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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tist. Husband. Daddy. --- TOLLE. 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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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샤루 위 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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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Kwangmin Choi, 2003-12-15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제목

샤루 위 단스? (Shall we dance?)




1. 음악감상

나는 국민학교 3학년에서 중학교 1학년까지 바이올린을 배웠다. 비록 4년 정도 배운 것이긴 했지만 그때의 버릇이 남아있어서, 지금도 음악을 들을 때면 피아노 배운 사람이 곡을 들을 때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왼손을 마치 지판을 짚듯이 무의식적으로 놀린다. 아무튼 악기를 배웠던 경험 때문인지, 혹은 천성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음악을 꽤 좋아했다. 어떤 특정한 음악가에 열광해본 적은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음악' 그 자체이지, 엄청나게 비싼 연주회 티켓을 사야 연주회장에 들어갈 수 있는 그런 특별한 '음악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는 변변한 오디오 기기가 없었기 때문에, 나의 음악감상은 주로 라디오를 통해 이루어졌다. 국민학교 시절의 FM104.5MHz {탐구생활} 정오방송, 중/고등학교 시절의 FM 93.1 MHz KBS 제1라디오 {명곡의 전당} 같은 프로그램들이 나의 주요 정보원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라디오에 무척 만족스러워했는데, 내 돈 주고 구할 수 없는 음반들에 대해 친절한 설명이 따라 나왔고, 또 그 방송을 송출하는 기기는 말할 나위없이 세계 최고가의 음향기기라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최고가의 승용차인 지하철을 애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LP 턴테이블 없어도, 진공관 앰프없어도, 먼지 쌓인 LP 묶음이 없어도, 나는 라디오를 통해 충분히 훌륭한 음악을 만족스럽게 즐길 수 있었다.

KBS 제1 라디오의 {명곡의 전당} 프로그램에서는 주로 음악회 실황을 중계했다. 내가 가본 음악회 중 기억나는 최초의 음악회는 아마도 국민학교 5학년 무렵에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있었던 {부활절 연합합창제} 같은 것이었다. 나는 이 합창제의 악몽을 기억한다. 이 연주회에서 각 교회 성가대들은 각자 발표 순서를 가진 후 대규모 좋아하던 당시 한국문화 수준을 반영하듯 마지막 곡으로 헨델의 {할렐루야}를 함께 불렀는데, 각 교회 성가대원이 약 백 여명으니 수 백명이 함께 부른 셈. 이들이 한번도 함께 보여서 연습을 해본 적이 었었던 탓에 {할렐루야} 코러스는 중간 이후부터 이상하게 흘러가더니, 나중에는 각 합창단이, 혹은 각 성부들이 멜로디를 제 멋대로 부르고들 있었다. 결과적으로 합창은 거대한 불협화음의 도가니가 되어 절망적인 지휘자의 몸부림과 함께 끝났다. 그 이후로 나는 소위 웅장하다는 대규모 합창단,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매우 싫어하게 되었다.




2. 일체유심조

나는 티켓을 사서 들어가야 하는 연주회에서 그다지 큰 감흥과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아마도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돈을 내고 티켓을 산 것은, 대학 1학년때 소개팅한 여학생과 함께 가려고 샀던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던 상 폐테르부르그 교향악단의 차이코프스키 연주회였던 것 같다. 한 장에 무려 2만 5천원이나 하는 표였으니 두 장이면 5만원이나 하던 것이었는데, 거기다가 멋지게 보이려고 당시에 한참 유행하던 사파리 재킷과 작지만 무겁기 짝이없는 가죽 가방도 하나 장만했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연주회장에 들어가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들으며 감동한 표정으로 내 옆의 여학생을 힐끗 보았더니, 그 친구는 "비창"스럽게 코를 쌕쌕 골며 {잠자는 숲 속의 미녀}되어 있더란 말이다. 미녀에게 관대한 나로서는 뭐,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서 2만 5천원짜리 초저녁 잠을 자는 것이려니 이해를 하기는 했지만, 그 이후로는 거금을 들여 티켓을 사지도, 연주회 때 꽃단장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사실 우리가 물건을 살때 내는 부가가치세에는 문화창달에 투자되는 문화예술진흥기금이 들어있지 않던가? 

다행이 음대가 있는 학교를 다닌 덕에 관심만 가지고 찾아보면 음악은 학교에 넘쳐났다. 나는 점심식사 후에는 학생회관의 양호실에 가서, 피곤하다고 말하고 장부에 이름만 적으면 공짜로 주는 종합비타민 '하이비날'이나 '아로나민 골드'나 '비타민C 500mg'을 받아먹고, 한 층 위에 있던 음악감상실의 널찍한 가죽소파에 누워 한 시간 정도 낮잠을 늘어지게 자길 즐겼다.

대부분의 학생 콘서트는 무료였고, 유료음악회를 가고싶다 싶을 때는 음대 사무실에 가서 조금만 어슬렁거리면 공짜표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주로 중앙도서관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도서관과 지척인 100주념기념관에서 하던 무료 연주회는 거의 빼놓지 않고 다녔는데, 그곳의 음악회는 주로 수요일이나 목요일에 있었고, 그래서 음악회가 있는 날의 일과란 식당에서 저녁 먹고, 도서관 앞 백낙준 동상 근처에 앉아 친구들과 함께 지나가는 여학생 점수를 매기고, 배가 꺼지면 도서관에 돌아와 자판기 커피를 커내 홀짝이며 신문을 보고, 저녁 7시 무렵에 음악회 가서 1시간 문화활동하고,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와 공부하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었다.

나는 특히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즐겨 보았다. 예측불허의 실수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던 이들의 연주회는 가히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묘미와 긴장감이 있었다. 내 앞의 무대에 헤르베르트 폰 캬라안이, 푸르트 뱅글러가, 이 무치치가, 정경화가, 로스트로포비치가, 파바로티가, 마리아 칼라스가 없으면 어떤가? 내가 즐겨 듣고 만족만 하면 되지.

일체유심조다, 일체유심조.




3. 음악회

나는 사실 음악만 듣고자 굳이 연주회장에 가지는 않는다. 연주회장 구조도 둘러보고, 조명의 위치도 확인하고, 무대의 문은 얼마나 잘 숨겨져 있는지, 좌석은 편한지, 얼마나 많은 관중들이 동원되어 있으며, 얼마나 많은 자발적 관중들이 있는지를 살핀다. (자발적 관중인 나는 다른 자발적 관중들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그들은 대개 혼자 앉아있고, 그러다보니 뭔가를 혼자서 늘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물론 가까운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러다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연주가 시작되면, 이번에는 연주자가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하는 버릇들을 찾아낸다. 독주회라면 연주자 1인에게 관심이 집중되겠지만, 합주라면 나의 관심은 분산되기 마련이다. 한때는 오케스트라 단원 전체를 돌아가면서 두루 살펴보았지만, 요새는 더 재미있는 감상법을 찾아내었는데, 한 명만 찍어서 연주회 내내 그 사람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다 보면 일에 몰두하고 있는 한 사람의 정열에 탄복하기도 하고, 혹은 그들이 몰래 실수하는 장면을 찾아내기도 한다. 가령, 다른 바이올린 주자들의 활이 남들은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데, 자기 혼자만 위로 올라가고 있다던지, 악보 잘못 넘겨서 약간 주춤하는 모습이라든지 하는 것 말이다. 혹시라도 팀파니같은 타악기 주자들을 보고 있을 때면, 아주 가끔씩 있는 두둥~소리를 내기 위해 그 오랜 시간을 우두커니 서서 그 한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서 약간의 안쓰러움과 함께 또한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연주회는 하나의 요약된 인생이다. 실수를 해도 재빨리 수습하고 가급적 실수의 흔적을 남겨서는 안된다. 사람들이 그 실수가 실수가 아닌 음악의 "새로운 해석"이라고 여길 정도도 당당하게 행동해야 한다. 또한 언제올지도 모르는 기회를 위해, 지루하지만 긴장된 자세로 우두커니 서서 그 순간이 오길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 기회가 왔는데 두둥거리며 북을 치지 않는다면, 아마도 내 인생의 지휘자는 다음 무대에 나를 세우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론 연주회장에서 연주자와 음악에만 신경을 쓰는 것은 아니다. 연주자에게는 매우 미안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사실 그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다. 조명이 어둡기 때문에 관찰은 눈을 매우 피곤하게 한다. 좋은 음악도 계속 들으면 다소 지루해진다. 그럴 때는 지긋이 눈을 감고, 들려오는 음악을 배경음악으로 깔고 여러가지 생각에 잠긴다. 듣기 쉬운 음악도 그런 마당에, 듣기 어려운 음악이라면 잡념이 끼어들 것이 더할 나위없다.



인생을 살다보면, 어떤 일에 조금만 발을 담궈보고도 일이 잘 풀려갈 것인지, 꼬일 것인지 미래를 직감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내가 일진에 서서 문제를 돌파해 나갈 것인지, 꼬리를 내리고 이진으로 후퇴하여 향후 기회를 엿보아야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때로 결정을 제때에 내리지 못하고 안절부절, 좌불안석, 진퇴양란하다가 장렬히 전사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난 12월 10일 저녁, Kuttner String Qaurtet의 연주회에 참석했다. 이 연주회는 Quartet이므로 제1바이올린, 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이렇게 네 명이 연주한다. 첫 곡이던 명랑한 모짜르트의 곡이 끝나고서, 두번째 곡인 드뷔시의 곡이 시작된지 2분이 채 되지 않아, 나는 곡의 난해함이 불러온 돌발적 위기상황을 체험하게 되었다. 나는 즉각적으로, 곡 그 자체에 계속 관심을 두다가 장렬히 전사할 것인지, 곡 이외의 요소로 내 관심을 분산시켜 구차한 목숨을 부지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나는 도움을 구하는 시선으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4명.

순간 4라는 수는 인기그룹 '핑클'이란 검색결과를 리턴해 주었고, 즉각적으로 그 중에 가장 미스테리한 존재인 이진이 떠올랐다. 노래를 잘하는 '옥주현', 얼굴 예쁜 '성유리', 비록 나는 동의할 수 없지만 일부 사람들이 섹시하다고 말하는 '이효리'가 각자의 포지션을 확실히 가지고 있는 반면, 노래를 (내 귀엔) 특별히 잘하지도, 얼굴이 (내 눈에) 특별히 매혹적이지도 않은 '이진'은, 나에게는 그 옛날 '삼미 수퍼스타즈'처럼 늘 혼란과 당혹을 주는 존재로 "주목" 받아왔다. 좋아서가 아니라 일종의 안타까움 때문에 더 주목하게 되는 그런 존재 말이다.

이진(李眞)은 영원한 이진(二進)이 될 수 밖에 없는 姓名學학적 문제를 타고난 것일까? 중고등학교 생양아치들도 {一進會}란 거창한 이름표를 달고 뒷골목 천하를 호령하지 않던가? J.F. 케네디의 아버지는 늘 아들들에게 비슷한 것을 말했다지 않은가? "二進은 없다. 二進은 이미 진 것"이라고.

그러나 쿼텟의 연주는 나위없이 훌륭한 연주였다. 그곳에 二進은 없었다.




4. Por una Cabeza

드뷔시의 곡을 마치고 박수를 받으며 퇴장한 연주자들은 무대로 돌아와 자리를 잡고 앉아, Carlos Gardel 작곡의 그 유명한 탱고음악 {Por una cabaza}를 앵콜곡으로 연주했다.

아, 

Por 
una 
cabeza !


Carlos Gardel, {Por una Cabeza}

순간 나의 기억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순식간에 블루밍턴의 아우어홀에서 10년 전의 서울로 돌아간다.

10여년 전, 나는 낮에는 나라를 지키고, 밤에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6410원을 국가로부터 월급으로 받는 대신 35000원의 출퇴근용 시외버스비를 개인적으로 지출해야 하는 구조적 모순을 시정하기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중학생이던 동생과 동생 친구 5명을 모아 수학과 과학 단체과외를 집에서 하고 있었는데, 어느 주말 나는 큰 마음을 먹고 나의 학생들에게 영화 하나를 보여주기로 결심하고, 이 모두를 명동 중앙극장에 데려가 {여인의 향기}을 함께 보았다. 그 영화에서 알파치노가 레스토랑에서 추던 탱고에 맞춰 연주되던 음악이 바로 {Por una cabeza}였다.

참고로 말하자면, 내가 국민학교 때는 학교에서 전교생 상대로 포크댄스를 가르치곤 했고 운동회 같을 때 전교생이 폴카나 왈츠를 학부모 앞에서 시연하기도했다. 물론 체육점수의 30점 정도가 무용점수 였다. 이 당시 친구들끼리는 "아싸라비아 콜롬비아~ 닭다리잡고 뜯어뜯어~"라는 정체불명의 박자에 맞춰 춤을 연습했다. 하지만 나는 춤을 무척 싫어한다. 대학 1학년 1학기 종강파티때 누군가 디스코텍에서 내가 춤추는 것을 비디오카메라로 찍은 적이 있었는데, 나는 내가 춤추는 모습에 충격 받아 그 이후로는 춤을 추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나는 마치...줄에 매달린 피노키오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혐오스러웠다.



그 영화로 인해 한국에 잔잔한 탱고의 유행이 잠시 있었는데, 심지어 춤을 혐오하던 나 역시 깊은 인상을 받아 탱고를 배우고자 하는 열망에 불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홍대 앞 어느 재즈댄스 연습실에서 탱고를 3회 5만원에 가르쳐준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고, 다음 월급을 받는 날 나는 5만원을 들고 홍대입구로 향했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자 빼곰히 문이 열린 연습실 쪽에서는 원.투.쓰리.포. 소리와 딱따기 소리가 들려왔고, 짧은 머리의 사내가 들어오자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강사로 보이는 미모의 아가씨가 요구르트병을 손에 들고 걸어왔다.

"어떻게 오셨어요?"

순간 나는 당황했다.

"추추..츠.."

"예?"

"치치..인..구 만나러 왔는데요"

나는 그만 엉겁결에 "춤 배우러 왔는데요"이라고 말할 것을 "친구 만나러 왔는데요"라고 말해버렸다.

"지금 중급반 레슨 중이니까 끝날 때까지 사무실에서 기다리세요."

강사는 문을 닫고 연습실 안으로 휑하니 들어가버렸다. 나는 강사가 건네준 요구르트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문에 뚫린 작은 유리창을 통해 20여명의 사람들이 쌍쌍이 탱고를 연습하고 있는 것을 한 5분 쯤 멀건히 바라보다가, 강사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때도 연습실에는 {Por una cabeza}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탱고레슨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나는 관중들의 박수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10년의 세월과, 태평양과 로키산맥과 대평원을 넘어 인디애나 블루밍턴의 아우어홀로 돌아온다. 10년이 이렇게 순식간에 지나가버렸지만, 예나 지금이나 나는 홀로 앉아있고, 나를 오래 전 열정의 탱고의 세계로 잠시나마 이끌었던 {Por una cabeza}를 우두커니 듣고만 있다.

그때 미모의 강사에게 용감하게 외쳤더라면, 나는 지금과는 다른 현재를 맞이했을까?

“샤루 위 단스(Shall we dance)?”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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