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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tist. Husband. Daddy. --- TOLLE. 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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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혁명과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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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Kwangmin Choi, 2008-03-20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제목

혁명과 오해

순서
  1. 미륵의 배꼽
  2. 바스티유
  3. 베르사이유

{선운사}란 시가 있다.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한참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하지만 시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1. 미륵의 배꼽

"모든" 혁명이 무언가 심오하고 웅혼한 이데올로기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대체로 역사를 큰 시간축에서 볼 줄 모르는 사람이거나 혹은 왜곡하려는 사람이라 단언할 수 있다. 

혁명의 시발이 되는 봉기가 초기에 진압당하지 않고 본 궤도에 오르게 되면, 그제서야 이데올로기가 혁명에 색조를 입히고 혁명을 지속하거나 가속하거나 방향을 제시할 추진제로 등장한다. 그후 혁명이 크게 성공하거나 비극적으로 실패하고 난후 역사는 거기에 "xx 대혁명"이라느니 "xx 운동"이라느니 하는 거대한 의미와 이름을 부여한다.  

그러나 혁명의 계기가 되는 기폭제는 대개 그런 고매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가령, 동학농민전쟁은 선운사 도솔암에 있는 마애석불의 복장/腹藏, 즉 배 안에 숨겨져있(다)는 비결을 전라도 동학접주 손화중과 동학도인들이 꺼내서 보았다는 소문을 듣고 흥분한 각 지역의 동학교도들이, 정체조차 불분명한 이 '비결'을 눈으로 보겠다는 열망으로 몰려들게 되는 종말론적 미륵신앙의 해프닝에서 출발했다. 

물론 이 사건이 동학농민전쟁 발발원인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동학전쟁은 최제우의 처형에서 비롯된 교조신원운동과 수탈 당하던 농민들의 분노가 겹쳐 언제든 폭발할 상황이기는 했다. 계기가 무엇이 될지만 달린 상황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전설은 조선 말인 {춘산채지가/春山採芝歌}란 예언서를 썼다고 알려진 이서구(李書九)가 1787년 전라도 감찰사로 부임하면서 시작한다. 이서구가 부임하고 며칠이 지났을 때, 선운사 마애불 쪽에서 큰 기운이 뻗치는 것을 느낀 이서구는 호기심에 이끌려 미륵불 쪽에 갔다가 그 복장에서 문제의 비결서를 꺼내게 되었다 한다. 백제 위덕왕 24년(AD 577년)에 선운사(禪雲寺)선운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는 검단대사 (檢丹大師)가 남겼다는 비결서 말이다.


선운사 마애석불과 복장


도솔암 마애불상의 배꼽에 미래를 예견한 비결을 숨기면서 검단대사가 거기에 벼락살을 묻어놓았고, 따라서 비결을 도굴하려는 자는 벼락에 맞아 죽는다는 전설이 있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비결의 첫 장을 막 펼쳐보는 순간 맑은 하늘에서 천둥벼락이 치기에 두려움을 느낀 이서구는 그 비결을 마애불의 복장에 다시 되돌려 놓으면서 대신 그 첫 장에 “전라감사 이서구가 억지로 열다 (全羅監司 李書九 開坼)”라는 문구를 적었다고 한다.

그 뒤, 전라도 고부의 동학교도 사이에서는 “미륵의 배꼽 속에 신기한 비결이 들어 있는데 그 비결이 나오는 날 한양이 망한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고, 바야흐로 동학의 정읍대접주인 손화중(孫華仲)은 1892년 (고종 29) 8월, 이상향을 서둘러 이룩하기 위해 미륵의 복장 속에 있다는 비기가 필수적이므로 당장 열어봐야 한다며 동학 지도부 회의인 접중 (接中)에서 결의한다. 결의에 따라 300여 명의 동학도가 도솔암으로 올라가, 청죽 수백 개와 새끼줄 수천 다발로 임시다리를 만들어 암벽을 타고 올라가 마애불 배꼽에서 이서구가 보았다는 비결문서를 꺼냈다는 것이 두번째 전설이다. 

물론 손화중이 미륵의 배꼽에서 꺼냈다는 비결을 당시에 본 사람도 없고, 그 내용의 인용도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분명치 않다. 선운사 마애석불의 사각형 배꼽이 실제로 개폐가 가능한 구조인지도 알수 없다.

전설은 다시 이어진다. 

손화중과 이 일행이 꺼내봤다는 이 비결 속에 "조선 개국 500년 후 미륵석불의 복장을 여는 자가 있을 것이며, 그 비결이 세상에 나오면 조선은 망하고 다시 새롭게 흥할 것"이란 내용이 적혀있다는 소문이 떠돌자, 전북의 동부 일대에서 동학교세가 급격히 수 만명으로 불어났으며, 이에 따라 한양의 조정도 극도로 민감해졌다.  

아무튼 동학농민전쟁은 의도한 것이든, 의도하지 않은 것이든 이런 일종의 '오해'로부터 개시되었다.




2. 바스티유

혁명의 동기는 다양하다. 그러나 경제적 요인이 아마도 거의 모든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듯 싶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은 대체로 현 체제에서 직접적으로 소외된 불만세력이 압도적으로 혁명의 전위에 뛰어들어야 탄력을 받기 때문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초반에는 앙시엥 레짐에 허덕이던 농민과 특별히 도시노동자/빈민들인 상-퀼로트의 역할이 초반에 두드러진다. 루이 16세-마리 앙트와네트의 시절에 프랑스는 이어지는 흉작과 경제계획 실패에서 초래된 인플레이션으로 허덕이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급료의 50%를 식비에 지출해야 했던 상-퀼로트 계층의 불만은 당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었다.

1789년 7월 14일, 카미유 데물렝(Camille Desmoulins, 1760-1794)은 상-퀼로트로 구성된 민병대를 조직해 부르봉 왕정에 반대하는 정치범을 수용하고 있다고 '믿어져 온' 바스티유 감옥으로 진격한다. 이 믿음에 따르자면 혁명의 첫 제물로서는 최고의 상징성이 있기는 했다. (물론 바스티유 사건은 돌발사건이 아니라 6월 말부터 전국으로 번지던 폭동을 배경을 깔고 있다.)

문제는 그곳에 정치범은 없었다는 점이다. 대신 그곳에는 그 유명한 사드 후작이 있었다. '최음제' 과실치사 및 미성년자 추행혐의로 사형을 언도받고 1777년에 체포되어 뱅센의 지하감방에 수감 중이다가, 1784년 2월 27일에 바스티유로 이송된 상태였다. 바스티유 습격 며칠 전, 사드는 창문을 통해 "놈들이 죄수들을 학살하고 있다. 빨리 와서 죄수들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외쳤고, 이것은 혁명가들에게 바스티유 공격의 정당성을 고취시켜 주었지만, 당시 바스티유에는 단 7명의 죄수만 수감 중이었고, 사드를 포함한 전원은 정치범이기는 커녕 잡범들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된 혁명가들이 나머지 6명에 대해서는 어떤 처우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중에 사드는 정신병동으로 이송되었다.


Marquis de Sade (출처: Wikimedia Commons)




3. 베르사이유

장-자크 루소가 1768년에 쓴 {고백록}에는 "S'il ait aucun , donnez-leur la croûte au loin du pâté (빵/pain이 없으면, 빠떼/pâté를 줘라)"라고 일갈한 거만한 익명의 '왕비'가 등장한다. 그의 시대를 고려해 볼때, 이 여자는 루이 14세의 첫 왕비인 에스파니아 출신의 마리아 테레사일 것으로 역사가들은 본다. (마리 앙트와네트의 어머니인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사와는 동명이인).

프랑스 혁명이 왕정폐지의 단계 접어들 무렵, 마리 앙트와네트가 했다는 어떤 말이 파리 시민들을 극도로 진노하게 만들었다. 전해지는 말인 즉, 왕비가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굶주림을 호소하러 온 빈민을 보며 "Qu’ils mangent de la brioche/(빵이 없으면) 브리오슈/brioche를 먹으라고 해"라는 경멸조의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여러가지 다른 버전들이 존재하며, 이 말이 실제로 그녀의 말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설령 했다손 치더라도, 마리 앙트와네트에게 동정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불리한 해석도 있다. 아마도 이 발언의 진위는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Archduchess Maria Antonia of Austria, the later Queen Marie Antoinette of France, daughter of Empress Maria Theresia of Austria and Holy Roman Emperor Franz I. Stephan of Lorraine (출처: Wikimedia Commons)

(그러나 서민의 생필품인) 빵/pain과, 거위간을 갈아넣어 만든 빠떼/pâté와, 버터와 달걀을 많이 넣어 과자처럼 만든 브리오슈/brioche와의 차이를 먼저 이해해야 파리시민들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pain, pâté, brioche, 내게는 모두 같은 빵 종류에 불과하나, 당시의 생필품이었던 pain이 아닌 다소 별미에 속하는 pâté나 brioche를 빈민에게 주라는 말이, pain의 공급부족과 인플레이션으로 계속 "고통"받아온 상-퀼로트 계급과 농민들에게 분노를 촉발했을 지 모른다.

물론 마리 앙트와네트가 (정확히 위의 말은 아니라고 해도) 저 말을 실제로 했을 가능성도 있다. 꼭 악의에서가 아니라 선의에서 말이다. 빵이 없으면 브리오슈든 빠떼든 마리 앙트와네트는 먹었을 테니까.

"이 모든 것은 오해입니다"라고 마리 앙트와네트가 자신을 변호하긴 너무 늦었다.


허기에 굶주렸든,
증오와 복수에 굶주렸든,

굶주린 사람은 난폭한 법이니까.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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