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12-07-06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모든 글과 번역문 들에 대해 (1) 복제-배포, (2)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 (3) 화면캡처를 금하며, (4) 인용 시 글의 URL 주소 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 최광민] 예수 vs. 예수 #07: 삼위일체 개념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요약
발렌티누스파 계열 그노시스파들의 에온발출설과 보편교회의 삼위일체론을 비교하고, 왜 AD 2-4세기의 기독교 교부들이 발렌티누스의 발출 개념을 거부했는지 살펴본다.
목차
© 최광민 (Kwangmin Choi). 2012-07-06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모든 글과 번역문 들에 대해 (1) 복제-배포, (2)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 (3) 화면캡처를 금하며, (4) 인용 시 글의 URL 주소 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 최광민] 예수 vs. 예수 #07: 삼위일체 개념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요약
발렌티누스파 계열 그노시스파들의 에온발출설과 보편교회의 삼위일체론을 비교하고, 왜 AD 2-4세기의 기독교 교부들이 발렌티누스의 발출 개념을 거부했는지 살펴본다.
목차
- 메모
- 기억
- 하나, 셋, 삼위일체 (Trinity), 삼위-일체 (Tri-Unity)
- 우시아, 휘포스타시스
- 세 신적존재: 성부, 성자, 성령
-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아브라함이 만난 '세 사람'
- 알렉산드리아의 발렌티누스
- 발렌티누스파 계열 그노시스의 신관 및 세계관
- 모나드
- 디아드
- 테트라드
- 오그도아드
- 데카드
- 도데카드
- 플레로마
- 우주적 비극의 시작
- 소피아의 타락
- 케노마 혹은 휘스테레마
- 그리스도와 회복
- 발렌티누스의 '삼위일체'?
- 알렉산드리아 (파문)사제 아리우스의 진술
- 발출? ἐκπόρευσις? προβολή?
- 카르타고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의 진술
- 안키라 주교 마르켈루스의 진술
- 발렌티누스의 '세 휘포스타시스 ὑπόστασις '와 '세 프로소폰 πρόσωπον'?
- 발렌티누스의 {세 본성에 관하여}? {삼분론}?
- 맺음말
- 발렌티누스의 휘포스타시스, 아리우스의 휘포스타시스, 마르켈루스의 휘포스타시스, 보편교회의 휘포스타시스
§ 메모
게시판 방문자로부터 "삼위일체 교리는 원래 AD 2세기 영지주의/그노시스 이단자인 발렌티누스가 발명한 개념이었는데, 이를 후대의 기독교가 훔친 것이 아닌가?"란 질문을 받았다.
§ 기억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중학교 1학년 무렵이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동네 교회 (예수교 장로회 합동 교단)의 중등부 모임에서는 매달 마지막 주에 특별주제를 선정해서 공부한 후 돌아가면서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었는데, 나는 '기독교 이단 분파의 교리'가 가장 흥미로운 주제였기에 그걸 내 주제로 정했다.
전도사께 빌렸던 책들의 깊이가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교보문고에 가서 좀 두꺼운 책들도 들춰보곤 했는데, 당시 내가 본 책들 대부분은 미국에서 나온 책을 번역한 것들이라서, 그 책들에 등장하는 많은 이단들은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 '몰몬교'를 제외하면 내가 서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단들이 아니었다. 가령, '유니테리언-유니버설리스트', '크리스천 사이언스', '신사고 (New Thought)', '유니티' 라든지 하는 종파는 미국에 오기 전까지는 한국에서 만나본 적조차 없다. 당시 나는 대체로 통일교니 전도관이니 하는 한국 발 이단들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기독교 역사상 많은 신학적/교리적 '이단'들이 있고 그 정도도 각양각색이지만, 전통적인 조직신학 분류법에 따라 대체로 (1) 신론, (2) 그리스도론, (3) 성령론, (4) 구원론, (5) 교회론, (6) 종말론...등의 순서로 '이단'의 엄중성을 나눠 볼 수는 있다. 사회적인 물의를 주로 일으키는 그룹들은 주로 시한부 종말론과 관련된 그룹들이지만, 이단 그 자체만 본다면 신론 및 그리스도론과 관련된 이단이 아마도 가장 깊이 살펴봐야 할 그룹이라고 생각한다. AD 2-5세기의 이단논쟁도 대부분 신론과 그리스도론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신론'과 '그리스도론'은 에큐메니컬 운동의 테두리를 정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된다. 가령, '신론'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정교회, 로마카톨릭, 프로테스탄트 제 교파 뿐 아니라, 칼데아 (네스토리우스파) 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이집트 꼽트교회 간에 차이는 사라진다. '그리스도론'에 초점을 맞추면, 그제서야 양성파 네스토리우스파 및 단/합성파인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나 이집트 꼽트교회 등과 대척점이 생긴다. 그러나 이 경우라도, 정교회-로마카톨릭-프로테스탄트는 '신론'과 '그리스도론'에 관한 한 교리 상 거의 아무런 차이가 없다. 현대 '에큐메니컬' 운동에 가장 열정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유주의 계열 프로테스탄트들의 많은 신학자들의 '신론'과 '그리스도론'이 AD 2-5세기에 발표된 일련의 '에큐메니컬 신조'들에서 이탈한 것은 아이러니라 하겠다.
기독교 역사상 많은 신학적/교리적 '이단'들이 있고 그 정도도 각양각색이지만, 전통적인 조직신학 분류법에 따라 대체로 (1) 신론, (2) 그리스도론, (3) 성령론, (4) 구원론, (5) 교회론, (6) 종말론...등의 순서로 '이단'의 엄중성을 나눠 볼 수는 있다. 사회적인 물의를 주로 일으키는 그룹들은 주로 시한부 종말론과 관련된 그룹들이지만, 이단 그 자체만 본다면 신론 및 그리스도론과 관련된 이단이 아마도 가장 깊이 살펴봐야 할 그룹이라고 생각한다. AD 2-5세기의 이단논쟁도 대부분 신론과 그리스도론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신론'과 '그리스도론'은 에큐메니컬 운동의 테두리를 정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된다. 가령, '신론'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정교회, 로마카톨릭, 프로테스탄트 제 교파 뿐 아니라, 칼데아 (네스토리우스파) 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이집트 꼽트교회 간에 차이는 사라진다. '그리스도론'에 초점을 맞추면, 그제서야 양성파 네스토리우스파 및 단/합성파인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나 이집트 꼽트교회 등과 대척점이 생긴다. 그러나 이 경우라도, 정교회-로마카톨릭-프로테스탄트는 '신론'과 '그리스도론'에 관한 한 교리 상 거의 아무런 차이가 없다. 현대 '에큐메니컬' 운동에 가장 열정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유주의 계열 프로테스탄트들의 많은 신학자들의 '신론'과 '그리스도론'이 AD 2-5세기에 발표된 일련의 '에큐메니컬 신조'들에서 이탈한 것은 아이러니라 하겠다.
이 글에서는 '신론'에 관련된 역사적인 논쟁만 촛점을 맞추도록 하겠다.
기독교의 '신론'은 '성부'를 다루기도 하지만 대체로 '삼위일체'적인 신관을 다루게 된다. 따라서 이 '기독교 신론'에 따른 이단은 '비-삼위일체적' 교리를 가지는 그룹들이 된다. 따라서 이들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려면 역사적 보편교회가 가르쳐 온 '삼위일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져야만 할 것이다.
당시 (그리고 현재도) 교회에서 흔히 권장되는 나긋나긋한 신앙서적들은 '삼위일체'의 공식에 대해서는 설명해 주지만 보통 그 역사적 맥락을 깊이있게 정확히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한편, 중학 시절 독실한 여호와의 증인 신자이던 친구가 당시 삼위일체를 반박하는 자료라며 읽어보라고 건네주었던 여호와의 증인 기관지 {파수대}의 특별판 {삼위일체를 믿어야 하는가?}는 꽤 흥미로운 자료이긴 했지만, 거기 인용된 (다소 반-삼위일체적으로 들리는) 기독교 초기 교부들의 발언들이 문맥이 제거된 채로 소개되고 있어서 그 잡지의 설명을 액면 그대로 믿긴 어려웠다.
사실 {예수 vs. 예수 #2: 예수는 언제부터 神이었을까?}란 내 글은 그 {파수대} 특별판에 대한 나의 답이기도 하다. (참고: http://kwangmin.blogspot.com/2015/07/vs-02.html)
중학생 시절 그렇게 AD 5세기 무렵까지 고대교회에서 간헐적으로 유행했던 다양한 이단들, 특히 다양한 변형을 가진 '양태론'에 대해 공부한 후 나는 뭔가 큰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당시 주일학교에서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가장 흔하게 사용되던 비유는 "얼음-물-수증기"였기 때문이었다. 더 말할 나위없이 이 비유 자체는 전형적인 양태론이다.
참고로 "성부-성자-성령이 같은 본질에 구별되는 세 위로 구성되어 있다는 '삼위일체론'이 AD 4세기에 이르러서야 로마황제의 강압에 의해 투표로 결정되었다는", 특별히 '인간' 예수의 지위가 그때에 가서야 '신'으로 '승급'되었다는 꽤 널리 퍼진 속설과 달리, 초기 기독교에서 널리 퍼진 형태의 이단은 (그노시스를 제외한다면) 오직 한 존재가 '성부-성자-성령'의 세 형태로 현현방식만 달리한 것이라는 '양태론'이었다. 특별히 다신교를 버리고 '일신교'인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 가운데서 등장한 이해였던 듯 하다.
AD 2-3세기에 활동한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가 양태론자들을 비판한 {프락세아스 반박}을 읽어보자.
비-삼위일체적 양태론은 다양한 변형들이 있었는데, 예수의 '인간성'이 보다 더 강조된 AD 3세기 중반 사모사타 출신 안티오키아 (파문)주교 파울로스의 주장은 현재도 자유주의 기독교 진영에서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소위 "신에게 휘둘려 산 사나이 인간 예수"에 대한 담론이다.
기독교의 '신론'은 '성부'를 다루기도 하지만 대체로 '삼위일체'적인 신관을 다루게 된다. 따라서 이 '기독교 신론'에 따른 이단은 '비-삼위일체적' 교리를 가지는 그룹들이 된다. 따라서 이들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려면 역사적 보편교회가 가르쳐 온 '삼위일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져야만 할 것이다.
당시 (그리고 현재도) 교회에서 흔히 권장되는 나긋나긋한 신앙서적들은 '삼위일체'의 공식에 대해서는 설명해 주지만 보통 그 역사적 맥락을 깊이있게 정확히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한편, 중학 시절 독실한 여호와의 증인 신자이던 친구가 당시 삼위일체를 반박하는 자료라며 읽어보라고 건네주었던 여호와의 증인 기관지 {파수대}의 특별판 {삼위일체를 믿어야 하는가?}는 꽤 흥미로운 자료이긴 했지만, 거기 인용된 (다소 반-삼위일체적으로 들리는) 기독교 초기 교부들의 발언들이 문맥이 제거된 채로 소개되고 있어서 그 잡지의 설명을 액면 그대로 믿긴 어려웠다.
사실 {예수 vs. 예수 #2: 예수는 언제부터 神이었을까?}란 내 글은 그 {파수대} 특별판에 대한 나의 답이기도 하다. (참고: http://kwangmin.blogspot.com/2015/07/vs-02.html)
여호와의 증인 워치타워협회, {파수대: 삼위일체를 믿어야 하는가?}
중학생 시절 그렇게 AD 5세기 무렵까지 고대교회에서 간헐적으로 유행했던 다양한 이단들, 특히 다양한 변형을 가진 '양태론'에 대해 공부한 후 나는 뭔가 큰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당시 주일학교에서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가장 흔하게 사용되던 비유는 "얼음-물-수증기"였기 때문이었다. 더 말할 나위없이 이 비유 자체는 전형적인 양태론이다.
참고로 "성부-성자-성령이 같은 본질에 구별되는 세 위로 구성되어 있다는 '삼위일체론'이 AD 4세기에 이르러서야 로마황제의 강압에 의해 투표로 결정되었다는", 특별히 '인간' 예수의 지위가 그때에 가서야 '신'으로 '승급'되었다는 꽤 널리 퍼진 속설과 달리, 초기 기독교에서 널리 퍼진 형태의 이단은 (그노시스를 제외한다면) 오직 한 존재가 '성부-성자-성령'의 세 형태로 현현방식만 달리한 것이라는 '양태론'이었다. 특별히 다신교를 버리고 '일신교'인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 가운데서 등장한 이해였던 듯 하다.
AD 2-3세기에 활동한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가 양태론자들을 비판한 {프락세아스 반박}을 읽어보자.
Simplices enim quique, ne dixerim imprudentes et idiotae, quae maior semper credentium pars est, quoniam et ipsa regula fidei a pluribus diis saeculi ad unicum et verum deum transfert, non intellegentes unicum quidem sed cum sua oeconomia essecredendum, expavescunt ad oeconomiam. numerum et dispositionem trinitatis divisionem praesumunt unitatis, quando unitas ex semetipsa derivans trinitatem non destruatur ab illa sed administretur. itaque duos et tres iam iactitant a nobis praedicari, se vero unius dei cultores praesumunt, quasi non et unitas irrationaliter collecta haeresim faciat et trinitas rationaliter expensa veritatem constituat.
The simple, indeed, (I will not call them unwise and unlearned) who always constitute the majority of believers, are startled at the dispensation (of the Three in One), on the ground that their very rule of faith withdraws them from the world’s plurality of gods to the one only true God; not understanding that, although He is the one only God, He must yet be believed in with His own oikonomia [economy]. The numerical order and distribution of the Trinity they assume to be a division of the Unity. whereas the Unity which derives the Trinity out of its own self is so far from being destroyed, that it is actually supported by it. They are constantly throwing out against us that we are preachers of two gods and three gods, while they take to themselves pre-eminently the credit of being worshippers of the One God;; just as if the Unity itself with irrational deductions did not produce heresy, and the Trinity rationally considered constitute the truth. --- Tertullian, {Against Praxeas}, 3, in ANF, vol. 3).
진실로, 신자들 가운데 늘 다수를 차지하는 이 단순한 사람들은 (나는 그들을 멍청하다거나 무지한 자들이라고 부르진 않겠지만), (한 분 안에 셋이 있다는) 이 경세에 깜짝 놀라는데, 그들이 세상의 다신교를 버리고 오직 한 분의 진정한 신을 믿는 것을 가장 근본적인 신조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신이 바로 그 유일한 신임에도 불구하고 신 자신의 경세 안에서 믿어져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삼위일체의 수와 순서를 생각하면서 이것이 단일한 신을 나누게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단일성 자체에서 유도되는 셋은 단일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단일성에 의해 지지되는 것이다. 우리를 지속적으로 반대하며 우리가 두 신 혹은 세 신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들이야말로 유일신을 섬긴다고 주장한다. 타당치 못하게 이해된 단일성 자체가 이단은 아니겠지만, 올바로 이해된 삼위성이 진리를 구성한다. --- 테르툴리아누스, {프락세아스 반박} / 번역: 최광민
비-삼위일체적 양태론은 다양한 변형들이 있었는데, 예수의 '인간성'이 보다 더 강조된 AD 3세기 중반 사모사타 출신 안티오키아 (파문)주교 파울로스의 주장은 현재도 자유주의 기독교 진영에서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소위 "신에게 휘둘려 산 사나이 인간 예수"에 대한 담론이다.
사모사타의 파울로스가 가르친 양태론은 이런 식이다:
성부-성자-성령은 셋이 아닌 단 하나의 존재이며 따라서 "신의 로고스/말씀"는 (인간 속의 이성/로고스와 마찬가지로) '신의 속성'으로서 성부 안에 존재하다가 이 세상의 창조 전에 '성자'로서 낳아졌으며,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된 세례 때 성령에 의해서 "인간 예수"의 정신과 합체/지배하여 활동한 것이 된다. 그러기에 "인간 예수"는 기본적으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으로나 명백한 인간이지만, 그에게 깃든 "로고스-성자"의 영향력 하에 "그리스도"로서 활동한 것이 된다. (즉, 예수와 그리스도는 분리된다) 따라서 이 "예수"는 "성육신한 신"이 아닌 소위, "신의 로고스/성자에 사로잡혀 산 (풍운아) 인간 예수"일 뿐이다. 이 주장은 훗날 니케아파 뿐 아니라 아리우스파에 의해서도 배척되었다. 아리우스파는 "인간 예수에게 신의 한 양태인 성자가 깃들었다"고 본 것이 아니라, "성자가 인간이 되었다"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범-아리우스파 교리의 핵심은 "성자와 성부의 질적 차이"에 있다. 따라서 범-아리우스파는 통상적인 양태론자들은 아니다.
중학생 시절, 한번은 교회의 어른들을 상대로 그 분들이 역사적 교회가 가르쳐 온 '삼위일체'를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질문을 던져서 돌아오는 답을 정리해 본 적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 분들 상당수가 '양태론'의 입장으로 '삼위일체'를 이해하고 있었다. 더러는 '삼신론'으로 삼위일체를 이해하고 있었다. 어떤 분들은 {니케아 신조}와 아리우스파의 주장 사이에 양발을 걸쳐둔 준-아리우스파의 입장처럼 성부-성자-성령이 서로 '비슷하다'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었다. 물론 정확히 알고 계신 분도 소수 있었다. 이것은 내게 꽤 큰 충격이었는데, 이런 신론들은 사실 프로테스탄트 교단들, 로마카톨릭, 혹은 정교회 모두에게 이단이기 때문이다.
이 조사는 내게 또 다른 질문을 던져주었다.
기독교도들이 위대한 순교자들로 고백하는 AD 1세기에서 4세기 초반까지의 순교자들 개개인들이 정확히 어떤 신론을 가지고 있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 시절은 삼위일체 개념이 정교화 되는 시점으로, AD 325년 니케아 회의 이전에도 신관과 관련된 (특별히 성부-성자의 관계, 성자의 신성과 속성에 관련된) 다양한 논쟁들이 있었고 또 지역의 주교회의들에서 몇몇을 공식적인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따라서 순교자들 가운데는 후대에 니케아 회의에서 확정된 대로의 그 '신론', 즉 '정통파'의 신론을 따르던 이들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은 다양한 형태로 '신론'을 이해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가령 어떤 지역의 순교자들이 양태론을 은밀히 혹은 공개적으로 가르친 주교/감독의 치리에 속한 교구의 신자였기에 자신들이 신학적 오류를 가진 줄 생각조차 못했다면, 그런 그들의 순교는 무의미해지는 것일까? 그들은 결국 이단자였을 뿐일까? 그렇다면, 신학적으로 아주 보수적이었던 장로교단에 속했던 내 모교회의 신심 깊으나 '양태론적' 혹은 '삼신론적' 신론으로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분들의 구원은 어떻게 담보되는 것일까?
내 질문은 신학교육을 받은 성직자나 신학자가 아닌, (한국의 대부분 프로테스탄트 교단들이 신자들에게 깊이 가르치지 않는) 니케아 신조나 프로테스탄트의 대표적인 신조인 웨스트민트터 신조 등 일련의 정통신조들에 정의된 삼위일체론을 깊게 접해 보지 못한 일반 신자를 향한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오류'라는 관점에서만 본다면, 교리를 훈련받은 성직자나 신학자가 저지르는 오류나 훈련받지 않은 일반 신자의 오류의 '내용'은 같다. 신은 이 두 그룹을 다른 기준으로 심판하실 것인가? 혹은 후자에 대해서는 설령 '신론'에서의 오류가 있었더라도 관대하게 용서할 것인가?
이런 '핵심교리들'을 이해하는 자의 신앙은 그렇지 못한 자의 신앙보다 '나은' 것인가?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12살 무렵에 사촌누나가 생일선물로 사줬던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소설집 한 권이 있었다. 톨스토이가 러시아 민간설화를 수집해 번안한 작품들로{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바보 이반}, {사람에게는 땅이 얼마나 필요한가} 등의 유명한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내가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작품은 볼가 지방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인 {세 은자 The Three Hermits}란 단편이다.
내용은 이렇다:
{히브리서}에서 성자(예수)는 성부의 "본체" (ὑπόστασις, 휘포스타시스)의 "각인된 형상" (χαρακτὴρ, 카락텔)이며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즉, 성자 (예수)는 성부의 영광과 본체/실체/본성이 정확히 드러난 존재다.
물론 이 경우의 '휘포스타시스'는 아직 후대의 삼위일체 논쟁에 등장하는 그 용어의 의미를 담지 않고, 다만 '본체', '실체' 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휘포스타시스 (ὑπόστᾰσις) 란 용어에 대한 AD 4세기 초반까지의 보편교회의 이해는 처음부터 고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단어는 대체로 '존재' 혹은 '실체'와 같은 의미로 이해되었다. 기독교의 시작 전에 이미 그리스/로마 스토아 철학의 개념으로 자리잡았던 철학용어 우시아 (οὐσία') 역시 보편교회는 이 단어를 '본질' 혹은 '본체'로 이해했는데, '휘포스타시스'보다는 '우시아'가 보다 본질적인 실체를 뜻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늘 확실히 구분되어 사용된 것도 아니었다. AD 2세기와 3세기의 타티아노스와 오리게네스 등이 위와 같은 의미로 휘포스타시스와 우시아를 구분했던 사람들이었고, 또 AD 325년의 니케아 회의도 이런 의미로 휘포스타시스와 우시아를 사용했다.
또한 성자/예수는 성부의 형상/형체/본체/실체 (모르페, μορφῇ)이기도 하다. AD 52-62년 사이 필리피 (=빌립보)의 기독교인들에게 보낸 친서로 공히 인정되는 바울의 편지에서는 인간으로 오기 전과 부활 이후의 예수 (=성자)는 이렇게 묘사된다.
니케아 회의 한 세대 후에 동일본질파의 삼위일체를 정교히 가다듬은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리아 마자카의 주교 바실레오스는 두 단어를 범주론의 입장에서 보다 확실히 구분지었다.
아리우스파와 반-아리우스파 모두 '우시아'와 '휘포스타시스'에 관한 합의된 용어의 통일없이 약간씩 다른 의미로 두 용어를 해석하고 적용시켰기 때문에, 양 측의 논쟁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이 용어가 어떤 문맥 상에서 사용되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AD 4세기에 이 용어의 용례를 두고 벌어진 신학적 논쟁들에 AD 5세기 이후에 고정된 의미를 적용시키면 해석이 매우 곤란해질 수 있다.
나는 지금도 {니케아 신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를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 혹은 감동을 잊지 못한다. 당시 내가 발견한 또 한가지 문제는 장로교단과 감리교단이 주류인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교단 대부분이 공중예배에서 {사도신조}만 고백할 뿐, 루터교단과 성공회 등과는 달리 고대 정통파 교회들의 표준신조들이었던 {니케아 신조}/{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나 {칼케돈 신조} 등은 철저하게 공중예배에서 무시한다는 점이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세례준비 때 삼위일체에 대한 아주 초보적인 개념만 교육받은 후론, 이 주제에 대해 아주 피상적인 이해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신조}들에 정리된 구체적 개념에 반복해 노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중학생 시절, 한번은 교회의 어른들을 상대로 그 분들이 역사적 교회가 가르쳐 온 '삼위일체'를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질문을 던져서 돌아오는 답을 정리해 본 적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 분들 상당수가 '양태론'의 입장으로 '삼위일체'를 이해하고 있었다. 더러는 '삼신론'으로 삼위일체를 이해하고 있었다. 어떤 분들은 {니케아 신조}와 아리우스파의 주장 사이에 양발을 걸쳐둔 준-아리우스파의 입장처럼 성부-성자-성령이 서로 '비슷하다'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었다. 물론 정확히 알고 계신 분도 소수 있었다. 이것은 내게 꽤 큰 충격이었는데, 이런 신론들은 사실 프로테스탄트 교단들, 로마카톨릭, 혹은 정교회 모두에게 이단이기 때문이다.
이 조사는 내게 또 다른 질문을 던져주었다.
기독교도들이 위대한 순교자들로 고백하는 AD 1세기에서 4세기 초반까지의 순교자들 개개인들이 정확히 어떤 신론을 가지고 있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 시절은 삼위일체 개념이 정교화 되는 시점으로, AD 325년 니케아 회의 이전에도 신관과 관련된 (특별히 성부-성자의 관계, 성자의 신성과 속성에 관련된) 다양한 논쟁들이 있었고 또 지역의 주교회의들에서 몇몇을 공식적인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따라서 순교자들 가운데는 후대에 니케아 회의에서 확정된 대로의 그 '신론', 즉 '정통파'의 신론을 따르던 이들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은 다양한 형태로 '신론'을 이해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가령 어떤 지역의 순교자들이 양태론을 은밀히 혹은 공개적으로 가르친 주교/감독의 치리에 속한 교구의 신자였기에 자신들이 신학적 오류를 가진 줄 생각조차 못했다면, 그런 그들의 순교는 무의미해지는 것일까? 그들은 결국 이단자였을 뿐일까? 그렇다면, 신학적으로 아주 보수적이었던 장로교단에 속했던 내 모교회의 신심 깊으나 '양태론적' 혹은 '삼신론적' 신론으로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분들의 구원은 어떻게 담보되는 것일까?
내 질문은 신학교육을 받은 성직자나 신학자가 아닌, (한국의 대부분 프로테스탄트 교단들이 신자들에게 깊이 가르치지 않는) 니케아 신조나 프로테스탄트의 대표적인 신조인 웨스트민트터 신조 등 일련의 정통신조들에 정의된 삼위일체론을 깊게 접해 보지 못한 일반 신자를 향한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오류'라는 관점에서만 본다면, 교리를 훈련받은 성직자나 신학자가 저지르는 오류나 훈련받지 않은 일반 신자의 오류의 '내용'은 같다. 신은 이 두 그룹을 다른 기준으로 심판하실 것인가? 혹은 후자에 대해서는 설령 '신론'에서의 오류가 있었더라도 관대하게 용서할 것인가?
이런 '핵심교리들'을 이해하는 자의 신앙은 그렇지 못한 자의 신앙보다 '나은' 것인가?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12살 무렵에 사촌누나가 생일선물로 사줬던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소설집 한 권이 있었다. 톨스토이가 러시아 민간설화를 수집해 번안한 작품들로{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바보 이반}, {사람에게는 땅이 얼마나 필요한가} 등의 유명한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내가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작품은 볼가 지방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인 {세 은자 The Three Hermits}란 단편이다.
한 주교가 배를 타고 솔로베츠키 (Solovetsky) 수도원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 배에는 성지순례를 가는 순례자들도 많이 타고 있었다. 주교는 한 어부가 사람들에게 그 바다의 한 섬에 사람들이 성자라 여기는 세 노인이 함께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엿듣고 그 섬에 내려 세 노인을 만나보고자 한다. 작은 배를 타고 섬에 내려 노인들을 만나 주교는 그들이 "자신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신을 섬기는지"를 물어보는데, 노인들은 자신들은 신을 어떻게 섬겨야 할지 모르겠고, 그저 자기 자신들을 돌보며 살아갈 뿐이라고 답한다. 노인들은 서로 다른 개성을 가졌지만, 서로서로 이신전심으로 서로를 이해하며 한마음으로 살고 있었다. 주교는 이번에는 "그럼 기도는 어떻게 하는지"를 물었는데, 세 노인은 하늘을 바라보며 "당신은 셋, 우리도 셋이오니,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Three are ye, three are we, have mercy upon us!' 라고 기도한다고 답한다. 세 노인들이 '삼위일체'에 대해 어디선가 듣기는 했으나 제대로 된 교리와 기도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는데 연민을 느낀 주교는, 갈 길이 바쁜 와중이었음에도 한나절을 그 섬에 머물면서 세 노인들이 {주기도문}을 완벽히 암송할 수 있게 인내를 가지고 도와주었다. 마침내 세 명 모두 {주기도문}을 암송할 수 있게 되자 주교는 뿌듯한 마음으로 섬을 떠나 배로 돌아가 가던 항해를 계속한다. 얼마 후 배에서 소란이 일어났는데, 세 노인이 주교가 떠난 후{주기도문}를 조금씩 잊어버리다가 결국 전혀 기억나지 않게 되었으니 다시 가르쳐 달라고 주교에게 청하러 바다 위를 달려오는 것이었다. 이 장면을 보고 주교는 "당신들을 가르칠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우리 죄인들을 위해 기도해 주소서" 라고 말하며 그들 앞에 머리를 숙인다... . / 정리: 최광민
이 이야기를 읽고서 어린 시절에는 이렇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만약 모든 교리적 논쟁의 분기점이 되는 시점 이전으로 돌아가, 그저 '나는 한 신과, 그의 아들인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또 성령을 믿는다"만 가지고 신앙고백을 하고, 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라고.
신론과 그리스도론 및 성령론 만 본다면, 로마카톨릭, 정교회, 프로테스탄트 제파의 교리는 거의 동일하다. 이들 간의 차이는 주로 교회론과 구원론이 차이라고 볼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와 대척점에 서있는 로마카톨릭의 '마리아'론도 교회론/구원론의 곁가지라고 간주될 수 있다.
만약 교회의 신조에서 칼케돈 신조를 제거하면 동방의 양성파 네스토리우스 칼데아 교회와 이집트 꼽트교회와 시리아 야곱파 교회를 필두로 한 단/합성파 교회들이 다시 보편교회의 범위 안에 들어올 것이다. 이들 간의 차이는 그리스도론 가운데서도 신/인성의 결합방식에 대한 차이 뿐일 뿐, 모두 예수를 완전한 신이자 완전한 인간으로 보는 {니케아 신조}를 그대로 수용한다.
{니케아 신조}를 제거하면 이번에는 범-아리우스파가 다시 보편교회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물론 신론에 있어서의 문제로 인해 아리우스파가 보편교회 안에 수용되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서 {니케아 신조}는 역사적인 보편교회를 정의하는데 있어서 어찌보면 양보되기 힘든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예수에 관한 아리우스파의 이단과 비교해 본다면, {칼케돈 신조}가 정죄한 양성파 네스토리우스파 및 단/합성파와 서방의 소위 '정통파인 칼케돈파 (로마카톨릭+정교회)' 간의 신학적 차이는 매우 근소하다고 볼 수 있고, 사실 대부분은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세 분파 간의 신학적 해설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어떤 질문이 던져지고 그에 대한 설명들이 등장한 이후에는, 판단보류를 선언하고 다시 그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사유는 불가역적이다. 이것을 독일 극작가 뒤렘마트는 그의 유명한 희곡 {물리학자들}에서 뫼비우스 박사의 말을 빌어 이렇게 표현한다.
만약 철회될 수 없는 것이라면, 남은 일은 한가지 뿐.
대상을 정확히 이해하는 일 뿐이다.
§ 하나, 셋, 삼위일체 (Trinity), 삼위-일체 (Tri-Unity)
종종 '삼위일체'에 대한 담론이 기독교 역사에서 AD 3세기 이후나 되어야 서서히 등장한 것처럼 보는 주장을 접하는데, 이 주장의 트릭은 '삼위일체'에 대한 '담론'과 '용어'를 정확히 분리하지 않는데 있다. '삼위일체'란 '용어'의 사용이 늦었다고 해서 그 담론까지 늦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오직 한 신만 존재하는' 기독교 신학에서 또한 '각각 신으로 불려질 수 있는 세 존재 간의 상호관계'에 대한 담론은 이미 {신약성서} 문서군과 AD 2세기 초-중반 교부들을 저작에 등장한다. 굳이 기독교 초기 교부들의 저작까지 언급하지 않고 AD 1세기 말에 이미 완결된 히브리 성서 (={구약성서})와 AD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반까지 보편교회에서 '정경'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후에 완결된 총 27권 가운데) 대략 20 여권의 {신약성서} 문서들만 고려하더라도, 초기 기독교는 이미 (후대의 정밀한 정의까지는 아니지만) 성부-성자-성령이란 세 존재를 (천사를 포함한) 피조물과는 전혀 다른, 즉 창조 이전의 신적 존재로 간주한다.
신론과 그리스도론 및 성령론 만 본다면, 로마카톨릭, 정교회, 프로테스탄트 제파의 교리는 거의 동일하다. 이들 간의 차이는 주로 교회론과 구원론이 차이라고 볼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와 대척점에 서있는 로마카톨릭의 '마리아'론도 교회론/구원론의 곁가지라고 간주될 수 있다.
만약 교회의 신조에서 칼케돈 신조를 제거하면 동방의 양성파 네스토리우스 칼데아 교회와 이집트 꼽트교회와 시리아 야곱파 교회를 필두로 한 단/합성파 교회들이 다시 보편교회의 범위 안에 들어올 것이다. 이들 간의 차이는 그리스도론 가운데서도 신/인성의 결합방식에 대한 차이 뿐일 뿐, 모두 예수를 완전한 신이자 완전한 인간으로 보는 {니케아 신조}를 그대로 수용한다.
{니케아 신조}를 제거하면 이번에는 범-아리우스파가 다시 보편교회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물론 신론에 있어서의 문제로 인해 아리우스파가 보편교회 안에 수용되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서 {니케아 신조}는 역사적인 보편교회를 정의하는데 있어서 어찌보면 양보되기 힘든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예수에 관한 아리우스파의 이단과 비교해 본다면, {칼케돈 신조}가 정죄한 양성파 네스토리우스파 및 단/합성파와 서방의 소위 '정통파인 칼케돈파 (로마카톨릭+정교회)' 간의 신학적 차이는 매우 근소하다고 볼 수 있고, 사실 대부분은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세 분파 간의 신학적 해설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어떤 질문이 던져지고 그에 대한 설명들이 등장한 이후에는, 판단보류를 선언하고 다시 그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사유는 불가역적이다. 이것을 독일 극작가 뒤렘마트는 그의 유명한 희곡 {물리학자들}에서 뫼비우스 박사의 말을 빌어 이렇게 표현한다.
[MÖBIUS]: Was einmal gedacht wurde, kann nicht mehr zurückgenommen werden --- Friedrich Dürrenmatt, {Die Physiker}
[뫼비우스]: 일단 사고된 것은, 이미 철회될 수 없는 거야. --- 프리드리히 뒤렘마트, {물리학자들}
만약 철회될 수 없는 것이라면, 남은 일은 한가지 뿐.
대상을 정확히 이해하는 일 뿐이다.
§ 하나, 셋, 삼위일체 (Trinity), 삼위-일체 (Tri-Unity)
종종 '삼위일체'에 대한 담론이 기독교 역사에서 AD 3세기 이후나 되어야 서서히 등장한 것처럼 보는 주장을 접하는데, 이 주장의 트릭은 '삼위일체'에 대한 '담론'과 '용어'를 정확히 분리하지 않는데 있다. '삼위일체'란 '용어'의 사용이 늦었다고 해서 그 담론까지 늦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오직 한 신만 존재하는' 기독교 신학에서 또한 '각각 신으로 불려질 수 있는 세 존재 간의 상호관계'에 대한 담론은 이미 {신약성서} 문서군과 AD 2세기 초-중반 교부들을 저작에 등장한다. 굳이 기독교 초기 교부들의 저작까지 언급하지 않고 AD 1세기 말에 이미 완결된 히브리 성서 (={구약성서})와 AD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반까지 보편교회에서 '정경'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후에 완결된 총 27권 가운데) 대략 20 여권의 {신약성서} 문서들만 고려하더라도, 초기 기독교는 이미 (후대의 정밀한 정의까지는 아니지만) 성부-성자-성령이란 세 존재를 (천사를 포함한) 피조물과는 전혀 다른, 즉 창조 이전의 신적 존재로 간주한다.
이 가운데 성부는 유대교에서도 신으로 부르는 그 존재임에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면 성자 (=예수)와 성령은 또 누구/무엇이며, 이 둘과 성부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성자와 성령의 관계는 또 무엇인가? 그래서 이 세 존재에 대한 사유는 기독교 역사 아주 초기에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 옳으며, 이 점은 소위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대체로 동의한다.
우선 종종 잘못 사용되고 있는 '삼위일체'란 용어부터 적절히 이해해 보자. '삼위일체'는 반드시 '삼위' + '일체' 두 단어로 나눠서 각각을 정확히 이해한 후에 한 개념인 '삼위일체'로 종합해야 한다.
즉,
({신약성서}의 용례에 따라) 예수를 "세상의 창조자"이며 "신"으로 호칭하는 예수의 사도 요한의 제자이자 안티오키아 주교 이그나티오스 (ca. 35 /50 - 98/117)는 AD 110년 경에 트랄리아의 기독교도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적는다.
그는 여기서 두 극단을 설명한다. 하나는 예수가 그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며, 다른 한쪽은 성자-성자-성령이 양태론적으로 사실상 하나라고 보는 사람들이다. 이그나티오스는 이 둘을 모두 이단으로 선언한다.
'삼위일체' 三位一體는 '한 우시아(體)에 참여하는 세 휘포스타시스(位)'에 대한 설명이다. 니케아 회의 이후 성령을 포함한 이 세 휘포스타시스의 상호관계를 보다 정밀하게 정의한 신학자들은 AD 4-5세기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인, 카이사리아 마자카 주교 바실레이오스, 나지안주스 주교 그레고리오스, 그리고 닛사 주교 그레고리오스 3총사다. 이들 카파도키아 교부 3인이 정교히 정의한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이 보강된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AD 381년의 제 1차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에서 AD 325 년 니케아 공회의의 신조를 증보해 발표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강력히 반영되어 이후 기독교의 정통신조로 고정되었다.
# 우시아 οὐσία'와 휘포스타시스 ὑπόστᾰσις'
훗날 '삼위'에 등장하는 '위'의 대응어로 자리잡을 그리스어 '휘포스타시스 ὑπόστᾰσις' 자체는 이미 {신약성서}에 등장한다. {히브리서}가 바울의 글이라면 AD 65년 이전에, 그렇지 않더라도 다른 교부들의 글에 인용된 시점을 고려할 때 AD 100년 이전에 작성된 문서로 잡을 수 있다.
우선 종종 잘못 사용되고 있는 '삼위일체'란 용어부터 적절히 이해해 보자. '삼위일체'는 반드시 '삼위' + '일체' 두 단어로 나눠서 각각을 정확히 이해한 후에 한 개념인 '삼위일체'로 종합해야 한다.
즉,
- 숫자 상 '삼위', 즉 '세 휘포스타시스 ὑπόστᾰσις'
- 본질 상 '일체', 즉, '한 우시아 οὐσία'
({신약성서}의 용례에 따라) 예수를 "세상의 창조자"이며 "신"으로 호칭하는 예수의 사도 요한의 제자이자 안티오키아 주교 이그나티오스 (ca. 35 /50 - 98/117)는 AD 110년 경에 트랄리아의 기독교도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적는다.
"For they speak of Christ, not that they may preach Christ, but that they may reject Christ; and they speak of the law, not that they may establish the law, but that they may proclaim things contrary to it. For they alienate Christ from the Father, and the law from Christ. They also calumniate His being born of the Virgin; they are ashamed of His cross; they deny His passion; and they do not believe His resurrection. They introduce God as a Being unknown; they suppose Christ to be unbegotten; and as to the Spirit, they do not admit that He exists. Some of them say that the Son is a mere man, and that the Father, Son, and Holy Spirit are but the same person, and that the creation is the work of God, not by Christ, but by some other strange power." (Epistle to the Trallians, Ch. VI).
그들(=이단자들)은 비록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지만, 그리스도를 전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를 부정한다. 그들은 율법에 대해 말하나 율법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율법에 반하는 것들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성부와 상관없는 존재로 만들고, 율법을 그리스도로 부터 분리시킨다. 그리스도가 처녀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부정하며 그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신을 미지의 존재로 만들며, 그리스도가 (성부로부터) 낳아진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령에 관해 그들은 성령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성자가 그저 인간일 뿐이라 말하거나, 성부/성자/성령이 동일한 하나일 뿐이라고 말하거나 (즉, 양태론적으로 성부-성자-성령이 한 실체가 형태만 달리한 것이라고 가르치거나 / 필자 주), 창조에 관해서는 성부가 그리스도(=성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어떤 다른 기이한 능력을 통해 세상을 창조한 것이라고 말한다. --- 안티오키아 주교 이그나티오스, {트랄리아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 제 6장 / 번역: 최광민
그는 여기서 두 극단을 설명한다. 하나는 예수가 그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며, 다른 한쪽은 성자-성자-성령이 양태론적으로 사실상 하나라고 보는 사람들이다. 이그나티오스는 이 둘을 모두 이단으로 선언한다.
'삼위일체' 三位一體는 '한 우시아(體)에 참여하는 세 휘포스타시스(位)'에 대한 설명이다. 니케아 회의 이후 성령을 포함한 이 세 휘포스타시스의 상호관계를 보다 정밀하게 정의한 신학자들은 AD 4-5세기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인, 카이사리아 마자카 주교 바실레이오스, 나지안주스 주교 그레고리오스, 그리고 닛사 주교 그레고리오스 3총사다. 이들 카파도키아 교부 3인이 정교히 정의한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이 보강된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AD 381년의 제 1차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에서 AD 325 년 니케아 공회의의 신조를 증보해 발표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강력히 반영되어 이후 기독교의 정통신조로 고정되었다.
# 우시아 οὐσία'와 휘포스타시스 ὑπόστᾰσις'
훗날 '삼위'에 등장하는 '위'의 대응어로 자리잡을 그리스어 '휘포스타시스 ὑπόστᾰσις' 자체는 이미 {신약성서}에 등장한다. {히브리서}가 바울의 글이라면 AD 65년 이전에, 그렇지 않더라도 다른 교부들의 글에 인용된 시점을 고려할 때 AD 100년 이전에 작성된 문서로 잡을 수 있다.
{히브리서}에서 성자(예수)는 성부의 "본체" (ὑπόστασις, 휘포스타시스)의 "각인된 형상" (χαρακτὴρ, 카락텔)이며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즉, 성자 (예수)는 성부의 영광과 본체/실체/본성이 정확히 드러난 존재다.
3 ὃς ὢν ἀπαύγασμα τῆς δόξης καὶ χαρακτὴρ τῆς ὑποστάσεως αὐτοῦ, φέρων τε τὰ πάντα τῶ ῥήματι τῆς δυνάμεως αὐτοῦ, καθαρισμὸν τῶν ἁμαρτιῶν ποιησάμενος ἐκάθισεν ἐν δεξιᾷ τῆς μεγαλωσύνης ἐν ὑψηλοῖς, --- Greek {GNT}.
3 qui cum sit splendor gloriæ, et figura substantiæ ejus, portansque omnia verbo virtutis suæ, purgationem peccatorum faciens, sedet ad dexteram majestatis in excelsis:--- Latin {Vulgata}.
3 Who being the brightness of his glory, and the express image of his person, and upholding all things by the word of his power, when he had by himself purged our sins, sat down on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on high; --- KJV
3 He is the radiance of the glory of God and the exact imprint of his nature, and he upholds the universe by the word of his power. After making purification for sins, he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on high, --- ESV {Hebrews} 1:3
1:3 The Son is the radiance of his glory and the representation of his essence, and he sustains all things by his powerful word, and so when he had accomplished cleansing for sins, he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on high. --- NET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하나님의 본체 (ὑποστάσεως)대로의 모습 (χαρακτὴρ) 이십니다. 그는 자기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서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 한국어 새번역
물론 이 경우의 '휘포스타시스'는 아직 후대의 삼위일체 논쟁에 등장하는 그 용어의 의미를 담지 않고, 다만 '본체', '실체' 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휘포스타시스 (ὑπόστᾰσις) 란 용어에 대한 AD 4세기 초반까지의 보편교회의 이해는 처음부터 고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단어는 대체로 '존재' 혹은 '실체'와 같은 의미로 이해되었다. 기독교의 시작 전에 이미 그리스/로마 스토아 철학의 개념으로 자리잡았던 철학용어 우시아 (οὐσία') 역시 보편교회는 이 단어를 '본질' 혹은 '본체'로 이해했는데, '휘포스타시스'보다는 '우시아'가 보다 본질적인 실체를 뜻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늘 확실히 구분되어 사용된 것도 아니었다. AD 2세기와 3세기의 타티아노스와 오리게네스 등이 위와 같은 의미로 휘포스타시스와 우시아를 구분했던 사람들이었고, 또 AD 325년의 니케아 회의도 이런 의미로 휘포스타시스와 우시아를 사용했다.
또한 성자/예수는 성부의 형상/형체/본체/실체 (모르페, μορφῇ)이기도 하다. AD 52-62년 사이 필리피 (=빌립보)의 기독교인들에게 보낸 친서로 공히 인정되는 바울의 편지에서는 인간으로 오기 전과 부활 이후의 예수 (=성자)는 이렇게 묘사된다.
5 τοῦτο φρονεῖτε ἐν ὑμῖν ὃ καὶ ἐν χριστῶ ἰησοῦ, 6 ὃς ἐν μορφῇ θεοῦ ὑπάρχων οὐχ ἁρπαγμὸν ἡγήσατο τὸ εἶναι ἴσα θεῶ, 7 ἀλλὰ ἑαυτὸν ἐκένωσεν μορφὴν δούλου λαβών, ἐν ὁμοιώματι ἀνθρώπων γενόμενος· καὶ σχήματι εὑρεθεὶς ὡς ἄνθρωπος 8 ἐταπείνωσεν ἑαυτὸν γενόμενος ὑπήκοος μέχρι θανάτου, θανάτου δὲ σταυροῦ. 9 διὸ καὶ ὁ θεὸς αὐτὸν ὑπερύψωσεν καὶ ἐχαρίσατο αὐτῶ τὸ ὄνομα τὸ ὑπὲρ πᾶν ὄνομα, 10 ἵνα ἐν τῶ ὀνόματι ἰησοῦ πᾶν γόνυ κάμψῃ ἐπουρανίων καὶ ἐπιγείων καὶ καταχθονίων, 11 καὶ πᾶσα γλῶσσα ἐξομολογήσηται ὅτι κύριος ἰησοῦς χριστὸς εἰς δόξαν θεοῦ πατρός. --- 그리스어, {빌립보서} 2:5-11
5 Hoc enim sentite in vobis, quod et in Christo Jesu: 6 qui cum in forma Dei esset, non rapinam arbitratus est esse se æqualem Deo: 7 sed semetipsum exinanivit, formam servi accipiens, in similitudinem hominum factus, et habitu inventus ut homo. 8 Humiliavit semetipsum factus obediens usque ad mortem, mortem autem crucis. 9 Propter quod et Deus exaltavit illum, et donavit illi nomen, quod est super omne nomen: 10 ut in nomine Jesu omne genu flectatur cælestium, terrestrium et infernorum, 11 et omnis lingua confiteatur, quia Dominus Jesus Christus in gloria est Dei Patris. --- 라틴어 불가타 {빌립보서} 2:5-11
2:5 You should have the same attitude toward one another that Christ Jesus had, 2:6 who though he existed in the form of God did not regard equality with God as something to be grasped, 2:7 but emptied himself by taking on the form of a slave, by looking like other men, and by sharing in human nature. 2:8 He humbled himself, by becoming obedient to the point of death – even death on a cross! 2:9 As a result God exalted him and gave him the name that is above every name, 2:10 so that at the name of Jesus every knee will bow – in heaven and on earth and under the earth – 2:11 and every tongue confess that Jesus Christ is Lord to the glory of God the Father. ---- 영어 NET, {빌립보서} 2:5-11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그는 하나님의 모습 (μορφῇ θεοῦ, 형체, 실체)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 한국어 새번역, {빌립보서} 2:5-11
니케아 회의 한 세대 후에 동일본질파의 삼위일체를 정교히 가다듬은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리아 마자카의 주교 바실레오스는 두 단어를 범주론의 입장에서 보다 확실히 구분지었다.
"The distinction between ousia and hypostases is the same as that between the general and the particular; as, for instance, between the animal and the particular man. Wherefore, in the case of the Godhead, we confess one essence or substance so as not to give variant definition of existence, but we confess a particular hypostasis, in order that our conception of Father, Son, and Holy Spirit may be without confusion and clear." ---- Basil, {To Amphilochius} #236:6
'우시아'와 '휘포스타시스'의 차이는 '일반적'인 것과 '특정한' 것 사이의 차이와 같다. 가령, '동물'이란 범주와 '특정한 사람' 간의 차이와 같다. 그래서 신의 존재방식에 관해, 우리가 그 존재의 단일성을 표현할 때는 하나의 본질, 혹은 한 본체를 고백하지만, 성부-성자-성령의 개념을 혼동없이 분명히 표현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휘포스타시스로 이를 고백한다. ---- 카이사리아 마자카 주교 바실레오스, {암필로키오스에게 보내는 편지} 236:6 / 번역: 최광민
아리우스파와 반-아리우스파 모두 '우시아'와 '휘포스타시스'에 관한 합의된 용어의 통일없이 약간씩 다른 의미로 두 용어를 해석하고 적용시켰기 때문에, 양 측의 논쟁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이 용어가 어떤 문맥 상에서 사용되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AD 4세기에 이 용어의 용례를 두고 벌어진 신학적 논쟁들에 AD 5세기 이후에 고정된 의미를 적용시키면 해석이 매우 곤란해질 수 있다.
가령, AD 325년 니케아 회의를 전후해서 많은 신학자들이 '우시아'와 '휘포스타시스'를 사용해서 각자 주장을 펼치지만, 그 의미들은 AD 4-5세기에 삼위일체론을 현재까지 전수되는 형태로 가다듬은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용례와 미묘한 차이를 가진다. 신학에서의 이런 미묘한 차이는 종종 신학적으로는 전혀 다른 견해를 도출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우시아, 휘포스타시스 등의 원래 용어를 가급적 그대로 쓰기로 하겠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최종적이고 공식적인 '삼위일체'의 공식이 완결되기까지 등장한 수 많은 '이단'적 견해들은 바로 이 '세 휘포스타시스/삼위'와 이 '한 우시아/일체'를 어떻게 정의하고 조합하는가에 달린 것이었다. '본질 상 일체' 없이 '숫자 상 삼위'만 말하면 이는 '삼신론'이다. 본질적으로 (종종 등급으로도) 셋으로 구별되는 사실 상의 세 신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숫자 상 세 위'에 대한 개념없이 '본질적 일체'만으로 삼위일체를 이해하려고 하면 이는 '양태론'이 된다. 이 경우 "셋"은 정말로 구별되는 셋이 아니라 역할과 현현방식에 있어서만 그렇게 보이는 가상적인 복수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 왜 "한 우시아"와 "세 휘포스타시스"란 개념이 기독교 신학에서 그렇게도 중요했던 것일까?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플라톤 철학의 영향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신약성서}를 구성하는 문서들 자체가 이 '천사를 포함한 피조물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성부-성자-성령이라는 '세 신적존재'를 여러 문맥 속에서 종종 한 단위로 언급하는 동시에 {구약성서}의 가르침과 동일하게 '한 신'에 대해서 가르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삼위일체의 개념을 '증명'하기 위해 인용해 온 {구약성서}의 구절들은 일단 배제하고, AD 2세기 중반 무렵까지 보편교회가 정경으로 명시하고 있던 {신약성서} 문서들에서 추출할 수 있는 단서들만 무작위로 한번 나열해 보자.
기타등등.
그럼....도대체 성부-성자-성령의 관계는 무엇인가? 어떤 설명이 이 모든 구절을 통일적인 하나의 개념으로 풀어낼 수 있을 것인가?
§ 세 신적존재: 성부, 성자, 성령
바울이 에페소스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는 이 '하나'란 개념이 왜 기독교에서 중요한지가 잘 드러나 있다.
'성부-성자-성령', 보다 원어에 충실하자면 '아버지-아들(주님)-영'을 하나의 단위로 사용하는 용례는 주로 세례와 축도에 등장한다.
바울이 편지를 마무리하며 적은 축복인사는 아래와 같다.
AD 2세기 초/중반을 살았던 사마리아 출신의 기독교 철학자/교부 유스티노스는 유대인 랍비 트리폰과의 대화를 담은 {트리폰과의 대화}에서 역시 이 논증을 구사하고 있다.
각설하고,
기독교의 역사에서 최종적이고 공식적인 '삼위일체'의 공식이 완결되기까지 등장한 수 많은 '이단'적 견해들은 바로 이 '세 휘포스타시스/삼위'와 이 '한 우시아/일체'를 어떻게 정의하고 조합하는가에 달린 것이었다. '본질 상 일체' 없이 '숫자 상 삼위'만 말하면 이는 '삼신론'이다. 본질적으로 (종종 등급으로도) 셋으로 구별되는 사실 상의 세 신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숫자 상 세 위'에 대한 개념없이 '본질적 일체'만으로 삼위일체를 이해하려고 하면 이는 '양태론'이 된다. 이 경우 "셋"은 정말로 구별되는 셋이 아니라 역할과 현현방식에 있어서만 그렇게 보이는 가상적인 복수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 왜 "한 우시아"와 "세 휘포스타시스"란 개념이 기독교 신학에서 그렇게도 중요했던 것일까?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플라톤 철학의 영향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신약성서}를 구성하는 문서들 자체가 이 '천사를 포함한 피조물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성부-성자-성령이라는 '세 신적존재'를 여러 문맥 속에서 종종 한 단위로 언급하는 동시에 {구약성서}의 가르침과 동일하게 '한 신'에 대해서 가르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삼위일체의 개념을 '증명'하기 위해 인용해 온 {구약성서}의 구절들은 일단 배제하고, AD 2세기 중반 무렵까지 보편교회가 정경으로 명시하고 있던 {신약성서} 문서들에서 추출할 수 있는 단서들만 무작위로 한번 나열해 보자.
- 단수로서의 '신'. 즉, 신은 '한 분'이다.
- 단수로서의 '아버지 (=성부)'는 성자 및 성령과 구별되는 한 존재이다.
- 단수로서의 '아들 (=성자)'는 성부 및 성령과 구별되는 한 존재이다.
- 단수인 '성령'은 성부 및 성자와 구별되는 한 존재이다.
- 성부는 불가해하다. 피조물은 그를 이해할 수 없다.
- 성부의 목소리를 듣거나 그의 모습 (에이도스, εἶδος)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성자 만이 성부를 알고, 사람들에게 그에 대해 알려줄 수 있다.
- (개인 속의 영 만이 그 개인의 생각을 알 수 있듯), 성령 (=신의 영)만이 성부의 생각을 헤아릴 수 있다.
- 성자를 본 자는, 또한 성부를 본 것이다.
- 성령은 성자를 증거한다.
- 많은 {신약성서} 문서 속에서 '신'은 문맥상 대체로 '성부'를 뜻한다.
- 성자도 가끔 '신'으로 진술된다.
- 성자는 신의 '로고스', 즉 '말씀이다'.
- 성자는 성부의 '본체' (휘포스타시스, ὑπόστᾰσις)가' 각인된 형상' (카락텔, χαρακτήρ)이다
- 성자는 성부의 형상/모습/본체/실체 (모르페, μορφῇ)이다.
- 성령은 '성자/예수'와는 독자적인 존재이다.
- 성령은 동시에 종종 '신의 영'이다.
- 성령은 또 '성부의 영'이다.
- 성령은 또 '성자의 영'이기도 하다.
- 성령은 성자와 " 동종이지만 다른 (=알로스 ἄλλος)" 파라클레토스/보혜사/위로자다.
- 성부는 성자를 '낳았다'.
- 성령은 성부'로부터 온다'
- 성자/예수는 성부에게로부터 성령을 보내겠다고 약속한다.
- 유대교/기독교의 관점에서 "경배"는 '참 신'에게만 바쳐질 수 있다.
- 성부는 '유일한 신'으로 경배받는다.
- 성자는 경배를 받을 자격이 있다.
- 성자는 성부처럼 '경배'받는다.
- '신'은 창조자이다.
- 성부는 창조자이다.
- 성자는 만물을 창조하고, 피조세계를 보존한다
- (성령도 창조에 참여한다.)
- 성자/예수와 성부는 '하나'다.
- 성자/예수는 성부 안에, 성부는 성자 안에 있다.
- 성부는 성자/예수보다 '크다'.
- (예수에 따르면), 성부는 성자/예수의 '아버지/아바/파테르'이자 인간들의 '아버지/아바/파테르'이다.
- 예수는 성부의 "독생한 아들"이고, 신자는 성자를 통해 성부의 "양자"가 된다.
- (예수에 따르면), 성부는 성자/예수의 '신/엘로힘/알라하/테오스'이자 인간들의 '신/엘로힘/알라하/테오스'이다.
- 히브리 (=구약)성서에서 '엘로힘'은 반드시 '신'을 뜻하지는 않고, 문맥에 따라 신, 왕, 재판관, 메시아가 될 수 있다. 즉, '야훼'는 물론 '엘로힘'이지만, '엘로힘'이 늘 '야훼'는 아니다. 가령, 엘리야는 {열왕기상} 18:21에서 "야훼 (יְהוָ֤ה / κύριος / Dominus )가 엘로힘 (הָֽאֱלֹהִים֙ / ὁ θεός / Deus)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엘로힘이)라면 그를 따르라"며 이스라엘인들에게 선택을 촉구한다. 따라서 "야훼 엘로힘"은 "야훼라 불리는 엘로힘" 혹은 "우리의 엘로힘은 야훼다"라는 선언으로 볼 수 있다.
기타등등.
그럼....도대체 성부-성자-성령의 관계는 무엇인가? 어떤 설명이 이 모든 구절을 통일적인 하나의 개념으로 풀어낼 수 있을 것인가?
§ 세 신적존재: 성부, 성자, 성령
바울이 에페소스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는 이 '하나'란 개념이 왜 기독교에서 중요한지가 잘 드러나 있다.
ἓν σῶμα καὶ ἓν πνεῦμα, καθὼς καὶ ἐκλήθητε ἐν μιᾷ ἐλπίδι τῆς κλήσεως ὑμῶν· εἷς κύριος, μία πίστις, ἓν βάπτισμα· εἷς θεὸς καὶ πατὴρ πάντων, ὁ ἐπὶ πάντων καὶ διὰ πάντων καὶ ἐν πᾶσιν. --- Greek, {GNT}
Unum corpus, et unus Spiritus, sicut vocati estis in una spe vocationis vestræ. Unus Dominus, una fides, unum baptisma. Unus Deus et Pater omnium, qui est super omnes, et per omnia, et in omnibus nobis. -- Latin, {Vulgata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셔서 안겨주시는 희망도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며, 만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십니다 --- 한국어 공동번역,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4:3-6
바울이 편지를 마무리하며 적은 축복인사는 아래와 같다.
13 ἡ χάρις τοῦ κυρ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καὶ ἡ ἀγάπη τοῦ θεοῦ καὶ ἡ κοινωνία τοῦ ἁγίου πνεύματος μετὰ πάντων ὑμῶν. --- Greek, {GNT}
13 Gratia Domini nostri Jesu Christi, et caritas Dei, et communicatio Sancti Spiritus sit cum omnibus vobis. Amen. --- Latin, {Vulgata}
13:13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the love of God and the fellowship of the Holy Spirit be with you all. --- NET
주 예수 그리스도의 τοῦ κυρ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은총과 하나님의 τοῦ θεοῦ 사랑과 성령의 τοῦ ἁγίου πνεύματος 사귐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 한국어 새번역, {고린도 후서} 13:13
아울러 정통파 교회의 세례는 {마태복음}의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예수의 명령에 따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즉,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으로 세번 시행되었다.
{사도행전}의 몇몇 구절들에 등장하는 세례가 성부나 혹은 성령에 대한 언급없이 "예수의 이름으로"라고만 되어있다는 점에 바탕하여 {마태복음}의 이 구절이 삼위일체가 어느 정도 자리잡혀 가던 시절에 가서야 삽입된 후대의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어 왔지만, 이 공식이 AD 1세기 중/말기의 {디다케}, AD 2세기 중반의 교부 유스티노스의 제자였던 앗시리아인 타티아노스, AD 3세기 초의 히폴리투스 등 아직 니케아식 삼위일체가 정교히 정의되지 않던 시절의 기독교 초기시절의 교부들의 글에도 역시 성부-성자-성령의 공식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단정적으로 그렇게 말할 근거는 크지 않다. 이 논란은 AD 3세기 중반 북 아프리카 카르타고 주교였던 키프리아누스도 언급하고 있다.
가령 AD 70-100년 사이를 작성시점으로 보는 {디다케}는 아래와 같다.
AD 165년에 순교한 유스티노스도 성부-성자-성령의 한 단위를 세례의 공식으로 사용한다.
AD 2세기 중반에 순교한 유스티노스의 제자였던 앗시리아인 타티아노스가 4권의 정경 복음서를 통편집한 AD 170년의 {디아테사론}은 아래와 같이 전한다.
리그두눔 (=리옹) 주교 이레네우스의 제자였던 로마 사제로 AD 2세기 후반에서 AD 3세기 초반에 활동한 히폴리투스의 저술로 현재 대체로 받아들여지는 {사도전승}에 따르면 세례를 줄 때 성부, 성자, 성령 및 교회와 육체의 부활에 대한 신자의 믿음을 묻는다. 이 문서는 AD 215년으로 소급된다.
AD 216년,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양태론적 이단을 가르친 프락세아스를 반박하면서 아래와 같이 진술한다.
AD 248년 경,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신학자 오리게네스는 역시 성부-성자-성령의 공식을 언급할 뿐 아니라, 이 셋의 이름으로 주지 않는 세례를 무효라고 진술한다.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주교의 키프리아누스는 AD 253년에 아래와 같이 진술한다.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는 니케아 회의 2년 전인 AD 323년에 아래와 같이 진술한다.
성부-성자-성령이 세례의 효력을 담보하는 한 단위라면, 이 셋의 관계는 무엇이란 말일까? {구약성서}의 관점에서 인간의 죄를 소멸/사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신 (~성부)이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는 자신의 권위로 죄를 사면하여 유대인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을 격분시켰는데, 이 권세는 성부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답한다. 그럼 속죄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할은 또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
세례에 관한 {신약성서}의 진술에 따라 초기 기독교도들은 성부-성자-성령을 이해하면서 이 셋이 분명히 (실재로든, 양태론적으로든) 구분되지만, 동시에 어떤 의미나 형식으로든 '한 단위'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초기 교부들은 여기에 더해 {구약성서}로부터도 역시 구분되어 있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개념을 추출해 냈다.
{구약성서}의 경우,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인역 구약성서, LXX}를 주로 사용하던 교부들은, 히브리어에서 '신'을 뜻하는 복수 '엘로힘'에 상응하는 그리스어 '테오스'를 문맥상 '신', '천사', '왕', '제사장/사제' 등으로 달리 해석하지만, 신의 '이름'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야훼/여호와' 및 '야훼'의 완곡용법인 '아도나이 (=주님)'의 그리스어 번역인 '퀴리오스'의 경우 (가령, 야훼/아도나이 엘로힘 = 퀴리오스 테오스) 반드시 '신'에게만 적용시켰는데, 대체로 이 적용은 '성부'에 해당하지만, 동시에 '성자'에게도 적용되었다.
참고로, '성령'은 용례와 언어에 따라 문법적 성 (grammatical gender)이 다르다. 가령, 셈계 언어인 히브리어 ("רוח", 루아흐)나 아람어 (그리고 아람어의 후기형태인 시리아어)에서의 문법적 성은 '여성'이다. 그리스어 ("πνεῦμα", 프뉴마)에서의 문법적 성은 '중성'인데, 이 단어의 대명사는 '중성'과 '남성'이 함께 사용된다. 그리스어 {신약성서}에서 성령을 표현하는 다른 용어인 '파라클레토스'의 문법적 성은 '남성'이다. 라틴어와 라틴어에서 유래한 언어군에서 '영 (spiritus, '스피리투스')'는 문법적으로 '남성'이다. '물리적 성'과 '문법적 성'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은, 종종 이를 두고 '성령'에게 일종의 '여신'의 지위를 부여하려고 하는데, 이는 해당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억측에 불과하다.
{신약성서}를 제외하고 역사적 기독교에 전승된 가장 오래된 문건들에 따르더라도, AD 1세기 후반에서 AD 2세기 초반의 (최소한) 시리아 - 소아시아 - 그리스 - 로마 지역의 보편교회는 이미 '성부 + 성자 + 성령' 이라는 세 '신적 존재'가 셋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함을 인정하고 있었다. 일단 셋의 '동등성'에 대한 논의는 뒤로 미루도록 하자.
가령, 예수의 제자 요한의 제자였던 안티오키아 주교/감독 이그나티오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신적 존재'로서의 '셋'은 이미 초기 기독교도들이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물론 이 '셋'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AD 1세기 중/후반~2세기 초반의 기독교도들이 정의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많은 가설들이 있다. 현존하는 기록 가운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수준으로 성부-성자(-성령)의 관계를 정의하고 있는 진술은 없기 때문이다. 소위 '정통파 교부들'로 간주되는 교부들의 진술만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정리하자면, 전승된 기록들만 본다면 늦어도 AD 1세기 말의 (정통파) 기독교도들은 (1) '한 신'을 믿었고 (2) 성부-성자-성령이라는 '셋'을 (천사를 포함한) 피조세계에 속하지 않은 신적 존재로 믿었으며 (그래서 또한 신으로 불렀고), (3) 동시에 이 셋을 (본질적이든 현상적이든) 구별해서 진술했다.
혹자는 이들 초기 기독교 교부들이 후대처럼 '정밀한' 정의를 내리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후대의 {니케아 신조}와 같은 방식으로 성부-성자-성령의 관계를 어렴풋이 이해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혹자는 성자와 성령은 비록 피조물이 아닌 '신적 존재 Divine Beings'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신 자체'는 아니기에 '신'으로 불릴 수는 있으나 '그 자체로서는' 신이 아닌, 즉 성부에게 종속되어 있는 하위의 존재들, 혹은 신의 '속성의 구현'들로 교부들이 이해했을 것으로 말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지 간에, 이 셋은 (천사를 포함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신적 존재'들로 간주되었다.
이 '셋'의 관계에 대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이 모든 진술들을 하나의 통일된 개념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 역사적인 (+ 정통파) 기독교도들에게 있어, 이 '통일된 개념'이 바로 '성부-성자-성령의 동일본질론에 입각한 삼위일체론'이었다. 또한 이들 거의 모두는 삼위일체 논쟁이 벌어지기 이미 200년도 전인 2세기 초반에도, 구약성서에서 족장들과 선지자/예언자들에게 나타났던 그 존재가 사실은 "성자"였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즉, 피조세계를 초월하여 불가지하고 불가해한 성부를 피조물에게 드러낸 현현은 바로 성부와 피조세계를 매개한 "성자"였다고 이해한 것이다.
그래서 AD 4세기 초반과 중반을 강타한 '삼위일체' 논쟁 - 더 정확히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본질에 대한 논쟁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 논쟁이 그리스 철학용어를 사용해 진행되기는 하지만,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사유의 도구일 뿐, 논쟁 그 자체는 바로 {신약성서} 여기저기에 등장하는 구절들에 바탕해 가장 타당한 통일적인 설명을 찾아내려는 시도였다.
따라서 니케아 회의와 그 이후에 대립하는 '동일본질'파와 '유사/이질본질'파 양 측의 어느 누구도 위에 언급된 {신약성서}의 구절들 그 자체에 반대한 사람은 없었다. 즉, 이 진술들은 '동일본질파'와 그 반대파 모두가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할 근거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동일한 단서/진술에 대한 양 측의 이해가 달랐을 뿐이다.
"성령은 신이다"란 표현 자체는 성서에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성령을 포함하는 삼위일체의 최종적 정의를 놓고 니케아 회의 이후 거의 2세대 동안 혼란스러웠던 상황에 대해 닛사 주교 그레고리오스의 강론 31.5에서 인용한다.
이들 카파도키아 3총사가 활동하던 시절은 성부와 성자를 완전히 분리시키고, 또 성령을 성부와 성자의 조수 정도로 격하시키던 경향을 가진 원조 아리우스파의 세가 한풀 꺾이던 중이자, 성부-성자-성령의 신적지위를 인정하되 셋 간의 위계적/위엄적 지위를 그 순서대로 간주하던 준-아리우스파가 보다 동일본질파 쪽으로 동화되던 시기였다.
그레고리오스의 친구이기도 했던 카이사리아 주교 바실레이오스는 AD 375년 경 이들을 겨냥하여 삼위의 동등을 분명히 강조한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한 {성령에 대하여}를 발표한다. 당시 그는 공공예배에서 영광송 (Doxology)을 부르면서 "성부께 영광을, (영광을 / 필자 주) 성자와 함께 (with), 또 성령과 함께 (with)"란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원래의 전통적인 표현은 "성부께 영광을, 성자를 통해 (through), 성령 안에서 (in)"였다.
이 전통적 용어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바실레이오스는 그 당시 준-아리우스파 주교 마케도니오스의 교리를 주장하던 한 일파인 (폄칭) 프뉴마토마코이 (=성령의 대적자)들이 성령의 신성을 부정하고, 성령을 성자의 피조물이자 성부/성자의 사환으로 간주하던 것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들은 그리스 철학, 특별히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에 따라 삼위의 세 존재를 확실히 구별하면서, 이를 "문법적"으로도 정당화 했는데, 가령, "~로부터 from"은 성부에게, "~를 통해 through"는 성자에게, "~안에"는 성령에게 적용되는데, 이는 이 단어들이 각 존재의 속성과 연결되어 있다고 해석했다. 즉, 성부는 "기원", 성자는 "활동", 성령은 성자의 활동이 이뤄지는 "시간과 장소"에 대응된다고 본 것이다. 이 셋의 속성이 다르므로, 단어 또한 달리 써야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의 핵심이었다.
바실레이오스는 이들의 수사학적이고 철학적 설명이 이교적이며, 또한 "성령과 함께"와 "성령 안에서"는 교회의 전통과 성서에서 모두 존재하며, 다만 전자는 "삼위 간"의 관계를, 후자는 "성령과 인간" 간의 관계란 문맥에서 모두 가능하다고 변호했다.
바실레이오스의 {성령에 대하여}에서 인용한다.
그럼 테르툴리아누스와 바실레이오스가 인용한 바울의 편지에서 인용해 보자.
기독교 초기교부들의 모든 기록에서 성부에 대한 지식은 피조세계에 감추어져 있고, 성부를 알고 성부를 피조세계에 알리는 것은 성자이며, 또한 그를 통해서만 성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마치 인간의 영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듯) 성령 역시 성부의 경륜까지 살피고 그 생각을 헤아린다고 적는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령을 받은 기독교도들은 또한 그리스도의 마음 (νοῦν χριστοῦ) 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성부의 뜻을 이제 헤아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는 무엇이겠는가?
이들 카파도키아 교부 3인이 정교히 정의한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이 보강된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AD 381년의 제 1차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에서 AD 325 년 니케아 공회의의 신조를 증보해 발표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강력히 반영되어 이후 기독교의 정통신조로 고정되었다.
§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아브라함이 만난 세 사람
'천사를 포함한 피조세계'에 속하지 않은 성부-성자-성령이란 이 '세 신적 (divine)' 존재를 인정하게 될 때 이어지는 당연한 질문은 이 '셋'의 관계일 것이다. {신약성서} 그 자체에는 이 셋을 명시적으로 하나로 묶어 부르는 단일한 용어가 없다. 다만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호칭될 뿐이다.
이런 세 신적존재에 대한 개념은 기독교 교부들이 다신교적인 지중해 종교들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낸, 즉 AD 1세기까지의 유대교에서는 전혀 발견된 적 없는 개념이던가?
그게 또 그렇지 않다. (참고: http://kwangmin.blogspot.com/2015/07/vs-04.html)
예수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알렉산드리아의 저명한 유대인 철학자 필론은 그의 저작인 {아브라함에 관하여}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앞서 아브라함을 방문했던 '세 여행자'의 이야기를 다루는 {창세기} 18-19장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그는 우선 이 '셋'을 '천사들'로 보는 유대교의 통상적인 문자적 해석을 설명한 후, 이어서 이 '셋'을 비유적이고 상징적으로 풀이한다.
한국어 공동번역으로 해당 부분을 발췌해서 읽어보자.
이 창세기 원문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에서 필론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셋'을 (1) '한 존재 / 야훼'의 (2) 세 형상/이미지였다고 풀이한다. 즉, 아브라함이 본 '셋'은 (1) 가운데 있던 살아있는 신의 본질적 형상과 (2) 그것에서 현현되는 두 그림자 형상이었다는 것이다. 마치 빛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두개의 그림자가 생긴 것과 같다는 것이다.
필론의 설명을 읽어보자.
필론의 '비유적' 해석은 이 장면에서 한 신을 구성하는 '신 자체'와 신의 두 '속성'들을 설명한다. 이 경우 신 자체 (~야훼) '나는 나 - 에헤예 아쉐르 에헤예'이고, 그 오른편에는 신의' 창조력'인 '엘로힘 / 테오스 / 신'이 있고, 그 좌측에는 신의 '지배력'인 '아도나이 / 퀴리오스 / 주님'이 있다. '예헤 아쉐르 에헤', '엘로힘', 그리고 '아도나이'가 한 단위로 {구약성서}에서 사용되는 그것은 다른 말 할 것 없이 '유대교의 신' 야훼다.
오해하지 말하야 할 점은 '신 자체'를 보좌하는 그의 '창조력 / 엘로힘'과 '지배력 / 아도나이'는 신 자체의 '피조물'이 아니란 점이다. 필론의 관점에서 이 두 권능은 '신 자체'의 '속성'', (온전하지는 않더라도) '신 자체'를 인식하는 한 '방식', 혹은 '신 자신'를 바라보는 한 '방향'에 해당하기 때문에, 사실은 '신 자체'와 분리되지 않으며, 동시에 영원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창조력 / 엘로힘'과 '지배력 / 아도나이'가 '신 자신'를 대신하거나 혹은 '신 자신'이 그 둘로 온전히 변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엘로힘-신 자신-아도나이는 '양태론'적인 관계에 놓이지는 않는다.
필론은 이 해석이 '반드시 사실은 아니더라도 사실에 근접한' 알레고리적 해석이라고 누누이 당부한다. 하지만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신 / 테오스'이자, '주님 / 퀴리오스'이자, '성부의 우편에 앉은 자'로 표현되는 것을 기억해 본다면 흥미롭지 않은가? (이 표현 자체는 다윗의 {시편}에서 온 것이다.)
물론 필론도 말했다시피 이 '세 사람'을 '세 천사'로 보는 견해가 가장 일반적인 독법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세 천사'로 보는 해석과, 필론의 '세 측면'으로 보는 해석과 또 달리, AD 1세기 초로 소급되는 유대교의 {요나단 탈굼}이나 AD 1-4세기의 거의 모든 기독교 교부들의 해석은 또 다르다. 아브라함을 방문한 세 사람에 대해, {탈굼}은 그 중 가운데 인물을 '야훼의 멤라/말씀'으로 해석하고 다른 둘을 천사로 보았고, 또 초기 기독교 교부들도 (심지어 나중의 아리우스파 까지도) 이 셋을 인간이 되기 전의 성자와 그의 두 천사로 해석했다.
16 οἱ δὲ ἕνδεκα μαθηταὶ ἐπορεύθησαν εἰς τὴν γαλιλαίαν εἰς τὸ ὄρος οὖ ἐτάξατο αὐτοῖς ὁ ἰησοῦς, 17 καὶ ἰδόντες αὐτὸν προσεκύνησαν, οἱ δὲ ἐδίστασαν. 18 καὶ προσελθὼν ὁ ἰησοῦς ἐλάλησεν αὐτοῖς λέγων, ἐδόθη μοι πᾶσα ἐξουσία ἐν οὐρανῶ καὶ ἐπὶ [τῆς] γῆς. 19 πορευθέντες οὗν μαθητεύσατε πάντα τὰ ἔθνη, βαπτίζοντες αὐτοὺς εἰς τὸ ὄνομα τοῦ πατρὸς καὶ τοῦ υἱοῦ καὶ τοῦ ἁγίου πνεύματος, 20 διδάσκοντες αὐτοὺς τηρεῖν πάντα ὅσα ἐνετειλάμην ὑμῖν· καὶ ἰδοὺ ἐγὼ μεθ᾽ ὑμῶν εἰμι πάσας τὰς ἡμέρας ἕως τῆς συντελείας τοῦ αἰῶνος. --- Greek {GNT}
16 Undecim autem discipuli abierunt in Galilæam in montem ubi constituerat illis Jesus. 17 Et videntes eum adoraverunt: quidam autem dubitaverunt. 18 Et accedens Jesus locutus est eis, dicens: Data est mihi omnis potestas in cælo et in terra: 19 euntes ergo docete omnes gentes: baptizantes eos in nomine Patris, et Filii, et Spiritus Sancti: 20 docentes eos servare omnia quæcumque mandavi vobis: et ecce ego vobiscum sum omnibus diebus, usque ad consummationem sæculi.--- Latin {Vulgata}
28:16 So the eleven disciples went to Galilee to the mountain Jesus had designated. 28:17 When they saw him, they worshiped him,but some doubted. 28:18 Then Jesus came up and said to them, “All authority in heaven and on earth has been given to me. 28:19 Therefore go and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 baptizing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the Son and the Holy Spirit, 28:20 teaching them to obey everything I have commanded you. And remember, I am with you always, to the end of the age.” --- NET, {Mattew} 28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예수께서 일러주신 산에 이르렀다. 그들은 예수를 뵙고, 절을 하였다 προσεκύνησαν .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께서 다가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 τοῦ πατρὸς 와 아들 τοῦ υἱοῦ과 성령의 이름 τοῦ ἁγίου πνεύματος 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 한국어 새번역, {마태복음} 28장
{사도행전}의 몇몇 구절들에 등장하는 세례가 성부나 혹은 성령에 대한 언급없이 "예수의 이름으로"라고만 되어있다는 점에 바탕하여 {마태복음}의 이 구절이 삼위일체가 어느 정도 자리잡혀 가던 시절에 가서야 삽입된 후대의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어 왔지만, 이 공식이 AD 1세기 중/말기의 {디다케}, AD 2세기 중반의 교부 유스티노스의 제자였던 앗시리아인 타티아노스, AD 3세기 초의 히폴리투스 등 아직 니케아식 삼위일체가 정교히 정의되지 않던 시절의 기독교 초기시절의 교부들의 글에도 역시 성부-성자-성령의 공식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단정적으로 그렇게 말할 근거는 크지 않다. 이 논란은 AD 3세기 중반 북 아프리카 카르타고 주교였던 키프리아누스도 언급하고 있다.
가령 AD 70-100년 사이를 작성시점으로 보는 {디다케}는 아래와 같다.
"After the foregoing instructions, baptize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in living [running] water. If you have no living water, then baptize in other water, and if you are not able in cold, then in warm. If you have neither, pour water three times on the head,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Before baptism, let the one baptizing and the one to be baptized fast, as also any others who are able. Command the one who is to be baptized to fast beforehand for one or two days" --- Didache 7:1 [A.D. 70]
일련의 가르침에 따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흐르는 물 (강물)에서 세례를 주어라. 만약 흐르는 물이 없다면 다른 물 (고인 물)에서 세례를 주어라. 찬물이 없다면 더운 물로 세례를 주어라. 이도저도 없다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받는 자의 머리에 물을 세번 부어라. 세례를 받기 전, 세례를 주는 자와 받는 자 모두 금식할 것이며, 다른 이들도 할 수 있다면 금식하라. 세례를 받는 자는 세례 전 하루 이틀 간 금식하도록 지시하라. --- {디다케} 7:1 / 번역: 최광민
AD 165년에 순교한 유스티노스도 성부-성자-성령의 한 단위를 세례의 공식으로 사용한다.
"As many as are persuaded and believe that what we teach and say is true, and undertake to be able to live accordingly, are instructed to pray and to entreat God with fasting, for the remission of their sins that are past, we praying and fasting with them. Then they are brought by us where there is water, and are regenerated in the same manner in which we were ourselves regenerated. For, in the name of God, the Father and Lord of the universe, and of our Savior Jesus Christ, and of the Holy Spirit, they then receive the washing with water. For Christ also said, 'Except ye be born again, ye shall not enter into the kingdom of heaven.' Now, that it is impossible for those who have once been born to enter into their mothers' wombs, is manifest to all... And for this we have learned from the apostles this reason. Since at our birth we were born without our own knowledge or choice, by our parents coming together, and were brought up in bad habits and wicked training; in order that we may not remain the children of necessity and of ignorance, but may become the children of choice and knowledge, and may obtain in the water the remission of sins formerly committed, there is pronounced over him who chooses to be born again, and has repented of his sins, the name of God the Father and Lord of the universe." --- Justin Martyr, {First Apology}. Ante-Nicene Fathers, vol. 1
....[전략]....그들은 성부이자 우주의 주인이신 신의 이름과,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후략] --- 유스티노스, {첫번째 변증}/ 번역: 최광민
AD 2세기 중반에 순교한 유스티노스의 제자였던 앗시리아인 타티아노스가 4권의 정경 복음서를 통편집한 AD 170년의 {디아테사론}은 아래와 같이 전한다.
"Then said Jesus unto them, ‘I have been given all authority in heaven and earth; and as my Father has sent me, so I also send you. Go now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my gospel in all the creation; and teach all the peoples, and baptize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the Son and the Holy Spirit; and teach them to keep all whatsoever I commanded you: and lo, I am with you all the days, unto the end of the world’ [Matt. 28:18-20]" --- Tatian the Syrian, {The Diatesseron} 55
예수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나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던 것 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제 온 세상으로 가서 나의 복음을 만인에게 전하고, 그들을 가르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주어라.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들을 그들이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나는 너희와 이 세상의 끝까지 언제나 함께 있을 것이다. --- (앗)시리아인 타티아노스, {디아테사론} 55 / 번역: 최광민
리그두눔 (=리옹) 주교 이레네우스의 제자였던 로마 사제로 AD 2세기 후반에서 AD 3세기 초반에 활동한 히폴리투스의 저술로 현재 대체로 받아들여지는 {사도전승}에 따르면 세례를 줄 때 성부, 성자, 성령 및 교회와 육체의 부활에 대한 신자의 믿음을 묻는다. 이 문서는 AD 215년으로 소급된다.
"When the one being baptized goes down into the water, the one baptizing him shall put his hand on him and speak thus: ‘Do you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And he that is being baptized shall say: ‘I believe.’ Then, having his hand imposed upon the head of the one to be baptized, he shall baptize him once. Then he shall say: ‘Do you believe in Christ Jesus . . . ?’ And when he says: ‘I believe,’ he is baptized again. Again shall he say: ‘Do you believe in the Holy Spirit and the holy Church and the resurrection of the flesh?’ The one being baptized then says: ‘I believe.’ And so he is baptized a third time" --- {The Apostolic Tradition} 21
세례를 받을 자가 물 속으로 들어갈 때, 세례를 주는 이는 세례받는 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그대는 신 - 전능하신 성부를 믿습니까?'라고 말하면, 세례를 받는 이는 "믿습니다"라고 말한다. 다시 세례받는 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서 '그대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습니까?'라고 말할때, 그가 '믿습니다'라고 말하면 두번째로 세례를 준다. 다시 "그대는 성령과 거룩한 교회와 육체의 부활을 믿습니까?"라고 물을때 그가 "믿습니다"라고 하면 세번째로 세례를 준다 --- 로마의 히폴리투스, {사도전승} 21 /번역: 최광민
AD 216년,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양태론적 이단을 가르친 프락세아스를 반박하면서 아래와 같이 진술한다.
.... et post resurrectionem spondens missurum se discipulis promissionem patris, et novissime mandans ut tinguerent in patrem et filium et spiritum sanctum, non in unum : nam nec semel sed ter, ad singula nomina in personas singulas, tinguimur. ----- http://www.tertullian.org/latin/adversus_praxean.htm
"After his resurrection he promises in a pledge to his disciples that he will send them the promise of his Father; and lastly, he commands them to baptize into the Father and the Son and the Holy Ghost, not into a unipersonal God. And indeed it is not once only, but three times, that we are immersed into the three persons, at each several mention of their names" --- Tertulian of Carthage, {Against Praxeas} 26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그는 제자들에게 성부가 약속하신 분 (=성령) 보내주실 것이라고 맹세코 말씀하셨다. 마지막으로 그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며, 그저 '한 신'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줄 것을 명령하셨다. 진실로 그래서 세례는 한 번만 주는 것이 아니라 세 번 주어진다. 우리는 세 위 (페르소나)의 이름이 각각 불릴 때마다 각각 물에 잠긴다. ---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 {프락세아스 반박} 26 / 번역: 최광민
AD 248년 경,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신학자 오리게네스는 역시 성부-성자-성령의 공식을 언급할 뿐 아니라, 이 셋의 이름으로 주지 않는 세례를 무효라고 진술한다.
5.8: Perhaps you may inquire even into this: why, when the Lord himself told his disciples that they should baptize all peoples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 does this Apostle emply the name of Christ along in Baptism, saying, "We who have been baptized in Christ;" for indeed, legitimate baptism is had only in the name of the Trinity" --- Origen, {Commentary on Romans 5:8}
5.8. 아마도 "주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모든 이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에게 세례주어야 함을 지시했는데, 이 사도 (=바울)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받은 우리는'이라고 말할 때 그리스도의 이름 만 언급하지 않는가?"라고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진실로 셋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만 합법적 세례이다. ----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 {로마서 주석} 5:8 / 번역: 최광민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주교의 키프리아누스는 AD 253년에 아래와 같이 진술한다.
"He [Jesus] commanded them to baptize the Gentiles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How then do some say that though a Gentile be baptized . . . never mind how or of whom, so long as it be done in the name of Jesus Christ, the remission of sins can follow—when Christ himself commands the nations to be baptized in the full and united Trinity?" --- {Letters} 73:18
"그 (예수)는 이방인들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줄 것을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 그렇다면 도대체........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으로 세례가 주어지더라도 죄의 용서가 따라올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인가? - 그리스도 본인이 완전하고 통일된 세 분의 이름으로 세례줄 것을 명령하셨는데 말이다. ---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 {서신들} 73:18 / 번역: 최광민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는 니케아 회의 2년 전인 AD 323년에 아래와 같이 진술한다.
"We believe . . . each of these to be and to exist: the Father, truly Father, and the Son, truly Son, and the Holy Ghost, truly Holy Ghost, as also our Lord, sending forth his disciples for the preaching, said, ‘Go teach all nations, baptizing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Ghost.’ Concerning whom we confidently affirm that so we hold, and so we think, and so we have held aforetime, and we maintain this faith unto the death, anathematizing every godless heresy" (Letter to the People of His Diocese 3 [A.D. 323]).
우리는....이들이 각각 존재한다고 믿는다. 진실로 성부이신 성부, 진실로 아들이신 성자, 진실로 성령이신 성령이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그 제자들을 (복음을) 설파하기 위해 보내시면서, "가서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라고 하신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자신있게 확증하길, 이것이 우리가 지키는 바요, 생각하는 바요, 또한 전수받은 바요, 이 믿음을 죽음에 이르더라도 지킬 것이며, 모든 불경한 이단자를 파문할 것임을 확언한다. ---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 {교구에 보내는 편지} 2 / 번역: 최광민
성부-성자-성령이 세례의 효력을 담보하는 한 단위라면, 이 셋의 관계는 무엇이란 말일까? {구약성서}의 관점에서 인간의 죄를 소멸/사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신 (~성부)이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는 자신의 권위로 죄를 사면하여 유대인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을 격분시켰는데, 이 권세는 성부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답한다. 그럼 속죄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할은 또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
세례에 관한 {신약성서}의 진술에 따라 초기 기독교도들은 성부-성자-성령을 이해하면서 이 셋이 분명히 (실재로든, 양태론적으로든) 구분되지만, 동시에 어떤 의미나 형식으로든 '한 단위'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초기 교부들은 여기에 더해 {구약성서}로부터도 역시 구분되어 있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개념을 추출해 냈다.
{구약성서}의 경우,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인역 구약성서, LXX}를 주로 사용하던 교부들은, 히브리어에서 '신'을 뜻하는 복수 '엘로힘'에 상응하는 그리스어 '테오스'를 문맥상 '신', '천사', '왕', '제사장/사제' 등으로 달리 해석하지만, 신의 '이름'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야훼/여호와' 및 '야훼'의 완곡용법인 '아도나이 (=주님)'의 그리스어 번역인 '퀴리오스'의 경우 (가령, 야훼/아도나이 엘로힘 = 퀴리오스 테오스) 반드시 '신'에게만 적용시켰는데, 대체로 이 적용은 '성부'에 해당하지만, 동시에 '성자'에게도 적용되었다.
참고로, '성령'은 용례와 언어에 따라 문법적 성 (grammatical gender)이 다르다. 가령, 셈계 언어인 히브리어 ("רוח", 루아흐)나 아람어 (그리고 아람어의 후기형태인 시리아어)에서의 문법적 성은 '여성'이다. 그리스어 ("πνεῦμα", 프뉴마)에서의 문법적 성은 '중성'인데, 이 단어의 대명사는 '중성'과 '남성'이 함께 사용된다. 그리스어 {신약성서}에서 성령을 표현하는 다른 용어인 '파라클레토스'의 문법적 성은 '남성'이다. 라틴어와 라틴어에서 유래한 언어군에서 '영 (spiritus, '스피리투스')'는 문법적으로 '남성'이다. '물리적 성'과 '문법적 성'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은, 종종 이를 두고 '성령'에게 일종의 '여신'의 지위를 부여하려고 하는데, 이는 해당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억측에 불과하다.
{신약성서}를 제외하고 역사적 기독교에 전승된 가장 오래된 문건들에 따르더라도, AD 1세기 후반에서 AD 2세기 초반의 (최소한) 시리아 - 소아시아 - 그리스 - 로마 지역의 보편교회는 이미 '성부 + 성자 + 성령' 이라는 세 '신적 존재'가 셋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함을 인정하고 있었다. 일단 셋의 '동등성'에 대한 논의는 뒤로 미루도록 하자.
가령, 예수의 제자 요한의 제자였던 안티오키아 주교/감독 이그나티오스는 이렇게 말한다.
"For they speak of Christ, not that they may preach Christ, but that they may reject Christ; and they speak of the law, not that they may establish the law, but that they may proclaim things contrary to it. For they alienate Christ from the Father, and the law from Christ. They also calumniate His being born of the Virgin; they are ashamed of His cross; they deny His passion; and they do not believe His resurrection. They introduce God as a Being unknown; they suppose Christ to be unbegotten; and as to the Spirit, they do not admit that He exists. Some of them say that the Son is a mere man, and that the Father, Son, and Holy Spirit are but the same person, and that the creation is the work of God, not by Christ, but by some other strange power." --- Ignatius, {Epistle to the Trallians}, Ch. VI
그들(=이단자들)은 비록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지만, 그리스도를 전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를 부정한다. 그들은 율법에 대해 말하나 율법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율법에 반하는 것들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성부와 상관없는 존재로 만들고, 율법을 그리스도로 부터 분리시킨다. 그리스도가 처녀에게서 태어났다 점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부정하며 그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신을 미지의 존재로 만들었고, 그리스도가 (성부로부터) 낳아진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령에 관해 그들은 성령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더러는 성자가 그저 인간일 뿐이며, 성부, 성자, 성령이 [양태론적으로, 즉 실체적으로도 / 필자 주] 동일한 하나라고 말하거나, 성부가 그리스도(=성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어떤 다른 기이한 능력을 통해 세상을 창조한 것이라고 말한다. --- 안티오키아 주교 이그나티오스, {트랄리아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 제 6장 / 번역: 최광민
그래서 '신적 존재'로서의 '셋'은 이미 초기 기독교도들이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물론 이 '셋'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AD 1세기 중/후반~2세기 초반의 기독교도들이 정의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많은 가설들이 있다. 현존하는 기록 가운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수준으로 성부-성자(-성령)의 관계를 정의하고 있는 진술은 없기 때문이다. 소위 '정통파 교부들'로 간주되는 교부들의 진술만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정리하자면, 전승된 기록들만 본다면 늦어도 AD 1세기 말의 (정통파) 기독교도들은 (1) '한 신'을 믿었고 (2) 성부-성자-성령이라는 '셋'을 (천사를 포함한) 피조세계에 속하지 않은 신적 존재로 믿었으며 (그래서 또한 신으로 불렀고), (3) 동시에 이 셋을 (본질적이든 현상적이든) 구별해서 진술했다.
혹자는 이들 초기 기독교 교부들이 후대처럼 '정밀한' 정의를 내리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후대의 {니케아 신조}와 같은 방식으로 성부-성자-성령의 관계를 어렴풋이 이해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혹자는 성자와 성령은 비록 피조물이 아닌 '신적 존재 Divine Beings'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신 자체'는 아니기에 '신'으로 불릴 수는 있으나 '그 자체로서는' 신이 아닌, 즉 성부에게 종속되어 있는 하위의 존재들, 혹은 신의 '속성의 구현'들로 교부들이 이해했을 것으로 말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지 간에, 이 셋은 (천사를 포함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신적 존재'들로 간주되었다.
이 '셋'의 관계에 대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이 모든 진술들을 하나의 통일된 개념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 역사적인 (+ 정통파) 기독교도들에게 있어, 이 '통일된 개념'이 바로 '성부-성자-성령의 동일본질론에 입각한 삼위일체론'이었다. 또한 이들 거의 모두는 삼위일체 논쟁이 벌어지기 이미 200년도 전인 2세기 초반에도, 구약성서에서 족장들과 선지자/예언자들에게 나타났던 그 존재가 사실은 "성자"였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즉, 피조세계를 초월하여 불가지하고 불가해한 성부를 피조물에게 드러낸 현현은 바로 성부와 피조세계를 매개한 "성자"였다고 이해한 것이다.
37 καὶ ὁ πέμψας με πατὴρ ἐκεῖνος μεμαρτύρηκεν περὶ ἐμοῦ. οὔτε φωνὴν αὐτοῦ πώποτε ἀκηκόατε οὔτε εἶδος αὐτοῦ ἑωράκατε, --- 그리스어, {요한복음} 5:37
37 et qui misit me Pater, ipse testimonium perhibuit de me: neque vocem ejus umquam audistis, neque speciem ejus vidistis: --- 라틴어 불가타, {요한복음} 5:37
또 나 (=예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 주셨다. 너희는 그 음성을 들은 일도 없고, 그 모습을 본 일도 없다. --- 한국어 새번역, {요한복음} 5:37
그래서 AD 4세기 초반과 중반을 강타한 '삼위일체' 논쟁 - 더 정확히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본질에 대한 논쟁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 논쟁이 그리스 철학용어를 사용해 진행되기는 하지만,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사유의 도구일 뿐, 논쟁 그 자체는 바로 {신약성서} 여기저기에 등장하는 구절들에 바탕해 가장 타당한 통일적인 설명을 찾아내려는 시도였다.
따라서 니케아 회의와 그 이후에 대립하는 '동일본질'파와 '유사/이질본질'파 양 측의 어느 누구도 위에 언급된 {신약성서}의 구절들 그 자체에 반대한 사람은 없었다. 즉, 이 진술들은 '동일본질파'와 그 반대파 모두가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할 근거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동일한 단서/진술에 대한 양 측의 이해가 달랐을 뿐이다.
"성령은 신이다"란 표현 자체는 성서에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성령을 포함하는 삼위일체의 최종적 정의를 놓고 니케아 회의 이후 거의 2세대 동안 혼란스러웠던 상황에 대해 닛사 주교 그레고리오스의 강론 31.5에서 인용한다.
V. Or rather, let me reason with you about Him from a somewhat earlier point, for we have already discussed the Trinity. The Sadducees altogether denied the existence of the Holy Spirit, just as they did that of Angels and the Resurrection; rejecting, I know not upon what ground, the important testimonies concerning Him in the Old Testament. And of the Greeks those who are more inclined to speak of God, and who approach nearest to us, have formed some conception of Him, as it seems to me, though they have differed as to His Name, and have addressed Him as the Mind of the World, or the External Mind, and the like. But of the wise men amongst ourselves, some have conceived of him as an Activity, some as a Creature, some as God; and some have been uncertain which to call Him, out of reverence for Scripture, they say, as though it did not make the matter clear either way. And therefore they neither worship Him nor treat Him with dishonour, but take up a neutral position, or rather a very miserable one, with respect to Him. And of those who consider Him to be God, some are orthodox in mind only, while others venture to be so with the lips also. And I have heard of some who are even more clever, and measure Deity; and these agree with us that there are Three Conceptions; but they have separated these from one another so completely as to make one of them infinite both in essence and power, and the second in power but not in essence, and the third circumscribed in both; thus imitating in another way those who call them the Creator, the Co-operator, and the Minister, and consider that the same order and dignity which belongs to these names is also a sequence in the facts. --- Gregory of Nyssa, {The Fifth Theological Oration. On the Holy Spirit}, Oration #31.
...우리가 이미 삼위일체에 대해서 논했기 때문에, 이전의 논점을 통해 그 분(성령 / 필자 주)에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사두개파들은 성령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하는데, 그 뿐 아니라 그들은 또한 천사나 부활에 대해서도 부정하면서 구약성서에서 그 분에 대한 근거나 중요한 증언을 본 적 없다며 말한다. 그들보다는 보다 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래서 우리 (기독교도)에게 보다 근접한 그리스인들의 경우, 내가 보기엔 그들이 그(=성령)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긴 했지만 그에 관한 모종의 개념을 생각해 내기는 했고, 성령을 '세계혼'이나 혹은 '영원한 정신' 등으로 불렀다. 우리 (=기독교 계열, 이질본질파 (원조 아리우스), 유사본질파 (준-아리우스파), 동일본질파 (니케아, 정통파) / 필자 주) 측의 학식있는 사람들의 경우, 혹자는 그를 (신의 / 필자 주) '활동력'이라고 생각하고, 혹자는 피조물이라고 생각하고, 혹자는 신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성서에 바탕할 때 성령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를 확신하지 못하고 어느 쪽 설명으로도 이 문제가 분명하지 않다고 말하며, 따라서 성령을 경배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않으면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혹은 그에 대해 난처해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성령을 신으로 간주하는 이들 가운데서 일부는 생각만 정통이지만, 또 어떤 이들은 입술로도 담대히 그렇게 주장한다. 나는 신성의 경중을 재는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도 들었는데, 비록 그들이 세 개념 (성부, 성자, 성령)이 있다는 점에서는 우리에게 동의하지만, 그들은 이 셋을 서로 분리하여 그 중 한 분은 (= 성부)는 그 본질과 권능에 있어서 무한하다고 보고, 두번째 분(=성자)은 본질이 아닌 권능에 있어서만, 그리고 세번째 분(=성령)은 (본질과 권능) 둘 다 제한이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 셋을 모두 창조주, 동역자, (우주의) 관리자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을 흉내내기는 하지만, 실재에 있어 그들의 위계와 위엄은 이 순서를 따른다고 여긴다..... --- 닛사 주교 그레고리오스, {성령에 관하여} 강론 #31 / 번역: 최광민
이들 카파도키아 3총사가 활동하던 시절은 성부와 성자를 완전히 분리시키고, 또 성령을 성부와 성자의 조수 정도로 격하시키던 경향을 가진 원조 아리우스파의 세가 한풀 꺾이던 중이자, 성부-성자-성령의 신적지위를 인정하되 셋 간의 위계적/위엄적 지위를 그 순서대로 간주하던 준-아리우스파가 보다 동일본질파 쪽으로 동화되던 시기였다.
그레고리오스의 친구이기도 했던 카이사리아 주교 바실레이오스는 AD 375년 경 이들을 겨냥하여 삼위의 동등을 분명히 강조한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한 {성령에 대하여}를 발표한다. 당시 그는 공공예배에서 영광송 (Doxology)을 부르면서 "성부께 영광을, (영광을 / 필자 주) 성자와 함께 (with), 또 성령과 함께 (with)"란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원래의 전통적인 표현은 "성부께 영광을, 성자를 통해 (through), 성령 안에서 (in)"였다.
이 전통적 용어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바실레이오스는 그 당시 준-아리우스파 주교 마케도니오스의 교리를 주장하던 한 일파인 (폄칭) 프뉴마토마코이 (=성령의 대적자)들이 성령의 신성을 부정하고, 성령을 성자의 피조물이자 성부/성자의 사환으로 간주하던 것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들은 그리스 철학, 특별히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에 따라 삼위의 세 존재를 확실히 구별하면서, 이를 "문법적"으로도 정당화 했는데, 가령, "~로부터 from"은 성부에게, "~를 통해 through"는 성자에게, "~안에"는 성령에게 적용되는데, 이는 이 단어들이 각 존재의 속성과 연결되어 있다고 해석했다. 즉, 성부는 "기원", 성자는 "활동", 성령은 성자의 활동이 이뤄지는 "시간과 장소"에 대응된다고 본 것이다. 이 셋의 속성이 다르므로, 단어 또한 달리 써야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의 핵심이었다.
바실레이오스는 이들의 수사학적이고 철학적 설명이 이교적이며, 또한 "성령과 함께"와 "성령 안에서"는 교회의 전통과 성서에서 모두 존재하며, 다만 전자는 "삼위 간"의 관계를, 후자는 "성령과 인간" 간의 관계란 문맥에서 모두 가능하다고 변호했다.
바실레이오스의 {성령에 대하여}에서 인용한다.
Truth is always a quarry hard to hunt, and therefore we must look everywhere for its tracks
The superior remoteness of the Father is really inconceivable, in that thought and intelligence are wholly impotent to go beyond the generation of the Lord; and St. John has admirably confined the conception within circumscribed boundaries by two words,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For thought cannot travel outside “was,” nor imagination beyond “beginning.” Let your thought travel ever so far backward, you cannot get beyond the “was,” and however you may strain and strive to see what is beyond the Son, you will find it impossible to get further than the “beginning.” True religion, therefore, thus teaches us to think of the Son together with the Father.
We must not, however, regard the economy through the Son as a compulsory and subordinate ministration resulting from the low estate of a slave, but rather the voluntary solicitude working effectually for His own creation in goodness and in pity, according to the will of God the Father.
When then He says, “I have not spoken of myself,” and again, “As the Father said unto me, so I speak,”6 and “The word which ye hear is not mine, but [the Father’s] which sent me,” and in another place, “As the Father gave me commandment, even so I do,”8 it is not because He lacks deliberate purpose or power of initiation, nor yet because He has to wait for the preconcerted key-note, that he employs language of this kind. His object is to make it plain that His own will is connected in indissoluble union with the Father. Do not then let us understand by what is called a “commandment” a peremptory mandate delivered by organs of speech, and giving orders to the Son, as to a subordinate, concerning what He ought to do. Let us rather, in a sense befitting the Godhead, perceive a transmission of will, like the reflexion of an object in a mirror, passing without note of time from Father to Son
Its proper and peculiar title is “Holy Spirit;” which is a name specially appropriate to everything that is incorporeal, purely immaterial, and indivisible.
Just as when a sunbeam falls on bright and transparent bodies, they themselves become brilliant too, and shed forth a fresh brightness from themselves, so souls wherein the Spirit dwells, illuminated by the Spirit, themselves become spiritual, and send forth their grace to others. Hence comes foreknowledge of the future, understanding of mysteries, apprehension of what is hidden, distribution of good gifts, the heavenly citizenship, a place in the chorus of angels, joy without end, abiding in God, the being made like to God, and, highest of all, the being made God.
For if our Lord, when enjoining the baptism of salvation, charged His disciples to baptize all nations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Ghost,” not disdaining fellowship with Him, and these men allege that we must not rank Him with the Father and the Son, is it not clear that they openly withstand the commandment of God? But the greatest proof of the conjunction of the Spirit with the Father and the Son is that He is said to have the same relation to God which the spirit in us has to each of us. “For what man” it is said, “knoweth the things of a man, save the spirit of man which is in him? even so the things of God knoweth no man but the Spirit of God.” (1 Cor 2:11). --- Basil the Great, {On Holy Spirit}
우리 주님이 구원을 위한 세례를 가르치시며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실때, 그 (성령)과의 관계를 간과하지 않으셨고, 그들도 우리가 성령을 성부와 성자에 따라 서열을 세우지 말아야 함을 보였다면, 그들이 신의 계명을 공개적으로 지켰다는 점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나 성령이 성부와 성자와 맺는 관계에 대한 가장 큰 증거는 성령과 신의 관계는 우리의 영과 우리의 관계과 같은 것으로 표현된다는 점이다. "사람 속의 일을 그 영 이외에 누가 알겠는가? 신의 일도 신의 영 이외엔 누구도 모르는 법이다"라고 기록되었으니 말이다. (고린트 1서 2:11) ---- 카이사리아 마자카 주교 바실레이오스, {성령에 대하여} / 번역: 최광민
이 설명은 동방의 교부들에 앞서 이미 2세기 말 북아프리카 라틴교회의 거점이던 카르타고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가 양태론자 프락세아스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제시한 바 있다. 읽어보자.
[4] quis enim scit quae sint in deo nisi spiritus qui in ipso, est? sermo autem spiritu structus est, et ut ita dixerim sermonis corpus est spiritus. sermo ergo et in patre semper, sicut dicit,Ego in patre : et apud deum semper, sicut scriptum est, Et sermo erat apud deum: et nunquam separatus a patre aut alias a patre quia Ego et pater unum sumus.
[4] For what man knows the things which be in God, but the Spirit which is in Him? 1 Corinthians 2:11 But the Word was formed by the Spirit, and (if I may so express myself) the Spirit is the body of the Word. The Word, therefore, is both always in the Father, as He says, I am in the Father; John 14:11 and is always with God, according to what is written, And the Word was with God; John 1:1 and never separate from the Father, or other than the Father, since I and the Father are one. John 10:30
신 안에 계신 그의 영 이외에 누가 신의 생각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말씀/로고스는 굳이 말한다면 성령에 의해 형상을 갖추며, 또 성령은 로고스의 몸이다. 그래서 성자/로고스가 "나는 아버지 안에 있다"라고 말하듯, 로고스는 성부 안에 언제나 있는 동시에, 또한 성부와 함께 계신다. 이것은 "로고스/말씀은 신과 함께 계셨다"라고 기록된 바와 같다. 그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기록된 바와 같이, 성자는 결코 성부로부터 분리되지 않으며, 성부가 아닌 것으로부터도 분리되지 않는다 / 테르툴리아누스, {프락세아스 반박} / 번역: 최광민
기독교 초기교부들의 모든 기록에서 성부에 대한 지식은 피조세계에 감추어져 있고, 성부를 알고 성부를 피조세계에 알리는 것은 성자이며, 또한 그를 통해서만 성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마치 인간의 영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듯) 성령 역시 성부의 경륜까지 살피고 그 생각을 헤아린다고 적는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령을 받은 기독교도들은 또한 그리스도의 마음 (νοῦν χριστοῦ) 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성부의 뜻을 이제 헤아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는 무엇이겠는가?
9 ἀλλὰ καθὼς γέγραπται, ἃ ὀφθαλμὸς οὐκ εἶδεν καὶ οὗς οὐκ ἤκουσεν καὶ ἐπὶ καρδίαν ἀνθρώπου οὐκ ἀνέβη, ἃ ἡτοίμασεν ὁ θεὸς τοῖς ἀγαπῶσιν αὐτόν. 10 ἡμῖν δὲ ἀπεκάλυψεν ὁ θεὸς διὰ τοῦ πνεύματος· τὸ γὰρ πνεῦμα πάντα ἐραυνᾷ, καὶ τὰ βάθη τοῦ θεοῦ. 11 τίς γὰρ οἶδεν ἀνθρώπων τὰ τοῦ ἀνθρώπου εἰ μὴ τὸ πνεῦμα τοῦ ἀνθρώπου τὸ ἐν αὐτῶ; οὕτως καὶ τὰ τοῦ θεοῦ οὐδεὶς ἔγνωκεν εἰ μὴ τὸ πνεῦμα τοῦ θεοῦ. 12 ἡμεῖς δὲ οὐ τὸ πνεῦμα τοῦ κόσμου ἐλάβομεν ἀλλὰ τὸ πνεῦμα τὸ ἐκ τοῦ θεοῦ, ἵνα εἰδῶμεν τὰ ὑπὸ τοῦ θεοῦ χαρισθέντα ἡμῖν· 13 ἃ καὶ λαλοῦμεν οὐκ ἐν διδακτοῖς ἀνθρωπίνης σοφίας λόγοις ἀλλ᾽ ἐν διδακτοῖς πνεύματος, πνευματικοῖς πνευματικὰ συγκρίνοντες. 14 ψυχικὸς δὲ ἄνθρωπος οὐ δέχεται τὰ τοῦ πνεύματος τοῦ θεοῦ, μωρία γὰρ αὐτῶ ἐστιν, καὶ οὐ δύναται γνῶναι, ὅτι πνευματικῶς ἀνακρίνεται·15 ὁ δὲ πνευματικὸς ἀνακρίνει [τὰ] πάντα, αὐτὸς δὲ ὑπ᾽ οὐδενὸς ἀνακρίνεται.16 τίς γὰρ ἔγνω νοῦν κυρίου, ὃς συμβιβάσει αὐτόν; ἡμεῖς δὲ νοῦν χριστοῦ ἔχομεν. -- 그리스어
9 Sed sicut scriptum est: Quod oculus non vidit, nec auris audivit, nec in cor hominis ascendit, quæ præparavit Deus iis qui diligunt illum: 10 nobis autem revelavit Deus per Spiritum suum: Spiritus enim omnia scrutatur, etiam profunda Dei.11 Quis enim hominum scit quæ sunt hominis, nisi spiritus hominis, qui in ipso est? ita et quæ Dei sunt, nemo cognovit, nisi Spiritus Dei. 12 Nos autem non spiritum hujus mundi accepimus, sed Spiritum qui ex Deo est, ut sciamus quæ a Deo donata sunt nobis: 13 quæ et loquimur non in doctis humanæ sapientiæ verbis, sed in doctrina Spiritus, spiritualibus spiritualia comparantes. 14 Animalis autem homo non percipit ea quæ sunt Spiritus Dei: stultitia enim est illi, et non potest intelligere: quia spiritualiter examinatur.15 Spiritualis autem judicat omnia: et ipse a nemine judicatur. 16 Quis enim cognovit sensum Domini, qui instruat eum? nos autem sensum Christi habemus. --- 라틴어 불가타
그러나 성경에 기록한 바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한 것들,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은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련해 주셨다" 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이런 일들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은 모든 것을 살피시니, 곧 하나님의 깊은 경륜까지도 살피십니다. 사람 속에 있는 그 사람의 영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신 영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선물들을 우리로 하여금 깨달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선물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에서 배운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말로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령한 것을 가지고 신령한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그러나 자연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런 일들이 어리석은 일이며, 그는 이런 일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영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서도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았습니까? 누가 그분을 가르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 한국어 새번역 {고린도전서} 2:9-16
이들 카파도키아 교부 3인이 정교히 정의한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이 보강된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AD 381년의 제 1차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에서 AD 325 년 니케아 공회의의 신조를 증보해 발표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강력히 반영되어 이후 기독교의 정통신조로 고정되었다.
§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아브라함이 만난 세 사람
'천사를 포함한 피조세계'에 속하지 않은 성부-성자-성령이란 이 '세 신적 (divine)' 존재를 인정하게 될 때 이어지는 당연한 질문은 이 '셋'의 관계일 것이다. {신약성서} 그 자체에는 이 셋을 명시적으로 하나로 묶어 부르는 단일한 용어가 없다. 다만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호칭될 뿐이다.
이런 세 신적존재에 대한 개념은 기독교 교부들이 다신교적인 지중해 종교들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낸, 즉 AD 1세기까지의 유대교에서는 전혀 발견된 적 없는 개념이던가?
그게 또 그렇지 않다. (참고: http://kwangmin.blogspot.com/2015/07/vs-04.html)
예수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알렉산드리아의 저명한 유대인 철학자 필론은 그의 저작인 {아브라함에 관하여}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앞서 아브라함을 방문했던 '세 여행자'의 이야기를 다루는 {창세기} 18-19장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그는 우선 이 '셋'을 '천사들'로 보는 유대교의 통상적인 문자적 해석을 설명한 후, 이어서 이 '셋'을 비유적이고 상징적으로 풀이한다.
한국어 공동번역으로 해당 부분을 발췌해서 읽어보자.
......야훼께서는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문 어귀에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어 웬 사람 셋이 자기를 향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들을 보자마자 천막 문에서 뛰어나가 맞으며 땅에 엎드려 청을 드렸다. "손님네들, 괜찮으시다면 소인 곁을 그냥 지나쳐 가지 마십시오. 물을 길어올 터이니 발을 씻으시고 나무 밑에서 좀 쉬십시오. 떡도 가져올 터이니 잡수시고 피곤을 푸신 뒤에 길을 떠나십시오. 모처럼 소인한테 오셨는데, 어찌 그냥 가시겠습니까?" 그들이 대답하였다. "아! 그렇게 하여주시겠소?" 아브라함은 급히 천막으로 들어가 사라에게 고운 밀가루 서 말을 내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고 이르고 소떼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살이 연하고 맛있어 보이는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종에게 맡겨 빨리 잡아서 요리하게 하고는 그 송아지 요리에다가 엉긴 젖과 우유를 곁들여서 손님들 앞에 차려놓고, 손님들이 나무 밑에서 먹는 동안 그 곁에 서서 시중을 들었다.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부인 사라는 어디 계시오?" 하고 묻자, 아브라함은 사라가 천막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내년 봄 새싹이 돋아날 무렵, 내가 틀림없이 너를 찾아오리라. 그 때 네 아내 사라는 이미 아들을 낳았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등지고 서 있는 천막 문 어귀에서 이 말을 엿듣고 있었다.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 많은 늙은이였고 사라는 달거리가 끊긴 지도 오래였다. 그래서 사라는 속으로 웃으며 "내가 이렇게 늙었고 내 남편도 다 늙었는데, 이제 무슨 낙을 다시 보랴!"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야훼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사라가, 다 늙은 몸으로 어떻게 아기를 낳으랴 하며 웃으니, 될 말이냐?이 야훼가 무슨 일인들 못 하겠느냐? 내년 봄 새싹이 돋아날 무렵에 내가 다시 찾아오리라. 그 때 사라는 이미 아들을 낳았을 것이다." 그러자 사라는 겁이 나서 웃지 않았다고 잡아뗐으나, 야훼께서는 "아니다. 너는 분명히 웃었다." 하시며 꾸짖으셨다.
사람들은 길을 떠나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도 그들을 배웅하느라고 같이 왔다. 야훼께서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셨다. '내가 장차 하려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 아브라함은 강대한 민족이 되고 세상 민족들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 복을 빌 것이 아닌가? 나는 그로 하여금 그의 자손과 그의 뒤를 이을 가문에게 옳고 바른 일을 지시하여 이 야훼의 가르침을 지키게 하려고 그를 뽑아 세우지 않았던가? 그러니, 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을 그대로 이루어주어야 하리라.' 이렇게 생각하시고 야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오는 저 아우성을 나는 차마 들을 수가 없다. 너무나 엄청난 죄를 짓고들 있다. 내려가서 그 하는 짓들이 모두 나에게 들려오는 저 아우성과 정말 같은 것인지 알아보아야 하겠다." 그 사람들은 걸음을 옮겨 소돔 쪽으로 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냥 야훼 앞에 서 있었다.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물었다.....[중략].....
야훼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자리를 뜨셨다. 아브라함도 자기 고장으로 되돌아갔다.
하느님의 천사 둘이 소돔에 다다른 것은 저녁때였다. 롯이 때마침 성문께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맞으며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청하였다. "손님네들, 누추하지만 제 집에 들러 발을 씻으시고 하룻밤 편히 쉬신 다음 아침 일찍이 길을 떠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들은 밖에서 밤을 새우겠다고 하면서 사양하였으나, 롯이 하도 간청하는 바람에 롯을 따라 그의 집에 들어갔다. 롯은 그들에게 누룩 안 든 빵을 구워주며 대접하였다. 그들이 아직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소돔 시민이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온통 몰려와 롯의 집을 둘러싸고 롯에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오늘 밤 네 집에 든 자들이 어디 있느냐? 그자들하고 재미를 좀 보게 끌어내어라." ....[중략]..... 일이 이쯤 되자 그 두 사람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았다.......[중략].....동 틀 무렵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롯을 재촉하였다. "이 성에 벌이 내릴 때 함께 죽지 않으려거든, 네 아내와 시집가지 않은 두 딸을 데리고 어서 떠나거라." 그래도 롯이 망설이므로 그들은 보다못해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고 성 밖으로 끌어내었다. 야훼께서 롯을 그토록 불쌍히 여기셨던 것이다. 롯의 가족을 데리고 나온 그들은 "살려거든 어서 달아나거라.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 된다. 이 분지 안에는 아무데도 머물지 마라. 있는 힘을 다 내어 산으로 피해야 한다." 하고 재촉하였다. 그러나 롯은 그들에게 간청하였다.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저같이 하잘것없는 사람에게 이렇듯 큰 호의를 베풀어 목숨을 건져주시니 고마운 말씀 이루 다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재앙이 당장 눈앞에 있는데 저 산으로 도망치다가는 죽고 말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기 보이는 도시라면 가까워서 도망칠 수 있겠습니다. 아주 작은 도시입니다. 작은 도시지만 거기에라도 가서 목숨을 건지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그는 청을 들어주겠다고 하며 롯에게 말하였다. "저 도시는 멸하지 않을 터이니 빨리 그 곳으로 달아나거라. 네가 그 곳에 이르기까지 나는 손을 쓸 수가 없다." 그 도시를 소알이라고 한 데는 이런 연유가 있다.
롯이 소알 땅을 밟자 해가 솟았다. 야훼께서 손수 하늘에서 유황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퍼부으시어 (원어: 야훼께서, 유황과 불을 하늘의 야훼로부터) 거기에 있는 도시들과 사람과 땅에 돋아난 푸성귀까지 모조리 태워버리셨다. --- 한국어 공동번역, {창세기} 18-19장
이 창세기 원문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에서 필론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셋'을 (1) '한 존재 / 야훼'의 (2) 세 형상/이미지였다고 풀이한다. 즉, 아브라함이 본 '셋'은 (1) 가운데 있던 살아있는 신의 본질적 형상과 (2) 그것에서 현현되는 두 그림자 형상이었다는 것이다. 마치 빛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두개의 그림자가 생긴 것과 같다는 것이다.
필론의 설명을 읽어보자.
{The works Philo Judaeus, the contemporary of Josephus} by Philo, of Alexandria; Yonge, Charles Duke, 1812-1891
https://archive.org/stream/worksphilojudaeu02philuoft
XXIV. (119) This then is sufficient to say by way of a literal explanation of this account; we must now speak of that which may be given if the story be looked at as figurative and symbolical. The things which are expressed by the voice are the signs of those things which are conceived in the mind alone; when, therefore, the soul is shone upon by God as if at noonday, and when it is wholly and entirely filled with that light which is appreciable only by the intellect, and by being wholly surrounded with its brilliancy is free from all shade or darkness, it then perceives a threefold image of one subject, one image of the living God, and others of the other two, as if they were shadows irradiated by it. And some such thing as this happens to those who dwell in that light which is perceptible by the outward senses, for whether people are standing still or in motion, there is often a double shadow falling from them.
이 설명에 대한 문자적 설명은 충분하다. 그럼 이제 같은 이야기를 비유적이고 상징적으로 해석하 는 경우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목소리에 의해 표현되는 것은 마음 속에 생각되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그래서 신이 마치 대낮처럼 영혼에 빛을 비춘다면, 그 영혼은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지성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그 빛에 충만하게 되며, 그 빛에 완전히 둘러싸이게 되면 거기엔 어떤 그림자도 어떤 어둠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은 그때 한 존재의 세 형상을 인식하게 된다. 그 하나는 살아계신 신이며, 다른 둘은 신에게서 발산된 그림자 같은 존재이다. 이런 것 가운데 어떤 것들은 그 빛 가운데 존재하는 사람의 외적 감관에 의해서도 감지될 수 있는데, 이것은 사람이 정지해 있거나 혹은 움직일 때 종종 그 사람으로 인해 생기는 두 그림자가 생기는 것과 같다. / 번역: 최광민
(120) Let not any one then fancy that the word shadow is applied to God with perfect propriety. It is merely a catachrestical abuse of the name, by way of bringing before our eyes a more vivid representation of the matter intended to be intimated.
(121) Since this is not the actual truth, but in order that one may when speaking keep as close to the truth as possible, the one in the middle is the Father of the universe, who in the sacred scriptures is called by his proper name, I am that I am; and the beings on each side are those most ancient powers which are always close to the living God, one of which is called his creative power, and the other his royal power. And the creative power is God, for it is by this that he made and arranged the universe; and the royal power is the Lord, for it is fitting that the Creator should lord it over and govern the creature. (122) Therefore, the middle person of the three, being attended by each of his powers as by body-guards, presents to the mind, which is endowed with the faculty of sight, a vision at one time of one being, and at another time of three; of one when the soul being completely purified, and having surmounted not only the multitudes of numbers, but also the number two, which is the neighbour of the unit, hastens onward to that idea which is devoid of all mixture, free from all combination, and by itself in need of nothing else whatever; and of three, when, not being as yet made perfect as to the important virtues, it is still seeking for initiation in those of less consequence, and is not able to attain to a comprehension of the living God by its own unassisted faculties without the aid of something else, but can only do so by judging of his deeds, whether as creator or as governor.
꼭 사실이 아니더라도 가능한 사실에 가까운 설명을 해 본다면, 그 가운데 있는 존재는 성서가 적절하게도 '나는 나다 = 에헤예 아쉐르 에헤예 אֶֽהְיֶ֖ה אֲשֶׁ֣ר אֶֽהְיֶ֑ה'로 호칭하고 있는 바로 그 우주의 아버지이다. 그리고 그를 양 측에서 보좌하는 존재는 살아계신 신을 지극히 오래 전부터 보좌하고 있는 신의 능력들로서, 각각 '창조력'과 '신의 왕권 (=지배력)'이라 불리어 진다. 이 '창조력'은 '신 / 테오스 θεός = 엘로힘 אֱלֹהִים'인데, 그 이유는 바로 이 능력을 통해 신이 우주를 만들고 조정하였기 때문이다. '신의 왕권'은 '주님 / 퀴리오스 κύριος = 아도나이 אֲדֹנָי'인데, 그 이유는 이를 통해 창조주가 피조물 위에 군림하여 지배하기 때문이다. (122) 그래서, 두 능력들의 보좌를 받아 가운데 계신 존재는 시각을 통해서 정신에 비춰지게 될 때 경우에 따라 한 존재로도, 혹은 세 존재로도 보여지는 것이다. 온전히 순수한 영혼에게 신은 복수로서 표상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존재로 보여지며, 그냥 복수 뿐 아니라 아무것도 섞이지 않았고, 어떤 혼합도 없으며, 자충적인 이데아 (신 자신)를 향하고 두 존재들 (즉, '창조력'과 '지배력') 조차도 압도한다. 또한 이 존재는 셋으로도 보여지는데, 이 경우는 영혼이 아직 온전하지 않아 중요한 덕성들로 연마되어 있지않고 여전히 낮은 입문 단계에 있어서, 살아계신 신을 다른 도움없이 오직 신 자신 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탓에 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의 행위, 즉 창조자로서의 능력과 지배자로서의 능력을 통할 수 밖에 없는 경우에 그러한 것이다./ 번역: 최광민
[중략]
XXV. (124) There are three different classes of human dispositions, each of which has received as its portion one of the aforesaid visions. The best of them has received that vision which is in the centre, the sight of the truly living God. The one which is next best has received that which is on the right hand, the sight of the beneficent power which has the name of God. And the third has the sight of that which is on the left hand, the governing power, which is called lord. (125) Therefore, the best dispositions cultivate that being who exists of himself, without the aid of any one else, being themselves attracted by nothing else, by reason of all their entire attention being directed to the honour of that one being. But of the other dispositions, some derive their existence and owe their being recognized by the father to his beneficent power; and others, again, owe it to his governing power.
(124) 인간에게는 앞서 말한 시각/관점들을 받아들이는 세 종류의 정신적 성향이 있다. 이 가운데 최선은 중앙의 존재 -즉, 진실로 살아계신 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차선은 그의 우측에 있는 존재 - 즉, 신의 이름 (=엘로힘)을 지니고 있는 신의 자애로운 권능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신의 좌측에 있는 신의 '지배력'이자 주님 (=아도나이)라 불리는 존재를 바라보는 것이다. ....[중략].../ 번역: 최광민
[중략]
(131) But that which is seen is in reality a threefold appearance of one subject is plain, not only from the contemplation of the allegory, but also from that of the express words in which the allegory is couched. (132) For when the wise man entreats those persons who are in the guise of three travellers to come and lodge in his house, he speaks to them not as three persons, but as one, and says, "My lord, if I have found favour with thee, do not thou pass by thy Servant."{12}{#ge 18:3.} For the expressions, "my lord," and "with thee," and "do not pass by," and others of the same kind, are all such as are naturally addressed to a single individual, but not to many. And when those persons, having been entertained in his house, address their entertainer in an affectionate manner, it is again one of them who promises that he by himself will be present, and will bestow on him the seed of a child of his own, speaking in the following words: "I will return again and visit thee again, according to the time of life, and Sarah thy wife shall have a Son."{13}{#ge 18:10.} ---- Philo of Alexandria, {On Abraham}, 121f., 124
...[중략]....(132) 그 현자 (아브라함 / 필자 주)가 세 여행자로 위장하고 나타난 존재를 그의 집에 맞이하여 대접할 때, 아브라함은 이 셋을 셋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로서 대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말하길, "내 주여, 제가 당신을 위해 좋은 것을 마련해 드릴테니, 당신의 종을 지나치지 마소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의 주 (단수)", "당신께 (단수)", "지나치지 마소서 (단수동사 / 필자 주)"란 표현이나 이와 유사한 다른 표현들은 복수가 아닌 단수의 인물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후략] ---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아브라함에 관하여} / 번역: 최광민
필론의 '비유적' 해석은 이 장면에서 한 신을 구성하는 '신 자체'와 신의 두 '속성'들을 설명한다. 이 경우 신 자체 (~야훼) '나는 나 - 에헤예 아쉐르 에헤예'이고, 그 오른편에는 신의' 창조력'인 '엘로힘 / 테오스 / 신'이 있고, 그 좌측에는 신의 '지배력'인 '아도나이 / 퀴리오스 / 주님'이 있다. '예헤 아쉐르 에헤', '엘로힘', 그리고 '아도나이'가 한 단위로 {구약성서}에서 사용되는 그것은 다른 말 할 것 없이 '유대교의 신' 야훼다.
오해하지 말하야 할 점은 '신 자체'를 보좌하는 그의 '창조력 / 엘로힘'과 '지배력 / 아도나이'는 신 자체의 '피조물'이 아니란 점이다. 필론의 관점에서 이 두 권능은 '신 자체'의 '속성'', (온전하지는 않더라도) '신 자체'를 인식하는 한 '방식', 혹은 '신 자신'를 바라보는 한 '방향'에 해당하기 때문에, 사실은 '신 자체'와 분리되지 않으며, 동시에 영원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창조력 / 엘로힘'과 '지배력 / 아도나이'가 '신 자신'를 대신하거나 혹은 '신 자신'이 그 둘로 온전히 변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엘로힘-신 자신-아도나이는 '양태론'적인 관계에 놓이지는 않는다.
필론은 이 해석이 '반드시 사실은 아니더라도 사실에 근접한' 알레고리적 해석이라고 누누이 당부한다. 하지만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신 / 테오스'이자, '주님 / 퀴리오스'이자, '성부의 우편에 앉은 자'로 표현되는 것을 기억해 본다면 흥미롭지 않은가? (이 표현 자체는 다윗의 {시편}에서 온 것이다.)
물론 필론도 말했다시피 이 '세 사람'을 '세 천사'로 보는 견해가 가장 일반적인 독법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세 천사'로 보는 해석과, 필론의 '세 측면'으로 보는 해석과 또 달리, AD 1세기 초로 소급되는 유대교의 {요나단 탈굼}이나 AD 1-4세기의 거의 모든 기독교 교부들의 해석은 또 다르다. 아브라함을 방문한 세 사람에 대해, {탈굼}은 그 중 가운데 인물을 '야훼의 멤라/말씀'으로 해석하고 다른 둘을 천사로 보았고, 또 초기 기독교 교부들도 (심지어 나중의 아리우스파 까지도) 이 셋을 인간이 되기 전의 성자와 그의 두 천사로 해석했다.
{창세기} 19장 24절의 히브리어 원전에 등장하는 ‘두 야훼’ - 하늘에 있던 야훼와 지상의 야훼 - 에 대해 {요나단 탈굼}과 {예루살렘 탈굼}은 앞의 야훼를 ‘야훼의 멤라/말씀’으로 바꾸고 있다. 우선 히브리어와 그리스 원문을 읽은 후, 아람어 탈굼이 어떻게 해당 문장에 등장하는 두 야훼를 렌더링하고 있는지를 보자.
“And YHWH rained brimstone and fire upon Sodom and upon Gomorrah, from YHWH, from the heavens.” -- 히브리어 원문 (영어, 타나크)
야훼께서, 하늘의 야훼로부터 소돔과 고모라 위에 유황과 불의 비를 내리셨다 --- 히브리어 원문 직역
24 καὶ κύριος ἔβρεξεν ἐπὶ Σοδομα καὶ Γομορρα θεῖον καὶ πῦρ παρὰ κυρίου ἐκ τοῦ οὐρανοῦ --- 그리스어 {70인역 / LXX}
퀴리오스 (=주님)께서 하늘의 퀴리오스 (주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셨다 --- 그리스어 {70인역} / 번역: 최광민
And the Word of the Lord had caused showers of favour to descend upon Sedom and Amorah, to the intent that they might work repentance, but they did it not: so that they said, Wickedness is not manifest before the Lord. Behold, then, there are now sent down upon them sulphur and fire from before the Word of the Lord from Heaven --- {The Targums of Onkelos and Jonathan Ben Uzziel: On the Pentateuch With The Fragments of the Jerusalem Targum From the Chaldee} J. W. Etheridge, M.A. https://archive.org/details/cu31924074296975
주님 (야훼)의 말씀/멤라가 세돔(소돔)과 아모라 (고모라)인들을 회개시키려고 은총을 내리셨으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주님 앞에 들킨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이제 유황과 불이 하늘로부터 주님의 멤라 앞에 내려왔다 --- 아람어 {요나단 탈굼} / 번역: J. W. Etheridge / 중역: 최광민
And the Word of the Lord Himself had made to descend upon the people of Sedom and Amorah showers of favour, that they might work repentance from their wicked works. But when they saw the showers of favour, they said, So, our wicked works are not manifest before Him. He turned (then), and caused to descend upon them bitumen and fire from before the Lord from the heavens.. --- {The Targums of Onkelos and Jonathan Ben Uzziel: On the Pentateuch With The Fragments of the Jerusalem Targum From the Chaldee} J. W. Etheridge, M.A.
세돔과 아모라 사람들이 혹시 자신들의 악행을 회개를 할까 싶어 주님의 멤라 자신이 은총을 내리셨으나, 그들은 그들의 악행을 회개하지 않았다. 그들은 은총이 하늘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서는 자신들의 악행이 주님 앞에 들키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주님의 멤라는 돌이켜 이제 하늘로부터 역청과 불을 주님 앞에 내리셨다 --- 아람어 {예루살렘 탈굼} / 번역: J. W. Etheridge / 중역: 최광민
AD 2세기 초/중반을 살았던 사마리아 출신의 기독교 철학자/교부 유스티노스는 유대인 랍비 트리폰과의 대화를 담은 {트리폰과의 대화}에서 역시 이 논증을 구사하고 있다.
21 ἰδοὺ ἡ πόλις αὕτη ἐγγὺς τοῦ καταφυγεῖν ἐστιν ἐκεῖ μικρά· ἐκεῖ σωθήσομαι, ὡς μικρά ἐστι, καὶ ζήσεται ἡ ψυχή μου. καὶ εἶπεν αὐτῷ· Ἰδοὺ ἐθαύμασά σου τὸ πρόσωπον καὶ ἐπὶ τῷ ῥήματι τούτῳ τοῦ μὴ καταστρέψαι τὴν πόλιν περὶ ἧς ἐλάλησας. σπεῦσον τοῦ σωθῆναι ἐκεῖ· οὐ γὰρ δυνήσομαι ποιῆσαι πρᾶγμα ἕως τοῦ εἰσελθεῖν σε ἐκεῖ. διὰ τοῦτο ἐκάλεσε τὸ ὄνομα τῆς πόλεως Σηγώρ. ὁ ἥλιος ἐξῆλθεν ἐπὶ τὴν γῆν, καὶ Λὼτ εἰσῆλθεν εἰς Σηγώρ. καὶ ὁ κύριος ἔβρεξεν εἰς Σόδομα καὶ Γόμορρα θεῖον καὶ πῦρ παρὰ κυρίου ἐκ τοῦ οὐρανοῦ, καὶ κατέστρεψε τὰς πόλεις ταύτας καὶ πᾶσαν τὴν περίοικον. 22 Καὶ πάλιν παυσάμενος ἐπέφερον· Καὶ νῦν οὐ νενοήκατε, φίλοι, ὅτι ὁ εἷς τῶν τριῶν, ὁ καὶ θεὸς καὶ κύριος τῷ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ὑπηρετῶν, κύριος τῶν δύο ἀγγέλων; προσελθόντων γὰρ αὐτῶν εἰς Σόδομα, αὐτὸς ὑπολειφθεὶς προσωμίλει τῷ Ἀβραὰμ τὰ ἀναγεγραμμένα ὑπὸ Μωυσέως· οὗ καὶ αὐτοῦ ἀπελθόντος μετὰ τὰς ὁμιλίας, ὁ Ἀβραὰμ ὑπέστρεψεν εἰς τὸν τόπον αὐτοῦ. 23 οὗ ἐλθόντος, οὐκέτι δύο ἄγγελοι ὁμιλοῦσι τῷ Λὼτ ἀλλ' αὐτός, ὡς ὁ λόγος δηλοῖ, καὶ κύριός ἐστι, παρὰ κυρίου τοῦ ἐν τῷ οὐρανῷ, τοῦτ' ἔστι τοῦ ποιητοῦ τῶν ὅλων, λαβὼν τὸ ταῦτα ἐπενεγκεῖν Σοδόμοις καὶ Γομόρροις ἅπερ ὁ λόγος καταριθμεῖ, οὕτως εἰπών· Κύριος ἔβρεξεν ἐπὶ Σόδομα καὶ Γόμορρα θεῖον καὶ πῦρ παρὰ κυρίου ἐκ τοῦ οὐρανοῦ.
"...And after another pause I added: "And now have you not perceived, my friends, that one of the three, who is both God and Lord, and ministers to Him who is in the heavens, is Lord of the two angels? For when[the angels] proceeded to Sodom, He remained behind, and communed with Abraham in the words recorded by Moses; and when He departed after the conversation, Abraham went back to his place. And when he came[to Sodom], the two angels no longer conversed with Lot, but Himself, as the Scripture makes evident; and He is the Lord who received commission from the Lord who[remains] in the heavens, i.e.,the Maker of all things, to inflict upon Sodom and Gomorrah the[judgments] which the Scripture describes in these terms:'The Lord rained down upon Sodom and Gomorrah sulphur and fire from the Lord out of heaven..." --- {Dialogue of Justin, Philosopher and Martyr, with Trypho, a Jew}.CHAP. LVI.
.... 잠깐 멈춘 후, 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여러분 (=유대인 트리폰과 배석자들),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그 세 명 가운데 한 명, 즉 신이자 주님이신 분이 하늘에 있는 분의 전권을 대리하는 분이며, 이 두 천사의 주인이 아닙니까? 천사들이 소돔으로 갈때, 이 분은 뒤에 남아 모세가 기록한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이야기를 나눴지요? 그 분이 대화를 마치고 떠날 때 아브라함은 자기 처소로 돌아갔고, 다시 이 분이 소돔에 이르렀을 때, 롯은 두 천사와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고 그 분과 이야기 한 것입니다. 성서가 이 점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하늘에 있는 만물의 창조자 주님 (=야훼)으로부터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할 권한을 받은 분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이렇게 적습니다: [그리스어 번역본에서] "주님 (=야훼)께서, 소돔과 고모라 위로 유황과 불을, 주님 (=야훼)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리셨다.." --- 유스티노스, {트리폰과의 대화}, 56장 / 번역: 최광민
각설하고,
우리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론이 보편교회나 혹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특히 인기를 누린 각종 그노시스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잘 알 수 없다. 일단 필론의 이 개념이 '필론이 처음으로 창안한 것'인지 혹은 그 선례가 있는지에 대해선 정답 없는 논란이 있다는 점, 기독교가 시작된 제 1세대와 공존했다는 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뿌리를 둔 발렌티누스파 등 그노시스 제파가 등장하기 1-1.5세대 전에 바로 그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다는 점만 기억해 두자.
§ 알렉산드리아의 발렌티누스
혹자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가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AD 2-4세기 동안 번성했던 발렌티누스파 그노시스의 교리를 흡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주장이지만, 몇가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발렌티누스파 그노시스를 가장 예리하게 공격했던 인물은 시리아 혹은 소아시아 출신의 리그두눔 주교 이레네우스와 로마 사제 히폴리투스와 북 아프리카 카르타고의 라틴교부 테르툴리아누스였다. 이들이 발렌티누스파 이단에 대해 예리한 반박을 저술로 남긴 시점인 AD 2세기 말-3세기 초는, 발렌티누스파가 시작된 지 1.5-2세대가 흐른 후였다.
우선은 문제의 인물 발렌티누스와 그의 신관에 대해 먼저 정리해 보도록 하자. 그가 창설하고 그의 제자들에 의해 발전된 이 그노시스파는 아주 복잡한 신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 신관은 그들의 우주론이기도 하고, 또한 구원론이기도 하다.
발렌티누스파 그노시스의 창시자인 발렌티누스 개인에 관한 자료는 기독교 교부들의 기록들에서 종합된 것으로, 발렌티누파 측 문건에서 직접 전해지는 것은 없다. 이 문건들에 따르면, 발렌티누스는 이집트 나일 삼각주에 위치한 프레보니스 출생으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철학을 교육받았다.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의 온실과도 같은 곳인지라 다양한 철학적, 종교적 사고가 습합된 지역인 동시에 그곳에 몇 세기 동안 뿌리를 내린 대규모 유대인 공동체를 바탕으로 기독교가 매우 초기에 전파된 곳이기도 했다.
아마도 이 곳에서 발렌티누스는 기독교 뿐 아니라, 이미 AD 2세기 초반부터 중대한 이단으로 대두되던 바실리데스파 그노시스의 가르침과도 조우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AD 2/3세기의 알렉산드리아 교부인 클레멘스에 따르면, 바실리데스의 추종자들은 바실리데스가 사도였던 바울을 따르던 튜다란 인물의 제자였고, 이 튜다가 바울이 내부인들과만 나누었던 비밀스런 교리들을 바실리데스에게 다시 전수한 것으로 주장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자신의 가르침을 펴던 발렌티누스는 히기누스가 로마 주교로 재임하던 시기인 AD 136년 경에 로마로 와서 아니케투스가 차기 주교가 될 때까지 로마에 체류했다. AD 2/3세기의 북 아프리카 카르타고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당시의 발렌티누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혹평한다.
발렌티누스가 로마주교가 되지 못한 이유를 그의 이단설 탓으로 돌리지 않는 것으로 볼 때, 테르툴리아누스는 로마에 체류할 당시의 발렌티누스가 그때까지는 보편교회의 가르침에서 크게 이탈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여기는 듯 하다. 한편, AD 4/5세기의 살라미스 주교 에피파니우스에 따르면, 로마를 터난 발렌티누스가 키프로스에서 배가 난파된 후 정신이 나가 이단이 된 것으로 본다.
발렌티누스의 기본교리는 그의 사후 다양한 그룹의 그노시스로 전이되는데, 범-발렌티누스파 그노시스 주의자 가운데는 바르다이산, 헤라클레온, 프톨레마이오스, 마르코스 등이 있다. 발렌티누스는 AD 160 년 전후에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테르툴리아누스가 AD 150년에 태어나 AD 240년 경에 사망했으므로, 테르툴리아누스는 발렌티누스 계열의 그노시스 교리의 진화과 급속도로 진행된 제 1세대를 경험한 셈이다.
발렌티누스가 가르친 기본교리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워낙 진화속도가 빨랐기 때문이다. 다만 1945년 이집트에서 발굴된 나그함마디 문서군에서 발견된 꼽트어 {진리복음서}는 아마도 이레네우스가 언급한 {진리 복음서} 혹은 테르툴리아누스가 언급한 {발렌티누스 복음서}와 같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문서에 등장하는 성부-성자-성령의 관계는 보편교회의 그것과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발렌티누스파 역시 그들의 교리를 {신약성서}의 구절에서 따왔기 때문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발렌티누스가 개시한 이 계열의 그노시스가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복잡하게 진화되었는지를 비판한다.
여기서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발렌티누스나 발렌티누스파가 과연 '삼위일체'의 개념을 처음으로 발명했으며, 그들의 개념을 (발렌티누스파를 격렬히 비난하던) 보편교회가 슬그머니 흡수해서 적반하장으로 보편교리의 정통교리로 삼았다"고 말하는 주장이 과연 얼마나 타당한 주장인지를 하나씩 자료를 살피면서 풀어보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길고 지리하긴 하지만, 도대체 발렌티누스파의 신관이 무엇이었는지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넘어가야 한다.
§ 발렌티누스 계열 그노시스파의 신관 및 세계관
AD 1세기 말부터 출현하기 시작한 다양한 그룹의 '그노시스파' 혹은 '영지주의자'들은, 일관된 교리체계를 가진 단일그룹이 아니라 서로 비슷한 핵심교리를 공유하지만 세부적으로는 꽤 복잡한 차이를 보이는 꽤 복합적인 그룹들을 부르는 총칭이다.
이들 가운데 역사적으로 가장 성공한 그룹들로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지중해 권, 특히 서방권에서 큰 영향을 가졌던 발렌티누스파 (및 거기서 파생된 그룹들)와 바실리데스파, 그리고 페르시아권을 진원지로 하여 로마 제국 전역과 심지어 중국에까지 포교된 마니교를 들 수 있다. AD 2-3세기에는 발렌티누스파가, AD 3세기 후로는 마니교가 정통파 교회 (혹은 보편교회)에 가장 위협적이었다.
여기서는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해 자주 등장하게 되는 발렌티누스파 그노시스 계열에 대해서만 촛점을 맞춰본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AD 2세기 초/중반 한때는 로마 주교 후보로 나서기도 했던 (아마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발렌티누스는 로마 주교의 꿈이 실현되지 못하자 동방으로 이주 특별히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현학적인 그의 독특한 교리를 발전시킨다. AD 2세기 중/후반의 발렌티누스파의 영향력은 정통파 교회에 특히 위협적이어서, 당시 갈리아 리그두눔의 주교 이레네우스와 로마 사제 히폴리투스가 이단을 반박하는 일련의 논증을 작성할 때 특별히 발렌티누스파를 염두에 두었다.
이들 그노시스파 이단들이 보편교회에 위험했던 이유는 이들이 스스로를 "기독교도"라고 주장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철학적으나 영적으로 수준높은 "진짜" 기독교도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즉, 교부들의 표현대로라면 이들이 교회 안에 '기생'하면서 현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내부적 균열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당대의 현학적인 기독교도 식자들이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직설적인 교리를 가진 보편교회보다는 다양한 그노시스파의 '복잡하고 현란한' 교리들에 귀가 솔깃했던 것은 아마 당연했을 것이다.
그들이 주장의 근거를 {신약성서}에서 따왔기 때문에 얼핏 보기엔 마치 "교회의 표준언어"를 구사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표면적인 유사점일 뿐 사실은 동일한 {신약성서} 속 진술들에 바탕하긴 하였지만 전혀 다른 신학적 주장을 펼친 것이다.
그래서 이레네우스는 그노시스파 이단들에 대해 이렇게 일갈한다.
게다가 이들 그노시스들은 학파에 따라 서로 비슷하면서도 종종 매우 다른 복잡한 이론들을 경쟁적으로 고안해 냈기 때문에, 보편교회는 이들의 주장을 하나씩 반박하기 위해 백과사전식 저술을 만들어내야 할 정도였다.
리그두눔 주교 이레네우스의 진술이다.
발렌티누스파를 비롯한 다양한 그노시스 계열의 이단은 '신론'과 '구원론'에 있어 기존의 보편교회의 교리와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그들의 '신론'과 '구원론'은 일종의 '우주론'과 '존재론'과 합친 것으로, 현대인의 눈에는 일종의 장엄한 '스페이스 판타지'처럼 보인다.
그럼 우선 발렌티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믿던 바를 정리해 보자. 이 글에서 참고할 자료는 리그두눔 주교 이레네우스의 {이단 반박}, 로마의 히폴리투스의 {이단 반박}, 카르타고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의 {이단 반박}, 살라미스 주교 에피파니우스의 {파나리온} 등이며, 발렌티누스파 측 자료로는 나그 함마디에서 출토된 (종종 발렌티누스 본인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진리 복음서}, {발렌티누스파 해설, Valentinian Exposition}이다.
사실 발렌티누스파의 신관은 기독교의 성부-성자-성령의 공식보다 수십~백배는 복잡하다.
# 신: 단일체 (= 모나드)
이레네우스의 {이단 반박 1:2:5}에 따르자면, 발렌티누스파가 묘사하는 성부는 불가해하고 불가지한 존재로서 인간이 그 존재를 묘사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는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자이자, 모든 존재들의 궁극적 기원이다.
발렌티누스의 저작으로 종종 여겨지는 {진리 복음서} 18:34 (및 {발렌티누스파 해설} 22:27-28, 이레네우스의 {이단반박} 2:2:2 에 따르자면, 신은 이 세상을 포함하는 모든 만물을 그 안에 품은 존재이다.
이 개념은 신이 만물을 포함하고 또 초월한다는 스피노자적 범신론과 다소 유사한데, 따라서 발렌티누스의 세계관에서 하위존재들의 출현은 바로 이 신의 연속적인 자기-전개 (unfolding)에 해당한다. 즉, 신 자신의 일자성을 유지하면서 일련의 다중적인 전개과정을 통해 하위존재들을 발출시키게 된다.
그래서 발렌티누스파의 신관은 사실상 '존재론'이며 또한 '우주론'이다.
# 신: 2-에온체 (=디아드)
발렌티누스파는 동/서의 큰 분파 뿐 아니라 각 분파의 내부적으로도 다양한 분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 혹은 신적 존재들 (=에온) 남성성과 여성성이 있는 남-여 쌍으로 구성된 양성적 존재로 표상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치했다. 이를 "남-여 에온쌍" (복수 συζυγίαι, 단수 σύζυγοι)으로 불러보자.
말할 것도 없이 신을 '남성'적으로 묘사한 전통적인 유대교나 기독교의 인식에 배치되는 것이다. 물론 신의 '영'을 뜻하는 '루아흐'가 히브리어에서는 '문법적 여성'이긴 하지만, 이를 '물리적 여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언어와 문화적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결과이다. 사실 발렌티누스파 조차, 성령/보혜사에 해당하는 '파라클레토스'는 남성으로 설정했다.
이 '남-여 에온쌍' 개념은 (1) 만물의 창조자가 각 존재들에게 (2) 형상과 (3) 질료를 공급한다는 플라톤적 사고와 관련된 것이다. 고대세계의 일반적 관념에서 '능동적 생산력'은 '남성'이 아닌 '여성'이기에 우주에 '질료'를 공급하는 (= 즉, 생산) 주체 역시 신의 여성적 측면이 된다. 하지만 '그노시스'와 '페미니즘'을 혼합하길 종종 즐기는 '현대 그노시스주의자'들의 주장과 무색하게도, (흔한 속설들의 시도에서 처럼) 이 '에온쌍'의 개념으로부터 현대적 의미의 '남녀평등'을 유도하려는 시도는 꽤 난감한 것이다.
단일체 모나드인 근원적 신은 여전히 모나드로서 단일체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여성 속성의 에온쌍으로 존재하는 2-에온체, 즉 '디아드'이기도 하다. 남성적 측면은 '뷔토스 (=심오)' 혹은 '불가해', '첫 아버지'라 불리며 우주에 '형상'을 제공한다. '뷔토스란'란 그 깊이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불가해함을 뜻하는 것이다. '질료'를 공급하는 여성적 측면인 '시게'에 비해 '형상'을 공급하는 이 남성적 측면은 기본적으로 수동적이고 정적이다. 신의 여성적 측면인 '시게=엔노이아'에 의해서만 이 남성적 측면이 비로소 '형상'을 내어놓기 때문이다 (에피파니우스, {파나리온} 5:3 참고). 궁극의 신의 여성적 측면을 그노시스파들은 '시게 (=고요)', 혹은 '엔노이아 (=사유)'라 불렀다. '시게'란 이 신의 궁극적이고 원초적 상태에 해당하며 (발렌티누스파 해설 Exposition 22:24), 신의 자기-인식 상태를 뜻한다. 신의 여성적 측면이자 '에온'인 이 '시게'는 자신보다 하위 존재들, 즉 하위 에온들을 연속해서 만들어 내는 능동적 창조력이다.
그런데 히폴리투스의 {이단 반박} 30:8에 언급된 저자 미상의 발렌티누스파 저작과 역시 저자 미상의 발렌티누스파 저작인 {Tripartite Tractate 삼분론}에서는 성부의 단일성이 강조된다. 그럼 어떻게 남-여 에온쌍으로 존재하는 신의 단일성이 보존되는 것일까? 이 저작들에 따르면 '남-여 에온쌍'이란 신의 두 측면은 사실은 정말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두 측면은 한 신격 안에서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마치 동전의 양 면 혹은 물과 습기와의 관계와 유사하다. 그래서 이 남-여 에온쌍은 둘로 나뉠 수 없으며, 그러기에 신을 인식함에 있어 양자를 모두 고려하지 않으면 신 자체도 혹은 에온쌍 가운데 어느 한쪽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발렌티누스파의 이해였다. 즉, 하나이면서 둘인 것이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던 태초에 블변/부동의 단일한 모나드로서 시게-엔노이아 에온쌍으로 존재하던 성부 만이 세계에 홀로 존재했다 (히폴리투스, {이단반박} 29:5, 이레네우스 {이단반박} 1:1:1) 그래서 장차 존재하게 될 전 우주는 성부 안에 내재된 미전개/미분화된 '잠재성'으로만 존재했다. (에피파니우스, {파나리온} 5:3 , {발렌티누스파 해설} 22:27-28, {삼분론} 60:1-34).
이 잠재성이 구현되는 창조의 전 과정은 성부의 자기-제한이 필수적으로 포함된 개념이 된다. 즉, 계속적인 하위존재 (에온)의 발출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이 하위 에온쌍들은 계속해서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는데, 이때 신은 존재로 충만한 '충만계' (=플레로마)와 저급한 "결핍계 (=케노마)" 사이의 경계를 설정하게 된다 (이레네우스 {이단반박} 1:2:1, 발렌티누스파 해설 27:36-37)
이 경계는 종국적으로는 신 (및 에온들)과 저급한 만물 사이에 분명한 경계 (이레네우스 1:2:2)가 되는데, 발렌티누스파는 이 경계를 나누고 유지하는 에온을 '호로스 (=경계설정자)' 혹은 '스타우로스 (십자가)'라고 불렀다. 흥미롭게도 이 호로스/스타우로스란 에온은 다른 에온들과는 달리 남-여 에온쌍이 아니라 단독으로 존재한다. 호로스 혹은 스타우로스가 설정하고 지탱하는 이 경계에는 두가지 기능이 있는데, 그 하나는 충만계와 결핍계를 나누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동시에 이 둘을 지탱하는 것이다 (이레네우스 1:2:1). 혹자는 이 '호로스'가 이집트 신 '호루스'에서 가져온 것이란 근거 약한 주장을 펼치는데, 사실 그노시스 교리와 이집트의 오리시스-이시스-호루스 종교 간에는 (특별히 호루스의 지위와 역할) 별로 유사한 점이 발견되지 않는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충만계의 이 에온들은 이 경계를 넘어 존재할 수 없다.
# 제 1차 발출: 테트라드 (=4-에온체)
일련의 에온 발출을 통한 일련의 자기전개와 경계설정을 통해,성부는 불가지적인 자신을 가지적인 세상에 현현시킬 수 있게 되는데, 이때 신은 신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자신의 사유를 통해 지식의 영을 발출시키며 이것이 바로 '성자'가 된다.
이 '성자'는 뷔토스-시게 에온쌍으로 존재하는 성부처럼 양성적인 '누스-알레테이아 에온쌍'으로 존재한다 성자의 남성적 에온인 '누스 (=정신)'는 종종 '독생자', '만물의 아버지'로 표현되며, 그의 여성적 측면은 '알레테이아 (=진리)', '만물의 어머니'로 불려진다. 발렌티누스파는 성자의 이 두 측면을, '진리가 참으로 각성된 정신을 통해 이해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 성자는 그 하위에 존재할 모든 만물의 기원이 되는데, 성부의 남-여 두 에온과 성자의 남-여 두 에온을 합쳐 총 네 에온 (테트라드)인 '뷔토스/심오', '시게/고요', '누스/정신', '알레테이아/진리' 가 만물의 기원이 된다.
불가해한 성부와 달리, 성부로부터 발출된 성부의 이미지인 성자 (누스-알레테이아 에온쌍)는 인식가능한 존재이다 (이레네우스 1:12:1, 삼분론 66:13-15). 그러기에 인간이 지고의 성부를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성자를 통해서이다.
또한 발렌티누스파가 보기에, 이 세상에서 수난받은 것으로 인지된 그 '성자'는 바로 성부의 '누스/정신', 정확히 말하면 이 '성자'의 남성적 측면인 '누스/정신'이다.
# 제 2차 발출: 오그도아드 (=8-에온체)
이제 발렌티누스가 설명하는 본격적 우주창조가 시작된다.
성부와 성자를 구성하는 남-여의 네 원초적 에온은 두 쌍의 남-여 에온쌍을 발출하는데, 이때 새로 발출된 첫 쌍의 남-여 에온쌍은 로고스/말씀 (남성)과 조에/생명 (여성)이다. 이 둘은 성부를 구성하는 '뷔토스/심오' (남성)과 '시게/고요' (여성)으로부터 왔다 (발렌티누스파 해설 29:25-37). 두번째 남-여 에온쌍은 안드로포스/인간 (남성)과 에클레시아/교회 (여성)이다. 이들은 성자를 구성하는 에온쌍인 '누스/정신'과 '진리/알레테이아'에서 온 에온들로, "교회와 연합된 인간의 상태"를 뜻한다. (발렌티누스파 해설 29:25-37) 이렇게 이제 총 8 에온이 존재하게 된다.
발렌티누스파에서 분파된 프톨레마이오스와 테오도토스는 성자를 구성했거나 성자에게서 직접 유래한 '누스/정신', '알레테이아/진리', '안드로포스/인간', '에클레시아/교회'란 네 측면/에온은 바로 성자의 특성을 표현한 것이며, 따라서 이것이야 말로 {요한복음서} 서문을 설명한다고 풀이한다. 즉, 요한은 그 {복음서}에서 "태초에 로고스/말씀가 계셨다"라고 진술하는데, 발렌티누스파들은 요한이 '로고스'를 말할때 그 '로고스'란 바로 '누스'와 '진리'를 말한 것이며, 또 요한이 1"4절에서 로고스/말씀이 조에/생명이 되다"는 말을 "로고스-생명'의 에온쌍을 말한 것이라고 한다. 또 요한이 '생명은 사람들게게 비춘 빛이었다"는 구절로부터 "안드로포스/인간-에클레시아/교회' 에온쌍을 말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레네우스 1:8:5)
이렇게 성부와 성자를 구성하는 원초적인 4-에온과 이로부터 파생된 4-에온은 기초적인 '8-에온체'을 구성한다. 이 8-에온체야 말로 만물의 근원이자 원천이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이레네우스 1:1:1).
이것이 8-에온체 '오그도아드'이다.
# 데카드 발출 / 18-에온체
이어서 이 8-에온체, 즉 오그도아드로부터 보다 낮은 에온들이 발출되는데, 10-에온 (=데카드)은 '로고스/말씀'과 '조에/생명'으로부터 (에피파니우스 5:9, 히폴리투스 30:1, 발렌티누스파 해설 30:16-19)), 12-에온 (=도데카드) 은 '안드로포스/인간'과 '에클레시아/교회'로부터 발출된다. 이것들은 '성자' 안에 있던 특성들이 발현된 것이다.
10-에온 역시 5종의 남-녀 에온쌍으로 구성되며, 이 에온들은 윤리적 삶을 지탱하는 우주적 원리를 상징한다. 남성 에온은 안정성을, 여성 에온은 능동적/성적 능력을 암시한다. 그들은 이 두 원리가 결합해 이상적인 존재를 구성한다고 보았다.
이 5종의 남-여 에온쌍은,
이다. 이것이 데카드다.
# 도데카드 발출 / 30-에온체
한편, '인간'과 '교회'에서 유래하는 6-에온쌍은 '정신'과 '진리'를 기린다. (히폴리투스 30:1). (발렌티누스파) 그노시스가 지향하는 완전한 인간형을 상징하다.
이 6종의 남-여 에온쌍은
이다. 이것이 도데카드다.
그래서 이 에온들은 8-, 10-, 12- 씩 나뉘어지는 세 그룹을 이룬다. 이렇게 총 30-에온은 성자의 다양한 본성이 발현되어 펼쳐진 것으로, 이를 마치 씨앗에서 나무가 자라나오는 것으로 풀이했다. (히폴리투스 8:2-5, 이레네우스 2:17:6, 삼분론 60:31-32). 또는 태양에서 빛살이 쏟아져 내리는 것과도 같다고 보았다. (이레네우스 2:13:5, 2:17:7).
이 30-에온의 영적 세계가 발렌티누스파가 본 이상적 세계이다. 8은 완전한 이상이며, 10은 안정과 단일성을 뜻한다. 12는 교회와의 연합을 통해 완성되는 가치와 덕을 상징한다. 30 에온 가운데 성자로부터 직/간접 발출되는 26 에온은 성자의 특성을 상징한다.
# 플레로마 πλήρωμα (=충만계)
발렌티누스파는 (영적) 우주를 플레로마/충만의 한 가운데 신이 위치한 일련의 동심원적 구조체로 보았고, 성자가 성부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에온들도 성자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비록 에온들은 다수이지만 신은 여전히 하나"란 결론을 유도할 수 있었다.
이레네우스에 따르면,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즉, 모든 에온은 단수의 신 안에 유지되지만, 밖으로 드러날 때는 복수가 된다.
마르쿠스의 {이단반박 Ainst Heresies} 1:14:1에 따르면, 더 나아가 30-에온들 각각이 또 다른 에온들을 품고 있으며 또 이 에온들이 더 하위의 에온들을 품기에 무한 수의 에온이 존재한다고 해설되기도 한다.
# 우주적 비극의 시작
발렌티누스의 신관과 우주관에서 볼때, 오직 성부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갖는 것은 성자 뿐이다. 발렌티누스파는 이 개념을 {복음서}에서 가져왔다. 성자를 제외한 다른 하위 에온들에게 있어, 성부는 불가해하고 불가지하다. (이레네우스 1:2:1, 1:14:1, {발렌티누스파 해설} 24:25-39, {진리 복음서} 22:27-29)
이 '성자'는 정통파 보편교회가 가르친 성자=로고스=예수와 꽤 다른 존재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뷔토스-시게 에온쌍으로 존재하는 성부/프로파토르처럼 성자도 양성적인 '누스-알레테이아 에온쌍'으로 존재한다 성자의 남성적 에온인 '누스 (=정신)'는 종종 '모노게네스/독생자', '만물의 아버지'로 표현되며, 그의 여성적 측면은 '알레테이아 (=진리)', '만물의 어머니'로 불려진다. 발렌티누스파는 성자의 이 두 측면을, '진리가 참으로 각성된 정신을 통해 이해되는 것'으로 해석했다. 성부의 남-여 두 에온과 성자의 남-여 두 에온을 합쳐 총 네 에온 (테트라드)인 '뷔토스/심오', '시게/고요', '누스/정신', '알레테이아/진리' 가 만물의, 정확히는 모든 하위 에온들의 기원이 된다.
다시 4-에온체인 테트라드 바깥의 하위 에온들로 돌아가 본다면, 이 에온들은 그저 성자의 사유를 통해서만 신에 대해 알 수 있을 뿐이다. 에온은 그래서 자신들이 유래한 최상위 존재 (근원적 신)에 대해 알고 싶은 열망을 가지게 되는데, 발렌티누스파의 {진리 복음서}는 성부를 알고자 하는 에온들의 이런 추구는 필연적으로 재난을 불러왔다고 한다. "진리"의 대체물은 영적우주에 상반되는 "물질"적 우주다. 그리고 인간은 오류에 빠진 에온들이 자리잡게된 형상들이며, 혹은 에온은 인간의 무지와 미망에 대한 메타포라고도 볼 수 있겠다.
에온들의 공포는 소피아의 타락으로 구체적인 실행에 옮겨진다.
# 소피아 (지혜)의 타락
발렌티누스파의 소피아 신화는 오류에 대한 메타포이다.
이 신화에 따르면, 절망적으로 성부를 알고자 했으나 도저히 이 꿈을 성취할 수 없던 12 에온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발출된 지혜/소피아는, 스스로 자신과 다른 에온들의 기원을 알고자 하는 구도에 나선다. 그런데 소피아는 성자를 사유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즉 존재의 충만 가운데서가 아니라 자신의 길을 찾는다.
이 결과 플레로마를 벗어난 소피아는 자신의 에온-짝인 텔레토스와의 결합을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낳으려가가 '무형'의 질료를 유산하게 된다. 분리되어 오류의 상태로 빠져 고통당하게 된다. (이레네우스 1:2:2-3, {삼분론} 75:17-77:37). 발렌티누스는 이것은 마치 하와가 아담에게서 분리되어 나온 것과 같다고 보았다.
성부처럼 (창조자가) 되고자 했던' 소피아의 이런 모방은 결국 실패하며 그녀의 피조물은 유산되는데 (히폴리투스 30:6), 그 결과 소피아는 무지 가운데 절망에 빠진다. (이레네우스 1:2:1).
절망 가운데 소피아는 참회하고 도움을 구한다. 이때 '호로스' (경계를 나누는 자) 혹은 '스타우로스 (십자가)'라 불리는 에온이 등장한다 (이레네우스 1:2:3, 히폴리투스 31:2, {발렌티누스파 해설} 34:25-31) 이 호로스의 역할은 플로레마/충만계와 타락한 에온 사이를 나누는 것이다. 소피아는 '상위 소피아'와 유산된 딸린 '하위 소피아' 혹은 '소피아 아카모트;로 분리되고, 유산된 딸인 '하위 소피아'인 '소피아 아카모트'는 충만으로부터 분리되어 물질계로 떨어진다. 둘로 분리된 소피아들 가운데 '상위 소피아'는 이후 다시 회복되어 그 남성짝에게 돌아가 성부는 도저히 불가해하다는 진리를 깨닫는다. (이레네우스 1:2:4, cf.. 히폴리투스 31:5)
그럼 '하위 소피아'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이 '낙태된 사유'는 물질 세계에 같혀 고통 당한다. 이 하위세계는 존재의 충만 (플레로마)가 결핍된 물질계이다. 존재의 충만은 성자에 의해 발출되었고, 또 성자 안에 내재한다. 충만이 결핍된 세계는 참 지식 (그노시스)가 없다. 이 결핍은 그래서 '무지'다. 이 무지는 참 지식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발렌티누스파에 따르면 타락한 소피아 혹은 '하위 소피아'는 히브리어로 '아카모트'라고 불리거나, 혹은 '루아흐 / 성령'이라 불릴 때도 있는데, 이 존재가 {요한 계시록}에 등장하는 '새 예루살렘'이고, {복음서}에 등장하는 길 잃은 양이란 것이다. 하위계에 갇혀 자신의 참 기원을 모르는 존재, 이 추락한 소피아 아카모트는 그래서 개개 인간의 원형이 된다.
이 소피아는 그리스도에 대해 모른 채 계속해서 신을 이해하고자 무익한 노력을 한다. 그러나 앞에서 에온들에 의해 설정된 두번째 경계로 인해 충만/플레로마로 들어갈 수가 없다. 무지의 결과, 이 소피아는 고통과 공포와 혼란 가운데 고통 당하게 되는데, 이 세계는 그녀에게 환상으로 보이고 그녀는 이 환각과 실재를 구별할 수 없다. 이런 혼란스런 인식은 바로 신을 모르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같은 것이다. ({진리 복음서} 29:1-7, 이레네우스 2:14:3)
§ 케노마 κένωμα (공허) 혹은 휘스테레마 ὑστέρημα (결핍)
소피아가 회심하는 순간까지의 우주의 상태는 다음과 같다.
충만계인 플레로마는 상위 소피아의 회복에 아울러 호로스/스타우로스가 30 에온과 그 밖의 모든 것을 경계지음으로써 완전히 분리된다.
'상위 소피아'는 회복되었지만 '하위 소피아'인 소피아 아카모트는 플레로마에서 분리되어 무지와 고통을 상징하는 물질계에 갇힌다. 소피아 아카모트 물질계의 조성자인 데미우르고스의 어머니이자 물질계의 창조력이 된다. 아울로 그노시스의 철학을 따르는 추종자들은 소피아 아카모트의 영적 씨앗을 받은 자녀들로 상정된다.
그래서 플레로마 밖의 현상계는 충만이 결핍된 결핍계인 케노마 (공허계)로, 이 안에 우리가 인식하는 물질적 세계인 코스모스/우주가 존재한다. 한편 로마의 히폴리투스의 {이단반박} 6권 31장에서는 플레로마의 상대개념을 휘스테레마 (결핍계)로 진술한다.이 용례는 에피파니우스의 {파나리온} 31.4에도 등장하는데, 이 경우엔 휘스테레마가 데미우르고스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충만계/플레로마를 구성하는 30-에온처럼, 케노마/휘스테레마 안에도 그에 대응하는 존재들이 있다. 즉, 케노마의 조물주인 데미우르고스를 비롯하여 케노마 안에도 역시 오그도아드 (8-에온), 데카드 (10에온), 도데카드 (12에온)이 있다. 플로로마에 속한 상위-소피아와 마찬가지로 케노마로 쫓겨난 하위-소피아 (=아카모트)가 있다. 충만계에 다른 에온들을 무지와 미망에서 구원한 성자가 있다면, 케노마에는 영지/그노시스를 깨달은 인류를 구원할 그리스도가 있다. 플레로마에 안드로포스 (=인간)과 에클레시아 (=교회)라고 명명된 에온이 있다면, 케노마에는 그에 상응하는 실제 인간들과 교회가 존재한다. 그러니가 케노마-휘스테레마, 즉 물질계는 30 에온들이 구성하는 충만계/영계의 그림자 같다는 것이 발렌티누스파의 주장이었다.
충만계의 구성에 상응하는 결핍계/물질계의 요소들에 대한 발렌티누스파의 설명을 옮기고 있는 이레네우스의 글을 읽어보자.
마지막은 구원론과 교회론이다. 발렌티누스파가 말하는 '구원'은 보편교회가 가르쳐 온 '구원'과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 그리스도와 회복
앞서 벌어졌던 재난의 재발방지를 위해, 충만계의 성자는 다른 남-여 에온쌍으로 현현하는데, 그것이 그리스도 (남성)-성령 (여성)이다. (이레네우스 1:2:5, 히폴리투스 31:3). 이 에온쌍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지상교회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상징한다.
그리스도로서의 성자는 다시 한번 성부는 불가지하고 불가해 함을 다른 에온들에게 밝히고, 진리는 오직 자신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레네우스 1:2:5) 성부는 자신의 가슴 - 즉 성령을 드러내고, 자신 안에 감춰진 성자를 드러내 보인다. 성부의 이 자비를 통해 에온들은 그를 비로소 알고 성부를 무모하게 찾는 수고를 멈추게 되며, 성부 안에서 안식한다. 이것이야 말로 안식임을 알게되기 때문이다. (이레네우스 1:2:5-6 cf. {진리 복음서} 24:9-20)
발렌티누스파는 바로 이 과정이 신앙과 세례의 진정한 의미라고 가르쳤다 ({삼분론} 126:27-129:34). 그리하여 충만계의 모든 에온이 성자 안에서 하나가 되는데, 그러기에 성자는 이들 에온들의 '구원자'이다. 이 '구원자'야 말로 모든 에온들이 한 목소리로 부르게 될 이름인 것이다. 오묘하게도 에온들의 각 "그리스어" 이름에서 글자를 떼내어 합성하면 '구원자'란 그리스어 단어를 만들 수 있다!!! (cf. {진리 복음서} 38:6-41:3).
발렌티누스의 세계관에서 모든 에온은 이성의 짝이 있기에, 이 남성 '구원자'는 이 물질세계로 떨어진 '하위 지혜/소피아'의 남성 파트너이자 신랑이 된다. (cf. 이레네우스 1:2:6, 히폴리투스 32:1-2, 삼분론 85:15-90:3)
소피아의 간구에 반응해, 충만계의 '구원자'는 자신을 비워 충만계 바깥으로 나와 천사들과 함께 결핍계로 온다. (이레네우스 1:4:5). 여기서 그는 짝이 없이 물질계에 유폐된 소피아 아카모트와 결함해 또 다른 한 쌍의 남-여 에온쌍이 된다. 그리고 마침내 이 소피아 아카모트는 자신에게 생명을 준 존재를 묵상함으로써 미망과 무지에서 벗어나 심경의 변화를 겪게 되는데, 이때 비로소 무거운 마음이 풀리고 웃게 되며 (이레네우스 1:4:2), 다른 에온들과 함께 이 상태를 해결할 도움을 구하게 된다 (이레네우스 1:4:5, 히폴리투스 32:3).
구원자와 그의 천사들을 보며 소피아는 기뻐하면서 영적 씨앗을 그노시스 추종자들의 안에 흩뿌리는데, 이것이 모든 영지주의 기독교도들 안에 있는 영적 요소들이다. 이 씨앗은 그래서 '교회'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교회'는 충만계의 그 '교회 / 에클레시아'의 모형이다.
물질계는 영적씨앗들이 성장하고 단련받기 위해 필요했는데, 소피아 스스로 이 세계를 직접 만들 수는 없었기 때문에, 소피아는 자신이 낳은 데미우르고스를 통해 물질계를 만들게 했다. 비록 데미우르고스가 소피아 아카모트와 물질계 간에서 태어난 존재이지만, 오직 소피아 아카모트만 30-에온으로 구성된 플레로마에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데미우르고스는 물질로 된 이 세상을 창조할 때 플레로마를 직접 참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데미우르고스를 비밀리에 배후조종하여 그 대신 혼돈으로부터 플레로마를 모방한 세상을 만들게 했고, 결과적으로는 비록 결함을 있으나 거의 완벽한 세상을 창조를 돕는다.
이렇게 데미우르고스를 통해서 소피아는 구약성서 {창세기}의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 그래서 물질계를 창조한 이 데미우르고스는 구약성서 {창세기}의 창조주인 유대인의 '야훼'이다. 즉, 거의 모든 그노시스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유대교의 야훼는 그저 물질계의 창조자일 뿐 아니라, 자신의 근본조차도 모르는 존재가 된다. 데미우르고스는 자신의 어머니가 누군지 몰랐기 때문에, 자신이 유일한 지고의 창조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발렌티누스파가 보기에 데미우르고스/야훼는 결국은 소피아 아카모트의 조수였을 뿐이다. 소피아 아카모트와 물질이 결합해 탄생한 데미우르고스는 7 천사와 천계를 만들고 그 위에서 군림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칠층천'이라고도 불린다. 데미우르고스의 7천사들은 창조의 7일을 암시한다. 하지만 데미우르고스는 자신 위에 소피아와 구원자가 거주하는 제 8층천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 이 8층천은 충만계의 8 에온을 암시한다. (이레네우스1:5:2).
소피아의 배후조종 하에 데미우르고스가 인간을 만들때, 그는 원형적 인간의 이미지를 통해 물질계의 인간을 만들었기에 인간들은 물질적 신체 안에 영적 씨앗을 품고 있다. 이 영적 씨앗을 통해 각자는 구원자 그리스도를 묵상함으로써 영지/그노시스에 이를 수 있고, 차츰 무지를 극복하고 신에 가까이 도달할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의 영은 혼을 깨워 소피아와 함께 충만계에 다시 들어간다. 그래서 소피아는 '하늘에서 내려온 새 예루살렘'이라 불린다. 마친가지로 영들은 천사들과 합체하게 된다. 이때 성부를 보게 되고, 지적인 에온이 되어 영원한 결혼에 들어선다. 이 완전한 충만은 '신랑/신부의 신방'으로 묘사된다 (이레네우스 1:7:1).
이것이 발렌티누스파가 말하는 종말이다. 이제 물질계에 감춰졌던 불이 타올라 모든 물질계를 동시에 불태워 아무것도 남기지 않게 된다. 이로써 물질계는 사라지고, 결핍은 해소도며, 존재의 회복은 완료된다 (이레네우스 1:7:1). .
발렌티누스파의 이 신화는 개인의 영적발전에 대한 알레고리 (풍유)인데, 이들이 이것을 다만 알레고리로서 받아들였는지, 혹은 실제적인 우주론으로 받아들였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고대인의 관념 상, 아마도 둘 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발렌티누스의 '삼위일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발렌티누스는 '삼위일체'론의 선구자일까? 그의 이단설을 보편교회가 흡수하여 후대의 '삼위일체 교리'로 발전시킨 것인가?
우선, (아리우스파 논쟁의 촉발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파문)사제 아리우스와 (동일본질파이나 후에 사벨리우스주의자로 간주되어 탄핵된) 안키라 주교 마르켈루스의 저작에 등장하는 발렌티누스(파)의 견해를 옮겨보자. '
우시아', '휘포스타시스', '프로소폰 (=페르소나)'에 대한 합의된 정의와 뉘앙스가 아직 분명하지 않은 때이기 때문에, 그냥 그리스어 원어 그대로 옮긴다.
#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의 진술
니케아 회의 벌어지기 몇 해 전, 자신의 상관이었던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드로에게 자신의 신관을 피력하는 이 편지에서 아리우스는 성부-성자-성령의 관계에 관한 한 자신이 이단으로 보고 있는 몇몇 이단자들 - 발렌티누스, 마니, 사벨리누스, 히에라카스 - 과 그들의 주장을 거론한다. 이 견해들은 당시까지의 보편교회에서 이미 이단으로 정죄된 것들이다.
현대 영어로 정확한 번역어가 없는 용어는 그리스어 원문의 용어와 함께 병기하겠다.
발렌티누스의 주장에 관련된 아리우스의 주장은 아래와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아리우스의 원조 주장은 아주 분명하다. 한번 정리해 보자.
즉, 아리우스의 주장은 '성부와 성자는 본질상 완전히 다르다'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성부와 성자 간에 본질이 같거나 유사하다고 보는 입장들은 틀렸다고 본 것이다. 아리우스의 용례에서 "세 휘포스타시스"는 여기서 (1) "본질이 서로 다르고" (2) 따라서 "개별적으로도 완전히 분리되는 세 존재"를 말한다. " 발렌티누스의 경우라면 이것은 (1) 본질은 같으나 (2) 성부로부터 실체적으로 완전히 분리된 에온들을 말한다. 니코메디아 주교 유세비우스가 좌장이었던 준-아리우스파의 휘포스타시스는 '본질은 '유사'하고, 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셋'을 뜻한다. 동일보질파의 보편교회의 휘포스타시스는 '본질이 같고, 각각 개별적이긴 하지만 또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는 셋' 을 말한다.
그럼 여기서 아리우스가 발렌티누스의 주장을 구성하는 핵심용어로 지목한 '발출", 즉 '프로볼레 προβολή'가 정확히 어떤 뜻인지 확인해 보고나서, 보편교회가 설명한 '프로볼레'와는 또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 보겠다.
# 발출 ἐκπόρευσις? προβολή?
기독교의 성부-성자-성령 개념이 발렌티누스 혹은 발렌티누스파 그노시스에서 왔다고 말하긴 섵부른 결론이다. 그 이유는 사실 발렌티누스(파) 조차 저 개념을 {신약성서}, 특별히 {요한 복음서} 및 바울의 서신들에서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단'이라고 해서 정통파의 입장과 모든 면이 달라야 할 필요는 없다는 점을 기억하자.
가령, 성자와 성령이 "성부로부터 온다"는 표현은 이미 {요한 복음서}에 진술되어 있다.
우선, 성부로부터 성자가 옴 (~발출 ἐξέρχομαι 엑세르코마이)에 대한 예수 본인의 말을 인용한다
다음은 제자들을 떠나 성부에게로 간 후, 성부로부터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말하는 예수 본인의 말을 인용해 보자.
후대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성자는 낳아지고', '성령은 발출된다'는 표현으로 이를 설명했다.
그럼 여기서 다시 아리우스의 주장으로 돌아가 보자.
'성부로부터 성자가 옴'의 개념을 설명하는 발렌티누스의 용어는이와 조금 다른 형태인 '발출 προβολή 프로볼레' 이다. 발렌티누스의 존재유출/발출론은 {요한 복음서}에 사용되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흥미로운 일인데, 발렌티누스파는 {요한 복음서}에서 에온에 관한 많은 모티프를 빌려왔기 때문이다. 발렌티누스가 '프로볼레'를 선택하여 자신의 존재유출론을 설명한 이유는 분명치 않다.
그노시스파가 아닌 정통파에 속한 기독교 교부 중에 이 용어를 성부-성자-성령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교부는 북 아프리카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였다. 그는 양태론자 프락세아스의 가르침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경세적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이 단어를 명시적으로 '도입'했는데, 이때 이 단어가 발렌티누스파에 의해서 이미 사용되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성부-성자-성령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굳이 이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이 용어가 성부로부터 성자가, 혹은 성령이 발출되는 과정을 설명하기에 그 뉘앙스가 적절한 용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발렌티누스파와 자신이 (즉, 당시의 보편교회가) 이 단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도 명시한다. 참고로, {프락세아스 반박}을 쓰던 시절의 테르툴리아누스는 그의 활동 중기까지 사제로 활동했던 보편교회를 떠나 이단으로 정죄된 금욕적 은사주의 분파인 몬타누스파로 옮겨 갔거나, 혹은 최소한 보편교회와의 관계를 유지한 상태에서 몬타누스파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글 속에서 테르툴리아누스가 몬타누스파 만을 보편교회로 주장하는 흔적은 전혀 없기 때문에, 여전히 그의 설명이 보편교회의 테두리 안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라틴교부 히에로니무스는 AD 392년 경 베들레헴에서 쓴 {De Viris Illustribus} 제 53장에서 그는 테르툴리아누스가 보편교회를 비판하면서 쓴 7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대부분은 금욕적 생활에 대한 내용이다.
각설하고, 'προβολή 프로볼레'란 용어의 사용이 보편교회에서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보는 테르툴리아누스의 설명을 직접 읽어보도록 하자. 라틴어와 그 영어번역을 소개한 후 한국어로 번역하겠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왜 발렌티누스의 존재발출론이 보편교회의 교리, 즉 성자의 나옴과 성령의 발출이라는 교리와 충돌한다고 본 것일까? 그의 견해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즉, 발렌티누스파의 이 '성자'는 정통파 보편교회가 가르친 성자=로고스=예수와 꽤 다른 존재로서, 뷔토스-시게 에온쌍으로 존재하는 성부/프로파토르처럼 성자도 양성적인 '누스-알레테이아 에온쌍'으로 존재하면서 남성적 에온인 '누스 (=정신)'는 종종 '모노게네스/독생자', '만물의 아버지'와 여성적 측면와 '알레테이아 (=진리)', '만물의 어머니'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원적인 신을 알 수 있는 것은 이 '성자'의 남성적인 측면에 속하는 에온인 누스 혹은 모노게네스이다.
그래서 아리우스가 앞에서 말한 '발렌티누스가 말한 성부로부터 성자의 발출 / 프로볼레'란 것은 이런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즉, 에온들이 2-에온체의 근원적 신으로부터 발출되어 나오는 것, 그 신과 근원은 같으나 (즉, 플레로마의 일원이나), 그 발출과정에서 나온 에온들은 그들의 아버지를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분리되는 것을 뜻한다.
# 안키라 주교 마르켈루스의 진술
그런데 니케아 회의 후 동일본질파를 가장 강력하게 대변했던 인물 가운데 하나인 안키라 주교 마르켈루스는 아리우스야 말로 발렌티누스파의 아류라며 공격한다.
논의에 앞서, 니케아 회의에서는 동일본질파에 섰던 마르켈루스가 왜 조금 뒤에 가서는 심지어 동일본질파로부터도 이단시 되었을까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알아두는 것이 중요하다.
AD 5세기의 교회사가인 소크라테스 스콜라티코스는 이렇게 진술한다. 이 내용은 마르켈루스를 정밀하게 반박한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의 논점을 간략히 진술한 것이다.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는마르켈루스의 교리를 반박한 {마르켈루스 반박 Contra Marcellum}과 {교회의 신학에 관하여 Ecclesiastical Theology}를 저술했다. 그럼 왜 유세비우스는 마르켈루스가 AD 269년에 주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축출된 안티오키아 주교인 사모사타의 파울로스가 주창한 이단설에 따라 그리스도를 '단순한 인간'으로 간주했다고 비난한 것일까?
이미 AD 3세기 중반에 이단으로 정죄된 사모사타 출신 안티오키아 주교 파울로스의 주장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파울로스의 이해에 따르자면, 성부-성자-성령은 셋이 아닌 단 하나의 프로소폰/페르소나 ~ 휘포스타시스로 존재한다. 억지로 말하자면 1위 1체다. 성자 혹은 로고스는 따라서 독립된 휘포스타시스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지혜로서 성부 안에 존재한다. 이것은 마치 인간 안에 로고스/이성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이 세상의 창조 전에 로고스는 성자로 낳아졌는데, 그때의 로고스-성자는 형테도 없고 가시적이지도 않지만, 구약시대의 예언자 - 특별히 모세 -와 긴밀히 관계했고, 또 성령에 의해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인간 예수의 이성"으로 활동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부와 로고스-성자는 사실은 구분되지 않는 한 신이며, 로고스-성자가 직접 인간 예수로 성육신 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육체와 인간으로서의 개별적인 이성을 가진 예수의 이성과 정신으로서, 혹은 인간 예수의 정신과 합체하여 활동한 것이 된다. 그러기에 인간 예수는 기본적으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으로나 명백한 인간이지만, 성령으로서의 로고스-성자의 영향력 하에 그리스도로서 활동한 것이 된다. 그러니까 성부와 하나인 로고스-성자와는 달리, 인간 예수는 로고스-성자의 직접적인 성육신이라기 보다는 그 자체 인간으로서의 개인성을 여전히 가지는 것이 된다. 그 하나는 그저 인간으로서의 인간 예수이고, 또 하나는 인간 예수 위에 강림한 후 (실체적이 아니라 질적으로) 그와 연합한 로고스-성자이다. 이 둘 사이의 연합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의지가 일치하는 경우에만 존속된다. 이것이 사모사타의 파울로스가 펼친 주장이다. 동일본질파가 다시 보편교회의 정통파로 자리매김한 4세기 이후 다시 한번 교회를 결정적으로 분열시키게 되는 "네스토리우스 논쟁", 즉 예수의 신인양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 논쟁에서,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확연히 나누게 이해한 네스토리우스와 안티오키아 교회 측은 이후로도 지속하여 사모사타의 파울로스의 이단설과 유사하다는 의심을 받게 된다. 그 정반대쪽으로 이해하면 단성파로 가게 된다. "그 (=예수)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며 바울이 골로사이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 (골 2:9)의 구절을 극단으로 강조하면 양성파가, 요한의 복음서에 등장하는 "그 말씀/로고스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구절을 극단으로 강조하면 단성파적인 이해로 나아가게 된다. 즉, 전자의 이해는 "신이 인간(육체) 안에 거하였다"는 관점이, 후자는 "신이 인간(육체)가 되었다"는 관점이 각각 강조된 것이다. 칼케돈 신조는 이 양 극단을 조화시키려는 시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시리아와 동방 지역 70인의 주교들이 파울로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안티오키아 주교직을 박탈할 것을 결의한 AD 269년의 주교회의는 파울로스가 "동일본질 / 호모우스오스"란 용어의 사용을 금지했다. 물론 이 경우 "호모우스오스"의 정의는 니케아 회의가 결의한 동일한 단어와 그 의미와 해석이 전혀 다르다. 파울로스의 경우, 그는 이 용어를 성부-성자-성령이 "구분없이" 완전히 하나일 뿐이라는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가 마르켈루스를 비난한 것은 이런 배경이 있다. 유세비우스가 볼 때, 마르켈루스의 인간 예수는 그저 "(인간의) 육체에 (인간의) 영혼을 가진 단순한 인간으로, 보통 인간이 가진 본성과 조금도 구별할 수 없"는 존재이며, 다만 그의 정신만 신의 로고스의 지배를 받은 것이다 (유세비우스, {Ecclesiastical Theology} 1.20.7), 사모사타의 파울로스처럼 마르켈루스도 성부에게서 낳아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로고스-성자가 직접 그 자체로 신이자 인간인예수 그리스도로 성육신 한 것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세비우스는 이 점을 사모사타의 파울로스를 언급하면서 설명하는데, "그(=사모사타의 파울로스)은 마르켈루스처럼 예수를 신의 그리스도로 가르치고 또 한 분의 신에 대해서 가르치긴 했지만, 그리스도를 성자이면서 또한 육체로 오기 전에 이미 낳아진 자로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 교부들은 그의 가르침을 신의 교회에 낯선 주장 (=이단)" (유세비우스, {Ecclesiastical Theology} 1.14 )으로 간주했다고 진술한다.
유세비우스와 다른 교부들의 비판을 조금 쉽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마르켈루스가 이런 신론과 그리스도론을 가졌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의 아리우스 및 발렌티누스 비판을 읽어보면, 그의 의도를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발렌티누스의 '세 휘포스타시스 ὑπόστασις '와 '세 프로소폰 πρόσωπον'?
전해지는 단편들 가운데 (저자가 정말 마르켈루스인지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거룩한 교회에 관하여}를 발췌해 읽어보자.
동일본질파였던 (그러나 동일본질파 간에도 신학적 입장이 논란이 되었던) 안키라 주교 마르켈루스의 비난은 아리우스가 발렌티누스를 비판한 것과는 관점이 또 다르다. 아리우스파 지도자인 아스테리우스를 반박하면서, 마르켈루스는 바로 아리우스파야말로 발렌티누스의 이단설에 바탕했다고 맹공을 퍼붓는다.
마르켈루스가 이 반박문을 작성한 시점은, 이미 이질본질파 (아리우스파)를 등에 엎은 유사본질파 (준-아리우스파)가 황제의 지지를 받아 동일본질파를 억압하던 때이다. AD 336년에 친-아리우스파가 우세한 예루살렘 주교회의에서 마르켈루스의 저작들이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AD 336년에는 친-아리우스파인 유사본질파의 좌장 니코메디아 주교 유세비우스가 주관한 콘스탄티노플 회의는 마르켈루스의 안키라 주교직을 박탈했다. AD 340년 로마 주교 율리우스 1세는 마르켈루스가 이단혐의에 대해 무고하다고 선언하며 그의 주교직을 다시 인준해 주려고 했고, AD 348년 콘스탄티누스의 두 아들 간 분쟁 와중에 이전에 동일본질파이기에 주교직을 박탈 당했던 아타나시우스와 마르켈루스 등은 일시적으로 주교직을 회복했다. 하지만 마르켈루스가 주교직에 복귀하는 것은 여러 해가 걸렸으며, AD 353년에 콘스탄티노플 측의 개입으로 바실레이오스에게 다시 자리를 빼앗긴다. 아울러 같은 동일본질파에 서 있던 측에서도 마르켈루스의 이단성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한때 마르켈루스를 지지했던 아타나시우스도 마침내 마르켈루스 (개인이라기 보다는 그의)의 교설을 정죄하는데 동참하게 된다.
아리우스파를 발렌티누스파와 연결짓는 마르켈루스의 논점을 정리해 보자.
마르켈루스가 하고자 한 말은 꽤 분명하다. 아리우스파의 성부-성자-성령은 본질을 공유하지 않는 완전히 독립적인 셋으로 분리된다. 따라서 이것은 성부 >> 성자 >> 성령의 위계질서를 가진 세 신을 상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잠깐, 그럼 '세 휘포스타시스' 간의 관계에 대해 아리우스와 마르켈루스는 전혀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주의깊게 두 주장을 읽어보면, 둘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본질'과 '발출'에 대한 발렌티누스의 주장을 아리우스의 관점에서 비판한 것이다. 마르켈루스의 주장은 '성부-성자-성령'이란 세 휘포스타시스의 '구분'과 '분리'에 대한 발렌티누스의 주장을 비판한 것이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만약 발렌티누스처럼 '성자가 성부로부터 발출되었다'고 보게 되면 이는 성부와 성자가 본질을 공유하게 된다는 뜻이므로 (성부-성자-성령이 모두 다른 본질을 가진다고 보는 아리우스파의 입장에서는) 틀렸다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아리우스의 주장 대로라면 '세 휘포스타시스'는 완전히 다른 세 독립된 존재여야 한다
마르켈루스의 주장은 발렌티누스가 '세 휘포스타시스'와 '세 프로소폰' 개념을 만들었고 이 개념을 아리우스가 가져가서 '세개의 완전히 다른 휘포스타시스'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즉, 발렌티누스가 아리우스의 선구자란 뜻이 된다. 그것은 테르툴리아누스의 지적처럼, 발렌티누스의 존재유출설에서 에온들은 플레로마 안에서 근원적 신과 본질을 공유하더라도, 사실은 근원적 신과 결정적으로 끊어져 낮은 단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동일본질파에 의해서도 이단으로 정죄된 마르켈루스의 주장은, 삼위일체의 그 셋은 영원히 분리되어 나뉜 존재로서의 세 휘포스타시스가 아니라, 일시적으로만 나뉘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은 원래 한 존재 (모나드)이자 '한 휘포스타시스'로 존재하며 , 우주가 탄생될 때 비로소 로고스가 성부로부터 나와 신의 활동력으로서의 '성자'가 되었고, 이 로고스-성자가 나중에 인간이 될 때, 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20:22에 따라 성령도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와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종말이 오면, 성자와 성령 모두 성부로 돌아가 다시 신은 단일한 존재가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성부-성자-성령은 '영원한' 삼위일체가 아니라, 세상이 존속하는 동안에만 존재하는 형식의 신의 현현방식이다.
그러니까 마르켈루스의 입장에서 본다면 '세 휘포스타시스'가 존재하더라도 이것은 영속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즉, 마르켈루스는 논점은 두개로 나누어서 이해야 한다. 즉, 마르켈루스는 (1) 헤르메스 트리메기토스 - 플라톤 - 발렌티누스 -아리우스 모두 이렇게 (2) 완전히 나뉘어져 있는 (3) 영속적인 세 휘포스타시스로서 존재하는 성부-성자-성령을 가르친다며 비난하는 것이다.
바로 이 세번째 논점에서 마르켈루스는 니케아 신조에 동의한 동일본질파의 가르침에서도 벗어나 버렸다. 동일본질파는 삼위일체를 한 본질을 공유하는 영속적인 세 휘포스타시스로 여기기 때문이다.
# 발렌티누스의 {세 본성에 관하여}? {삼분론}?
각설하고,
그런데 마르켈루스의 글로 여겨지고 있는 이 문건을 이해하는데는 몇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우선, (1)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 가운데 발렌티누스가 '세 휘포스타시스'의 개념을 처음 고안했다는 내용을 담은 문건은 마르켈루스의 이 진술이 유일하다. (2) 마르켈루스가 발렌티누스의 저작이라고 언급하는 {세 본성에 관하여}란 저작은 현재 전하지 않으며, 그 저작이 발렌티누스의 것이라는 제 3의 증거는 없다.
우선, '휘포스타시스'란 용어 자체는 앞에서 말했다시피, {신약성서}에 이미 등장한다. 물론 그 의미는 후대에서처럼 정밀하게 정의되지 않은 상태로, 그저 '실체' 정도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한 '성부-성자-성령'을 구분되는 세 신적존재로 이해하는 것 역시 발렌티누스의 등장 이전에 이미 {신약성서}의 단서들에 따라 초기 교부들이 이해하고 있던 바였다.
§ 알렉산드리아의 발렌티누스
혹자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가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AD 2-4세기 동안 번성했던 발렌티누스파 그노시스의 교리를 흡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주장이지만, 몇가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발렌티누스파 그노시스를 가장 예리하게 공격했던 인물은 시리아 혹은 소아시아 출신의 리그두눔 주교 이레네우스와 로마 사제 히폴리투스와 북 아프리카 카르타고의 라틴교부 테르툴리아누스였다. 이들이 발렌티누스파 이단에 대해 예리한 반박을 저술로 남긴 시점인 AD 2세기 말-3세기 초는, 발렌티누스파가 시작된 지 1.5-2세대가 흐른 후였다.
우선은 문제의 인물 발렌티누스와 그의 신관에 대해 먼저 정리해 보도록 하자. 그가 창설하고 그의 제자들에 의해 발전된 이 그노시스파는 아주 복잡한 신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 신관은 그들의 우주론이기도 하고, 또한 구원론이기도 하다.
발렌티누스파 그노시스의 창시자인 발렌티누스 개인에 관한 자료는 기독교 교부들의 기록들에서 종합된 것으로, 발렌티누파 측 문건에서 직접 전해지는 것은 없다. 이 문건들에 따르면, 발렌티누스는 이집트 나일 삼각주에 위치한 프레보니스 출생으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철학을 교육받았다.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의 온실과도 같은 곳인지라 다양한 철학적, 종교적 사고가 습합된 지역인 동시에 그곳에 몇 세기 동안 뿌리를 내린 대규모 유대인 공동체를 바탕으로 기독교가 매우 초기에 전파된 곳이기도 했다.
아마도 이 곳에서 발렌티누스는 기독교 뿐 아니라, 이미 AD 2세기 초반부터 중대한 이단으로 대두되던 바실리데스파 그노시스의 가르침과도 조우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AD 2/3세기의 알렉산드리아 교부인 클레멘스에 따르면, 바실리데스의 추종자들은 바실리데스가 사도였던 바울을 따르던 튜다란 인물의 제자였고, 이 튜다가 바울이 내부인들과만 나누었던 비밀스런 교리들을 바실리데스에게 다시 전수한 것으로 주장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자신의 가르침을 펴던 발렌티누스는 히기누스가 로마 주교로 재임하던 시기인 AD 136년 경에 로마로 와서 아니케투스가 차기 주교가 될 때까지 로마에 체류했다. AD 2/3세기의 북 아프리카 카르타고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당시의 발렌티누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혹평한다.
Valentinus had expected to become a bishop, because he was an able man both in genius and eloquence. Being indignant, however, that another obtained the dignity by reason of a claim which confessorship had given him, he broke with the church of the true faith. Just like those (restless) spirits which, when roused by ambition, are usually inflamed with the desire of revenge, he applied himself with all his might to exterminate the truth; and finding the clue of a certain old opinion, he marked out a path for himself with the subtlety of a serpent. --- Tertullian, {Adversus Valentinianos} iv,
발렌티누스는 (로마) 주교가 될 것을 기대했다. 그는 박학으로 보나 유창한 언변으로보나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고백자 (=박해를 받고 살아남은 신자)의 지위를 받은 다른 사람이 로마 주교가 되자, 이에 몹시 실망한 발렌티누스는 참 진리를 가진 교회와 결별했다. 야심에 찬 사람들이 그러하듯, 복수심에 불타오른 그는 진리를 뿌리뽑기 위해 전력투구했다. 어떤 옛 사상에서 단서를 발견한 후 뱀 (=사탄)에 사로잡혀 그 자신의 길/종파를 열었다. ---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 {발렌티누스파 반박} 1권 4장 / 번역: 최광민
발렌티누스가 로마주교가 되지 못한 이유를 그의 이단설 탓으로 돌리지 않는 것으로 볼 때, 테르툴리아누스는 로마에 체류할 당시의 발렌티누스가 그때까지는 보편교회의 가르침에서 크게 이탈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여기는 듯 하다. 한편, AD 4/5세기의 살라미스 주교 에피파니우스에 따르면, 로마를 터난 발렌티누스가 키프로스에서 배가 난파된 후 정신이 나가 이단이 된 것으로 본다.
발렌티누스의 기본교리는 그의 사후 다양한 그룹의 그노시스로 전이되는데, 범-발렌티누스파 그노시스 주의자 가운데는 바르다이산, 헤라클레온, 프톨레마이오스, 마르코스 등이 있다. 발렌티누스는 AD 160 년 전후에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테르툴리아누스가 AD 150년에 태어나 AD 240년 경에 사망했으므로, 테르툴리아누스는 발렌티누스 계열의 그노시스 교리의 진화과 급속도로 진행된 제 1세대를 경험한 셈이다.
발렌티누스가 가르친 기본교리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워낙 진화속도가 빨랐기 때문이다. 다만 1945년 이집트에서 발굴된 나그함마디 문서군에서 발견된 꼽트어 {진리복음서}는 아마도 이레네우스가 언급한 {진리 복음서} 혹은 테르툴리아누스가 언급한 {발렌티누스 복음서}와 같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문서에 등장하는 성부-성자-성령의 관계는 보편교회의 그것과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발렌티누스파 역시 그들의 교리를 {신약성서}의 구절에서 따왔기 때문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발렌티누스가 개시한 이 계열의 그노시스가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복잡하게 진화되었는지를 비판한다.
Valentinus, however, was as yet nowhere, and still the Valentinians derive their name from Valentinus. Axionicus at Antioch is the only man who at the present time does honour to the memory of Valentinus, by keeping his rules to the full. But this heresy is permitted to fashion itself into as many various shapes as a courtezan, who usually changes and adjusts her dress every day. And why not? When they review that spiritual seed of theirs in every man after this fashion, whenever they have hit upon any novelty, they immediately call their presumption a revelation, their own perverse ingenuity a spiritual gift; but (they deny all) unity, admitting only diversity. And thus we clearly see that, setting aside their customary dissimulation, most of them are in a divided state, being ready to say (and that sincerely) of certain points of their belief, This is not so; and, I take this in a different sense; and, I do not admit that. By this variety, indeed, innovation is stamped on the very face of their rules; besides which, it wears all the colourable features of ignorant conceits. --- Tertullian, {Adversus Valentinianos} iv,
발렌티누스의 원조 교리는 사라졌으나, 발렌티누스파는 여전히 그의 이름을 사용한다. 안티오키아의 악시오니코스는 발렌티누스의 교리를 현재까지 완전히 지키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이 이단은 매일 옷을 갈아입는 고급창녀처럼 발렌티누스의 교리를 다양하게 변형시켰다. 안 그럴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영적 자질을 돌아보면서 자기에게서 어떤 새로운 것이라도 발견했을 때, 그들은 즉시 자신들의 생각이 '계시'이며 자신 만의 기괴한 독창성이며 영적 선물이라고 주장해 댄다. 그들은 통일성이 아닌 오직 다양성 만을 추구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들의 통상적인 기만은 제쳐두더라도 그들 대부분이 늘 분열적이라는 점과 (불일치하는 / 필자 주) 각자의 믿음을 주창할 준비가 늘 되어있다는 점을 분명히 보게 된다. (통일이 아닌 다양성을 추구하는 그들의 주장은 / 필자 주) 이것은 틀린 것이다. 나는 그들과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생각하며, 그들의 태도에 동의하지 않는다. 진실로 이런 다양성을 통해 발명된 것들이 바로 그들의 교리를 특징 짓는다. 아울러 이런 다양성은 무지한 허세가 보여주는 온갖 알록달록한 특징들로 채색되어 있다. ----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 {발렌티누스 반박} 4장 / 번역: 최광민
For although Valentinus seems to use the entire volume, he has none the less laid violent hands on the truth only with a more cunning mind and skill than Marcion. Marcion expressly and openly used the knife, not the pen, since he made such an excision of the Scriptures as suited his own subject-matter. Valentinus, however, abstained from such excision, because he did not invent Scriptures to square with his own subject-matter, but adapted his matter to the Scriptures; and yet he took away more, and added more, by removing the proper meaning of every particular word, and adding fantastic arrangements of things which have no real existence. -- Tertulian, {Prescription against Heretics}, Chapter 38
비록 발렌티누스가 (기독교의 / 필자 주) 성서 전부를 사용하기는 했던 듯하나, 그는 마르키온보다 오히려 더 교활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진리를 유린했다. 마르키온은 펜 대신 분명하고 공개적으로 칼을 사용했다. 그의 주장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교리와 일치되지 않는 / 필자 주) 성서(의 일부 / 필자 주)를 잘라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렌티누스는 자신의 교리에 맞게 성서를 새로 만드는 대신, 자신의 교리를 성서에 끼워 맞췄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그는 성서에 사용된 특정 단어들의 적절한 의미를 제거하고, 또 존재하지도 않는 허망한 내용들을 삽입함으로써 (마르키온보다 / 필자 주) 성서를 더 많이 삭제하고, (성서에 없는 가르침을 / 필자 주) 더 많이 삽입한 것이다. ----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 {이단에 대한 처방} 38장 / 번역: 최광민
Their very unity, however, is schism. I am greatly in error if they do not among themselves swerve even from their own regulations, forasmuch as every man, just as it suits his own temper, modifies the traditions he has received after the same fashion as the man who handed them down did, when he moulded them according to his own will. The progress of the matter is an acknowledgment at once of its character and of the manner of its birth. That was allowable to the Valentinians which had been allowed to Valentinus; that was also fair for the Marcionites which had been done by Marcion— even to innovate on the faith, as was agreeable to their own pleasure. In short, all heresies, when thoroughly looked into, are detected harbouring dissent in many particulars even from their own founders. The majority of them have not even churches. Motherless, houseless, creedless, outcasts, they wander about in their own essential worthlessness. --- Tertulian, {Prescription against Heretics}, Chapter 42
이단자들에게 통일된 점이 있다면 이들이 분열한다는 사실 뿐이다. 내가 틀리지 않다면, 그들이 그들 자신의 교리를 변개시기고, 그것이 자신의 본성인 양 자신들에게 교리를 전수해 준 자 (=발렌티누스)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도 제멋대로 전승을 바꾸고 있다. 이들은 시작 때부터 그리했던 것이다. 즉, 발렌티누스파가 이런 성향이 용인하는 것은, 바로 발렌티누스 자신이 그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마르키온파가 그런 것은 자기 좋을대로 신앙을 바꾼 마르키온이 역시 그랬기 때문이다.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교회에 속해있지도 않다. 어머니도 없고, 집도 없고, (통일된 / 필자 주) 신조도 없고, 동떨어져 있으면서, 그들은 조금도 가치없는 것들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 {이단에 대한 처방} 42장 / 번역: 최광민
여기서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발렌티누스나 발렌티누스파가 과연 '삼위일체'의 개념을 처음으로 발명했으며, 그들의 개념을 (발렌티누스파를 격렬히 비난하던) 보편교회가 슬그머니 흡수해서 적반하장으로 보편교리의 정통교리로 삼았다"고 말하는 주장이 과연 얼마나 타당한 주장인지를 하나씩 자료를 살피면서 풀어보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길고 지리하긴 하지만, 도대체 발렌티누스파의 신관이 무엇이었는지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넘어가야 한다.
§ 발렌티누스 계열 그노시스파의 신관 및 세계관
AD 1세기 말부터 출현하기 시작한 다양한 그룹의 '그노시스파' 혹은 '영지주의자'들은, 일관된 교리체계를 가진 단일그룹이 아니라 서로 비슷한 핵심교리를 공유하지만 세부적으로는 꽤 복잡한 차이를 보이는 꽤 복합적인 그룹들을 부르는 총칭이다.
이들 가운데 역사적으로 가장 성공한 그룹들로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지중해 권, 특히 서방권에서 큰 영향을 가졌던 발렌티누스파 (및 거기서 파생된 그룹들)와 바실리데스파, 그리고 페르시아권을 진원지로 하여 로마 제국 전역과 심지어 중국에까지 포교된 마니교를 들 수 있다. AD 2-3세기에는 발렌티누스파가, AD 3세기 후로는 마니교가 정통파 교회 (혹은 보편교회)에 가장 위협적이었다.
여기서는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해 자주 등장하게 되는 발렌티누스파 그노시스 계열에 대해서만 촛점을 맞춰본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AD 2세기 초/중반 한때는 로마 주교 후보로 나서기도 했던 (아마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발렌티누스는 로마 주교의 꿈이 실현되지 못하자 동방으로 이주 특별히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현학적인 그의 독특한 교리를 발전시킨다. AD 2세기 중/후반의 발렌티누스파의 영향력은 정통파 교회에 특히 위협적이어서, 당시 갈리아 리그두눔의 주교 이레네우스와 로마 사제 히폴리투스가 이단을 반박하는 일련의 논증을 작성할 때 특별히 발렌티누스파를 염두에 두었다.
이들 그노시스파 이단들이 보편교회에 위험했던 이유는 이들이 스스로를 "기독교도"라고 주장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철학적으나 영적으로 수준높은 "진짜" 기독교도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즉, 교부들의 표현대로라면 이들이 교회 안에 '기생'하면서 현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내부적 균열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당대의 현학적인 기독교도 식자들이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직설적인 교리를 가진 보편교회보다는 다양한 그노시스파의 '복잡하고 현란한' 교리들에 귀가 솔깃했던 것은 아마 당연했을 것이다.
그들이 주장의 근거를 {신약성서}에서 따왔기 때문에 얼핏 보기엔 마치 "교회의 표준언어"를 구사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표면적인 유사점일 뿐 사실은 동일한 {신약성서} 속 진술들에 바탕하긴 하였지만 전혀 다른 신학적 주장을 펼친 것이다.
그래서 이레네우스는 그노시스파 이단들에 대해 이렇게 일갈한다.
2. Error, indeed, is never set forth in its naked deformity, lest, being thus exposed, it should at once be detected. But it is craftily decked out in an attractive dress, so as, by its outward form, to make it appear to the inexperienced (ridiculous as the expression may seem) more true than the truth itself. One far superior to me has well said, in reference to this point, A clever imitation in glass casts contempt, as it were, on that precious jewel the emerald (which is most highly esteemed by some), unless it come under the eye of one able to test and expose the counterfeit. Or, again, what inexperienced person can with ease detect the presence of brass when it has been mixed up with silver? Lest, therefore, through my neglect, some should be carried off, even as sheep are by wolves, while they perceive not the true character of these men,— because they outwardly are covered with sheep's clothing (against whom the Lord has enjoined us to be on our guard), and because their language resembles ours, while their sentiments are very different --- Irenaeus Against Heresies, Preface, #2
오류는 그 추한 알몸을 결코 드러내지 않지만, 일단 그 알몸이 드러나면 사람들은 금새 알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오류는 매력적인 옷으로 교묘하게 위장하기 때문에, 경험없는 사람들에는 오류가 진실보다도 더 진실처럼 여겨진다. 이 점에 대해서 나보다 훨씬 훌륭한 이가 이미 언급했다시피, 유리로 만든 교묘한 가짜 에머랄드가 위조품임을 밝히기 위해서는 이를 전문적으로 감정하고 위조임을 입증할 수 있는 전문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경험없는 사람들이 은에 동이 섞여있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을까? 경험없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마치 양들이 늑대들에게 낚이듯이 이들에게 사로잡혀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겉으로 양의 가죽을 입고 있고, 그들의 용어는 우리의 용어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신학적) 견해는 우리와 매우 다르다. --- 번역: 최광민
게다가 이들 그노시스들은 학파에 따라 서로 비슷하면서도 종종 매우 다른 복잡한 이론들을 경쟁적으로 고안해 냈기 때문에, 보편교회는 이들의 주장을 하나씩 반박하기 위해 백과사전식 저술을 만들어내야 할 정도였다.
리그두눔 주교 이레네우스의 진술이다.
But since they differ so widely among themselves both as respects doctrine and tradition, and since those of them who are recognised as being most modern make it their effort daily to invent some new opinion, and to bring out what no one ever before thought of, it is a difficult matter to describe all their opinions. --- Irenaeus Against Heresies, Book 1, Chapters 21.5
.....그러나 그들은 교리과 전통에 있어 매우 다양한데, 이들 가운데 가장 최신 유행을 이끄는 자들은 매일매일 새로운 견해를 발명해내고 있다. 사람들이 이전에 생각해 내지 못했던 새로운 견해들을 매일 매일 발명해내고 있기에, 이들의 견해를 모두 정리해 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 루그두눔 주교 이레네우스, {이단반박} / 번역: 최광민
발렌티누스파를 비롯한 다양한 그노시스 계열의 이단은 '신론'과 '구원론'에 있어 기존의 보편교회의 교리와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그들의 '신론'과 '구원론'은 일종의 '우주론'과 '존재론'과 합친 것으로, 현대인의 눈에는 일종의 장엄한 '스페이스 판타지'처럼 보인다.
그럼 우선 발렌티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믿던 바를 정리해 보자. 이 글에서 참고할 자료는 리그두눔 주교 이레네우스의 {이단 반박}, 로마의 히폴리투스의 {이단 반박}, 카르타고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의 {이단 반박}, 살라미스 주교 에피파니우스의 {파나리온} 등이며, 발렌티누스파 측 자료로는 나그 함마디에서 출토된 (종종 발렌티누스 본인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진리 복음서}, {발렌티누스파 해설, Valentinian Exposition}이다.
Irenaeus, {Against Heresies} Ante-Nicene Fathers, Vol. 1. Edited by Alexander Roberts
https://archive.org/stream/antenicenefather01robe
Hippolytus, {Refutation of All Heresies} Philosophumena; or, The refutation of all heresies, formerly attributed to Origen, but now to Hippolytus, bishop and martyr, who flourished about 220 A.D. Translated from the text of Cruice
https://archive.org/stream/philosophumenaor01hippuoft
Tertulian, Ante-Nicene Fathers, Vol. 5. Edited by Alexander Roberts
https://archive.org/stream/antenicenefather03robe
사실 발렌티누스파의 신관은 기독교의 성부-성자-성령의 공식보다 수십~백배는 복잡하다.
# 신: 단일체 (= 모나드)
이레네우스의 {이단 반박 1:2:5}에 따르자면, 발렌티누스파가 묘사하는 성부는 불가해하고 불가지한 존재로서 인간이 그 존재를 묘사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는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자이자, 모든 존재들의 궁극적 기원이다.
발렌티누스의 저작으로 종종 여겨지는 {진리 복음서} 18:34 (및 {발렌티누스파 해설} 22:27-28, 이레네우스의 {이단반박} 2:2:2 에 따르자면, 신은 이 세상을 포함하는 모든 만물을 그 안에 품은 존재이다.
2. Next let them tell us whether these things have been formed within the limits which are contained by Him, and in His proper territory, or in regions belonging to others, and lying beyond Him? But if they say [that these things were done] beyond Him, then all the absurdities already mentioned will face them, and the Supreme God will be enclosed by that which is beyond Him, in which also it will be necessary that He should find His end. If, on the other hand, [these things were done] within His own proper territory, it will be very idle to say that the world was thus formed within His proper territory against His will by angels who are themselves under His power, or by any other being, as if either He Himself did not behold all things which take place among His own possessions, or was not aware of the things to be done by angels. --- Irenaeus, {Against Heresies} 2.2.2
이 개념은 신이 만물을 포함하고 또 초월한다는 스피노자적 범신론과 다소 유사한데, 따라서 발렌티누스의 세계관에서 하위존재들의 출현은 바로 이 신의 연속적인 자기-전개 (unfolding)에 해당한다. 즉, 신 자신의 일자성을 유지하면서 일련의 다중적인 전개과정을 통해 하위존재들을 발출시키게 된다.
그래서 발렌티누스파의 신관은 사실상 '존재론'이며 또한 '우주론'이다.
# 신: 2-에온체 (=디아드)
발렌티누스파는 동/서의 큰 분파 뿐 아니라 각 분파의 내부적으로도 다양한 분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 혹은 신적 존재들 (=에온) 남성성과 여성성이 있는 남-여 쌍으로 구성된 양성적 존재로 표상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치했다. 이를 "남-여 에온쌍" (복수 συζυγίαι, 단수 σύζυγοι)으로 불러보자.
말할 것도 없이 신을 '남성'적으로 묘사한 전통적인 유대교나 기독교의 인식에 배치되는 것이다. 물론 신의 '영'을 뜻하는 '루아흐'가 히브리어에서는 '문법적 여성'이긴 하지만, 이를 '물리적 여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언어와 문화적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결과이다. 사실 발렌티누스파 조차, 성령/보혜사에 해당하는 '파라클레토스'는 남성으로 설정했다.
이 '남-여 에온쌍' 개념은 (1) 만물의 창조자가 각 존재들에게 (2) 형상과 (3) 질료를 공급한다는 플라톤적 사고와 관련된 것이다. 고대세계의 일반적 관념에서 '능동적 생산력'은 '남성'이 아닌 '여성'이기에 우주에 '질료'를 공급하는 (= 즉, 생산) 주체 역시 신의 여성적 측면이 된다. 하지만 '그노시스'와 '페미니즘'을 혼합하길 종종 즐기는 '현대 그노시스주의자'들의 주장과 무색하게도, (흔한 속설들의 시도에서 처럼) 이 '에온쌍'의 개념으로부터 현대적 의미의 '남녀평등'을 유도하려는 시도는 꽤 난감한 것이다.
단일체 모나드인 근원적 신은 여전히 모나드로서 단일체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여성 속성의 에온쌍으로 존재하는 2-에온체, 즉 '디아드'이기도 하다. 남성적 측면은 '뷔토스 (=심오)' 혹은 '불가해', '첫 아버지'라 불리며 우주에 '형상'을 제공한다. '뷔토스란'란 그 깊이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불가해함을 뜻하는 것이다. '질료'를 공급하는 여성적 측면인 '시게'에 비해 '형상'을 공급하는 이 남성적 측면은 기본적으로 수동적이고 정적이다. 신의 여성적 측면인 '시게=엔노이아'에 의해서만 이 남성적 측면이 비로소 '형상'을 내어놓기 때문이다 (에피파니우스, {파나리온} 5:3 참고). 궁극의 신의 여성적 측면을 그노시스파들은 '시게 (=고요)', 혹은 '엔노이아 (=사유)'라 불렀다. '시게'란 이 신의 궁극적이고 원초적 상태에 해당하며 (발렌티누스파 해설 Exposition 22:24), 신의 자기-인식 상태를 뜻한다. 신의 여성적 측면이자 '에온'인 이 '시게'는 자신보다 하위 존재들, 즉 하위 에온들을 연속해서 만들어 내는 능동적 창조력이다.
그런데 히폴리투스의 {이단 반박} 30:8에 언급된 저자 미상의 발렌티누스파 저작과 역시 저자 미상의 발렌티누스파 저작인 {Tripartite Tractate 삼분론}에서는 성부의 단일성이 강조된다. 그럼 어떻게 남-여 에온쌍으로 존재하는 신의 단일성이 보존되는 것일까? 이 저작들에 따르면 '남-여 에온쌍'이란 신의 두 측면은 사실은 정말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두 측면은 한 신격 안에서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마치 동전의 양 면 혹은 물과 습기와의 관계와 유사하다. 그래서 이 남-여 에온쌍은 둘로 나뉠 수 없으며, 그러기에 신을 인식함에 있어 양자를 모두 고려하지 않으면 신 자체도 혹은 에온쌍 가운데 어느 한쪽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발렌티누스파의 이해였다. 즉, 하나이면서 둘인 것이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던 태초에 블변/부동의 단일한 모나드로서 시게-엔노이아 에온쌍으로 존재하던 성부 만이 세계에 홀로 존재했다 (히폴리투스, {이단반박} 29:5, 이레네우스 {이단반박} 1:1:1) 그래서 장차 존재하게 될 전 우주는 성부 안에 내재된 미전개/미분화된 '잠재성'으로만 존재했다. (에피파니우스, {파나리온} 5:3 , {발렌티누스파 해설} 22:27-28, {삼분론} 60:1-34).
이 잠재성이 구현되는 창조의 전 과정은 성부의 자기-제한이 필수적으로 포함된 개념이 된다. 즉, 계속적인 하위존재 (에온)의 발출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이 하위 에온쌍들은 계속해서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는데, 이때 신은 존재로 충만한 '충만계' (=플레로마)와 저급한 "결핍계 (=케노마)" 사이의 경계를 설정하게 된다 (이레네우스 {이단반박} 1:2:1, 발렌티누스파 해설 27:36-37)
이 경계는 종국적으로는 신 (및 에온들)과 저급한 만물 사이에 분명한 경계 (이레네우스 1:2:2)가 되는데, 발렌티누스파는 이 경계를 나누고 유지하는 에온을 '호로스 (=경계설정자)' 혹은 '스타우로스 (십자가)'라고 불렀다. 흥미롭게도 이 호로스/스타우로스란 에온은 다른 에온들과는 달리 남-여 에온쌍이 아니라 단독으로 존재한다. 호로스 혹은 스타우로스가 설정하고 지탱하는 이 경계에는 두가지 기능이 있는데, 그 하나는 충만계와 결핍계를 나누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동시에 이 둘을 지탱하는 것이다 (이레네우스 1:2:1). 혹자는 이 '호로스'가 이집트 신 '호루스'에서 가져온 것이란 근거 약한 주장을 펼치는데, 사실 그노시스 교리와 이집트의 오리시스-이시스-호루스 종교 간에는 (특별히 호루스의 지위와 역할) 별로 유사한 점이 발견되지 않는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충만계의 이 에온들은 이 경계를 넘어 존재할 수 없다.
# 제 1차 발출: 테트라드 (=4-에온체)
일련의 에온 발출을 통한 일련의 자기전개와 경계설정을 통해,성부는 불가지적인 자신을 가지적인 세상에 현현시킬 수 있게 되는데, 이때 신은 신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자신의 사유를 통해 지식의 영을 발출시키며 이것이 바로 '성자'가 된다.
이 '성자'는 뷔토스-시게 에온쌍으로 존재하는 성부처럼 양성적인 '누스-알레테이아 에온쌍'으로 존재한다 성자의 남성적 에온인 '누스 (=정신)'는 종종 '독생자', '만물의 아버지'로 표현되며, 그의 여성적 측면은 '알레테이아 (=진리)', '만물의 어머니'로 불려진다. 발렌티누스파는 성자의 이 두 측면을, '진리가 참으로 각성된 정신을 통해 이해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 성자는 그 하위에 존재할 모든 만물의 기원이 되는데, 성부의 남-여 두 에온과 성자의 남-여 두 에온을 합쳐 총 네 에온 (테트라드)인 '뷔토스/심오', '시게/고요', '누스/정신', '알레테이아/진리' 가 만물의 기원이 된다.
불가해한 성부와 달리, 성부로부터 발출된 성부의 이미지인 성자 (누스-알레테이아 에온쌍)는 인식가능한 존재이다 (이레네우스 1:12:1, 삼분론 66:13-15). 그러기에 인간이 지고의 성부를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성자를 통해서이다.
또한 발렌티누스파가 보기에, 이 세상에서 수난받은 것으로 인지된 그 '성자'는 바로 성부의 '누스/정신', 정확히 말하면 이 '성자'의 남성적 측면인 '누스/정신'이다.
7. If, again, they declare that their Æons were sent forth just as rays are from the sun, then, since all are of the samesubstance and sprung from the same source, all must either be capable of passion along with Him who produced them, or all will remain impassible for ever. For they can no longer maintain that, of beings so produced, some are impassible and others passible. If, then, they declare all impassible, they do themselves destroy their own argument. For how could the youngest Æon have suffered passion if all were impassible? If, on the other hand, they declare that all partook of this passion, as indeed some of them venture to maintain, then, inasmuch as it originated with Logos, but flowed onwards to Sophia, they will thus be convicted of tracing back the passion to Logos, who is the Nous of this Propator, and so acknowledging the Nous of the Propator and the Father Himself to have experienced passion. For the Father of all is not to be regarded as a kind of compound Being, who can be separated from his Nous (mind), as I have already shown; but Nous is the Father, and the Father Nous. It necessarily follows, therefore, both that he who springs from Him as Logos, or rather that Nous himself, since he is Logos, must be perfect and impassible, and that those productions which proceed from him, seeing that they are of the same substance with himself, should be perfect and impassible, and should ever remain similar to him who produced them. -- Against Heresies, (Book II, Chapter 17)
.....[전략]....그들은 수난을 프로파토르의 누스인 로고스에게 소급하며, 따라서 프로파토르이자 성부 본인의 누스가 수난을 받은 것으로 본다...... 루그두눔 주교 이레네우스, {이단 반박} 2권 17.7 / 번역: 최광민
# 제 2차 발출: 오그도아드 (=8-에온체)
이제 발렌티누스가 설명하는 본격적 우주창조가 시작된다.
성부와 성자를 구성하는 남-여의 네 원초적 에온은 두 쌍의 남-여 에온쌍을 발출하는데, 이때 새로 발출된 첫 쌍의 남-여 에온쌍은 로고스/말씀 (남성)과 조에/생명 (여성)이다. 이 둘은 성부를 구성하는 '뷔토스/심오' (남성)과 '시게/고요' (여성)으로부터 왔다 (발렌티누스파 해설 29:25-37). 두번째 남-여 에온쌍은 안드로포스/인간 (남성)과 에클레시아/교회 (여성)이다. 이들은 성자를 구성하는 에온쌍인 '누스/정신'과 '진리/알레테이아'에서 온 에온들로, "교회와 연합된 인간의 상태"를 뜻한다. (발렌티누스파 해설 29:25-37) 이렇게 이제 총 8 에온이 존재하게 된다.
발렌티누스파에서 분파된 프톨레마이오스와 테오도토스는 성자를 구성했거나 성자에게서 직접 유래한 '누스/정신', '알레테이아/진리', '안드로포스/인간', '에클레시아/교회'란 네 측면/에온은 바로 성자의 특성을 표현한 것이며, 따라서 이것이야 말로 {요한복음서} 서문을 설명한다고 풀이한다. 즉, 요한은 그 {복음서}에서 "태초에 로고스/말씀가 계셨다"라고 진술하는데, 발렌티누스파들은 요한이 '로고스'를 말할때 그 '로고스'란 바로 '누스'와 '진리'를 말한 것이며, 또 요한이 1"4절에서 로고스/말씀이 조에/생명이 되다"는 말을 "로고스-생명'의 에온쌍을 말한 것이라고 한다. 또 요한이 '생명은 사람들게게 비춘 빛이었다"는 구절로부터 "안드로포스/인간-에클레시아/교회' 에온쌍을 말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레네우스 1:8:5)
이렇게 성부와 성자를 구성하는 원초적인 4-에온과 이로부터 파생된 4-에온은 기초적인 '8-에온체'을 구성한다. 이 8-에온체야 말로 만물의 근원이자 원천이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이레네우스 1:1:1).
1. THEY maintain, then, that in the invisible and ineffable heights above there exists a certain perfect, pre-existent AEon,(4) whom they call Proarche, Propator, and Bythus, and describe as being invisible and incomprehensible. Eternal and unbegotten, he remained throughout innumerable cycles of ages in profound serenity and quiescence. There existed along with him Ennoea, whom they also call Charis and Sige.(5) At last this Bythus determined to send forth from himself the beginning of all things, and deposited this production (which he had resolved to bring forth) in his contemporary Sige, even as seed is deposited in the womb. She then, having received this seed, and becoming pregnant, gave birth to Nous, who was both similar and equal to him who had produced him, and was alone capable of comprehending his father's greatness. This Nous they call also Monogenes, and Father, and the Beginning of all Things. Along with him was also produced Aletheia; and these four constituted the first and first-begotten Pythagorean Tetrad, which they also denominate the root of all things. For there are first Bythus and Sige, and then Nous and Aletheia. And Monogenes, perceiving for what purpose he had been produced, also himself sent forth Logos and Zoe, being the father of all those who were to come after him, and the beginning and fashioning of the entire Pleroma. By the conjunction of Logos and Zoo were brought forth Anthropos and Ecclesia; and thus was formed the first-begotten Ogdoad, the root and substance of all things, called among them by four names, viz., Bythus, and Nous, and Logos, and Anthropos. For each of these is masculo-feminine, as follows: Propator was united by a conjunction with his Ennoea; then Monogenes, that is Nous, with Aletheia; Logos with Zoe, and Anthropos with Ecclesia. --- Ireaneus, {Against Heresies} 1:1:1
그들은 주장하기를.....[중략]....우선 뷔토스와 시게, 그리고 누스와 알레테이아가 존재한다. 모노게네스는 그가 발출된 방식에 따라 로고스와 조이를 발출하고, 이로서 자신 이후에 등장하게될 모든 것의 아버지가 되며, 전체 플레로마를 시작하고 구성하게 된다. 로고스와 조이의 결합으로 안트로포스와 에클레시아가 나오며, 이로써 만물의 근원이지 본질이 되는 오그도아드가 처음 구성되는데, 그 가운데 뷔토스, 누스, 로고스, 안트로포스 네 이름으로 불려진다.....[후략]민 ----- 이레네우스, {이단반박} 1:1:1 / 번역: 최광민
이것이 8-에온체 '오그도아드'이다.
# 데카드 발출 / 18-에온체
이어서 이 8-에온체, 즉 오그도아드로부터 보다 낮은 에온들이 발출되는데, 10-에온 (=데카드)은 '로고스/말씀'과 '조에/생명'으로부터 (에피파니우스 5:9, 히폴리투스 30:1, 발렌티누스파 해설 30:16-19)), 12-에온 (=도데카드) 은 '안드로포스/인간'과 '에클레시아/교회'로부터 발출된다. 이것들은 '성자' 안에 있던 특성들이 발현된 것이다.
10-에온 역시 5종의 남-녀 에온쌍으로 구성되며, 이 에온들은 윤리적 삶을 지탱하는 우주적 원리를 상징한다. 남성 에온은 안정성을, 여성 에온은 능동적/성적 능력을 암시한다. 그들은 이 두 원리가 결합해 이상적인 존재를 구성한다고 보았다.
이 5종의 남-여 에온쌍은,
- 뷔티오스(깊음) - 믹시스 (혼합)
- 아게라토스 (무변) - 헤노시스 (결합)
- 아우토퓨테스 (자존) - 헤도네
- 아키네토스 (무동) - 쉰크라시스 (혼합)
- 호모게네스 (독생한)- 마카리아 (행복)
이다. 이것이 데카드다.
# 도데카드 발출 / 30-에온체
한편, '인간'과 '교회'에서 유래하는 6-에온쌍은 '정신'과 '진리'를 기린다. (히폴리투스 30:1). (발렌티누스파) 그노시스가 지향하는 완전한 인간형을 상징하다.
이 6종의 남-여 에온쌍은
- 파라클레토스 (위로자) - 피스티스 (믿음)
- 파트리코스 (부성) - 엘피스 (희망)
- 메트리코스 (모성) - 아가페 (사랑)
- 아이노스 (찬양) - 쉰네시스 (지성, 이해)
- 에클레시아스티코스 (교회의) - 마카리오스테스 (행복/ 축복)
- 텔레토스 (의지/열망ordained) - 소피아 (지혜)
이다. 이것이 도데카드다.
그래서 이 에온들은 8-, 10-, 12- 씩 나뉘어지는 세 그룹을 이룬다. 이렇게 총 30-에온은 성자의 다양한 본성이 발현되어 펼쳐진 것으로, 이를 마치 씨앗에서 나무가 자라나오는 것으로 풀이했다. (히폴리투스 8:2-5, 이레네우스 2:17:6, 삼분론 60:31-32). 또는 태양에서 빛살이 쏟아져 내리는 것과도 같다고 보았다. (이레네우스 2:13:5, 2:17:7).
이 30-에온의 영적 세계가 발렌티누스파가 본 이상적 세계이다. 8은 완전한 이상이며, 10은 안정과 단일성을 뜻한다. 12는 교회와의 연합을 통해 완성되는 가치와 덕을 상징한다. 30 에온 가운데 성자로부터 직/간접 발출되는 26 에온은 성자의 특성을 상징한다.
# 플레로마 πλήρωμα (=충만계)
발렌티누스파는 (영적) 우주를 플레로마/충만의 한 가운데 신이 위치한 일련의 동심원적 구조체로 보았고, 성자가 성부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에온들도 성자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비록 에온들은 다수이지만 신은 여전히 하나"란 결론을 유도할 수 있었다.
이레네우스에 따르면,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All are formed of the same substance with the Father, differing from one another in size and not in nature, and filling up the Greatness of the Father, even as the fingers complete the hand." --- Against Heresies 2:17:6
"이 모든 에온들은 성부와 동일한 질료로 구성된다. 각각은 그 크기가 서로 다르지만 그 본성이 다르지는 않으며, 모두 함께 성부의 위대함을 완성한다. 마치 손가락들이 손을 완성하는 것과 같다 --- 이레네우스, {이단반박} 2:17.6
즉, 모든 에온은 단수의 신 안에 유지되지만, 밖으로 드러날 때는 복수가 된다.
[Some] confess that the Father of all contains all things, and that there is nothing whatever outside of the Pleroma (for it is an absolute necessity that, [if there be anything outside of it,] it should be bounded and circumscribed by something greater than itself), and that they speak of what is without and what within in reference to knowledge and ignorance, and not with respect to local distance; but that, in the Pleroma, or in those things which are contained by the Father, the whole creation which we know to have been formed, having been made by the Demiurge, or by the angels, is contained by the unspeakable greatness, as the centre is in a circle, or as a spot is in a garment . . . .— Iren. II. iv. 2
어떤 이단자들은 만물의 아버지가 만물을 품고 있으며, 플레로마/충만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고백한다 (그 밖에 무언가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그것보다 더 큰 무엇으로 경계지어지고 둘러싸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충만하지 않음 (결핍)과 충만 안에 있다는 개념을 거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앎과 무지의 관계로 설명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형체를 가진 모든 세계는 데미우르고스나 혹은 천사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원의 중심 혹은 덥개 안의 점으로 표상될 수 있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위대한 존재가 플레로마 안, 혹은 성부의 품 안에서 이를 품고 있다고 고백한다..... --- 이레네우스, {이단반박} 2.4.2 / 번역: 최광민
마르쿠스의 {이단반박 Ainst Heresies} 1:14:1에 따르면, 더 나아가 30-에온들 각각이 또 다른 에온들을 품고 있으며 또 이 에온들이 더 하위의 에온들을 품기에 무한 수의 에온이 존재한다고 해설되기도 한다.
# 우주적 비극의 시작
발렌티누스의 신관과 우주관에서 볼때, 오직 성부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갖는 것은 성자 뿐이다. 발렌티누스파는 이 개념을 {복음서}에서 가져왔다. 성자를 제외한 다른 하위 에온들에게 있어, 성부는 불가해하고 불가지하다. (이레네우스 1:2:1, 1:14:1, {발렌티누스파 해설} 24:25-39, {진리 복음서} 22:27-29)
1. They proceed to tell us that the Propator of their scheme was known only to Monogenes, who sprang from him; in other words, only to Nous, while to all the others he was invisible and incomprehensible. And, according to them, Nous alone took pleasure in contemplating the Father, and exulting in considering his immeasurable greatness; while he also meditated how he might communicate to the rest of the AEons the greatness of the Father, revealing to them how vast and mighty he was, and how he was without beginning,--beyond comprehension, and altogether incapable of being seen. But, in accordance with the will of the Father, Sige restrained him, because it was his design to lead them all to an acquaintance with the aforesaid Propator, and to create within them a desire of investigating his nature. In like manner, the rest of the AEons also, in a kind of quiet way, had a wish to behold the Author of their being, and to contemplate that First Cause which had no beginning. --- Irenaeus, {Against Heresies} 1.2.1
발렌티누스파 이단은 말하길, 그들의 관점에서 프로파토르 (아버지)는 그에게서 나온 모노게네스(독생자) - 혹은 다른 용어로는 누스 (=정신)에게만 알려져 있고, 다른 에온들에게 있어 프로파토르는 보이지도 감지되지도 않는다고 한다. 발렌티누스파에 따르자면, 오직 누스 만 성부를 묵상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리고, 성부의 측량불가한 위대함을 생각하며 즐거워할 수 있을 따름이다. 동시에 누스는 다른 에온들이 이해할 수도 감지할 수도 없는 성부의 위대함과 전능함과 성부의 영원함을 어떻게 다른 에온들에게 드러낼 수 있을지를 명상했다...... --- 이레네우스, {이단반박} 1.2.1 / 번역: 최광민
이 '성자'는 정통파 보편교회가 가르친 성자=로고스=예수와 꽤 다른 존재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뷔토스-시게 에온쌍으로 존재하는 성부/프로파토르처럼 성자도 양성적인 '누스-알레테이아 에온쌍'으로 존재한다 성자의 남성적 에온인 '누스 (=정신)'는 종종 '모노게네스/독생자', '만물의 아버지'로 표현되며, 그의 여성적 측면은 '알레테이아 (=진리)', '만물의 어머니'로 불려진다. 발렌티누스파는 성자의 이 두 측면을, '진리가 참으로 각성된 정신을 통해 이해되는 것'으로 해석했다. 성부의 남-여 두 에온과 성자의 남-여 두 에온을 합쳐 총 네 에온 (테트라드)인 '뷔토스/심오', '시게/고요', '누스/정신', '알레테이아/진리' 가 만물의, 정확히는 모든 하위 에온들의 기원이 된다.
다시 4-에온체인 테트라드 바깥의 하위 에온들로 돌아가 본다면, 이 에온들은 그저 성자의 사유를 통해서만 신에 대해 알 수 있을 뿐이다. 에온은 그래서 자신들이 유래한 최상위 존재 (근원적 신)에 대해 알고 싶은 열망을 가지게 되는데, 발렌티누스파의 {진리 복음서}는 성부를 알고자 하는 에온들의 이런 추구는 필연적으로 재난을 불러왔다고 한다. "진리"의 대체물은 영적우주에 상반되는 "물질"적 우주다. 그리고 인간은 오류에 빠진 에온들이 자리잡게된 형상들이며, 혹은 에온은 인간의 무지와 미망에 대한 메타포라고도 볼 수 있겠다.
"The All went about searching for the one from whom they had come forth, and the All was inside of him, the incomprehensible, inconceivable one who is superior to every thought." --- Gospel of Truth 17:4-9
충만계/플레로마 (=모든 에온) 는 자신들이 발출된 근원에 대해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그 (근원적 신) 안에 충만계는 그 안에 있었지만 그는 아무리 생각한들 불가해하고 상상조차 불가한 존재였다 --- {진리 복음서} / 번역: 최광민
"ignorance of the Father caused agitation and fear. And the agitation grew dense like a fog, so that no one could see. Thus error found strength...Without having learned to know the truth, she took up residence in a modeled form (a material body), preparing by means of the power, in beauty, a substitute for the truth" (Gospel of Truth 17:10-13)
성부에 대한 무지는 (에온들 사이에 / 필자 주) 동요와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동요는 짙은 안개처럼 더 심해져 어떤 에온도 앞을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 {진리 복음서} / 번역: 최광민
에온들의 공포는 소피아의 타락으로 구체적인 실행에 옮겨진다.
# 소피아 (지혜)의 타락
발렌티누스파의 소피아 신화는 오류에 대한 메타포이다.
이 신화에 따르면, 절망적으로 성부를 알고자 했으나 도저히 이 꿈을 성취할 수 없던 12 에온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발출된 지혜/소피아는, 스스로 자신과 다른 에온들의 기원을 알고자 하는 구도에 나선다. 그런데 소피아는 성자를 사유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즉 존재의 충만 가운데서가 아니라 자신의 길을 찾는다.
이 결과 플레로마를 벗어난 소피아는 자신의 에온-짝인 텔레토스와의 결합을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낳으려가가 '무형'의 질료를 유산하게 된다. 분리되어 오류의 상태로 빠져 고통당하게 된다. (이레네우스 1:2:2-3, {삼분론} 75:17-77:37). 발렌티누스는 이것은 마치 하와가 아담에게서 분리되어 나온 것과 같다고 보았다.
성부처럼 (창조자가) 되고자 했던' 소피아의 이런 모방은 결국 실패하며 그녀의 피조물은 유산되는데 (히폴리투스 30:6), 그 결과 소피아는 무지 가운데 절망에 빠진다. (이레네우스 1:2:1).
절망 가운데 소피아는 참회하고 도움을 구한다. 이때 '호로스' (경계를 나누는 자) 혹은 '스타우로스 (십자가)'라 불리는 에온이 등장한다 (이레네우스 1:2:3, 히폴리투스 31:2, {발렌티누스파 해설} 34:25-31) 이 호로스의 역할은 플로레마/충만계와 타락한 에온 사이를 나누는 것이다. 소피아는 '상위 소피아'와 유산된 딸린 '하위 소피아' 혹은 '소피아 아카모트;로 분리되고, 유산된 딸인 '하위 소피아'인 '소피아 아카모트'는 충만으로부터 분리되어 물질계로 떨어진다. 둘로 분리된 소피아들 가운데 '상위 소피아'는 이후 다시 회복되어 그 남성짝에게 돌아가 성부는 도저히 불가해하다는 진리를 깨닫는다. (이레네우스 1:2:4, cf.. 히폴리투스 31:5)
그럼 '하위 소피아'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이 '낙태된 사유'는 물질 세계에 같혀 고통 당한다. 이 하위세계는 존재의 충만 (플레로마)가 결핍된 물질계이다. 존재의 충만은 성자에 의해 발출되었고, 또 성자 안에 내재한다. 충만이 결핍된 세계는 참 지식 (그노시스)가 없다. 이 결핍은 그래서 '무지'다. 이 무지는 참 지식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발렌티누스파에 따르면 타락한 소피아 혹은 '하위 소피아'는 히브리어로 '아카모트'라고 불리거나, 혹은 '루아흐 / 성령'이라 불릴 때도 있는데, 이 존재가 {요한 계시록}에 등장하는 '새 예루살렘'이고, {복음서}에 등장하는 길 잃은 양이란 것이다. 하위계에 갇혀 자신의 참 기원을 모르는 존재, 이 추락한 소피아 아카모트는 그래서 개개 인간의 원형이 된다.
이 소피아는 그리스도에 대해 모른 채 계속해서 신을 이해하고자 무익한 노력을 한다. 그러나 앞에서 에온들에 의해 설정된 두번째 경계로 인해 충만/플레로마로 들어갈 수가 없다. 무지의 결과, 이 소피아는 고통과 공포와 혼란 가운데 고통 당하게 되는데, 이 세계는 그녀에게 환상으로 보이고 그녀는 이 환각과 실재를 구별할 수 없다. 이런 혼란스런 인식은 바로 신을 모르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같은 것이다. ({진리 복음서} 29:1-7, 이레네우스 2:14:3)
§ 케노마 κένωμα (공허) 혹은 휘스테레마 ὑστέρημα (결핍)
소피아가 회심하는 순간까지의 우주의 상태는 다음과 같다.
충만계인 플레로마는 상위 소피아의 회복에 아울러 호로스/스타우로스가 30 에온과 그 밖의 모든 것을 경계지음으로써 완전히 분리된다.
'상위 소피아'는 회복되었지만 '하위 소피아'인 소피아 아카모트는 플레로마에서 분리되어 무지와 고통을 상징하는 물질계에 갇힌다. 소피아 아카모트 물질계의 조성자인 데미우르고스의 어머니이자 물질계의 창조력이 된다. 아울로 그노시스의 철학을 따르는 추종자들은 소피아 아카모트의 영적 씨앗을 받은 자녀들로 상정된다.
그래서 플레로마 밖의 현상계는 충만이 결핍된 결핍계인 케노마 (공허계)로, 이 안에 우리가 인식하는 물질적 세계인 코스모스/우주가 존재한다. 한편 로마의 히폴리투스의 {이단반박} 6권 31장에서는 플레로마의 상대개념을 휘스테레마 (결핍계)로 진술한다.이 용례는 에피파니우스의 {파나리온} 31.4에도 등장하는데, 이 경우엔 휘스테레마가 데미우르고스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충만계/플레로마를 구성하는 30-에온처럼, 케노마/휘스테레마 안에도 그에 대응하는 존재들이 있다. 즉, 케노마의 조물주인 데미우르고스를 비롯하여 케노마 안에도 역시 오그도아드 (8-에온), 데카드 (10에온), 도데카드 (12에온)이 있다. 플로로마에 속한 상위-소피아와 마찬가지로 케노마로 쫓겨난 하위-소피아 (=아카모트)가 있다. 충만계에 다른 에온들을 무지와 미망에서 구원한 성자가 있다면, 케노마에는 영지/그노시스를 깨달은 인류를 구원할 그리스도가 있다. 플레로마에 안드로포스 (=인간)과 에클레시아 (=교회)라고 명명된 에온이 있다면, 케노마에는 그에 상응하는 실제 인간들과 교회가 존재한다. 그러니가 케노마-휘스테레마, 즉 물질계는 30 에온들이 구성하는 충만계/영계의 그림자 같다는 것이 발렌티누스파의 주장이었다.
충만계의 구성에 상응하는 결핍계/물질계의 요소들에 대한 발렌티누스파의 설명을 옮기고 있는 이레네우스의 글을 읽어보자.
Chapter XVII.—The theory of the Marcosians, that created things were made after the image of things invisible.
1. I wish also to explain to thee their theory as to the way in which the creation itself was formed through the mother by the Demiurge (as it were without his knowledge), after the image of things invisible.
They maintain, then, that first of all the four elements, fire, water, earth, and air, were produced after the image of the primary Tetrad above, and that then, we add their operations, viz., heat, cold, dryness, and humidity, an exact likeness of the Ogdoad is presented.
They next reckon up ten powers in the following manner:—There are seven globular bodies, which they also call heavens; then that globular body which contains these, which also they name the eighth heaven; and, in addition to these, the sun and moon. These, being ten in number, they declare to be types of the invisible Decad, which proceeded from Logos and Zoe.
As to the Duodecad, it is indicated by the zodiacal circle, as it is called; for they affirm that the twelve signs do most manifestly shadow forth the Duodecad, the daughter of Anthropos and Ecclesia.
And since the highest heaven, beating upon the very sphere [of the seventh heaven], has been linked with the most rapid precession of the whole system, as a check, and balancing that system with its own gravity, so that it completes the cycle from sign to sign in thirty years,—they say that this is an image of Horus, encircling their thirty-named mother.[1] And then, again, as the moon travels through her allotted space of heaven in thirty days, they hold, that by these days she expresses the number of the thirty Æons.
The sun also, who runs through his orbit in twelve months, and then returns to the same point in the circle, makes the Duodecad manifest by these twelve months; and the days, as being measured by twelve hours, are a type of the invisible Duodecad.
Moreover, they declare that the hour, which is the twelfth part of the day, is composed[2] of thirty parts, in order to set forth the image of the Triacontad. Also the circumference of the zodiacal circle itself contains three hundred and sixty degrees (for each of its signs comprises thirty); and thus also they affirm, that by means of this circle an image is preserved of that connection which exists between the twelve and the thirty. Still further, asserting that the earth is divided into twelve zones, and that in each zone it receives power from the heavens, according to the perpendicular [position of the sun above it], bringing forth productions corresponding to that power which sends down its influence upon it, they maintain that this is a most evident type of the Duodecad and its offspring.
2. In addition to these things, they declare that the Demiurge, desiring to imitate the infinitude, and eternity, and immensity, and freedom from all measurement by time of the Ogdoad above, but, as he was the fruit of defect, being unable to express its permanence and eternity, had recourse to the expedient of spreading out its eternity into times, and seasons, and vast numbers of years, imagining, that by the multitude of such times he might imitate its immensity.
They declare further, that the truth having escaped him, he followed that which was false, and that, for this reason, when the times are fulfilled, his work shall perish.
마지막은 구원론과 교회론이다. 발렌티누스파가 말하는 '구원'은 보편교회가 가르쳐 온 '구원'과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 그리스도와 회복
앞서 벌어졌던 재난의 재발방지를 위해, 충만계의 성자는 다른 남-여 에온쌍으로 현현하는데, 그것이 그리스도 (남성)-성령 (여성)이다. (이레네우스 1:2:5, 히폴리투스 31:3). 이 에온쌍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지상교회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상징한다.
그리스도로서의 성자는 다시 한번 성부는 불가지하고 불가해 함을 다른 에온들에게 밝히고, 진리는 오직 자신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레네우스 1:2:5) 성부는 자신의 가슴 - 즉 성령을 드러내고, 자신 안에 감춰진 성자를 드러내 보인다. 성부의 이 자비를 통해 에온들은 그를 비로소 알고 성부를 무모하게 찾는 수고를 멈추게 되며, 성부 안에서 안식한다. 이것이야 말로 안식임을 알게되기 때문이다. (이레네우스 1:2:5-6 cf. {진리 복음서} 24:9-20)
발렌티누스파는 바로 이 과정이 신앙과 세례의 진정한 의미라고 가르쳤다 ({삼분론} 126:27-129:34). 그리하여 충만계의 모든 에온이 성자 안에서 하나가 되는데, 그러기에 성자는 이들 에온들의 '구원자'이다. 이 '구원자'야 말로 모든 에온들이 한 목소리로 부르게 될 이름인 것이다. 오묘하게도 에온들의 각 "그리스어" 이름에서 글자를 떼내어 합성하면 '구원자'란 그리스어 단어를 만들 수 있다!!! (cf. {진리 복음서} 38:6-41:3).
발렌티누스의 세계관에서 모든 에온은 이성의 짝이 있기에, 이 남성 '구원자'는 이 물질세계로 떨어진 '하위 지혜/소피아'의 남성 파트너이자 신랑이 된다. (cf. 이레네우스 1:2:6, 히폴리투스 32:1-2, 삼분론 85:15-90:3)
소피아의 간구에 반응해, 충만계의 '구원자'는 자신을 비워 충만계 바깥으로 나와 천사들과 함께 결핍계로 온다. (이레네우스 1:4:5). 여기서 그는 짝이 없이 물질계에 유폐된 소피아 아카모트와 결함해 또 다른 한 쌍의 남-여 에온쌍이 된다. 그리고 마침내 이 소피아 아카모트는 자신에게 생명을 준 존재를 묵상함으로써 미망과 무지에서 벗어나 심경의 변화를 겪게 되는데, 이때 비로소 무거운 마음이 풀리고 웃게 되며 (이레네우스 1:4:2), 다른 에온들과 함께 이 상태를 해결할 도움을 구하게 된다 (이레네우스 1:4:5, 히폴리투스 32:3).
구원자와 그의 천사들을 보며 소피아는 기뻐하면서 영적 씨앗을 그노시스 추종자들의 안에 흩뿌리는데, 이것이 모든 영지주의 기독교도들 안에 있는 영적 요소들이다. 이 씨앗은 그래서 '교회'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교회'는 충만계의 그 '교회 / 에클레시아'의 모형이다.
물질계는 영적씨앗들이 성장하고 단련받기 위해 필요했는데, 소피아 스스로 이 세계를 직접 만들 수는 없었기 때문에, 소피아는 자신이 낳은 데미우르고스를 통해 물질계를 만들게 했다. 비록 데미우르고스가 소피아 아카모트와 물질계 간에서 태어난 존재이지만, 오직 소피아 아카모트만 30-에온으로 구성된 플레로마에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데미우르고스는 물질로 된 이 세상을 창조할 때 플레로마를 직접 참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데미우르고스를 비밀리에 배후조종하여 그 대신 혼돈으로부터 플레로마를 모방한 세상을 만들게 했고, 결과적으로는 비록 결함을 있으나 거의 완벽한 세상을 창조를 돕는다.
이렇게 데미우르고스를 통해서 소피아는 구약성서 {창세기}의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 그래서 물질계를 창조한 이 데미우르고스는 구약성서 {창세기}의 창조주인 유대인의 '야훼'이다. 즉, 거의 모든 그노시스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유대교의 야훼는 그저 물질계의 창조자일 뿐 아니라, 자신의 근본조차도 모르는 존재가 된다. 데미우르고스는 자신의 어머니가 누군지 몰랐기 때문에, 자신이 유일한 지고의 창조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발렌티누스파가 보기에 데미우르고스/야훼는 결국은 소피아 아카모트의 조수였을 뿐이다. 소피아 아카모트와 물질이 결합해 탄생한 데미우르고스는 7 천사와 천계를 만들고 그 위에서 군림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칠층천'이라고도 불린다. 데미우르고스의 7천사들은 창조의 7일을 암시한다. 하지만 데미우르고스는 자신 위에 소피아와 구원자가 거주하는 제 8층천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 이 8층천은 충만계의 8 에온을 암시한다. (이레네우스1:5:2).
소피아의 배후조종 하에 데미우르고스가 인간을 만들때, 그는 원형적 인간의 이미지를 통해 물질계의 인간을 만들었기에 인간들은 물질적 신체 안에 영적 씨앗을 품고 있다. 이 영적 씨앗을 통해 각자는 구원자 그리스도를 묵상함으로써 영지/그노시스에 이를 수 있고, 차츰 무지를 극복하고 신에 가까이 도달할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의 영은 혼을 깨워 소피아와 함께 충만계에 다시 들어간다. 그래서 소피아는 '하늘에서 내려온 새 예루살렘'이라 불린다. 마친가지로 영들은 천사들과 합체하게 된다. 이때 성부를 보게 되고, 지적인 에온이 되어 영원한 결혼에 들어선다. 이 완전한 충만은 '신랑/신부의 신방'으로 묘사된다 (이레네우스 1:7:1).
이것이 발렌티누스파가 말하는 종말이다. 이제 물질계에 감춰졌던 불이 타올라 모든 물질계를 동시에 불태워 아무것도 남기지 않게 된다. 이로써 물질계는 사라지고, 결핍은 해소도며, 존재의 회복은 완료된다 (이레네우스 1:7:1). .
발렌티누스파의 이 신화는 개인의 영적발전에 대한 알레고리 (풍유)인데, 이들이 이것을 다만 알레고리로서 받아들였는지, 혹은 실제적인 우주론으로 받아들였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고대인의 관념 상, 아마도 둘 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발렌티누스의 '삼위일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발렌티누스는 '삼위일체'론의 선구자일까? 그의 이단설을 보편교회가 흡수하여 후대의 '삼위일체 교리'로 발전시킨 것인가?
우선, (아리우스파 논쟁의 촉발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파문)사제 아리우스와 (동일본질파이나 후에 사벨리우스주의자로 간주되어 탄핵된) 안키라 주교 마르켈루스의 저작에 등장하는 발렌티누스(파)의 견해를 옮겨보자. '
우시아', '휘포스타시스', '프로소폰 (=페르소나)'에 대한 합의된 정의와 뉘앙스가 아직 분명하지 않은 때이기 때문에, 그냥 그리스어 원어 그대로 옮긴다.
#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의 진술
니케아 회의 벌어지기 몇 해 전, 자신의 상관이었던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드로에게 자신의 신관을 피력하는 이 편지에서 아리우스는 성부-성자-성령의 관계에 관한 한 자신이 이단으로 보고 있는 몇몇 이단자들 - 발렌티누스, 마니, 사벨리누스, 히에라카스 - 과 그들의 주장을 거론한다. 이 견해들은 당시까지의 보편교회에서 이미 이단으로 정죄된 것들이다.
현대 영어로 정확한 번역어가 없는 용어는 그리스어 원문의 용어와 함께 병기하겠다.
To Our Blessed Pope and Bishop, Alexander, the Presbyters and Deacons send health in the Lord: Our faith from our forefathers, which also we have learned from thee, Blessed Pope, is this:—We acknowledge One God, alone Ingenerate, alone Everlasting, alone Unbegun, alone True, alone having Immortality, alone Wise, alone Good, alone Sovereign; Judge, Governor, and Providence of all, unalterable and unchangeable, just and good, God of Law and Prophets and New Testament; who begat an Only-begotten Son before eternal times, through whom He has made both the ages and the universe; and begat Him, not in semblance, but in truth; and that He made Him subsist at His own will, unalterable and unchangeable; perfect creature of God, but not as one of the creatures; offspring, but not as one of things begotten; nor as Valentinus pronounced that the offspring of the Father was an issue; nor as Manichæus taught that the offspring was a portion of the Father, one in essence; or as Sabellius, dividing the Monad, speaks of a Son-and-Father; nor as Hieracas, of one torch from another, or as a lamp divided into two;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 필자 주) 저희 사제들과 부제들은 우리의 축복받으신 교부이자 주교이신 알렉산드로스님이 주님 안에서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선조들과 또 축복받은 교부이신 당신께로부터 전수받은 믿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한 분이시며, 홀로 독존하시며, 홀로 영원하시며, 홀로 시작이 없으시며, 홀로 진리이시며, 홀로 불멸하시며, 홀로 지혜로우시며, 홀로 선하시며, 홀로 주권자이신, 재판자, 주권자, 만물의 섭리, 변함없고 불변하시는 분, 공정하고 선하신 분, 율법과 예언자들(=구약성서 / 필자 주)과 신약성서의 신을 인정합니다. 그 분은 영원한 시간 이전에 독생하신 아들을 낳으셨으며, 그 아들을 통하여 시간과 우주를 만드셨습니다. 성부가 성자를 낳으신 것은 성부와의 유사함이 아닌 진리란 측면에서 낳아진 것입니다. 성부는 성자를 자신의 의지 가운데 존재하게 하여 변성되지 않고 불변하는 완벽한 신의 피조물 (= ktisma)로 만들었지만, 여타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발렌티누스의 주장처럼 성부로부터 성자가 발출 (= probolē) 된 것도 아니고, 마니의 주장처럼 성부의 본질상 동일한 부분 (meros homoousion)이 (나뉘어 / 필자 주) 성자가 되었으며 따라서 (성부와 성자가) 한 본질이라는 것도 아니며, 사벨리우스의 주장처럼 한 모나드 (=일자)를 성자-성부 (huiopatora)로 나눠 부른다는 것도 아니며, 또한 히에라카스의 주장처럼 성부로부터 성자가 횃불처럼, 혹은 한 등잔불처럼 둘로 나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 번역: 최광민
nor that He who was before, was afterwards generated or new-created into a Son, as thou too thyself, Blessed Pope, in the midst of the Church and in session hast often condemned; but, as we say, at the will of God, created before times and before ages, and gaining life and being from the Father, who gave subsistence to His glories together with Him. For the Father did not, in giving to Him the inheritance of all things, deprive Himself of what He has ingenerately in Himself; for He is the Fountain of all things.
성자는 존재하지 않던 시점이 있었고, 나중에 생성되어 성자로서 새로이 창조된 것입니다. 축복받은 교부여, 교회 안이나 회의들 가운데서 당신이 종종 정죄했던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장처럼, 신의 의지에 따라 성자는 태초의 시간 이전에 창조되었으며 성부로부터 생명을 받아 존재하게 되었으며, 성부가 자신의 영광을 성자에게 나눠준 것입니다. 성부는 만물을 성자에게 상속시키긴 했지만, 자신의 본연의 속성까지 내어준 것은 아닙니다. 성부는 만물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 번역: 최광민
Thus there are Three Subsistences. And God, being the cause of all things, is Unbegun and altogether Sole, but the Son being begotten apart from time by the Father, and being created and founded before ages, was not before His generation, but being begotten apart from time before all things, alone was made to subsist by the Father. For He is not eternal or co-eternal or co-unoriginate with the Father, nor has He His being together with the Father, as some speak of relations, introducing two ingenerate beginnings, but God is before all things as being Monad and Beginning of all.
따라서 세 휘포스타시스 (=성부-성자-성령, hypostaseis)가 있는 것입니다. 신은 모든 것의 원인이 되시며, (따라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며, 철저하게 홀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시간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낳아졌고, 피조되고 (ktistheis), 드러난 존재입니다. 그래서 낳아지기 전에 그는 존재하지 않았고, 다만 만물들이 존재하기 전에 성부에 의해 낳아져서 존재하게 (hypestē)된 것입니다. 성자는 그래서 영원하지도 않고, 성부와 더불어 영원하지도 않으며, 누군가 말하는 것처럼 성부처럼 기원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두가지의 태어남 없는 기원을 도입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신은 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모나드/일자 (一者)이셨으며, 모든 것의 출발점이였습니다. --- 번역: 최광민
Wherefore also He is before the Son; as we have learned also from thy preaching in the midst of the Church. So far then as from God He has being, and glories, and life, and all things are delivered unto Him, in such sense is God His origin. For He is above Him, as being His God and before Him. But if the terms ‘from Him,’ and ‘from the womb,’ and ‘I came forth from the Father, and I am come’ (Rom. xi. 36; Ps. cx. 3; John xvi. 28), be understood by some to mean as if a part of Him, one in essence or as an issue, then the Father is according to them compounded and divisible and alterable and material, and, as far as their belief goes, has the circumstances of a body, Who is the Incorporeal God. --- Athanasius, De Synodis, Part II, Chapter 16
발렌티누스의 주장에 관련된 아리우스의 주장은 아래와 같이 정리될 수 있다.
- 아리우스는 성자를 성부의 특별한 '피조물 κτίσμα'로 본다.
- 발렌티누스는 성자가 성부로부터 '발출 / 프로볼레 προβολή'되었다고 주장했다.
- 아리우스는 성부-성자-성령은 세 '휘포스타시스 ὑπόστᾰσις'로 존재한다고 본다.
이 점에 있어서 아리우스의 원조 주장은 아주 분명하다. 한번 정리해 보자.
- 아리우스가 이해하는 바로는, 성자는 '참 신' 혹은 '원조 신'인 성부가 특별히 만든 '피조된 신'으로, 이 '피조된 신'인 성자를 통해 천사를 포함한 이 세상을 창조했다.
- 성자는 '참 신'인 성부에 의해 '만들어진' 신이기에, 성자는 성부와 '본질'을 공유할 수 없고, 따라서 성자의 본질은 성부의 본질과 완전히 다르다.
- 성자는 '무'로부터' 피조되었다. (혹은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제 3의 질료를 통해 피조되었다)
- 발렌티누스는 성자가 성부로부터 '발출되었다'고 했는데, 이 경우 발출된 에온은 성부와 본질은 공유하고 실체적으로는 성부로부터 분리된다. 하지만 아리우스파의 주장처럼 성부와 성자의 본질이 완전히 다르다면 발렌티누스의 설명은 틀린 것이다.
- 마니, 사벨리우스, 히에라카스의 주장들 역시 성부와 성자가 완전히 혹은 일정정도 본질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아리우스의 주장대로 성부와 성자의 본질이 완전히 다르다면 이 또한 역시 틀린 것이다.
- 그래서 아리우스가 말하는 '세 휘포스타시스'가 뜻하는 바는 성부-성자-성령이 본질이 완전히 다르며, 따라서 세 위가 완전히 독립적인 실체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 동일본질파의 입장에서 볼때, 아리우스의 주장은 그래서 삼신론과 유사하게 된다.
즉, 아리우스의 주장은 '성부와 성자는 본질상 완전히 다르다'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성부와 성자 간에 본질이 같거나 유사하다고 보는 입장들은 틀렸다고 본 것이다. 아리우스의 용례에서 "세 휘포스타시스"는 여기서 (1) "본질이 서로 다르고" (2) 따라서 "개별적으로도 완전히 분리되는 세 존재"를 말한다. " 발렌티누스의 경우라면 이것은 (1) 본질은 같으나 (2) 성부로부터 실체적으로 완전히 분리된 에온들을 말한다. 니코메디아 주교 유세비우스가 좌장이었던 준-아리우스파의 휘포스타시스는 '본질은 '유사'하고, 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셋'을 뜻한다. 동일보질파의 보편교회의 휘포스타시스는 '본질이 같고, 각각 개별적이긴 하지만 또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는 셋' 을 말한다.
그럼 여기서 아리우스가 발렌티누스의 주장을 구성하는 핵심용어로 지목한 '발출", 즉 '프로볼레 προβολή'가 정확히 어떤 뜻인지 확인해 보고나서, 보편교회가 설명한 '프로볼레'와는 또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 보겠다.
# 발출 ἐκπόρευσις? προβολή?
기독교의 성부-성자-성령 개념이 발렌티누스 혹은 발렌티누스파 그노시스에서 왔다고 말하긴 섵부른 결론이다. 그 이유는 사실 발렌티누스(파) 조차 저 개념을 {신약성서}, 특별히 {요한 복음서} 및 바울의 서신들에서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단'이라고 해서 정통파의 입장과 모든 면이 달라야 할 필요는 없다는 점을 기억하자.
가령, 성자와 성령이 "성부로부터 온다"는 표현은 이미 {요한 복음서}에 진술되어 있다.
우선, 성부로부터 성자가 옴 (~발출 ἐξέρχομαι 엑세르코마이)에 대한 예수 본인의 말을 인용한다
εἶπεν οὖν αὐτοῖς ὁ Ἰησοῦς εἰ ὁ θεὸς πατὴρ ὑμῶν ἦν ἠγαπᾶτε ἂν ἐμέ ἐγὼ γὰρ ἐκ τοῦ θεοῦ ἐξῆλθον καὶ ἥκω οὐδὲ γὰρ ἀπ᾽ ἐμαυτοῦ ἐλήλυθα ἀλλ᾽ ἐκεῖνός με ἀπέστειλεν --- Greek {GNT}
42 Dixit ergo eis Jesus: Si Deus pater vester esset, diligeretis utique et me; ego enim ex Deo processi, et veni: neque enim a meipso veni, sed ille me misit. --- Latin {Vulgata}
Jesus said unto them, If God were your Father, ye would love me: for I proceeded forth and came from God; neither came I of myself, but he sent me. --- KJV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하나님이 너희의 아버지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에게서 와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 한국어 새번역, {요한복음} 8:42
다음은 제자들을 떠나 성부에게로 간 후, 성부로부터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말하는 예수 본인의 말을 인용해 보자.
ὅταν δὲ ἔλθῃ ὁ παράκλητος ὃν ἐγὼ πέμψω ὑμῖν παρὰ τοῦ πατρός τὸ πνεῦμα τῆς ἀληθείας ὃ παρὰ τοῦ πατρὸς ἐκπορεύεται ἐκεῖνος μαρτυρήσει περὶ ἐμοῦ
26 Cum autem venerit Paraclitus, quem ego mittam vobis a Patre, Spiritum veritatis, qui a Patre procedit, ille testimonium perhibebit de me;
But when the Comforter is come, whom I will send unto you from the Father, even the Spirit of truth, which proceedeth from the Father, he shall testify of me: (KJV)John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 한국어 개역개정, {요한복음} 15:26
후대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성자는 낳아지고', '성령은 발출된다'는 표현으로 이를 설명했다.
καὶ εἰς τὸ Πνεῦμα τὸ Ἅγιον, τὸ Κύριον καὶ Ζωοποιόν, τὸ ἐκ τοῦ Πατρὸς ἐκπορευόμενον,
.....[우리는 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자 성부로부터 오시는/발출되는 성령을 [믿는다]....
그럼 여기서 다시 아리우스의 주장으로 돌아가 보자.
.....발렌티누스의 주장처럼 성부로부터 성자가 '발출 προβολή'된 것도 아니고.....
'성부로부터 성자가 옴'의 개념을 설명하는 발렌티누스의 용어는이와 조금 다른 형태인 '발출 προβολή 프로볼레' 이다. 발렌티누스의 존재유출/발출론은 {요한 복음서}에 사용되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흥미로운 일인데, 발렌티누스파는 {요한 복음서}에서 에온에 관한 많은 모티프를 빌려왔기 때문이다. 발렌티누스가 '프로볼레'를 선택하여 자신의 존재유출론을 설명한 이유는 분명치 않다.
그노시스파가 아닌 정통파에 속한 기독교 교부 중에 이 용어를 성부-성자-성령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교부는 북 아프리카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였다. 그는 양태론자 프락세아스의 가르침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경세적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이 단어를 명시적으로 '도입'했는데, 이때 이 단어가 발렌티누스파에 의해서 이미 사용되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성부-성자-성령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굳이 이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이 용어가 성부로부터 성자가, 혹은 성령이 발출되는 과정을 설명하기에 그 뉘앙스가 적절한 용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발렌티누스파와 자신이 (즉, 당시의 보편교회가) 이 단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도 명시한다. 참고로, {프락세아스 반박}을 쓰던 시절의 테르툴리아누스는 그의 활동 중기까지 사제로 활동했던 보편교회를 떠나 이단으로 정죄된 금욕적 은사주의 분파인 몬타누스파로 옮겨 갔거나, 혹은 최소한 보편교회와의 관계를 유지한 상태에서 몬타누스파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글 속에서 테르툴리아누스가 몬타누스파 만을 보편교회로 주장하는 흔적은 전혀 없기 때문에, 여전히 그의 설명이 보편교회의 테두리 안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라틴교부 히에로니무스는 AD 392년 경 베들레헴에서 쓴 {De Viris Illustribus} 제 53장에서 그는 테르툴리아누스가 보편교회를 비판하면서 쓴 7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대부분은 금욕적 생활에 대한 내용이다.
4. Hic cum usque ad mediam aetatem presbyter Ecclesiae permansisset, invidia postea et contumeliis clericorum Romanae Ecclesiae, ad Montani dogma delapsus, in multis libris Novae Prophetiae meminit. 5. Specialiter autem adversum Ecclesiam texuit volumina, de pudicitia, de persecutione, de jejuniis, de monogamia, de ecstasi libros sex, et septimum, quem adversum Apollonium composuit. Ferturque vixisse usque ad decrepitam aetatem, et multa quae non exstant opuscula condidisse.
Tertullian was a priest of the church until middle age, but then, because of the envy and insults of the clergy of the church of Rome, he lapsed into Montanism and refers to the New Prophecy in many treatises. In particular, he directed against the church discussions of modesty, of persecution, of fasting, of monogamy, and of divine possession (in six books, with a seventh against Apollonius). He is said to have lived to an advanced age and published many tracts which are no longer extant. --- Jerome, De Viris Illustribus,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각설하고, 'προβολή 프로볼레'란 용어의 사용이 보편교회에서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보는 테르툴리아누스의 설명을 직접 읽어보도록 하자. 라틴어와 그 영어번역을 소개한 후 한국어로 번역하겠다.
CAP. 8. [1] Hoc si qui putaverit me προβολή aliquam introducere, id est prolationem rei alterius ex altera, quod facit Valentinus alium atque alium aeonem de aeone producens, primo quidem dicam tibi, non ideo non utitur et veritas vocabulo isto et re ac censu eius quia et haeresis utatur : immo haeresis potius ex veritate accepit quod ad mendacium suum strueret.
If any man from this shall think that I am introducing some προβολή — that is to say, some prolation of one thing out of another, as Valentinus does when he sets forth Æon from Æon, one after another— then this is my first reply to you: Truth must not therefore refrain from the use of such a term, and its reality and meaning, because heresy also employs it. The fact is, heresy has rather taken it from Truth, in order to mould it into its own counterfeit.
'한 대상이 어떤 다른 것으로부터'발출/유출됨'이란 뜻을 가진 단어로 발렌티누스가 한 에온이 다른 에온으로부터 발출된다는 개념을 설명하려고 사용한 '프로볼레 προβολή' 란 단어를 지금 내가 도입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한 내 답변은 우선 다음과 같다: 진리를 표현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그 용어와 용례와 의미를 사용하는데 망설일 필요는 없다. 이단도 그 단어를 채용하기 때문이다. 사실을 말한다면, 이단은 자신의 거짓을 가다듬기 위해 오히려 진리로부터 그 용어를 가로채 사용해 왔다. / 번역: 최광민
[2] prolatus est sermo dei an non? hic mecum gradum fige. si prolatus est, cognosce προβολή veritatis, et viderit haeresis si quid de veritate imitata est. iam nunc quaeritur quis quomodo utatur aliqua re et vocabulo eius.
Was the Word of God put forth or not? Here take your stand with me, and flinch not. If He was put forth, then acknowledge that the true doctrine has a prolation; and never mind heresy, when in any point it mimics the truth. The question now is, in what sense each side uses a given thing and the word which expresses it.
신의 로고스는 발출되었는가? 아닌가? 두려워 말고 내 설명을 따라가 보도록 하자. 만약 성자가 발출되었다면, 그가 발출 προβολή 되었다는 것을 바른 교리로 인정하고 진리를 흉내내는 이단 따위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말도록 하자. 정말 물어야 할 것은 이 단어를 양자 (보편교회와 발렌티누스파)가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가와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이다. / 번역: 최광민
Valentinus προβολή suas discernit et separat ab auctore, et ita longe ab eo ponit ut aeon patrem nesciat; denique desiderat nosse nec potest, immo et paene devoratur et dissolvitur in reliquam substantiam.
Valentinus divides and separates his prolations from their Author, and places them at so great a distance from Him, that the Æon does not know the Father: he longs, indeed, to know Him, but cannot; nay, he is almost swallowed up and dissolved into the rest of matter.
발렌티누스의 발출 προβολή은 발출되는 대상을 발출되는 원천으로부터 나누고 분리시킨다. 그리하여 발출된 것은 그 원천으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지게 되는데, 그 결과 에온은 그 아버지를 알지 못하게 된다. 진실로 에온은 성부를 알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되지만 결국 성부를 인식할 수가 없다. 에온은 물질의 세계에 삼겨지고 녹아버리는 것이다 / 번역: 최광민
[3] apud nos autem solus filius patrem novit, et sinum patris ipse exposuit, et omnia apud patrem audivit et vidit, et quae mandatus est a patre ea et loquitur, nec suam sed patris perfecit voluntatem, quam de proximo immo de initio noverat.
With us, however, the Son alone knows the Father, Matthew 11:27 and has Himself unfolded the Father's bosom.John 1:18 He has also heard and seen all things with the Father; and what He has been commanded by the Father, that also does He speak. John 8:26 And it is not His own will, but the Father's, which He has accomplished, John 6:38 which He had known most intimately, even from the beginning
그러나 우리 (=보편교회)의 경우, 오직 성자 만이 성부를 인식할 수 있고, 성부의 품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신다. 성자는 성부와 함께 모든 것을 듣고 보는 존재이다. 성부로부터 받은 말을 성자는 그대로 전한다. 성자가 하신 일은 그 자신의 뜻이 아니라 태초로부터 성자가 가장 잘 알고 있던 성부의 뜻이다 / 번역: 최광민
[4] quis enim scit quae sint in deo nisi spiritus qui in ipso, est? sermo autem spiritu structus est, et ut ita dixerim sermonis corpus est spiritus. sermo ergo et in patre semper, sicut dicit,Ego in patre : et apud deum semper, sicut scriptum est, Et sermo erat apud deum: et nunquam separatus a patre aut alias a patre quia Ego et pater unum sumus.
[4] For what man knows the things which be in God, but the Spirit which is in Him? 1 Corinthians 2:11 But the Word was formed by the Spirit, and (if I may so express myself) the Spirit is the body of the Word. The Word, therefore, is both always in the Father, as He says, I am in the Father; John 14:11 and is always with God, according to what is written, And the Word was with God; John 1:1 and never separate from the Father, or other than the Father, since I and the Father are one. John 10:30
신 안에 계신 그의 영 이외에 누가 신의 생각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말씀/로고스는 굳이 말한다면 성령에 의해 형상을 갖추며, 또 성령은 로고스의 몸이다. 그래서 성자/로고스가 "나는 아버지 안에 있다"라고 말하듯, 로고스는 성부 안에 언제나 있는 동시에, 또한 성부와 함께 계신다. 이것은 "로고스/말씀은 신과 함께 계셨다"라고 기록된 바와 같다. 그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기록된 바와 같이, 성자는 결코 성부로부터 분리되지 않으며, 성부가 아닌 것으로부터도 분리되지 않는다 / 번역: 최광민
[5] haec erit προβολή veritatis, custos unitatis, qua prolatum dicimus filium a patre sed non separatum. protulit enim deus sermonem, quemadmodum etiam paracletus docet, sicut radix fruticem et fons fluvium et sol radium : nam et istae species προβολαί, sunt earum substantiarum ex quibus prodeunt. nec dubitaverim filium licere et radicis fruticem et fontis fluvium et solis radium, quia omnis origo parens est et omne quod ex origine profertur progenies est,
This will be the prolation, taught by the truth, the guardian of the Unity, wherein we declare that the Son is a prolation from the Father, without being separated from Him. For God sent forth the Word, as the Paraclete also declares, just as the root puts forth the tree, and the fountain the river, and the sun the ray. For these are προβολαί, or emanations, of the substances from which they proceed. I should not hesitate, indeed, to call the tree the son or offspring of the root, and the river of the fountain, and the ray of the sun; because every original source is a parent, and everything which issues from the origin is an offspring.
이것이 진리가 가르치는 발출 προβολή이며, 신의 단일성이 보존되는 방식이며, 그러기에 우리는 성자가 성부로부터 분리됨 없이 발출된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신이 로고스를 발출하는 것은 파라클레토스 (성령)이 선언하듯이 뿌리가 나무를, 샘이 강물을, 태양이 햇빛을 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그 원천으로부터 대상이 발출 προβολαί, 혹은 유출된다는 것이다. 진실로 나는 나무와 강물과 햇빛이 각각 뿌리와 샘물과 태양의 아들 혹은 자식이라고 망설이지 않고 말할 것이다. 모든 것의 원천은 그 아버지이며, 그 원천으로부터 나온 것은 그 자식이기 때문이다. / 번역: 최광민
multo magis sermo dei qui etiam proprie nomen filii accepit: nec frutex tamen a radice nec fluvius a fonte nec radius a sole discernitur, sicut nec a deo sermo. [6] igitur secundum horum exemplorum formam profiteor me duos licere deum et sermonem eius, patrem et filium ipsius: nam et radix et frutex duae res sunt sed coniunctae, et fons et flumen duae species sunt sed indivisae, et sol et radius duce formae sunt sed cohaerentes.
Much more is (this true of) the Word of God, who has actually received as His own peculiar designation the name of Son. But still the tree is not severed from the root, nor the river from the fountain, nor the ray from the sun; nor, indeed, is the Word separated from God. Following, therefore, the form of these analogies, I confess that I call God and His Word— the Father and His Son— two. For the root and the tree are distinctly two things, but correlatively joined; the fountain and the river are also two forms, but indivisible; so likewise the sun and the ray are two forms, but coherent ones.
그는 '아들'이라는 그의 특별한 지위를 성부로부터 받는 신의 로고스 (=성자)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나무나 강물이나 햇빛은 각각 뿌리나 샘물이나 태양으로부터 끊어지지 않는다. [6] 그러기에 이 비유를 통해 나는 신과 그의 로고스, 즉 성부와 성자를 '두 존재'로 고백한다. 뿌리와 나무가 명백히 다른 두 대상이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듯, 샘물과 강은 서로 다른 모습을 가졌으나 나뉠 수 없는 것처럼, 태양과 햇빛이 서로 다르지만 서로 연결된 하나인 것과 같다 / 번역: 최광민
[7] omne quod prodit ex aliquo secundum sit eius necesse est de quo prodit, nec ideo tamen est separatum. secundus autem ubi est, duo sunt, et tertius ubi est, tres sunt. tertius enim est spiritus a deo et filio, sicut tertius a radice fructus ex frutice et tertius a fonte rivus ex flamine et tertius a sole apex ex radio: nihil tamen a matrice alienatur a qua proprietates suas ducit. ita trinitas per consertos et connexos gradus a patre decurrens et monarchiae nihil obstrepit et oeconomiae statum protegit.
Everything which proceeds from something else must needs be second to that from which it proceeds, without being on that account separated. Where, however, there is a second, there must be two; and where there is a third, there must be three. Now the Spirit indeed is third from God and the Son; just as the fruit of the tree is third from the root, or as the stream out of the river is third from the fountain, or as the apex of the ray is third from the sun. Nothing, however, is alien from that original source whence it derives its own properties. In like manner the Trinity, flowing down from the Father through intertwined and connected steps, does not at all disturb the Monarchy, while it at the same time guards the state of the Economy (οἰκονομία oeconomiae)
한 원천에서 나오는 것은 그 원천에 대해서는 분리되지 않는 제 2의 존재이다. 그런데 두번째란 것은 둘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세번째가 있다는 것은, 즉 셋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성령은 진실로 신과 성자로부터 왔다. 나무에 열리는 과일이 뿌리로부터, 혹은 빛의 끝단이 태양으로 부터는 세번째로 나온 것이 된다. 한 원천에서 나온 것들은 한 속성에서 온 것이므로 서로 다르지 않다. 이런 식으로 삼위일체 역시 성부로부터 흘러나와 서로 얽힌 관계를 맺으나 결코 신의 단일성을 해치지 않는 동시에, 단일성 안의 경세를 지키는 것이다 / 번역: 최광민 --- Against Praxeas, Chapter 8. Though the Son or Word of God Emanates from the Father, He is Not, Like the Emanations of Valentinus, Separable from the Father. Nor is the Holy Ghost Separable from Either. Illustrations from Nature / 번역: 최광민
테르툴리아누스는 왜 발렌티누스의 존재발출론이 보편교회의 교리, 즉 성자의 나옴과 성령의 발출이라는 교리와 충돌한다고 본 것일까? 그의 견해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Let, then, the serpent hide himself as much as he is able, and let him wrest all his wisdom in the labyrinths of his obscurities; let him dwell deep down in the ground; let him worm himself into secret holes; let him unroll his length through his sinuous joints; let him tortuously crawl, though not all at once, beast as he is that skulks the light.
뱀들 (~ 이단자들)이 은밀하게 자신을 숨기게, 모호한 미로 속에 자신이 지혜를 끌어들이게, 땅 속에 깊이 쳐박혀 살게, 비밀의 구멍 속으로 기어들어가게, 그 긴 몸을 길게 늘이게, 빛을 피해다니는 짐승이기에 고통스럽게 느릿느릿 기어다니게 내벼려 두자./ 번역: 최광민
Of our dove, however, how simple is the very home!— always in high and open places, and facing the light! As the symbol of the Holy Spirit, it loves the (radiant) East, that figure of Christ. Nothing causes truth a blush, except only being hidden, because no man will be ashamed to give ear thereto.
그러나 비둘기들의 (~ 기독교도) 거처는 얼마나 단순한가. 늘 높고 사방이 뚫린 곳에 있으며 빛을 향하고 있다. 성령의 상징으로서, 비들기는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좋아하는데, 동쪽은 그리스도를 뜻한다. 숨겨진 것 이외에 어떤 것도 진리를 당혹케 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진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기 때문이다. / 번역: 최광민
No man will be ashamed to recognise Him as God whom nature has already commended to him, whom he already perceives in all His works, — Him indeed who is simply, for this reason, imperfectly known; because man has not thought of Him as only one, because he has named Him in a plurality (of gods), and adored Him in other forms.
어느 누구도 그를 세상을 만드신 신을 인정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피조물 가운데서 신을 이미 인식한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 신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그를 단일자로 여기지 않았고, 대신 여러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부여하고 다른 형태의 신들을 섬겼기 때문이다 / 번역: 최광민
Yet, to induce oneself to turn from this multitude of deities to another crowd, to remove from a familiar authority to an unknown one, to wrench oneself from what is manifest to what is hidden, is to offend faith on the very threshold. Now, even suppose that you are initiated into the entire fable, will it not occur to you that you have heard something very like it from your fond nurse when you were a baby, among the lullabies she sang to you about the towers of Lamia, and the horns of the sun?
그러나 이런 여러 신들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또 다른 다수의 존재들에 대한 개념을 생각해 내는 것, 미지의 존재를 상정해 친숙한 권위 (= 보편교회의 교리)로 부터 벗어나는 것, 명백한 진리로부터 숨겨진 비의로 돌아서는 것 등은 우리의 믿음을 바로 그 근본부터 위반하는 것이다. 이제 당신이 완전히 지어낸 우화 (= 그노시스 이단)에 입문한다고 했을때, 그들의 이야기들은 당신이 어렸을 때 좋아하던 유모가 라미아의 탑 (Λάμια, 제우스의 애인으로 헤라의 저주를 받아 자기 자식과 다른 아이들을 잡아먹는 요괴가 된 리비아의 여왕 / 필자 주)에 관해서 불러주던 자장가들과 유사하단 생각이 들진 않는가? / 번역: 최광민
Let, however, any man approach the subject from a knowledge of the faith which he has otherwise learned, as soon as he finds so many names of Æons, so many marriages, so many offsprings, so many exits, so many issues, felicities and infelicities of a dispersed and mutilated Deity, will that man hesitate at once to pronounce that these are "the fables and endless genealogies" which the inspired apostle by anticipation condemned, while these seeds of heresy were even then shooting forth? Deservedly, therefore, must they be regarded as wanting in simplicity, and as merely prudent, who produce such fables not without difficulty, and defend them only indirectly, who at the same time do not thoroughly instruct those whom they teach. This, of course, shows their astuteness, if their lessons are disgraceful; their unkindness, if they are honourable. As for us, however, who are the simple folk, we know all about it. In short, this is the very first weapon with which we are armed for our encounter; it unmasks and brings to view the whole of their depraved system. And in this we have the first augury of our victory; because even merely to point out that which is concealed with so great an outlay of artifice, is to destroy it. --- Tertulian, {Against the Valentinians.} [Tr. Dr. Roberts.], Chapter 3
그러나 누구든 그간 배워 온 신앙의 지식을 가지고 이 주제를 접근하게 되면, 그는 즉시 엄청난 수의 에온들과 그들의 결합과 그들의 자식과 탄생과 발출과 높고 낮은 위계들이 얼마나 많은 지와 그로인해 갈갈이 찢겨진 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당장 이 모든 것들이 이런 이단의 씨앗들이 태동하게 될 것은 사도들이 예견하고 정죄했듯 "우화와 끝없는 탄생"에 대한 것임을 말하길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 번역: 최광민
즉, 발렌티누스파의 이 '성자'는 정통파 보편교회가 가르친 성자=로고스=예수와 꽤 다른 존재로서, 뷔토스-시게 에온쌍으로 존재하는 성부/프로파토르처럼 성자도 양성적인 '누스-알레테이아 에온쌍'으로 존재하면서 남성적 에온인 '누스 (=정신)'는 종종 '모노게네스/독생자', '만물의 아버지'와 여성적 측면와 '알레테이아 (=진리)', '만물의 어머니'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원적인 신을 알 수 있는 것은 이 '성자'의 남성적인 측면에 속하는 에온인 누스 혹은 모노게네스이다.
그래서 아리우스가 앞에서 말한 '발렌티누스가 말한 성부로부터 성자의 발출 / 프로볼레'란 것은 이런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즉, 에온들이 2-에온체의 근원적 신으로부터 발출되어 나오는 것, 그 신과 근원은 같으나 (즉, 플레로마의 일원이나), 그 발출과정에서 나온 에온들은 그들의 아버지를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분리되는 것을 뜻한다.
# 안키라 주교 마르켈루스의 진술
그런데 니케아 회의 후 동일본질파를 가장 강력하게 대변했던 인물 가운데 하나인 안키라 주교 마르켈루스는 아리우스야 말로 발렌티누스파의 아류라며 공격한다.
논의에 앞서, 니케아 회의에서는 동일본질파에 섰던 마르켈루스가 왜 조금 뒤에 가서는 심지어 동일본질파로부터도 이단시 되었을까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알아두는 것이 중요하다.
AD 5세기의 교회사가인 소크라테스 스콜라티코스는 이렇게 진술한다. 이 내용은 마르켈루스를 정밀하게 반박한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의 논점을 간략히 진술한 것이다.
Chapter XXXVI.—Of Marcellus Bishop of Ancyra, and Asterius the Sophist.
The bishops assembled at Constantinople deposed also Marcellus bishop of Ancyra, a city of Galatia Minor, on this account. A certain rhetorician of Cappadocia named Asterius having abandoned his art, and professed himself a convert to Christianity, undertook the composition of some treatises, which are still extant, in which he commended the dogmas of Arius; asserting that Christ is the power of God, in the same sense as the locust and the palmer-worm are said by Moses to be the power of God,253 with other similar utterances. Now Asterius was in constant association with the bishops, and especially with those of their number who did not discountenance the Arian doctrine: he also attended their Synods, in the hope of insinuating himself into the bishopric of some city: but he failed to obtain ordination, in consequence of having sacrificed during the persecution.
Going therefore throughout the cities of Syria, he read in public the books which he had composed. Marcellus being informed of this, and wishing to counteract his influence, in his over-anxiety to confute him, fell into the diametrically opposite error; for he dared to say, as the Samosatene had done, that Christ was a mere man.
When the bishops then convened at Jerusalem had intelligence of these things, they took no notice of Asterius, because he was not enrolled even in the catalogue of ordained priests; but they insisted that Marcellus, as a priest, should give an account of the book which he had written. Finding that he entertained Paul of Samosata’s sentiments, they required him to retract his opinion; and he being thoroughly ashamed of himself, promised to burn his book. But the convention of bishops being hastily dissolved by the emperor’s summoning them to Constantinople, the Eusebians on their arrival at that city, again took the case of Marcellus into consideration; and as Marcellus refused to fulfil his promise of burning his untimely book, those present deposed him, and sent Basil into Ancyra in his stead. Moreover Eusebius wrote a refutation of this work in three books, in which he exposed its erroneous doctrine.
Marcellus however was afterwards reinstated in his bishopric by the Synod at Sardica, on his assurance that his book had been misunderstood, and that on that account he was supposed to favor the Samosatene’s views. But of this we shall speak more fully in its proper place. ---- NPNF2-02. Socrates Scholasticus, {Ecclesiastical Histories}
(준 -아리우스파) 주교들은 콘스탄티노플에서 회합을 갖고 소-갈라티아의 도시 안키라의 주교였던 마르켈루스의 지위를 박탈했다. 다음의 이유 때문이었다: 카파도키아에 아스테리우스라는 이름의 수사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나중에 수사학을 버리고 기독교도가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오늘날까지도 잘 남아있는 몇 편의 논문들을 썼는데, 이것은 아리우스의 주장들을 담았다. 즉, 그리스도는 신의 권능일 뿐이며.......[중략].....아스테리우스는 주교들과 계속하여 교류를 가졌는데, 특별히 아리우스의 교리를 거부하지 않았던 주교이 많았다. 아스테리우스는 주교회의에도 참석하면서 한 도시의 주교가 될 것을 기대했는데, 그가 박해 중 이교의 신에게 분향한 것이 드러나 성직을 받을 수 없었다.
그후 시리아의 도시들을 다니면서 자신이 쓴 책을 공개적으로 강독하였는데, 이 사실을 듣은 마르켈루스는 아스테리우스의 영향을 막고 그를 반박하려고 하다가, 결국은 정반대 쪽의 오류에 빠져들게 되었다. 즉, 마르켈루스는 감히 사모사타의 파울로스가 범한 오류처럼 그리스도는 그저 인간일 뿐이란 주장으로까지 나간 것이었다.
주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이런 점을 조사했는데 이때 성직자 명단에 등록되지 않은 아스테리우스의 문제는 다루지 않았다. 마르켈루스는 성직자 (사제)였기 때문에, 주교들은 그가 쓴 책들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마르켈루스가 사모사타의 파울로스의 논조로 주장을 펼친 것을 발견한 주교들은 마르켈루스에게 그 책들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마르켈루스는 완전히 망신을 당했고 자신의 책을 모두 소각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 회의는 황제가 급히 이들을 콘스탄티노플로 부르는 통에 서둘러 해산되었고, 그들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후에 (준-아리우스파 / 유사본질파)인 유세비우스파가 마르켈루스 건을 다루게 되었다. 마르켈루스가 자신의 설익은 주장을 담을 책들을 불태우겠다고 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그들은 마르켈루스의 지위를 박탈하고, 바실레이오스를 안키라 주교로 삼았다. 아울러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는 마르켈루스의 오류를 지적하는 세 권을 책을 썼다.
이후 마르켈루스는 사르디카에서 열린 주교회의를 통해 자신의 주교직 복귀를 주장했는데, 그는 이때 자신의 책이 오독되어 사모사타의 파울로스의 견해에 우호적인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보다 적절한 지면에서 면밀하게 이에 대해 다룰 것이다. --- 소크라테스 스콜라티쿠스, {교회사} / 번역: 최광민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는마르켈루스의 교리를 반박한 {마르켈루스 반박 Contra Marcellum}과 {교회의 신학에 관하여 Ecclesiastical Theology}를 저술했다. 그럼 왜 유세비우스는 마르켈루스가 AD 269년에 주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축출된 안티오키아 주교인 사모사타의 파울로스가 주창한 이단설에 따라 그리스도를 '단순한 인간'으로 간주했다고 비난한 것일까?
이미 AD 3세기 중반에 이단으로 정죄된 사모사타 출신 안티오키아 주교 파울로스의 주장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파울로스의 이해에 따르자면, 성부-성자-성령은 셋이 아닌 단 하나의 프로소폰/페르소나 ~ 휘포스타시스로 존재한다. 억지로 말하자면 1위 1체다. 성자 혹은 로고스는 따라서 독립된 휘포스타시스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지혜로서 성부 안에 존재한다. 이것은 마치 인간 안에 로고스/이성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이 세상의 창조 전에 로고스는 성자로 낳아졌는데, 그때의 로고스-성자는 형테도 없고 가시적이지도 않지만, 구약시대의 예언자 - 특별히 모세 -와 긴밀히 관계했고, 또 성령에 의해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인간 예수의 이성"으로 활동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부와 로고스-성자는 사실은 구분되지 않는 한 신이며, 로고스-성자가 직접 인간 예수로 성육신 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육체와 인간으로서의 개별적인 이성을 가진 예수의 이성과 정신으로서, 혹은 인간 예수의 정신과 합체하여 활동한 것이 된다. 그러기에 인간 예수는 기본적으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으로나 명백한 인간이지만, 성령으로서의 로고스-성자의 영향력 하에 그리스도로서 활동한 것이 된다. 그러니까 성부와 하나인 로고스-성자와는 달리, 인간 예수는 로고스-성자의 직접적인 성육신이라기 보다는 그 자체 인간으로서의 개인성을 여전히 가지는 것이 된다. 그 하나는 그저 인간으로서의 인간 예수이고, 또 하나는 인간 예수 위에 강림한 후 (실체적이 아니라 질적으로) 그와 연합한 로고스-성자이다. 이 둘 사이의 연합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의지가 일치하는 경우에만 존속된다. 이것이 사모사타의 파울로스가 펼친 주장이다. 동일본질파가 다시 보편교회의 정통파로 자리매김한 4세기 이후 다시 한번 교회를 결정적으로 분열시키게 되는 "네스토리우스 논쟁", 즉 예수의 신인양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 논쟁에서,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확연히 나누게 이해한 네스토리우스와 안티오키아 교회 측은 이후로도 지속하여 사모사타의 파울로스의 이단설과 유사하다는 의심을 받게 된다. 그 정반대쪽으로 이해하면 단성파로 가게 된다. "그 (=예수)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며 바울이 골로사이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 (골 2:9)의 구절을 극단으로 강조하면 양성파가, 요한의 복음서에 등장하는 "그 말씀/로고스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구절을 극단으로 강조하면 단성파적인 이해로 나아가게 된다. 즉, 전자의 이해는 "신이 인간(육체) 안에 거하였다"는 관점이, 후자는 "신이 인간(육체)가 되었다"는 관점이 각각 강조된 것이다. 칼케돈 신조는 이 양 극단을 조화시키려는 시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시리아와 동방 지역 70인의 주교들이 파울로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안티오키아 주교직을 박탈할 것을 결의한 AD 269년의 주교회의는 파울로스가 "동일본질 / 호모우스오스"란 용어의 사용을 금지했다. 물론 이 경우 "호모우스오스"의 정의는 니케아 회의가 결의한 동일한 단어와 그 의미와 해석이 전혀 다르다. 파울로스의 경우, 그는 이 용어를 성부-성자-성령이 "구분없이" 완전히 하나일 뿐이라는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가 마르켈루스를 비난한 것은 이런 배경이 있다. 유세비우스가 볼 때, 마르켈루스의 인간 예수는 그저 "(인간의) 육체에 (인간의) 영혼을 가진 단순한 인간으로, 보통 인간이 가진 본성과 조금도 구별할 수 없"는 존재이며, 다만 그의 정신만 신의 로고스의 지배를 받은 것이다 (유세비우스, {Ecclesiastical Theology} 1.20.7), 사모사타의 파울로스처럼 마르켈루스도 성부에게서 낳아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로고스-성자가 직접 그 자체로 신이자 인간인예수 그리스도로 성육신 한 것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세비우스는 이 점을 사모사타의 파울로스를 언급하면서 설명하는데, "그(=사모사타의 파울로스)은 마르켈루스처럼 예수를 신의 그리스도로 가르치고 또 한 분의 신에 대해서 가르치긴 했지만, 그리스도를 성자이면서 또한 육체로 오기 전에 이미 낳아진 자로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 교부들은 그의 가르침을 신의 교회에 낯선 주장 (=이단)" (유세비우스, {Ecclesiastical Theology} 1.14 )으로 간주했다고 진술한다.
유세비우스와 다른 교부들의 비판을 조금 쉽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마르켈루스는 성부-성자-성령은 영속적으로 구별되어 있는 휘포스타시스로 보지 않고, 일시적인 것으로 보았다.
- 마르켈루스는 인간이 되기 전의 성자는 '성자'가 아니라 '로고스'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 마르켈루스에 따르면 이 '로고스'는 사실은 성부와 구별되어 존재하지 않고 실제적으로 하나다.
- 보편교회는 성자가 세상의 창조 이전에 이미 '아들'로서 낳아져서 존재하였으며, 바로 그 성자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 예수로 세상에 왔다고 보는 반면, 마르켈루스의 입장에 따르자면, 인간이 되기 전에 로고스는 '아들'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성부와 일체인 로고스 였기 때문에, 인간 예수 위에 로고스가 성자로서 오기 전까지는 인간 예수는 그냥 인간일 뿐이다.
- 따라서 마르켈루스의 견해는 이단으로 이미 축출된 사모사타의 파울로스의 그리스도론과 유사하며, 성부와 로고스를 구분되지 않는 한 실체로 보았다는 점에서는 변형 양태론 혹은 변형 사벨리아누스 주의로 볼 수 있다.
마르켈루스가 이런 신론과 그리스도론을 가졌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의 아리우스 및 발렌티누스 비판을 읽어보면, 그의 의도를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발렌티누스의 '세 휘포스타시스 ὑπόστασις '와 '세 프로소폰 πρόσωπον'?
전해지는 단편들 가운데 (저자가 정말 마르켈루스인지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거룩한 교회에 관하여}를 발췌해 읽어보자.
동일본질파였던 (그러나 동일본질파 간에도 신학적 입장이 논란이 되었던) 안키라 주교 마르켈루스의 비난은 아리우스가 발렌티누스를 비판한 것과는 관점이 또 다르다. 아리우스파 지도자인 아스테리우스를 반박하면서, 마르켈루스는 바로 아리우스파야말로 발렌티누스의 이단설에 바탕했다고 맹공을 퍼붓는다.
1. 한 분의 신과 한 분의 신의 아들과, 한 분의 성령이 있기에, 한 인류와 한 세상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고, 하나의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와 하나의 세례 만이 세상에 존재할 뿐이다. 이것은 바울이 "한 신, 한 믿음, 한 세례"라고 말한 것과 같다....[중략].....3. 그러나 이단자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을 사도나 제자들에게서나 혹은 그들의 후임자들인 주교들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다. 그 집단들은 널리 퍼진 것이 아니라 국지적으로 산재하고 있으며, 거기서 악마는 그들을 속여 헛된 야망에 빠지게 하여 악마의 일을 심부름하는 지도자로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교회가 보편교회가 아닌 이유이다. 4. 유대교의 사두가이파는....6 시몬 (마구스 )의 추종자들로 그노시스....[중략]....라 불리는 자들도 서로가 서로를 베껴 새로운 교리를 만들며.....[중략]......7 이 모든 이단들은 헤르메스 (트리스메기토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이 오류를 가져온 것이다. 8 신의 교회를 타락시키는 아리우스파 이단...[중략]...은 또 세 위격 (τρεῖς ὑποστάσεις)을 가르치는데, 이것은 바로 {세 본성에 관하여}란 저작 속에서 이단의 괴수 발렌티누스가 처음 고안한 것이다. 그는 이 (=발렌티누스파 그노시스) 이단의 지도자인 발렌티누스는 그의 {세 본성에 관하여 Peri ton trion physeon}란 저작에서 세 존재 (위)의 개념을 처음 고안한 자다. 그는 세 휘포스타시스 (ὑπόστασις / τρεῖς ὑποστάσεις)와 세 프로소폰 (πρόσωπον / 복수 τρεῖς πρόσωπα)으로 존재하는 - 성부, 성자, 성령'이란 개념을 헤르메스와 플라톤으로부터 가져와 만들어 냈다. 10 또한 이것이 바로 그들이 (=아리우스파) 성부에 의해 태초의 만물 이전에 존재하게 된 두번째 신이란 개념을 만들게 된 계기다. 그들이 (=아리우스파) 선택한 지도자인 아스테리우스는 트리스메기토스라고도 불리는 헤르메스의 가르침을 따르기도 했다. (헤르메스 트리스메기토스는 / 필자 주) 의사인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말하길 "들어라, 아스클레피오스. 우리 관례로 신이라 부르는 주님이자 만물의 창조자는 이후 가시적이고 감지될 있는 두번째 신을 만들었다"라고 했다. 이 두번째 신의 개념으로부터 아스테리우스는 요한이 진술한 "독생한 아들"이 아닌 "독생한 신"의 개념을 만들어낸 것이다... [중략] ... 플라톤은 {고르기아스}에서 이런 식으로 말하고있다: "이 모든 것들은 지극히 필수적인 것들로서, 이 가장 아름답고 최선의 것을 만드신 창조자는 이것들을 취해 가변적인 것들을 만들었다. 이때 그는 자충적적이고 완벽한 아들을 낳았다". 또 같은 방식으로 아스테리우스는 말한다: "이 경우에 있어, 우리는 오직 하나의 불변하며, 태어나지 않았으며, 파괴될 수 없는 오직 한 형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이 존재는 그 본질을 다른 것에서 받지 않았음을과, 스스로 다른 형상들로 변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 존재는 불가시적이고 이해될 수 없는 존재이나, 이성적 사유자 (~로고스, 누스)는 그를 인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이름의 존재는 (~로고스, 누스)는 태어난 존재이며, 가시적이며, 변화되는 존재이다.....[중략]..., 또한 아리우스파는 성령을 경배/공경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성령을 거스려 모독하고 있다. 그들은 성령을 종이자 사환이라 부르며, 이런 불경스런 가르침을 (사마리아인 시몬 마구스의 스승)인 사두개 이단의 수괴인 도시테우스로부터 전수받아 무신론의 구덩이 속으로 삼켜졌다. ---- 안키라 주교 마르켈루스, {거룩한 교회에 관하여 De Sancta Ecclesia}, A.H.B. Logan, “Marcellus of Ancyra (Pseudo-Anthimus), On the Holy Church: Text, Translation and Commentary. Verses 8–9.”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NS, 51.1, April 2000:95 영어번역 전문에서 한국어로 중역 / 최광민
마르켈루스가 이 반박문을 작성한 시점은, 이미 이질본질파 (아리우스파)를 등에 엎은 유사본질파 (준-아리우스파)가 황제의 지지를 받아 동일본질파를 억압하던 때이다. AD 336년에 친-아리우스파가 우세한 예루살렘 주교회의에서 마르켈루스의 저작들이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AD 336년에는 친-아리우스파인 유사본질파의 좌장 니코메디아 주교 유세비우스가 주관한 콘스탄티노플 회의는 마르켈루스의 안키라 주교직을 박탈했다. AD 340년 로마 주교 율리우스 1세는 마르켈루스가 이단혐의에 대해 무고하다고 선언하며 그의 주교직을 다시 인준해 주려고 했고, AD 348년 콘스탄티누스의 두 아들 간 분쟁 와중에 이전에 동일본질파이기에 주교직을 박탈 당했던 아타나시우스와 마르켈루스 등은 일시적으로 주교직을 회복했다. 하지만 마르켈루스가 주교직에 복귀하는 것은 여러 해가 걸렸으며, AD 353년에 콘스탄티노플 측의 개입으로 바실레이오스에게 다시 자리를 빼앗긴다. 아울러 같은 동일본질파에 서 있던 측에서도 마르켈루스의 이단성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한때 마르켈루스를 지지했던 아타나시우스도 마침내 마르켈루스 (개인이라기 보다는 그의)의 교설을 정죄하는데 동참하게 된다.
아리우스파를 발렌티누스파와 연결짓는 마르켈루스의 논점을 정리해 보자.
- 아리우스파는 '세 휘포스타시스 τρεῖς ὑποστάσεις'를 가르친다. 이 경우, 성자와 성령은 성부에게서 분리된다.
- 바로 이 (즉, 성부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하는) 아리우스파의 '세 휘포스타시스'란 개념은 발렌티누스가 그의 {세 본성에 관하여}에서 처음 고안했다.
- 발렌티누스가 해석한 성부-성자-성령은 '세 휘포스타시스 τρεῖς ὑποστάσεις'와 '세 프로소폰 τρεῖς πρόσωπα'으로 존재한다.
- 이 개념은 이교 철학자인 헤르메스 트리메기토스와 플라톤에게서 온 것이다.
- 결과적으로 발렌티누스의 이 개념은 성자를 '두번 째 신'으로 만들어 신의 단일성을 파괴한다.
- 아리우스파는 성령을 천사보다는 위에 있으나 성부 및 성자에게 복속된 존재로 간주한다.
마르켈루스가 하고자 한 말은 꽤 분명하다. 아리우스파의 성부-성자-성령은 본질을 공유하지 않는 완전히 독립적인 셋으로 분리된다. 따라서 이것은 성부 >> 성자 >> 성령의 위계질서를 가진 세 신을 상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잠깐, 그럼 '세 휘포스타시스' 간의 관계에 대해 아리우스와 마르켈루스는 전혀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주의깊게 두 주장을 읽어보면, 둘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본질'과 '발출'에 대한 발렌티누스의 주장을 아리우스의 관점에서 비판한 것이다. 마르켈루스의 주장은 '성부-성자-성령'이란 세 휘포스타시스의 '구분'과 '분리'에 대한 발렌티누스의 주장을 비판한 것이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만약 발렌티누스처럼 '성자가 성부로부터 발출되었다'고 보게 되면 이는 성부와 성자가 본질을 공유하게 된다는 뜻이므로 (성부-성자-성령이 모두 다른 본질을 가진다고 보는 아리우스파의 입장에서는) 틀렸다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아리우스의 주장 대로라면 '세 휘포스타시스'는 완전히 다른 세 독립된 존재여야 한다
마르켈루스의 주장은 발렌티누스가 '세 휘포스타시스'와 '세 프로소폰' 개념을 만들었고 이 개념을 아리우스가 가져가서 '세개의 완전히 다른 휘포스타시스'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즉, 발렌티누스가 아리우스의 선구자란 뜻이 된다. 그것은 테르툴리아누스의 지적처럼, 발렌티누스의 존재유출설에서 에온들은 플레로마 안에서 근원적 신과 본질을 공유하더라도, 사실은 근원적 신과 결정적으로 끊어져 낮은 단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동일본질파에 의해서도 이단으로 정죄된 마르켈루스의 주장은, 삼위일체의 그 셋은 영원히 분리되어 나뉜 존재로서의 세 휘포스타시스가 아니라, 일시적으로만 나뉘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은 원래 한 존재 (모나드)이자 '한 휘포스타시스'로 존재하며 , 우주가 탄생될 때 비로소 로고스가 성부로부터 나와 신의 활동력으로서의 '성자'가 되었고, 이 로고스-성자가 나중에 인간이 될 때, 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20:22에 따라 성령도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와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종말이 오면, 성자와 성령 모두 성부로 돌아가 다시 신은 단일한 존재가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성부-성자-성령은 '영원한' 삼위일체가 아니라, 세상이 존속하는 동안에만 존재하는 형식의 신의 현현방식이다.
그러니까 마르켈루스의 입장에서 본다면 '세 휘포스타시스'가 존재하더라도 이것은 영속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즉, 마르켈루스는 논점은 두개로 나누어서 이해야 한다. 즉, 마르켈루스는 (1) 헤르메스 트리메기토스 - 플라톤 - 발렌티누스 -아리우스 모두 이렇게 (2) 완전히 나뉘어져 있는 (3) 영속적인 세 휘포스타시스로서 존재하는 성부-성자-성령을 가르친다며 비난하는 것이다.
바로 이 세번째 논점에서 마르켈루스는 니케아 신조에 동의한 동일본질파의 가르침에서도 벗어나 버렸다. 동일본질파는 삼위일체를 한 본질을 공유하는 영속적인 세 휘포스타시스로 여기기 때문이다.
# 발렌티누스의 {세 본성에 관하여}? {삼분론}?
각설하고,
그런데 마르켈루스의 글로 여겨지고 있는 이 문건을 이해하는데는 몇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우선, (1)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 가운데 발렌티누스가 '세 휘포스타시스'의 개념을 처음 고안했다는 내용을 담은 문건은 마르켈루스의 이 진술이 유일하다. (2) 마르켈루스가 발렌티누스의 저작이라고 언급하는 {세 본성에 관하여}란 저작은 현재 전하지 않으며, 그 저작이 발렌티누스의 것이라는 제 3의 증거는 없다.
우선, '휘포스타시스'란 용어 자체는 앞에서 말했다시피, {신약성서}에 이미 등장한다. 물론 그 의미는 후대에서처럼 정밀하게 정의되지 않은 상태로, 그저 '실체' 정도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한 '성부-성자-성령'을 구분되는 세 신적존재로 이해하는 것 역시 발렌티누스의 등장 이전에 이미 {신약성서}의 단서들에 따라 초기 교부들이 이해하고 있던 바였다.
그러므로 발렌티누스가 성부-성자-성령을 한 유닛으로 이해한 첫 인물인 것도 아니다. 아울러 발렌티누스가 로마에 체류하던 시절까지는 보편교회의 교리를 벗어난 신관을 가졌던 것으로 여겨질 교부들은 비판은 남아있지 않다. 즉, 발렌티누스의 교리 역시 기성의 보편교회의 교리에 기초를 두었다고 볼 이유는 충분하다. 테르툴리아누스 말대로, 발렌티누스는 성서는 그대로 놓아둔 채 그 위에 자신의 철학으로 성서와 용어와 나레이션을 재정의, 재구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우스의 '완전히 이질적이고 독립된 세 휘포스타시스'가 정말로 발렌티누스의 개념이었는지는 마르켈루스가 언급한 저작이 현존하지 않으므로 확인할 방법이 없다 .혹시 발렌티누스의 저작으로 여겨지는 {진리복음서}에 비슷한 개념이 있는지 살펴보자.
{진리 복음서}에는 성부-성자-성령에 언급되지만, 이 셋을 '세 휘포스타시스'와 비슷한 용어로 부르진 않는다. 그러나 여기 표현되는 성자와 성령이 성부의 '피조물'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마르켈루스는 발렌티누스가 {세 본성에 관하여 Peri ton trion physeon}란 책을 통해 '세 휘포스타시스'와 '세 프로소폰'의 개념을 창안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 책은 남아있지 않고 실제로 존재했는지조차 알 수 없다. 발렌티누스파의 저작들 가운데 저자 미상의 발렌티누스파 저작인 {Tripartite Tractate 삼분론}이 어쩌면 이와 가장 유사해 보이지만, 이 책은 성부-성자-성령을 세 휘포스타시스란 용어로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인간을 플라톤적 설명에 따라 영적-동물적-물질적 요소로 구성된 것으로 보는 '인간의 삼분론'이다.
AD 2세기 말의 이레네우스도 발렌티누스파의 이 삼분론에 대해 진술했다.
마르켈루스보다 50여 년전 인물이었던 테르툴리아누스도 발렌티누스파 및 기타 그노시스들의 이런 "철학"들을 비판하며,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플라톤 학파 (아카데미아)와 기독교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단자들과 기독교도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맹비난하며, 기독교 신학을 스토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뒤섞으려는 이단자들의 시도를 단호히 거부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세 휘포스타시스'라고는 불릴 수 있을 수도 있지만, 여전히 성부-성자-성령의 관계에 적용될 수는 없다. 발렌티누스는 물질적 인간은 이교도, 동물적/혼적 인간은 기성 기독교도, 영적 인간은 자파의 그노시스 신자로 간주했다.
발렌티누스파의 {삼분론} 또 이렇게 말한다.
§ 맺음말: 다시 휘포스타시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발렌티누스가 동일본질과 세 휘포스타시스를 바탕으로 하는 삼위일체론을 "창안"했고, 보편교회의 동일본질파가 이를 후대에 흡수해 정통교리로 만들었다"라는 주장은, 결국 발렌티누스파의 에온발출설에 사용된 "프로볼레"란 그리스어 단어와, 마르켈루스의 저작으로 간주되는 {거룩한 교회에 관하여}에 등장하는 "세 휘포스타시스, 세 프로소폰"이란 모호한 구절에서 온 것이다. 앞에서 설명했다시피, 발렌티누스의 '프로볼레'와 발렌티누스~아리우스의 '세 휘포스타시스'는 그 의미가 동일본질파 보편교회의 용례와 다르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고 위의 자료를 해석하면 잘못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정리해 보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성부-성자-성령을 피조세계에 속하지 않은 신적존재로서의 한 단위로 보는 것은 {신약성서}의 여러 구절을 종합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 있는 설명이다. 굳이 AD 2세기 중반의 발렌티누스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신약성서} 이외의 문서에서 이 경향은 이미 AD 1세기 말의 {디다케}나 예수의 제자 요한의 제자인 안티오키아 주교 이그나티오스의 글에 이미 등장한다.
에온의 발출에 관해 발렌티누스의 교리에 사용된 '발출'은, 이레네우스나 테르툴리아누스 등이 지적하는 것처럼 보편교회가 성자와 성령의 '발출'을 설명한 것과는 그 용례와 의미에서 큰 차이가 있다.
아리우스의 '완전히 이질적이고 독립된 세 휘포스타시스'가 정말로 발렌티누스의 개념이었는지는 마르켈루스가 언급한 저작이 현존하지 않으므로 확인할 방법이 없다 .혹시 발렌티누스의 저작으로 여겨지는 {진리복음서}에 비슷한 개념이 있는지 살펴보자.
The Father opens his bosom, but his bosom is the Holy Spirit. He reveals his hidden self which is his son, so that through the compassion of the Father the Aeons may know him, end their wearying search for the Father and rest themselves in him, knowing that this is rest.
.... 성부는 그의 가슴을 여시는데 그 가슴은 성령이다. 성부는 그의 숨은 자아를 내보이는데 그것은 성자이다. 성부의 자비로써 에온들은 이제 그를 인식할 수 있게 되며, 성부를 찾는 지친 방황을 마친 후 이것이 안식임을 깨닫고 성부 안에서 안식한다...... / 번역: 최광민
[중략]
Truth appeared; all its emanations knew it. They greeted the Father in truth with a perfect power that joins them with the Father. For, as for everyone who loves the truth - because the truth is the mouth of the Father; his tongue is the Holy Spirit - he who is joined to the truth is joined to the Father's mouth by his tongue, whenever he is to receive the Holy Spirit, since this is the manifestation of the Father, and his revelation to his aeons.
..... 진리는 성부의 입이며, 성부의 혀는 성령이기에,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 진리에 동참하는 자는 성령을 받을 때 성부의 혀 (=성령)를 통해 성부의 입 (=진리)에 연결된다. 이것이 성부의 현현이자, 그가 에온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 번역: 최광민
Now the name of the Father is the Son. It is he who first gave a name to the one who came forth from him, who was himself, and he begot him as a son. He gave him his name, which belonged to him; he is the one to whom belongs all that exists around him, the Father. His is the name; his is the Son. It is possible for him to be seen. The name, however, is invisible, because it alone is the mystery of the invisible, which comes to ears that are completely filled with it by him. For indeed, the Father's name is not spoken, but (rather,) it is apparent through a Son. --- Robert M. Grant, Gnosticism (Harper & Brothers, New York, 1961),
이제 성부의 이름은 성자이다. 성부는 자신으로부터 처음으로 나온 성자 -즉, 자기 자신에게 한 이름을 주었고, 그를 자신의 아들로 낳았다. 성부는 성자에게 자기 자신에게 속한 자기의 이름을 주었다. 성부는 존재하는 만물이 속해 있는 바로 그 분이다. 그 이름은 성부의 이름이다. 그의 이름은 성자이다. 성자를 보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 이름은 불가지하다, 왜냐하면 그 이름 자체는 불가지한 신비이며.........[중략] 진실로 성부의 이름은 발설되지 않지만, 그 이름은 성자를 통해 드러난다..... ---- 알렉산드리아의 발렌티누스(?) , {진리복음서} / 번역: 최광민
{진리 복음서}에는 성부-성자-성령에 언급되지만, 이 셋을 '세 휘포스타시스'와 비슷한 용어로 부르진 않는다. 그러나 여기 표현되는 성자와 성령이 성부의 '피조물'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마르켈루스는 발렌티누스가 {세 본성에 관하여 Peri ton trion physeon}란 책을 통해 '세 휘포스타시스'와 '세 프로소폰'의 개념을 창안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 책은 남아있지 않고 실제로 존재했는지조차 알 수 없다. 발렌티누스파의 저작들 가운데 저자 미상의 발렌티누스파 저작인 {Tripartite Tractate 삼분론}이 어쩌면 이와 가장 유사해 보이지만, 이 책은 성부-성자-성령을 세 휘포스타시스란 용어로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인간을 플라톤적 설명에 따라 영적-동물적-물질적 요소로 구성된 것으로 보는 '인간의 삼분론'이다.
AD 2세기 말의 이레네우스도 발렌티누스파의 이 삼분론에 대해 진술했다.
“These three kinds of existence then, having been formed—one from passion, which was matter; a second from conversion, which was animal (soul); and the third, that which she herself brought forth, which was spiritual.” ---- 이단반박. 1.5.1
이 세가지 형태의 존재는 이렇게 구성된다: (소피아의) 욕망에서 오는 것은 물질(적)이다. (소피아의) 회심에서 오는 것은 동물적 본성이다. 그리고 세번째로 소피아 자신으로부터 영적 본성이 온다 ---- 이레네우스, {이단반박} 1.5.1
마르켈루스보다 50여 년전 인물이었던 테르툴리아누스도 발렌티누스파 및 기타 그노시스들의 이런 "철학"들을 비판하며,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플라톤 학파 (아카데미아)와 기독교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단자들과 기독교도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맹비난하며, 기독교 신학을 스토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뒤섞으려는 이단자들의 시도를 단호히 거부했다.
These are the doctrines of men and of demons 1 Timothy 4:1 produced for itching ears of the spirit of this world's wisdom: this the Lord called foolishness, and chose the foolish things of the world to confound even philosophy itself. For (philosophy) it is which is the material of the world's wisdom, the rash interpreter of the nature and the dispensation of God. Indeed heresies are themselves instigated by philosophy. From this source came the Æons, and I known not what infinite forms, and the trinity of man in the system of Valentinus, who was of Plato's school. From the same source came Marcion's better god, with all his tranquillity; he came of the Stoics. Then, again, the opinion that the soul dies is held by the Epicureans; while the denial of the restoration of the body is taken from the aggregate school of all the philosophers; also, when matter is made equal to God, then you have the teaching of Zeno; and when any doctrine is alleged touching a god of fire, then Heraclitus comes in. The same subject-matter is discussed over and over again by the heretics and the philosophers; the same arguments are involved. Whence comes evil? Why is it permitted? What is the origin of man? And in what way does he come? Besides the question which Valentinus has very lately proposed— Whence comes God? Which he settles with the answer: From enthymesis and ectroma. Unhappy Aristotle! Who invented for these men dialectics, the art of building up and pulling down; an art so evasive in its propositions, so far-fetched in its conjectures, so harsh, in its arguments, so productive of contentions— embarrassing even to itself, retracting everything, and really treating of nothing! Whence spring those fables and endless genealogies, 1 Timothy 1:4 and unprofitable questions, Titus 3:9 and words which spread like a cancer? 2 Timothy 2:17 From all these, when the apostle would restrain us, he expressly names philosophy as that which he would have us be on our guard against. Writing to the Colossians, he says, See that no one beguile you through philosophy and vain deceit, after the tradition of men, and contrary to the wisdom of the Holy Ghost. He had been at Athens, and had in his interviews (with its philosophers) become acquainted with that human wisdom which pretends to know the truth, while it only corrupts it, and is itself divided into its own manifold heresies, by the variety of its mutually repugnant sects. What indeed has Athens to do with Jerusalem? What concord is there between the Academy and the Church? What between heretics and Christians? Our instruction comes from the porch of Solomon, who had himself taught that the Lord should be sought in simplicity of heart. Wisdom 1:1 Away with all attempts to produce a mottled Christianity of Stoic, Platonic, and dialectic composition! We want no curious disputation after possessing Christ Jesus, no inquisition after enjoying the gospel! With our faith, we desire no further belief. For this is our palmary faith, that there is nothing which we ought to believe besides. ---- Prescription against Heretics. Chapter 7.
물론 이것은 인간의 '세 휘포스타시스'라고는 불릴 수 있을 수도 있지만, 여전히 성부-성자-성령의 관계에 적용될 수는 없다. 발렌티누스는 물질적 인간은 이교도, 동물적/혼적 인간은 기성 기독교도, 영적 인간은 자파의 그노시스 신자로 간주했다.
발렌티누스파의 {삼분론} 또 이렇게 말한다.
“Mankind came to be in three essential types, the spiritual, the psychic, and the material, conforming to the triple disposition of the Logos, from which were brought forth the material ones and the psychic ones and the spiritual ones. Each of the three essential types is known by its fruit. And they were not known at first but only at the coming of the Savior, who shone upon the saints and revealed what each was.
인간은 세 종류의 근본적인 유형인, 영적, 혼적, 물질적 유형으로 존재하는데, 이는 물질적, 혼적, 영적인 유형이 유래하는 로고스의 삼중상태에 대응한다. 이 세 유형의 인간은 각자의 열매로서 알 수 있다. 처음부터 이 세 종류의 인간들이 알려져 있던 것은 아니며, 성도들에게 빛을 비추고 각자가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를 드러내 보인 구원자가 도래한 후에야 알려지게 된 것이다.
The spiritual race, being like light from light and like spirit from spirit, when its head appeared, it ran toward him immediately. It immediately became a body of its head. It suddenly received knowledge in the revelation.
영적 인간은 빛에서 유래한 빛이며, 영에서 온 영 같아서, 그 머리가 나타날 때 즉시 그 (로고스)에게로 달려와 한 몸이 된다. 영적 인간은 계시 안에 있는 지식 (그노시스)를 갑자기 받아들이게 된다.
The psychic race is like light from a fire, since it hesitated to accept knowledge of him who appeared to it. (It hesitated) even more to run toward him in faith. Rather, through a voice it was instructed, and this was sufficient, since it is not far from the hope according to the promise, since it received, so to speak as a pledge, the assurance of the things which were to be.
혼적 인간은 불에서 온 빛과 같은데, 이것은 그에게 나타나는 로고스의 지식 (그노시스)을 받아들이길 주저하기 때문이다. 믿음 안에서 그에게 달려가는 것은 더 주저하게 된다. .......
The material race, however, is alien in every way; since it is dark, it shuns the shining of the light, because its appearance destroys it. And since it has not received its unity, it is something excessive and hateful toward the Lord at his revelation.
물질적 인간은 모든 면에서 다르다. 어둠이기에 비춰지는 빛을 피하는데, 빛은 어둠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합일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주님이 그 계시 가운데 나타날 때 그에게로 다가가길 피하고 혐오한다.
The spiritual race will receive complete salvation in every way. The material will receive destruction in every way, just as one who resists him. The psychic race, since it is in the middle when it is brought forth and also when it is created, is double according to its determination for both good and evil.” ----- {Tripartite Tractate} 118
영적 인간은 모든 면에서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 물질적 인간은 로고스에게 저항했기에 모든 면에서 멸망당하게 된다. 혼적인간은 태어나고 피조되었을 때 중간상태에 있으므로, 선과 악의 결정에 있어 이중적이다 --- 저자 미상, {삼분론} / 번역: 최광민
§ 맺음말: 다시 휘포스타시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발렌티누스가 동일본질과 세 휘포스타시스를 바탕으로 하는 삼위일체론을 "창안"했고, 보편교회의 동일본질파가 이를 후대에 흡수해 정통교리로 만들었다"라는 주장은, 결국 발렌티누스파의 에온발출설에 사용된 "프로볼레"란 그리스어 단어와, 마르켈루스의 저작으로 간주되는 {거룩한 교회에 관하여}에 등장하는 "세 휘포스타시스, 세 프로소폰"이란 모호한 구절에서 온 것이다. 앞에서 설명했다시피, 발렌티누스의 '프로볼레'와 발렌티누스~아리우스의 '세 휘포스타시스'는 그 의미가 동일본질파 보편교회의 용례와 다르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고 위의 자료를 해석하면 잘못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정리해 보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성부-성자-성령을 피조세계에 속하지 않은 신적존재로서의 한 단위로 보는 것은 {신약성서}의 여러 구절을 종합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 있는 설명이다. 굳이 AD 2세기 중반의 발렌티누스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신약성서} 이외의 문서에서 이 경향은 이미 AD 1세기 말의 {디다케}나 예수의 제자 요한의 제자인 안티오키아 주교 이그나티오스의 글에 이미 등장한다.
에온의 발출에 관해 발렌티누스의 교리에 사용된 '발출'은, 이레네우스나 테르툴리아누스 등이 지적하는 것처럼 보편교회가 성자와 성령의 '발출'을 설명한 것과는 그 용례와 의미에서 큰 차이가 있다.
발렌티누스의 발출은 설령 그 에온들이 성부로부터 유래했고 성부와 동일한 질료과 본성으로 구성되기에 신적인 충만=플레로마 안에 존속되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성부로부터 분리되어 낮은 단계로 떨어져 버리는 형태의 발출이다. 발렌티누스파의 입장에서 발출된 에온은 그 근원인 성부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니케아 신조에 따르는 보편교회는 발출된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성부-성자-성령이 상호 간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이것이 AD 3세기 초반까지의 보편교회를 대변하는 이레네우스와 테르툴리아누스가 발렌티누스의 발출 개념을 비판하면서 지적한 점이다. 그래서 발렌티누스의 에온발출설에 따른 에온은 그 본질은 성부에게서 오나 성부와 분리된 결국 낮은 등급으로서의 개별적 존재자들이다.
한편, 아리우스의 세 휘포스타시스는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본질을 공유하지 않는, 즉 서로 완전히 다른 본질에 속한, 완전히 다른 독립적 세 존재이다.
마르켈루스에게 있어서의 신의 휘포스타시스는 성부-성자-성령이 한 본질을 가지나 영속적으로서의 셋이 아닌 한시적으로만 셋으로, 궁극적으로 신은 한 휘포스타시스 만을 가지게 된다.
반면, (최소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따르는) 보편교회가 인식하는 세 휘포스타시는 한 본질 = 한 우시아 안에 참여하는, 셋으로 구분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리되지 않고 긴밀히 연결된 성부-성자-성령을 뜻한다. 이 개념은 니케아 회의 후 1-2세대 안에 카파도키아 교부들이 더욱 정밀하게 정의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리우스 논쟁과 네스토리우스 논쟁 등을 거치며 확립된 동일본질파 보편교회의 대표적인 신조 셋을 차례로 읽어보고, 이 신조에 설명된 우시아와 휘포스타시스가 발렌티누스나 아리우스나 마르켈루스의 용례와 어떻게 다른지 확인해 보자.
AD 325년 니케아 회의의 결의를 담은 {니케아 신조}다.
아래는 {니케아 신조}에서 보완된 AD 381년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전문이다. 니케아 회의의 주제가 성부-성자의 관계에 집중되었기에 성령에 대한 언급은 한 줄로만 요약되었다, 이 신조에서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성령에 관한 설명을 삽입했다.
아래는 AD 500년 경의 {아타나시우스 신조}다. 이 신조는 고대의 신조 가운데 아리우스파의 입장을 가장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
여전히 발렌티누스가 '삼위일체' 개념을 창안했고, 이 개념을 기독교 교부들 (특히 이레네우스나 테르툴리아누스가) 교묘히 수정한 후 보편교회의 핵심교리로 흡수/표절했다고 생각되는가?
판단은 각자의 몫.
草人
한편, 아리우스의 세 휘포스타시스는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본질을 공유하지 않는, 즉 서로 완전히 다른 본질에 속한, 완전히 다른 독립적 세 존재이다.
마르켈루스에게 있어서의 신의 휘포스타시스는 성부-성자-성령이 한 본질을 가지나 영속적으로서의 셋이 아닌 한시적으로만 셋으로, 궁극적으로 신은 한 휘포스타시스 만을 가지게 된다.
반면, (최소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따르는) 보편교회가 인식하는 세 휘포스타시는 한 본질 = 한 우시아 안에 참여하는, 셋으로 구분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리되지 않고 긴밀히 연결된 성부-성자-성령을 뜻한다. 이 개념은 니케아 회의 후 1-2세대 안에 카파도키아 교부들이 더욱 정밀하게 정의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리우스 논쟁과 네스토리우스 논쟁 등을 거치며 확립된 동일본질파 보편교회의 대표적인 신조 셋을 차례로 읽어보고, 이 신조에 설명된 우시아와 휘포스타시스가 발렌티누스나 아리우스나 마르켈루스의 용례와 어떻게 다른지 확인해 보자.
AD 325년 니케아 회의의 결의를 담은 {니케아 신조}다.
Πιστεύομεν εἰς ἕνα θεὸν Πατέρα παντοκράτορα, πάντων ὁρατῶν τε και ἀοράτων ποιητήν. Πιστεύομεν εἰς ἕνα κύριον Ἰησοῦν Χριστόν, τὸν υἱὸν τοῦ θεοῦ, γεννηθέντα ἐκ τοῦ Πατρὸς μονογενῆ, τοὐτέστιν ἐκ τῆς οὐσίας τοῦ Πατρός, θεὸν ἐκ θεοῦ ἀληθινοῦ, γεννηθέντα, οὐ ποιηθέντα, ὁμοούσιον τῷ Πατρί δι' οὗ τὰ πάντα ἐγένετο, τά τε ἐν τῷ οὐρανῷ καὶ τὰ ἐπὶ τῆς γῆς τὸν δι' ἡμᾶς τοὺς ἀνθρώπους καὶ διὰ τὴν ἡμετέραν σωτηρίαν κατελθόντα καὶ σαρκωθέντα καὶ ἐνανθρωπήσαντα, παθόντα, καὶ ἀναστάντα τῇ τρίτῃ ἡμέρᾳ, καὶ ἀνελθόντα εἰς τοὺς οὐρανούς, καὶ ἐρχόμενον κρῖναι ζῶντας καὶ νεκρούς. αὶ εἰς τὸ Ἅγιον Πνεῦμα Τοὺς δὲ λέγοντας, ὅτι ἦν ποτε ὅτε οὐκ ἦν, καὶ πρὶν γεννηθῆναι οὐκ ἦν, καὶ ὅτι ἐξ οὐκ ὄντων ἐγένετο, ἢ ἐξ ἑτέρας ὑποστάσεως ἢ οὐσίας φάσκοντας εἶναι, [ἢ κτιστόν,] τρεπτὸν ἢ ἀλλοιωτὸν τὸν υἱὸν τοῦ θεοῦ, [τούτους] ἀναθεματίζει ἡ καθολικὴ [καὶ ἀποστολικὴ] ἐκκλησία.
Credimus in unum Deum patrem omnipotentem, omnium visibilium et invisibilium factorem. Et in unum Dominum nostrum Jesum Christum filium Dei, natum ex Patre unigenitum, hoc est, de substantia Patris, Deum ex Deo, lumen ex lumine, Deum verum de Deo vero, natum non factum, unius substantiae cum Patre, quod graece dicunt homousion, per quem omnia facta sunt quae in coelo et in terra, qui propter nostram salutem descendit, incarnatus est, et homo factus est, et passus est, et resurrexit tertia die, et adscendit in coelos, venturus judicare vivos et mortuos. Et in Spiritum sanctum. Eos autem, qui dicunt, Erat quando non erat, et ante quam nasceretur non erat, et quod de non exstantibus factus est, vel ex alia substantia aut essentia, dicentes convertibilem et demutabilem Deum: hos anathematizat catholica Ecclesia.
We believe in one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all things visible and invisible And in one Lord Jesus Christ, the Son of God, begotten of the Father [the only-begotten; that is, of the essence of the Father, God of God,] Light of Light, very God of very God, begotten, not made, being of one substance with the Father; By whom all things were made [both in heaven and on earth]; Who for us men, and for our salvation, came down and was incarnate and was made man; He suffered, and the third day he rose again, ascended into heaven;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And in the Holy Spirit. But those who say that: "There was a time when He was not;" and "He was not before He was made;" and "He was made out of nothing," or "He is of another substance" or "essence," or "The Son of God is created," or "changeable," or "alterable" - they are condemned by the Holy Orthodox and Universal Apostolic Church.
우리는 한 분의 신, 성부, 전능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만드신 이를 믿는다. 또 한 분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 성부로부터 특유하게 나셨고, 성부의 본질 (즉, ousia)로부터 낳아진 '신에게서 오신 신'이시요 '빛에서 오신 빛'이시며, '참된 신에게서 오신 참된 신'으로서, 낳아지셨으나 피조되지는 아니하였고, 성부와 동일한 본질 (homousios)이시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를 통하여 만들어졌다. 그는 우리 인간들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강림하여 육체를 입고 사람이 되셨다. 고난을 받고 사흘 만에 부활하여 승천하셨고, 장차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우리는 또한 성령을 믿는다. 그러나 보편적 (카톨릭)이며 사도적인 교회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자들을 정죄한다: 즉, 성자가 계시지 않은 때가 있었다고 말하는 자들, 그가 (세상의 창조 이전에 성부로부터 / 필자 주) 태어나시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자들, 그가 무로부터 생겨나셨다고 말하는 자들, 신의 아들이 어떤 다른 물질이나 본질로부터 유래했다거나 창조되었다거나 변할 수 있다거나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번역: 최광민
아래는 {니케아 신조}에서 보완된 AD 381년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전문이다. 니케아 회의의 주제가 성부-성자의 관계에 집중되었기에 성령에 대한 언급은 한 줄로만 요약되었다, 이 신조에서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성령에 관한 설명을 삽입했다.
Πιστεύομεν εἰς ἕνα Θεὸν Πατέρα παντοκράτορα ποιητὴν οὐρανοῦ καὶ γῆς ὁρατῶν τε πάντων καὶ ἀοράτων καὶ εἰς ἕνα Κύριον Ἰησοῦν Χριστὸν τὸν υἱὸν τοῦ Θεοῦ τὸν Μονογενῆ, τὸν ἐκ τοῦ Πατρὸς γεννηθέντα πρὸ πάντων τῶν αἰώνων, Φῶς ἐκ Φωτός, Θεὸν ἀληθινὸν ἐκ Θεοῦ ἀληθινοῦ, γεννηθέντα οὐ ποιηθέντα, ὁμοούσιον τῷ Πατρί, δι' οὗ τὰ πάντα ἐγένετο·τὸν δι' ἡμᾶς τοὺς ἀνθρώπουςκαὶ διὰ τὴν ἡμετέραν σωτηρίαν κατελθόντα ἐκ τῶν οὐρανῶν, καὶ σαρκωθέντα ἐκ Πνεύματος Ἁγίου καὶ Μαρίας τῆς παρθένου, καὶ ἐνανθρωπήσαντα, σταυρωθέντα τε ὑπὲρ ἡμῶν ἐπὶ Ποντίου Πιλάτου, καὶ παθόντα, καὶ ταφέντα, καὶ ἀναστάντα τῇ τρίτῃ ἡμέρᾳ κατὰ τὰς γραφὰς, καὶ ἀνελθόντα εἰς τοὺς οὐρανοὺς, καὶ καθεζόμενον ἐν δεξιᾷ τοῦ Πατρὸς, καὶ πάλιν ἐρχόμενον μετὰ δόξης κρῖναι ζῶντας καὶ νεκρούς, οὗ τῆς βασιλείας οὐκ ἔσται τέλος· καὶ εἰς τὸ Πνεῦμα τὸ Ἅγιον, τὸ Κύριον καὶ Ζωοποιόν, τὸ ἐκ τοῦ Πατρὸς ἐκπορευόμενον, τὸ σὺν Πατρὶ καὶ Υἱῷ συμπροσκυνούμενον καὶ συνδοξαζόμενον, τὸ λαλῆσαν διὰ τῶν προφητῶν·εἰς μίαν ἁγίαν καθολικὴν καὶ ἀποστολικὴν ἐκκλησίαν ὁμολογοῦμεν ἓν βάπτισμα εἰς ἄφεσιν ἁμαρτιῶν·προσδοκῶμεν ἀνάστασιν νεκρῶν, καὶ ζωὴν τοῦ μέλλοντος αἰῶνος. ἀμήν.
Credimus in unum Deum, Patrem omnipotentem, factorem coeli et terrae, visibilium omnium et invisibilium, et in unum Dominum Jesum Christum, Filium Dei unicum,de Patre natum ante omnia saecula;Deum verum de Deo vero; natum, non factum; ejusdemque substantiae qua Pater est; per quem omnia facta sunt;qui propter nos homines et propter nostram salutem descendit, incarnatus est de Spiritu sancto, in Maria virgine homo factus, crucifixus pro nobis sub Pontio Pilato, sepultus, resurrexit tertia die, ascendit ad coelos, sedet ad dexteram Patris;inde venturus est cum gloria judicare vivos ac mortuos, cujus regni non erit finis. Et in Spiritum sanctum, ominum ac vivificatorema Patre procedentem, qui cum Patre et Filio adoratur et glorificatur, qui locutus est per Prophetas;in unam catholicam atque apostolicam Ecclesiam. Confitemur unum baptismum in remissionem peccatorum; speramus resurrectionem mortuorum, vitam futuri saeculi. Amen.
We believe in one God, the Father, the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of all that is, seen and unseen. And [we believe] in one Lord, Jesus Christ, the only-begotten Son of God, eternally begotten of the Father, Light from Light, true God from true God, begotten, not made, of one being with the Father. Through him all things were made. For us, humans, and for our salvation, he came down from heaven, was incarnate of the Holy Spirit and the virgin Mary, and became fully human. For our sake he was crucified under Pontius Pilate. He suffered death and was buried. He rose again on the third day in accordance with the Scriptures. He ascended into heaven and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He will come again in glory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and his kingdom will have no end. And [we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Lord, the giver of life, who proceeds from the Father, who in unity with the Father and the Son is worshiped and glorified, who has spoken through the prophets. [We believe] in one holy universal and apostolic Church. We acknowledge one baptism for the forgiveness of sins. We look for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the life of the world to come. Amen.
우리는 한 분이신 신, 전능하신 성부, 하늘과 땅과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만물을 창조한 분을 믿는다. 또한 한 분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 신의 독생자, 세상 이전에 성부로부터 나신 자, 빛으로부터의 빛, 참 신으로부터의 참 신이시며 (Deum verum de Deo vero), (성부가) 낳으시되 피조되지 않으셨고,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셨다 (ὁμοούσιον τῷ Πατρί / ejusdemque substantiae qua Pater est). 그는 만물이 생겨나게 하셨고, 우리 인간을 위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와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육체를 입어 사람이 되셨고,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 고난받으시고 무덤에 들어가셨다가, 성서대로 3일 만에 부활/승천하여 성부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장차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하여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성령을 믿으니, 성령은 주님이며 생명을 주시는 자로, 성부로부터 나오시며 (ἐκπορευόμενον /procedentem), 곧 성부 및 성자와 함께 경배받으시며, 함께 영광을 받으실 분이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해 오신 분이다. 우리는 거룩하고 보편적인 (카톨릭) 사도적인 하나의 교회를 믿는다. 우리는 죄의 용서을 위한 한 세례를 고백한다.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과 다가올 세상에서의 삶을 기다린다. 아멘. --- 번역: 최광민
아래는 AD 500년 경의 {아타나시우스 신조}다. 이 신조는 고대의 신조 가운데 아리우스파의 입장을 가장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
Quicunque vult salvus esse, ante omnia opus est, ut teneat catholicam fidem: Quam nisi quisque integram inviolatamque servaverit, absque dubio in aeternam peribit. Fides autem catholica haec est: ut unum Deum in Trinitate, et Trinitatem in unitate veneremur. Neque confundentes personas, neque substantiam seperantes. Alia est enim persona Patris alia Filii, alia Spiritus Sancti: Sed Patris, et Fili, et Spiritus Sancti una est divinitas, aequalis gloria, coeterna maiestas. Qualis Pater, talis Filius, talis [et] Spiritus Sanctus. Increatus Pater, increatus Filius, increatus [et] Spiritus Sanctus. Immensus Pater, immensus Filius, immensus [et] Spiritus Sanctus. Aeternus Pater, aeternus Filius, aeternus [et] Spiritus Sanctus. Et tamen non tres aeterni, sed unus aeternus. Sicut non tres increati, nec tres immensi, sed unus increatus, et unus immensus. Similiter omnipotens Pater, omnipotens Filius, omnipotens [et] Spiritus Sanctus. Et tamen non tres omnipotentes, sed unus omnipotens. Ita Deus Pater, Deus Filius, Deus [et] Spiritus Sanctus. Et tamen non tres dii, sed unus est Deus. Ita Dominus Pater, Dominus Filius, Dominus [et] Spiritus Sanctus. Et tamen non tres Domini, sed unus [est] Dominus. Quia, sicut singillatim unamquamque personam Deum ac Dominum confiteri christiana veritate compelimur: Ita tres Deos aut [tres] Dominos dicere catholica religione prohibemur. Pater a nullo est factus: nec creatus, nec genitus. Filius a Patre solo est: non factus, nec creatus, sed genitus. Spiritus Sanctus a Patre et Filio: non factus, nec creatus, nec genitus, sed procedens. Unus ergo Pater, non tres Patres: unus Filius, non tres Filii: unus Spiritus Sanctus, non tres Spiritus Sancti. Et in hac Trinitate nihil prius aut posterius, nihil maius aut minus: Sed totae tres personae coaeternae sibi sunt et coaequales. Ita, ut per omnia, sicut iam supra dictum est, et unitas in Trinitate, et Trinitas in unitate veneranda sit. Qui vult ergo salvus esse, ita de Trinitate sentiat. Sed necessarium est ad aeternam salutem, ut incarnationem quoque Domini nostri Iesu Christi fideliter credat. Est ergo fides recta ut credamus et confiteamur, quia Dominus noster Iesus Christus, Dei Filius, Deus [pariter] et homo est. Deus [est] ex substantia Patris ante saecula genitus: et homo est ex substantia matris in saeculo natus. Perfectus Deus, perfectus homo: ex anima rationali et humana carne subsistens. Aequalis Patri secundum divinitatem: minor Patre secundum humanitatem. Qui licet Deus sit et homo, non duo tamen, sed unus est Christus. Unus autem non conversione divinitatis in carnem, sed assumptione humanitatis in Deum. Unus omnino, non confusione substantiae, sed unitate personae. Nam sicut anima rationalis et caro unus est homo: ita Deus et homo unus est Christus. Qui passus est pro salute nostra: descendit ad inferos: tertia die resurrexit a mortuis .Ascendit ad [in] caelos, sedet ad dexteram [Dei] Patris [omnipotentis]. Inde venturus [est] judicare vivos et mortuos. Ad cujus adventum omnes homines resurgere habent cum corporibus suis; Et reddituri sunt de factis propriis rationem. Et qui bona egerunt, ibunt in vitam aeternam: qui vero mala, in ignem aeternum. Haec est fides catholica, quam nisi quisque fideliter firmiterque crediderit, salvus esse non poterit.
Whosoever will be saved, before all things it is necessary that he hold the catholic faith; Which faith except every one do keep whole and undefiled, without doubt he shall perish everlastingly. And the catholic faith is this: That we worship one God in Trinity, and Trinity in Unity; Neither confounding the persons nor dividing the substance. For there is one person of the Father, another of the Son, and another of the Holy Spirit.6. But the Godhead of the Father,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is all one, the glory equal, the majesty coeternal. Such as the Father is, such is the Son, and such is the Holy Spirit. The Father uncreated, the Son uncreated, and the Holy Spirit uncreated. The Father incomprehensible, the Son incomprehensible, and the Holy Spirit incomprehensible. The Father eternal, the Son eternal, and the Holy Spirit eternal. And yet they are not three eternals but one eternal. As also there are not three uncreated nor three incomprehensible, but one uncreated and one incomprehensible. So likewise the Father is almighty, the Son almighty, and the Holy Spirit almighty. And yet they are not three almighties, but one almighty. So the Father is God, the Son is God, and the Holy Spirit is God; And yet they are not three Gods, but one God. So likewise the Father is Lord, the Son Lord, and the Holy Spirit Lord; And yet they are not three Lords but one Lord. For like as we are compelled by the Christian verity to acknowledge every Person by himself to be God and Lord; So are we forbidden by the catholic religion to say; There are three Gods or three Lords. The Father is made of none, neither created nor begotten. The Son is of the Father alone; not made nor created, but begotten. The Holy Spirit is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neither made, nor created, nor begotten, but proceeding. So there is one Father, not three Fathers; one Son, not three Sons; one Holy Spirit, not three Holy Spirits. And in this Trinity none is afore or after another; none is greater or less than another. But the whole three persons are coeternal, and coequal. So that in all things, as aforesaid, the Unity in Trinity and the Trinity in Unity is to be worshipped. He therefore that will be saved must thus think of the Trinity. Furthermore it is necessary to everlasting salvation that he also believe rightly the incarnation of our Lord Jesus Christ. For the right faith is that we believe and confess that our Lord Jesus Christ, the Son of God, is God and man. God of the substance of the Father, begotten before the worlds; and man of substance of His mother, born in the world. Perfect God and perfect man, of a reasonable soul and human flesh subsisting. Equal to the Father as touching His Godhead, and inferior to the Father as touching His manhood. Who, although He is God and man, yet He is not two, but one Christ. One, not by conversion of the Godhead into flesh, but by taking of that manhood into God. One altogether, not by confusion of substance, but by unity of person. For as the reasonable soul and flesh is one man, so God and man is one Christ; Who suffered for our salvation, descended into hell, rose again the third day from the dead; He ascended into heaven, He sits on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God, Almighty;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At whose coming all men shall rise again with their bodies; and shall give account of their own works. And they that have done good shall go into life everlasting and they that have done evil into everlasting fire. This is the catholic faith, which except a man believe faithfully he cannot be saved.
구원을 바라는 자는 무엇보다 먼저 (교회의 / 필자 주) 보편적 신앙 가져야 한다. 이 신앙을 온전하고 완전하게 지키지 않는 자는 반드시 영원히 멸망받을 것이다. 보편적 신앙이 가르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삼위로서 일체이며 일체 가운데 삼위이신, 유일한 신을 믿는다. 이 삼위 (= personae = 휘포스타시스)는 혼합되지 않으며, 그 본질 (= substantia = 우시아)이 나뉘지도 않는다. 성부의 한 위와 성자의 한 위, 또한 성령의 또 다른 한 위가 각각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격은 모두 하나요, 그 영광도 동일하며, 그 위엄도 함께 영원하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각 존재한다. 성부가 창조되지 않았듯, 성자도 창조되지 않았으며, 또한 성령도 창조되지 않았다. 성부가 온전히 이해될 수 없는 존재이듯, 성자도 온전히 이해될 수 없고, 성령도 온전히 이해될 수 없다. 성부가 영원하듯, 성자도 영원하며, 또 성령도 영원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영원한 세 분의 존재들이 아니며, 영원한 한 존재이다.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 피조되지 않은 세 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피조되지도 않고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단 한 신만이 계신다. 성부가 전능하듯, 성자와 성령도 전능하다. 그러나 전능한 세 신이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전능한 한 신이 있을 뿐이다. 성부가 신이시듯, 성자도, 또 성령도 신이다. 그럼에도 세 신이 아니라, 한 신만이 존재할 뿐이다. 성부가 주님이듯, 성자도, 또 성령도 주님이다. 그럼에도 주님은 세 분의 주님이 아니라 한 주님일 뿐이다. 우리는 각각의 삼위가 신이며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기독교의 진리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기독교도는 "세 신이 계시며 세 분 주님이 계시다"고 해서는 않된다. 성부는 그 무엇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즉, 창조된 것이 아니며, 태어나지도 않으셨다. 성자는 성부가 낳으셨고, 지음을 받았거나 창조되신 것이 아니며, 성부에 의해 낳아진 것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지만, 지음을 받았거나 창조되었거나 발생된 것이 아니며,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는 것이다. 따라서 세 성부가 아닌 한 성부, 세 성자가 아닌 한 성자, 세 성령이 아닌 한 성령만이 있을 뿐이다. 이 삼위에 있어서 그 어느 한 위가 다른 한 위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한 것이 아니며, 어느 한 위가 다른 위보다 크거나 작지도 않다. 다만 삼위가 함께 영원하며 동등하다. 따라서 전술된 바와 같이, 삼위로서의 일체와, 일체로서의 삼위가 모든 면에서 경배를 받아야 한다. 따라서 구원을 바라는 자들은 삼위일체에 관하여 이와 같이 믿어야 한다. 또한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해 바르게 믿어야 한다. 바른 믿음이란, 신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신인 동시에 인간이라는 점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는 성부의 본질에서 나신 신이시며, 이 세상이 생기기 전에 나신 자요, 동시에 인간으로서는 그 어머니의 본질로부터 이 세상에서 나신 분이시다. 그는 완전한 신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으로서, 이성있는 영과 인간의 육신으로서 존재한다. 신성으로는 성부와 동등하나 그의 인성으로는 성부보다 낮다. 비록 그가 신이며 동시에 인간이시기도 하나, 둘이 아니요 한 그리스도이다. 이처럼 둘이 하나 되는데 있어 그 신성이 육체로 바뀐 것이 아니라, 인성을 신성 안에 받아 신이 되신다. 그의 본질은 혼합된 것이 아니라 품격 (=신성과 인성)이 온전하게 하나로 통일된 존재이다. 한 인간이 영혼과 육체를 가지듯, 그리스도는 신인 동시에 인간이 되신다. 그는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승천하여 전능한 성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거기에서 오실 것이다. 그가 다시 올 때 모든 사람들이 육체로 부활할 것이며, 그들 자신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받을 것이다. 그리고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영생으로, 악을 행한 자는 영원한 불에 들어갈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참 신앙이며, 이를 진심으로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아멘. --- 번역: 최광민
여전히 발렌티누스가 '삼위일체' 개념을 창안했고, 이 개념을 기독교 교부들 (특히 이레네우스나 테르툴리아누스가) 교묘히 수정한 후 보편교회의 핵심교리로 흡수/표절했다고 생각되는가?
판단은 각자의 몫.
草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