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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tist. Husband. Daddy. --- TOLLE. 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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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부활 vs.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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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草人 최광민 2021-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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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부활 vs. 부활



전능한 그리스도 (= 크리스토스 판토크라토르 Χριστὸς Παντοκράτωρ)


게시판 질문에 대한 답글: 


#질문자 (판플들)

https://youtu.be/FoBYPwPqGDo 이런 극단적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박과 광민님?초인님? 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답변 (최광민)

방금 유투브 내용을 봤는데, 세가지 코멘트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분 유명인인가 보죠? 예전에도 방문자 한 분이 언급하셨던 것 같은데)

[1]

북아프리카 히포 주교 아우구스티누스는 믿음과 이해의 관계에 대해 유명한 명제를 남겼습니다. 둘을 서로 상보적이지만, 때로 한쪽이 더 강조될 수도 있습니다.

Intellige ut credas verbum meum;
이해하라, 내 말을 믿기 위해.

sed crede ut intelligas verbum Dei
믿으라, 신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2010년대 초반부에 리 스트로벨이나 개리 하버마스, 윌리엄 크레이그 등이 수행한 소위 "부활 변증"이 복음주의 진영에서 크게 영향력을 발휘했었는데요, 보통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그 책들이 제시하는 "증거"들을 회의론자들 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압도적" 증거들이란 식으로 홍보했었습니다.

저도 그들 변증가들이 출판한 책을 거의 읽어보았습니다만, 개인적으론 그다지 "압도적인" 논증이나 변증이란 느낌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느낀다면 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 비신자의 입장에서도 역시 그렇게나 확실한 증거라 느껴질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논증은 마치 아우구스티누스의 선언 #1에 해당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논리'나 '증거'가 정말 '믿음'을 가져올 수 있을까요? 전 개인적으론 회의적입니다. 물론 일단 어떤 겨자씨 만한 믿음이 생겨난 후라면, 기존의 믿음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수는 있겠습니다. 이건 아우구스티누스의 명제#2에 해당할 것 같습니다.



[2]

저 유투버가 인용한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의 말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Credo quia absurdum" 은 사실은 잘못 인용된 것이고 그 맥락과 취지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그리스도의 육체에 관하여 De carne Christi } 5장에서 한 말은, 정확히는 "prorsus credibile est, quia ineptum est", 즉 "(그것은) 완전히 믿을 만 하다, 왜냐하면 부적합하니까"입니다. 혹은 "certum est, quia impossibile" 즉, "(그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입니다. 이 표현들이 근세 초기에 - 특별히 이성을 중시하는 계몽주의/지성주의와 스콜라신학적 로마카톨릭에 반대하는 측에서 '믿음'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나는 믿는다, 불합리하므로"란 식으로 변형되어 유포되어 온 것입니다. 이때 테르툴리아누스의 원래 의도가 약간 비틀어졌씁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런 진술을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닙니다. 그는 유대교의 신을 부정하고 예수의 육체적 죽음과 육체적 부활을 부정한 그노시스 일파인 마르시온파의 논리를 비판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정말로 쓴 내용은 이렇습니다.

"...crucifixus est dei filius: non pudet, quia pudendum est. et mortuus est dei filius: [prorsus] credibile est, quia ineptum est. et sepultus resurrexit: certum est, quia impossibile...."

"... 신의 아들은 십자가형을 당했다.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십자가형은 정말로 / 필자 주)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신의 아들은 죽으셨다. 이는 [분명히] 믿을만 한데 이것이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분은 묻히셨고 다시 부활하셨다. 이것은 확실한데 이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번역: 최광민

전체 문맥을 복원하면, 테르툴리아누스의 이 말의 원래 뜻은 (1) 바울이 말한 바대로 '나는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인간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는 일이 사실은 더 큰 신의 지혜의 일부'란 성서의 구절을 기반하고 또 (2)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저작인 {수사학}에서 언질한 대로 '어떤 믿기 어려운 주장이 사실이 더 신뢰할 만할 수도 있는데, 그 주장을 지어낸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란 논리를 적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입니다.

즉, (1) 예수의 육체가 인간의 것과 다른 일종의 '가상의 육체'라고 주장한 마르키온파의 입장에서라면, 혹은 (2) 그리스 철학에서 처럼 신은 영광의 존재요 고통을 당할 수 없는 아파테이아의 존재라면,  (3) 신의 아들은 죽을 수도 부활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신(의 아들)이 죽는다는 생각은 마르시온이나 그리스 철학자들의 입장에서는 '부적합'하고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성서'는 그렇게 적었습니다. 그러니까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를 두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비틀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가 그런 부적합하고 불가능한 이야길 사실로 적었다면, 오히려 믿을 만한 뜻이 아니겠는가?'란 취지로 말한 것이라 봐야 합니다. 역설을 이용한 논증이랄까요.



[3]

평소처럼 제가 예전에 쓴 글을 우선 링크해 드리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소위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제 이해와 평가를 적었습니다.

https://kwangmin.blogspot.com/2015/07/vs-05.html

이 글에서는 그 진영에서 '부활'을 보는 일반적 시각에 대해 짦게 코멘트 했습니다. 아마 이런 식의 이해가 소위 자유주의 진영 사이에서 유통되는 형식이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뭔가 우아하지만 사실은 공허합니다.

https://kwangmin.blogspot.com/2015/07/vs-06.html

그리고 과연 고대의 교부들이 '부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래에 적었습니다.

https://kwangmin.blogspot.com/2013/01/blog-post_20.html


이상입니다.


최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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