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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tist. Husband. Daddy. --- TOLLE. 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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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에큐메니칼 써핑 #2: 퀘이커 미팅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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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Kwangmin Choi, 2003-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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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에큐메니칼 써핑 #3: 퀘이커 미팅 방문

순서
  1. 방문 교회/교단
  2. 프렌즈 혹은 퀘이커
  3. 예전
  4. 정리

1. 방문 교회/교단

  • 방문일: 2003.7.27
  • 교회/교단: Bloomington Friends Meeting (퀘이커)
  • 두개 사안에 대한 이 교회의 입장
    • 이라크전에 찬성하는가?: 반대
    • 동성애자를 교회에 받아들일 것인가?
      •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경우: 포괄적 찬성 혹은 노코멘트
      • 동성애 육체관계까지 하는 (practice) 경우: 반대 혹은 포괄적 찬성


    Friends Meeting Hall, Bloomington, Indiana

    2. 친우회(프렌즈), 혹은 퀘이커

    공식명칭은 종교친우회(Religious Society of Friends)이지만, 원래 이들을 조롱하는 말이다가 "공식적인" 별명이 된 '퀘이커(Quakers)'로 일반에 더 잘 알려진 이들은 17세기 영국의 종교개혁에서 매우 특이한 위치를 차지했다. 스스로는 보통 "프렌즈"라고 부른다. 이 글에서는  "퀘이커"로 통일하겠다.


    17세기 영국의 종교개혁 과정 중에서, 퀘이커는 주교제 프로테스탄트 교단으로서 교회와 성직자의 제도적인 위계적 권위를 강조하던 영국 국교회 (성공회)의 입장과, 오직 성서 만을 유일한 권위로 삼았던 칼뱅주의 퓨리턴의 입장을 둘 다 거부했다.

    1660년대에 퀘이커 운동을 시작한 영국의 George Fox는 신이 모든 인간의 영혼에 비추는 '내면의 빛, Inner Lignt' (퀘이커의 원래 용어로는 "Inward light" - 뉘앙스가 약간 다르다 / 필자 주) 를 강조하며, 신부나 목사, 혹은 교회와 성사 (세례와 성만찬)라는 '외형적 제도'를 통하지 않고도, 신자들을 향한 신의 직접적인 계시와 각성이 존재함을 가르쳤다.

    그래서 퀘이커리즘의 핵심은 바로 개개인이 신의 이 직접적 계시와 내면의 빛을 찾는데 있다. 그래서 오직 성서 만을 최종적 권위로 인정하는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교단의 가르침과 다르게, 퀘이커들은 성서와 아울러 '내면의 빛' 혹은 '내면을 비추는 빛'에 같은 권위를 부여한다. 이것을 인간 내에 발견되는 신과 그리스도의 현전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감정의 번잡함을 배제하고 오직 개인의 양심과 영혼 깊숙히 침잠해 들어가는 퀘이커들의 침묵예배의 정신과도 일치한다.

    퀘이커의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적이다. 프로테스탄트 좌파의 또 다른 흐름이던 메노 시몬스가 이끈 재세례파(Ana-baptist) 교도들(아미쉬들은 재세례파의 한 분파다)처럼 전쟁과 병역을 거부하는 이들은 (사실상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은 (기독교에서는 이단으로 분류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독자적 교리가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좌파 기독교의 역사에도 상존해 왔다.), 재세례파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직과 세례를 포함한 모든 교회의 제도적 장치를 거부한다. 역사적으로 퀘이커들은 노예제도를 맹공했고, 전쟁에 반대했으며, 탄압에 대한 무저항/비폭력 저항을 견지하는 등 사회적 이슈에 평화주의 노선을 견지하면서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

    많은 퀘이커들이 영국 국교회와 칼뱅주의 퓨리턴들의 탄압을 받았고, William Penn이 이끈 일군의 퀘이커들은 현재 미국의 펜실베이아로 이주해서 이 지역을 개간했다. 펜실베니아는 Penn + Sylvania의 합성어로 개척자인 Willam Penn을 기념하고 있다. 이들은 퓨리턴들이 중심이 되었던 북동부 개척민들과 달리, 아메리카 원주민과도 평화적으로 공존했다. 퀘이커의 비폭력/무저항 정신은 20세기 초반 남아프리카를 방문 중인 마하트마 간디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현대 미국의 퀘이커는 크게 삼분되어 있다. 한편의 리버럴은 기독교의 정체성이 많이 흐려져 거의 유니테리언처럼 된 그룹이 있는가하면, 다른 한편에는 복음주의에 속하는 그룹도 있다. 퀘이커의 분열은 19세기 초반에 두번에 걸쳐 일어났다.

    첫 분열은 전통적 퀘이커 (Orthodox Friends)와 신학적으로 자유주의자/리버럴 퀘이커에 속하는 힉스파 (the Hicksites) 사이에서 1820년대 중반에 일어났다. 분쟁은 롱 아일랜드 출신으로 농촌지역의 순회 목회자이던 엘리아스 힉스에 대한 논쟁으로 시작되었다. 힉스는 당시 미국과 영국의 부유한 도시거주 퀘이커들이 당시의 복음주의적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영향을 받아 성서의 권위를 중시하고 칭의/성화/삼위일체 등 퀘이커들이 그동안 그다지 관심을 보여오지 않던 신조들을 명시적으로 표현하는 추세를 보이던 점을 겨냥해, 성서의 묵상과 탐구보다는 신을 직접 경험할 것을 강조한 퀘이커 초기 가르침을 강조하게 된다. (아울러 총회를 연례회로 하자는 전통파와 윌례회로 하자는 힉스파 사이의 사소한 분쟁도 있었다.) 특별히 필라델피아의 전통파 퀘이커들은 힉스를 배격했는데, 그 이유는 힉스가 초기 퀘이커의 가르침을 강조한 것을 넘어서 성서의 권위를 폄하하는 발언과 함께 전통적인 기독교의 기본교리를 부정하는데까지 나아갔기 때문이다. 가령, 힉스는 성서의 일부는 부정확하며 - 특별히, 예수의 처녀수태는 역사적으로 의심스러우며 - 또한 이런 "의심스런 것을" 믿는 것은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공공연히 가르쳤기 때문이다. 아울러 힉스는 자신이 신과 직통으로 늘 대화한다고까지 공언했다. 힉스파는 필라델피아 연례총회에 맞서 총회를 떠나 독립된 그룹을 형성했다.

    두번째 분열은, 1830년대부터 시작된 전통파 내부의 분열이다. 신학적 리버럴에 속한 힉스파를 배제한 후, 전통파 퀘이커는 내면의 빛을 성서보다 우위에 두는 초기 퀘이커의 입장을 고수할 것인지, 혹은 당대에 힘을 더해가던 프로테스탄트 복음주의 운동을 따라갈 것인지를 두고 갈등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오하이오 연례회 소속의 엘리셔 베이츠는 영국을 방문하던 중에 복음주의 운동의 모임에 참석해서 세례를 받게 되는데, 세례 등 성사를 부정하던 오하이오 연례회는 그를 제명시킨다. 이 무렵 영국 감리교단의 성화교리에 영향을 받은 퀘이커 조셉 존 거니 (Gurney)는 미국을 방문하게 된다. 거니는 퀘이커들은 그동안 성서를 지나치게 무시했다고 비판했고, 사회참여에 대해서는 선거 등을 통해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독려했다. 아울러 그는 전통적인 퀘이커 복식을 거부했다. 이에 맞서 로드 아일랜드의 퀘이커 존 윌버가 거니를 비판하면서 전통파 퀘이커는 1842년 복음주의 퀘이커인 거니파와 (Gurneyites) 보수/전통파 윌버파 (Wulburites)로 쪼개지게 되고, 지역연회에서의 분열도 이어 15년 간 일어났다.

    한국의 무교회주의자 유영모의 제자였던 사상가 함석헌씨는, 비록 본인은 자신을 "퀘이커 교도"로 분명히 자리매김하지는 않았으나, 여자문제로 인해 스승으로부터 배척당한 후, 훗날 퀘이커 모임에 참석했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퀘이커로 간주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사상적 흐름이 퀘이커에 잘 맞는다고 했을 뿐,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퀘이커'로 명시하지는 않았다. 만약 그를 '퀘이커'로 보아야 한다면, 그를 리버럴 퀘이커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자리에 조용히 앉아 어린 시절 {명화극장}에서 보았던, 1860년대 인디애나를 배경으로 게리 쿠퍼가 퀘이커 가장을 연기했던 {우정어린 설복, Friendly Persuasion}을 잠시 추억한다.


    3. 예전 

    오하이오 연례회 소속의 윌버파에 속하는 블루밍턴의 퀘이커 모임은 "un-programmed worship"에 따라 예배와 묵상이 이뤄지는 곳이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모임 장소를 church라고 하기보다는 meeting house라고 부른다.

    퀘이커들은 두가지 예배방식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예전적인 Programmed고 다른 하나는 비예전적인 Unprogrammed다. Programmed는 다른 프로테스탄트 교단처럼 예배 중에 찬송을 부르고, 목사의 설교를 정식순서에 두고 있다. 물론 퀘이커 정신에 따라 짧지만 묵상의 시간을 예배 중에 두고 있다. 이에 비해 훨씬 전통적이고 원칙적인 퀘이커들의 예배는 Unprogrammed worship이며 전통파 퀘이커들이 선호하는 방식이다. 예배에 아무런 순서도 원칙도 예전도 없다는 말이다. 예배자들은 미팅 홀에 둘러앉아 침묵하며 묵상과 기도에 집중한다. 어떤 찬송가도 설교도 수반되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성직자가 개입할 이유가 없다. 묵상 중에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각자 묵상과 기도 중에 깨달은 점을 일어나 짧게 언급하고 다시 앉으며, 이런 침묵의 시간이 1시간 가량 이어진다. 이들에게 음악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동찬양은 보통 침묵예배 이전에 열정적으로 불려진다.

    정리하자면 퀘이커리즘은 일종의 신비주의다. 그러나 이 말의 용례는 주의를 요한다. 퀘이커의 신비주의는 감정이 폭주하는 광신의 신비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퀘이커의 신비주의는 자신의 내면과 신을 향한 조용한 직관과 집중을 통해 얻어지는 평화에 그 핵심이 있다. 바로 이 점이 퀘이커의 가르침, 즉 인간을 향한 신의 직접적 계시라는 관점이 내포하는 잠재적 위험성에서 퀘이커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 즉, 퀘이커들은 신으로부터 왔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직관과 충돌하는 경우, 이에 대해 다시 깊은 성찰을 시작한다. 그래서 만장일치가 이뤄질 때까지 묵상을 반복한다. 이것은 목놓아 외쳐대고 들떠있는 (열)광적인 신비주의자들에게서 상상할 수 없는 겸손한 자세다.

    모임은 매우 경건했다. 그러나 퀘이커 침묵집회는 종교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에게는 따라가기 쉽지않은 예배방식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종교에 처음 귀의하는 많은 사람은 내면의 빛을 찾기보다는 종교의 권위 혹은 율법적 명령과 계율을 (다소 맹목적으로) 단순히 따르는 것에서 빠르고 손쉬운 위안을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신과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기 두려운 사람들 역시 퀘이커의 모임을 힘들어 할 것이다. 그러나 내면적 각성과 침묵 속에서 이뤄지는 신과의 교감을 강조하는 퀘이커들의 가르침은 높은 수준의 영성을 요구한다는 점과 이것이 어쩌면 신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궁극적인 목표라는 점을 잊어서는 않된다. 내가 만났던 많은 퀘이커들은 자신들의 이 원칙에 매우 깊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침묵의 예배가 마치고, 광고시간에는 이라크 전쟁에 대한 미국정부의 절차적 문제에 대한 조사권을 발동하고, 북한의 핵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을 위해 정부와 이웃을 상대로편지를 쓰자는 제안이 나왔다. 퀘이커들의 평화주의는 세상으로부터 은둔하는 평화가 아니라, 매우 실천적인 평화주의라는 것을 새삼 각인시켰다.

    환영의 시간에 (이것 조차도 조용하게 이루어졌다.) 건너편에 앉은 Janice라는 70대 할머니는 큰 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한국어로 인사했고, 나의 오른쪽에 앉은 노인은 자기 아들이 3명의 한국고아를 입양했다며 역시 한국어로 인사했다. (이 노인의 말에 따르면 나는 1980년 이후로 이곳 퀘이커 미팅을 찾은 최초의 동양인이라고 했다.) Janice할머니는 1964년에 일본 도쿄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퀘이커 모임의 서포팅 그룹에서 일했고, 70년대에 서울의 외국어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서울의 퀘이커 모임에서 함석헌 옹과 교분을 가졌다고 귀뜸해 주었다.

    (함석헌이란 인물에 대해 특별한 환상을 갖고 있진 않지만) 미국에서 듣는 '함석헌'이라는 이름은 특별한 느낌이었다.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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