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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tist. Husband. Daddy. --- TOLLE. 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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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통석의 염 痛惜之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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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Kwangmin Choi, 2004-01-23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제목

통석의 염 / 痛惜之念

순서
  1. 통석의 염
  2. {여오질서}?
  3. {일본서기}?
  4. {삼국사기}?
  5. 맺음말



1938년, 육군열병식에서 사열받는 昭和天皇 히로히토 (source: wikimedia commons, 朝日新聞社「週刊20世紀 皇室の100年」)



1. 통석의 염

1990년 일본천황 아키히토가 노태우 대통령에게 했었던 "소위" 과거사 사죄발언인 '통석의 염(痛惜之念)'.

일본의 학습원 학자들이 직접 고전에서 골라준 단어로 알려져 있다. 원래 왕조시절에는 이런 류의 외교적 단어를 선정할때 고전에 밝은 자들이 고사에서 빌려와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일본에서도 외교나 의례에 관한 용어를 만들 때는 일본 학습원 대학 학자들을 동원해서까지 주의를 기울인다고 한다. (고전에서 말 따오는 것은 한국으로 치면 김종필 류의 정치인들이 그 정신을 이었다고나 할까?) 그럼 이 단어는 고전 어디에 나온 단어일까?

혹자는 공자가 사랑하던 제자 안회가 죽자 식음을 전폐하다는 '통석비탄(痛惜悲嘆)'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쓰고 싶었다면 '통석비탄' 대신 굳이 '통석'의 '염'이라고 쪼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청나라 강희제가 펴낸 {강희자전}을 능가하는 시대의 역작으로 평가받는 일본의 한문사전 {대한화사전, 大漢和辭典}에는 이런 설명이 붙어있다.

표제자 ‘痛’(문자번호 22195) : ‘痛惜’(어휘번호 32) : ‘甚だ. しくをしむ(몹시 애석해하다).

그리고 그 각주에는 이런 설명이 부가되어 있다.

  • {신당서}에서 인용된 [新書,數寧]事勢可 爲痛惜者
  • {후당서}에서 인용된 : [後漢書,劉虞傳]百姓流レ舊、莫レ不痛惜
  • 위나라 문제(文帝) 조비(曹丕)의 말에서 인용된 [魏文帝、與五質 書]美志不遂、良可痛惜

그렇다면 아무래도 위나라 문제의 말에 등장하는 저 '통석'이 가장 혐의가 짙다. 




2. {여오질서}?

조비는 위 무제(武帝) 조조(曹操)의 세째아들이었고 그 동생 조식을 죽이려고 했을때 조식이 읊었다는 {칠보시}의 고사로 잘 기억되고 있다.

七步詩 - 曹植 (서기 192 ~ 232) -

煮豆燃豆萁 / 豆在釜中泣
本是同根生 / 相煎何太急

콩을 콩대로 삶으니, / 솥 안에 있는 콩 눈물 흘리네.
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는데 / 어찌 그리도 세차게 삶아대는가.

동한 헌제의 연호는 ‘건안’으로 서기 196년에서 219년 사이다. 이 연호를 따라 한말/위초의 일곱 명의 시인을 '건안칠자(建安七子)'라 칭하는데, 공융(孔融), 진림(陳琳), 왕찬(王粲), 서간(徐幹), 완우(阮瑀), 응양(應瑒), 유정(劉禎)이 그들이다.  이 시대는 또한 위-촉-오가 중원을 할거한 '삼국지' 속의 시기였다. 건안칠자 가운에 있는 응창의 자가 바로 서기 217년에 죽은 '덕련'이다.

위에서 지적한 '통석'이 등장하는 것은 양(梁)나라의 소명태자(昭明太子)가 엮은 시문집인 {文選}으로, 이 속에 조비의 글인 {여오질서, 與吳質書}란 서간문이 있다.

二月三日,丕白:

歲月易得,別來行復四年。三年不見,東山猶歎其遠;況乃過之?思何可支!雖書疏往返,未足解其勞結。

昔年疾疫,親故多罹其災。徐、陳、應、劉,一時俱逝,痛可言邪?昔日遊處,行則連輿,止則接席;何曾須臾相失。每觴酌流行,絲竹並奏,酒酣耳熱,仰而賦詩。當此之時,忽然不自知樂也。謂百年己分,可長共相保;何圖數年之間,零落略盡,言之傷心!頃撰其遺文,都為一集。觀其姓名,已為鬼錄。追思昔遊,猶在心目。而此諸子,化為糞壤,可復道哉!

觀古今文人,類不護細行,鮮能以名節自立。而偉長獨懷文抱質,恬淡寡欲,有箕山之志,可謂彬彬君子者矣。著《中論》二十餘篇,成一家之言,辭義典雅,足傳於後,此子為不朽矣。德璉常斐然有述作之意,其才學足以著書,美志不遂,良可痛惜!間者歷覽諸子之文,對之抆(音:問)淚;既痛逝者,行自念也。孔璋章表殊健,微為繁富。公幹有逸氣,但未遒耳;其五言詩之善者,妙絕詩人。元瑜書記翩翩,致足樂也。仲宣獨自善於辭賦,惜其體弱,不足起其文;至於所善,古人無以遠過。

昔伯牙絕絃於鍾期,仲尼覆醢(音:海)於子路,痛知音之難遇,傷門人之莫逮;諸子但為未及古人,自一時之雋也。今之存者,已不逮。矣,後生可畏,來者難誣。然恐吾與足下不及見也。

年行已長大,所懷萬端,時有所慮,至通夜不瞑。志意何時復類昔日?已成老翁,但未白頭耳。光武言:「年三十餘;在兵中十歲,所更非一。」吾德不及之,年與之齊矣。以犬羊之質,服虎豹之文;無眾星之明,假日月之光;動見瞻觀,何時易乎?恐永不復得為昔日遊也。少壯真當努力,年一過往,何可攀援?古人思秉燭夜遊,良有以也。

頃何以自娛?頗復有所述造否?東望於邑,裁書敘心。丕白。

이 편지에서 조비는 덕련(德漣)의 죽음을 안타까와 하며, 이런 말을 한다.

美志不遂 良可痛惜

"아름다운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진정 통석할 만하다"란 뜻이다. 아키히토 천황이 언급한 '통석'이 조비의 {여오질서}에서 인용한 것이라면, 이 단어는 '사죄'는 고사하고 '사과'조차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저 글에서 조비는 덕련의 재능을 아까와하고 유감스러워한 것이지, 사죄하거나 사과한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3. {일본서기}日本書紀 卷十九 欽明紀 ?

http://www.ishwar.com/shinto/holy_nihongi/

日本書紀 卷十九 欽明紀

일본서기 19권 흠명기 23년 7월조에 무내숙니가 가야군에 의해 제거되는 상황을 담은 기사가 있다.이 기사는 (백제) 귀수대왕의 장자인 무내숙니가 칠지도를 들고 일본으로 간 후 가야와 연합하여 침류왕의 군사와 전투를 벌인 상황을 담고 있다.

발췌한다.

....秋七月,己巳朔,新羅遣使獻調賦.其使人知新羅滅任那,恥背國恩,不敢請罷.遂留不歸本土,例同國家百姓.今河內國更荒郡鸕鶿野邑新羅人之先也
신라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그 사신은 신라가 임나를 멸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라의 은혜를 배반함을 부끄럽게 여겨 돌아가겠다고 청하지 않고 결국은 머물러 본토에 돌아가지 않았다. 나중에 나라의 백성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지금의 하내국 경황군 노자야군의 신라인의 선조다

十四.大葉子的悲劇

是月,遣大將軍紀男麻呂宿禰,將兵出哆唎.副將河邊臣瓊缶出居曾山.而欲問新羅攻任那之狀.遂到任那,以薦集部首登弭,遣於百濟約束軍計.登弭仍宿妻家,落印書、弓箭於路.新羅具知軍計,卒起大兵,尋屬敗亡,乞降歸附. 紀男麻呂宿禰取勝旋師,入百濟營.令軍中曰:「夫勝不忘敗,安必慮危,古之善教也.今處疆畔,豺狼交接,而可輕忽,不思變難哉?況復平安之世,刀劍不離於身.蓋君子之武備,不可以已.宜深警戒,務崇斯令!」士卒皆委心而服事焉.

...(중략)...

河邊臣瓊缶獨進轉鬥,所向皆拔.新羅更舉白旗,投兵降首.河邊臣瓊缶元不曉兵,對舉白旗,空爾獨進.新羅鬥將曰:「將軍河邊臣今欲降矣.」乃進軍逆戰.盡銳遄攻破之,前鋒所傷甚眾.倭國造手彥自知難救,棄軍遁逃

하변신경부는 홀로 나아가 이리저리 싸웠다. 가는 곳마다 모두 빼앗았다. 신라는 백기를 들고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하변신경부는 원래 병법을 몰라 백기를 들고 마주 빈손으로 혼자 나아갔다. 신라투장이 "장군 하변신은 지금 항복하려는가"라고 말했다. 그래서 진군하여 맞아 싸웠다. 날카롭게 공격하여 깨뜨렸다. 선봉이 많이 패했다. 왜국조수언이 이제는 구할 수가 없음을 알아차리고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이때 신라투장이 손에 창을 들고 추격하여 성의 해자에 이르러 창을 휘둘렀다. 수언은 준마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성의 해자를 뛰어넘어 간신히 몸을 피할 수 있었다.

新羅鬥將手持鉤戟,追至城洫,運戟擊之.手彥因騎駿馬,超渡城洫,僅以身免.鬥降臨城洫而歎曰:「久須尼自利!此新羅語未詳也.」於是,河邊臣遂引軍退,急營於野.於是,士卒盡相欺蔑,莫有遵承.

투장은 성의 해자에 이르러 탄식하기를 "구스니지리[久須尼自利/이는 신라말로서 미상]"라고 했다. 여기서 하변신은 군을 물리고 급히 야영을 하였다. 이때 사졸들은 서로 속이고 멸시하여 따르지 않았다.

鬥將自就營中,悉生虜河邊臣瓊缶等及其隨婦.于時父子夫婦不能相恤.鬥將問河邊臣曰:「汝命與婦,孰與尤愛?」答曰:「何愛一女,以取禍乎?如何不過命也.」遂許為妾. 鬥將遂於露地,姦其婦女.婦女後還,河邊臣欲就談之.婦人甚以慚恨,而不隨曰:「昔君輕賣妾身,今何面目以相遇?」遂不肯言.是婦人者,阪本臣女,曰-甘美媛.

투장은 직접 군영에 가서 하변신경부 등과 그를 따라온 부(婦)를 사로잡았다.투장은 직접 군영에 가서 하변신경부 등과 그를 따라온 부(婦)를 사로잡았다. 이때 부자, 부부가 서로 도와줄 수가 없었다. 투장이 하변신에게 묻기를 "너의 목숨과 부(婦) 중에서 어느 편을 더 아끼느냐"라고 하자 답하기를 "어찌 한 여자를 사랑하여 화를 부르겠는가. 어찌 되든 목숨보다 귀할 수는 없다"라고 하면서 첩으로 삼는 것을 허락했다. 투장은 드디어 노지(露地)에서 그 부녀를 간했다. 부녀가 뒤에 돌아오자 하변신이 말을 걸려고 했지만 부녀가 몹시 분하고 원망스러워하며 따르지 않고 말하기를 "전날 당신이 첩의 몸을 가벼이 팔고서 지금 무슨 면목으로 대하고자 하느냐"하고서 끝내 대꾸하지 않았다. 그 부인은 판본신의 딸 감미원이라고 한다.

同時所虜調吉士伊企儺,為人勇烈,終不降服.新羅鬥將拔刀欲斬,逼而脫褌,追令以尻臀向日本大號叫,叫,咷也.曰:「日本將,嚙我臗脽!」即號叫曰:「新羅王,啖我臗脽!」雖被苦逼,尚如前叫.由是見殺,其子-舅子亦抱其父而死.伊企儺辭旨難奪皆如此,由此特為諸將帥所痛惜

같은 때 포로가 된 조길사이기나가 사람됨이 용감하여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신라투장이 칼을 빼어 참하려 하자 일부러 바지를 벗고 달아나 일본을 향하여 궁둥이를 드러낸 채 큰소리로 "일본의 장수가 내 궁둥이를 물었다"라고 하고는 또 "신라왕이 내 궁둥이를 물었다"라고 외쳤다. 몹시 핍박을 받고서도 여전히 꼭 같이 소리쳤다. 이 때문에 살해되었다. 그 아들 구자(舅子)가 역시 그 아비를 끌어안고 죽었다. 이기나의 마음[辭旨]을 빼앗기 어려움이 모두 이와 같았다. 이 때문에, 특히나 여러 장수들을 위해서는 통석한 일이었다...

이 역시 '사죄'나 '사과'와는 전혀 다른 뉘앙스이다. 역시 안타깝고 애석한 마음을 뜻할 뿐이다. 만약 학습원 학자들이 이 단어를 {일본서기}에서 따온 것이라면 그야말로 기가막힐 일이다. 이것은 신라-왜의 전투에서 신라투장에게 패한 왜국 장수들에 대한 유감이기 때문이다.




4. {삼국사기}?

앞의 {일본서기} 기사와 접점을 가지고 있는 한국 측 사료인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아신왕 2년조의 기록을 보자.

출전: 디지털 한국학 DB, http://www.koreandb.net/Sam

二年 春正月 謁東明廟 又祭天地於南壇 拜眞武爲左將 委以兵馬事 武王之親舅 沈毅有大略 時人服之

2년(393) 봄 정월에 동명묘(東明廟)에 배알하였다. 또 남쪽 제단[南壇]에서 천지에 제사지냈다. 진무(眞武)를 좌장(左將)으로 삼고 군사 업무를 맡겼다. 무(武)는 왕의 외삼촌으로 침착하고 굳세며 큰 지략이 있어 당시 사람들이 복종하였다.

秋八月 王謂武曰 “關彌城者 我北鄙之襟1)要也 今爲高句麗所有 此寡人之所痛惜 而卿之所宜用心而雪恥也”

가을 8월에 왕이 무(武)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관미성(關彌城)은 우리 북쪽 변경의 요해지(要害地)이다.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과인(寡人)이 분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바이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설욕하라.”

遂謀將兵一萬 伐高句麗南鄙 武身先士卒 以冒矢石 意復石峴等五城 先圍關彌城 麗人城固守 武以糧道不繼 引而歸

[무는] 드디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도모하였다. 무가 몸소 사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면서 석현성(石峴城) 등 다섯 성을 회복하려고 먼저 관미성을 포위하였으나, 고구려 사람들은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무는 군량 수송이 이어지지 못하므로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당시 상황은 이러하다. 어린 아들을 두고 백제 15대 왕인 침류왕이 죽자, 조카를 대신하여 침류왕의 동생인 제16대 진사왕이 왕으로 등극한다. 그런데 진사왕 8년(392년)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공격하여, 예성강 하류에 위치한 항구 지역이자 백제북방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관미성을 포함한 10여 개의 성을 점거하였다. 이후 진사왕이 392년에 서거하자, 진사왕의 조카이며 침류왕의 장남인 제17대 아신왕이 마침내 등극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관미성 탈환에 적극성을 보였는데, 그때 신하에게 했던 발언이 바로 저 위에 인용된 말이다.

이 또한 '사죄'나 '사과'와는 뉘앙스가 다르다. 저 말은 고구려 땅에 빼았긴 고토를 아쉬워하는 문맥에서 나온 발언이다. 물론 가능성은 적어 보이지만, 그럼 일본 학습원의 학자들은 {삼국사기}까지 들춰가면서 저 단어를 찾아낸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코 앞에서 조롱당하고도 조롱당하는 줄도 몰랐던 셈이겠지.

지나친 음모론일까?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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