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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tist. Husband. Daddy. --- TOLLE. 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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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예수 vs. 예수 #04: 다바르, 멤라, 로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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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Kwangmin Choi), 2004-05-17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제목

예수  vs. 예수 #04: 다바르, 멤라, 로고스,

요약

기독교에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 용어 "말씀" 혹은 "로고스"를 {탈굼}에 반영된 유대인의 사고와 헬레니즘의 영향 하에 있던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필론의 철학과 어떤 유사점과 상이점을 보이는 지를 서술하며, 과연 기독교가 채용한 이 개념의 기원을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의 철학까지 소급해 올라가야 하는지에 대해 간략히 논한다.

순서
  1. {요한복음} 1장
  2. 다바르, 멤라, 밀타
  3. 필론의 로고스(λόγος ): 신의 독생자
  4. 기독교의 로고스 (λόγος): 그리스도
  5. 맺음말 
  6. 참고

    참고:

    오래된 논문이긴 하지만, 하바드 대학 George Foot Moore의  논문 {Intermediaries in Jewish Theology: Memra, Shekinah, Metatron / 유대교 신학에서의 중재자: 멤라, 쉐키나, 메타트론}이 이 주제에 대한 균형잡힌 리뷰를 제공한다..


    George Foot Moore, {Intermediaries in Jewish Theology: Memra, Shekinah, Metatron}, The Harvard Theological Review, Vol. 15, No. 1 (Jan., 1922), pp. 41-85
    https://archive.org/stream/jstor-1507936/1507936

    최근 논문으로는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의 종교사학자 Daniel Boyarin의 {The Gospel of the Memra: Jewish Binitarianism and the Prologue to John 멤라 복음서, 유대교 이위일체와 요한복음서의 전조}의 일독을 권한다. 이 논문은 {탈굼}과 {요한복음} 1장의 독법을 (랍비)유대교 미드라쉬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Daniel Boyarin, {The Gospel of the Memra: Jewish Binitarianism and the Prologue to John}
    http://nes.berkeley.edu/Web_Boyarin/BoyarinArticles/108%20Gospel%20of%20the%20Memra%20%282001%29.pdf


    1. {요한복음} 1장 1-3절

    도올이 {요한복음}을 강해한다기에 생각이 나서 10여 년 전에 써둔 글을 찾아 올려본다. 도올의 이번 강의가 유료강의라서 듣지는 못했지만, 그는 최근에 발간된 책에는 이렇게 적은 모양이다.

    "...로고스는 법칙으로서 우주에 내재하는 동시에 사유의 법칙으로서 우리 마음에, 우리 영혼에 내재하는 것이며, 그것이 생명이요 빛이었다..." --- 김용옥 {요한복음 강해} (87쪽)

    이미 BC 3세기 무렵부터 그리스 철학과는 무관하게 유대인의 종교관념 속에 수 세기 동안 발전되어 왔던 '다바르', 멤라', '밀타'의 개념에 대한 역사적, 사상사적 고찰없이, 플라톤 철학이나 스토아 철학의 '이성'으로서의 '로고스'를 {요한복음} 1장의 '로고스'에 직접 끌어다 맞추려고 시도했다면 실수라고 생각한다.

    '역사' 없는 '사상'은 없는 법이다. 그러나 그 역사를 추적하기 위해서 헤라이클레토스와 파르메니데스까지 소급해 올라갈 필요는 없다.

    일단 "그 유명한" {요한복음}의 첫 구절을 읽어보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그리스어

    1 ἐν ἀρχῇ ἦν ὁ λόγος, καὶ ὁ λόγος ἦν πρὸς τὸν θεόν, καὶ θεὸς ἦν ὁ λόγος. 2 οὖτος ἦν ἐν ἀρχῇ πρὸς τὸν θεόν. 3 πάντα δι᾽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καὶ χωρὶς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οὐδὲ ἕν. ὃ γέγονεν



    시리아어 {페쉬타}



    라틴어 {불가타}

    in principio erat Verbum et Verbum erat apud Deum et Deus erat Verbum hoc erat in principio apud Deum omnia per ipsum facta sunt et sine ipso factum est nihil quod factum est

    한국어 {표준새번역}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니, 그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기독교에서는 이 '로고스'를 '예수"와 일치시킨다. {요한복음}이라는 "텍스트를 충실히 따라나간다면",  {요한복음}의 저자가 예수를 이 '로고스'로 인식하고 있었다는데 이견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요한복음}의 저자로 알려진 예수의 제자 요한이 (코이네 그리스어로) 저 복음서를 쓸때, 그리스의 철학개념인 '로고스'를 끌어다 쓴 것인지, 아니면 당시 유대인들에게 익숙했던 한 종교적 개념을 단순히 같은 뜻을 가지는 그리스어 단어를 차용한 것인지가 아마도 흥미로운 학문적 쟁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다바르, 멤라, 밀타

    BC 8세기 북부 이스라엘 왕국이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한 후, 남부 유다 왕국은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네부카드네자드(느부갓네살)에게 패망하여 3차례에 걸쳐 (BC 597, 587, 582) 유대인들은 바빌론 일대로 유배를 당하게 되는데, BC 539년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키루스(고레스)의 칙령으로 귀향한다.

    BC 5세기경부터 국제화된 페르시아 제국에서 아람어가 공식언어로 사용되고, 팔레스티나의 유대인 사회와 디아스포라 유대인 사이에서도 일상어로 점차 히브리어 대신에 아람어를 사용하게 되자, 시나고그 예배 때 사제 계급인 레위 부족이 아닌 평신자인 ‘통역자 (메투르게만)’는 히브리어로 낭독되는 율법서와 예언서에 관련된 본문 등을 히브리어에서 아람어로 통역을 하게 되었다. 즉, 시나고그에서 {토라}가 낭독될 때는 히브리어 한 구절씩 마다 아람어 통역이 따라 붙었고, {예언서}가 낭독될 때는 히브리어 세 구절 당 한번씩 아람어로 통역되었다.

    히브리어 성서를 낭독할 때, 낭독자는 실수를 피하고 전달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절대로 이를 외워서 낭독해서는 않되고 반드시 글자를 짚어가며 읽게 되어 있었다.  반면, 이들 아람어 통역자들인 메투르게만들은 텍스트를 읽어서는 안되고 반드시 낭독되는 히브리어를 듣고 이를 통역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은 이 아람어 내용이 원전에서 나온 것이 아니란 것을 청중들에게 각인시키려는 장치이자, 아람어 번역이 히브리어 원전보다 우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장치였다. 그래서 메투르게만은 히브리어 낭독자 보다 목소리를 높일 수도 없었다. 그러나 메투르게만은 이 아람어 통역에서 원전을 내용을 풀어서 보다 쉽게, 혹은 신학적인 해석을 가미할 수 있었다.

    히브리 성서의 이 아람어 번역, 더 정확히는 주석된 번역은 원래는 기록되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AD 1세기를 전후해서부터는 일정한 형식으로 굳어져 드디어 기록으로 정착되는데, 이것을 {탈굼, Targum}이라 부른다. “해석한다" 혹은 "설명한다"는 이 아람어 단어의 뜻이 보여주듯 {탈굼}은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직역이 아니라 이를 해석하여 의역한 것이다. 초기에는 히브리 정경에 비교할 때 권위를 인정받지 못했지만, 일부 유대인 공동체에서는 권위를 부여받았고, 이것은 나중에 랍비-유대교 사회에서 논쟁을 촉발하여 차차 {탈굼}의 사용은 사라져 갔다. 현재는 예멘의 유대교 사회에서만 종교의례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탈굼}에는 {옹켈로스 탈굼(모세오경)}과 {요나단 탈굼(예언서)}, 그리고 {제1예루살렘 탈굼 (예언서)}과 {제2예루살렘 탈굼 (단편탈굼)}등이 있다. 현재 전승된 사본들은 AD 4세기 이후에 정착된 것으로 여겨진다. {탈굼 네오피티}는 훨씬 후대인 AD 16세기의 사본이다.

    이 무렵부터 유대인들은 신에 대한 표현에서 바빌론 유수 이전과는 다른 면모를 보이게 된다. 즉, 바빌론 유수 이전에는 신인동형동성적으로 묘사하던 신을 이제는 그 초월성을 강조하여 가급적 의인화된 표현을 삼가게 된 것이다. 신의 이름인 '야훼(YHWH)'을 입에 담는 대신 '아도나이'로 고쳐 부르게 되는 것도 이 시절부터였다. 그 결과 너무도 초월적이어서 불가지한 존재인 신이 직접 인간과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다소 간 가지적인 그의 '말씀'이 인간과 관계를 맺어온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모든 번역은 번역 당시의 '해석관점'을 담고 있다. 즉, 히브리어 성서의 그리스어 번역인 {70인역, LXX / Septuagint}이든 아람어 번역인 {탈굼}이든, 예수가 등장하기 적어도 두 세기 정도 동안 무르익은 해석경향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탈굼}에 따르면, 이제 말하는 것은 신 '자신'이 아니라 그의 '말씀'이 된다. 사실 이런 경향은 히브리어 구약성서에서도 등장하는 표현이었는데, {탈굼}의 주석자들은 이 경향을 더욱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 세상을 창조한 주체도 바로 신의 '말씀'이었고, 에덴동산을 거닐던 것도 신의 '말씀'이고 예언자들에게 말한 것도 신의 '말씀'이었고, 또 족장들과 모세가 보았던 존재도 형상으로 규정될 수 없는 야훼 자체가 아닌 그의 '말씀'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예언서들은 흔히 "야훼의 '말씀'이 ~에게 말하였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즉, ‘말하는 주체’는 바로 '말씀'인 것이다. 이 '말씀'을 아람어 {탈굼}에서는 '멤라(מימרא)' 라고 불렀다.  서부 아람어의 일파인 시리아어로의 번역은 본래 AD 1세기경 메소포타미아의 아리아베네(Ariabene) 지역에 있던 유대인 사회에서 번역하여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AD 5세기에 구약/신약을 포함한 {페쉬타}로 완성되었다 .이 {페쉬타}에서는 {탈굼}에 등장하는 아람어 ‘멤라’가 같은 의미를 가지는 시리아어 ‘밀타(Miltha)’로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히브리 성서에서 야훼가 '말'을 할때 사용되는, 즉 언어적 매개로의 '말씀'은 '다바르' (야훼의 말씀 = בדבר יהוה), 혹은 '임라' (야훼의 말씀 אמרת יהוה)인데, 아람어 탈굼에서는 후자의 '임라'를 '멤라;로 번역했다. 일반적인 '말'은 '멤라'가 아니라 '피트가마 פִּתְגָם'로 표현된다 (ptgama de-Y). 그러므로 '멤라'는 신의 '말씀'을 의인화 한 것이라기보다는 특별한 실재적 '존재'를 표현하기 위해 신중하게 의도적으로 선택된 용어로 보인다.

    가령, 히브리 성서인 다윗의 {시편}에 언급된 창조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보자. 만약이 이 '말씀' 즉, '야훼의 다바르 / בִּדְבַר יְהוָה' 혹은 '주님의 로고스 / τῷ λόγῳ τοῦ κυρίου'가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재하는 어떤 존재'라고 상정하면, {탈굼}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이해될 것이다.

    בִּדְבַר יְהוָה שָׁמַיִם נַעֲשׂוּ וּבְרוּחַ פִּיו כָּל־צְבָאָֽם׃ --- 히브리어 맛소라 사본, {시편} 33편 6절

    τῷ λόγῳ τοῦ κυρίου οἱ οὐρανοὶ ἐστερεώθησαν καὶ τῷ πνεύματι τοῦ στόματος αὐτοῦ πᾶσα ἡ δύναμις αὐτῶν --- 그리스어 70인역 (LXX), {시편} 32편 6절 (히브리 성서의 33장에 해당)

    Verbo Domini cæli firmati sunt, et spiritu oris ejus omnis virtus eorum. --- 라틴어 불가타, {시편} 32편 6절 (히브리 성서의 33장에 해당)

    야훼의 말씀(=다바르=로고스)으로 하늘이 펼쳐지고, 그의 입김으로 별들이 돋아났다. --- 한국어 공동번역, {시편} 33편 6절

    또한 유명한 ‘소돔과 고모라’의 장면이 등장하는 {창세기} 19장 24절을 보면, 히브리어 원전에 등장하는 ‘두 야훼’ - 하늘에 있던 야훼와 지상의 야훼 - 에 대해 {요나단 탈굼}과 {예루살렘 탈굼}은 앞의 야훼를 ‘야훼의 멤라/말씀’으로 바꾸고 있다. 우선 히브리어와 그리스 원문을 읽은 후, 아람어 탈굼이 어떻게 해당 문장에 등장하는 두 야훼를 렌더링하고 있는지를 보자.


    “And YHWH rained brimstone and fire upon Sodom and upon Gomorrah, from YHWH, from the heavens.”  -- 히브리어 원문 (영어, 타나크)

    야훼께서, 하늘의 야훼로부터  소돔과 고모라 위에 유황과 불의 비를 내리셨다 --- 히브리어 원문 직역

    24 καὶ κύριος ἔβρεξεν ἐπὶ Σοδομα καὶ Γομορρα θεῖον καὶ πῦρ παρὰ κυρίου ἐκ τοῦ οὐρανοῦ  --- 그리스어 {70인역 / LXX}

    퀴리오스 (=주님)께서 하늘의 퀴리오스 (주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셨다 --- 그리스어 {70인역} / 번역: 최광민



    And the Word of the Lord had caused showers of favour to descend upon Sedom and Amorah, to the intent that they might work repentance, but they did it not: so that they said, Wickedness is not manifest before the Lord. Behold, then, there are now sent down upon them sulphur and fire from before the Word of the Lord from Heaven  --- {The Targums of Onkelos and Jonathan Ben Uzziel: On the Pentateuch With The Fragments of the Jerusalem Targum From the Chaldee} J. W. Etheridge, M.A. https://archive.org/details/cu31924074296975

    주님 (야훼)의 말씀/멤라가 세돔(소돔)과 아모라 (고모라)인들을 회개시키려고 은총을 내리셨으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주님 앞에 들킨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이제 유황과 불이 하늘로부터 주님의 멤라 앞에 내려왔다 --- 아람어 {요나단 탈굼} / 번역:  J. W. Etheridge / 중역: 최광민

    And the Word of the Lord Himself had made to descend upon the people of Sedom and Amorah showers of favour, that they might work repentance from their wicked works. But when they saw the showers of favour, they said, So, our wicked works are not manifest before Him. He turned (then), and caused to descend upon them bitumen and fire from before the Lord from the heavens.. --- {The Targums of Onkelos and Jonathan Ben Uzziel: On the Pentateuch With The Fragments of the Jerusalem Targum From the Chaldee} J. W. Etheridge, M.A.

    세돔과 아모라 사람들이 혹시 자신들의 악행을 회개를 할까 싶어 주님의 멤라 자신이 은총을 내리셨으나, 그들은 그들의 악행을 회개하지 않았다. 그들은 은총이 하늘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서는 자신들의 악행이 주님 앞에 들키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주님의 멤라는 돌이켜 이제 하늘로부터 역청과 불을 주님 앞에 내리셨다 --- 아람어 {예루살렘 탈굼} / 번역:  J. W. Etheridge / 중역: 최광민  

    이 "두 주님(아도나이/퀴리오스)" 혹은 "두 야훼'에 대한 논증은 이미 AD 1-2세기 기독교도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AD 2세기 초중반을 살았던 사마리아 출신의 기독교 철학자/교부 유스티노스는 유대인 랍비 트리폰과의 대화를 담은 {트리폰과의 대화}에서 역시 이 논증을 구사하고 있다.

    21 ἰδοὺ ἡ πόλις αὕτη ἐγγὺς τοῦ καταφυγεῖν ἐστιν ἐκεῖ μικρά· ἐκεῖ σωθήσομαι, ὡς μικρά ἐστι, καὶ ζήσεται ἡ ψυχή μου. καὶ εἶπεν αὐτῷ· Ἰδοὺ ἐθαύμασά σου τὸ πρόσωπον καὶ ἐπὶ τῷ ῥήματι τούτῳ τοῦ μὴ καταστρέψαι τὴν πόλιν περὶ ἧς ἐλάλησας. σπεῦσον τοῦ σωθῆναι ἐκεῖ· οὐ γὰρ δυνήσομαι ποιῆσαι πρᾶγμα ἕως τοῦ εἰσελθεῖν σε ἐκεῖ. διὰ τοῦτο ἐκάλεσε τὸ ὄνομα τῆς πόλεως Σηγώρ. ὁ ἥλιος ἐξῆλθεν ἐπὶ τὴν γῆν, καὶ Λὼτ εἰσῆλθεν εἰς Σηγώρ. καὶ ὁ κύριος ἔβρεξεν εἰς Σόδομα καὶ Γόμορρα θεῖον καὶ πῦρ παρὰ κυρίου ἐκ τοῦ οὐρανοῦ, καὶ κατέστρεψε τὰς πόλεις ταύτας καὶ πᾶσαν τὴν περίοικον. 22 Καὶ πάλιν παυσάμενος ἐπέφερον· Καὶ νῦν οὐ νενοήκατε, φίλοι, ὅτι ὁ εἷς τῶν τριῶν, ὁ καὶ θεὸς καὶ κύριος τῷ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ὑπηρετῶν, κύριος τῶν δύο ἀγγέλων; προσελθόντων γὰρ αὐτῶν εἰς Σόδομα, αὐτὸς ὑπολειφθεὶς προσωμίλει τῷ Ἀβραὰμ τὰ ἀναγεγραμμένα ὑπὸ Μωυσέως· οὗ καὶ αὐτοῦ ἀπελθόντος μετὰ τὰς ὁμιλίας, ὁ Ἀβραὰμ ὑπέστρεψεν εἰς τὸν τόπον αὐτοῦ. 23 οὗ ἐλθόντος, οὐκέτι δύο ἄγγελοι ὁμιλοῦσι τῷ Λὼτ ἀλλ' αὐτός, ὡς ὁ λόγος δηλοῖ, καὶ κύριός ἐστι, παρὰ κυρίου τοῦ ἐν τῷ οὐρανῷ, τοῦτ' ἔστι τοῦ ποιητοῦ τῶν ὅλων, λαβὼν τὸ ταῦτα ἐπενεγκεῖν Σοδόμοις καὶ Γομόρροις ἅπερ ὁ λόγος καταριθμεῖ, οὕτως εἰπών· Κύριος ἔβρεξεν ἐπὶ Σόδομα καὶ Γόμορρα θεῖον καὶ πῦρ παρὰ κυρίου ἐκ τοῦ οὐρανοῦ.

    "...And after another pause I added: "And now have you not perceived, my friends, that one of the three, who is both God and Lord, and ministers to Him who is in the heavens, is Lord of the two angels? For when[the angels] proceeded to Sodom, He remained behind, and communed with Abraham in the words recorded by Moses; and when He departed after the conversation, Abraham went back to his place. And when he came[to Sodom], the two angels no longer conversed with Lot, but Himself, as the Scripture makes evident; and He is the Lord who received commission from the Lord who[remains] in the heavens, i.e.,the Maker of all things, to inflict upon Sodom and Gomorrah the[judgments] which the Scripture describes in these terms:'The Lord rained down upon Sodom and Gomorrah sulphur and fire from the Lord out of heaven..." --- {Dialogue of Justin, Philosopher and Martyr, with Trypho, a Jew}.CHAP. LVI.

    .... 잠깐 멈춘 후, 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여러분 (=유대인 트리폰과 배석자들),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그 세 명 가운데 한 명, 즉 신이자 주님이신 분이 하늘에 있는 분의 전권을 대리하는 분이며, 이 두 천사의 주인이 아닙니까? 천사들이 소돔으로 갈때, 이 분은 뒤에 남아 모세가 기록한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이야기를 나눴지요? 그 분이 대화를 마치고 떠날 때 아브라함은 자기 처소로 돌아갔고,  다시 이 분이 소돔에 이르렀을 때, 롯은 두 천사와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고 그 분과 이야기 한 것입니다. 성서가 이 점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하늘에 있는 만물의 창조자 주님 (=야훼)으로부터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할 권한을 받은 분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이렇게 적습니다: [그리스어 번역본에서] "주님 (=야훼)께서, 소돔과 고모라 위로 유황과 불을, 주님 (=야훼)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리셨다.."  --- 유스티노스, {트리폰과의 대화}, 56장  / 번역: 최광민



    이런 이해는 기독교 초기 3세기 간 거의 모든 정통교부들의 저작에 등장할 뿐 아니라, AD 4세기의 아리우스 논쟁에서도 정통파가 되는 삼위일체파 뿐 아니라 아리우스파 역시 이런 이해에 따라 위에 언급된 "두 야훼" 중 전자의 '야훼'를 인간이 되기 전의 성자라고 여기고 있었다. AD 351년 시르미움에서 아리우스파 주교들이 발표한 신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 회의에서는 이 "두 야훼", 즉 (1) 성부와 성자를 동일하게 보는 자와 (2) 성자/예수를 "주님으로 보지 않는 자"를 파문할 것을 선언한다.

    (17.) Whosoever shall explain, “The Lord rained fire from the Lord” (Gen 24:24), not of the Father and the Son, and says that He rained from Himself, be he anathema. For the Son, being Lord, rained from the Father Who is Lord..." --- {Sixth Arian Confession aka First Sirmium (Sirmium, 351 AD)}

    [제 17조] 누구든지 (주님이신) 성부와 (주님이신) 성자가 아닌 그저 "주님이 주님에게서 불비를 내리셨다"라고 말하거나, " 주님이 주님 자신으로부터 불비를 내리셨다라고 하는 자는 파문당할 것이다. 주님(=야훼)이신 성자가, 또한 주님(=야훼)이신 성부로부터 불비를 내리신 것이기 때문이다.   --- AD 351년 시르미움 1차회의 / 제 6차 아리우스 계열 신앙고백 / 번역: 최광민

    또한 아람어 {탈굼}에서 히브리어 원전의 ‘야훼’가 ‘야훼의 말씀’, 즉 ‘야훼의 멤라’로 강조/대체된 부분들을 발췌해 본다.  여기서 야훼의 멤라는 야훼와 더불어 세상을 창조한 존재이자, 신과 인간 사이의 계약관계에 있어 야훼와 인간 사이에서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  아람어에서 영어로의 번역에는 미묘한 뉘앙스에 있어서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창세기} 1장 1절을 히브리어 맛소라 사본과 아람어{탈굼 네오피티 Targum Neofiti}의 내용으로 비교해 보자.

    우선은 히브리어이다.



    태초에 엘로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 {창세기} 1장 1절

    다음은 AD 아람어 {탈굼 네오피티} 및 맥나마라와 세퍼드의 영어번역이다. 맥나마라는 야훼를 뜻하는 아람어 축약형 세개의 요드 ייי 의 앞의 ד (달레트)가 후대 기독교도에 의한 렌더링이라고 본다.

    מלקדמין בחכמה ברא דייי שכלל ית שמיא וית ארעא

    מלקדמין (태초에)
    בחכמה (지혜와 함께)
    ברא (아들 or 창조하다)
    דייי (야훼의 / 아람어 축약형)
    שכלל (완성하다)
    ית שמיא (하늘과)
    וית ארעא׃ (땅을)

    from the beginning the Son of the Lord perfected the heaven and the earth 태초에 야훼의 아들이 하늘과 땅을 완성하셨다 --- COMPREHENSIVE
    ARAMAIC LEXICON PROJECT http://cal1.cn.huc.edu/showsubtexts.php?subtext=54001&cset=Hebrew AND http://cal1.cn.huc.edu/searching/targumsearch.html.

    "...From the beginning, with wisdom, the Lord, created and finished the heavens and the earth..." + [맥마나라의 주석]: “the Memra of the Lord”; text of Nf [Neofiti] has “the son of the Lord”, which is due most probably to a sixteenth-century correction...."  --  --- Targum Neofiti, Gen. 1:1 / (McNamara, 1992, 52)

    “In the beginning, with wisdom, the Son of YHWH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 Shepherd, Michael B. “Targums, the New Testament, and Biblical Theology of the Messiah.” JETS. 51:1 (2008), 45-58

    태초에, 지혜와 함께, 야훼의 아들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 {탈굼 네오피티}, 창세기 1:1 / 번역: 최광민

    '야훼' 혹은 '엘로힘'이 그의 '멤라'로 해석되는 {탈굼}의 용례들을 몇가지 더 읽어보자. (http://targum.info/targumic-texts/pentateuchal-targumim/)

    • "....And the Word of the Lord created man in His likeness, in the likeness of the presence of the Lord He created him, the male and his yoke-fellow He created them...." {Targum Jerusalem} / Gen. 1:27
      • "....주님의 멤라는 그의 모습에 따라, 야훼의 모습에 따라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  --- {탈굼 예루살렘} 창세기 1:27
    • And they heard the voice of the Word of the Lord God walking in the garden in the evening of the day;(22) and Adam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before the Lord God among the trees of the garden. -- {Targum Onkelos} 3:8
      • And they heard the voice of the word of the Lord God walking in the garden in the repose of the day; and Adam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before the Lord God among the trees of the garden -- {Targum Jerusalem} 3:8
      • 그들 (아담과 하와)는 그날 저녁 (에덴)동산을 거니시는 야훼 엘로힘의 멤라의 소리를 듣고....  /  창세기{탈굼 옹켈로스} + {탈굼 예루살렘} 3:8 / 번역: 최광민.
    • And he believed in the Lord, and had faith in the (Memra) Word of the Lord, and He reckoned it to him for righteousness (lizeku) -- Targum Onkelos Gen. 15:6
    • And Abrahm prayed in the name of the Word of the Lord, and said, Thou art the Lord who seest, and art not seen. --- Jerusalem Targum Gen. 22:14
      • 아브라함은 야훼의 멤라의 이름으로 경배하고 기도하기를, "당신은 야훼십니다. 당신은 보실 수 있지만, 당신을 볼 수는 없습니다. --- 탈굼 예루살렘, {창세기} 22:14 / 번역: 최광민
    • And Hagar gave thanks, and prayed in the Name of the Word of the Lord, who had been manifested to her, saying, Blessed be Thou, Eloha, the Living One of all Ages, who hast looked upon my affliction -- {Jerusalem Targum} Gen. 16:3
      • 하갈은 감사를 올리며, 그녀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야훼의 멤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다..  --- 탈굼 예루살렘, {창세기} 16:3  / 번역: 최광민
    • And the Word of the Lord created man in His likeness, in the likeness of the presence of the Lord He created him, the male and his yoke-fellow He created them  --- Targ. Jerusalem Gen. 1:27
      • 야훼의 멤라는 자신의 모습에 따라 인간, 즉 남자와 그 짝 (여자)를 창조하셨다 -- 탈굼 예루살렘, {창세기} 1:27 / 번역: 최광민 
    • And the Word of the Lord said to Mosheh, He who spake to the world, Be, and it was; and who will speak to it, Be, and it will be. And he said, Thus shalt thou speak to the sons of Israel, EHEYEH hath sent me unto you. --- Jerusalem Targum Ex. 3:14
      • 야훼의 멤라가 모세에게 말했다, "나는 세상을 '존재하라'고 명령하여 있게 한 자다. 나는 또한 '존재하라'고 명령해 미래에 이루어지게 할 자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너는  '존재자'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말해라.  --- 예루살렘 탈굼, {출애굽기} 3:14 / 번역: 최광민
    •  Night first; when the Word of the Lord was revealed upon the world as it was created; when the world was without form and void, and darkness was spread upon the face of the deep, and the Word of the Lord illuminated and made it light; and he called it the first night.  --- Targum Jerusalem Ex. 12:42 
      •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야훼의 멤라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낸 첫날 밤, 세상은 황폐하고 공허했으며 어둠이 심연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야훼의 멤라는 찬란하게 빛났는데, 그는 이때를 첫째 밤이라 부르셨다. --- 탈굼 예루살렘 {출애굽기} 12:42 / 번역: 최광민
    • And the Lord said, This is the sign of the covenant which I establish between My Word and between you and every living soul that is with you, unto the generations of the world. --- Targum Onkelos Gen. 9:1
    • And I will set My covenant between My Word and thee, and will multiply thee very greatly. --- Targum Onkelos Gen. 17:7 
      • 나는 나의 멤라와 너희 사이에 나의 계약을 맺으리라 --- 옹켈로스 탈굼, {창세기} 17:7  / 번역: 최광민
    • "...Yaakov said: "My soul does not wait for salvation such as that wrought by Gideon, the son of Yoash, for that was but temporal; neither Samson, which was only transitory; but for that salvation which You have promised to come, through for a salvation like that of Your Memra unto Your people, the B’nai Israel; for your deliverance my soul hopes." Targum Jonathan Gen. 49:1
    • But I will have mercy upon the house of Yahudah, and I will save them by the Memra of YHWH, their Elohim. --- Targum Jonathan Hosea 1:7 
      • 나는 유다 가문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며, 그들의 엘로힘 (=신), 즉 야훼의 멤라로 구원할 것이다.  ---- 요나단 탈굼, {호세아} 1:7 / 번역: 최광민
    • The Memra brings Israel nigh unto [YAH] and sits on His throne receiving the prayers of Israel.” Targ.Yer. to Gen.4:7
    • “My Shechinah I shall put among you, My Memra shall be unto you for a redeeming deity, and you shall be unto My Name a holy people.” Targ.Yer. to Lev.22:2
    • The Memra will roar to gather the exiles” Targ.Hos.11:5VIII-30
    • “In the Memra the redemption will be found.” Targ.Zech.12:5.
    • “By belief, we understand that the ages were prepared by the Memra of Elohim, so that what is seen was not made of what visible.” Ivrim 11:3
    • "...Israel will be redeemed by the memra of God, an everlasting redemption. They will not be ashamed forever and ever..." Isa 45:17 Targum Jonathan
    • "...Turn to my memra all dwellers on earth. I am the LORD, there is no other. That the Word of YHWH is the savior is expressed elsewhere: But Israel shall be saved by the Word of YHVH with an everlasting salvation By the Word of YHWH shall all the seed of Israel be justified..." (Targum Jonathan Is. 45:17, 25)
      • 세상의 모든 자들아 나의 멤라에게로 돌아오라. 나는 야훼, 다른 자는 없다. "야훼의 멤라는 우리의 구원자"라는 외침이 도처에서 들린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야훼의 멤라로 인해 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라. 야훼의 멤라로 인해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의로와 질 것이다 --- 요나단 탈굼, {이사야} 45:17, 25 / 번역: 최광민
    • And the Word of the Lord spake all the excellency of these words saying:--- Ex. 20:1 Targum Jonathan
      • 야훼의 멤라가 이 모든 장엄한 말씀을 하셨다 --- 탈굼 예루살렘, {출애굽기}  20:1 / 번역: 최광민
    • "...And Abraham trusted in the Word (Memra) of YHWH, and He counted it to him for righteousness. (Targum Onkelos Gen. 15:6)

    무엇보다도 {탈굼 예루살렘}의 모세오경 (토라) 가운데 하나인 {출애굽기}에서 모세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야훼가 직접 자신을 부른 호칭인 "אֶהְיֶה אֲשֶׁר אֶהְיֶה, 에헤예 아쉐르 에헤예, I AM THAT I AM, 스스로 존재하는 자, 존재자, 혹은 나는 나 "를 야훼의 멤라에 적용시킨다.



    우선 {탈굼 예루살렘}을 보자.

    And the Word of the Lord said to Mosheh, He who spake to the world, Be, and it was; and who will speak to it, Be, and it will be. And he said, Thus shalt thou speak to the sons of Israel, EHEYEH hath sent me unto you. --- Jerusalem Targum Ex. 3:14 

    야훼의 멤라가 모세에게 말했다, "나는 세상을 '존재하라'고 명령하여 있게 한 자다. 나는 또한 '존재하라'고 명령해 미래에 이루어지게 할 자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너는  '존재자'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말해라.  --- 예루살렘 탈굼, {출애급기} 3:14 / 번역: 최광민

    일종의 미드라쉬라 볼 수있는 이 아람어 {탈굼}에 대응하는 히브리어 {히브리 성서} (맛소라 사본) 본문과 {히브리 성서}의 그리스어 번역인 {70인역/LXX} 본문, 라틴어 {불가타} 본문, 한국어 {새번역} 본문은 아래와 같다. 여기서의 화자는 히브리어로 엘로힘(אֱלֹהִים), 그리스어로 테오스(θεὸς), 라틴어로 데우스(Deus), 즉 하나님 혹은 하느님이다. 특별히 그리스어 "ἐγώ εἰμι ὁ ὤν 에고 에이미 호 온"에서의 "호 온"은 "존재(자)"를 뜻한다.

    14 וַיֹּאמֶר אֱלֹהִים אֶל־מֹשֶׁה אֶֽהְיֶה אֲשֶׁר אֶֽהְיֶה וַיֹּאמֶר כֹּה תֹאמַר לִבְנֵי יִשְׂרָאֵל אֶֽהְיֶה שְׁלָחַנִי אֲלֵיכֶֽם׃

    14 καὶ εἶπεν ὁ θεὸς πρὸς Μωυσῆν ἐγώ εἰμι ὁ ὤν καὶ εἶπεν οὕτως ἐρεῖς τοῖς υἱοῖς Ισραηλ ὁ ὢν ἀπέσταλκέν με πρὸς ὑμᾶς

    14 Dixit Deus ad Moysen: Ego sum qui sum. Ait: Sic dices filiis Israël: Qui est, misit me ad vos.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곧 나다אֶֽהְיֶה אֲשֶׁר אֶֽהְיֶה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  / 한국어 {표준새번역}

    AD 180년 경, 시리아 안티오키아 주교/감독인 테오필로스는 아래와 같이 진술함으로써 {요한 복음서}의 첫 구절과 아람어 {탈굼}의 개념이 강력한 역사적/사상적 연계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God, then, having His own Word internal within His own bowels, begat Him, emitting Him along with His own wisdom before all things. He had this Word as a helper in the things that were created by Him, and by Him He made all things. He (the Word) is called "governing principle" , because He rules, and is Lord of all things fashioned by Him. He (the Word), then, being Spirit of God, and governing principle, and wisdom, and power of the highest, came down upon the prophets, and through them spoke of the creation of the world and of all other things..." --- Theophilus of Antioch, {To Autolycus} 2:15

    그 자신의 말씀/로고스를 그 안에 가지신 신은, 로고스를 낳았고, 만물들에 앞서 그 자신의 지혜와 함께 그를 드러냈다. 신은 이 로고스의 도움으로, 또 그를 통하여 만물을 창조했다. 그래서 로고스는 "지배원리"로 불리는데, 그것은 로고스는 다스리는 존재이며, 신에 의해 조성된 만물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신의 영, 지배원리, 지혜, 지고의 권능으로서의 로고스는 예언자들에게 내려왔던 존재이며, 예언자들을 통해서 창조의 이야기 및 모든 다른 이야기를 전해준 존재이다....  --- 안티오키아의 테오필로스, {아우토리코스에게} 2:15  / 번역: 최광민

    이 진술은 또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교/플라톤 철학자인 필론의 사상과도 연계점을 보인다.




    3. 필론의 로고스(λόγος ): 신의 독생자

    BC 1세기에서 AD 1세기 필론이 살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래로 이집트-시리아-그리스-로마에 이르는 폭넓은 지역에 헬레니즘을 재생산/공급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대인 공동체는 이미 BC 3세기 무렵에 그리스계 이집트 왕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지시에 따라 히브리어로 된 유대교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해 사용하고 있었고, 이 그리스어 번역은 지중해 일대 헬레니즘 영향권 아래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가운데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이 그리스어 번역은 {70인역, LXX}으로 불리는데, 주로 그리스어 사용지역으로 퍼져나간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처음 채택했던 구약성서 원문이 바로 이 {70인역}이었다.

    필론의 시대 몇 세대 전에 같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성서인 {70인역}의 편찬자들은 히브리어의 ‘말씀’ 즉 ‘다바르’를 그리스어 '로고스'로 번역했다. (이유는 단순히 그 의미가 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70인역}를 사용하던 유대인 필론이 '로고스'를 말할 때의 그 '로고스'는 플라톤 철학과 스토아 철학이 말하던 '탈인격적 원리'로서의 '로고스'가 아닌 '인격적 실체'로서의 '로고스'라는 점에서 앞의 두 그리스 철학이 말하는 것과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필론의 '로고스' 개념은 분명 플라톤 철학의 흔적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는 헬레니즘 문명권에 속한 헬라화된 유대인으로서 그리스 철학과 학문의 용어를 차용해 그의 종교적 개념을 풀이했지만, 곧 일반적 의미에서의 플라톤 철학자였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의 저작을 보면, 그는 오히려 유대인의 종교가 그리스의 철학보다 우위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 그가 사용한 '로고스' 개념은 위에 언급된 {탈굼}에 등장하는 것처럼 BC 3세기에서 AD 1세기 초반의 유대교 교리를 그리스의 철학용어를 빌려서 사용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부의 맏아들인 로고스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창조했는지에 관한 필론의 설명을 주의깊게 읽어보자. 여기서 말하는 '종(Speices)'는 생물학적인 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 존재론에서 말하는 의미로서의 '존재론적 종'이다.


    {The Works of Philo Judaeus}, tr. C. D. Yonge
    https://www.archive.org/stream/worksphilojudaeu01philuoft

    Now, the following is an example of the former kind: “And God planted a paradise in Eden, toward the East,” not of terrestrial but of celestial plants, which the planter caused to spring up from the incorporeal light which exists around him, in such a way as to be for ever inextinguishable. I have also heard of one of the companions of Moses having uttered such a speech as this: “Behold, a man whose name is the East!” A very novel appellation indeed, if you consider it as spoken of a man who is compounded of body and soul; but if you look upon it as applied to that incorporeal being who in no respect differs from the divine image, you will then agree that the name of the east has been given to him with great felicity. For the Father of the universe has caused him to spring up as the eldest son, whom, in another passage, he calls the firstborn; and he who is thus born, imitating the ways of his father, has formed such and such species, looking to his archetypal patterns. - {De Confusione Linguarum} 63

    우주만물의 아버지는 그를 맏아들로 낳으셨는데, 다른 구절에는 그를 "처음 나신 자"로 불렀다. 이 태어난 존재는 그의 아버지를 여러모로 모방했고, 그 (=아버지, 신)의 원형적인 패턴을 바라봄으로서 이런저런 종들을 창조해 냈다--- 필론, {De Confusione Linguarum} 63 / 번역: 최광민

    "For it was indispensable that the man who was consecrated to the Father of the world, should have as a paraclete, his son, the being most perfect in all virtue, to procure forgiveness of sins, and a supply of unlimited blessings" - {De Vita Mosis}, iii. 14 / ii. 155

    필론이 그의 저술에서 '로고스'를 지칭해 부른 다른 호칭들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런 표현들은 필론 자신의 창작이 아니라, 이미 예수 이전 수세기 전부터 축적되어온 소위 '유대 지혜문학'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다. 필론은 '로고스'를 '지혜', '말씀', '중재자(파라클레토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의) 독생자/맏아들'로 부른다. 이 '로고스'는 너무나 초월적이어서 세계와 관계하지 않는 신 자신를 대신해 신과 인간세상 사이를 연결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필론이 인지한 '로고스'는, 그래서 세계를 향한 신 자신의 "현현"이다. 즉, 신 자신(아버지)가 로고스를 "낳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의 로고스 철학의 기조를 이루는 아버지-아들의 관계다. 이 부자관계가 인간의 생물학적 부자관계와 같은 것이 아니라 다만 존재의 '현현방식'에 관한 것이므로, “신(YHWH)이 아들(로고스)을 낳을때 여성 배우자를 필요로 하는가?”라는 식의 유치한 발상은 필론의 (그리고 기독교의) 신-로고스 개념과 전혀 무관하다.



    필론의 관점에서 로고스는 신의 자기 현현이며 권능의 구현이지만, 이 로고스는 신에게서 '태어난' 이유로 신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신의 정신이기에 '영원에 - 혹은 영원한 탄생에 - 참여한다. 동시에 '피조물'이 아닌 관계로 이 세상과도 확연히 분리된다. 즉, 로고스는 지위적으로 신과 세상 가운데서 이 둘을 중재한다. (이것은 {탈굼}에서 야훼의 멤라가 야훼와 세계 사이에 갖는 관계와 같다.) 그리고 이 세상은 실제로는 이 '로고스'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이것 역시 {탈굼}에서 야훼의 멤라에게 부여하는 지위와 같다.)

    이 세계의 창조자로서의 ‘로고스’는 마치 플라톤 철학에 등장하는 세상의 조성자 ‘데미우르고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필론의 이 ‘로고스’에는 플라톤 철학의 배후에 깔린 물질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즉 불완전한 물질세계의 창조자 ‘데미우르고스’에게 적용된 다소 간의 부정적 이미지가 전혀 들어있지 않다.

    그런데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유대교도였으나, 기독교도였던 적은 전혀 없었던 이 저명한 유대인 철학자 필론의 사상과, 거의 동시대에 씌여진 {요한복음} 사이에 존재하는 이 대칭관계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필론은 이 '로고스' 외에도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신의 외형적 '복수성'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필론 역시 그의 저작인 {아브라함에 관하여}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앞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세 사람'이 등장하는 {창세기} 18-19장의 이야기에서 이를 설명한다.

    우선, 창세기 18-19장을 읽어보자.

    ......야훼께서는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문 어귀에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어 웬 사람 셋이 자기를 향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들을 보자마자 천막 문에서 뛰어나가 맞으며 땅에 엎드려 청을 드렸다. "손님네들, 괜찮으시다면 소인 곁을 그냥 지나쳐 가지 마십시오. 물을 길어올 터이니 발을 씻으시고 나무 밑에서 좀 쉬십시오. 떡도 가져올 터이니 잡수시고 피곤을 푸신 뒤에 길을 떠나십시오. 모처럼 소인한테 오셨는데, 어찌 그냥 가시겠습니까?" 그들이 대답하였다. "아! 그렇게 하여주시겠소?" 아브라함은 급히 천막으로 들어가 사라에게 고운 밀가루 서 말을 내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고 이르고 소떼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살이 연하고 맛있어 보이는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종에게 맡겨 빨리 잡아서 요리하게 하고는 그 송아지 요리에다가 엉긴 젖과 우유를 곁들여서 손님들 앞에 차려놓고, 손님들이 나무 밑에서 먹는 동안 그 곁에 서서 시중을 들었다.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부인 사라는 어디 계시오?" 하고 묻자, 아브라함은 사라가 천막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내년 봄 새싹이 돋아날 무렵, 내가 틀림없이 너를 찾아오리라. 그 때 네 아내 사라는 이미 아들을 낳았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등지고 서 있는 천막 문 어귀에서 이 말을 엿듣고 있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 많은 늙은이였고 사라는 달거리가 끊긴 지도 오래였다. 그래서 사라는 속으로 웃으며 "내가 이렇게 늙었고 내 남편도 다 늙었는데, 이제 무슨 낙을 다시 보랴!"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야훼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사라가, 다 늙은 몸으로 어떻게 아기를 낳으랴 하며 웃으니, 될 말이냐?이 야훼가 무슨 일인들 못 하겠느냐? 내년 봄 새싹이 돋아날 무렵에 내가 다시 찾아오리라. 그 때 사라는 이미 아들을 낳았을 것이다." 그러자 사라는 겁이 나서 웃지 않았다고 잡아뗐으나, 야훼께서는 "아니다. 너는 분명히 웃었다." 하시며 꾸짖으셨다.

    사람들은 길을 떠나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도 그들을 배웅하느라고 같이 왔다. 야훼께서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셨다. '내가 장차 하려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 아브라함은 강대한 민족이 되고 세상 민족들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 복을 빌 것이 아닌가? 나는 그로 하여금 그의 자손과 그의 뒤를 이을 가문에게 옳고 바른 일을 지시하여 이 야훼의 가르침을 지키게 하려고 그를 뽑아 세우지 않았던가? 그러니, 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을 그대로 이루어주어야 하리라.' 이렇게 생각하시고 야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오는 저 아우성을 나는 차마 들을 수가 없다. 너무나 엄청난 죄를 짓고들 있다. 내려가서 그 하는 짓들이 모두 나에게 들려오는 저 아우성과 정말 같은 것인지 알아보아야 하겠다." 그 사람들은 걸음을 옮겨 소돔 쪽으로 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냥 야훼 앞에 서 있었다.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물었다.....[중략].....
    야훼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자리를 뜨셨다. 아브라함도 자기 고장으로 되돌아갔다.

    하느님의 천사 둘이 소돔에 다다른 것은 저녁때였다. 롯이 때마침 성문께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맞으며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청하였다. "손님네들, 누추하지만 제 집에 들러 발을 씻으시고 하룻밤 편히 쉬신 다음 아침 일찍이 길을 떠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들은 밖에서 밤을 새우겠다고 하면서 사양하였으나, 롯이 하도 간청하는 바람에 롯을 따라 그의 집에 들어갔다. 롯은 그들에게 누룩 안 든 빵을 구워주며 대접하였다. 그들이 아직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소돔 시민이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온통 몰려와 롯의 집을 둘러싸고 롯에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오늘 밤 네 집에 든 자들이 어디 있느냐? 그자들하고 재미를 좀 보게 끌어내어라." ....[중략]..... 일이 이쯤 되자 그 두 사람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았다.......[중략].....동 틀 무렵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롯을 재촉하였다. "이 성에 벌이 내릴 때 함께 죽지 않으려거든, 네 아내와 시집가지 않은 두 딸을 데리고 어서 떠나거라." 그래도 롯이 망설이므로 그들은 보다못해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고 성 밖으로 끌어내었다. 야훼께서 롯을 그토록 불쌍히 여기셨던 것이다. 롯의 가족을 데리고 나온 그들은 "살려거든 어서 달아나거라.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 된다. 이 분지 안에는 아무데도 머물지 마라. 있는 힘을 다 내어 산으로 피해야 한다." 하고 재촉하였다. 그러나 롯은 그들에게 간청하였다.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저같이 하잘것없는 사람에게 이렇듯 큰 호의를 베풀어 목숨을 건져주시니 고마운 말씀 이루 다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재앙이 당장 눈앞에 있는데 저 산으로 도망치다가는 죽고 말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기 보이는 도시라면 가까워서 도망칠 수 있겠습니다. 아주 작은 도시입니다. 작은 도시지만 거기에라도 가서 목숨을 건지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그는 청을 들어주겠다고 하며 롯에게 말하였다. "저 도시는 멸하지 않을 터이니 빨리 그 곳으로 달아나거라. 네가 그 곳에 이르기까지 나는 손을 쓸 수가 없다." 그 도시를 소알이라고 한 데는 이런 연유가 있다.

    롯이 소알 땅을 밟자 해가 솟았다. 야훼께서 손수 하늘에서 유황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퍼부으시어 (원어: 야훼께서, 유황과 불을 하늘의 야훼로부터) 거기에 있는 도시들과 사람과 땅에 돋아난 푸성귀까지 모조리 태워버리셨다. --- 한국어 공동번역, {창세기} 18-19장


    필론은 우선 이 '셋'을 '천사들'로 보는 유대교의 통상적인 문자적 해석을 설명한 후, 이어서 이 '셋'을 비유적이고 상징적으로 풀이한다.



    이 알레고리적 해석에서 그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셋'을  (1)  '한 존재 / 야훼'의 (2) 세 형상/이미지였다고 풀이한다. 즉, 아브라함이 본 '셋'은 (1) 가운데 있던 살아있는 신의 본질적 형상과  (2) 그것에서 현현되는 두 그림자 형상이었다는 것이다. 마치 빛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두개의 그림자가 생긴 것과 같다는 것이다.

    필론의 설명을 읽어보자.

    XXIV. (119) This then is sufficient to say by way of a literal explanation of this account; we must now speak of that which may be given if the story be looked at as figurative and symbolical. The things which are expressed by the voice are the signs of those things which are conceived in the mind alone; when, therefore, the soul is shone upon by God as if at noonday, and when it is wholly and entirely filled with that light which is appreciable only by the intellect, and by being wholly surrounded with its brilliancy is free from all shade or darkness, it then perceives a threefold image of one subject, one image of the living God, and others of the other two, as if they were shadows irradiated by it. And some such thing as this happens to those who dwell in that light which is perceptible by the outward senses, for whether people are standing still or in motion, there is often a double shadow falling from them. 

    이 설명에 대한 문자적 설명은 충분하다. 그럼 이제 같은 이야기를 비유적이고 상징적으로 해석하 는 경우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목소리에 의해 표현되는 것은 마음 속에 생각되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그래서 신이 마치 대낮처럼 영혼에 빛을 비춘다면, 그 영혼은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지성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그 빛에 충만하게 되며, 그 빛에 완전히 둘러싸이게 되면 거기엔 어떤 그림자도 어떤 어둠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은 그때 한 존재의 세 형상을 인식하게 된다. 그 하나는 살아계신 신이며, 다른 둘은 신에게서 발산된 그림자 같은 존재이다. 이런 것 가운데 어떤 것들은 그 빛 가운데 존재하는 사람의 외적 감관에 의해서도 감지될 수 있는데, 이것은 사람이 정지해 있거나 혹은 움직일 때 종종 그 사람으로 인해 생기는 두 그림자가 생기는 것과 같다. / 번역: 최광민

    (120) Let not any one then fancy that the word shadow is applied to God with perfect propriety. It is merely a catachrestical abuse of the name, by way of bringing before our eyes a more vivid representation of the matter intended to be intimated.  

    (121) Since this is not the actual truth, but in order that one may when speaking keep as close to the truth as possible, the one in the middle is the Father of the universe, who in the sacred scriptures is called by his proper name, I am that I am; and the beings on each side are those most ancient powers which are always close to the living God, one of which is called his creative power, and the other his royal power. And the creative power is God, for it is by this that he made and arranged the universe; and the royal power is the Lord, for it is fitting that the Creator should lord it over and govern the creature. (122) Therefore, the middle person of the three, being attended by each of his powers as by body-guards, presents to the mind, which is endowed with the faculty of sight, a vision at one time of one being, and at another time of three; of one when the soul being completely purified, and having surmounted not only the multitudes of numbers, but also the number two, which is the neighbour of the unit, hastens onward to that idea which is devoid of all mixture, free from all combination, and by itself in need of nothing else whatever; and of three, when, not being as yet made perfect as to the important virtues, it is still seeking for initiation in those of less consequence, and is not able to attain to a comprehension of the living God by its own unassisted faculties without the aid of something else, but can only do so by judging of his deeds, whether as creator or as governor.

    꼭 사실이 아니더라도 가능한 사실에 가까운 설명을 해 본다면, 그 가운데 있는 존재는 성서가 적절하게도 '나는 나다 = 에헤예 아쉐르 에헤예 אֶֽהְיֶ֖ה אֲשֶׁ֣ר אֶֽהְיֶ֑ה'로 호칭하고 있는 바로 그 우주의 아버지이다. 그리고 그를 양 측에서 보좌하는 존재는 살아계신 신을 지극히 오래 전부터 보좌하고 있는 신의 능력들로서, 각각 '창조력'과 '신의 왕권 (=지배력)'이라 불리어 진다. 이 '창조력'은 '신 / 테오스 θεός = 엘로힘 אֱלֹהִים'인데, 그 이유는 바로 이 능력을 통해 신이 우주를 만들고 조정하였기 때문이다. '신의 왕권'은 '주님 / 퀴리오스 κύριος = 아도나이 אֲדֹנָי'인데, 그 이유는 이를 통해 창조주가 피조물 위에 군림하여 지배하기 때문이다. (122) 그래서, 두 능력들의 보좌를 받아 가운데 계신 존재는 시각을 통해서 정신에 비춰지게 될 때 경우에 따라 한 존재로도, 혹은 세 존재로도 보여지는 것이다. 온전히 순수한 영혼에게 신은 복수로서 표상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존재로 보여지며, 그냥 복수 뿐 아니라 아무것도 섞이지 않았고, 어떤 혼합도 없으며, 자충적인 이데아 (신 자신)를 향하고 두 존재들 (즉, '창조력'과 '지배력') 조차도 압도한다. 또한 이 존재는 셋으로도 보여지는데, 이 경우는 영혼이 아직 온전하지 않아 중요한 덕성들로 연마되어 있지않고 여전히 낮은 입문 단계에 있어서, 살아계신 신을 다른 도움없이 오직 신 자신 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탓에 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의 행위, 즉 창조자로서의 능력과 지배자로서의 능력을 통할 수 밖에 없는 경우에 그러한 것이다./ 번역: 최광민

    [중략]

    XXV. (124) There are three different classes of human dispositions, each of which has received as its portion one of the aforesaid visions. The best of them has received that vision which is in the centre, the sight of the truly living God. The one which is next best has received that which is on the right hand, the sight of the beneficent power which has the name of God. And the third has the sight of that which is on the left hand, the governing power, which is called lord. (125) Therefore, the best dispositions cultivate that being who exists of himself, without the aid of any one else, being themselves attracted by nothing else, by reason of all their entire attention being directed to the honour of that one being. But of the other dispositions, some derive their existence and owe their being recognized by the father to his beneficent power; and others, again, owe it to his governing power.

    (124) 인간에게는 앞서 말한 시각/관점들을 받아들이는 세 종류의 정신적 성향이 있다. 이 가운데 최선은 중앙의 존재 -즉, 진실로 살아계신 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차선은 그의 우측에 있는 존재 - 즉, 신의 이름 (=엘로힘)을 지니고 있는 신의 자애로운 권능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신의 좌측에 있는 신의 '지배력'이자 주님 (=아도나이)라 불리는 존재를 바라보는 것이다.   ....[중략].../ 번역: 최광민

    [중략]

    (131) But that which is seen is in reality a threefold appearance of one subject is plain, not only from the contemplation of the allegory, but also from that of the express words in which the allegory is couched. (132) For when the wise man entreats those persons who are in the guise of three travellers to come and lodge in his house, he speaks to them not as three persons, but as one, and says, "My lord, if I have found favour with thee, do not thou pass by thy Servant."{12}{#ge 18:3.} For the expressions, "my lord," and "with thee," and "do not pass by," and others of the same kind, are all such as are naturally addressed to a single individual, but not to many. And when those persons, having been entertained in his house, address their entertainer in an affectionate manner, it is again one of them who promises that he by himself will be present, and will bestow on him the seed of a child of his own, speaking in the following words: "I will return again and visit thee again, according to the time of life, and Sarah thy wife shall have a Son."{13}{#ge 18:10.} ---- Philo of Alexandria, {On Abraham}, 121f., 124

    ...[중략]....(132) 그 현자 (아브라함 / 필자 주)가 세 여행자로 위장하고 나타난 존재를 그의 집에 맞이하여 대접할 때, 아브라함은 이 셋을 셋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로서 대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말하길, "내 주여, 제가 당신을 위해 좋은 것을 마련해 드릴테니, 당신의 종을 지나치지 마소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의 주", "당신께", "지나치지 마소서 (단수동사 / 필자 주)"란 표현이나 이와 유사한 다른 표현들은 복수가 아닌 단수의 인물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후략]  ---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아브라함에 관하여} / 번역: 최광민



    필론의 '비유적' 해석은 이 장면에서 한 신을 구성하는 '신 자신'와 신의 두 '속성'들을 설명한다. 이 경우 신 자신 (~야훼) '나는 나 - 에헤예 아쉐르 에헤예'이고, 그 오른편에는 신의' 창조력'인 '엘로힘 / 테오스 / 신'이 있고, 그 좌측에는 신의 '지배력'인 '아도나이 / 퀴리오스 / 주님'이 있다. '예헤 아쉐르 에헤', '엘로힘', 그리고 '아도나이'가 한 단위로 {구약성서}에서 사용되는 그것은 다른 말 할 것 없이 '유대교의 신' 야훼다.

    {창세기}의 해당 일화에 등장하는 '세 존재'를 '세 천사'로 풀이한 '문자적' 해석이 아마도 당시 유대교의 일반적인 해석이었을것으로 판단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탈굼}의 경우에서와 같이, 이 셋을 '야훼의 멤라/말씀'과 '두 천사'로 해석하는 경우도 예루살렘의 주류 바리새파 사이에 있었다는 점도 기억해 두자.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신 / 테오스'이자, '주님 / 퀴리오스'이자, '성부의 우편에 앉은 자'로 표현되는 것을 기억한다면, 필론의 '비유적' 접근법에서 '실재적' 접근법으로 옮겨갈 때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될 지를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신 자신'를 보좌하는 그의 '창조력 / 엘로힘'과 '지배력 / 아도나이'는 신 자신의 '피조물'이 아니란 점이다. 필론의 관점에서 이 두 권능은 '신 자신'의 '속성/측면'', (온전하지는 않더라도) '신 자신'를 인식하는 한 '방식', 혹은 '신 자신'를 바라보는 한 '방향'에 해당하기 때문에, 사실은 '신 자신'와 분리되지 않으며, 동시에 영원하다.

    이것은 기독교의 '삼위일체'의 원형일까? 글쎄 꼭 그렇지는 않지만, 최소한 예수와 동시대에 신의 '복수성'과  '단일성'에 대한 논의가 유대교 내부에 이미 존재했으며 따라서 기독교가 이 개념을 굳이 지중해의 이교들로부터 '빌려'왔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는 점만 기억해 두자.

    각설하고,

    혹자는 필론의 '로고스'는 단지 신의 '지혜/말씀'을 의인화한 것이라고 말할 것이고, 혹자는 그가 BC 3세기에서 AD 1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축적되어온 유대교 지혜문학의 전통, 특별히 {탈굼}의 해석경향에 따라 신 자신와 그의 지혜/말씀을 구별했다고 평할 것이며, 혹자는 그가 정통적 유대교의 흐름을 벗어나 지나치게 그리스 철학으로 기울었다고 평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혹자는 기독교는 이처럼 헬라화된 유대교의 변형이며 필론의 공식을 점진적으로 차용한 것이라고 풀이할 것이며, 혹자는 플라톤 철학이나 스토아 철학이 말하는 로고스와는 현격히 다른 인격적 로고스의 개념이 기독교의 출현 직전에 이미 무르익었다는 점이야말로 신의 섭리라고 평할 것이다.

    사상사를 살핀다면 각각의 견해는 나름의 타당성을 갖고 있다. 사실상 바로 이 점은 기독교 초기 교부들에게 상당한 부담감을 주었던 듯 싶다. 그래서 12세기 서유럽 신학자들이 아랍의 아비체나와 아베로에스와 가졌던 관계처럼, AD 2-3세기의 기독교 교부들에게 있어서 필론 역시 모방의 대상이거나 혹은 극복의 대상이었다. 필론은 아마도 유대교를 신봉하던 유대인들 가운데서 {요한복음}에 가장 가깝게 접근한 사람이라고 보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유사성이 성립하는 이유는 필론과 요한이 모두 플라톤주의자였기 때문일까? 오히려 필론과 요한이 {탈굼}과 유대 지혜문학의 바탕에 함께 서 있었기 때문이 이 유사성이 발견되는 것은 아닐까?




    4. 기독교의 로고스(λόγος) : 그리스도

    앞서 말한대로 필론의 '신 자신'은 기독교의 '성부'에, 그리고 '로고스'는 '성자'에 거의 오버랩시킬 수 있는데, {탈굼}과 필론과 {신약성서} 모두 ‘로고스’ 혹 ‘아들’은 이 세계의 창조자로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신약성서}라는 텍스트에 충실한다면, 기독교에서의 예수의 지위는 결코 단순한 ‘위대한' 정신적 스승’일 수는 없다. 그것은 아래 이유 때문이다. 그리스어, 라틴어, 한국어로 해당 구절을 읽어보자.

    우선 바울이 콜로사이의 기독교도들에게 보낸 편지인 {골로새서}를 보면 당시 기독교도들의 신앙고백 혹은 찬미가의 단편을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이 편지가 바울의 진품으로 받아들이는 경우 이 편지가 작성된 시점은 AD 50년이다. 이 편지를 보다 후대에 작품으로 (즉, 바울의 진품이 아니라고) 보는 경우라고 해도 상한선을 AD 80년으로 잡고 있다.



    15 ὅς ἐστιν εἰκὼν τοῦ θεοῦ τοῦ ἀοράτου, πρωτότοκος πάσης κτίσεως, 16 ὅτι ἐν αὐτῶ ἐκτίσθη τὰ πάντα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καὶ ἐπὶ τῆς γῆς, τὰ ὁρατὰ καὶ τὰ ἀόρατα, εἴτε θρόνοι εἴτε κυριότητες εἴτε ἀρχαὶ εἴτε ἐξουσίαι· τὰ πάντα δι᾽ αὐτοῦ καὶ εἰς αὐτὸν ἔκτισται, 17 καὶ αὐτός ἐστιν πρὸ πάντων καὶ τὰ πάντα ἐν αὐτῶ συνέστηκεν.   --- 그리스어

    …qui est imago Dei invisibilis primogenitus omnis creaturae quia in ipso condita sunt universa in caelis et in terra visibilia et invisibilia sive throni sive dominationes sive principatus sive potestates omnia per ipsum et in ipso creata sunt et ipse est ante omnes et omnia in ipso constant…   --- 라틴어, {불가타}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만물이 그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의 안에서 존속합니다…” --- 한국어 {표준새번역}



    이번에는 {히브리서}를 보자. AD 3세기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교부 오리게네스가 언질한 바대로, 이 서신은 당시에도 바울의 작품으로 알려지긴 했으나 저자가 정확히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바르나바, 아폴로, 클레멘스 등이 그동안 이 서신의 저자로 제안되었다.

    오리게네스의 설명을 인용한 AD 4세기의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서 인용한다.

    1. To sum up briefly, he has given in the Hypotyposes abridged accounts of all canonical Scripture, not omitting the disputed books, — I refer to Jude and the other Catholic epistles, and Barnabas and the so-called Apocalypse of Peter. 2. He says that the Epistle to the Hebrews is the work of Paul, and that it was written to the Hebrews in the Hebrew language; but that Luke translated it carefully and published it for the Greeks, and hence the same style of expression is found in this epistle and in the Acts. 3. But he says that the words, Paul the Apostle, were probably not prefixed, because, in sending it to the Hebrews, who were prejudiced and suspicious of him, he wisely did not wish to repel them at the very beginning by giving his name. 4. Farther on he says: "But now, as the blessed presbyter said, since the Lord being the apostle of the Almighty, was sent to the Hebrews, Paul, as sent to the Gentiles, on account of his modesty did not subscribe himself an apostle of the Hebrews, through respect for the Lord, and because being a herald and apostle of the Gentiles he wrote to the Hebrews out of his superabundance." --- Eusebius {Church History} Book VI Ch 25 v14

    간략히 요약하기 위해 오리게네스는 모든 정경문서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Hypotyposes}에 기록했는데 논란이 되는 책인 {유다서}및 다른 '공동서신'들과 {바르나바서}와 이른바 {베드로 계시록}에 대한 설명도 배제하지 않았다. 그는 {히브리서}는 바울의 작품이며 원래 히브리어로 히브리인들에게 보내진 것인데, 루가/누가가 이를 주의깊게 그리스인들을 위해 그리스어로 번역했다고 한다. 그래서 동일한 문체가 이 서신과 {사도행전}에서 발견된다. 바울이 이 서신의 저자로 처음에 명시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이 편지가 바울에 대한 편견과 의혹을 가지고 있던 히브리인들에게 보내질때 이 서신의 머릿말에 바울의 이름이 등장하자마자 서신 자체를 거부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한 바울의 현명한 결정이었다는 것이 오리게네스의 설명이다. 더 나아가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말한다...(후략) --- 유세비우스, {교회사} 제 6권 25장 14절/ 번역: 최광민

    바울의 편지라면 AD 50년대, 로마의 클레멘스의 작품이라면 AD 100년 경으로 잡을 수 있다. 따라서 이 서신의 내용은 기독교의 출현 한 세대 혹은 멀리잡아 두 세대 안의 믿음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 ἐπ᾽ ἐσχάτου τῶν ἡμερῶν τούτων ἐλάλησεν ἡμῖν ἐν υἱῶ, ὃν ἔθηκεν κληρονόμον πάντων, δι᾽ οὖ καὶ ἐποίησεν τοὺς αἰῶνας· 3 ὃς ὢν ἀπαύγασμα τῆς δόξης καὶ χαρακτὴρ τῆς ὑποστάσεως αὐτοῦ, φέρων τε τὰ πάντα τῶ ῥήματι τῆς δυνάμεως αὐτοῦ, καθαρισμὸν τῶν ἁμαρτιῶν ποιησάμενος ἐκάθισεν ἐν δεξιᾷ τῆς μεγαλωσύνης ἐν ὑψηλοῖς, --- 그리스어

    “…novissime diebus istis locutus est nobis in Filio quem constituit heredem universorum per quem fecit et saecula qui cum sit splendor gloriae et figura substantiae eius portansque omnia verbo virtutis suae purgationem peccatorum faciens sedit ad dexteram Maiestatis in excelsis…… 
    --- 라틴어, {불가타}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그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하나님의 본바탕의 본보기이시요, 자기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 한국어, {표준새번역}



    그런데 필론이 로고스를 아버지보다 열등한 위치에 두었던 점이 많은 초기 기독교 교부들 사이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즉, AD 325년의 니케아 공회의 이전에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의 영향권 안에 있던 시리아와 카파도기아의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위계순서'를 강조해 성자를 성부에 종속시키는 경향을 보였고, 그리스와 라틴지방의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본질'의 동등성을 더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왜냐하면, 비록 성자는 성부로부터 낳아지지만, 그 신적본질에 있어서 아버지와 같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성자는 성부와 함께 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이며, 따라서 그의 본질이 이 세상에 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둘러싼 갈등은 AD 4세기 전반에 아리우스 논쟁이라는 형태로 불거지게 되는데, AD 325년 니케아 공회의의 주된 논점을 이룬 소위 '삼위일체 논쟁'에서 삼위일체론을 지지하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타나시우스와 이에 반대하는 역시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리우스는 '성부가 성자를 낳음' 이라는 관점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그들의 논점은 '낳음' 혹은 '현현'의 결과 나타나는 성부와 성자의 구분이 그 '본질적' 차이를 초래하는가, 혹은 성자는 성부보다 ‘본질적’으로 열등한 존재였는가 하는데 집중된 것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위계의 구분에도 불구하고 성부와 성자 간 본질의 '동등성'을 주장할 것이고, 아리우스는 본질적 '차이'를 주장하여 성자를 모든 피조물보다는 월등하나 성부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 위치시킬 것이며, 친-아리우스파인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본질상 '유사'를 주장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이 일반적으로 플라톤의 존재원리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주장은 상당한 문제를 내포한다. 플라톤의 존재유출설에서 위계의 순서는 곧 질적차이를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실제로는 아타나시우스가 아닌 아리우스가 오히려 플라톤(혹은 필론)에 더 가까운 견해를 취한 것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리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성자는 존재하지 않는 시점이 있었고, 어느 시점에 성부가 그를 모든 피조물에 앞서 낳았으며 (혹은 그를 만들었으며), 성자로 인해 이 세상이 조성되었다고 판단하였다.

    한편 아리우스의 설명이 곧 '제 2의 신'을 상정한다고 보았던 아타나시우스는, 신의 단일성을 방어하기 위해 말씀(성자)는 위격으로 보아서는 아버지에게서 낳아지지만 그 본질에서는 영원 가운데 성부와 함께 존재했다고 해설했다. 그 이유는 성자가 성부의 '영원한' 지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탈굼}의 해석경향을 따른다면, 야훼의 멤라는 야훼를 완벽하게 대리하는 존재이다.)




    5. 맺음말

    현대에 들어 흔히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 특별히 유대인 지도자들의 당혹감과 적대감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거나 혹은 정치적 이유라는 식으로 풀이하는 경향이 지배적인데, 나는 이런 해석은 다만 지엽적 부분들만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위에 기술한 것과 같이 AD 1세기 초반에 절정에 달했던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유대 지혜문학의 인식체계 (그리고 그의 헬라화된 변형인 필론의 로고스 철학)에 따라, AD 1세기에 이베리아 반도에서 메소포타미아까지 산재해있던 유대인 공동체들은 이미 ‘로고스/멤라/말씀’을 ‘아버지’와 다소 간 분리하고 있었고, 이를 실체로서 인식한 것이든 은유적으로 인식한 것이든 그 ‘말씀’에 ‘신의 아들’, ‘독생자’, ‘중재자’, ‘구원자(메시아)’ 같은 호칭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가 어느날 나타나 자신을 ‘신의 아들’라고 부르고, 나아가 그 동안 유대인들이 시나고그 집회에서 은유적으로 신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사용하던 히브리어 ‘아비누(abinu)” 대신 보다 친연성이 강조된 아람어 ‘압바/아빠(abba)’라고 불렀을때, 유대인 공동체가 받았을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바울의 {로마서} 8:15는 그래서 신을 이제 "압바/아빠 아버지, αββα ὁ πατήρ"라 부르게 된 것을 신의 아들 예수의 희생을 통해 양자가 된 기독교도들이 누리는 일종의 특권으로 묘사한다.

    14 ὅσοι γὰρ πνεύματι θεοῦ ἄγονται, οὖτοι υἱοὶ θεοῦ εἰσιν. 15 οὐ γὰρ ἐλάβετε πνεῦμα δουλείας πάλιν εἰς φόβον, ἀλλὰ ἐλάβετε πνεῦμα υἱοθεσίας, ἐν ᾧ κράζομεν, αββα ὁ πατήρ· 16 αὐτὸ τὸ πνεῦμα συμμαρτυρεῖ τῶ πνεύματι ἡμῶν ὅτι ἐσμὲν τέκνα θεοῦ. 17 εἰ δὲ τέκνα, καὶ κληρονόμοι· κληρονόμοι μὲν θεοῦ, συγκληρονόμοι δὲ χριστοῦ, εἴπερ συμπάσχομεν ἵνα καὶ συνδοξασθῶμεν. --- 그리스어

    14 Quicumque enim Spiritu Dei aguntur, ii sunt filii Dei. 15 Non enim accepistis spiritum servitutis iterum in timore, sed accepistis spiritum adoptionis filiorum, in quo clamamus: Abba (Pater). 16 Ipse enim Spiritus testimonium reddit spiritui nostro quod sumus filii Dei.17 Si autem filii, et hæredes: hæredes, quidem Dei, cohæredes autem Christi: si tamen compatimur ut et conglorificemur.--- 라틴어 불가타

    [14]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16]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또 우리의 마음속에도 그러한 확신이 있습니다. [17]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 --- 한국어 공동번역, {로마서} 8:14-17

    그러므로 유대인의 사고체계 속에 아무런 문맥도 없는 상태에서 예수가 혹은 기독교가 등장했던 것이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의 등장은 이미 예고된 맥락 가운데 있었고, 또한 충분히 준비된 과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문제는 그가 정말 ‘멤라’ 혹은 ‘로고스’인지를 받아들일 지, 혹은 거부할 것일 지에 대한 것뿐이었다. 즉, 이 사내 예수는 정말로 신의 ‘말씀(멤라)’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거나, 혹은 사기꾼/과대망상가일 수 밖에 없었다.

    바로 그 이유로, 예수가 등장했을 때 유대인들이 두 부류로 갈라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그 결과 한편의 사람들은 그에게 열광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를 못박으려 했다. 전자에게 예수는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바로 그 메시아, 즉 육화된 신의 ‘독생자’, ‘다바르’, ‘멤라’, ‘로고스’ 이지만, 후자에게 있어 예수는 최악의 신성모독자일 수 밖에 없으며, 그들이 가진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그 죄는 오직 죽음으로만 갚게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가 당대에 불러일으킨 논란에 대해 로마-유대, 기득권-피기득권이라는 ‘지배-피지배’의 정치적 구도를 적용하는 것은, 정황을 해석하는데 있어 양념은 될 수 있겠지만 본질이 될 수는 없다.

    판단은 각자의 몫.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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