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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파괴"는 반-지성적 광기의 산물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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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Kwangmin Choi). 2019-11-13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모든 글과 번역문 들에 대해 (1) 복제-배포, (2)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 (3) 화면캡처를 금하며, (4) 인용 시 글의 URL 주소 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 최광민]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파괴"는 반-지성적 광기의 산물이었을까?

목차
  1. 무세이온 vs. 세라페이온
    1. 칼 세이건의 오류와 {코스모스}를 통한 오류의 확산
    2. 무세이온과 세라페이온의 역사
    3. AD 391/2년 철거 지전 세라페이온의 성격
      1. 얌블리코스 학파와의 관계
      2. 테온/히파티아와의 관계
      3. 테오필로스의 관계
    4. 세라페이온의 철거 배경과 과정
      1. 스콜라티코스의 기록
      2. 소조메노스의 기록
      3. 유나피오스 (이교도)의 기록
    5. 세라페이온의 구조와 도서관/서고의 위치
      1. 고고학적 재구성
      2. 아프토니오스의 기록
      3. 소장장서의 향방
    6. 세라페이온의 철거는 "반지성"의 "지성"에 대한 테러일까? 
  2. 히파티아 vs. 키릴로스
    1. 테오필로스와의 우호적 관계
    2. 키릴로스와의 적대적 관계
    3. 실제 사태
      1. 스콜라티코스의 기록
    4. 히파티아의 살해는 "반지성"의 "지성"에 대한 테러일까?


    Thomas Cole, {The Course of Empire}

        

    포럼 질문에 대한 답변:

    링크: http://forum-scientiarum.16390.x6.nabble.com/-td4982084.html#a4982098

    [질문] xo8gh8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파괴된 시기는 정확히 언제인가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집트를 정복할 당시 전투 중에 실수로 도서관이 불이 번져서 파괴되었다는 설, 후에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고 기독교도들이 폭동을 일으켜 도서관을 파괴했다는 설, 나중에 이슬람 정복자들이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 후 이교의 잔재라면서 도서관을 파괴했다는 설 등 여러 설이 난무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은 이슬람교도들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파괴했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악의적으로 왜곡된 것이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기독교도들에 의해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주장했다고 하던데 정황상 기독교도들의 소행의 가능성이 가장 높을까요? 알렉산드리아 감독 키릴로스는 히파티아의 살해사건에 관여했나요? 또 히파티아를 종교적 광신에 맞선 이성과 과학의 순교자로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정치적 알력다툼에 의해 죽은것에 불과하며 실제로 히파티아가 오레스테스로 하여금 기독교인과 유대인들의 대립을 부추기는 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무고하게 죽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어떤 것이 진실인가요?



    [답변] 최광민

    # 무세이온 vs 세라페이온

    마치 "상식"처럼 굳어져 오랫동안 대중들 사이에 유통되어 온 위의 주장을 구성하는 중심축은 아래와 같다.

    •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고대의 지식을 총집결한 지성과 이성의 전당이었다.
    • 반-지성주의적인 기독교는 눈의 가시이던 그 "지성의 전당"을 "약탈"하고 "파괴"했다. 
    • 반-여성주의적이기도 한 기독교는 당시의 뛰어난 알렉산드리아의 여성 지식인인 히파티아를 살해했다.
    • 따라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파괴와 히파티아의 살해는 반-지성적이고 반-여성적 기독교의 종교적 광신이 불러 일으킨, "이성과 지성에 대한 핍박"이었다  !!

    해당 역사의 1차 역사자료를 접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처음 접하게 될때면, 종교적 광기에 사로잡혀 이교도와 과학/지성에 대한 증오로 이글거리는 무지한 기독교도 폭도들이 횃불과 무기를 들고 지성의 전당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처들어가, 방어처도 되지 못할 도서관에 숨어든 이교도들 사이에서 도서관 관장이던 "여성"지식인 히파티아를 색출하여 무참하게 공개살해 하는 그런 식의 장면이 머릿 속에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정말?

    내 경우엔 중2 때 읽었던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 해당 내용을 처음 보았는데, 그때 그 단락을 읽으면서 당시 이런 만행을 저지른 당시의 이집트 기독교도들의 야만성에 매우 분개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몇 해가 지나 해당 원 사료를 찾아 비교해 보고나서 이런 "상식적" 설명이 상당한 과장이자 오류란 점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과학의 대중화에 앞섰던 칼 세이건이 그런 잘못된 정보를 대중들에게 널리 퍼트린 장본인이다. 다큐멘터리 필름으로도 유명한 이 책의 세계적 인기 탓에 삽입된 오류도 더 강력하게 퍼진 것이다.

    가령,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 이렇게 적었다.

    But the greatest marvel of Alexandria was the library and its associated museum (literally, an institution devoted to the specialties of the Nine Muses). Of that legendary library, the most that survives today is a dank and forgotten cellar of the Serapeum, the library annex, once a temple and later reconsecrated to knowledge. A few moldering shelves may be its only physical remains. Yet this place was once the brain and glory of the greatest city on the planet, the first true research institute in the history of the world. The scholars of the library studied the entire Cosmos. Cosmos is a Greek word for the order of the universe. It is, in a way, the opposite of Chaos. It implies the deep interconnectedness of all things. It conveys awe for the intricate and subtle way in which the universe is put together. Here was a community of scholars, exploring physics, literature, medicine, astronomy, geography, philosophy, mathematics, biology, and engineering. Science and scholarship had come of age. Genius flourished there. The Alexandrian Library is where we humans first collected, seriously and systematically, the knowledge of the world.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장 놀라왔던 것은 (말 그대로, 9명의 무사 여신들의 특화된 기술에 기려 바쳐진 기관) "무세이온"과 연계된 도서관이었다. 그 전설적인 도서관 가운데 오늘날 남아있는 것이라곤 도서관 별관으로서 한때는 신전이었다가 후에는 지식의 전당으로 헌정된 축축하고 잊혀진 세라페이온의 지하실 뿐이다. 몇몇 썩은 선반들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이 장소는 한때 지구 상의 가장 위대했던 도시의 두뇌이자 영광이었으며, 세계 역사의 첫번째 진정한 연구기관이었다...... --- 칼 세이건, {코스모스} / 번역: 최광민



    아마도 칼 세이건의 이런 이해는 18세기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기본에게서 온 듯 하다. 기본은 이렇게 적었다.

    Theophilus proceeded to demolish the temple of Serapis, without any other difficulties than those which he found in the weight and solidity of the materials: but these obstacles proved so insuperable that he was obliged to leave the foundations and to content himself with reducing the edifice itself to a heap of rubbish; a part of which was soon afterwards cleared away, to make room for a church, erected in honour of the Christian martyrs. The valuable library of Alexandria was pillaged or destroyed; and, near twenty years afterwards, the appearance of the empty shelves excited the regret and indignation of every spectator, whose mind was not totally darkened by religious prejudice.  --- Edward Gibbon,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건축자재가 무겁고 견고하긴 했지만, 테오필로스는 세라피스 신전의 철거를 어렵지 않게 진행시켰다....[중략].......알렉산드리아의 이 값진 도서관은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20년 정도가 지난 후 텅빈 서고를 바라보며, 종교적 편견으로 완전히 어두워지지는 않는 생각을 가진 이들은 탄식하고 분노했다.  --- 에드워드 기본, {로마제국쇠망사} / 번역: 최광민

    그래?

    "고대 지식의 온갖 정수를 갖추어 놓았던 학문의 전당"이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세라피스 신전 (세라페이온)"에 있다가 기독교도들에게 "약탈"당해 "파괴"되었을까?

    그게 또 그렇지 않다. 



    이 사건들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핵심은, 여기서 말하는 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도대체 어딜 말하는가? 에 있다. 사실 여기에 모든 혼란의 단초가 있다. 지금 에드워드 기본과 칼 세이건은 두개의 다른 기관/건물그리고 시대를 혼동해서 두개의 다른 도서관을 하나의 도서관으로 착각하고 있다. 

    에드워드 기번은 꽤 반-기독교적인 편향적 시각을 가진 역사가란 점을 염두에 두고, 최대한 중립적 사료를 바탕으로 해당 사실을 재구성해 보자. 

    기록된 사서와 고고학 자료를 통해 보면,  고대로부터 유명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그리스계 이집트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필라델포스) BC 3세기 중반에 건립한 도서관이다. 이 도서관은 무사 여신들 (무사이)에게 헌정된 연구기관인 "무세이온"의 일부였다.

    이 도서관은 이미 BC 1세기 중반 카이사르 시절에 일부가 불탄 후 이후 AD 3세기 말까지 줄곧 쇠락기였고, 특별히 아우렐리아누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 두 황제의 알렉산드리아 공략시 거의 전부 불타버렸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우렐리아누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는 기독교가 아직 로마에서 공인도 받기 전이고, 이들이 벌인 알렉산드리아에서의 군사작전도 기독교와는 전혀 상관없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러니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가 건립했던 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흥망성쇠는 기독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에는 다른 도서관도 있었다. 

    BC 3세기 중반에 건립된 무세이온 부설 주 도서관에 이어, 프톨레마이오스 3세 (유에르게테스)가 BC 3세기 말에 그리스-이집트 종교가 습합된 합성신 세라피스를 모신 신전 세라페이온 신전 경내에 도서관 별관을 하나 더 세웠다. 사실 에드워드 기본이나 칼 세이건이 말하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독교도들이 파괴한' 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란 바로 이 세라페이온 부속 도서관이다. 물론 알렉산드리아에 있었으니 이 세라페이온 부속 고서관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라고 불릴 수는 있겠지만,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가 건립한 '고대 지성의 전당'은 이 도서관이 아니었다는 점을 다시 기억해 두자. 

    칼 세이건이 그의 책 {코스모스}의 해당 단락에서 칭송하고 있는 에라스토테네스나 헤론 등을 비롯한 고대 헬레니즘 세계의 과학자, 의학자, 지리학자, 수학자, 생물학자, 공학자, 철학자들이 활동한 도서관은 '세라페이온'이 아니라 '무세이온'에 있던 도서관이었다. 

    알렉산드리아 서부 지구, Wikimedia Commons

    무세이온과 세라페이온은 위치도 다르다. 알렉산드리아의 북서부 지구의 지도를 보면 본토에서 파로스 섬을 연결하는 방파제의 본토 쪽에 인접하면서 항구를 바라보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절 궁정 구역에 무세이온과 도서관이 위치해 있었다. 카이사르의 알렉산드리아 공략 시 도서관이 피해를 입었다고 보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당시 공격이 항구에서 있었고 항구를 바라보는 왕궁 구역이 화재피해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세라페이온은 남서부 지구 성곽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문제는 AD 392년 알렉산드리아 주교 테오필로스의 지시로 철거된 세라페이온이 정말 이전에 소실된 "주 도서관"에 필적할 만한 "도서관"으로서 당시 기능한 것인지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세라페이온 철거 직전 세라페이온 부설 도서관의 지위에 대한 AD 4세기 시리아 안티오키아의 이교도 철학자 아프토니오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시절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세라페이온 신전 내 부속건물에 있던 장서열람실에서 소장장서를 열람할 수 있었다.

    아프토니오스의 해당 기록을 인용한다.

    On going into the acropolis itself, one enters a single open space, bounded by four equal sides, and its figure is rather like that of a war machine (i.e., a hollow rectangle). In the middle is a courtyard, surrounded by a colonnade. Stoas continue the courtyard and the stoas are divided by equal columns, and as for their measure, it is the largest possible. Each stoa ends in another crosswise colonnade and a double column divides it from another stoa, one ending and the other beginning again. Small covered structures are built inside the stoas; some are reading rooms for books, offering an opportunity for the studious to pursue knowledge and arousing the whole city to the possibility of wisdom; others were built as shrines to the ancient gods. Gold adorns the roof of the stoas and the capitals of the columns are made of bronze, overlaid with gold. The decoration of the courtyard is not all the same; different parts were done differently. One part has a representation of the contests of Perseus. A column higher than the others stands in the middle, making the place conspicuous.92 A visitor, up to this point, does not  --- Aphthonios of antioch, {Progymnasmata}

    (세라페이온 신전 부지 내 / 최광민) 아크로폴리스로 들어서면, 뚫린 정방형 공간 하나와 만난다. 그래서 그 모양새는 마치 (안이 빈) 공성기 같은 느낌이다. 
    중앙에는 열주회랑으로 둘러싸인 내부광장이 있다. 이어지는 광장의 회랑은 같은 석주들로 가급적 널직히 정확히 구간이 나뉘어 진다. 각각의 회랑은 가로지르는 회랑과 만나게 되며, 다른 회랑과 연결되는 곳에는 두개의 석주가 각각 처음과 끝을 나눈다. 회랑 안에는 작은 구조물들이 지어졌는데, 어떤 것은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도시민들에게 지혜를 장려하기 위해 마련된 장서열람실들이고, 또 어떤 방들은 고대 신들을 모신 방들이다. 회랑의 지붕은 금으로 장식되었고, 기둥들의 머리는 청동으로 만들어져 금과 어우러져 있다.  --- 아프토니오스, {수사학 지침서} / 번역: 최광민

    하지만 이것을 바탕으로 AD 4세기 당시 세라페이온 부속도서관이 수세기 전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대표지성들이 활동했던 연구기관으로서의 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같은 지위를 누렸다고 말하긴 곤란하다. 당시 세라페이온 부속도서관의 장서규모와 장서목록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세라페이온 (부속 도서관)의 성격을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별관이 있던 세라페이온은 AD 4세기 말까지도 여전히 세라피스와 각종 신을 모시고 숭배하던 인기있는 신전이었던 동시에, 마술적 신비주의 신플라톤주의자들인 얌블리코스 학파의 회합장소이자 강의장소이기도 했다.  얌플리코스 계열의 신-플라톤주의에서는 철학에 아울러 여러 비의종교의 의식과 비의를 연구/집례하는 등 철학이라기 보다는 종교에 더 기울어 있었다. 테오필로스의 공격목표는 "도서관"으로서의 세라페이온이라기 보다는, "세라피스신의 신전"인 동시에 신비주의적이고 마술적인 신-플라톤주의인 "얌블리코스 학파의 본부"로서의 세라페이온이란 점을 역시 기억해 두자. 

    AD 3세기 말 아우렐리우스 혹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주 도서관 (무세이온)이 소실 전후로 일부 장서는 무세이온에서 세라페이온 부속도서관으로 아마 이관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이것은 추정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주 도서관 소실 이후 알렉산드리아에 이 "무세이온" 재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AD 10세기의 비잔틴 기록이 남아있다. 이집트의 기독교화가 진행되던 AD 4세기 중반 이후 바로 이 무세이온은 뒤에 설명할 수학자 테온과 히파티아 부녀가 이끌었다. 재건된 '무세이온'이 건물/도서관을 뜻하는 것인지, 단지 그 이름을 차용한 학파를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둘 다일 수도 있다.

    흥미롭게도 세라페이온 철거 당시 알렉산드리아 주교인 테오필로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대표적 이교도 지성인인 히파티아와 그 아버지 테온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었으며, 사실 얌블리코스 학파에 비해 보다 철학적으로는 정통적인 플로티노스 철학을 계승한 테온과 히파티아는 당시 '무세이온'을 이끌면서 급진적이고 마술적인 신비주의인 얌블리코스 계열 신-플라톤주의와 대립하고 있었다. (테온과 히파티아가 수학자였다는 점을 기억하자. 그들이 이끈 학파/학교 역시 같은 이런 성향을 따랐을 것이다). 즉, 무세이온의 테온/히파티아와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주교 테오필로스는  얌블리코스 학파란 어찌보면 공동의 적을 가진 일종의 동맹관계였다는 뜻이다. 

    참고로, 신-플라톤주의를 공식으로 창설한 알렉산드리아의 플로티노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 "침묵의 철학자" 암모니우스 사카스는, AD 3세기의 대표적 반-기독교주의자이자 신-플라톤주의자 포르피리우스와 기독교 교부 유세비우스/히에로니무스의 진술에 따르면, 생애 초반부에는 기독교도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신-플라톤주의에서 기독교적 색채가 발견되는 것이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니란 설명도 있다. 아마도 테오필로스가 얌블리코스 학파에 비해 테온/히파티아에게 상대적으로 우호적이었던 이유는 이런 배경이 있을 수 있다.

    자, 그럼 이제부터 '반-지성적 기독교도들의 "폭동과 약탈"로 "파괴"된 "지성의 전당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이란 구도가 왠지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정리해 보자.

    • 테오필로스는 세라피스신의 숭배지이자 신비주의 신-플라톤주의인 얌블리코스 학파의 근거지인 세라페이온을 허물었다.
      • 그는 또 동시에 (도서관과는 상관없는) 알렉산드리아의 다른 이교신전들도 철거했다.
    • 알렉산드리아 최고지성들인 "이교도" 테온과 그의 딸 히파티아는 세라페이온과 대립관계인 '무세이온'의 총책임자였다.

    세라페이온이 만약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핵심 도서관' 이었다면 테온/히파티아로 대변되는 측이 그 세라페이온 도서관의 "파괴"나 소장장서의 "약탈" 및 "분서갱유"에  동의했을까? 아니면 이 사안은 테온/히파티아가 적대학파를 종식시키기 위해 공동의 적을 가진 기독교 측과 공모한 사건으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세라페이온은 당시 '핵심도서관'의 기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테온/히파티아 측이 사실상 묵인한 것은 아닐까? 혹은 세라페이온 철거 후 장서는 테온/히파티아의 무세이온이 흡수하지 않았을까? 이 경우, 세라페이온 철거는 이성과 광신이 대립해 벌어진 산물이라기 보다는, 얌블리코스 학파의 종언하고만 관계 있게 된다.



    게다가 세라페이온 신전의 철거는 기독교도들의 "폭동"에 의해 "파괴"된 것이 아니라, 황제의 철거명령에 의해 착수된 행정절차의 일부였다.  테오필로스가 이교의 성물을 모욕 준 것이 발단이 되긴 했지만, 유혈폭동을 일으킨 것은 기독교도들이 아니라 이교도들 - 특별히 이교신전에 소속된 신관들과 철학교사들이었다.

    AD 440년 경 소크라테스 스콜라티코스가 쓴 {교회사} 제 5권 16장에는 세라페이온 철거와 관련된 내막이 잘 설명되어 있다:

    당시 로마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1세는 AD 381년 공회의에서 발표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정통"신조로 삼은 직후 제국 전역에서 정통파 기독교 이외의 기독교 종파를 억누르고, 국가의 공공의례이기도 했던 다신교/이교 의식에 대한 국가와 지방정부의 지원을 중지시켰으며, AD 391년에 들어서는 로마에서 이교의식과 희생제를 금지하고 범죄화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알렉산드리아 주교 테오필로스는 기독교의 단일국교화를 진행 중이던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청원하여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이교신전들을 철거시켜 달라고 요청하는데, AD 391/2년 황제는 이 요청을 들어주면서 전 과정이 테오필로스의 감독 하에 진행되어야 한다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따라 알렉산드리아에도 AD 391/2년 모든 형태의 이교의식과 관습을 금지되었다.

    테오필로스는 이를 은밀한 비의종교들을 상대로 공개적인 망신을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기로 했는데, 우선 미트라 예배소에서 나온 미트라교 유물들을 늘어놓고 대중들에게 구경시켰다. 그리고 나서 세라페이온을 허물어 세라피스 비의종교의 여러 상징물이나 거대한 성기로 유명한 생식의 신 프라아포스의 신상 들을 광장 한복판에 늘어놓아 구경거리가 되게 만들었다.


    Priapus, Wikimedia Commons

    At the solicitation of Theophilus bishop of Alexandria the emperor issued an order at this time for the demolition of the heathen temples in that city; commanding also that it should be put in execution under the direction of Theophilus. Seizing this opportunity, Theophilus exerted himself to the utmost to expose the pagan mysteries to contempt. And to begin with, he caused the Mithreum to be cleaned out, and exhibited to public view the tokens of its bloody mysteries. Then he destroyed the Serapeum, and the bloody rites of the Mithreum he publicly caricatured; the Serapeum also he showed full of extravagant superstitions, and he had the phalli of Priapus carried through the midst of the forum.   -- Socrates Scholaticus, {Church History} Book V, Chapter 15

    그때 알렉산드리아 주교 테오필로스의 청원을 받고, 황제는 그 도시에 있는 이교신전들의 철거하되 테오필로스가 집행을 감독할 것을 지시했다. 테오필로스는 이를 이교 비의종교들을 까발려 망신을 줄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그는 우선 미트라교 예배소를 훑어 그 유혈낭자한 종교의 상징물들을 대중들에게 공개했다. 이후 그는 세라페이온을 허물고 미트라 예배소의 피투성이 예전을 공개적으로 희화화 시켰다. 그는 또 세라페이온의 방대한 미신/우상들을 공개했는데, 프리아포스의 남근을 광장 한 가운데로 가져다 전시했다. ---- 소크라테스 스콜라티코스, {교회사} 제 5권 15장 / 번역: 최광민  

    이에 분노한 이교도들, 특별히 세라페이온 등에 소속된 이교도 신관들과 철학교사들이 격분해 기독교도들을 무장공격해 여럿을 죽였고 이에 기독교도들도 반격을 개시했다. 스콜라티코스는 이 유혈사태로 기독교도 측의 사망자가 훨씬 많긴 했지만, 양 측 모두 상당한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기록했다. 이때 폭동에 가담한 많은 이교도들이 알렉산드리아를 떠났는데, 이는 황제의 포고령을 폭력을 동원해 정면으로 대항했기 때문이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이미 이런 식의 폭동을 사형으로 다스린 전례가 있었다. 이런 망명인사 가운데는 이 일화를 기록해 전한 소크라테스 스콜라티코스가 콘스탄티노플에서 문법을 배웠던 제우스 (=제우스와 동일시 된 세라피스) 신관 헬라디오스와 시미우스 신관 암모니오스가 있었다. 이들은 당시 알렉산드리아를 탈출해 콘스탄티노플로 이주했었는데, 헬라디오스의 경우 본인이 9명의 기독교도들을 직접 죽였다고 자랑삼아 말했던 사실을 스콜라티코스는 기록에 남겼다.

    The pagans of Alexandria, and especially the professors of philosophy, were unable to repress their rage at this exposure, and exceeded in revengeful ferocity their outrages on a former occasion: for with one accord, at a preconcerted signal, they rushed impetuously upon the Christians, and murdered every one they could lay hands on. The Christians also made an attempt to resist the assailants, and so the mischief was the more augmented. This desperate affray was prolonged until satiety of bloodshed put an end to it. Then it was discovered that very few of the heathens had been killed, but a great number of Christians; while the number of wounded on each side was almost innumerable. Fear then possessed the pagans on account of what was done, as they considered the emperor's displeasure. For having done what seemed good in their own eyes, and by their bloodshed having quenched their courage, some fled in one direction, some in another, and many quitting Alexandria, dispersed themselves in various cities. Among these were the two grammarians Helladius and Ammonius, whose pupil I was in my youth at Constantinople. Helladius was said to be the priest of Jupiter, and Ammonius of Simius.    -- Socrates Scholaticus, {Church History} Book V, Chapter 15

    이걸 지켜보던 알렉산드리아의 이교도들, 특히 철학교사들은 격분하여 복수심 불타 담아 분노를 표출했다. 그들은 일사분란하게 미리 맞춘 신호에 따라 기독교도에게 돌격하여 손에 닿는 모두를 살해했다. 기독교도들 역시 반격을 시도하였고, 소동은 한층 더 악화되었다. 이 끔찍한 싸움은 진압될 때까지 이어졌다. 이교도들이 몇몇 죽은데 반해, 기독교도 측의 사망자는 훨씬 많았다. 하지만 양 측의 부상자는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후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보고 공포에 사로잡힌 이교도들은, 자신들이 벌인 유혈사태를 보곤 겁을 먹고 이리저리로 도망을 쳤고, 많은 사람들이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다른 도시로 흩어졌다. 그 가운데는 내가 어린 시절 콘스탄티노플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두 명의 문법교사 헬라디오스와 암모니오스가 있었다. 헬라디오스는 제우스 (=제우스와 동일시 된 세라피스)의 신관, 암모니오스는 시미오스의 신관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 소크라테스 스콜라티코스, {교회사} 제 5권 15장 / 번역: 최광민  

    기독교도들이 제거대상으로 삼은 주 목표물을 우상을 비롯한 종교상징물들이었다. 많은 이교신전이 철거되는 과정에서 모든 신상과 종교적 도상들이 파괴되었는데, 테오필로스는 본보기로 앞서 말한 프리아포스의 신상만 남겨 공개장소에 전시시켰다. 스콜라티코스는 이 과정에서 종교적인 대상 이외에 다른 소장장서들이 파괴되었다는 언급을 하지 않는데, 기독교도이기에 앞서 당시 세라페이온의 상황을 가장 잘 알았던 암모니오스와 헬라디오스로부터 고전교육을 받은 학자였고, 또 그들로 부터 당시 사태의 정황을 전해들었던 소크라테스 스콜라티코스가 이에 대해 전혀 유감을 표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세라페이온의 철거 시 소장장서의 손실은 미미했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 Thus this disturbance having been terminated, the governor of Alexandria, and the commander-in-chief of the troops in Egypt, assisted Theophilus in demolishing the heathen temples. These were therefore razed to the ground, and the images of their gods molten into pots and other convenient utensils for the use of the Alexandrian church; for the emperor had instructed Theophilus to distribute them for the relief of the poor. All the images were accordingly broken to pieces, except one statue of the god before mentioned, which Theophilus preserved and set up in a public place; 'Lest,' said he, 'at a future time the heathens should deny that they had ever worshipped such gods.' This action gave great umbrage to Ammonius the grammarian in particular, who to my knowledge was accustomed to say that 'the religion of the Gentiles was grossly abused in that that single statue was not also molten, but preserved, in order to render that religion ridiculous.' Helladius however boasted in the presence of some that he had slain in that desperate onset nine men with his own hand. Such were the doings at Alexandria at that time.  -- Socrates Scholaticus, {Church History} Book V, Chapter 15

    ... 소요사태가 종식된 후, 알렉산드리아 총독과 이집트 군사령관은 테오필로스를 도와 이교신전 을 철거했다. 신전들은 허물어졌고 신상들은 녹여져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 쓰일 그릇이나 다른 식기로 만들어졌다.  황제는  가난한 이들을 구호하는데 이것들을 나누어 주라고 테오필로스에게 지시했다. 모든 신상들은 파괴되었지만 앞서 말한 신의 (= 프리아포스 / 최광민 주) 신상은 남았는데, 테오필로스는 이를 보전해 공공장소에 세워두었다. 그는 말하길, "훗날 이교도들은 자신들이 저딴 신을 숭배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조치는 특히 문법학자였던 암모니오스의 분노를 샀는데, 내 기억으론 그는 "이교를 조롱하기 위해 그 신상 하나를 녹이지 않고 오히려 보전했기 때문에, 이교는 더욱 모욕당했다"라고 종종 말했다.  한편, 헬라디오스는 그가 그 절망적 상황에서 자신의 손으로 직접 9명을 죽였노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것이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 소크라테스 스콜라티코스, {교회사} 제 5권 15장 / 번역: 최광민  



    한편, 소크라테스 스콜라티코스보다 한 세대 후인 AD 5세기 교회사가인 소조메노스의 기록은 사건의 순서나 세부묘사가 약간 다르다. 스콜라티코스의 경우는 폭동 이전에 "세라페이온"이 철거된 것처럼 묘사되지만, 소조메노스의 경우 폭동 시점에 "세라페이온" 건물은 아직 남아있었다. 아마도 스콜라티코스가 말한 "폭동 이전의 세라페이온 철거"란 세라페이온 경내에 위치한 세라피스 신전 건물의 완전철거 전 (미트라스 예배소의 경우 처럼) 공개전시를 목적으로 세라피스 신전과 부속건물 내부의 종교시설물과 신상 및 성물들을 제거/철거한 과정을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세라페이온"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뒤에서 세라페이온 복원도를 바탕으로 다시 설명하겠다.

    About this period, the bishop of Alexandria, to whom the temple of Dionysus had, at his own request, been granted by the emperor, converted the edifice into a church. The statues were removed, the adyta (hidden statues) were exposed; and, in order to cast contumely on the pagan mysteries, he made a procession for the display of these objects; the phalli (ritual symbols of Dionysus), and whatever other object had been concealed in the adyta which really was, or seemed to be, ridiculous, he made a public exhibition of. ---- Sozomen, Historia Ecclesiastica, 7: 15

    이 시기에 알렉산드리아 주교의 요청에 따라 황제는 디오니소스의 신전의 소유권을 그에게 이전시켜 외관을 교회로 바꾸게 했다. 신상들은 제거되고 은밀하게 보관되던 (이교의) 성물들은 공개되었다. 이교의 비의종교를 모욕주려는 의도로, 주교는 이 성물들을 가지고 나와 공개적으로 행진시켰다. (디오니소스)의 음경상이라든지 다른 은밀한 성물들은 그 무엇이든지 간에 공개적으로 전시되어 조롱당했다. --- 소조메노스, {교회사} 7장 / 번역: 최광민

    The pagans, amazed at so unexpected an exposure, could not suffer it in silence, but conspired together to attack the Christians. They killed many of the Christians, wounded others, and seized the Serapion, a temple which was conspicuous for beauty and vastness and which was seated on an eminence. This they converted into a temporary citadel; and hither they conveyed many of the Christians, put them to the torture, and compelled them to offer sacrifice. Those who refused compliance were crucified, had both legs broken, or were put to death in some cruel manner. When the sedition had prevailed for some time, the rulers came and urged the people to remember the laws, to lay down their arms, and to give up the Serapion. There came then Romanus, the general of the military legions in Egypt; and Evagrius was the prefect of Alexandria.  ---- Sozomen, Historia Ecclesiastica, 7: 15

    이교도들은 그렇게 갑작스럽게 이것들이 공개된데 경악하여 참고만 있을 수 없었다. 대신 사람들을 조직하여 기독교도들을 공격했다. 그들은 많은 기독교도들을 죽이고 부상을 입혔으며, 언덕 위에 세워진 아름답고 장대하기로 유명한 세라페이온 신전을 점거하고 이 건물을 일시적인 요새로 개조했다. 이후 그들은 많은 기독교도들을 그리로 이송해 고문을 가하고 (이교의 신에게) 희생제물을 강제로 바치게 강요했다. 이를 거부한 사람들은 십자가형을 받거나, 양 다리가 부러지거나, 혹은 다른 잔인한 방식으로 처형당했다. 폭동이 한동안 진행된 후, 당국이 개입하여 사람들에게 법질서를 상기시키며 무기를 내려놓고 세라페이온에서 철수할 것을 촉구했다. 이후 이집트 군단 사령관인 로마누스가 도착했다. 에바그리우스는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총독이었다. --- 소조메노스, {교회사} 7장 / 번역: 최광민

    As their efforts, however, to reduce the people to submission were utterly in vain, they made known what had transpired to the emperor. Those who had shut themselves up in the Serapion prepared a more spirited resistance, from fear of the punishment that they knew would await their audacious proceedings, and they were further instigated to revolt by the inflammatory discourses of a man named Olympius, attired in the garments of a philosopher, who told them that they ought to die rather than neglect the gods of their fathers. Perceiving that they were greatly dispirited by the destruction of the idolatrous statues, he assured them that such a circumstance did not warrant their renouncing their religion; for that the statues were composed of corruptible materials, and were mere pictures, and therefore would disappear; whereas, the powers which had dwelt within them, had flown to heaven. By such representations as these, he retained the multitude with him in the Serapion.  ---- Sozomen, Historia Ecclesiastica, 7: 15

    그러나 항복을 받아내려던 이들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자, 상황을 황제에게 보고했다. 세라페이온에서 농성하던 자들은 그들의 대담한 행동의 결과가 불러올 처벌에 대한 공포 때문에 보다 더 격렬한 저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또 철학자의 옷을 입은 올림피오스란 사람이 반란을 고무하는 격렬한 연설을 듣고 고무받던 중이었데, 그는 그들 선조들의 신들을 버리느니 차라리 죽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우상들의 파괴로 사람들이 크게 낙심한 점을 알기에, 그는 이런 상황 때문에 그들의 종교를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연설했다. 그는 신상들이란 부서질 물질로 된 것이고 다만 표현물일 뿐이며 따라서 사라질 것이지만, 그 안에 있는 능력은 하늘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그런 식으로 그는 사람들을 세라페이온에 잡아둘 수 있었다.  --- 소조메노스, {교회사} 7장 / 번역: 최광민

    When the emperor was informed of these occurrences, he declared that the Christians who had been slain were blessed, inasmuch as they had been admitted to the honor of martyrdom, and had suffered in defense of the faith. He offered free pardon to those who had slain them, hoping that by this act of clemency they would be the more readily induced to embrace Christianity; and he commanded the demolition of the temples in Alexandria which had been the cause of the popular sedition. It is said that, when this imperial edict was read in public, the Christians uttered loud shouts of joy, because the emperor laid the odium of what had occurred upon the pagans. The people who were guarding the Serapion were so terrified at hearing these shouts, that they took to flight, and the Christians immediately obtained possession of the spot, which they have retained ever since. ---- Sozomen, Historia Ecclesiastica, 7: 15

    이 사태를 보고받은 황제는, 살해당한 기독교도들이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고난받고 순교의 영광을 받아들였기에 그들의 (순교자로서) 시복을 선언했다. 황제는 그들을 살해한 자들에 대해서도 사면을 제안했는데, 그는 자비를 베풀면 그들이 기독교를 수용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그는 대중폭동이 발생한 원인이 된 알렉산드리아의 이교신전들에 대한 철거지시를 내렸다. 이 칙령이 대중들 앞에서 낭독될 때, 기독교도들은 큰 환성을 질렀다고 하는데, 이는 황제가 이교도들이 자행한 일을 정죄했기 때문이었다. 세라페이온에서 농성하던 자들은 이 환성을 듣고 공포에 질려 도주했고, 기독교도들은 그 장소를 즉시 접수해 그 이후로 계속 보유하고 있다.  --- 소조메노스, {교회사} 7장 / 번역: 최광민




    한편, 역시 비슷한 시기, 같은 사건을 이교도 측 시각으로 본 기록으로는 얌블리코스 계열 신플라톤주의자였던 유나피오스의 {소피스트들의 생애}가 있다. 

    The temples at Canobus also suffered the same fate in the reign of Theodosius, when Theophilus presided over the abominable ones like a sort of Eurymedon and Evagrius was prefect of the city, and Romanus in command of the legions in Egypt.  --- Eunapius , {the lives of the Sophists}

    카노보스에 있던 신전들 역시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치세에 같은 운명을 겪었는데, 테오필로스가 유리메돈 같은 혐오스런 인간들 (=기독교도)를 지배하고 에바그리우스가 그 도시의 총독이었으며, 로마누스가 이집트 군단의 사령관이었을 때의 일이다.    --- 유나피오스, {소피스트들의 생애} /번역: 최광민 

    For these men, girding themselves in their wrath against our sacred places as though against stones and stone-masons, made a raid on the temples, and though they could not allege even a rumour of war to justify them, they demolished the temple of Serapis and made war against the temple offerings, whereby they won a victory without meeting a foe or fighting a battle. In this fashion they fought so strenuously against the statues and votive offerings that they not only conquered but stole them as well, and their only military tactics were to ensure that the thief should escape detection. Only the floor of the temple of Serapis they did not take, simply because of the weight of the stones which were not easy to move from their place.   --- Eunapius , {the lives of the Sophists}

    이 인간들은 우리의 성소들에 대해 분노로 사로잡혀 마치 석재나 석공들을 상대로 하겠다는듯 신전들을 공격했고,  그들을 정당화하기 위한 전쟁의 소문 조차 뒤집어 씌우지 못했으면서도 세라피스의 신전을 허물고 신전에 바쳐진 헌물을 공격하면서, 적을 만나지도 전투를 벌이지도 않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 방식으로, 그들은 신상들과 헌물들을 '정복'한 것 뿐 아니라 또한 그것들을 탈취했는데, 그들은 유일한 군사전략이란 걸리지 않고 훔치는 것 뿐이었다. 세라피스 신전 바닥은 탈취하지 못했는데, 단지 너무 무거워서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유나피오스, {소피스트들의 생애} /번역: 최광민 

    Then these warlike and honourable men, after they had thrown everything into confusion and disorder and had thrust out hands, unstained indeed by blood but not pure from greed, boasted that they had overcome the gods, and reckoned their sacrilege and impiety a thing to glory in. Next, into the sacred places they imported monks, as they called them, who were men in appearance but led the lives of swine, and openly did and allowed countless unspeakable crimes. But this they accounted piety, to show contempt for things divine. For in those days every man who wore a black robe and consented to behave in unseemly fashion in public, possessed the power of a tyrant, to such a pitch of virtue had the human race advanced ! All this however I have described in my Universal History --- Eunapius , {the lives of the Sophists}

    이 전쟁 좋아하는 존귀한 자들은 모든 것을 혼란과 무질서로 만든 후에 설령 손에 피는 안묻혔지만 탐욕스런 손을 휘두르면서 신들을 굴복시켰다 자랑하여, 그들의 신성모독과 불경함을 인증했다. 이어서 소위 '수도사'들이란 자들을 데려왔는데, 그들은 외관은 사람이나 돼지의 삶을 사는 자들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범죄를 공개적으로 저질렀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한 것을 조롱하면서 이를 경건한 것이라 여겼다. 이 시기에 검은 수도복을 입고 공개적으로 꼴사납게 행동하기로 결의한 모든 자들은 폭군의 힘을 지녔는데, 그런 덕성을 향해 인류는 진보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 일들은 내 {일반 역사}에 기록해 두었다.  --- 유나피오스, {소피스트들의 생애} /번역: 최광민 



    독설 속에 상당히 깊은 "한"이 느껴지는 기록인데,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로서 만약 세라페이온 철거 당시 "도서관"이 망실되었다면 그로 인한 "학문적 손실"에 대해 가장 큰 유감을 보였어야 할 유나피오스는 왜 "소장장서"에 대한 약탈이나 소실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을까? 그의 분노가 건물의 철거와 성물의 약탈에 촛점 맞춰져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가 이 사건 개요를 자세히 적었다는 그의 {일반 역사}란 책이 망실된 점은 제 3자적 시각을 보다 면밀히 비교해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아쉬운 부분이다. 그렇다고 또 이 책을 "기독교도가 분서갱유했다"고 막바로 넘겨짚지는 말자. 대부분의 경우 사본들이 꾸준히 필사되지 않으면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역사에서 사라질 뿐이다. 역사 속에서 망실된 모든 사본들이 분서갱유 때문에 그리된 것은 아니란 뜻이다.

    당시 많은 이교신전들이 큰 규모는 아니더라도 도서관 혹은 서고실을 갖춘 경우가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당시 얌블리코스 계열의 신플라톤자들의 주요거점이던 세라페이온 역시 몇 세기 전 뮤세이온 도서관의 규모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장소를 보유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여지는 많다. 그럼 이 장서들은 어디에 보관된 것일까? 이 장서들은 세라피스 신전이 철거되는 과정에서 함께 소실되었을까?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세라페이온"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 

    주디스 S 맥켄지가 발표한 흥미진진한 2004년 논문인 {Reconstructing the Serapeum in Alexandria from the Archaeological Evidence} (The Journal of Roman Studies , Volume 94 ,2004 , pp. 73 - 121) 은 고고학 발굴자료를 바탕으로 BC 3세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절부터 AD 4세기 로마시대에 이르는 동안 세라페이온의 건축학적 역사와 특성을 재구성해 보고했는데, 이 논문에 수록된 AD 4/5세기 당시 세라페이온 신전구역의 복원 조감도를 보면 아래와 같다.


    Judith S McKenzie, {Reconstructing the Serapeum in Alexandria from the Archaeological Evidence}

    사람들의 흔한 오해와 달리, '세라페이온'은 단일 신전 건물 (= 세라피스 신전)이 아니라, 일종의 신전복합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세라페이온'이라고 말할 때는 알렉산드리아 남서부 언덕 위에 세워진 '전체 신전터'를 말하기도 하고, 우측 하단의 긴 계단으로 연결된 출입구과 열주를 지나면 나오는 '세라피스 신전' 본 건물을 말하기도 한다. 즉, 신전 본관과 그 부속 경내가 다 포함된 개념이다. 

    세라피스 신전 본관을 중심으로 한 이 세라페이온 부지는 알렉산드리아의 유일한 언덕인 남서쪽 언덕 위에 건설되었고 바다에서도 그 장대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위치상 이점으로 세라페이온은 일종의 '요새'를 염두하여 개/증축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AD 4세기 경 로마 시대에 세라페이온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벽 바로 뒤에 기둥과 지붕으로 연결된 열주회랑이 신전터를 네모자로 빙 두르며  배치되어 있었다. 세라피스 신전은 그 열주회랑 안쪽의 광장 구역 북쪽에 위치했다. 100개의 계단을 올라 신전 구역으로 들어가면 열주를 지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념비를 옆의 연못을 만나게 되고, 그 연못 우측으로 세라피스 신전이 보인다. 신전을 정면에도 보았을 때, 그 왼쪽에는 비밀지하통로로 내려가는 입구가 있다. 이 지하통로는 신전 지하 및 광장을 건너 바라보이는 남측 건물과 연결되어 있었고, 정문 쪽으로도 뻗어있었다. 

    그럼 장서가 보관된 서고와 열람실은 어디에 위치해 있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세라피스 신전 내부에 있었다고 흔히들 오해한다. 그러나 AD 4세기의 후반기의 안티오키아 철학자이자 수사학자였던 아프토니오스 (Aphthonios) 는 세라페이온의 장서는 세라페이온 신전터 전체를 벽과 함께 둘러싸고 있는 경내의 열주회랑 (스토아) 안에 갖춰진 방들에 보관되고 열람되었다고 기록했다. 

    고고학 발굴을 통해 세라페리온 경내에서 서쪽과 남쪽의 열주회랑, 즉 정문을 통과해 세라페이온 신전 터 정중앙에서 세라피스 신전을 바라보고 섰을 때 좌측과 후방의 열주회랑에 일련의 방들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는데, 바로 이 방들이 서고와 열람실, 그리고 회합장소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열주회랑의 또 다른 구역들은 여러 신들을 모신 공간이었는데, 테오필로스가 세라페이온의 이교신상들과 성물들을 모아 파괴할 때 이 공간 역시 철저하게 수색되었을 것이나, 이 공간이 앞서 말한 서고와 열람실이 있는 구역과 겹치는지는 확실치 않다. 대체로 서고/열람공간과 종교적 시설은 열주회랑에 따라 구분되어 있었을 것으로 본다.  어찌되었든 간에 세라페이온의 장서들은 세라피스 신전 내부에 보관되었던 것이 아니라 외부의 열주회랑 내의 구역에 보관되었던 것이다.

    아프토니오스의 기록을 인용한다.

    Citadels, then, have been built in cities for the common security; for they are the highest points in the cities, and they are not themselves more fortified with buildings than they fortify their cities. The middle of Athens has embraced the acropolis of the Athenians, and Alexander had a height prepared in his own city, constructed to suit the name he gave it; for he set it on the highest point of the city, and it is more sensible to call it an acropolis than that on which the Athenians took counsel. Its appearance is as this account will describe. -- Aphthonios of antioch, {Progymnasmata}

    도시들은 보안을 위해 요새들을 건설해 왔다. 요새는 도시 중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건축물 보다도 도시(성곽)을 강화하는 것에 더 힘을 쏟았다. 아테네 한가운에는 아테네인들의 아크로폴리스가 있고,
    알렉산드로스도 가장 높은 지대를 마련하여 자신의 이름을 붙인 도시 이름에 걸맞은 것을 건설했는데, 아테네인들이 말하는 것보단 그것을 아크로폴리스라 부르는게 보다 적절할 것 같다--- 아프토니오스, {수사학 지침서} / 번역: 최광민

    An ”akra” projects up from the land, going up to a considerable height, and is called an “acropolis” for two reasons: because it is raised to a height and because it has been set on the high point of a city. Roads leading to this acropolis are not alike; for here there is an incline (”anodos”) and there an entrance way (”eisodos”). The roads change their names, being called by their function: here it is possible to go on foot and the way is public and a road for those going by carriage; on another side, flights of steps have been constructed [39R] where it is not possible for carriages to go. Flight of steps follows flight of step, always increasing from the lesser and leading upward, not ceasing until there have been a hundred steps; for the limit of a number is the end that reaches perfect measure. At the top of the stairs is a Propylaeon, enclosed by latticed gates of moderate height, and four very large columns rise up, providing several openings into one entrance passage. Above the columns stands the Oecus, fronted by many smaller columns which are not all of the same color, and when compared they add ornament to the design. The roof of the building rises in a dome, and around the dome is fixed a great memorial of things that are. 
    -- Aphthonios of antioch, {Progymnasmata}

    '아크라 (요새)'는 평지에서 상당한 높이까지 솟아 있으며, '아크로폴리스'라 불릴 때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은 그 높이 때문이고, 다음으론 그것이 도시의 고점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아크로폴리스로 연결된 길들이 모두 같지는 않은데, 경사로와 진입로가 있다. 도로는 기능에 따라 이들이 다르다. 도보가 있고, 공공로가 있으며, 또 수레가 지나는 길이 다른 쪽에 있다. 각 중간층을 연결하는 계단들이 놓여져 있는데, 계단은 아래서 위로 계속 뻗어있으며, 총 100개의 계단으로 구성된다. 끝에 딱 맞게 이 수는 정확히 계산되어 졌다. 계단의 꼭대기에는 정문이 있는데, 중간 높이의 격자형 문이 달려있다. 네개의 매우 큰 석주들이 놓여 있는데 하나의 입장로로 연결되는 통로가 된다. 석주들 위로는 공실이 있는데 여러가지 색의 작은 석주들이 설치어 장식을 더한다.  지붕에는 돔이 설치되었고, 돔 주변에는 훌륭한 기념물들이 설치되었다 
    --- 아프토니오스, {수사학 지침서} / 번역: 최광민

    On going into the acropolis itself, one enters a single open space, bounded by four equal sides, and its figure is rather like that of a war machine (i.e., a hollow rectangle).
    In the middle is a courtyard, surrounded by a colonnade. Stoas continue the courtyard and the stoas are divided by equal columns, and as for their measure, it is the largest possible. Each stoa ends in another crosswise colonnade and a double column divides it from another stoa, one ending and the other beginning again. Small covered structures are built inside the stoas; some are reading rooms for books, offering an opportunity for the studious to pursue knowledge and arousing the whole city to the possibility of wisdom; others were built as shrines to the ancient gods. Gold adorns the roof of the stoas and the capitals of the columns are made of bronze, overlaid with gold. The decoration of the courtyard is not all the same; different parts were done differently. One part has a representation of the contests of Perseus. A column higher than the others stands in the middle, making the place conspicuous.92 A visitor, up to this point, does not  --- Aphthonios of antioch, {Progymnasmata}

    아크로폴리스로 들어서면, 뚫린 정방형 공간 하나와 만난다. 그래서 그 모양새는 마치 (안이 빈) 공성기 같은 느낌이다.
    중앙에는 열주회랑으로 둘러싸인 내부광장이 있다. 이어지는 광장의 회랑은 같은 석주들로 가급적 널직히 정확히 구간이 나뉘어 진다. 각각의 회랑은 가로지르는 회랑과 만나게 되며, 다른 회랑과 연결되는 곳에는 두개의 석주가 각각 처음과 끝을 나눈다. 회랑 안에는 작은 구조물들이 지어졌는데, 어떤 것은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도시민들에게 지혜를 장려하기 위해 마련된 장서열람실들이고, 또 어떤 방들은 고대 신들을 모신 방들이다. 회랑의 지붕은 금으로 장식되었고, 기둥들의 머리는 청동으로 만들어져 금과 어우러져 있다.  --- 아프토니오스, {수사학 지침서} / 번역: 최광민



    테오필로스 주교가 철거를 목표한 것은 세라페이온 경내의 '세라피스 신전'였다는 점을 기억하자. 세라피스 신전 안에는 이집트 전통신인 오시리스와 아피스가 결합해 그리스화한 세라피스의 거대한 목상이 안치되어 있었는데, 세라페이온의 철거 (+약탈) 과정을 묘사한 소조메노스나 루피누스, 유나피오스 등의 기록을 보면, 철거와 약탈 주 대상은 바로 이 신상과 신전 본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라피스 신전이 철거된 후 세라페이온 터는 방치되었고 대신 그 근처에 수도원과 교회가 세워졌다. 하지만 열주회랑은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계속 남아있었던 듯 하다. AD 1169년 살라딘 통치 하 이집트의 이슬람 총독인 압드 알-라티프 (Adb al-Latif)의 기록에 따르면, 세라페이온의 열주회랑 일부는 이슬람 정복 후 수백 년이 지나 살라딘의 지시로 철거된 12세기 까지도 남아 있었다. 그럼 왜 테오필로스 당시에는 세라페이온을 두르고 있는 벽이나 열주회랑은 건드리지 않은 것일까? 아마도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 세라페이온의 터 자체는 그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요새'로 사용가능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테오필로스가 세라페이온에 있던 세라피스 신전을 철거하고 부속건물 안에 있던 여러 신상들과 이교의 성물을 수색/압수해서 파괴시켰을 때, 열주회랑에 있던 서고/열람실의 장서들의 운명은 어떻게 된 것일까? 테오필로스는 그 모든 장서들의 '파괴'를 지시했을까? 아니면 압수 후 분류해서 다른 곳으로 (가령, 테온/히파티아의 뮤세이온) 이관시켰을까? "장서 파괴"에 대한 고대기록이 이토록 희미하다면, 후자의 설명이 보다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물론 세리페이온이 보유했던 장서의 영구소실이 언제, 누구에 의한 것이었든지 간에 그 사실 자체는 몹시 아쉬운 일이다.

    세라페이온의 철거나 히파티아의 살해로 알렉산드리아나 지중해 로마/그리스 문명권의 학문이 그날로 종언을 고한 것도 아니다. 히파티아 살해 후에도 알렉산드리아에는 계속해서 철학학교가 존속했고, 또 이교 역시 국가나 지방정부의 지원을 받는 공공이교제전은 중지되었지만, 안티오키아의 단성/합성파 수도사인 요한 루푸스가 쓴 {이베리아인 페트루스의 생애 The Life of Peter the Iberian}를 보면 AD 5세기에 바로 과거 세라페이온이 있던 장소에서 이교의 치유의식이 열렸다는 기록이 등장하며, 또 AD 500년을 전후해 씌여진 {안티오키아의 세베루스의 생애 Life of Severus of Antioch}에도 역시 메누피스에 있던 이시스 신전으로 이교도들이 순례를 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로마 통치권 내의 모든 이교도 신전과 철학학교가 영구폐쇄된 것은 AD 529년 비잔틴의 유스티니아누스의 포고령이 나온 때였다.

    각설하고,

    무세이온에 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나, 세라페이온에 있던 도서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류 역사의 전무후무한 지성의 전당이었을까?

    사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무세이온 부속 도서관, 즉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설립된지 한세기 후, 소아시아의 부유한 페르가몬에도 이에 필적할 만한 도서관이 세워졌다. 페르가몬의 군주 유메네스 2세가 BC 220-159년 사이에 세운 이 페르가몬 도서관은 AD 1세기의 작가인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아마도 과장이 섞였겠지만 약 20만 권의 장서를 갖춘 도서관으로 AD 1세기 기준으로 (쇠락하기 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필적하는 도서관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면서 결혼 선물로 페르가몬 도서관의 모든 장서를 알렉산드리아로 보냈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훗날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를 공략하면서 (일부)소실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장서의 상당부분은 페르가몬 도서관의 장서였을 것이다. AD 1세기 세네카는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4만권의 장서가 있다고 추정했다. 아무튼 이 페르가몬 도서관은 AD 2세기에도 번영했고, 언제 폐쇄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최소한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도 기능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그 시기의 로마문명권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하나만 달랑 있었던 것은 아니란 뜻이다. 따라서 만약 AD 4세기 말 당시 세라페이온 도서관의 지위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고대 지식의 정수가 총집결된" "무세이온 도서관을 계승한" "유일한" 전당이 아니었다면, 광신 (기독교)이 이성 (그리스 철학/과학)을 "영원히" 파괴한 구도로 그려낸 에드워드 기본과 칼 세이건의 진술은 꽤 과장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세라페이온 (도서관)의 철거는 "반-지성적" 종교적 광기의 산물이었을까?




    # 히파티아 vs 키릴로스

    많이들 오해하는데, 히파티아는 세라페이온의 세라피스 신전이 철거될 때 살해당한 것이 아니다.

    가령,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 이렇게 적었다

    ....Among those great men was a great woman, Hypatia, mathematician and astronomer, the last light of the Library, whose martyrdom is bound up with the destruction of this place seven centuries after its founding, a story to which we will return.... Carl Sagan, {Cosmos} Chapter 1

    ....그 위대한 남자들 가운데 한 위대한 여성이 있었는데, 도서관의 마지막 빛이었으며 창설 7세기 후에 발생한 이 도서관의 파괴와 그녀의 순교가 관련되어 있는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히파티아의 이야기를 다시 다룰 것이다. ----- 칼 세이건, {코스모스} 제 1장 / 번역: 최광민

    .... The glory of the Alexandrian Library is a dim memory. Its last remnants were destroyed soon after Hypatia's death .... ---- Carl Sagan, {Cosmos} Chapter 13

    ...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영광은 이제 잊혀진 기억이 되었다. 도서관의 마지막 유산은 히파티아의 죽음 직후 파괴되었다.... --- 칼 세이건, {코스모스} 제 13장 / 번역: 최광민

    정말?

    세라페이온이 황제의 명령 하에 철거된 것은 AD 392년 경의 일로 테오필로스가 알렉산드리아 주교일 때의 사건이다. 히파티아는 테오필로스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키릴로스가 주교이던 AD 415년 살해 당했다. 테오필로스가 세라페이온을 철거한 AD 392년 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AD 412년 사이의 20년 간, 테온이나 히파티아가 테오필로스와 이 문제를 놓고 갈등을 벌였다는 사료는 남아있지 않다. 앞서 말한대로, 테온이나 히파티아는 세라페이온과 대립관계에 있던 인물들이다. 

    알렉산드리아 주교 테오필로스는 테온에 이어 히파티아에게 적대적이지 않았고, 테온이 사망한 AD 405년 부터 무세이온을 계승해 이끌게 된 히파티아를 기독교로 최근 개종한 로마총독부 인사들과 연결시켜준 인물이 바로 테오필로스였다. 그러니까 히파티아의 성공배후에는 사실 이해관계가 맞았던 테오필로스 주교가 있었던 것이다. 

    테오필로스는 히파티아의 학교에서 수학한 2인을 기독교 주교로 임명하기도 했다.  북아프리카 리비아에 위치한 프톨레마이스의 주교로 AD 410년에 임명된 시네시오스가 스승이었던 히파티아에게 보낸 7편의 편지가 남아 있는데, 여기에서도 테오필로스와 히파티아 간의 대립을 추출해 볼 단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AD 410년이면 히파티아가 무세이온의 책임자가 된지 5년 차의 일이다. 테오필로스의 이 조치를 고려해 볼때, 그가 이 무렵 히파티아와 어떤 갈등관계 였을 것으로 특별히 볼 이유는 없다.

    AD 412년 테오필로스는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데, 비록 그가 조카인 키릴로스를 후임으로 낙점하고 차기 주교로 훈련시키는 중이긴 했지만 공식으로 후계자 지명을 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주교직 계승을 놓고 당시 반-로마적이자 급진주의 탓에 이단으로 간주되던 노바티아누스파의 지원을 받던 티모테오스와 치열하게 다투게 된다. AD 412년 실권을 장악한 이후 강경 보수노선을 표방한 키릴로스는, 정적들을 제거해 가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을 히파티아 등에 대한 반감도 드러냈다. 

    키릴로스 보다 10-20살 정도 연배가 높고, 또 알렉산드리아의 정계와 학계에서 훨씬 높은 명망을 누리던 히파티아의 입장에서 보면, 이제 갓 종교적 권력을 손에 쥔 30대 말의 키릴로스가 그의 외삼촌이자 전임자였던 테오필로스 주교의 유화적 태도를 벗어나고 있는 점이 못마땅했을 수 있을 것이다. 히파티아는 테온과 테오필로스를 통해 확보한 정치적 인맥을 통해 키릴로스와 대립각을 보이기 시작하던 이집트의 로마총독부 인물들과 공개적 혹은 개인적 회동도 갖고 있었다. 키릴로스의 입장에선 자신의 기반을 위협할 수 있는 히파티아의 존재 자체가 눈에 가시였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권을 확보한 키릴로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모든 유대인 회당을 폐쇄하고 유대인의 재산을 압류하는 동시에 전원추방을 지시한다. 이때 기독교도이자 히스티아의 친구였던 로마총독인 오레스테스가 개입하여 황제에게 진상을 보고하자, 키릴로스는 오레스테스가 이교도를 옹호한다며 자신의 지지자들인 수도사들과 일반신자들을 조종해 폭동을 일으키고 심지어 총독이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어서 총독이 폭동을 유발시키고 살인을 옹호한 수도사 암모니오스를 공개처형하자 키릴로스는 암모니오스에게 순교자의 지위를 부여한 후 총독과 전면전에 나섰다. 



    동시대인이자 교회사가인 소크라테스 스콜라티코스에 따르면, 이 무렵 히파티아가 총독과 키릴로스를 이간질했다는 소문이 알렉산드리아에 돌았고,  이어지는 수난주간에 페트로스란 이름의 독경사가 주도한 기독교도 폭도들은 집에 가던 히파티아를 공격해 인근 카이사리온 교회당에 끌고가서 찢어 죽인 후 시신을 불태웠다.  이 사건에 대한 (기독교 입장에서 본) 당시의 세평을 그의 {교회사} 제 6권 15장에서 발췌한다.

    ......This affair brought not the least opprobrium, not only upon Cyril, but also upon the whole Alexandrian church. And surely nothing can be farther from the spirit of Christianity than the allowance of massacres, fights, and transactions of that sort. This happened in the month of March during Lent, in the fourth year of Cyril's episcopate, under the tenth consulate of Honorius, and the sixth of Theodosius. --- Socrates Scholaticus, {Ecclesiastical History}, Bk VI: Chap. 15

    ... 이 사건으로 키릴로스나 전체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조금도 비판받지 않았다.
    분명, 살육과 분쟁 혹 유사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허락하는 것보다 기독교의 정신에서 먼 것은 없다. 이 사건은 호노리우스가 10번째 콘술직에 있었고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통치 6년 차인 해이자, 키릴로스가 주교좌에 오른지 4년 차인 해 3월의 사순절 기간에 발생했다. -- 소크라테스 스콜라티코스, {교회사} / 번역: 최광민

    후에 '성인'으로 시성된 알렉산드리아 총주교 키릴로스는 사실 좀 문제적 인간이었다.

    비록 키릴로스가 콘스탄티노플 총주교 네스토리우스의 소위 "양성론"을 이단으로 정죄한 에페소스 1차회의를 주도한 공으로, 이후 칼케돈 신조를 따르는 측과 단성파 측 모두에게 "성인"으로 받들여지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1) 그가 단성론자였던 라오디케아 주교 아폴로나리스와 위-아타나시우스표현을 니케아 공회의를 승리로 이끈 알렉산드리아 주교 아타나시우스의 진술로 착각해 잘못 인용해 쓴 {Oratio ad dominas}과 {Contra Orientales}이 이후 단/합성파의 주장을 뒷받침 할 주요 근거가 된 점, (2) 그가 열정적인 전투적 수도사들과 신자들을 능수능란하게 조직해서 폭동을 유발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신학적/정치적 입지를 강화한 방식이 그의 후계자인 알렉산드리아 총주교 디오스코로스에게 그대로 이어진 점 등을 대표적인 문제로 들 수 있다.

    특별히 후자의 문제는 심각했는데, 디오스코로스와 친-알렉산드리아계 수도사들이 일방적으로 주도한 에페소스 2차회의 (강도회의)에서는 이집트와 시리아 등지에서 디오스코로스와 콘스탄티노플 수도원장 유티케스의 "단성론"을 지지하며 몰려온 수도사들과 열혈지지자들이 준 폭동 상태에서 당시 유티케스의 극단적 단성론을 정죄하려던 콘스탄티노플 총주교 플라비아노스를 조리돌림하여 결국 사망에 이르게 했다.

    순교를 지고의 가치로 삼던 AD 4-6세기의 북아프리카와 레반트 기독교도, 특별히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 등지의 열혈수도사들의 이런 과격한 집단행동 패턴은 지중해 일대에서도 유명했다. 이런 실력행사를 벌이다 죽으면 그것을 순교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조용히 사막에서 수도하던 수도사만 있던게 아니었던 것이다.

    과연 히파티아는 항간에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성의 화신"으로서 "종교적 광신"에 맞서다가 죽은 것일까? 아니면 "종교적 광신"에서 비롯된 "정치적 파벌전" 가운에 희생된 것일까?

    판단은 각자의 몫.


    최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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