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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예수 vs. 붓다 #7: [과부의 두 렙톤] 일화는 과연 대승불경 {대장엄론경}의 표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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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Kwangmin Choi, 2011-02-22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제목

[© 최광민] 예수 vs 붓다 #7: 과부의 두 렙톤 이야기는 대승불경 {대장엄론경}의 표절일까?

요약

아슈바고사의 {대장엄론경} 제 22화의 '거지 처자의 보시' 일화와 {복음서}의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일화가 얼마나 표면적으로 유사하며 다른지를 설명한다.

순서
  1. 속설, 속설들
  2. 아슈바고사, {대장엄론경} 제 22화
  3. {복음서}의 내용
  4. 비교
    1. 처자 vs. 과부
    2. 대비설정
    3. 보시의 목적
    4. 승려에 보시 vs. 성전에 헌금
    5. 동전 두 닢 vs. 두 렙톤
    6. 교훈의 의도?
  5. 맺음말


티베리우스 황제 (TIBEPOY KAICAP,) 당시 유대아의 로마 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 (본디오 빌라도)와 화환이 새겨진 동전 "렙톤" / 위키피디아


§ 속설, 속설들

AD 2세기 서북 인도의 불교승려이자 시인이었던 아슈바고사 (= 馬鳴, 마명, AD 100-160)는 인도 산스크리트 (대승)불교문학의 최초 시인으로 꼽히는 인물로, 고타마 붓다의 삶을 다룬 서사시 {붓다차리타, 佛所行讚}의 저자로 가장 유명하다.

대승불경인 {대장엄론경 大莊嚴論經}은 (저자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있지만) 대체로 아슈바고사가 AD 2세기에 서북 인도에서 산스크리트어로 쓴 것으로 여겨지며, 중국 후진(後秦) 대에 서역승 후진삼장(後秦三藏) 쿠마라지바 (鳩摩羅什, 구마라집)이 AD 402년에서 412년 사이에 산스크리트어에서 한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장엄론경}은 총 90편의 다양한 우화, 비유, 자타카 등의 내용으로 불교적 교훈을 전한다.

그런데 혹자 (가령, 민희식, {법화경과 신약성서})는, 이 {대장엄론경}의 22번째 일화로부터 {복음서}의 한 장면이 차용/표절/도용되었다고 주장한다.

정말 그런지, 지금부터 해당되는 {대장엄론경}의 일화와 {복음서}의 일화를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자.




§ 아슈바고사, {대장엄론경(大莊嚴論經)} 제 22화 

아슈바고사의 {대장엄론경}은 1882년 Samuel Beal이 한역 {대장엄론경}에서 영어로 번역하여 서구에 그 내용이 알려지게 되었는데, 한문 원문 및 Samuel Beal의 영역에서 중역하고 한문 원문으로 Beal의 해석을 보강하도록 하겠다.

한국어 중역: 최광민

(22)復次,夫修施者在勝信心,兩錢布施果報難量。 

Again: "A man who bestows charity, if he is actuated by a supreme principle of faith in giveng even two mites, shall reveive a return beyond calculation." 

"보시를 베푸는 사람이  설령 두 닢을 보시하더라도 지고한 믿음의 원리로 발원하였다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과보를 얻을 것이다."

我昔曾聞,有一女人至晝闇山,見眾人等於彼山中作般遮于瑟。時彼女人於會乞食,既睹眾僧心懷歡喜,而讚歎言:

I heard that there was once a lone woman who having gone to the mountain Chau ngan (day dull) beheld the men on the mountain holding a religious assembly called the Panchavarsha parishat. Then the woman having begged some food in the crowd beholding the priests was filled with joy and uttering her praises said, 

예전에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주암산(晝闇山)에 간 한 여인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산중에서 반차회(般遮會 Panchavarsha parishat (5년 마다 열리는 법회 / 필자 주)를 연 것을 보았다. 군중 가운데서 걸식하던 여인은 거기 모인 승려들을 보고 환희심에 찬탄하며 말하였다. 

"善哉聖僧!譬如大海眾寶窟宅,眾人供養; 我獨貧窮無物用施" 作是語已,遍身搜求了無所有,復自思惟:"先於糞中得二銅錢"  即持此錢奉施眾僧。

"It is well holy priests I but whilst others give precious things such as the ocean caves produce I a poor (woman) have nothing to give". Having spoken thus and searched herself in vain for something to give she recollected that some time before she hid found in a dung heap two mites (copper mites) so taking these forthwith she offered them as a gift to the priesthood in charity

"훌륭한 스님들이구나! 사람들은 바다동굴에서 나는 것 같은 귀한 보물들을 공양하는데 나는 가난해서 보시할 것이 하나도 없구나." 이렇게 말하며  몸을 뒤져 보았으나 아무것도 가진게 없었다. 곰곰히 생각하다 이전에 똥더미 속에서 동전 두 닢을 발견한 것이 생각나 이 동전을 스님들께 받들어 보시하였다.

時僧上座得羅漢果豫知人心,而彼上座常自珍重,見彼女人有深信心,為欲增長彼功德故,不待維那,躬自慇懃起為咒願,即舉右手高聲唱言:

At this time the president (Sthavira) who had arrived at the condition of a Rahat (the fruit of Rahatship), and so could read the motives (heart) of men disregarding the rich gifts of others and beholding the deep principle of faith dwelling in the heart of this poor woman and wishing the priesthood to esteem rightly her religious merit at once and without waiting to take up his vina (lute), with full voice burst forth with the following lines( religious canto), as he raised his right hand and said,

그때 아라한 (=라하트)의 경지에 이른 한 상좌(수타비라, 上座) 승려가 있었는데, 그는 사람의 마음을 미리 아는 이였으나 스스로는 늘 진중하였다. 그는 그 여인에게 깊은 신심이 있음을 알아 차리고, 그 공덕을 늘려주고자 유나를 기다리지 않고 몸소 일어나 주원해 주려고 오른손을 들고 다음과 같이 크게 외쳤다. 

[필자 주: 이어 이 상좌승려가 이 여인의 공덕을  기리며 주원한다. '주원'이란 법회 때 승려가 법어를 읽으며 보시하는 시주의 원하는 바가 이뤄지길 기원해 주는 것을 말한다.]

"大德僧聽!", 即說偈言:

"Reverend priests attend!" and then he proceeded:-

"덕 높은 스님들은 들으시오!". 이렇게 말하며 게를 설하였다.

大地及大海,
所有諸寶物,
如此童女意,
悉能施與僧。
留心善觀察,
行道為修福,
使得解脫道,
離貧窮棘刺。

The mighty earth and vast ocean,
Whatever treasures they contain,
According to this woman's intention
Are all bestowed in charity on the priesthood.
With careful mind and pious consideration
Practising herself in the discharge of good works
She has reached the goal of deliverance
And utterly put away all covetous and selfish aims

땅과 바다가
온갖 값진 보물을 가졌을 지라도,
이 처자의 마음대로라면 
모든 것을 승려들에게 보시하였다..
주의깊은 마음과 경건한 관찰로

도를 행하여 복을 닦는 이는
해탈을 얻어 
가난의 고통을 벗어나게 된다..

時彼童女極生大心, 如師所說我作難作, 便捨一切資財珍寶等無有異, 悲欣交集, 五體投地歸命諸僧, 以此兩錢置上座前, 涕泣不樂, 即說偈言:

At this time the woman was mightily strengthened in her mind as she thought, 'It is even as the Teacher says what I do is as difficult as for him who gives up all his treasures' and then exulting in the act although sorrowing on account of her poverty she prostrated herself before the priests and offered her two mites to the president, weeping as she did so and cast down in heart and, then she recited the following lines:

이 때에 그 처자는 큰 결심을 하고 '상좌스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내가 다 하리라'  말하고는,  오체투지하여 승려들 앞에 절하고 마치 모든 재산과 값진 보물을 다 보시하듯 이 두 닢을 상좌승려 앞에 바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願我生死中
永離於貧窮,
常得歡慶集
親戚莫別離
我今施僧果
唯佛能分別,
由此功德故
速成所願果,
所種微善心
身根願速出。

May I through all successive births
Escape such poverty as now afflicts me I
Enjoying for ever such happiness as plenty brings
With friends and relations in equal condition
I now offer in charity priestly fruit
May Buddha rightly discern my aim And as the result of this religious act
May I soon obtain answer to my prayer
The good and pious intention of my heart
May it result soon in outward prosperity

바라건대 제가 생사 가운데
가난을 영원히 벗어나
항상 기쁘고도 풍요하며
친구와 친척들과도 떨어짐 없게 하소서.
지금 제가 스님들께 보시한 것은
오직 붓다 만이 분별해 주시리니
이 공덕으로
빨리 소원을 이룰 수 있다면
제 마음의 선하고 신심어린 뜻이
속히 현실이 되길 바라옵니다.

時彼女人出彼山已坐一樹下,樹蔭不移上有雲蓋。時彼國王適喪夫人出外遊行,見彼雲蓋往至樹下,見此童女心生染著,將還宮內,用為第一最大夫人。

Then the woman having left the mountain sat down beneath a tree whilst a cloud canopy above her sheltered her without intermission from the sun. Now at this time the king of the country having just performed the funeral obsequies of the queen was walking abroad to see the country when observing the cloud canopy he went to the tree over which it rested and there seeing the woman his mind was filled with desire. [He takes here to his palace and bestows upon her gifts and places here in authiority as his chief wife].

그후 여인은 산을 떠나 나무 밑에 앉았는데 구름이 여인의 머리 위에 머물러 그늘을 마련해 주었다. 이때 그 지역의 왕이 왕비를 잃은 후 지역을 둘러보던 중이었는데, 그 구름을 보고 나무로 와서 그 여인을 보게 되었다. 왕은 그 여인을 갖기를 원해 여인을 왕궁에 데려가 선물을 주고 그의 첫째 왕비로 삼았다.  / 번역: 최광민

{Abstract of Four Lectures on Buddhist Literature in China} By Samuel Beal
From Asvaghosha's sermons, vol.iv. p.15. Logical Dispute cited as Topic 2 in the Kalpanamanditika (Ta-chuang-yen-lun-ching) The second topic of the Ta-chuang-yen-lun-ching translated by Kumarajiva (구마라집)



이야기는 제 2부는 이렇게 이어진다. '교훈'을 담은 이 부분이 바로 해당 일화가 설해진 의도에 해당한다. 읽어보자.

即作是念:"我先發願今已稱心" 即白國王:"多齎寶物施設供具,詣晝闇山供養眾僧,寶珠瓔珞種種財物,持用奉施"
 
여인이  '내가 지난 번에 발원한 것이 벌써 생각대로 되었구나'라고 생각하고  왕에게 말하였다. "주암산에 많은 보물들과 보시할 공양구를 가지고 가서 여러 스님들을 공양하겠습니다."

彼時上座不為咒願。爾時大眾疑怪所以,而作是言:"先者貧賤兩錢施時起為咒願;今者乃為王之夫人,珍寶瓔珞種種財物而用布施,不為咒願?"

그러나 이번에는 상좌승려가 여인을 위해 주원해 주지 않았다. 이상히 여긴 대중들이 이유를 물었다.  "빈궁하던 그 처자가 동전 둘을 보시하였을 때에는 몸소 일어나 주원을 해주시더니, 여인이 왕비가 되어 귀한 보물과 영락 등 온갖 재물로 보시하는데 이번에는 왜 주원해 주시지 않으십니까?"

時彼上座語眾僧言:"我先為彼咒願之時不為財物,乃恐童女心意錯亂,故為咒願"  即說偈言: 

그때 이 상좌가 여러 승려들에게, "내가 지난번 여인을 위해 주원한 것은 보화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이 착란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곧 게를 설하였다.

不以錢財多
而獲大果報,
唯有勝善心
乃得大畏報

돈이나 재물이 많다고
큰 과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선심만 있어도
큰 과보를 얻을 수 있다.


彼女先施時
一切悉捨施,
佛智能分別
非我所能知

여인이 지난번 보시할 때에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바친 것은
붓다의 지혜만이 분별할 수 있는 것으로서,
나로서는 알 수 없다

今雖財寶多
不如彼時心,
十六分中一
若心擾濁施,
譬如諸商賈,  
少於諸財物,
心期於大報。 

이제 그녀가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그 때의 마음과는 같지 않으니
1/16 이라도 흐려진 마음으로 보시한다면,
마치 장사꾼들이
작은 보시를 하곤
마음으로 큰 보상을 바라는 것과 같네


所施物雖小,
心意勝廣大,  
以是故未來,
得報亦無量。

보시하는 물건이 비록 적어도
마음이 크다면
그 마음 때문에 미래세에
무량한 과보를 받을 것이니

如阿輸迦王,
淨心用土施,  
亦如舍衛城,
窮下之女人,  
飯漿施迦葉。
施土得大地,  
飯漿天中勝,

저 (전생의 / 필자 주) 아소카왕이
청정한 마음으로 흙을 보시했던 것 같고,
또한 사위성의
가난하고 천한 여인이
쌀뜨물을 가섭에게 보시함과도 같으니,
흙을 보시하여 국토를 얻었고
쌀뜨물을 보시하여 천상의 즐거움을 받았다.

施少心淨廣,  
得報亦弘大。
譬如白淨衣,  
以油渧其上,
垢膩遂增長,  
亦猶油渧水。

이같이 마음만 청정하고 크다면
적은 보시로도 큰 보상을 받으니
희고 깨끗한 옷 위에
기름 한 방울만 떨어져도
옷 전체에 기름이 번지는 것과 같으며,

油渧雖微小, 
遍於池水上,
以是故當知,  
心勝故報大。

또 물에 떨어진 기름 방울과 같아서,
비록 기름 한 방울은 작아도
연못 물 표면 전체에 퍼지는 것과 같으니,
마음 탓에 큰 과보를 받는
이 이치를 마땅히 깨달아야 하리라.
 / 번역: 최광민

그럼 이번에는  혹자들이 이 내용에서 "표절" 혹은 "차용"되었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복음서}의 내용을 발췌해서 읽어보자.




§ {복음서}의 내용

우선, {신약성서}의 두번째 문서인 {마르코/마가 복음서}의 내용을 옮겨보자.  두 {복음서}가 진술하는 이 내용은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가 체포되어 처형되던 주간의 화요일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친 내용들을 담고 있다.

38 καὶ ἐν τῇ διδαχῇ αὐτοῦ ἔλεγεν, βλέπετε ἀπὸ τῶν γραμματέων τῶν θελόντων ἐν στολαῖς περιπατεῖν καὶ ἀσπασμοὺς ἐν ταῖς ἀγοραῖς 39 καὶ πρωτοκαθεδρίας ἐν ταῖς συναγωγαῖς καὶ πρωτοκλισίας ἐν τοῖς δείπνοις· 40 οἱ κατεσθίοντες τὰς οἰκίας τῶν χηρῶν καὶ προφάσει μακρὰ προσευχόμενοι, οὖτοι λήμψονται περισσότερον κρίμα.

예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이런 말씀도 하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기다란 예복을 걸치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찾으며 잔칫집에 가면 제일 윗자리에 앉으려 한다. 또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오래 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만큼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41 καὶ καθίσας κατέναντι τοῦ γαζοφυλακίου ἐθεώρει πῶς ὁ ὄχλος βάλλει χαλκὸν εἰς τὸ γαζοφυλάκιον· καὶ πολλοὶ πλούσιοι ἔβαλλον πολλά·42 καὶ ἐλθοῦσα μία χήρα πτωχὴ ἔβαλεν λεπτὰ δύο, ὅ ἐστιν κοδράντης. 43 καὶ προσκαλεσάμενος τοὺς μαθητὰς αὐτοῦ εἶπεν αὐτοῖς, ἀμὴν λέγω ὑμῖν ὅτι ἡ χήρα αὕτη ἡ πτωχὴ πλεῖον πάντων ἔβαλεν τῶν βαλλόντων εἰς τὸ γαζοφυλάκιον· 44 πάντες γὰρ ἐκ τοῦ περισσεύοντος αὐτοῖς ἔβαλον, αὕτη δὲ ἐκ τῆς ὑστερήσεως αὐτῆς πάντα ὅσα εἶχεν ἔβαλεν, ὅλον τὸν βίον αὐτῆς.

예수께서 헌금궤 맞은 편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궤에 돈을 넣는 것을 바라보고 계셨다. 그 때 부자들은 여럿이 와서 많은 돈을 넣었는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겨우 렙톤 두 개를 넣었다. 이것은 동전 한 닢 값어치의 돈이었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헌금궤에 넣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넣었으니 생활비를 모두 바친 셈이다." --- 한국어 공동번역, {마르코의 복음서} 12장 38-44

세번째 {복음서}인 {루가/누가 복음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45 ἀκούοντος δὲ παντὸς τοῦ λαοῦ εἶπεν τοῖς μαθηταῖς [αὐτοῦ], 46 προσέχετε ἀπὸ τῶν γραμματέων τῶν θελόντων περιπατεῖν ἐν στολαῖς καὶ φιλούντων ἀσπασμοὺς ἐν ταῖς ἀγοραῖς καὶ πρωτοκαθεδρίας ἐν ταῖς συναγωγαῖς καὶ πρωτοκλισίας ἐν τοῖς δείπνοις, 47 οἳ κατεσθίουσιν τὰς οἰκίας τῶν χηρῶν καὶ προφάσει μακρὰ προσεύχονται· οὖτοι λήμψονται περισσότερον κρίμα.

모든 백성이 듣고 있는 가운데, 예수께서는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원하고, 장터에서 인사 받는 것과 회당에서 높은 자리와 잔치에서 윗자리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그들은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1 ἀναβλέψας δὲ εἶδεν τοὺς βάλλοντας εἰς τὸ γαζοφυλάκιον τὰ δῶρα αὐτῶν πλουσίους. 2 εἶδεν δέ τινα χήραν πενιχρὰν βάλλουσαν ἐκεῖ λεπτὰ δύο, 3 καὶ εἶπεν, ἀληθῶς λέγω ὑμῖν ὅτι ἡ χήρα αὕτη ἡ πτωχὴ πλεῖον πάντων ἔβαλεν· 4 πάντες γὰρ οὖτοι ἐκ τοῦ περισσεύοντος αὐτοῖς ἔβαλον εἰς τὰ δῶρα, αὕτη δὲ ἐκ τοῦ ὑστερήματος αὐτῆς πάντα τὸν βίον ὃν εἶχεν ἔβαλεν.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거기에 렙돈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저 사람들은 다 넉넉한 가운데서 자기들의 헌금을 넣었지만, 이 과부는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한국어 새번역, {누가복음} 20장 45-47, 21장 1-4

꽤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하나씩 따져 보자.




§ 비교

# 처자와 과부

{대장엄론경}의 '처자(=동녀)'는 미혼의 젊은 여인인 반면, {복음서}의 등장인물은 과부다.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과부'는 매우 특별한 존재로서 '고아'와 함께 공동체가 돌보아야 하는 대상으로 명시되어 있다. 그래서 {복음서}의 과부 이야기는 그 문맥에서 읽혀져야 한다. 이것은 {복음서}의 '과부의 헌금' 이야기 직전에 등장하는 '과부를 등쳐먹는 율법사' 이야기와 함께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대장엄론경}의 거지 처자의 경우는 특별한 문맥없이 그냥 읽어도 될 듯 하다.


# 대비설정

{대장엄론경}의 대비설정은 동일한 이 처자가 (1) 거지일 때와 (2) 왕비가 된 후이다. 즉, 빈궁할 때와 부유할 때 보시의 마음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대조한다. 사실은 원문 상으로는 거지 처자가 왕비가 된 후 승려를 공양하는 그 마음이 변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1) 절실함과 (2) 여유의 차이일 것이다.

반면, {복음서}의 일화가 대비시키는 것은 (1) 가난한 과부와 (2) (위선적인 율법사들과 부자들이다. {복음서}의 이 대비설정이 의도한 바는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 보시의 목적?

{대장엄론경}의 거지 처자는 '빈궁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발원을 가지고 그녀가 가진 동전 두 닢을 승려들 앞에 보시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빈궁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소원을 이룬다.

{복음서}의 과부의 경우, 왜 헌금을 했는지, 무엇을 바라면서 두 렙톤을 헌금하였는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고, 그 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설명하지 않는다. 예수는 그 과부가 가진 전부를 헌금했다고 말한 것 이 외에는 그녀의 행위에 대해 아무 것도 언급하지 않으며, 그 과부가 헌금으로 인해 받을 복도 언급하지 않는다.


# 승려들에게 보시 vs. 성전에 헌금

{대장엄론경}에 등장하는 처자의 헌금은 반차회를 연 승려들에게 바쳐진 보시다. {대장엄론경} 본문에도 등장하지만, 여기서 승려들은 신자들이 (1) 승려들에게 (2) 청정한 마음으로 보시할 것을 (3) 독려하고 있다. "청정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보시의 양과 상관없이 큰 과보를 얻는다"는 것이 이 일화의 주제이자 교훈이다.

{복음서}의 일화의 교훈은 이것이 아니다. {복음서}의 내용 속에서 예수는 성전 뜰에서 사람들이 성전에 설치된 (입구는 좁고 안은 넓은) 나팔모양 헌금함에 사람들이 헌금을 넣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 헌금은 "예수"에게 바쳐진 것이 아니라, "성전"에 바쳐지던 공식적 헌금이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놋쇠로 만든 총 13개의 헌금함이 있었는데, 성전 마당에 남자,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의 뜰 사이에 놓인 벽을 따라 일렬로 놓여 있었다.  각각의 헌금함은 특정된 용도가 있었으며, 가령 고정된 액수인 1/2 세켈의 성전세는 1-2번 함에, 번제/속죄죄로 비둘기를 제물로 바치려는 여인들에게 할당된 3-4번 함, 제단용 목재를 구입하는 용도는 5번 함, 제단에 바칠 향을 위한 6번 함, 성전의 의례용 금잔을 위한 7번 함, 남성들의 속제제물을 위한 8번 함, 속건제를 위한 9번 함, 비둘기 제물 비용을 위한 10번 함, 나실 (나지르)인 서원을 위한 11번 함, 나병환자의 치유를 기원하는 12번 함,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타 기부금을 위한 13번 함이 그것들이다. 성전의 이 구역은 이방인들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복음서}에도 기록되었시피, 예수와 그 제자들은 약 3년 간의 사역 중 그들을 따르던 사람들로부터 후원금을 받아 활동자금으로 사용했고, 나중에 스승을 배반하게 될 유다 이스카리옷, 즉 가롯유다가 바로 이 헌금궤를 맡고 있던 재정담당이었다. 그래서 예수의 일행도 헌금을 받는 위치에 있었지만, 이 일화 속에서의 헌금은 예수에게 기부된 것이 아니라 성전에 바쳐진 헌금인 것이다. 그래서 {대장엄론경}의 상좌승려와 달리 예수는 자신들에게 헌금할 것을 독려한 것이 아니고, 그저 성전에 헌금을 바치는 한 과부의 헌금에 대해 '평'하고 있는 것이다.




# 동전 "두" 닢 vs. "두" 렙톤

{대장엄론경}의 이 내용과 {복음서}의 과부의 헌금일화의 유사성이 처음 서구에서 제시되었을때 그들의 눈길을 먼저 끌었던 것은 "숫자 2"였다. 서북 인도의 한 처자는 "두 동전"을,  예루살렘의 한 과부는 "두 렙톤"을 보시/헌금했기 때문이다.

가령 1927년 {붓다의 생애 The Life of Buddha}를 저술한 Edward Joseph Thomas 의 진술을 읽어보자. 토마스는 이전 연구자들이 제시한 16가지 정도의 일화들의 유사성에 대해 언급하지만, 불교와 기독교 간의 유사한 에피소드들이 정말로 차용에 의한 것인지를 확정하지는 않았다.

가령, {복음서}의 '가난한 과부의 두 렙톤' 에피소드와 {대장엄론경}의 거지 처자 에피소드에 대해 이렇게 진술한다.

#6. The widow's mite. (Mark 12, 41-44, Luke 21, 1-4):  The parallel here is with a story in a work of Asvaghosha certainly later than the Gospels. 

A poor maiden, who had heard the monks preaching, "recollected that some time before she had found in a dungheap two copper mites, so taking these forthwith she offered them as a gift to the priesthood in charity. At this time the president (sthavira), who... could read the heart of men, disregarding the rich gifts of others and beholding the deep principle of faith dwelling in the heart of this poor woman... burst forth with an utterance in verse." Soon after the king passes by and sees her, and finally makes her his chief queen. 

Neither religion needed to borrow this truth, but it is the fact that two coins are mentioned which gives force to the idea of borrowing. Chronology is against the probability that it was on the part of the Evangelists. --- Edward Joseph Thomas, {The Life of Buddha}

#6 과부의 동전 두 닢 (마르코/마가 12:41-44, 루가/누가 21:1-4): 아슈바고사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와 유사한 에피소드는 확실히 {복음서}들보다 후대의 내용이다.

"...승려들의 설법을 들은 한 가난한 처자 예전에 똥더미 속에서 구리동전 둘을 찾았던 것을 기억해내고, 이 동전 둘을 승려 앞에 보시했다. 이때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던 상좌승려는 부유한 다른 이들의 보시보다는 이 가난한 처자의 마음 속에서 깊은 이치를 보게 되었고 게를 설했다". 이후 근처를 지나가던 황이 그 처자를 보고는 그녀를 데려다 첫째 왕비로 삼았다.

이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두 종교 (불교, 기독교)가 이야기를 서로 빌려올 필요는 없다. 그러나 바쳐진 "두 동전" 이야기 때문에 상호 간에 내용을 빌려왔을 가능성이 제시되는 것도 사실이다. 연대 상으로만 본다면 {복음서}들의 저자들이 (불교 쪽에서 내용을) 빌려왔을 확률은 낮다.  --- 에드워드 조셉 토마스, {붓다의 생애} / 번역: 최광민

그럼 혹시 연대적으로 {복음서}가 {대장엄론경}보다 앞선다면, 그럼 아슈바고사가 {복음서}에서 내용을 빌려왔다고 설명해야 할까? 사실은 그것도 아니다. 에드워드 토마스도 진술했다시피, 이런 내용의 "종교적 가르침/진리"를 펴기 위해  굳이 다른 종교(들)로부터 일화를 베껴올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 왜 두 에피소드에는 모두 "2"가 등장할까?

{대장엄론경}의 경우, '두 동전'은 거름더미 사이에서 '발견'된 것으로 2란 숫자에 부과되는 의미는 없다. 처자는 그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보시했을 뿐이고, 그것이 공교롭게도 2 닢이었을 뿐이다. 다른 문맥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서의 2는 다른 문맥없이 그냥 2이다.

한편 {복음서}의 '동전 두 닢"인 '두 렙톤'에는 흥미로운 역사적 의미가 있다. {복음서}에는 AD 1세기 초반, 로마의 속국이었던 유대-이두메 왕국 일대에서 사용되던 통화단위 몇 가지가 등장한다. 당시 통용되던 은화인 '데나리온'은 예수 당시 노동자의 하루 일당에 해당한다. 동전인 '앗사리온'은 1/16 '데나리온', 동전인 '쿼드란스'는 1/64 '데나리온', 유대인 청동주화인 렙톤은 1/128 '데나리온'이다. 1 '쿼드란스'란 '앗사리온'의 1/4이라서 '쿼드란스' (1/4)로 불렸다.

두 렙톤, 즉 로마 화폐단위로 1 쿼드란스로는 빵을 굽기 위해 곡물가루 한 줌이나 참새 한 마리를 살 수 있는 가치가 있었다. 그러니까 한 끼, 혹은 한 나절 식사를 해결할 만한 액수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두 렙톤'은 성전헌금으로 바쳐질 수 있는 최소 액수였다. 성전에 바치는 최소 헌금액수를 언급한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기록 ([바바 바스라] 10B)이 있다 (Edersheim, Life and Times of Jesus the Messiah, vol. 2, p. 388, cites Babha B. 10b.)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해당 단락을 읽어보자. (Folio 10a Baba Bathra 10b) 이 단락은 자선헌금에 대한 랍비들 간의 견해를 옮기고 있다.

When a man gives without knowing to whom he gives. and the beggar receives without knowing from whom he receives. 'He gives without knowing to whom he gives': this excludes the practice of Mar 'Ukba.1 'The beggar receives without knowing from whom he receives': this excludes the practice of R. Abba.2 How is a man then to do? — He should put his money into the charity box.

주는 사람은 누구에게 줘야 하는지 모르고, 받는 거지는 누구로부터 받아야 하는지 모를 때가 있다. '누구에게 줄 지 모르고 주는' 경우란 마르 우크바의 경우는 제외된다. '누구로부터 받는지 모르는 거지'의 경우에서 랍비 아바의 경우는 제외된다. 그럼 이 돈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이 돈을 자선함에 넣어야 한다.

The following was adduced in objection to this: 'What is a man to do in order that he may have male offspring? R. Eliezer says that he should give generously to the poor; R. Joshua says that he should make his wife glad to perform the marital office. R. Eliezer b. Jacob says: A man should not put a farthing (=perutah) into the charity box unless it is under the supervision of a man like R. Hanina b. Teradion'?3 — In saying [that a man should put his money into the charity box] we mean, when it is under the supervision of a man like R. Hanina b. Teradion. //  (I.e., as reliable as R. Hanina, but not necessarily as pious. V. Tosaf. s.v. [H]. )

...랍비 엘리에젤 벤 야코프는 말한다: "만약 랍비 하니나 벤 테라디온 같은 사람이 감독하지 않는다면, 자선함에 한 닢 (=페루타)를 넣어서는 않된다."......  / 번역: 최광민

{탈무드} 주석에 따르면 여기 등장하는 '랍비 하니나 벤 데라디온'은 특별히 경건하지는 않았지만 신뢰할 만한 인물의 대명사이다. 자, 이 {탈무드}에 등장하는 '한 닢의 단위'는 아람어 '페루타/프루타'다. 예수와 동시대인인 헤롯 아그리파 (BC 10 - AD 44)가 유대아의 왕으로 즉위하기 전까지, 유대아-사마리아-갈릴리는 로마 이전의 지배세력이었던 시리아의 그리스계 왕조였던 셀레우키드 왕국 때의 통화제도를 여전히 따르고 있었다. 환산하면 로마의 1 쿼드란스 (κοδράντης)는 2 렙톤이고, 2 렙톤이 바로 1 페루타였다.

그렇다면 예수 당시에 적절한 감독 하에 헌금함에 넣을 수 있는 최소 헌금액수는 1 페루타, 즉 '두 렙톤'이다. 그러니까  {복음서}의 과부는 (물론 본인에겐 큰 액수였겠지만) 아마도 당시 관례상 허용된 최소치를 헌금한 것이다.

성전의 이 헌금함에 돈을 넣게 되면, 헌금함을 지키고 있던 제사장은 바쳐지는 봉헌의 종류와 봉헌의 목적을 묻고 거기에 맞는 예물의 양이나 헌금액의 액수를 큰 소리로 불러주기 때문에, 근처에 있던 사람 역시 그 목적과 액수를 알 수 있었다. 성전 헌금궤 앞에서 지켜보던 예수와 제자들 역시 제사장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부자와 가난한 과부는 같은 시간대에 헌금했으므로, 부자들은 과부보다 (절대량으론) 많은 헌금을 한 후 우쭐했을 것이고, 가난한 과부는 심리적으로 위축되었을 것이다.




# 교훈의 의도?

{대장엄론경} 제 22화의 내용과 교훈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청정한 마음으로 정성껏 승려들에게 보시하면 보시한 양과 상관없이 큰 과보를 얻게 된다"가 그 교훈이다.

그럼 {복음서}는 도대체 뭘 말하려는 것일까? '전 재산을 반드시 다 바쳐라'일까? 역사적으로 해당 구절을 그렇게 해석한 그룹들도 있지만 (주로 중세기에 청빈을 강조하던 수도공동체들), 텍스트만 본다면 꼭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읽는다면, 예수는

  • 예수는 '일부만 바친' 부자들과 달리 과부는 "전부를 봉헌했다"는 '사실'을 적시한다.
  • 과부가 헌금을 바친 마음은 훌륭한 것이었을지는 모르나, 정작 예수 본인이 이 과부의 행동을 '칭찬'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 이후 과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 가령, 복을 받았는지? - 후일담은 전혀 없다.  
  • 문맥상, 예수는 (1) 바로 앞 단락의 '과부를 등쳐먹은 율법사'들의 위선과 (2) 액수 상 부담없는 헌금을 내고도 우쭐거리는 '부자'들을 겨냥해 말하고 있다.

이것이 가감없이 텍스트를 읽었을 때 우선적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다.


§ 맺음말

이런 전체 맥락없이 과부의 '헌금액수', 즉 '전부'에 대해서만 말하며 '헌금을 독려'하는 행위는 사실은 {복음서}의 해당 단락을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이 "가난한 과부의 두 렙톤" 에피소드를 가져다가 "과도한 헌금액수"를 신자들에게 "독려"하면서 "그리하여야만 무한한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설교하는 목사들이 있다면, 그들이야 말로 {대장엄론경} 제 22화를 (그나마 무리하게) 베껴와 억지로 {복음서}에 적용하는 장본인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판단은 각자의 몫.


草人 최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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