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oogleSearch



추천영상: 12인치 천체망원경으로 촬영한 토성

Scientist. Husband. Daddy. --- TOLLE. LEGE
외부자료의 인용에 있어 대한민국 저작권법(28조)과 U.S. Copyright Act (17 USC. §107)에 정의된 "저작권물의 공정한 이용원칙 | the U.S. fair use doctrine" 을 따릅니다.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모든 글과 번역문들에 대해 (1) 복제-배포, (2) 임의수정 및 자의적 본문 발췌, (3) 무단배포를 위한 화면캡처를 금하며, (4) 인용 시 URL 주소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후원 | 운영] [대문으로] [방명록] [옛 방명록] [티스토리 (백업)]

이 블로그 검색

[© 최광민] 스테파노스의 순교는 종교적 창작물일까?

라벨: ,


작성

© 최광민 2021-01-07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모든 글과 번역문 들에 대해 (1) 복제-배포, (2)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 (3) 화면캡처를 금하며, (4) 인용 시 글의 URL 주소 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 최광민] 스테파노스의 순교는 종교적 창작물일까?


게시판 질문 (Basil) 에 대한 답변


순교자 스테파노스의 이콘 / Wikimedia Commons


# [질문] 질문은 스데반 집사(스테파노 부제)의 역사적 실존성에 관한 것입니다. 2013년 11월 26일에 Neil Godfrey라는 분이 쓴 The Fiction of Stephen the First Martyr 라는 글이 이 질문의 출처임을 밝혀드립니다. 글의 저자는 몇 가지 이유로 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자로 여겨지는 스데반이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답변]


아침에 일어나 메시지를 읽은 후 언급하신 글을 찾아서 읽어봤습니다. 

https://vridar.org/2013/11/26/the-fiction-of-stephen-the-first-martyr/

해당 블로그 포스팅은 (프로필에 따르면) 호주에 거주하는 교육학/도서관정보학 전공자이자 현재 직업은 사서인 것으로 보이는 Neil Godfrey씨가 브라이트 신학대학 (Brite Divinity School)의 신약학 교수인 Shelly Mattews (https://www.brite.edu/staff/shelly-matthews/)의 책 {Perfect Martyr 완벽한 순교자}을 읽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따라서 내용 자체는 셸리 매튜스의 책과 동일합니다.  제가 이 책을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

/ 최광민


# [질문] 첫째, 스데반과 그의 순교가 주후 180년 이레네우스에 의해 언급되기 전까지 사도행전 외의 문헌에서 발견되지 않는 것. (이레네우스의 기록도 그 출처가 사도행전 임을 명시하고 있음.)

[답변]

사실입니다. 단, 현존하는 자료에 한해서.

/ 최광민




# [질문] 둘째,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그가 스데반의 순교의 증인이 되었음에도 그의 서신 어디에서도 스데반을 언급하지 않는 것.

[답변]

사실입니다. 단, 한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스테파노스 (스데반) 처형"이 실제사건이었고  "스테파노스의 처형에 바울이 동조했다"는 {사도행전}의 내용 역시 사실이었다면, 그 얼마 후까지 능동적인 박해자로 활동하던 바울이 회심한 이후에도 이 건은 바울에게는 상당한 심리적 부담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이나 바울 본인의 기록에도 보다시피, 바울이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극적으로 개종한 후에도 시리아 지역이 아닌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울을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때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고, 또 바울이 예루살렘 지도부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리와 관습적인 문제로도 예루살렘 측과 갈등/알력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테파노스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급 인사였기 때문에, 아마도 이 갈등의 배경에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였던 스테파노스의 순교에 대한 "인간적 앙금"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용서라는게 그렇게 쉬운 건 아니죠. 

이런 정황에서, 자신이 연루되었던 그 사건을 굳이 언급하고 싶었을까 생각해 보면 바울의 침묵이 일면 설명되지 않을까요? 특별히 예루살렘 교회와 갈등을 겪던 시절에 말이죠. 

누구나 마음 속에 묻어두고 싶은 일들이 있는 법이죠. 가령, 비록 바울서신들 보다는 훨씬 짧긴 하지만, 베드로의 두 편지나 {사도행전}에서 예수를 코 앞에서 세번 부인한 자신의 부끄러운 일화를 베드로가 다시 꺼낸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이 사건을 완전히 덮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갈라티아의 기독교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사건의 정황을 꽤 고통스럽게 적었습니다. 

내가 전에 유다교 신자였을 때의 소행은 여러분이 다 들었을 터이지만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였습니다. 아니, 아주 없애버리려고까지 하였습니다. 나는 그 때 내 동족 중 동년배들 사이에서는 누구보다도 유다교를 신봉하는 데 앞장섰으며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도 훨씬 더 열성적이었습니다.  --- 한국어 공동번역, {갈라티아에 보내는 편지}

바울이 비록 '스테파노스'란 이름을 여기에 언급하지 않았다 해도, 그와 동시대인이라면 이 정도의 언급만으로도 당시 무슨 일이 있었었는지에 대한 충분한 레퍼런싱이 되었을 것입니다. 

/ 최광민


# [질문] 셋째, 로마 주교 클레멘트와 폴리캅은 여러 기독 순교자에 대해 언급했지만 스데반은 언급하지 않은 것.

[답변]


로마 주교 클레멘스(/트)와 소아시아 스미르나 주교 폴리카포스의 서신  모두 AD 1세기 말/2세기 초반의 문건들입니다.

언급하신 {클레멘스 서신 I}에서 로마 주교 클레멘스는 특별히 "로마"에서 순교한 바울과 베드로, 그리고 사도들이 사람들의 질시로 각처에서 핍박당한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스테파노스에 대한 언급도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순교자의 이름이 거명되지도 않습니다. 이 문서에서 사도의 후계자임과 교회의 직제적 질서를 강조한 클레멘스가 사도/주교급 아래인 집사/부제급의 스테파노스를 이 문맥에서 언급하지 않은 점이 전 별로 이상하지 않습니다.

폴리카포스가 {필리포이 (=빌립보) 사람들에게 보내는 서신}에도 역시 핍박 당한 사도들과 교회의 선지자들이 언급되는데, 아울러서 필리포이 기독교도들이 직접 "목도했던" 지역 인물 이그나티오스와 조시모스가 받은 핍박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AD 2세기 초반에 필리포이의 기독교도들에게 보내는 격려의 편지니까요. 이 편지에서 2.5 세대 전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스테파노스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서 저는 그게 특별히 더 이상하게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 최광민




# [질문] 넷째, 요세푸스가 야고보의 순교에 대해 언급한 후대 기록이 스데반의 순교와 거의 비슷한 이야기인 것.(따라서 창작) 그리고 스데반의 순교 이야기의 "수사적 적합성"이 그의 이야기가 창작일 가능성을 높인다고 설명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이 순교한 이유는 그가 모세와 율법을 부정했다고 모함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되는데, 이는 예수님의 경우와 같다. 의도적으로 스데반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하려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것 같다.

[답변]

첫 부분은 내용을 약간 잘못 이해하셨습니다.

AD 4세기 초/중반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가 쓴 {교회사}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의 순교에 대한 기록을 세개 자료를 바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클레멘스, 헤게시포스, 그리고 요세푸스의 기록입니다.

우선 유세비우스는 유대인들이 야고보를 죽일 때 그를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뜨린 후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는 일화를 전하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기록을 한 줄로 언급했지만 그 내용을 크게 신뢰하지는 않았습니다. 일단 클레멘스의 기록은 유세비우스가 언급한 자료 중 가장 나중인 AD 2세기 중/후반의 전승을 반영합니다.

유세비우스는 대신 사도들의 시대 직후에 살면서 그들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던 헤게시포스의 기록을 가장 정확하다고 보았습니다. 헤게시포스는 AD 2세기 초반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유세비우스가 언급한 마지막 자료는 AD 1세기 중/후반에 살았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가 그의 {유대고대사}에 적은 내용입니다. 제가 예전에 그 내용을 정리한 적이 있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이 야고보가 "그리스도라 불리던 예수의 형제"라고 언급된 것과 투석으로 처형했다는 언급 이외에는 특별히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스테파노스의 순교와 비슷한 내용이 없습니다. 그의 순교가 특별히 "기독교"적 신앙 때문이란 내용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요세푸스의 방점은 이 처형이 "위법한 사법살인"이었다는 점과 "절차적 문제로 인해 사건을 주도한 대제사장이 로마총독에 의해 지위를 박탈당한" 경위에 있습니다. 

스테파노스의 순교와 비슷한 내용은 유세비우스가 두번째로 인용한 자료인 AD 2세기 중반의 유대계 기독교 연대기 작가 헤게시포스의 기록에 등장합니다. 여기서 야고보의 기소이유, 기소과정, 재판, 변론, 처형,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전 과정은 스테파노스의 그것과 거의 동일합니다. 그리 길지는 않은데, 읽어보면 헤게시포스가 요세푸스가 쓴 책 내용은 몰랐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 헤게시포스가 쓴 내용은 허구일까? 전 꼭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스테파노스의 순교가 예루살렘에서 AD 34년 경에 있었다고 볼 때, 요세푸스가 언급한 "그리스도라 불린 예수의 형제 야고보"의 처형은 그보다 한 세대 뒤인 AD 70년 예루살렘 침공 얼마 전의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보통 AD 62년 혹은 69년의 사건으로 봅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스테파노스 순교 이후 예루살렘의 기독교도들은 상당수 예루살렘을 떠났고, 이후 예루살렘이 위치한 유대아 지역의 기근 및 경제적 문제로 예루살렘 교회 자체가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보통 예루살렘 1대 주교로 간주되는 야고보가 이끌던 예루살렘 교회는 AD 60년 대 말까지 유대교 지도부에 의한 지속적인 핍박에 노출되었을 것을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야고보가 순교에 직면하게 된다면, 그 지도자인 야고보가 기소와 재판과정에서 보여줘야할 행동의 모범은 이미 한 세대전 스테파노스에 의해 이미 제시되어 있습니다. 즉, 기소내용이 신앙적인 것일 경우, 그는 재판에서 (스테파노스가 했던 것처럼) 자신이 왜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있는지를 설명해야 하고, 예수의 명령에 따라 (스테파노스가 했던 것처럼)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따라서 야고보가 취할운신의 폭은 매우 좁고, 따라서 스테파노스가 한 세대 전에 보여준 모습과 크게 달라야 할 이유도 특별히 없습니다. 

해게시포스가 스테파노스와 야고보를 혼동했을 수도 있고, 혹은 헤게시포스가 위경 {야고보 묵시록}에서 해당내용을 빌려왔을 수도 있지만 (혹은 같은 전승을 두 문서가 담았을 수도 있지만), 일단 스테파노스에 대한 해게시포스의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유세비우스 등이 파편적으로 인용한 몇몇 내용들 말고는 헤게시포스의 책 전체가 현재 남아있지 않습니다. 

내용을 과장하거나 보다 극적으로 윤색했을 가능성은? 그건 충분히 고려할 문제입니다. 원래 고대의 저작에서 화자의 웅변장면은  (직접인용이라고 명시되어 있지 않은 한) 간접인용이거나 혹은 창작/윤색일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 최광민




# [질문] 그리고 스데반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왕관(면류관)을 의미하는데 이는 다른 신약 성경에도 언급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교 안에서 전통적으로 순교의 보상으로 여겨진다.

[답변]


'스테파노스'란 이름은 '원 / 관 / 월계관" 등을 뜻하는 그리스어고 거기서 '상 / 명예' 등등의 2차적 뜻이 유도됩니다. 그럼 이 그리스 이름의 뜻에서 "스테파노스 순교 일화가 기독교적으로 가공된 이야기"란 결론을 직접 유도할 수 있을까요?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흔히들 예수 당시 예루살렘의 주 언어는 아람어이고 그리스어나 라틴어, 혹은 히브리어 등은 아주 소수에 의해서만 사용되었다고 오해하는데, 사실 예루살렘이 AD 70년 함락되고 이후 예루살렘의 완전히 이교도 도시로 바뀌기 직전 시기까지 유적/유물들에서 발견된 인각들을 보면 무려 40%가 그리스어로 되어 있습니다. 이미 그 시절 많은 (특히 지배층) 현지 유대인들이 그리스어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스어를 사용했으며, 헬레니즘 사회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설립한 시나고그 (회당)들이 예루살렘과 각처에 있었습니다. 

혹자는 이 회당에서는 그리스어가 통용어였고 사용된 구약성서는 히브리어 및 그리스어 {70인역}이었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해사본에 그리스어 {70인역}이 등장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죠)

예루살렘의 초대교회 역시 {사도행전}이 말해주듯, 현지 히브리파와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헬라파간의 갈등상황 아래 있었고, 사실 스테파노스를 비롯한 집사/부제란 직제가 생긴게 바로 구제 문제에 있어 히브리파가 헬라파를 차별한 것이 그 이유로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테파노스가 기소되는 과정에도 소위 '자유파'라 불리는 이들 디아스포라 계열 회당과 스테파노스 간의 분쟁이 그 직접적인 발단이 됩니다.

이름이란 보통 좋은 뜻을 가집니다. '스테파노스'란 이름 역시 마찬가지며, 그 이름을 꼭 기독교적 맥락에서 "순교에 대한 보상"이란 뜻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이름은 사실 예수 이전의 고대 아테네에서도 사용되었는데, 가령, BC 4세기 페르시아의 침공에 맞서 명연설을 했던 웅변가이자 정치가인 아테네의 데모스테네스가 {스테파노스 반박}이란 연설을 남긴 것에서 보듯, 예수 이전 수 백전 전부터 이미 그리스어 이름으로 사용되던 것입니다. 좋은 뜻이니까요. 

{사도행전}에는 이름이 나와있지 않지만 최초 일곱집사 가운데 한명으로 교회전승이 정하는 "니콜라오스"는 또 어떨까요. 이 이름의 뜻은 "Νικό (승리)" + λαος (사람들의)란 두 단어에서 왔습니다. 그럼 이 "니콜라오스"는 "기독교도들의 승리"란 신학적 의미로 그 이름이 붙여졌을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그냥 예로부터 사용되던 "좋은 이름"입니다.  




# [질문] 고대의 역사가와 소설가들은 이렇게 수사적으로 올바른 글을 쓰는 능력을 자랑스러워 했기 때문에, 현대의 우리로서는 그들의 저작에서 역사적 사실과 그들의 창작을 구분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답변]

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고대의 작가들은 오늘날 말하는 그런 "정확한 인용" 같은 개념을 별로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가령, 전기물 등에 나오는 긴 "웅변" 같은 경우, (직접인용이라고 명시되어 있지 않다면) 일종의 간접인용처럼 전체적인 내용을 유지하되 구체적인 말은 적당히 살을 붙여서 재창작하는게 매우 일반적이었습니다. 

고대 아테네의 역사가로서 역사기술에서 "신화적" 설명을 배제하고 인간적 시각과 "실증주의"를 도입한 것으로 잘 알려진 투키디데스가 그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쓸 때, 그런 기술방식을 잘 설명했습니다.

With reference to the speeches in this history, some were delivered before the war began, others while it was going on; some I heard myself, others I got from various quarters; it was in all cases difficult to carry them word for word in one's memory, so my habit has been to make the speakers say what was in my opinion demanded of them by the various occasions, of course adhering as closely as possible to the general sense of what they really said -- Thucydides. The Peloponnesian War. London, J. M. Dent; New York, E. P. Dutton. 1910.

이 역사에 등장하는 연설들 가운데 어떤 연설은 전쟁 직전에 다른 것들은 전쟁 중에 전해졌다. 또 어떤 연설은 내가 직접 들었지만, 다른 것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들은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한 사람의 기억 속에서 정확하게 전달되었다고 보긴 힘들기 때문에, 나는 내가 보기에 그 연설의 화자들이 다양한 상황 속에서 했을 법한 연설을 하는 것으로 설정하되, 그들이 말한 전체적인 내용을 충실히 재현하고자 했다. ---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 1권 22장 1절  / 번역: 최광민

가령, AD 1세기 말 로마 작가이자 역사가인 타키투스가 쓴 {아그리콜라 전기}에 등장하는 로마 장군 아그리콜라와 브리타니아 원주민 반군 칼가쿠스의 연설이 그런 예입니다.


같은 관점에서 {사도행전} (및 성서의 다른 책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늘 가지고 있던 의문이었지만) 가령, 스테파노스가 재판에서 자신의 입장을 변론하는 내용이 아주 길게 등장하는데, 그 내용을 누가 옆에서 받아 적어두었던 것이 아니라면, 그 진술 전체가 "따옴표로 묶인" "정확한 인용"이라 보긴 곤란할 것입니다. 

어떤 신적인 개입이 있어 당시 장면을 후대의 작가가 기적적으로 리플레이 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세번째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쓴 것으로 전통적으로 여겨지는 루가/누가는 자신이 자료를 주의깊게 정리해서 집필했다고 {복음서} 서문에 적고 있습니다. 

고대의 저작물을 읽으실 때 이 점을 늘 염두하시는게 좋습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런 주제들에 대한 논쟁은 사실은 모두 "추론"이란 점입니다. 사실 "추론"으론 아무 것도 "증명"하지 못합니다.


/ 최광민







라벨: ,





Scientist. Husband. Daddy. --- TOLLE. LEGE
외부자료의 인용에 있어 대한민국 저작권법(28조)과 U.S. Copyright Act (17 USC. §107)에 정의된 "저작권물의 공정한 이용원칙 | the U.S. fair use doctrine" 을 따릅니다.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모든 글과 번역문들에 대해 (1) 복제-배포, (2) 임의수정 및 자의적 본문 발췌, (3) 무단배포를 위한 화면캡처를 금하며, (4) 인용 시 URL 주소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후원 | 운영] [대문으로] [방명록] [옛 방명록] [티스토리 (백업)] [신시내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