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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장미의 이름} 속 앗소의 독백을 통해 본 14세기 독일 저지대 신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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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Kwangmin Choi, 1995-12-10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글들에 대해 저자의 동의없는 전문복제/배포 -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를 금하며, 인용 시 글의 URL 링크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장미의 이름} 속 앗소의 독백을 통해 본 14세기 독일 저지대 신비주의

순서
  1. 도입: 14세기 서유럽의 역사
  2. 중세보편논쟁
  3. {장미의 이름}과 {중세의 가을}
    1. Ubi-sunt: 삶에 대한 환멸
    2. Memento mori: 죽음에의 집착
    3. 신비주의
  4. 맺음말

§ 도입: 14세기 서유럽의 역사

14세기를 연 로마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 (Bonifacius VIII)는 교황권이 몰락하고 세속에 대한 교회의 권력이 왕권으로 수렴되어 가는 시대의 추세를 미쳐 파악하지 못한 채 성직자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정면도전하다가 결국 삼부회의 승인을 등에 업은 프랑스의 필립 4세 (Phillip IV)에 의해 강제로 폐위 당하는데, 이후 필립 4세는 클레멘스 5세 (Clemens V)를 교황에 임명하고 전략상의 이유로 교황청을 로마에서 아비뇽 (Avignon)으로 옮겨 이후 로마카톨릭 교회의 '바빌론 유수'라 불릴 72년간의 사건의 시발을 만든다.

결국 이 사건은 로마교황의 권위, 더 나아가 로마카톨릭 교회의 권위 실추로 이어지고, 심지어 교회 내부에서도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인 영국인 오캄의 윌리엄 (William of Occam)과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 (Marsilius of Padua)등은 신성로마제국 (Sanctum Romanum Imperium/ Holy Roman Empire) 황제 루드비히 (Ludwig/ Louis)의 세속에 대한 지배 권력을 이론적으로 옹호하고 교황권의 한계를 종교적 영역에 분명하게 국한하는 등, 교회는 현저하게 세속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 갔다.

이러던 차에 1337년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이 발발하여 장궁(longbow)을 도입한 영국이 프랑스를 연패시키는 가운데, 흑해 북안 카파에 위치한 제노바의 무역기지를 몽골의 기마부대가 공략하는 과정에서 전파된 페스트는 동서방의 무역루트를 타고 순식간에 서방으로 퍼져나가 급기야 1337-1350년 사이 불과 3년만에 전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빼앗아 갔다. 이 재해는 극도로 광범위하여 페스트를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징벌로 보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고, 이미 아비뇽의 무능한 교황청에서 등을 돌린 수많은 지식인은 내향적 개인적 신앙으로 전향하기 시작했다. 또한 군중들이 위안을 찾은 곳은 교회가 아니라 마술과 이단적 사상과 신비주의 그리고 그로테스크한 집착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그런 어수선함 가운데 100년 전쟁 내내 영국에 패배 당해 철저히 약탈당한 프랑스의 농민은 1358년 다분히 반-봉건적 성격의 농민반란인 쟈크리 (Jacquerie)의 난을 일으켰고, 또 계속되는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역시 수탈당하던 잉글랜드의 농민은 1381년 와트 타일러 (Wat Tyler)의 난을 일으켰다. 한편 137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는 로마로 교황청을 복귀시키고 통제력을 되찾으려 했으나 곧 사망하고, 우르바누스 6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프랑스 추기경단은 1378년 다시 아비뇽에 클레멘트 7세를 교황으로 앉혔다. 그리고 쌍방은 서로를 적그리스도이자 이단으로 선언하여 파문하였는데 이를 39년간의 '대분열시대' (1378-1417)라 한다. 이런 정치적 배경 이외에도, 1300년에 시작되어 장차 2세기동안 지속될 유럽의 이상 한파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다시 말해 이는 생산량의 감소와 그에 따른 봉건적 생산체제 및 장원기반 경제체제의 붕괴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대충 살펴본 서유럽의 14세기다. 결론적으로 14세기는 격동의 시대였다. 이는 달리 말하면 권력을 강화하려는 세속군주와 상공업을 통해 치부에 성공한 부르주아에겐 더없이 좋은 성공과 기회의 시대였다는 말도 되고, 따라서 이 시기가 이탈리아에서 단테가 '신곡'을 완성하고 페트라르카가 '아프리카'를 ,복카치오가 '데카메론'을, 그리고 멀리 영국에선 위클리프가 영어성경의 번역에 착수하고 쵸서가 '켄터베리 이야기'를 완성한, 실로 르네상스의 뿌리가 내려지는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권력의 중앙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있어서 전쟁, 미신, 기아, 페스트가 지배하던 14세기는 그야말로 생지옥으로 인식되어졌을 것이고, 그것은 나중에 보여질 냉소, 공포,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비주의로 대표되는 초월의 형태로 나타났다.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Harcourt Brace Jovanovich Publishing

14세기 서유럽인의 세계관을 추적하기 위한 도구로, 당시를 배경으로 하여 씌여진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 The Name of The Rose, Harcourt Brace Jovanovich Publishing]에 등장하는 멜크의 수도사 앗소(Adso of Melk)의 사상편력을 검토해 보겠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등장인물 중 굳이 앗소를 검토하는 이유는, 그가 14세기의 전반부에서 후반부를 걸쳐 산 유일한 등장인물로 설정되어 있기도 하려니와, 소설을 구성하는 주요축인 바스커빌의 윌리엄(William of Baskerville)이나 그의 정적인 베르나르 드 귀(Bernard de Guy)와는 달리 지배세력의 권력투쟁의 중심에서 다소 소외된 인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차차 보이겠으나, 이 소설에서 앗소의 세계관과 신앙관을 추측케하는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단은, 그 자체로서 14세기 후반의 모든 세계관을 그대로 압축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비록 앗소가 실존인물은 아니라 하더라도, 앗소를(또는 앗소가 상정하고 있는 인물) 삶에 염증을 느끼고 권력에서 소외된(또는 자의에 따라 은거하는) 14세기 서유럽인의 전형이라 부르는데 큰 무리는 없다고 본다.




§ 중세보편논쟁

인간의 개념 속에 등장하는 보편자(universalis)를 실재적인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실재론), 혹은 인간의 사고(및 단어)의 산물인지(유명론)에 대한 보편논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시작한다고도 할 수 있지만, 본격적으로 서구철학의 관심으로 등장한 것은 고대 말/중세 초기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에서부터였다.

보에티우스는 게르만족이 로마를 접수한 후 사라져가는 고대문명의 잔영을 남길 백과사전을 남기기에 급급하였기 때문에 그 자신의 분석보다는 자신이 확보할 수 있었던 문헌자료를 통한 단편적인 지식만을 요약해 남겨두었고, 이때문에 보에티우스 당대보다 더 고대문헌적 자료가 부족했던 중세 전/중반기를 거치면서 소모적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논쟁은 고대 그리스의 1차적 자료가 이슬람을 통해 역수입되던 13-14세기에 오히려 더 강렬해졌다. 그것은 서구 철학계가 그리스의 잔영에 머물지 않고 독자적인 철학 체계로 나아갈 능력을 충분히 배양해냈기 때문이었다.

서양의 중세 보편논쟁의 의미는 단지 소모적이었다는 말로만 일축하기에는 그 의미가 너무 크다. 중세 보편논쟁은 철학의 이름을 빌린 종교적, 정치적 기획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즉, 중세의 정치적 갈등구도는 종종 보편논쟁이란 가면을 쓰고 진행되어졌다. 보편논쟁은 신과 인간을 재정의하는 도구가 되었고, 그 결과 종교가 사회의 모든 영역을 관통하던 서유럽 사회에 가져다 준 파급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는 독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책을 탐정소설의 하나로 읽는다. 에코 본인의 의도했던 것 중 하나가 추리소설기법이었으므로 이런 독법이 틀린 것은 아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청 사이에 벌어지는 역사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로 읽는다. 이것도 에코의 의도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는 묘미는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긴장관계가 도대체 어디에서 발생하는가를 알면 더욱 증폭된다. 그리고 그 배후에 중세 보편논쟁이 있다. 특별히 이 책의 제목 (stat ROSA (= 장미) pristina NOMINE (= 이름), nomine nuda tenemus), 주요 갈등관계를 형성하는 두 축(신성로마제국(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 루드비히 황제) 대 교황청(요한21세)), 그리고 바스커빌의 윌리엄으로 위장되어 그려지고 있는 중세 유명론의 대표자 오컴의 윌리엄등만 고려해보아도 그렇다.

존재론과 중세보편논쟁에 대한 가장 좋은 책은 에띠엔 질송의 {중세철학사}이지만, 이 책은 읽기가 매우 고약하고 각 철학장들에 대한 구체적 흥미가 없다면 매우 지루한 백과사전처럼 보일 수도 있다. 게다가 번역이 종종 잘못되어 있다. 만약 보편논쟁 그 자체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싶다면 뉴욕 포덤 대학의 중세철학 교수인 귤라 클리마 (Gyula Kilima) 교수의 자료를 읽어보기 바란다. 이 사람은 인터넷으로 검색 가능한 스탠포드 철학 백과사전에 보편논쟁에 대한 항목의 저자이기도 하다. 포덤 (Fordham) 대학의 그의 싸이트는 이 주제 이외에 중세철학에 대한 심도있는 논문들을 제공하기도 한다.

귤라 클리마 교수 :
http://www.fordham.edu/gsas/phil/klima/
스탠포드의 보편개념 항목 :
http://plato.stanford.edu/entries/universals-medieval/
포덤 대학의 중세자료 (Internet Medieval Soursebook)
http://www.fordham.edu/halsall/sbook.html

그리고 요한 후이징하의 {중세의 가을}을 읽으면,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중세의 가을}의 표절처럼 느껴지기 시작할 것이다.




§ {장미의 이름}과 {중세의 가을}

앗소의 독백은 주로 소설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서두와 결미에 나타나는데, 이 글에서는 에필로그에서도 가장 마지막 결미부분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앗소는 노인이 된 14세기말 내지는 15세기초의 시점에서, 14세기 초반에 있었던 한 사건을 추억하는 형태로 글을 적어 나간다. 만약 그가 1390년경에 이 글을 쓴 것으로 (소설 속에서) 설정되었다다면, 그는 교회의 '바빌론 유수'뿐 아니라 교황이 난립한 '대분열'까지 목격한 것이 된다. 이때를 저술 시점으로 보는 것은 타당한 이유가 있다. 즉, 앗소는 프롤로그에서 교황 요한 22세를 저주하고서, 이후 아무도 요한이란 이름을 교황의 칭호로 참칭하지 않았음을 감사해하는데, 사실 1409년에는 피사의 종교회의 결과 요한 23세가 알렉산드로 5세를 계승하여 유럽에는 3명의 교황이 동시에 등장하는 대분열사상 최악의 사건이 발생으므로, 앗소는 최대로 잡아도 1409년 이전에 자신의 회고록을 집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뿐 아니라 그는 흑사병, 100년 전쟁, 그리고 수 차례에 걸친 농민반란을 목격했으리라.

따라서 앗소가 세상을 바라보는 형식은 '세계의 쇠락'을 한탄하는 종말론적 입장을 취한다는 면에서, 세계는 진보해 갈 것으로 믿었던 영국 경험주의의 시조인 프란체스코파 수도사 로저 베이컨(Roger Bacon)의 친구이자 제자로 묘사된 앗소의 스승 윌리엄 수도사보다 훨씬 전통적인 중세적 관념에 선다. 앗소는 말하길 현대인(중세 말의 시점에서)은 "고대인에 비하면 애들과 난장이에 불과하며, 청년들은 더 이상 배우려하지 않아 학문은 쇠퇴하고, 눈먼 자가 세계를 인도"한다고 한탄하며, 성서와 고전의 고사를 반어적으로 패러디하여 세계의 몰락을 한탄하고 있다.

앗소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14세기 유럽인이 가졌던 종교적 관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세는 종교의 시대인 만큼 종교적 이미지가 극도를 발달되는 양태를 보였다. 물론 여기에는 무지한 대중을 교화하기 위한 교회의 의도적 개입 , 즉 이미지의 창출과 유포 및 기존의 민간의 이미지를 교회 내로 수용, 공인하려는 과정이 수반되었다. 그런 종교적 이미지의 형상화가 무지한 일반 군중에게 미친 영향력이란 막대한 것을 넘어서 때때로 마술적 효과를 내기까지 했음은 성물 숭배, 성자 숭배 등에 나타난 군중의 열광적 숭배를 통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교회는 이들 종교적 상징을 문맹인 대중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주입시키기 위해 주로 건축과 미술의 형태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요한 후이징가, {중세의 가을}

종교적 상징에 '죽음'에 대한 것이 빠질 수가 없고, 사실 교회는 전 중세시대를 통하여 죽음과 지옥이란 이미지를 교묘히 이용하여 막강한 지배력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쇠퇴기의 중세만큼 죽음이란 모티브에 큰 감동과 강조를 부여한 시기는 달리 없었다” 며 [중세의 가을]에서 중세사가 요한 후이징가(Johan Huizinga)가 말했듯이 '죽음'은 14세기의 대중을 사로잡은 가장 막강한 모티브였다. 그것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전쟁과 반란, 흑사병과 기타 전염병 그리고 영혼을 의탁할 만한 신뢰를 잃은 당시 교회에 대한 대중의 회의 등을 고려할때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이다. 호이징가는 [중세의 가을]에서 중세말에 전 유럽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죽음'에 대한 태도를 3가지 양태를 들고 있다.




§§ Ubi-sunt : 삶에 대한 환멸

그 하나는 "한때 명성을 날리던 그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는가?"라는 외침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런 태도는 흔히 삶의 무상함에 대한 인식과 환멸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런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던 수도사들의 지배적인 입장을 반영하는데, 즉 그들은 죽음에 대한 깊은 명상으로부터 인생의 무상과 덧없음이란 관념을 유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의 기원을 굳이 기독교적인 사고로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런 사고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고대 英詩에서도 나타나는 이른 바 Ubi-sunt (Ubi sunt qui ante nos fuerunt? / 우리 앞에 간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느냐?) 라는 애가(哀歌)형식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것은 중세 전시기에 걸쳐서 끊임없이 강조되고, 중세 말에 이르러선 중세인의 사고를 나타내는 하나의 대표적 세계관이 되었다. 바로 이런 인식 태도는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단의 첫 문장으로 부터 유추된다.

즉, 앗소는 "Est ubi gloria nunc Babyloniae? (바빌론의 영광은 어디에 있는가?)" 란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의 장중한 결미를 시작하는데 이는 전형적인 Ubi-sunt형식을 취한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은 앗소의 말이 아니라 (또는 에코의 창작이 아니라), 그가 살고있는 14세기의 후반보다 200년 이상 앞선 시대에 클뤼니(Cluny) 수도원의 수사였던 베르나르 드 몰레 (Bernardus Morlanensis / Bernardo de Morlay / Bernard of Morlaix)가 1140년에 쓴 시에서 발췌된 것이다.

다음은 그 시의 라틴어 전문이다.

De contemptu mundi
세상을 경멸하며

...
Est ubi gloria nunc Babylonia? Nunc ubi dirus
Nabugodonosor, et Darii vigor, illeque Cyrus?
Qualiter orbita viribus incita praeterierunt,
Fama relinquitur, illaque fugitur, hi putruerunt.
Nunc ubi curia, pompaque Julia? Caesar abisti!
Te truculentior, orbe potentior ipse fuisti.

바빌론아, 너의 영광은 어디에 있느냐?
그 무서운 네부카드네자르, 용맹한 다리우스 그리고 명성높던 키루스는?
땅이 큰 힘으로 움직여 그들이 사라져간 것처럼
이름은 남았으나 그 육체는 썩어갔구나.
호사스럽던 율리아여, 그대의 궁전은 어디있는가?
그대 온 세상보다도 거칠고 위대하던 카이사르여!


Nunc ubi Marius atque Fabricius inscius auri?
Mors ubi nobilis et memorabilis actio Pauli?
Diva philippica vox ubi coelica nunc Ciceronis?
Pax ubi civibus atque rebellibus ira Catonis?
Nunc ubi Regulus? Aut ubi Romulus, aut ubi Remus?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마리우스와 물욕을 모르던 피브리키우스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디로 갔는가, 파울루스의 고귀한 행실과 기념할 만한 행적은?
마왕 필리피카의 불길한 소리는 어디에? 키케로의 그 천상의 소리는?
시민을 위한 평화는 어디로? 반역자에 대한 카토의 분노는?
레글루스는 지금 어디에 있으며 로물루스는, 또 레무스는 어디로 갔느냐.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어제의 장미는 이름 뿐, 단지 쇠락한 이름 만이 남았구나.

Bernard de Molay, Bernardus Morlanensis
클뤼니 수도사, 베르나르 드 몰레, 1140년

이 시는 고대 오리엔트의 제국 바빌론, 페르시아를 비롯한 로마의 번영과 여러 위인들의 업적 역시 허망한 것임을 강조하면서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한다. 이 시의 결미는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라는 탄식으로 마치는데, 이것은 허망하게 그 '이름'만이 남은 '장미'란 실재론적 존재를 언급함으로써 중세를 지배한 실재론적 세계관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도덕적으론 명예와 명성의 무상함을 꼬집은 것이다. 또한 앗소는 동 시대인 프랑스 시인 비용의 시 (호이징가, [중세의 가을]) [옛 귀부인들에 대한 발라드 (Ballade des Dames du temps jadis)]의 후렴구를 인용해 "어제 내린 눈은 어디에 있는가?(Where is the snows of yesterday?)"라고도 묻는다.

죽음에 대한 이런 첫번째 태도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묵상보다는 세계의 '무상함'과 '몰락'이란 관점이 더 강조되어 있으므로, 나중에 언급될 '죽음에 대한 공포'를 담고 있기보다는 삶에 대한 일종의 수도사다운 관조와 멜랑콜리를 표현한 것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 Memento mori : 죽음에의 집착

다음은 주로 귀족들에 의해 묘사된 죽음에 대한 태도를 보고자 한다. 그것은 주로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이 해체되는 광경을 현실적으로 묘사하는 모티브로서, 이른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라 불리는 형태이다.(호이징가, [중세의 가을) 이것은 앞서 말한 수도사들의 종교적 명상에 의해 얻어진 차분한 멜랑콜리보다는 좀더 세속적인 탄식과 시체의 부패 같은 실제적인 광경을 묘사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좀더 강렬한 비애를 자아낸다. 이런 모티브에는 현세에 대한 강한 집착이 (가령, 아름다움이나 부를 잃는 것에 대한 탄식)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앗소는 이 테마를 소설의 초반부에서 멜크 수도원에 피신하고 있는 프렌체스코회 소형제파의 수장 우베르티노와의 대화 속에 은근히 인용한다. 이 대화 속에서 우베르티노는 견습수도사 앗소에게 여자의 사악함, 죽음과 지옥의 형벌을 이야기 하고, 앗소는 성당 벽에 새겨진 조상 속에서 이 모티브를 발견하고 공포에 떤다.


Holbein d. J.; Danse Macabre. XXXV. The New-Married Lady (source: Wikimedia Commons)

'메멘토 모리'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또 하나의 모티브는 "죽음의 무도 la danse de mort" 내지는 어원이 불확실한 "la danse macabré"이다. 호이징가에 따르면 '마카브레'라는 단어는 14세기에 등장하여 1376년 시인 쟝 르 페브르(Jean le Fevre)에 의해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위에 제시한 2개의 모티브보다 훨씬 민중적이며 따라서 그들의 죽음에 대한 미신적 공포심을 반영한 테마라 할 수 있다. "죽음"이란 개념은 프랑스어로 "la Mort"라 불리워지면서 의인화되고 건축의 조각이나 그림에 등장하였는데, 중세 말기에 이르면 홀바인의 작품에 나타나는 것 같이 '죽음'이란 모티브가 주로 낫이나 칼을 든 수도사의 음침한 승복을 입은 해골의 형태를 가지고 황소나 암소를 타고 가는 악마적인 모습이나, 흑사병으로 죽은 시체가 가득 쌓인 짐수레를 타고가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리고 때때로 시체 위에서 신나게 춤을 추는 해골의 그림으로도 남아있다. 이런 '죽음의 무도'에 대한 묘사는 말할 나위없이 당시 유행하던 흑사병과 전쟁등에 대한 민중의 극심한 공포를 잘 반영하는 것이다. 앗소는 "세상은 마카브레를 추고 있다. / The earth is dancing Macabré" 라고 말함으로서, 호이징가가 지적한 14세기의 대표적인 죽음의 이미지를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앗소처럼 당대의 많은 지식인 계층이 이 혼란스런 시대에 적지 않은 사상적 혼란과 동요를 일으켰음을 쉽게 추리할 수 있다. 대다수의 의식을 가진 자들은, 앗소가 프롤로그에서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날이 오면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 볼 것이며,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이란 聖 바울의 말을 인용해 말하고자 한 것 같이, 쇠퇴하는 중세적 사고가 창출해낸 수많은 이미지의 범람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을 가졌으리라 본다. 즉 호이징하의 단언처럼 "중세를 지탱한 거대한 상징체계는 제위치를 벗어나있는 이미지의 범람이 계속되는 한, 한낱 무질서한 환각에 불과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세말에 이미지가 과도하게 양산되어 홍수를 이룬 까닭은, 주로 죄와 죽음과 지옥에 대한 공포를 고취시키기 위한(그리하여 대중에 대한 교권의 우세를 유지하기 위해) 이미지 창출에 교회와 대중이 과도한 상상력을 불어넣은 데 그 이유가 있다. 이런 정신적 혼란의 와중에서 현세에 대한 민중의 불안과 불만은 때때로 종말론적 사상에 영향을 받은 과격한 무정부주의적 천년왕국운동으로 폭발하기도 하고 (노만근, [천년왕국 운동사]), 또는 미신과 마술에의 열광으로 귀결되기도 했다.




§§ 신비주의

그러나 이런 시대말적인 회의, 멜랑콜리, 탄식, 공포에 대해 약간은 회의적이나 경건한 수도사 앗소가 취한 태도는 그 어느것도 아니다. 앗소를 포함한 중세인의 일단은 다른 해결의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신뢰를 상실한 교회의 중재대신 神과 천상의 기쁨을 추구하기 위해 기존의 상징체계들과 이미지들을 거부하는 길이며, "이미지의 도움없이 신성에 이르려는 감동적인 정신의 투쟁" (호이징가, [중세의 가을])이다. 다시말해 앗소는 신비주의에 귀의한다.

앗소는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침묵하는 것 뿐(All I can do is now is be silent)"라고 말하면서 이어 독일 신비주의자들의 사상을 마지막 한 단락 속에 모두 쏟아 넣는다. 다음은 영역본 [장미의 이름]의 대결미에서 발췌한 글로, 이 문단은 그야말로 14세기 독일 신비주의의 완결편이다.

"Est ubi gloria nunc Bsbyloniae? Where are the snows of yesterday? The earth is dancing the dance of Macabre; at times it seems to me that the Danube is crowded with ships loaded with fools going toward a dark place.

All I can do now is be silent. O quam salubre, quam incundum et sauve est sedere in solitudine et tacere et loqui cum Deo! Soon I shall be joined with my beginning, and I no longer believe that it is the God of glory of whom the abbots of my order spoke to me, or of joy, as the minorites believed in those days, perhaps not even of piety. Gott ist ein lauter Nichts, ihn rührt kein Nun noch Hier.

I shall soon enter this broad desert, perfectly level and boundless, where the truly pious heart succumbs in bliss. I shall sink into the divine shadow, in a dumb silence and an ineffable union, and in this sinking all equality and all inequality shall be lost, and in that abyss my spirit will lose itself, and will not know the equal or the inequal, or anything else: and all differences will be forgotten. I shall be in the simple foundation, in the silent desert where diversity is never seen, in the privacy where no one finds himself in his proper place. I shall fall into the silent and uninhabitated divinity where there is no work and no image.

It is cold in the scriptorium, my thumb aches. I leave this manuscript, I do not know for whom; I no longer know what it is about;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앗소의 말 "O quam salubre, quam incundum et suave est sedere in solitudine et tacere et loqui cum Deo / 오 고독속에 앉아 침묵한채 신과 이야기하는 것은 얼마나 유익하며, 쾌적하며 또 달콤한가"은 사실 독일 신비주의 명상가이자 타울러가 설립한 '공동생활 형제단'의 수도사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á Kempis, 1380-1471)가 그의 명상집인 [그리스도를 본받아 / Imitatio Christi)]에 기록한 잠언이다.

앗소는 또 "Gott ist ein lauter Nichts, ihn rührt kein Nun noch Hier / 신은 전적으로 無로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라는 선언을 남긴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은 神性을 無(Nicht-sein)으로 정의한 독일 도미니코회 수도사이자 파리대학 교수였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dt, 1260-1365)의 신과의 '신비한 합일'(die unio mystica) 사상을 계승한 신비주의자 앙겔루스 실레지우스(Angelus Silesius)가 한 말이며, 이 말 속에는 많은 독일 신비주의자들이 추구했던 바, 실재론적 상징체계를 과감히 제거하고 그런 이미지 없이 신성에 도달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그래서 이들 신비주의자들은 神性을 '영광'이니 '기쁨' 이니하는 기존의 종교적 상징 대신에 그 반대의 개념 즉 침묵, 공허, 암흑 등 부정의 언어로 神性을 정의하고 궁극적으로는 순수한 부정만으로 신성을 정의하기에 이르렀다. 에필로그에서 앗소가 왜 베네딕트 수도회가 말하는 '신의 영광'과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말하는 '신의 기쁨'이란 관념에 그토록 회의적인가 여기에서 드러난다.

앗소는 오히려 자신의 죽음을 일컬어 "광막한 사막으로 간다 / I shall soon enter this broad desert"고 표현함으로써, "오, 신이여. 당신은 한없이 넓고 광막하여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사막과도 같습니다.”라고 말하곤 했던 드니 르 샤르트르(Denis le Chartreux)가 한 말을 상기시킨다. 이어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명제가 앗소의 고백으로 다시 등장하는데, 앗소와 에크하르트는 모두 신성을 "형식도 형태도 없는 말없고 잔혹한 심연"으로 비유하면서 "영혼이 누릴 완전한 지복은 행위도 이미지도 없는 사막같은 신성속에 뿌리내릴때" 있으며, 그래서 영혼은 "그런 神性속에서 넋을 잃고 매몰 되어야한다"고 강조했다. 앗소의(그리고 에크하르트의) 합일사상은 에크하르트의 제자 요하네스 타울러(Johannes Tauler, 1290-1391)의 그것과도 일치한다. 그는 "순화되고 정화된 영혼는 신성한 암흑, 고요한 침묵과 알 수도 또 형용할 수도 없는 합일 속에 침몰한다"고 말하면서 이 심연 속에서는 "모든 동질성과 이질성이 사라지고 영혼은 이 심연 속에서 넋을 잃는다. 그리하며 영혼은 神도 자신도 유사성도 차이점도 아무 것도 의식하지 못한다."고 말했고, 앗소는 그 말을 그의 독백 속에 그대로 인용한다.

다시 말해 앗소는 신비주의에 귀의함으로써 절망적인 14세기를 신과의 합일과 초월로써 극복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플랑드르 지방을 중심으로 한 중-북부 유럽에서의 신비주의는 냉소적인 환멸, 죽음에 대한 끝없는 공포와 더불어 권력의 주변부에 있던 소외된 사람들의 세계관으로 차차 자리잡고 나가면서 기존의 사회체제에 대한 막강한 대체세력으로 성장해 나가고, 결국 100여년 후의 종교개혁을 성공시킨 사상적 기반이 된다.




§ 맺음말

지금까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 속의 화자인 앗소의 독백을 중심으로 14세기 유럽인의 정신적 혼란과 그들의 반응 양상을 추리해 보았다. 전술했다시피 14세기의 서유럽 사회는 극히 불안한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100년전쟁과 연이은 농민반란이, 경제적으로는 곳곳에서 중세경제의 기반이었던 장원체제의 몰락이, 종교적으로는 200여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의 실패와 내부분열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또 교회는 크게 분열하여 심지어 3인의 교황이 동시에 등장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하에서 중세사회의 정신적인 결속을 유지시켜온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상적인 분열과 모순이 가시화되기 시작하는데, 그 가운데는 성직자의 비리와 모순을 공격하여 대중의 지지를 획득한 다양한 형태의 이단운동과 스콜라 철학 내의 유명론 (nominalism)의 전면적 대두, 미신적 신앙 행위, 그리고 부질없는 신학적 논쟁 등이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앗소의 독백을 통하여 본 바와 같이 중세인이 느꼈을 만한 정신적 동요는 실로 엄청났다. 때는 아직 르네상스가 이르기 직전이라 여전히 미신과 무지가 일반 대중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교회의 타락과 전염병, 특히 14세기를 강타한 흑사병은 민중의 마음속에 죽음에 대한 미신적 공포를 불러 일으키고, 아울러 신뢰할 만한 교회 지도력의 부재는 그런 경향을 더욱 부채질 했기 때문이다. 지도적인 중심을 상실한 사회체계는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현실에서의 도피 경향을 부추키는 주된 요소가 되었으며, 그 결과 소외계층 가운데 삶에 대한 환멸이나, 공포를 벗어나기 위한 광적 신앙과 미신에의 집착을 유행시키고, 또는 특별히 전통적으로 종교적 감성이 강한 플랑드르와 독일 지방에서는 이들 사이에 두드러진 신비주의적 공감대를 빠르게 확산시켰다.

위에서 언급한 14세기 대중의 현실에 대한 4개의 태도중에서, 그나마 가장 건설적이고 다음 세기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친 경향은 오직 신비주의에서만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신비주의 체계가 비록 때때로 지나친 개인적 감성과 주관성에 우왕좌왕한 적도 있지만, 대체로 윤리적이고 현실 참여적인 태도를 견지했고, 또 신과 개인 사이에 성직자 계급과 마리아를 비롯한 성자들의 매개를 설정한 기존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과는 달리 神과 信者 사이의 직접적 신비한 합일을 강조함으로써, 신과 인간 사이의 매개자를 배제하고 또 거기에 수반되는 수직적인 종속적 지배구조를 정당화한 중세의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뒤바꿀 이념적 기반을 제공한 때문이다. 따라서 14세기 독일 신비주의자들의 이런 개인적이고 내면적 신앙과 "구원을 원하는 자여, 신과 너 사이에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라.” 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의 선언까지는 불과 1세기 남짓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실제로 루터 자신이 타울러에게 깊은 정신적 교화를 받고 타울러가 저술한 것으로 추정한 [독일신학 / Theologia Germanica)] 을 편찬하기도 했다.

또 신비주의는 기존의 교회가 유지하고 있었던 지나칠 정도의 과다한 상징체계를 의도적으로 부정하고 윤리주의, 선행, 노동의 가치를 끊임없이 강조함으로써 더 나아가 종교개혁뿐 아니라 그에 수반된 사회개혁의 선두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가령, 에크하르트 그 자신의 사상은 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르침에 동조한 평신도들은 저지대 독일의 각처에서 형제단, 자매단이라 불리는 소규모의 종교적이면서도 경제적인 재속 수도 공동체를 형성했고, 이런 형태의 운동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당시까지 유지되어 종교개혁의 전위조직과도 같은 기능을 수행했던 것이다.

14세기 신비주의 사상의 특징은 바로 여기에 있다. 통상적인 신비주의는 속세에서의 초탈을 통해 구원을 약속하려는 시도지만, 14세기 기독교 신비주의는 원시 기독교로의 복귀라는 사상과 개개인의 신앙수준에 그치지 않고 실천적인 행동양식을 덧붙이기를 잊지 않았기 때문에, 신비주의 그 자체는 시대를 선도할 이념으로서는 미약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시대를 사로잡은 강력한 이념으로 각인될 수 있었다.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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