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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먼저 낯빛 붉히는 자는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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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글,
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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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00-02-10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제목
먼저 낯빛 붉히는 자는 진다.
순서
- 퇴계와 고봉에 대한 소고
- 죽을 것인가? 죽일 것인가? 설득할 것인가?
- 공자, 뒷산에서 산적을 만나다. (픽션)
- 세르베투스, 제네바에서 칼뱅을 만나다.
- 당신, 토론에서 사람을 만나다.
이황(李滉), 1502-1571
1. 퇴계와 고봉에 대한 소고
조선 명종-선조시절을 살았던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은 사제지간이면서, 학문적 동지이자 적수이기도 했다. 서기 1558년 32살의 다소 늦은 나이에 중앙관계에 진출한 고봉에게 당시 성균관 대사성이던 퇴계는 짧막한 훈계조의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게 하여 학업을 추구하라}라는 편지를 보내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두 사람은 사제관계를 맺고 13년 간의 편지를 통한 교분을 나누었다.
기대승은 일련의 편지를 통해 주기론(主氣論)의 입장에서 이황과 소위 "사단칠정논쟁"을 벌였는데, 이때 이황은 이(理)개념을 보편이념으로 삼아 그것이 물질적 세계 밖에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해 이것을 도덕의 근원으로 삼은 반면, 기대승은 도덕성이란 칠정(七情)이 현실 속에서 도덕규범과 합치될 때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이 논쟁은 서구철학 속에 끊임없이 등장해온 보편논쟁과도 맞닿아 있다.) 후대는 기대승이 이황의 엄격한 논점을 상당히 완화시켰다고 평가하게 될 것이다. 이 편지의 내용은 {兩先生四七理氣往復說}에 남아있다.
여기까지는 가감없는 역사적 팩트이고, 두 사람 간의 이야기는 후세에 길이 코 끝 찡한 미담으로 남았다. 그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대로 두 사람의 편지가 원래부터 순수하게 아름답게 시작되었을까? 주리론에 굳은 바탕을 두고 이미 강고한 학파를 이루고 있던 퇴계가, 과연 26살이나 어린 새파란 고봉이 8년간 가끔식 고개를 쳐들고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공격해 들어오는 것을 참으로 즐거워 했을까? 혹 그럴 수도. 세상에는 늘 성인들과 군자들이 존재해 온 법이니까.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고 싶다.
퇴계와 고봉은 서당 마당에서 댕기머리 휘어잡고 싸우던 서당 학동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먼저 낯빛 붉히고 밥상 뒤집는 자가 결국 지는 것임을. 그래서 처음에는 비록 마음에 안드는 영감님이고, 처음에는 마음에 안드는 새파란 하룻강아지지만, 정성껏 예의를 다해 문장을 가다듬고, 정중히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만약, "퇴계 선생님, 안녕하세요?" 라는 고봉의 편지에,
"염병!" 라고 퇴계가 퉁명스럽게 답했다면,
혹은, "고봉은 잘 있나?" 라고 퇴계가 썼더니,
"재수!" 라고 고봉이 빈정렸다면,
후대가 누구에게 손가락질하게 될 것인지는 설령 학식 낮은 서당학동들이라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둘 사이의 견해를 조금도 좁히지 않으려했겠지만, 이런 정중함이 조금씩 조금씩 누적되어 점차 사적으로도 가까운 관계로 나아갔으리라.
견해의 차이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무슨 그리 대수인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이데올로기와 견해의 차이가 나눌 수 있다는 말인가. 사실 퇴계는 고봉의 지적을 점차적으로 수용해서 자신의 극단적 이론에서 다소 간 물러서게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겼다고 보아야 할까? 퇴계인가? 고봉인가?
사실 그 둘 모두가 이겼다. 오늘날 그들의 예리한 이론들이 오직 한 줌의 유림들과 철학자들에게나 의미있는 반면, 그들이 나눈 정중한 편지들은 그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 편지 자체로서 훨씬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 먼저 낯빛을 붉히고 밥상 뒤집는 사람은, 이기더라도 진 것과 같다. 밥상은 함께 떠먹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흥분해 밥상을 뒤집는 사람은 다른 모든 것을 제외하더라도 이미 두가지 점에서 진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우선,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는 스스로에게 진 것이고, 더 나아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관점을 상대에게 납득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상대방에게 진 것이다. 후자에 대해서는 다소간 변명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전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변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흥분할수록 더욱 정중하게, 동의하지 않을수록 더욱 예의를 갖출 일이다. 누가 아는가, 혹시라도 정중함 속에 양자가 서로의 관점을 돌아보고, 밥상에 돌아앉아 찌게를 함께 떠먹게 될지.
어떤 경우라도 이데올로기는 사람에 우선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압도하는 순간, 그 이데올로기는 용도폐기되는 것이 마땅하다. 도대체 누가 이데올로기에게 그런 지위를 주었는가?
2. 죽을 것인가? 죽일 것인가? 설득할 것인가?
2.1. 공자, 뒷산에서 산적을 만나다. (픽션)
공자 : 선생, 도를 어떻게 전하면 좋을까요?
光子 : 선생은 뒷산의 산적들에게 어떻게 도를 전할테요?
공자 : 의관정제하고 뒷산에 올라 산적 두목에게 삼강오륜과 사서삼경을 가르치죠.
光子 : 음, 좋은 생각이긴 한데 단칼에 목이 달아나시겠군?
(공자, 내심 화가 나지만 참고 다시 질문한다.)
공자 : 그럼 선생은 어찌 하시려오?
光子 : 음...난 먼저, 가죽옷으로 갈아입고 뒷산에 올라,
공자 : 올라서는?
光子 : 산적으로 받아달라고 해서는, 좋은 산적되고, 두목의 좋은 친구가 된 다음,
공자 : 뭐라고요?
光子 : 나중 세월이 지나면 조용히 불러 두목에게 도를 전할테요.
공자 : 뭣이, 도적놈이 되시겠다고?
光子 : 그럼 도적놈 교화도 못하고 죽자고? 본시 공선생의 목적은 도적놈의 교화가 아니었던가?
2.2. 세르베투스, 제네바에서 칼뱅을 만나다.
혈액순환의 원리를 밝힌 에스파니아 출신의 의사이자 비주류 신학자였던 미카엘 세르베투스(1511-1553)는, 그가 가명으로 출판한 책이 “정통적” 삼위일체 개념을 비난했다하여 1553년 로마카톨릭 측에게 체포되어 이단혐의로 투옥된 후 탈출하였으나, 궐석에서 "화형"으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탈출하여 이탈리아로 가던 길에 제네바에 들러 칼뱅이 설교하던 교회예배에 참석했다가 발각되어 체포된 후 스위스 제네바 법정에 넘겨져 결국 프로테스탄트 측에게 “화형”당했다. 이 사건은 종교개혁자 장 칼뱅의 경력에 치명적인 오명을 남겼고, 칼뱅의 비판자들에게는 두고두고 좋은 공격거리를 제공했다.
이 사건은 특별히 세르베투스의 사형방식이 "화형"이었다는 이유로 크게 부각되어 세르베투스의 추종자들은 그를 마녀사냥에 희생된 양심의 수호자로 강조하게 된다. 아마 세르베투스가 화형이 아닌 참수형을 당했다면 이 사건의 의미는 약간 다른 뉘앙스로 전승되었을 지도 모른다. 장 칼뱅이 이단자"세르베투스의 죽음을 원한 것은 정확한 "사실"이지만, 칼뱅은 “화형”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관대한 참수형”을 청원한 반면 제네바 시민이 아니었던 칼뱅과 파워게임을 벌이고 있던 제네바 시당국이 이 청원을 묵살하고 화형을 언도했다는 점도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칼뱅이 세르베투스를 "화형"시켰다"라는 자극적인 문장은 정황상 꼭 올바르지는 않다.
사실 칼뱅은 세르베투스의 화형 전날 동료인 프랑스 출신 신학자 기욤 파렐에게 1553년 8월 20일과 10월 26일에 아래와 같이 적었다. (사실 나중에 이 편지에 답한 파렐은 칼뱅이 세르베투스에게 보인 '동정심'을 꾸짖었다).
{Letters of John Calvin}, by Calvin, Jean, 1509-1564; Bonnet, Jules, 1820-1892; Gilchrist, Marcus Robert
..I hope that sentence of death will at least be passed upon jim; nut I desire that the severity of the punishment may be mitigated..... – John Calvin (a letter to Farel, 20.8.155)
...나는 세르베투스에게 사형이 언도되길 원하지만, 그렇게 잔혹한 방식은 피할 수 있길 바랍니다..
...He will be led forth to punishment tomorrow. We endeavored to alter the mode of his death, but in vain. Why we did not succeed I defer for narration until I see you....” – John Calvin (a letter to Farel, 26.10.1553)
...내일 세르베투스는 처형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화형이 아닌 방식으로) 처형방식을 바꾸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왜 실패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다음에 만날 때로 미루겠습니다.. / 번역: 최광민
아무튼 화형 이후, 칼뱅의 반대자들에게 세르베투스는 일약 “진리의 순교자”로 칭송받았고 심지어 "성자"로 취급된 반면, 칼뱅은 고집불통 악마로 흔히 묘사되었다. 하지만 관련 기록을 보면, 세르베투스에 대한 오늘날의 이런 대중적 인식은 "기록된" 사실과는 약간 다른 것으로 보인다. 원래 칼뱅 측은 세르베투스가 그의 책을 통해 설명한 삼위일체에 관한 이해가 고대에 이미 존재했던 한 이단설의 재현일 뿐이라고 설득하여 그의 입장을 취하시키려는 것을 우선적으로 목표했다. 그런데 당대의 천재였던 세르베투스는 고집스럽게 자기 주장만 늘어놓을 뿐더러 설상가상으로 법정에서 반대자들을 바보취급하면서 조롱했다.
제네바로 오면 체포될 것이란 칼뱅 측의 사전경고에도 불구하고, 세르베투스 본인이 로마로 가던 길에 굳이 제네바에 들러 역시 굳이 칼뱅이 설교하는 교회의 일요일 예배를 참관하다 그를 알아본 사람의 제보로 체포된 것이다. 칼뱅의 편지에 보면 세르베투스가 제네바를 방문한 의도에 대해 칼뱅 역시 의아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세르베투스는 그 자신이 이미 로마카톨릭 측에 의해 프랑스 일대에서 모의화형을 당할 정도로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우호적이자 칼뱅에게 적대적이었던 제네바의 자유당 인사들이 시의회와 법원에 포진해 있는 제네바로 망명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을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세르베투스가 체포부터 사형이 언도되는 전 과정 동안 그렇게 의기양양했던 이유일 수 있다.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서 화형당하기 전, 칼뱅과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에 관한 일련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삼위일체의 오류에 관하여}란 세르베투스의 책에 응답해 칼뱅이 그의 책 {기독교 요강}을 보낸 것이 그 시작이었다. 세르베투스는 그 책 곳곳에 자신의 조롱과 반박을 적어서 되돌려 보냈고, 이에 대해 칼뱅은 아래와 같이 적어 보냈다.
...I neither hate you nor despise you; nor do I wish to persecute you; but I would be as hard as iron when I behold you insulting sound doctrine with so great audacity....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나는 당신을 박해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옳은 교리를 감히 그렇게까지 모독하는 것을 보고 강철처럼 굳어졌습니다 / 번역: 최광민
칼뱅 측과 제네바 시당국을 정말로 분노하게 만들었던 것은 세르베투스의 신학적 이론도 이론이었겠지만, 그의 이런 인격적 결함이 그들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은 것이다. 즉, 세르베투스는 스스로 “화형”을 벌었다고도 볼 수 있다. 칼뱅의 비난자들조차도 세르베투스의 이런 독불장군적 “태도”까지 옹호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옹호했던 것은 세르베투스로 표상되는 "표현의 자유”였을 뿐이었다. 후대로 가면서, 이 분리는 사라지고 세르베투스의 인격적 결점은 잊혀져갔으며, 대신 세르베투스는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다 죽은 진리의 순교자로 윤색되어 나갔다. 일부에서는 심지어 그를 거의 성인의 반열에 올리기도 했다.
두 예화는 나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3. 당신, 토론에서 사람을 만나다.
위에 제시한 픽션에서 공자와 光子가 각각 취한 입장은 교화의 “목표”가 무엇인가를 두고 갈린 것이다. 공자처럼 진리를 전하다가 순교자가 되는 일은 매우 훌륭한 결단이다. 이것은 목숨을 거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光子처럼 장기적 관점에서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 지금 잠시 굽히는 것 역시 매우 훌륭한 결단이다. 그런데 내게는 光子가 더 마음에 와닿는다. 그 이유는 왠지 光子에게서는 공자에게서 느껴지지 않는 산적에 대한 애정이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공자의 선택은 왠지 그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시위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인 종종 든다. 그러나 판단은 자신의 몫이다. 각자 자신의 양심에 따라 결정할 일이다.
세르베투스의 경우에는 이 점이 더 명확해진다. 세르베투스는 더 나은 언어로, 더 나은 표현으로 상대를 설득하려는 시도를 그다지 하지 않았다. 물론 또 다른 고집불통이었던 칼뱅이 그의 주장을 순순히 받아들였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르베투스가 정말로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믿는다면, 더할 나위없이 자신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경우에서는, 토론이야말로 오류에 빠졌다고 믿어지는 상대에게 자신의 애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토론은 공자/光子나 세르베투스/칼뱅의 경우와는 달리 절대적 진리를 놓고 벌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면 그것은 순교가 아니라 다만 개죽음에 불과할 것이다. 위에서 光子는 정말 진리를 말하다가 죽는 것을 두고도 개죽음이라 부를 터인데, 하물며 내가 믿고 말하고 있는 것이 100% 진리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이다 죽어버린다면, 이를 두고 달리 표현할 방법은 없다.
토론의 목표는 자신의 생각이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전달”하는데서 그치지 않는다. 또한 토론의 목표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그저 시위하는데에 있지 않다. 우리의 생각이 말이 되어 세치의 혀를 떠나는 순간, 혹은 글이 되어 키보드에 얹어진 우리의 손가락을 떠나는 순간, 그 말과 글은 남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영향력을 가지는 것이며, 상대에게 나의 영향을 미치고 싶다는 무의식적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 영향력은 여러가지 표현방식이 있다. 때로 그것은 비수가 될 수도 있고, 건네주는 맥주 한병이 될 수도 있다. 이 차이는 내가 상대를 누구로 인지하는가에서 비롯된다. 내가 상대를 내 친구라 판단한다면, 그리고 그 친구가 오류에 빠졌다고 판단된다면, 나는 그 친구를 비수로 응징하지 않고 대신 친구의 등을 토닥거리며 설득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칼로 찌르기에는 너무 소중한 나의 친구이기 때문이며, 또한 이런 토닥거림이 친구 사이에서는 가장 효과적인 설득방법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의 친구들에게 비수를 겨눌 “권리”가 없다. 혹은 당신은 친구들에게 비수를 겨눌 “이유”가 없다.물론 적에게는 칼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그런데 누가 나의 친구인가? 누가 나의 적인가. 나는 상대가 서로의 원칙을 존중하는 한, 그래서 내가 기꺼이 관용을 발휘하는 한, 나는 토론의 상대를 나의 적으로 간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에게 이렇게 명령한다.
너는 마음껏 토론하고 남을 설득하라.
진실로써, 예리하게, 효과적으로,
무엇보다 너의 애정을 담아.
그러므로 논리는 치밀하게,
그러나 표현은 정중하게.
이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나는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해 나 스스로를 무력하며 불행한 사람으로 간주할 것이다.
이 불쌍한 사람아,
애정이 결핍된 진실이 무슨 소용인가?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1844년 {경제학 철학 초고, The economy and Philosophic Manuscripts} 화폐편
- 칼 마르크스 (Karl Marx)
전문 : http://csf.colorado.edu/psn/marx/Archive/1844-EPM/
"...Assume man to be man and his relationship to the world to be a human one: then you can exchange love only for love, trust for trust, etc. If you want to enjoy art, you must be an artistically cultivated person; if you want to exercise influence over other people, you must be a person with a stimulating and encouraging effect on other people.
Every one of your relations to man and to nature must be a specific expression, corresponding to the object of your will, of your real individual life. If you love without evoking love in return; that is, if your loving as loving does not produce reciprocal love; if through a living expression of yourself as a loving person you do not make yourself a beloved one, then your love is impotent ; a misfortune..."
"... 인간을 인간이라고 전제하고,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라고 전제한다면 너는 사랑과 사랑, 신뢰와 신뢰 등등으로 교환할 수 있다. 네가 예술을 향유하기를 바란다면 너는 예술적인 소양을 쌓은 인간이어야 한다 .네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너는 현실적으로 고무하고 장려하면서 다른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인간이어야만 한다.
인간에 대한, 그리고 자연에 대한 너의 모든 관계는 너의 의지의 대상에 상응하는, 너의 현실적, 개인적 삶의 특정한 표출이어야 한다. 네가 사랑을 알면서도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네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너의 생활표현을 통해서 너를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너의 사랑은 무력하며 하나의 불행이다."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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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Kwangmin Choi, 2000-02-10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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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낯빛 붉히는 자는 진다.
순서
- 퇴계와 고봉에 대한 소고
- 죽을 것인가? 죽일 것인가? 설득할 것인가?
- 공자, 뒷산에서 산적을 만나다. (픽션)
- 세르베투스, 제네바에서 칼뱅을 만나다.
- 당신, 토론에서 사람을 만나다.
여기까지는 가감없는 역사적 팩트이고, 두 사람 간의 이야기는 후세에 길이 코 끝 찡한 미담으로 남았다. 그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대로 두 사람의 편지가 원래부터 순수하게 아름답게 시작되었을까? 주리론에 굳은 바탕을 두고 이미 강고한 학파를 이루고 있던 퇴계가, 과연 26살이나 어린 새파란 고봉이 8년간 가끔식 고개를 쳐들고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공격해 들어오는 것을 참으로 즐거워 했을까? 혹 그럴 수도. 세상에는 늘 성인들과 군자들이 존재해 온 법이니까.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고 싶다.
퇴계와 고봉은 서당 마당에서 댕기머리 휘어잡고 싸우던 서당 학동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먼저 낯빛 붉히고 밥상 뒤집는 자가 결국 지는 것임을. 그래서 처음에는 비록 마음에 안드는 영감님이고, 처음에는 마음에 안드는 새파란 하룻강아지지만, 정성껏 예의를 다해 문장을 가다듬고, 정중히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만약, "퇴계 선생님, 안녕하세요?" 라는 고봉의 편지에,
"염병!" 라고 퇴계가 퉁명스럽게 답했다면,
혹은, "고봉은 잘 있나?" 라고 퇴계가 썼더니,
"재수!" 라고 고봉이 빈정렸다면,
후대가 누구에게 손가락질하게 될 것인지는 설령 학식 낮은 서당학동들이라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둘 사이의 견해를 조금도 좁히지 않으려했겠지만, 이런 정중함이 조금씩 조금씩 누적되어 점차 사적으로도 가까운 관계로 나아갔으리라.
견해의 차이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무슨 그리 대수인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이데올로기와 견해의 차이가 나눌 수 있다는 말인가. 사실 퇴계는 고봉의 지적을 점차적으로 수용해서 자신의 극단적 이론에서 다소 간 물러서게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겼다고 보아야 할까? 퇴계인가? 고봉인가?
사실 그 둘 모두가 이겼다. 오늘날 그들의 예리한 이론들이 오직 한 줌의 유림들과 철학자들에게나 의미있는 반면, 그들이 나눈 정중한 편지들은 그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 편지 자체로서 훨씬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 먼저 낯빛을 붉히고 밥상 뒤집는 사람은, 이기더라도 진 것과 같다. 밥상은 함께 떠먹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흥분해 밥상을 뒤집는 사람은 다른 모든 것을 제외하더라도 이미 두가지 점에서 진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우선,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는 스스로에게 진 것이고, 더 나아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관점을 상대에게 납득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상대방에게 진 것이다. 후자에 대해서는 다소간 변명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전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변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흥분할수록 더욱 정중하게, 동의하지 않을수록 더욱 예의를 갖출 일이다. 누가 아는가, 혹시라도 정중함 속에 양자가 서로의 관점을 돌아보고, 밥상에 돌아앉아 찌게를 함께 떠먹게 될지.
어떤 경우라도 이데올로기는 사람에 우선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압도하는 순간, 그 이데올로기는 용도폐기되는 것이 마땅하다. 도대체 누가 이데올로기에게 그런 지위를 주었는가?
2. 죽을 것인가? 죽일 것인가? 설득할 것인가?
2.1. 공자, 뒷산에서 산적을 만나다. (픽션)
공자 : 선생, 도를 어떻게 전하면 좋을까요?
光子 : 선생은 뒷산의 산적들에게 어떻게 도를 전할테요?
공자 : 의관정제하고 뒷산에 올라 산적 두목에게 삼강오륜과 사서삼경을 가르치죠.
光子 : 음, 좋은 생각이긴 한데 단칼에 목이 달아나시겠군?
(공자, 내심 화가 나지만 참고 다시 질문한다.)
공자 : 그럼 선생은 어찌 하시려오?
光子 : 음...난 먼저, 가죽옷으로 갈아입고 뒷산에 올라,
공자 : 올라서는?
光子 : 산적으로 받아달라고 해서는, 좋은 산적되고, 두목의 좋은 친구가 된 다음,
공자 : 뭐라고요?
光子 : 나중 세월이 지나면 조용히 불러 두목에게 도를 전할테요.
공자 : 뭣이, 도적놈이 되시겠다고?
光子 : 그럼 도적놈 교화도 못하고 죽자고? 본시 공선생의 목적은 도적놈의 교화가 아니었던가?
2.2. 세르베투스, 제네바에서 칼뱅을 만나다.
혈액순환의 원리를 밝힌 에스파니아 출신의 의사이자 비주류 신학자였던 미카엘 세르베투스(1511-1553)는, 그가 가명으로 출판한 책이 “정통적” 삼위일체 개념을 비난했다하여 1553년 로마카톨릭 측에게 체포되어 이단혐의로 투옥된 후 탈출하였으나, 궐석에서 "화형"으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탈출하여 이탈리아로 가던 길에 제네바에 들러 칼뱅이 설교하던 교회예배에 참석했다가 발각되어 체포된 후 스위스 제네바 법정에 넘겨져 결국 프로테스탄트 측에게 “화형”당했다. 이 사건은 종교개혁자 장 칼뱅의 경력에 치명적인 오명을 남겼고, 칼뱅의 비판자들에게는 두고두고 좋은 공격거리를 제공했다.
이 사건은 특별히 세르베투스의 사형방식이 "화형"이었다는 이유로 크게 부각되어 세르베투스의 추종자들은 그를 마녀사냥에 희생된 양심의 수호자로 강조하게 된다. 아마 세르베투스가 화형이 아닌 참수형을 당했다면 이 사건의 의미는 약간 다른 뉘앙스로 전승되었을 지도 모른다. 장 칼뱅이 이단자"세르베투스의 죽음을 원한 것은 정확한 "사실"이지만, 칼뱅은 “화형”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관대한 참수형”을 청원한 반면 제네바 시민이 아니었던 칼뱅과 파워게임을 벌이고 있던 제네바 시당국이 이 청원을 묵살하고 화형을 언도했다는 점도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칼뱅이 세르베투스를 "화형"시켰다"라는 자극적인 문장은 정황상 꼭 올바르지는 않다.
사실 칼뱅은 세르베투스의 화형 전날 동료인 프랑스 출신 신학자 기욤 파렐에게 1553년 8월 20일과 10월 26일에 아래와 같이 적었다. (사실 나중에 이 편지에 답한 파렐은 칼뱅이 세르베투스에게 보인 '동정심'을 꾸짖었다).
아무튼 화형 이후, 칼뱅의 반대자들에게 세르베투스는 일약 “진리의 순교자”로 칭송받았고 심지어 "성자"로 취급된 반면, 칼뱅은 고집불통 악마로 흔히 묘사되었다. 하지만 관련 기록을 보면, 세르베투스에 대한 오늘날의 이런 대중적 인식은 "기록된" 사실과는 약간 다른 것으로 보인다. 원래 칼뱅 측은 세르베투스가 그의 책을 통해 설명한 삼위일체에 관한 이해가 고대에 이미 존재했던 한 이단설의 재현일 뿐이라고 설득하여 그의 입장을 취하시키려는 것을 우선적으로 목표했다. 그런데 당대의 천재였던 세르베투스는 고집스럽게 자기 주장만 늘어놓을 뿐더러 설상가상으로 법정에서 반대자들을 바보취급하면서 조롱했다.
제네바로 오면 체포될 것이란 칼뱅 측의 사전경고에도 불구하고, 세르베투스 본인이 로마로 가던 길에 굳이 제네바에 들러 역시 굳이 칼뱅이 설교하는 교회의 일요일 예배를 참관하다 그를 알아본 사람의 제보로 체포된 것이다. 칼뱅의 편지에 보면 세르베투스가 제네바를 방문한 의도에 대해 칼뱅 역시 의아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세르베투스는 그 자신이 이미 로마카톨릭 측에 의해 프랑스 일대에서 모의화형을 당할 정도로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우호적이자 칼뱅에게 적대적이었던 제네바의 자유당 인사들이 시의회와 법원에 포진해 있는 제네바로 망명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을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세르베투스가 체포부터 사형이 언도되는 전 과정 동안 그렇게 의기양양했던 이유일 수 있다.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서 화형당하기 전, 칼뱅과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에 관한 일련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삼위일체의 오류에 관하여}란 세르베투스의 책에 응답해 칼뱅이 그의 책 {기독교 요강}을 보낸 것이 그 시작이었다. 세르베투스는 그 책 곳곳에 자신의 조롱과 반박을 적어서 되돌려 보냈고, 이에 대해 칼뱅은 아래와 같이 적어 보냈다.
칼뱅 측과 제네바 시당국을 정말로 분노하게 만들었던 것은 세르베투스의 신학적 이론도 이론이었겠지만, 그의 이런 인격적 결함이 그들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은 것이다. 즉, 세르베투스는 스스로 “화형”을 벌었다고도 볼 수 있다. 칼뱅의 비난자들조차도 세르베투스의 이런 독불장군적 “태도”까지 옹호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옹호했던 것은 세르베투스로 표상되는 "표현의 자유”였을 뿐이었다. 후대로 가면서, 이 분리는 사라지고 세르베투스의 인격적 결점은 잊혀져갔으며, 대신 세르베투스는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다 죽은 진리의 순교자로 윤색되어 나갔다. 일부에서는 심지어 그를 거의 성인의 반열에 올리기도 했다.
두 예화는 나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3. 당신, 토론에서 사람을 만나다.
위에 제시한 픽션에서 공자와 光子가 각각 취한 입장은 교화의 “목표”가 무엇인가를 두고 갈린 것이다. 공자처럼 진리를 전하다가 순교자가 되는 일은 매우 훌륭한 결단이다. 이것은 목숨을 거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光子처럼 장기적 관점에서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 지금 잠시 굽히는 것 역시 매우 훌륭한 결단이다. 그런데 내게는 光子가 더 마음에 와닿는다. 그 이유는 왠지 光子에게서는 공자에게서 느껴지지 않는 산적에 대한 애정이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공자의 선택은 왠지 그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시위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인 종종 든다. 그러나 판단은 자신의 몫이다. 각자 자신의 양심에 따라 결정할 일이다.
세르베투스의 경우에는 이 점이 더 명확해진다. 세르베투스는 더 나은 언어로, 더 나은 표현으로 상대를 설득하려는 시도를 그다지 하지 않았다. 물론 또 다른 고집불통이었던 칼뱅이 그의 주장을 순순히 받아들였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르베투스가 정말로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믿는다면, 더할 나위없이 자신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경우에서는, 토론이야말로 오류에 빠졌다고 믿어지는 상대에게 자신의 애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토론은 공자/光子나 세르베투스/칼뱅의 경우와는 달리 절대적 진리를 놓고 벌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면 그것은 순교가 아니라 다만 개죽음에 불과할 것이다. 위에서 光子는 정말 진리를 말하다가 죽는 것을 두고도 개죽음이라 부를 터인데, 하물며 내가 믿고 말하고 있는 것이 100% 진리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이다 죽어버린다면, 이를 두고 달리 표현할 방법은 없다.
토론의 목표는 자신의 생각이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전달”하는데서 그치지 않는다. 또한 토론의 목표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그저 시위하는데에 있지 않다. 우리의 생각이 말이 되어 세치의 혀를 떠나는 순간, 혹은 글이 되어 키보드에 얹어진 우리의 손가락을 떠나는 순간, 그 말과 글은 남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영향력을 가지는 것이며, 상대에게 나의 영향을 미치고 싶다는 무의식적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 영향력은 여러가지 표현방식이 있다. 때로 그것은 비수가 될 수도 있고, 건네주는 맥주 한병이 될 수도 있다. 이 차이는 내가 상대를 누구로 인지하는가에서 비롯된다. 내가 상대를 내 친구라 판단한다면, 그리고 그 친구가 오류에 빠졌다고 판단된다면, 나는 그 친구를 비수로 응징하지 않고 대신 친구의 등을 토닥거리며 설득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칼로 찌르기에는 너무 소중한 나의 친구이기 때문이며, 또한 이런 토닥거림이 친구 사이에서는 가장 효과적인 설득방법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의 친구들에게 비수를 겨눌 “권리”가 없다. 혹은 당신은 친구들에게 비수를 겨눌 “이유”가 없다.물론 적에게는 칼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그런데 누가 나의 친구인가? 누가 나의 적인가. 나는 상대가 서로의 원칙을 존중하는 한, 그래서 내가 기꺼이 관용을 발휘하는 한, 나는 토론의 상대를 나의 적으로 간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에게 이렇게 명령한다.
너는 마음껏 토론하고 남을 설득하라.
진실로써, 예리하게, 효과적으로,
무엇보다 너의 애정을 담아.
그러므로 논리는 치밀하게,
그러나 표현은 정중하게.
이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나는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해 나 스스로를 무력하며 불행한 사람으로 간주할 것이다.
이 불쌍한 사람아,
애정이 결핍된 진실이 무슨 소용인가?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草人
공자 : 선생, 도를 어떻게 전하면 좋을까요?
光子 : 선생은 뒷산의 산적들에게 어떻게 도를 전할테요?
공자 : 의관정제하고 뒷산에 올라 산적 두목에게 삼강오륜과 사서삼경을 가르치죠.
光子 : 음, 좋은 생각이긴 한데 단칼에 목이 달아나시겠군?
(공자, 내심 화가 나지만 참고 다시 질문한다.)
공자 : 그럼 선생은 어찌 하시려오?
光子 : 음...난 먼저, 가죽옷으로 갈아입고 뒷산에 올라,
공자 : 올라서는?
光子 : 산적으로 받아달라고 해서는, 좋은 산적되고, 두목의 좋은 친구가 된 다음,
공자 : 뭐라고요?
光子 : 나중 세월이 지나면 조용히 불러 두목에게 도를 전할테요.
공자 : 뭣이, 도적놈이 되시겠다고?
光子 : 그럼 도적놈 교화도 못하고 죽자고? 본시 공선생의 목적은 도적놈의 교화가 아니었던가?
2.2. 세르베투스, 제네바에서 칼뱅을 만나다.
혈액순환의 원리를 밝힌 에스파니아 출신의 의사이자 비주류 신학자였던 미카엘 세르베투스(1511-1553)는, 그가 가명으로 출판한 책이 “정통적” 삼위일체 개념을 비난했다하여 1553년 로마카톨릭 측에게 체포되어 이단혐의로 투옥된 후 탈출하였으나, 궐석에서 "화형"으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탈출하여 이탈리아로 가던 길에 제네바에 들러 칼뱅이 설교하던 교회예배에 참석했다가 발각되어 체포된 후 스위스 제네바 법정에 넘겨져 결국 프로테스탄트 측에게 “화형”당했다. 이 사건은 종교개혁자 장 칼뱅의 경력에 치명적인 오명을 남겼고, 칼뱅의 비판자들에게는 두고두고 좋은 공격거리를 제공했다.
이 사건은 특별히 세르베투스의 사형방식이 "화형"이었다는 이유로 크게 부각되어 세르베투스의 추종자들은 그를 마녀사냥에 희생된 양심의 수호자로 강조하게 된다. 아마 세르베투스가 화형이 아닌 참수형을 당했다면 이 사건의 의미는 약간 다른 뉘앙스로 전승되었을 지도 모른다. 장 칼뱅이 이단자"세르베투스의 죽음을 원한 것은 정확한 "사실"이지만, 칼뱅은 “화형”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관대한 참수형”을 청원한 반면 제네바 시민이 아니었던 칼뱅과 파워게임을 벌이고 있던 제네바 시당국이 이 청원을 묵살하고 화형을 언도했다는 점도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칼뱅이 세르베투스를 "화형"시켰다"라는 자극적인 문장은 정황상 꼭 올바르지는 않다.
사실 칼뱅은 세르베투스의 화형 전날 동료인 프랑스 출신 신학자 기욤 파렐에게 1553년 8월 20일과 10월 26일에 아래와 같이 적었다. (사실 나중에 이 편지에 답한 파렐은 칼뱅이 세르베투스에게 보인 '동정심'을 꾸짖었다).
{Letters of John Calvin}, by Calvin, Jean, 1509-1564; Bonnet, Jules, 1820-1892; Gilchrist, Marcus Robert
..I hope that sentence of death will at least be passed upon jim; nut I desire that the severity of the punishment may be mitigated..... – John Calvin (a letter to Farel, 20.8.155)
...나는 세르베투스에게 사형이 언도되길 원하지만, 그렇게 잔혹한 방식은 피할 수 있길 바랍니다..
...He will be led forth to punishment tomorrow. We endeavored to alter the mode of his death, but in vain. Why we did not succeed I defer for narration until I see you....” – John Calvin (a letter to Farel, 26.10.1553)
...내일 세르베투스는 처형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화형이 아닌 방식으로) 처형방식을 바꾸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왜 실패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다음에 만날 때로 미루겠습니다.. / 번역: 최광민
아무튼 화형 이후, 칼뱅의 반대자들에게 세르베투스는 일약 “진리의 순교자”로 칭송받았고 심지어 "성자"로 취급된 반면, 칼뱅은 고집불통 악마로 흔히 묘사되었다. 하지만 관련 기록을 보면, 세르베투스에 대한 오늘날의 이런 대중적 인식은 "기록된" 사실과는 약간 다른 것으로 보인다. 원래 칼뱅 측은 세르베투스가 그의 책을 통해 설명한 삼위일체에 관한 이해가 고대에 이미 존재했던 한 이단설의 재현일 뿐이라고 설득하여 그의 입장을 취하시키려는 것을 우선적으로 목표했다. 그런데 당대의 천재였던 세르베투스는 고집스럽게 자기 주장만 늘어놓을 뿐더러 설상가상으로 법정에서 반대자들을 바보취급하면서 조롱했다.
제네바로 오면 체포될 것이란 칼뱅 측의 사전경고에도 불구하고, 세르베투스 본인이 로마로 가던 길에 굳이 제네바에 들러 역시 굳이 칼뱅이 설교하는 교회의 일요일 예배를 참관하다 그를 알아본 사람의 제보로 체포된 것이다. 칼뱅의 편지에 보면 세르베투스가 제네바를 방문한 의도에 대해 칼뱅 역시 의아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세르베투스는 그 자신이 이미 로마카톨릭 측에 의해 프랑스 일대에서 모의화형을 당할 정도로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우호적이자 칼뱅에게 적대적이었던 제네바의 자유당 인사들이 시의회와 법원에 포진해 있는 제네바로 망명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을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세르베투스가 체포부터 사형이 언도되는 전 과정 동안 그렇게 의기양양했던 이유일 수 있다.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서 화형당하기 전, 칼뱅과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에 관한 일련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삼위일체의 오류에 관하여}란 세르베투스의 책에 응답해 칼뱅이 그의 책 {기독교 요강}을 보낸 것이 그 시작이었다. 세르베투스는 그 책 곳곳에 자신의 조롱과 반박을 적어서 되돌려 보냈고, 이에 대해 칼뱅은 아래와 같이 적어 보냈다.
...I neither hate you nor despise you; nor do I wish to persecute you; but I would be as hard as iron when I behold you insulting sound doctrine with so great audacity....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나는 당신을 박해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옳은 교리를 감히 그렇게까지 모독하는 것을 보고 강철처럼 굳어졌습니다 / 번역: 최광민
칼뱅 측과 제네바 시당국을 정말로 분노하게 만들었던 것은 세르베투스의 신학적 이론도 이론이었겠지만, 그의 이런 인격적 결함이 그들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은 것이다. 즉, 세르베투스는 스스로 “화형”을 벌었다고도 볼 수 있다. 칼뱅의 비난자들조차도 세르베투스의 이런 독불장군적 “태도”까지 옹호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옹호했던 것은 세르베투스로 표상되는 "표현의 자유”였을 뿐이었다. 후대로 가면서, 이 분리는 사라지고 세르베투스의 인격적 결점은 잊혀져갔으며, 대신 세르베투스는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다 죽은 진리의 순교자로 윤색되어 나갔다. 일부에서는 심지어 그를 거의 성인의 반열에 올리기도 했다.
두 예화는 나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3. 당신, 토론에서 사람을 만나다.
위에 제시한 픽션에서 공자와 光子가 각각 취한 입장은 교화의 “목표”가 무엇인가를 두고 갈린 것이다. 공자처럼 진리를 전하다가 순교자가 되는 일은 매우 훌륭한 결단이다. 이것은 목숨을 거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光子처럼 장기적 관점에서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 지금 잠시 굽히는 것 역시 매우 훌륭한 결단이다. 그런데 내게는 光子가 더 마음에 와닿는다. 그 이유는 왠지 光子에게서는 공자에게서 느껴지지 않는 산적에 대한 애정이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공자의 선택은 왠지 그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시위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인 종종 든다. 그러나 판단은 자신의 몫이다. 각자 자신의 양심에 따라 결정할 일이다.
세르베투스의 경우에는 이 점이 더 명확해진다. 세르베투스는 더 나은 언어로, 더 나은 표현으로 상대를 설득하려는 시도를 그다지 하지 않았다. 물론 또 다른 고집불통이었던 칼뱅이 그의 주장을 순순히 받아들였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르베투스가 정말로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믿는다면, 더할 나위없이 자신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경우에서는, 토론이야말로 오류에 빠졌다고 믿어지는 상대에게 자신의 애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토론은 공자/光子나 세르베투스/칼뱅의 경우와는 달리 절대적 진리를 놓고 벌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면 그것은 순교가 아니라 다만 개죽음에 불과할 것이다. 위에서 光子는 정말 진리를 말하다가 죽는 것을 두고도 개죽음이라 부를 터인데, 하물며 내가 믿고 말하고 있는 것이 100% 진리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이다 죽어버린다면, 이를 두고 달리 표현할 방법은 없다.
토론의 목표는 자신의 생각이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전달”하는데서 그치지 않는다. 또한 토론의 목표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그저 시위하는데에 있지 않다. 우리의 생각이 말이 되어 세치의 혀를 떠나는 순간, 혹은 글이 되어 키보드에 얹어진 우리의 손가락을 떠나는 순간, 그 말과 글은 남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영향력을 가지는 것이며, 상대에게 나의 영향을 미치고 싶다는 무의식적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 영향력은 여러가지 표현방식이 있다. 때로 그것은 비수가 될 수도 있고, 건네주는 맥주 한병이 될 수도 있다. 이 차이는 내가 상대를 누구로 인지하는가에서 비롯된다. 내가 상대를 내 친구라 판단한다면, 그리고 그 친구가 오류에 빠졌다고 판단된다면, 나는 그 친구를 비수로 응징하지 않고 대신 친구의 등을 토닥거리며 설득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칼로 찌르기에는 너무 소중한 나의 친구이기 때문이며, 또한 이런 토닥거림이 친구 사이에서는 가장 효과적인 설득방법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의 친구들에게 비수를 겨눌 “권리”가 없다. 혹은 당신은 친구들에게 비수를 겨눌 “이유”가 없다.물론 적에게는 칼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그런데 누가 나의 친구인가? 누가 나의 적인가. 나는 상대가 서로의 원칙을 존중하는 한, 그래서 내가 기꺼이 관용을 발휘하는 한, 나는 토론의 상대를 나의 적으로 간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에게 이렇게 명령한다.
너는 마음껏 토론하고 남을 설득하라.
진실로써, 예리하게, 효과적으로,
무엇보다 너의 애정을 담아.
그러므로 논리는 치밀하게,
그러나 표현은 정중하게.
이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나는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해 나 스스로를 무력하며 불행한 사람으로 간주할 것이다.
이 불쌍한 사람아,
애정이 결핍된 진실이 무슨 소용인가?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1844년 {경제학 철학 초고, The economy and Philosophic Manuscripts} 화폐편
- 칼 마르크스 (Karl Marx)
전문 : http://csf.colorado.edu/psn/marx/Archive/1844-EPM/
"...Assume man to be man and his relationship to the world to be a human one: then you can exchange love only for love, trust for trust, etc. If you want to enjoy art, you must be an artistically cultivated person; if you want to exercise influence over other people, you must be a person with a stimulating and encouraging effect on other people.
Every one of your relations to man and to nature must be a specific expression, corresponding to the object of your will, of your real individual life. If you love without evoking love in return; that is, if your loving as loving does not produce reciprocal love; if through a living expression of yourself as a loving person you do not make yourself a beloved one, then your love is impotent ; a misfortune...""... 인간을 인간이라고 전제하고,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라고 전제한다면 너는 사랑과 사랑, 신뢰와 신뢰 등등으로 교환할 수 있다. 네가 예술을 향유하기를 바란다면 너는 예술적인 소양을 쌓은 인간이어야 한다 .네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너는 현실적으로 고무하고 장려하면서 다른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인간이어야만 한다.인간에 대한, 그리고 자연에 대한 너의 모든 관계는 너의 의지의 대상에 상응하는, 너의 현실적, 개인적 삶의 특정한 표출이어야 한다. 네가 사랑을 알면서도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네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너의 생활표현을 통해서 너를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너의 사랑은 무력하며 하나의 불행이다."
草人
Scientist. Husband. Daddy. --- TOLLE. 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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