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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뷔리당의 당나귀: 자유의지와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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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02-12-30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제목
뷔리당의 당나귀: 자유의지와 선택
순서
- 뷔리당의 당나귀
- 안다-믿는다. 사고한다=행동한다.
당나귀, Wikimedia Commons
1. 뷔리당의 당나귀
쟝 뷔리당(Jean Buridan)은 서기 1300년대 초-중반 파리대학에서 활동한 스콜라 학자로서, 윌리엄 오캄에게서 논리학을 배웠고 일반적으로 윌리엄 오캄의 영향을 받는 유명론자 그룹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한다. 로마카톨릭 신부였던 쟝 뷔리당은 철학자와 과학이론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는 논리학 뿐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론을 비판하고 대신 '임페투스 이론'을 개선하여, 훗날 갈릴레이의 임페토, 혹은 데카르트의 모멘툼에 아주 근접한 관성이론을 제시했다.
뷔리당의 비유로 흔히 {뷔리당의 다리}와 {뷔리당의 당나귀} 비유로 후세에 알려져 있다.
전자인 {뷔리당의 다리}는 그의 {소피스마타 Sophismata}에 기술된 재미있는 논리적 파라독스 가운데 하나다. 그 내용은 이런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강을 건너려는데 플라톤이 다리를 지키고 있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에게 '당신의 첫번째 명제가 참이라면, 다리를 건너게 해줄테지만, 거짓이라면 당신을 강물에 내던지겠소"라고 말한다. 그저자 소크라테스는, "넌 날 강에 던질거야"라고 답한다.
이 경우 플라톤은 역설의 함정에 빠진다. (1)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강에 던질 수 없는데, 이 경우 그가 한 약속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2) 하지만 그렇다고 소크라테스를 통과시킬 수도 없는데, 그럴 경우 소크라테스의 진술은 거짓이기 때문이다.
{뷔리당의 당나귀}는 자유의지와 선택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여기 한 당나귀가 있다고 하자. 주인은 당나귀의 왼편과 오른편에 동일한 종류와 분량의 맛있는 건초를 동일한 거리에 놓아둔다. 당나귀는 과연 어느쪽 건초를 취할 것인가? 만약 당나귀가 모든 상황을 아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판단한다면 당나귀는 왼쪽과 오른쪽의 지푸라기중 어떤 것 하나를 선호할 아무런 논리적 이유를 가지지 않으며, 또 자신의 선호를 설명할 수도 없다. 결국 당나귀는 논리적인 패닉상태에 빠지게 되고 결국 굶어죽게 된다는 것이 뷔리당의 설명. 물론 뷔리당 자신도 현실세계의 당나귀에게는 이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유는 여전히 설명할 수 없지만, 당나귀는 늘 왼쪽 아니면 오른쪽을 선택한다.
사실 뷔리당은 자신의 책에서 '당나귀'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비유에 등장하는 동물은 '개'다. 이 동물을 '당나귀'로 옮긴 것은 스피노자의 {에티카}였다. 스피노자는 여기서 '당나귀'와 '사람'을 대조시켰다.
대상이 사람이라면? 바룩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이렇게 썼다.
[I]t may be objected, if man does not act from free will, what will happen if the incentives to action are equally balanced, as in the case of Buridan's ass?
[In reply,] I am quite ready to admit, that a man placed in the equilibrium described (namely, as perceiving nothing but hunger and thirst, a certain food and a certain drink, each equally distant from him) would die of hunger and thirst. If I am asked, whether such an one should not rather be considered an ass than a man; I answer, that I do not know, neither do I know how a man should be considered, who hangs himself, or how we should consider children, fools, madmen, &c. ---- Baruch Spinoza, Ethics, Book 2, Scholium
만약 사람의 행위가 자유의지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면, 마치 '뷔리당의 당나귀'의 경우처럼 행위의 동기가 동일하게 균형되어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이에 대해] 위와 같은 상태의 동등한 조건 (즉, (허기와 갈증 이외엔 아무 것도 느끼지 않고, 음식과 마실 것이 각각 동일하게 떨어져 있는 식의) 가운데 사람이 놓이게 되면, 그 사람은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죽게 될 것이라고 나도 꽤 인정한다. 그 대상을 사람이 아닌 당나귀로 간주해서는 안되지 않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스스로 목을 매는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애들이나 바보, 혹은 미친 사람 등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나는 모르겠다고 답하겠다 -- 바룩 스피노자 {에티카}
뷔리당의 '개'의 경우는 이렇다.
.. Should two courses be judged equal, then the will cannot break the deadlock, all it can do is to suspend judgement until the circumstances change, and the right course of action is clear.
.. 동일하다고 여겨지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어 이 교착생태를 의지로서 깰 수 없는 경우, 할 수 있는 것은 상황이 바뀌어 올바른 선택이 분명해질 때 판단을 보류하는 것 뿐이다. -- 쟝 뷔리당
아마도 뷔리당은 12세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이슬람 세계에서 발전시킨 후 서유럽에 재수입된 큰 공 알-가찰리의 개념에서 이를 빌려온 듯 하다. Suppose two similar dates in front of a man, who has a strong desire for them but who is unable to take them both. Surely he will take one of them, through a quality in him, the nature of which is to differentiate between two similar things. -- Abu Hamid al-Ghazali, The Incoherence of the Philosophers,
두개의 동일한 대추야자가 사람 앞에 놓여있는 경우, 그 사람이 대추야자를 먹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있더라고 두개를 모두 가질 수는 없다고 하자. 그는 유사한 대상을 구분할 수 있는 인간의 본성에 따라 분명 하나를 고를 것이다. -- 아부 하미드 알-가찰리
알-가찰리가 가져온 아리스토렐레스의 진술은 이렇다.
...a man, being just as hungry as thirsty, and placed in between food and drink, must necessarily remain where he is and starve to death — Aristotle, On the Heavens 295b, c. 350 BC
... 허기와 갈증이란 상태에 각각 동일하게 놓인 인간을 음식과 마실 것 가운데 놓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는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천체론}
2. 안다-믿는다. 사고한다-행동한다
우리는 충동적인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을 대체로 평가절하 하도록 교육 받아왔다. 모름지기 사람은 모든 가능성을 살피고, 모든 편견을 극복한 뒤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 이런 충동의 노예들의 대척점에는 너무도 신중하고 객관적임을 자부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선택에 앞서 모든 가능성을 세심히 조사하고 그것을 아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심사한다.
물론 이 경우는 뷔리당의 당나귀와는 조금 다르다. 이번의 상황은 동일한 양과 부피의 건초더미가 아니며, 선택할 대상은 조금씩 다른 실체들이다. 하지만 상황이 정말 다른가? 꼭 그렇지도 않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뷔리당의 당나귀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객관적인 판단기준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인가? 우리는 정말로 모든 가능성을 고려했는가? 판단자는 정말로 객관적일 수 있는가? 내 결정이 객관적이었다고 믿고 싶은 것은 아닌가? 이 길을 따르는 것이 '논리적'으로 '옳은' 판단이라는 것을 알지만, 이 길은 너무나 무력하다는 점도 우리는 안다. 우리는 선택과 판단에 있어서 이와 같이 이상화된 수준으로 객관적이고 공정할 수 없다. 이것은 원칙에 불과할 뿐, 어느 누구도 모든 상황과 가능성을 정확하게 동일선 상에 놓고 결정을 내리지는 않으며 늘 편향된 기호가 결정을 내리는 중요한 팩터로 작용한다.
결국 우리의 결정은 우리의 의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이 경우 우리 스스로는 우리의 의지가 과연 합리적이고 올바른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한 극단은 인간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충동의 고무공으로 만들고, 그 반대편은 인간을 늘상 재기만 하다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다면 정답은 그 둘 사이 어디에 있을 것이지만, 어느 누구도 그 둘 사이의 어디 쯤에 정답이 존재하는지는 말하지 못한다.
물론 우리는 정밀하게 재야할 것이다. 그것이 논리적으로 합리적인 태도이므로. 하지만 늘 한 발짝 뒤로 물러서 결정을 미루고 가장 최소의 선택을 하기 위해 이모저모 늘상 재기만하는 것은 실제로는 뷔리당의 당나귀가 되길 자임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재고 사유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으며, 고민에는 반드시 끝이 있어야 한다. 당나귀를 살리는 것은 편견에서 자유로운 사고가 아니라 주둥이를 돌려 건초를 씹는 행위다. 따라서 결정의 순간을 결정하는 것은 다름아닌 의지다. 그런데 나를 결정으로 이끄는 이 의지가 과연 확실한 것인지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딜레마는 다시 시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천히 뷔리당의 당나귀가 되어간다.
"나"는 어느 순간에 이르면 내 의지를 신뢰하고 과감하게 행동해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듯, 행동하지 않는 사고는 설령 그 판단의 결론이 옳다하더라도 뷔리당의 당나귀처럼 나를 천천히 아사시킬 것이므로.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의심하는 의심은, 의심조차 아닐 것이다.".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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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Kwangmin Choi, 2002-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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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리당의 당나귀: 자유의지와 선택
순서
- 뷔리당의 당나귀
- 안다-믿는다. 사고한다=행동한다.
당나귀, Wikimedia Commons
1. 뷔리당의 당나귀
쟝 뷔리당(Jean Buridan)은 서기 1300년대 초-중반 파리대학에서 활동한 스콜라 학자로서, 윌리엄 오캄에게서 논리학을 배웠고 일반적으로 윌리엄 오캄의 영향을 받는 유명론자 그룹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한다. 로마카톨릭 신부였던 쟝 뷔리당은 철학자와 과학이론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는 논리학 뿐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론을 비판하고 대신 '임페투스 이론'을 개선하여, 훗날 갈릴레이의 임페토, 혹은 데카르트의 모멘툼에 아주 근접한 관성이론을 제시했다.
뷔리당의 비유로 흔히 {뷔리당의 다리}와 {뷔리당의 당나귀} 비유로 후세에 알려져 있다.
여기 한 당나귀가 있다고 하자. 주인은 당나귀의 왼편과 오른편에 동일한 종류와 분량의 맛있는 건초를 동일한 거리에 놓아둔다. 당나귀는 과연 어느쪽 건초를 취할 것인가? 만약 당나귀가 모든 상황을 아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판단한다면 당나귀는 왼쪽과 오른쪽의 지푸라기중 어떤 것 하나를 선호할 아무런 논리적 이유를 가지지 않으며, 또 자신의 선호를 설명할 수도 없다. 결국 당나귀는 논리적인 패닉상태에 빠지게 되고 결국 굶어죽게 된다는 것이 뷔리당의 설명. 물론 뷔리당 자신도 현실세계의 당나귀에게는 이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유는 여전히 설명할 수 없지만, 당나귀는 늘 왼쪽 아니면 오른쪽을 선택한다.
대상이 사람이라면? 바룩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이렇게 썼다.
[I]t may be objected, if man does not act from free will, what will happen if the incentives to action are equally balanced, as in the case of Buridan's ass?
[In reply,] I am quite ready to admit, that a man placed in the equilibrium described (namely, as perceiving nothing but hunger and thirst, a certain food and a certain drink, each equally distant from him) would die of hunger and thirst. If I am asked, whether such an one should not rather be considered an ass than a man; I answer, that I do not know, neither do I know how a man should be considered, who hangs himself, or how we should consider children, fools, madmen, &c. ---- Baruch Spinoza, Ethics, Book 2, Scholium
만약 사람의 행위가 자유의지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면, 마치 '뷔리당의 당나귀'의 경우처럼 행위의 동기가 동일하게 균형되어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만약 사람의 행위가 자유의지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면, 마치 '뷔리당의 당나귀'의 경우처럼 행위의 동기가 동일하게 균형되어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이에 대해] 위와 같은 상태의 동등한 조건 (즉, (허기와 갈증 이외엔 아무 것도 느끼지 않고, 음식과 마실 것이 각각 동일하게 떨어져 있는 식의) 가운데 사람이 놓이게 되면, 그 사람은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죽게 될 것이라고 나도 꽤 인정한다. 그 대상을 사람이 아닌 당나귀로 간주해서는 안되지 않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스스로 목을 매는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애들이나 바보, 혹은 미친 사람 등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나는 모르겠다고 답하겠다 -- 바룩 스피노자 {에티카}
.. 동일하다고 여겨지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어 이 교착생태를 의지로서 깰 수 없는 경우, 할 수 있는 것은 상황이 바뀌어 올바른 선택이 분명해질 때 판단을 보류하는 것 뿐이다. -- 쟝 뷔리당
두개의 동일한 대추야자가 사람 앞에 놓여있는 경우, 그 사람이 대추야자를 먹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있더라고 두개를 모두 가질 수는 없다고 하자. 그는 유사한 대상을 구분할 수 있는 인간의 본성에 따라 분명 하나를 고를 것이다. -- 아부 하미드 알-가찰리
알-가찰리가 가져온 아리스토렐레스의 진술은 이렇다.
...a man, being just as hungry as thirsty, and placed in between food and drink, must necessarily remain where he is and starve to death — Aristotle, On the Heavens 295b, c. 350 BC
... 허기와 갈증이란 상태에 각각 동일하게 놓인 인간을 음식과 마실 것 가운데 놓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는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천체론}
2. 안다-믿는다. 사고한다-행동한다
우리는 충동적인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을 대체로 평가절하 하도록 교육 받아왔다. 모름지기 사람은 모든 가능성을 살피고, 모든 편견을 극복한 뒤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 이런 충동의 노예들의 대척점에는 너무도 신중하고 객관적임을 자부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선택에 앞서 모든 가능성을 세심히 조사하고 그것을 아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심사한다.
물론 이 경우는 뷔리당의 당나귀와는 조금 다르다. 이번의 상황은 동일한 양과 부피의 건초더미가 아니며, 선택할 대상은 조금씩 다른 실체들이다. 하지만 상황이 정말 다른가? 꼭 그렇지도 않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뷔리당의 당나귀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객관적인 판단기준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인가? 우리는 정말로 모든 가능성을 고려했는가? 판단자는 정말로 객관적일 수 있는가? 내 결정이 객관적이었다고 믿고 싶은 것은 아닌가? 이 길을 따르는 것이 '논리적'으로 '옳은' 판단이라는 것을 알지만, 이 길은 너무나 무력하다는 점도 우리는 안다. 우리는 선택과 판단에 있어서 이와 같이 이상화된 수준으로 객관적이고 공정할 수 없다. 이것은 원칙에 불과할 뿐, 어느 누구도 모든 상황과 가능성을 정확하게 동일선 상에 놓고 결정을 내리지는 않으며 늘 편향된 기호가 결정을 내리는 중요한 팩터로 작용한다.
결국 우리의 결정은 우리의 의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이 경우 우리 스스로는 우리의 의지가 과연 합리적이고 올바른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한 극단은 인간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충동의 고무공으로 만들고, 그 반대편은 인간을 늘상 재기만 하다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다면 정답은 그 둘 사이 어디에 있을 것이지만, 어느 누구도 그 둘 사이의 어디 쯤에 정답이 존재하는지는 말하지 못한다.
물론 우리는 정밀하게 재야할 것이다. 그것이 논리적으로 합리적인 태도이므로. 하지만 늘 한 발짝 뒤로 물러서 결정을 미루고 가장 최소의 선택을 하기 위해 이모저모 늘상 재기만하는 것은 실제로는 뷔리당의 당나귀가 되길 자임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재고 사유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으며, 고민에는 반드시 끝이 있어야 한다. 당나귀를 살리는 것은 편견에서 자유로운 사고가 아니라 주둥이를 돌려 건초를 씹는 행위다. 따라서 결정의 순간을 결정하는 것은 다름아닌 의지다. 그런데 나를 결정으로 이끄는 이 의지가 과연 확실한 것인지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딜레마는 다시 시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천히 뷔리당의 당나귀가 되어간다.
"나"는 어느 순간에 이르면 내 의지를 신뢰하고 과감하게 행동해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듯, 행동하지 않는 사고는 설령 그 판단의 결론이 옳다하더라도 뷔리당의 당나귀처럼 나를 천천히 아사시킬 것이므로.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의심하는 의심은, 의심조차 아닐 것이다.".
草人
Scientist. Husband. Daddy. --- TOLLE. 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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