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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에붐: {종말의식과 인간적 시간 / The Sense of an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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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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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1995-11-15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제목
종말의식과 인간적 시간 (프랭크 커머드) : Frank Kermode, {The Sense of an Ending}
시계는 묘한 긴장을 가지고 있다. 밤잠을 못이루게 하는 아날로그 시계의 똑딱거리는 초침소리를 생각해보면 분명하리라 생각된다. 똑딱거리는 시계바늘 소리에서 "똑"과 "딱" 사이에는 때때로 무한에 이를 것 같이 긴 정적이 있는가 하면, 부질없는 찰나도 역시 존재한다.
모름지기 인간이 경험하는 것은 "시간"자체가 아니라 그저 시계바늘 소리일 뿐이라, 그나마 초침소리가 없다면 우리는 그 "똑"과 "딱"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 게다가 이 똑딱소리는 얼마나 오묘한가. 잠이 오지않는 밤, 서둘러 잠을 청하면서도 귀에 흘러들어오는 "시간의 소리"를 우리도 모르게 속으로 읽게된다. 똑딱똑딱똑딱똑딱....그러다보면 "똑딱"은 어느새 "딱똑"이 되어있고, 신기하게도 분명 "똑"으로 시작되어 "딱"으로 끝나야하는 1초라는 한 쌍은, 어느덧 "딱"으로 시작되어 "똑"으로 끝나고 있다. 왠지 모르게 음산해지는 순간.
Frank Kermode, {The Sense of an Ending}
이 책은 종교서적이 아니라 문학비평이다. 그러나 문학비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5장 이후부터는 사실 너무 지루하고, 시간과 종말의 개념을 다루는 앞부분만을 정말 흥미있게 읽었다. 이 책의 전반부는 시간에 관한 서구의 관념 중 세가지, 즉 크로노스, 카이로스, 그리고 에붐을 다룬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에 대해 두가지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 하나는 "크로노스/kronos"이고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kairos"였다. 전자는 시작도 끝도 없는 (per omnia secula seculorum), 즉 영원에서 영원으로 끝없이 이어지며, 순환과 반복을 통해 영원의 개념을 반영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이다.
후자인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와는 매우 다른 시간이다. 그것은 어떤 특별한 계기와 늘 관련되어 있는 시간, 혹은 "그 시각"이다. 이 카이로스의 관점에서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며, 어떤 의지의 개입 혹은 운명, 혹은 섭리와 관계를 맺은 시간을 의미하며 그래서 매 순간은 그 "의미"를 가진다. 유사하게 고대 히브리인은 오직 하나의 시간관념을 가지고 있었다고들 한다. 그 시간은 어떤 하나의 순간에서 어떤 시점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과도 같이, 창조에서 종말을 향해 날아가는 단선적이고 직선적인 시간이다. 그래서 카이로스는 히브리적 단선적 시간관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영원을 상정하는 유대-기독교의 시간개념으로 발전한다. 바로 그 이유로 영원한 우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은 13세기 유럽에 도입된 즉시 스콜라 철학 내부에 엄청난 논쟁을 몰고왔으며, 그 결과 중세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 금서조치되는 계기가 되었다
훗날 토마스 아퀴나스는 여기에 "에붐 aevuum"이라는 새로운 시간개념을 도입한다. 그것은 신의 속성이자 천사가 사는 영역이고, 인간이 현재 인지할 수는 없으나 장차 참여하게 될 새로운 형태의 "그 무엇"이다. 에붐은 간단히 말하자면,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는 그 무엇이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옮겨 적는다.
{신학대전} 제10문 : 신의 영원성
http://www.ccel.org/a/aquinas/summa/FP.html
....[1]. 영원성이란 동시적이고 완전하며 시작도 마침도 없는 생명의 소유를 지칭한다. 시간(tempus)이란 '먼저'와 '나중'에 따른 운동의 척도이다. [2]. 불변하고 항상적인 신에게는 변화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먼저'와 '나중'으로 구별될 구별점을 그의 존재 속에 설정할 수 없다. 따라서 신에겐 시간이 없고 영원하다. [3]. 그리고 이 영원성은 신의 존재 자체에 속하는 것이므로 신의 고유한 본질이다. 다른 모든 존재자들은 고유한 권리로서가 아니라 오직 신의 영원성에 참여할 수 있을 뿐이다. [4]. 영원은 시간과 다르다. 왜냐하면 영원성은 모든 것이 동시에 함께 있음인데. 이것이 시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5]. '시간'은 '먼저'와 '나중'을 함축한다. '시대(aevum)'는 시작은 가지나 끝이 없다. 시대도 '먼저'와 '나중'을 지니긴 하지만. 새로워짐도 낡아짐도 가지지 않는다. 영원은 어떠한 '먼저'도 '나중'도 지니고 있지 않고, 결코 어떤 모양으로도 그것들과 무관하다....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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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상
© 최광민, Kwangmin Choi, 1995-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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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종말의식과 인간적 시간 (프랭크 커머드) : Frank Kermode, {The Sense of an Ending}
Frank Kermode, {The Sense of an Ending}
이 책은 종교서적이 아니라 문학비평이다. 그러나 문학비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5장 이후부터는 사실 너무 지루하고, 시간과 종말의 개념을 다루는 앞부분만을 정말 흥미있게 읽었다. 이 책의 전반부는 시간에 관한 서구의 관념 중 세가지, 즉 크로노스, 카이로스, 그리고 에붐을 다룬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에 대해 두가지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 하나는 "크로노스/kronos"이고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kairos"였다. 전자는 시작도 끝도 없는 (per omnia secula seculorum), 즉 영원에서 영원으로 끝없이 이어지며, 순환과 반복을 통해 영원의 개념을 반영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이다.
후자인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와는 매우 다른 시간이다. 그것은 어떤 특별한 계기와 늘 관련되어 있는 시간, 혹은 "그 시각"이다. 이 카이로스의 관점에서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며, 어떤 의지의 개입 혹은 운명, 혹은 섭리와 관계를 맺은 시간을 의미하며 그래서 매 순간은 그 "의미"를 가진다. 유사하게 고대 히브리인은 오직 하나의 시간관념을 가지고 있었다고들 한다. 그 시간은 어떤 하나의 순간에서 어떤 시점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과도 같이, 창조에서 종말을 향해 날아가는 단선적이고 직선적인 시간이다. 그래서 카이로스는 히브리적 단선적 시간관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영원을 상정하는 유대-기독교의 시간개념으로 발전한다. 바로 그 이유로 영원한 우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은 13세기 유럽에 도입된 즉시 스콜라 철학 내부에 엄청난 논쟁을 몰고왔으며, 그 결과 중세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 금서조치되는 계기가 되었다
훗날 토마스 아퀴나스는 여기에 "에붐 aevuum"이라는 새로운 시간개념을 도입한다. 그것은 신의 속성이자 천사가 사는 영역이고, 인간이 현재 인지할 수는 없으나 장차 참여하게 될 새로운 형태의 "그 무엇"이다. 에붐은 간단히 말하자면,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는 그 무엇이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옮겨 적는다.
草人
후자인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와는 매우 다른 시간이다. 그것은 어떤 특별한 계기와 늘 관련되어 있는 시간, 혹은 "그 시각"이다. 이 카이로스의 관점에서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며, 어떤 의지의 개입 혹은 운명, 혹은 섭리와 관계를 맺은 시간을 의미하며 그래서 매 순간은 그 "의미"를 가진다. 유사하게 고대 히브리인은 오직 하나의 시간관념을 가지고 있었다고들 한다. 그 시간은 어떤 하나의 순간에서 어떤 시점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과도 같이, 창조에서 종말을 향해 날아가는 단선적이고 직선적인 시간이다. 그래서 카이로스는 히브리적 단선적 시간관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영원을 상정하는 유대-기독교의 시간개념으로 발전한다. 바로 그 이유로 영원한 우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은 13세기 유럽에 도입된 즉시 스콜라 철학 내부에 엄청난 논쟁을 몰고왔으며, 그 결과 중세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 금서조치되는 계기가 되었다
훗날 토마스 아퀴나스는 여기에 "에붐 aevuum"이라는 새로운 시간개념을 도입한다. 그것은 신의 속성이자 천사가 사는 영역이고, 인간이 현재 인지할 수는 없으나 장차 참여하게 될 새로운 형태의 "그 무엇"이다. 에붐은 간단히 말하자면,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는 그 무엇이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옮겨 적는다.
{신학대전} 제10문 : 신의 영원성
http://www.ccel.org/a/aquinas/summa/FP.html
....[1]. 영원성이란 동시적이고 완전하며 시작도 마침도 없는 생명의 소유를 지칭한다. 시간(tempus)이란 '먼저'와 '나중'에 따른 운동의 척도이다. [2]. 불변하고 항상적인 신에게는 변화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먼저'와 '나중'으로 구별될 구별점을 그의 존재 속에 설정할 수 없다. 따라서 신에겐 시간이 없고 영원하다. [3]. 그리고 이 영원성은 신의 존재 자체에 속하는 것이므로 신의 고유한 본질이다. 다른 모든 존재자들은 고유한 권리로서가 아니라 오직 신의 영원성에 참여할 수 있을 뿐이다. [4]. 영원은 시간과 다르다. 왜냐하면 영원성은 모든 것이 동시에 함께 있음인데. 이것이 시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5]. '시간'은 '먼저'와 '나중'을 함축한다. '시대(aevum)'는 시작은 가지나 끝이 없다. 시대도 '먼저'와 '나중'을 지니긴 하지만. 새로워짐도 낡아짐도 가지지 않는다. 영원은 어떠한 '먼저'도 '나중'도 지니고 있지 않고, 결코 어떤 모양으로도 그것들과 무관하다....
草人
Scientist. Husband. Daddy. --- TOLLE. 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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