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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tist. Husband. Daddy. --- TOLLE. 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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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퓌론은 침착했고, 돼지는 잠을 청한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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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2020-11-09

제목

 [© 최광민] 퓌론은 침착했고, 돼지는 잠을 청한 적 없다

순서
  1. ""필론"과 "잠자는 돼지"
  2. 이문열의 "필론"과 엘리스의 "퓌론"
  3. "퓌론"과 "밥먹던 돼지"

# "필론"과 "잠자는" "돼지"

오늘 자 {조선일보}의 칼럼인 [태평로]에서 현 문재인 정부 장관들의 정책난맥상을 "질타"하는 {장관님들, 차라리 현자 ‘필론’처럼 푹 주무세요} (2020-11-09)를 읽다가 피식 웃었다.


이 칼럼에서 필자는 이렇게 적는다.

"....그도 아니라면 고대 그리스의 현자(賢者) 필론을 따라 하면 어떨까. 하루는 필론이 배를 타고 여행하다 큰 폭풍우를 만났다. 모두 우왕좌왕하면서 배는 아수라장이 됐다. 필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지만, 도무지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갑판 밑 짐칸에서 돼지 한 마리가 편안하게 자고 있는 것을 보게 됐다. 이야기의 끝은 이렇다. “결국 필론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돼지 흉내를 내는 것뿐이었다.” 턱없이 분란 만들고, 엉뚱한 정책으로 시장 휘젓지 말고 좀 조용히 주무시는 것도 한 방법이라 말씀드린다..... / 이진석 조선일보 사회정책부장 "

이 칼럼에서 "필론"은 난리 중에 우왕좌왕하다 결국 돼지흉내나 낼 수 밖에 없었던 애처롭고 다소 희극적인 고대 그리스의 현자로 등장한다.

그런데.... 

필론? 
돼지? 
흉내?




비슷한 내용을 예전에 {중앙일보} 칼럼에서도 몇번 읽은 적이 있다. 다음 칼럼을 읽어보자.
 

정확하게 같은 내용이고, 인용된 동일한 일화는 이번에는 이명박 정부의 중앙은행 정책을 비판하는데 쓰였다. 

“필론이 한번은 배를 타고 여행을 했다. 배가 바다 가운데서 큰 폭풍우를 만나자 사람들은 우왕좌왕 배 안은 곧 아수라장이 됐다. 필론은 현자인 자기가 거기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도무지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배 선창에는 돼지 한 마리가 편안하게 자고 있었다. 결국 필론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돼지의 흉내를 내는 것뿐이었다.” 나는 필론의 돼지가 되고 싶지 않다.... / 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여기서 "나는 필론의 돼지가 되고 싶지 않다"는 필자의 선언은 부도덕한 권력과 불합리에 맞서지 못하는 비겁한 필부가 되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또 그런가하면 {중앙일보}에 실린 다른 칼럼을 읽어보자.


이 칼럼에서 문기석씨의 "필론"은 군 일탈문제의 수동적 피해자이자 수동적 방관자를 지칭하며, 준엄하게 비판당한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제대군인에 대한 대접은 그야말로 입대부터 제대가 당연하듯이 받아진다. 다른 선진국에서 군이 신뢰할 수 있는 기관이지만 우리 군은 아직도 짚차, 권총, 건빵 도둑놈들이 활개치고 있다. 거기에 가혹 행위, 성추행까지 곁들여지는 현실이다. 국민 모두가 이런 군의 일탈에 필론이 안 되려면 군 조직부터 혁신되어야 한다. 그래야 국민이 이 나라를 지켜가는 군인들의 자리에 다시한번 생각할 수 있다...."   / 문기석 중부일보 논설실장

이 칼럼에 언급되어 있듯, 위에 언급한 세 칼럼에 등장하는 소위 "필론"과 "돼지" 이야기는 이문열의 소설 {필론의 돼지}에서 인용된 것이다. 

".....필론은 AD 100~200년 안에 출생한 유대인 철학자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인물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 이 필론의 이름을 달아 소설가 이문열은 1989년에 ‘필론의 돼지’ 라는 다소 뭉클하며 마치 계란 노란자를 막 마신 듯한 비릿한 내음의 단편 소설을 발표한다. 얼마나 많이 읽혔을까. 지금도 돼지는 곧 필론과 영화속 ‘우물에 빠진 돼지’로 회자될 정도다. 우선 내용은 이렇다. 필론이 배를 타고 바다를 여행할 때에 큰 폭풍우를 만나 배안은 아수라장이 된다. 그러자 그 안에서 기도하는 사람,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살려고 뗏목을 엮는 사람등 다양한 행동을 하게 된다. 하지만 필론은 사람들의 동요와는 상관없이 편안하게 잠을 자는 돼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필론은 곧 이 돼지를 흉내 낸다. ... / 문기석 중부일보 논설실장



그리고 과연 이문열은 그 책에서 이렇게 적었다.



필론이 한 번은 배를 타고 여행을 했다. 배가 큰 폭풍우를 만나자 사람들은 우왕좌왕 배안은 곧 아수라장이 되었다. 울부짖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뗏목을 엮는 사람, 필론은 현자(賢者)인 자기가 거기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도무지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배 선창에는 돼지 한 마리가 사람들의 소동에는 아랑곳 없이 편안하게 잠자고 있었다. 결국 필론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돼지의 흉내를 내는 것뿐이었다  --- 이문열, {필론의 돼지}

여기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  

물론.

원전내용의 확인없이 반복되는 인용이 어떻게 엉뚱하게 진화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원전과 비교검증 없이 유포되는 사례를, 

나는 종종 "원전사태"라 부르곤 한다. 




# 필론? 퓌론!

우선 문기석 논설실장의 칼럼에는 이문열의 글에도 등장하지 않는 내용이 첫머리부터 등장한다. 

이문열은 그의 책에서 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를 "필론"이라고 표기했는데, 사실 이문열이 말하고자 한 사람은 "필론 Φίλων"이 아니라 엘리스의 "퓌론 Πύρρων ὁ Ἠλεῖος"이다. 이 퓌론은 BC 2-3세기 인물이지 AD 100-200년에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Pyrrho(n)나 Philo(n) 은 이문열이 해당 소설을 발표하던 시절의 "혼란스럽던" 외래어 표기법으론 아마 '피론' 혹은 '필론'이 될 수도 있었을 듯 하다. 아무튼 모든 오해는 이 표기법에서 시작된다.

물론 철학자 "필론"도 철학사에 등장하지만, 이 "필론"은 예수와 거의 동시대인으로 BC 1세기 후반기에 태어나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유대인" 플라톤 철학자일 수 밖에 없다. 필론이란 이름을 가진 고대의 철학자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밖에 없기 때문. 게다가 그의 몇몇 저작은 현재까지 남아있고 특별히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사회에서의 그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서는 AD 1세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가 쓴 기록에 남아있다. 

그러니 "필론은 AD 100~200년 안에 출생한 유대인 철학자다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인물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라는 문기석씨의 탄식은 이중으로 틀렸다. 이문열이 "퓌론"을 "필론"으로 쓴 사람을 다시 "유대인 필론"으로 오인한데 이어 거기다가 자신의 잘못 수집한 정보까지 추가해 버린 셈. 뱀장어를 뱀으로 착각한 후, 거기에 다리까지 그려넣은 셈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문열의 글 자체가 이미 잘못된 내용과 암시를 담고 있다. 

왜?

물론 그리스 철학자 퓌론이 폭풍우 가운데 배를 탄 것도 사실이고, 그 배에 돼지가 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돼지는 잠을 잔 적이 없고
퓌론이 돼지를 흉내낸 적도 없다.

도대체 이문열은 이런 퓌론의 일화를 도대체 어디에서 잘못 옮긴 것일까?




# "퓌론"과 "밥먹던 돼지"

"퓌론의 돼지" 이야기를 후대에 가장 널리 알린 사람은 16세기 사상가이자 수필가인 미쉘 드 몽테뉴였는데, 그는 자신의 유명 수필집인 {수상록}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문열 버전의 이 "필론" 이야기는 아마도 몽테뉴 버전의 "퓌론"에서 잘못 옮겨진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럼 몽테뉴가 어떻게 적었는지 보자.

The philosopher Pyrrho* happened to be aboard ship during a mighty storm; to those about him whom he saw most terrified he pointed out an exemplary pig, quite unconcerned with the storm; he encouraged them to imitate it. --- Michel Eyquem de Montaigne {Essais} Book 1, ch. 14,

철학자 퓌론이 한번은 폭풍 와중에 배를 탄 적이 있다. 그 주변에서 가장 겁에 질린 사람을 보고, 퓌론은 폭풍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는 돼지 한마리를 찍어서 가리키며 사람들에게 그 돼지를 본받으라고 말했다. -- 미쉘 드 몽테뉴, {수상록} 1권 14장 / 번역: 최광민 

 Dare we conclude that the benefit of reason (which we praise so highly & on account of which we esteem ourselves to be lords & masters of all creation) was placed in us for our torment ? What use is knowledge if, for its sake, we lose the calm & repose which we would enjoy without it & if it makes our condition worse than that of Pyrrho's pig ? Intelligence was given us for our greater good: shall we use it to bring about our downfall by fighting against the design of Nature & the order of the Universe, which require each creature to use its faculties & resources for its advantage ? --- Michel Eyquem de Montaigne {Essais} Book 1, ch. 14,

우리는 (우리가 그리고 높이 찬양하며, 또 스스로를 모든 피조물의 지배자이자 주인으로 여기게 하는) 이성을 우리가 고통을 받을 때에도 발휘한다고 감히 결론을 지을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이성 없이도 즐기는 평정과 안식을 잃는다면, 이성이 퓌론의 돼지만도 못한 상태로 우리를 몰아넣는다면 지식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지성은 더 나은 것을 위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개개 피조물들이 각자를 위해 그 능력과 자원을 사용하는데 요구되는 자연의 설계와 우주에 질서에 저항하며 우리의 몰락을 가져오는데 지성을 사용해야 할까? -- 미쉘 드 몽테뉴, {수상록} 1권 14장 / 번역: 최광민

이문열의 글에 등장하는 "필론"는 폭풍우에 난장판에 된 선상에서 뭘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못하고 우왕좌왕 하던 인물이다. 하지만 몽테뉴의 글에 등장하는 "퓌론"은 최소한 자신이 사람들에게 뭘 충고해 줘야할지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럼 퓌론이 가리킨 그 돼지는 폭풍우 속에서 뭘하고 있었던 걸까? 이문열이 전한 내용처럼 거기서 "편안하게 자"고 있었고, 퓌론은 마지못해 그 돼지를 흉내내어 잠이라도 잤던걸까?

물론 아니다. 

몽테뉴는 아예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몽테뉴의 그 돼지는 "폭풍 따위는 신경도 쓰고 있지 않았을 뿐"이다. 그럼 그 돼지는 도대체 뭘하고 있었던 걸까?




AD 3세기의 그리스 전기작가인 디오게네스 레르티오스는 BC 1/2세기에 활동한 그리스 출신 스토아 철학자인 포세이도니오스의 말을 빌어 이 일화를 전한다. 현재 전해지는 "퓌론의 돼지" 일화의 원전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68 Posidonius, too, relates of him a story of this sort. When his fellow-passengers on board a ship were all unnerved by a storm, he kept calm and confident, pointing to a little pig in the ship that went on eating, and telling them that such was the unperturbed state in which the wise man should keep himself. --- Diogenes Laërtius, {Lives of the Eminent Philosophers} Book IX, Chapter 11

포세이도니오스 역시 이런 종류의 일화를 전한다: 그 (=퓌론)와 함께 배에 탄 사람들이 폭풍에 모두 두려워하고 있을 때에도 그는 평정과 당당함을 유지했는데, 배에서 계속 먹이를 먹고 있던 작은 돼지를 가리키며 저것이 바로 현자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부동의 자세라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 디오게네스 레르티오스, {저명한 철학자들의 삶 -- 퓌론 편} 2권 11장, 번역: 최광민

이문열이  "....필론은 현자(賢者)인 자기가 거기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도무지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라고 했으나, 정작 원전에서의 퓌론은 철학자적 평정과 당당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울러 돼지는 잠들기는 커녕 (자신의 본분/본능에 따라) 열심히 밥을 먹고 있었다. 즉 본능 및 본분에 충실했을 따름이다. 퓌론의 원래 취지는 아주 간단하다. 몽테뉴 처럼 이성과 본능을 대비한 것도 아니다.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 초연하라는 것이다. 그는 이미 이 철학에 따라 선악과 미래에 대한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내키는 대로" 살다가 세상을 떠난 인물로 기록에 남았다. 

정작 원전에서의 퓌론은 폭풍우 속의 배에서 자신이 사람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줘야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때 마침 먹이를 먹고 있던 돼지는 퓌론의 철학을 사람들에게 설명할 좋은 예였을 뿐이다. 퓌론이 돼지를 따라 잠들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철학자 퓌론의 철학에 대해서 디오니소스 레르티오스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해 놓았다. 이전 글에서 발췌한다.


Diogenes Laertius Lives Of Eminent Philosophers II: 6 10, https://archive.org/details/L184DiogenesLaertiusLivesOfEminentPhilosophersII610

[61] Pyrrho of Elis was the son of Pleistarchus, as Diocles relates. According to Apollodorus in his Chronology, he was first a painter ; then he studied under Stilpo's son Bryson1: thus Alexander in his Successions of Philosophers. Afterwards he joined Anaxarchus, whom he accompanied on his travels everywhere so that he even forgathered with the Indian Gymnosophists and with the Magi. This led him to adopt a most noble philosophy, to quote Ascanius of Abdera, taking the form of agnosticism and suspension of judgement. He denied that anything was honourable or dishonourable, just or unjust.2 And so, universally, he held that there is nothing really existent, but custom and convention govern human action ; for no single thing is in itself any more this than that. [62] He led a life consistent with this doctrine, going out of his way for nothing, taking no precaution, but facing all risks as they came, whether carts, precipices, dogs or what not, and, generally, leaving nothing to the arbitrament of the senses ; but he was kept out of harm's way by his friends who, as Antigonus of Carystus tells us, used to follow close after him. But Aenesidemus says that it was only his philosophy that was based upon suspension of judgement, and that he did not lack foresight in his everyday acts. He lived to be nearly ninety. --- Lives of Eminent Philosophers. Diogenes Laertius. R.D. Hick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2, Book9, Chapter11, 61-62 

[61]디오클레스에 따르면, 엘리스의 퓌론은 프레이스타르코스의 아들이었다. 아폴로도로스의 {연대기}에 따르지만, 그는 처음에는 화공이었는데, 후에 스틸포스의 아들인 브뤼손 밑에서 공부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책 {철학자 계보}에서 또 그렇게 전한다. 이후 그는 아낙사르코스 학파에 합류하여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나 따라갔는데, 심지어 멀리 인도의 나체철학자들과 (페르시아의) 마기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퓌론은 가장 고귀한 철학을 수용하게 되었는데, 압데라의 아스카니오스를 인용하자면, 그의 철학은 불가지론과 판단보류를 취하는 형식이었다고 한다. 그는 어떤 대상이 고상하다거나 저급하다라거나, 혹은 정의롭다다거나 불의하다거나라는 판단을 거부했다. 일반적으로 말해, 그는 실재하는 것은 없으며, 인간의 행동은 문화와 합의된 원칙에 따라 지배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그 자체 만으로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62] 그는 이 원리에 따라 살았으며,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살았고, 미래에 대한 어떤 염려도 하지 않아 오는 위험은 그대로 맞이했으며.....[중략]....하지만 에네시데모스에 따른다면, 그의 철학은 다만 판단보류에 기초했을 뿐이며 그가 일상생활 속에서조차 아무런 예측도 하지 않고 산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거의 90세까지 살았다.  --- 디오게네스 레르티오스, {저명한 철학자들의 삶} / 번역: 최광민

다시 이문열을 인용한다.




필론이 한 번은 배를 타고 여행을 했다. 배가 큰 폭풍우를 만나자 사람들은 우왕좌왕 배안은 곧 아수라장이 되었다. 울부짖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뗏목을 엮는 사람, 필론은 현자(賢者)인 자기가 거기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도무지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배 선창에는 돼지 한 마리가 사람들의 소동에는 아랑곳 없이 편안하게 잠자고 있었다. 결국 필론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돼지의 흉내를 내는 것뿐이었다  --- 이문열, {필론의 돼지}

위에 언급한 한 칼럼에서 언급된 것 처럼 소설가 이문열이 1989년에 이 "다소 뭉클하며 마치 계란 노란자를 막 마신 듯한 비릿한 내음의 단편 소설을 발표한" 후로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이 읽혔을까. 지금도 돼지는 곧 필론과 영화속 ‘우물에 빠진 돼지’로 회자될 정도"라니 말이다. "필론의 돼지"와 "홍상수의 돼지"가 문화/예술계의 대표돼지가 되었다는 건 또 무슨 말일까?

아무튼 1989년 이후로 이 책을 통해서 퓌론과 그의 돼지 이야기를 접한 사람들은, 아마도 이문열의 오류를 계속 복사하며 전파했을 것이고 결국 원전과는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하는 셈이다. 이문열의 돼지는 현실을 '도피'하고 잠들어 있고, 그의 퓌론은 가혹한 현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돼지처럼 현실을 '도피'하는 인물로 그려져 있기 때문.

왜곡하기는 참 쉬워도, 
교정하기는 참 어렵다.

그야말로 '원전사태'. 

부디 이제라도 
퓌론과 그 돼지의 훼손당한 명예가
회복될 수 있기를 빌어본다.


최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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