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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적으로" 방탕한 탕자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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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Kwangmin Choi). 2005-07-04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제목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적으로" 방탕한 탕자였을까?

순서
  1. 방탕한 아들의 대명사, 아우구스티누스
  2. 청소년기 (16세)
  3. 첫번째 동거 (17-30세 경경)
  4. 두번째 동거 (30세 경)
  5. 정리: 과장을 통한 성인공경

§ "방탕한 아들"의 대명사, 아우구스티누스

역사 속 위인의 회심을 강조하기 위해, 후세는 종종 그들의 "방탕했던" 삶을 조금 더 극적으로 윤색한다. 북아프리카 (현, 알제리) 출신으로서 가장 영향력있는 라틴교부의 한 사람이 된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그런 예의 하나이다.


The earliest portrait of Saint Augustine in a 6th century fresco, Lateran, Rome. (출처: Wikimedia Commons)

내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처음 읽은 것은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그때에도 통상적으로 알려졌던 아우구스티누스와 책에서 말하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꽤 달라서 당혹했던 기억이 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관련해 통속적으로 회자되는 이야기는 대체로 다음의 구성을 가진다.

  1.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는 독실한 기독교도였다.
  2.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머니의 기대에 반해 방탕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3. 한 예로 그는 호색을 일삼는 등 어머니의 기대를 반해 모니카를 슬픔에 잠기게 했고,
  4. 이단인 마니교도가 되었다
  5. 그러나, 모니카의 끝없는 기도로 마침내 아우구스티누스는 훌륭한 기독교도로 거듭났다.

이 간략한 구성에서 통속적으로  대비/강조되는 것은 (1) 몹쓸 아들과 (2) 아들을 회심시킨 어머니의 기도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 본인이 남긴 {고백록}에서 아우구스티누스 본인이 기록하는 자신의 과거는 이와 꽤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사실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젊은시절의 "방탕"함을 논할 때, 그것은 대체로 수사학-마니교-신플라톤주의를 떠돌았던 자신의 사상적 편력과 속세의 지식에 대한 오만을 말한다. 물론 여기에 그의 "성적방탕"도 포함되기는 하지만 전자에 비해 매우 작게 묘사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성적방탕" 일화는 크게 세가지 이야기가 뒤섞인 것이다.




§ 청소년기 (16세 무렵)

그 첫번째 일화는 16살 무렵 그가 고향인 북 아프리카 타가스테에서 부모와 함께 살던 시절의 이야기다. 당시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의 행실을 걱정해서 "음행하지 말 것 - 무엇보다도 유부녀를 건드리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잔소리로 여겨 발끈했다고 적었다.

사람들은 흔히 이 대목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여자 (특별히 유부녀)를 건드리고 다녔을 것이라고 섣불리 생각하곤 하는데, 사실 아우구티누스는 바로 그 뒤에 해명을 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나이 또래들이 흔히 그러듯) 악행에 대한 허영심 때문에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들을 짐짓 한 척하면서 뻐기고 다녔다고 진술하고 있다.

읽어보자.

6. During that sixteenth year of my age, I lived with my parents, having a holiday from school for a time--this idleness imposed upon me by my parents' straitened finances. The thornbushes of lust grew rank about my head, and there was no hand to root them out. Indeed, when my father saw me one day at the baths and perceived that I was becoming a man, and was showing the signs of adolescence, he joyfully told my mother about it as if already looking forward to grandchildren, rejoicing in that sort of inebriation in which the world so often forgets thee, its Creator, and falls in love with thy creature instead of thee--the inebriation of that invisible wine of a perverted will which turns and bows down to infamy. But in my mother's breast thou hadst already begun to build thy temple and the foundation of thy holy habitation--whereas my father was only a catechumen, and that but recently. She was, therefore, startled with a holy fear and trembling: for though I had not yet been baptized, she feared those crooked ways in which they walk who turn their backs to thee and not their faces. 

7. Woe is me! Do I dare affirm that thou didst hold thy peace, O my God, while I wandered farther away from thee? Didst thou really then hold thy peace? Then whose words were they but thine which by my mother, thy faithful handmaid, thou didst pour into my ears? None of them, however, sank into my heart to make me do anything.

슬프도다! 오, 나의 하나님, 제가 당신을 떠나 방황하고 있을때, 당신이 가만히 계셨었다고 제가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정말 잠자코 계셨던 것일까요? 당신의 충실한 여종이셨던 제 어머니를 통해 가끔씩 제게 들려주시던 말들이 바로 당신의 말 아니었던가요? 다만 제 귀에는 그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소리가 마음 속에 들어오지 않았을 뿐 입니다. --- 번역: 최광민

She deplored and, as I remember, warned me privately with great solicitude, "not to commit fornication; but above all things never to defile another man's wife." These appeared to me but womanish counsels, which I would have blushed to obey.  

어머니는 행여나 제가 음행의 죄를 저지를 것을 걱정하여 바른 행실을 가질 것, 특별히 유부녀와 간통해서는 안된다고 은밀히 당부하셨습니다만, 저는 그런 말이 남자답지 못한 여자스런 잔소리로 여겨져 순종하는 것이 쑥스럽기까지 했습니다.---번역: 최광민

Yet they were from thee, and I knew it not. I thought that thou wast silent and that it was only she who spoke. Yet it was through her that thou didst not keep silence toward me; and in rejecting her counsel I was rejecting thee--I, her son, "the son of thy handmaid, thy servant."[49] 

[중략]

But I did not realize this, and rushed on headlong with such blindness that, among my friends, I was ashamed to be less shameless than they, when I heard them boasting of their disgraceful exploits--yes, and glorying all the more the worse their baseness was. What is worse, I took pleasure in such exploits, not for the pleasure's sake only but mostly for praise. What is worthy of vituperation except vice itself? Yet I made myself out worse than I was, in order that I might not go lacking for praise. And when in anything I had not sinned as the worst ones in the group, I would still say that I had done what I had not done, in order not to appear contemptible because I was more innocent than they; and not to drop in their esteem because I was more chaste.

그러나 저는 (당신이 어머니를 통해 훈계하시는 줄도 모르고 / 필자 주) 맹목적으로 질주했으며, 같은 또래들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그 친구들이 자신들의 죄를 우쭐거리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나서는, 죄에 대한 쾌락보다는 명예욕에 불타서 그렇게 행동했던 것입니다. 악 이외에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그러나 나는 친구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악당이 되기로 했습니다. 그 방탕한 친구들의 무리에 끼기 위해 제가 하지않은 일을 했다고 거짓말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순결할수록 친구들의 경멸을 당하고, 결백할 수록 낮은 취급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번역: 최광민

--- {Confession, Book 2}, Translated by Albert c. Outler / 번역: 최광민

오히려 사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 속에서 아우구스누스가 이 시절의 죄로 가장 크게 고백하는 죄는 성적인 죄가 아니라 위의 고백 바로 뒤에 등장한 죄인 "도둑질"인데,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자기 집 포도원 근처에 있던 (남의) 배나무에서 배를 몰래 서리하러 다녔던 것이다.

이 도둑질, 즉 동네 배나무 서리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굉장히 긴 설명과 과도할 정도로의 참회를 적어내려 간다. 이 분량은 바로 직전에 묘사된 청소년기의 소위 "성적"방종에 대한 묘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소위 청소년기의 방종에 대한 묘사는 위에 인용한 짤막한 내용 말고는 그의 기나긴 {고백} 전체에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구나 한번쯤 가지고 있을 과수원 서리에 대한 기억을 악한 본성에서 유래한 큰 범죄로 고백하고 있을 정도로 죄에 민감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우리는 종종 그런 이들을 "성인"이라 부른다.)  그런 그가 과일서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죄인 간음이나 유부녀와의 간통에 대해 실제로는 아무 말도 하고 있지않다는 것을 볼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니카의 당부 - 음행이나 유부녀와의 간통 - 을 실제로는 저지르지 않았다고 고백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의 설명대로라면, 그는 "허세"를 부린 것 뿐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청소년기 성적방종 사실을 감추려고 일부러 축소했을 이유는 없다. 그는 이후 약 13년에 걸친 동거에 대해서도 아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소한 것들까지에 대한 고백은 고대와 중세의 성자들 뿐 아니라, 근세의 청교도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청교도가 아니라 삼위일체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당대의 유니테리언과 유사한 신학을 가졌던) 17세기 수학자/과학자 아이작 뉴턴은 케임브릿지 학생이던 1662년에 자신이 저질렀던 58개의 "대죄" 목록을 작성하는데, 그 중에는 물론 어머니와 양아버지를 집과 함께 태워버리겠다고 욕한 정도의 중죄로 포함되지만, 여동생을 때린 일이라든지, 주일날 쥐덫을 놓은 일이라던지, 혹은 주일밤에 파이를 만든 일 같은 것도 포함된다.

게다가 아우구스티누스는 17세 부터 30세 무렵까지 동거했던 카르타고 여인이 그때까지 자신의 "유일한 여인"이었다고 직접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 첫번째 동거 (17-30세 경)

다음으로 그가 고향을 떠나 로마령 북아프리카의 중심지였던 카르타고에서 수사학 교사로 활동하던 17세 무렵부터 시작되어 30살 무렵까지 이어진 낮은 신분의 여자와의 동거 이야기를 읽어보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여인과의 사이에서 아데오다투스라는 이름의 아들을 가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부모의 허락없이 정식 결혼절차없이 이 여인과 동거를 시작한 것을 "육욕에 의한 죄"로 고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이 그에게 유일한 여인이었으며 또 헤어질 때까지 이 여인에게만 충실했다고도 고백한다. 그리고 동거 후 그 다음 해에 태어난 그 둘 사이의 아들 아데오다투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적는다. (이 아들은 의도해서 갖게 된 것은 아니었고, 이후 이 둘이 13년을 살면서 다른 자식을 두지 않은 것으로 보아 피임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2..... In those years I had a mistress, to whom I was not joined in lawful marriage. She was a woman I had discovered in my wayward passion, void as it was of understanding, yet she was the only one; and I remained faithful to her and with her I discovered, by my own experience, what a great difference there is between the restraint of the marriage bond contracted with a view to having children and the compact of a lustful love, where children are born against the parents' will -- although once they are born they compel our love. --- BOOK 4 / CHAPTER II

... 그 시절 저는 합법적인 결혼을 하지않고 동거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지각없이 공허한 방탕에 빠져있던 중 알게 된 여인이었지만, 그녀는 저의 유일한 여인이었고 저는 그녀에게만 충실했습니다. 그녀와 살면서 결혼관계 속에서 아이를 갖는 것과 의도치 않게 욕정에 의해 아이를 갖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발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아이가 태어나면 당연히 사랑하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 아우구스티누스, {고백} 제 4권 제 2장 / 번역: 최광민

14. ... We took with us the boy Adeodatus, my son after the flesh, the offspring of my sin. Thou hadst made of him a noble lad. He was barely fifteen years old, but his intelligence excelled that of many grave and learned men. I confess to thee thy gifts, O Lord my God, creator of all, who hast power to reform our deformities -- for there was nothing of me in that boy but the sin. For it was thou who didst inspire us to foster him in thy discipline, and none other -- thy gifts I confess to thee. There is a book of mine, entitled De Magistro.[287] It is a dialogue between Adeodatus and me, and thou knowest that all things there put into the mouth of my interlocutor are his, though he was then only in his sixteenth year. Many other gifts even more wonderful I found in him. His talent was a source of awe to me. And who but thou couldst be the worker of such marvels? And thou didst quickly remove his life from the earth, and even now I recall him to mind with a sense of security, because I fear nothing for his childhood or youth, nor for his whole career. We took him for our companion, as if he were the same age in grace with ourselves, to be trained with ourselves in thy discipline. And so we were baptized and the anxiety about our past life left us. Nor did I ever have enough in those days of the wondrous sweetness of meditating on the depth of thy counsels concerning the salvation of the human race. How freely did I weep in thy hymns and canticles; how deeply was I moved by the voices of thy sweet-speaking Church! The voices flowed into my ears; and the truth was poured forth into my heart, where the tide of my devotion overflowed, and my tears ran down, and I was happy in all these things.--- BOOK 9 / CHAPTER VI

....우리는 또한 (세례를 지원하러 가는 길에 / 필자 주) 아데오다투스를 데리고 갔습니다. 육체로는 제 죄악 때문에 태어난 아이지만, 당신은 그 아이를 훌륭하게 키워내셨습니다. 그 나이가 15세에 불과했지만, 그 아이의 총명은 학식많은 어른들을 능가할 정도였습니다. 만물의 창조자요 우리의 잘못을 바로잡아주시는 능력을 지닌 나의 주 하나님, 나는 당신이 제게 주신 선물에 감사드립니다. 그 아이와 저 사이에는 사실 (저의) 죄 말고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그 아이를 당신의 가르침으로 양육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하신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입니다. 이 아이를 선물로 주신데 대해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저의 책 가운데 저와 아데오다투스가 대화를 나눈 내용을 담은 {교사론}이 있습니다. 이 책에 적힌 대화 전부가 고작 16살이었던 제 아들의 생각이란 것을 당신은 알고 계십니다. 나는 그 아이에게서 더 놀라운 재능을 보았고, 그 재능에 경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신 이외에 누가 이런 놀라운 일을 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당신은 제 아들을 일찍 데려가셨습니다. 그러기에 더 편한 마음으로 제 아들의 어린시절과 청년기, 그리고 인간 자체에 대해서 돌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아이를 은총 가운데 우리와 같은 나이를 가진 것처럼 대우했고, 당신의 교훈으로 훈련받도록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 제 9권 제 6장 / 번역: 최광민

그러므로 (비록 동거생활이긴 했지만) "성적으로 방탕"했던 아우구스티누스 이야기는 적어도 17세부터 30세 즈음까지는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울러 당시 로마법은 신분이 다른 남녀 간의 결혼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는데, 이는 로마 시민권의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었다. 가령, 로마 시민권자는 비시민, 특별히 해방노예 출신의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 로마법 상 금지되어 있다. 이 경우, 결혼만 금지되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자식에게 로마시민권이 부여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여인의 이름과 출신을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후세는 아마도 이 여인이 카르타고의 비-로마시민 혹은 해방노예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런 형식의 동거는 한 명의 배우자와의 일부일처적인 관계의 동거만을 뜻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 관계 속에서 한 남자와 지속적인 사실혼 관계를 가지는 여인은 '매춘부'라는 비난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다. 이 형식의 동거는 로마사회에서 법적인 지위를 가지지는 않지만 결혼의 한 형태로 간주되고 있었고, 그런 이유로 성적인 문제에 대해 상당히 엄격했던 북아프리카의 주교들도 기독교도가 로마법 상의 결혼이 아닌 경우라 하더라도, 이 결합이 교회법상 적절하고 이 둘이 남편과 아내로서의 역할과 의무에 충실하다면 이들에게 성찬을 주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동거 직후부터 한동안 마니교도였기 때문에, 이 동거를 당시 교회가 인정했을 것으로 여길 순 없을 것이다. 다만 그의 동거가 당시 로마사회의 일반적인 유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따라서 동거 그 자체를 두고 그가 '성적방종을 즐겼다'라고 말할 순 없다는 것만 기억해 두자.

참고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여인을 자신의 '친구'로 회고한다. 당시의 로마사회에서 남자의 친구는 남자만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여인을 자신의 '친구'였다고 표현한 것은 이 여인에 대한 그의 애정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기간 동안 아우구스티누스는 수사학을 가르치는 동시에, AD 373년부터 9년 간은 "성관계를 금기시"하는 마니교의 청문자로 입문했다. 이 청문자로서의 지위는 결혼이 허용된 지위이기는 했으나, 마니교의 교리에 따르면 남녀 간의 성관계는 몹시 "물질적"인 저급한 것으로 여겨졌으므로, 마니교도인 아우구스티누스가 교리에 반하는 성적방종을 했으리라고 볼 이유는 없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미 언급했다시파, 그의 동거녀는 그의 유일한 여인이었고 다른 여자와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 동거 다음 해 태어난 아데오다투스 이외에 다른 자식을 두지 않은 것은 그가 마니교에 입문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후 마니교에 회의를 느낀 아우구스티누스는 AD 382년에 마니교를 떠나기는 했지만, 마니교 동료들의 소개를 받아 밀라노의 수사학 교수직을 제안받고 밀라노로 이주했다. 밀라노에 정착한 그는 이후 마니교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잠시 신플라톤주의에 매료되었다가,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에게 감화를 받고 기독교로 기울게 된다. 하지만 즉각적으로 개종한 것은 아니고, 계속해서 (신)플라톤주의적 사유를 계속해 가는 과정 속에 아울러 성서를 탐구하고 있었다.

이 무렵 어머니가 고향으로부터 와서 아우구스티누스와 합류했다. 모니카는 13년 간 아들과 살아온 동거녀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동안 원했던 바대로 "휼륭한 집안"의 규수를 찾아 아들과 "정식으로" 짝지어 주려고 했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아우구스티누스는 동거녀가 있는 상태였지만 11살짜리 규수에게 청혼하고 약혼도 했다. 다만 나이가 너무 어려서 결혼까지 2년 간 기다리기로 했다.

원래 교회법은 이혼 및 (정확히는) 이혼한 배우자가 살아있는 동안의 재혼을 금했다. 이것은 형식상 중혼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동거"는 "결혼"이 아니기 때문에 형식상 "이혼"이 성립하지 않으며,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식결혼은 기술적으로는 "중혼"이 아닌 셈이 된다.

약혼과 동시에 아우구스티누스는 13년을 같이 살아온 동거녀를 내보내야 했다. 그 이야기를 {고백록}에 적으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래와 같이 적는다. 우리는 여기서 흔히 말해지는 "탕자 아우구스티누스"와는 다른 모습의 아우구스티누스를 보게된다.

BOOK 6 / CHAPTER XIII

23. Active efforts were made to get me a wife. I wooed; I was engaged; and my mother took the greatest pains in the matter. For her hope was that, when I was once married, I might be washed clean in health-giving baptism for which I was being daily prepared, as she joyfully saw, taking note that her desires and promises were being fulfilled in my faith. Yet, when, at my request and her own impulse, she called upon thee daily with strong, heartfelt cries, that thou wouldst, by a vision, disclose unto her a leading about my future marriage, thou wouldst not. She did, indeed, see certain vain and fantastic things, such as are conjured up by the strong preoccupation of the human spirit, and these she supposed had some reference to me. And she told me about them, but not with the confidence she usually had when thou hadst shown her anything. For she always said that she could distinguish, by a certain feeling impossible to describe, between thy revelations and the dreams of her own soul. Yet the matter was pressed forward, and proposals were made for a girl who was as yet some two years too young to marry. And because she pleased me, I agreed to wait for her.

(...중략...)

CHAPTER XV

25. Meanwhile my sins were being multiplied. My mistress was torn from my side as an impediment to my marriage, and my heart which clung to her was torn and wounded till it bled. And she went back to Africa, vowing to thee never to know any other man and leaving with me my natural son by her. But I, unhappy as I was, and weaker than a woman, could not bear the delay of the two years that should elapse before I could obtain the bride I sought. And so, since I was not a lover of wedlock so much as a slave of lust, I procured another mistress -- not a wife, of course. Thus in bondage to a lasting habit, the disease of my soul might be nursed up and kept in its vigor or even increased until it reached the realm of matrimony. Nor indeed was the wound healed that had been caused by cutting away my former mistress; only it ceased to burn and throb, and began to fester, and was more dangerous because it was less painful.

그러는 중에 제 죄는 늘어만 갔습니다. 지금까지 동거해 온 여인은 결혼에 장애가 되기에 저와 헤어져야 했습니다. 그녀와 단단히 결합되어있던 제 마음은 피 흘릴 정도로 갈갈히 찢겨졌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제 곁에 남겨두고 아프리카로 돌아가면서 당신께 다시는 다른 남자를 알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보다 못난 죄인인 저는, 약혼자를 맞아들일 2년이 지루해 또 다른 여자를 알게 되었는데 물론 아내는 아니었습니다. 옛 버릇에 묶인 제 영혼의 병은 더 강렬하게 깊어져 결혼할 무렵까지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제 첫 동거녀와 끊겨지면서 받은 상처는 아물지 않고 열과 고통 끝에 곯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덜 고통스러웠기에 더 절망적이 되어갔습니다.
--- 아우구스티누스, {고백} 제 6권 15장 / 번역: 최광민

동거녀를 북아프리카로 떠나보내는 자신의 마음을 적으면서, 아우구스티누스를 그 "마음이 피를 흘릴 정도로 찢어졌다"고 표현했다. 아들을 남기고 떠나는 동거녀 역시 다시는 다른 남자를 일절 만나지 않겠노라고 신에게 맹세하였다. 이 동거녀의 종교가 무엇이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때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를 떠난 후  몇 해가 지난 다음이었고 또 그가 당시 기독교 입문자 자격이었으므로, 맹세의 대상이 기독교의 신이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는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적으로 방탕했는가?




§ 두번째 동거 (30세 경)

이제 세번째 일화를 살펴보자.

사실 "방탕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제서야 아주 잠깐 등장한다. 이 무렵 그는 서른 즈음의 나이였다. 11세 약혼녀와 약혼절차도 마무리 되고, 또 사랑하던 동거녀와 눈물의 이별을 마친 아우구스티누스 였지만, 새 약혼자와의 결혼까지 2년을 기다리지 못하고 다른 여자와 두번째 동거를 시작한다. 아우구스티누스 본인의 참회처럼 자신은 자신이 버린 첫번째 동거녀 보다 훨씬 못난 인간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성적으로 방탕한 아우구스티누스"란 이 무렵에 해당한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아직 기독교 세례를 받기 전이었다.

두번째 동거가 얼마나 지속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도 아주 일시적인 충동적인 동거였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행동에 강한 죄책감을 느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전 혼담을 취소했다. 이후에도 약 3년 간 플라톤주의와 기독교 사이에서 저울질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로의 완전한 회심을 하고 AD 387년 부활절 주일, 아들 아데오다투스 및 친구들과 함께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아울러 평생 독신으로 살기로 결심하는데, 아마도 모니카는 이번에는 아들의 뜻을 존중해 준 듯 하다.

다음 해 아들 및 어머니와 함께 로마의 항구 오스티아에서 고향인 북아프리카로 돌아가는 길에 어머니 모니카가 오스티아에서 열병으로 별세했다. 고향에 돌아가서 한동안 가문의 영지에서 부유하게 살던 가운데 아들인 아데오다투스도 죽었다. 남은 가족없이 혼자가 된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유일하게 남긴 재산인 집을 개조해 친구들과 수도공동체를 만들어 저술에 몰두하다가 나중에 사제로 임명되었다.

아우구스투스와 13년을 살았던 첫번째 여인의 후일담은 분명치 않다. 고향으로 돌아간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여인과 다시 조우했는지도 알 수 없다.

{고백록} 속에서 신(과 독자)에게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고 있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첫 여인과의 13년 간의 동거가 "죄"가 아니었다고까지는 굳이 변명하지 않는다. 그는 요절한 아데오다투스의 총명과 미덕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구절에서도조차 이 아들을 "죄로 인해 낳은 아들"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그가 그 여인과 아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었다는 점만은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 정리: 과장을 통한 성인공경

이상의 이야기를 통해 볼때, 아우구스티누스는 분명 그 무명의 카르타고 여인과 16세의 나이로 요절한 아들 아데오다투스를 극진히 사랑했다는 것을 의심할 나위 없으며, 따라서 소위 "방탕한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세간의 잘못된 인식은 교정되어야 한다.

AD 4세기 말 살라미스 주교 에피파니우스가 "성인공경"에 대해 따끔하게 언질했던 것 처럼, 위인들을 드높이기 위해 그 삶을 과장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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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tist. Husband. Daddy. --- TOLLE. 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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