예수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만났던) 클레오파의 아들 시메온을 예루살렘의 제 2대 감독/주교로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전승에 따르면 클레오파가 예수의 양부 요셉의 형제이기 때문에, 이 시메온은 예수와 사촌지간이 된다.
He also relates that Vespasian after the conquest of Jerusalem gave orders that all that belonged to the lineage of David should be sought out, in order that none of the royal race might be left among the Jews; and in consequence of this a most terrible persecution again hung over the Jews. --- Eusebius of Caesarea, {Church History}, Translated by Arthur Cushman McGiffert. From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cond Series, Vol. 1. Edited by Philip Schaff and Henry Wace
그 (=헤게시포스)는 또 베스파시아누스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후, 유대인들 가운데 (다윗) 왕가의 혈통을 지닌 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제거하기 위해 다윗의 자손들을 색출하도록 명령하였다고 한다. 이 결과로 유대인들에 대한 가장 끔찍한 탄압이 다시 펼쳐졌다.... ---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 {교회사} 제 3권 12장 / 번역: 최광민
다음으론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서 유세비우스는 AD 2세기 작가들인 헤게시포스와 테르툴리아누스를 인용한다.
But when this same Domitian had commanded that the descendants of David should be slain, an ancient tradition says that some of the heretics brought accusation against the descendants of Jude (said to have been a brother of the Saviour according to the flesh), on the ground that they were of the lineage of David and were related to Christ himself. Hegesippus relates these facts in the following words. --- Eusebius of Caesarea, {Church History}, Translated by Arthur Cushman McGiffert. From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cond Series, Vol. 1. Edited by Philip Schaff and Henry Wace, CH.19
이 도미티아누스가 다윗의 후손들을 처형할 것을 명령하였고, 고대 자료에 따르면 이때 어떤 이단들들이 ({유다서}의 저자인 / 필자 주) 육체적으로는 우리 구세주의 형제인 유다의 후손들을 다윗의 자손이자 그리스도 본인과 친인척으로 고발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에 관해 (AD 2세기의 / 필자 주) 헤게시포스는 이렇게 말한다: ---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 {교회사} 제 3권 19장 / 번역: 최광민
1. Of the family of the Lord there were still living the grandchildren of Jude, who is said to have been the Lord's brother according to the flesh. 2. Information was given that they belonged to the family of David, and they were brought to the Emperor Domitian by the Evocatus. For Domitian feared the coming of Christ as Herod also had feared it. And he asked them if they were descendants of David, and they confessed that they were. Then he asked them how much property they had, or how much money they owned. And both of them answered that they had only nine thousand denarii, half of which belonged to each of them. 4. And this property did not consist of silver, but of a piece of land which contained only thirty-nine acres, and from which they raised their taxes and supported themselves by their own labor. 5. Then they showed their hands, exhibiting the hardness of their bodies and the callousness produced upon their hands by continuous toil as evidence of their own labor. 6. And when they were asked concerning Christ and his kingdom, of what sort it was and where and when it was to appear, they answered that it was not a temporal nor an earthly kingdom, but a heavenly and angelic one, which would appear at the end of the world, when he should come in glory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and to give unto every one according to his works. 7. Upon hearing this, Domitian did not pass judgment against them, but, despising them as of no account, he let them go, and by a decree put a stop to the persecution of the Church. 8. But when they were released they ruled the churches because they were witnesses and were also relatives of the Lord. And peace being established, they lived until the time of Trajan. These things are related by Hegesippus. 9. Tertullian also has mentioned Domitian in the following words: Domitian also, who possessed a share of Nero's cruelty, attempted once to do the same thing that the latter did. But because he had, I suppose, some intelligence, he very soon ceased, and even recalled those whom he had banished. 10. But after Domitian had reigned fifteen years, and Nerva had succeeded to the empire, the Roman Senate, according to the writers that record the history of those days, voted that Domitian's honors should be cancelled, and that those who had been unjustly banished should return to their homes and have their property restored to them. 11. It was at this time that the apostle John returned from his banishment in the island and took up his abode at Ephesus, according to an ancient Christian tradition. --- Eusebius of Caesarea, {Church History}, Translated by Arthur Cushman McGiffert. From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cond Series, Vol. 1. Edited by Philip Schaff and Henry Wace, CH.20
"[헤게시포스의 기록] 우리 주님의 가족으로는 육체로는 우리 주님의 형제인 유다의 손자들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들이 다윗의 후손이라는 정보가 전해지자, 그들은 에보카투스에 의해 도미티아누스 황제 앞으로 끌려갔다. 도미티아누스는 헤롯 만큼이나 그리스도의 도래를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도미티아누스는 그들이 다윗의 후손인지를 물었고, 그들은 그렇다고 답했다. 그들 재산이 얼마이며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물었을때, 그 둘은 고작 9천 데나리온을 각각 나눠가지고 있다고 답했다....[중략]....그들은 그들이 고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란 증거로 단단한 근육과 손에 잡힌 굳은 살을 보여주었다.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과 그 왕국의 성격과 언제 어디서 그 왕국이 출현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자, 그들은 그 왕국은 일시적인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천상의 영적인 왕국이라고 답하면서, 왕국은 세상의 마지막에 도래할 것과 그리스도가 영광 가운데 재림하여 산 자와 죽은 자를 그가 한 일에 따라 심판하게 되리라고 답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이것을 듣고나서 그들을 하찮은 사람들이라 경멸하며 처형하지 않고 풀어주었고, 이후 교회에 대한 탄압을 중단할 것을 선포하였다. 그들은 신앙을 증거했고 또 주님의 친척이기에 풀려난 후에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평화가 지속되었고, 그들은 트라야누스 황제의 집권 때까지 살았다." 이것은 헤게시포스가 기록한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도 도미티아누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테르툴리아누스의 기록] 네로의 잔학성을 가진 도미티아누스 역시 네로가 했던 것과 같은 시도를 한때 한 적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는 정신은 어느 정도 온전했기 때문에 탄압을 곧 중단했으며, 그가 처벌한 사람들을 복권해주기도 했다." ...[후략] ---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 {교회사} 제 3권 20장 / 번역: 최광민
## 담네우스의 아들 예수?
이 예수는 대제사장 안나누스가 로마총독의 허가없이 소집된 산헤드린을 통해 "그리스도라 불린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죽인 이유로 총독에게 경질된 후 새로 선출된 대제사장이었다. 이 인물과 "그리스도라 불린 예수", 즉 기독교의 예수와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다.
## 가말라의 아들 예수?
"예수 벤 가말라" 혹은 "가말라의 아들 예수"는 AD 64년에 유대교 대제사장이었던 인물로, 앞서 언급한 담네우스의 아들 예수에 이어 대제사장으로 선출되었다. 다소 내성적인 인물이었으며, 요세푸스에 따르면 1년 후 마티아스 벤 테오필에게 대제사장 직을 넘겼다 ("Ant." xx. 9, § 7). 예수 벤 가말라는 유대교 탈무드에 6세 어린이들에게도 공교육을 실시해야 하는 유대교 규율을 제정한 인물로도 등장한다. 대제사장 직에서 물러난 후에, 그는 계속해서 예루살렘의 지도층의 중심인물이었고, 요세푸스의 자서전에 따르면 (Life, 204-205), 이 예수 벤 가말라는 제사장인 요세푸스 가문의 가까운 친구였다. 따라서 요세푸스가 이 "예수"를 다른 예수와 오판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이 예수는 평화주의자로서 확전을 피하기 위해 열광적인 젤롯들과 이두메/에돔인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을 막으려했는데, 결국 안나누스와 함께 국가반역자로 처단되었다.
## 샤파트의 아들 예수?
이 예수는 "기독교의 예수"보다 한 세대 뒤의 인물로 갈릴리를 배경으로 하는 강도단의 지도자였다. 여기서의 강도단이란 반-로마적 성향의 게릴라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로마의 입장에서는 마적단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이들의 성격은 둘 다 였을 것이다. 요세푸스는 그가 티투스의 정벌군의 추격 중 호수 근방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한다. 요세푸스는 제 1차 유대전쟁에 참전한 장본인이고 누구보다도 전쟁의 정황을 잘 알고 있던 예루살렘의 실력자 집안이자, 유대인 측의 갈릴리 사령관이었다. 그런 요세푸스가 이 "예수"와 다른 "예수"를 혼동했을 가능성은? 없다.
## 사피아스의 아들 예수?
이 "예수"는 당시 갈릴리 사령관이던 요세푸스가 다바리타에서 승전한 후 전리품을 나누는 일로 요세푸스에게 맞선 인물이다. 요세푸스가 전리품을 제대로 분배하지 않은 일로 불만을 품은 티베리아스 사람들을 선동한 이 예수는, 전차경주장에서 모세율법을 손에 들고 나와 요세푸스가 반역을 꾀하고 있으며, 모세율법을 위반했다며 요세푸스의 집을 병사들과 함께 습격했다. 이 인물은 또 티베리아스에 있는 헤롯의 궁전을 약탈하면서 티베리아스에 거주하던 그리스계 주민들을 살해하는 일을 주도한 티베리아스의 실력자였다.
이 "예수"를 요세푸스가 다른 예수와 혼동했을 가능성은? 없다.그럼 기독교도들이 이 예수와 "메시아 예수"와 혼동했을까? 어떤 모티프에서? 이 예수의 낮은 출신? 그가 갈릴리 출신 젤롯들을 이끌었다는 점?
"The principal instigator of the mob was Jesus son of Sapphias, the chief magistrate of Tiberias, an unprincipled man who had an instinct for introducing disorder into matters of consequence, and who exceeded all others in the fomenting of sedition and revolution. Taking a copy of the laws of Moses into his hands, he now stepped into the midst of the people and said: 'Fellow citizens! If you cannot for your own sakes bring yourselves to condemn Josephus, then have regard for the laws of your country, which your commander-in-chief intended to betray -- and for their sakes hate the crime and bring this insolent criminal to his just punishment!' When he had said this and the crowd had loudly applauded him, he took some soldiers and hurried to the house I was lodging in with the intent to kill me at once. I was wholly insensible of this, having fallen asleep from fatigue. But Simon, who was entrusted with guarding my person and had alone remained with me, seeing the onrushing citizens, awoke me and told me of the danger, and urged me to die honorably as a general, by my own hand, before my enemies arrived to force me to it or to kill me themselves. Such were his words; but I committed my fate to God and hastened to go out to the people. Changing my garment for one of black and suspending my sword from my neck, I proceeded, by a different road on which I expected no enemy would encounter me, to the hippodrome. I appeared among the people suddenly, flung myself on my face, and watered the ground with my tears -- and so became to them all an object of compassion." --- Josephus The Life 27-28 134-139
#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
아마도 이 예수가 "기독교의 예수"와 중첩되는 부분이 있는 유일한 경우일 것이다.
이 예수는 AD 66년에 시작된 유대전쟁 4년 전에 예루살렘에 와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인물이다. 즉, 요세푸스가 젊었던 시절에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이다. 유대인 지도층은 그를 로마 당국에 넘겨줬다. 당시 총독인 알비누스는 그를 미친 사람으로 간주해서 풀어주었는데, 이 예수는 계속해서 7년 간이나 예언을 하고 다니다가 로마군이 예루살렘 공성전을 벌일 때, 투석기에서 날아온 돌에 맞아 사망했다. 물론 요세푸스는 이 "예수"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
여기 등장하는 총독 알비누스는 자신의 부임 직전, 자신의 동의없이 소집된 산헤드린을 통해 대제사장 안나누스가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불법적으로 처형한 것을 엄중히 처벌한 바로 그 인물이다. 요세푸스나 기독교도들이 이 예수와 그들의 예수를 혼동했을까?
이 예수가 (1)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것, (2) 유대집권층이 그를 로마총독에게 넘긴 점에서는 "기독교의 예수"와 유사하지만, 결국 그는 풀려나서 7년이나 공개적으로 더 활동하다가 사망했다. 당시에 이미 예루살렘에 존재하고 있던 기독교 공동체가 이 "예수"와 자신들의 "메시아 예수"를 혼동했을까?
요세푸스의 기록이다.
But, what is still more terrible, there was one Jesus, the son of Ananus, a plebeian and a husbandman, who, four years before the war began, and at a time when the city was in very great peace and prosperity, came to that feast whereon it is our custom for every one to make tabernacles to God in the temple, 23 began on a sudden to cry aloud, "A voice from the east, a voice from the west, a voice from the four winds, a voice against Jerusalem and the holy house, a voice against the bridegrooms and the brides, and a voice against this whole people!" This was his cry, as he went about by day and by night, in all the lanes of the city. However, certain of the most eminent among the populace had great indignation at this dire cry of his, and took up the man, and gave him a great number of severe stripes; yet did not he either say any thing for himself, or any thing peculiar to those that chastised him, but still went on with the same words which he cried before. Hereupon our rulers, supposing, as the case proved to be, that this was a sort of divine fury in the man, brought him to the Roman procurator, where he was whipped till his bones were laid bare; yet he did not make any supplication for himself, nor shed any tears, but turning his voice to the most lamentable tone possible, at every stroke of the whip his answer was, "Woe, woe to Jerusalem!" And when Albinus [for he was then our procurator] asked him, Who he was? and whence he came? and why he uttered such words? he made no manner of reply to what he said, but still did not leave off his melancholy ditty, till Albinus took him to be a madman, and dismissed him. Now, during all the time that passed before the war began, this man did not go near any of the citizens, nor was seen by them while he said so; but he every day uttered these lamentable words, as if it were his premeditated vow, "Woe, woe to Jerusalem!" Nor did he give ill words to any of those that beat him every day, nor good words to those that gave him food; but this was his reply to all men, and indeed no other than a melancholy presage of what was to come. This cry of his was the loudest at the festivals; and he continued this ditty for seven years and five months, without growing hoarse, or being tired therewith, until the very time that he saw his presage in earnest fulfilled in our siege, when it ceased; for as he was going round upon the wall, he cried out with his utmost force, "Woe, woe to the city again, and to the people, and to the holy house!" And just as he added at the last, "Woe, woe to myself also!" there came a stone out of one of the engines, and smote him, and killed him immediately; and as he was uttering the very same presages he gave up the ghost.[5] --- Book 6, Chapter 5, Section 3 of the historian Flavius Josephus' The Wars of the Jews or History of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누가 누굴 베끼긴 할 것일까?
아울러 SBS 다큐멘터리는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를 언급하면서 요세푸스의
진술을 잘못 번역했다.
해당 진술은 아래와 같다.
SBS 제작진은 이를,
로 번역했다. 요세푸스의 그리스어 원문은 아래와 같다.
여기서 δαιμονιώτερον 의 의미는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광기/열광/엑스타시로 신들렸거나 혹은 (종종 천재성으로 인해) "미친" 것을 말한다. 고대에는 "미친" 것을 "신으로부터 온 것"으로 여겼다.
또한 Ῥωμαίοις ἔπαρχον 은 "로마검찰관"이 아닌 "총독" 즉 "프로큐라토르"로 번역해야 한다. 여기서는 알비누스 총독을 말한다. 이 프로큐라토르는 시리아 레가투스와 달리 로마군단이 주둔하지 않는 지역에 파견되었고, 징세업무, 계엄통치, 사법업무 등을 담당했고 그 내용을 황제에게 직접 보고했다.
그래서 유대지도자들이 이 "예수"가 무슨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여겨 이를 막기 위해 로마 행정력을 이용한 것이 아니다. 유대지도자들이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를 총독에게 넘긴 직접적인 이유는 그가 성전의 종교의례를 방해하고 공공축제인 오순절 축제를 망쳤기 때문이다. (바로 앞에서 요세푸스가 그렇게 진술한다.) 공공축제를 방해하는 행위는 공권력에 의해 처벌되는 사례에 속한다.
게다가 (후일담일 수는 있지만)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가 등장할 무렵에 발생한 몇가지 음울한 "징조"를 요세푸스는 보고한다. 그는 이것을 임박한 예루살렘의 몰락의 전조로 풀이하고 있는데 가령, (1) 거의 1년 간 상공에서 관측되던 칼 모양의 혜성, (2) 유월절 1주일 전 심야에 성전 제단 주위에 출현해 30분 간 지속된 강렬한 빛, (3) 같은 무렵 유월절 축제에 희생물로 바쳐질 성별된 암소가 괴이하게도 새끼양을 낳은 일, (4) 스무 명이 장정이 달려들어야 간신히 여닫을 수 있는 성전 내측 동쪽의 황동문이 한밤 중에 저절로 열린 일, (5) 유월절 축제 며칠 후 일몰 직후에 천군천사가 전차와 함께 구름 사이에 등장해 예루살렘을 에워싼 일, (6) 이후 오순절 축제를 위한 의식을 진행하던 밤에 성전에서 발생한 지진과 소음과 이상한 목소리들이 그런 것들이다.
해당 진술은 아래와 같다.
Hereupon our rulers, supposing, as the case proved to be, that this was a sort of divine fury in the man, brought him to the Roman procurator, where he was whipped till his bones were laid bare;
SBS 제작진은 이를,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에게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판단한 유대사제들이 그를 로마 검찰관에게 데려갔다. / SBS {신의 길, 인간의 길}
로 번역했다. 요세푸스의 그리스어 원문은 아래와 같다.
[302] τῶν δὲ ἐπισήμων τινὲς δημοτῶν ἀγανακτήσαντες πρὸς τὸ κακόφημον συλλαμβάνουσι τὸν ἄνθρωπον καὶ πολλαῖς αἰκίζονται πληγαῖς. ὁ δὲ οὔθ᾽ ὑπὲρ αὑτοῦ φθεγξάμενος οὔτε ἰδίᾳ πρὸς τοὺς παίοντας, ἃς καὶ πρότερον φωνὰς βοῶν διετέλει. [303] νομίσαντες δὲ οἱ ἄρχοντες, ὅπερ ἦν, δαιμονιώτερον τὸ κίνημα τἀνδρὸς ἀνάγουσιν αὐτὸν ἐπὶ τὸν παρὰ Ῥωμαίοις ἔπαρχον
여기서 δαιμονιώτερον 의 의미는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광기/열광/엑스타시로 신들렸거나 혹은 (종종 천재성으로 인해) "미친" 것을 말한다. 고대에는 "미친" 것을 "신으로부터 온 것"으로 여겼다.
또한 Ῥωμαίοις ἔπαρχον 은 "로마검찰관"이 아닌 "총독" 즉 "프로큐라토르"로 번역해야 한다. 여기서는 알비누스 총독을 말한다. 이 프로큐라토르는 시리아 레가투스와 달리 로마군단이 주둔하지 않는 지역에 파견되었고, 징세업무, 계엄통치, 사법업무 등을 담당했고 그 내용을 황제에게 직접 보고했다.
그래서 유대지도자들이 이 "예수"가 무슨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여겨 이를 막기 위해 로마 행정력을 이용한 것이 아니다. 유대지도자들이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를 총독에게 넘긴 직접적인 이유는 그가 성전의 종교의례를 방해하고 공공축제인 오순절 축제를 망쳤기 때문이다. (바로 앞에서 요세푸스가 그렇게 진술한다.) 공공축제를 방해하는 행위는 공권력에 의해 처벌되는 사례에 속한다.
게다가 (후일담일 수는 있지만)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가 등장할 무렵에 발생한 몇가지 음울한 "징조"를 요세푸스는 보고한다. 그는 이것을 임박한 예루살렘의 몰락의 전조로 풀이하고 있는데 가령, (1) 거의 1년 간 상공에서 관측되던 칼 모양의 혜성, (2) 유월절 1주일 전 심야에 성전 제단 주위에 출현해 30분 간 지속된 강렬한 빛, (3) 같은 무렵 유월절 축제에 희생물로 바쳐질 성별된 암소가 괴이하게도 새끼양을 낳은 일, (4) 스무 명이 장정이 달려들어야 간신히 여닫을 수 있는 성전 내측 동쪽의 황동문이 한밤 중에 저절로 열린 일, (5) 유월절 축제 며칠 후 일몰 직후에 천군천사가 전차와 함께 구름 사이에 등장해 예루살렘을 에워싼 일, (6) 이후 오순절 축제를 위한 의식을 진행하던 밤에 성전에서 발생한 지진과 소음과 이상한 목소리들이 그런 것들이다.
요세푸스는 이 중 몇가지는 직접 경험한 듯 하다. 비록 그가 일부 사건의
진위에 대해 다소 회의적이긴 하지만, 이 사건들을 성전파괴에 대한 징조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민중들과 유대인 지도자들 (서기관들,
제사장들)은 동일한 징조를 다르게 해석하고들 있었는데, 유대인 지도자들은
이를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였다. 바로 이 오순절 축제에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가 출현해 예루살렘의 파괴를 소리높여 외치고 다녔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총독 알비누스가 부임 직후 한 첫번째 조치는, 로마총독의 허가없이 산헤드린을 소집하고 그 결정에 따라 역시 로마총독의 허가없이 (기독교의)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사법살인한 당시 대제사장 안나누스를 파직시킨 것이었다. 따라서 안나누스의 아들 예수를 알비누스에게 보낸 유대인 지도부의 행위는 그렇게 복잡하게 해석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알비누스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미리 알아서 조치했을 뿐이다.
게다가 당시 총독 알비누스가 부임 직후 한 첫번째 조치는, 로마총독의 허가없이 산헤드린을 소집하고 그 결정에 따라 역시 로마총독의 허가없이 (기독교의)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사법살인한 당시 대제사장 안나누스를 파직시킨 것이었다. 따라서 안나누스의 아들 예수를 알비누스에게 보낸 유대인 지도부의 행위는 그렇게 복잡하게 해석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알비누스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미리 알아서 조치했을 뿐이다.
아무튼 이 예수는 총독에 의해 죽지도 않았고, 풀려난 후 7년 간 자유롭게
활동하는 동안 예루살렘의 유대인 지도부가 그를 죽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럼 어떻게 이 예수가 기독교의 예수와 오버랩되는가?
# 타키투스의 "그리스도 Christus"와 "기독교도 Chrestianos"
한편,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의 기록은 이렇다. AD 64년 네로 치하에 발생한 로마 대화재의 방화범으로 기소된 기독교도들에 대한 기록이다.
한편,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의 기록은 이렇다. AD 64년 네로 치하에 발생한 로마 대화재의 방화범으로 기소된 기독교도들에 대한 기록이다.
44. Et haec quidem humanis consiliis providebantur. mox petita [a] dis piacula aditique Sibyllae libri, ex quibus supplicatum Volcano et Cereri Proserpinaeque, ac propitiata Iuno per matronas, primum in Capitolio, deinde apud proximum mare, unde hausta aqua templum et simulacrum deae perspersum est; et sellisternia ac pervigilia celebravere feminae, quibus mariti erant. Sed non ope humana, non largitionibus principis aut deum placamentis decedebat infamia, quin iussum incendium crederetur. ergo abolendo rumori
XLIV. Such indeed were the precautions of human wisdom. The next thing was to seek means of propitiating the gods, and recourse was had to the Sibylline books, by the direction of which prayers were offered to Vulcanus, Ceres, and Proserpina. Juno, too, was entreated by the matrons, first, in the Capitol, then on the nearest part of the coast, whence water was procured to sprinkle the fane and image of the goddess. And there were sacred banquets and nightly vigils celebrated by married women. But all human efforts, all the lavish gifts of the emperor, and the propitiations of the gods, did not banish the sinister belief that the conflagration was the result of an order.
Nero subdidit reos et quaesitissimis poenis adfecit, quos per flagitia invisos vulgus Chrestianos appellabat. auctor nominis eius Christus Tibero imperitante per procuratorem Pontium Pilatum supplicio adfectus erat; repressaque in praesens exitiablilis superstitio rursum erumpebat, non modo per Iudaeam, originem eius mali, sed per urbem etiam, quo cuncta undique atrocia aut pudenda confluunt celebranturque.
Consequently, to get rid of the report, Nero fastened the guilt and inflicted the most exquisite tortures on a class hated for their abominations, called Christians by the populace. Christus, from whom the name had its origin, suffered the extreme penalty during the reign of Tiberius at the hands of one of our procurators, Pontius Pilatus, and a most mischievous superstition, thus checked for the moment, again broke out not only in Judæa, the first source of the evil, but even in Rome, where all things hideous and shameful from every part of the world find their [p. 381] centre and become popular.
따라서 네로는 소문을 억누르고자, 혐오스런 행위로 증오의 대상이 된 크레스티아노스/그리스도인이라 불라는 자들을 범죄인으로 잡아들여 극심한 고문을 가했다.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의 어원이 된 '크레(리)스투스'는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 그의 프로큐라토르 가운데 하나인 폰티우스 필라투스에 의해 극형에 처해졌는데, 이 극악한 미신/종교는 이 사악함이 시작된 유대아 뿐 아니라 심지어 로마에까지 등장해, 세상의 모든 음험하고 수치스런 것들이 자리잡고 유행하게 되었다 / 번역: 최광민
igitur primum correpti qui fatebantur, deinde indicio eorum multitudo ingens haud proinde in crimine incendii quam odio humani generis convicti sunt. et pereuntibus addita ludibria, ut ferarum tergis contecti laniatu canum interirent aut crucibus adfixi [aut flammandi atque], ubi defecisset dies, in usu[m] nocturni luminis urerentur. hortos suos ei spectaculo Nero obtulerat, et circense ludicrum edebat, habitu aurigae permixtus plebi vel curriculo insistens. unde quamquam adversus sontes et novissima exempla meritos miseratio oriebatur, tamquam non utilitate publica, sed in saevitiam unius absumerentur.
Accordingly, an arrest was first made of all who pleaded guilty; then, upon their information, an immense multitude was convicted, not so much of the crime of firing the city, as of hatred against mankind. Mockery of every sort was added to their deaths. Covered with the skins of beasts, they were torn by dogs and perished, or were nailed to crosses, or were doomed to the flames and burnt, to serve as a nightly illumination, when daylight had expired. Nero offered his gardens for the spectacle, and was exhibiting a show in the circus, while he mingled with the people in the dress of a charioteer or stood aloft on a car. Hence, even for criminals who deserved extreme and exemplary punishment, there arose a feeling of compassion; for it was not, as it seemed, for the public good, but to glut one man's cruelty, that they were being destroyed. --- Tacitus, {The Annals} 15.44
여기서 타키투스는 "기독교도"를 뜻하는 그리스어 '크리스티아노스'를 라틴어 표기로 '크레스티아노스'로 적었다.
로마 역사가인 수에토니우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 전기}에서 AD 49년 클라우디우스 황제 당시 로마에서 유대인들이 추방된 사건을 짧게 다루면서 그 배후로 "크레스투스"란 인물을 언급한다. 사실 당시 "크레스투스"란 이름은 그리스계 노예 및 평민 이름으로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이 인물은 예수와 상관없는 "크레스투스"란 유대인으로 새길 수 있다. 혹은 "그리스도"의 그리스어 원음인 "크리스토스"가 오인 된 것일 수도 있다.
Iudaeos impulsore Chresto assidue tumultuantis Roma expulit -- Suetonius, {CLAUDIUS} XXV
크레스투스의 선동으로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소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 (=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다. -- 수에토니우스, {열 두 황제의 전기} / 클라우디우스 편 / 번역: 최광민
적어도 타키투스의 경우는 단순히 발음상의
착각일 뿐으로 보아야 한다. 타키투스의 친구이자 트라야누스 황제 때
비티비아 총독으로 그 지역 기독교도들을 취조했던 (소)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와 기독교도들을 처벌할 프로토콜에 대해 자문을 구하는 편지를
교환하면서 '크리스토 Christo' 와 '크리스티아니 Christiani' 를
사용한다.
타키투스의 저작들에 익숙했고, 그래서 타키투스 등 로마 작가가들이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해 잘못 기술하고 있는 내용들을 비판하기도 했던 AD 2세기 후반의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신 테르툴리아누스는, 그의 변증에서 로마인들이 기독교도들을 탄압하면서도 해당용어조차 제대로 모른다고 비판하고 있다.
AD 4세기에 그리스어로 필사된 성서사본인 {코덱스 시나이쿠스}의 경우,
{사도행전} 11:26, 26:7, 그리고 {베드로전서} 4:16에서 각각
그리스도인들 ("크리스티아노이")를 '에타'를 써서 "크레스티아노이"로
표기한다. 이 세 군데 이외엔 모두 '이오타 (ι)'가 사용된
'크리스티아노이'로 되어 있다. 이 {코덱스 시나이티쿠스}는 많은
필사오류를 가지고 있고, 여러 세대에 걸쳐 오/탈자가 수정된 흔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오타 (ι)'가 사용된 "크리스토스 (Χριστός)"든
'에타 (η)'가 사용된 "크레스토스 (Χρηστός)"든, "크리스티아노스
Χριστιανός"든 "크레스티아노스 Χρηστιανός" 든 모두 동일한
"그리스도"와 "기독교도"를 뜻할 뿐이다.
타키투스의 저작들에 익숙했고, 그래서 타키투스 등 로마 작가가들이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해 잘못 기술하고 있는 내용들을 비판하기도 했던 AD 2세기 후반의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신 테르툴리아누스는, 그의 변증에서 로마인들이 기독교도들을 탄압하면서도 해당용어조차 제대로 모른다고 비판하고 있다.
"Christianus" vero, quantum interpretatio est, de unctione deducitur. Sed et cum perperam "Chrestianus" pronuntiatur a vobis — nam nec nominis certa est notitia penes vos —, de suavitate vel benignitate compositum est.
But Christian, so far as the meaning of the word is concerned, is derived from anointing. Yes, and even when it is wrongly pronounced by you Chrestianus (for you do not even know accurately the name you hate), it comes from sweetness and benignity. --- Tertullian, {Apology} Chapter 3
....."크리스티아누스 (기독교도)"란 단어의 의미를 따진다면, 그 단어는 '기름부음'이란 단어에서 왔다. (당신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이름 (=그리스도인 / 기독교도 / 크리스티아누스)조차 정확하게 모르면서) 당신들이 그 단어를 "크레스티아누스"라고 잘못 발음할 때 조차, (잘못 발음된 / 필자 주) 그 단어 ("크레스티아누스")는 "달콤한" 혹은 "선한"이란 (좋은 / 필자 주) 뜻을 가진다...... --- 테르툴리아누스, {변증} / 번역: 최광민
판단은 각자의 몫.
草人
Scientist. Husband. Daddy. --- TOLLE. 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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