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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여자의 씨, 아브라함의 씨, 다윗의 씨 - 히브리어 רעך (제라)와 그리스어 σπέρμα (스페르마)의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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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草人 최광민 2025-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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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최광민] 여자의 씨, 아브라함의 씨, 다윗의 씨

요약

[© 최광민] 여자의 씨, 아브라함의 씨, 다윗의 씨

순서
  1. 질문 (구사)
  2. 짧은 답변 (최광민)
  3. 바울과 {신약성서}의 언어/문서적 배경
    1. 바울의 {갈라디아서} 4:15 vs. {창세기} 12:7
      1. 단수형 집합명사로서 히브리어 רעך (제라)와 그리스어 σπέρμα (스페르마)의 용례
      2. 히브리어 "제라"나 그리스어 "스페르마"기 집합명사가 아닌 "개인"을 뜻하는 용례
      3. 단수 집합명사 "스페르마" 대신 복수 일반명사인 "스페르마타"가 "자손들"을 뜻하는 용례
      4. {창세기} 3:15 - 여자의 "씨"
      5. {창세기} 3:15 - 아람어 {탈굼}에서의 렌더링
      6. 다윗의 씨 (제라 다위드 זֶרַע דָּוִד)
      7. 정리: 다시 바울의 논점으로




      # 질문 (구사)


      링크: http://x.211.s1.nabble.com/-td4982225.html

      아래 글은 어떤 분이 바울의 구약 인용문제를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아래 두 부분은 찾아봐도 명확한 해설을 찾기 힘들어 질문을 드립니다.

      (1) 바울은 미드라쉬(Midrash)와 페셰르(Pesher)라는 성서의 해석에 관한 기본 개념들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와 관련된 글이 있거나, 알고 계신 것이 있는지요?

      (2) 갈라디아서 3:16과 창세기 12:7, 13:15 등의 '자손(히브리어: 제라, zera)'이라는 단어의
      집합명사(collective noun)의 쓰임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 것이 있으면 나누어주시기 바랍니다.


      --- 이하 바울 구약 인용에 대한 비판 글 ---

      성서를 비판적으로 세심하게 분석하고 읽어 본 사람들은 기독교의 교리를 대부분 뼈대를 만든 자칭 사도 바울이 얼마나 궤변론자(詭辯論者)인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4절에서 "성경(구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언급했을 때, 학자들은 바울이 염두에 둔 가장 유력한 '성경' 구절로 호세아 6장 2절을 꼽는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세아6:2)...배경의 이해 없이 보면 바울의 주장처럼 예수의 삼 일만의 부활을 예언한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호세아 선지자(BC 8세기)가 활동하던 당시,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위협 속에 있었고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영적으로 타락해 있었다고 호세아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호세아 본문의 '우리'는 메시아 한 사람(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받아 상처 입은 이스라엘 공동체(북이스라엘/에브라임)를 지적하는 글이다.

      여기서 "살리시며", "일으키시리니"는 죽은 시체가 무덤에서 나오는 생물학적 부활이 아니다. 이는 전쟁이나 재난으로 인해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인 국가적 위기에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회복되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히브리 문학(구약)에서 "이틀 후"와 "셋째 날"이라는 표현은 숫자 2와 3을 나열하여 "아주 짧은 시간 내에" 혹은 "속히"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시적 관용구다. 즉, 하나님이 징계하시더라도 우리가 회개하면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기대감을 나타낸 글이다.

      바울은 이글을 삼일만에 예수 부활을 구약이 예언한 것으로 원래 문맥과는 전혀 다르게 인용하는 해석으로 자신의 신학을 만들어 낸다.

      상당수 구약학자들은 호세아 6:1-3의 고백이 호세아 선지자의 진심 어린 권면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피상적이고 가벼운 회개를 풍자하는 말이라고 본다.

      근거는 바로 이어지는 6장 4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탄식한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돌아가자! 그러면 금방 낫게 해주시겠지(이틀 뒤, 삼일 째)"라고 가볍게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런 '값싼 회개'를 거부하신다는 문맥이다. 즉, 원래 본문은 "하나님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백성들의 안일한 태도"를 보여주는 구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성서학자들의 해석이다.

      바울은 해당 구절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다음 문장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결론적으로,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징계를 받아도 하나님이 속히(3일쯤에)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다소 안일할 수도 있는) 기대를 말했지만, 바울은 이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예수를 문자 그대로 3일 만에 다시 살리심으로써, 참된 회복을 시작하셨다"는 구속사적 성취로 재해석했다. 그럴싸한 문장만 찾으면 족했던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해석을 미드라쉬(Midrash)와 페셰르(Pesher)라는 성서의 해석에 관한 기본 개념들에 근거하고 있다. 과거 (특히 종교적) 글들을 읽을 때 현대의 역사적-문법적 해석(원저자의 의도 파악)과는 다른 두 가지 주요 방식이다.

      A. 미드라쉬 (Midrash): "현재적 의미 찾기"는 히브리어 동사 '다라쉬(darash, 찾다/구하다)'에서 유래했다. 고대 텍스트의 틈을 메우거나, 현재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여 적용하는 방식이다.

      문맥을 넘어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거나, 숨겨진 영적 의미를 캐낸다는 것이다. 예를 보자. (갈라디아서 4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내 사라와 하갈 이야기를 인용하며 이를 "이것은 비유(Allegory)니"라고 선언한다. 그는 하갈을 '시내산 율법'으로, 사라를 '자유 있는 예루살렘(복음)'으로 재해석한다. 이는 창세기의 원래 문맥과는 전혀 다른 해석이다.

      B. 페셰르 (Pesher): "이것이 곧 그것이다 (This is That) '페셰르'는 '해석' 또는 '꿈의 풀이'라는 뜻으로, 특히 쿰란 공동체(사해 사본)와 초기 기독교가 즐겨 사용한 종말론적 해석법이다.
      이 해석법의 핵심 원리는 다음과 같다.

      1. 구약 예언자들은 자신이 쓴 글의 '진정한 의미(비밀, Mysterion)'를 몰랐다.
      2. 이 비밀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세우신 '의의 교사'나 '메시아'를 통해서만 풀린다.
      3. 따라서 구약의 텍스트는 "지금 우리 공동체에서 일어난 이 사건"을 예언한 것이다.

      바울에게 호세아 6장은 단순한 이스라엘의 회복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텍스트는 수백 년간 '봉인된 비밀'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 '페셰르(진정한 의미)'가 드러났다고 본 것이다. 어떻게? 성층권을 뚫고 그 위의 천국을 다녀온 본인에게 신이 직접 계시를 통해 밝혀준 진리라고 주장한다.

      당대 유대교의 비판 : "성경 왜곡이다" 바울이 활동하던 당시, 정통 유대교 랍비들이나 일반 유대인들에게 바울의 해석은 받아들이기 힘든 '억지'였다. 이단인 것이다.

      메시아관의 충돌 :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다윗과 같은 '승리하는 왕'이지, 나무에 달려 저주받아 죽고(신 21:23) 사흘 만에 살아나는 존재가 아니었다. 바울이 호세아나 이사야의 구절을 가져와 "이것이 죽은 메시아를 예언한 것이다"라고 주장했을 때, 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성경을 제멋대로 조각내어 끼워 맞추는 행위"로 보였다. 실제로 바울의 신학은 이런 멋대로의 끼워 맞추기가 대부분이다.

      "십자가는 걸림돌(Skandalon)", 바울 자신도 고린도전서 1:23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걸림돌이 되는) 것이요"라고 고백한다. 즉, 자신의 해석이 유대인들의 보편적 성경 상식과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트리포(Trypho)의 반박 : 2세기 기독교 변증가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가 쓴 『트리포와의 대화』를 보면, 유대인 학자 트리포는 "너희 기독교인들은 성경 본문의 문맥을 무시하고, 너희가 믿는 예수를 증명하기 위해 구절들을 억지로 뜯어고치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한다.

      현대 성서비평학의 분석:
      "본문 이탈(Proof-texting)" - 현대 역사 비평학자들은 바울의 해석 방식을 냉정하게 '본문 증거(Proof-texting)' 방식이라고 정의한다. 우리말로는 '성구 증명(聖句 證明)' 혹은 '증거 구절 대기'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 용어는 주로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되는데, "자신의 주장이나 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의 원래 문맥(Context)을 무시하고 특정 구절만 핀셋으로 집어내듯 뽑아서 증거로 사용하는 방식"을 뜻한다. 소위 자의적 짜집기다. 이를 위해서는 맥락 무시(Decontextualization) 의 해석을 한다. 다른 말로 문맥의 거세 (Decontextualization)는 텍스트를 다루는 방식에서 '문맥(Context)'과 텍스트(Text) 늘 분리한다. ​

      정상적인 해석(Exegesis)은 문맥 (저자의 의도, 역사적 배경, 앞뒤 문장)을 먼저 연구하고 그 안에서 텍스트의 의미를 도출한다. 하지만 문맥 거세 ​Proof-texting (Eisegesis)는 내가 증명하고 싶은 결론(교리, 주장)을 먼저 정하고 성경 전체를 뒤져서 그 주장을 지지해 줄 것 같은 단어나 문장을 찾아내어 "보라, 성경에 이렇게 써있지 않느냐"라고 제시한다.

      학자들은 바울이 호세아 6장의 '문맥(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무시하고, 필요한 '단어(제 삼일, 살리시며)'만 채취해 갔다고 지적한다. 학문적으로 엄밀히 말하면, 호세아 선지자는 예수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 아니므로, 바울의 해석은 원작자의 의도(Exegesis)가 아닌 독자의 임의적 주석, 주입(Eisegesis)에 해당한다.

      사후적 재해석(Retrospective Re-reading): 샌더스(E.P. Sanders)나 라이트(N.T. Wright) 같은 바울 신학의 대가들도 바울이 "답(부활)을 먼저 가지고, 그 후에 문제를(성경 근거) 찾았다"는 점을 인정한다. 즉, 성경을 연구하다가 부활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 구약 성경을 다시 뒤져서 논리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분명히 견강부회이며, 문맥을 이탈한 논리적 비약이다. 현대 비평학자들은 "바울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혹은 대담한) Proof-texting의 대가"라고 평가한다. 가장 대담한 궤변론자라는 말이다.

      ​바울은 이미 "예수는 부활하셨고, 이방인도 구원받는다"는 결론을 가지고 있었다. 이 결론을 증명하기 위해 구약 성경을 샅샅이 뒤져, '자손(단수)', '제 삼일', '믿음' 같은 단어가 들어간 구절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구절들이 원래 말하려던 역사적 맥락(이스라엘의 회복, 율법 준수 등)을 잘라내고, 자신의 신학적 논리를 완성하는 벽돌(Proof-text)로 사용했다.

      구약이 예수를 예언했다는 사후적 재해석과 임의적 편집의 미드라쉬와 폐르쉐를 인정한다면 정통 교회의 이단이란 주장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누구나 숨겨진 진리를 주장하며 성경의 자의적 해석과 짜집기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 맥락 거세의 궤변은 왜 위험한가?

      ​Proof-texting은 "성경으로 성경을 공격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성경에 써 있다"는 절대적 권위를 빌려, 사실은 성경이 지지하지 않는 인간의 탐욕이나 특정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한다. (예: 십자군 전쟁, 노예 제도 옹호 등도 모두 성경 구절을 Proof-texting하여 정당화되었다). 지금도 성경에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트랜스젠더나 낙태 반대를 성경 구절을 갖고 하고 있고 일전에 내가 포스팅했던 대로 하나님/예수님은 채식주의자라는 주장까지 성경을 들어 말한다.

      사실 초기 기독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학계가 가장 골머리를 앓아온 핵심적인 딜레마, 즉 "해석학적 무정부 상태(Hermeneutical Anarchy)"의 위험성이 존재한다.

      만약 "원래 문맥을 무시하고 숨겨진 의미(비밀)를 찾았다"는 방식(미드라쉬/페셰르)을 무제한 허용한다면.. "내가 재림 예수다"라고 주장하는 교주들의 해석과 사도 바울의 해석을 구별할 객관적 잣대가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지적은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바울은 되고 너는 안된다는 것이 이단 낙인찍기의 본질이 된다. 모든 이단은 성경을 사용한다.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교리를 증명할 '단어'를 사냥(Proof-texting)한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보고, 반대되는 문맥은 무시하게 만든다.
      (이하 생략)

      --------------
      기독교가 기둥으로 삼는 바울의 신학이 어떤 궤변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궁금한 분들을 위해 몇가지 예를 추가로 정리해 봤다.

      현대 비평학자들이 "문맥을 이탈한 인용(Decontextualization)" 혹은 "원자적 해석(Atomistic Exegesis: 단어 하나만 떼어내어 해석함)"이라고 비판하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아니 거의 모든 주장들이 이러한 궤변에 근거하고 있다.

      1. 갈라디아서 3:16 - '자손' (단수와 복수의 말장난?)
      바울의 논리적 비약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가장 유명한 사례다.
      [바울의 인용] :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원래 맥락 (창세기 12:7, 13:15 등) :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자손(히브리어: 제라, zera)'은 집합명사(collective noun)다. 마치 우리말의 '후손'이나 영어의 'Seed/Offspring'처럼, 단수 형태를 쓰지만, 문맥상 명백히 "이스라엘 민족 전체(다수)"를 의미한다.

      바울은 이 단어가 문법적으로 '단수형'이라는 점을 포착하여,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오직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언어학적으로 억지 주장이다. 집합명사의 특성을 무시하고, 문법적 형태(단수)에 신학적 의미를 억지로 부여하여 아브라함 언약의 수혜자를 이스라엘 민족에서 예수 개인으로 돌변시켰다.


      # 짧은 답변 (최광민)

      사실 이 논점은 기독교도의 입장을 벗어나 생각한다면 꽤 타당한 논점입니다. 특별히 이 문제는 "성서는 성서로 해석한다" 혹은 "성서 자체가 성서의 해석자이다 Scriptura sui interpres" 란 프로테스탄트 기독교 측 관점에서는 해결해야 할 큰 문제일 수 있습니다.

      중학생 시절에 헨델의 메시아 전곡을 처음 듣고 큰 감명을 받고, 그 곡의 가사로 쓰이는 성경구절들 - 특별히 예수의 탄생과 수난 부활에 대한 구약성서의 "예언"으로 제시된 구절들을 하나씩 확인해 보면서, 몇몇 구절의 구약 본문에서의 맥락과 신약에서의 맥락과 단어가 왠지 일치하지 않는단 느낌을 받고 혼란스러웠던 개인적 경험도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히브리어 {맛소라} 사본과 그리스어 {70인역, LXX}, 그리고 사해사본 간의 불일치와 관련된 "구약성서 정본과 전승 문제"에 대해 알고 나서 더욱 흥미진진해 졌던 기억도 나네요.

      제가 그 시절 이후 수년 간 이 문제를 두고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을 포스팅해 봅니다. 제가 성서학자나 신학자는 아니란 점을 꼭 기억하시고요. 

      우선,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길지 않으니 여기 바로 적겠습니다.

      '미드라쉬 midrash'란 유대교 신학 - 특별히 바리새파/랍비 유대교에서, 맥락상 의미가 불분명한 '경전 (특별히 토라)구절에 대해 그 구절에 표면적 의미와 숨은 의미가 있다고 보고 하는 주석 작업입니다.

      '페셔 pesher'란 특별히 쿰란에서 활동한 (아마도) 에세네파 유대교에서, 예언서들의 내용을 당시 상황에 적용한 후 특정 예언이 현 시점에서 성취되고 있다고 보고 예언을 풀이하는 해석기법입니다. 이것 역시 해당 예언이 두 층위로 구성되었다는 관점으로 작업합니다.

      이 '미드라쉬'와 '페셔' 개념을 뒤섞어서 호주의 한 신학자가 벌인 괴상한 작업을 하나 소개시켜드리겠습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 갑니다.

      위에 질문에서 논점이 잘 정리되긴 했지만, 사실 이 논쟁은 단순한 문법의 문제 뿐 아니라, 바울서신 전체맥락, {구약성서} 히브리어 원문과 그리스어 {70인역} 교차비교, 아람어 {탈굼}에서의 렌더링 등등을 함께 입체적으로 파악하면 보다 이해하기 쉽습니다.


      # 바울과 {신약성서}의 언어/문서적 배경

      바울이 활동한 AD 1세기 초/중반으로 부터 수 백년 이전부터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타 문명권에 사는 많은 유대인들은 모어인 히브리어나 본토의 상용어 아람어 구사능력을 잃어버렸다. 그리스나 소아시아 지역 뿐 아니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후 헬레네즘 문명권에 병합된 이집트 역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에 코이네 헬라/그리스어가 공용어로 자리잡았고 그곳 유대인들도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구사했다. 

      그래서 예수 당시에도 예루살렘을 방문하거나 역이민한 그리스어 구사 유대인들을 위한 시나고그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집사제도가 생긴 배경 자체가, 히브리어/아람어를 구사하는 본토 히브리파와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헬라파 간의 갈등을 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 로부터 200여년 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도서광이던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란 그리스계 이집트 파라오가 (72명의) 유대인 학자들을 예루살렘에서 초빙해 우선 모세5경인 토라를 시작으로 유대교 경전을 코이네 그리스어로 번역시켰고, 이것이 소위 {70인역, LXX}의 형태로 지중해 일대에 퍼졌다. 예수 약간 앞시대 인물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교 철학자이자 유대인 대표이기도 했던 필론이 그리스로 쓴 저작들에도 이 {70인역}이 인용되어 있고, 아울러 예수 바로 뒷 세대의 유대인 제사장 출신 역사가 요세푸스도 이 {70인역}를 언급했다. 사실 기독교 {신약성서}에 인용된 많은 {구약성서}의 인용문들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리고 초기 기독교 교부들이 인용한 거의 대부분의 인용문들이 이 그리스어 {70인역}에서 인용된 것이다. 그래서 정교회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구약성서}의 정본이 히브리어가 아니라 그리스어 {70인역}이다. AD 4/5세기 라틴교부 히에로니무스가 새로 라틴어 성서{불가타}를 번역할 때, 기존처럼 {70인역}에 바탕하지 않고 히브리어에서 직접 라틴어로 번역을 시도하자, 아우구스티누스를 포함한 많은 교회지도자들이 거부감을 보이기도 했었다.

      요세푸스는 "히브리 성서"와 {70인역}이 1:1로 대응된다는 식으로 쓰긴 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심지어 유대교 엣세네파의 공동체가 제작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해사본} 내용 중에는 히브리 성서의 "정본"으로 취급되는{맛소라}본이 아닌 {70인역}의 문체와 같은 구절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것은 특별히 예수 당시 유대교 구약성서의 "정본"이 무엇이었는가를 둔 논란의 근거가 된다.

      소아시아 타르수스 태생으로 지중해 디아스포라의 일원이던 바리새파 바울이 이 {70인역}을 당시 유대교의 "히브리어 성서" 정본에 상응하는 "그리스어 성서"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물론 그는 이후 예루살렘에 와서 힐렐의 손자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그가 히브리어/아람어에도 능통했을 것 역시 당연하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어/히브리어 혹은 그리스어/히브리어/아람어 다중언어 구사자였다.

      물론 그의 선교는 그리스어권 유대인 공동체와 이방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가 서신에 사용한 "성서"는 바로 그리스어 {70인역}이었다. 한편 그가 히브리어 원전 내용을 몰랐을 리는 없기 때문에, 그는 아마 히브리어 히브리 성서와 그리스어 {70인역}을 함께 레퍼런싱하면서 자신의 논리를 세웠다고 볼 수 있다. 

      모든 번역은 번역 당시의 해석관점이 반영된다. 

      {70인역}이 200여년 간 유통되던 시점에서 바울처럼 히브리어/그리스어를 모두 구사하던 유대인 학자라면, 히브리어 원전의 해석이 모호한 경우 {70인역}을 참고해서 그 의미를 보강했을 것이란 뜻이다. 또한 그가 바리새파 유대교도였기 때문에, 랍비 유대교의 전승의 큰 축을 이루는 미드라쉬 해석법 혹은 당시 아람어 {탈굼}의 해석경향을 알거나 친숙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게 바로 지금 언급하고 있는 {갈라디아서} 4:15절의 경우다. 


      # 바울의 {갈라디아서} 4:15 vs. {창세기} 12:7

      바울은 {갈라디아서} 4:15장에서 아래와 같은 주장을 펼쳤다.

      3:16 τῷ δὲ Ἀβραὰμ ἐρρήθησαν αἱ ἐπαγγελίαι καὶ τῷ σπέρματι αὐτοῦ οὐ λέγει Καὶ τοῖς σπέρμασιν ὡς ἐπὶ πολλῶν ἀλλ᾽ ὡς ἐφ᾽ ἑνός Καὶ τῷ σπέρματί σου ὅς ἐστιν Χριστός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을 말씀하실 때에, 마치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것처럼 '후손들에게'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단 한 사람을 가리키는 뜻으로 '너의 후손에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 사람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럼 바울이 지금 인용한 {창세기} 12:7을 읽어보자. 아직 아브라함으로 개명하기 전 아브람이 75세에 북부 메소포타미아/시리아에 위치한 고향 하란을 떠나 카나안으로 이주하면서 세켐에 이르렀을때 야훼가 그에게 내린 언약이다.  

      12:7 ויּרא יהוה אל־אברם ויּאמר לזרעך אתּן את־הארץ הזּאת ויּבן שׁם מזבּח ליהוה הנּראה אליו׃   -- 히브리어 {맛소라}

      12:7 καὶ ὤφθη κύριος τῷ Αβραμ καὶ εἶπεν αὐτῷ τῷ 
      σπέρματί σου δώσω τὴν γῆν ταύτην καὶ ᾠκοδόμησεν ἐκεῖ Αβραμ θυσιαστήριον κυρίῳ τῷ ὀφθέντι αὐτῷ 
      -- 그리스어 {LXX}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의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 아브람은 거기에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쳤다. -- 한국어 {새번역}

      논쟁의 핵심은 사실 꽤 간단하다.

      {창세기}12:7의 이 구절의 히브리어 "제라 / רעך"는 맥락 상 '자손들'이란 의미의 단수형 집합명사인데, 바울이 이를 임의로 '개인'으로 해석하여 이를 이 '자손들'을 '자손'인 예수에게 적용했으니, 이는 임의적 해석이자 오류란 점이다.

      {창세기} 13장에도 유사한 구절이 나온다. 조카인 롯과 결별한 후 야훼가 아브람에게 내린 축복이다.

      13:15 כּי את־כּל־הארץ אשׁר־אתּה ראה לך אתּננּה וּלזרעך עד־עולם׃

      13:15 ὅτι πᾶσαν τὴν γῆν ἣν σὺ ὁρᾷς σοὶ δώσω αὐτὴν καὶ τῷ σπέρματί σου ἕως τοῦ αἰῶνος

      15 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13:16 ושׂמתּי את־זרעך כּעפר הארץ אשׁר אם־יוּכל אישׁ למנות את־עפר הארץ גּם־זרעך ימּנה׃

      13:16 καὶ ποιήσω τὸ σπέρμα σου ὡς τὴν ἄμμον τῆς γῆς εἰ δύναταί τις ἐξαριθμῆσαι τὴν ἄμμον τῆς γῆς καὶ τὸ σπέρμα σου ἐξαριθμηθήσεται

      16 내가 너의 자손을 땅의 먼지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 누구든지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너의 자손을 셀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바울은 히브리어 혹은 그리스어 문법을 오독했거나, 의도적으로 과장/오역하여 {창세기}의 해당구절을 그의 신학적 관점에 따라 왜곡한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해석할 근거가 있는 것일까?

      바울의 논리를 이해하려면, 바울이 {갈라디아서} 문서 전체에서 {창세기}에 근거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개념을 어떻게 풀이하고 있는지를 입체적으로 보면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저 이 구절만의 문제가 아니다.


      # 단수형 집합명사로서 히브리어 רעך (제라)와 그리스어 σπέρμα (스페르마)의 용례

      "씨/자손"에 대응하는 히브리어 "זרעך (제라)"나 그리스어 {70인역}의 "σπέρμα (스페르마)"가 단수형의 집합명사로서 의미상 복수인 "자손들/후손들"을 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은 사실이다. 

      히브리어 "זרעך (제라)"에 대응하는 복수형 단어가 따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리스어에는 '씨'를 뜻하는 단수형 "스페르마 σπέρμα"와 복수형 "스페르마타 σπέρματα"가 따로 있다. 하지만 그리스어 {70인역}에서도 자손을 뜻할 때는 보통 히브리 성서 경우처럼 대개 "스페르마"로 표기하고, "스페르마타"의 경우는 다양한 종류들을 씨앗들을 총칭할 때 등에 주로 사용되었다.

      "제라"가 단수형 집합명사로 쓰일 경우 대응하는 인칭대명사로 단수형 (그/ הוּא/ 후)나 동사/명사가 사용될 수 있지만, "제라"의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 복수인칭대명사 (그들/ הֵם/ 헴)을 명시적으로 사용한 경우도 있다. 그리스어 {70인역}에서는 "그"를 뜻하는 단수 αὐτός (아우토스)에서 "그들"인 복수 αὐτοί (아우토이)로 바뀌어 사용되었다. 대응하는 동사들도 복수로 처리했다.

      이하 인칭대명사들은 노란색으로 하이라이트 하겠다.

      {창세기} 15:13의 경우다.

      15:13 ויּאמר לאברם ידע תּדע כּי־גר יהיה זרעך בּארץ לא להם ועבדוּם וענּוּ אתם ארבּע מאות שׁנה׃

      15:13 καὶ ἐρρέθη πρὸς Αβραμ γινώσκων γνώσῃ ὅτι πάροικον ἔσται τὸ
      σπέρμα σου ἐν γῇ οὐκ ἰδίᾳ καὶ δουλώσουσιν αὐτοὺς καὶ κακώσουσιν αὐτοὺς καὶ ταπεινώσουσιν αὐτοὺς τετρακόσια ἔτη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똑똑히 알고 있거라. 너의
      자손이 다른 나라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다가, 마침내 종이 되어서, 사백 년 동안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

      {이사야} 61:9 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61:9 ונודע בּגּוים זרעם וצאצאיהם בּתוך העמּים כּל־ראיהם יכּירוּם כּי הם זרע בּרך יהוה׃ ס

      61:9 καὶ γνωσθήσεται ἐν τοῖς ἔθνεσιν τὸ σπέρμα αὐτῶν καὶ τὰ ἔκγονα αὐτῶν πᾶς ὁ ὁρῶν αὐτοὺς ἐπιγνώσεται αὐτούς ὅτι οὗτοί εἰσιν σπέρμα ηὐλογημένον ὑπὸ θεοῦ

      9 그들의 자손이 열방에 알려지며, 그들의 자손이 만민 가운데 알려질 것이다. 그들을 보는 사람마다, 그들이 나 주의 복을 받은 자손임을 인정할 것이다."


      # 히브리어 "제라"나 그리스어 "스페르마"가 집합명사가 아닌 "개인"을 뜻하는 용례

      하지만 히브리어 "제라"나 그리스어 "스페르마"가 특정 개인을 뜻하는 경우도 있다. 

      우선 예로 들 수 있는 것은 {창세기} 4:25 인데, "또 다른 אחר" + "씨 זרע" 즉, 그리스어로 '스페르마 헤테론 σπέρμα ἕτερον'이다. 이 경우는 아담/하와의 세번째 아들인 셋 (Seth)을 뜻한다.

      4:25 ויּדע אדם עוד את־אשׁתּו ותּלד בּן ותּקרא את־שׁמו שׁת כּי שׁת־לי אלהים זרע אחר תּחת הבל כּי הרגו קין׃  

      4:25 ἔγνω δὲ Αδαμ Ευαν τὴν γυναῖκα αὐτοῦ καὶ συλλαβοῦσα ἔτεκεν υἱὸν καὶ ἐπωνόμασεν τὸ ὄνομα αὐτοῦ Σηθ λέγουσα ἐξανέστησεν γάρ μοι ὁ θεὸς
      σπέρμα ἕτερον ἀντὶ Αβελ ὃν ἀπέκτεινεν Καιν  -- {LXX}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였다. 마침내, 그의 아내가 아들을 낳고 말하였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죽은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나에게 허락하셨구나.”

      또 다른 예는 {창세기} 21:13에서 볼 수 있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자식이 없어 사라의 이집트인 종 하갈을 통해 얻은 아들인 이스마엘에 대해 야훼가 아브라함에게 내린 약속이다. 이 경우 역시 제라/스페르마는 "이스마엘" 한 사람을 뜻한다.  

      21:13 וגם את־בּן־האמה לגוי אשׂימנּוּ כּי זרעך הוּא׃

      21:13 καὶ τὸν υἱὸν δὲ τῆς παιδίσκης ταύτης εἰς ἔθνος μέγα ποιήσω αὐτόν ὅτι
      σπέρμα σόν ἐστιν

      그러나 여종에게서 난 아들도 너의 니, 그 아들은 그 아들대로, 내가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

      히브리어 "제라"에 대응되는 그리스어 "스페르마"가 단수 집합명사가 아닌 단수 일반명사로서 한 개인을 뜻하는 사례는 {신약성서}에 꽤 있다. 예를 들어보겠다.

      바울은 {로마서} 11:1에서 본인을 아브라함의 "후손 (= 스페르마)"라고 소개했다. 즉, 여기서의 스페르마는 단수 집합명사가 아니라 당연히 바울 개인을 말하는 단수 일반명사다.

      Rom11:1 Λέγω οὖν μὴ ἀπώσατο ὁ θεὸς τὸν λαὸν αὐτοῦ μὴ γένοιτο· καὶ γὰρ ἐγὼ Ἰσραηλίτης εἰμί ἐκ σπέρματος Ἀβραάμ φυλῆς Βενιαμίν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신 것은 아닙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나도 이스라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입니다.

      또 디도에게 보낸 두번째 편지 2:8에서 예수를 다윗의 "후손 (= 스페르마)"라고 표현한다. 역시 집합명사가 아니라 예수 개인이다.

      2Ti2:8 Μνημόνευε Ἰησοῦν Χριστὸν ἐγηγερμένον ἐκ νεκρῶν ἐκ σπέρματος Δαβίδ, κατὰ τὸ εὐαγγέλιόν μου

      내가 전하는 복음대로, 다윗의 자손으로 나시고,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히브리서} 11:1절에서는 "스페르마"가 아브라함-사라의 아들 "이삭" 개인으로 특정된다. 역시 집합명사가 아니다.

      Heb11:11 Πίστει καὶ αὐτὴ Σάρρα δύναμιν εἰς καταβολὴν σπέρματος ἔλαβεν καὶ παρὰ καιρὸν ἡλικίας ἔτεκεν, ἐπεὶ πιστὸν ἡγήσατο τὸν ἐπαγγειλάμενον

      그의 아내 사라도 이제 나이가 많은 여자인데다가 원래 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사라는 약속해 주신 분을 진실한 분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서신인 {히브리서} 2:16에서의 "스페르마"는 이번에는 "자손들"을 뜻하는 단수형 집합명사다.

      Heb2:16 οὐ γὰρ δήπου ἀγγέλων ἐπιλαμβάνεται ἀλλὰ σπέρματος Ἀβραὰμ ἐπιλαμβάνεται

      사실, 주님(=예수)께서는 천사들을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도와주십니다.

      즉, "스페르마"를 단수형 집합명사로 늘 단정할 수는 없다. 문맥과 상응하는 인칭대명사, 동/명사를 함께 확인해야 한다. 


      # 단수 집합명사 "스페르마" 대신 복수 일반명사인 "스페르마타"가 "자손들"을 뜻하는 용례

      그런데 단수형 집합명사인 "스페르마" 이외에도 복수형 일반명사인 '스페르마타'도 '자손들' 이란 뜻으로 고전 그리스어 및 바울 당시 코이네 그리스어에서 실제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사람들은 잘 언급하지 않는다.

      우선, 그리스어 {70인역}에 포함되어 있는 {마카베오서} 문서군 가운데 {마카베오 4서}의 예를 보자. 이 {마카베오 4서}는 조지아 정교회에서만 정경으로 인정하며, 기록 시점은 AD 1세기 전후로 여겨진다.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이 문서를 아마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가 작성했을 것으로 여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문서에 포함된 순교자 이야기를 높이 평가했다.

      이 문건에는 이스라엘인들이 "아브라함 가문의 씨들"의 후손으로 표현된다. 이때의 "씨들"은 단수형 집합명사인 "스페르마"가 아니라, 그 단어의 복수형 일반명사인 "스페르마타"다.

      Ὦ τῶν Ἀβραμιαίων σπερμάτων ἀπόγονοι παῖδες Ἰσραηλῖται, πείθεσθε τῷ νόμῳ τούτῳ καὶ πάντα εὐσεβεῖτε. -- {마카베오 4서} 18:1

      아브라함 가문의 
      씨들의 후손인 이스라엘 자녀들아, 이 율법에 순종하고 매사에 경건하라

      "스페르마"가 아닌 "스페르마타"가 "자손들"로 사용된 고전 그리스어 문건은 BC 5세기의 그리스 시인 핀다로스의 {피티아 찬가}에 역시 '후손들'로 '스페르마'가 아닌 '스페르마토스'가 쓰였다.

      (255) ἔνθα γὰρ γένος Εὐφάμου φυτευθὲν λοιπὸν αἰεί (256) τέλλετο· καὶ Λα케δαιμονίων μιχθέντες ἀνδρῶν (257) ἤθεσιν, ἔν ποτε καλλίσταν δράποντο νᾶσον· (258) ἔνθεν δ᾽ ὄμμι Λατοΐδας ἔπορεν Λιβύας πεδίον (259) σὺν θεῶν τιμαῖς ὀφέλλειν, ἄστυ χρυσοθρόνου (260) διανέμειν θεῖον Κυράνας, (261) ὀρθόβουλον μῆτιν ἐφευρομένοις· (262) ὑμετέρας ἀκτῖνας σπερμάτων.  -- The Greek Text (Pythian 4.255–262)

      (255) For there the race of Euphamos was planted, to flourish (256) forever; and having mingled with the customs of Spartan men, (257) in time they colonized the island once called Kalliste (Thera). (258) From there, the Son of Leto (Apollo) granted you the plain of Libya, (259) to prosper it with the honors of the gods, and to govern (260) the noble city of golden-throned Cyrene, (261) since you have found a wisdom of upright counsel— (262) beholding the rays of your descendants.

      (255) 바로 그곳에서 유파모스의 혈통이 심어져 영원히 번창하게 되었으니, (256) 그들은 라케다이몬(스파르타) 인들의 관습에 동화되어 지내다가 (257) 마침내 한때 '칼리스테(가장 아름다운 곳)'라 불렸던 섬(테라)을 차지하였도다. (258) 그곳으로부터 레토의 아들(=아폴론)은 당신들에게 리비아의 평원을 선사하여, (259) 신들의 영광으로 그 땅을 번영케 하고, 황금 보좌의 도시 (260) 신성한 키레네를 통치하게 하였도다. (261) 당신들이 올바른 조언을 주는 지혜를 찾아내었기에, (262) 당신 후손들의 찬란한 빛을 [지켜보게 하였도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단수형 집합명사 "스페르마"가 명백히 개인을 뜻하는 용례도 있으니 바울이 "스페르마타" vs "스페르마"를 대비시킨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닐 수 있다. 


      # {창세기} 3:15 - 여자의 "씨"

      이 모티프는 기독교에선 아주 초기 교부시절 부터 메시아에 대한 "원초복음서"라 불릴 정도로 강력한 신학적인 주제로 사용되었다. 이 역시 바울의 사고를 따라가는데 큰 도움을 준다.

      3:15 ואיבה אשׁית בּינך וּבין האשּׁה וּבין זרעך וּבין זרעהּ הוּא ישׁוּפך ראשׁ ואתּה תּשׁוּפנּוּ עקב׃

      3:15 καὶ ἔχθραν θήσω ἀνὰ μέσον σου καὶ ἀνὰ μέσον τῆς γυναικὸς καὶ ἀνὰ μέσον τοῦ 
      σπέρματός σου καὶ ἀνὰ μέσον τοῦ σπέρματος αὐτῆς αὐτός σου τηρήσει κεφαλήν καὶ σὺ τηρήσεις αὐτοῦ πτέρναν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4에서 예수를 '여자가 낳은 자'로 묘사하고,

      4:4 ὅτε δὲ ἦλθεν τὸ πλήρωμα τοῦ χρόνου ἐξαπέστειλεν ὁ θεὸς τὸν υἱὸν αὐτοῦ γενόμενον ἐκ γυναικός γενόμενον ὑπὸ νόμον

      그러나 기한이 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또한 율법 아래에 놓이게 하셨습니다.

      또 {로마서} 16:20에서는 사탄이 밟힐 것이란 모티프를 언급하는데ㅡ

      16:20 ὁ δὲ θεὸς τῆς εἰρήνης συντρίψει τὸν Σατανᾶν ὑπὸ τοὺς πόδας ὑμῶν ἐν τάχει ἡ χάρις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μεθ᾽ ὑμῶν

      평화의 하나님께서 곧 사탄을 쳐부수셔서 여러분의
      발 밑에 짓밟히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

      이는 또 사실 예수 본인이 언급한 모티프이기도 하다. {루가복음} 10:19를 보자.

      10:18 εἶπεν δὲ αὐτοῖς Ἐθεώρουν τὸν Σατανᾶν ὡς ἀστραπὴν ἐκ τοῦ οὐρανοῦ πεσόντα 10:19 ἰδού, δίδωμι ὑμῖν τὴν ἐξουσίαν τοῦ πατεῖν ἐπάνω ὄφεων καὶ σκορπίων καὶ ἐπὶ πᾶσαν τὴν δύναμιν τοῦ ἐχθροῦ καὶ οὐδὲν ὑμᾶς οὐ μὴ ἀδικήσῃ

      1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19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세력을 누를 권세를 주었으니, 아무것도 너희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

      {창세기} 3:15의  "씨/자손" 역시 히브리어로 '제라'이며, 그리스어로는 '스페르마'다. 히브리어 문장에서는 '여자의 씨/자손'이 내용상 단수형 집합명사로서의 "자손들"인지 개인을 뜻하는 "자손"인지 분명치 않다. 그런데 그 "씨/자손"에 대응하는 히브리어 인칭대명사가 3인칭 단수인 "그 / 후 / הוּא" 이다.  그리스어{70인역}에서 "그녀의 씨 σπέρματος αὐτῆς 에 대응하는 인칭대명사 역시 단수인 "그 αὐτός / 아우토스"다. 게다가 원래 그리스어 "스페르마"는 중성단수인데 {70인역}은 인칭대명사로 굳이 남성형을 썼다. 

      이 경우 해석 상 여지가 있다. 이를 "자손들"이 아닌 "한 남자"로 해석할 근거를 준다는 뜻이다.

      문장 대칭구조도 좀 재밌다. 여기서 (1) 뱀 vs 여자 (2) 뱀의 씨/자손 vs 여자의 씨/자손이 대립쌍이 된다. 그런데 실제로 대립하는 상대는 (1) 뱀 vs 여자 (2) 뱀의 씨/자손 vs 여자의 씨/자손이 아니라, "여자의 씨/자손 vs 뱀" 이다. 그래서 "머리에 치명상"을 받는 쪽은 뱀의 씨/자손들이 아니라 뱀 본인이다. 

      그럼 생각해 보자. 

      여기서 제라/스페르마가 아담/하와의 복수의 자손들을 뜻한다면, 뱀은 인간이 존속하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인간들로부터 (머리에) 치명상을 계속 머리에 받으며 지냈다는 식의 구도가 된다. 왠지 치명상인데 정의상 좀 이상하다.

      하지만 이 '여인의 씨/자손'이 어떤 개인 - 특별히 메시아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그 메시아가 뱀/사탄에게 종말 때 결정적 일격을 가한다는 예언으로 이 구절을 이해한다면? 바로 이 해석이 기독교가 아주 초기부터 수용한 관점이다. 

      하지만 예수와 바울의 시대 전후, 혹은 초기 기독교 시대의 유대교에서도 비슷한 이해가 유통되고 있었다.


      # {창세기} 3:15 - 아람어 {탈굼}에서의 렌더링

      {탈굼}은 히브리 성서의 아람어 평역이다. 히브리 성서의 이 아람어 번역, 더 정확히는 주석된 번역은 원래는 기록되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AD 1세기를 전후해서부터는 일정한 형식으로 굳어져 드디어 기록으로 정착되는데, 이것을 {탈굼, Targum}이라 부른다. “해석한다" 혹은 "설명한다"는 이 아람어 단어의 뜻이 보여주듯 {탈굼}은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직역이 아니라 이를 해석하여 의역한 것이다. 초기에는 히브리 정경에 비교할 때 권위를 인정받지 못했지만, 일부 유대인 공동체에서는 권위를 부여받았고, 이것은 나중에 랍비-유대교 사회에서 논쟁을 촉발하여 차차 {탈굼}의 사용은 사라져 갔다. 현재는 예멘의 유대교 사회에서만 종교의례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히브리 성서의 히브리어 זֶרַע 제라에 해당하는 아람어는 자라 ( זַרְעָא)인데, 아람어 {탈굼}은 {창세기} 3:15절을 아람어로 번역하면서 "제라"의 대응어로 "자라" 대신 בר (바르, 아들)의 복수형 (בני)을 사용했다. 그래서 {탈굼}에서는 "여자의 씨"가 아니라 명시적으로 "여자의 아들들/자손들"인 복수가 된다.

      우선 AD 1/2세기에 출현한 {옹켈로스 탈굼}을 읽어보자.

      וּדְבָבוּ אֲשַׁוֵּי בֵּינָךְ וּבֵין אִיתְּתָא וּבֵין בְּנָךְ וּבֵין בְּנַהָא הוּא יְהֵי דְכִיר לָךְ מָה דַעֲבַדְתְּ לֵיהּ מִלְּקַדְמִין וְאַתְּ תְּהֵי נָטַר לֵיהּ לְסוֹפָא׃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너의 자손과 여자의 자손들 사이에 원수가 되게 하리니, 는 네가 태초에 그에게 행한 것을 기억할 것이요, 너는 마지막 때에 를 노려볼 것이다."

      {옹켈로스 탈굼}에서는 아람어 "벤아하 בְּנַהָא"가 "그녀의 아들들"을 뜻하는 분명 복수형인데, 이하 이 "그녀의 아들들"에 해당하는 인칭대명사로 복수형 "그들"을 뜻하는 "הִינוּן 이눈"이 아니라 "후 הוּא" 즉, 단수로서의 "그"가 사용되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창세기} 원문에는 없는 "마지막 때" 혹은 "종말"에 대한 암시가 {옹켈로스 탈굼}에 들어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옹켈로스 탈굼}의 종말론적 대립구도는 여자의 자손인 (단수의) "그"와 뱀이다.

      AD 2-4세기에 로마시대 팔레스티나 일대에서 사용된 원형에 가까운 갈릴리 아람어로 작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네오피티 탈굼}에서는, "그녀의 아들들/ 베나하 /בְּנָהָא" 에 상응하는 인칭대명사로 그들/인눈/ אינון 이 사용된다. 즉 복수형이 명시되어 있따. 여기서 "끝장"으로 번역한 쉐프유타 / שפיותא 는 중의적 단어인데, (1) 짓밟다와 (2) 평정/평화/화해/해결 이란 뜻을 가진다. 즉, 가혹하게 평정됨으로써 얻어지는 평화를 뜻한다.

      ואיבה אשוי בינך ובין אתתא ובין בניך ובין בניה ויהוי כד יהוון בניה נטרין אורייתא ועבדין פקודיא יהוון מתכוונין לך ומחיין יתך על רישך וקטלין יתך וכד שבקין בניה דאתתא פקודיא דאורייתא תהוי מתכוון ונכית יתיה בעקביה וממרע יתיה ברם יהוי אסו לבניה דאתתא ולך חיוויא לא יהוי אסו דעתידין אינון למעבד שפיותא אלין לאלין בסוף עקב יומיא ביומוי דמלכא משיחא.

      나는 너와 여자를, 또 네 아들들과 그녀의 아들들은 원수가 되게 하리라. 그녀의 아들들이 율법(토라)를 준수하고 계명을 따를 때, 그들은 너를 노려 네 머리를 쳐 죽일 것이다. 그러나 여자의 아들들이 율법의 계명을 버린다면, 너는 그들의 발꿈치를 물고 그들을 병들게 할 것이다. 하지만 여자의 아들들은 치유될 것이나, 너는 그렇지 않아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때, 즉 메시아 왕의 시대에 서로 끝장 (שפיותא)을 보게 될 것이다.

      편집시기를 AD 1세기에서 10세기까지로 추정하는{예루살렘 탈굼}은 {옹켈로스 탈굼} 보다 훨씬 내용이 풍부하고, {네오피티 탈굼}과는 매우 유사하다. 여기 사용된 "여인의 아들들 בְּנַיָא דְאִיתְּתָא" benaya d’itteta" 을 복수로 풀이하면서 인칭대명사도 "그들 (הִינוּן 히눈)이 사용되었다.

      וִיהֵי כַּד יֶהֱוֵין בְּנַיָא דְאִתְּתָא לְעַיָן בְּאוֹרָיְיתָא וְעָבְדִין פִּקוּדַיָא יֶהֱוְיַן מִתְכַוְונִין וּמַחְיַין יָתָךְ לְרֵישָׁךְ וְקַטְלִין יָתָךְ וְכַד יִשְׁבְּקוּן בְּנַיָא דְאִיתְּתָא מִצְוָתָא דְאוֹרַיְיתָא וְלָא יַעַבְדוּן פִּקוּדַיָא תֶּהֱוֵי מִתְכַוִין וּנְכִית יַתְהוֹן בְּעִקְבֵהוֹן וּמַמְרַע יַתְהוֹן בְּרַם יֶהֱוֵי אָסוּ לִבְנָהָא דְאִתְּתָא וְלָךְ חִיוְיָא לָא יֶהֱוֵי אָסוּ בְּרַם עַתִידִין הִינוּן אִילֵין לְאִילֵין לְמַעֲבַּד שְׁפוּיָיתָא בְּעִיקְבָא בְּסוֹף עֵקֶב יוֹמַיָא בְּיוֹמוֹי דְמַלְכָּא מְשִׁיחָא:

      "
      여자의 아들들이 율법(토라)을 연구하고 계명들을 행할 때, 그들은 네 머리를 쳐서 너를 죽이려 할 것이다. 그러나 여자의 자손들이 율법의 계명들을 저버리고 그 가르침들을 행하지 않을 때, 너는 그들의 발꿈치를 물어 그들을 병들게 하려 할 것이다. 여자의 아들들에게는 치유가 있겠으나, 뱀 너에게는 치유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모든 날들의 끝(종말)인 메시아 왕의 시대에 끝장 (בְּעִיקְבָא)을 보게될 것이다."

      {네오피티 탈굼}과 {예루실렘 탈굼}의 특징은 {옹켈로스 탈굼}을 더 발전시켜 인류를 타락시킨 뱀 (~ 사탄/악마)에 대한 야훼의 예언이 "말카 메쉬하" 즉 "메시아/מְשִׁיחָא 왕/מַלְכָּא"의 시대/בְּיוֹמוֹי/be-yomoi"에 이뤄진다고 본 점이다. 그리고 그 메시아 왕이 도래하는 시점은 모든 날들의 끝 (בְּסוֹף עֵקֶב יוֹמַיָא be-sof ekev yomayaat)인 종말이다.

      그래서 {탈굼}이 의도하는 바는 분명하다.

      "여자의 아들들/자손들"과 "뱀"과의 싸움은 "여자의 자손들"이 약간 우세한 가운데 (머리 > 발꿈치) 종말 때까지 이어지다가 종말의 때 - 혹은 메시아가 도래할 때 - 뱀은 최후의 치명적인 일격을 받아 영원히 패배한다. 이 메시아-왕 역시 "여자의 자손들" 중 하나이지만, 야훼가 뱀에게 내린 선고를 "최종적"이고 "결정적"으로 완성할 인물은 바로 이 메시아-왕 이다.


      # 다윗의 씨 (제라 다위드 זֶרַע דָּוִד)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다윗의 씨 זֶרַע דָּוִד"란 표현도 바울의 논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다. 특별히 {시편} 89편의 예를 들어보겠다.

      {시편} 89편은 다윗왕 시절 에스라인 에단이 쓴 마스길로, 유대교에서 매우 특별한 지위를 가진 시편이다. 이 {시편}은 다윗왕조의 신적 권위가 메시아적 암시와 함께 등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메시아-왕은 야훼의 맏아들으로 지명되기까지 한다.

      유대교에서는 메시아에 대한 암시를 담은 주요 {시편}으로 여겨지고, 당연히 기독교에서는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 예수에 대한 예언으로 간주된다. 

      89:36 זרעו לעולם יהיה וכסאו כשּׁמשׁ נגדּי׃

      89:36 (LXX 88:37) τὸ σπέρμα αὐτοῦ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μενεῖ καὶ ὁ θρόνος αὐτοῦ ὡς ὁ ἥλιος ἐναντίον μου

      자손이 영원토록 이어지고, 그 왕위는 내 앞에서 태양처럼 있을 것이니,

      89:27 (WLC 89:28)אף־אני בּכור אתּנהוּ עליון למלכי־ארץ׃

      89:27 (LXX 88:28) κἀγὼ πρωτότοκον θήσομαι αὐτόν ὑψηλὸν παρὰ τοῖς βασιλεῦσιν τῆς γῆς

      27 나도 그를 맏아들로 삼아서, 세상의 왕들 가운데서 가장 높은 왕으로 삼겠다.

      유대교의 {미드라쉬 테힐림}에서는 마지막 51절을 메시아의 수난으로 해석한다.

      89:51 (WLC 89:52) אשׁר חרפוּ אויביך יהוה אשׁר חרפוּ עקּבות משׁיחך׃

      89:51 (LXX 88:52) οὗ ὠνείδισαν οἱ ἐχθροί σου κύριε οὗ ὠνείδισαν τὸ ἀντάλλαγμα τοῦ χριστοῦ σου

      주님, 주님의 원수들은 주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깔보며 발자국/발꿈치 마다 모욕합니다.

      그 이유는 메시아의 발꿈치 / 이크봇 메쉬헤카 עקּבות משׁיחך 란 표현 때문이다. 유대교 전통과 탈무드에서 이 표현은 단순히 "발자국"를 넘어 하나의 종말론적 시대적 징조를 뜻하는 고유 명사처럼 사용됩니다. 유대교 신학에서는 이를 이크보트 하마시아(Ikvot HaMashiach)라 부르며 메시아 도래 직전의 고난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여기서 עקּבות 란 단어는 "발자국"을 뜻하기도 하고 "발꿈치"를 뜻하기도 한다. 이를 "발꿈치"로 받아들이면 야훼의 원수들은 메시아의 "발꿈치"를 공격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그때 다시 {창세기} 3:15절이 소환된다.

      다시 {창세기} 3:15를 읽어보자.

      3:15 ואיבה אשׁית בּינך וּבין האשּׁה וּבין זרעך וּבין זרעהּ הוּא ישׁוּפך ראשׁ ואתּה תּשׁוּפנּוּ עקב׃

      3:15 καὶ ἔχθραν θήσω ἀνὰ μέσον σου καὶ ἀνὰ μέσον τῆς γυναικὸς καὶ ἀνὰ μέσον τοῦ 
      σπέρματός σου καὶ ἀνὰ μέσον τοῦ σπέρματος αὐτῆς αὐτός σου τηρήσει κεφαλήν καὶ σὺ τηρήσεις αὐτοῦ πτέρναν

      and enmity I put between thee and the woman, and between thy seed and her seed; he doth bruise thee -- the head, and thou dost bruise him -- the heel.'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 정리: 아브라함의 씨/자손은 누구인가?

      바울의 {갈라디아서}의 문맥을 이제 입체적으로 짚어보자. 

      바울은 이 서신에서 모세율법을 (혹은 모세율법도) 따라야만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을 펴는 율법파 기독교 파벌과 그 동조자들을 비판하며, 모세율법/행위와 복음/믿음을 대비시키면서 "누가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손인가?"를 논한다. 제 3장에서 그의 논점은 이렇게 진행된다.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 앞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 나는 여러분에게서 이 한 가지만을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믿음의 소식을 들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 와서는 육체로 끝마치려고 합니까? 여러분의 그 많은 체험은, 다 허사가 되었다는 말입니까? 참말로 허사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율법을 행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믿음의 소식을 듣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믿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운 일로 여겨 주셨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서 난 사람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여러분은 아십시오 (Γινώσκετε ἄρα ὅτι οἱ ἐκ πίστεως οὗτοι εἰσιν υἱοί Ἀβραάμ). 또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을 믿음에 근거하여 의롭다고 여겨 주신다는 것을 성경은 미리 알고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는 기쁜 소식을 미리 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서 난 사람들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율법의 행위에 근거하여 살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저주 아래에 있습니다. 기록된 바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계속하여 행하지 않는 사람은 다 저주 아래에 있다"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으로는 아무도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믿음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의 일을 행하는 사람은 그 일로 살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은 자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 문제의 3:16절이 등장한다.

      3:16 τῷ δὲ Ἀβραὰμ ἐρρήθησαν αἱ ἐπαγγελίαι καὶ τῷ σπέρματι αὐτοῦ οὐ λέγει Καὶ τοῖς σπέρμασιν ὡς ἐπὶ πολλῶν ἀλλ᾽ ὡς ἐφ᾽ ἑνός Καὶ τῷ σπέρματί σου ὅς ἐστιν Χριστός

      and to Abraham were the promises spoken, and to his seed; He doth not say, 'And to seeds,' as of many, but as of one, 'And to thy seed,' which is Christ;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 (σπέρματι αὐτοῦ)에게 약속을 말씀하실 때에, 마치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것처럼 '후손들 (σπέρμασιν) 에게'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단 한 사람을 가리키는 뜻으로 '너의 후손에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 사람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정리해 보자.
      • 모든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믿음으로 거듭난 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3:7 
      • 장차 모든 민족은 '아브라함으로 인해' 즉, '아브라함의 후손에 의해' 복을 받게 된다.
      •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이방인도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을 받는다. 
      •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아브라함의 자손인) 그리스도의 희생이 가져온 구원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창세기}와 여타 {구약성서} 맥락에서 "아브라함의 씨"가 명백한 복수의 의미인 경우에도 이 표현은 아브라함의 "생물학적 모든 자손"을 뜻하진 않는다. 대신 야훼의 '언약'에 따른 자손에게만 한정된다. 이를 테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로 이어지는 계보가 언약에 있는 자손들이다.

      그래서 야훼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언약은 {창세기} 35:12에서는 야곱에게 이렇게 이어진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너에게 주고, 그 땅을 내가 너의 자손에게도 주겠다."

      이 계보에 따라 야곱의 아들에게서 12부족이 탄생하고, 그 가운데서도 유독 유다의 "씨"를 따라 다윗과 그 왕가에 대한 야훼의 언약으로 이어지며, 이를 바탕으로 기독교의 {마태}와 {루가} 복음서들은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 유다 > .....> 다윗으로 이어진 이 언약의 계보가 예수에게서 완성된다고 확정한다. 다시 말하지만, 아브라함의 모든 자손을 말하는게 아니다.

      다시 바울의 문장을 인용한다.

      3:16 τῷ δὲ Ἀβραὰμ ἐρρήθησαν αἱ ἐπαγγελίαι καὶ τῷ σπέρματι αὐτοῦ οὐ λέγει Καὶ τοῖς σπέρμασιν ὡς ἐπὶ πολλῶν ἀλλ᾽ ὡς ἐφ᾽ ἑνός Καὶ τῷ σπέρματί σου ὅς ἐστιν Χριστός

      and to Abraham were the promises spoken, and to his seed; He doth not say, 'And to seeds,' as of many, but as of one, 'And to thy seed,' which is Christ;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 (σπέρματι αὐτοῦ)에게 약속을 말씀하실 때에, 마치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것처럼 '후손들 (σπέρμασιν) 에게'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단 한 사람을 가리키는 뜻으로 '너의 후손에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 사람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 한국어 {새번역}

      일단 위에 인용한 한국어 {새번역}이 "단 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은 과도한 번역이다. 원문에는 '단/오직'이란 단어가 나오지도 않는다. 이건 마치 마르틴 루터가 {로마서}를 독일어로 번역할 때, 프로테스탄트의 '이신칭의' 교리를 강조하고자 그리스어 원문에 없는 '오직 allein'을 삽입해, "So halten wir nun dafür, daß der Mensch gerecht werde ohne des Gesetzes Werke, **allein** durch den Glauben. 의인은 **오직 (alles)**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 번역한 것과 같은 꼴이다.

      바울이 표면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창세기} 해당 구절에서 아브라함의 씨/후손을 표현할 때 사용한 단어는 복수형 "씨들 / 스페르마타"가 아니라 단수형 "씨 / 스페르마"이니 한 사람 (= 예수)를 지칭한 것이란 논리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복수형 '스페르마타'가 사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스페르마'가 단수형 집합명사로 사용되므로, 바울이 복수형 일반명사 '스페르마타'와 (사실상 복수인) 단수형 집합명사 '스페르마'를 잘못 대비시켰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바울이 이 "스페르마"의 용례에 단수형 집합명사의 용례가 있다는 걸 몰랐을 수는 없다. 그건 바울이 심지어 이 제 3장 속 여기저기에 어떤 때는 단수형 일반명사로, 또 어떤 때는 집합명사로  "스페르마"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는 용례를 확실히 구분하고 있었다. 

      한번 보자.
      • 3:7 그러므로 믿음에서 난 사람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녀들 ("휘오이 υἱοί ")임을 여러분은 아십시오.
      • 3:16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을 말씀하실 때에, 마치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것처럼 '후손들(복수: "스페르마타")에게'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단 한 사람을 가리키는 뜻으로 '너의 후손 (단수: "스페르마")에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 사람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 3:27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후손들 (단수형 집합명사 "스페르마" σπέρμα)이요, 약속을 따라 정해진 상속자들 (복수: "클레로노모이 κληρονόμοι")입니다.

      그래서 이건 바울의 실수도 아니고 왜곡도 아니다. 다만 그는 어떤 해석관점을 {창세기}에 투사한 것이다.

      사실 {창세기} 12장에서 카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한 그 아브람의 "씨"는 아브람이 언약을 받은 시점에서 본다면, 그의 먼 후손"들"일 수도 있지만 당장은 그를 상속할 '아들'일 수도 있다. 아브람은 당시 75세의 노인으로 고향을 떠나 막 카나안에 입성한 때였고, 그때는 이스마엘이고 이삭이고 뭐고 없이 아예 아들이 하나도 없었다.

      12:7 ויּרא יהוה אל־אברם ויּאמר לזרעך אתּן את־הארץ הזּאת ויּבן שׁם מזבּח ליהוה הנּראה אליו׃   -- 히브리어 {맛소라}

      12:7 καὶ ὤφθη κύριος τῷ Αβραμ καὶ εἶπεν αὐτῷ τῷ 
      σπέρματί σου δώσω τὴν γῆν ταύτην καὶ ᾠκοδόμησεν ἐκεῖ Αβραμ θυσιαστήριον κυρίῳ τῷ ὀφθέντι αὐτῷ 
      -- 그리스어 {LXX}

      And Jehovah appeareth unto Abram, and saith, 'To thy 
      seed I give this land;' and he buildeth there an altar to Jehovah, who hath appeared unto him. 
       -- 영어 {YLT}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의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 아브람은 거기에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쳤다. -- 한국어 {새번역}

      바울은 바로 다음 장인 {갈라디아서} 4장에서, 이스마엘과 이삭 모두 아브라함의 아들들이지만, 오직 이삭 만이 '아브라함의 씨'라는 점을 강조한다. {창세기}에서 야훼가 아브라함에게 언약한 '씨'는 '이삭'이기 때문이다.

      4:21 율법 아래에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여, 나에게 말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율법이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합니까? 22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여종에게서 태어나고 한 사람은 종이 아닌 본처에게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3 여종에게서 난 아들은 육신을 따라 태어나고, 본처에게서 난 아들은 약속을 따라 태어났습니다. .... 28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29 그러나 그 때에 육신을 따라 난 사람이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을 박해한 것과 같이, 지금도 그러합니다. 30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아라. 여종의 아들은 절대로, 종이 아닌 본처의 아들과 함께 유업을 받지 못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31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를 가진 여자의 자녀입니다.  --- 한국어 {새번역} 4:28

      또한 같은 논리에서 아브라함의 손자 에서와 야곱 중에서도 오직 야곱 만이 언약된 '아브라함의 씨'이다. 이어지는 논리에서 카나안 정복을 완성하는 다윗이 이 관점에서 '아브라함의 씨'가 되고, 또 그를 계승한 미래의 메시아가 최종적인 '아브라함의 씨'가 된다. '아브라함의 씨'이자 '다윗의 씨'로서의 이 메시아는 유대교에서는 아직 오지 않았고, 기독교에서는 바로 예수가 '아브라함의 궁국적인 씨'가 된다. 따라서 예수를 통해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에게 접붙여져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에, 야훼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만방이 아브라함으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란 축복이 예수를 통해 이방인에게도 성취되는 셈이다.

      이 관점으로 바울의 문장을 해석하면, 왜 그가 '스페르마'를 아브라함의 모든 자손들이 아니라 예수에게 적용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제라/스페르마'는 단수형 집합명사로서 "언약의 자손(들)"을 뜻하는 동시에, 그 "언약"을 성취한 것은 "언약의 계보 안에 있는 모든 자손들"이 아니라 언약을 최종적으로 성취한 "그 후손" 예수라고 보기 때문이다. 


      최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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