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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마니, 마니광불, 사파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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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Kwangmin Choi, 200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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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최광민] 마니, 마니광불, 사파마교

순서
  1. 마니: 그리스도의 사도
  2. 마니: 빛의 붓다 (摩尼光佛)
  3. 마니: 사파마교
  4. 자료

§ 마니

내가 '마니교'라는 종교에 대해 처음으로 어렴풋하게나마 알게된 것은 국민학교 시절 방송되던 NHK의 다큐멘터리 {실크로드}를 통해서였고, 그보다 조금 더 자세한 정보를 알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고나서였다. 이 책의 화자인 서기 4세기의 기독교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청년기의 9년 간을 마니교도로 살았고, 신-플라톤주의를 거쳐 기독교로 개종한 후 고향인 북아프리카로 돌아가 생을 마칠 때까지 지중해 일대에서 번성하던 마니교와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마니교는 이미 그 종교가 발생한 3세기에 북아프리카에서 중앙아시아 일대까지 퍼져있었고, 그 최대판도는 브리타니아(영국), 북아프리카, 나일강 상류, 중국에 이르렀다. 다소 무리한 주장이지만, 일본 진언밀교가 마니교의 변형이라고 생각하며 대승비불설을 주장하는 일본의 일부 불교학자들의 견해를 수용한다면, 마니교의 동쪽 최대판도는 일본에 이르른다.

마니교에 대한 동방측 자료와 서방측 자료에는 약간 차이가 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마니교가 도입된 지역의 문화에 맞춰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리모델링 되거나 습합되는 경향이 많았기 때문이다. 마니교는 종종 이식된 지역의 토착신의 "이름"을 받아들여 마니교 신/정령들의 이름을 개명하는 경우가 많았고, 종교용어에 있어서도 지역의 언어를 적극 수용했기 때문에, 그 결과 때때로 같은 개념이 다른 용어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종교적 혼합주의와 절충주의의 대표적 사례로 통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마니교의 기원은 다음과 같다:

마니교의 창시자 마니(서기 216-277) 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고 종교와 정치를 통합한 사산조 페르시아(서기 226-651)의 초대 군주인 알데씨르(재위, 서기 226-240)가 통치하던 시대에 활동했다. 마니의 제자 도마가 쓴 것으로 여겨지는 {진주의 노래}에는 마니로 암시되는 주인공이 '왕의 아들'로 묘사되고 있으며, 이는 그의 모계가 파르티아 왕가의 후손이기 때문인 듯 하다. (마니가 9살 무렵에 파르티아는 사산조 페르시아로 대체된다.) 그리스어로 작성된 {카이른 파피루스, Cairn papyrus}에 따르면, 원래 페르시아의 수도 엑바타나 출신이었던 마니의 아버지 파탁 바바크(Fatak Babak)는 유대-기독교적이고 그노시스적인 종파이던 엘카사이(Elkasite) 파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마니의 가르침은 지중해 지역의 그노시스를 대표하던 마르키온, 바실리테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일대에 자리잡고 있던 만디안/나조렌들의 영향이 혼합되어 있다.


마니가 새겨진 인장. 시리아어 "마니,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출처: Museum für Indische Kunst, Berlin)

후대의 마니교 문서는 마니가 파테키오스(Patekios)라는 사람의 수제자였다고 적는 반면, 그리스/라틴계 자료에는 테레빈토스(Therebintos)라는 제 3의 인물 역시 파테키오스의 제자로 등장하는데, 이 결과 마니교의 기원이 파테키오스 => 테레빈토스 => 마니의 3단계로 이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식 이름 '테레빈토스'가 원래는 아람어로 ‘제자’를 뜻하는 ‘타르비타’에서 왔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었다. 즉 ‘테레빈토스’란 특정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제자’라는 의미의 아람어 단어가 그리스어화하는 과정에서 사람 이름으로 오인되었다는 것이다. 역시 그리스식 이름인 '파테키오스'는 마니의 아버지 이름 ‘파탁’이 그리스어화 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파탁/파테키오스’의 제자인 ‘테레빈토스’는 바로 그의 아들 마니가 된다. 또 다른 문헌에서는 마니에게 가르침을 전수한 사람을 ‘스키티아노스(Scythianos)’ 라 부르는데, 아마도 그의 아버지가 스키타이 지역 출신지역 이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마니교 기원에 대해서는 동부와 서부의 서술에 차이가 나므로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Acta Archelai}라는 서방측 자료가 마니의 사후 1세기 안에 씌여진 것이 확실하다면, 이 서방측 자료에 비중을 더 둘 수는 있다.

마니교 문서인 {진주의 노래}는 창조주가 아담의 몸 속에 귀한 진주를 묻었고, 그 진주가 몸에서 몸으로 전해지다가 마리아를 거쳐 탄생한 예수에게 전해졌다고 노래한다. 마니는 스스로를 ‘예수의 충실한 사도’라 주장하며 자신의 저술은 늘 '예수그리스도의 사도 마니'라는 머릿말로 시작했다. 그는 또 예수를 찬양하는 많은 찬송을 남겼다. 그래서 마니교 출신이었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와 그 당대의 기독교 변증가들은 그노시스가 기독교라는 줄기를 이용해서 거기에 기생하는 것처럼, 마니교 역시 기독교의 용어와 가르침에 대한 기생체로 간주했다. 같은 맥락에서 마니는 자신을 ‘파라클레토스’라고 부름으로써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예언이 자신에게서 성취되었다고 가르쳤다. ({요한복음}에서는 그 ‘파라클레토스’를 ‘성령’으로 암시한다.)

마니교에서는 ‘영원한 아버지’가 마니 이전에 인류에게 보낸 구약성서의 예언자들 (노아, 셈, 아브라함, 에노스, 에녹 등), 그리고 니코테오스(Nikotheos, Nikotheas) 등 그노시스 주창자들, 그리고 붓다나 짜라투스트라 등으로 구성된 일련의 예언자 리스트를 제시했고. 마니 자신을 이 일련의 계시의 최종완성이라 불렀다. 그래서 마니는 ‘예언자들의 봉인(Seal of Prophets)’이라고 불리게 된다. 그런데 이 호칭 ‘예언자들의 봉인’은 또한 4세기 후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에게 적용될 것이며, 아울러 19세기가 되면 바하이교의 교조 바하울라가 이 호칭을 자기에게 적용시킬 것이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모든 율법과 예언자의 완성이다.

마니는 자신이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했던 "파라클레토스", 즉 성령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Wh]e[n] the church of the saviour was raised to the heights, my apo/stolate began, which you asked me about! From that time on was sent the Paraclete, the Spirit of truth; the one who has / co[me] to you in this last generation. Just like the saviour sa/id: When I go, I will send to you the Paraclete. / [Whe]n the Paraclete comes, he can upbraid the world concerni[ng / sin, and] he can speak with you on behalf of right[eou]sness, and 10 [about] judgement, concerning the sinners who believe / [me not; ... *5 he] can speak with you [... / ... / ... / ... 15 ...] he can s[p]eak with you and preach [... / ...] that [...], the one who will honour me and [... / ...] he gives to you. / [...] preach on behalf of the Paraclete of truth, that he / [...] he came to manifest the one whom he had known [... 20 ...] the appointed time of all these years, as they [... / ... from] Jesus until now [... / ... / ...] until he [... / ...] and he makes them free. Yet, when the church as25sumed the flesh, the season arrived to redeem the souls; like / [the mont]h of Parmuthi that cereal shall ripen i[n], / to be harvested.

"...구세주의 교회가 흥왕할 때 나의 사도직이 시작되었다. 그 이래로 진리의 영인 파라클레토스 (필자 주:마니를 말함)가 보내져, 이 최후의 시대를 살고 있는 너희들에게로 왔다. 이는 예수가 "내가 떠나면 너희에게 파라클레토스를 보낼 것으며, 파라클레토스가 오면 그는 죄에 관하여 세상을 꾸짖고..."..    --- 번역: 최광민

한편, 마니는 교리요강인 {케팔라이아, Kephalaia}에서 붓다, 짜라투스트라, 그리고 예수를 자신의 선구자 세 명으로 거명한다. 마니는 이 셋이 형제이며 같은 지혜를 전한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그리스어로 된 마니교 문서에서는 윤회전생에 대한 개념을 제외하면 불교의 흔적을 찾기가 그다지 쉽지 않다. 아마도 윤회에 대한 다른 설명은 불교와 보다 습합된 동부 마니교와 다른 양상을 보이는 서부 마니교의 교리적 차이를 반영하는 듯 하다.




§ 빛의 붓다(摩尼光佛)로서의 마니

마니는 철저한 이원론적 우주관과 종교적절충주의 그리고 윤회전생을 기반한 교리를 가르쳤다. 유럽, 아프리카, 지중해 동부지역의 원 카톨릭 교회와 중앙아시아의 네스토리우스 교회에서는 마니교에서 개종한 신자들을 입교시킬때, 스키티아노스, 짜라투스트라, 붓다, 그리고 마니의 가르침을 저주할 것을 맹세시켰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I curse Zarades (Zoroaster) who, Manes said, had appeared as a god before his time among the Indians and Persians, and whom he calls the Sun. I curse those who say Christ is the Sun, and who make prayers to the Sun, and who do not pray to the true God, only towards the East, but who turn themselves round, following the motions of the Sun with their innumerable supplications. I curse those person who says Zarades and Budas and Christ and the Sun are all one and the same" - Godfrey Higgins, {Anacalypsis} Vol I, A & B Books, 1992, p. 722.

...마니의 말에 따르면 그의 시대 이전에 인도인들과 페르시아 사람들 사이에서 신이자 태양으로 여겨졌던 짜라투스트라를 나는 저주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태양이라고 말하는 자들을 저주하며, 진실된 (기독교의) 신에게 동쪽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의 움직임을 따라 돌면서 태양에게 수많은 기도를  바치는 자들을 저주합니다. 나는 짜라투스트라와 붓다와 그리스도와 태양이 모두 하나요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저주합니다."....  ---번역: 최광민

마니교 문서 {Kephaalia, 교설}에 따르면, 마니는 사푸르 1세가 즉위한 서기 240년, 군데사푸르의 왕도에서 그의 새 가르침을 사푸르에게 전한 것으로 되어있다. 마니가 자신과 다른 "예언자"들을 어떻게 관계지었는가는 아래의 발언에 드러난다.

마니교 문서: http://essenes.net/mani/0texts.html

"...As once Buddha came to India, Zoroaster to Persia, and Jesus to the lands of the West, so came in the present time, this prophecy through me, the Mani, to the land of Babylonia..."

…붓다가 인도로, 짜라투스트라가 페르시아로, 예수가 서쪽나라로 갔던 것처럼, 오늘날 나 마니를 통해 이 예언은 바빌론에 왔다…” --- 번역: 최광민

"...In the last years of Ardash[ir] 25 the king I came out to preach. I crossed to the country of the Indians. [I] / preached to them the hope of life. I chose in that place / a good election. Yet, also, in the year [that Ar/da]shir the king died Shapur his son became king. He [...] / I crossed from the country of the Indians to the land of the Persians. Also, from the land of Persia I came [to] the land of Babylon, Mesen[e] / and Susiana. I a[pp]eared before Shapur the king. He rece/I[v]ed me with great ho[nou]r. He gave me permission to journey in [... / ...pr]eaching the word of life. I even spent some year[s / ...] him in the retinue; many years in Pers[i]a, in the country of the Partians, up to Adiabene, and / the bor[de]rs of the provinces of the kingdom of the Romans. /

"… 알다시르 왕의 통치 마지막 동안 나는 설교하러 떠났다. 나는 인도인의 나라로 가서 생명의 희망에 대해서 설교했다. 거기서 나는 제자를 뽑았다. 알다시르 왕이 죽은 해 그의 아들 샤푸르왕이 왕위에 올랐고....나는 인도에서 페르시아로 갔다가 페르시아에서 다시 바빌론과 메세네와 수샤나로 갔다. 샤푸르 왕은 내게 생명의 말을 설교하러 다닐 수 있도록 허가했다. 나는 그를 여러 해 보좌하기도 했고, 페르시아, 파르티아, 그리고 아디아베네, 그리고 로마 접경 지방에서 여러 해 머물렀다…"  --- 번역: 최광민

사푸르왕이 죽은 후, 마니교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국교인 조로아스터교와의 대립에서 패배한 마니의 처형과 함께 축출되어 인도의 북서쪽 박트리아/소그드 지방에서 스키타이계 소왕국들과 그리스계인 파르티아 왕국에서 크게 퍼져나가면서 몇몇 왕국의 국교가 되며 번성한다. 흥미롭게도 바로 이 지역은 인도 서북부의 대승불교가 인도를 떠나 동아시아로 이동해 나가던 전진기지였고, 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 경교가 이동해 들어오던, 즉 서방종교가 중국으로 가는 1차 관문이면서 동시에 여러 종교들의 교리가 뒤섞이게 되는 혼합주의/절충주의의 온상이기도 했다.

그 한 예로써, AD 8-10세기에 중국 서부 신장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실크로드 지역에 조성된 툰황 등 불교석굴들에서 출토된 문서들은 기묘하게도 대승불교 경전 뿐 아니라, 다수의 마니교 경전 사본을 포함하고 있으며 나아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문서를 포함하기까지 한다. 중앙 아시아 실크로드에서 북부 인도에 이르는 지역에 설립되었던 AD 2-7세기의 대규모 불교승원/수도원의 일부는 마니교 수도원으로 밝혀졌다. 특히 실크로드의 주요 관문이었던 투르판/가오창과 베제클릭에서 발견된 수도원에서 대규모로 출토된 마니교 문서들은 이 지역이 마니교의 주요 요충지였음을 재확인 시켰다. (베제클릭 천불동에서 발견된 마니교 문서들)




투르판/가오창 근방의 베제클릭 천불동 (千佛洞) (출처: Wikimedia Commons)



흰옷을 입고 수염과 머리를 기르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마니교의 성직자 - "선택된 자 (Elects)"들, 투르판/가오창/Khocho, Ruin K. 8th/9th century AD. Painting on paper. 17.2x 11.2 cm. III 6368. (출처: Wikimedia Commons)


염주를 굴리며 베마(Bêmâ) 의식을 거행하는 마니교도들, 투르판/가오창 (출처: Museum für Indische Kunst, Berlin)

이 지역의 마니교도들은 주로 실크로드를 따라 교역하던 서역계 상인들로서 아람어, 소그드어, 페르시아어, 투르크어를 구사했으며, 이들은 실크로드 요충지를 따라 조성된 마니교 수도원을 중간 기착지와 휴식 및 치료의 장소로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중앙아시아, 북인도, 중국 전역에서 마니교도는 탁월한 의술로 널리 알려졌다.

툰황석굴에서 발견된 문서 가운데 페르시아어에서 중국어로 AD 731년에 번역된 {빛의 붓다 마니의 가르침, The compendium of the doctrines and styles of the teaching of the Mani, the Buddha of light} 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광명의 붓다(光明佛)인 마니는 2월 8일 서역에서 태어났다,”라고 되어 있다. 중국의 마니교도들은 자신들을 ‘빛의 붓다 마니(摩尼光佛) 의 제자’라고 불렀는데, 마니는 이 외에도 마이트레야/미륵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중국 마니교의 역사에 대해 읽어본 책들 가운데 새뮤얼 리우의 아래 책이 가장 훌륭한 듯 싶다.


  • Samuel N. C. Lieu , {Manichaeism in Central Asia and China: (Nag Hammadi and Manichaean Studies}
  • Samuel N. C. Lieu, {Manichaeism in Mesopotamia and the Roman East}

중국인들은 페르시아(대진)에서 전래된 조로아스터교(배화교 혹은 현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경교), 그리고 마니교를 종종 혼동하고는 했다. 이들 외래종교 가운데 마니교가 가장 빠른 속도로 중국(불교)화했는데, 특별히 당을 둘러싼 국제/국내정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위구르인들이 마니교를 국교로 삼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승불교와 습합된 형태의 마니교는 AD 1900년 영국인 스타인이 수집(=약탈, 밀반출)한 툰황석굴 문서들에서 잘 드러난다. AD 731년 당 현종의 지시로 마니교의 교리와 제도에 대해 기록한 {마니광불교법의략 / 摩尼光佛敎法儀略}과 {마니교하부찬 / 摩尼敎下部讚}과 등의 문서 등을 통해 보면 이미 마니교는 중국 내에서 상당히 불교화 된 것을 알 수 있다. 마니교 관련 경전들은 {신수대장경}의 제54권 외교부(外敎部)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경교)의 문서들과 함께 수록되었다.

마니교와 불교의 갈등은 AD 732년 당 조정의 조칙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조칙은 “사견(邪見)인 마니교가 불교를 사칭해 백성들을 미혹시키는 일은 엄하게 금지시켜야 하나, 서역인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따르고 있는 경우에는 죄를 묻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상황은 다시 역전되는데, AD 755-763년의 농민반란, 안사(安史)의 난(亂) 등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마니교를 국교로 삼은 위구르의 도움을 받은 당 황실은 다시 마니교 등 서역종교에 관대한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당 황실은 공식적으로 도교를 후원하고 있었고, 특별히 당 무종은 도교에 심취하여 회창연간 (AD 842-845) 동안 불교를 탄압하는 동시에 조로아스터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경교) 및 마니교 역시 외래종교라는 이유로 극심한 박해를 해 거의 소멸되기에 이른다.

이후 마니교는 미륵사상과 결합한 백련교/명교에도 흡수된 것으로 여겨지며, 이 백련교/명교의 직간접 지원을 받았던 주원장은 나중에 원나라를 뒤엎고 명(明)나라를 세운 후 자신을 도왔던 명교를 철저히 탄압했다. 이들은 이어지는 탄압으로 차차 중국 남동부 절강성으로 이동하였다. 이곳에 있는 후아비오샨 언덕에는 세계에서 유일한 마니교 사원이 남아있다. 양나라 때 건립된 이 사원에는 불상 대신 마니의 조상이 봉안되어 있다.


Wang Lianmao, {Return to the City of Light} (Fuzhou, 2000) p. 130.

이 사원의 측면 암벽에는 다음의 마니교 수련강령이 새겨져 있다. 빛의 붓다인 마니광불을 묵상하는 것이 주요 수련법으로 등장한다.

勤念

淸淨光明
大力知慧
無上至真
摩尼光佛

힘써 묵상하라
청정한 광명과
위대한 지혜와
끝없이 높은 진리와
빛의 붓다 마니를

마니교가 중국에서 불교와 영향을 주고받았다면 현재 불교 내에서 마니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까? 대승비술설을 주장하는 불교학자들 중 일부는 마니교의 흔적을 한국의 대승경전 {천수경}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경전에는 업장을 소멸하는 열 두 붓다인 참제업장보승장불(懺除業障寶勝藏佛)이 등장하며, 신자들은 "南無懺除業障寶勝藏佛"을 독송하면서 업장의 소멸을 기원한다.

  1. 보광왕화렴조불(寶光王火炎照佛)
  2. 일체향화자재력왕불(一切香火自在力王佛)
  3. 백억항하사결정불(百億恒河沙決定佛)
  4. 진위덕불(振威德佛)
  5. 금강견강소복괴산불(金剛堅强消伏壞散佛)
  6. 보광월전묘음존왕불(普光月殿妙音尊王佛)
  7. 환희장마니보적불(歡喜藏摩尼寶積佛)
  8. 무진향승왕불(無盡香勝王佛)
  9. 사자월불(獅子月佛)
  10. 환희장엄주왕불(歡喜莊嚴珠王佛)
  11. 제보당마니승광불(帝寶幢摩尼勝光佛)

이 주장에 따르면 이 가운데 '환희장마니보적불'과 '제보당마니승광불'을 독송하지 않는 사찰들이 있는데, 이 마니불 계통의 붓다들이 불교화된 마니교의 흔적 임을 불승들이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의 근거와 논리가 어디까지 확실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참고로 {천수경}은 한국에서 편집된 밀교계 다라니이며, 조선 성종 7년(1476)에 간행된 {천수천안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경}이 오늘날 독송되는 {천수경}의 모체이다.

한편, 서기 1264년에 기록된 중국의 마니교 문서에는 노자가 서역으로 가서 환생한 후 마니붓다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는 마니교가 유입될 당시 도교를 숭배한 당 황실의 관계를 고려한 마니교와 도교와의 습합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When our teacher Lao-Tzu went to the region of the West, he became (reincarnated as) Mani Buddha. --- Chang Hsi-sheng, 1264A.D.

우리 스승 노자가 서역으로 가서 마니 붓다가 되었다.

이 주장은 또한 13세기 초, 몽골제국을 세운 칭기스칸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만난 후 그에 의해 중용되어 칭기스칸의 손자 몽케 칸의 시절 초반까지 도교의 전성기를 이룬 도사 리지창 (Li Zhichang)이 퍼트렸던 주장과 유사하기도 하다. 그는 불교에 대한 도교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불교의 교조 고타마 싯다르타는 자기의 각성으로 붓다가 된 것이 아니라 인도에 간 노자의 가르침과 도움을 받아 각성한 야만족일 뿐이라고 폄하하는 책을 유포시키는 등 칭기스칸과의 개인적 관계를 이용한 불교와의 갈등을 조장하였다. 도교 세력을 압박하는 조치로, 몽케는 도사들에 의해 자행된 훼불행위에 대한 소림사 주지 등의 상소에 분노하여 목잘린 불상을 들어 친히 리지창을 때려 죽였다.

티벳에서는 밀교계열의 라마불교가 성립된 서기 8세기 이전 이미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유입된 본(Bon)교 혹 본-조첸이라는 종교가 융성하고 있었다. 본-조첸은 파드마삼바바에 의해 라마교로 흡수되게 되지만 현재로 티벳에는 라마교화 한 본-조첸의 사원과 승려들이 남아있다. 이미 본교가 티벳인의 기층심리를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드마삼바바는 라마교로의 대체과정에서 본교의 형식을 상당부분 흡수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본교가 마니교 혹은 변형된 마니교였을 것으로 유추하고 있으며, 라다크 근방의 알키(Alchi) 사원은 그 흔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대승비불설을 주장하는 일본의 몇몇 불교학자들은, 일본 진언밀교가 마니교 혹은 마니교의 상당한 영향을 받은 형태로서의 밀교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럴 경우, 일본이 마니교의 동쪽 최대판도가 된다.




§ 사파마교(邪派魔敎)

무협을 재미있게 만드는 것은 원칙을 지키는 정의로운 무림정파(正派)가 아니라, 바로 사술을 즐기는 동방불패 같은 무림사파(邪派)들이다. 이들은 많은 경우에 이유를 알 수 없이 정파를 향해 음모를 꾸미다 응징당함으로써 사필귀정의 고사를 재확인 시킨다. 대만의 와룡생의 {비연경룡}이 사파들은 무협지의 전면에 배치시킨 작품이라고 하는데, 국민당 군출신이었던 와룡생은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의 대결구도를 정파와 사파의 대결로 그려냈다고 한다.

김용의 {소오강호} 속의 동방불패 등의 사파들은 獨覇天下, 征服武林, 一統江湖 따위의 표어를 외치면서 강호에 혈겁을 일으킨다. 필시 멸문지화를 당해 천생고아가 되거나 혹은 규화보전을 익히다 남성을 잃어버리는 따위의 무시무시한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그 무엇인가를 얻겠다고 비장한 복수혈전을 벌이는지에 대해 나같은 범부가 알 바가 아니지만, 덕분에 무협지를 쥔 나의 손은 땀에 젖고 영화 속 주인공의 소매깃 퍼더덕거리는 소리는 더욱 생생하게 들린다. 그러나 무슨 이유일까? 그 호들갑스런 퍼더덕 소리는 왠지 슬프기만 하다.

영화 {소오강호/笑傲江湖}는 이 느낌은 이렇게 표현할 것이다.

無風浪不成江湖 강호에서는 풍랑없이 지낼 수 없고
無恩怨不出豪傑 은원없는 호걸 또한 나오지 않네

- 有所思-

江湖粉爭恨不休 강호 속에 한만 남아
風雨飄零幾春秋 비바람속에 지나길 몇 해던가
人來人往都是客 부지런히 오고가는 사람들은 그저 손님일 뿐
依舊寂寞在心頭 내 맘은 예전처럼 적막하네

마교(魔敎)는 중국사에서 실재한 하나의 종교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라고는 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반정부적 종교들이 조정에 의해 마교로 규정되어 박해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교는 대체로 모두 '끽채사마(喫菜事魔) - 채소만 먹고 마귀를 섬기"는 종교로 규정되었고, 마니교, 백련교, 금강선, 백의불회 등이 이 부류의 종교로 간주된다.

대만의 무협작가 김용의 {영웅문} 3부작 가운데 하나인 {중원의 별/의천도룡기}는 (허구적이긴 해도) 명교를 깊게 다룬 작품이다. 김용은 이 명교의 뿌리를 마니교로 간주했지만, 이 둘의 직접적인 연관을 규명하는 것은 다소 모호하다.이 소설에서 무당(武當)파의 대협은 광명정 ('광명'이란 단어는 지극히 마니교적인 단어다)으로 명교를 섬멸하러 간다. 참고로 김용의 다른 작품 {소오강호}에 등장하는 묘족의 지도자 동방불패는 일월신교의 교주이며, 日月이란 마니교에 등장하는 두가지 주요 모티브이다 (사실상 명교의 明 역시 日 + 月 에서 온 것이다.). 물론 일월신교는 김용이 소설 속에서 만들어 낸 종교다.


§ 자료

마니교 문서와 마니교를 반박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은 아래 링크에서.

사산조 페르시아-파르티아에서의 마니교 발전과정과 교리에 대해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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