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 草人 최광민 2010-12-20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글들에 대해 저자의 동의없는 전문복제/배포 -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를 금하며, 인용 시 글의 URL 링크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 최광민] 크리스마스 특집 #5: 헤롯대왕은 언제 사망했을까? : 전통적 BC 1년설과 현대의 BC 4년설
순서
© 草人 최광민 2010-12-20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글들에 대해 저자의 동의없는 전문복제/배포 -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를 금하며, 인용 시 글의 URL 링크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 최광민] 크리스마스 특집 #5: 헤롯대왕은 언제 사망했을까? : 전통적 BC 1년설과 현대의 BC 4년설
순서
- 헤롯대왕의 사망 연대 논쟁
- 현대의 표준연표: BC 4년
- 헤롯의 통치기간
- 월식
- 헤롯의 아들들의 집권기간
- 고대 교회의 표준연표 (BC 1년)의 관점에서 본 "BC 4년"설의 문제점
- 헤롯대왕의 통치기간에 대한 요세푸스의 다른 기록방식
- 아우구스투스의 등록령/충성맹세 시점과의 충돌
- 월식부터 사망까지의 빠듯한 기간
- 다른 월식들의 문제
- BC 6/5년의 시리아 행정관: 바루스? 사투르니누스?
-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행적 문제
- 율리아 문제
- 헤롯의 아들들의 집권연대
- 헤롯 아켈라오스
- 헤롯 안티파스의 실제 집권연도
- 헤롯 필립포스의 집권 20년? 22년?
- 헤롯의 영아살해
헤롯대왕, Wikimedia Commons
# 헤롯대왕의 사망 연대 논쟁
기독교 초기 교부들은 복음서와 로마의 사료를 바탕으로 BC 3/2년을 예수의 탄생연도로 보았다.
그런데 예수의 탄생을 다루는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 속의 기록의 역사적
신빙성은 결국 헤롯대왕의 사망 연도를 어떻게 확정하는가에 달려있다.
그 이유는 간략하게 말해 다음과 같다.
서로 다른 연대체계 (가령, 서력기원과 중국의 연호)를 비교해서 하나의 통일된 연대체계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두 문화권의 역사 중 서로 겹치는 부분을 기준으로 (신뢰도가 더 높은 쪽의 연표에 따라) 재배열하면 된다. 하지만 이것도 사실은 상대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가장 좋은 방법은 절대적인 기준점으로 삼을 수 있는 자연현상에 기준하는 방법이다. 가령, 일식이나 월식의 출현일을 바탕으로 절대적인 기준점을 산정하는 것이 그런 방법에 속한다.
우선 현대 역사학자들이 예수의 탄생연도와 헤롯의 사망연도를 어떻게 추정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BC 12년?
BC 7년 -BC 4년 사이?
BC 6년?
BC 6년 이전?
BC 3/2년 ?
여기서는 헤롯대왕의 사망에 관한 현대의 표준이론인 BC 4년설과 전통적인 BC 1년 설 두가지를 다루도록 하겠다.
# 현대의 표준연표 : 헤롯의 사망연도 = BC 4년?
헤롯의 사망연도를 BC 4년으로 설명한 첫 시도는 1605년 폴란드의 역사가 Laurentius Suslyga에 의한 것이다. 그는 (1) 요세푸스의 기록 중 헤롯대왕의 연대기 (2) 헤롯 필립포스의 연대기 (3) 아우구스투의 딸 율리아의 유배시기 등을 바탕으로 BC 4년을 헤롯대왕의 사망일로 추정했다.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이 주장을 발전시켜서 BC 4년 3월 14일의 월식을 요세푸스가 헤롯대왕의 죽음 얼마 전에 있었다는 그 월식으로 해석했다.
현재 BC 4년은 헤롯대왕의 사망연도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연도이며, Emil Schürer의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in the Time of Jesus Christ} 이후 학계의 표준이론이 되었다.
우선, 쉴러와 그 지지자들의 논증근거를 정리해 보자.
## 헤롯의 통치기간
요세푸스는 다른 저작에서 조금 다른 헤롯의 통치기간을 언급하는데 (Antiquities XVII, 190; War, I, 665), 헤롯의 통치기간은 예루살렘을 폼페이누스와 공략할때 안티고누스 왕의 죽음 (BC 37년 혹은 36년) 으로부터 계수해서 34년이고, 로마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은 BC 40년으로부터 계수해서 37년이다.그렇게 되면 대략 BC 4-2년 사이가 헤롯대왕의 사망연도가 된다. (BC 3년에는 월식이 없다.)
또한 헤롯의 통치 7년 차는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를 패배시킨 해였고 유래없는 대지진이 유대아 일대에 있었다 (Antiquities 15.5.2). 악티움 해전은 BC 31년 9월 31일에 있었으므로, 이렇게 되면, 헤롯의 통치는 BC 37년이 된다. 이것은 안티고누스의 죽음으로부터 계수된 것과 같다.
## 월식
요세푸스는 헤롯대왕의 죽음 얼마 전에 월식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BC 4년"설에서는 BC 4년 3월 13일의 월식이 요세푸스가 말한 그 월식인 것으로 이해한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17.6.4에서 인용한다.
## 헤롯의 아들들의 집권기간
로마 역사가 캇시우스 디오는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스가 권좌에 오른 후 로마 콘술 Aemalius Lepidus와 L. Arruntuis 의 임기에 실각했다고 기록한다. 그해는 그렇다면 AD 6년이 된다.
캇시우스 디오를 인용한다.
헤롯을 이어 유대아 일대의 통치자가 되는 그의 아들들이 주조한 주화들을 보면, 대체로 BC 4년부터 그의 통치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 헤롯을 이은 세 아들들 (아켈라오스, 안티파스, 필립포스)이 발행한 주화들의 발행연도를 살펴보자. 세 명의 재위기간은 일단 표준연표에 따르겠다
우선 헤롯 아켈라오스 (BC 4년 - AD 6년)가 발행한 주화들은 연대가 불분명하다. 한편, 갈릴리의 분봉왕(tetrarch)인 헤롯 안티파스 (BC 4년 - AD 39년)가 발행한 주화들은 연대가 확정되어 있다. 주화는 그가 새 수도인 티베리아스로 옮긴 후부터 발행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있는 주화 중 가장 이른 것의 제작연도는 재위 24년 (AD 19/20년)이다. 그는 AD 39년에 칼리귤라 황제에 의해 축출당했고, 그해가 그의 집권 43년 임을 입증하는 주화가 남아있다.
파니아스에 도읍을 정한 헤롯 필립포스 1세(BC 4년 - AD 34년)가 지배하던 지역은 유대인 지역이 아니었다. 그의 주화에는 로마황제라거나 헤롯대왕이 파니아스 건립한 이교신전 등이 등장하며 가장 이른 것은 재위 5년부터 시작한다.
# 고대 교회의 표준연표 (BC 1년)의 관점에서 본 "BC 4년"설의 문제점
1960년대 중반부터 몇몇 역사학자들이 쉴러가 계산한 헤롯대왕의 재위시기에 대해 이견을 내어놓았다. Jack Finegan은 1964년에 {Handbook of Biblical Chronology} (284-291)에서 쉴러의 이론을 버리고 예수의 탄생을 BC 3/2년에, 헤롯대왕의 죽음을 BC 1년에 위치시키는 새로운 연표를 발표했다.
이 주장을 따르는 대표적인 논문들과 책들 가운데 내가 참조한 리스트는 아래와 같다.
가장 최근 논문으로는 Andrew E. Steinmann의 논문 {When Did Herod the Great Reign?} (Novum Testamentum 51 (2009) pp 1-29)를 참조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쉴러의 표준연표가 가지는 문제점은 아래와 같이 정리될 수 있다.
## 헤롯대왕의 통치기간에 대한 요세푸스의 다른 기록방식
위에 언급한 대로, 요세푸스의 계산에 따르면 헤롯의 사망시점은 BC 4년에서 2년에 겹친다. 요세푸스는 대체로 헤롯의 즉위로부터 로마의 연표에 맞춘 연대기를 기술해 나갔다. 그런데 역사학자들을 난처하게 만드는 부분은 그런 연대기 표기방식이 예수의 탄생 얼마 전인 헤롯의 재위 28년에 끝난다는 것이다. 요세푸스가 다시 로마의 연표를 이용해서 서술하기 시작하는 때는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의 재임 10년 차인 AD 6년이며, 이때부터 유대전쟁이 벌어지는 AD 66-73년까지는 다시 로마연표를 참조한 연대기를 작성한다.
결과적으로 요세푸스가 이 무렵 유대아에서 벌어진 사건들에 대해 남긴 사건들의 상대적 전후관계만 의존해서 연대기를 재구성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당시의 사건 (가령, 아우구스투스/퀴리니우스의 등록령, 월식, 유월절)을 무엇으로 맞추느냐에 따라 헤롯의 사망연도는 들쭉날쭉하게 된다.
헤롯 재위 28년부터 아켈라오스 재임 10년에 걸치는 약 10여 년의 (추정)기간은 유대인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들이 벌어진 시점이었다. 가령, 헤롯의 처 가운데 하나인 마리암네의 자식들이 처형당했고, 아우구스투스에게 충성맹세를 거부한 6000여 명의 바리새인들의 서약거부 사건이 있었고, 헤롯과 공동으로 국정을 수행하던 장남 안티파트로스가 헤롯을 시해하려는 음모로 기소되어 시리아의 로마총독에게 보내졌고, 헤롯의 형제인 페로라스가 죽었고, 안티파트로스에 대한 헤롯의 친국이 이어졌고, 로마의 황금독수리상이 부숴지는 사태가 발생했고, 두 명의 랍비가 본보기로 처형되었고, 안티파트로스가 헤롯의 손에 처형당했다. 이 사건 어느 것도 요세푸스가 이 전에 사용한 벤치마크 연도 (즉 올림피아드나 악티움 해전)에 참조되어 기술되지 않았다.
## 아우구스투스의 등록령/충성맹세 시점과의 충돌
예수의 탄생 무렵 로마 전역에서 아우구스투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이 있었던 것은 BC 3/2년 무렵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요세푸스는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충성서약을 거부한 6000여 명의 바리새인들에 대한 헤롯의 처벌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즉 헤롯이 BC 3/2년에도 살아있었다는 뜻이 된다.
- 첫째, 헤롯이 BC 4년에 사망했다면, 예수의 탄생일은 BC 8-4년 무렵이 될 것이고, 이 경우는 BC 3/2년에 있었던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충성서약 관련 센서스 혹은 AD 6년에 있었던 퀴리니우스의 징세 센서스 어느 것도 {누가/루가복음서}의 진술과 일치할 수 없다.
- 둘째, 헤롯이 BC 4년에 사망했다면, {마태/마태오복음서}에 등장하는 동방박사가 개입할 만한 천문현상이 예수와 무관해 진다.
서로 다른 연대체계 (가령, 서력기원과 중국의 연호)를 비교해서 하나의 통일된 연대체계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두 문화권의 역사 중 서로 겹치는 부분을 기준으로 (신뢰도가 더 높은 쪽의 연표에 따라) 재배열하면 된다. 하지만 이것도 사실은 상대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가장 좋은 방법은 절대적인 기준점으로 삼을 수 있는 자연현상에 기준하는 방법이다. 가령, 일식이나 월식의 출현일을 바탕으로 절대적인 기준점을 산정하는 것이 그런 방법에 속한다.
우선 현대 역사학자들이 예수의 탄생연도와 헤롯의 사망연도를 어떻게 추정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BC 12년?
- "Places the Crucifixion of Jesus in 36." p. 162. "It follows that Jesus was born in 12 BC." p. 163. --- Nikos Kokkinos, {Chronos, Kairos, Christos: Nativity and Chronological Studies Presented to Jack Finegan}. Winona Lake, IN: Eisenbrauns, 1989
- "Prevailing view is that Jesus was born between 8 and 2 BC and that he died around AD 30-33." p. 56. "my judgment that Jesus was born in late 12 BC and that he was crucified around AD 21." p. 56. --- Ephraim Jerry Vardaman, {Chronos, Kairos, Christos: Nativity and Chronological Studies Presented to Jack Finegan}. Winona Lake, IN: Eisenbrauns, 1989
BC 7년 -BC 4년 사이?
- "Jesus was born somewhere between 4 and 6 B.C.", --- Ben Witherington III, {Primary Sources} Christian History, August 1998 p12(1).
- "About the date of Jesus' birth there are equally perplexing problems. The belief that he was born in AD 1 only came into existence in the sixth century AD when a monk... His birth-date should be reassigned to 6 or 5 or 4 BC, though some prefer 11 or 7 . , --- Michael Grant, {Jesus: An Historian's Review of the Gospels}, Scribner's, 1977, p. 71
- "Jesus is linked with the reign of king Herod teh Great (37-4 B.C.E.), during whose incumbency Jesus was allegedly born. We also have the name of Herod Antipas, tetrarch from 4 B.C.E. to 39 C.E., who ruled Galilee during Jesus' life and beheaded John the Baptist; and the name of Pntius Pilate, the Roman procurator (26-36 C.E.) under whom Jesus was crucified. Jesus therefore lived in a period bounded by a date prior to the death of Herod on the one side and by the end of Pilate's tenure in 36 C.E. on the other." --- Robert W. Funk and the Jesus Seminar, The Acts of Jesus: The Search for the Authentic Deeds of Jesus, HarperSanFrancisco, 1998, p. 528
- "All things considered, then, we can only estimate that Jesus must have been born sometime during 6-4 B.C." -- D. A. Carson, Douglas J. Moo and Leon Morris. {An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2.
- "During the reign of King Herod the Great (and if Matthew is to be believed, toward the end of his reign, therefore somewhere between 7-4 B.C.), a Jew named Yeshia (=Jesus) was born, perhaps in Bethlehem of Judea but more likely in Nazareth of Galilee-at any rate, in a small town somewhere within the confines of Herod's kingdom." --- John P. Meier, A Marginal Jew, Doubleday, 1991-, vol. 1:407, p. 229
- "...yields 5 BC, the most likely date for the Nativity." p. 119 -- Paul L. Maier, {Chronos, Kairos, Christos: Nativity and Chronological Studies Presented to Jack Finegan}. Winona Lake, IN: Eisenbrauns, 1989
BC 6년?
- The first enrolment (ἀπογραφὴ πρώτη). A definite allusion by Luke to a series of censuses instituted by Augustus, the second of which is mentioned by him in Ac 5:37. This second one is described by Josephus and it was supposed by some that Luke confused the two. But Ramsay [q.v., Luke the Physician] has shown that a periodical fourteen-year census in Egypt is given in dated papyri back to A.D. 20. The one in Ac 5:37 would then be A.D. 6. This is in the time of Augustus. The first would then be B.C. 8 in Egypt. If it was delayed a couple of years in Palestine by Herod the Great for obvious reasons, that would make the birth of Christ about B.C. 6 which agrees with the other known data. When Quirinius (Κυρηνίου). Genitive absolute. Here again Luke has been attacked on the ground that Quirinius was only governor of Syria once and that was A.D. 6 as shown by Josephus (Ant. XVIII. I.I). But Ramsay has proven by inscriptions that Quirinius was twice in Syria and that Luke is correct here also.. -- A. T. Robertson's Word Pictures of the New Testament (Broadman & Holman, 1970), on Luke 2:2:
BC 6년 이전?
- "Both Matthew and Luke assign Jesus' birth to "the days when Herod was king of Judea" -consequently before 3 B.C. Luke, however, describes Jesus as "about thirty years old" when John bptized him "in the fifteenth year of Tiberius" -i.e., A.D. 28-29; this would place Christ's birth in the year 2-1 B.C. Luke adds that "in thjose days there went out a decree of Caesar Agustus that all the world should be taxed . . . when Quirinius was governonr of Syria." Quirinius is known to have been legate in Syria between A.D. 6 and 12; Josephus notes a census by him in Judea, but ascribes it to A.D. 6-7; we have no futher mention of this census. Tertullian records a census of Judea by Saturninus, governon of Syria 8-7 B.C.; if this is the census that Luke had in mind, the bith of Christ would have to be palced before 6 B.C." -- Will Durant, Caesar and Christ, Simon and Schuster, 1994, p. 557-558
BC 3/2년 ?
- "If we remember the prevailing tradition represented by the majority of the early Christian scholars dated the birth of Jesus in 3/2 B.C., and if we accept the time of Herod's death as between the [lunar] eclipse of Jan 9/10 and the Passover of April 8 in the year 1 B.C., then we will probably date the nativity of Jesus in 3/2 B.C., perhaps in mid-January in 2 B.C." p. 319, §549. Jack Finegan, Handbook of Biblical Chronology, rev. ed. (1998)
- "I believe that there are seven historical and biblical factors that show the reasonableness of a 3 or 2 BC birth for Jesus." p. 86. -- Ernest L. Martin, {Chronos, Kairos, Christos: Nativity and Chronological Studies Presented to Jack Finegan}. Winona Lake, IN: Eisenbrauns, 1989
여기서는 헤롯대왕의 사망에 관한 현대의 표준이론인 BC 4년설과 전통적인 BC 1년 설 두가지를 다루도록 하겠다.
# 현대의 표준연표 : 헤롯의 사망연도 = BC 4년?
헤롯의 사망연도를 BC 4년으로 설명한 첫 시도는 1605년 폴란드의 역사가 Laurentius Suslyga에 의한 것이다. 그는 (1) 요세푸스의 기록 중 헤롯대왕의 연대기 (2) 헤롯 필립포스의 연대기 (3) 아우구스투의 딸 율리아의 유배시기 등을 바탕으로 BC 4년을 헤롯대왕의 사망일로 추정했다.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이 주장을 발전시켜서 BC 4년 3월 14일의 월식을 요세푸스가 헤롯대왕의 죽음 얼마 전에 있었다는 그 월식으로 해석했다.
현재 BC 4년은 헤롯대왕의 사망연도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연도이며, Emil Schürer의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in the Time of Jesus Christ} 이후 학계의 표준이론이 되었다.
Emil Schürer,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in the Time of Jesus Christ}
https://archive.org/stream/historyofjewishp01sch
우선, 쉴러와 그 지지자들의 논증근거를 정리해 보자.
## 헤롯의 통치기간
요세푸스는 다른 저작에서 조금 다른 헤롯의 통치기간을 언급하는데 (Antiquities XVII, 190; War, I, 665), 헤롯의 통치기간은 예루살렘을 폼페이누스와 공략할때 안티고누스 왕의 죽음 (BC 37년 혹은 36년) 으로부터 계수해서 34년이고, 로마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은 BC 40년으로부터 계수해서 37년이다.그렇게 되면 대략 BC 4-2년 사이가 헤롯대왕의 사망연도가 된다. (BC 3년에는 월식이 없다.)
1. AND now Herod altered his testament upon the alteration of his mind; for he appointed Antipas, to whom he had before left the kingdom, to be tetrarch of Galilee and Perea, and granted the kingdom to Archclaus. He also gave Gaulonitis, and Trachonitis, and Paneas to Philip, who was his son, but own brother to Archclaus (10) by the name of a tetrarchy; and bequeathed Jarnnia, and Ashdod, and Phasaelis to Salome his sister, with five hundred thousand [drachmae] of silver that was coined. He also made provision for all the rest of his kindred, by giving them sums of money and annual revenues, and so left them all in a wealthy condition. He bequeathed also to Caesar ten millions [of drachmae] of coined money, besides both vessels of gold and silver, and garments exceeding costly, to Julia, Caesar's wife; and to certain others, five millions. When he had done these things, he died, the fifth day after he had caused Antipater to be slain; having reigned, since he had procured Antigonus to be slain, thirty-four years; but since he had been declared king by the Romans, thirty-seven. (11) A man he was of great barbarity towards all men equally, and a slave to his passion; but above the consideration of what was right; yet was he favored by fortune as much as any man ever was, for from a private man he became a king; and though he were encompassed with ten thousand dangers, he got clear of them all, and continued his life till a very old age. But then, as to the affairs of his family and children, in which indeed, according to his own opinion, he was also very fortunate, because he was able to conquer his enemies, yet, in my opinion, he was herein very unfortunate. ---{유대고대사} 17.8.1
8. So Herod, having survived the slaughter of his son five days, died, having reigned thirty-four years since he had caused Antigonus to be slain, and obtained his kingdom; but thirty-seven years since he had been made king by the Romans. --- {유대전쟁사} 1.33.8
또한 헤롯의 통치 7년 차는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를 패배시킨 해였고 유래없는 대지진이 유대아 일대에 있었다 (Antiquities 15.5.2). 악티움 해전은 BC 31년 9월 31일에 있었으므로, 이렇게 되면, 헤롯의 통치는 BC 37년이 된다. 이것은 안티고누스의 죽음으로부터 계수된 것과 같다.
At this time it was that the fight happened at Actium, between Octavius Caesar and Antony, in the seventh year of the reign of Herod (8) and then it was also that there was an earthquake in Judea, such a one as had not happened at any other time, and which earthquake brought a great destruction upon the cattle in that country. About ten thousand men also perished by the fall of houses; but the army, which lodged in the field, received no damage by this sad accident. When the Arabians were informed of this, and when those that hated the Jews, and pleased themselves with aggravating the reports, told them of it, they raised their spirits, as if their enemy's country was quite overthrown, and the men were utterly destroyed, and thought there now remained nothing that could oppose them. --- {유대고대사} 15.5.2
## 월식
요세푸스는 헤롯대왕의 죽음 얼마 전에 월식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BC 4년"설에서는 BC 4년 3월 13일의 월식이 요세푸스가 말한 그 월식인 것으로 이해한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17.6.4에서 인용한다.
"...But the people, on account of Herod's barbarous temper, and for fear he should be so cruel and to inflict punishment on them, said what was done was done without their approbation, and that it seemed to them that the actors might well be punished for what they had done. But as for Herod, he dealt more mildly with others [of the assembly] but he deprived Matthias of the high priesthood, as in part an occasion of this action, and made Joazar, who was Matthias's wife's brother, high priest in his stead. Now it happened, that during the time of the high priesthood of this Matthias, there was another person made high priest for a single day, that very day which the Jews observed as a fast. The occasion was this: This Matthias the high priest, on the night before that day when the fast was to be celebrated, seemed, in a dream, 1 to have conversation with his wife; and because he could not officiate himself on that account, Joseph, the son of Ellemus, his kinsman, assisted him in that sacred office. But Herod deprived this Matthias of the high priesthood, and burnt the other Matthias, who had raised the sedition, with his companions, alive. And that very night there was an eclipse of the moon..." --- {유대고대사} 17.6.4
## 헤롯의 아들들의 집권기간
로마 역사가 캇시우스 디오는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스가 권좌에 오른 후 로마 콘술 Aemalius Lepidus와 L. Arruntuis 의 임기에 실각했다고 기록한다. 그해는 그렇다면 AD 6년이 된다.
캇시우스 디오를 인용한다.
"...25 After this, in the consulship of Aemilius Lepidus and Lucius Arruntius, when no revenues for the military fund were being discovered that suited anybody, but absolutely everybody was vexed because such an attempt was even being made..." --- Dio Cassius 55.24.9.25
"...6 These were the events in the city that year. In Achaia the governor died in the middle of his term and instructions were given to his quaestor and to his assessor (whom, as I have stated, we call envoy) for the former to administer the province as far as the Isthmus and the other the remainder. Herod of Palestine, who was accused by his brothers of some wrongdoing or other, was banished beyond the Alps and a portion of the domain was confiscated to the state..." --- Dio Cassius, 55.27.6.
헤롯을 이어 유대아 일대의 통치자가 되는 그의 아들들이 주조한 주화들을 보면, 대체로 BC 4년부터 그의 통치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 헤롯을 이은 세 아들들 (아켈라오스, 안티파스, 필립포스)이 발행한 주화들의 발행연도를 살펴보자. 세 명의 재위기간은 일단 표준연표에 따르겠다
우선 헤롯 아켈라오스 (BC 4년 - AD 6년)가 발행한 주화들은 연대가 불분명하다. 한편, 갈릴리의 분봉왕(tetrarch)인 헤롯 안티파스 (BC 4년 - AD 39년)가 발행한 주화들은 연대가 확정되어 있다. 주화는 그가 새 수도인 티베리아스로 옮긴 후부터 발행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있는 주화 중 가장 이른 것의 제작연도는 재위 24년 (AD 19/20년)이다. 그는 AD 39년에 칼리귤라 황제에 의해 축출당했고, 그해가 그의 집권 43년 임을 입증하는 주화가 남아있다.
파니아스에 도읍을 정한 헤롯 필립포스 1세(BC 4년 - AD 34년)가 지배하던 지역은 유대인 지역이 아니었다. 그의 주화에는 로마황제라거나 헤롯대왕이 파니아스 건립한 이교신전 등이 등장하며 가장 이른 것은 재위 5년부터 시작한다.
# 고대 교회의 표준연표 (BC 1년)의 관점에서 본 "BC 4년"설의 문제점
1960년대 중반부터 몇몇 역사학자들이 쉴러가 계산한 헤롯대왕의 재위시기에 대해 이견을 내어놓았다. Jack Finegan은 1964년에 {Handbook of Biblical Chronology} (284-291)에서 쉴러의 이론을 버리고 예수의 탄생을 BC 3/2년에, 헤롯대왕의 죽음을 BC 1년에 위치시키는 새로운 연표를 발표했다.
이 주장을 따르는 대표적인 논문들과 책들 가운데 내가 참조한 리스트는 아래와 같다.
- W.E. Filmer, {Chronology of the Reign of Herod the Great,}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ns 17 (1966) 283–298
- Ormond Edwards, {Herodian Chronology}, Palestine Exploration Quarterly 114 (1982) 29–42
- Jerry Vardaman (Author), Edwin M. Yamauchi (Editor) , {Chronos, Kairos, Christos: Nativity and Chronological Studies Presented to Jack Finegan}, 1989
- Paul Keresztes, {Imperial Rome and the Christians: From Herod the Great to About 200 A.D.} (Lanham, MD: University Press of America, 1989) 1–43
가장 최근 논문으로는 Andrew E. Steinmann의 논문 {When Did Herod the Great Reign?} (Novum Testamentum 51 (2009) pp 1-29)를 참조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쉴러의 표준연표가 가지는 문제점은 아래와 같이 정리될 수 있다.
## 헤롯대왕의 통치기간에 대한 요세푸스의 다른 기록방식
위에 언급한 대로, 요세푸스의 계산에 따르면 헤롯의 사망시점은 BC 4년에서 2년에 겹친다. 요세푸스는 대체로 헤롯의 즉위로부터 로마의 연표에 맞춘 연대기를 기술해 나갔다. 그런데 역사학자들을 난처하게 만드는 부분은 그런 연대기 표기방식이 예수의 탄생 얼마 전인 헤롯의 재위 28년에 끝난다는 것이다. 요세푸스가 다시 로마의 연표를 이용해서 서술하기 시작하는 때는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의 재임 10년 차인 AD 6년이며, 이때부터 유대전쟁이 벌어지는 AD 66-73년까지는 다시 로마연표를 참조한 연대기를 작성한다.
결과적으로 요세푸스가 이 무렵 유대아에서 벌어진 사건들에 대해 남긴 사건들의 상대적 전후관계만 의존해서 연대기를 재구성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당시의 사건 (가령, 아우구스투스/퀴리니우스의 등록령, 월식, 유월절)을 무엇으로 맞추느냐에 따라 헤롯의 사망연도는 들쭉날쭉하게 된다.
헤롯 재위 28년부터 아켈라오스 재임 10년에 걸치는 약 10여 년의 (추정)기간은 유대인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들이 벌어진 시점이었다. 가령, 헤롯의 처 가운데 하나인 마리암네의 자식들이 처형당했고, 아우구스투스에게 충성맹세를 거부한 6000여 명의 바리새인들의 서약거부 사건이 있었고, 헤롯과 공동으로 국정을 수행하던 장남 안티파트로스가 헤롯을 시해하려는 음모로 기소되어 시리아의 로마총독에게 보내졌고, 헤롯의 형제인 페로라스가 죽었고, 안티파트로스에 대한 헤롯의 친국이 이어졌고, 로마의 황금독수리상이 부숴지는 사태가 발생했고, 두 명의 랍비가 본보기로 처형되었고, 안티파트로스가 헤롯의 손에 처형당했다. 이 사건 어느 것도 요세푸스가 이 전에 사용한 벤치마크 연도 (즉 올림피아드나 악티움 해전)에 참조되어 기술되지 않았다.
## 아우구스투스의 등록령/충성맹세 시점과의 충돌
예수의 탄생 무렵 로마 전역에서 아우구스투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이 있었던 것은 BC 3/2년 무렵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요세푸스는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충성서약을 거부한 6000여 명의 바리새인들에 대한 헤롯의 처벌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즉 헤롯이 BC 3/2년에도 살아있었다는 뜻이 된다.
## 월식부터 사망까지의 빠듯한 기간
요세푸스는 헤롯대왕이 월식이 있은 후부터 이어지는 유월절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지만 연도를 특정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 월식을 BC 4년 3월 13일에 발생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우, 그 해의 유월절은 30일 후에 오게 된다. 그런데 요세푸스는 이 한 달 남짓의 기간에 발생한 너무나 많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대체로 한 달 안에 일어나기에는 빠듯한 사건들의 배열이다.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출처: Ant. XVII.vi.5-ix.3; Wars I.xxxiii.5-9).
- 월식 전날 헤롯은 그가 성전 동쪽 문에 설치한 로마의 금독수리를 파괴한 혐의로 저명한 바리사리/바리새파 랍비 두 명을 산 채로 화형시켰다.
- 훨식 다음날, 헤롯의 병이 위중해져서 여러 부위가 곪고 벌레가 생겼다
- 에리코/여리고에서 10마일 정도 떨어진 사해 동편의 온천에서 휴양을 했으나 차도가 없어 왕궁으로 돌아왔다
- 헤롯의 아들 안티파트로스가 처형당했고, 헤롯은 그로부터 5일 후 죽는다 (자신의 즉위 34년 하루 후).
- 화려한 국장이 치러졌다.
- 장례일로부터 7일 간의 애도기간 (shiva)이 시작되었다.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 3.9.5에 따르면 유대인들의 통상적인 장례 애도기간 (Sheloshim) 이것은 (장례일로부터) 30일이었다)
- 월식이 있은 밤 전날 헤롯에 의해 처형당했던 유대인들을 애도하는 또 다른 애도가 이어졌다.
- 이어지는 유월절
## 다른 월식들의 문제
요세푸스는 자신의 저작에서 (연도와 날짜가 불분명한) 단 한 건의 월식만을 기록한다. 그러나 사실 그 무렵에는 여러 건의 월식이 있었다. 천문학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으로 쉽게 확인해 볼 수 있다
- BC 4년 : 3/13 (1차, 부분월식/35%), 9/2 (2차)
- BC 3년 : 없음
- BC 2년 : 1/16 (1차), 7/17 (2차, 부분월식/81%)
- BC 1년 : 1/9-10 (완전월식), 12/29 (부분)
- AD 1년 : 없음
- AD 2년 : 11/4
헤롯의 사망은 이 월식 중 하나와 인접한 유월절 (니산 14일) 사이에 있었다. 그럼 그 무렵의 유월절을 살펴보자.
- BC 4년 : 4/10
- BC 3년 : 3/29
- BC 2년 : 3/18
- BC 1년 : 4/6
- AD 1년 : 3/27
- AD 2년 : 4/14
유대아 일대에서 월식은 거의 매 년 (종종 일년에도 여러 차례) 관측된다. 만약 (요세푸스가 암시하는 대로) 처형이 늦은 오후에 있었고, 그래서 월식이 초저녁 무렵에 관측된 것이라면, BC 10-AD 1년 사이에 있었던 여러 건의 월식 가운데, (1) BC 4년 3월 13일, (2) BC 1년 1월 10일의 월식은 다소 부적절하다. (그러나 가능성은 있다.) 그 이유는 이 두 건의 월식은 일몰 후 6시간 후인 자정무렵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BC 5년 9월 15일에 있었던 월식은 일몰 후 3시간 뒤에 발생했다.
이 기준에 가장 잘 부합하는 월식은 BC 1년 12월 29일에 있었던 월식이다. 달은 (처형이 집행된 여리고에서) 관측 가능한 고도(동쪽 3도)에 있었고, 월식은 일몰 후 20분 후에 시작되었다. 만약 이 월식이 요세푸스가 말한 그 월식이라면, 헤롯의 사망일은 BC 4년이 아니라 AD 1년이 된다.
한편, BC 1월 9일의 월식 역시 유력한 후보이다. 유대인의 기념일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는 문서 {Megillat Ta'anit }에 따르면, 헤롯의 죽음은 세밧(Shebat)월 2일로 되어있다.이 경우 가장 가능성 높은 헤롯의 사망일은 BC 1월 9일의 월식부터 유월절 사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경우 문제의 월식부터 유월절까지는 92일이 된다. 이 정도의 기간이라면 위에 언급된 헤롯이 죽기 전과 그 후의 시간표가 설명되기 충분하다.
## BC 6/5년의 시리아 총독: 바루스? 사투르니누스?
요세푸스는 헤롯이 죽었을 때, 바루스가 시리아 총독이었다고 진술했다. 동전에 따르면 바루스는 확실히 BC 4년 직전까지 시리아 총독이었다. 문제는 로마측 사료에 따르면 바루스는 BC 6/5년에도 시리아 총독이지만,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롯의 사망 2/3년 전 시리아를 관할한 총독은 사투르니누스가 된다. 따라서 로마의 사료가 틀렸거나 요세푸스의 진술이 틀린 것이 된다
만약 로마측 사료와 요세푸스가 모두 맞다면, 이것은 헤롯의 사망을 BC 4년으로 보는 관점이 틀린 것이라는 결론이 된다. 즉, 누가 시리아의 총독이었는지가 불분명한 BC 4-AD 1년 사이에 바루스가 총독으로 재임명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추론이다.
##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행적 문제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롯이 죽은 무렵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체제의 제 2인자로서 헤롯 아켈라오스의 송사에 개입해 있었다.
...4. Sabinus did also afford these his assistance to the same purpose by letters he sent, wherein he accused Archelaus before Caesar, and highly commended Antipas. Salome also, and those with her, put the crimes which they accused Archelaus of in order, and put them into Caesar's hands; and after they had done that, Archelaus wrote down the reasons of his claim, and, by Ptolemy, sent in his father's ring, and his father's accounts. And when Caesar had maturely weighed by himself what both had to allege for themselves, as also had considered of the great burden of the kingdom, and largeness of the revenues, and withal the number of the children Herod had left behind him, and had moreover read the letters he had received from Varus and Sabinus on this occasion, he assembled the principal persons among the Romans together, (in which assembly Caius, the son of Agrippa, and his daughter Julias, but by himself adopted for his own son, sat in the first seat,) and gave the pleaders leave to speak. --- {유대전쟁사} 2.2.4
....5. Now when Archelaus had sent in his papers to Caesar, wherein he pleaded his right to. the kingdom, and his father's testament, with the accounts of Herod's money, and with Ptolemy, who brought Herod's seal, he so expected the event; but when Caesar had read these papers, and Varus's and Sabinus's letters, with the accounts of the money, and what were the annual incomes of the kingdom, and understood that Antipas had also sent letters to lay claim to the kingdom, he summoned his friends together, to know their opinions, and with them Caius, the son of Agrippa, and of Julia his daughter, whom he had adopted, and took him, and made him sit first of all, and desired such as pleased to speak their minds about the affairs now before them. Now Antipater, Salome's son, a very subtle orator, and a bitter enemy to Archelaus, spake first to this purpose:.. --- {유대고대사} 17.9.5
로마 측 사료에 따르면,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BC 1년에 파르티아 변방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동방에 사령관으로 파견되어 있었다. 헤롯이 BC 4년에 죽었다면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BC 4년에서 BC 1년 사이에 로마에 머물렀어야 한다.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이 무렵 행적을 알려주는 사료는 충분치 않지만 꽤 타당한 추정이다.
헤롯의 죽음을 이른 AD 1년 (그리고 아마도 이른 BC 1년?)으로 보는 경우도 약간의 가정을 더 필요로 하지만 무리한 정황은 아니다. 콘술의 업무를 반드시 로마에서 볼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율리우스력) AD 1년 1월 1일부터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두 명의 콘술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본인은 BC 5년과 2년에 콘술이었고,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콘술직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서의 경력을 쌓게하기 위한 배려였다.) 로마 역사가 디오 캇시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AD 1년 초에 파르티아의 왕인 프라타케스(Prataces)와 잠정적 휴전에 동의했는데 그 무렵 가이우스는 "시리아에 주둔하면서" 콘술의 업무를 보고 있었다.
Cassius Dio Cocceianus, {Dio's Roman history, tr. Cary, Earnest, 1879-; Foster, Herbert Baldwin, 1874-1906
https://archive.org/stream/diosromanhistory06cassuoftWhen the barbarians heard of Gaius' expedition, Phrataces sent men to Augustus to explain what had occurred and to demand the return of his brothers on condition of his accepting peace. The emperor [AD 1년 -- 필자 주] sent him a letter in reply, addressed simply to " Phrataces," without the appellation of " king," in which he directed him to lay aside the royal name and to withdraw from Armenia. Thereupon the Parthian, so far from being cowed, wrote back in a generally haughty tone, styling himself " King of Kings " and addressing Augustus simply as " Caesar." Tigranes did not at once send any envoys, but when Artabazus somewhat later fell ill and died, he sent gifts to Augustus, in view of the fact that his rival had been removed, and though he a,d. i did not mention the name " king " in his letter, he really did petition Augustus for the kingship. Influenced by these considerations and at the same time fearing the war with the Parthians, the emperor accepted the gifts and bade him go with good hopes to Gaius in Syria..... others who marched against them from Egypt, and did not yield until a tribune from the pretorian guard was sent against them. This man in the course of time checked their incursions, with the result that for a long period no senator governed the cities in this region. Coincident with these events^ there was an outbreak on the part of the Germans. Somewhat earlier Domitius, while still governing the districts along the Ister, had intercepted the Hermunduri, a tribe which for some reason or other had left their own land and were wandering about in quest of another, and he had settled them in a part of the Marcomannian territory ; then he had crossed the Albis, meeting with no opposition, had made a friendly alliance with the barbarians on the further side, and had set up an altar to Augustus on the bank of the river. Just now he had transferred his headquarters to the Rhine, and in his desire to secure the return of certain Cheruscan exiles through the efforts of other persons had met with a reverse and had caused the other barbarians likewise to conceive a contempt for the Romans. This was the extent, however, of his operations that year ; for in view of the Parthian war which was impending no attention was paid to the Germans at this time.Nevertheless, war did not break out with the [AD 1년 -- 필자 주] Parthians, either. For Phrataces, hearing that Gaius was in Syria, acting as consul, and, furthermore, having suspicions regarding his own people, wlio had even before this been inclined to be disloyal to him, forestalled action on their part by coming to terms with the Romans, on condition that he himself should renounce Armenia and that his brothers should remain beyond the sea. The Armenians, however, in spite of the fact that Tigranes had perished in a war with barbarians and Erato had resigned her sovereignty, nevertheless went to war with the Romans because they were being handedover to a Mede, Ariobarzanes, who had once come to the Romans along with Tiridates. This was in the [AD 2년 -- 필자 주] following year, when Publius Vinicius and Publius Varus were consuls. And though they accomplished nothing worthy of note, a certain Addon, who was [AD 3년 -- 필자 주] holding Artagira, induced Gaius to come up close to the wall, retending that he would reveal to him some of the Parthian king's secrets, and then wounded him, whereupon he was besieged. He held out for a long time ; but when he was at last captured, not only Augustus but Gaius also assumed the title of imperator, and Armenia was given by Augustus and the senate first to Ariobarzanes and then upon his death a little later to his son Artabazus. Gaius became ill from his wound, and since he was not robust to begin with and the condition of his health had impaired his mind, this illness blunted his faculties still more. At last he begged leave to retire to private life, and it was his desire to remain somewhere in Syria. ugustus, accordingly, grieved at heart, communicated his wish to the senate, and.... --- Dio lv.10.4, from Cary, E., {Dio's Roman History}
분명치는 않지만, AD 1년의 휴전으로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에 일시적으로나마 머무르면서 로마에서 콘술의 업무를 볼 여유가 생겼을 듯 싶다. 하지만 디오는 가이우스가 이 기간 동안 시리아에 계속 주둔했는지 혹은 로마를 방문했는지에 대해 기록하고 있지 않다. AD 2년 아르메니아 전쟁이 발발하게 되는데, 참전한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부상을 입고 AD 4년에 사망한다.
## 율리아(Julia) 문제
요세푸스 Wars I.xxxi.1
Suetonius, Augustus LXIII-LXV; Tiberius IV,3.
헤롯대왕의 아들 중 하나로 분봉왕 중 하나인 헤롯 안티파스는 베트람프타 (=베트-하란)을 성곽을 갖춘 도시로 승격시키면서 그 이름을 "율리아스" (혹은 "리비아스')로 개명했는데, 요세푸스는 이 이름이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기록한다.
한편, 헤롯 필리포스는 소규모 마을이던 벳사이다 (Bethsaida, 벳세다) 를 도시 (polis)로 승격해 이를 '율리아스'라고 명명했는데, 요세푸스는 이번에는 이 "율리아스"가 아우구스투스의 (방탕한) 딸인 율리아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1. WHEN Cyrenius had now disposed of Archelaus's money, and when the taxings were come to a conclusion, which were made in the thirty-seventh year of Caesar's victory over Antony at Actium, he deprived Joazar of the high priesthood, which dignity had been conferred on him by the multitude, and he appointed Ananus, the son of Seth, to be high priest; while Herod and Philip had each of them received their own tetrarchy, and settled the affairs thereof. Herod also built a wall about Sepphoris, (which is the security of all Galilee,) and made it the metropolis of the country. He also built a wall round Betharamphtha, which was itself a city also, and called it Julias, from the name of the emperor's wife. When Philip also had built Paneas, a city at the fountains of Jordan, he named it Cesarea. He also advanced the village Bethsaids, situate at the lake of Gennesareth, unto the dignity of a city, both by the number of inhabitants it contained, and its other grandeur, and called it by the name of Julias, the same name with Caesar's daughter. --- {Antiquities, 18.2.1, --- William Whiston William Whiston 번역 (1737)
이 진술에 따라 BC 4년설을 지지하는 역사학자들은 이 도시는 BC 2년 이전에 건설되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즉, 필립포스가 BC 2년 이전에 집권했었어야 한다는 뜻일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가 율리아를 BC 2년에 유배시켰기 때문에, 처벌당한 아우구스투스의 "딸의 이름을 딴 도시를 세운다는 것은 비상식적이지 않겠는가? ---- 라는 것이 BC 4년설 지지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요세푸스 (혹은 필사자)의 착오라고 볼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우선 로마제국 전역에는 '콜로니아 율리아' (줄여서 '율리아스')라 명명된 로마 식민도시들이 있었다. 가령, BC 45년에 현재 프랑스 남프랑스 일대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세운 Colonia Iulia Paterna Arelatensis Sextanorum나 Colonia Iulia Paterna Claudius Narbo Martius Decumanorum 등이 그런 예에 속한다. 헤롯대왕에 의해 BC 14년 현재 레바논 베이루트에 건립된 요새도시 Colonia Iulia Augusta Felix Berytus 역시 그런 경우다. 이 경우 '율리아'는 아우구스투스의 딸의 이름을 딴 것이 아니라,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계승하는 이른바 '율리우스 황가'를 뜻하는 것이다. 남성이름이 도시의 이름에 붙여질때 여성화되는 다른 한 예로는, 헤롯이 자신이 한때 지지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헌정한 요새도시 '안토니아'가 있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28.2.3 에 따르면, 티베리우스 황제와 가까왔던 헤롯 안티파스의 경우 게네사렛 호수를 낀 도시 티베리아스 Τιβεριάς를 건설해 티베리우스에게 헌정했는데, 이는 "티베리우스"의 여성형이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AD 130년에 폐허화 된 예루살렘에 건립한 신도시 아엘리아 카피톨리아 (Aelia Capitolia) 역시 그의 가문명 Aelius을 여성화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처 리비아의 본명은 리비아 드루실라 (BC 58 - AD 29)로, 남편인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한 AD 14년에 그의 유언에 따라 재산의 1/3을 상속받는 한편 율리우스 가문에 공식으로 입양되어 "율리아"를 가문명 (gens)으로 받고 "아우구스타"란 호칭을 받게 된다.
타키투스의 기록이다.
Cornelius Tacitus, {The Annals}
https://archive.org/stream/annalsbooksivi00tacigoog
Tiberius and Livia were his [Augustus Caesar's] heirs, and Livia was adopted into the Julian family with the name 'Augusta.'" --- Tacitus, {Annals} 1.8
티베리우스와 리비아가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의 상속인이 되었고, 리비아는 율리우스 가문에 입양되어 '아우구스타'란 이름을 받았다 --- 타키투스, {연감} 1.8 / 번역: 최광민
이후 리비아는 "율리아 아우구스타"라는 공식 이름으로 로마인들에게 불렸다. 나중에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리비아를 신격화하여 "디바 아우구스타"란 호칭으로 리비아에게 디바/여신의 지위를 부여했다.
헤롯 필립포스는 8세에서 18세까지 로마에서 교육받았으며, 거의 확실히 아우구스투스의 처인 리비아와 교류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 이유는 필립포스의 숙모가 리비아와 가까운 친구였고, 또 아우구스투스의 손자들인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와 라틴어 수업을 같이 들었기 때문이다. 1966년의 벳사이다 발굴조사 중 로마신전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리비아 율리아 (즉, 아우구스투스의 처)"의 상과 필립포스와 리비아의 이름이 적힌 동전들이 발굴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처 리비아는 AD 29년에 사망했으므로, 이 신전은 그녀에게 헌정된 것으로 보인다. 이 벳사이다는 AD 30/31년 경, '율리아스'로 개명되면서 '폴리스'급으로 승격되었다.. 따라서 이 벳사이다가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의 이름을 딴 것"이란 요세푸스의 진술은 틀린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헤롯의 아들들의 집권연대
이 문제는 헤롯대왕의 죽음을 BC 1년으로 잡는 가설의 가장 걸림돌 가운데 하나다. 일단 헤롯대왕의 아들 안티파트로스의 경우를 살펴보자.
JUDAEA, Herodian Kings. Herod IV Philip, with Tiberius. 4 BCE-34 CE. Æ 17mm (5.51 gm, 12h). Paneas (Banias) mint. Dated RY 34 (30/1 CE). Bare head of Tiberius right; laurel branch to right / Tetrastyle temple (Augusteum) with pellet in pediment; date between columns. Meshorer 106; RPC I 4948; Hendin 538. Good VF, desert patina. Nice example of these usually poorly struck coins. (Source: wikimedia commons)
요세푸스는 자신의 역사저술에서 매 권을 선대왕의 죽음 (즉, 새 정권의
시작)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유대고대사} 제 14권에서 요세푸스는 왕자들의
죽음으로부터 해당 권을 시작한다.
헤롯은 물론 죽을 때까지 통치를 했지만, 집권 중에 아들 안티파트로스를 국정에 참여시켜서 사실상 양두체제를 구성했다. 이 체제는 상당히 의외의 것이었는지 요세푸스는 선례가 없는 것이라고 적었다. 심지어 안티파트로스는 헤롯과 같이 왕을 암시하는 자주빛의 의복을 입었다.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사}에서 반역죄로 기소된 안티파트로스가 헤롯에게 한 변론을 옮기고 있는데, 안티파트로스는 자신이 이미 아버지와 공동으로 (실질적인) 왕위에 있었으므로 반역 따위를 자기가 꾀할 필요가 없었다고 항변한다.
헤롯이 처음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지원하다가 대세에 따라 장차 아우구스투스가 될 옥타비아누스로 배를 갈아탄 후부터 헤롯과 옥타비아누스는 오랜 기간동안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사투르니누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직후, 헤롯은 자신의 군대를 아라비아에 파병해 사막에 은신한 강도단을 척결하고 자기에게 부채가 있는 아라비아의 토호들에게서 돈을 걷어들였다. 비록 헤롯의 파병이 시리아 총독의 허락 하에 군사행동을 취한 것이긴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아라비아인인 실레우스/Syliaeus의 말만 듣고 분노하여 헤롯에게 부여된 "황제의 친구 / Amici Caesaris"의 지위를 박탈했다. 이로써 헤롯의 지위는 황제의 '예속민'으로 강등당하게 된다.
요세푸스는 적는다.
헤롯이 안티파트로스를 국정파트너로 삼은 사건에는 이런 정치적 사정이 있는 듯 하다. 원래 헤롯대왕과 첫 아내 도리스 사이에서 태어난 장자였던 안티파트로스는, 헤롯이 도리스와 이혼하고 하스모니안 왕가의 계승자인 마리암네와 결혼을 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유배를 당했던 과거가 있다.
표준연표에 따르면, 안티파트로스는 마리암네의 권력이 몰락하던 BC 13년 무렵 다시 권력을 잡아 헤롯의 계승순위 1위가 되었다. 이후 헤롯과 마리암네 사이에서 태어난 (하스모니안 왕가의 정통계승자인) 알렉산드로스와 아리스토불로스 역시 왕위 계승권에 들어오자 안티파트로스는 두 형제를 살해했다.
이어 헤롯대왕이 사망하기 2년 조금 더 전에는 헤롯대왕의 막내동생이자 당시 갈릴리의 분봉왕이던 삼촌 페로라스를 살해했다. 안티파트로스의 계획들이 밝혀진 후 안티파트로스 대신 아켈라오스가 헤롯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로마에 있던 안티파트로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혐의를 받아 시리아 총독이었던 푸블리우스 퀸틸리우스 바루스의 소환령을 받고 유죄가 선고되었고, 유대아로 돌아온 직후 아버지 헤롯에 의해 직접 사형당했다.
헤롯 아켈라오스
헤롯대왕은 사망하기 얼마 전 후계자를 아켈라오스에서 안티파스로 변경하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러나 그는 최후 유언장에서는 다시 아켈라오스를 유대-이두매 왕국의 계승자로 정했다 (Ant. XVII.i.1, XVII.ii.4, Wars I.xxiii.5. ).
아켈라오스의 경우 자신의 형제 안티파트로스의 지위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자신의 집권시점을 안티파트로스가 헤롯과 함께 국정보조를 시작한 시점에 맞추는 것은 타당한 조치로 여겨진다. 아켈라오스가 안티파트로스를 대신해 왕위 계승자로 지명된 것은 헤롯대왕이 죽기 2년 전이다. 중간에 헤롯대왕이 계승자를 한차례 안티파스로 변경하긴 했지만 또 다시 아켈라오스가 계승자로 지명되었다면, 헤롯대왕이 죽기 2년 전부터 아켈라오스는 안티파트로스와 유사한 형태로 국정에 개입했을 수 있다. 만약 헤롯이 BC 1년에 사망한 것이라면, 아켈라오스는 자신의 집권을 안티파트로스가 실각한 시점 (이 경우 BC 4년 하반기)에 맞출 충분한 근거가 된다. 안티파트로스 및 세 형제가 같은 시기에 헤롯의 국정에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가정은 사료가 충분하지 않아 사실여부를 알 수 없다.
집권시점에 대한 소급적용은 고대세계에서 꽤 관용적이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왕들의 재위연도에서도 그런 사례가 발견된다. 헬레니즘 세계에서 재위의 시작은 종종 실제 대관일이 아니라 왕권의 정당성을 얻은 시점으로 소급되었다. 가령, BC 2세기의 폰투스 왕가는 자신들의 조상인 미트리다테스 1세가 키우스(Cius)의 총독을 몰아낸 시점을 BC 336년으로 잡았는데, 사실 폰투스 왕가는 미트리다테스 3세 이전까지는 "왕"이란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로마의 사례 중에는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같은 군인황제들을 들 수 있는데, 로마 역사가 캇시우스 디오는 그들이 적용한 소급시점은 그들이 황제의 권좌에 근접할 만한 권력을 잡은 시점이라고 기록한다.
캇시우스 디오를 인용한다
근세에는 잉글랜드의 국왕 찰스 2세가 대표적인 예로, 실제 대관일은 1660년 5월 29일이었지만, 정치적인 이유에서 자신의 즉위일을 그보다 10여 년 앞선 1649년 1월 30일로 소급적용했다.
물론 헤롯의 아들 셋이 자신들의 집권연대를 소급적용시켰는지에 대해서는 더 분명한 증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헤롯 안티파스의 실제 집권연도
갈릴리의 분봉왕을 맡게된 안티파스가 집권시점을 앞당겨 공표했을 여지 역시 충분하다. 안티파스는 삼촌 페로라스가 죽고 곧 갈릴리를 맡았다. 따라서 갈릴리의 지배자로서의 안티파스의 실질적인 집권시점은 헤롯대왕이 죽기 전 2년 전이 되는 것이다. 헤롯이 BC 1년에 죽었다면 그의 집권시점은 BC 4년 하반기가 된다.
헤롯 필립포스의 집권 20년? 22년?
헤롯의 다른 아들 필립포스의 경우를 보자. 표준 그리스어판 요세푸스 (Ant. XVIII.iv.6)에 따르면, 그는 티베리우스 20년 (AD 33/34년)까지 총 37년을 분봉왕으로 집권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집권시점은 BC 4년이 된다.
그런데 1966년 W. E. Filmer는 요세푸스 저작 사본에 등장하는 "티베리우스 20년"은 "티베리우스 22년"의 오기 임을 논증하면서, 19세기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인 Molkenbuhr가 1517년 파리 본과 1841년 바티칸 본에서는 "티베리우스 22년"임을 보고했음을 제시한다. 이 경우, 헤롯 필립포스의 집권시점은 BC 4년이 아닌 BC 2년 경이 된다.
한편, 1995년 David W. Beyer는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요세푸스 {유대고대사}의 그리스어 에디션들 가운데 AD 1544년 이전에 나온 에디션 가운데 세 점을 제외한 전부가 "티베리우스 22년"으로 표기하고 있음을 확인했고, 이어서 미국 국회도서관에 보존된 5점 역시 "티베리우스 22년"임을 확인했다. 가장 오래된 AD 4-6세기의 사본 역시 "22년"으로 기록한다. 그렇다면 현재 유통되는 그리스어 에디션은 16세기부터 출판상 식자오류를 지닌 에디션에 바탕해 계속해 출판되어 왔다는 뜻이 될 것이다.
만약 요세푸스의 진술처럼 "티베리우스 22년 (즉, AD 36년)"이 "헤롯 필립포스의 총 집권 37년"이었다면, 헤롯이 사망한 시점은 BC 1년이 되며, 필립포스는 헤롯대왕의 사후 분봉왕으로서 집권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이 내용은 1995년 [The Society of Bibllical Literature] 연례학회에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주장도 헛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베이어가 조사한 1544년 이전의 그리스어 판본은 대영박물관과 미국국회도서관 장서들이다. 그가 조사한 사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AD 12세기의 필사본이다. 그런데 이것들보다 더 오래된 요세푸스의 사본들이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존재하고 있는데, 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Codex Ambrosianae F 128 사본이며 AD 11세기에 필사되었다. 그리고 가장 신뢰할만한 필사본으로 여겨지는 Codex Vaticanus Graecus 984은 AD 1354년에 필사되었다. 그리고 이 두 필사본은 "티베리우스 20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해당 숫자들의 필사 정확도가 의심되는 라틴어 필사본은 일단 제외하도록 한다.)
헤롯은 물론 죽을 때까지 통치를 했지만, 집권 중에 아들 안티파트로스를 국정에 참여시켜서 사실상 양두체제를 구성했다. 이 체제는 상당히 의외의 것이었는지 요세푸스는 선례가 없는 것이라고 적었다. 심지어 안티파트로스는 헤롯과 같이 왕을 암시하는 자주빛의 의복을 입었다.
"...However, he governed the nation jointly with his father, being indeed no other than a king already; and he was for that very reason trusted, and the more firmly depended on, for the which he ought himself to have been put to death, as appearing to have betrayed his brethren out of his concern for the preservation of Herod, and not rather out of his ill-will to them, and, before them, to his father himself: and this was the accursed state he was in....2. Now Quintilius Varus was at this time at Jerusalem, being sent to succeed Saturninus as president of Syria, and was come as an assessor to Herod, who had desired his advice in his present affairs; and as they were sitting together, Antipater came upon them, without knowing any thing of the matter; so he came into the palace clothed in purple..." --- {유대고대사} 17.1.1-2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사}에서 반역죄로 기소된 안티파트로스가 헤롯에게 한 변론을 옮기고 있는데, 안티파트로스는 자신이 이미 아버지와 공동으로 (실질적인) 왕위에 있었으므로 반역 따위를 자기가 꾀할 필요가 없었다고 항변한다.
3. Upon Herod's saying this, he was interrupted by the confusion he was in; but ordered Nicolaus, one of his friends, to produce the evidence against Antipater. But in the mean time Antipater lifted up his head, (for he lay on the ground before his father's feet,) and cried out aloud, "Thou, O father, hast made my apology for me; for how can I be a parricide, whom thou thyself confessest to have always had for thy guardian? Thou callest my filial affection prodigious lies and hypocrisy! how then could it be that I, who was so subtle in other matters, should here be so mad as not to understand that it was not easy that he who committed so horrid a crime should be concealed from men, but impossible that he should be concealed from the Judge of heaven, who sees all things, and is present every where? or did not I know what end my brethren came to, on whom God inflicted so great a punishment for their evil designs against thee? And indeed what was there that could possibly provoke me against thee? Could the hope of being king do it? I was a king already. Could I suspect hatred from thee? No. Was not I beloved by thee? And what other fear could I have? Nay, by preserving thee safe, I was a terror to others. Did I want money? No; for who was able to expend so much as myself? Indeed, father, had I been the most execrable of all mankind, and had I had the soul of the most cruel wild beast, must I not have been overcome with the benefits thou hadst bestowed upon me? whom, as thou thyself sayest, thou broughtest [into the palace]; whom thou didst prefer before so many of thy sons; whom thou madest a king in thine own lifetime, and, by the vast magnitude of the other advantages thou bestowedst on me, thou madest me an object of envy.
...(전략) 도대체 제가 아버지께 반역을 꾀할 이유가 뭡니까? 제가 왕이라도 되고 싶어서 그랬습니까? 저는 이미 왕이었습니다! 혹시 아버지의 미움을 받고있다고 제가 의심했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아버지의 총애를 받지 않았습니까? ...(후략) --- {The Wars Of The Jews} Book1, Ch.32.3 / 번역: 최광민
헤롯이 처음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지원하다가 대세에 따라 장차 아우구스투스가 될 옥타비아누스로 배를 갈아탄 후부터 헤롯과 옥타비아누스는 오랜 기간동안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사투르니누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직후, 헤롯은 자신의 군대를 아라비아에 파병해 사막에 은신한 강도단을 척결하고 자기에게 부채가 있는 아라비아의 토호들에게서 돈을 걷어들였다. 비록 헤롯의 파병이 시리아 총독의 허락 하에 군사행동을 취한 것이긴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아라비아인인 실레우스/Syliaeus의 말만 듣고 분노하여 헤롯에게 부여된 "황제의 친구 / Amici Caesaris"의 지위를 박탈했다. 이로써 헤롯의 지위는 황제의 '예속민'으로 강등당하게 된다.
요세푸스는 적는다.
"...Caesar was provoked when this was said, and asked no more than this one question, both of Herod's friends that were there, and of his own friends, who were come from Syria, Whether Herod had led an army thither? And when they were forced to confess so much, Caesar, without staying to hear for what reason he did it, and how it was done, grew very angry, and wrote to Herod sharply. The sum of his epistle was this, that whereas of old he had used him as his friend, he should now use him as his subject....” --- {유대고대사} 16.9.3
헤롯이 안티파트로스를 국정파트너로 삼은 사건에는 이런 정치적 사정이 있는 듯 하다. 원래 헤롯대왕과 첫 아내 도리스 사이에서 태어난 장자였던 안티파트로스는, 헤롯이 도리스와 이혼하고 하스모니안 왕가의 계승자인 마리암네와 결혼을 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유배를 당했던 과거가 있다.
표준연표에 따르면, 안티파트로스는 마리암네의 권력이 몰락하던 BC 13년 무렵 다시 권력을 잡아 헤롯의 계승순위 1위가 되었다. 이후 헤롯과 마리암네 사이에서 태어난 (하스모니안 왕가의 정통계승자인) 알렉산드로스와 아리스토불로스 역시 왕위 계승권에 들어오자 안티파트로스는 두 형제를 살해했다.
이어 헤롯대왕이 사망하기 2년 조금 더 전에는 헤롯대왕의 막내동생이자 당시 갈릴리의 분봉왕이던 삼촌 페로라스를 살해했다. 안티파트로스의 계획들이 밝혀진 후 안티파트로스 대신 아켈라오스가 헤롯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로마에 있던 안티파트로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혐의를 받아 시리아 총독이었던 푸블리우스 퀸틸리우스 바루스의 소환령을 받고 유죄가 선고되었고, 유대아로 돌아온 직후 아버지 헤롯에 의해 직접 사형당했다.
헤롯 아켈라오스
헤롯대왕은 사망하기 얼마 전 후계자를 아켈라오스에서 안티파스로 변경하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러나 그는 최후 유언장에서는 다시 아켈라오스를 유대-이두매 왕국의 계승자로 정했다 (Ant. XVII.i.1, XVII.ii.4, Wars I.xxiii.5. ).
아켈라오스의 경우 자신의 형제 안티파트로스의 지위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자신의 집권시점을 안티파트로스가 헤롯과 함께 국정보조를 시작한 시점에 맞추는 것은 타당한 조치로 여겨진다. 아켈라오스가 안티파트로스를 대신해 왕위 계승자로 지명된 것은 헤롯대왕이 죽기 2년 전이다. 중간에 헤롯대왕이 계승자를 한차례 안티파스로 변경하긴 했지만 또 다시 아켈라오스가 계승자로 지명되었다면, 헤롯대왕이 죽기 2년 전부터 아켈라오스는 안티파트로스와 유사한 형태로 국정에 개입했을 수 있다. 만약 헤롯이 BC 1년에 사망한 것이라면, 아켈라오스는 자신의 집권을 안티파트로스가 실각한 시점 (이 경우 BC 4년 하반기)에 맞출 충분한 근거가 된다. 안티파트로스 및 세 형제가 같은 시기에 헤롯의 국정에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가정은 사료가 충분하지 않아 사실여부를 알 수 없다.
집권시점에 대한 소급적용은 고대세계에서 꽤 관용적이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왕들의 재위연도에서도 그런 사례가 발견된다. 헬레니즘 세계에서 재위의 시작은 종종 실제 대관일이 아니라 왕권의 정당성을 얻은 시점으로 소급되었다. 가령, BC 2세기의 폰투스 왕가는 자신들의 조상인 미트리다테스 1세가 키우스(Cius)의 총독을 몰아낸 시점을 BC 336년으로 잡았는데, 사실 폰투스 왕가는 미트리다테스 3세 이전까지는 "왕"이란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로마의 사례 중에는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같은 군인황제들을 들 수 있는데, 로마 역사가 캇시우스 디오는 그들이 적용한 소급시점은 그들이 황제의 권좌에 근접할 만한 권력을 잡은 시점이라고 기록한다.
캇시우스 디오를 인용한다
"...For they did not succeed one another legitimately, but each of them, even while his rival was alive and still ruling, believed himself to be emperor from the moment that he even got a glimpse of the throne.." --- Dio, {Roman History}, 66.17.5
...그들은 합법적으로 [아우구스투스 직을]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수가 아직 살아서 통치하고 있는 동안에도 권좌에 오를 수 있을 낌새가 비쳐진 순간부터 그들 스스로를 황제라고 여겼다.....캇시우스 디오, {로마사} 66.17.5 / 번역: 최광민
근세에는 잉글랜드의 국왕 찰스 2세가 대표적인 예로, 실제 대관일은 1660년 5월 29일이었지만, 정치적인 이유에서 자신의 즉위일을 그보다 10여 년 앞선 1649년 1월 30일로 소급적용했다.
물론 헤롯의 아들 셋이 자신들의 집권연대를 소급적용시켰는지에 대해서는 더 분명한 증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헤롯 안티파스의 실제 집권연도
갈릴리의 분봉왕을 맡게된 안티파스가 집권시점을 앞당겨 공표했을 여지 역시 충분하다. 안티파스는 삼촌 페로라스가 죽고 곧 갈릴리를 맡았다. 따라서 갈릴리의 지배자로서의 안티파스의 실질적인 집권시점은 헤롯대왕이 죽기 전 2년 전이 되는 것이다. 헤롯이 BC 1년에 죽었다면 그의 집권시점은 BC 4년 하반기가 된다.
헤롯 필립포스의 집권 20년? 22년?
헤롯의 다른 아들 필립포스의 경우를 보자. 표준 그리스어판 요세푸스 (Ant. XVIII.iv.6)에 따르면, 그는 티베리우스 20년 (AD 33/34년)까지 총 37년을 분봉왕으로 집권했다.
6. About this time it was that Philip, Herod's ' brother, departed this life, in the twentieth year of the reign of Tiberius, (14) after he had been tetrarch of Trachonitis and Gaulanitis, and of the nation of the Bataneans also, thirty-seven years. He had showed himself a person of moderation and quietness in the conduct of his life and government; he constantly lived in that country which was subject to him; he used to make his progress with a few chosen friends; his tribunal also, on which he sat in judgment, followed him in his progress; and when any one met him who wanted his assistance, he made no delay, but had his tribunal set down immediately, wheresoever he happened to be, and sat down upon it, and heard his complaint: he there ordered the guilty that were convicted to be punished, and absolved those that had been accused unjustly. He died at Julias; and when he was carried to that monument which he had already erected for himself beforehand, he was buried with great pomp. His principality Tiberius took, (for he left no sons behind him,) and added it to the province of Syria, but gave order that the tributes which arose from it should be collected, and laid up in his tetrachy.
결과적으로 그의 집권시점은 BC 4년이 된다.
그런데 1966년 W. E. Filmer는 요세푸스 저작 사본에 등장하는 "티베리우스 20년"은 "티베리우스 22년"의 오기 임을 논증하면서, 19세기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인 Molkenbuhr가 1517년 파리 본과 1841년 바티칸 본에서는 "티베리우스 22년"임을 보고했음을 제시한다. 이 경우, 헤롯 필립포스의 집권시점은 BC 4년이 아닌 BC 2년 경이 된다.
한편, 1995년 David W. Beyer는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요세푸스 {유대고대사}의 그리스어 에디션들 가운데 AD 1544년 이전에 나온 에디션 가운데 세 점을 제외한 전부가 "티베리우스 22년"으로 표기하고 있음을 확인했고, 이어서 미국 국회도서관에 보존된 5점 역시 "티베리우스 22년"임을 확인했다. 가장 오래된 AD 4-6세기의 사본 역시 "22년"으로 기록한다. 그렇다면 현재 유통되는 그리스어 에디션은 16세기부터 출판상 식자오류를 지닌 에디션에 바탕해 계속해 출판되어 왔다는 뜻이 될 것이다.
David W. Beyer, {Jesephus Reexamined: Unraveling the 22 Years of Tiberius} in {Chronos, Kairos, Christos II}
Steinmann:
http://historiantigua.cl/wp-content/uploads/2011/08/When_Did_Herod_the_Great_Reign.pdf
만약 요세푸스의 진술처럼 "티베리우스 22년 (즉, AD 36년)"이 "헤롯 필립포스의 총 집권 37년"이었다면, 헤롯이 사망한 시점은 BC 1년이 되며, 필립포스는 헤롯대왕의 사후 분봉왕으로서 집권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이 내용은 1995년 [The Society of Bibllical Literature] 연례학회에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주장도 헛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베이어가 조사한 1544년 이전의 그리스어 판본은 대영박물관과 미국국회도서관 장서들이다. 그가 조사한 사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AD 12세기의 필사본이다. 그런데 이것들보다 더 오래된 요세푸스의 사본들이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존재하고 있는데, 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Codex Ambrosianae F 128 사본이며 AD 11세기에 필사되었다. 그리고 가장 신뢰할만한 필사본으로 여겨지는 Codex Vaticanus Graecus 984은 AD 1354년에 필사되었다. 그리고 이 두 필사본은 "티베리우스 20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해당 숫자들의 필사 정확도가 의심되는 라틴어 필사본은 일단 제외하도록 한다.)
草人 최광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