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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예수 vs. 붓다 #1: 소위 "불교계통" 복음서들의 정체: {이사전}, {보병궁 복음서}, {유란시아書}, {임마누엘의 탈무드}

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 2011.02.12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모든 글과 번역문 들에 대해 (1) 복제-배포, (2)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 (3) 화면캡처를 금하며, (4) 인용 시 글의 URL 주소 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예수 vs. 붓다 #1: 소위 "불교계통" 복음서들의 정체: {이사전}, {보병궁 복음서}, {유란시아書}, {임마누엘의 탈무드}

요약

니콜라스 노토비치가 19세기 말 티벳에서 발견하였다는 {이사傳}이란 문서가, 출판 직후 전문가들에 의해 어떤 이유로 반박되었으며, 왜 신뢰할 수 없는 허위문서인지를 설명한다.

또한 그 이후에 등장한 채널링 문서 {보병궁 복음서} 및 {유란시아서}와 UFO 컬트를 통해 발표된 {임마누엘의 탈무드}등의 문서들이 유사종교인 신지학 뉴에이지 계열 UFO컬트들과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어 있는지도 서술한다.

아울러 이런 주장이 증산도 계열 대원출판의 시리즈물과 불문학자이자 불교저술가인 민희식씨 등을 통해 1980-90년 대에 한국에서 어떻게 유포되어졌는지도 간략히 기술한다.

순서

  1. 예수의 불교계통 연대기? 
    1. 민희식, {불교기록에 나타난 예수의 생애} 1987년 
  2. 신비가 리바이 다울링의 채널링 문서, {보병궁 복음서}, 1908년 
    1. 현, 증산도 부종정 안원전(안병섭), {성약성서 / 보병궁 복음서}, 1985년 
    2. 현, 증산도 종정 안경전, {다이제스트 개벽: 남북통일과 지구대변혁의 실상}, 1986년 
    3. 민희식, {법화경과 신약성서}, 1986년(불일(佛日)출판사/1999(가이아씨앤디) 
  3. 저자 미상, {유란시아書, The Urantia Book}, 1924-1955년
    1. "네바돈의 미카엘"의 화신 예수와 인도인 두 여행자의 지중해 유람기 ?
    2. AD 22년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알려진 "일본 신토" 문서?
    3. 알프스 산 중에서 붓다를 비판하는 예수와 두 명의 인도인 제자들?
  4. 이사 라시드와 UFO접촉자 빌리 마이어의 {임마누엘의 탈무드}, 1963/1978년 
    1. 예수의 비밀을 밝혀낸 이사 라시드를 암살한 이스라엘 정보당국? 
    2. 神 (El): 심우주에서 금속우주선을 타고 온 인류형 초지성체 ?
    3. "셈야자": "백인"의 시조 아담의 생부인 외계인, 우주여행자 ?
    4. "셈야제": 빌리 마이어와 다년 간 접촉한 플레이아데스 출신 미녀 외계인 ?
  5. 니콜라스(니콜라이) 노토비치의 {이사傳 / The Unknown Life of Jesus Christ}, 1894년 
    1. 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종교학자 막스 뮐러의 1차 반박 
    2. 노토비치의 말바꾸기 
    3. 인디아 Government College의 교수 J. 아치발드 더글라스의 현지답사, 인터뷰, 반박 
    4. "이사" 
      1. "이사": 아랍어 "이름" 
      2. "이사": 팔리어/산스크리트어 "호칭" 
    5. 니콜라스 노토비치를 지지하는 증거들? 
      1. 힌두교 베단타/라마크리슈난 계열의 지도자 스와미 압헤다난다 (Swami Abhedananda)의 현지답사 기록과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의 주장?
      2. 신지학 신봉자 니콜라스(니콜라이) 콘스탄티노비치 레리크의 현지답사 기록?
      3. 마즈다즈난교 신봉자 엘라자베스 카스파리 박사의 사진증거?
      4. 뉴에이지 컬트단체 Church Universal and Triumphant의 설립자/지도자 엘리자베스 C 프라핏? 
  6. 맺음말 
  7. 부록#1. 막스 뮐러의 반박 전문 
  8. 부록#2. 아치발드 더글라스의 보고서 전문

    1. 예수의 불교계통 연대기들?

    1.1. 20세기 발 복음서들

    기독교가 정경으로 인정하는 네 권의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은 예수의 약 18년 간의 삶을 발굴했다고 주장하는 문서들 가운데, 1908년에 등장한 {보병궁 복음서/The Aquarian Gospel of Jesus Christ}처럼 초자연적인 "채널링" 같은 신비체험을 통하지 않고, 고대문서를 통해 발견되었으며 따라서 역사적인 문서로 '주장'되는 계열의 대표적인 문서로는, 1890년에 등장한 (정체가 묘연한) 니콜라스 노토비치의 {예수 그리스도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 (이하, 이사傳) / The Unknown Life of Jesus Christ}, 역시 정체불명의 인물 이사 라시드가 플레이아데스 성단에서 온 UFO 접촉자로 유명한 빌리 마이어와 작업해 1963년에 발표한 {The Talmud of Jmmanuel / 임마누엘의 탈무드}가 있다. 정체불명의 인물(들)에 의해 20세기 시카고에서 출판된 {유란시아書, The Urantia Book}도 20세기에 출현한 {복음서}의 부류에 들어간다.

    이 문서들 가운데 "아주 잠시나마" 학자들 가운데 논의되었던 것은 노토비치의 {이사傳} 뿐이다.  이 글에서는 {보병궁 복음서}, {유란시아書}, {임마누엘의 탈무드}에 대해 간략히 논평한 후, 노토비치의 {이사傳}}을 마지막에서 깊이 다루겠다.


    https://www.archive.org/stream/unknownlifeofjes00noto?ui=embed#mode/2up
    니콜라스 노토비치, {예수 그리스도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 (이하, 이사傳) / The Unknown Life of Jesus Christ}, 1894년


    https://archive.org/stream/aquariangospelof00levirich?ui=embed#mode/2up
    리바이 H. 다울링, {보병궁 복음서/The Aquarian Gospel of Jesus Christ}, 1908년


    https://archive.org/stream/TheUrantiaBook1955FirstEdition/The-Urantia-Book-1955-Guardian-Plates-600dpi?ui=embed#mode/2up
    저자 미상, {유란시아書, The Urantia Book}, 1924-1955년


    https://archive.org/details/pdfy-UgyOJYUQHLjjkzlT
    이사 라시드 & UFO접촉자 빌리 마이어, {The Talmud of Jmmanuel / 임마누엘의 탈무드}, 1963년/1978년

    19세기 말까지 역사적으로 단 한번도 그 존재와 유사한 언급된 적 없는 이들 문서들이 역사적 진본문서라면, 그 종교적, 역사적 함의는 그야말로 엄청날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들 문서를 그렇게 평가하는 정규학자들은 없다.

    그리고 그 이유는 충분하고도 남는다.




    1.2. 민희식, {불교기록에 나타난 예수의 생애}, 1987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서들을 "역사적 문서"로, 심지어 "신뢰할 만한 사료"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늘 있어왔다. 가령 노토비치의 {이사전}은 "예수가 인도에서 수행했다"라는 속설의 지지자들에게는 "역사적"인 문서요 또 일종의 경전과도 같이 받아들여진다. 이 문서가 한국불교계에 널리 퍼지는데 대표적인 역할을 한 불문학자이자 불교저술가인 민희식씨는, 불교 조계종 중앙승가대학교에서 발행하는 학술지 {승가}에 {불교기록에 나타난 예수의 생애}라는 제목의 "논문"을 1987년에 발표하면서, 노토비치의 이 문서를 포함해 이와 유사한 류의 문서들을 "불교계통 연대기"라 통칭하며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기록에 관해 "불교계통의 연대기"는 "선입관이 없는 기록이라 (기독교의 {복음서}보다 --- 필자 주) 오히려 정확하다"라고 단언한다.

    과연 그럴까?

    그럼 노토비치의 {이사전}을 충실히 옮기고 있는 민희식씨의 이 "논문"을, 대한불교 진각종 측의 한 싸이트를 통해 열람해 보도록 하자. 이 문건들을 "(학술)논문"으로 간주할 수준의 글로 봐야할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불교기록에 나타난 예수의 생애
    http://www.riss.kr/link?id=A40028737
    제어번호 : 40028737저자명 : 閔憙植
    학술지명 : 僧伽
    권호사항 : Vol.4 No.- [1987]
    발행처 : 중앙승가대학교자료유형 : 학술저널
    수록면 : 175-186(12쪽)
    언어 : Korean
    발행년도 : 1987년
    KDC : 220.000

    흥미롭지만 무모한 주장이다. 심지어 다소 희극적이기까지 하다. 이 정체불명의 문서들을 "신뢰할 만한 역사자료"로 받아들이는 일은 사실상 엄청난 "종교적 믿음"을 요구하는데, 아닌게 아니라 이 문서들을 경전으로 받드는 종교 ({보병궁 복음서}의 경우) 와 UFO컬트 ({임마누엘의 탈무드}의 경우)가 실제 존재한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민희식씨 주장은  (1) 정체불명의 유대계 러시아인인니콜라스 노토비치가 1894년프랑스에서 출판한  한 책자와, (2) 1908년 미국 중서부에서 '채널링'으로 신비가 리바이 다울링에게계시되었다는 {보뱡궁 복음서}, (3) 서북인도와 파키스탄 접경인 캐쉬미르 지역에서 19세기 말에 발흥한 이슬람 이단인 아마디야 이슬람의 주장을 그대로 옮긴 후 (3) 거기에 자신의 "대승불교"적인 해석을 약간 더 가미한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 처형 후 소생해서 서북인도 캐쉬미르로 와서 살다 죽었다는 아마디야 이슬람의 주장은 독립된 글로 다루겠다. (참고: http://kwangmin.blogspot.com/2014/11/vs-6.html)

    출현 순서는 {이사전} - {보병궁 복음서} - {유란시아서} - {임마누엘의 탈무드}이지만, 순서를 약간 바꿔서 {보병궁 복음서} - {유란시아서} - {임마누엘의 탈무드}를 먼저 살펴본 후, 마지막으로 노토비치의 {이사전}을 다루도록 하겠다.




    2. 신비가 리바이 다울링의 채널링 문서, {보병궁 복음서}, 1908년

    20세기 초 미국의 리바이 다울링이 일종의 신비체험인 "채널링" 기술을 통해 영계에 비물질적으로 보존되어 있다는 소위 "아카샤" 기록을 보고 기술했다는 {보병궁 복음서/The Aquarian Gospel of Jesus Christ}는 예수가 인도, 티벳, 페르시아, 그리스 및 이집트 등을 돌며 수행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채널링이란 일종의 무아지경 혹은 입신상태에서 글을 받아적는 혹은 구술하는 것을 뜻한다. 오컬트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은 들어보았을 "에드가 케이시"가 그런 류의 채널링을 구사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예수가 인도에서 수행했다"는 식의 주장은 증산교도들과 불교도들 사이에 꽤 널리 퍼져있는데, 그 과정에서 민족주의 종교 증산도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 현재 증산도 종정인 안경전씨가 1986년 증산도 계열 대원출판을 통해 발행한 {다이제스트 개벽: 남북통일과 지구 대변혁의 실상}의 제 3장 {기성종교에서 전하는 개벽상황과 인류구원}의 두번째 단락인 {기독교가 전해주는 인류의 미래}는 안경전씨의 동생이자 현재 증산도 부종정인 안원전(=안병섭)씨가 증산도 계열 대원출판을을 통해 번역/출판한 {성약성서} 혹은 {보병궁 복음서}를 바탕으로 한다. 이 책의 제 2판에서는 역자명이 안병섭에서 안원전으로 개정되었다.

    이 증산도 계열 대원출판사는 초고대문명, 오컬트, UFO 등의 "괴력난신(怪力亂神)"에 관련된 출판을 열심히 했었는데, UFO, 사라진 고대문명, 초능력, 심령과학 등과 관련된 괴력난신(怪力亂神)이라면 가리지않고 찾아읽던 고등학교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받아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현 증산도 종정 안경전씨는 자신의 책 속에서 {보병궁 복음서}를 칭송하며, "천상영계의 기록인 아카샤/우주심 기록을 계시받아 그대로 옮겨적은 것"이며, 기독교의 공인 4가지 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예수의 12세부터 30세까지의 구도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에 {보병궁 복음서}를 통해 예수의 "가르침의 진수"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막상 이 문서는 역사기록으로 간주되기 힘든 오컬트 종교문서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이 문서의 발표자 리바이 다울링 본인과 출판인이 아예 그렇게 명시했기 때문이다.

    {보병궁 복음서}의 서문이 설명하는 이 책의 성격에 대해 한번 읽어보자.

    Early in life, when but a mere lad, he had a vision in which he was told that he was to "build a white city." This vision was repeated three times with years intervening. The building of the "white city" was "The Aquarian Gospel of Jesus the Christ." This book was transcribed between the early morning hours of two and six--the absolutely "quiet hours.

    아직 어린 소년이었을때 그(=다울링)은 그가 "흰 도시를 건설할 것"이라고 말하는 환상을 받았는데, 이 환상은 몇 년간 세번 반복되었다. "흰 도시"란 {예수 그리스도의 보병궁 복음서}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새벽 2-6시 사이의 고요한 시간동안 받아서 기술되었다. --- L. H. Dowling, {보병궁 복음서}, 발행인 서문 [Who was Levi?], 번역: 최광민

    다울링이 채널링 기법으로 받아적었다는 소위 "아카샤 기록"이 대한 {보병궁 복음서}의 진술을 직접 읽어보자

    7 What are the Akashic Records? Akasha is a Sanskrit word, and means "Primary substance," that out of which all things are formed. According to Aquarian philosophy, it is the first stage of the crystallisation of spirit. This philosophy recognises the fact that all primordial substance is spirit; ....(중략).... The Akashic Records. The imperishable records of life, known as the Akashic Records, are wholly in the domain of Supreme Intelligence, or Universal Mind, and the Akashic Record reader must be in such close touch with the Holy Spirit, or the Holy Breath, as the ancient masters call this spirit of Supreme Intelligence, that every thought vibration is instantly felt in every fibre of his being.

    7. 아카샤 기록이란 무엇인가? "아카샤"란 산스크리트어로 "원초적 물질"을 말하는 것으로 만물이 거기서 유래한다. 보병궁 철학에 따르면, 아카샤는 영이 가장 처음 물질화하는 단계이다. 보병궁 철학은 모든 원초적 질료는 영적이라고여긴다....(중략)...아카샤 기록은 불멸하는 생명의 기록으로, 궁국의 지성 혹은 우주적 정신의 영역에 속해있는 기록이다. 아카샤 기록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성령 혹은 성스런 숨결과 밀접한 접촉을 하는 자로서....(후략)  --- L. H. Dowling, {보병궁 복음서}, Eva S. Dowling의 [서문/Introduction], 번역: 최광민



    한편, 당시 {보병궁 복음서}를 한국에 번역/소개했던 안원전 (현) 증산도 부종정은,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아래와 같은 흥미로운 진술을 하고 있다. 이런 소위 "불교계통 연대기"들의 한국에서의 전파과정을 보여주는 일화들이다.

    .....필자가 20년전 국내에 {아콰리언 가스펠-보병궁의 성약}을 처음 소개한 뒤 조계종 대불청년회장을 한 한양대 불문과 민희식 교수가 불일서점을 통해 200여권을 주문해 가더니 조계종에서 강론한 내용 {법화경과 신약성서}를 내놓았다. 그 이후 외대 힌두어과를 갓 졸업했던 장성규라는 젊은 친구가 국내에 {인도에서의 예수}라는 책을 펴내고 필자를 찾아온 적이 있었고, {불제자였던 예수}를 비롯 이사전(이사는 인도에서의 예수 이름) 등 수많은 책이 나왔고 국내에 성혈과 성배라는 책자가 나왔으나 골수 기독교인의 결사반대로 절판되었고 요 2-3년전 막달라 마리아라는 영화가 예수와의 결혼이야기를 소재로 해서 나왔으나 가톨릭과 개신교의 결사항전으로 상영이 안된 적이 있다.(안원전) ..." --- 출처: http://www.cheramia.net/board/view.php?id=bbs6&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it&desc=desc&no=193

    예수가 인도에서 수행했다는 주장을 한국 불교계에 확산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불문학자 민희식씨는,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법화경과 신약성서}에서 19세기 말에 등장한 노토비치의 {예수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 (이하, 이사전)과, 1908년 미국의 신비종교가 리바이 다울링의 {보병궁 복음서}의 내용을 주축으로 해서 알려지지 않은 예수의 청년기 삶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한다. 특별히 인도, 티벳, 페르시아에서의 예수의 행적에 대한 이 책의 많은 진술은 {보병궁 복음서}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의 책 {법화경과 신약성서}(가이아씨앤디)는 특별히 이 {보병궁 복음서}의 내용을 비판없이 그대로 "역사적 기정사실"로 언급하고 있다.

    가령, 민희식씨는 예수가 불교, 조로아스터교, 베다교 스승들의 지도를 받았다는 {보병궁 복음서}의 진술을 자신의 책에 그대로 옮기고 있다.



    "...예수는 인도의 의학을 연구하기 위해 이곳(=베나레스)에서 우드라카의 제자가 되었다...." -- 민희식, {법화경과 신약성서}(가아아씨앤디) 1부 2장 [토마스복음서를 통해 본 예수와 법화경]

    "...예수는 간다라와 인도에서 불교를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해 티베트로 떠났다. 티베트의 랏사에 있는 고문서를 읽고 성인 맹그스테의 지도를 받기 위한 것이었다...." -- 민희식, {법화경과 신약성서}(가이아씨앤디) 1부 6장, [티베트, 페르시아에서의 예수]

    "...그는...도읍지 페르세폴리스에가서 24년 전에 하늘의 별을 보고 그를 찾아왔던 세 사람의 동방박사를 만났다.... -- 민희식, {법화경과 신약성서}(가아아씨앤디) 1부 6장 [티베트, 페르시아에서의 예수]

    "...멀리 라호르의 승려 아자이닝이 성인들로부터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나러 왔다...." -- 민희식, {법화경과 신약성서}(가아아씨앤디) 1부 7장 [히말라야에서의 예수]

    민희식씨의 책에 등장하는 우드라카 (Udraka), 아자이닝(Ajainin), 페르세폴리스에서 다시 조우한 동방박사들, 멩그스테 (Meng-ste) 등의 이름들과 그들의 이야기들은 오직 {보병궁 복음서}에만 등장한다.  1908년 미국 중부 한 마을의 서재에서 천상영계의 기록을 입신상태에서 다울링이 받아적었다는 바로 그 책 말이다.



    그나저나,




    테.

    {보병궁 복음서}의 제 36장과 56장에서는 예수가 티벳 라싸에서 중국현자 맹자 (Meng-ste, 孟子)를 만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어떻게 AD 1세기 초반에 살았던 예수가 BC 300년에 사망한 맹자를, 그것도 티벳에서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논하지 않겠다. 이 "맹자"는 심지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까지 다녀온 것으로 되어있다.

    안원전/안병섭씨의 한국어 번역에서는 이 맹자/Meng-ste의 영어 표기를 "그대로" 읽어 "멘구스테" 혹은 "멩그스테" 같이 이상한 이름으로 음역된 후 세간에 유포되었다. 안경전씨는 이 단어를 "멩그/Meng-스테/ste"가 아니라 "멩쯔" 즉, "맹자"의 중국어 원음으로 이해하고 읽었어야 했다. 서구에서 "맹자"는 라틴어화한 멘키우스/Mencius, 혹은 중국음을 딴 Meng-ste, Meng-tze, Mengzi, Mengtzu 등으로 일반적으로 표기되어 왔다.

    현 증산도 부종정 안병섭/안경전씨는 이 소위 "멩그스테"의 출신지를 "요동"으로 풀이하여 마치 그가 "고조선" 혹은 "부여" 혹은 "고구려인"일 것 같은 민족주의적 암시를 주려한듯 하지만, 사실 {보병궁 복음서}에는 그런 언급이 없다. 그는 다만 티벳보다 더 동쪽, 즉 "중국" 출신으로 묘사되어 있을 뿐이다.

    간략히 "맹자" 부분을 둘 인용해 본다. (UFO 음모론에 늘 등장하는 "마제스틱 12 (혹은 MJ12)를 패러디하여 내가 농담으로 "마제스틱 7"이라 부르는) 중국(!)인 "멩구스테"를 포함한 전 세계 일곱 현자들이 AD 1세기 초반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론의 집에 모여 세계상황에 대한 국제회의를 했다는 부분을 눈여겨 두자.

    Now, Meng-ste, greatest sage of all the farther East, was in this temple of Tibet. --- {보병궁 복음서},  제 36장 3절:

    (티벳보다, - 필자 주) 훨씬 더 동방에서 온 위대한 현자 맹자 (Meng-ste)가 티벳의 이 사원에 있었다. (번역: 최광민)

    6 Now, Alexandria was the center of the world's best thought, and here in Philo's home the sages met. 7 From China came Meng-ste; from India Vidyapati came; from Persia Kaspar came; and from Assyria Ashbina came; from Greece Apollo came; Matheno was the Egyptian sage, and Philo was the chief of Hebrew thought.-- {보병궁 복음서}, 제 56장 6-7절:

    6.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세계의 철학 중심지였고, 여기있는 필론의 집에서 여러 현자들이 모임을 가졌다. 7. 중국에서는 맹자가, 인도에서는 비댜파티가, 페르시아에서는 카스파가, 앗시리아에서는 아쉬비나가, 그리스에서는 아폴로가, 이집트에서는 마테노가, 그리고 히브리 사상의 거두 필론이 참석했다. --- 번역: 최광민)

    {보병궁 복음서}의 추종자들은 이 저작물 속에 등장하는 이 인물의 로마자 표기가 "Meng-tze"가 아닌 "Meng-ste"란 점을 들어 "멩구스테"는 유교철학자 "맹자"가 아닌 다른 인물이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치더라도 AD 1세기 초반에 전혀 중국인명이라고는 들리지 않는 "멩그스테"라는 이름의 인물, 혹은 감히 자신을 "孟子"로 참칭한 어떤 중국 "최고의" 현자가, 중국-티벳-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종횡무진 활동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다.

    참고로 위에 언급된 세계의 현자들 가운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론은 실존인물이고, 비댜파티는 예수보다 몇세기 후대의 인물이며, 페르시아의 카스파는 후대 전설 속에 등장하는 "동방박사" 중 한 명이다. 그리스의 아폴로는 아마도 예수와 거의 동시대인인 아폴로니오스의 오기인듯 하며, 이집트의 마테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절의 이집트 역사가인 마네토의 오기인지 혹은 일부러 철자를 바꾼 것인지 혹은 마테노라는 그런 인물이 정말 있었던 것인지 도무지 알려져 있지 않다. 결국 위에 언급된 "현자"들 가운데 예수 당시에 실제로 유명했던 현자/철학자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로/필론 한 명 뿐인 셈이다.

    안경전씨의 단언처럼 이 문서는 과연 "우주심을 그대로 옮겨적은 정확한" 문서일까? 아니면 이 {보병궁 복음서}의 발표자 리바이 도울링이 중국 연표를 착각해서 일으킨 해프닝일까?

    영계/에테르계에 비물질적으로 보존되어있다는 소위 "아카샤" 기록을 채널링을 통해 수신해 1908년에 발표했다는 리바이 다울링의 저 {보병궁 복음서}를 민희식씨는 정말로 "신뢰할 만한 역사기록"으로 인정한다는 뜻일까?



    이 문서를 "역사문서"로 간주하는 일은 거의 "종교적 믿음"을 필요로 하지만, 민희식씨의 열정적인 독자들은 이 문제를 전혀 모르는게 아닌가 싶다. {보병궁 복음서}의 내용을 자신의 대표저작물에 역사기록으로 즐겨 인용해 온 민희식씨가 이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모른다면 더 큰일이다.) 그러나 민희식씨가 자신의 과거 주장들을 공개적으로 철회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지는 않다.

    혹은 불교계 금강신문이 2007년 {불교 知性의 대화}란 제호로 연재한 기획대담기사의 세번째 대담인 당시 한양대 불문과 석좌교수이던 민희식 교수와 서울대 종교학과 윤원철 교수의 대담을 보면, 윤원철 교수는 민희식씨의 {법화경과 신약성서}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기사링크: http://www.gg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35)

    "최근에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면서 두 종교 사이의 관련성을 치밀하게 밝혀 낸 《법화경과 신약성서》 증보판을 내놓으셨습니다. 불문학을 전공하신 대학자이신데, 불교와 기독교를 공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 윤원철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대담의 마무리로 민희식씨는 향후 연구계획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기회가 된다면 불교·기독교·이슬람 등 각 종교의 경전에 나와 있는 좋은 말씀을 엮어 발간하고 싶습니다. 인류가 종교로 인한 다툼없이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그것이 제일 먼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계속 연구해서 《법화경과 신약성서》를 더 완벽하게 만들 계획이예요. 간다라 역사문화연구도 꾸준히 할 생각입니다.  --- 민희식 (한양대 석좌교수)

    윤원철씨는 민희식씨의 "노작" {법화경과 신약성서}의 중요한 축으로 등장하는 19/20세기 발 니콜라스 노토비치의 {예수 그리스도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 (소위 {이사전})이나, 20세기 초 미국 중서부에서 입신상태의 채널링으로 작성된 {보병궁 복음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  민희식씨의 연구가 (특별히 {법화경과 신약성서}만 보더라도) 학자의 눈으로 볼때 "치밀한가"? "완벽한가"?

    민희식씨야 종교학을 전공하지 않은 불문학자이기에 오류를 범했다고 치더라도, 윤원철씨는 한국불교를 전공한 불교학자이자 서울대 종교학과에서 가르치는 정규 종교학자가 아닌가?

    그나저나 티벳에 불교가 전파된 시점은? 티벳의 정사에 따라 짧게 정리만 한다면, AD 5세기의 티벳의 군주 토토리 니아첸의 시절에 인도로부터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들이 티벳에 왔다고 한다. 이 산스크리트어 불경들은 AD 7세기 33대 티벳 국왕인 송첸 감포 시절에 이르러 티벳어로 역경사업이 시작되었다. 송첸 감포는 당나라의 공주인 문성공주를 자신의 아들과 혼인시켰는데 이때 문성공주가 당나라에서 석가모니불의 불상을 가져왔다고 전한다. (송첸 감포는 아들이 낙마사고로 재위 2년 만에 죽자, 다시 복위하여 며느리인 문성공주를 다시 자신의 왕비로 맞아들였다.)

    티벳에 밀교계열의 라마불교가 성립된 AD 8세기 이전 티벳에는 이미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유입된 본(Bon)교 혹 본-조첸이라는 종교가 국가종교로 융성하고 있었다. 본-조첸은 AD 8 세기 말 인도에서 밀교 계열의 탄트라 불교를 가져와 티벳의 라마교를 정립한 파드마삼바바 이후 라마교로 흡수되게 되지만 현재로 티벳에는 라마교화 한 본-조첸의 사원과 승려들이 남아있다. 이미 본교가 티벳인의 기층심리를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드마삼바바는 라마교로의 대체과정에서 본교의 형식을 상당부분 흡수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본교가 (기독교 그노시스 계열의 대표적 이단인) 마니교 혹은 변형된 마니교였을 것으로 유추하고 있으며, 라다크 근방의 알키(Alchi) 사원은 그 흔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3. 저자 미상, {유란시아書, The Urantia Book}, 1924-1955년

    3.1. "네바돈의 미카엘"의 화신 예수와 두 인도인 여행자들의 지중해 유람?

    천상존재들에 의한 신비로운 현대계시라고 주장되며 1924년 경부터 출현해 1955년 시카고에서 출판된 {유란시아}는, 저자들(천사들?)이 분명하지 않은데다, 원래의 작성의도가 계시인지, 종교적 아젠다인자, 철학인지, 사기인지, 판타지 소설/수필인지 정체가 아주 모호한 방대한 문서군이 모여진 책이다. 1986년과 2006년에 각각 미국 내 저작권과 국제 저작권이 만료되었으므로, 누구나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 그동안 이 문서에 기반한 어떤 종교가 창교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소위 채널링 계통의 명상가들 사이에서 {보병궁 복음서}와 더불어 꾸준히 읽히고 있는 스테디 셀러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유란시아"는 지구를 뜻한다.

    신 혹은 외계의 존재들을 비롯한 심오한 우주철학을 전개하는 앞 부분과는 달리, 이 방대한 편집문서의 제 4권은 예수의 탄생에서 그의 수난과 부활이라는 예수의 일대기를 지극히 세밀하게 묘사하는 {복음서}의 형식을 취하며, 다가올 미래의 일과 궁국적인 종교에 대한 언급으로 마무리 짓는다. 그 세밀한 정도는 여타 20세기 발 {복음서}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정확히 말하면 "불교 계열 복음서"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비록 불교나 힌두교 등 등 동양종교에 대해 관대하게 소개하고 있긴 하지만, {유란시아書}에 따르자면 창조주 신의 70만 명에 이르르는 낙원의 아들들 (Paradise Sons) 가운데 하나인 "네바돈의 미카엘 / Michael of Nebadon"의 화신인 예수가 잠시 뒤에 설명할  두 명의 인도인 제자에게 설명해 준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싯달타는, 천상에 있는 지고의 영적 아버지에 대한 직관을 잃어버린 탓에 무신론적 종교를 창시해 가르친 "고아 같은 예언자"였기 때문이다.

    {유란시아書}를 자세히 다루는 대신, 짧게 {복음서}에 해당하는 제 4권의 내용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유란시아서}가 다루는 예수의 일대기는 이 글에서 소개하고 있는 노토비치의 {이사전}, 다울링의 {보병궁 복음서}, 빌리 마이어의 {임마누엘의 탈무드}과 결정적으로 다른 한가지가 있다.

    결정적으로 {유란시아書} 속의 예수는 인도나 티벳을 다녀온 적이 없다. 아니, 28세가 되기 전까진 유대아 땅을 떠나 본 적도 없다. 청소년 기부터 서른 무렵까지 동쪽으로는 티벳에서 서쪽으로는 지중해 일대를 주유했다는 다른 20세기 발 {복음서}와 보이는 현격한 차이라고 하겠다.

    대신 예수는 부유한 인도인 부자의 통역 겸 선생 자격으로 지중해 일대를 거쳐 2년 간 로마를 유람하고 왔고, 그 다음에는 1년 간 카라반들을 따라 카스피해 지역과 메소포타미아를 다녀온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 이 책에 따르면 예수가 3년 간 여행한 지역은 서쪽으로는 로마, 북쪽으로는 오늘날 스위스가 있는 알프스 산맥, 그리고 남쪽으로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동쪽으로는 페르시아 수사 까지로 묘사된다.



    {유란시아書}와 달리,  다른 20세기 발 복음서들은 예수의 로마 유람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대신 인도/티벳 여행이 그의 구도여행의 정점을 이룬다. 하지만 {유란시아書}에서 예수가 두 명의 인도인 제자를 데리고 고타마 싯달타와 불교에 대해 (시큰둥하게) 비판한 곳은, 인도/티벳의 히말라야나 서북인도의 간다라가 아니라 오늘날 스위스가 있는 "알프스 산맥"이다.....AD 22년에 두 명의 인도인들과 함께 알프스를 등정한 예수!!!

    {유란시아書}에 따르면, 예수는 28세가 되던 AD 22년 유월절 축제 주간에, 유대아를 방문한 인도에서 온 부유한 여행자인 고도드와 그의 17세 아들인 가니드를 만난다. 이들은 로마로 가는 길에 지중해 여러 곳을 들를 목적으로 여행 중으로 중간 기착지인 유대아에서 통역과 아들을 위한 교사를 구하는 중이었는데, 예수의  가세가 기울던 차라, 고노드가 1년 치 경비를 선불로 지급하는 조건으로 예수는 이들을 따라 나선다.

    129:2.9 Before the end of this Passover week, by apparent chance, Jesus met a wealthy traveler and his son, a young man about seventeen years of age. These travelers hailed from India, and being on their way to visit Rome and various other points on the Mediterranean, they had arranged to arrive in Jerusalem during the Passover, hoping to find someone whom they could engage as interpreter for both and tutor for the son. The father was insistent that Jesus consent to travel with them. Jesus told him about his family and that it was hardly fair to go away for almost two years, during which time they might find themselves in need. Whereupon, this traveler from the Orient proposed to advance to Jesus the wages of one year so that he could intrust such funds to his friends for the safeguarding of his family against want. And Jesus agreed to make the trip

    129:2:9 (예수가 28세이던 / 필자 주) 유월절 주간이 끝나기 전 예수는 부유한 여행객과 그의 약 17세 가량 나이의 아들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인도에서 온 이 여행자들은 로마와 지중해 일대를 둘러보기 위한 여행 중에 유월절 기간 중 예루살렘에 들러 통역과 아들의 가정교사를 찾고 있었다. 그 아버지는 함께 여행하자고 예수에게 청했으나, 예수는 가족 때문에 거의 2년 간 집을 비울 수는 없으며 그로인해 가족들이 빈궁해 질 수 있다고 답했다. 동방에서 온 이 여행자는 예수에게 1년 치 임금을 선불로 지급하면, 그 돈을 예수의 친구에게 위탁하여 가족들이 필요를 맞춰줄 수 있다고 제안했다. 예수는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합의했다 --- {유란시아書} / 번역: 최광민

    {유란시아書}에 따르자면, 인도인 두 명과 예수가 총 2년 간 지중해 일대를 유람했다는 이 여행은 "정확히" AD 22년 4월 26일 일요일 아침에 예루살렘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예루살렘 - 야파 - 카이사리아 - 알렉산드리아 -크레테 - 카르타고 - 몰타 -시라큐스 - 메시나 - 나폴리 - 카푸아를 거쳐 이탈리아에 와서 아피아 가도를 따라 로마에 입성한다. 역사상 어떤 문건도 보여주지 못했던 "세밀한 역사성"을 보여준다. 믿거나 말거나.

    130:0.1 THE tour of the Roman world consumed most of the twenty-eighth and the entire twenty-ninth year of Jesus’ life on earth. Jesus and the two natives from India — Gonod and his son Ganid — left Jerusalem on a Sunday morning, April 26, A.D. 22. They made their journey according to schedule, and Jesus said good-bye to the father and son in the city of Charax on the Persian Gulf on the tenth day of December the following year, A.D. 23.

    예수가 지상에서 보낸 28년 차 거의 전부와 29년 차 전부는 로마 여행에 쓰였다. 예수와 두 명의 인도인인 고노드와 그의 아들 가니드는 AD 22년 4월 26일 일요일 아침 예루살렘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계획에 따라 일정을 잡았으며, 예수는 다음 해인 AD 24년 12월 10일에 페르시아 만의 카락스에서 고도드와 가니드를 송별했다.   / 번역: 최광민

    130:0.2 From Jerusalem they went to Caesarea by way of Joppa. At Caesarea they took a boat for Alexandria. From Alexandria they sailed for Lasea in Crete. From Crete they sailed for Carthage, touching at Cyrene. At Carthage they took a boat for Naples, stopping at Malta, Syracuse, and Messina. From Naples they went to Capua, whence they traveled by the Appian Way to Rome.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야파를 경유해 카이사리아로 갔다. 카이사리아에서 배 편으로 알렉산드리아로 갔으며,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크레테 섬의 라세아로 배 편으로 이동했다. 크레테에서 키레네를 찍고 카르타고로 갔다. 카르타고에서 그들은 배 편으로 네아폴리스 (나폴리)로 갔고, 이때 말타, 시라쿠사, 메시나를 경유했다. 나폴리에서 카푸아로 이동했으며, 거기서 아피아 길을 따라 로마로 입성했다 / 번역: 최광민



    로마에서 돌아오는 길은 로마 -타렌툼 - 니코폴리스 - 코린토스 - 아테네 -  트로아스 - 에페소스 - 로도스 - 키프로스 - 안티오키아 - 시돈 - 다마스쿠스를 경유한 후, 다시 카라반들을 따라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론에 가서 우르와 다른 지역을 방문한 후 페르시아의 수사를 거쳐 페르시아 만의 카락스에서 인도인 일행과 작별했다는 것이다.

    130:0.3 After their stay in Rome they went overland to Tarentum, where they set sail for Athens in Greece, stopping at Nicopolis and Corinth. From Athens they went to Ephesus by way of Troas. From Ephesus they sailed for Cyprus, putting in at Rhodes on the way. They spent considerable time visiting and resting on Cyprus and then sailed for Antioch in Syria. From Antioch they journeyed south to Sidon and then went over to Damascus. From there they traveled by caravan to Mesopotamia, passing through Thapsacus and Larissa. They spent some time in Babylon, visited Ur and other places, and then went to Susa. From Susa they journeyed to Charax, from which place Gonod and Ganid embarked for India.

    130:0.4 It was while working four months at Damascus that Jesus had picked up the rudiments of the language spoken by Gonod and Ganid. While there he had labored much of the time on translations from Greek into one of the languages of India, being assisted by a native of Gonod’s home district.

    {유린시아서}에 따르면 인도인 제자들과 작별하고 고향에 돌아온 후인 AD 24년에는 대상들을 따라 앗시리아, 메디나, 파르티아를 거쳐 남부 카스피해 지역을 다녀오기도 한다.

    134:2.1 It was the first of April, A.D. 24, when Jesus left Nazareth on the caravan trip to the Caspian Sea region. The caravan which Jesus joined as its conductor was going from Jerusalem by way of Damascus and Lake Urmia through Assyria, Media, and Parthia to the southeastern Caspian Sea region. It was a full year before he returned from this journey. 

    AD 24년 4월 1일, 예수는 나사렛을 떠나 대상들과 함께 카스피해 방면으로 여행을 떠났다. 예수가 함께 길을 떠난 대상의 인솔자는 예루살렘을 떠나 다마스쿠스와 아르미야 호수 방면을 통해 앗시리아, 메디아, 파르티아를 거쳐 카스피해 남부 지역을 향했다. 예수가 이 여행에서 돌아오기까지는 꼬박 1년이 걸렸다 / 번역: 최광민

    {이사전}, {보병궁 복음서}, (잠시 후 설명할) {임마누엘의 탈무드}에서처럼 예수가 서북인도 (간다라)나 티벳을 다녀왔다는 진술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흥미롭지 않은가?




    3.2. AD 22년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알려진 "일본 신토" 문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예수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을 방문할 때 그의 인도인 제자 가니드와 세계종교에 대해 논하는 장면이다. {유란시아書}에 따르자면, AD 28년 무렵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100만 권 분량에 달해는 온갖 문명권의 문서가 가득했는데, 여기 소장된 문서 중에는 중국과 심지어 "일본"의 문서도 있었다고 한다. 세계종교에 대한 대화 중에는 이 도서관이 보유한 각종 종교문서들이 등장하는데, 가령,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 도교, 유교,......, 심지어 일본의 신토까지 총등장한다.

    더 놀랍게도, 예수는 이 모든 종교들이 사실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멜키세덱의 포교사들이 그 옛날 동방에 건너가 전파한 유일신에 대한 가르침에서 파생된 것"이란 충격적 주장을 하면서, 인도인 소년제자 가니드를 시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보유한 동방종교의 경전들에서 "멜키세덱의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는 부분을 발췌하도록 지시한다.

    {유란시아서}에 따른 이 "멜키세덱"은 네바돈의 미카엘 (=예수) 만큼이나 외계적 존재인 "마키벤타 멜키세덱"의 지구에서의 화신이다. 자, 그럼 멜키세덱을 만나보자.

    93:0.2 The Melchizedek order of universe sonship has been exceedingly active on Urantia. A corps of twelve served in conjunction with the Life Carriers. A later corps of twelve became receivers for your world shortly after the Caligastia secession and continued in authority until the time of Adam and Eve. These twelve Melchizedeks returned to Urantia upon the default of Adam and Eve, and they continued thereafter as planetary receivers on down to the day when Jesus of Nazareth, as the Son of Man, became the titular Planetary Prince of Urantia.

    93:0.2
    유란시아 (=지구) 상에서 우주아들 신분의 멜키세덱 계급의 활동은 매우 활발했다. 열 두 그룹이 생명운반자들과 역할을 수행했다. 후대의 열 두 그룹은 칼리가스티아가 떨어져 나간 직후 너희 세계 (=유란시아)를 맡게 되었고, 아담과 이브의 시절까지 관리를 담당했다. 이 열 두 멜키세덱은 아담과 이브의 문제가 있은 후 유란시아로 돌아왔고, 이 후로는 나자렛의 예수가 '사람의 아들'이란 직위로 유란시아 행성 지배자가 된 때까지 행성관리자의 역할을 담당했다 ---- {유란시아서} / 번역: 최광민

    93:1.2 The twelve Melchizedek receivers knew of Michael's impending bestowal on their planet, but they did not know how soon it would occur; therefore they convened in solemn council and petitioned the Most Highs of Edentia that some provision be made for maintaining the light of truth on Urantia. This plea was dismissed with the mandate that " the conduct of affairs on 606 of Satania is fully in the hands of the Melchizedek custodians. " The receivers then appealed to the Father Melchizedek for help but only received word that they should continue to uphold truth in the manner of their own election " until the arrival of a bestowal Son, " who " would rescue the planetary titles from forfeiture and uncertainty. " 93:1.3 And it was in consequence of having been thrown so completely on their own resources that Machiventa Melchizedek, one of the twelve planetary receivers, volunteered to do that which had been done only six times in all the history of Nebadon: to personalize on earth as a temporary man of the realm, to bestow himself as an emergency Son of world ministry.

    93:1.2 이들 12인의 멜키세덱들은 미카엘 (=예수)이 곧 그들의 행성 (=지구)에 오게 될 것을 알고 있긴 했지만, 그 날이 얼마나 빨리 올 지는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엄숙한 회의를 열어 유란시아에서 진리의 빛을 보존하기 위해 모종의 조치를 취해줄 것을 에덴시아의 지고자들에게 청원했다. 청원은 "사타니아 606번 구역에서 일어나는 일은 멜키세덱 관라인들의 전권에 속한다."라는 지시와 함께 기각되었다. 이후 관리자들은 아버지 멜키세덱에게 다시 청원했지만, 이 행성의 지위를 피폐와 불안정으로부터 구원할 (유란시아에) 임명된 아들이 도착할 때까지 스스로 정한 방식으로 진리를 지켜야 한다는 대답을 받았다. 93:1.3 자력으로 해결하라고 방치되었기 때문에, 행성관리자 12인 가운데 하나인 마키벤타 멜키세덱이 전체 네바돈의 역사에서 단 6차례만 행해졌던 일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것은 지구 상에 일시적으로 인간이 되어, 세상을 다스릴 비상시 아들이 되는 것이었다. ---- {유란시아서} / 번역: 최광민



    흠. 어쩌면 그럴지도.

    아무튼 이 멜키세덱의 화신이 조직해 보낸 포교사들은 온 세상에 퍼져나가 멜키세덱의 가르침을 전파했고, 그 결과 모든 주요 종교의 초기 가르침에는 멜키세덱의 교리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소위 "불교 계통" 20세기 발 복음서들의 친-인도적 발언들과 비교해 보자.

    131:3.1 Ganid was shocked to discover how near Buddhism came to being a great and beautiful religion without God, without a personal and universal Deity. However, he did find some record of certain earlier beliefs which reflected something of the influence of the teachings of the Melchizedek missionaries who continued their work in India even to the times of Buddha. Jesus and Ganid collected the following statements from the Buddhist literature:

    가니드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 필자 주) 개인적이고 보편적 신을 가지고 있지 않은 불교가 그토록 위대하고 아름다운 종교가 될 수 있었는지를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다. 가니드는 기록들 가운데, 그 옛날 인도로 파견된 멜키세덱의 포교자들의 붓다의 시절 무렵까지도 포교활동을 계속한데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초기 불교 신앙에 관한 기록들을 찾아냈다. 예수와 가니드는 불교 문서들에서 다름의 진술들들 발췌해 모았다....[후략] --- {유란시아書} 제 4권 131:3.1 / 번역: 최광민

    131:4.1 The missionaries of Melchizedek carried the teachings of the one God with them wherever they journeyed. Much of this monotheistic doctrine, together with other and previous concepts, became embodied in the subsequent teachings of Hinduism. Jesus and Ganid made the following excerpts:

    멜키세덱의 포교사들은 유일신에 대한 가르침을 전파하며 여행했다. 그들의 이전의 다른 개념들과 함께 이 유일신관은 이어지는 힌두교의 가르침 속에 녹아들었다. 예수와 가니드는 다름의 진술들을 발췌했다....[후략] --- {유란시아書} 제 4권 131:4.1 / 번역: 최광민

    131:7.1 Only recently had the manuscripts of this Far-Eastern religion been lodged in the Alexandrian library. It was the one world religion of which Ganid had never heard. This belief also contained remnants of the earlier Melchizedek teachings as is shown by the following abstracts:

    일본 신토: 아주 최근에 (즉, AD 22년 경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 필자 주) 이 극동의 종교문서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소장되었다. 이 종교는 (인도인 / 필자 주) 가니드가 처음 들어보는 종교였다. 다음의 발췌문에서 보여지듯, 이 종교 역시 고대 멜키세덱의 가르침의 흔적을 담고 있다....[후략] --- {유란시아書} 제 4권 131:7.1 / 번역: 최광민

    131:8.1 The messengers of Melchizedek penetrated far into China, and the doctrine of one God became a part of the earlier teachings of several Chinese religions; the one persisting the longest and containing most of the monotheistic truth was Taoism, and Ganid collected the following from the teachings of its founder:

    멜키세덱의 가르침은 멀리 중국에까지 퍼졌나갔고, 유일신에 대한 그의 교리는 몇몇 중국 종교의 초창기 가르침의 한 부분이 되었다. 가장 길게 유일신론 대부분을 담고 있는 것은 도교이다. 가니드는 도교의 창시자 (=노자 / 필자 주)의 가르침에서 다음의 진술들을 발췌했다...[후략] --- {유란시아書} 제 4권 131:8.1 / 번역: 최광민

    131:9.1 Even the least God-recognizing of the world’s great religions acknowledged the monotheism of the Melchizedek missionaries and their persistent successors. Ganid’s summary of Confucianism was:

    위대한 세계종교 가운데서 가장 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 종교조차도 (= 유교 / 필자 주), 멜키세덱의 포교사들과 그들의 후계자들이 전한 유일신론을 인정했다. 유교에 관한 가니드의 정리는 다음과 같다 .... [후략] --- {유란시아書} 제 4권 131:9.1 / 번역: 최광민

    AD 22년 무렵의 일본 (왜)에 대한 기록은 중국 {후한서}에 등장하는 한 줄이 현재까지는 유일하다. 하물며 장황하게 기록되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소장된 도교, 유교, 심지어 일본 신토문서라니!  하긴 {보병궁 복음서}에서는 "맹자"가 알렉산드리아에 다녀오지 않던가.

    그런데 막상 역사가들은 이 엄청난 증언에 전혀 관심 없는 듯 싶다. 그리고 그 이유는 충분하고도 남는다.




    3.3 "알프스 산"에서 붓다를 비판하는 예수?

    로마를 여행하는 틈틈이 이 세 명의 일행은 로마 근방을 답사하는데,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스위스가 위치한 알프스 산맥을 다녀온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이 산 속에서 예수는 고타마 붓다와 불교에 대해 인도인 제자 고노드와 가니드와 하루종일 심오한 대화를 주고받는다.

    앞서 말한 대로, 이 문서 속의 예수는 인도나 티벳을 다녀온 적 없다. 그래서 {보병궁 복음서}에 등장하는 멩구스테니 등을 티벳의 라싸나 혹은 인도의 간다라나, 혹은 히말라야산에서 만난 적도 없다.

    대신 그는 로마 유람길에 두 명의 인도인 제자를 거느리고 "알프스 산"을 다녀온다. 게다가 알프스 산 중에서 고타마 붓다에 대해 예수가 언급하는 내용에서은 "불제자 예수"의 흔적을 찾기는 힘들다. 그는 알프스 산 속에서 고타마 붓다가 훌륭한 사상가요 나름 노력을 했으나 신의 정수를 놓쳐 무신론적 종교를 창시한 것으로 폄하하기 때문이다. 고타마 싯달타는 "고아같은 예언자"란 것이었다. 다울링의 {보병궁 복음서}나 노토비치의 {이사전} 속의 예수가 들었으면 입에 거품을 물었을 소리다.

    132:7.3 It was on the visit to Switzerland, up in the mountains, that Jesus had an all-day talk with both father and son about Buddhism. Many times Ganid had asked Jesus direct questions about Buddha, but he had always received more or less evasive replies. Now, in the presence of the son, the father asked Jesus a direct question about Buddha, and he received a direct reply. Said Gonod: “I would really like to know what you think of Buddha.” And Jesus answered:

    (알프스 / 필자 주) 산맥 위에 위치한 스위스 지방을 방문할 때의 일이었다. 여기서 예수는 인도인 부자 (고노드와 가니드)와 함께 불교에 관해 하루종일 대화를 나누었다. 예전에 가니드는 붓다에 대한 단도직입적인 질문들을 예수에게 여러차례 던졌는데, 그때마다 예수는 그저 우회적으로 답했을 뿐이었다. 이제 가니드 앞에서 아버지 고노드는 붓다에 대해 직설적인 질문을 예수에게 던졌고, 이번에는 예수로부터 직설적인 답변을 들었다. 고노드는 물었다: "당신이 붓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 알고 싶습니다. 예수는 이렇게 답했다. --- {유란시아書} 제 4권 132:7.3 / 번역: 최광민

    132:7.4 “Your Buddha was much better than your Buddhism.
    Buddha was a great man, even a prophet to his people, but he was an orphan prophet; by that I mean that he early lost sight of his spiritual Father, the Father in heaven. His experience was tragic. He tried to live and teach as a messenger of God, but without God. Buddha guided his ship of salvation right up to the safe harbor, right up to the entrance to the haven of mortal salvation, and there, because of faulty charts of navigation, the good ship ran aground. There it has rested these many generations, motionless and almost hopelessly stranded. And thereon have many of your people remained all these years. They live within hailing distance of the safe waters of rest, but they refuse to enter because the noble craft of the good Buddha met the misfortune of grounding just outside the harbor. And the Buddhist peoples never will enter this harbor unless they abandon the philosophic craft of their prophet and seize upon his noble spirit. Had your people remained true to the spirit of Buddha, you would have long since entered your haven of spirit tranquillity, soul rest, and assurance of salvation. 132:7.5 “You see, Gonod, Buddha knew God in spirit but failed clearly to discover him in mind; the Jews discovered God in mind but largely failed to know him in spirit. Today, the Buddhists flounder about in a philosophy without God, while my people are piteously enslaved to the fear of a God without a saving philosophy of life and liberty. You have a philosophy without a God; the Jews have a God but are largely without a philosophy of living as related thereto. Buddha, failing to envision God as a spirit and as a Father, failed to provide in his teaching the moral energy and the spiritual driving power which a religion must possess if it is to change a race and exalt a nation.”

    "당신들의 붓다는 불교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붓다는 위대한 인물이었고 인도인들에게는 예언자였겠지만, 그는 고아 같은 예언자였습니다. 내 말은, 붓다는 그의 영적 아버지, 즉 천상의 아버지에 대한 인식을 일찍부터 가지지 못했단 뜻입니다. 그의 체험은 비극적인 것이었습니다. 붓다는 신의 사도로서 살고 가르치려고 시도했지만, 결국은 신이 없는 사도로 살고 가르쳤을 뿐입니다. 붓다는 안정한 항구로 가는 구원의 길로 배를 이끌어 바로 그 앞까지 갔으나, 잘못된 항해도 탓에 좋은 배가 좌초했습다. 거기서 그 배는 꼼짝도 못하게 되어 여러 세대 동안 덧없이 표류하게 된 것입니다. 당신들 인도인들 가운데는 지난 세월 동안 이 종교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멀리 보이는 평온한 항구까지 소리 지르면 닿은 만한 거리에 있지만 정작 그리로 가지는 않는데, 위대한 붓다의 이 귀한 배가 그 항구 바로 바깥에서 좌초되는 불행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불교도들이 그들의 예언자 붓다가 성립한 철학의 배를 포기하고 붓다의 고귀한 정신을 거머쥐지 않으면 이 항구에 결코 들어서지 못할 것입니다. 인도인들이 붓다의 정신에 충실히 머물렀다면, 오래 전에 영적안정, 영혼의 안식, 보장된 구원 속에 들어섰을 것입니다.알겠습니까, 고노드? 붓다는 정신으로는 신을 알았으나 마음으로 그를 발견하는데는 분명 실패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마음으로는 신을 발견했지만 정신으로 아는데는 크게 실패했습니다....[후략] --- {유란시아書} 제 4권 132:7.4 / 번역: 최광민

    천상영계의 계시라는 이 {유란시아書}의 예수는, 우주심의 정확한 아카샤 기록을 채널링해서 받아적었다는 두 세대 전 리바이 다울링의 {보병궁 복음서} 속의 예수와 왜 이리 다를까? 두 명, 혹은 세 명의 예수가 동시에 존재했던 것일까?




    4. 이사 라시드(?)와 UFO 접촉자 빌리 마이어의 {임마누엘의 탈무드}, 1963/1978년

    이 문서 역시 초고대문명과 외계문명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증산도 계열 대원출판을 통해 한국어로 번역/소개된 바 있다.


    이 문서의 "소위" 발견(?)은 매우 "비공식적"이고 "개인적"인데, 일단 이 문서의 발견자(들)이 밝히는 발견과정을 기술해 보겠다.

    1963년의 어느 날, 전직 그리스 정교회 사제였다는 (그러나 사진 몇 장을 제외하면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도 없고, 현재까지도 여전히 신원미상인) 팔레스타인계 이사 라시드는 그의 친구 스위스인 빌리 마이어 "Billy" Eduard Albert Meier와 예루살렘 구시가지 남쪽을 산책하고 있었다(고 한다). 빌리 마이어가 1997년에 한 진술에 따르면, 그때 그는 바위와 수풀 사이에서 30cm 정도의 작은 구멍을 하나 발견했다(고 한다). 구멍을 넓힌 후 이사 라시드와 빌리 마이어가 그 안으로 기어들어갔는데, 거기서 그들은 석판 아래 묻혀있던 {임마누엘의 탈무드}를 발견했(다고 한)다.

    물론 이 유물 발견은 이스라엘 발굴당국이나 그 어떤 고고학계에 전혀 보고되지 않았다. 그들이 발견을 의도적으로 숨긴 것인지, 혹은 처음부터 보고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인지는 그야말로 아무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믿음"의 영역에 속한다.

    아람어를 읽을 수 있던 이사 라시드는 내용을 빌리 마이어의 모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그 후 마이어는 세계종교의 진리 - 특별히 힌두교의 진리 -에 통달하기 위해 인도를 여행한다. 1970년 경, 이사 라시드는 {임마누엘의 탈무드}의 37장까지를 번역한 원고를 스위스에 살던 마이어의 부모집으로 보내왔다(고 한다). 이후 라시드와의 연락은 끊겼다가, 1974년 9월에 이사 라시드가 다시 편지를 보내왔다(고 한다). 그는 예루살렘에서의 자신의 작업을 이스라엘의 "어떤" 당국이 눈치채는 바람에 {임마누엘의 탈무드} 원본사본을 가지고 가족과 함께 탈출해 레바논의 난민캠프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그의 위치가 이스라엘 정보당국에 노출된 후 그를 노린 이스라엘 군에 의해 난민캠프가 엄청난 포격을 받아 다시 이라크 바그다드로 탈출했다고 적었다(고 한다). 이사 라시드를 노린 포격과 급작스런 탈출과정에서 아람어 "원본"은 (이런 식의 주장들에선 늘 그런 것처럼) 레바논의 캠프에서 소실되었다(고 한다).

    {임마누엘의 탈무드} 독일어/영어판 마지막에 부록으로 편집되어 있는 이사 라시드의 1974년 편지를 인용해 본다. 이런 류의 문서들에 늘 등장하는 전형적인 "음모론"이다.

    I have been persecuted by two different groups, both Christians and Jews, which was to be anticipated, because the scrolls are not favourable towards either religion. After my lucky escape a misfortune struck me, which cannot be made undone. First I fled from Jerusalem to Lebanon and stayed there at a refugee camp with my family. But there the Jews located me and, with their military, attacked the camp, which resulted in many deaths. Only with great difficulty my family and I escaped the massacre and we were able to flee once more. But unfortunately all scrolls got lost and they are no longer in my possession. I believe they all burned when the Jews destroyed the homes by fire, but maybe they fell into the hands of the Jews?

    예상했던대로 나는 기독교도 및 유대인에 의해 탄압받고 있었는데,  그 문서 (= {임마누엘의 탈무드})의 내용이 기독교나 유대교에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탈출에 성공한 후 돌이킬 수 없이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 우선, 예루살렘을 탈출해서 레바논의 난민캠프에 가족과 함께 머물렀는데, 유대인들이 내 거취를 파악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난민캠프를 공격해서 여럿이 죽었다. 나와 가족은 간신히 탈출하긴 했지만, 거기있던 모든 문서가 분실되었고 나는 더 이상 원본을 가지고 있지 않다. 유대인들이 공격했을때  그 문서들을 소각했거나 탈취했으리라고 생각된다.

    Then the Israelis announced that they had undertaken a punitive action against Palestinian guerrillas. However, in reality, they, together with some people from the Christian church, were after me and my scrolls. By means of the alleged punitive action they were now able to cover up and falsify the actual reason and purpose of their venture. And because of the disappearance of the original scrolls, any proof is missing that the New Testament of the Bible is an outrageous lie whereby mankind is condemned.

    이스라엘 당국은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을 응징하기 위해 군사행동을 한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사실 이스라엘 당국은 기독교도들과 합세해서 나와 그 문서를 쫓고 있었던 것이다. 보복작전이란 거짓명분으로 그들의 진짜 이유를 위장할 수 있게 되었다. 원본이 사라졌기 때문에, {신약성서}가 완전한 날조임을 입증할 증거가 사라진 것이다. --- {임마누엘의 탈무드}, [이사 라시드의 편지] / 번역: 최광민

    그후 마이어는 이사 라시드와 그 가족이 1976년 바그다드에서 암살되었다고 전한다. 역시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라시드의 "사후" 마이어가 라시드의 독일어 번역을 손질했다는 1978년에 독일어판 {임마누엘의 탈무드}가 나왔고, 1996년에 독일어/영어대역본이 출판되었다. 그래서 이 문서의 "아람어 원본"을 직접 본 사람은 (정체불명의) 이사 라시드와 빌리 마이어 두 사람 뿐이며, 그나마도 현재 마이어 한 명만 생존한 "증인"이다. 이사 라시드 혹은 마이어에 따르면 아람어 원본은 이사 라시드를 노린 이스라엘 정보당국의 난민캠프 포격 중 소실되었으니, 마이어에 의해 출판된 독일어 번역본이 이 문서의 사실상 "원본"인 셈이다.


    UFO 접촉자 빌리 마이어, 'Billy' Eduard Albert Meiers와 그가 1964년에 인도에서 찍었다는 UFO (출처: Wikimedia Commons)




    神 (El): 심우주에서 금속우주선을 타고 온 인류형 초지성체?

    그나저나 이사 라시드에 이어 이 아람어 문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는 빌리 마이어는 또 누구던가?

    그는 플레이아데스 성단에서 온 우주인 셈야제와 접촉하고 그 메시지를 책으로 엮은 {Message from the Pleiades /(한국 번역서 명) 그대 반짝이는 별을 보거든}의 저자이며, {Message from the Pleiades, Vol. 2}에서는 자신이 외계로 가서 직접 예수(Jmmanuel)을 만났다고 주장해온 인물이다. 마이어의 추종자들은 예수를 뜻하는 "임마누엘(Immanuel)"에서 I를 J로 바꿔 "Jmmanuel"로 표기하며, 이전에 포스팅한 {소위, 아크나톤 18계명의 정체}에 소개한 {피닉스 저널}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만약 이사 라시드란 정체불명의 인물이 발견했다는 이 문서를 고고학적인 진본문서로 간주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가 외계적 존재이며, 특별히 플레이아데스 성단의 외계인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부터 우선 인정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임마누엘의 탈무드}는 마이어가 플레이아데스 외계인으로부터 들은 메시지와 상당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임마누엘의 탈무드}에는 UFO와 흡사한 물체를 통해 이동하는 예수가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가령, 아래의 진술은 예수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은 직후를 묘사한다.

    33. Behold, after these words Jmmanuel entered into the metallic light, which climbed into the sky, surrounded by fire and smoke, and passed over the lifeless sea, as the singing of the metallic light soon faded away...

    [33] 보라, 이 말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 필자 주)이 들린 후에, 임마누엘 (=예수 / 필자 주)는 금속성 광채 속으로 들어가자, 그것은 하늘로 떠올라 불과 연기에 휩싸여 사해 위로 날아갔으며,  곧 금속성 광채의 굉음이 사라졌다...  --- {임마누엘의 탈무드}, 제 4장 / 번역: 최광민

    이후 예수는 (기독교 {복음서}의 설명처럼 사막에서 40일간 단식하며 사탄에게 시험받은 것이 아니라), 지구의 북극 근처에 가서 지구와 우주와 생명의 신비 등을 전수받고 온다.


    UFO 접촉자 에두아르드 빌리 마이어의 {플레이아데스 성단으로부터의 메시지 Message From the Pleiades} 시리즈



    그럼 {임마누엘의 탈무드}에 나오는 '신/엘'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는 '창조주'가 아니며 "광대한 심우주의 별들에서 금속제 우주선을 타고 지구로 와서 세 종류 인류를 지배하는 초지성/초영성의 외계지성체" 혹은 "외계인"이다.

    기독교의 정경 {복음서}들의 기술과는 달리, {임마누엘의 탈무드}는 예수가 유대인들을 격분시킨 이유는 "성전모독" 같은 것이 아니라 신에 관한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 때문인 것으로 설명한다. 아래는 예수가 체포되어 산헤드린에서의 재판 중 대제사장 카이아파스 앞에서 했다는 진술이다. {임마누엘의 탈무드}에서 인용한다.

    53. "god has come from the vastness of the universe and has brought the world under his will; therefore he is the supreme emperor of these three human populations. 54. "One of them is here in this country, which you have deprived of its rights an자d subjugated; another is in the east as far as the land of India, and the third is in the north from the land of the king with horns to the sea where icy mountains drift in the water. 55. "There are seven human lineages living in all the directions of the wind, from one end of the Earth to the other; 56. "god is lord over them also, although they serve other gods who also are not of this Earth. 57. "If you consider god to be Creation, you are mistaken and commit a sacrilege against the truth. 58. "Just as you are human like I am, so god is human, except that in spirit and consciousness he is very much more advanced than the human lineages procreated by him; 59. "god and his celestial sons are other human lineages who have come from the stars out of the depths of space in their machines of metal. 

    [53] 신은 광대한 우주에서 왔으며 이 세계를 그의 의지 아래 두셨다. 그래서 그는 이 세 그룹 인류들의 지고의 지배자이시다. [54] 이 세 그룹의 인류 가운데 하나는 너희가 권리를 빼았고 굴종시킨 이곳 유대인들이고, 다른 그룹은 저 멀리 동방의 인도인이며, 마지막으로는 뿔 달린 (투구를 쓴 / 필자 주) 왕의 땅으로부터 빙산이 흐르는 북방지역에 사는 이들이다. [55] 지구 온 땅에는 총 7그룹의 인류가 살고 있다. [56] 비록 그들이 지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온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지만, 신은 그들 모두 위에 군림한다. [57] 만약 너희가 신을 창조주라고 생각한다면, 너희는 진리를 모독하는 죄를 짓는 것이다. [58] 신은 너희나 나처럼 인간이다. 다만 영과 의식수준에 있어 그로부터 나온 인류들보다 엄청나게 진보되어 있을 뿐이다. [59] 신과 그의 천상의 아들들 역시 광대한 심우주의 별들로부터 금속제 우주선 (머신)을 타고 지구에 온 또 다른 인류인 것이다.  --- 이시 라시드 & 빌리 마이어, {임마누엘의 탈무드}, 제 28장. / 번역: 최광민

    아니나 다를까, 인도 이야기가 빠질 리 없다. 인도 이야기는 곳곳에 등장하는데, 가령 {임마누엘이 탈무드} 속 예수는 그를 취조하는 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23] Furthermore, I have travelled extensively to faraway places and lived for may years in the land of India. There I was taught much knowledge and many secretes by the great wise and knowledgeable men who are known as masters. [24] When I have fulfilled my mission here, I will return there with Thomas, my brother, who is a faithful disciple of mine......

    더 나아가, 나는 멀고 먼 곳까지 여행했고, 인도에서 수 년간 머물렀다. 거기서 나는 지혜와 지식에 통달한 마스터들로부터 큰 지식과 비밀들을 전수받았다. 내가 이곳 (이스라엘)에서의 임무를 완수 한 후, 나는 내 형제이자 나의 진실한 사도인 토마스/도마와 함께 인도로 돌아갈 것이다. --- 이사 라시드 & 빌리 마이어, {임마누엘의 탈무드} 제 28장 / 번역: 최광민

    그래?




    "셈야자": "백인"의 시조 아담의 생부인 외계인, 우주여행자 ?

    사실 {임마누엘의 탈무드}와 빌리 마이어의 "플레이아데스 성단인" 이야기와의 관계는 꽤 노골적이다. 가령, {임마누엘의 탈무드}의 제 1장은 백인 ({임마누엘의 탈무드}의 용례로 백인은 인도인, 유대인, 유럽인을 지칭)의 시조 아담의 아버지인 "셈야자"란 외계인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2] Semjasa, the celestial son and guardian angel of god, the greater ruler of the voyagers who traveled here through vast expanses of the universe, took a terrestrial woman and begot Adam, the father of the white human population...."  --- {The Talmud of Jmmanuel}, Chpter 1. The Genealogy of Jmmanuel

    "...우주의 아들이자, 신을 수호하는 천사이자, 광대한 우주를 여행하여 지구로 온 항해자들의 위대한 지도자인 셈야자는 인간의 여인을 통해 모든 백인의 조상이 되는 아담을 낳았다 --- {임마누엘의 탈무드} 1장, [임마누엘/예수의 족보}  / 번역: 최광민 

    개인적인 생각으론, 빌리 마이어는 이 '셈야자'를 유대교 위경인 {에녹서 I}에서 베껴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창세기} 6장의 내용을 지상을 감시할 임무를 가진 천사계급 (=아람어: עִיר 이르, 그리스어:  ἐγρήγοροι)중 일부와 인간여자들 사이의 성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풀이하는 {에녹서} 1권 6장에서 이 천사들의 반란을 주도한 천사의 이름이 바로 '셈야자 (아람어: שמיחז, 그리스어 Σεμιαζά) '이기 때문이다.

    신약성서 {유다서}는 이렇게 진술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창세기}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또 자기네가 통치하는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들의 거처를 떠난 천사들을, 그 큰 날의 심판에 붙이시려고, 영원한 사슬로 매어서 어둠에 가두어 두셨습니다…. 한국어 표준새번역  {유다서} 1장 6절

    {에녹서} 제 1권의 6장에서 천사의 타락을 주도한 지도적 천사들은 Samlazaz (=셈야자) 이하 Araklba, Rameel, Kokablel, Tamlel, Ramlel, Danel, Ezeqeel, Baraqijal, Asael, Armaros, Batarel, Ananel, Zaq1el, Samsapeel, Satarel, Turel, Jomjael, Sariel 이며, 그 이외에 등장하는 하위 그룹의 천사들은 Semjaza, Armaros, Baraqijal, Kokabel, Ezeqeel, Araqiel, Shamsiel, Sariel. 이들은 인간에게 사악한 기술을 가르치기는 했지만, 다른 신화체계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적 '문화영웅'의 원형을 가지고 있다.

    {에녹서}에서 발췌/인용한다.

    …And it came to pass when the children of men had multiplied that in those days were born unto them beautiful and comely daughters. 2 And the angels, the children of the heaven, saw and lusted after them, and said to one another: 'Come, let us choose us wives from among the children of men 3 and beget us children.' And Semjaza, who was their leader, said unto them: 'I fear ye will not 4 indeed agree to do this deed, and I alone shall have to pay the penalty of a great sin.' And they all answered him and said: 'Let us all swear an oath, and all bind ourselves by mutual imprecations 5 not to abandon this plan but to do this thing.' Then sware they all together and bound themselves 6 by mutual imprecations upon it. And they were in all two hundred; who descended in the days of Jared on the summit of Mount Hermon, and they called it Mount Hermon, because they had sworn 7 and bound themselves by mutual imprecations upon it. And these are the names of their leaders: Samlazaz, their leader, Araklba, Rameel, Kokablel, Tamlel, Ramlel, Danel, Ezeqeel, Baraqijal, 8 Asael, Armaros, Batarel, Ananel, Zaq1el, Samsapeel, Satarel, Turel, Jomjael, Sariel. These are their chiefs of tens…. --- {에녹서} 1권 6장

    ....사람의 자손들이 번성하던 시절, 인간들에겐 아름답고 준수한 딸들이 태어났었다. 천상의 자녀들이 천사들이 그 딸들을 보고 음욕에 빠져 서로 말하길, "자, 이제인간의 딸들 가운데서 우리의 아내를 골라 우리의 자녀를 낳도록 하자'라고 했다. 그들의 지도자인 셈야자는, "나는 너희들이 이 일에 동조하지 않아서 나 혼자서 이 대죄에 대한 댓가를 지게 될까 두렵다. "라고 했다. 그러자 그들 모두는, "우리 모두 맹세 하고 이 계획을 반드시 지켜내기 위해 공동책임을 지자'고 했다. 그들은 총 200명이었고 야렛의 시절에 헤르몬 산 정상에 내려왔는데, 그때 그들이 공동책임에 대해 상호맹세를 했기 때문에 그 산을 그렇게 이름 지었다. 그들 지도자들의 이름은 지도자로 셈라자즈, 아라카바, 라미엘, 코카브렐, 탐렐, 람렐, 다넬, 에제키엘, 바라케잘, 아사엘, 아르마로스, 바타렐, 마나넬, 자키엘, 삼사피엘, 사타렐, 투렐, 로미야렐, 사리엘 등이다. 이들은 각각 10명의 천사를 이끌었다..  ...[후략]   / 번역: 최광민



    {에녹서} 1권은 천사가 어떻게 타락했고, 왜 노아의 홍수가 필수적이었는지를 설명한다. 에녹서 1권은 {창세기} 6장에 대한 일종의 보충설명으로 볼 수 있는데, {창세기} 6장은 “신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고 이들은 네피림이었다”라고 기술한다. 누가 '신'의 아들들인지, 누가 '사람'의 딸들인지 그리고 네피림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정경에는 분명히 나와있지 않다.

    {에녹서} 1권에는 이 “자기 위치를 떠난 천사들(Watchers)”에 대해 길고도 장황하게 설명되어 있다.  {에녹서} 1권은 이 타락한 천사들과 그 자손인 네피림에 대해 설명한다. 따라서 {에녹서}에 따르면 천사의 타락은 두번에 걸쳐 일어난 셈이다. 하나는 에덴동산에서의 사탄의 유혹, 그리고 그 다음에 일어난 {에녹서}의 타락이다. 실제로도 {에녹서}는  (대홍수의 원인을 타락한 인류로 설명하는 정경 {창세기}와는 다소 다르게) 대홍수는 이들 타락한 천사들의 자손인 네피림의 전횡에 대한 신의 징벌로 기술한다.

    {에녹서}는 '신의 아들'은 세상을 감시하라고 '파견된 천사'들, '사람의 딸'은 문자 그대로 '인간의 딸'들, 네피림은 타락한 천사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일종의 돌연변이 거인 (130미터 혹은 13미터)으로 설명하고 있다. {에녹서}에 따르면 타락한 천사들은 인간들에게 악한 기술들을 전수하였고, 그들의 자손인 네피림들은 처음엔 인간 위에 군림하며 착취하다가 나중에 인간들과 생물들을 죽여 피를 마시며 땅을 휘젓고 다니며, 결국 네피림들끼리 서로 죽이는 상잔을 저질렀기 때문에, 이에 분노한 신의 명령으로 대천사들은 타락한 천사들과 네피림들을 대홍수로 응징하고 무저갱에 가두었다고 진술한다. 이런 개념들은 왠지 고대의 프로메테우스 설화와 티탄 (거신족) 대한 설화를 연상케 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에녹서}는 20세기 발 UFO 컬트 들이 즐겨 인용하는 문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에녹서}의 셈야자와 200명의 타락천사들은 아담의 5대손에 해당하는 야렛의 시절에 지상에 내려왔기 때문이다. 야렛은 아담 후 460년 후 태어난 것으로 {창세기}에 기술된다. {에녹서} 셈야자가 {임마누엘 탈무드}의 그 '셈야자'라면, 어떻게 그 셈야자는 아담의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그럼 아담의 어머니어야 할 '사람의 딸'은 또 누구인가? 게다가 그럼 아담이 바로 '네피림'이어야 하지 않는가?  대홍수 때 살아남은 노아와 그 가족을 제외한 인류 전체가 그럼 네피림이었단 소린가? 하지만 노아는 '네피림'인 아담의 자손이니 역시 '네피림' 아닌가? 혹시 아담 이후론 '사람의 딸'들과만 통혼해서 다시 인간의 피에 가까와진건가? 즉, '네피림'은 천사/인간 1대 하이브리드에만 적용되는가?

    그게 아님 셈야자는 두 명이었던 걸까?




    "셈야제": 빌리 마이어와 다년 간 접촉한 플레이아데스 출신 미녀 외계인 ?

    흥미로운 일이다. {임마누엘의 탈무드}가 전하는 "백인"의 시조 아담의 아버지는 우주여행자 "셈야자/Semjasa"이고, {임마누엘의 탈무드}를 독일어로 펴낸 UFO접촉자 빌리 마이어가 만났다는 플레이아데스 성단인의 이름은 "셈야제/Semjase"이니 말이다. "셈야-"는 우주 (혹은 플레이아데스)에서 인기있는 돌림자인듯.


    빌리 마이어가 여러 차례 접촉했다는 플레이아데스 성단인 셈야제 (Semjase)의 초상. 마이어에 따르면, 셈야제의 당시 나이는 344세, 신장은 170센티미터, 흰 피부에 푸른 눈, 금발이라고 함. (출처: Wikimedia Commons)

    백인종은 (아마도 플레이아데스 성단에서 온) 멀고 먼 옛날 우주여행자 "셈야자"가 인간과 관계해 낳은 아담에서 비롯되었을까? (몇 장의 사진 이외에는 정체가 알려진 바 없는) "이사 라시드"는 빌리 마이어가 묘사한 것과 같은 인물일까? 그들은 정말 예루살렘 근방의 발굴되지 않은 예수의 무덤에서 2000년 전의 아람어 원본문서를 "발견"했을까? 이스라엘 정보당국은 문제의 아람어 문서를 탈취하기 위해 레바논 난민캠프를 심지어 "포격"했을까? 정체불명의 어떤 조직은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바그다드까지 숨어들어간 이사 라시드와 그 가족을 "암살"했을까? 그런데 그들은 왜 훗날의 화근을 미리 막기위해 빌리 마이어까지 암살하지는 않았을까? 빌리 마이어가 수 차례 만났다는 플레이아데스 성단 출신 금발미녀 "셈야제"는 아담의 아버지인 우주여행자 "셈야자"와는 어떤 관계일까? 빌리 마이어가 우주에서 직접 만났다는 예수는 자신의 {탈무드} 출판에 대해 뭐라고 논평했을까?

    그나저나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가서 임마누엘 (예수)를 직접 만나고 왔다는 UFO접촉자 빌리 마이어가 그가 셈야제로부터 받은 메시지와 거의 같은 내용을 담은 {임마누엘의 탈무드}를 예루살렘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은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 아닌가?

    이 문서(들)를 역사기록으로 받아들일지, 혹은 진부한 UFO컬트물로 받아들일지의 판단은 각자의 몫.

    가장 아이러니한 일은, 일부 소위 "명상가"들이 등 서로 모순되는  {이사전}, {유란시아서}, {보병궁 복음서}, {임마누엘의 탈무드}를 정확한 역사물 혹은 신성한 계시로 간주해 나란히 놓고 읽는다는 점이다.




    5. 니콜라스(니콜라이) 노토비치의 {이사傳 / The Unknown Life of Jesus Christ}, 1894

    그럼 이제부터, 위에 언급된 "복음서"들 가운데 "그나마" 가장 "역사적인 문서"로 "믿어져" 학계에서 잠시나마 공개적 논란을 일으켰던 노토비치의 {예수 그리스도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 (이하, "이사전")을 둘러싼 문제들을 설명해 보겠다.

    이 문서에는 우주에서 온 신이니 외계인이니 혹은 아카샤 기록이니 하는 소재가 등장하지 않으니, 앞에 언급한 문서들과는 확실한 차이가 있다.

    우선, 정체가 묘연한 인물인 니콜라스 노토비치에 대해 정리해 보자.


    니콜라스 노토비치 (source: Wikipedia)

    (자신의 소개에 따르면)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한 러시아 유대인이라는 노토비치는 1887년 기자 (혹은 스파이, 혹은 둘 다)의 신분으로 인도와 티벳의 국경에 위치한 라다크(Ladakh)주(州)의 수도 레(Leh)를 방문하게 된다. 그곳에 있던 프로테스탄트 모라비아 교단의 선교본부에서 치통치료를 받으려는 것이었다.


    헤미스/히미스 사원 (source: Wikimedia Commons)

    몇년 후인 1894년, 노토비치는 예수의 과거행적을 찾아냈다는 책을 한 권 썼다. 자신이 레 인근의 티벳불교의 사원인 히미스 (Hemis/Himis) 사원에 가서 "이사/Issa"라 불리는 예수 (아랍어로 "이사")의 이야기와 매우 유사한 민간전설을 듣게 되었고, 히미스 사원에 팔리어에서 번역된 {聖 이사傳/ The Life of St. Issa}이라 불리는 티벳어 사본이 소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는 것이다. 노토비치의 진술에 따르면, 처음 사본의 열람을 요청하길 주저하여 그냥 떠나려 했는데, 사원을 떠나 돌아가는 길에 낙마하여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다시 사원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다리가 회복되는 동안 승려들에게 요청하여 그 고문서를 읽어달라고 한 후 이를 다시 번역하였다는 것이다.

    노토비치의 주장에 따르면, 이때의 노트를 바탕으로 그는 1894년 프랑스어 판 {La vie inconnue de Jesus Christ / The Unknown Life of Jesus Christ}를 서방세계에 출간하게 되었는데, 출간 즉시 서방세계에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아래는 1916년 미국에서 발간된 영어번역본 제 4판.


    http://www.archive.org/stream/unknownlifeofjes00noto?ui=embed#page/n5/mode/2up




    5.1. 옥스포드 대학의 종교학자 막스 뮐러의 1차 반박, 1895년

    독일 출신의 옥스포드 대학 종교학 교수, "현대 종교학의 아버지"이자 동양학자인 막스 뮐러(Max Müller)는 동방의 경전을 총집대성한 {The Sacred Books of the East} 시리즈의 편집책임자로서 노토비치의 이 "새 발견"에 관심을 둘 수 밖에 없었다.


    막스 뮐러 (source: Wikimedia Commons)

    뮐러는 노토비치의 책을 살펴본 후 노토비치의 진술 속에서 몇가지 의혹을 찾아내 1894년 학술지 {The Nineteenth Centuries}에 제시했다. 전문은 부록에 실었다.


    {The Nineteenth Century} Vol XXXVI, 1894
    https://books.google.cl/books?id=3N0aAAAAYAAJ&printsec=frontcover&source=gbs_ge_summary_r&cad=0#v=onepage&q&f=false

    우선 뮐러는 노토비치가 자신의 여행경로나 원본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기는 했지만, 사실 노토비치 말처럼 사진자료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일이니 일단 분실가능성은 열어둔다. 

    다만 노토비치 이전에 티벳의 마하트마 (도인) 들로부터 교시를 받아왔다는 신지학의 창시자 블라바트스키나 그 마하트마들이 보낸 편지들의 주요 수신인이던 Alfred Percy Sinnett 역시 어떤 방식으로 어떤 경로를 통해 티벳을 방문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바 없다는 점을 들며 노토비치를 우회적으로 꼬집는다.

    뮐러는 19세기 말 신지학의 창시자 마담 블라바트스키를 필두로 서방의 여러 구도자들이 특별히 "티벳"에 집중적으로 매혹된 이유에 대해 1894년에 발표된 반박문에서 아래와 같이 비평한다.

    Even Central Asia and Central Africa are no longer safe, and, hence, no doubt, the great charm which attaches to a country like Tibet, now almost the only country some parts of which are still closed against European explorers. It was in Tibet, therefore, that Madame Blavatsky met her Mahâtmas, who initiated her in the mysteries of Esoteric Buddhism. Mr. Sinnet claims to have followed in her footsteps, but has never described his or her route. Of course, if Madame Blavatsky and Mr. Sinnet had only told us by what passes they entered Tibet from India, at what stations they halted, and in what language they communicated with the Mahâtmas, it would not be courteous to ask any further questions. That there are Mahâtmas in India and Tibet no one would venture to deny. The only doubt is whether these real Mahâtmas know, or profess to know, anything beyond what they can, and what we can, learn from their sacred literature. -- Max Muller, {the Nineteenth Century} v.36, 1894년

    심지어 중앙아시아나 중앙아프리카 역시 탐험가의 발길을 더이상 피할 수 없었고 그 결과 티벳의 일부 지역 정도가 여전히 유럽 탐험가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신비의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그 결과 티벳은 마담 블라바트스키가 마하트마들을 만나 밀교불교의 신비에 입문하게 된 곳이기도 하고, 신넷이 블라바트스키의 족적을 따라갔다고 주장하는 곳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블라바트스키나 신넷은 결코 자신들이 어떤 경로로 그곳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인도를 통해 티벳에 가게 되었다고만 말할 뿐이며, 만약 그들이 어디를 경유했는지, 어떤 언어로 마하트마들과 대화를 나누었는지만 이야기해 준다면 더 이상 질문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인도와 티벳에 마하트마들이 있다는 것을 누구도 감히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이들 "진짜" 마하트마들이 그들과 우리가 그들의 종교문서를 통해 알 수 있는 어떤 것을 넘어서는 것을 알거나 혹은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 막스 밀러, {19세기} v36 / 번역: 최광민

    막스 뮐러의 또 다른 지적은 서지학적인 것인데, 이 정도의 분량과 내용을 담은 문서라면 티벳경전을 구성하는 모든 문서가 기록되어있는 티벳불교의 대장경 문서 {칸주르/Kanjur}와 {탄주르/Tanjur} 중 적어도 하나에는 등장해야 하는데, {이사전}과 같은 문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 두번째 의혹이었다.

    노토비치는 {이사전}이란 티벳문서가 원래 (남)인도에 왔던 유대인 상인들이 유대아에서 "최근 (즉 1세기 초반)"에 있었던 예수의 활동과 십자가형에 대한 이야기를 인도인에게 구술해주면서 처음 집결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고, 그 이야기를 듣던 인도인 중 일부는 몇 년 전에 이미 인도에서 예수를 만났던 적이 있었던 사람이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뮐러는 이럴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았다. 그 이유는 예수의 처형을 목격한 후 곧 예루살렘을 떠나 남인도로 왔던 유대인 상인들과 북인도와 티벳에서 몇 년전 예수/이사를 만났다는 사람들이 폰티우스 필라투스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사형집행된 예수를 동일인으로 즉시 인지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점이다. 게다가 "예수"라는 이름을 팔리어로 "이사"라고 불렸다면, 왜 "폰티우스 필라투스"라는 라틴어 이름은 팔리어가 원본이라는 {이사전}에서조차 왜 그 이름 그대로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시했다.



    아울러 막스 뮐러는 라다크주의 레와 인근 히미스 사원을 최근 방문한 한 영국인 여성이 보내온 편지를 1894년 6월 29일에 공개했다. 노토비치의 책이 서방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그 여성은 마침 히미스 사원에 들렀을 때 그곳의 승려들에게 노토비치의 진술을 재확인해본 후, 승려들이 그런 러시아인은 지난 50년 간 사원에 온 적도 없고 히미스 사원에는 예수에 대한 그런 기록도 없다고 증언했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이 여성의 편지를 막스 뮐러의 글에서 인용한다.

    P.S.----It is curious that at the very time I was writing this paper I received a letter from an English lady dated Leh, Ladakh, June 29. She writes:

    [밀러의 추가노트] 흥미롭게도 내가 이 논문을 쓰던 중, 6월 29일에 티벳 라다크 레에서 한 영국인 여성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


    We left Leh two days ago, having enjoyed our stay there so much! There had been only one English lady here for over three years. Two German ladies live there, missionaries, a Mr. and Mrs. Weber----a girl, and another English missionary. They have only twenty Christians, though it has been a mission-station for seven years. We saw a polo match which was played down the principal street.

    [영국인 여성의 편지] 우리는 이틀 전 레를 떠났습니다. 레에서 머물 때 얼마나 즐거웠던지요. 지난 3년 이상 영국인 여성이라곤 단 한 명 뿐이었고, 두 명의 독일 여성들과, 선교사인 웨버 부부와 한 소녀와 또 다른 영국인 선교사가 살고 있습니다. 레에는 7년 간 선교본부가 있었지만 20여 명의 기독교도만 있습니다. 우리는 대로에서 벌어진 폴로 경기를 관람했습니다.

    Yesterday we were at the great Himis monastery, the largest Buddhist monastery up here----800 Lamas. Did you hear of a Russian who could not gain admittance to the monastery in any way, but at last broke his leg outside, and was taken in? His object was to copy a Buddhist Life of Christ which is there. He says he got it, and has published it since in French. There is not a single word of truth in the whole story! There has been no Russian there. No one has been taken into the Seminary for the past fifty years with a broken leg! There is no Life of Christ there at all! It is dawning on me that people who in England profess to have been living in Buddhist monasteries in Tibet and to have learnt there the mysteries of Esoteric Buddhism are frauds.


    어제 우리는 장대한 히미스 사원에 갔었습니다. 800명의 승려가 거주하는 이 지역의 가장 큰 불교사원이죠. 그런데 (히미스 -- 필자 주) 사원에 들어가려고 애쓰다가 거절 당했다가 막판에 다리가 골절되는 바람에 사원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어떤 러시아 사람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그 러시아인의 목적은 그 사원에 있다는 불제자 예수의 전기를 복사하려는 것이었답니다. 그는 그 문서를 결국 얻게 되었고 그 후 프랑스어로 번역출판하였다고 주장한다죠? 그 사람 말은 하나도 믿을 것이 없어요. 그 사원에는 러시아인이라고는 있어본 적이 없어요. 지난 50년 간 다리가 부러진 어떤 사람이 경내에 들어온 적이 없다고 합니다! 물론 예수의 전기 같은게 있지도 않고요. 티벳에 있는 불교사원에 거쳐하면서 밀교계통 불교의 신비를 배웠다느니 주장하는 영국인 사기꾼들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번역: 최광민

    The monasteries one and all are the most filthy places. The Lamas are the dirtiest of a very dirty race. They are fearfully ignorant, and idolaters pur et simple; no----neither pure nor simple. I have asked many travellers whom I have met, and they all tell the same story. They acknowledge that perhaps at the Lama University at Lassa it may be better, but no Englishman is allowed there. Captain Bower (the discoverer of the famous Bower MS.) did his very best to get there, but failed.

    이곳 (불교)사원들은 하나같이 불결합니다. 승려들은 그 중에서도 아주 지저분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끔찍히도 무지하며 순진하고 단순한 우상숭배자들입니다. 아니, 순진하지도 단순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만난 많은 여행자들 역시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라싸에 있는 승가대학은 나을 것이라고 인정합니다만, 영국인들은 거기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 유명한 보워 사본의 발견자인) 보워 대위도 거기 들어가 보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 번역: 최광민

    ... We are roughing it |522 now very much. I have not tasted bread for five weeks, and shall not for two months more. We have 'chappaties' instead. We rarely get any butter. We carry a little tinned butter, but it is too precious to eat much of. It was a great luxury to get some linen washed in Leh, though they did starch the sheets. "We are just starting on our 500 miles march to Simla. We hear that one pass is not open yet, about which we are very anxious. We have one pass of 18,000 feet to cross, and we shall be 13,000 feet high for over a fortnight; but I hope that by the time you get this we shall be down in beautiful Kulu, only one month from Simla!  

    막스 뮐러는 그리스어/라틴어와 같은 서양 고전어 뿐 아니라, 아랍어, 페르시아어, 그리고 산스크리트어 같은 동양의 고전어에도 능통했다.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위해 미리 밝혀두자면, 뮐러는 불교와 기독교 사이에 유사성이 발견됨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자신은 두 종교의 역사적인 연계성의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누구든 그 증거를 제시해 준다면 극도로 감사할 것이라고 일찌기 언질한 바 있다. 따라서 인도문명에 깊은 애정을 지녔던 막스 뮐러가 불교에 대해 편견을 가졌거나 혹은 기독교를 방어하기 위해 부당하게 노토비치의 주장을 배척했다고 볼 이유는 거의 없다.

    뮐러의 1883년 저작 {India, What can it teach us?} 279페이지에서 인용한다.

    ....That there are startling coincidences between Buddhism and Christianity cannot be denied; and it must likewise be admitted that Buddhism existed at least four hundred years before Christianity. I go even further and say that I should be extremely grateful if anybody would point out to me the historical channels through which Buddhism had influenced early Christianity. I have been looking for such channels all my life, but hitherto I have found none. What I have found is that for some of the most startling coincidences there are historical antecedents on both sides; and if we once know these antecedents the coincidences become far less startling." --- {India, What can it teach us?}, Max Müller, 1883

    ... 불교와 기독교 사이에 놀랄만한 공통점이 있다는 점은 부정될 수 없다. 또한 불교가 기독교보다 최소한 400년 전부터 존재했다는 점도 인정되어야 한다. 나는 더 나아가서 누구든 불교가 초기 기독교에 영향을 준 역사적 경로들에 대해 내게 지적해 준다면 극도로 감사할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내 평생에 걸쳐 그런 경로들에 대해 연구해 왔지만, 아직까지는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발견한 점은 가장 놀랄만큼 공통점을 보이는 몇몇 사례들의 경우, 양측 모두 역사적인 전례들 가지고 있다는 점과, 우리가 일단 이 전례들을 알게되면 양측의 공통점이 훨씬 덜 놀랍게 여겨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 막스 밀러, {인도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 , 1883년  / 번역: 최광민




    5.2. 노토비치의 말바꾸기, 1895년

    1894년 막스 뮐러의 공개적 반박이 있은 후, 노토비치는 이듬해인 1895년 런던판의 서문에서 막스 뮐러의 반박내용에 답했다. 이 과정에서 노토비치는 자신의 주요진술 몇가지를 대폭 수정했다.

    그가 번복한 내용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노토비치는 원래 자신의 책 1판에서는 히미스 사원의 서고에 2권의 {이사전}이 있었다고 주장한 것을 번복했다. 대신 {이사전}에 담긴 내용은 어떤 단일한 "책"의 형태로 존재한 것이 아니었고, 서고 이곳 저곳에 있던 제목없는 여러 티벳문서들에 흩어져있던 단편적인 내용들을 "모아" 자신이 책의 형태로 재편집했다는 것이다. 즉, 히미스 사원에는 {이사전}이란 것이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따라서, 노토비치는 (막스 뮐러가 주장하듯) 자신의 책이 티벳대장경 목록에 나오지 않는 이유를, 그 내용이 "어떤 제목도 붙지않은 여러 책에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의 원래의 주장을 분명히 뒤집은 것이다.

    노토비치가 자신의 진술을 번복하는 과정을 직접 들여다보자.

    1판에서 노토비치는 팔리어로 된 이 문서의 원본은 라싸 인근의 마르보르 사원에 있고, 자신이 히미스 사원에서 본 것은 티벳어로 번역된 2권 혹은 2종의 완결된 사본형태로 된 것이라고 했다.

    "...The two manuscripts, from which the lama of the convent Himis read to me all that had a bearing upon Jesus, are compilations from divers copies written in the Thibetan language, translations of scrolls belonging to the library of Lhassa and brought, about two hundred years after Christ, from India, Nepaul and Maghada, to a convent on Mount Marbour, near the city of Lhassa, now the residence of the Dalai-Lama. These scrolls were written in Pali, which certain lamas study even now, so as to be able to translate it into the Thibetan. The chroniclers were Buddhists belonging to the sect of the Buddha Gothama...."

    히미스 사원의 승려/라마는 예수에 관한 내용을 담은 두 사본을 내게 읽어주었는데, 그것들은 티벳어로 적힌 여러 필사본들로부터 종합된 것이었고, 이는 원래 라싸의 사원도서관에 소장된 두루마리에서 번역된 것이었다. 예수의 시절에서 200여년 동안, 인도, 네팔, 마가다 등에서 달라이 라마가 거주하는 라싸 근방의 마보르산의 사원에까지 오게 된 것이다. 원래 이 두루마리들은 팔리어로 작성되어 있었고, 현재도 팔리어를 공부하는 승려들은 이 문서들을 티벳어로 번역할 수 있었던 것이다. 편찬자는 고타마 붓다의 종단에 속한 불교도들이었다...   --- 니콜라스 노토비치, {예수 그리스도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 (이사전)}, 제 1판 / 번역: 최광민

    이 진술을 번복해서 노토비치는 이렇게 적는다:

    "...The truth indeed is that the verses of which I give a translation in my book are probably not to be found in any kind of catalogue, either of the Tandjur or of the Kandjur. They are to be found scattered through more than one book without any title; consequently they could not be found in catalogues of Chinese or Tibetan works...."

    내 책 속에 번역된 내용들이 {탄주르}나 {칸주르} 같은 대장경 목록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이 내용들은 제목이 붙지 않은 여러 권의 책에 흩어져 있었고, 이 때문에 결과적으로 중국이나 티벳의 대장경 목록에 등장할 수 없었다... --- 니콜라스 노토비치, {예수 그리스도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 (이사전)}, 제 2판 / 번역: 최광민

    "compiled from divers copies written in the Tibetan tongue, translated from rolls belonging to the Lassa library, and brought from India, Nepal, and Maghada two hundred years after Christ. These rolls were placed in a convent standing on Mount Marbour, near Lassa."

    이 문서는 예수로부터 200년 동안 인도, 네팔, 마가다 등으로부터 가져와 라싸의 도서관에 소장된 여러 두루마리로부터 티벳어로 번역된 다양한 사본들로부터 종합된 것이다. 원본 두루마리는 라싸 근방의 마보르산에 있는 사원에 위치되어 있다.  --- 니콜라스 노토비치, {예수 그리스도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 (이사전)}, 제 2판 / 번역: 최광민

    자신을 변호하면서, 노토비치는 자신의 작업이 호메로스가 {일리아드}를 쓸때 여러 소스에서 짜깁기한 것과 같은 것이라고 스스로를 변호했다. 즉, 그의 {이사전}은 문서적 증거가치가 떨어지는 (최소한) "짜깁기"임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또한, 노토비치는 예수의 처형사건을 인도에 전해준 것은 유대인 상인들이었다는 최초의 진술을 바꿔, 예루살렘에서 우연히 예수의 십자가형을 목격했던 인도인 상인들이었다고 번복했다.

    1판에서 노토비치가 했던 원래의 진술은 이렇다.

    "....The manuscripts relate to us, first of all,--according to the accounts given by merchants arriving from Judea in the same year when the death of Jesus occurred--that a just man by the name of Issa, an Israelite, in spite of his being acquitted twice by the judges as being a man of God, was nevertheless put to death by the order of the Pagan governor, Pilate, who feared that he might take advantage of his great popularity to reestablish the kingdom of Israel and expel from the country its conquerors. Then follow rather incoherent communications regarding the preachings of Jesus among the Guebers and other heathens.They seem to have been written during the first years following the death of Jesus, in whose career a lively and growing interest is shown..."

    그 사본은 예수가 죽던 해에 유대아로부터 (인도에) 도착한 상인들에 남긴 설명에 따라, '이사 (예수)'라 불리는 정의로운 유대인이, 재판관들이 그를 '신이 보낸 사람'으로 두번이나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대중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이스라엘 왕국을 재건하고 정복자를 몰아낼 것을 두려워한 이교도 총독인 빌라도에 의해 결국 처형된 사건을 우리에게 전한다.....(중략)....(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이 기록들은 예수의 죽음에 이어지는 첫 해 동안 기록된 것으로 보이며.....  --- 니콜라스 노토비치, {예수 그리스도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 (이사전)} 1판 / 번역: 최광민 



    노토비치가 2판에서 번복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they were not Jewish but Indian merchants who happened to witness the crucifixion prior to returning home from Palestine....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팔레스티나에서 인도로 돌아가기 전 우연히 (예수의) 십자가형을 목격한 인도인 상인들이었다. --- 니콜라스 노토비치 / 번역: 최광민

    히미스 사원의 주지를 만나 그의 전언을 옮겨 막스 밀러에게 보낸 여성의 편지에 대해서는, 동양인들이 원래 서구인들을 강도로 여기기 때문에 주지가 거짓말 한 것으로 주장했다. 반면, 주지가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던 이유는 자신이 서유럽인이 아니며 동방의 외교증을 여행 중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Orientals are in the habit of looking upon Europeans as robbers who introduce themselves in their midst to despoil them in the name of civilization...because I made use of the Eastern diplomacy which I had learnt in my travels...."

    ...동양인들은 유럽인들은 문명을 전달한다면서 자신들을 망치는 약탈자로 보곤 한다.....나는 여행 중에 배운 바대로 동방의 외교증을 사용했기 때문에....

    아울러 노토비치는 바티칸이 연루된 음모론도 펼쳤다. 즉, 로마카톨릭 교회는 이 문건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인도/중국/이집트/아라비아에 있던 선교사들의 보고를 바탕으로 바티칸 도서관에 63종의 해당문서를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전혀 확인된 바 없으며, 그에게 이런 정보를 주었다는 익명의 로마카톨릭 추기경이 노토비치가 누구를 통해서 이런 내부정보를 습득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아래와 같이 "주장"할 뿐이다. 이런 분야의 음모론은 늘 이런 식이다.

    "....I may however add to what I have already said in my introduction as to having learnt from him that the Unknown Life of Jesus Christ is no novelty to the Roman Church, this: that the Vatican Library possesses sixty-three complete or incomplete manuscripts in various Oriental languages referring to this matter, which have been brought to Rome by missionaries from India, China, Egypt and Arabia...."

    ...그러나 이미 서문에 언급한 대로 그(=익명의 로마카톨릭 추기경)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알려지지 않는 생애}가 로마카톨릭 교회에 낯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된 것에 아울러 다음의 내용을 덧붙이고자 한다: 바티칸 도서관은 다양한 동방의 언어로 이 사실을 다루고 있는 완벽한 혹은 부분적인 63종의 사본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것들은 인도, 중국, 이집트, 아라비아에 파송된 선교사들에 의해 로마로 보내진 것들이다  --- 니콜라스 노토비치, {예수 그리스도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 (이사전)}, 제 1판 / 번역: 최광민

    노토비치는 (1) 히미스 사원에 그 문서가 있는지와 (2) 자신이 그 문서를 제대로 옮겼는지에 대해서만 논의를 집중하자는 식으로 얼버무렸다.

    "...Did those passages exist in the monastery of Himis, and have I faithfully reproduced their substance?..."

    ...그런 문장들이 히미스 사원(의 문서에) 존재하는지, 내가 그 자료들을 믿을 수 있게 옮겼는지가....

    그래서 보다 더 철저한 조사가 이어진다.




    5.3. 인도 Government College의 교수 제임스 아치발드 더글라스 의 현지답사, 인터뷰, 반박, 1895년

    1895년, 인도 아그라에 있던 Government College의 교수 아치발드 더글라스 (James Archibald Douglas)는 3개월 간의 휴가 동안 히미스 사원을 방문해서 노토비치의 기록의 진위를 밝히기 위한 독립적인 조사에 착수한다.

    더글라스는 노토비치의 책에 기록된 경로를 따라 문제의 히미스 사원을 방문했으며, 1895년 6월 3일 히미스 사원 주지와의 인터뷰를 마친 후, 주지는 더글라스와 통역을 맡은 은퇴한 대영제국 라다크 우체국장인 샴웰 졸단 (Shamwell Joldan)와 입회 하에 질의응답서에 서명을 하고 히미스 사원 주지의 공식인감을 찍었다. 이 보고서는 옥스포드 대학의 막스 뮐러에게 봉인된 원본과 함께 보내졌으며, 같은 해 6월 "The Chief Lama of Himis on the Alleged 'Unknown Life of Christ"라는 제목으로 막스 밀러가 발행하던 {The Nineteenth Centuries}에 발표되었다.

    오해를 막기 위해 스스로 설명한 더글라스 본인의 종교관은 이렇다.

    I am not a religious teacher, and, great as is my respect for Christian missionaries, I cannot profess any enthusiastic sympathy with their methods and immediate aims. M. Notovitch cannot therefore charge me with 'missionary prejudice' or 'obstinate sectarianism.'

    나는 종교를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고, 기독교 선교사들을 높이 존중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선교방식이나 성급한 목표에 대해서는 크게 수긍하지 않는다. 따라서 노토비치는  "선교적인 편견"이라든지 '고집스런 종파주의' 따위의 혐의를 나에게 뒤집어 씌울 수는 없을 것이다.  --- 더글라스 아치발드 더글라스 / 번역: 최광민

    막스 뮐러에게 보내 공개출판된 그의 보고서에서 그의 답사과정은 아래와 같다. 그는 처음에는 노토비치의 보고내용에 열린 마음을 가졌으나, 답사과정에서 확인한 내용과 노토비치의 진술의 불일치로 인해 서서히 의혹을 가지게 된 것으로 설명한다. 가령, 해당 지역의 식생이라든지, 혹은 히미스 사원이 노토비치가 설명한 것과는 달리 외부인에게 (비록 하룻밤 묵는 것으로 제한되긴 하지만) 개방적이었다는 사실 등이 그런 예에 속한다.

    I was resident in Madras during the whole of last year, and did not expect to have an opportunity of investigating the facts respecting the Unknown Life of Christ at so early a date. Removing to the North-West Provinces in the early part of the present year, I found that it would be practicable during the three months of the University vacation to travel through Kashmir to Ladakh, following the route taken by M. Notovitch, and to spend sufficient time at the monastery at Himis to learn the truth on this important question.

    나는 작년 한 해 내내 마드라스에 거주했는데,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진위에 대해 그렇게 일찍 조사할 기회를 가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올해 초반 북서부 지방으로 떠나면서, 나는 대학의 석달 휴가 동안 노토비치의 경유지를 따라 카쉬미르를 통과해 라다크로 여행해 볼 만하며, 히미스에 있는 승원에서 충분한 시간 머물면서 이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진실을 조사할 충분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번역: 최광민

    I may here mention, en passant, that I did not find it necessary to break even a little finger, much less a leg, in order to gain admittance to Himis Monastery, where I am now staying for a few days, enjoying the kind hospitality of the Chief Lama (or Abbot), the same gentleman who, according to M. Notovitch, nursed him so kindly under the painful circumstances connected with his memorable visit.

    히미스 사원에 들어가기 위해서 다리는 고사하고 새끼손가락 하나라도 부러뜨릴 필요가 없었다는 점을 여기서 말해야 할 듯 하다. 내가 지금 며칠 째 머물고 있고, 또 노토비치에 따르면 그의 기억에 남을 만한 방문에 관련되어 있다는 (다리가 부러진 / 역자 주) 고통스런 상황에서 그를 친절히 돌봐주었다는 바로 그 주지 (혹 승정)의 호의를 즐기고 있는 바로 이곳 말이다.  
    - 번역: 최광민

    Coming to Himis with an entirely open mind on the question, and in no way biassed by the formation of a previous judgment, I was fully prepared to find that M. Notovitch's narrative was correct, and to congratulate him on his marvellous discovery.

    히미스로 오는 길에,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완전히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이미 제기된 평가에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실 노토비치의 진술이 옳은 것으로 드러날 경우 그의 놀라운 발견을 축하해 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 번역: 최광민

    One matter of detail, entirely unconnected with the genuineness of the Russian traveller's literary discovery, shook my faith slightly in the general veracity of the discoverer. Daring his journey up the Sind Valley M. Notovitch was beset on all sides by 'panthers, tigers, leopards, black bears, wolves, and jackals.' A panther ate one of his coolies near the village of Haïena before his very eyes, and black bears blocked his path in an aggressive manner. Some of the old inhabitants of Haïena told me that they had never seen or heard of a panther or tiger in the neighbourhood, and they had never heard of any coolie, travelling with a European sahib, who had lost his life in the way described. They were sure that such an event had not happened within the last ten years. I was informed by a gentleman of large experience in big-game shooting in Kashmir that such an experience as that of M. Notovitch was quite unprecedented, even in 1887, within thirty miles of the capital of Kashmir. During my journey up the Sind Valley the only wild animal I saw was a red bear of such retiring disposition that I could not get near enough for a shot.

    이 러시아 여행자의 문서발견의 진위과는 완전히 별도로, 세부사항 하나가 그 발견의 전반적인 진실성에 대한 나의 신뢰를 조금 흔들었다. 노토비치는 인더스 계곡을 따라 여행하면서 들고양이, 호랑이, 표범, 혹곰, 늑대, 들개가 도처에서 위협했다고 적으면서, 바로 그의 눈 앞에서 짐꾼 하나가 하이에나 마을 근처에서 들고양이에게 잡아먹혔고, 흑곰이 그의 앞길을 공격적으로 막아섰다고 적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사는 노인들이 내게 말하길, 자기들은 마을 근처에서 들고양이나 호랑이 무리를 본적이 결코 없으며, 또 짐꾼이나 유럽인 여행자가 묘사된 것 처럼 짐승들에게 생명을 잃었다는 이야기도 전혀 들어 본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지난 10년 간 그런 일은 절대 없었다고 확인해 주었다. 나는 카쉬미르 지역에서 많은 사냥 경험을 가진 신사로부터 노토비치가 겪었다는 일이 카쉬미르의 주도로부터 30마일 내외 지역에서는 심지어 1887년 시점에서도 꽤 전례가 없다는 점도 언질 받았다. 인더스 계곡을 따라 올라오는 길에 내가 본 유일한 야생동물이라고는 불곰 한마리 뿐인데, 그나마도 그 불곰은 낯을 가려 가까이에서 볼 수 조차 없었다.   - 번역: 최광민

    In Ladakh I was so fortunate as to bag an ibex with thirty-eight-inch horns, called somewhat contemptuously by the Russian author 'wild goats;' but it is not fair to the Ladakhis to assert, as M. Notovitch does, that the pursuit of this animal is the principal occupation of the men of the country. Ibex are now so scarce near the Leh-Srinagar road that it is fortunate that this is not the case. M. Notovitch pursued his path undeterred by trifling discouragements, 'prepared,' as he tells us, ' for the discovery of a Life of Christ among the Buddhists.'

    운좋게도 라다크에서 38인치 길이의 뿔을 가진 산양 (ibex) 을 잡을 기회가 있었다. 그 러시아 작가 (=노토비치)는 다소 무시하는 조로 "야생 염소"라 불렀다. 그러나 이 산양을 사냥하는 것을 그 지역 남자들의 주업이라고 라다크 주민들이 말했다는 노토비치의 진술은 타당하지 않은데, 산양은 현재 레와 스리나가르 도상 인근에서는 너무 드물어서 주민들이 주업으로 산양을 사냥하지 않는게 차라리 다행이다. -- 제임스 아치발드 더글라스  / 번역: 최광민



    히미스 사원에서 주지승려를 만난 더글라스는 그가 1887-1888년 사이에 히미스 사원을 방문한 다른 유럽인들을 기억했지만, 노토비치란 인물과 노토비치의 책에 기록된 히미스 사원 관련 내용과 자신에 대한 기록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진술을 받았다.

    M. Notovitch pursued his path undeterred by trifling discouragements, 'prepared,' as he tells us, ' for the discovery of a Life of Christ among the Buddhists.' In justice to the imaginative author I feel bound to say that I have no evidence that M. Notovitch has not visited Himis Monastery. On the contrary, the Chief Lama, or Chagzot, of Himis does distinctly remember that several European gentlemen visited the monastery in the  years 1887 and 1888.

    노토비치는 '불교도들 사이에서 그리스도의 생애담을 발견'하기 위해, 낙담에도 좌절하지 않고 (여행을) "준비"였다고 적었다. 이 공상적 작가에겐 불리하게도, 나는 노토비치가 히미스 사원을 방문했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고 말해겠다고 느끼게 되었다. 히미스 사원의 주지승 혹은 차그좃은 1887년에서 1888년 사이에 승원을 방문한 여러 명의 유럽인들에 대해 분명히 기억했다.  --- 제임스 아치발드 더글라스 / 번역: 최광민

    노토비치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모티프가 되는 '다리가 부러진 사연'에 대해서는 히미스 사원의 주지 및 다른 승려들에게 다음과 같은 확인을 받았다.

    In my last conversation with the Lama we talked of the story of the broken leg. He assured me that no European gentleman had ever been nursed in the monastery while suffering from a broken limb, and then went on to say that no European traveller had ever during his term of office remained at Himis for more than three days. The Abbot called in several old monks to confirm this statement, and mentioned that the hospitality offered by the monastery to travellers is for one night, and is only extended for special reasons by his personal invitation, and that he and his monks would not have forgotten so unusual a circumstance. That M. Notovitch may have injured his leg after leaving Leh on the road to Srinagar is possible, but the whole story of the broken leg, in so far as it relates to Himis Monastery, is neither more nor less than a fiction.

    그 주지스님과의 마지막 대화 가운데, 우리는 (노토비치의 / 역자 주) 부러진 다리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그 분은 그 어떤 팔다리가 부러진 유럽 남성도 사원에서 치료를 받은 적이 없다고 확인해 주었으며, 또 어떤 유럽인 여행자도 공무 중 3일 이상 히미스 사원에 머무르 적이 없다고 이야기 했다. 주지스님은 연로한 여러 승려들을 불러 이 사실을 확인해 주었으며, 또 히미스 사원이 여행자들에 베푸는 환대는 하룻밤고 주지스님의 개인적 초대 같은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만 특별히 연장된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주지스님이나 다른 승려들이 (노토비치의 경우 같은 / 역자 주) 그런 특별한 사례를 잊을 리가 없을 것이다. 노토비치가 레를 떠나 스리나가르로 가는 길에 다리에 부상을 입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부러진 다리'와 히미스 사원에 관련된 전체 이야기는 그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 제임스 아치발드 더글라스 / 번역: 최광민

    여기서 노토비치의 책과 더글라스의 보고서에 등장하는 "스리나가르"란 지명을 기억해 두자.  19세기 말에 서북인도 카쉬미르에서 발흥한 이슬람 이단인 아마디야 이슬람의 교조인 미즈라 굴람 아흐마디에 의해 널리 퍼진 소위 "서북 인도 스리나가르의 예수 무덤"이 어떤 식으로 생성되고 전파되었는지는, 그리고 이 무덤의 주인이라는 "예수"에 대한 이렇게 중요한 정보가, 어떻게 바로 그 지역을 통과했던 노토비치의 책과 더글라스의 보고서에는 단 한 줄도 등장하지 않는지는 다음 글에서 참고하기 바란다.  (** 링크: [© 최광민] 예수 vs. 붓다: 붓다는 어쩌다 예수가 되었을까?})

    더글라스는 히미스 사원의 주지승이 모든 유럽인 방문객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고, 유럽인의 용모 차이를 구별할 수 없을 수도 있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노토비치'의 레 방문을 입증할 증거를 수집한 후, 최소한 '노토비치'란 이름의 러시아인이 레 (Leh)의 병원에서 Karl Marks 박사로 부터 치통치료를 받은 사실을 확인했다.

    The declaration of the 'English lady at Leh,' and of the British officers, mentioned by Professor Max Millier, was probably founded on the fact that no such name as Notovitch occurs in the list of European travellers kept at the dâk bungalow in Leh, where M. Notovitch says that he resided during his stay in that place. Careful inquiries have elicited the fact that a Russian gentleman named Notovitch was treated by the medical officer of Leh Hospital, Dr. Karl Marks, when suffering not from a broken leg, but from the less romantic but hardly less painful complaint----toothache.

    막스 뮐러 교수가 언급한 '레를 방문한 영국인 여성"과 영국 관리들이 밝힌 내용은 아마도 레에 있는 유럽인 여행자 숙소의 투숙객 명부에 노토비치란 이름이 없다는 사실에서도 아마도 드러날 것 같은데, 노토비치는 체류 중에 바로 그곳에 머물렀었다고 적었다. 면밀히 조사해 보니, 노토비치란 이름의 러시아 남성이 레 병원의 칼 막스 박사로 부터 - 부러진 다리를 치료 받은 것이 아니라 - 그보단 덜 낭만적이지만, 그럼에도 덜 고통스럽다고는 할 수 없을.... "치통" 치료를 받았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제임스 아치발드 더글라스 / 번역: 최광민

    이 조사는 막스 뮐러의 반박과는 별개의 작업으로, 대영제국 치하 라다크의 우체국장이었던 티벳인 샴월 졸단이 영어-티벳어 통역을 맡았다. 당시 해당 지역의 우체국장은 대영제국의 식민지 관리로서 상당한 지위를 가진 직책이었다.



    더글라스는 인터뷰 절차에 대해 이렇게 적는다. 발췌번역하겠다.

    I will now call attention to several leading statements in M. Notovitch's book, all of which will be found to be definitely contradicted in the document signed by the Chief Superior of Himis Monastery, and sealed with his official seal. This statement I have sent to Professor Max Müller for inspection, together with the subjoined declaration of Mr. Joldan, an educated Tibetan gentleman, to whose able assistance I am deeply indebted. A more patient and painstaking interpreter could not be found, nor one better fitted for the task.

    이제 노토비치의 책에 나오는 몇가지 주요 진술들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데, 이 모든 진술들은 히미스 사원의 주지승려가 서명하고 본인의 공식인장으로 봉인된 내용과 결정적으로 상충된다. 나는 검토를 위해 이 문서를 막스 뮐러 교수에게 보내면서, 이와 연관하여 교육받은 티벳 신사이자 그의 도움에 크게 빚진 바 있는 졸단씨의 증언도 첨부했는데, 그 보다 더 인내하고 어려움을 감수하며 통역을 진행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도, 또 이 직무에 더 적합한 인물을 찾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 번역: 최광민

    The extracts from M. Notovitch's book were slowly translated to the Lama, and were thoroughly understood by him. The questions and answers were fully discussed at two lengthy interviews before being prepared as a document for signature, and when so prepared were carefully translated again to the Lama by Mr. Joldan, and discussed by him with that gentleman, and with a venerable monk who appeared to act as the Lama's private secretary.

    노토비치의 책에서 발췌한 내용은 스님이 철처하게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천천히 통역되었다. 질문과 답변은 서명을 받기 위해 문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두번의 인터뷰를 통해 철처히 토론되었고, 그렇게 준비된 문서를 졸단씨가 다시 (주지)스님께 번역해 드렸고, (주지)스님과 졸단씨, 그리고 스님의 개인비서인 듯 보이는 고승과 그 내용을 함께 토론했다.  - 번역: 최광민

    I may here say that I have the fullest confidence in the veracity and honesty of this old and respected Chief Lama, who appears to be held in the highest esteem, not only among Buddhists, but by all Europeans who have made his acquaintance. As he says, he has nothing whatever to gain by the concealment of facts, or by any departure from the truth.

    아여기서 이 연로하시고 존경받는 주지스님의 진실성과 정직을 완전히 확신한다는 점을 말해 두는게 좋을 것 같다. 이 분은 단지 불교도들 사이에서 뿐 아니라, 그들 아는 모든 유럽인들에게도 최고의 존경을 받는 분이었다. 그 분이 말한 바대로, 그는 사실을 감춰서 진실을 속여 얻을 이득 같은게 있을 리 없는 분이다. - 번역: 최광민

    His indignation at the manner in which he has been travestied by the ingenious author was of far too genuine a character to be feigned, and I was much interested when, in our final interview, he asked me if in Europe there existed no means of punishing a person who told such untruths. I could only reply that literary honesty is taken for granted to such an extent in Europe, that literary forgery of the nature committed by M. Notovitch could not, I believed, be punished by our criminal law.

    이 창의적인 작가 (=노토비치)가 사실과 다른 인물로 자신 (=주지)을 왜곡한 방식에 대한 이 분의 분노는 꾸며낸 것이라고 전혀 볼 수 없었다. 우리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하신 말씀이 매우 인상 깊었는데, 그분은 유럽에는 그런 거짓말을 한 사람을 처벌할 방법이 없는가 하고 물으셨다. 나는 유럽에서는 문서는 사실을 담아야 한다고 당연히 여기지만, 노토비치가 한 문서위조의 성격상 우리 법률로는 처벌할 방법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 제임스 아치발드 더글라스 / 번역: 최광민

    더글라스 일행이 이어서 인터뷰한 사람은, 지난 15년 간 히미스 사원의 주지로 있던 고승이었다. 노토비치의 {이사傳}의 한 장에는 노토비치와 히미스 사원의 주지가 {이사전}이라는 문서의 역사와 세계종교에 관해 나눈 심도있는 대화가 실려있다. 그런데 주지의 증언에 따르면 다리가 부러져서 사원에 머물던 어떤 유럽인에 대해서도 자신은 알지 못하며, 더구나 42년간 티벳불교의 고위승려(라마) 로 있는 동안 노토비치가 주장하는 내용을 담은 어떤 문서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심지어 주지는 티벳에 있는 다른 사찰의 고위승려에게 문의해 보았지만, 어느 누구도 이사(Issa)란 사람에 관련된 책이나 사본을 알고 있지 않았다고 더글라스에게 진술했다.

    다음은 주지의 진술이다.

    "I have never heard of [a manuscript] which mentions the name of Issa, and it is my firm and honest belief that none such exists. I have inquired of our principal Lamas in other monasteries of Tibet, and they are not acquainted with any books or manuscripts which mention the name of Issa."

    나는 불교승려 (라마)로 42년을 지냈고, 잘 알려진 모든 불교서적과 사본들에 대해 꽤 잘 알고 있습니다만, "이사"라는 이름을 언급한 문서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문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확고하고 솔직한 믿음입니다. 티벳에 있는 다른 불교승원들의 고승들에게도 문의해 보았습니다만, 그들 역시 "이사"라는 이름을 언급한 책이나 사본에 대해 모르고 있습니다. --- 번역: 최광민



    사실 위의 주지승의 진술과는 달리, 티벳에는 그가 살던 시절 오래 전에 기독교가, 혹은 적어도 기독교 선교사들이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 주지승 이전 수세기 전 티벳인들이 "예수"에 대해 꼭 몰랐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우선 티벳과 중앙아시아 일대에는 AD 5세기 이후 기독교 이단인 마니교가 유목국가를 중심으로 상당히 퍼져 있었고, 가령 위구르 제국은 AD 8세기 후반 보쿠 칸이 마니교로 개종한 후 마니교를 국교로 삼기도 했다. AD 451년의 칼케돈 공회의에서 그리스도 신인양성론으로 인해 이단으로 영구파문 당한 후, 주로 서아시아, 중앙 아시아, 및 중국으로 포교된  네스토리우스파 교회 (= 동방교회)의 총주교로서 동방선교에 가장 열정을 가졌던 총주교 티모데오스 1세는,  AD 780-823년 간 재임 중 중앙 아시아, 인도, 중국, 그리고 티벳에 총주교 아래의 직위인 메트로폴리탄 (~ 대주교)를 파견하여 해당 지역을 치리시켰다.


    AD 16-17세기 중앙아시아의 패권도 -- 위키미디아 커먼스.

    또한 몽골제국의 본국이랄 수 있는 원나라가 망하고 몽골족이 북상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북원을 건립한 후, 서부 몽골계에 속하는 오이라트 부족은 북원 및 티벳의 서북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원래 몽골제국 성립 이전에도 범-몽골계라 할 수 있던 케라이트 및 나이만 부족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이었고, 오이라트 부족의 경우는 티벳불교로 개종하기 전에는 샤머니즘이 주력인 가운데, 불교, 마니교, 기독교 등등도 믿고 있었다.  이후 1615년 티벳불교로 개종한 오이라트부족은 티벳의 불교파벌인 겔룩파와 카르마카큐파 간의 분쟁에 개입했다. 1637년 겔룩파의 요청으로 오이라트의 귀시 칸은 제 5대 달라이 라마에 의해 티벳의 칸으로 옹립되어 코슈트 칸국이 티벳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18세기 중반, 동서를 잇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티벳의 중심지 라싸는 불교도, 도교도, 기독교도, 무슬림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고, 특히 1717년 오이라트부가 세운 다른 칸국인 중가르 칸국의 침략으로 사망한 코슈트 칸국의 마지막 칸인 랍장 칸은 로마 카톨릭 예수회 선교사들의 지식을 통치에 활용하는 등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다시 주지승-더글라스의 대화로 돌아가 보자.

    더글라스가 통역의 도움을 빌어 노토비치의 저작 {Unknown Life of Jesus Christ}에 등장하는 해당부분을 주지에게 읽어주자, 주지는 화를 내며 노토비치의 저작이 위조라며 외쳤다.

    위의 보고서 가운데 히미스 사원 주지와의 인터뷰 장면을 발췌인용한다. 아치발드 더글라스의 정식보고서는 이 글 아래 두번째 부록으로 수록했다.-- 번역: 최광민

    Question 1. You are the Chief Lama (or Abbot) of Himis Monastery?
    질문 1. 헤미스(히미스) 사원의 주지스님이신가요?

    Answer 1. Yes.
    답변 1. 그렇습니다.

    Question 2. For how long have you acted continuously in that capacity?
    질문 2. 얼마동안 주지로 계셨나요?

    Answer 2. For fifteen years.
    답변 2. 15년 입니다.

    Question 3. Have you or any of the Buddhist monks in this monastery ever seen here a European with an injured leg?

    질문 3. 주지스님이나 이 사원에 있는 다른 승려들 가운데 다리에 부상을 입은 유럽인을 사원 경내에서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필자 주: 노토비치는 자신이 주지와 대화를 나누었다고 진술했다: "The chief lama, approaching me, tendered an invitation to accompany him to the principal terrace and partake of the festal "tchang;" which I accepted with pleasure, for my head was dizzy from the long spectacle.")

    Answer 3. No, not during the last fifteen years. If any sahib suffering from serious injury had stayed in this monastery it would have been my duty to report the matter to the Wazir of Leh. I have never had occasion to do so.

    답변 3. 아니오. 지난 15년 간은 없습니다. 만약 중상을 입고 고통을 당하는 신사 분/사히브가 사원 경내에 머물렀다면, 그 일을 레에 계신 관리/와지르께 보고하는 것이 내 의무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랬던 적이 없습니다.

    Question 4. Have you or any of your monks ever shown any Life of Issa to any sahib, and allowed him to copy and translate the same?

    질문 4. 어떤 승려가 전에 {이사의 생애}라는 책을 신사 분/사히브에게 보여주고, 그 사히브가 그 책을 복사해서 번역하도록 해준 일이 있나요? (참고: 노토비치는 주지 본인이 자신에게 그 책의 사본을 보여주었다고 진술했다. ""Would you commit a sin in reciting your copy of the life of Issa to a stranger?" I asked him. "That which belongs to God," he answered me, "belongs also to man. Our duty requires us to cheerfully devote ourselves to the propagation of His doctrine. Only, I do not, at present, know where that manuscript is. If you ever visit our gonpa again, I shall take pleasure in showing it to you.")

    Answer 4. There is no such book in the monastery, and during my term of office no sahib has been allowed to copy or translate any of the manuscripts in the monastery.

    답변 4. 그런 책은 우리 사원에 없고, 내 임기 중에 어떤 사히브에게도 우리 사원이 보유한 사본을 복사하거나 번역하도록 허가한 일이 없습니다.

    Question 5. Are you aware of the existence of any book in any of the Buddhist monasteries of Tibet bearing on the life of Issa?

    질문 5. 티벳에 있는 불교승원 가운데 {이사의 생애}의 내용을 담은 어떤 책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신가요? (- 필자 주: 노토비치에 따르면, 이 주지는 노토비치에게 이 문서 및 "이사"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해 주었다고한다. 다음은 노토비치의 글에서 인용한다. "In what language are written the principal scrolls bearing upon the life of Issa?" I asked, rising from my seat, for I saw that my interesting interlocutor evidenced fatigue, The original scrolls brought from India to Nepaul, and from Nepaul to Thibet, relating to the life of Issa, are written in the Pali language and are actually in Lhassa; but a copy in our language--I mean the Thibetan--is in this convent.". "How is Issa looked upon in Thibet? Has he the repute of a saint?". "The people are not even aware that he ever existed. Only the principal lamas, who know of him through having studied the scrolls in which his life is related, are familiar with his name; but, as his doctrine does not constitute a canonical part of Buddhism, and the worshippers of Issa do not recognize the authority of the Dalai-Lama, the prophet Issa--with many others like him--is not recognized in Thibet as one of the principal saints....")

    Answer 5. I have been for forty-two years a Lama, and am well acquainted with all the well-known Buddhist books and manuscripts, and I have never heard of one which mentions the name of Issa, and it is my firm and honest belief that none such exists. I have inquired of our principal Lamas in other monasteries of Tibet, and they are not acquainted with any books or manuscripts which mention the name of Issa.

    답변 5. 나는 불교승려 (라마)로 42년을 지냈고, 잘 알려진 모든 불교서적과 사본들에 대해 꽤 잘 알고 있습니다만, "이사"라는 이름을 언급한 문서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문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확고하고 솔직한 믿음입니다. 티벳에 있는 다른 불교승원들의 고승들에게도 문의해 보았습니다만, 그들 역시 "이사"라는 이름을 언급한 책이나 사본에 대해 모르고 있습니다.

    Question 6. M. Nicolas Notovitch, a Russian gentleman who visited |672 your monastery between seven and eight years ago, states that you discussed with him the religions of the ancient Egyptians, Assyrians, and the people of Israel.

    질문 6. 7-8년 전에 이 승원을 방문했다는 러시아인 니콜라스 노토비치는, 주지스님과 노토비치씨가 고대 이집트인들과 앗시리아인들, 그리고 이스라엘인들에 대해 토론했다고 책에서 진술했는데요... (-필지 주: 노토비치는 히미스 사원의 주지가 이집트/앗시리아/이스라엘 종교에 대한 심도있는 이해를 보여주었다고 진술했다: "....We see a striking example of this in the ancient Egyptians, who adored animals, trees, stones, the winds and the rain....(중략)...While seeking a route to lead their feet to the Creator, the Assyrians turned their eyes toward the stars, which they contemplated without the power of attaining them. The Guebers have conserved the same belief to our days...(중략)...The Israelites may be said to have demonstrated, in the most flagrant way, the love of man for everything which is concrete....")

    Answer 6. I know nothing whatever about the Egyptians, Assyrians, and the people of Israel, and do not know anything of their religions whatsoever. I have never mentioned these peoples to any sahib.

    답변 6. 나는 이집트인이니 앗시리아인이니 이스라엘인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아는게 전무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종교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아는 바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에 대해 어떤 사히브와도 이야기 한 적이 없습니다.

    [I was reading M. Notovitch's book to the Lama at the time, and he burst out with, 'Sun, sun, sun, manna mi dug!' which is Tibetan for, 'Lies, lies, lies, nothing but lies!' I have read this to him as part of the statement which he is to sign----as his deliberate opinion of M. Notovitch's book. He appears perfectly satisfied on the matter. J. A. D.]

    [그리고 나는 노토비치의 책을 주지스님에게 읽어주었는데, 그는 "순, 순, 순, 만나 미 둑!" 라며 티벳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말은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완전 거짓말일세!"란 뜻이다......]

    Question 7. Do you know of any Buddhist writings in the Pâli language?

    질문 7. 스님께서는 팔리어로 된 불교문서를 알고 계신가요? (필자 주: 노토비치에 따르면, 주지는 이사에 대한 문서가 인도에서 네팔을 거쳐 티벳에 들어왔으며, 현재 라싸에는 팔리어 원본이 있고, 히미스 사원에는 티벳어 사본이 있다고 진술했다; ""The original scrolls brought from India to Nepaul, and from Nepaul to Thibet, relating to the life of Issa, are written in the Pali language and are actually in Lhassa; but a copy in our language--I mean the Thibetan--is in this convent.")

    Answer 7. I know of no Buddhist writings in the Pâli langage; all the writings here, that I know of, have been translated from Sanskrit and Hindi into the Tibetan language.

    답변 7. 나는 팔리어로 된 불교문서를 모릅니다. 이곳에 있는 내가 아는 문서들은 모두 산스크리트어와 힌디어에서 티벳어로 번역된 것들 뿐입니다. [From this answer, and other observations of the Lama, it would appear that he is not acquainted with the term 'Pâli.'----J. A. D. ] [.....주지스님은 "팔리"라는 용어자체를 모르는 것 같았다....JAD]

    Question 8. Have you received from any sahib a present of a watch, an alarum, and a thermometer?

    질문 8. 스님은 손목시계, 알람시계, 온도계 같은 것을 어떤 사히브(=노토비치)로부터 받으신 바 있으신가요? (참고: 노토비치는 주지에게 이 선물들을 주었다고 적었다: "In the evening of the next day I was again in Leh--thinking of how to get back to the convent. Two days later I sent, by a messenger, to the chief lama, as presents, a watch, an alarm clock, and a thermometer....")

    Answer 8. I have never received any such presents from any sahib. I do not know what a thermometer is. I am sure that I have not one in my possession.

    답변 8. 나는 어떤 신사 분/사히브로부터도 그런 선물을 받은 적 없습니다. 나는 온도계가 뭔지 모르겠군요. 내가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This answer was given after a careful explanation of the nature of the articles in question.----J. A. D.]

    Question 9. Do you speak Urdu or English?

    질문 9. 스님께서는 우르두어나 영어를 하실 수 있습니까?

    Answer 9. I do not know either Urdu or English.

    답변 9. 나는 우르두어나 영어를 못합니다.

    Question 10. Is the name of Issa held in great respect by the Buddhists?

    질문 10. 불교도들 사이에서 "이사"가 크게 존경받는 인물인가요? (참고: 노토비치는 불교도 (고승들 가운데) 높은 존경을 받고 있다며 주지가 말한 것으로 적었다. "The name Issa is very much respected among the Buddhists," he replied, "but he is only known by the chief lamas, who have read the scrolls relating to his life.")

    Answer 10. They know nothing even of his name; none of the Lamas has ever heard it, save through missionaries and European sources.

    답변 10. 불교도들은 심지어 (이사라는) 그런 이름조차 모릅니다. 서방에서 온 선교사들이나 유럽 측 자료를 통하기까진, 어떤 고승(라마)들도 그런 이름을 예전에 들어본 적 조차 없습니다.

    Signed in the Tibetan language by the Chief Lama of Himis, and sealed with his official seal.

    히미스 사원의 주지의 티벳어 서명 및 주지의 공식인감 날인.

    In the presence of us

    J. Archibald Douglas, Professor, Government College, Agra, N.-W. P.
    Shahmwell Joldan, late Postmaster of Ladakh.

    입회인

    J. 아치발드 더글라스, 아그라 소재 Goverment College 교수
    샴웰 졸단, 라다크의 우체국장 (은퇴)

    Himis Monastery, Little Tibet: June 3, 1895.
    소 티벳 소재 히미스 사원에서. 1895년 6월 3일.

    (Mr. Joldan's Declaration)  - 번역: 최광민



    이어 통역을 맡은 은퇴한 우체국장인 티벳인 샴웰 졸단이 선서하고 서명한다.

    졸단씨의 선서

    This is my declaration: That I acted as interpreter for Professor Douglas in his interviews with the Chief Lama of Hiinis Monastery.

    선서합니다. 나는 히미스 사원의 주지스님과 인터뷰한 더글라스 교수의 통역을 맡았습니다.

    I can speak English, and Tibetan is my native language. The questions and answers to which the Chief Lama has appended his seal and signature were thoroughly understood by him, and I have the fullest confidence in his absolute veracity.

    나는 영어를 구사할 수 있으며, 티벳어는 나의 모국어입니다. 모든 질문들과 답변들은 주지스님의 직인과 서명이 날인되었으며, 주지스님은 이 질문들과 답변들을 완전히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스님이 절대적으로 정직하시다고 확신합니다.

    Shahmwell Joldan
    (Retired Postmaster of Ladakh under the British Imperial Post Office).

    샴웰 졸단
    대영제국 체신국 산하의 라다크 전직 우체국장 (은퇴)  --- 번역: 최광민

    동일한 보고서에서 아치발드 더글라스는 더욱 결정적인 지적을 하고 있다. 노토비치의 책에 등장하는 라마불교 "홍모파"의 주요사찰인 히미스 사원의 주지가 자신이 거느리는 승려들을 "우리 황모파 승려들은...."이라고 언급하는 부분이다.

    The Lamaïstes of Ladakh are divided into two great parties: the red monks, or orthodox conservative body; and the yellow monks, a reforming nonconformist sect. On p. 119 of the Unknown Life of Christ, the Lama of Himis, the Chief Superior under the Dalai Lama of the red or orthodox monks of Ladakh, describes himself and his fellow-monks as 'we yellow monks,' in one of those wonderful conversations before alluded to. It would be just as natural for his Grace the Archbishop of Canterbury, discussing the state of the English Church with an unsophisticated foreigner, to describe himself and the whole bench of bishops as 'we ministers of the Wesleyan Methodist body.' The Russian traveller might have remembered the dark-red robes and the red wallets of the monks who fill the monastery of Himis, unless it be that the Russian author is colour-blind, as well as blind to a sense of truth. The religious differences of these two religious bodies are described with an inaccuracy so marvellous that it might almost seem to be intentional.

    라다크의 라마불교들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뉜다. 하나는 정통적 보수파인 홍모파(紅帽派)고, 다른 하나는 개혁적이고 자유로운 황모파(皇帽派)다. 노토비치는 자신의 {이사전} 119쪽에서 히미스 사원의 승려이자 라다크의 "홍모파/정통파" 달라이 라마 휘하의 대승정인 히미스 사원의 라마 (주지)가 노토비치와 나눈 놀라운 대화 속에서 자신 스스로를 "우리 황모파는..."이라고 말한 것으로 진술한다. 이것은 마치 영국국교회의 캔터베리 대주교가 어떤 어리숙한 외국인과 영국교회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자신과 영국국교회 주교들에 대해 "우리 웨슬리파 감리교회의 목사들은...."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 러시아인 여행자 (=노토비치)가 색맹 혹은 사기꾼이 아니라면, 히미스 사원을 가득 매운 빨간색 승복들과 승려들의 빨간색 주머니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두 그룹의 종파에 대한 기록은 놀랄만큼 부정확하게 기술되어 있으며, 실수라기 보다는 원래 의도했던 대로 적은 것으로 거의 보여진다. ---- 아치발드 더글라스, {The Chief Lama of Himis on the Alleged 'Unknown Life of Christ / 소위 {그리스도의 알려지지 않은 삶 / 이사전} 속에 등장하는 히미스 사원의 주지스님에 관하여}, 논문집 [19세기]에서 발췌  / 번역: 최광민


    티벳불교 황모파 승려들 (source: Wikimedia Commons)



    노토비치의 {이사전} 속에서 노토비치와 히미스 사원의 주지가 세계종교와 사상에 대해 나누었다는 장황한 대화를 인용해 보자.

    "Buddhism is divided into many sects which, by the way, differ only in certain religious ceremonies, the basis of the doctrine being everywhere the same. The Thibetan Buddhists, who are called 'lamaists,' separated themselves from the Fô-ists fifteen hundred years ago. Until that time we had formed part of the worshippers of the Buddha, Fô-Sakya-Muni, who was the first to collect all the laws compiled by the various buddhas preceding him, when the great schism took place in the bosom of Brahmanism. Later on, a Khoutoukhte-Mongol translated into Chinese the books of the great Buddha, for which the Emperor of China rewarded him by bestowing upon him the title of 'G-Chi—'Preceptor of the King!' After his death, this title was given to the Dalai-Lama of Thibet. Since that epoch, all the titularies of this position have borne the title of Go-Chi. Our religion is called the Lamaic one—from the word 'lama,' superior. It admits of two classes of monks, the red and the yellow. The former may marry, and they recognize the authority of the Bantsine, who resides in Techow Loumba, and is chief of the civil administration in Thibet. We, the yellow lamas, have taken the vow of celibacy, and our direct chief is the Dalai-Lama. This is the difference which separates the two religious orders, the respective rituals of which are identical."

    ....우리의 종교는 라마교라고 불립니다. '라마'라는 말은 '상급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승려들은 두 부류로 나뉘는데, 홍모파와 황모파가 있습니다. 전자는 결혼 할 수 있으며 테초 룸바에 거처하는 반친을 수장으로 모십니다. "우리 황모파"는 독신을 고수하며 우리의 수장은 달라이-라마 입니다. 이것이 우리 불교종단을 구별짓는 차이이며, 개별적인 의식들은 동일합니다.  --- 니콜라스 노토비치, {이사전} 발췌 / 번역: 최광민

    "달라이 라마"란 용어는 서구에서 혼동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이 직함은 티벳불교 전체의 지도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원칙적으로 "달라이 라마"는 14세기에 창건된 황모파 "겔룩"파의 수장을 뜻한다. 그런데 왠일인지 노토비치가 만났다는 "홍모파" 사원인 "히미스 사원"의 주지승려는 자신의 수장을 "황모파" 수장인 "달라이 라마"라고 주장하고 있다. 

    막스 뮐러 교수와 아치발드 더글라스 교수의 독립적인 조사를 통해, (예수가 정말 인도에 간 적이 있는가의 문제를 떠나) 노토비치의 저작물은 학계에서 위조문서로 평가되어 일단 퇴출되었다. 그러다가 1920년대 미국에서 재출간되면서 논쟁은 약간 성격을 달리하여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막스 뮐러는 이 해프닝을 아래와 같이 분석한다.

    But, taking it for granted that M. Notovitch is a gentleman and not a liar, we cannot help thinking that the Buddhist monks of Ladakh and Tibet must be wags, who enjoy mystifying inquisitive travellers, and that M. Notovitch fell far too easy a victim to their jokes. Possibly, the same excuse may apply to Madame Blavatsky, who was fully convinced that her friends, the Mahâtmas of Tibet, sent her letters to Calcutta, not by post, but through the air, letters which she showed to her friends, and which were written, not on Mahâtmic paper and with Mahâtmic ink, but on English paper and |517 with English ink. Be that as it may, M. Notovitch is not the first traveller in the East to whom Brâhmans or Buddhists have supplied, for a consideration, the information and even the manuscripts which they were in search of. Wilford's case ought to have served as a warning, but we know it did not serve as a warning to M. Jacolliot when he published his Bible dans l'Inde from Sanskrit originals, supplied to him by learned Pandits at Chandranagor. Madame Blavatsky, if I remember rightly, never even pretended to have received Tibetan manuscripts, or, if she had, neither she nor Mr. Sinnet have ever seen fit to publish either the text or an English translation of these treasures.

    노토비치가 선량한 신사이며, 또 사기꾼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라다크와 티벳에 있는 불교승려들이 신비한 이야기로 여행자들을 가지고 놀았을 수 있다고 밖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노토비치는 아주 쉬운 먹이감이 되었을 뿐이다. 티벳에 있는 마하트마들이 우편도 아닌 공중을 통해, 그것도 티벳종이나 잉크가 아닌 영국종이와 잉크로 씌여진 편지를 캘커타에 있는 자기에게 보내준다고 굳게 믿은 마담 블라바트스키 역시 같은 먹잇감이었을 수도 있다. 어떤 정보나 문서를 찾아 동방에 간 서구인들에게 브라만이나 불교승려들이 원하는 것을 전해준 사례는 노토비치가 처음은 아니다. 윌포드의 사례는 아주 좋은 경고사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윌포드의 이 사례는 찬드라나고르의 힌두교 승려들이 제공했다는 산스크리트어 원문을 통해 {인도의 성서}라는 책을 발표한 자콜리오에게 아무런 경고가 되지 못했다는 점도 우리는 알고 있다.  --- 번역: 최광민

    물론 막스 밀러가 노토비치나 블라바트스키를 "선량"하고 "정직"한 인물로 여긴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더글라스 아치발드의 보고서 후기에 이렇게 적었다.

    Although I was convinced that the story told by M. Notovitch in this Vie inconnue de Jésus-Christ 3 was pure fiction, I thought it |677 fair, when writing my article in the October number of this Review, 1894, to give him the benefit of a doubt, and to suggest that he might possib]y have been hoaxed by Buddhist priests from whom he professed to have gathered his information about Issa, i.e. Jesus. (Isa is the name for Jesus used by Mohammedans.) Such things have happened before. Inquisitive travellers have been supplied with the exact information which they wanted by Mahàtmas and other religious authorities, whether in Tibet or India, or even among Zulus and Red Indians. It seemed a long cry to Leh in Ladakh, and in throwing out in an English review this hint that M. Notovitch might have been hoaxed, I did not think that the Buddhist priests in the Monastery of Himis, in Little Tibet, might be offended by my remarks. After having read, however, the foregoing article by Professor Douglas, I feel bound most humbly to apologise to the excellent Lamas of that monastery for having thought them capable of such frivolity. After the conrplete refutation, or, I should rather say, annihilation, of M. Notovitch by Professor A. Douglas, there does not seem to be any further necessity----nay, any excuse----for trying to spare the feelings of that venturesome Russian traveller. He was not hoaxed, but he tried to hoax us. Mr. Douglas has sent me the original papers, containing the depositions of the Chief Priest of the Monastery of Him is and of his interpreter, and I gladly testify that they entirely agree with the extracts given in the article, and are-signed and sealed by the Chief Lama and by Mr. Joldan, formerly Postmaster of Ladakh, who acted as interpreter between the priests and Professor A. Douglas. The papers are dated Himis Monastery, Little Tibet, June 3, 1894.

    노토비치가 그의 {알려지지 않은 예수의 생애}에서 진술한 이야기를 완전한 허구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이 총설논문집의 1894년 10월 판에 내 논문을 실을 때만해도, 이사, 즉 예수 (그런데 '이사'는 무슬림들이 예수를 부를 때 쓰는 표현이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때 불교승려들에게 속았을 가능성에 대해 의심해 보는 것도 어떻겠는냐는 제안을 노토비치에게 해주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일이 예전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자료를 조사하고자 여행하던 이들이 정확히 원하던 정보를 인도, 티벳, 심지어 아프리카 줄루족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마하트마 (=도인)나 여타 상급종교인들이나  주어온 일들이 있어 왔기 때문이다. 노토비치가 불교승려들에게 속았을지도 모른다고 적은 그 영어리뷰가 나왔을 때, 그것이 소-티벳 히미스 사원의 불교승려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더글라스 교수의 이어지는 논문을 읽고나서, 내가 경솔하게 그들을 의심했다는 점에 대해 주지스님께 공손히 사과해야겠다고 느끼게 되었다. 완벽한 반박, 혹은 노토비치의 보고를 그야말로 '박살'냈다고 내가 부르는 더글라스 교수의 이 논문은, 이 겁없는 러시아 여행자에 대해 어떤 변명의 여지도 더이상 남겨둘 필요가 없음을 보여준다. 노토비치는 속은게 아니라 속였을 뿐이다. 더글라스는 히미스 사원 주지와 통역자의 공증을 포함한 논문의 원본을 보내주었으며,  나는 그들이 논문에 제시된 발췌문들에 완전히 동의하였고, 주지스님과 더글라스 교수와 주지스님과의 통역을 맡은 라다크의 전직 우체국장인 졸단씨가 서명하고 날인했음을 기쁘게 입증한다. 이 논문은 소-티벳 히미스 사원에서 1894년 6월 3일에 작성된 것으로 되어있다.  / 번역: 최광민



    5.4. "이사"?

    사실 노토비치의 주장은, 그가 보았다는 문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이름이 "이사"라는데에서 이미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5.4.1. "이사": 아랍어 이름

    "예수"라는 이름의 어형변화에 대해 정리해 보자.

    이 이름의 원형은 모세를 이은 히브리인의 지도자로서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인을 이끌고 카나안으로 입성한 "눈의 아들" "예호수아 יהושע" 다. 북 이스라엘 왕국과 남 유다왕국이 각각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한 후 중동 일대로 흩어진 유대인들을 페르시아의 키루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허용한 BC 5세기의 상황을 담고 있는 구약성서의 문서 {느혜미아}에는 "눈의 아들 예호수아"를 "눈의 아들 예수아 ישוע"로 기록되어 있다. 예수아는 히브리어 예호수아의 아람어 변형이며, 예수 당시의 아람어에서도 역시 "예수아"이다.

    이 아람어 형 "예수아"는 BC 3세기 경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절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된 {70인역/LXX}에서 "예수스 Ἰησοῦς"가 되며, {70인역}에서는 이 히브리어/아람어 "예호수아/예수아"를 모두 "예수스)/Ἰησοῦς"로 표기한다. {느헤미아}의 해당 구절을 히브리/아람어 {맛소라}, 그리스어 {70인역}, 그리고 현대 영어번역 (NET)으로 비교해 보자.

    17 ‏וַיַּֽעֲשׂ֣וּ כָֽל־הַ֠קָּהָל הַשָּׁבִ֨ים מִן־הַשְּׁבִ֥י׀ סֻכּוֹת֮ וַיֵּשְׁב֣וּ בַסֻּכּוֹת֒ כִּ֣י לֹֽא־עָשׂ֡וּ מִימֵי֩ יֵשׁ֨וּעַ בִּן־נ֥וּן כֵּן֙ בְּנֵ֣י יִשְׂרָאֵ֔ל עַ֖ד הַיּ֣וֹם הַה֑וּא וַתְּהִ֥י שִׂמְחָ֖ה גְּדוֹלָ֥ה מְאֹֽד׃

    17 καὶ ἐποίησαν πᾶσα ἡ ἐκκλησία, οἱ ἐπιστρέψαντες ἀπὸ τῆς αἰχμαλωσίας, σκηνὰς καὶ ἐκάθισαν ἐν σκηναῖς· ὅτι οὐκ ἐποίησαν ἀπὸ ἡμερῶν ᾿Ιησοῦ υἱοῦ Ναυῆ οὕτως οἱ υἱοὶ ᾿Ισραὴλ ἕως τῆς ἡμέρας ἐκείνης· καὶ ἐγένετο εὐφροσύνη μεγάλη.

    NeHEM-Yah 8:17 So all the assembly which had returned from the exile constructed temporary shelters and lived in them. The Israelites had not done so from the days of Joshua son of Nun until that day. Everyone experienced very great joys (NET). 

    따라서 예호수아 (히브리어) > 예수아 (아람어) > 예수스 (그리스어) 로의 단계적인 어형번형에 대한 언어학적인 증거는 이미 확보된 것이다.

    아람어의 후기 형태인 시리아어 (Syriac)에서 예수는 두가지 형태로 호칭되는데 동방 시리아어에서는 "이쇼 ܝܫܘܥ"로, 서방 시리아어에서는 "야수 يسوع" 로 불렸다. 한편, 이슬람교 출현 이후 무슬림들은 예수를 아랍어로 "이사 ى `īsā"로 불러왔다. 이 형태는 {코란}의 용례이며, 서부 아랍권의 동방교회들은 현재까지도 예수를 아랍어형 "이사"가 아닌 시리아어형 "야수"로 부르고 있다. 

    아울러 기독교 이단으로서 AD 4세기 이후 주로 무역경로를 타고 페르시아에서 옥수스강을 건너 중앙아시아로 전파되어 AD 7세기까지 중앙아시아 일대의 유력종교로 부상하고, 이후 AD 8세기 말에는 당나라와 겨루는 당대의 맹주 위구르 칸국의 국교가 되기도 한 마니교에서는, 동부 시리아/아람어, 페르시아어, 파르티아어 형태에 따라 역시 예수를 '이쇼'로 불렀다. 가령, "Yišōʿ Zīwā = 영광의 이쇼/예수" (동부 아람어), "yyšwʿ mšyhʾh = 이쇼/예수 므시아/메시아" (파르티아어) 등이며, 중기 페르시아어 문헌에 따르면 마니는 스스로 "yyšwʿ ʾryʾmʾn = 이쇼/예수 아리만/신/정령"의 사도를 자처했다.


    중앙아시아 일대에 이슬람교가 본격 진출한 것은 이슬람 종주국인 압바스 칼리프국과 티벳 동맹군이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이 현재 카자흐스탄 일대에서 지휘한 탈라스 전투에서 당나라 및 카를루크 동맹군을 대파시킨 AD 751년 이후다. 따라서 노토비치의 주장이나 혹은 (앞으로 다룰) 힌두교 문서 {바비쉬야 푸라나}의 주장에 따라, 예수가 AD 1세기에 인도로 가서 자신을 "이사"라고 호칭했다면, 이것은 상당히 괴이한 시대착오적 사건일 것이다. "예수=이사"는 이슬람교가 출현한 AD 7세기 이전, 그리고  알려진 바 없는 어형이기 때문이다.




    5.4.2. "이사": 팔리어/산스크리트어 "호칭"

    한편,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에서 "이사"는 "주님"을 뜻하며 흔히 시바神의 호칭으로 사용된다. 팔리어든 산스크리트어든 이 "이사"는 호칭이지 이름이 아니다.


    팔리어-영어 사전 (http://dsal.uchicago.edu/dictionaries/pali/)

    Īsa : (page 124)
    -- 2. uttered, proclaimed, said Dāvs v.12. Īsa Īsa [fr. iś to have power, perf. īśe = Goth. aih; cp. Sk. īśvara = P. issara, & BSk. īśa, e. g. Jtm 3181] lord, owner, ruler J iv.209 (of a black lion = kāḷa-- sīha C.); VvA 168. f. īsī see mahesī a chief queen. Cp. also mahesakkha.
    Īsaka Īsaka [dimin. of īsā] a pole J

    산스크리트어-영어 사전 (http://dsal.uchicago.edu/dictionaries/apte/)

     . ईश īśa : (page 393)
    to. ईश् īśईश् m. A master, lord, the Supreme Spirit. ईशा- बास्यमिदं सर्वम् Īśop.1.ईश īśaईश a. [ईश्-क] 1 Owning, possessing, sharing, master or lord of; see below.-2 One who is com- pletely master of anything.-3 Capable of (with gen.) -4 Powerful, supreme.-शः 1 A lord, master; with gen. or in

    그런데 노토비치는 "이사"라는 예수의 "이름"이 AD 1세기 팔리어로 기록되었던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5.4. 니콜라스 노토비치를 지지하는 증거들의 배경설명

    니콜라스 노토비치를 옹호하는 증거들을 대개 신지학 및 (그 후속판인) 뉴에이지 운동과 연루된 사람들로부터 왔다. 이들의 공통점은 "눈"으로는 노토비치가 채록했다는 문서를 보았다고 주장하지만, 문서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증거나 원본의 샘플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참 이상한 점이다. 그들은 모두 카메라를 지니고 티벳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5.4.1. 힌두교 베단타/라마크리슈난 계열의 지도자 스와미 압헤다난다 (Swami Abhedananda)의 현지답사 기록과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의 주장? 

    현대 힌두교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베단타/라마크리슈나 계열의 힌두교 지도자인 스와미 압헤다난다는 노토비치의 책을 읽고 사실확인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가 속한 베단타 교단에서 예수는 힌두교의 성자로도 추앙받기 때문이었고, 만약 예수가 인도에 와서 인도의 철학들을 공부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베단타 교단에게 더할 나위없이 좋은 자료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스와미 압헤다난다(Wikimedia Commons)

    1922년, 마침내 스와미 압헤다난다는 히미스 사원을 방문한다. 이 방문의 전말은 1970년대에 가서야 알려지게 되었다. 노토비치의 책을 사실로 소개하고 있는 {The Lost Years of Jesus}라는 영상물을 제작한 딕 복과 자넷 복 (Dick and Janet Bock) 부부는 스와미 압헤다난다의 제자 스와미 프라나난다 (Swami Prajnananda)를 인터뷰하게 되었는데, 이때 스와미 프라나난다는 스승 스와미 압헤다난다가 문제의 그 문서들을 히미스 사원에서 정말 발견했고, 모든 내용을 번역해서 그 내용을 인도에서 출판한 {Kashmiri O Tibetti / 카쉬미르와 티벳으로의 여행}이란 책에 적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다시 그 문서들을 열람하려고하자, 히미스 사원 측에서는 그 문서가 더이상 그곳에 있지 않다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누군가에 의해 문서들이 옮겨졌다는 것이 스와미 프라나난다의 주장이다.

    그의 진술을 옮겨보자.


    Janet Bock, {The Jesus Mystery: Of Lost Years and Unknown Travels}. Los Angeles: Aura Books, 1980.

    "....found the scrolls and he translated all the writings, all the life incidents of the Christ. He narrated those incidents in his book 'Kashmiri O Tibetti.'" --- Janet Bock, {The Jesus Mystery: Of Lost Years and Unknown Travels, p. 21

    "....(티벳 승려는) 두루마리를 찾아 그 내용을 번역해 주었는데 그리스도의 일대기에 대한 것이었다. 그(= 스와미 압헤다난다 / 필자 주)는 이 일을 그의 책 {카시미르와 티벳으로의 여행}에 적었다..."  --- 자넷 복, {예수의 미스테리: 그의 잊혀진 시간들과 미지의 여행들} 21쪽 / 번역: 최광민

    "....Years afterwards he inquired but they said the scrolls were no longer there. I also requested to see the scrolls, but there is nothing. There are no scrolls. They have been removed, by whom we do not know." --- Bock, p. 22

    "...세월이 지나 그 (=스와미 압헤다난다)가 다시 문의했는데, 티벳승려들은 그 두루마리들이 더 이상 그곳에 있지 않다고 말해주었다. 나 (=스와미 프라나난다) 역시 그 두루마리를 볼 수 있겠느냐고 문의해 보았으나 그곳에는 없었다. 아무 두루마리도 남아있지 않았다. 우리가 모르는 누군가에 의해 치워진 것이다..." --- 자넷 복, {예수의 미스테리: 그의 잊혀진 시간들과 미지의 여행들} 22쪽 / 번역: 최광민

    치워진 것인가? 아님 원래부터 없었던 것인가?



    인터뷰에 나오는 스와미 압헤다난다의 {Kashmiri O Tibetti / Journey into Kashmir and Tibet / 카쉬미르와 티벳으로의 여행}에서 내용을 확인해 보자.


    Swami Abhedananda, {Swami Abhedananda's Journey into Kashmir and Tibet}. Trans. Ansupati Dasgupta and Kunja Bihari Kundu. Calcutta: Ramakrishna Vedanta Math, 1987.

    "....he requested to be allowed to see the book. . . . The lama who was acting as our guide took a manuscript from the shelf and showed it to the Swami. He said that it was an exact translation of the original manuscript which was lying in the monastery of Marbour near Lhasa. The original manuscript [as per Notovitch] is in Pali, while the manuscript preserved in Himis is in Tibetan. It consists of fourteen chapters and two hundred twenty-four couplets (slokas). The Swami got some portion of the manuscript translated with the help of the lama attending on him." --- {Kashmiri O Tibetti}. [p. 119].

    "...그 (=스와미 압헤다난다) 는 그 책의 열람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우리의 안내를 담당한 라마승은 서고에서 사본을 가져다가 스와미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라싸 근방의 마보르 사원에 있는 원본에서 정확히 (티벳어로) 번역된 것이라고 말했다. 원본은 [노토비치가 말한대로] 팔리어이지만, 히미스 사원에 보관된 사본은 티벳어였다. 내용은 14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224절로 나뉘어 있었다. 스와미는 그를 안내한 라마승의 도움을 빌어 사본의 일부를 번역해왔다....   --- 스와미 압헤다난다, {카시미르와 티벳으로의 여행} 119쪽 / 번역: 최광민

    일행이 문서의 열람을 요청하자, 일행을 안내하던 히미스 사원의 승려가 서가에서 사본을 하나 가져와 스와미 압헤다난다에게 보여주면서, 이 사본은 라싸 (Lhasa) 근방의 마보르 사원 (Marbour Monastry)에 있던 (팔리어) 원본을 티벳어로 정확히 번역한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 부분은 노토비치의 진술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 "원본에서 정확하게 번역되어 필사되었다는" 티벳어 사본이 총 14장 (chapter) 224절 (couple)으로 되어있었다. 스와미 압헤다난다는 승려의 입회 하에 그 승려의 도움을 빌어 그 번역사본의 일부를 벵골어로 중역해서 가져와 출판했다는 것이 이 방문에 관련된 사건의 전말이다.

    문제는?

    위에서 설명한 대로, 막스 뮐러의 1894년 공개반박이 있은 후 니콜라스 노토비치는 1895년의 제 2판의 서문에서는 (제 1판의 주장과는 달리) 히미스 사원에는 "두 권으로 결집된 형태로의" {이사전}이란 것은 없었고, 자신이 여러 파편적인 티벳문서에 예수와 관련된 내용을 추출하여 재구성했다고 적었다. 그럼 1922년 히미스 사원에서 스와미 압헤다난다가 보았던 그 티벳어판의 사본은 도대체 왜 하나의 문서로 결집된 문서인 것일까? 심지어 스와미 압헤다난다가 본 그 티벳어 문서는 노토비치의 책과 구성순서조차 같다. (그런데 노토비치는 제 2판에서 자신 스스로 여러 문서를 "재구성"했다고 적었다.) 따라서 히미스 사원에 있던 티벳어 버전의 문서는 "노토비치가 출간한 책"의 티벳어 요약본이었던 것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한편, 스와미 압헤다난다가 티벳어에서 벵골어로 중역해 출판한 책의 내용에는 노토비치의 기록 중 예수가 브라만교의 경전 {베다}의 권위를 폄하하는 내용이 삭제되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이런 내용이 베단타 계열의 힌두교에서 예수를 힌두교의 성자로 추앙하는 것과 충돌하기 때문에 스와미 압헤다난다가 의도적으로 해당부분을 삭제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노토비치? 스와미 압헤다난다를 안내한 그 티벳승려?

    모두?

    한편, 스와미 압데다난다처럼 예수와 크리슈나를 조화시키려고 했던 파라마한사 요가난다 (Paramahansa Yogananda, AD 1893-1925)도 같은 궤적에 있는 인물로서, 그는 20세기 초 인도와 미국을 오가며 여러 강연과 저술을 통해, 동방박사들이 인도인이었으며, 이들 인도인 동방박사에 의해 아기 예수에게 "주님"을 뜻하는 "이사"란 산스크리트어 이름이 부여되었고, 예수는 13-30세 사이에 인도에 건너가 요가와 명상을 통해 구도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아래는 그의 사후 52년 후 미국에 있는 [요가난다 자아인식 장학재단] 에서 펴낸 전집 {The Second Coming of Christ / 예수의 재림}.


    Paramahansa Yogananda, AD 1893-1952 (출처: Wikimedia Commons)


    파라마한사 요가난다, {The Second Coming of Christ / 예수의 재림}

    인터넷에 보면 이 파라마한사 요가난다가 위에 언급된 민희식씨와 대담을 나누었다는 괴설(링크)도 떠돌고 있다. 1952년에 죽은 마라마한사 요가난다와 그 해 18살 무렵의 1934년생 민희식씨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 도대체 언제 어디서 만나 무슨 대담을 가졌던 걸까?

    이 괴설의 유포는 민희식씨의 열정적인 추종자(들)에 의한 것으로 보이며, 민희식씨의 직접적인 책임은 없어보인다.




    5.4.2. 신지학 신봉자 니콜라스 레릭의 현지답사 기록?

    미국에서 활동한 러시아 출신의 화가이자 작가이자 철학자이자 "신지학 계열의 신비주의자'인 니콜라이 콘스탄티노비치 레리크 (영미권에서는 니콜라스 레릭, (Nikolai Konstantinovich Rerikh 혹은 Nicholas Roerich)는, 노토비치의 기록에 근거헤 1924 - 1928년에 이사와 전설의 도시 "샴발라"를 찾는 원정단을 꾸려 중앙아시아 탐방에 나섰다.


    자와할랄 네루와 함께 사진촬영한 니콜라이 레릭 (source: Wikipedia) 

    노토비치의 책을 접했던 그는 당연히 라다크도 방문했는데, 그가 남긴 1925년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그곳에서 1500년 된 티벳문서로부터 예수의 이야기를 찾았고 그것을 일부 번역했다고 적었다.

    Per Beskow은 {Strange Tales About Jesus}에서 레리크가 기록해 왔다는 문장들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인용한다.


    Per Beskow, {Strange Tales About Jesus}

    "...The first part of his account is taken literally from Notovitch's Life of Saint Issa, chapters 5-13 (only extracts but with all the verses in the right order). It is followed by 'another version' (pages 93-94), taken from chapter 16 of Dowling's {Aquarian Gospel}..."

    ... 레릭의 설명 첫부분은 노토비치의 {이사전} 5-13장에 등장하는 내용과 문자 그대로 똑같다. (비록 발췌된 형태이지만, 모든 문구가 정확히 같은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어지는 93-94 페이지에 등장하는 그의 설명은 다울링의 {보병궁 복음서} 제 16장에서 가져온 것이다...../ 번역: 최광민

    그의 의혹은 레릭이 찾아냈다는 그 "티벳문서"에 인용된 문장들이,

    1. 노토비치의 프랑스어판 책에 등장하는 문장과 문체를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다.
    2. 더 큰 문제는 20세기 초에 출판된 리바이 다울링의 {보병궁 복음서 / The Aquarian Gospel of Jesus}에 나오는 문장을 베껴쓰고 있다.

    는 두가지로 압축된다.

    후자의 경우는 치명적인 문제다. {보병궁 보음서}는 역사적 문서가 아니라 소위 "채널링"에 의해 작성된 문서이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때, 어떻게 1500년 되었다는 고문서가 1908년에 미국에서 작성되어 발표된 리바이 도울링의 채널링 문서와 동일할 수 있는가? 천상영계에 비물질적인 에테르 상태로 존재한다는 아카샤 기록은 틀림없는 증거이기 때문에?

    나는 니콜라스 노토비치가 (1) 자신의 여행경험과 (2) 타인의 기행문에 바탕해 (3) 자신의 상상을 덧붙인 (4) 소설을 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런 류의 위조문서들은 "계시"의 형태라든지 "채널링"의 형태라든지 혹은 "잊혀졌다가 우연히 발견된 고대문서"의 형태로 19세기 말에 종종 제작되고 있었고, 또 서로 비슷한 ("인도 발") 철학을 공유하고 있다.  많이 양보해서 설령 노토비치가 정직하게 티벳승려들이 불러주는 것을 번역/필사했다 치더라도, 막스 뮐러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티벳승려들과 (확인되지 않는) 통역자 사이에서 완전히 무력한 상태였다. 그의 통역이 둘 사이에서 제대로 커뮤니케이션은 한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사실상 노토비치는 누가 통역했는지 조차도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바티칸이 개입한 음모론을 말할 때도 "언제 누구에게서" 정보를 얻은 것인지 밝히지도 않았다.




    5.4.3. 마즈다즈난교 신봉자 엘라자베스 카스파리의 사진증거?

    1939년 스위스 출신의 음악학/교육학 박사인 엘리자베스 카스파리 (Elisabeth Caspari)가 노토비치의 책을 지원사격하는 증언을 제시했다. 엘리자베스 카스파리는 고대 조로아스터교의 한 분파인 마즈다교의 진정한 계승임을 주장하며 독일계 미국인 Otto Hanisch (1854–1936)가 1900년에 개창한 마즈다즈난교 (Mazdaznan)의 신자였다. 물론 이 종교는 현존하는 조로아스터교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현대물이며, 기독교 교리와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를 상호취합한 형태의 신흥종교였다. 참고로, 엘리자베스 카스파리는 "몬테소리 교육법"을 개창한 마리아 몬테소리의 제자로서 몬테소리 교육의 전도사로 활약했다. 그의 멘토였던 마리아 몬테소리는 인도에 머물던 1939년 국제 신지학 본부를 창설한 장본인이자 신지학의 핵심인물이기도 했다.

    1930년 무렵, 카스파리는 지인들과 인도/티벳의 종교를 연구하기 위해 티벳에 갔다가 히미스 사원에서 열린 한 축제에 참석하게 되었다. 카스파리에 따르면, 사원에 머물던 중 하루는 한 사서담당 승려와 다른 승려들이 와서 카스파리 일행에게 양피지에 적힌 불교문서 세 점을 보여주었는데, 이 중 하나를 보여주던 사서승려가 "이 문서들은 당신들의 예수가 여기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훗날 카스파리는 유사종교단체인 Summit University Forum에 와서 이 문서를 노토비치가 카피했다는 그 문서라고 증언했다는 것이 그 골자이다.

    아래는 그때 찍었다는 사진이다.


    카스파리가 보고했다는 사진 (source: {The Lost Years of Jesus}by Elizabeth C Prophet)

    문제는?

    역시 사진 속의 문서가 식별불가능하다는데 있다. 카스파리의 일행 가운데 팔리어/산스크리트어/티벳어에 능통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따라서 그들이 저 문서 속의 내용을 판독할 수 있었는지, 혹은 도대체 사진 속의 승려가 무슨 문서를 보여준 것인지 사진 상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저 문서는 히미스 사원이든 라싸의 마보르 사원이든 그 어디서도 그 이후로 지금까지 재발견되지 않았다.  2005년 미국 American 대학의 답사팀이 히미스 사원의 서고를 재조사했으나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

    또 음모론을 들이밀 것인가?




    5.4.4. 뉴에이지 컬트단체 Church Universal and Triumphant의 설립자/교주 엘리자베스 C 프라핏?

    그럼 여기서 잠깐 엘리자벳 카스파리의 일화를 전한 원 출전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위에 말한 "Summit Univesity" 라는 기관은, 대학이 아니라 "the Summit Lighthouse" 혹은 " The Church Universal and Triumphant"라는 뉴에이지 계열 종교단체의 부속기관이며, 이 종교단체는 엘리자벳 클레어 프라핏 (Elizabeth Clare Prophet)이 창설했다. 이 단체는 마담 블라바트스키의 신지학 (theosophy) 계열과 뉴에이지 계열 "I AM 운동"의 혼성물로 보면된다.


    Elizabeth C Prophet (source: Wikipedia)

    노토비치의 문서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흔히들 오해하는데, 사실 엘라자벳 C 프라핏은 학자가 아니다. 그녀의 남편인 마크 프라핏은 1957년 우주의 대마스터들의 가르침을 지구에 전파한다는 The Summit Lighthouse라는 유사종교기관을 만들었고, 1973년 그가 사망하자 그의 아내인 엘리자벳 C 프라핏이 이를 확장한 Church Universal and Triumphant 를 시작했다.

    이 단체를 이끌던 엘리자벳 C 프라핏은 자신을 "구루 마/ Guru Ma"라고 자처하면서, 현 지구의 엘리트들은 사악한 외계인들이라 주장하고 1990년대 부터는 이들 외계인들이 자신의 추종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핵무기로 죽일 것이란 종말론을 공공연히 주장했다. 이들은 몬타나 등지에 핵전쟁대비 쉘터를 만드는 등 물의를 일으키다가 정작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엘리자벳 프라핏이 자신의 주장을 번복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프라핏은 자신이 전생에 (파라오 아케나텐의 아내인) 네페르티티, 캐멀롯의 기네비어 여왕, 그리고 프랑스의 마리 앙트와네트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E. C. Prophet, {The Lost Years of Jesus}

    예언자 엘라자베스 클레어, 김용환 번역, {불제자였던 예수}

    내가 프라핏의 책을 처음 접했던 것은 고등학생이던 1988년 무렵에 교보문고에서였는데, 그녀의 가장 유명한 저작인 {The Lost Years of Jesus}란 책은 당시 {불제자였던 예수} (1987, 번역 김용환)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소개되었었다. 인도에서 예수가 살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이전의 온갖 자료들을 정리한 것이라 보면 된다. 참고로, 김용환씨의 번역서에서는 저자를 "예언자 엘리자베스 클레어"라고 적었는데, 그녀의 이름 Elizabeth Clare Prophet 에서 "Prophet"은 그녀가 "예언자"란 뜻이 아니라, 그녀의 두번째 남편이자 함께 컬트를 이끌었던 Mark L. Prophet 의 "성"이다.

    물론 어떤 책의 저자가 유사종교 컬트의 교주였다는 이유로 그 책을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실의 적시와 학문적인 엄정성일테니.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정규학자들은 이 책을 그런 카테고리에 넣지 못할 듯 싶다.




    6 맺음말

    이런 류의 저작들은 원본을 제시하라는 요구에 대해 늘 동일한 음모론으로 답한다. 위기감을 느낀 유대인과 기독교도들이 원본을 은폐하거나 파기하거나 심지어 "진리를 드러낸" 이들 작가들을 암살했다는 식이다.

    어쩌면 정말 (하지만 꼭 음모 때문이 아니라도)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을 수도, 혹은 출판을 통해 상당한 돈을 벌고 적절한 시점에 지하에 숨었을 수도 있겠다. 노토비치라면 제1차세계대전이, (절말로 존재한 인물일 경우) 이사 라시드라면 70년대 중동전쟁이 조용히 "사라지기"에는 적절한 때였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비물질적 에테르계에 저장된 아카샤 기록을 채널링"을 통해 받아 {보병궁 복음서}를 작성했다고 주장한 리바이 다울링은 차라리 "솔직하다".

    이 속설의 신봉자들은 이런 류의 주장들을 둘러싼 신지학과 그로부터 유래한 뉴에이지운동과 또 그와 밀접한 접점을 가진 UFO컬트들의 집요한 영향을 진지하게 고려해보지 않는듯 하다. 이런 주제에 대해 19/20세기의 신지학을 이해하지 않고는 큰 그림을 놓칠 뿐이다.

    여전히 이 20세기 발 복음서가 신뢰할 만한 "역사기록"으로 여겨지는가?

    판단은 각자의 몫.


    © 최광민 (Kwangmin Choi). 2011.02.12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草人




    부록 #1. 막스 뮐러의 1차 반박 전문 (1894년) -- 번역: 최광민

    source: http://www.tertullian.org/rpearse/scanned/notovitch.htm


    http://books.google.cl/books?id=3N0aAAAAYAAJ&dq=THE%20ALLEGED%20SOJOURN%20OF%20CHRIST%20IN%20INDIA&pg=PP1&output=embed


    The Nineteenth Century, 36 (July-December 1894) pp. 515-522
    THE ALLEGED SOJOURN OF CHRIST IN INDIA 1

    Aeneas Sylvius, afterwards Pope Pius the Second, 1458-64, when on a visit to England, was anxious to see with his own eyes the barnacle geese that were reported to grow on trees, and, being supposed to be vegetable rather than animal, were allowed to be eaten during Lent. He went as far as Scotland to see them, but when arrived there he was told that he must go further, to the Orchades, if he wished to see these miraculous geese. He seemed rather provoked at this, and, complaining that miracles would always flee further and further, he gave up his goose chase (didicimus miracula semper remotius fugere).

    Since his time, the number of countries in which miracles and mysteries could find a safe hiding-place has been much reduced. If there were a single barnacle goose left in the Orchades, i.e. the Orkney Islands, tourists would by this time have given a good account of it. There are few countries left now beyond the reach of steamers or railways, and if there is a spot never trodden by a European foot, that is the very spot which is sure to be fixed upon by some adventurous members of the Alpine Club for their next expedition.

    Even Central Asia and Central Africa are no longer safe, and, hence, no doubt, the great charm which attaches to a country like Tibet, now almost the only country some parts of which are still closed against European explorers. It was in Tibet, therefore, that Madame Blavatsky met her Mahâtmas, who initiated her in the mysteries of Esoteric Buddhism. Mr. Sinnet claims to have followed in her footsteps, but has never described his or her route. Of course, if Madame Blavatsky and Mr. Sinnet had only told us by what passes they entered Tibet from India, at what stations they halted, and in what language they communicated with the Mahâtmas, it would not be courteous to ask any further questions. That there are Mahâtmas in India and Tibet no one would venture to deny. The only doubt is whether these real Mahâtmas know, or profess to know, anything beyond what they can, and what we can, learn from their sacred literature.

    심지어 중앙아시아나 중앙아프리카 역시 탐험가의 발길을 피할 수 없었고 그 결과 티벳의 일부 지역 정도가 여전히 유럽 탐험가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신비의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그 결과 티벳은 마담 블라바트스키가 마하트마들을 만나 밀교불교의 신비에 입문하게 된 곳이기도 하고, 신넷이 블라바트스키의 족적을 따라갔다고 주장하는 곳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블라바트스키나 신넷은 결코 자신들이 어떤 경로로 그곳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인도를 통해 티벳에 가게 되었다고만 말할 뿐이며, 만약 그들이 어디를 경유했는지, 어떤 언어로 마하트마들과 대화를 나누었는지만 이야기해 준다면 더 이상 질문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인도와 티벳에 마하트마들이 있다는 것을 누구도 감히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이들 "진짜" 마하트마들이 그들과 우리가 그들의 종교문서를 통해 알 수 있는 어떤 것을 넘어서는 것을 알거나 혹은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 번역: 최광민

    If so, they have only to give the authorities to which they appeal for their esoteric knowledge, and we shall know at |516 once whether they are right or wrong. Their Sacred Canon is accessible to us as it is to them, and we could, therefore, very easily come to an understanding with them as to what they mean by Esoteric Buddhism. Their Sacred Canon exists in Sanskrit, in Chinese, and in Tibetan, and no Sacred Canon is so large and has at the same time been so minutely catalogued as that of the Buddhists in India, China, or Tibet.

    But though certain portions of Tibet, and particularly the capital (Lassa), are still inaccessible, at least to English travellers from India, other portions of it, and the countries between it and India, are becoming more and more frequented by adventurous tourists. It would therefore hardly be safe to appeal any longer to unknown Mahâtmas, or to the monks of Tibetan monasteries, for wild statements about Buddhism, esoteric or otherwise, for a letter addressed to these monasteries, or to English officials in the neighbourhood, would at once bring every information that could be desired. "Where detection was so easy, it is almost impossible to believe that a Russian traveller, M. Notovitch, who has lately published a 'Life of Christ' dictated to him by Buddhist priests in the Himis Monastery, near Leh, in Ladakh, should, as his critics maintain, have invented not only the whole of this Vie inconnue de Jésus-Christ, but the whole of his journey to Ladakh.

    비록 티벳의 어떤 지역들, 특별히 수도 라싸는 외부인, 특별히 인도를 통해 그리로 여행하는 영국인들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지만, 티벳과 인도 사이이 지역들은 점차 더 많은 탐험가들이 자주 방문하고들 있다. 그래서 이 지역은 어떤 미지의 마하트마 (도인)이나 혹은 티벳 사원의 불승들을 들먹이면서 불교나 혹은 여타 다른 밀교들에 관한 엄청난 주장을 펼치기엔 더이상 안전하지 않다. 이런 불교승원들이나 혹은 근방의 영국관리들에게 편지 한 통만 보내더라도 원하는 모든 정보를 입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뒷조사가 이렇게 쉽기 때문에, 최근에 불히미스 사원의 불승에게 구술받아 적었다는 {예수전 / 이사전}을 펴낸 러시아인 여행자인 노토비치는 아마도 비판자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이사전} 자체를 지어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라다크에 갔었다는 그의 여행 자체를 조작했음이 분명하다고 쉽게 믿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 번역: 최광민



    It is no doubt unfortunate that M. Notovitch lost the photographs which he took on the way, but such a thing may happen, and if an author declares that he has travelled from Kashmir to Ladakh one can hardly summon courage to doubt his word. It is certainly strange that letters should have been received not only from missionaries, but lately from English officers also passing through Leh, who, after making careful inquiries on the spot, declare that no Russian gentleman of the name of Notovitch ever passed through Leh, and that no traveller with a broken leg was ever nursed in the monastery of Himis. But M. Notovitch may have travelled in disguise, and he will no doubt be able to prove through his publisher, M. Paul Ollendorf, how both the Moravian missionaries and the English officers were misinformed by the Buddhist priests of the monastery of Leh. The monastery of Himis has often been visited, and there is a very full description of it in the works of the brothers Schlagintweit on Tibet.

    노토비치가 자신이 여행 중에 찍은 사진들을 분실했다는 점은 몹시 유감스럽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있을 수 있는 법이며, 만약 노토비치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가 카시미르에서 라다크로 여행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말을 굳이 의심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지역에 있는 선교본부나 최근 레를 통해 그 지역을 답사하게 된 영국 관리들이 보내온 편지들에서 어떤 노토비치란 러시아인이 레를 통해 여행했다거나 다리가 부러져 히미스 사원에서 치료받았다는 일이 없다고 보고한 점은 확실히 노토비치를 의심할 만한 부분이다. 그러나 노토비치가 위장하고 여행했을 수도 있고, 그의 출판인인 파울 올렌로르프씨를 통해 밝힌 것처럼 모라비아 선교본부와 영국관리들이 히미스 사원의 불교승려들로부터 잘못된 정보를 받았을 수도 있겠다. 히미스 사원에는 방문객이 종종 있고, 티벳에 있는 슐라긴트바이트 형제들에 의한 매우 자세한 기록이 있다. - 번역: 최광민

    But, taking it for granted that M. Notovitch is a gentleman and not a liar, we cannot help thinking that the Buddhist monks of Ladakh and Tibet must be wags, who enjoy mystifying inquisitive travellers, and that M. Notovitch fell far too easy a victim to their jokes. Possibly, the same excuse may apply to Madame Blavatsky, who was fully convinced that her friends, the Mahâtmas of Tibet, sent her letters to Calcutta, not by post, but through the air, letters which she showed to her friends, and which were written, not on Mahâtmic paper and with Mahâtmic ink, but on English paper and |517 with English ink. Be that as it may, M. Notovitch is not the first traveller in the East to whom Brâhmans or Buddhists have supplied, for a consideration, the information and even the manuscripts which they were in search of. Wilford's case ought to have served as a warning, but we know it did not serve as a warning to M. Jacolliot when he published his Bible dans l'Inde from Sanskrit originals, supplied to him by learned Pandits at Chandranagor.

    노토비치가 선량한 신사요 사기꾼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라다크와 티벳에 있는 불교승려들이 신비한 이야기로 여행자들을 가지고 놀았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노토비치는 아주 쉬운 먹이감이 되었을 뿐이다. 어쩌면 티벳에 있는 마하트마들이 우편도 아닌 공중을 통해, 그것도 티벳종이나 잉크가 아닌 영국종이와 잉크로 씌여진 편지를 캘커타에 있는 자기에게 보내준다고 굳게 믿은 마담 블라바트스키 역시 같은 먹잇감이었을 수도 있다. 어떤 정보나 문서를 찾아 동방에 간 서구인들에게 브라만이나 불교승려들이 원하는 것을 전해준 사례는 노토비치가 처음은 아니다. 윌포드의 사례는 아주 좋은 경고사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윌포드의 이 사례는 찬드라나고르의 힌두교 승려들이 제공했다는 산스크리트어 원문을 통해 {인도의 성서}라는 책을 발표한 자콜리오에게 아무런 경고가 되지 못했다는 점도 우리는 알고 있다. - 번역: 최광민

    Madame Blavatsky, if I remember rightly, never even pretended to have received Tibetan manuscripts, or, if she had, neither she nor Mr. Sinnet have ever seen fit to publish either the text or an English translation of these treasures. But M. Notovitch, though he did not bring the manuscripts home, at all events saw them, and not pretending to a knowledge of Tibetan, had the Tibetan text translated by an interpreter, and has published seventy pages of it in French in his Vie inconnue de Jésus-Christ. He was evidently prepared for the discovery of a Life of Christ among the Buddhists. Similarities between Christianity and Buddhism have frequently been pointed out of late, and the idea that Christ was influenced by Buddhist doctrines has more than once been put forward by popular writers. 

    The difficulty has hitherto been to discover any real historical channel through which Buddhism could have reached Palestine at the time of Christ. M. Notovitch thinks that the manuscript which he found at Himis explains the matter in the simplest way. There is no doubt, as he says, a gap in the life of Christ, say from his fifteenth to his twenty-ninth year. During that very time the new Life found in Tibet asserts that Christ was in India, that he studied Sanskrit and Pâli, that he read the Vedas and the Buddhist Canon, and then returned through Persia to Palestine to preach the Gospel. 



    If we understand M. Notovitch rightly, this Life of Christ was taken down from the mouths of some Jewish merchants who came to India immediately after the Crucifixion (p. 237). It was written down in Pâli, the sacred language of Southern Buddhism; the scrolls were afterwards brought from India to Nepaul and Makhada (quaere Magadha) about 200 a.d. (p. 236), and from Nepaul to Tibet, and are at present carefully preserved at Lassa. Tibetan translations of the Pâli text are found, he says, in various Buddhist monasteries, and, among the rest, at Himis. It is these Tibetan manuscripts which were translated at Himis for M. Notovitch while he was laid up in the monastery with a broken leg, and it is from these manuscripts that he has taken his new Life of Jesus Christ and published it in French, with an account of his travels. This volume, which has already passed through several editions in France, is soon to be translated into English.

    노토비치의 주장을 옳게 이해했다면, 이 '그리스도의 생애'란 문서는 십자가형이 있는 직후 인도로 간 유대인 상인들의 구술에 바탕하여 작성되었다. 이 문서는 남방불교의 종교어인 팔리어로 작성되었고, 두루마리는 이후 인도에서 AD 200년 경에 네팔과 마가다로 옮겨졌다. 그리고 나서 네탈에서 티멧으로 옮겨진 후 현재는 라싸에서 주의깊게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노토비치는 말하길, 팔리어에서 티벳어로 번역된 사본이 여러 불교사원 및 히미스 사원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이 티벳어 사본이 노토비치가 히미스 사원에 부러진 다리 문제로 머무는 종안 번역되었고, 바로 이 번역에 바탕해 노토비치가 그의 기행문과 함께 프랑스어로 그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출판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이미 여러 판을 거쳤고, 곧 영어로도 번역될 것이다.  - 번역: 최광민

    There is a certain plausibility about all this. The language of Magadha, and of Southern Buddhism in general, was certainly Pâli, and Buddhism reached Tibet through Nepaul. But M. Notovitch ought to |518 have been somewhat startled and a little more sceptical when he was told that the Jewish merchants who arrived in India immediately after the Crucifixion knew not only what had happened to Christ in Palestine, but also what had happened to Jesus, or Issa, while he spent fifteen years of his life among the Brâhmans and Buddhists in India, learning Sanskrit and Pâli, and studying the Vedas and the Tripitaka. With all their cleverness the Buddhist monks would have found it hard to answer the question, how these Jewish merchants met the very people who had known Issa as a casual student of Sanskrit and Pâli in India ----for India is a large term----and still more, how those who had known Issa as a simple student in India, saw at once that he was the same person who had been put to death under Pontius Pilate. Even his name was not quite the same. His name in India is said to have been Issa, very like the Arabic name Isâ'l Masîh, Jesus, the Messiah, while, strange to say, the name of Pontius Pilate seems to have remained unchanged in its passage from Hebrew to Pâli, and from Pâli to Tibetan. We must remember that part of Tibet was converted to Mohammedanism. 

    여기엔 확실히 나름 타당성이 있다. 마가다와 남방불교 일반의 언어는 확실히 팔리어고, 불교는 네팔을 거쳐 티벳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형 직후 인도에 도착한 유대인 상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있던 그리스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알 뿐 아니라 또 동시에 예수 혹은 이사가 15년 간 브라만 및 불교도들과 인도에서 살면서 신스크리트어와 팔리어를 배우고 베타와 (불교)삼장을 공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노토비치는 다소 간 놀라거나 혹은 의혹을 가졌으리라. 총명한 불교승려들이라도 어떻게 이 유대인 상인들이 넓은 정의에서 '인도'에서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를 공부하던 일반적인 학생이던 '이사'라 알려진 사람을 아는 바로 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는지, 더 나아가 인도에서 그저 학생이었던 '이사'란 인물을 알던 사람들이 폰티우스 필라투스 치하에 처형당한 사람을 동일인물로 당장에 인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심지어 그의 이름조차 동일하지 않은데 말이다. 그의 이름은 인도에서 '이사'로 불렸다는데, 이것은 '이사 마시 (= 예수 메시아)'란 아랍어와 동일하다. 그런데 또 폰티우스 팔리투스는 히브리어에서 팔리어로, 팔리어에서 티벳어도 번역되는 과정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티벳 일부가 이슬람화 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 번역: 최광민

    So much for the difficulty as to the first composition of the Life of Issa in Pâli, the joint work of Jewish merchants and the personal friends of Christ in India, whether in Sind or at Benares. Still greater, however, is the difficulty of the Tibetan translation of that Life having been preserved for so many centuries without ever being mentioned. If M. Notovitch had been better acquainted with the Buddhist literature of Tibet and China, he would never have allowed his Buddhist hosts to tell him that this Life of Jesus was -well known in Tibetan literature, though read by the learned only. 

    유대인 상인과 인도에 있던 예수의 친구들의 공동작업으로 {이사의 생애}가 인더스 계곡 혹 베나레스에서 팔리어로 처음 작성되었다는 점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 더 나아가, 그 문서가 그렇게 오랬동안 언급되지 않은 채로 수세기 동안 보존되었다가 티벳어로 번역되었다는 데에는 더 큰 문제가 있다. 노토비치가 티벳이나 중국의 불교문서들에 대해 보다 더 잘 알았더라면, 결코 그를 대접한 불교승려들이 이 예수의 생애 이야기가 설령 학식을 갖춘 이들만 읽을 수 있더라도 잘 알려진 티벳 (불교)문서란 식으로 말한 것으로는 적지 않았을 것이다.   - 번역: 최광민



    We possess excellent catalogues of manuscripts and books of the Buddhists in Tibet and in China. A complete catalogue of the Tripitaka or the Buddhist Canon in Chinese has been translated into English by a pupil of mine, the Rev. Bunyiu Nanjio, M.A., and published by the Clarendon Press in 1883. It contains no less than 1,662 entries. The Tibetan Catalogue is likewise a most wonderful performance, and has been published in the Asiatic Researches, vol. xx., by Csoma Körösi, the famous Hungarian traveller, who spent years in the monasteries of Tibet and became an excellent Tibetan scholar. It has lately been republished by M. Féer in the Annales du Musée Guimet. This Catalogue is not confined to what we should call sacred or canonical books, it contains everything that was considered old and classical in Tibetan literature. There are two collections, the Kandjur and the Tandjur. The Kandjur consists of 108 large volumes, arranged in seven divisions:

    1. Dulva, discipline (Vinaya).
    2. Sherch'hin, wisdom (Pragnâpâramitâ).
    3. P'hal-ch'hen, the garland of Buddhas (Buddha-avatansaka).
    4. Kon-tségs, mountain of treasures (Ratnakûta).
    5. Mdo, or Sûtras, aphorisms (Sûtrânta). |519
    6. Myang-Hdas, or final emancipation (Nirvâna).
    7. Gryut, Tantra or mysticism (Tantra).

    'The Tandjur consists of 225 volumes, and while the Kandjur is supposed to contain the Word of Buddha, the Tandjur contains many books on grammar, philosophy, &c, which, though recognised as part of the Canon, are in no sense sacred. In the Tandjur, therefore, if not in the Kandjur, the story of Issa ought to have its place, and if M. Notovitch had asked his Tibetan friends to give him at least a reference to that part of the Catalogue where this story might be found, he would at once have discovered that they were trying to dupe him. Two things in their account are impossible, or next to impossible. The first, that the Jews from Palestine who came to India in about 35 a.d. should have met the very people who had known Issa when he was a student at Benares; the second, that this Sutra of Issa, composed in the first century of our era, should not have found a place either in the Kandjur or in the Tandjur.

    {탄주르}는 225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칸주르}가 붓다의 어록을 취급하고 있다면 {탄주르}는 문법, 철학 등과 관련된 문서를 포함한다. 비록 이들 문서들이 정경의 한 부분으로 여겨지기는 하지만 성스런 종교문서라고 볼 수는 없다. 그래서 만약 {칸주르}가 아니라면 {탄주르}에서 소위 "이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노토비치가 그의 티벳 친구들에게 요청해서 이 이야기가 등장하는 목록의 일부만이라도 물어보았다면, 그는 티벳불승들이 그를 속였다는 것을 당장 알 수 있을 것이다. (노토비치가 전한 / 필자 주) 티벳불승들의 설명은 두가지 점에서 아예 불가능하거나, 매우 불가능하다. 첫째, 팔레스타인에서 인도로 갔다는 유대인들은 그들에 따르면 AD 35년에 인도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그들은 더 나아가서 베나레스에서 오래 전 수행했었다는 이사를 잘 아는 바로 그 사람들 만났다는 것이다. 둘째, {이사 수트라}기 AD 1세기에 작성되었다는데, 이 문건은 {칸주르}와 {탄주르}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 번역: 최광민

    It might, of course, be said, Why should the Buddhist monks of Himis have indulged in this mystification?----but we know as a fact that Pandits in India, when hard pressed, have allowed themselves the same liberty with such men as Wilford and Jacolliot; why should not the Buddhist monks of Himis have done the same for M. Notovitch, who was determined to find a Life of Jesus Christ in Tibet?

    물론 도대체 왜 히미스 사원의 불승들이 이런 신화를 조작할 동기가 무었인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도의 푼디트 (=도인)들을 마구 조르면 윌포드나 자콜리오 같은 사람들에게똑같은 일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티멧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대기를 찾겠다고 작정한 노토비치에게 히미스 사원의 불승들이 똑같은 일을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까? - 번역: 최광민



    If this explanation, the only one I can think of, be rejected, nothing would remain but to accuse M. Notovitch, not simply of a mauvaise plaisanterie, but of a disgraceful fraud; and that seems a strong measure to adopt towards a gentleman who represents himself as on friendly terms with Cardinal Rotelli, M. Jules Simon, and E. Renan. And here I must say that if there is anything that might cause misgivings in our mind as to M. Notovitch's trustworthiness, it is the way in which he speaks of his friends. When a Cardinal at Rome dissuades him from publishing his book, and also kindly offers to assist him, he hints that this was simply a bribe, and that the Cardinal wished to suppress the book. Why should he? If the story of Issa were historically true, it would remove many difficulties. It would show once for all that Jesus was a real and historical character. The teaching ascribed to him in Tibet is much the same as what is found in the Gospels, and if there are some differences, if more particularly the miraculous element is almost entirely absent, a Cardinal of the Roman Catholic Church would always have the tradition of the Church to rest on, and would probably have been most grateful for the solid historical framework supplied by the Tibetan Life.

    M. Notovitch is equally uncharitable in imputing motives to the late M. Renan, who seems to have received him most kindly and to have offered to submit his discovery to the Academy. M. Notovitch |520 says that he never called on Renan again, but actually waited for his death, because he was sure that M. Renan would have secured the best part of the credit for himself, leaving to M. Notovitch nothing but the good luck of having discovered the Tibetan manuscript at Himis. Whatever else Renan was, he certainly was far from jealous, and he would have acted towards M. Notovitch in the same spirit with which he welcomed the discoveries which Hamdy Bey lately made in Syria on the very ground which had been explored before by Renan himself. Many travellers who discover manuscripts, or inscriptions, or antiquities, are too apt to forget how much they owe to good luck and to the spades of their labourers, and that, though a man who disinters a buried city may be congratulated on his devotion and courage and perseverance, he does not thereby become a scholar or antiquary. The name of the discoverer of the Rosetta stone is almost forgotten, the name of the decipherer will be remembered for ever.

    The worst treatment, however, is meted out to the missionaries in Tibet. It seems that they have written to say that M. Notovitch had never broken his leg or been nursed in the monastery of Himis. This is a point that can easily be cleared up, for there are at the present moment a number of English officers at Leh, and there is the doctor who either did or did not set the traveller's leg. M. Notovitch hints that the Moravian missionaries at Leh are distrusted by the people, and that the monks would never have shown them the manuscript containing the Life of Issa. Again I say, why not? If Issa was Jesus Christ, either the Buddhist monks and the Moravian missionaries would have seen that they both believed in the same teacher, or they might have thought that this new Life of Issa was even less exposed to objections than the Gospel story. But the worst comes at the end. 'How can I tell,' he writes, 'that these missionaries have not themselves taken away the documents of which I saw the copies at the Himis monastery?' But how could they, if the monks never showed them these manuscripts? M. Notovitch goes even further. 'This is simply a supposition of my own,' he writes, 'but, if it is true, only the copies have been made to disappear, and the originals have remained at Lassa. ... I propose to start at the end of the present year for Tibet, in order to find the original documents having reference to the life of Jesus Christ. I hope to succeed in this undertaking in spite of the wishes of the missionaries, for whom, however, I have never ceased to profess the profoundest respect.' Any one who can hint that these missionaries may have stolen and suppressed the only historical Life of Christ which is known to exist, and nevertheless express the profoundest respect for them, must not be surprised if the missionaries and their friends retaliate in the same spirit. We still prefer to suppose that M. Notovitch, like Lieutenant Wilford, like M. Jacolliot, like Madame Blavatsky and Mr. Sinnet, was duped. |521 It is pleasanter to believe that Buddhist monks can at times be wags, than that M. Notovitch is a rogue.

    All this, no doubt, is very sad. How long have we wished for a real historical life of Christ without the legendary halo, written, not by one of his disciples, but by an independent eye-witness who had seen and heard Christ during the three years of his active life, and who had witnessed the Crucifixion and whatever happened afterwards? And now, when we seemed to have found such a Life, written by an eye-witness of his death, and free as yet from any miraculous accretions, it turns out to be an invention of a Buddhist monk at Himis, or, as others would have it, a fraud committed by an enterprising traveller and a bold French publisher. We must not lose patience. In these days of unexpected discoveries in Egypt and elsewhere, everything is possible. There is now at Vienna a fragment of the Gospel-story more ancient than the text of St. Mark. Other things may follow. Only let us hope that if such a Life were ever to be discovered, the attitude of Christian theologians would not be like that which M. Notovitch suspects on the part of an Italian Cardinal or of the Moravian missionaries at Himis, but that the historical Christ, though different from the Christ of the Gospels, would be welcomed by all who can believe in his teaching, even without the help of miracles.

    F. Max Müller.



    P.S.----It is curious that at the very time I was writing this paper I received a letter from an English lady dated Leh, Ladakh, June 29. She writes:

    [막스 뮐러의 추가노트] 흥미롭게도 내가 이 논문을 쓰던 중, 6월 29일에 티벳 라다크 레에서 한 영국인 여성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 - 번역: 최광민


    We left Leh two days ago, having enjoyed our stay there so much! There had been only one English lady here for over three years. Two German ladies live there, missionaries, a Mr. and Mrs. Weber----a girl, and another English missionary. They have only twenty Christians, though it has been a mission-station for seven years. We saw a polo match which was played down the principal street.

    [영국인 여성의 편지] 우리는 이틀 전에 레를 떠났습니다. 레에서 머물 때 얼마나 즐거웠던지요. 지난 3년 이상 영국인 여성이라곤 단 한 명 뿐이었고, 두 명의 독일 여성들과, 선교사인 웨버 부부와 한 소녀와 또 다른 영국인 선교사가 살고 있습니다. 레에는 7년 간 선교본부가 있었지만 20여 명의 기독교도만 있습니다. 우리는 대로에서 벌어진 폴로 경기를 관람했습니다. - 번역: 최광민

    Yesterday we were at the great Himis monastery, the largest Buddhist monastery up here----800 Lamas. Did you hear of a Russian who could not gain admittance to the monastery in any way, but at last broke his leg outside, and was taken in? His object was to copy a Buddhist Life of Christ which is there. He says he got it, and has published it since in French. There is not a single word of truth in the whole story! There has been no Russian there. No one has been taken into the Seminary for the past fifty years with a broken leg! There is no Life of Christ there at all! It is dawning on me that people who in England profess to have been living in Buddhist monasteries in Tibet and to have learnt there the mysteries of Esoteric Buddhism are frauds.


    어제 우리는 장대한 히미스 사원에 갔었습니다. 800명의 승려가 거주하는 이 지역의 가장 큰 불교사원이죠. 그런데 (히미스 -- 필자 주) 사원에 들어가려고 애쓰다가 거절 당했다가 막판에 다리가 골절되는 바람에 사원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어떤 러시아 사람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그 러시아인의 목적은 그 사원에 있다는 불제자 예수의 전기를 복사하려는 것이었답니다. 그는 그 문서를 결국 얻게 되었고 그 후 프랑스어로 번역출판하였다고 주장한다죠? 그 사람 말은 하나도 믿을 것이 없어요. 그 사원에는 러시아인이라고는 있어본 적이 없어요. 지난 50년 간 다리가 부러진 어떤 사람이 경내에 들어온 적이 없다고 합니다! 물론 예수의 전기 같은게 있지도 않고요. 티벳에 있는 불교사원에 거쳐하면서 밀교계통 불교의 신비를 배웠다느니 주장하는 영국인 사기꾼들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번역: 최광민


    The monasteries one and all are the most filthy places. The Lamas are the dirtiest of a very dirty race. They are fearfully ignorant, and idolaters pur et simple; no----neither pure nor simple. I have asked many travellers whom I have met, and they all tell the same story. They acknowledge that perhaps at the Lama University at Lassa it may be better, but no Englishman is allowed there. Captain Bower (the discoverer of the famous Bower MS.) did his very best to get there, but failed.

    이곳 (불교)사원들은 하나같이 불결합니다. 승려들은 그 중에서도 아주 지저분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끔찍히도 무지하며 순진하고 단순한 우상숭배자들입니다. 아니, 순진하지도 단순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만난 많은 여행자들 역시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라싸에 있는 승가대학은 나을 것이라고 인정합니다만, 영국인들은 거기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 유명한 보워 사본의 발견자인) 보워 대위도 거기 들어가 보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 번역: 최광민

    . . . . We are roughing it |522 now very much. I have not tasted bread for five weeks, and shall not for two months more. We have 'chappaties' instead. We rarely get any butter. We carry a little tinned butter, but it is too precious to eat much of. It was a great luxury to get some linen washed in Leh, though they did starch the sheets. "We are just starting on our 500 miles march to Simla. We hear that one pass is not open yet, about which we are very anxious. We have one pass of 18,000 feet to cross, and we shall be 13,000 feet high for over a fortnight; but I hope that by the time you get this we shall be down in beautiful Kulu, only one month from Simla!





    부록 #2: 아치발드 더글라스의 현지답사보고서 전문 (1895년)

    [필자/최광민 주]학술지 {The Nineteenth Century}의 제 39판 (January-June 1896), 667-677 페이지에 등장하는 아치발드 더글라스의 논문/보고서의 전문을 옮긴다. 히미스 사원의 주지와의 인터뷰 부분은 하이라이트 하고 한국어로 번역했다. 질문 내용 중 (참고)부분은 내가 추가했다.



    {A FESTIVAL IN A GONPA.}: http://www.sacred-texts.com/chr/uljc/uljc05.htm#page_117


      출처: The Nineteenth Century, 39 (January-June 1896) pp. 667-677

      source: http://www.tertullian.org/rpearse/scanned/notovitch.htm

      THE CHIEF LAMA OF HIMIS ON THE ALLEGED 'UNKNOWN LIFE OF CHRIST'

      It is difficult for any one resident in India to estimate accurately the importance of new departures in European literature, and to gauge the degree of acceptance accorded to a fresh literary discovery such as that which M. Notovitch claims to have made. A revelation of so surprising a nature could not, however, have failed to excite keen interest, not only among theologians and the religious public generally, but also among all who wish to acquire additional information respecting ancient religious systems and civilisations.

      Under these circumstances it was not surprising to find in the October (1894) number of this Review an article from the able pen of Professor Max Müller dealing with the Russian traveller's marvellous 'find.'

      I confess that, not having at the time had the pleasure of reading the book which forms the subject of this article, it seemed to me that the learned Oxford Professor was disposed to treat the discoverer somewhat harshly, in holding up the Unknown Life of Christ as a literary forgery, on evidence which did not then appear conclusive.

      A careful perusal of the book made a less favourable impression of the genuineness of the discovery therein described; but my faith in M. Notovitch was somewhat revived by the bold reply which that gentleman made to his critics, to the effect that he is 'neither a "hoaxer" nor a "forger," ' and that he is about to undertake a fresh journey to Tibet to prove the truth of his story.

      In the light of subsequent investigations, I am bound to say that the chief interest which attaches, in my mind, to M. Notovitch's daring defence of his book is the fact that that defence appeared immediately before the publication of an English translation of his work.

      I was resident in Madras during the whole of last year, and did not expect to have an opportunity of investigating the facts respecting the Unknown Life of Christ at so early a date. Removing to the North-West Provinces in the early part of the present year, I found that it would be practicable during the three months of the University vacation to travel through Kashmir to Ladakh, following the route taken by M. Notovitch, and to spend sufficient time at the monastery at Himis to learn the truth on this important question. 

      나는 작년 한 해 내내 마드라스에 거주했는데, 내가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진위에 대해 그렇게 일찍 조사할 기회를 가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올해 초반 북서부 지방으로 떠나면서, 나는 대학에서의 석달휴가 동안 노토비치의 경유지를 따라 카쉬미르를 통과해 라다크로 여행해볼 만하며, 히미스에 있는 승원에서 충분한 시간 머물면서 이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진실을 조사할 충분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는 점을 발견했다. 번역: 최광민



      I may here mention, en passant, that I did not find it necessary to break even a little finger, much less a leg, in order t이인o gain admittance to Himis Monastery, where I am now staying for a few days, enjoying the kind hospitality of the Chief Lama (or Abbot), the same gentleman who, according to M. Notovitch, nursed him so kindly under the painful circumstances connected with his memorable visit.

      히미스 사원에 들어가기 위해서 다리는 고사하고 새끼손가락 하나라도 부러뜨릴 필요가 없었다는 점을 여기서 말해야 할 듯 하다. 내가 지금 며칠 째 머물고 있고, 노토비치에 따르면 그의 기억에 남을 만한 방문에 연관되어 있다는 (다리가 부러진 / 역자 주) 고통스런 상황에서 그를 친절히 돌봐주었다는 바로 그 주지 (혹 승정)의 호의를 즐기고 있는 바로 이곳 말이다. 번역: 최광민

      Coming to Himis with an entirely open mind on the question, and in no way biassed by the formation of a previous judgment, I was fully prepared to find that M. Notovitch's narrative was correct, and to congratulate him on his marvellous discovery.  

      히미스로 오는 길에, 나는 완전히 이 문제에 대해 완전히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이미 제기된 판단에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사실 노토비치의 진술이 옳은 것으로 드러날 경우 그의 놀라운 발견에 대해 그에게 축하를 전할 완전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번역: 최광민

      One matter of detail, entirely unconnected with the genuineness of the Russian traveller's literary discovery, shook my faith slightly in the general veracity of the discoverer. Daring his journey up the Sind Valley M. Notovitch was beset on all sides by 'panthers, tigers, leopards, black bears, wolves, and jackals.' A panther ate one of his coolies near the village of Haïena before his very eyes, and black bears blocked his path in an aggressive manner. Some of the old inhabitants of Haïena told me that they had never seen or heard of a panther or tiger in the neighbourhood, and they had never heard of any coolie, travelling with a European sahib, who had lost his life in the way described. They were sure that such an event had not happened within the last ten years. I was informed by a gentleman of large experience in big-game shooting in Kashmir that such an experience as that of M. Notovitch was quite unprecedented, even in 1887, within thirty miles of the capital of Kashmir. During my journey up the Sind Valley the only wild animal I saw was a red bear of such retiring disposition that I could not get near enough for a shot.

      이 러시아 여행자의 문서발견의 진위과는 완전히 별도로, 세부사항 하나가 그 발견의 전반적인 진실성에 대한 나의 신뢰를 조금 흔들었다. 노토비치는 인더스 계곡을 따라 여행하면서 들고양이, 호랑이, 표범, 혹곰, 늑대, 들개가 도처에서 위협했다고 적으면서, 바로 그의 눈 앞에서 짐꾼 하나가 하이에나 마을 근처에서 들고양이에게 잡아먹혔고, 흑곰이 그의 앞길을 공격적으로 막아섰다고 적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사는 노인들이 내게 말하길, 자기들은 마을 근처에서 들고양이나 호랑이 무리를 본적이 결코 없으며, 또 짐꾼이나 유럽인 여행자가 묘사된 것 처럼 짐승들에게 생명을 잃었다는 이야기도 전혀 들어 본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지난 10년 간 그런 일은 절대 없었다고 확인해 주었다. 나는 카쉬미르 지역에서 많은 사냥 경험을 가진 신사로부터 노토비치가 겪었다는 일이 카쉬미르의 주도로부터 30마일 내외 지역에서는 심지어 1887년 시점에서도 꽤 전례가 없다는 점도 언질 받았다.  인더스 계곡을 따라 올라오는 길에 내가 본 유일한 야생동물이라고는 불곰 한마리 뿐인데, 그나마도 그 불곰은 낯을 가려 가까이에서 볼 수 조차 없었다. 번역: 최광민



      In Ladakh I was so fortunate as to bag an ibex with thirty-eight-inch horns, called somewhat contemptuously by the Russian author 'wild goats;' but it is not fair to the Ladakhis to assert, as M. Notovitch does, that the pursuit of this animal is the principal occupation of the men of the country. Ibex are now so scarce near the Leh-Srinagar road that it is fortunate that this is not the case.

      운좋게도 라다크에서 38인치 길이의 뿔을 가진 산양 (ibex) 을 잡을 기회가 있었다. 그 러시아 작가 (=노토비치)는 다소 무시하는 조로 "야생 염소"라 불렀다. 그러나 이 산양을 사냥하는 것을 그 지역 남자들의 주업이라고 라다크 주민들이 말했다는 노토비치의 진술은 부당한데, 산양은 현재 레와 스리나가르 도상 인근에서는 너무 드물어서 주민들이 주업으로 산양을 사냥하지 않는게 차라리 다행이다. 
      번역: 최광민

      M. Notovitch pursued his path undeterred by trifling discouragements, 'prepared,' as he tells us, ' for the discovery of a Life of Christ among the Buddhists.' In justice to the imaginative author I feel bound to say that I have no evidence that M. Notovitch has not visited Himis Monastery. On the contrary, the Chief Lama, or Chagzot, of Himis does distinctly remember that several European gentlemen visited the monastery in the years 1887 and 1888.


      노토비치는 '불교도들 사이에서 그리스도의 생애담을 발견'하기 위해, 낙담에도 좌절하지 않고 (여행을) "준비"였다고 적었다. 공상적 작가에겐 불리하게도, 나는 노토비치가 히미스 사원을 방문했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고 말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히미스 사원의 주지승 혹은 차그좃은 1887년에서 1888년 사이에 승원을 방문한 여러 명의 유럽인들에 대해 분명히 기억했다. 
      번역: 최광민

      I do not attach much importance to the venerable Lama's declaration, before the Commissioner of Ladakh, to the effect that no Russian gentleman visited the monastery in the years named, because I have reason to believe that the Lama was not aware at the time of the appearance of a person of Russian nationality, and on being shown the photograph of M. Notovitch confesses that he might have mistaken him for an 'English sahib.' It appears certain that this venerable Abbot could not distinguish at a glance between a Russian and other European or American traveller.

      나는 라다크에 있는 관리가 언급해 연도에 어떤 러시아인도 히미스 사원을 방문한 적이 없다는 것 같은 내용을 확인해주기 전까지는 스님의 증언에 큰 무게를 두지 않는데,  스님이 러시아 국적을 가진 사람의 외모를 당시에 구별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르고, 또 노토비치의 사진을 보여드렸을 때 어떤 '영국인 사히브'와 그를 혼동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주지스님은 러시아인과 다른 유럽인 혹은 미국인 여행자를 한 눈에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번역: 최광민



      The declaration of the 'English lady at Leh,' and of the British officers, mentioned by Professor Max Millier, was probably founded on the fact that no such name as Notovitch occurs in the list of European travellers kept at the dâk bungalow in Leh, where M. Notovitch says that he resided during his stay in that place. Careful inquiries have elicited the fact that a Russian gentleman named Notovitch was treated by the medical officer of Leh Hospital, Dr. Karl Marks, when suffering not from a broken leg, but from the less romantic but hardly less painful complaint----toothache.

      막스 뮐러 교수가 언급한 '레를 방문한 영국인 여성"과 영국 관리들이 밝힌 내용은 아마도 레에 있는 유럽인 여행자 숙소의 투숙객 명부에 노토비치란 이름이 없다는 사실에서도 아마도 드러날 것 같은데, 노토비치는 체류 중에 바로 그곳에 머물렀었다고 적었다. 면밀히 조사해 보니, 노토비치란 이름의 러시아 남성이 레 병원의 칼 막스 박사로 부터 - 부러진 다리를 치료 받은 것이 아니라 -  그보단 덜 낭만적이지만, 그럼에도 덜 고통스럽다고는 할 수 없을...."치통" 치료를 받았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번역: 최광민

      I will now call attention to several leading statements in M. Notovitch's book, all of which will be found to be definitely contradicted in the document signed by the Chief Superior of Himis Monastery, and sealed with his official seal. This statement I have sent to Professor Max Müller for inspection, together with the subjoined declaration of Mr. Joldan, an educated Tibetan gentleman, to whose able assistance I am deeply indebted. A more patient and painstaking interpreter could not be found, nor one better fitted for the task.

      이제 노토비치의 책에 나오는 몇가지 주요 진술들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데, 이 모든 진술들은 히미스 사원의 주지승려가 서명하고 본인의 공식인장으로 봉인된 내용과 결정적으로 상충된다. 나는 검토를 위해 이 문서를 막스 뮐러 교수에게 보내면서, 이와 연관하여 교육받은 티벳 신사이자 내가 그의 도움에 크게 빚진 바 있는 졸단씨의 증언도 첨부했는데, 그 보다 더 인내하고 어려움을 감수하며 통역을 진행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도, 또 이 직무에 더 적합한 인물을 찾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번역: 최광민

      The extracts from M. Notovitch's book were slowly translated to the Lama, and were thoroughly understood by him. The questions and answers were fully discussed at two lengthy interviews before being prepared as a document for signature, and when so prepared were carefully translated again to the Lama by Mr. Joldan, and discussed by him with that gentleman, and with a venerable monk who appeared to act as the Lama's private secretary.

      노토비치의 책에서 발췌한 내용은 스님이 철처하게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천천히 통역되었다. 질문과 답변은 서명을 받기 위해 문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두번의 인터뷰를 통해 철처히 토론되었고, 그렇게 준비된 문서를 졸단씨가 다시 (주지)스님께 번역해 드렸고, (주지)스님과 졸단씨, 그리고 스님의 개인비서인 듯 보이는 고승과 그 내용을 함께 토론했다. 번역: 최광민

      I may here say that I have the fullest confidence in the veracity and honesty of this old and respected Chief Lama, who appears to be held in the highest esteem, not only among Buddhists, but by all Europeans who have made his acquaintance. As he says, he has nothing whatever to gain by the concealment of facts, or by any departure from the truth.

      아마 여기서 이 연로하시고 존경받는 주지스님의 진실성과 정직을 완전히 확신한다는 점을 말해 두는게 좋겠다. 그 분은 단지 불교도들 사이에서 뿐 아니라, 그들 아는 모든 유럽인들에게도 최고의 존경을 받는 분이었다. 그 분이 말한 바대로, 그는 사실을 감춰서 진실을 속여 얻을 이득 같은게 있을 리 없는 분이다. 번역: 최광민

      His indignation at the manner in which he has been travestied by the ingenious author was of far too genuine a character to be feigned, and I was much interested when, in our final interview, he asked me if in Europe there existed no means of punishing a person  who told such untruths. I could only reply that literary honesty is taken for granted to such an extent in Europe, that literary forgery of the nature committed by M. Notovitch could not, I believed, be punished by our criminal law.

      이 창의적인 작가 (=노토비치)가 사실과 다른 인물로 자신 (=주지)을 왜곡한 방식에 대한 이 분의 분노는 꾸며낸 것이라고 전혀 볼 수 없었다. 우리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하신 말씀이 매우 인상 깊었는데, 그분은 유럽에는 그런 거짓말을 한 사람을 처벌할 방법이 없는가 하고 물으셨다. 나는 유럽에서는 문서의 진실성이 당연히 여겨지지만, 노토비치가 한 문서위조의 성격상 우리 법률로는 처벌할 방법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번역: 최광민



      With reference to M. Notovitch's declaration that he is going to Himis to verify the statements made in his book, I would take the liberty of earnestly advising him, if he does so, to disguise himself at least as effectually as on the occasion of his former visit. M. Notovitch will not find himself popular at Himis, and might not gain admittance, even on the pretext of having another broken leg.

      자신의 책에 쓴 내용을 입증하기 위해 히미스 사원에 가겠다는 노토비치의 선언에 대해 평하자면, 나는 그가 그렇게 하겠다면 지난번처럼 완전히 위장하고 가보라고 진지하게 충고할 생각이다. 노토비치는 자신이 히미스 사원에서 이제 환영받지 못한다는 점과, 아마도 다른 쪽 다리가 부러졌다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사원에 들어갈 수 없을 지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번역: 최광민

      The following extracts have been carefully selected from the Unknown Life of Christ, and are such that on their truth or falsehood may be said to depend the value of M. Notovitch's story. After describing at length the details of a dramatic performance, said to have been witnessed in the courtyard of Himis Monastery, M. Notovitch writes:

      • After having crossed the courtyard and ascended a staircase lined with prayer-wheels, we passed through two rooms encumbered with idols, and came out upon the terrace, where I seated myself on a bench opposite the venerable Lama, whose eyes flashed with intelligence (p. 110).
      • (This extract is important as bearing on the question of identification; see Answers 1 and 2 of the Lama's statement: and it may here be remarked that the author's account of the approach to the Chief Lama's reception room and balcony is accurate.) Then follows a long résumé of a conversation on religious matters, in the course of which the Abbot is said to have made the following observations amongst others:
      • We have a striking example of this (Nature-worship) in the ancient Egyptians, who worshipped animals, trees, and stones, the winds and the rain (p. 114).
      • The Assyrians, in seeking the way which should lead them to the feet of the Creator, turned their eyes to the stars (p. 115).
      • Perhaps the people of Israel have demonstrated in a more flagrant manner than any other, man's love for the concrete (p. 115).
      • The name of Issa is held in great respect by the Buddhists, but little is known about him save by the Chief Lamas who have read the scrolls relating to his life (p. 120).
      • The documents brought from India to Nepal, and from Nepal to Tibet, concerning Issa's existence, are written in the Pâli language, and are now in Lassa; but a copy in our language----that is, the Tibetan----exists in this convent (p. 123).
      • Two days later I sent by a messenger to the Chief Lama a present comprising an alarum, a watch, and a thermometer (p. 125).
      • We will now pass on to the description given by the author of his re-entry into the monastery with a broken leg:
      • I was carried with great care to the best of their chambers, and placed on a bed of soft materials, near to which stood a prayer-wheel. All this took place under the immediate surveillance of the Superior, who affectionately pressed the hand I offered him in gratitude for his kindness (p. 127).
      • While a youth of the convent kept in motion the prayer-wheel near my bed, |671 the venerable Superior entertained me with endless stories, constantly taking my alarum and watch from their cases, and putting me questions as to their uses, and the way they should be worked. At last, acceding to my earnest entreaties, he ended by bringing me two large bound volumes, with leaves yellowed by time, and from them he read to me, in the Tibetan language, the biography of Issa, which I carefully noted in my carnet de voyage, as my interpreter translated what he said (p. 128).

      This last extract is in a sense the most important of all, as will be seen when it is compared with Answers 3, 4, and 5 in the statement of the Chief Superior of Himis Monastery. That statement I now append. The original is in the hands of Professor Max Müller, as I have said, as also is the appended declaration of Mr. Joldan, of Leh.

      The statement of the Lama, if true----and there is every reason to believe it to be so----disposes once and for ever of M. Notovitch's claim to have discovered a Life of Issa among the Buddhists of Ladakh. My questions to the Lama were framed briefly, and with as much simplicity as possible, so that there might be no room for any mistake or doubt respecting the meaning of these questions.

      My interpreter. Mr. Joldan, tells me that he was most careful to translate the Lama's answers verbally and literally, to avoid all possible misapprehension. The statement is as follows:


      이하 번역: 최광민



      ####################################
      Question 1. You are the Chief Lama (or Abbot) of Himis Monastery?

      질문 1. 헤미스(히미스) 사원의 주지스님이신가요?

      Answer 1. Yes.

      답변 1. 그렇습니다.

      Question 2. For how long have you acted continuously in that capacity?

      질문 2. 얼마동안 주지로 계셨나요?

      Answer 2. For fifteen years.

      답변 2. 15년 입니다.

      Question 3. Have you or any of the Buddhist monks in this monastery ever seen here a European with an injured leg?

      질문 3. 주지스님이나 이 사원에 있는 다른 승려들 가운데 다리에 부상을 입은 유럽인을 사원 경내에서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참고: 노토비치는 자신이 주지와 대화를 나누었다고 진술했다: "The chief lama, approaching me, tendered an invitation to accompany him to the principal terrace and partake of the festal "tchang;" which I accepted with pleasure, for my head was dizzy from the long spectacle.")

      Answer 3. No, not during the last fifteen years. If any sahib suffering from serious injury had stayed in this monastery it would have been my duty to report the matter to the Wazir of Leh. I have never had occasion to do so.

      답변 3. 아니오. 지난 15년 간은 없습니다. 만약 중상을 입고 고통을 당하는 신사 분/사히브가 사원 경내에 머물렀다면, 그 일을 레에 계신 관리/와지르께 보고하는 것이 내 의무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랬던 적이 없습니다.

      Question 4. Have you or any of your monks ever shown any Life of Issa to any sahib, and allowed him to copy and translate the same?

      질문 4. 어떤 승려가 전에 {이사의 생애}라는 책을 신사 분/사히브에게 보여주고, 그 사히브가 그 책을 복사해서 번역하도록 해준 일이 있나요?

      (참고: 노토비치는 주지 본인이 자신에게 그 책의 사본을 보여주었다고 진술했다. ""Would you commit a sin in reciting your copy of the life of Issa to a stranger?" I asked him. "That which belongs to God," he answered me, "belongs also to man. Our duty requires us to cheerfully devote ourselves to the propagation of His doctrine. Only, I do not, at present, know where that manuscript is. If you ever visit our gonpa again, I shall take pleasure in showing it to you.")

      Answer 4. There is no such book in the monastery, and during my term of office no sahib has been allowed to copy or translate any of the manuscripts in the monastery.

      답변 4. 그런 책은 우리 사원에 없고, 내 임기 중에 어떤 사히브에게도 우리 사원이 보유한 사본을 복사하거나 번역하도록 허가한 일이 없습니다.

      Question 5. Are you aware of the existence of any book in any of the Buddhist monasteries of Tibet bearing on the life of Issa?

      질문 5. 티벳에 있는 불교승원 가운데 {이사의 생애}의 내용을 담은 어떤 책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신가요? (참고: 노토비치에 따르면, 주지는 이 문서 및 "이사"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해 주었다: """In what language are written the principal scrolls bearing upon the life of Issa?" I asked, rising from my seat, for I saw that my interesting interlocutor evidenced fatigue, The original scrolls brought from India to Nepaul, and from Nepaul to Thibet, relating to the life of Issa, are written in the Pali language and are actually in Lhassa; but a copy in our language--I mean the Thibetan--is in this convent.". "How is Issa looked upon in Thibet? Has he the repute of a saint?". "The people are not even aware that he ever existed. Only the principal lamas, who know of him through having studied the scrolls in which his life is related, are familiar with his name; but, as his doctrine does not constitute a canonical part of Buddhism, and the worshippers of Issa do not recognize the authority of the Dalai-Lama, the prophet Issa--with many others like him--is not recognized in Thibet as one of the principal saints....")

      Answer 5. I have been for forty-two years a Lama, and am well acquainted with all the well-known Buddhist books and manuscripts, and I have never heard of one which mentions the name of Issa, and it is my firm and honest belief that none such exists. I have inquired of our principal Lamas in other monasteries of Tibet, and they are not acquainted with any books or manuscripts which mention the name of Issa. 

      답변 5. 나는 불교승려 (라마)로 42년을 지냈고, 잘 알려진 모든 불교서적과 사본들에 대해 꽤 잘 알고 있습니다만, "이사"라는 이름을 언급한 문서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문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확고하고 솔직한 믿음입니다. 티벳에 있는 다른 불교승원들의 고승들에게도 문의해 보았습니다만, 그들 역시 "이사"라는 이름을 언급한 책이나 사본에 대해 모르고 있습니다

      Question 6. M. Nicolas Notovitch, a Russian gentleman who visited |672 your monastery between seven and eight years ago, states that you discussed with him the religions of the ancient Egyptians, Assyrians, and the people of Israel.

      질문 6. 7-8년 전에 이 승원을 방문했다는 러시아인 니콜라스 노토비치는, 주지스님과 노토비치씨가 고대 이집트인들과 앗시리아인들, 그리고 이스라엘인들에 대해 토론했다고 책에서 진술했는데요.... (참고: 노토비치는 히미스 사원의 주지가 이집트/앗시리아/이스라엘 종교에 대한 심도있는 이해를 보여주었다고 진술했다: "....We see a striking example of this in the ancient Egyptians, who adored animals, trees, stones, the winds and the rain....(중략)...While seeking a route to lead their feet to the Creator, the Assyrians turned their eyes toward the stars, which they contemplated without the power of attaining them. The Guebers have conserved the same belief to our days...(중략)...The Israelites may be said to have demonstrated, in the most flagrant way, the love of man for everything which is concrete....")

      Answer 6. I know nothing whatever about the Egyptians, Assyrians, and the people of Israel, and do not know anything of their religions whatsoever. I have never mentioned these peoples to any sahib.

      답변 6. 나는 이집트인이니 앗시리아인이니 이스라엘인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아는게 전무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종교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아는 바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에 대해 어떤 사히브와도 이야기 한 적이 없습니다.

      [I was reading M. Notovitch's book to the Lama at the time, and he burst out with, 'Sun, sun, sun, manna mi dug!' which is Tibetan for, 'Lies, lies, lies, nothing but lies!' I have read this to him as part of the statement which he is to sign----as his deliberate opinion of M. Notovitch's book. He appears perfectly satisfied on the matter. J. A. D.]

      [그리고 나는 노토비치의 책을 주지스님에게 읽어주었는데, 그는 "순, 순, 순, 만나 미 둑!" 라며 티벳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말은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완전 거짓말일세!"란 뜻이다......]

      Question 7. Do you know of any Buddhist writings in the Pâli language?

      질문 7. 스님께서는 팔리어로 된 불교문서를 알고 계신가요?

      (참고: 노토비치에 따르면, 주지는 이사에 대한 문서가 인도에서 네팔을 거쳐 티벳에 들어왔으며, 현재 라싸에는 팔리어 원본이 있고, 히미스 사원에는 티벳어 사본이 있다고 진술했다; 
      ""The original scrolls brought from India to Nepaul, and from Nepaul to Thibet, relating to the life of Issa, are written in the Pali language and are actually in Lhassa; but a copy in our language--I mean the Thibetan--is in this convent.")

      Answer 7. I know of no Buddhist writings in the Pâli langage; all the writings here, that I know of, have been translated from Sanskrit and Hindi into the Tibetan language.

      답변 7. 나는 팔리어로 된 불교문서를 모릅니다. 이곳에 있는 내가 아는 문서들은 모드 산스크리트어와 힌디어에서 티벳어로 번역된 것들 뿐입니다.

      [From this answer, and other observations of the Lama, it would appear that he is not acquainted with the term 'Pâli.'----J. A. D. ]

      [.....주지스님은 "팔리"라는 용어자체를 모르는 것 같았다....JAD]

      Question 8. Have you received from any sahib a present of a watch, an alarum, and a thermometer?

      질문 8. 스님은 손목시계, 알람시계, 온도계 같은 것을 어떤 사히브(=노토비치)로부터 받으신 바 있으신가요?

      (참고: 노토비치는 주지에게 이 선물들을 주었다고 적었다: "In the evening of the next day I was again in Leh--thinking of how to get back to the convent. Two days later I sent, by a messenger, to the chief lama, as presents, a watch, an alarm clock, and a thermometer....")

      Answer 8. I have never received any such presents from any sahib. I do not know what a thermometer is. I am sure that I have not one in my possession.

      답변 8. 나는 어떤 신사 분/사히브로부터도 그런 선물을 받은 적 없습니다. 나는 온도계가 뭔지로 모르겠군요. 내가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This answer was given after a careful explanation of the nature of the articles in question.----J. A. D.]

      Question 9. Do you speak Urdu or English?

      질문 9. 스님께서는 우르두어나 영어를 하실 수 있습니까?

      Answer 9. I do not know either Urdu or English.

      답변 9. 나는 우르두어나 영어를 못합니다.

      Question 10. Is the name of Issa held in great respect by the Buddhists?

      질문 10. 불교도들 사이에서 "이사"가 크게 존경받는 인물인가요?

      (참고: 노토비치에 따르면, 주지는 이사가 불교도 (고승들 가운데) 높은 존경을 받고 있다고 적었다. "The name Issa is very much respected among the Buddhists," he replied, "but he is only known by the chief lamas, who have read the scrolls relating to his life.")

      Answer 10. They know nothing even of his name; none of the Lamas has ever heard it, save through missionaries and European sources.

      답변 10. 불교도들은 심지어 그런 이름조차 모릅니다. 서방에서 온 선교사들이나 유럽 측 자료를 통하기까진, 어떤 고승(라마)들도 그런 이름을 예전에 들어본 적조차 없었습니다.

      Signed in the Tibetan language by the Chief Lama of Himis, and sealed with his official seal.
      히미스 사원의 주지의 티벳어 서명 및 주지의 공식인감 날인.

      In the presence of us
      J. Archibald Douglas, Professor, Government College, Agra, N.-W. P.
      Shahmwell Joldan, late Postmaster of Ladakh.

      입회인
      J. 아치발드 더글라스, 아그라 소재 Goverment College 교수
      샴웰 졸단, 라다크의 우체국장 (은퇴)

      Himis Monastery, Little Tibet: June 3, 1895.

      소 티벳 소재 히미스 사원에서. 1895년 6월 3일.

      (Mr. Joldan's Declaration)

      졸단씨의 선서

      This is my declaration: That I acted as interpreter for Professor Douglas in his interviews with the Chief Lama of Hiinis Monastery.

      선서합니다. 나는 히미스 사원의 주지스님과 인터뷰한 더글라스 교수의 통역을 맡았습니다.

      I can speak English, and Tibetan is my native language. The questions and answers to which the Chief Lama has appended his seal and signature were thoroughly understood by him, and I have the fullest confidence in his absolute veracity.

      나는 영어를 구사할 수 있으며, 티벳어는 나의 모국어입니다. 모든 질문들과 답변들은 주지스님의 직인과 서명이 날인되었으며, 주지스님은 이 질문들과 답변들을 완전히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정직성을 절대적으로 확신합니다.

      Shahmwell Joldan
      (Retired Postmaster of Ladakh
      under the British Imperial Post Office).

      샴웰 졸단
      대영제국 체신국 산하의 라다크 전직 우체국장 (은퇴)
      #####################################




      Leh: June 5, 1895.

      This statement and declaration appear conclusive, and they are confirmed by my own inquiries, and by those made in my presence by the Abbot of Hirnis of some of the monks who have been longest resident in the monastery. There is every reason for believing that the conversations with the Lamas of Wokka and Lamayuru originated also in the fertile brain of M. Notovitch.

      Neither of these reverend Abbots remembers anything about the Russian traveller, and they know nothing of the religion of Issa (Christianity) or of any Buddhist sacred books or writings which mention his name.

      I would here remark that the Lamas of Ladakh are not a garrulous race, and I have never known them indulge in high-flown platitudes on any subject. The casual reader would judge from a perusal of M. Notovitch's 'conversations' with them, that they were as much addicted to pompous generalities as the orators of youthful debating societies. The Lamas I have met are prepared to answer rational inquiries courteously. They do so with brevity, and usually to the point. They confess willingly that their knowledge on religious subjects is limited to their own religion, and that they know nothing whatever of religious systems unconnected with Tibetan Buddhism. They do not read any languages but Sanskrit and Tibetan, and their conversations with foreigners are altogether limited to commonplace topics. The Chief Lama of Himis had never heard of the existence of the Egyptians or of the Assyrians, and his indignation at M. Notovitch's statement that he had discussed their religious beliefs was so real, that he almost seemed to imagine that M. Notovitch had accused him of saying something outrageously improper.

      The exclusiveness of the Buddhism of Lassa seems to have instilled into the minds of the Lamaïstes an instinctive shrinking from foreign customs and ideas.

      I would call attention especially to the ninth answer in the Lama's statement, in which he disclaims all knowledge of the English and Urdu languages.

      The question arises, 'Who was M. Notovitch's interpreter?' The Tibetans of Ladakh competent to interpret such a conversation are leading men, certainly not more than three or four in number. Not one of them has ever seen M. Notovitch, to his knowledge. What does our imaginative author tell about this detail? On page |673 35 of the English edition, we are informed that at the village of Groond (thirty-six miles from Srinagar) he took a shikari into his service 'who fulfilled the rôle of interpreter.' Of all the extraordinary statements with which this book abounds, this appears to us the most marvellous. A Kashmiri shikari is invariably a simple peasant, whose knowledge of language is limited to his native tongue, and a few words of Urdu and English, relating to the necessities of the road, the camp and sport, picked up from English sportscaen and their Hindu attendants.

      Even in his own language no Kashmiri villager would be likely to be able to express religious and philosophical ideas such as are contained in the 'conversations' between M. Notovitch and the Lamas. These ideas are foreign to the Kashmiri mode of thought, usually limited to what our author would term 'things palpable.'

      We will take one or two examples:

      Part of the spirituality of our Lord (p. 33);
      Essential principles of monotheism (p. 51);
      An intermediary between earth and heaven (p. 51);

      used in the 'conversation' with the Abbot of Wokka on the journey to Leh. The conversations at Himis abound in even more magnificent expressions:

      Idols which they regarded as neutral to their surroundings (p. 114);
      The attenuation of the divine principle (p. 115);
      The dominion of things palpable (p. 115);
      A canonical part of Buddhism (p. 1:34);

      and many others which readers will have no difficulty in finding.

      Few things have amused me more, in connexion with this inquiry, than the half-annoyed, half-amused expression of the venerable Lama's face when Mr. Joldan, after a careful explanation from me, did his best to translate into Tibetan, as elegantly as it deserves, the expression 'the attenuation of the divine principle.'

      Apart, then, altogether from the statement made by the old Abbot, there are ample reasons for doubting the veracity of M. Notovitch's narrative.

      In my last conversation with the Lama we talked of the story of the broken leg. He assured me that no European gentleman had ever been nursed in the monastery while suffering from a broken limb, and then went on to say that no European traveller had ever during his term of office remained at Himis for more than three days. The Abbot called in several old monks to confirm this statement, and mentioned that the hospitality offered by the monastery to travellers is for one night, and is only extended for special reasons by his personal invitation, and that he and his monks would not have forgotten so unusual a circumstance. That M. Notovitch may have injured his leg after leaving Leh on the road to Srinagar is possible, but the whole story of the broken leg, in so far as it relates to Himis Monastery, is neither more nor less than a fiction.

      그 주지스님과의 마지막 대화 가운데, 우리는 (노토비치의 / 역자 주) 부러진 다리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그 분은 그 어떤 팔다리가 부러진 유럽 남성도 사원에서 치료를 받은 적이 없다고 확인해 주었으며, 또 어떤 유럽인 여행자도 공무 중 3일 이상 히미스 사원에 머무르 적이 없다고 이야기 했다. 주지스님은 연로한 여러 승려들을 불러 이 사실을 확인해 주었으며, 히미스 사원이 여행자들에 베푸는 환대는 하룻밤이며, 주지스님의 개인적 초대 같은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만 특별히 연장된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주지스님이나 다른 승려들이 그런 특별한 사례를 잊을 리가 없다. 노토비치가 레를 떠나 스리나가르로 가는 길에 다리에 부상을 입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부러진 다리'와 히미스 사원에 관련된 전체 이야기는 그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번역: 최광민




      The Lamaïstes of Ladakh are divided into two great parties: the red monks, or orthodox conservative body; and the yellow monks, a reforming nonconformist sect. On p. 119 of the Unknown Life of Christ, the Lama of Himis, the Chief Superior under the Dalai Lama of the red or orthodox monks of Ladakh, describes himself and his fellow-monks as 'we yellow monks,' in one of those wonderful conversations before alluded to. It would be just as natural for his Grace the Archbishop of Canterbury, discussing the state of the English Church with an unsophisticated foreigner, to describe himself and the whole bench of bishops as 'we ministers of the Wesleyan Methodist body.' The Russian traveller might have remembered the dark-red robes and the red wallets of the monks who fill the monastery of Himis, unless it be that the Russian author is colour-blind, as well as blind to a sense of truth. The religious differences of these two religious bodies are described with an inaccuracy so marvellous that it might almost seem to be intentional.

      라다크의 라마불교도는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뉜다. 하나는 정통적 보수파인 홍모파(紅帽派)고, 다른 하나는 개혁적이고 자유로운 황모파(皇帽派)다. 노토비치는 자신의 {이사전} 119쪽에서 히미스 사원의 승려이자 라다크의 "홍모파/정통파" 달라이 라마 휘하의 대승정인 히미스 사원의 라마 (주지)가 노토비치와 나눈 놀라운 대화 속에서 자신 스스로를 "우리 황모파는..."이라고 말한 것으로 진술한다. 이것은 마치 영국국교회의 캔터베리 대주교가 어떤 어리숙한 외국인과 영국교회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자신과 영국국교회 주교들에 대해 "우리 웨슬리파 감리교회의 목사들은...."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 러시아인 여행자 (=노토비치)가 색맹 혹은 사기꾼이 아니라면, 히미스 사원을 가득 매운 빨간색 승복들과 승려들의 빨간색 주머니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두 그룹의 종파에 대한 기록은 놀랄만큼 부정확하게 기술되어 있으며, 실수라기 보다는 그가 원래 의도했던 거의 보여진다. 번역: 최광민

      Regarded, then, in the light of a work of the imagination, M. Notovitch's book fails to please, because it does not present that most fascinating feature of fiction, a close semblance of probability.

      And yet, if I am rightly informed, the French version has gone through eleven editions; so M. Notovitch's effort of imagination has found, doubtless, a substantial reward. In face of the evidence adduced, we must reject the theory generously put forward by Professor Max Müller, that M. Notovitch was the victim of a cunning 'hoax ' on the part of the Buddhist monks of Himis.

      I do not believe that the venerable monk who presides over Himis Monastery would have consented to the practice of such a deception, and I do not think that any of the monks are capable of carrying out such a deception successfully. The departures from truth, on other points, which can be proved against M. Notovitch render such a solution highly improbable.

      나는 히미스 사원을 관장하는 고승께서 그런 사기극에 동조했으리라고 믿지 않는다. 나는 어떤 승려들도 그런 성공적인 사기를 쳤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노토비치의 주장을 반박할 만한 사실왜곡의 다른 사례들을 볼때 이런 설명은 현실적으로 매우 불가능하다. 번역: 최광민



      The preface which is attached to the English edition under the form of a letter 'To the Publishers' is a bold defence of the truth of M. Notovitch's story, but it does not contain a single additional argument in favour of the authenticity of the Life of Issa.

      A work of brilliant imagination is entitled to respect when it confesses itself as such, but when it is boldly and solemnly asserted again and again to be truth and fact, it is rightly designated by a harsher term. The Life of Issa is not a simple biography. Such a publication, though a literary forgery, might be considered comparatively harmless. This Life of Issa contains two very striking departures from Christian revelation, as accepted by the vast majority of those |675 who confess the faith of Christ. 

      It practically denies the working of miracles, and it also gives a definite denial to the resurrection of Jesus. To the first of these denials is given no less authority than the word's of our Lord, while the second more important article of faith is explained away very much to the discredit of the Apostles of the Early Church. M. Notovitch must remain, therefore, under the burden of what will be in the eyes of many people a more serious charge than literary forgery, and persistent untruthfulness. He has attempted wilfully to pervert Christian truth, and has endeavoured to invest that perversion with a shield of Divine authority.

      I am not a religious teacher, and, great as is my respect for Christian missionaries, I cannot profess any enthusiastic sympathy with their methods and immediate aims. M. Notovitch cannot therefore charge me with 'missionary prejudice' or 'obstinate sectarianism.'

      나는 종교를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고, 기독교 선교사들을 매우 존중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선교방식이나 성급한 목표에 대해 크게 동조하지 않는다. 따라서 노토비치는 나에게 "선교적인 편견"이라든지 '고집스런 종파주의' 따위의 혐의를 뒤집어 씌울 수는 없을 것이다. 번역: 최광민

      But, in the name of common honesty, what must be said of M. Notovitch's statement, that his version of the Life of Issa 'has many more chances of being conformable to the truth than the accounts of the evangelists, the composition of which, effected at different epochs, and at a time ulterior to the events, may have contributed in a large measure to distort the facts and to alter their sense.'

      Another daring departure from the New Testament account is that the blame of Christ's crucifixion is cast on the Roman governor Pilate, who is represented as descending to the suborning of false witnesses to excuse the unjust condemnation of Jesus.

      The Jewish chief priests and people are represented as deeply attached to the great Preacher, whom they regarded as a possible deliverer from Roman tyranny, and as endeavouring to save Him from the tyrannical injustice of Pilate. This remarkable perversion of the received account has led several people to ask if the author of the Unknown Life of Christ is of Jewish extraction. Such inquiries as I have been able to make are not, however, in favour of such a supposition.

      In many respects it may be said that this 'Gospel according to M. Notovitch' bears a resemblance to the Vie de Jésus by Renan, to whom the Russian author states that he showed his manuscripts.

      We believe, nevertheless, that the great French author possessed too much perspicacity to be deceived by the 'discovery,' and too much honesty to accept support of his views from such a dubious quarter.

      The general question as to the probability of the existence of any Life of Issa among the Buddhist manuscripts in the monasteries of Tibet has been already so ably dealt with by so great an authority on these matters as Professor Max Müller, that I feel it would be presumptuous on my part to attempt to deal with a subject in which |676 I am but slightly versed. I will therefore content myself by saying that the statements of the Lama of Himis, and conversations with other Lamas, entirely bear out Professor Max Müller's contention that no such Life of Issa exists in Thibet.

      In conclusion, I would refer to two items of the Russian author's defence of his work. The first is that in which he boldly invites his detractors to visit Himis, and there ascertain the truth or falsehood of his story; the second that passage in which he requests his critics 'to restrict themselves to this simple question: Did those passages exist in the monastery of Himis, and have I faithfully reproduced their substance?'

      Otherwise he informs the world in general no one has any 'honest' right to criticise his discovery. I have visited Himis, and have endeavoured by patient and impartial inquiry to find out the truth respecting M. Notovitch's remarkable story, with the result that, while I have not found one single fact to support his statements, all the weight of evidence goes to disprove them beyond all shadow of doubt. It is certain that no such passages as M. Notovitch pretends to have translated exist in the monastery of Himis, and therefore it is impossible that he could have 'faithfully reproduced' the same.

      The general accuracy of my statements respecting my interviews with the Lama of Himis can further be borne out by reference to Captain Chevenix Trench, British Commissioner of Ladakh,2 who is due to visit Himis about the end of the present month, and who has expressed to me his intention of discussing the subject with the Chief Lama.

      Before concluding, I desire to acknowledge my sense of obligation to the Wazir of Leh, to the Chief Lama and monks of Himis Monastery, to my excellent interpreter, and to other kind friends in Ladakh, not only for the able assistance which they afforded to me in my investigations, but also for the unfailing courtesy and kind hospitality which rendered so enjoyable my visit to Ladakh.

      J. Archibald Douglas.

      June 1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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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SCRIPT
      BY PROFESSOR MAX MÜLLER

      막스 뮐러의 후기

      Although I was convinced that the story told by M. Notovitch in this Vie inconnue de Jésus-Christ 3 was pure fiction, I thought it |677 fair, when writing my article in the October number of this Review, 1894, to give him the benefit of a doubt, and to suggest that he might possib]y have been hoaxed by Buddhist priests from whom he professed to have gathered his information about Issa, i.e. Jesus. (Isa is the name for Jesus used by Mohammedans.) Such things have happened before. Inquisitive travellers have been supplied with the exact information which they wanted by Mahàtmas and other religious authorities, whether in Tibet or India, or even among Zulus and Red Indians. It seemed a long cry to Leh in Ladakh, and in throwing out in an English review this hint that M. Notovitch might have been hoaxed, I did not think that the Buddhist priests in the Monastery of Himis, in Little Tibet, might be offended by my remarks. After having read, however, the foregoing article by Professor Douglas, I feel bound most humbly to apologise to the excellent Lamas of that monastery for having thought them capable of such frivolity. After the conrplete refutation, or, I should rather say, annihilation, of M. Notovitch by Professor A. Douglas, there does not seem to be any further necessity----nay, any excuse----for trying to spare the feelings of that venturesome Russian traveller. He was not hoaxed, but he tried to hoax us. Mr. Douglas has sent me the original papers, containing the depositions of the Chief Priest of the Monastery of Him is and of his interpreter, and I gladly testify that they entirely agree with the extracts given in the article, and are-signed and sealed by the Chief Lama and by Mr. Joldan, formerly Postmaster of Ladakh, who acted as interpreter between the priests and Professor A. Douglas. The papers are dated Himis Monastery, Little Tibet, June 3, 1894.

      노토비치가 그의 {알려지지 않은 예수의 생애}에서 진술한 이야기를 완전한 허구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이 총설논문집의 1894년 10월 판에 내 논문을 실을 때만해도, 이사, 즉 예수 (그런데 '이사'는 무슬림들이 예수를 부를 때 쓰는 표현이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때 불교승려들에게 속았을 가능성에 대해 의심해 보는 것도 어떻겠는냐는 제안을 노토비치에게 해주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일이 예전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자료를 조사하고자 여행하던 이들이 정확히 원하던 정보를 인도, 티벳, 심지어 아프리카 줄루족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마하트마 (=도인)나 여타 상급종교인들이나  주어온 일들이 있어 왔기 때문이다. 노토비치가 불교승려들에게 속았을지도 모른다고 적은 그 영어리뷰가 나왔을 때, 그것이 소-티벳 히미스 사원의 불교승려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더글라스 교수의 이어지는 논문을 읽고나서, 내가 경솔하게 그들을 의심했다는 점에 대해 주지스님께 공손히 사과해야겠다고 느끼게 되었다. 완벽한 반박, 혹은 노토비치의 보고를 그야말로 '박살'냈다고 내가 부르는 더글라스 교수의 이 논문은, 이 겁없는 러시아 여행자에 대해 어떤 변명의 여지도 더이상 남겨둘 필요가 없음을 보여준다. 노토비치는 속은게 아니라 속였을 뿐이다. 더글라스는 히미스 사원 주지와 통역자의 공증을 포함한 논문의 원본을 보내주었으며,  나는 그들이 논문에 제시된 발췌문들에 완전히 동의하였고, 주지스님과 더글라스 교수와 주지스님과의 통역을 맡은 라다크의 전직 우체국장인 졸단씨가 서명하고 날인했음을 기쁘게 입증한다. 이 논문은 소-티벳 히미스 사원에서 1894년 6월 3일에 작성된 것으로 되어있다 번역: 최광민

      I ought perhaps to add that I cannot claim any particular merit in having proved the Vie inconnue de Jésus-Christ----that is, the Life of Christ taken from MSS. in the monasteries of Tibet----to be a mere fiction. I doubt whether any Sanskrit or Pâli scholar, in fact any serious student of Buddhism, was taken in by M. Notovitch. One might as well look for the waters of Jordan in the Brahmaputra as. for a Life of Christ in Tibet.

      F. Max Müller.

      November 15, 1895.

      티벳의 사원에 있는 사본으로부터 가져왔다는 {예수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란 문건이 허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데서 내가 얻는 이득같은 것은 없다고 덧붙여 두는 것이 아마도 좋을 듯 싶다. 나는 불교를 진지하게 연구하는 산스크리트 혹은 팔리어 학자들이 노토비치의 문건을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혹자는 그 책에서 티벳 브라마푸트라에 있다고 설명한 요르단강을 찾아나설지는 모르겠지만. 번역: 최광민

      1. 1 Nicolas Notovitch, La Vie inconnue de Jésus-Christ. (Paris, 1894)
      2. 1 This paper was written at Himis in June 1895.----J. A D.
      3. 2 Paris: P. Ollendorff, 2e éd. 1894.

      ----- 번역: 최광민


      草人


      © 최광민 (Kwangmin Choi). 2011.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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