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04-12-03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글들에 대해 저자의 동의없는 전문복제/배포 -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를 금하며, 인용 시 글의 URL 링크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 최광민] 예수 vs. 예수 #6: 사람의 아들(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신의 아들 (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
순서
© 최광민, Kwangmin Choi, 2004-12-03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글들에 대해 저자의 동의없는 전문복제/배포 -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를 금하며, 인용 시 글의 URL 링크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 최광민] 예수 vs. 예수 #6: 사람의 아들(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신의 아들 (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
순서
- 도입
- 역사적 예수
- 원전(原典)으로
- σὺ εἶπας / λέγεις: 그것은 네 말이다?
- 예수 vs 가야파
- 예수 vs 빌라도
- 사람의 아들(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과 신의 아들 (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
- 텍스트, 컨텍스트
- 사람의 아들: 히브리 정경 {다니엘}, 위경 {에녹서},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 맺음말: 다시 원전으로
살바도르 달리, {Christ of Saint John of the Cross}, 1951년 -- Wikimedia Commons
§ 도입
어제 김정란 교수가 정치토론싸이트인 {데일리 서프라이즈}와 개혁성향 기독교 뉴스매체인 {뉴스앤조이}에 기고했다는 2004년 11월 22일 자 칼럼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먼저 아래 글을 읽어보자.
http://www.quakerseoul.org/jboard/?p=detail&code=board1&id=3117&page=43
거침없고 시원한 글이다. 하지만....
......그것은 네 말이다?
§ 역사적 예수
예수의 정체성을 두고 여러 가설들이 분분하다.
가령,
혹은,
혹은,
혹은,
혹은,
기타등등.
위에 언급된 주장들은 높은 수준부터 낮은 수준까지의 다양한 학자들과 작가들의 온갖 수준의 저작들에 등장해온 주장들을 일부만 추려 적은 것이다. 이 모든 묘사가 한 인물에 대한 것일 수는 없을 터이니, 도대체 역사에 존재했던 예수는 이 가운데 누구란 말인가? 학자들과 작가들이란 안그래도 번잡한 세상을 더 번잡하게 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이 복마전에 요새는 “빨갱이”라는 해석까지 가세했다.
이런 해석성향은, 사실상 서구 중세역사에서 농민/도시빈곤층과 귀족의 경제적 갈등이 심화될 때 농민봉기 혹은 여러 이단운동(중립적 의미에서)을 조직화/정당화 할 수 있었던 주된 근거이기도 했다. 이런 경향은 보통 (수도사 존 불이 말한 것으로 알려진) 서기 14세기 영국의 대표적 농민전쟁이었던 와트 타일러난의 구호 “아담과 이브가 길쌈할때, 귀족과 농노는 어디에 있었는가?” 에서처럼 원시공산주의에 대한 동경으로 배출되었고, 예수를 죽인 바로 그 서기 1세기 유대아의 기득권층과 그들 시대의 기득권층을 오버랩시켰다. 즉, 예수는 “기득권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는 것이 그 골자다.
서기 19세기부터 다양한 형태의 사회주의가 발전되어나가는 과정에서 예수는 이보다 조금 더 “정치적” 색채를 가지게 되었다. 이제 예수는 이제 기득권자에 의해 그저 억울한 “죽임”을 당한 것 일뿐 아니라 비운의 “혁명가”였다. 예수의 적이 로마 정치권력 혹은 유대아의 종교권력이었다는 상정은 결과적으로는 1950년대 이후 해방신학의 기본설정이 되었다. 아마도 예수의 수난을 그린 이탈리아 감독 파졸리니의 영화에 등장하는 “사회주의적” 예수는, 이미 서구문화의 의식 속에 너무나 깊게 뿌리박힌 예수를 도저히 축출해 낼 수 없었던, 그래서 예수에게 다소 간 온정적이었던 서구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어떻게 예수를 탈종교적이고 정치적으로 리모델링하고 싶어했는가를 보여주는 한 예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나도 한때 예수에 대한 그런 현대적 해석들 - 특별히 사회의 불의에 분노하고 억압받는 자의 "해방"을 부르짖는 "풍운아 예수"의 이미지에 경도된 적 있었다. 또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에 등장하는 식의 "너무나 인간적인" 예수의 이미지도 상당한 매력이 있었다. 카잔차키스의 소설을 읽는 내내 이 소설이 '불경스럽다'고 느끼지 않은 사람이거나, 혹은 이 소설 속에서 마지못해 십자가에서 죽(어주)는 예수의 마지막 장면("테텔레스타이")에서 심지어 눈물까지 흘려본 사람이라면 내 말 뜻을 이해할 것이다.
그런데 해를 거듭해 가면서 예수에 관한 새로운 이미지들의 범람에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버전의 예수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실제로 우리가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신약성서}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지 않은가? {신약성서} 밖에서라면 타키투스, 요세푸스 같은 예수로부터 한두 세대 이후의 로마 역사가들에 의해 아주 작은 편린만이 보고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사실 누군가 “예수”에 대해 이야기 한다면, 실제로 그 예수는 {신약성서}, 특별히 {복음서} 라는 텍스트 안에서 우선 읽혀져야만 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예수에 관한 한 {복음서}가 "원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예수에 대해 말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 텍스트 “밖”에서 예수를 말할 뿐, 그 텍스트 “안”으로는 들어가려고는 않는다. 겉돌거나 피상적인 인용으로 만족한다. 혹은 들어가면서도 자신의 선입견을 움켜쥐고 그 틀 안에서 해석을 내리고자 한다. 혹은 텍스트를 배제하고 정황으로 텍스트를 치환시키기도 한다. 말하자면 "의도적으로 오독한다"고나 할까?
김정란 교수가 “맹목적” 친미행태를 보이는 기독교도들을 비판한 것, 타락한 목사들과 교회들에 대해 비판한 것은 한 치의 틀림없이 옳다. 김정란 교수가 사회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고, 불의에 대한 불관용 등을 강조한 것에 대한 점 역시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그 주장을 피력하기 위해서 사용한 비유와 성서의 인용은, (1) 적절하지 않거나, (2) 경우에 따라서는 완전히 틀렸다고 판단되거나, 혹은 (3) 자신의 의도에 맞는 "해석" 하나만을 취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식의 글쓰기는 종종 위험하다. 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른 글을 인용할 경우 그 인용은 늘 정확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인용이 오히려 원래의 글을 전복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원전(原典)으로
나는 기독교도의 가정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유년시절부터 {성서}를 무척 많이 읽었다. 종교적 동기여서라기보다는 내가 살아온 배경과는 매우 달랐던 유라시아 저 끝의 문화와 역사를 말하고 있는 흥미로운 텍스트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역사에 늘 관심이 많고, 그래서 {성서}는 어린 시절의 내게는 종교적 텍스트이기에 앞서 역사적 (혹은 역사에 관한) 텍스트였다. {성서}가 실제 역사를 얼마나 정확히 반영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 일단 접어두도록 하자.
그 중에서 {신약성서}의 첫부분을 장식하는 {복음서}의 독서는 특별한 흥미를 선사했다. 기독교의 성서에서 예수의 행적을 담은 {복음서}는 총 4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은 예수에 대한 저자 나름의 독특한 시각을 제공한다. 특별히 앞의 세 권 ({마태오/마태}, {마르코/마가}, {루가/누가})은 관점의 유사성으로 인해 한 그룹으로 묶일 수 있고, {요한 복음서}는 예수의 어록에 촛점을 맞춘 신학적 해석을 강조하고 있다.
나는 고등학교 무렵부터 한국어 성서번역으로 고어체적이고 문어적인 한국어 {개역}과 함께 한국의 개신교와 로마카톨릭이 함께 번역한 한국어 {공동번역}을 읽기 시작했는데, 특별히 사회부정을 질타하는 (특별히) 소선지서들이 매우 통렬하고 시원스럽게 번역되어있는 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공동번역} 구약성서 번역의 담당자 하나가 문익환 목사였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공동번역}이 지나치게 많은 의역을 사용한다는 점, 따라서 번역자의 언어적 “취향”과 신학적 “해석관점”이 많이 가미될 수 밖에 없다는 점, 그리고 아울러 몇몇 오역이 눈에 띄인다는 점을 알게된 후, 나는 좀더 다양한 (영어)번역들과 원전을 대조하는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기독교가 공인하는 {복음서} 4권은 대체로 동일한 사건을 다루고는 있지만, 동일한 사건의 경우라도 약간씩 다른 묘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혹은 어떤 복음서에 기술된 내용이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4권을 모두 종합적으로 비교해서 읽게되면 어느 복음서에 빠진 세부묘사를 다른 복음서에서 찾을 수 있는 경우가 많고, 따라서 어느 한 복음서만 읽어서는 전체사건의 재구성이 왜곡되어 버리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사실 {복음서}의 몇개 구절, 가령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든지, 혹은 빌라도의 유명한 질문(혹은 빈정거림)인 “진리란 무엇인가?” 같은 말은, 그 자체로는 때때로 의미가 분명치 않다는 점에 학자들은 동의한다. 그래서 그 말이 등장하는 전후문맥, 그것도 4개 {복음서}를 모두 비교/참조해야만 완전한 재구성이 이뤄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종합은 유스티노스의 제자였던 AD 2세기의 타티아노스가 {디아테사론, διὰ τεσσάρων}에서 처음 시도했다.
그럼 이제 그 {복음서} 속으로 들어가보자. 앞서 말한대로, 예수에 대한 진술에 관한 한 {복음서}를 "원전"으로 간주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 σὺ εἶπας / λέγεις = "그것은 네 말이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체포되어 헤롯의 유대의 산헤드린(종교적 자치공의회)에서 대제사장 카이아파스 (이하, 가야파)와 아나스에게 일차취조를 당한 후, 유대아에 주둔한 로마의 프리펙투스 (이하, "총독")였던 폰티우스 빌라도 (이하, "빌라도")에게 보내졌다가, 갈릴리 출신이란 이유로 관할자인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에게 송환된 후, 다시 빌라도에게 보내져 십자가형을 확정받는다.
김정란 교수는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아마도 (기독교도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 인용이야 "복음서에 등장하는 장면"이니 별 문제가 없다고 쉽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그것은 김정란 교수가 칼럼에 인용한 “그것은 네 말이다”라는 문장의 번역문제 혹은 뉘앙스 때문이다.
김정란 교수는 이 말이 빌라도에 대한 예수의 "응수"였다고 이해하고 있고, 또 그런 식으로 칼럼에 썼다. 즉, “그건 (내 말이 아니라) 네가 하는 소리다.”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단 뜻이다. 어린 시절 나도 한동안 김정란 교수와 같은 식으로 이해하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이유는 이 글에 인용된 번역이 성서의 여러가지 한국어 번역 가운데 하나인 {공동번역}에서 사용되는 표현이기 때문일 것이다.
흡사 대제사장 가야파와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한방 날리는 듯한 예수의 멋진 "일갈", “(가야파여 혹은 빌라도여), 그건 네 말이다!”. 내가 {공동번역}을 처음 읽었던 고등학생 시절에도 이 표현은 김정란 교수에게서만큼이나 내게도 무척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강렬한 인상은 잠시.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 번역을 읽으면서 나는 약간 혼란스러웠었다. 그럼 예수는 지금 자기가 메시아라는 것을 부정한 것인가? 예수는 실제로 그렇게 말한 것일까? 혹시 다르게 번역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유감스럽게도 다른 번역본들에서 예수는 이와 정반대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김정란 교수는 아래와 같이 일갈한다.
하지만 예수는 그의 "존재원리"를 화두삼아 가야파/빌라도와 선문답한 것도, 그들의 무지와 미망을 조롱하며 철학적으로 응수한 것도 아니었다.
한때 플라톤 철학을 따르다가 기독교 "철학자"가 된 유스티노스는, 스토아 "철학자"들인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두 아들 베리시무스와 루키우스 등에게 헌정된 {변증} 속에서, 예수는 "철학자가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유스티노스는 AD 166년 저명한 "철학자"이자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치하에 처형당했다.
유스티노스는 왜 "예수는 철학자가 아니다"라고 단언했을까?
그럼 이제 원전을 들여다보자.
§§ 예수 vs. 가야파
빌라도가 예수를 취조하기 직전, 유대인들의 종교적 자치의회였던 산헤드린에서 있었던 취조과정 속에서 예수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빌라도와 예수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정확히 이해하는 단서이다.
4개의 {복음서}에 등장하는 공통적인 내용에 따르자면, 예수는 체포된 후 유대아의 최고자치의결기관인 산헤드린에서 불법재판을 받았다. 유대교 율법에서 (1) 재판정에 원로회의의 정족수가 모이지 않은 경우, (2) 비공개로 야간에 재판이 이뤄지는 경우, (3) 심리시 피고인에게 불리한 증언만 채택되는 경우는 공정성의 결여된 것으로 간주되어 재판 자체가 무효로 규정된다. 그래서 예수가 산헤드린에서 받는 재판은 기소된 내용의 문제에 앞서 이미 절차적으로 불법이었다.
이제 압송된 예수 앞에 여러 증인들이 예수에게 불리한 증언들을 내어 놓는다. 그 중 한가지 예가 유대인들이 성전을 파괴하면 그 성전을 3일 만에 새로 짓겠다고 가르쳤다는 증언, 즉 성전모독죄였다. 그런데 예수는 이런 치명적인 기소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침묵으로 일관한다
왜 예수는 침묵헸는가? 예수가 (김정란 교수의 말처럼) "네가 너의 진정한 말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너는 나의 존재 원리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따라서 나는 너를 너의 무지 안에 던져놓는다고. 깨달음은 네가 너의 진정한 언어를 발견하지 못하는 한, 결코 너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나 예수가 계속 침묵한 것은 아니다. 대제사장의 어떤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예수가 침묵을 깬다. 그의 입을 비로소 열게 만든 질문은 이것이다.
표현은 약간 다르지만 복음서 4권 가운데 요한의 복음서를 제외한 3권에 모두 등장하는 질문이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의 종교적/정치적 관념 속에서 사실 이 질문은 다음의 질문과 같다.
그럼 왜 줄곳 침묵하던 예수는 이 질문에 대해서는 반응을 보인 것인가?
예수에게는 그것만이 응대할 가치있는 질문이었기 때문인 듯 하다. 예수는 이 질문에 대해 아래와 같이 답한 것으로 그리스어 원전은 적고 있다.
그리스어 원전과 두 종류 한국어 번역을 비교해보자.(1) 사람의 아들, (2) 구름, (3) 오른쪽이란 단어에 주의하며 읽어보자.
위의 두 한국어 번역본이 가지는 뉘앙스의 차이를 매우 큰데, 사실상 정반대의 상황을 묘사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전자의 {표준새번역}의 경우, 예수는 대제사장의 질문을 받아치면서 대제사장 가야파의 말을 사실로 "재확인" 혹은 "동의"해주고 있다. 그 반면 후자의 {공동번역}의 경우, 이것은 마치 예수가 가이야의 진술을 자신에 대한 부당한 모함으로 여기고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준다.
그런데 원전의 말은 그냥 "네가 말했다. σὺ εἶπας" 라는 뜻을 가진다. 아울러 이 부분의 말을 "그것은 너의 말이다" 혹은 "그것은 네가 하는 소리다"라는 뜻으로 풀게되면 예수의 진술은 앞뒤가 맞지않게 된다. 왜냐하면 이 진술 바로 직후의 진술에서 예수는 자기가 "사람의 아들", 즉 "메시아"라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사람의 아들 (τὸν 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이 왜 '메시아'를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다루겠다.
{표준새번역} (과 기타 다른 한국어 번역)에서 3개 복음서에 등장하는 이 문장을 모두 “확인” 혹 “동의”의 뉘앙스로 번역한 반면,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공동번역}은 {마태오 복음서}에서만 “부정”의 뉘앙스로 번역하고, 다른 두 복음서에서는 모두 “동의”의 뉘앙스로 번역했다. 근데 이걸 다시 말한다면 해당 부분에 대한 {공동번역}의 번역은 일관성을 결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가령, 동일한 장면을 다루는 다른 복음서의 내용을 보자.
여기서 "네가 ~이냐? / σὺ εἶ......)라고 물은 대제사장 가야파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 "ἐγώ εἰμι / ego eimi"는 그냥 “나다 / I am”이라는 뜻이다. 즉, "나는 (네 말대로) 복된 분의 아들인 그리스도다" 혹은 "나는 (네 말대로) 메시아다"란 뜻이다.
다음 텍스트로 넘어가 보자.
예수의 답은 "ὑμεῖς λέγετε ὅτι ἐγώ εἰμι", 즉, "내가 그러하다고 (ἐγώ εἰμι), 너희가 말했다 (ὑμεῖς λέγετε ὅτι)" 이다. 즉, 그렇게 "법정에서 증언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예수는 자신이 그리스도(ὁ χριστός)이고, 사람의 아들(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이고, 신의 아들(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이라고 명시한 것이다. 이 세 호칭이 하나로 합쳐지면 말할 나위없이 "메시아"를 말한다.
# 신의 오른쪽 자리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면서 자신이 전능한 신의 "오른편"에 앉게 될 것이라고 예수가 말하자, 그를 심문하던 측은 예수에게 "그럼 네가 신의 아들이란 말이냐?"라고 즉시 묻는다. 왜? 예수의 이 말은 그들이 너무나도 잘 아는 다윗의 {시편} 110편에서 원용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편은 당시 유대인들이 도래할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간주한 내용으로, "야훼"가 "주님", 즉 "아도나이"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 도입
어제 김정란 교수가 정치토론싸이트인 {데일리 서프라이즈}와 개혁성향 기독교 뉴스매체인 {뉴스앤조이}에 기고했다는 2004년 11월 22일 자 칼럼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먼저 아래 글을 읽어보자.
http://www.quakerseoul.org/jboard/?p=detail&code=board1&id=3117&page=43
극우기독인에게 고함- “예수도 ‘국가보안법’ 희생자” 당신들은 ‘불온한 반항자’ 예수의 친구가 아니다
- 김정란 (시인, 상지대 교수)
나는 예수쟁이이다. 왜 “크리스찬”이라고 말하지 않고 우정 이런 식의 약간은 자기비하적인 용어를 사용하는지 헤아려주었으면 좋겠다. 한국 기독교는 너무나 가진 자들의 편에 서게 되었다는 생각, 따라서 진실로 예수라고 하는 한 팔레스타인의 지독한 주변인이었던 기독교의 창시자의 정신으로부터 너무나 멀어졌다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주변성을 자기 정체성 안에 통합해 넣는 용어를 일부러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를 비천한 자리에 가져다 놓을 줄 모르는 자는 크리스찬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내가 여전히 예수쟁이라고 생각한다. 그 말은 내가 예수를 깊이 사랑하고 나의 어리석음과 죄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나의 진정한 구원자로 여기고 따른다는 의미이다.
(중략)
극우 기독교인들이여, 대답하라. 대체 예수가 누구였던가. 예수는, 비유적으로 말하면, 바로 당신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빨갱이”였다. 무슨 말이냐고? 예수는 기존의 질서에 전격적으로 반기를 들었던 불온하기 짝이 없는 반항자였다. 그는 당대의 국가보안법 위반자였다. 예수는 국가보안법 때문에 희생되었다. 그는 종교적 의미에서는 당대의 지배계급이었던 유태의 사제들이 설정해놓은 율법의, 그리고 정치적 의미에서는 로마의 위정자들이 지정해놓은 법의 울타리를 파괴한 자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잡혀 죽었다.
그는 인간이 인간인 바가 체제와 제도에 의거하여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신과 막바로 맺는 관계 안에서 구성된다는 것을 가르쳤다. 나는 그가 “나는 신의 아들”이라고 말했을 때, 그가 가르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인간 각자가 “신의 아들”이라는 메시지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본질적 층위에서 전격적으로 제도가 설정한 존재의 개념에 저항할 것을 가르쳤다. 그는 바깥에서 인간을 규정하는 외적 관념과 싸울 것을 명령했다.
그는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깊은 부름 외의 그 무엇에게도 귀기울이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는 자신을 찾아와 “아들”이라고 부르는 마리아를 향해 “누가 당신의 아들이냐?”라고 되물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선지자”라고 “엘리야”라고 부르는 제자들의 명명을 거부하고 “인간의 아들”이라고 명확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한다. 그러나 그 정체성은 “신의 아들”이라는 정체성과 충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선언은, 인간 각자가 인간 각자의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깊은 내면의 부름과의 관계 안에서 “신의 아들”로 격상될 것을 주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의 아들의 자리에서 신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자들이다.
(중략)
예수는 국가보안법의 희생자였다. 그는 체제가 허용하지 않은 사상을 지닌 죄로 죽었다. 예수는 당대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혁명적인 사상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상범으로 잡혀 죽었다. 부활의 도그마는, 나에게는, 예수가 육체적으로 부활했다는 의미보다는, 체제가, 국가보안법이 무서워 웅크리고 있던 비겁한 제자들이 스스로 몸을 일으켜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결단을 내린 전격적인 신앙의 내면화가 이루어진 영적인 기적으로 여겨진다. 예수를 따르던 자들이 스스로 예수가 되기로 한 사건, 인간의, 제도의 아들 딸들이었던 자들이 신의 아들 딸이 되기 위해 몸을 일으킨 것이 나에게는 부활의 기적이다.
이 해석은 예수의 육체적인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은 어느 날 정말로 부활한 예수의 비전을 보았을 것이다. 사람의 인식이 지극한 경지에 다다를 때, 상징은 진실로 육화된 모습으로 한 인간의 내면 안에서 현현한다. 나는 예수의 에피파니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신비 경험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내면적 혁명을 이끌어내었기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 진정으로 제자들이 세상을 향해 떠나기 시작했던 일은 오순절, 즉 성령이 바람처럼 임하여 제자들의 혀를 강타했던 언어의 도래와 함께 일어났다. 따라서 오순절의 기적은 제자들 각자가 내면 깊은 곳에서 자신의 언어를 발견한 사건이다. 그날 제자들은 예수의 말을 자신의 말로 내면화하면서 스스로 비겁한 겁쟁이의 위상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부활했던 것이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면 적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예수가 살아 돌아온다면, 무엇이라고 말할까?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에 잡혀간 예수는 “네가 왕이냐?”라고 묻는 로마 총독에게 “그것은 네 말이다”라고 응수한다. 그리고 예수는 침묵한다. 채찍질을 당하면서 능멸과 조롱을 당하면서 예수는 그 혹독한 심문 동안 내내 입을 열지 않았다. 예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네가 너의 진정한 말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너는 나의 존재 원리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따라서 나는 너를 너의 무지 안에 던져놓는다고. 깨달음은 네가 너의 진정한 언어를 발견하지 못하는 한, 결코 너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시청 앞에 모여서 세상의 왕인 미국대통령을 향해 찬가를 불러대는 크리스찬들, 인공기를 태우며 사상이 다르다는 한 가지 이유로 동족을 증오하며 어떤 야만적 트랜스 상태에 빠져드는 소위 예수의 신도들을 향해 예수는 다시 그렇게 말할 것 같다.
“그것은 네 말이다.”
거침없고 시원한 글이다. 하지만....
......그것은 네 말이다?
§ 역사적 예수
예수의 정체성을 두고 여러 가설들이 분분하다.
가령,
- 예수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 아니다, 완전한 허구이며 지중해 미스테리아 종교들의 혼성물이다.
- 아니다, 역사적이면서도 신화적인 인물이다.
혹은,
- 예수는 메시아였다.
- 아니다, 사기꾼이었다.
- 아니다, 그저 과대망상가였을 뿐이다.
혹은,
- 예수는 "스스로" 신의 아들이자 메시아라고 했다.
- 아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다.
- 아니다, 바울이 다 지어낸 이야기다.
- 아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다 날조한 이야기다.
혹은,
- 예수는 바리새파 랍비였다.
- 아니다, 엣세네파였다.
- 아니다, 젤롯에 가까운 절충파였다.
- 아니다, 불교도였다.
혹은,
- 예수는 미혼이었다.
- 아니다, 예수는 결혼했었다.
- 아니다, 금욕주의자였다,
- 아니다, 사실은 동성애자였다,
기타등등.
위에 언급된 주장들은 높은 수준부터 낮은 수준까지의 다양한 학자들과 작가들의 온갖 수준의 저작들에 등장해온 주장들을 일부만 추려 적은 것이다. 이 모든 묘사가 한 인물에 대한 것일 수는 없을 터이니, 도대체 역사에 존재했던 예수는 이 가운데 누구란 말인가? 학자들과 작가들이란 안그래도 번잡한 세상을 더 번잡하게 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이 복마전에 요새는 “빨갱이”라는 해석까지 가세했다.
이런 해석성향은, 사실상 서구 중세역사에서 농민/도시빈곤층과 귀족의 경제적 갈등이 심화될 때 농민봉기 혹은 여러 이단운동(중립적 의미에서)을 조직화/정당화 할 수 있었던 주된 근거이기도 했다. 이런 경향은 보통 (수도사 존 불이 말한 것으로 알려진) 서기 14세기 영국의 대표적 농민전쟁이었던 와트 타일러난의 구호 “아담과 이브가 길쌈할때, 귀족과 농노는 어디에 있었는가?” 에서처럼 원시공산주의에 대한 동경으로 배출되었고, 예수를 죽인 바로 그 서기 1세기 유대아의 기득권층과 그들 시대의 기득권층을 오버랩시켰다. 즉, 예수는 “기득권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는 것이 그 골자다.
서기 19세기부터 다양한 형태의 사회주의가 발전되어나가는 과정에서 예수는 이보다 조금 더 “정치적” 색채를 가지게 되었다. 이제 예수는 이제 기득권자에 의해 그저 억울한 “죽임”을 당한 것 일뿐 아니라 비운의 “혁명가”였다. 예수의 적이 로마 정치권력 혹은 유대아의 종교권력이었다는 상정은 결과적으로는 1950년대 이후 해방신학의 기본설정이 되었다. 아마도 예수의 수난을 그린 이탈리아 감독 파졸리니의 영화에 등장하는 “사회주의적” 예수는, 이미 서구문화의 의식 속에 너무나 깊게 뿌리박힌 예수를 도저히 축출해 낼 수 없었던, 그래서 예수에게 다소 간 온정적이었던 서구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어떻게 예수를 탈종교적이고 정치적으로 리모델링하고 싶어했는가를 보여주는 한 예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나도 한때 예수에 대한 그런 현대적 해석들 - 특별히 사회의 불의에 분노하고 억압받는 자의 "해방"을 부르짖는 "풍운아 예수"의 이미지에 경도된 적 있었다. 또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에 등장하는 식의 "너무나 인간적인" 예수의 이미지도 상당한 매력이 있었다. 카잔차키스의 소설을 읽는 내내 이 소설이 '불경스럽다'고 느끼지 않은 사람이거나, 혹은 이 소설 속에서 마지못해 십자가에서 죽(어주)는 예수의 마지막 장면("테텔레스타이")에서 심지어 눈물까지 흘려본 사람이라면 내 말 뜻을 이해할 것이다.
그런데 해를 거듭해 가면서 예수에 관한 새로운 이미지들의 범람에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버전의 예수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실제로 우리가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신약성서}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지 않은가? {신약성서} 밖에서라면 타키투스, 요세푸스 같은 예수로부터 한두 세대 이후의 로마 역사가들에 의해 아주 작은 편린만이 보고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사실 누군가 “예수”에 대해 이야기 한다면, 실제로 그 예수는 {신약성서}, 특별히 {복음서} 라는 텍스트 안에서 우선 읽혀져야만 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예수에 관한 한 {복음서}가 "원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예수에 대해 말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 텍스트 “밖”에서 예수를 말할 뿐, 그 텍스트 “안”으로는 들어가려고는 않는다. 겉돌거나 피상적인 인용으로 만족한다. 혹은 들어가면서도 자신의 선입견을 움켜쥐고 그 틀 안에서 해석을 내리고자 한다. 혹은 텍스트를 배제하고 정황으로 텍스트를 치환시키기도 한다. 말하자면 "의도적으로 오독한다"고나 할까?
김정란 교수가 “맹목적” 친미행태를 보이는 기독교도들을 비판한 것, 타락한 목사들과 교회들에 대해 비판한 것은 한 치의 틀림없이 옳다. 김정란 교수가 사회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고, 불의에 대한 불관용 등을 강조한 것에 대한 점 역시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그 주장을 피력하기 위해서 사용한 비유와 성서의 인용은, (1) 적절하지 않거나, (2) 경우에 따라서는 완전히 틀렸다고 판단되거나, 혹은 (3) 자신의 의도에 맞는 "해석" 하나만을 취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식의 글쓰기는 종종 위험하다. 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른 글을 인용할 경우 그 인용은 늘 정확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인용이 오히려 원래의 글을 전복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원전(原典)으로
나는 기독교도의 가정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유년시절부터 {성서}를 무척 많이 읽었다. 종교적 동기여서라기보다는 내가 살아온 배경과는 매우 달랐던 유라시아 저 끝의 문화와 역사를 말하고 있는 흥미로운 텍스트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역사에 늘 관심이 많고, 그래서 {성서}는 어린 시절의 내게는 종교적 텍스트이기에 앞서 역사적 (혹은 역사에 관한) 텍스트였다. {성서}가 실제 역사를 얼마나 정확히 반영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 일단 접어두도록 하자.
그 중에서 {신약성서}의 첫부분을 장식하는 {복음서}의 독서는 특별한 흥미를 선사했다. 기독교의 성서에서 예수의 행적을 담은 {복음서}는 총 4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은 예수에 대한 저자 나름의 독특한 시각을 제공한다. 특별히 앞의 세 권 ({마태오/마태}, {마르코/마가}, {루가/누가})은 관점의 유사성으로 인해 한 그룹으로 묶일 수 있고, {요한 복음서}는 예수의 어록에 촛점을 맞춘 신학적 해석을 강조하고 있다.
나는 고등학교 무렵부터 한국어 성서번역으로 고어체적이고 문어적인 한국어 {개역}과 함께 한국의 개신교와 로마카톨릭이 함께 번역한 한국어 {공동번역}을 읽기 시작했는데, 특별히 사회부정을 질타하는 (특별히) 소선지서들이 매우 통렬하고 시원스럽게 번역되어있는 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공동번역} 구약성서 번역의 담당자 하나가 문익환 목사였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공동번역}이 지나치게 많은 의역을 사용한다는 점, 따라서 번역자의 언어적 “취향”과 신학적 “해석관점”이 많이 가미될 수 밖에 없다는 점, 그리고 아울러 몇몇 오역이 눈에 띄인다는 점을 알게된 후, 나는 좀더 다양한 (영어)번역들과 원전을 대조하는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기독교가 공인하는 {복음서} 4권은 대체로 동일한 사건을 다루고는 있지만, 동일한 사건의 경우라도 약간씩 다른 묘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혹은 어떤 복음서에 기술된 내용이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4권을 모두 종합적으로 비교해서 읽게되면 어느 복음서에 빠진 세부묘사를 다른 복음서에서 찾을 수 있는 경우가 많고, 따라서 어느 한 복음서만 읽어서는 전체사건의 재구성이 왜곡되어 버리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사실 {복음서}의 몇개 구절, 가령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든지, 혹은 빌라도의 유명한 질문(혹은 빈정거림)인 “진리란 무엇인가?” 같은 말은, 그 자체로는 때때로 의미가 분명치 않다는 점에 학자들은 동의한다. 그래서 그 말이 등장하는 전후문맥, 그것도 4개 {복음서}를 모두 비교/참조해야만 완전한 재구성이 이뤄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종합은 유스티노스의 제자였던 AD 2세기의 타티아노스가 {디아테사론, διὰ τεσσάρων}에서 처음 시도했다.
그럼 이제 그 {복음서} 속으로 들어가보자. 앞서 말한대로, 예수에 대한 진술에 관한 한 {복음서}를 "원전"으로 간주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 σὺ εἶπας / λέγεις = "그것은 네 말이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체포되어 헤롯의 유대의 산헤드린(종교적 자치공의회)에서 대제사장 카이아파스 (이하, 가야파)와 아나스에게 일차취조를 당한 후, 유대아에 주둔한 로마의 프리펙투스 (이하, "총독")였던 폰티우스 빌라도 (이하, "빌라도")에게 보내졌다가, 갈릴리 출신이란 이유로 관할자인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에게 송환된 후, 다시 빌라도에게 보내져 십자가형을 확정받는다.
김정란 교수는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에 잡혀간 예수는 “네가 왕이냐?”라고 묻는 로마 총독에게 “그것은 네 말이다”라고 응수한다….”
아마도 (기독교도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 인용이야 "복음서에 등장하는 장면"이니 별 문제가 없다고 쉽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그것은 김정란 교수가 칼럼에 인용한 “그것은 네 말이다”라는 문장의 번역문제 혹은 뉘앙스 때문이다.
김정란 교수는 이 말이 빌라도에 대한 예수의 "응수"였다고 이해하고 있고, 또 그런 식으로 칼럼에 썼다. 즉, “그건 (내 말이 아니라) 네가 하는 소리다.”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단 뜻이다. 어린 시절 나도 한동안 김정란 교수와 같은 식으로 이해하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이유는 이 글에 인용된 번역이 성서의 여러가지 한국어 번역 가운데 하나인 {공동번역}에서 사용되는 표현이기 때문일 것이다.
흡사 대제사장 가야파와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한방 날리는 듯한 예수의 멋진 "일갈", “(가야파여 혹은 빌라도여), 그건 네 말이다!”. 내가 {공동번역}을 처음 읽었던 고등학생 시절에도 이 표현은 김정란 교수에게서만큼이나 내게도 무척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강렬한 인상은 잠시.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 번역을 읽으면서 나는 약간 혼란스러웠었다. 그럼 예수는 지금 자기가 메시아라는 것을 부정한 것인가? 예수는 실제로 그렇게 말한 것일까? 혹시 다르게 번역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유감스럽게도 다른 번역본들에서 예수는 이와 정반대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김정란 교수는 아래와 같이 일갈한다.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에 잡혀간 예수는 “네가 왕이냐?”라고 묻는 로마 총독에게 “그것은 네 말이다”라고 응수한다. 그리고 예수는 침묵한다. 채찍질을 당하면서 능멸과 조롱을 당하면서 예수는 그 혹독한 심문 동안 내내 입을 열지 않았다. 예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네가 너의 진정한 말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너는 나의 존재 원리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따라서 나는 너를 너의 무지 안에 던져놓는다고. 깨달음은 네가 너의 진정한 언어를 발견하지 못하는 한, 결코 너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예수는 그의 "존재원리"를 화두삼아 가야파/빌라도와 선문답한 것도, 그들의 무지와 미망을 조롱하며 철학적으로 응수한 것도 아니었다.
한때 플라톤 철학을 따르다가 기독교 "철학자"가 된 유스티노스는, 스토아 "철학자"들인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두 아들 베리시무스와 루키우스 등에게 헌정된 {변증} 속에서, 예수는 "철학자가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유스티노스는 AD 166년 저명한 "철학자"이자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치하에 처형당했다.
....the teachings of Christ were short and concise, for he was no philosopher, but his word was the power of God. --- St Justin Martyr: First Apology 14
....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짧고 간단합니다. 그는 철학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신의 권능입니다... --- 유스티노스, {첫번째 변증} 14장 / 번역: 최광민
유스티노스는 왜 "예수는 철학자가 아니다"라고 단언했을까?
그럼 이제 원전을 들여다보자.
§§ 예수 vs. 가야파
빌라도가 예수를 취조하기 직전, 유대인들의 종교적 자치의회였던 산헤드린에서 있었던 취조과정 속에서 예수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빌라도와 예수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정확히 이해하는 단서이다.
4개의 {복음서}에 등장하는 공통적인 내용에 따르자면, 예수는 체포된 후 유대아의 최고자치의결기관인 산헤드린에서 불법재판을 받았다. 유대교 율법에서 (1) 재판정에 원로회의의 정족수가 모이지 않은 경우, (2) 비공개로 야간에 재판이 이뤄지는 경우, (3) 심리시 피고인에게 불리한 증언만 채택되는 경우는 공정성의 결여된 것으로 간주되어 재판 자체가 무효로 규정된다. 그래서 예수가 산헤드린에서 받는 재판은 기소된 내용의 문제에 앞서 이미 절차적으로 불법이었다.
이제 압송된 예수 앞에 여러 증인들이 예수에게 불리한 증언들을 내어 놓는다. 그 중 한가지 예가 유대인들이 성전을 파괴하면 그 성전을 3일 만에 새로 짓겠다고 가르쳤다는 증언, 즉 성전모독죄였다. 그런데 예수는 이런 치명적인 기소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침묵으로 일관한다
왜 예수는 침묵헸는가? 예수가 (김정란 교수의 말처럼) "네가 너의 진정한 말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너는 나의 존재 원리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따라서 나는 너를 너의 무지 안에 던져놓는다고. 깨달음은 네가 너의 진정한 언어를 발견하지 못하는 한, 결코 너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나 예수가 계속 침묵한 것은 아니다. 대제사장의 어떤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예수가 침묵을 깬다. 그의 입을 비로소 열게 만든 질문은 이것이다.
εἰ σὺ εἶ ὁ χριστὸς 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
네가 하나님의 아들 (=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인 메시아/그리스도 (=ὁ χριστὸς)냐?
표현은 약간 다르지만 복음서 4권 가운데 요한의 복음서를 제외한 3권에 모두 등장하는 질문이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의 종교적/정치적 관념 속에서 사실 이 질문은 다음의 질문과 같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럼 왜 줄곳 침묵하던 예수는 이 질문에 대해서는 반응을 보인 것인가?
예수에게는 그것만이 응대할 가치있는 질문이었기 때문인 듯 하다. 예수는 이 질문에 대해 아래와 같이 답한 것으로 그리스어 원전은 적고 있다.
그리스어 원전과 두 종류 한국어 번역을 비교해보자.(1) 사람의 아들, (2) 구름, (3) 오른쪽이란 단어에 주의하며 읽어보자.
{마태/마태오의 복음서} 26:64
64 λέγει αὐτῶ ὁ ἰησοῦς, σὺ εἶπας· πλὴν λέγω ὑμῖν, ἀπ᾽ ἄρτι ὄψεσθε τὸν 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 καθήμενον ἐκ δεξιῶν τῆς δυνάμεως καὶ ἐρχόμενον ἐπὶ τῶν νεφελῶν τοῦ οὐρανοῦ.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당신이 말하였소 (σὺ εἶπας). 내가 당신들에게 다시 말하오. 이제로부터 당신들은, 인자(τὸν 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가 권능의 보좌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 --- 한국어 표준새번역
예수께서는 그에게 "그것은 너의 말이다 (σὺ εἶπας)" 하시고는 "잘 들어 두어라. 너희는 이제부터 사람의 아들(τὸν 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또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 한국어 공동번역
위의 두 한국어 번역본이 가지는 뉘앙스의 차이를 매우 큰데, 사실상 정반대의 상황을 묘사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전자의 {표준새번역}의 경우, 예수는 대제사장의 질문을 받아치면서 대제사장 가야파의 말을 사실로 "재확인" 혹은 "동의"해주고 있다. 그 반면 후자의 {공동번역}의 경우, 이것은 마치 예수가 가이야의 진술을 자신에 대한 부당한 모함으로 여기고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준다.
그런데 원전의 말은 그냥 "네가 말했다. σὺ εἶπας" 라는 뜻을 가진다. 아울러 이 부분의 말을 "그것은 너의 말이다" 혹은 "그것은 네가 하는 소리다"라는 뜻으로 풀게되면 예수의 진술은 앞뒤가 맞지않게 된다. 왜냐하면 이 진술 바로 직후의 진술에서 예수는 자기가 "사람의 아들", 즉 "메시아"라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사람의 아들 (τὸν 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이 왜 '메시아'를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다루겠다.
{표준새번역} (과 기타 다른 한국어 번역)에서 3개 복음서에 등장하는 이 문장을 모두 “확인” 혹 “동의”의 뉘앙스로 번역한 반면,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공동번역}은 {마태오 복음서}에서만 “부정”의 뉘앙스로 번역하고, 다른 두 복음서에서는 모두 “동의”의 뉘앙스로 번역했다. 근데 이걸 다시 말한다면 해당 부분에 대한 {공동번역}의 번역은 일관성을 결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가령, 동일한 장면을 다루는 다른 복음서의 내용을 보자.
61 ὁ δὲ ἐσιώπα καὶ οὐκ ἀπεκρίνατο οὐδέν. πάλιν ὁ ἀρχιερεὺς ἐπηρώτα αὐτὸν καὶ λέγει αὐτῶ, σὺ εἶ ὁ χριστὸς ὁ υἱὸς τοῦ εὐλογητοῦ; 62 ὁ δὲ ἰησοῦς εἶπεν, ἐγώ εἰμι, καὶ ὄψεσθε τὸν 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 ἐκ δεξιῶν καθήμενον τῆς δυνάμεως καὶ ἐρχόμενον μετὰ τῶν νεφελῶν τοῦ οὐρανοῦ.
61 그러나 예수께서는 입을 다문 채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대사제는 다시 "그대가 과연 찬양을 받으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ὁ χριστὸς ὁ υἱὸς τοῦ εὐλογητοῦ;)인가?" 하고 물었다. 62 예수께서는 "그렇다(ἐγώ εἰμι). 너희는 사람의 아들(τὸν 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 한국어 공동번역, {마가/마르코의 복음서} 14:61-62
여기서 "네가 ~이냐? / σὺ εἶ......)라고 물은 대제사장 가야파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 "ἐγώ εἰμι / ego eimi"는 그냥 “나다 / I am”이라는 뜻이다. 즉, "나는 (네 말대로) 복된 분의 아들인 그리스도다" 혹은 "나는 (네 말대로) 메시아다"란 뜻이다.
다음 텍스트로 넘어가 보자.
66 καὶ ὡς ἐγένετο ἡμέρα, συνήχθη τὸ πρεσβυτέριον τοῦ λαοῦ, ἀρχιερεῖς τε καὶ γραμματεῖς, καὶ ἀπήγαγον αὐτὸν εἰς τὸ συνέδριον αὐτῶν, 67 λέγοντες, εἰ σὺ εἶ ὁ χριστός, εἰπὸν ἡμῖν. εἶπεν δὲ αὐτοῖς, ἐὰν ὑμῖν εἴπω οὐ μὴ πιστεύσητε· 68 ἐὰν δὲ ἐρωτήσω οὐ μὴ ἀποκριθῆτε. 69 ἀπὸ τοῦ νῦν δὲ ἔσται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καθήμενος ἐκ δεξιῶν τῆς δυνάμεως τοῦ θεοῦ. 70 εἶπαν δὲ πάντες, σὺ οὗν εἶ 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 ὁ δὲ πρὸς αὐτοὺς ἔφη, ὑμεῖς λέγετε ὅτι ἐγώ εἰμι. 71 οἱ δὲ εἶπαν, τί ἔτι ἔχομεν μαρτυρίας χρείαν; αὐτοὶ γὰρ ἠκούσαμεν ἀπὸ τοῦ στόματος αὐτοῦ.
66 날이 밝자 백성의 원로들을 비롯하여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모여 법정을 열고 예수를 끌어내어 67 심문을 시작하였다. "자, 말해 보아라. 그대가 그리스도(ὁ χριστός)인가?" 예수께서는 68 "내가 그렇다고 말하여도 너희는 믿지 않을 것이며 내가 물어보아도 너희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69 사람의 아들(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은 이제부터 전능하신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70이 말씀을 듣고 그들은 모두 "그러면 그대가 하느님의 아들(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이란 말인가?"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너희가 말하였다(ἐγώ εἰμι)." 하고 대답하시자 71 그들은 "이제 무슨 증언이 필요하겠습니까? 제 입으로 말하는 것을 우리가 직접 듣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 한국어 공동번역, {누가/루가의 복음서} 22:67-70
예수의 답은 "ὑμεῖς λέγετε ὅτι ἐγώ εἰμι", 즉, "내가 그러하다고 (ἐγώ εἰμι), 너희가 말했다 (ὑμεῖς λέγετε ὅτι)" 이다. 즉, 그렇게 "법정에서 증언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예수는 자신이 그리스도(ὁ χριστός)이고, 사람의 아들(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이고, 신의 아들(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이라고 명시한 것이다. 이 세 호칭이 하나로 합쳐지면 말할 나위없이 "메시아"를 말한다.
# 신의 오른쪽 자리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면서 자신이 전능한 신의 "오른편"에 앉게 될 것이라고 예수가 말하자, 그를 심문하던 측은 예수에게 "그럼 네가 신의 아들이란 말이냐?"라고 즉시 묻는다. 왜? 예수의 이 말은 그들이 너무나도 잘 아는 다윗의 {시편} 110편에서 원용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편은 당시 유대인들이 도래할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간주한 내용으로, "야훼"가 "주님", 즉 "아도나이"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110:1 לְדָוִד מִזְמוֹר נְאֻם יְהוָה לַֽאדֹנִי שֵׁב לִֽימִינִי עַד־אָשִׁית אֹיְבֶיךָ הֲדֹם לְרַגְלֶֽיךָ׃
110:2 מַטֵּֽה־עֻזְּךָ יִשְׁלַח יְהוָה מִצִּיּוֹן רְדֵה בְּקֶרֶב אֹיְבֶֽיךָ׃110:3 עַמְּךָ נְדָבֹת בְּיוֹם חֵילֶךָ בְּֽהַדְרֵי־קֹדֶשׁ מֵרֶחֶם מִשְׁחָר לְךָ טַל יַלְדֻתֶֽיךָ׃
110:4 נִשְׁבַּע יְהוָה וְלֹא יִנָּחֵם אַתָּֽה־ כֹהֵן לְעוֹלָם עַל־דִּבְרָתִי מַלְכִּי־צֶֽדֶק׃
110:5 אֲדֹנָי עַל־יְמִֽינְךָ מָחַץ בְּיוֹם־אַפּוֹ מְלָכִֽים׃
110:6 יָדִין בַּגּוֹיִם מָלֵא גְוִיּוֹת מָחַץ רֹאשׁ עַל־אֶרֶץ רַבָּֽה׃
110:7 מִנַּחַל בַּדֶּרֶךְ יִשְׁתֶּה עַל־כֵּן יָרִים רֹֽאשׁ׃1 τῷ Δαυιδ ψαλμός εἶπεν ὁ κύριος τῷ κυρίῳ μου κάθου ἐκ δεξιῶν μου ἕως ἂν θῶ τοὺς ἐχθρούς σου ὑποπόδιον τῶν ποδῶν σου 2 ῥάβδον δυνάμεώς σου ἐξαποστελεῖ κύριος ἐκ Σιων καὶ κατακυρίευε ἐν μέσῳ τῶν ἐχθρῶν σου 3 μετὰ σοῦ ἡ ἀρχὴ ἐν ἡμέρᾳ τῆς δυνάμεώς σου ἐν ταῖς λαμπρότησιν τῶν ἁγίων ἐκ γαστρὸς πρὸ ἑωσφόρου ἐξεγέννησά σε 4 ὤμοσεν κύριος καὶ οὐ μεταμεληθήσεται σὺ εἶ ἱερεὺς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κατὰ τὴν τάξιν Μελχισεδεκ 5 κύριος ἐκ δεξιῶν σου συνέθλασεν ἐν ἡμέρᾳ ὀργῆς αὐτοῦ βασιλεῖς 6 κρινεῖ ἐν τοῖς ἔθνεσιν πληρώσει πτώματα συνθλάσει κεφαλὰς ἐπὶ γῆς πολλῶν 7 ἐκ χειμάρρου ἐν ὁδῷ πίεται διὰ τοῦτο ὑψώσει κεφαλήν -- 그리스어 70인역에서는 {시편} 109편야훼께서 내 주께 선언하셨다.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 야훼가 시온에서 너에게 권능의 왕장을 내려주리니, 네 원수들 가운데서 왕권을 행사하여라. 네가 나던 날, 모태에서부터 네 젊음의 새벽녘에 너는 이미 거룩한 산에서 왕권을 받았다." 야훼께서 한번 맹세하셨으니 취소하지 않으시리라. "너는 멜기세덱의 법통을 이은 영원한 사제이다." 당신의 오른편에 주님 계시니 그 진노의 날에 뭇 왕들을 무찌르리라. 뭇 나라를 재판하여 시체를 쌓고 넓고 먼 저 땅에서 머리들을 부수리라. 그는 길가에서 시냇물을 마시고 머리를 쳐들리라. --- 한국어 공동번역, {시편} 110편
유대인들에게 너무나 친숙한 이 {시편}을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있는 예수는 결코 "그건 네가 하는 소리다"란 의미로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산헤드린에서 대제사장이 던진 "네가 메시아냐?"라는 질문에 대해 "내가 메시아다"라고 분명하게 답한 것이다. 따라서 김정란 교수가 상상하는 것처럼 "네가 너의 진정한 말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너는 나의 존재 원리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따라서 나는 너를 너의 무지 안에 던져놓는다고. 깨달음은 네가 너의 진정한 언어를 발견하지 못하는 한, 결코 너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의도한 것이 아닌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수는 "철학적 응수"가 아니라 가야파의 말을 (제 3자의 증언을 필요로 하는 유대교 재판원칙에 따라) 하나의 증언으로 재확인하고 있다. {공동번역}의 번역은 위와 같은 일관성의 문제가 있으며, 동일한 그리스어 문장을 (아마도 서로 다른 번역자가) 서로 다른 뉘앙스로 번역하여 오독의 소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사실상의 오역이다.
# 구름
우선 {다니엘}의 묘사는 아래와 같다.
7:13 חָזֵה הֲוֵית בְּחֶזְוֵי לֵֽילְיָא וַאֲרוּ עִם־עֲנָנֵי שְׁמַיָּא כְּבַר אֱנָשׁ אָתֵה הֲוָה וְעַד־עַתִּיק יֽוֹמַיָּא מְטָה וּקְדָמוֹהִי הַקְרְבֽוּהִי׃13 ἐθεώρουν ἐν ὁράματι τῆς νυκτὸς καὶ ἰδοὺ ἐπὶ τῶν νεφελῶν τοῦ οὐρανοῦ ὡς υἱὸς ἀνθρώπου ἤρχετο καὶ ὡς παλαιὸς ἡμερῶν παρῆν καὶ οἱ παρεστηκότες παρῆσαν αὐτῷ 14 καὶ ἐδόθη αὐτῷ ἐξουσία καὶ πάντα τὰ ἔθνη τῆς γῆς κατὰ γένη καὶ πᾶσα δόξα αὐτῷ λατρεύουσα καὶ ἡ ἐξουσία αὐτοῦ ἐξουσία αἰώνιος ἥτις οὐ μὴ ἀρθῇ καὶ ἡ βασιλεία αὐτοῦ ἥτις οὐ μὴ φθαρ…이것은 다니엘이 한 말이다…나는 밤에 또 이상한 광경을 보았는데 사람 모습을 한 이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와서 태고적부터 계신 이 앞으로 인도되어 나아갔다. 주권과 영화와 나라가 그에게 맡겨지고 인종과 말이 다른 뭇 백성들의 섬김을 받게 되었다. 그의 주권은 스러지지 아니하고 영원히 갈 것이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하리라 … --- 한국어 공동번역, {다니엘} 7:13-14
이 (정확히 "사람의 아들"은 아니지만) 이 “사람[처럼] 생긴 존재 / כְּבַ֥ר אֱנָ֖שׁ”는 천사장 미카엘도 가브리엘도 아닌 제 3의 존재로서, 이들 천사장 보다 상위에 있는 존재이며 또한 메시아로 암시되어 있다. 이것이 전통적인 기독교의 해석이다. 이것은 유대교 랍비문헌에는 이 {다니엘}의 문장에서 유래한 듯한 아람어 "구름의 아들 בר נפל"이 메시아의 칭호로 등장하기도 한다.
즉, 예수는 "사람의 아들은" (혹은 "나는") 이제부터 신의 오른편에 앉아 있다가 원수들을 징벌하기 위해 장차 구름을 타고 올 것이라고 재판정에서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실존, 미망, 깨달음....이런 것과는 무관한 맥락이다.
§§ 예수 vs. 빌라도
사실 예수의 이 진술패턴은 이어지는 빌라도의 취조를 다루는 내용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앞의 경우와 같이 {표준새번역}은 “동의”로 {공동번역}은 “부정”의 뉘앙스로 번역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공동번역은 이번에는 3개 {복음서} 모두에서 “부정”의 뉘앙스로 번역했단 점이다. 단 마지막 {요한복음서}에서는 “동의”로 번역했다. 역시 {공동번역}의 번역은 일관성이 없다.
{마태/마태오의 복음서} 27:11
11 ὁ δὲ ἰησοῦς ἐστάθη ἔμπροσθεν τοῦ ἡγεμόνος· καὶ ἐπηρώτησεν αὐτὸν ὁ ἡγεμὼν λέγων, σὺ εἶ ὁ βασιλεὺς τῶν ἰουδαίων; ὁ δὲ ἰησοῦς ἔφη, σὺ λέγεις.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서시니, 총독은 예수께 물어 말하기를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말하였소 (σὺ λέγεις)" 하고 말씀하셨다. --- 한국어 표준새번역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서시자 총독은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것은 네 말이다 (σὺ λέγεις)" 하고 대답하셨다 --- 한국어 공동번역
{마가/마르코의 복음서} 15:2
2 καὶ ἐπηρώτησεν αὐτὸν ὁ πιλᾶτος, σὺ εἶ ὁ βασιλεὺς τῶν ἰουδαίων; ὁ δὲ ἀποκριθεὶς αὐτῶ λέγει, σὺ λέγεις.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께 물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그러자 예수께서는 빌라도에게 "당신이 그렇게 말하였소(σὺ λέγεις)" 하고 말씀하셨다. --- 한국어 표준새번역
빌라도는 예수께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것은 네 말이다 (σὺ λέγεις)" 하고 대답하셨다 --- 한국어 공동번역
{누가/루가의 복음서} 23:3
3 ὁ δὲ πιλᾶτος ἠρώτησεν αὐτὸν λέγων, σὺ εἶ ὁ βασιλεὺς τῶν ἰουδαίων; ὁ δὲ ἀποκριθεὶς αὐτῶ ἔφη, σὺ λέγεις.
빌라도가 예수께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당신이 그렇게 말하였소(σὺ λέγεις)" 하고 말씀하셨다. --- 한국어 표준새번역
빌라도가 예수께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하고 물었다. “그것은 네 말이다(σὺ λέγεις)”라고 예수께서 답하셨다. --- 한국어 공동번역
근데 빌라도와 예수 사이에 있었던 대화는 {요한의 복음서}를 찾아보면 그 의미가 아주 명백해진다.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했을때 예수의 긴 설명을 하는데, 이에 대해 빌라도가 짜증스러운 듯 예수에게 다그치며 아래와 같이 묻는다.
{요한의 복음서} 18:36-7
34 ἀπεκρίθη ἰησοῦς, ἀπὸ σεαυτοῦ σὺ τοῦτο λέγεις ἢ ἄλλοι εἶπόν σοι περὶ ἐμοῦ; 35 ἀπεκρίθη ὁ πιλᾶτος, μήτι ἐγὼ ἰουδαῖός εἰμι; τὸ ἔθνος τὸ σὸν καὶ οἱ ἀρχιερεῖς παρέδωκάν σε ἐμοί· τί ἐποίησας; 36 ἀπεκρίθη ἰησοῦς, ἡ βασιλεία ἡ ἐμὴ οὐκ ἔστιν ἐκ τοῦ κόσμου τούτου· εἰ ἐκ τοῦ κόσμου τούτου ἦν ἡ βασιλεία ἡ ἐμή, οἱ ὑπηρέται οἱ ἐμοὶ ἠγωνίζοντο [ἄν], ἵνα μὴ παραδοθῶ τοῖς ἰουδαίοις· νῦν δὲ ἡ βασιλεία ἡ ἐμὴ οὐκ ἔστιν ἐντεῦθεν. 37 εἶπεν οὗν αὐτῶ ὁ πιλᾶτος, οὐκοῦν βασιλεὺς εἶ σύ; ἀπεκρίθη ὁ ἰησοῦς, σὺ λέγεις ὅτι βασιλεύς εἰμι. ἐγὼ εἰς τοῦτο γεγέννημαι καὶ εἰς τοῦτο ἐλήλυθα εἰς τὸν κόσμον, ἵνα μαρτυρήσω τῇ ἀληθείᾳ· πᾶς ὁ ὢν ἐκ τῆς ἀληθείας ἀκούει μου τῆς φωνῆς.
…..빌라도는 다시 관저 안으로 들어가 예수를 불러놓고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것은 네 말이냐? (ἀπὸ σεαυτοῦ σὺ τοῦτο λέγεις) 아니면 나에 관해서 다른 사람이 들려 준 말을 듣고 하는 말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빌라도는 "내가 유다인인 줄로 아느냐? 너를 내게 넘겨 준 자들은 너희 동족과 대사제들인데 도대체 너는 무슨 일을 했느냐?"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다인들의 손에 넘어 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그래서) 아뭏든 네가 왕이냐?" 하고 빌라도가 묻자 예수께서는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했다 (σὺ λέγεις ὅτι βασιλεύς εἰμι. ἐγὼ).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 듣는다" 하고 대답하셨다. --- 한국어 공동번역
이번에는 {공동번역}에서 조차도 “동의”와 “재확인”의 의미로 번역했다. 여기서 예수의 답은 "σὺ λέγεις ὅτι βασιλεύς εἰμι. ἐγὼ", 즉 "네가 말했다 ("σὺ λέγεις ὅτι): 내가 왕이라고 (βασιλεύς εἰμι. ἐγὼ)"이다. 예수는 빌라도의 진술을 그의 "증언"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러므로 빌라도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그것은 네 말이다”가 아닌 “네가 그렇게 말했다.” 혹은 “네가 지금 그렇게 증언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말 직후, (짜증난, 혹은 시큰둥한, 혹은 경외심을 가지게 된)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해당하는 죄를 발견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예수는 산헤드린과 빌라도의 법정에서 서로 다른 질문에 서로 다른 답변을 한 것이 아니었다. 산헤드린과 빌라도의 법정 앞에서 예수는 동일한 질문에 동일한 답을 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산헤드린에서의 예수의 답변은 유대지도자들의 경악을 유발한 반면, 빌라도의 법정에서의 예수의 답변은 오히려 예수에 대한 빌라도의 동정 혹은 시큰둥한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은 어떤 이유인가? 심지어 징세책임을 가진 로마관리의 입장에서는 민감한 사안일 수 밖에 없는 카이사르에 대한 납세문제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가 분명히 기소항목으로 들어있음에도 말이다. 게다가 예수는 빌라도 앞에서 자기가 아예 “왕”이라고까지 말했다.
혹자가 말하듯 예수의 죽음에 관해 로마인 빌라도에게 다소 간의 면죄부를 줌으로써 로마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후대의 반-유대주의 입장을 취하는 기독교도들이 이 부분을 변조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그리 멀리 나갈 필요는 없는 듯하다. 빌라도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그래서 뭔가 다른 컨텍스트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컨텍스트는 {복음서} 밖 보다는 이미 {복음서} 안에 충분히 설명되어 있다. 그 컨텍스트란 {요한의 복음서} 제18장에만 다소 길게 설명되어 있는 아래의 문단이다. {공동번역}이다.
…..빌라도는 다시 관저 안으로 들어가 예수를 불러놓고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것은 네 말이냐? 아니면 나에 관해서 다른 사람이 들려 준 말을 듣고 하는 말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빌라도는 "내가 유다인인 줄로 아느냐? 너를 내게 넘겨 준 자들은 너희 동족과 대사제들인데 도대체 너는 무슨 일을 했느냐?"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다인들의 손에 넘어 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 한국어 공동번역, {요한의 복음서} 18:37
여기서 예수는 ”네가 왕이냐?”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그건 네가 하는 소리다”라고 “응수”한 것이 아니라, 아주 분명하게 자기가 어떤 종류의 “왕”인지를 자세히 설명까지 붙여서 말해준 셈이다. 이제 왜 빌라도가 "아무튼 네가 왕이라는 거냐?”라고 반문한 이유는 명백하다.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정치적 위험을 거의 느끼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여기서 자기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빌라도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이 말에 이어지는 빌라도의 질문 혹은 독백인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말이 예수에 대한 매우 냉소적인 조롱이라고 생각한다. 혹시 빌라도가 종교적인 인물이었다면 이 질문은 철학적 질문이었겠지만, 필론이나 요세푸스에 따르면 빌라도는 그런 류의 심오한 인물이 아니었다.
로마인 빌라도와 달리 산헤드린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의 발언에 경악한 이유는 예수의 메시지가 본질적으로 “종교적” 메시지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바로 그런 이유로 예수의 “정체성” 문제는 산헤드린과 빌라도의 법정에서 유독 두드러지게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는 자신의 이런 정체성과 관련된 질문을 제외한 나머지 기소사유에 대해서는 거의 완전한 침묵으로 일관한 반면,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자신의 “정체성”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히 답을 했다. 그렇다면 실제로 예수를 죽음으로 몬 것은 로마라는 정치권력이라기 보다는 산헤드린이라는 종교권력이다. 정치권력은 여기서 조역을 수행했다. 여기서 나는 예수에게 있어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의 “종교적 정체성”이었다고 이해한다.
김정란 교수는 이렇게 썼다.
…대체 예수가 누구였던가. 예수는, 비유적으로 말하면, 바로 당신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빨갱이”였다. 무슨 말이냐고? 예수는 기존의 질서에 전격적으로 반기를 들었던 불온하기 짝이 없는 반항자였다. 그는 당대의 국가보안법 위반자였다. 예수는 국가보안법 때문에 희생되었다. 그는 종교적 의미에서는 당대의 지배계급이었던 유태의 사제들이 설정해놓은 율법의, 그리고 정치적 의미에서는 로마의 위정자들이 지정해놓은 법의 울타리를 파괴한 자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잡혀 죽었다…
하지만 텍스트에 근거해 굳이 말한다면, 예수는 국가보안법 때문에 희생된 피동적 피해자가 아니라, 국가보안법을 이용해 자신을 아주 능동적으로 희생시켰다고 보아야 한다. 사실 편견없이 복음서를 읽으면, 복음서에 기술된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일주일 동안, 마치 죽으려고 작정한듯, 그들 권력집단과의 갈등과 긴장을 “스스로” 고조시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복음서의 맥락을 배제한다면, 예수가 왜 그랬는가는 불분명하다. 자신의 희생으로 구원을 이루려는 것이었다는 것은 "역사적" 기독교의 본질적인 신앙이다. 그는 어떠면 자신을 위기상황으로 몰아감으로써 혁명을 유발하려고 했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혹은 그는 자신을 위기에 처하게 함으로써 긴급한 신의 개입을 유도하려고 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는 정말로 죽으려고 했다. 그것도 아주 자발적으로.
김정란 교수는 또 이렇게 썼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면 적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예수가 살아 돌아온다면, 무엇이라고 말할까?…
글쎄 내 생각에 예수는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적그리스도(ἀντίχριστος)는 국가보안법존치론자 안에도, 폐지론자 안에도, 국가보안법 안에도, 밖에도, 그 법의 적용대상자 안에도, 적용열외자 안에도, 자본주의 안에도, 자본주의 밖에도, 사회주의 안에도, 사회주의 밖에도, 독재국가 안에도, 민주공화정 안에도, 왕정 안에도, 과두귀족정 안에도 존재한다고.
그 이유는 “예수가 등장하는” 바로 그 텍스트 (신약성서)는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제도를 모두 (광의의) “적그리스도”라고 정의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란 용어는 주의를 요한다. 신약성서에는 광의/협의의 적그리스도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예수를 “자신의 왕” 혹은 “자신의 구원자”로 인정하는 경우라해도, 그 인정은 역시 신약성서의 텍스트에 기초한 정의로서의 “왕” 혹은 “구원자”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그 정의가 자의적이라면, 그 정의를 따르는 자 역시 광의의 “적그리스도”일 수 밖에 없다.
그 이유는 요한의 첫번째 편지를 따르더라도 명백하다. 요한은 당시의 그노시스를 겨냥해서 아래와 같이 적는다.
4:2 ἐν τούτῳ γινώσκετε τὸ πνεῦμα τοῦ θεοῦ· πᾶν πνεῦμα ὃ ὁμολογεῖ ἰησοῦν χριστὸν ἐν σαρκὶ ἐληλυθότα ἐκ τοῦ θεοῦ ἐστιν, 3 καὶ πᾶν πνεῦμα ὃ μὴ ὁμολογεῖ τὸν ἰησοῦν ἐκ τοῦ θεοῦ οὐκ ἔστιν· καὶ τοῦτό ἐστιν τὸ τοῦ ἀντιχρίστου, ὃ ἀκηκόατε ὅτι ἔρχεται, καὶ νῦν ἐν τῶ κόσμῳ ἐστὶν ἤδη
4:2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 한국어 개역개정, {요한1서} 4:2-3
2:22 τίς ἐστιν ὁ ψεύστης εἰ μὴ ὁ ἀρνούμενος ὅτι ἰησοῦς οὐκ ἔστιν ὁ χριστός; οὖτός ἐστιν ὁ ἀντίχριστος, ὁ ἀρνούμενος τὸν πατέρα καὶ τὸν υἱόν.
2: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 한국어 개역개정, {요한1서} 2:22
{신약성서}는 (그노시스들의 입장과 달리) 예수가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에 왔고, 또 "육체적으로" 또한 실제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었고, 또 (역시 그노시스들의 입장과 달리) "육체"로 부활했다고 적는다. 따라서 "예수가 살아 돌아온다면"이라거나, 혹은 (사실상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부정하고 있는) "...이 해석은 예수의 육체적인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은 어느 날 정말로 부활한 예수의 비전을 보았을 것이다. 사람의 인식이 지극한 경지에 다다를 때, 상징은 진실로 육화된 모습으로 한 인간의 내면 안에서 현현한다. 나는 예수의 에피파니를 부정하지 않는다...."라고 적은 김정란 교수의 문장 그 자체가 "복음서의 텍스트" 상 이미 적-그리스도적이란 뜻이다. 신약성서라는 텍스트에 기초한다면, 딱 이것만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정확하고, 또 “텍스트”에 기초했을때 가장 “정직”한 해석이다.
아울러, (1) 육체적 부활을 부정하지 않는다면서, (2) 그 부활을 "지극한 경지에 다다른" 때 예수의 제자들의 "내면 안에서" "육화된 모습"으로 "현현(에피파니)한 상징" 혹은 (3) 예수의 "비전"이라고 바로 이어서 말한다면, "육체적 부활을 부정하지 않는다"라는 첫번째 진술은 그냥 언어유희일 뿐이다. 그냥 "부활"도 아닌 "육체적 부활"이라는 표현에 또 다른 어떤 해석이 존재하던가?
내가 자유주의 신학자들, 혹은 그들로부터 사상적 세례를 받은 이들의 "현란한 레토릭"에 대해 (이레네우스가 그노시스 제파들에게 느꼈던 것과 같은) 현기증과 권태를 느끼는 것은 내 잘못 만은 아닐 것이다.
§ 사람의 아들(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과 신의 아들 (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
김정란 교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은 복음서 곳곳에서 예수가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호칭한 이유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2천년 전의 텍스트를 현대의 개념, 특별히 19/20세기 실존주의적 관점으로 해석해 온 한동안의 유행 때문이다. 예수가 사용한 용어 “사람”의 “아들”에서 그 “사람”이란 실존적 인간을 말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가령, 김정란 교수는 이렇게 적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선지자”라고 “엘리야”라고 부르는 제자들의 명명을 거부하고 “인간의 아들”이라고 명확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한다. 그러나 그 정체성은 “신의 아들”이라는 정체성과 충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선언은, 인간 각자가 인간 각자의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깊은 내면의 부름과의 관계 안에서 “신의 아들”로 격상될 것을 주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유감이지만 이 또한 오독이며 잘못된 인용이다.
우선 잘못된 인용인 까닭은, {마태 복음서} 16장에 등장하는 이 에피소드에서 예수가 “선지자” 혹은 “엘리야”라고 명명되는 것을 거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또한 자신을 “인간의 아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혹은 “메시아”라고 베드로의 입을 빌려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김정란 교수가 생각하는 그 텍스트에서 예수는 "인간의 아들"로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선언"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은 곧 신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메시아"로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한 것이다.
예수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예수께서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 하고 물으셨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 이번에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 한국어 공동번역, {마태/마태오의 복음서} 16장
또한 이 부분의 복음서 맥락을 오독한 이유는, 복음서는 예수의 호칭으로 “사람의 아들”과 “하느님의 아들”을 바꿔가면서 함께 사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 “사람”이란 김정란 교수의 글 속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실존적 인간”의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과 “신의 아들”. 이 대립적으로 보이는 두 용어는 모두 예수를 똑같이 지칭한다. 오래 전에 나 역시 여기 등장하는 이 “사람”의 아들과 “신”의 아들이란 용어가 상호간 충돌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던 적이 있었고, 김정란 교수처럼 이 외면적 모순을 “실존주의”적으로 해석하여 해결하는데 많은 매력을 느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는 19/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 역시 아니다.
# 나 (I)
확실히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헬레니즘 문화권에 맞닿은 갈릴리 출신들이기 때문에) 그리스어를 (알았을 수는 있지만 생활 속에서) 일상적으로 구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군중들 앞에서 자신을 그리스어로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라고 호칭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럼 이 그리스 단어에 해당하는 원어는 예수와 그의 사도들을 포함한 제 1세대 기독교도들의 일상어에서 왔을 것이고, 그럴 경우 이 그리스 단어는 AD 1세기 초반의 유대아 일대, 특별히 갈릴리 지역 아람어 방언의 번역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19세기부터 등장한 가장 간단하고 명쾌한 설명 가운데 한가지는, 그리스어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 사람의 아들)"은 아람어의 "바르 (에)나쉬"의 직역에 가까운 번역이란 것으로, 특별히 Géza Vermès 등은 이 "바르 (에)나쉬"가 그냥 "나"란 1인칭 대명사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복음서}의 용례는 모두 이 용례에 해당한다고 풀이한다. 확실히 복음서에서 예수가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 지칭하는 여러 장면 가운데, 이 '사람의 아들'을 '나'로 해석하면 그 뜻이 명백해지는 곳이 많다.
만약 예수가 사용한 '사람의 아들'이 아람어 '바르 (에)나쉬'이며 그 용례가 단순히 '나'라면, "사람의 아들"을 둘러싼 현란한 "철학적"인 담론은 그냥 해프닝일 뿐이다.
# "그" 사람 ("the" Man)
그런데 예수의 용례를 '나'로만 설정하기엔 약간 어색한 곳도 있다. 그래서 보다 전통적인 해석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바르 (에)나쉬'의 용례를 1차적 용례와 몇가지 암시적 용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예수는 십자가형을 받는 주간 직전까지도 "메시아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의 제자들 이외의 사람들에게 가급적 감추려고 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에는 제자들과 대중들 앞에 보다 명시적으로 이를 드러낸다. 그리고 (1)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을 때가 도래했음과, (2) "내 (=예수)"가 고난을 받을 것임과, (3) "내(=예수)"가 그 영광을 받을 대상임과, (4) "높이 들릴" ("영광을 받을" 혹은 중의적으로 "십자가에 달릴" ) 것이라고 진술한다.
.....명절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왔던 사람들 중에는 그리스 사람도 몇이 있었다. 그들은 갈릴래아 지방 베싸이다에서 온 필립보에게 가서 "선생님, 예수를 뵙게 하여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가서 이 말을 하고 두 사람이 함께 예수께 가서 그 말을 전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같이 있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주소서.' 하고 기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그 때에 하늘에서 "내가 이미 내 영광을 드러냈고 앞으로도 드러내리라."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거기에 서서 그 소리를 들은 군중 가운데는 천둥이 울렸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천사가 예수께 말하였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위해서 들려온 음성이다.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게 되었다.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당신이 어떻게 돌아가시리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이었다. ---- 한국어 공동번역, {요한의 복음서} 12장 발췌
그를 '정치적 메시아'로 따르던 군중들은 혼란스러워하며 그에게 묻는다.
34 ἀπεκρίθη οὗν αὐτῶ ὁ ὄχλος, ἡμεῖς ἠκούσαμεν ἐκ τοῦ νόμου ὅτι ὁ χριστὸς μένει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καὶ πῶς λέγεις σὺ ὅτι δεῖ ὑψωθῆναι τὸν 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 τίς ἐστιν οὖτος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그 때에 군중이 "우리는 율법서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사시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사람의 아들이 높이 들려야 한다고 하시니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 사람의 아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 한국어 공동번역, {요한의 복음서} 12장 발췌
이때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간주하고 있었고, 그들의 인식은 {시편}과 예언서들에 등장하는 "땅 위에 군림하는 영광스럽고 영원한 메시아"에 바탕하고 있었다. 이 문장 안에 '사람의 아들'은 두번 등장하는데, 뒤 '사람의 아들'은 예수를 뜻하는 1인칭 '나'를 가르키는 것으로 보기 힘들다. 여기서 군중들은 '사람의 아들'을 '그리스도' 혹은 '메시아'의 대용어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바르 (에)나쉬'에는 암시적으로 '특별한 "그" 사람 (~메시아)'를 암시하는 용례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아울러 정관사 "ὁ (=the)"가 사용된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 "the" son of man)"는 고전 그리스 문서에는 (아직까지) 용례가 발견되지 않았고 오직 기독교 문서에만 등장한다는 점을 들어 이 용례를 기독교 만의 고유용례로 보는 학자들은, 아마도 예수가 "바르 (에)나쉬"를 중의적으로 사용했으며, 따라서 이런 용례의 뉘앙스를 그리스어로 정확히 옮기기 위해 정관사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 메시아: 텍스트, 컨텍스트: {다니엘}, 위경 {에녹서}
기독교는 그 출발 무렵, 혹은 늦어도 AD 2세기 초반 부터 예수가 사용한 “사람”의 아들 혹 “人子”라는 말에 통상적 “인간”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즉, 이 “사람의 아들”은 다분히 19-20세기적인 관념인 실존적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에 대한 고유호칭이었다는 점이 초기 기독교의 이해였다. 그리고 (만약, "사람의 아들"이 "나"에 대한 아람어 관용문구 (=바르 나쉬)가 아니라면), 바로 이 이해가 AD 1세기라는 세팅에서 유대아의 민중들이 “사람의 아들”이란 말을 들었을때 (그것을 메시아에 대한 "호칭"으로 받아들였든 혹은 암시적으로 받아들였든) 느꼈을 이미지가 될 것이다. 요컨데 이 말은 “사람” + “아들”이 아닌, 하나의 의미소로서 “사람의 아들”이란 뜻이다.
이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보자.
{에녹서}는 예수를 전후 200년 사이에 유대교와 기독교의 기본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주요문서 가운데 하나로, 구약성서 위경 (pseudodephigrapha)으로 분류된다. ‘위경’이란 AD 1세기 말 바리새파가 주축이 된 유대교 랍비들에 의해 얌니아 회의에서 확정된 히브리어 구약성서 정경에 속하지 않으며, 또 BC 2-3세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셉투아긴트 Septuagint / 70인역}에 포함된 외전을 부르는 외경(Apocrypha)에도 속하지 않는 종교문서를 말하는 용어로, 종교적 권위를 가지지는 않지만 예수를 전후한 당시의 종교상을 반영하는 참고자료로서의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에녹서 : http://www.meta-religion.com/World_Religions/Christianity/Other_Books/Old_Testament_Apocrypha/book_of_enoch.htm
- 관련 글: 예수 vs. 엠페도클레스 #1: 에녹과 다이몬의 구현? (© 최광민)
통칭 {에녹서}라 불리는 문서는 사실은 3종의 완전히 독립된 텍스트군에 대한 통칭이다. 종교/문헌학적으로 중요도를 지닌 것은 이 가운데 두 종류인데, (완전한 형태로는) 에티오피아어로 된 {에녹서}과 고대 슬라브어로 된 {에녹의 비밀}이다. 두 문서 모두 BC 3-1세기의 히브리/아람어 (혹은 그리스어) 원전에서 각각 에티오피아어와 고대 슬라브어로 번역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두 문서는 다루고 있는 내용이 조금씩 다르고 문체도 상이하다. 이 글에서는 에티오피아어 {에녹서 1}은 {에녹서}로, 고대 슬라브어 {에녹서 2}는 {에녹의 비밀}이란 이름으로 구분해 다루겠다.
{에녹서 I}, https://www.archive.org/stream/cu31924067146773
AD 1-3세기에 문자로 기록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에녹서 I}는, 원래 히브리어 혹은 아람어로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단성론파인 에티오피아 정교회에서만 정경으로 인정하고 (이 교파는 서방과 동방교회의 정경보다 훨씬 많은 수의 정경을 인정한다) 있는데, 단성론을 지지하던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모교회인 이집트 꼽트교회가 AD 4세기에 정통파 교회로부터 단성론 이단으로 파문당한 이후론 오직 에티오피아어로 된 {에녹서}만 완벽한 형태로 남을 수 있었다. 에티오피아 정교회에서는 {에녹서}를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에녹서}가 처음부터 에티오피아어로 씌여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에녹의 언어가 에티오피아어라는 것이다. 이 에티오피아 번역본은 서기 18세기 스코틀랜드의 탐험가 제임스 브루스에 의해 서방에 처음 알려졌다. (이 제임스 브루스는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최근 팔레스타인 사해지역에서 발견된 에세네파들의 쿰란사본에서는 아람어(시리아어)로 작성된 에녹서의 파편들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원본은 아람어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쿰란의 공동체는 {에녹서}와 유사한 다양한 문서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를 에녹문서(Echochian Literature)라고 문헌학자들은 통칭한다. AD 1세기 일부 유대인들과 기독교도들은 이 책을 매우 높게 평가했고, AD 2세기의 일부 기독교 교부들은 이 문서에 최소한 준-정경적 위치까지 부여하기도 했다.
기독교 {신약성서}의 {유다서}에는 {에녹서}에 나오는 문구가 똑같이 등장하는데, 현재까지도 {유다서}의 이 문구가 {에녹서}를 인용한 것인지, 아니면 두 문서가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공통의 전승에 기초하였기 때문에 두 문구가 같은 것인지 논란이 많다. {유다서}와 {에녹서}의 문장은 한 글자도 틀림없이 정확히 같은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공통적인 부분을 번역하면 이렇다.
….And Enoch also, the seventh from Adam, prophesied of these, saying, Behold, the Lord cometh with ten thousands of his saints, To execute judgment upon all, and to convince all that are ungodly among them of all their ungodly deeds which they have ungodly committed, and of all their hard speeches which ungodly sinners have spoken against him… --- 정경 {유다서} 1: 14-15
…And behold! He cometh with ten thousands of His holy ones to execute judgement upon all, And to destroy all the ungodly: And to convict all flesh of all the works of their ungodliness which they have ungodly committed, and of all the hard things which ungodly sinners have spoken against Him…
…보라, 주께서 수만 명이나 되는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오셨으니, 이것은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모든 불경건한 자들이 저지른 온갖 불경건한 행실과, 또 불경건한 죄인들이 주님을 거슬러 말한 모든 거친 말을 들추어내서, 그들을 정죄하시려고 하는 것이다… --- 위경 {에녹서} 제 1권 1:9
성서학자들은 바울의 서신, 베드로의 서신, {유다서}, 심지어 복음서와 {요한계시록}에서 {에녹서}의 영향을 찾으려고 하지만, 반대의 의견도 만만치 않다. 핵심은 {에녹서}의 내용과 위의 정경의 유사부분이 공통전승에서 분지된 것인지, 아니면 이 문서들이 {에녹서}를 직접 참조한 것인지에 달려있다.
그러나 {에녹서}는 서기 1세기경 유대인과 초기 기독교도들의 세계를 옅볼 수 있는 역사적인 중요자료라는데 누구나 동의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사람의 아들”에서 메시아를 보았고, 또 초기 기독교인들은 같은 “사람의 아들”에서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보았기 때문에 {에녹서}에 일반적으로 호의적이었다. 심지어 {에녹서} 51장 5절은 메시아의 부활을 암시하는 듯한 문구로 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에녹서} 1권의 내용 가운데 있었다. 이 1권은 천사가 어떻게 타락했고, 왜 노아의 홍수가 필수적이었는지를 설명한다. 에녹서 1권은 창세기 6장에 대한 일종의 보충설명으로 볼 수 있다. 창세기 6장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고 이들은 네피림이었다”라고 전한다. 문제는 누가 하나님의 아들들인지, 그리고 네피림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정경에는 분명히 나와있지 않다는데 있다.
{에녹서}는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을 감시하라고 파견된 천사들, 사람의 딸은 문자 그대로 사람의 딸들, 네피림은 타락한 천사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일종의 돌연변이 거인 (130미터 혹은 13미터)으로 설명하고 있다. {에녹서}에 따르면 타락한 천사들은 인간들에게 악한 기술들을 전수하였고, 그들의 자손인 네피림들은 처음엔 인간 위에 군림하며 착취하다가 나중에 인간들과 생물들을 죽여 피를 마시며 땅을 휘젓고 다녔으며, 결국 네피림들끼리 서로 죽이는 상잔을 저질렀기 때문에, 이에 분노한 신의 명령으로 대천사들은 타락한 천사들과 네피림들을 대홍수로 응징하고 무저갱에 가두었다. 이런 개념들은 왠지 고대의 프로메테우스 설화와 티탄 (거신족) 대한 설화를 연상케 한다.
{유다서}는 이렇게 진술한다.
….또 자기네가 통치하는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들의 거처를 떠난 천사들을, 그 큰 날의 심판에 붙이시려고, 영원한 사슬로 매어서 어둠에 가두어 두셨습니다…. 한국어 표준새번역 {유다서} 1장 6절
그런데 이 이야기는 {창세기}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어지는 8절의 이야기 역시 정경 구약성서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다.
…천사장 미가엘은 모세의 시체를 놓고 악마와 다투면서 논쟁을 할 때에, 차마 모욕적인 말로 단죄하지 못하고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바란다'고만 말하였습니다… --- 한국어 표준새번역, {유다서} 1장 8절
그런데 {에녹서} 1권에는 이 “자기 위치를 떠난 천사들(Watchers)”에 대해 길고도 장황하게 설명되어 있다. 사실상 {에녹서} 1권은 (대홍수의 원인을 타락한 인류로 설명하는 정경 {창세기}와는 다소 다르게) 대홍수의 원인이 된 이 타락한 천사들과 그 자손인 네피림에 대한 설명이다. 즉 {에녹서} 제 1권의 6장에서 천사의 타락을 주도한 지도적 천사들은 Samlazaz 이하 Araklba, Rameel, Kokablel, Tamlel, Ramlel, Danel, Ezeqeel, Baraqijal, Asael, Armaros, Batarel, Ananel, Zaq1el, Samsapeel, Satarel, Turel, Jomjael, Sariel 이며, 그 이외에 등장하는 하위 그룹의 천사들은 Semjaza, Armaros, Baraqijal, Kokabel, Ezeqeel, Araqiel, Shamsiel, Sariel. 이들은 인간에게 사악한 기술을 가르치기는 했지만, 다른 신화체계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적 '문화영웅'의 원형을 가지고 있다.
…And it came to pass when the children of men had multiplied that in those days were born unto them beautiful and comely daughters. 2 And the angels, the children of the heaven, saw and lusted after them, and said to one another: 'Come, let us choose us wives from among the children of men 3 and beget us children.' And Semjaza, who was their leader, said unto them: 'I fear ye will not 4 indeed agree to do this deed, and I alone shall have to pay the penalty of a great sin.' And they all answered him and said: 'Let us all swear an oath, and all bind ourselves by mutual imprecations 5 not to abandon this plan but to do this thing.' Then sware they all together and bound themselves 6 by mutual imprecations upon it. And they were in all two hundred; who descended in the days of Jared on the summit of Mount Hermon, and they called it Mount Hermon, because they had sworn 7 and bound themselves by mutual imprecations upon it. And these are the names of their leaders: Samlazaz, their leader, Araklba, Rameel, Kokablel, Tamlel, Ramlel, Danel, Ezeqeel, Baraqijal, 8 Asael, Armaros, Batarel, Ananel, Zaq1el, Samsapeel, Satarel, Turel, Jomjael, Sariel. These are their chiefs of tens…. --- {에녹서} 1권 6장
....사람의 자손들이 번성하던 시절, 인간들에겐 아름답고 준수한 딸들이 태어났었다. 천상의 자녀들인 천사들이 그 딸들을 보고 음욕에 빠져 서로 말하길, "자, 이제인간의 딸들 가운데서 우리의 아내를 골라 우리의 자녀를 낳도록 하자'라고 했다. 그들의 지도자인 셈자자는, "나는 너희들이 이 일에 동조하지 않아서 나 혼자서 이 대죄에 대한 댓가를 지게 될까 두렵다. "라고 했다. 그러자 그들 모두는, "우리 모두 맹세 하고 이 계획을 반드시 지켜내기 위해 공동책임을 지자'고 했다. 그들은 총 200명이었고 야렛의 시절에 헤르몬 산 정상에 내려왔는데, 그때 그들이 공동책임에 대해 상호맹세를 했기 때문에 그 산을 그렇게 이름 지었다. 그들 지도자들의 이름은 지도자로 셈라자즈, 아라카바, 라미엘, 코카브렐, 탐렐, 람렐, 다넬, 에제키엘, 바라케잘, 아사엘, 아르마로스, 바타렐, 마나넬, 자키엘, 삼사피엘, 사타렐, 투렐, 로미야렐, 사리엘 등이다. 이들은 각각 10명의 천사를 이끌었다.. ...[후략] / 번역: 최광민
따라서 {에녹서}에 따르면 천사의 타락은 두번에 걸쳐 일어난 셈이다. 하나는 에덴동산에서의 사탄의 유혹, 그리고 그 다음에 일어난 {에녹서}의 타락이다. 실제로 {에녹서}는 노아의 홍수의 원인을 이들 타락한 천사들의 자손인 네피림의 전횡으로 풀이했다.
아울러, 예수로부터 한 세대 후의 인물로서, 유대교 제사장이자 제 1차 유대아-로마 전쟁 때는 갈릴리 사령관으로 참전했다가 로마에 투항한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유대고대사} 제 3장에서 역시 '타락한 천사들'을 네피림의 아버지들로 간주한다.
1. NOW this posterity of Seth continued to esteem God as the Lord of the universe, and to have an entire regard to virtue, for seven generations; but in process of time they were perverted, and forsook the practices of their forefathers; and did neither pay those honors to God which were appointed them, nor had they any concern to do justice towards men. But for what degree of zeal they had formerly shown for virtue, they now showed by their actions a double degree of wickedness, whereby they made God to be their enemy. For many angels of God accompanied with women, and begat sons that proved unjust, and despisers of all that was good, on account of the confidence they had in their own strength; for the tradition is, that these men did what resembled the acts of those whom the Grecians call giants. But Noah was very uneasy at what they did; and being displeased at their conduct, persuaded them to change their dispositions and their acts for the better: but seeing they did not yield to him, but were slaves to their wicked pleasures, he was afraid they would kill him, together with his wife and children, and those they had married; so he departed out of that land. --- {Antiquities of the Jews} 1.3.1
{에녹서}가 금서가 된 것은 바로 이런 천사의 '육체성'에 관한 개념 때문이다. 서기 3세기에 들어가면서 {에녹서}는 유대교 랍비들과 기독교 교부들의 집중적인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이들은 천사가 인간과 같은 정도의 물질성을 가지고 심지어 성적인 능력이 있다고 가르친 {에녹서}에 반발하고 이단문서로 규정했다. 그래서 현재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는 위의 창세기 문구의 “하나님의 아들”은 아담의 세번째 아들인 세트의 후손으로, {사람의 딸}은 가인의 후손으로 해석하는 것이 지배적 입장이 되었다.
자, 그럼 이제 “사람의 아들”이라는 단어의 역사적 의미로 돌아가보자.
{에녹서}는 통권 5권 108장으로 그 규모가 크다. 유대인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이 문서에 호의적이었던 이유는 {에녹서} 2번째 권에서부터 등장하는 이른바 사람의 아들(Son of Man - 통상 "人子") 때문이었다. 나는 여기서 {에녹서}가 정경적, 혹 준정경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AD 1세기 초반의 문화적 맥락을 재구성할 수 있는 참고자료로서의 가치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한다.
왜 예수는 자신을 종종 “사람의 아들”이라고 호칭했을까? 많은 해석들이 이를 두고 제기되었다. 이 “사람의 아들”은 구약성서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사람의 아들” 동일한 컨셉을 가지는 용어인 것은 확실하다. 이 용례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이 전혀 없는 현대작가들 이 “사람”이라는 용어에 착안해, 이 개념을 매우 “실존적”이고 “인간적”으로 이해하려고하는 경향이 있는데 (가령, 한국의 이문열의 소설 {사람의 아들}을 기억해보자), 사실 예수가 이 “사람의 아들”이란 단어를 {요한복음} 속에서 스스로에게 적용했을때 , 예수는 자신을 “인간의 아들” 혹은 “인간”이라는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정경에서는 오직 {다니엘서}에만 등장하는 신적인 존재로서의 그 “사람의 아들”을 뜻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예수가 {에녹서}를 정경으로 간주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예수가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호칭할 때 그것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은 {다니엘}과 {에녹서} 및 다른 묵시문학에 등장하던 이 개념을 즉각적으로 떠올렸을 것임이 분명하고, 따라서 그들의 귀에 “사람의 아들”임을 주장하는 예수는 바로 자신의 신성을 주장하고 있다고 판단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바로 이 문맥 속에서만 왜 예수에게 적대적이던 유대교 사두개파와 바리새파가 예수에게 신성모독을 적용했는지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다.
물론 구약성서 (가령, {에제키엘}) 속에서는 정말 한 인간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호칭하는 경우도 있다. {에녹서} 71장 14절에서는 에녹을 “사람의 아들”이라도 부른다. (하지만 이 “사람의 아들”과 신성한 존재로서의 “사람의 아들”은 다른 존재다.) 그러나 메시아와 관련된 문맥 속에 등장하는 “사람의 아들”이란 용례 속에서 이 존재의 “인성(人性)”을 유추하려는 시도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다니엘서}와 {에녹서}에 등장하는 “사람의 아들”은 인간의 모습을 가졌지만 신과 함께 있으며 후세를 위해 은밀히 숨겨져 있다가 갑자기 정체를 드러낼 초자연적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에녹서}에 묘사된 “사람의 아들 (人子)”는 구약성서 {다니엘}과 신약성서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사람의 아들” 및 “부활한 예수”의 컨셉을 비교해 보면 아래와 같다.
우선 {다니엘}의 묘사는 아래와 같다.
13 חָזֵ֤ה הֲוֵית֙ בְּחֶזְוֵ֣י לֵֽילְיָ֔א וַאֲרוּ֙ עִם־עֲנָנֵ֣י שְׁמַיָּ֔א כְּבַ֥ר אֱנָ֖שׁ אָתֵ֣ה הֲוָ֑ה וְעַד־עַתִּ֤יק יֽוֹמַיָּא֙ מְטָ֔ה וּקְדָמ֖וֹהִי הַקְרְבֽוּהִי׃ 14 וְלֵ֨הּ יְהִ֤יב שָׁלְטָן֙ וִיקָ֣ר וּמַלְכ֔וּ וְכֹ֣ל עַֽמְמַיָּ֗א אֻמַיָּ֛א וְלִשָּׁנַיָּ֖א לֵ֣הּ יִפְלְח֑וּן שָׁלְטָנֵ֞הּ שָׁלְטָ֤ן עָלַם֙ דִּֽי־לָ֣א יֶעְדֵּ֔ה וּמַלְכוּתֵ֖הּ דִּי־לָ֥א תִתְחַבַּֽל׃ פ
13 ἐθεώρουν ἐν ὁράματι τῆς νυκτὸς καὶ ἰδοὺ ἐπὶ τῶν νεφελῶν τοῦ οὐρανοῦ ὡς υἱὸς ἀνθρώπου ἤρχετο καὶ ὡς παλαιὸς ἡμερῶν παρῆν καὶ οἱ παρεστηκότες παρῆσαν αὐτῷ 14 καὶ ἐδόθη αὐτῷ ἐξουσία καὶ πάντα τὰ ἔθνη τῆς γῆς κατὰ γένη καὶ πᾶσα δόξα αὐτῷ λατρεύουσα καὶ ἡ ἐξουσία αὐτοῦ ἐξουσία αἰώνιος ἥτις οὐ μὴ ἀρθῇ καὶ ἡ βασιλεία αὐτοῦ ἥτις οὐ μὴ φθαρῇ
…이것은 다니엘이 한 말이다…나는 밤에 또 이상한 광경을 보았는데 사람 모습을 한 이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와서 태고적부터 계신 이 앞으로 인도되어 나아갔다. 주권과 영화와 나라가 그에게 맡겨지고 인종과 말이 다른 뭇 백성들의 섬김을 받게 되었다. 그의 주권은 스러지지 아니하고 영원히 갈 것이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하리라 … --- 한국어 공동번역, {다니엘} 7:13-14
5 וָאֶשָּׂ֤א אֶת־עֵינַי֙ וָאֵ֔רֶא וְהִנֵּ֥ה אִישׁ־אֶחָ֖ד לָב֣וּשׁ בַּדִּ֑ים וּמָתְנָ֥יו חֲגֻרִ֖ים בְּכֶ֥תֶם אוּפָֽז׃ 6 וּגְוִיָּת֣וֹ כְתַרְשִׁ֗ישׁ וּפָנָ֞יו כְּמַרְאֵ֤ה בָרָק֙ וְעֵינָיו֙ כְּלַפִּ֣ידֵי אֵ֔שׁ וּזְרֹֽעֹתָיו֙ וּמַרְגְּלֹתָ֔יו כְּעֵ֖ין נְחֹ֣שֶׁת קָלָ֑ל וְק֥וֹל דְּבָרָ֖יו כְּק֥וֹל הָמֽוֹן׃
5 καὶ ἦρα τοὺς ὀφθαλμούς μου καὶ εἶδον καὶ ἰδοὺ ἄνθρωπος εἷς ἐνδεδυμένος βύσσινα καὶ τὴν ὀσφὺν περιεζωσμένος βυσσίνῳ καὶ ἐκ μέσου αὐτοῦ φῶς 6 καὶ τὸ σῶμα αὐτοῦ ὡσεὶ θαρσις καὶ τὸ πρόσωπον αὐτοῦ ὡσεὶ ὅρασις ἀστραπῆς καὶ οἱ ὀφθαλμοὶ αὐτοῦ ὡσεὶ λαμπάδες πυρός καὶ οἱ βραχίονες αὐτοῦ καὶ οἱ πόδες ὡσεὶ χαλκὸς ἐξαστράπτων καὶ φωνὴ λαλιᾶς αὐτοῦ ὡσεὶ φωνὴ θορύβου
…그 때에 내가 눈을 떠서 보니, 한 사람이 모시 옷을 입고 우바스의 금으로 만든 띠로 허리를 동이고 있었다. 그의 몸은 녹주석 같이 빛나고, 그의 얼굴은 번갯불 같이 환하고, 눈은 횃불 같이 이글거리고, 팔과 발은 빛나는 놋쇠처럼 뻔쩍였으며, 목소리는 큰 무리가 지르는 소리와도 같았다--- 한국어 표준새번역, {다니엘} 10:5-6
이 “사람처럼 생긴 존재 כְּבַ֥ר אֱנָ֖שׁ”는 천사장 미카엘도 가브리엘도 아닌 제 3의 존재로서, 이들 천사장 보다 상위에 있는 존재이며, 또한 메시아로 암시되어 있다.
이 용어가 {다니엘} ("사람의 아들처럼 생긴 이")이나 {에녹서} ("사람의 아들")에서의 용례처럼 3인칭 (혹은 3인칭에 빗댄 1인칭)으로 사용되면, 그 의미는 (사람처럼 생긴) 어떤 신적 존재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된다. 기독교도들은 {복음서} 속에서 예수가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 부르는 몇몇 구절은 바로 이 용례에 따르는 것으로 해석한다. 특별히 재판정에서의 예수의 발언이 그렇다. 그 외의 경우는 1인칭 "나"로 해석하는 것이 문맥에 더 부합된다.
가령 AD 2세기의 교부 유스티노스는 {트리폰과의 대화 /Dialogue with Trypho}와 {첫번째 변증, The First Aplogy}에서 {다니엘}의 해당구절에 등장하는 "사람의 아들 같은 자"를 메시아/예수로 풀이한다.
https://www.archive.org/stream/antenicenechris27donagoog
Trypho, who was somewhat angry, but respected the Scriptures, as was manifest from his countenance, said to me:
Trypho: The utterances of God are holy, but your expositions are mere contrivances, as is plain from what has been explained by you; nay, even blasphemies, for you assert that angels sinned and revolted from God.
And I, wishing to get him to listen to me, answered in milder tones, thus:
Justin: I admire, sir, this piety of yours; and I pray that you may entertain the same disposition towards Him to whom angels are recorded to minister, as Daniel says; for [one] like the Son of man is led to the Ancient of days, and every kingdom is given to Him for ever and ever. But that you may know, sir, that it is not our audacity which has induced us to adopt this exposition, which you reprehend, I shall give you evidence from Isaiah himself; for he affirms that evil angels have dwelt and do dwell in Tanis, in Egypt. These are [his] words: 'Woe to the rebellious children! Thus says the Lord, You have taken counsel, but not through Me; and [made] agreements, but not through My Spirit, to add sins to sins; who have sinned in going down to Egypt (but they have not inquired at Me), that they may be assisted by Pharaoh, and be covered with the shadow of the Egyptians. For the shadow of Pharaoh shall be a disgrace to you, and a reproach to those who trust in the Egyptians; for the princes in Tanis are evil angels. In vain will they labour for a people which will not profit them by assistance, but [will be] for a disgrace and a reproach [to them].' Isaiah 30:1-5 And, further, Zechariah tells, as you yourself have related, that the devil stood on the right hand of Joshua the priest, to resist him; and [the Lord] said, 'The Lord, who has taken Jerusalem, rebuke you.' Zechariah 3:1 And again, it is written in Job, Job 1:6 as you said yourself, how that the angels came to stand before the Lord, and the devil came with them. And we have it recorded by Moses in the beginning of Genesis, that the serpent beguiled Eve, and was cursed. And we know that in Egypt there were magicians who emulated the mighty power displayed by God through the faithful servant Moses. And you are aware that David said, 'The gods of the nations are demons.' --- {Dialogue with Trypho} Chapter 79.
그의 {첫번째 변증}에서는 히브리 성서의 {예레미아}에 등장하는 "사람의 아들"을 다시 언급한다. 그러나 유스티노스는 여기서 {다니엘}과 {예레미아}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혹은 어떤 그리스어 {예레미아}의 다른 편집사본에서 인용했을 수 있다. {70인역}에 기초한 유스티노스는 그의 저작 곳곳에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히브리 원문을 변경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가령 그는 {시편}과 {예레미아}를 그 예로 들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겠다.
And that the Spirit of prophecy might signify to us that He who suffers these things has an ineffable origin, and rules His enemies, He spake thus: "His generation who shall declare? because His life is cut off from the earth: for their transgressions He comes to death. And I will give the wicked for His burial, and the rich for His death; because He did no violence, neither was any deceit in His mouth. And the Lord is pleased to cleanse Him from the stripe. If He be given for sin, your soul shall see His seed prolonged in days. And the Lord is pleased to deliver His soul from grief, to show Him light, and to form Him with knowledge, to justify the righteous who richly serveth many. And He shall bear our iniquities. Therefore He shall inherit many, and He shall divide the spoil of the strong; because His soul was delivered to death: and He was numbered with the transgressors; and He bare the sins of many, and He was delivered up for their transgressions." Hear, too, how He was to ascend into heaven according to prophecy. It was thus spoken: "Lift up the gates of heaven; be ye opened, that the King of glory may come in. Who is this King of glory? The Lord, strong and mighty." And how also He should come again out of heaven with glory, hear what was spoken in reference to this by the prophet Jeremiah. His words are: "Behold, as the Son of man He cometh in the clouds of heaven, and His angels with Him." --- Justin Martyr, {The First Apology}, CHAPTER LI -- THE MAJESTY OF CHRIST.
한편 요한의 환상을 기록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부활한 예수의 이미지는 아래와 같다.
13 καὶ ἐν μέσῳ τῶν λυχνιῶν ὅμοιον υἱὸν ἀνθρώπου, ἐνδεδυμένον ποδήρη καὶ περιεζωσμένον πρὸς τοῖς μαστοῖς ζώνην χρυσᾶν· 14 ἡ δὲ κεφαλὴ αὐτοῦ καὶ αἱ τρίχες λευκαὶ ὡς ἔριον λευκόν, ὡς χιών, καὶ οἱ ὀφθαλμοὶ αὐτοῦ ὡς φλὸξ πυρός, 15 καὶ οἱ πόδες αὐτοῦ ὅμοιοι χαλκολιβάνῳ ὡς ἐν καμίνῳ πεπυρωμένης, καὶ ἡ φωνὴ αὐτοῦ ὡς φωνὴ ὑδάτων πολλῶν, 16 καὶ ἔχων ἐν τῇ δεξιᾷ χειρὶ αὐτοῦ ἀστέρας ἑπτά, καὶ ἐκ τοῦ στόματος αὐτοῦ ῥομφαία δίστομος ὀξεῖα ἐκπορευομένη, καὶ ἡ ὄψις αὐτοῦ ὡς ὁ ἥλιος φαίνει ἐν τῇ δυνάμει αὐτοῦ. 17 καὶ ὅτε εἶδον αὐτόν, ἔπεσα πρὸς τοὺς πόδας αὐτοῦ ὡς νεκρός· καὶ ἔθηκεν τὴν δεξιὰν αὐτοῦ ἐπ᾽ ἐμὲ λέγων, μὴ φοβοῦ· ἐγώ εἰμι ὁ πρῶτος καὶ ὁ ἔσχατος, 18 καὶ ὁ ζῶν, καὶ ἐγενόμην νεκρὸς καὶ ἰδοὺ ζῶν εἰμι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τῶν αἰώνων, καὶ ἔχω τὰς κλεῖς τοῦ θανάτου καὶ τοῦ ᾅδου.
…그 촛대 한가운데 인자(人子/사람의 아들)와 같은 이 (ὅμοιον υἱὸν ἀνθρώπου)가 계셨습니다. 그는 발에 끌리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과 같이, 또 눈과 같이 희고, 눈은 불꽃과 같고, 발은 화덕에 달구어 낸 놋쇠와 같고, 음성은 큰 물소리와 같았습니다. 또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쥐고,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 칼이 뻗어 나오고, 얼굴은 해가 세차게 비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를 뵐 때에, 내가 그의 발 앞에 엎어져서 죽은 사람과 같이 되니, 그가 내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살아 있는 자다. 나는 한 번은 죽었으나, 보아라,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있어서,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 한국어 표준새번역, {요한계시록 1:13-16}
이제 {에녹서}가 묘사하는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해 한번 살펴본다. {에녹서} 제 2권의 46, 48, 71장에서는 에녹이 천상에 올라가 본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사람의 아들”은 {에녹서} 2권 곳곳에서 “정의로운자”, “선택된 자”, “메시아”, ‘기름부음 받은 자’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神, 즉 “지극히 높으신 분”은 {에녹서}에서 통상 “영들의 주인 (Lord of Spirits)”, “날들의 주인” 등으로 호칭된다.
제 46장
1 And there I saw One who had a head of days, And His head was white like wool, And with Him was another being whose countenance had the appearance of a man,
And his face was full of graciousness, like one of the holy angels.
2 And I asked the angel who went with me and showed me all the hidden things, concerning that
3 Son of Man, who he was, and whence he was, (and) why he went with the Head of Days? And he answered and said unto me:
This is the son of Man who hath righteousness,
With whom dwelleth righteousness,
And who revealeth all the treasures of that which is hidden,
Because the Lord of Spirits hath chosen him,
And whose lot hath the pre-eminence before the Lord of Spirits in uprightness for ever.
... 거기서 날들의 머리 (=영원)를 가지신 분 (=신)를 보았다. 그의 머리는 양털처럼 희었는데 그 곁에는 사람의 얼굴을 한 또 다른 이가 계셨다. 그의 얼굴에는 은혜가 가득했고, 흡사 거룩한 천사 중 하나와 같아 보였다. 그래서 나와 동행하며 모든 감춰진 신비를 보여준 천사에게 이 "사람의 아들" (=사람 같은 이)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왜 그가 날들의 주인과 함께 계신지에 대해 물었다. 천사는 내게 답했다: "이 분은 정의로우신 "사람의 아들"이며, 정의가 그와 함께 거하신다. 그는 숨겨진 모든 보화를 드러내시는 분이며, 영들의 주인께서 그 분을 선택하셨고....(후략) -- {에녹서} 1권 46:1-3 / 번역: 최광민
4 And this Son of Man whom thou hast seen
Shall raise up the kings and the mighty from their seats,
{And the strong from their thrones}
And shall loosen the reins of the strong,
And break the teeth of the sinners.
5 {And he shall put down the kings from their thrones and kingdoms}
Because they do not extol and praise Him,
Nor humbly acknowledge whence the kingdom was bestowed upon them.
6 And he shall put down the countenance of the strong,
And shall fill them with shame.
And darkness shall be their dwelling,
And worms shall be their bed,
And they shall have no hope of rising from their beds,
Because they do not extol the name of the Lord of Spirits.
7 And these are they who judge the stars of heaven,
{And raise their hands against the Most High},
And tread upon the earth and dwell upon it.
And all their deeds manifest unrighteousness,
And their power rests upon their riches,
And their faith is in the gods which they have made with their hands,
And they deny the name of the Lord of Spirits,
8 And they persecute the houses of His congregations,
And the faithful who hang upon the name of the Lord of Spirits.
제 48장
1 And in that place I saw the fountain of righteousness
Which was inexhaustible:
And around it were many fountains of wisdom:
And all the thirsty drank of them,
And were filled with wisdom,
And their dwellings were with the righteous and holy and elect.
2 And at that hour that Son of Man was named In the presence of the Lord of Spirits,
And his name before the Head of Days.
3 Yea, before the sun and the signs were created,
Before the stars of the heaven were made,
His name was named before the Lord of Spirits.
4 He shall be a staff to the righteous whereon to stay themselves and not fall,
And he shall be the light of the Gentiles,
And the hope of those who are troubled of heart.
5 All who dwell on earth shall fall down and worship before him,
And will praise and bless and celebrate with song the Lord of Spirits.
6 And for this reason hath he been chosen and hidden before Him,
Before the creation of the world and for evermore.
7 And the wisdom of the Lord of Spirits hath revealed him to the holy and righteous;
For he hath preserved the lot of the righteous,
Because they have hated and despised this world of unrighteousness,
And have hated all its works and ways in the name of the Lord of Spirits:
For in his name they are saved,
And according to his good pleasure hath it been in regard to their life.
8 In these days downcast in countenance shall the kings of the earth have become,
And the strong who possess the land because of the works of their hands,
For on the day of their anguish and affliction they shall not (be able to) save themselves.
And I will give them over into the hands of Mine elect:
As straw in the fire so shall they burn before the face of the holy:
As lead in the water shall they sink before the face of the righteous,
And no trace of them shall any more be found.
10 And on the day of their affliction there shall be rest on the earth,
And before them they shall fall and not rise again:
And there shall be no one to take them with his hands and raise them:
For they have denied the Lord of Spirits and His Anointed.
The name of the Lord of Spirits be blessed.
제 48장
1. And thus the Lord commanded the kings and the mighty and the exalted, and those who dwell on the earth, and said: 'Open your eyes and lift up your horns if ye are able to recognize the Elect One.'
2. And the Lord of Spirits seated him on the throne of His glory,
And the spirit of righteousness was poured out upon him,
And the word of his mouth slays all the sinners,
And all the unrighteous are destroyed from before his face.
3. And there shall stand up in that day all the kings and the mighty,
And the exalted and those who hold the earth,
And they shall see and recognize How he sits on the throne of his glory,
And righteousness is judged before him,
And no lying word is spoken before him.
4. Then shall pain come upon them as on a woman in travail,
[And she has pain in bringing forth]
When her child enters the mouth of the womb,
And she has pain in bringing forth.
5. And one portion of them shall look on the other,
And they shall be terrified,
And they shall be downcast of countenance,
And pain shall seize them,
When they see that Son of Man Sitting on the throne of his glory.
6. And the kings and the mighty and all who possess the earth shall bless and glorify and extol him who rules over all, who was hidden.
7. For from the beginning the Son of Man was hidden,
And the Most High preserved him in the presence of His might,
And revealed him to the elect.
8. And the congregation of the elect and holy shall be sown,
And all the elect shall stand before him on that day.
9. And all the kings and the mighty and the exalted and those who rule the earth
Shall fall down before him on their faces,
And worship and set their hope upon that Son of Man,
And petition him and supplicate for mercy at his hands.
10. Nevertheless that Lord of Spirits will so press them
That they shall hastily go forth from His presence,
And their faces shall be filled with shame,
And the darkness grow deeper on their faces.
11. And He will deliver them to the angels for punishment,
To execute vengeance on them because they have oppressed His children and His elect
12. And they shall be a spectacle for the righteous and for His elect:
They shall rejoice over them,
Because the wrath of the Lord of Spirits resteth upon them,
And His sword is drunk with their blood.
13. And the righteous and elect shall be saved on that day,
And they shall never thenceforward see the face of the sinners and unrighteous. p. 83
14. And the Lord of Spirits will abide over them,
And with that Son of Man shall they eat
And lie down and rise up for ever and ever.
15. And the righteous and elect shall have risen from the earth,
And ceased to be of downcast countenance.
And they shall have been clothed with garments of glory,
16. And these shall be the garments of life from the Lord of Spirits:
And your garments shall not grow old,
Nor your glory pass away before the Lord of Spirits.
…태초로부터 사람의 아들은 감추어져왔고, 지극히 높으신 분은 그를 숨겨두셨다. 그의 전능으로 사람의 아들을 선택하여 드러내시고…--- {에녹서} 1권 62:7-8 / 번역: 최광민
제 71장
1 And it came to pass after this that my spirit was translated
And it ascended into the heavens:
And I saw the holy sons of God.
They were stepping on flames of fire:
Their garments were white {and their raiment},
And their faces shone like snow.
2 And I saw two streams of fire,
And the light of that fire shone like hyacinth,
And I fell on my face before the Lord of Spirits.
3 And the angel Michael {one of the archangels} seized me by my right hand,
And lifted me up and led me forth into all the secrets,
And he showed me all the secrets of righteousness.
4 And he showed me all the secrets of the ends of the heaven,
And all the chambers of all the stars, and all the luminaries,
Whence they proceed before the face of the holy ones.
5 And he translated my spirit into the heaven of heavens,
And I saw there as it were a structure built of crystals,
And between those crystals tongues of living fire.
6 And my spirit saw the girdle which girt that house of fire,
And on its four sides were streams full of living fire,
And they girt that house.
7 And round about were Seraphin, Cherubic, and Ophannin:
And these are they who sleep not
And guard the throne of His glory.
8 And I saw angels who could not be counted,
A thousand thousands, and ten thousand times ten thousand,
Encircling that house.
And Michael, and Raphael, and Gabriel, and Phanuel,
And the holy angels who are above the heavens,
Go in and out of that house.
9 And they came forth from that house,
And Michael and Gabriel, Raphael and Phanuel,
And many holy angels without number.
10 And with them the Head of Days,
His head white and pure as wool,
And His raiment indescribable.
11 And I fell on my face,
And my whole body became relaxed,
And my spirit was transfigured;
And I cried with a loud voice, . . .
with the spirit of power,
And blessed and glorified and extolled.
12 And these blessings which went forth out of my mouth were well pleasing before that Head of Days. And that Head of Days came with Michael and Gabriel, Raphael and Phanuel, thousands and ten thousands of angels without number.
{Lost passage wherein the Son of Man was described as accompanying the Head of Days, and Enoch asked one of the angels (as in xlvi. 3) concerning the Son of Man as to who he was.}
14 And he (i.e. the angel) came to me and greeted me with His voice, and said unto me '
This is the Son of Man who is born unto righteousness,
And righteousness abides over him,
And the righteousness of the Head of Days forsakes him not.'
15 And he said unto me:
' He proclaims unto thee peace in the name of the world to come;
For from hence has proceeded peace 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And so shall it be unto thee for ever and for ever and ever.
16 And all shall walk in his ways since righteousness never forsaketh him:
With him will be their dwelling-places, and with him their heritage,
And they shall not be separated from him for ever and ever and ever.
And so there shall be length of days with that Son of Man,
And the righteous shall have peace and an upright way
In the name of the Lord of Spirits for ever and ever.'
예수가 유대묵시문학의 영향이 강렬하였던 서기 1세기에 바로 이 용어 "사람의 아들"을 자신에게 적용시켰다면,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실존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선언이었다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예수는 이 용어를 사용해서 {구약성서}의 묵시문학적 테마를 자신에게 직접 적용시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때 자기에게 적용시킨 바로 그 용어, 사람의 아들을 19/20세기의 주제인 "실존주의적 인간"으로 해석하는 것은 정말로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이런 예수의 주장이 유대교에 관심이 없던 빌라도에게 전혀 임팩트를 주지 않은 반면, 유대의 제사장들을 선두로 한 종교지도자들이 받은 충격과 증오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다만 예수가 “사회정의”를 외친 데서 온 것이었을까? 아니면 이렇게 “종교적” 직격탄을 예수가 유대사회에 쏘아넣었기 때문이었을까?
§ 다시 원전으로
전술했다시피, 고대의 텍스트는 고대의 관점에서 해석되는 것이 그 텍스트를 이해하는 가장 적절한 접근법이다. (그런 점에서 당대의 자유주의자들의 "역사적 예수" 연구방법에 대한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비판은 매우 적절하다.) 다양한 "현대적" 관점에서의 재해석은 많은 학문적/대중적 흥미를 유발하기는 하지만, 때때로 엉뚱한 결론을 도출하기 쉽다는 점은 현대에 차고 넘치는 수많은 "예수들"의 이미지들이 이미 역설적으로 반증하고 있다.
주석은 원전을 뒤집을 수 없다. {신약성서}라는 텍스트 “안”에서만 모습이 드러나는 그 “예수”를 그 텍스트 “밖”에서 “옳게”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 역시 모순이다. 모든 주석행위는 원전에 위배되지 않은 경우에 한해서만, 그 “참고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정도의 권위를 가진다. 따라서 어떤 (현대적) 해석도 {신약성서} 속의 (혹은 그 텍스트의 작성시점에서 조명된) 예수보다 더 예수스러울 수는 없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의 방식으로 무엇을 이해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한 텍스트 속에서만 드러나는 존재를 그 텍스트와 모순되게 이해하면서, 바로 그 이해에 따라 “그 존재를 이해한다”고 주장한다면, 그 텍스트 속의 존재는 오히려 그 사람을 향해 되묻지 않을까?
ἀπὸ σεαυτοῦ σὺ τοῦτο λέγεις
그건 네 생각에서 나온 말이냐?
草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