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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로마카톨릭 vs. 프로테스탄트 #01: 성육신과 성체, Hoc est corpus m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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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Kwangmin Choi, 2003-05-12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제목

[© 최광민] 로마카톨릭 vs. 프로테스탄트 #1: 성육신과 성체, Hoc est corpus meum

목차
  1. 성사: 마르틴 루터의 만인사제론
  2. 성체논쟁
    1. 성만찬: 유카리스티아 εὐχαριστία
    2. 베렝가리우스 논쟁
    3. 로마카톨릭의 공식견해: 화체설
    4. 정교회
    5. 마르틴 루터의 견해: 공재설
    6. 울리히 쯔빙글리의 견해: 기념/상징설
    7. 장 칼뱅: 동적임재설
    8. 성공회
  3. 맺음말

1. 성사

매주마다 성찬을 집행하는 루터교회 혹은 성공회의 예배에 가끔씩 참석할 때마다, 성찬의 이해를 둘러싼 11세기 베렝가리우스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갈등을 떠올리게 된다. 미국의 루터교회는 3교단 (위스컨신 시노드, 미주리 시노드, 복음주의루터교회)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가장 보수적인 그룹이 위스컨신 시노드고, 가장 자유주의적인 그룹이 복음주의 루터교회(ELCA)다. 후자는 여성목회자 안수문제로 전자로부터 갈라져 나왔고, 최근에는 동성애자에게 성직을 허락하는 문제로 또 한번 내홍을 치른 바 있다. ELCA는 다른 교단과의 에큐메니컬 운동에 매우 적극적이다. 최근에 이 교단은 미국 성공회와 준-통합 단계를 상징하는 성찬완전공유/Full Communion의 단계에 들어섰다. 성찬의 공유란 기술적으로는 16세기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분열시킨 성찬의 해석문제를 둘러싼 갈등에서 서로 한발짝 물러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주리 시노드 소속 루터교회에서는 성체에 대한 루터교단의 전통적인 설명인 공재론에 동의하지 않는 교단 신자가 성찬례에 참가하고자 할때, 루터교단의 공재론에 대해 목사의 설명을 들은 후에 참가하도록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해처럼 성찬을 "상징적인 기념"으로 생각하며, 성찬례를 집전하는 사제에 의해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로마카톨릭의 화체설을 수용하지 않는다. 혹 내가 실제적 임재를 말한다면 그것은 루터교회/성공회의 공재설과 부분적으로는 일치하지만, 보다 정확히는 정교회나 장 칼뱅의 이해와 같이 성령을 통한 임재를 말한다. 나의 판단은 쯔빙글리와 칼뱅의 이해 두가지 사이의 절충적인 입장이다. 나는 아울러 로마카톨릭이나 정교회 처럼, 혹은 프로테스탄트 교단에서는 루터교회와 성공회 등이 그러하는 것 처럼, 매주 성찬식을 집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AD 1-4세기의 기독교 역시 그랬기 때문이다. 설교로 성찬례를 대체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AD 2세기 초/중반 교회 예전에 대한 정보를 담은 교부 유스티노스의 글에서도 볼 수 있듯, 성찬과 성서독서, 그리고 설교는 각각 별개로서,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7개의 성사를 가진 정교회나 로마카톨릭 교회와 달리, 프로테스탄트 교파들은 교파를 막론하고 성서에 기록된 세례(침례)와 성찬식이라는 단 2개의 성사만을 인정한다. 성사 및 그것을 집행하는 성직자의 역할에 대한 이해는 종교개혁 이전 수 백년 전부터 라틴교회 내부에서 상당한 논쟁을 유발해왔는데, 그것은 단순히 교리의 문제일 뿐 아니라 교회의 통제적 권위와 직접적으로 관련을 가진 미묘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Lorenzo Monaco (c.1370 - c.1425), Wikimedia Commons

만약 한 프로테스탄트 신자가 교회라는 가시적 제도를 통한 구원의 역할을 다소 간 인정한다면 그것은 고교회파 성공회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성직자와 평신도의 차이를 다만 기능적인 것에 놓는다면 그것은 루터교회와 칼뱅주의 개혁교회에 가까와질 것이다.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차이가 이보다도 더 평등해진다면 분리파 퓨리턴에서 유래한 회중교회에 더 가까와질 것이다.  성직자의 역할과 제도로서의 교회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유아세례마저 거부한다면, 그는 침례교도/재침례교도에 더욱 가까와질 것이다. 그리고 가시적 성례를 (폐지하고) 내적인 것으로 해석한다면 그는 구세군이나 퀘이커라 불릴 것이다.

성직자의 지위에 대해 프로테스탄트 교단이 가지는 기본 생각은 비슷하다. 프로테스탄트의 성직자는 (오늘날 형태로의) 로마 카톨릭의 사제와 전혀 같지 않은데 로마 카톨릭의 사제는 평신도와 분명한 차이를 가지기 때문이다. 로마카톨릭의 교리체계에서 신의 은총과 기적은 사제와 교회라는 시스템을 통해서 평신도들에게 온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성직자에게 사제/priest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그리고 예전과 전통에 있어 프로테스탄트 가운데서는 가장 로마 카톨릭과 유사한 고교회파 성공회의 경우라 하더라도, 프로테스탄트의 성직자는 이런 주장을 대체로 할 수 없다.  (참고로, '주교'나 '사제'란 단어의 그리스어 원어는 ἐπίσκοπος (= 감독(자))와 πρεσβύτερος (장로/원로)란 의미를 가졌으며, 그런 점에서 한국어에서의 '주교', '사제'란 용어보다는 '감독', '장로'란 표현이 기독교 초기의 용례에 더 부합한다.)

프로테스탄트의 성직자는 본질상 평신도와 다르지 않은데, 그는 다만 그는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기능적' 차이만을 가질 뿐이다. 이 "만인사제론"은 서방교회에서는 12세기 북 이탈리아의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자로 불리는) 왈도파와  16세기 독일의 마르틴 루터에 의해서 복원된 프로테스탄트의 기본정신 가운데 하나다. 말할 필요도 없이, 만인사제론은 결과적으로 로마 카톨릭의 성사(sacrament)를 둘러싼 강렬한 교리적/정치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흔히들 잘못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16세기 종교개혁은 중세 로마카톨릭 교회의 '윤리적' 타락에 대한 반동에서 시작된 '도덕갱신운동'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물론 14-16세기의 교회의 타락과 중세 말에서 르네상스로 넘어오는 과정에서의 민족주의의 성장 등이 외적요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동기를 부여했거나 혹은 종교개혁을 폭발적으로 확대시킨 요인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오히려 종교개혁은 근본적으로 '교리적' 반동이었고, 프로테스탄트의 분열을 가져온 것 역시 기본적으로는 '교리적' 논쟁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핵심 주제에는 늘 성만찬을 포함한 교회의 성사에 대한 교리적 논쟁들이 자리잡았다. 그것은 성사의 매개자로서의 사제, 그리고 그들에게 무오의 권위를 부여한다는 로마카톨릭 교회에 대한 직격탄이었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성직과 로마카톨릭 교회의 성직은 이런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트 평신도는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을 권리와 권위를 성직자들과 함께 나누어 가진다. 그러므로 성직자들의 잘못에 눈을 감거나 성직자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사람은 자신 스스로 프로테스탄트가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또한 프로테스탄트로서의 직무유기이다.




2. 성체논쟁

2.1. 성만찬: 유카리스티아 εὐχαριστία

{복음서}와 바울의 서신 속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시행할 것을 직접 명령한 두가지는 세례(침례)와 성만찬이다. 이 중에서 세례는 공동체로의 가입(성도, saint)을 위한 의식이며, 성만찬은 그것의 지속을 확인하는 의미를 가진다.

이방인의 사도 바울은 코린토스의 기독교도들에게 보내는 그의 첫번째 편지에서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성찬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을 들어서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식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합니다. 몸을 분별함이 없이 먹고 마시는 사람은, 자기에게 내릴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는 몸이 약한 사람과 병든 사람이 많고, 죽은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 힌국어 새번역 {고린도 전서} 11장 발췌

{사도신경}에 등장하는 (프로테스탄트식 표현으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혹 (로마카톨릭식 표현으로) '모든 성인들의 통공' (commuion of saints)은 예전적인 의미에서는 성만찬을 통한 신자(saints) 간의 교제를 의미한다. 그래서 신자에 대한 교회의 징계는 여러 수준의 "성만찬 금지(ex-communication)"으로 나타나게 되고, 이것은 교회의 분열에서 아주 중요한 단계를 차지하게 된다. 동시에 교단의 일치가 이루어지려면 그래서 상호 간의 성찬공유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은 부분성찬공유와 완전공유 두가지로 나뉜다. 신자의 권한을 박탈하는 파문, 즉 아나테마 마라나타(Anathema Maranatha)는 ex-communication의 가장 엄중한 단계로 "교회가 이 사람에 대해 손을 때고 예수의 재림때까지 신의 뜻에 맡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파문자는 회개하고 교회와 화해하기 전까지는 죽는 순간까지도 성찬을 받을 수 없다.

오랫동안 파편적으로만 인용/알려져오다 19세기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전문이 발견된 이후, 고등문헌비평을 통해 1세기 중반 혹은 늦게는 2세기 아주 초기에 작성된 것으로 확인된 비정경문서인 고대문서 {디다케/Didache, 혹은 12사도의 가르침}은 이 의식에 대해 짧게 언급하고 있다.

9장 발췌

(Prayer)...As this broken bread was once scattered on the mountains, and after it had been brought together became one, so may thy Church be gathered together from the ends of the earth unto thy kingdom; for thine is the glory, and the power, through Jesus Christ, for ever.

And let none eat or drink of your Eucharist but such as have been baptized into the name of the Lord, for of a truth the Lord hath said concerning this, Give not that which is holy unto dogs...

(기도)...이 쪼갠 빵이 한때 산 위(예루살렘)에서 나뉘었다가 다시 합쳐져 하나가 되었듯, 당신의 교회도 저 세상 끝에서 당신의 왕국을 향해 함께 모이게 하소서. 영광과 권능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히 당신의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성만찬에서 먹거나 마시게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이에 대해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 처럼, 거룩한 것을 개에게 던져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 번역: 최광민

동일한 문헌의 14장에서는 다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But on the Lord's day, after that ye have assembled together, break bread and give thanks, having in addition confessed your sins, that your sacrifice may be pure....

...주님의 날에 모인 후에는, 그대들의 제물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 죄를 고백하고 함께 빵을 쪼개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오... / 번역: 최광민

이 문헌에서는 아직 후대에 교회분열의 단초가 되는 성체에 대한 해석이 등장하지 않고 있다. 십자가에서 예수가 처형된 것을 뜻하는 "쪼개진 빵"과 예수의 부활을 뜻하는 "합쳐진 빵"이 "세계로 흩어진 교회"와 "하나로 결합된 교회"로 상징되어 설명된다. 이는 성만찬에서의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것처럼, {신약성서}는 교회 (즉, 신자) 역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AD 2세기의 유스티노스는 그의 {첫번째 변증, Apology I}에서 아래와 같이 적었다. (tr. Roberts-Donaldson)

CHAPTER LXV -- ADMINISTRATION OF THE SACRAMENTS: But we, after we have thus washed him who has been convinced and has assented to our teaching, bring him to the place where those who are called brethren are assembled, in order that we may offer hearty prayers in common for ourselves and for the baptized [illuminated] person, and for all others in every place, that we may be counted worthy, now that we have learned the truth, by our works also to be found good citizens and keepers of the commandments, so that we may be saved with an everlasting salvation. Having ended the prayers, we salute one another with a kiss. There is then brought to the president of the brethren bread and a cup of wine mixed with water; and he taking them, gives praise and glory to the Father of the universe, through the name of the Son and of the Holy Ghost, and offers thanks at considerable length for our being counted worthy to receive these things at His hands. And when he has concluded the prayers and thanksgivings, all the people present express their assent by saying Amen. This word Amen answers in the Hebrew language to genoito [so be it]. And when the president has given thanks, and all the people have expressed their assent, those who are called by us deacons give to each of those present to partake of the bread and wine mixed with water over which the thanksgiving was pronounced, and to those who are absent they carry away a portion.

CHAPTER LXVI -- OF THE EUCHARIST: And this food is called among us Eukaristia [the Eucharist], of which no one is allowed to partake but the man who believes that the things which we teach are true, and who has been washed with the washing that is for the remission of sins, and unto regeneration, and who is so living as Christ has enjoined. For not as common bread and common drink do we receive these; but in like manner as Jesus Christ our Saviour, having been made flesh by the Word of God, had both flesh and blood for our salvation, so likewise have we been taught that the food which is blessed by the prayer of His word, and from which our blood and flesh by transmutation are nourished, is the flesh and blood of that Jesus who was made flesh. For the apostles, in the memoirs composed by them, which are called Gospels, have thus delivered unto us what was enjoined upon them; that Jesus took bread, and when He had given thanks, said, "This do ye in remembrance of Me, this is My body;" and that, after the same manner, having taken the cup and given thanks, He said, "This is My blood;" and gave it to them alone. Which the wicked devils have imitated in the mysteries of Mithras, commanding the same thing to be done. For, that bread and a cup of water are placed with certain incantations in the mystic rites of one who is being initiated, you either know or can learn.

제 66장: 성찬 (유카리스티아 εὐχαριστία)에 관해: 우리들은 이 음식을 "유카리스티아"라 부른다. 아무나 이 음식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우리가 가르친 바를 사실로 믿고, 죄의 사면과 거듭남을 위해 세례를 받았으며,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로 사는 사람만이 참예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음식을 받을 때 보통 빵이나 음료를 받을 때 처럼 하지 않으며, 마치 신의 말씀에 의해 인간이 되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살과 피를 갖게 된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받는 것처럼 한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기도에 의해 축복되고, 또 이를 통해 우리의 피와 살이 변화되어 양육되는 이 음식이 인간이 되신 예수의 살과 피라고 가르침 받아왔다. {복음서}라 불리는 사도들의 기억을 모은 책이 사도들이 받은 명령을 전해주고 있다. 예수께서 빵을 취한 후 기도를 올리시고 말씀하시길,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고 하셨고, 같은 방식으로 (포도주) 컵을 취하여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후, "이것은 나의 피다"라고 하신 후 잔을 그들에게 주셨다. 악마는 이것을 흉내내어 미트라스 밀교에서 같은 일을 하게 하였다. 즉, 어떤 주문을 읊으면서 빵과 물잔이 이 밀교의 입문식 때 놓여지는데, 당신들이 이미 이것을 알고 있거나, 혹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번역: 최광민   

이후 신의 아들인 로고스/성자가 유대아에서 한 인간 예수로 태어난 사건을 뜻하는 "성육신"에 대한 인식과 합쳐진 설명이 시도되기 시작한다.

일단은 서유럽에서의 논쟁부터 설명해 본다.




2.2. 베렝가리우스 논쟁

11세기에 서유럽을 뒤집어놓았던 논쟁은 투르 출신의 신성로마제국 수도사 베렝가리우스에 의해 촉발된 "성체변화논쟁"이다.  편의상 이 논쟁을 "베렝가리우스 논쟁"이라 부르겠다. 이른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한 일련의 말이 이 논쟁의 핵심이다.

라틴어 {마태 복음서} 26:26-28에서 인용한다.

Cenantibus autem eis accepit Iesus panem
et benedixit ac fregit deditque discipulis suis
et ait accipite et comedite hoc est corpus meum

식사 중에 예수는 빵을 집어
축복한 후, 빵을 찢어 제자들에게 나눠주면서 말했다.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나의 몸이다."

et accipiens calicem gratias egit
et dedit illis dicens bibite ex hoc omnes
hic est enim sanguis meus novi testamenti qui
pro multis effunditur in remissionem peccatorum

그리고 컵을 들어 감사기도를 올리고
제자들에게 주며 말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 흘리는 나의 피다."

AD 2-3세기의 기록을 보면, 초기 기독교도들은 일반 로마 시민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의혹을 받고 있었다.

  • 기독교도들은 공개적 장소에서 광란의 성관계와 근친상간을 행한다.
  • 기독교도들은 사람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식인의식을 행한다.

1번의 경우는 “교우 형제 자매와 거룩한 키스로 인사를 나눌 것”을 권고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형제, 자매에 대한 근친상간으로 로마인들이 오해했다는 사실, 그리고 2번은 성만찬 의식에 대한 오해였다.

베렝가리우스는 성찬식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수사학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사제가 미사(정확히는 성만찬 Eucharist)중에 축복하고 두손으로 찢는 빵과, 컵에 담겨져 하늘로 들어올려진 포도주의 의미에 대해서는 고대의 교부들 간에도 의견이 분분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을 "기념 amnesis"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그룹은 사제의 두 손에서 빵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이, 포도주는 실제로 그의 피로 변한다고 믿었다. 이런 주장들이 로마카톨릭 교회에서는 점차적으로 빵과 포도주가 "실제"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쪽으로 통일되어가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베렝가리우스 논쟁 당시에는 후자를 의미하는 공식적인 로마 카톨릭 교회의 용어는 성체변화 (trans-substantation) / 화체설이란 단어는 등장하지 않았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즉 논리학과 존재론으로 무장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등장까지 기다리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리 단순한 신앙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 이를 뒷받침하거나 혹은 비판하기 위해 변증법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베렝가리우스의 논법은 사물의 속성과 속성의 운반자로서의 실체를 설명하는 논리적 수사학에 그 핵심이 있다. 사제가 미사에서 쪼개는 빵과 들어올려진 포도주가 "실체 (substantio)적"으로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베렝가리우스는 이 주장이 문법적으로도, 혹은 논리적으로도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보이고 싶었다.

베렝가리우스의 첫 분석은 "A는 B다"라는 서술구문이다. "이 빵은 나의 몸이다" 라는 구문에서 빵과 몸을 동시에 주어로 해석하려는 반대파의 주장에 대해, 베렝가리우스는 한 문장에서 주어가 둘 일 수 없다는 수사학의 원칙을 내세웠다. 그래서 빵과 몸은 논리적 등가가 아닌 것이다.

이보다 더 강력한 논증은 사물을 속성과 실체라는 관점에서 보는 고대 논리학에서 출발한다. 만약 미사에서 사제가 축성한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면, 이것은 빵과 포도주가 그 속성을 그대로 둔 채 예수의 몸으로 그 실체를 바꾼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베렝가리우스의 반대파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물에서 실체와 속성이 따로따로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베렝가리우스는 이에 대해 사물에 대한 인식에서 그 실체와 속성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하니라, 두개가 함께 상호필연적으로 한 사물을 표상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반대파가 신의 전능을 빌어 신이 빵에서 그 속성을 놓아두고 실체를 예수의 살로 바꾼다고 주장한다면, 이 세상에서 인간이 인식하는 대상들에 대해 사람은 어떤 식으로도 자신의 인식의 확실성을 장담할 수 없다. 이것을 베렝가리우스는 "종의 상반 contra artem"이라 불렀다.

베렝가리우스 논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와 그의 반대파들이 중세 철학용어 "실재 substantia"라는 말을 서로 다르게 이해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반대파들은 "실재"를 "물리적 실체"와 동일시한 반면, 베렝가리우스는 그 말을 영성적 실체, 혹 논리학적 용어로는 하나의 "기호"로 보았다. 그러므로 베렝가리우스의 입장에서도 예수가 말한 그 빵은 바로 예수의 몸이고, 또한 예수의 몸은 성찬식 때 바로 그 빵과 함께 있는 것이다. 비록 그 현존이 "물리적 실체"로서가 아니라 "상징적" 임재이지만 말이다. 주류이던 반대파들은 실재란 물체적 실체이며 따라서 예수의 몸이 물체적으로 빵과 포도주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렝가리우스는 라테란 공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규정되는데, 반대파들은 (가령, 실바 칸디다의 주교 훔베르트) "미사에서 예수의 몸은 사제에 의해 찢겨지고, 신자들의 이로 씹힌다."는 말로 실재를 물리적 실체로 이해하는 그들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사제에 의해 축성된 빵을 쥐가 쏠아먹으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더욱 선명한 설명을 덧붙인다. 즉, "그리스도는 쥐 안에, 쥐는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다."는 것이 베렝가리우스를 정죄한 반대파들의 공식적 해명이다. 이것은 나중에 "성체변화 transsubstatiatio"라는 용어로 고정된다.




# 로마 카톨릭의 공식견해 : 화체설 (Trans-substantiation)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실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정의에 따라 결론 내리면서 '실체변화/Trans-substantiation'를 로마 카톨릭의 교리로 고정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대상을 조성을 양, 질, 관계, 시간, 공간 등등의 9가지 우유(accident)와 하나의 실체(substance)로 나누었는데, '우유 (심베베베코타)'는 외적인 모습/속성의 전달체로서 실체에 덧붙이거나 변화시키거나 실체로부터 분리해내더라도 실체에는 변화를 일으키지 않은 어떤 것 혹은 속성을 말한다. 따라서 사물의 비본질적인 속성이다. 반면 '실체' 그 본질/존재/속성 정도에 해당하는 중세철학 용어이다. 하나의 실체는 질료와 형상으로 이뤄지는데, 이때 '형상'이란 '외적으로 감지되는 형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퀴나스는 예수가 "이것은 나의 몸이고 나의 피다"라고 선언했던 빵과 포도주는 그 외형(우유)는 변화가 없는 대신, 빵의 본질적 실체는 "예수의 실체적인 살과 피"로 변하여야 한다고 이해한다. 즉, 실체 (substance)가 변화하므로, 이것을 성체의 실체변화/화체설 (trans-substantiation) 이라고 부른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서 성체의 축성 후 빵에 일어나는 변화, 즉 우유는 그대로이나  빵의 실체는 그리스도의 그것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설명하는 해당단락을 읽어보자.

 http://www.newadvent.org/summa/4075.htm#article5

우선 아퀴나스는 성체의 축성 후 빵의 우유가 그대로 남아 있음에 대해 먼저 이렇게 주장하며, 이에 대한 반박을 하나씩 논한다.

I answer that, It is evident to sense that all the accidents of the bread and wine remain after the consecration. And this is reasonably done by Divine providence. First of all, because it is not customary, but horrible, for men to eat human flesh, and to drink blood. And therefore Christ's flesh and blood are set before us to be partaken of under the species of those things which are the more commonly used by men, namely, bread and wine. Secondly, lest this sacrament might be derided by unbelievers, if we were to eat our Lord under His own species. Thirdly, that while we receive our Lord's body and blood invisibly, this may redound to the merit of faith.

실체의 변화에 대해서, 아퀴나스는 만약 빵의 실체적 형상이 남아있다면 질료 이외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는 것은 없는 셈이기에 빵의 실체적 형상은 반드시 변해야 하며, 따라서 빵의 실체적 형상은 남아있지 않게된다고 설명한다. 또한 실체를 구성하는 형상은 반드시 적절한 질료 안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축성 시 질료 뿐 아니라 실체 전부가 그리스도의 실체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논증한다.

I answer that, Some have contended that after the consecration not only do the accidents of the bread remain, but also its substantial form. But this cannot be. First of all, because if the substantial form of the bread were to remain, nothing of the bread would be changed into the body of Christ, excepting the matter; and so it would follow that it would be changed, not into the whole body of Christ, but into its matter, which is repugnant to the form of the sacrament, wherein it is said: "This is My body."

Secondly, because if the substantial form of the bread were to remain, it would remain either in matter, or separated from matter. The first cannot be, for if it were to remain in the matter of the bread, then the whole substance of the bread would remain, which is against what was said above (Article 2). Nor could it remain in any other matter, because the proper form exists only in its proper matter. But if it were to remain separate from matter, it would then be an actually intelligible form, and also an intelligence; for all forms separated from matter are such.

Thirdly, it would be unbefitting this sacrament: because the accidents of the bread remain in this sacrament, in order that the body of Christ may be seen under them, and not under its proper species, as stated above (Article 5)And therefore it must be said that the substantial form of the bread does not remain.

종교개혁에 반동한 로마카톨릭 측의 개혁작업인 트렌트 공회의에서 정식채택된 설명은, 형상과 질료로 구성된 실체에서 변화가 일어나되 우유는 변화되지 않는 채 남으며, 따라서 이 적극적 행위에 의하여 하나의 현실적인 존재가 소멸됨이 없이 다른 현실적인 존재로 전체 실체가 변화한다고 풀이한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신자들은 미사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에 극진한 공경을 바치며 이것을 "성체를 모신다"라고 표현한다. 빵과 포도주는 사제에 의해 실제적으로, 또 실재적으로 예수의 살과 피로 변화되얶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체설을 믿지 않는 것은 독신죄에 해당하게 되며, 사제에 의해 적절히 성체변화되지 않으면 그 성체는 무효하며, 또한 그 성찬식 역시 무효하다.

한국의 로마카톨릭 초기역사에는 아주 흥미로운 사건이 하나 있다.

정조 8년인 AD 1784년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조선인 최초로 공식적인 로마카톨릭 신자가 된 이승훈은, 석달 후 성서, 성상, 묵주 등을 북경에서 가지고 한양으로 돌아와, 이듬해 함께 천주학을 연구하던 이벽, 이가환, 정약용, 정약종, 정약전 등과 함께 명례동 김범우의 집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집회를 가졌다. 1785년 김범우의 집에서 가진 집회를 정부에 발각된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정부의 탄압이 시작되자 오히려 이를 계기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표교에 열정을 갖게 된 이들 지도부는, 1786년 자체적으로 이승훈을 주교로 삼고, 정약전, 최창연, 권일신, 유항검, 이존창을 포함한 10인을 사제로 삼은 후 성체성사와 고백성사 등을 수행하게 했다. 하지만 사제로서 성사를 집전해오던 유항검은 {성교절요} 등 교리서를 숙독하다가 평신도가 '사제를 사칭'하면 신을 모독하는 "독성죄"가 된다는 점을 깨닫고 지도부에 문제제기를 하게되고, 동지사편으로 1789-1790년 북경을 가게 된 윤유일이 가성직 제도가 (특별히 성체성사에 있어) 신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고 있으므로 폐지하라는 북경선교사들의 답신을 받고 돌아온 후 가성직 제도는 폐지된다. 이어 북경의 선교부는 적절히 성체성사를 집행할 중국인 사제인 주문모를 조선에 파견한다.

일단 사제에 의해 성체변화가 일어난 후의 빵과 포도주는 실재적인 예수의 살과 피이기 때문에 그 성체는 그리스도로 여겨져야 하며, 따라서 이를 함부로 먹거나 폐기시킬 수 없다. 그래서 집전사제는 원칙적으로는 성찬례 후에 남는 포도주 (=그리스도의 피)를 성배에 있는 그대로 즉시 모두 마셔야하며 (혹은 신중하게 폐기) , 이를 불경하게 다루거나 의도적으로 버리게 되면 자동적인 파문을 당할 수 있다.

고대의 라틴교회 및 동방의 정교회와 달리, 중세 시절부터 제 2차 바티칸 공회의 사이의 로마카톨릭 미사에서 포도주는 로마카톨릭 사제 만이 마시고 일반 신자들은 빵이 빵만 먹었다. 라틴교회는 예수의 육체는 피를 포함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예수의 피 (포도주) 없이 몸 (빵)만 받는 것도 충분하다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중세 이후, 포도주를 일반 신자들에게도 먹게 했던 사람은 보헤미아의 얀 후스(Jan Hus)가 처음이었고, 그는 이 일과 연관된 여러 교리적 충돌로 결국 화형을 당했다. 영국 옥스포드의 개혁자 존 위클리프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던 후스였지만, 성체에 대한 설명에서는 위클리프의 '기념설'보다는 전통적인 로마교회의 '화체설'을 따르는 것으로 스스로 변호했다.

성체변화 논쟁은 역사적으로는 성직에 대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두가지 교리를 지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우선, 사제 독신제의 문제에 있어서는 이렇듯 빵과 포도주를 실제 예수의 살과 피로 변화시키는 사제는 여자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고 거룩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 또한 로마 카톨릭의 성직직제의 수직적 권위 밖에서 이뤄지는 성사(sacrament)를 무효화 시킴으로써, 로마 카톨릭의 위계적 질서를 강화시키게 된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에서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경계는 사실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다.




# 정교회

정교회는 원래 이 문제에 대해 다소 모호한 표현을 사용해 왔으며 라틴교회와 같은 식의 정교한 교리화를 대체로 피해왔다. 따라서 로마카톨릭교회의 '실체변화 transsubstantiatio'와 유사한 식의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16세기부터인데, 정교회 측에서 그에 대응하는 여러가지 용어를 사용하지만 이중 가장 가까운 것은 라틴어 'transsubstantiatio'의 직역에 가까운 메타우스오시스 (μετουσίωσις)일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 용어로 본질을 말하는 우시아 (οὐσία)와 라틴어에서의 수브스탄티아 (subtantia)가 정확히 같은 의미에 대응되는지에 대한 큰 혼란은 삼위일체론의 정립되어 가던 AD 4세기에도 있었다.

사실 정교회에서는 8-9세기 성화상파괴논쟁시 성화상파괴론자들이 오직 성체만이 그리스도의 진정한 "이콘"이라고 주장한데 반해, 성화상옹호론자들은 성체는 '이콘' 정도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주장했다. 얼핏보면 마치 로마카톨릭의 '실체변화'를 말하는 것 처럼 들리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성화상옹호론자 중 가장 영향력 컷던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빵과 포도주'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가를 논하면서, 마치 그리스도가 "성령에 의해" 마리아를 통해 몸을 입은 것과 같이, 성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는 것 역시 "성령에 의한 것"이라고 풀이하면서, 그렇게 이해하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지적한다.

"It is truly that Body, united with Godhead, which had its origin from the Holy Virgin; not as though that Body which ascended came down from heaven, but because the bread and wine themselves are changed into the Body and Blood of God. But if thou seekest after the manner how this is, let it suffice thee to be told that it is by the Holy Ghost; in like manner as, by the same Holy Ghost, the Lord formed flesh to himself, and in himself, from the Mother of God; nor know I aught more than this, that the Word of God is true, powerful, and almighty, but its manner of operation unsearchable.” --- (J. Damasc. Theol. lib. iv. cap. 13, § 7.)  --- 다마스쿠스의 요한




# 마르틴 루터의 견해 : 공재설 (Co-substantiation)

로마 카톨릭 측의 "화체론"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뿌리를 둔 토마스 아퀴나스의 중세 중기 사고의 결실이라면, 루터의 이해는 중세 말 유명론자인 윌리엄 오캄의 이해와 유사하다. 루터 본인도 자신의 철학/논리학적 배경을 '유명론자'로 명시했다.

The Terminists [another name for Nominalists] is the name of a school in the universities to which I belong. They oppose Thomists, Scotists, and Albertinists, and are called Occamists, from Occam their founder .... Occam is a wise and sensible man, who endeavored earnestly to amplify and explain the subject. --- Martin Luter, {Table Talk} 

'유명론자'란 내가 속한 대학들의 학파 가운데 하나다. 그들은 토마스 (아퀴나스) 학파, (둔스) 스코투스 학파,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학파에 반대입장을 취하며, 창시자인 오캄의 이름을 따라 '오캄주의자'라 불린다....[중략]... 오캄은 현명하고 지각있는 사람으로서 대상을 드러내 설명하는데 꾸준한 노력을 기울였다.... --- 마르틴 루터, {탁상담화} / 번역: 최광민

특별히 그의 '공재설'은 오캄학파가 설명하는 '공간성'과 '실재성'의 개념에 다소 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God has and knows various ways to be present at a certain place, not only the single one of which the fanatics prattle, which the philosophers call "local." Of this the sophists properly say: There are three modes of being present in a given place: locally or circumscriptively, definitively, repletively..

신은 특정한 장소에 자신을 드러내실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가지며 또 알고 계신다. 이때 이 '장소'란 광적인 헛소리들에서 언급하는 '한 장소'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적으로 이런 '장소'는 '국지적' 이다. 한 장소에서 존재하는 데에는 세가지 방식이 있는데, 각각 국지적/외접적, 정의적, 충만적 현전이 그것들이다. / 마르틴 루터, {루터선집 } LW 37:156-58 번역: 최광민

.....an object is circumscriptively or locally in a place . . . if the space and the object occupying it exactly correspond and fit into the same measurements, such as wine or water in a cask, where the wine occupies no more space and the cask yields no more space than the volume of the wine.......

한 대상은 한 장소에 국지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마치 포도주와 술통처럼, 공간과 대상이 정확히 동일한 측정구간 안에 대응되고 끼워 맞춰진다면, 이 경우 포도주의 부피는 술통이 차지하는 공간 이상을 차지하지 않는다. / 마르틴 루터, {루터선집} LW 37:156-58 번역: 최광민

..... an object is in a place definitively...if the object or body is not palpably in one place and is not measurable according to the dimensions of the place where it is, but can occupy either more room or less. Thus it is said that angels and spirits are in certain places....The space is really material and circumscribed...but that which occupies it has not the same length, breadth, or depth as the space which it occupies. --- LW 37:156-58

대상은 '정의적' 방식으로 장소를 차지할 수도 있다.....만약 대상 혹은 이 한 장소에서 느껴지지 않고, 존재하고 있는 공간의 차원에 따라 측정될 수 없다 해도, 대상은 그 공간을 다소 간 차지할 수 있다. 그래서 천사와 영혼들은 그런 장소에 있다고 이야기 되는 것이다.....이 공간은 실제로는 물질적이고 외접을 가지지만.......그 공간은 그것이 차지하는 공간과 동일한 길이, 너비, 혹은 깊이를 갖지 않는다.    / 마르틴 루터, {루터선집 } LW 37:156-58 번역: 최광민

마지막 존재방식인 "충만전 현전"은 바로 '신의 존재' 방식으로, 루터는 신이 온 세상을 충만히 채우듯 그리스도 역시 그러하다고 보았고,  모든 곳에 동시에 현전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루터는 이런 사유 가운데 그의 '공재설'의 기반을 닦았다.

물론 루터의 이해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고대와 중세 내내 존재했던 생각 중 하나이다. 다만 교회의 '표준적' 이해가 아니었을 뿐이다. 중세의 모든 신학자들은 성체문제에 대한 다양한 접근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베렝가리우스에 대한 11세기의 정죄 이후, 모든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우회하여 표현해야만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a} 체계는 사실 그가 죽으면서 분열되었으며, 로마 카톨릭 교회가 아퀴나스를 성자로 추앙하고 그의 교리를 교회의 공식교리로 인정할 무렵엔 이미 아퀴나스의 체계는 사방에서 공격당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에 대한 공격 중의 하나는 과연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신학적 명제에 적용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것이었다.

When I learned later what church it was that had decreed this, namely, the Thomistic—that is, the Aristotelian church—I grew bolder, and after floating in a sea of doubt, I at last found rest for my conscience in the above view, namely, that it is real bread and real wine, in which Christ's real flesh and real blood are present in no other way and to no less a degree than the others assert them to be under their accidents. I reached this conclusion because I saw that the opinions of the Thomists, whether approved by pope or by council, remain only opinions, and would not become articles of faith even if an angel from heaven were to decree otherwise [Gal. 1:8]. For what is asserted without Scriptures or proven revelation may be held as an opinion, but need not be believed. -- LW 36:29

교회가 (교리로) 선포한 이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 즉, 아리스토렐레스적 교회 --- 이었다는 것을 훗날 배운 후 나는 더 과감해졌고, 의심의 바다를 떠돈 후에 마침내 내 양심에 따라 분명히 "실제 빵과 실제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의 실제 살과 실제 피가 존재하며,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유' 아래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위의 관점에서 안식을 찾게 되었다. 내가 이 결론에 이른 것은, 교황과 주교회의의 승인을 받았던 말든 토마스주의자들의 견해가 그저 견해에 불과할 뿐이라는 점, 그리고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진리와 다른 복음을 / 역자 주) 선포하더라도 믿음의 신조가 될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성서나 혹은 입증된 계시에 근거하지 않는 주장은 그냥 견해로 남아야 할 것이며, 신앙의 대상이 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 마르틴 루터, {루터선집}  LW 36:29 / 번역: 최광민

루터는 1519년 무렵부터 로마카톨릭의 '화체설'에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으나, 1524년부터는 '예수의 살과 피의 실재성'보다는 '상징설'을 주장하는 칼슈타트, 부쳐, 쯔빙글리 등의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격렬한 논쟁을 시작하였다. 강고한 성화상 파괴론자였던 칼슈타트 등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빵과 포도주에 '실재'한다고 보는 해석이 결국 성체를 우상으로 받드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입장을 취했고, 루터는 이들에 반발해 일련의 논고로 대응한다.

루터의 이해를 "공재론"이라 부르는 이유는, 예수의 살과 피라는 속성(substance)이 빵과 포도주의 속성과 함께 같은 외형 속에 신비로운 방식으로 "공존"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터에게 있어 성만찬에서 신자들이 나누는 빵과 포도주는 외형과 속성 모두 변함없는 빵과 포도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실제" - 몸과 피인 것이다.

로마카톨릭과의 분명한 분리에 큰 역할을 하게 되는 1537년 슈말칼드 신조에는 루터의 견해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 우선 그는 성체에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실제"로, "실재"로서 "임재"한다고 말한다.

We hold that the bread and the wine in the Supper are the true body and blood of Christ and that these are given and received not only by godly but also by wicked Christians.

우리는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가 실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이며, 이것이 신실한 신자와 타락한 신자 모두에게 주어진다고 믿는다
---- 마르틴 루터, {일치신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 한다는 로마카톨릭의 "화체설"은 거부한다. 즉, 성만찬에서의 빵과 포도주는 실제 그리스도의 살과 피이지만, 빵은 여전히 빵이고 포도주는 여전히 포도주다. 다만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거기 임재할 뿐이다.

As for transubstantiation, we have no regard for the subtle sophistry of those who teach that bread and wine surrender or lose their natural substance and retain only the appearance and shape of bread without any longer being real bread, for that bread is and remains there agrees better with the Scriptures, as St. Paul himself states, "The bread which we break" (1 Cor. 10:16), and again, "Let a man so eat of the bread" (1 Cor. 11:28). --- The Book of Concord, trans. and ed., Theodore G. Tappert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59), Part III, Art. VI, p 311, 

'화체설'에 대해서, 우리는 빵과 포도주가 자연적 속성을 포기하거나 잃으며, 더이상 실제로 빵이 아닌 채로 그저 외형과 형태만 빵처럼 보이는 상태로 유지된다고 주장하는 정교하고 교묘한 가르침이 성서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간주한다. 즉, 바울 자신은 "우리가 찢는 이 빵"이라고 말한 후, "이 '빵'을 먹게 하십시오"라고 진술한다. ---- 마르틴 루터, {일치신조} / 번역: 최광민

앞에서 설명했다시피, 루터는 육체적으로 부활/승천하여 성부의 우편에 앉아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여전히 '육체'이긴 하지만 신성과 온전히 결합되었기에, 마치 신이 영으로서 온 우주에 편재하듯 부활한 예수의 몸도 그러하다고 생각했다.

Christ's body is at the right hand of God; that is granted. The right hand of God, however, is everywhere....Therefore it surely is present also in the bread and wine at table. Now where the right hand of God is, there Christ's body and blood must be, for the right hand of God is not divisible into many parts but a single, simple entity. --- LW 37:53

그리스도의 몸은 신의 우편에 계신다. 이것은 확실하(게 기록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신의 우편'이란 모든 곳을 말한다....그래서 식탁에 놓은 빵과 포도주 역시 '신의 우편'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 '신의 우편' ,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계신 그곳은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지는 것이 아니라, 일치된 단일체이다 ----- 마르틴 루터, {루터선집} 37:53 / 번역: 최광민

따라서 예수는 성부의 우편에 있는 동시에 그의 몸을 기념하는 성체, 즉 빵과 포도주 안에도 그리스도는 존재하는 것이 된다.

[T]he glory of our God is precisely that for our sakes he comes down to the very depths, into human flesh, into the bread, into our mouth, our heart, our bosom . . . --- This is My Body, 1527, LW, Vol. 37, 72

신의 영광스러움은, 우리를 위해 신이 인간의 몸, 빵, 우리의 입, 우리의 심장, 가슴....바로 깊은 곳까지 내려오신다는 바로 그 점이다. --- 마르틴 루터, {이것은 나의 몸이다} / 번역: 최광민

[T]his word of Luke and Paul is clearer than sunlight and more overpowering than thunder. First, no one can deny that he speaks of the cup, since he says, “This is the cup.” Secondly, he calls it the cup of the new testament. This is overwhelming, for it could not be a new testament by means and on account of wine alone. --- Against the Heavenly Prophets in the Matter of Images and Sacraments, 1525; LW, Vol. 40, 217

All right! There we have it! This is clear, plain, and unconcealed: “I am speaking of My flesh and blood.” . . . There we have the flat statement which cannot be interpreted in any other way than that there is no life, but death alone, apart from His flesh and blood if these are neglected or despised. How is it possible to distort this text? . . . You must note these words and this text with the utmost diligence . . . It can neither speciously be interpreted nor avoided and evaded. --- Sermons on the Gospel of St. John: Chapters 6-8, 1532; LW, Vol. 23, 133-135

좋다! 이제 내용을 보자. 이것은 분명하고 단순하며 모호하지 않은 진술이다: "내 살과 피에 대해 말하노니....". 우리는 여기서 그 분의 살과 피를 무시하거나 조롱하지 않는 한, 이것 이외엔 생명도 없고 오직 죽음만 있다고 말하는 것이라 보는 것 이외의 다른 해석은 있을 수 없는 평이한 진술을 본다. 어떻게 이 문장을 왜곡하는 것이 가능한가?  --- 마르틴 루터, {요한복음서 설교집} / 번역: 최광민 

[S]ince we are confronted by God’s words, “This is my body” – distinct, clear, common, definite words, which certainly are no trope, either in Scripture or in any language – we must embrace them with faith . . . not as hairsplitting sophistry dictates but as God says them for us, we must repeat these words after him and hold to them. --- Confession Concerning Christ’s Supper, 1528; in Althaus, 390)

그러나 루터의 이해는 빵과 포도주의 속성이 사제에 의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라는 새로운 속성으로 변화된다는 로마카톨릭의 교리와는 분명히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성체를 상징적으로 이해한 베렝가리우스를 파문한 교황들을 칭송했으며, 쯔빙글리의 견해에 반박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은 신자들의 이로 씹힌다"라며 자신의 입장을 재천명했다.

I have often enough asserted that I do not argue whether the wine remains wine or not. It is enough for me that Christ’s blood is present; let it be with the wine as God wills. Sooner than have mere wine with the fanatics, I would agree with the pope that there is only blood. --- Confession Concerning Christ’s Supper, 1528, Luther’s Works [henceforth, “LW”], Vol. 37, 317)

나는 포도주가 여전히 포도주로 남아 있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충분히 설명해 왔다. 나로서는 그저 '그리스도의 피가 현전한다'라고 말하면 충분하다. 신의 의지에 의해 (그리스도의 / 역자 주) 피가 포도주와 함께 있다라고 하자. '오직 포도주만 있다'고 말하는 광신자 (쯔빙글리파 / 역자 주)들 보다는, 차라리 '오직 피만 있다'고 주장하는 교황에게 기꺼이 동의할 것이다 ---- 마르틴 루터, {그리스도의 성찬에 관한 고백} /  번역: 최광민

It is not sound reasoning arbitrarily to associate the sin which St. Paul attributes to eating with remembrance of Christ, of which Paul does not speak. For he does not say, “Who unworthily holds the Lord in remembrance,” but “Who unworthily eats and drinks.” --- Against the Heavenly Prophets in the Matter of Images and Sacraments, 1525; LW, Vol. 40, 183-184)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을 먹음과 죄를 연관시켰다는 주장은 건전한 사유가 아니다.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는 "주님에 대한 기억을 모시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가 아니라,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라고 말한다....  --- 마르틴 루터, {성화상과 성사 문제에 관한 (자칭) "천상의 예언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며} / 번역: 최광민

. . . The bread which is broken or distributed piece by piece is the participation in the body of Christ. It is, it is, it is, he says, the participation in the body of Christ. Wherein does the participation in the body of Christ consist? It cannot be anything else than that as each takes a part of the broken bread he takes therewith the body of Christ . . . --- Against the Heavenly Prophets in the Matter of Images and Sacraments, 1525; LW, Vol. 40, 178)

빵을 쪼개거나 조각으로 나누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 이것, 이것을 두고 그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다는 것인가? 각자가 그리스도의 몸과 함께하는 나뉘어진 빵을 받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될 수는 없다 .... ---마르틴 루터, {성화상과 성사 문제에 관한 (자칭) "천상의 예언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며} / 번역: 최광민

내가 알고 지내던 나이 드신 루터교회 신자 부부에 따르면, 자신들이 젊었을 때는 주일예배에 영성체를 받기 위해 금요일 부터 금식하는 루터교회 신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 울리히 쯔빙글리 : 기념/상징설 (Memoralism / Amnesis)

당시 루터와는 독자적으로 스위스 취리히의 개혁교회를 이끌었던 울리히 쯔빙글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념설/amnesis"을 재천명했다. 즉, 후기 아우구스티누스의 이해에 따라 성찬을 포함한 교회의 성사들은 교회의 지체들을 결속시키기 위한 상징적 행위라는 것이었다. 이 경우 베렝가리우스의 이해와 유사해진다.

AD 4-5세기의 교부이자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였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설교 #272를 읽어보자.

I haven't forgotten my promise. I had promised those of you who have just been baptized a sermon to explain the sacrament of the Lord's table, which you can see right now, and which you shared in last night. You ought to know what you have received, what you are about to receive, what you ought to receive every day. That bread which you can see on the altar, sanctified by the word of God, is the body of Christ.†2 That cup, or rather what the cup contains, sanctified by the word of God, is the blood of Christ. It was by means of these things that the Lord Christ wished to present us with his body and blood, which he shed for our sake for the forgiveness of sins. If you receive them well, you are yourselves what you receive. You see, the apostle says, We, being many, are one loaf, one body (1 Cor 10:17). That's how he explained the sacrament of the Lord's table; one loaf, one body, is what we all are, many though we be.

....제단에서 여러분이 보는 빵은 신의 말씀으로 성별된 것으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또한 컵 혹은 그 안에 담긴 포도주는 역시 신의 말씀으로 성별된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즉, 이것들은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 희생한 그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주길 원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성체를 받을 때, 여러분은 바로 여러분 자신을 받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께서 말한 것처럼, 우리 모두는 하나의 빵이요 하나의 몸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주님의 만찬에서의 성체에 대해 설명하는 바입니다. 한 덩어리의 빵과 한 몸이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여럿이지만 말입니다. / 번역: 최광민

In this loaf of bread you are given clearly to understand how much you should love unity. I mean, was that loaf made from one grain? Weren't there many grains of wheat? But before they came into the loaf they were all separate; they were joined together by means of water after a certain amount of pounding and crushing. Unless wheat is ground, after all, and moistened with water, it can't possibly get into this shape which is called bread. In the same way you too were being ground and pounded, as it were, by the humiliation of fasting and the sacrament of exorcism. Then came baptism, and you were, in a manner of speaking, moistened with water in order to be shaped into bread. But it's not yet bread without fire to bake it. So what does fire represent? That's the chrism, the anointing. Oil, the fire-feeder, you see, is the sacrament of the Holy Spirit.

Notice it, when the Acts of the Apostles are read; the reading of that book begins now, you see. Today begins the book which is called the Acts of the Apostles. Anybody who wishes to make progress has the means of doing so. When you assemble in church, put aside silly stories†3 and concentrate on the scriptures. We here are your books.†4 So pay attention, and see how the Holy Spirit is going to come at Pentecost. And this is how he will come; he will show himself in tongues of fire. You see, he breathes into us the charity which should set us on fire for God, and have us think lightly of the world, and burn up our straw, and purge and refine our hearts like gold. So the Holy Spirit comes, fire after water, and you are baked into the bread which is the body of Christ. And that's how unity is signified. Now you have the sacraments in the order they occur.†5 First, after the prayer,†6 you are urged to lift up your hearts; that's only right for the members of Christ. After all, if you have become members of Christ, where is your head?†7 Members have a head. If the head hadn't gone ahead before, the members would never follow. Where has our head gone? What did you give back in the creed?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he ascended into heaven, he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So our head is in heaven. That's why, after the words Lift up your hearts, you reply, We have lifted them up to the Lord.

And you mustn't attribute it to your own powers, your own merits, your own efforts, this lifting up of your hearts to the Lord, because it's God's gift that you should have your heart up above. That's why the bishop, or the presbyter who's offering, goes on to say, when the people have answered We have lifted them up to the Lord, why he goes on to say, Let us give thanks to the Lord our God, because we have lifted up our hearts. Let us give thanks, because unless he had enabled us to lift them up, we would still have our hearts down here on earth. And you signify your agreement by saying, It is right and just to give thanks to the one who caused us to lift up our hearts to our head.

Then, after the consecration of the sacrifice of God, because he wanted us to be ourselves his sacrifice, which is indicated by where that sacrifice was first put, that is the sign of the thing that we are;†8 why, then after the consecration is accomplished, we say the Lord's prayer, which you have received and given back. After that comes the greeting, Peace be with you, and Christians kiss one another with a holy kiss. It's a sign of peace; what is indicated by the lips should happen in the conscience; that is, just as your lips approach the lips of your brothers or sisters, so your heart should not be withdrawn from theirs. So they are great sacraments and signs, really serious and important sacraments. Do you want to know how their seriousness is impressed on us? The apostle says, Whoever eats the body of Christ or drinks the blood of the Lord unworthily is guilty of the body and blood of the Lord (1 Cor 11:27). What is receiving unworthily? Receiving with contempt, receiving with derision. 

Don't let yourselves think that what you can see is of no account. What you can see passes away, but the invisible reality signified does not pass away, but remains. Look, it's received, it's eaten, it's consumed. Is the body of Christ consumed, is the Church of Christ consumed, are the members of Christ consumed?†9 Perish the thought! Here they are being purified, there they will be crowned with the victor's laurels. So what is signified will remain eternally, although the thing that signifies it seems to pass away.

가시적인 것들이 아무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고 생각지 말기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사라지더라도,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보이지 않는 실체는 사라지지 않고 남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빵과 포도주를) 받아 먹고 소화되었습니다. 그럼 그리스도의 몸이 소화된 것인가요? 그리스도의 교회가 소화되었다는 말인가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소화되어 버렸다는 말인가요?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십시오.   / 번역: 최광민

So receive the sacrament in such a way that you think about yourselves, that you retain unity in your hearts, that you always fix your hearts up above. Don't let your hope be placed on earth, but in heaven. Let your faith be firm in God, let it be acceptable to God. Because what you don't see now, but believe, you are going to see there, where you will have joy without end.

다음은 그의 설교 #272이다.

What you see on God's altar, you've already observed during the night that has now ended. But you've heard nothing about just what it might be, or what it might mean, or what great thing it might be said to symbolize. For what you see is simply bread and a cup - this is the information your eyes report. But your faith demands far subtler insight: the bread is Christ's body, the cup is Christ's blood. Faith can grasp the fundamentals quickly, succinctly, yet it hungers for a fuller account of the matter. As the prophet says, "Unless you believe, you will not understand." [Is. 7.9; Septuagint] So you can say to me, "You urged us to believe; now explain, so we can understand." Inside each of you, thoughts like these are rising: "Our Lord Jesus Christ, we know the source of his flesh; he took it from the virgin Mary. Like any infant, he was nursed and nourished; he grew; became a youngster; suffered persecution from his own people. To the wood he was nailed; on the wood he died; from the wood, his body was taken down and buried. On the third day (as he willed) he rose; he ascended bodily into heaven whence he will come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There he dwells even now, seated at God's right. 

So how can bread be his body? And what about the cup? How can it (or what it contains) be his blood?" My friends, these realities are called sacraments because in them one thing is seen, while another is grasped. What is seen is a mere physical likeness; what is grasped bears spiritual fruit. So now, if you want to understand the body of Christ, listen to the Apostle Paul speaking to the faithful: "You are the body of Christ, member for member." [1 Cor. 12.27] If you, therefore, are Christ's body and members, it is your own mystery that is placed on the Lord's table! It is your own mystery that you are receiving! You are saying "Amen" to what you are: your response is a personal signature, affirming your faith. When you hear "The body of Christ", you reply "Amen." Be a member of Christ's body, then, so that your "Amen" may ring true! But what role does the bread play? We have no theory of our own to propose here; listen, instead, to what Paul says about this sacrament: "The bread is one, and we, though many, are one body." [1 Cor. 10.17] Understand and rejoice: unity, truth, faithfulness, love. "One bread," he says. What is this one bread? Is it not the "one body," formed from many? Remember: bread doesn't come from a single grain, but from many. 

그렇다면 어떻게 빵이 그리스도의 몸이란 말인가요? 컵 (속의 포도주)는 또 어떤가요? 어떻게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란 말인가요? 형제들이여, 우리가 성체라 부르는 이 속에서 하나는 명료하지만, 다른 하나는 유추된 것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단순한 물체적 유사성이고, 유추되는 것은 그것이 담고있는 영적인 열매입니다. 이제 그대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해하고 싶다면, 바울 사도가 신자들에게 한 말에 귀를 귀울여 봅시다: "[바울] 그대들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지체 중의 지체입니다. [코린트 I: 12.27]"  그대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며 지체들이라면, 주님의 식탁에 놓여진 것은 바로 그대들 자신들의 신비인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성찬식에서) 받는 것은 바로 그대들 본인의 신비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받을 때 '아멘'이라고 말합니다. 이 답은 바로 개개인의 확인절차인 것이며 당신들의 믿음을 인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아멘"이라고 답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되면, 그대들의 "아멘"은 바로 이것을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빵은 무슨 역항를 합니까? 우리는 이에 관해 말할 우리 자신의 이론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 바울이 이 성사에 관해 적은 것에 귀 기울이기 바랍니다. "[바울] 빵도 하나이고, 우리는 설령 여럿이지만 역시 한 몸이다 [코린트 I, 1:17]". 이제 일치, 진리, 믿음, 사랑 등을 이해하고 기뻐하십시오. 바울을 "한 빵"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엇이 이 "한 빵"입니까? 이것이야 말로 여럿이 하나가 되어 만들어지는 "한 몸"이 아닙니까? 기억하십시오. 빵은 곡식의 한 낱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낱알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 번역: 최광민

When you received exorcism, you were "ground." When you were baptized, you were "leavened." When you received the fire of the Holy Spirit, you were "baked." Be what you see; receive what you are. This is what Paul is saying about the bread. So too, what we are to understand about the cup is similar and requires little explanation. In the visible object of bread, many grains are gathered into one just as the faithful (so Scripture says) form "a single heart and mind in God" [Acts 4.32]. And thus it is with the wine. Remember, friends, how wine is made. Individual grapes hang together in a bunch, but the juice from them all is mingled to become a single brew. This is the image chosen by Christ our Lord to show how, at his own table, the mystery of our unity and peace is solemnly consecrated. All who fail to keep the bond of peace after entering this mystery receive not a sacrament that benefits them, but an indictment that condemns them. So let us give God our sincere and deepest gratitude, and, as far as human weakness will permit, let us turn to the Lord with pure hearts. With all our strength, let us seek God's singular mercy, for then the Divine Goodness will surely hear our prayers. God's power will drive the Evil One from our acts and thoughts; it will deepen our faith, govern our minds, grant us holy thoughts, and lead us, finally, to share the divine happiness through God's own son Jesus Christ. Amen!

부활/승천한 예수의 '몸'에 대한 쯔빙글리의 견해는 루터의 이해와 달랐다. 쯔빙글리는 '육체로 부활하여 승천한 후 성부의 우편에 앉아있는' 예수의 몸은 여전히 성부의 우편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쯔빙글리의 견해에 따르면, 성체는 예수의 실제적인 몸과 피가 될 수 없다. 따라서 화체설이나 공재설과 달리 그리스도의 몸은 실제적이든, 상징적이든 빵과 포도주와 함께 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기념이며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은 실재적으로 빵과 포도주 위에 신비한 방식으로 임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마음 속에 있다. 따라서 로마 카톨릭이나 루터교회와는 달리, 성체는 오직 신자들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Whether Christ’s words in Matthew 26, ‘This is my body’ can also be taken metaphorically or in tropice. It has already become clear enough that in this context the word ‘is’ cannot be taken literally. Hence it follows that it must be taken metaphorically or figuratively. In the words, ‘This is my body’, the word ‘this’ means the bread, and the word ‘body’ means the body which was put to death for us. Therefore the word ‘is’ cannot be taken literally, for the bread is not the body..... --- Huldrych Zwingli,{“On the Lord Supper}, LCC 24: 225

마태의 복음서 26장에 등장하는 "이것은 나의 몸이다"란 구절은 메타포 혹 은유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 점은 이미 문맥 상에서 "~이다"란 단어를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없음에서 이미 충분히 드러난다. 따라서 이 구절은 메타포 혹은 은유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이 따라 나온다. "이것은 나의 몸이다"에서 "이것"은 빵을 말하고 '몸'은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하실 그 몸을 말한다. 그래서 "~이다"란 단어는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않되는데, 빵이 그 몸은 아니기 때문이다 --- 울리히 쯔빙글리, {주님의 만찬} / 번역: 최광민 

A sacrament is the sign of a holy thing. When I say ‘the sacrament of the Lord’s body’, I am simply referring to that bread which is the symbol of the body of Christ who was put to death for our sakes. … But the real body of Christ is the body which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God, and the sacrament of his body is the bread, and the sacrament of his blood is the wine, of which we partake with thanksgiving. Now the sign and the thing signified cannot be one and the same. Therefore the sacrament of the body of Christ cannot be that body itself. --Huldrych Zwingli,{“On the Lord Supper}, LCC 24: 188  

성체는 거룩의 표징이다.내가 '주님의 성체'에 대해 말할 때, 나는 단순히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빵'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실제 몸은 신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그 몸에 대한 성체는 빵이고, 그분의 피의 성체는 포도주다. 우리는 감사함으로 그것을 받는 것이다.  이때 표징과 그것이 표상하는 것은 하나일 수도 같은 것일 수도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의 성체는 그의 몸 그 자체일 수가 없다. ---- 울리히 쯔빙글리, {주님의 만찬} / 번역: 최광민 

프로테스탄트를 분열시킨 처음 논쟁도 바로 성체에 대한 이해 때문이었다. 1529년 마르부르그(Marburg)에서 루터와 쯔빙글리는 성체의 이해에 대한 양측의 이견을 좁히기 위해 토론을 벌였지만 결국 이 모임은 합의를 찾지 못한채 결렬로 끝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독일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루터교회와 스위스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스위스 개혁교회라는 종교개혁의 두가지 지류를 낳게 되었다. 마르부르그 논쟁의 결렬 때는 마르틴 루터가 마주 앉은 테이블을 내리치며 쯔빙글리에게 “어쨌거나 "이것은 나의 몸이다/Hoc est meum corpus!"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라고 소리질렀다..




# 장 칼뱅 : 동적임재설 (Virtualism/ Dynamic Presence)

쯔빙글리의 스위스 개혁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프랑스 출신 쟝 칼뱅은 어떤 문맥에서는 성체의 해석과 관련하여 순수한 쯔빙글리주의를 따르는 듯 하지만, 어떤 문맥에서는 그리스 정교회와 유사한 이해를 보인다. 즉, 칼뱅은 기본적으로 성체는 상징적인 기념행위이지만,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빵과 포도주 위에 임재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칼뱅은 성만찬의 중요성을 여러 문맥에서 강조했었고 가급적 매주 집전하는 것이 좋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그러나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여러가지 이유로 매주마다 하던 성찬식을 한 달에 한 번으로 제한했고, 제네바에서 교육을 받고 후에 스코틀랜드 장로교단의 설립자가 되는 존 녹스는 일년에 4번만으로 제한하게 되었다. 칼뱅은 성체의 해석에 대해서는 여전히 루터에게 동의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최소한 초반에는) 서로를 존중했다. 그러나 루터의 {탁상담화} 등에는 루터가 칼뱅을 "성사주의자", 즉 로마카톨릭의 화체론을 거부하는 동시에 루터파의 공재론을 거부하는 그룹 (칼슈타트, 부처, 쯔빙글리 등등)으로 의심하는 내용이 등장하기도 한다.

화체설과 공재설에서 그리스도의 실제 몸은 직접적으로 빵과 포도주 위에 임재한다. 그것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마르틴 루터의 공재론에서는 그리스도의 신성 뿐 아니라 그와 분리할 수 없이 연합된 인성도 편재하며, 따라서 두 속성이 한 개인 안에 공유된다고 설명한다. 이를 "Communicatio Idiomatum"이라 부른다.

그러나 칼뱅의 이해에 따르면 신자들과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몸은 직접적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이 세상과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상징적이면서 동시에 효력적으로 임재한다. 이것은 칼뱅의 '성육신' 이해 - 즉, "어떻게 예수는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가질 수 있는가" - 에 따르면, 유한한 인간의 본성과 신체가 무한한 신성을 "품거나" 혹은 "신성이 인성 안에 갇힐 수"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육신에서 로고스는 인간의 본성과 육체 안에 가두어지는 것이 아니면서도 동시에 인성과 완전히 '연합'한다고 보았다. 

칼뱅 본인의 말을 빌자면, 그리스도는 심지어 세상에 있을 때에 조차,  "하늘을 떠남 없이 하늘에서 강림"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신성이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의 육체가 되거나 혹은 육체 안으로 들어간 것이라니라, 신으로서의 성자는 여전히 천상에 머물면서 성령을 통해 육체와 '연결/연합'되었다고 칼뱅은 이해했고, 이런 이해에 바탕해서 성체의 의미를 또한 풀이했다.

For even if the Word in His immeasurable essence united with the nature of man into one person, we do not imagine that He was confined therein. Here is something marvelous: the Son of God descended from heaven in such a way that, without leaving heaven, He willed to be borne in the virgin’s womb, to go about the earth, and to hang upon the cross; yet He continuously filled the world even as He had done from the beginning! ---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John T. McNeill, trans. Ford Lewis Battles,

비록 로고스의 측량할 수 없는 본질이 인성과 연합하여 한 개인이 되더라도, 우리는 로고스가 그 (=인성) 안에 갇힌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여기에 놀라운 점이 있다: 성자는 처녀의 태에서 나시고, 땅을 거니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초로부터 그리하셨듯이 계속하여 세상을 충만히 채우시는 그런  방식으로, 하늘을 떠나심 없이 하늘에서 강림하신 것이다! --- 장 칼뱅, {기독교 교리요강} (1559) / 번역: 최광민

Even though it seems unbelievable that Christ’s flesh, separated from us by such a great distance, penetrates to us, so that it becomes our food, let us remember how far the secret power of the Holy Spirit towers above all our senses . . . What, then, our mind does not comprehend, let faith conceive: that the Spirit truly unites things separated in space. . . . [T]he Lord bestows this benefit upon us through his Spirit, so that we may be made one in body, spirit, and soul with him. The bond of this connection is therefore the Spirit of Christ, with whom we are joined in unity, and is like the channel through which all that Christ himself is and has is conveyed to us. --- ---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John T. McNeill, trans. Ford Lewis Battles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우리의 몸에 들어와 양식이 된다는 점이 믿기 힘들어 보이지만, 성령의 신비한 능력이 우리의 모든 감관 너머 얼마나 멀리까지 뻗치는지를 기억해 보자....[중략]...우리의 정신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믿음으로 상상해 보도록 하자. 진실로 성령은 공간 상 분리되어 있는 것들은 묶으실 수 있다..[중략]... 주님은 그의 영을 통해 우리에게 혜택을 주어, 우리는 몸/영/혼에서 그 분과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이 연결로 우리를 결합시키는 분은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를 통해 우리는 하나로 연합된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 자신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이 통로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과 같다. --- 장 칼뱅, {기독교 교리요강} (1559) / 번역: 최광민

따라서 쯔빙글리의 이해와 마찬가지로, 성찬식은 오직 신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그리고 효력있는 성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쯔빙글리가 생각한 그런 '상징' 뿐은 아닌 것이다. 칼뱅은 신학적 논증을 의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논리학을 도입한 토마스 아퀴나스 및 증세 스콜라 철학자들을 맹비난했다.

칼뱅의 이런 성체의 이해를 놓고 AD 17세기 초반의 루터교단 신학자들이 칼뱅주의자들과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들은 이런 견해에 "Extra calvinisticum"란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은 칼뱅의 경우 신성은 인성과 연합되더라도 여전히 인성 너머 (extra)에 존재한다고 해설하기 때문이다. 루터와 칼뱅의 신학 모두 네스토리우스의 양성론과 유티케스의 단성론을 둘다 정죄하고 이후 서방교회의 표준신조가 되는 칼케돈 신조와 고대 교부들의 이해에 기반했지만, 루터 측은 칼뱅 측을 '양성론'으로, 칼뱅 측은 루터 측을 '단성론'으로 의심하기도 했다.

각설하고,

스위스 제네바에서 칼뱅의 제자였던 스코틀랜드 장로파 교회의 창설자 존 녹스(John Knox)는 {According to the Holy Scriptures, of the Sacrament of the Lord's Supper} 라는 제목의 1550년 논문의 마지막 두 문단에서 칼뱅이 이끌던 스위스 개혁교회의 관점을 아래와 같이 명시한다.

And as concerning these words, Hoc est corpus meum, "This is my body" (1 Cor. 11:24; Matt. 26:26; Mark 14:22; Luke 22:19), on which the Papists depend so much, saying that we must needs believe that the bread and wine are transubstantiated unto Christ's body and blood: we acknowledge [declare] that it is no article of our faith which can save us, nor which we are bound to believe upon pain of eternal damnation. For if we should believe that his very natural body, both flesh and blood, were naturally in the bread and wine, that should not save us, seeing many believe that, and yet receive it to their damnation. For it is not his presence in the bread that can save us, but his presence in our hearts, through faith in his blood, which has washed out our sins, and pacified his Father's wrath towards us. And again, if we do not believe his bodily presence in the bread and wine, that shall not damn us, but the absence out of our hearts through unbelief.

"호크 에스트 코르푸스 메움 / 이것은 나의 몸이다"란 진술과 관련해, 교황주의자들(=로마카톨릭)은 여기에 지나치게 집착해 말하길,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되었다고 믿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신조가 아니며, 영원한 징벌이 따르는 신조도 아니라고 선언하는 바이다....[중략]...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빵 속에 존재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죄를 씻어 인간에 대한 성부의 진노를 잠재우는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우리 마음 속에 존재하게 되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건데,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가 없다고 말한다고 하여 인간이 정죄받는 것이 아니라, 불신으로 인해 우리 마음 속에 그리스도가 존재하지 않게 됨으로 인간은 정죄를 받는 것이다

Now, if they would here object, that though it be truth, that the absence out of the bread could not damn us, yet are we bound to believe it because of God's word, saying, "This is my body" (1 Cor. 11:24); which who believes not, as much as in him lies, makes God a liar; and, therefore of an obstinate mind not to believe his word, may be our damnation: To this we answer, that we believe God's word, and confess that it is true, but not so to be understood as the Papists grossly affirm. For in the sacrament we receive Jesus Christ spiritually, as did the fathers of the Old Testament, according to St. Paul's saying (1 Cor. 10:3-4). And if men would well weigh, how that Christ, ordaining his holy sacrament of his body and blood, spoke these words sacramentally, doubtless they would never so grossly and foolishly understand them, contrary to all the scriptures, and to the exposition of St. Augustine, St. Jerome, Fulgentius, Vigilius, Origen, and many other godly writers.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은) 성서 전체와 아우구스티누스, 히에로니무스, 풀겐티우스, 비길리우스. 그리고 오리게네스와 다른 신실한 저자들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는다-- 번역: 최광민





# 성공회

AD 16세기 영국의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성공회는 성체 가운에 그리스도가 "현전"한다는 입장을 취하며, 이때의 "현전"이란 (1) 그리스도가 "실체"적으로 임재하고 (2) 성사적으로 연합하는 것이 된다.

역사적으로 볼때 영국국교회로서의 독립 초창기인 헨리8세 시기에는 루터의 영향을 받았고, 이후 엘리자베스 1세 이후부터 청교도혁명 시기를 전후로는 칼뱅의 신학에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신학적으로 강력한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고수했지만 선왕인 헨리8세에 이어 급진적 외형적 개혁은 거부했던 엘리자베스 1세는, 당시 급진 칼뱅주의 세력을 누르고 영국의 종교개혁을 국왕을 수장으로 하는 국가교회인 영국국교회 형태로 통일시키고자 국교회의 캔터베리 대주교 매튜 파커를 통해 영국교회의 표준이 될 {39개 신조}를 발표했다. 예전에 있어서는 로마카톨릭적인 요소를, 신학에 있어서는 칼뱅주의를 기조로 하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수용하는 것을 바탕으로 한다. {39개 신조}에 동의하지 않으면 영국국교회의 성직을 받을 수 없었다.

그 제 28조에 따르면 아래와 같다.

XXVIII. Of the Lord's Supper.

The Supper of the Lord is not only a sign of the love that Christians ought to have among themselves one to another, but rather it is a Sacrament of our Redemption by Christ's death: insomuch that to such as rightly, worthily, and with faith, receive the same, the Bread which we break is a partaking of the Body of Christ; and likewise the Cup of Blessing is a partaking of the Blood of Christ.

Transubstantiation (or the change of the substance of Bread and Wine) in the Supper of the Lord, cannot be proved by Holy Writ; but is repugnant to the plain words of Scripture, overthroweth the nature of a Sacrament, and hath given occasion to many superstitions.

The Body of Christ is given, taken, and eaten, in the Supper, only after an heavenly and spiritual manner. And the mean whereby the Body of Christ is received and eaten in the Supper, is Faith.

The Sacrament of the Lord's Supper was not by Christ's ordinance reserved, carried about, lifted up, or worshipped.

제 28조: 주님의 성만찬에 대해 

주님의 만찬은 기독교도들 간 서로 가져야만 할 사람에 대한 증표일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받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성사이다. 그러므로 올바르고, 합당하게, 믿음을 가지고 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쪼개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하는 것이며, 축복의 잔 또한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하는 것이다.

주님의 만찬 중 빵과 포도주의 속성이 변화된다는 화체설은 거룩한 성서로 입증될 수 없으며, 성서의 분명한 표현에 위배되며, 성사의 본질을 훼손하며, 많은 미신들의 여지를 주었다.

그리스도의 몸은 거룩하고 영적인 방식으로 성만찬 가운데 주어지고 받으며 먹어야 한다. 성만찬 가운데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받고 먹어야 한다.

주님의 (제정한) 성례에 따르면, 주님의 성만찬은 보관하며, 옮기며, 떠받들고, 경배할 대상이 아니다.  / 번역: 최광민

이후 영국에서 '화체설'은 '성서에 위배되는 야만스런 불경'으로 간주되었다. 전체적으로 영국국교회의 이 {39개 신조}가 의도한 바는 루터의 '공재설'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그걸 그렇게 분명히 명시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영국국교회의 기조는 "화체설은 틀렸지만,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성체에 실재/현전한다"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분파 간 통일/통합을 고려한 조처였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중반부터 영국국교회 내 고교회파 가운데 로마카톨릭적인 예전과 신학이 부활하게 되는 '옥스포드 운동'의 파장으로 고교회파에서는 '성체'에 보다 로마카톨릭적인 해석을 강조되기는 하지만, 결정적으로 성공회가 '화체설'을 명시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한, 성공회가 해석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현전하는' 성체란 '빵과 포도주가 살과 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기에 성체를 받기에 합당한 신자들에게만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서의 '효력이 있는 것이 된다.

현재 고교회파 성공회는 루터의 공재설과 유사한 그리스도의 '실체/실재적 임재'를, 보다 복음주의적이고 전통적으로 칼뱅의 영향을 받은 저교회파 성공회는 칼뱅주의적인 '영적 임재'를 일반적으로 수용하지만, 그렇다고 분명히 진영의 신학이 갈리지는 않는다.


3. 맺음말

나는 화체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이던 루터, 쯔빙글리, 칼뱅의 관점은 서로 공존될 수 없는가? 루터, 칼뱅, 쯔빙글리의 사고가 기초한 것은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던 후기 중세 사고관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이상 중세 존재론으로 대상을 파악하지 않으며, 따라서 오늘날의 그것에 대한 이해의 차이는 분열이 고착화될 정도로 크지는 않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종교개혁자라해도 그들이 절대적으로 무오하다고 말하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 기라성같은 그들도 그런데 개개 목사들은 말할 것도 없다.

AD 1/2세기에 기록된 {디다케/Didache}의 저자 혹은 편집자는 누구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을 것인가?

草人

© 최광민, Kwangmin Choi, 2003-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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