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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예수 vs. 예수 #03: 콘스탄티누스를 위한 약간의 변호

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07-03-20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모든 글과 번역문 들에 대해 (1) 복제-배포, (2)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 (3) 화면캡처를 금하며, (4) 인용 시 글의 URL 주소 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 최광민] 예수  vs. 예수 #3: 콘스탄티누스를 위한 약간의 변호

요약

콘스탄티누스 1세에 대한 평가는 종종 과도하게 폄하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일반대중들은 이런 평가의 어디까지가 사료에 기반한 것이고 어디까지가 정황에 기초해 추론된 것인지 분명히 알지 못한다. 원전/1차사료를 통해 비평해 본다.

순서

  1. 도입
  2. 콘스탄티누스는 장인을 고문해 죽인 미치광이일까?
  3. 콘스탄티누스는 처자식을 고문해 죽인 미치광이일까?
  4. 콘스탄티누스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니케아 회의를 주재했을까?
  5.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정치적/종교적 구미에 맞게 짜깁기하여 변개된 {신약성서} 편집본을 만든 장본인일까?
  6.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국교화했는가?
  7. 콘스탄티누스가 죽음에 임박해 세례를 받은 것은 그가 죽기 직전까지 솔 인빅투스 신자였기 때문일까?



콘스탄티누스 1세, 출처: wikimedia commons


§ 서문

"...도올은 4일 펴낸 {기독교성서의 이해}에서 ....그의 글은 예수 생애 전후 시대와 성서가 형성된 당시의 종교, 문화, 인물들에 대한 고증을 깔고 있다. 기독교를 공인해 13번째 사도로까지 불리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장인과 부인, 친자식까지 처참하게 고문해 죽인 ‘역사적 사실’도 글에 언급했다. ..." --- {한겨레신문} 보도, 2007.3.5.

비단 철학자 김용옥씨 (이하, 도올) 뿐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계열의 기독교도들, 특별히 반-로마카톨릭 경향이 강한 그룹 (가령, 주류 기독교인 침례교단이나 혹은 주류 기독교에서는 이단으로 간주되는  제7일 안식교단)일수록 그들이 생각하기에 (로마)카톨릭의 교리상 문제라고 생각되는 사안들의 기원을 모조리 콘스탄티누스에게 소급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그 결과 콘스탄티누스를 의도적으로, 그것도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격하시키곤 한다. {로마제국 쇠망사}의 저자로도 유명한 18세기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콘스탄티누스 (및 카이사리아의 유세비우스)를 과도하게 편파적으로 격하시키는 성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본의 아니게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변호하는 모양새가 되었는데, 그래도 내친 김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이 어떠했는가는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에 대한 이런저런 대중적인 논쟁들은 종종 사료에 기반하지 않은 "추론"에서 비롯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당시의 정황을 추론한 2차적 서술이 아니라 사료에 남은 내용 만을 '역사적 사실'로 한정해서 기술하겠다. 그에 대한 모든 사료들이 찬양 일색인 것은 아니다. 특별히 이교도 역사가인 조시무스의 기록은 콘스탄티누스에 대해 여러모로 비판적이다. 그러므로 조시무스의 기록을 중심으로 콘스탄티누스와 관련된 몇몇 일화를 정리하면 꽤 균형잡힌 관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콘스탄티누스는 장인을 고문해 죽인 미치광이일까?

만약 어떤 일반인이 "장인과 아내와 친자식까지 처참하게 고문해 죽였다"면, 우리는 다른 생각할 것 없이 그 사람을 정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고대에 살았던 왕이나 황제라면? 이 경우는 그렇게 속단하기가 쉽지 않다. 정황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반역/암살시도가 있었을 수도 있고. 왕이나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국가적 범죄가 있었을 수도 있다. 도올의 위의 진술에는 결정적으로 그 '이유'가 도무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세 사건은 각각 다른 시점에 일어났으며, 그 시점은 각각 AD 310년 (장인 막시미아누스), AD 326년 (아들 크리스푸스), AD 326년 말 (아내 파우스타)이다. 장인의 죽음은 콘스탄티누스가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밀라노 칙령}이 있기 전인 AD 313년 보다 전의 일이며, 아들과 아내의 처형은 니케아 회의가 열린 AD 325년의 이듬해에 집행되었다.

우선 장인이었던, 전 황제 막시미아누스(Marcus Aurelius Valerius Maximianus Herculius)부터 검토해 보자.


막시미아누스, 출처: wikimedia commons

막시미아누스는 로마제국을 동서로 양분해 통치할 필요를 느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카이사르로 AD 285년 임명되어 제국 서부를 담당했고, 이듬해 아우구스투스로 승격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의 동서분할에 이어 정제(아우구스투스)-부제(카이사르)라는 이원통치 시스템을 도입한 AD 283년,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는 서방의 아우구스투스인 막시미아누스의 카이사르가 된다. 이 콘스탄티우스는 지금 거론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아버지이며, 막시미아누스의 의붓딸인 테오도라와 정식결혼했다.

그러나 이 테오도라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가 아니며, 정치적 이유에서 막시미아누스의 사위가 된 콘스탄티우스는 이 결혼 훨씬 이전에 헬레나와의 사이에서 콘스탄티누스를 아들로 두고 있었다. 콘스탄티우스-헬레나의 관계가 정식 결혼관계였는지에 대해서는 고대로부터 여러 논쟁이 있었다.

AD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는 동시에 아우구스투스 직에서 은퇴하고, 각각 제국의 동쪽과 서쪽을 이전의 카이사르였던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에게 맡겼다. 그런데 이듬해에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했기 때문에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막센티우스가 서방의 아우구스투스를 맡게 되었다. 한편 동방의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인 갈레리우스와 세르베우스가 일으킨 군사책동을 콘스탄티우스의 아들이었던 콘스탄티누스와 함께 진압한 막시미아누스는 자신의 딸인 파우스타를 콘스탄티누스와 결혼시켰다.

AD 308년, 막시미아누스는 자기 아들인 막센티우스를 상대로 반역을 꾀하고 황제를 선포했다가 패배하고 당시 갈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사위 콘스탄티누스에게 도피했다. 그러나 사위 콘스탄티누스가 프랑크족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던 틈을 타서 AD 310년 다시 황제를 선포했다가 이번에는 콘스탄티누스에게 다시 진압되었다. (아직 콘스탄티누스는 서방의 아우구스투스는 아니었다. 그것은 AD 312년에 막센티우스를 격파한 다음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누스는 장인을 사면했다. 그러나 막시미아누스는 더 나아가 이번에는 자신의 친딸이자 콘스탄티누스의 아내인 파우스타를 연루시켜 콘스탄티누스를 암살하려고 시도했다. 이 계획을 파우스타가 남편에게 전함으로써 음모는 막을 내렸고, 그 결과 막시미아누스는 자살을 했거나 혹은 암살되었다고 전한다.

기독교도였던 콘스탄티누스에 대해 적대적 입장을 취하는 AD 5세기의 '이교도' 역사가 조시무스의 {Historia Nova} 제 2권에서 발췌했다.  조시무스의 성향으로 보건데, 아래 기술된 내용은 해당사안에 관해서는 (적어도 조시무스가 취합한 자료들 가운데) 콘스탄티누스에게 가장 불리한 내용이라고 봐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At this period Maximianus Herculius, who lamented the tumults which disturbed the public peace, came to Dioclesian who then lived at Carnutum, a town of Gallia Celtica, and endeavoured to persuade him to resume the empire, and not to suffer the government which they had preserved so long and with so much difficulty to be exposed to the madness and folly of those who had possessed themselves of it, and who had already brought it near to ruin. But Dioclesian refused to listen to him; for he wisely preferred his own quiet, and perhaps foresaw the troubles that would ensue, being a man well versed in matters of religion. Herculius therefore, perceiving that he could not prevail with him, came to Ravenna, and so returned to the Alps to meet Constantine, who lay there. And being naturally a busy faithless man, he promised his daughter Fausta to Constantine, which he performed, but persuaded him to pursue Maximianus Gallerius, who was then leaving Italy, and to lay wait for Maxentius. To all which Constantine agreed. He then left him, designing if possible to recover the empire, as he hoped to create a quarrel between Constantine and his son Maxentius. But while he attempted these things, Maximianus Gallerius assumed Licinius, as his colleague in the empire, with whose assistance he hoped to cope with Maxentius. But while Gallerius deliberated on these affairs, he died of an incurable wound, and Licinius then also claimed the sole dominion. Maximianus Herculius endeavoured, as I have said, to recover the empire by alienating the soldiers from Maxentius. For which purpose, by gifts and insinuating addresses, having brought them over to him, he endeavoured to form a conspiracy against Constantine, in which his soldiers were to join. But Fausta revealed it to Constantine, and Herculius, who was now overborne by so many disappointments, died of a distemper at Tarsus....

[전략] 막시미아누스 헤르쿨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에 대해 음모를 꾸미고 그의 병사를 집결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파우스타가 이 음모를 콘스탄티누스에게 알리게 되었고 (막시미아누스 / 필자 주), 그 결과 헤르쿨리우스는 크게 절망한 끝에 타르수스에서 홧병에 죽었다. 

--- 조시무스, {Historia Nova} 제 2권 / 번역: 최광민

이것이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장인 막시미아누스를 둘러싼 사건의 전말이다. 여기서 콘스탄티누스의 '광기'를 느낄 수 있을까? 오히려 상당히 관대한 콘스탄티누스가 아닌가? 게다가 막시미아누스는 고문당해 죽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홧병으로 죽었다고 보는게 조시무스의 관점이다. 막시마이누스의 죽음은 (강요된) 로마식 명예자살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 콘스탄티누스는 처자식을 처참하게 죽인 미치광이일까?

"결론"만 간략히 정리하면 이는 틀린 말은 아니다. 콘스탄티누스는 확실히 그의 아내와 아들을 사형시켰다.


크리스푸스, 출처: wikimedia commons


파우스타, 출처: wikimedia commons

언뜻보기에 '궁예'의 광기를 연상케하는 이 사건은 비교적 사료가 분명한 장인문제와는 달리 역사적으로 상당히 모호한 사안이다. 그 이유는 콘스탄티누스가 크리스푸스와 파우스타의 처형에 대해 "damnatio memoriae"를 선포했기 때문인 듯하다. 범죄자의 이름과 모든 기록을 공공기록에서 삭제하여 사람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는 조치를 말한다. 그래서 이들의 처형에 대한 기록은 당대에는 쉽게 언급될 수가 없었고 기록도 자세히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가지 가설이 분분하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콘스탄티누스가 권력에 눈이 멀어서 아들과 아내를 견제했고 그 결과 그 둘을 처형한 것이라고 볼 이유는 없다는 점이다.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콘스탄티누스가 죽인 장남 크리스푸스가 당시 콘스탄티누스의 아내이자 막시미아누스의 딸인 파우스타의 아들이 아니었다는 점을 우선 알아야 한다. 즉, 콘스탄티누스가 죽인 아내 (파우스타)와 아들 (크리스푸스)은 모자관계가 아니다.  크리스푸스는 콘스탄티누스의 정부인 미네르비나의 아들이었으며, 콘스탄티누스와 파우스타 사이의 두 아들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다. 파우스타와 크리스푸스는 10살 정도의 터울로 파우스타가 연상이었다. 콘스탄티누스가 AD 317년 크리스푸스 및 파우스타가 낳은 두 이복동생을 카이사르에 임명했을때, 크리스푸스는 이미 10대 말이었지만, 두 이복동생은 많아야 나이가 한 살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미 상당한 경력을 쌓고 있던 크리스푸를 파우스타가 정치적으로 견제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그럼 당시 황실의 알력관계를 한번 정리해 보자.

앞서 설명한대로 막시미아누스는 정치적인 이유로 자신의 의붓딸 테오도라를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인 콘스탄티누스의 아내로 준 적이 있다. 그 결과 콘스탄티누스의 생모인 헬레나는 (콘스탄티우스와 이미 결혼을 한 합법적인 아내였다면) 이를 위해 콘스탄티우스와 이혼, 혹은 (콘스탄티우스의 동거인이었다면) 별거를 했던 전력이 있다. 그래서 아마도 남편을 오래전 "빼앗긴" 경험이 있던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와 테오도라와는 동복자매지간인 며느리 파우스타 사이에는 모종의 긴장이 있긴 했을 것이다. 파우스타의 친정 아버지 막시미아누스와 오빠인 막센티우스는 경쟁자인 콘스탄티누스를 상대로 도발하다가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패배한 후 제거당했다. 그래서 파우스타와 콘스탄티누스 사이에 모종의 긴장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콘스탄티누스가 파우스타를 내치지 않고 살면서 사이에서 5명의 자녀를 둔 것을 보면 둘의 사이가 나빴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한편, 이미 장성한 크리스푸스는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카이사르로 임명된 후 최근의 연이은 군사작전의 성공으로 인기몰이를 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가 아들의 성공을 시샘하거나 견제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이미 단독집권하고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었고, 또 이미 카이사르로 임명되어 이변이 없는 한 아버지의 아우구스투스 직을 승계하게되는 크리스푸스가 무모하게 아버지를 상대로 모반을 꾀할 특별한 이유는 없다.

두 사람의 처형이 동시에 집행된 것은 아니고 몇 달의 간격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두 사람의 처형은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기독교도가 아닌 로마의 전통종교를 고수한 조시무스는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그의 저술 속에 등장하는 콘스탄티누스는 상당히 거만하고 성미 급하고 제멋대로의 성질을 가진 사람으로 등장한다.

조시무스의 {Historia Nova} 제 2권에서 발췌했다.

....Having done this, and sworn on both sides to observe the conditions, Constantine conferred the rank and title of Caesar on Crispus, his son by a concubine called Minervina, who was as yet but a youth, and on Constantine, who was born but a few days before at Arelatum. At the same time Licinianus, the son of Licinius, who was twenty years of age, was declared Caesar, Thus ended the second war....

...이런 연후에 양 측 간에 조건을 지키기로 맹세한 후, 콘스탄티누스는 정부인 미네르비나와의 사이의 어린 아들 크리스푸스와 콘스탄티누스 (2세)에게 카이사르의 지위와 호칭을 부여했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아레라툼에서 며칠 전에 태어난 터였다. 동시에 당시 20세였던 리키니우스의 아들 리키니아누스도 카이사르로 선포되었다. 그리하여 양 측의 두번째 내전은 끝났다....

....Now that the whole empire had fallen into the hands of Constantine, he no longer concealed his evil disposition and vicious inclinations, but acted as he pleased, without controul. He indeed used the ancient worship of his country though not so much out of honour or veneration as of necessity. Therefore he believed the soothsayers, who were expert in their art, as men who predicted the truth concerning all the great actions which he ever performed. But when he came to Rome, he was filled with pride and arrogance. He resolved to begin his impious actions at home.

이제 전 제국이 콘스탄티누스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그는 그의 사악한 기잘과 성향을 더이상 숨기지 않았으며, 그가 원하는 대로 멋대로 행동했다. 그는 비록 고대 로마의 종교를 따르기는 했으나 경외해서라기 보다는 필요에 의해서 였다.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과거위업들에 관해 맞게 예언한 점술가들을 신뢰했다. 그러나 그가 로마로 갔을때, 그는 자만과 거만에 가득 차게 되었으며, 로마 본국에서 그의 불경스런 행동들을 하기 시작했다....  

--- 조시무스, {Historia Nova} 제 2권 / 번역: 최광민

크리스푸스는 투옥 후 사형이 언도되어 처형 당했다. 조시무스에 따르면 크리스푸스가 처형된 이유는 콘스탄티누스의 아내이자 크리스푸스의 의붓어머니인 파우스타와의 간통혐의 때문이었다. 조시무스는 크리스푸스가 (다소) 무고하게 죽었고, 손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헬레나를 위로, 혹은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아마도) 원인제공자인 파우스타를 처형한 것으로 기록한다. 파우스타가 이 사건과 완전히 무관했다면, 즉, (1) 무고하게 크리스푸스를 모함한 적 없거나, 혹은 (2) 실제로 크리스푸스와 간통한 것이 아니라면, 왜 아끼던 손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헬레나를 "위로"하기 위해 굳이 파우스타를 처형시킨 것일까?

파우스타는 로마목욕탕의 가장 뜨거운 방, 즉 열탕과 사우나가 있는 칼리다리움(Calidarium)에서 처형되었다. 조시무스의 기록은 간결하기 때문에 파우스타를 칼리다리움의 열탕에서 익사시켜 죽인 것인지, 혹은 칼리다리움 자체를 과열시켜 열사시킨 것인지, 혹은 사우나의 증기로 질식사 시킨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두번째와 세번째의 조합이 파우스타의 사인일 것이다. 로마 시대에 칼리다리움에서의 열욕은 원치 임신을 하게 된 여자들이 자연유산을 유도할 의도로 종종 사용된 점을 들어, 칼리다리움을 이용한 처형과 파우스타의 간통을 연결지으려는 시도도 있어왔다.

역시 조시무스의 기록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조시무스의 성향으로 보건데 아래 기술된 내용은 해당사안에 관해서는 (적어도 조시무스가 취합한 자료들 가운데) 콘스탄티누스에게 가장 불리한 내용이라고 봐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For he put to death his son Crispus, stiled (as I mentioned) Caesar, on suspicion of debauching his mother-in-law Fausta, without any regard to the ties of nature. And when his own mother Helena expressed much sorrow for this atrocity, lamenting the young man's death with great bitterness, Constantine under pretence of comforting her, applied a remedy worse than the disease. For causing a bath to be heated to an extraordinary degree, he shut up Fausta in it, and a short time after took her out dead.

(내가 이미 언급했다시피) 거만한 카이사르인 그의 아들 크리스푸스가 모자관계가 아닌 계모와 간음했다고 의심한 콘스탄티누스는 아들을 처형했다. 콘스탄티누스의 모친인 헬레나가 이 잔혹한 처사에 대해 크게 슬퍼하고 손자의 죽음에 대해 애통해 하자, 콘스탄티누스는 헬레나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더 나쁜 처방을 내렸다. 목욕탕을 뜨겁게 달군 후 파우스타를 그 안에 잠시 가두고서 죽은 후 꺼낸 것이다. 

--- {Historia Nova} 제 2권 / 번역: 최광민

대충 두가지 가설이 가능하다.

가설 1. 크리스푸스가 부당하게 처형된 경우:

이 주장은 동일본질파와 유사본질파에 반대해서 "성자의 본질은 성부와 다르며 그 의지 또한 성부와 다르다"고 주장한 AD 4-5세기 "이질본질파" 측의 역사가인 필로스톨기오스가 제시한 것으로, 크리스푸스를 견제하고 있던 파우스타의 모함을 (가령, 크리스푸스가 자신을 유혹 혹은 겁탈하려고 했다는 모함) 콘스탄티누스가 받아들여 크리스푸스를 부당하게 처형하고, 몇 달 후 진위가 밝혀지자 파우스타를 처형한 것으로 설명한다. 이 설명은 고대에 대체로 받아들여진 설명이었고, 두 명의 사형을 둘러싼 정황과 꽤 일치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 가설의 문제는 콘스탄티누스가 크리스푸스에게 내린 "damnatio memoriae" 를 거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콘스탄티누스는 파우스타를 처형한 이후에도 크리스푸스를 명예회복 시키지 않았다.

가설 2. 크리스푸스와 파우스타가 실제로 간통을 범한 경우

이 경우 콘스탄티누스의 행동은 조시무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정당화 될 수 있다. 사실 조시무스는 사건의 정확한 원인을 이야기 하지 않고 있고, 크리스푸스나 파우스타를 특별히 변호하고 있지는 않다. (파우스타의 처형이 늦춰진 것은 아마도 임신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콘스탄티누스와 파우스타 사이의 딸은 이 무렵 태어난 것으로 보이기 때문). 의외로 이 가설이 사실일 가능성도 많다. 이 둘이 실제로 간통을 했다면, 콘스탄티누스가 크리스푸스 및 파우스타의 처형 후 조치한 'damnatio memoriae' 선고를 철회하지 않았다는 점이 다소 설명된다. 파우스타의 아들이자 콘스탄티누스를 이은 콘스탄티우스 2세 조차 어머니의 간통죄를 해명하거나 명예복권시키지 않았다.

각설하고, 조시무스의 기록에 따르지만, 친족을 둘이나 살해한데 양심의 가책을 느낀 콘스탄티누스는 우선 로마종교의 신관에게 달려가지만 그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들은 황제를 사면하지 않았던 듯 싶다. 이때 에스파니아 출신이자 궁정에 지인이 많은 에깁티우스 (이집트인? 아마도 코르도바 출신이자 콘스탄티누스의 종교자문이었던 호시우스를 말하는 듯하다) 기독교도가 콘스탄티누스와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그는 기독교에서는 어떤 죄이든 진심으로 회개하면 그 죄가 사면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해 주었고, 콘스탄티누스는 그것을 받아들여 회개를 한다. 이 일화를 통해 기독교도가 아니었던 조시무스는 기독교를 비윤리적이라며 간접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Of which his conscience accusing him, as also of violating his oath, he went to the priests to be purified from his crimes. But they told him, that there was no kind of lustration that was sufficient to clear him of such enormities. A Spaniard, named Aegyptius, very familiar with the court-ladies, being at Rome, happened to fall into converse with Constantine, and assured him, that the Christian doctrine would teach him how to cleanse himself from all his offences, and that they who received it were immediately absolved from all their sins. Constantine had no sooner heard this than he easily believed what was told him, and forsaking the rites of his country, received those which Aegyptius offered him ;....

양심의 가책을 느낀데다가 또한 그의 맹세를 어겼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죄를 정화시키기 위해 로마신관에게 갔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큰 죄를 정화하기에 충분한 희생정화제사(lustration)는 없다고 콘스탄티누스에게 말했다. 에깁티우스라 불린 히스파니아 사람이 마침 로마에 있었는데, 그는 궁정의 여인들과 매우 잘 알고 있었고 우연히 콘스탄티누스와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때 그는 콘스탄티누스에게 기독교에서는 모든 죄를 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으며, 기독교를 받아들인 자는 즉시 모든 죄에서 용서받는다는 것을 확신시켰다. 콘스탄티누스는 자기가 들은 바를 금새 믿어버리고, 로마의 국가종교를 버리고 이 에깁티우스가 그에게 제시한 바를 받아들였다.

--- {Historia Nova} 제 2권 / 번역: 최광민




§ 콘스탄티누스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AD 325년 니케아 회의를 주재했을까?

니케아 회의에 대해 대중적인 음모론에 이미 익숙해진 일반인들이 가지고있는 인상은 이런 식이다. 즉,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멀리는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 페르시아, 인도 등에서 온 약 300여 명의 주교, 사제, 부제들은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조성한 공포 분위기에 압도되어 민감한 신학적 주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으며, 그저 황제의 종교적, 정치적 목적에 맞춘 거수기 역할을 했다는 것. 결과적으로 오늘날의 기독교의 모습은 결국 콘스탄티누스의 개인적 취향과 정치적 목적에 따라 강압적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래? 그러나 이것도 원전에서는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우선 니케아 회의가 열리기 직전인 AD 323년 혹은 324년 분쟁 중이던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드로스와 시리아에 머물던 사제 아리우스에게 콘스탄티누스가 보낸 편지를 보면, 콘스탄티누스는 이 사안의 중대성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그다지 대단한 사안으로 여기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아리우스의 주장이 담은 신학적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And yet, having made a careful enquiry into the origin and foundation of these differences, I find the cause to be of a truly insignificant character, and quite unworthy of such fierce contention...For the cause of your difference has not been any of the leading doctrines or precepts of the Divine law, nor has any new heresy respecting the worship of God arisen among you....

이 분쟁이 시작된 원인과 입장의 차이를 가져온 근거들을 주의깊게 조사한 결과, 나는 이 문제가 사소한 이유로 시작되었다는 것과, 이런 일로 그토록 격렬하게 다투는 일이 무의미한 일이란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양 측의 차이를 불러온 내용은 그동안의 주류교리도 아니었고, 교회법의 치리대상도 아니며,  신을 섬김에 있어 어떤 새로운 이단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 번역: 최광민 

그는 아리우스의 지지자들을 격렬하게 비판한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드로스의 태도를 문제삼고 있고, 아리우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게 좋겠다고 권고한다. 따라서 사실 콘스탄티누스는 이 편지 속에서 논쟁의 촉발자 아리우스와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드로스를 동시에 비난하고 있다. 그의 관심사는 신학이라기 보다는 교회의 통일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교회의 통일"을 통한 "치안과 질서 유지"였다. 그는 정치인과 군인이었을 뿐이다.

전문을 옮기고 중요한 부분은 강조하겠다.

VICTOR CONSTANTINUS, MAXIMUS AUGUSTUS, to Alexander and Arius.

"I call that God to witness, as well I may, who is the helper of my endeavors, and the Preserver of all men, that I had a twofold reason for undertaking that duty which I have now performed. 

MY design then was, first, to bring the diverse judgments formed by all nations respecting the Deity to a condition, as it were, of settled uniformity; and, secondly, to restore to health the system of the world, then suffering under the malignant power of a grievous distemper. Keeping these objects in view, I sought to accomplish the one by the secret eye of thought, while the other I tried to rectify by the power of military authority. For I was aware that, if I should succeed in establishing, according to my hopes, a common harmony of sentiment among all the servants of God, the general course of affairs would also experience a change correspondent to the pious desires of them all. Finding, then, that the whole of Africa was pervaded by an intolerable spirit of mad folly, through the influence of those who with heedless frivolity had presumed to rend the religion of the people into diverse sects; I was anxious to check this disorder, and could discover no other remedy equal to the occasion, except in sending some of yourselves to aid in restoring mutual harmony among the disputants, after I had removed that common enemy of mankind who had interposed his lawless sentence for the prohibition of your holy synods. For since the power of Divine light, and the law of sacred worship, which, proceeding in the first instance, through the favor of God, from the bosom, as it were, of the East, have illumined the world, by their sacred radiance,I naturally believed that you would be the first to promote the salvation of other nations, and resolved with all energy of thought and diligence of enquiry to seek your aid. As soon, therefore, as I had secured my decisive victory and unquestionable triumph over my enemies, my first enquiry was concerning that object which I felt to be of paramount interest and importance. 

BUT, O glorious Providence of God! how deep a wound did not my ears only, but my very heart receive in the report that divisions existed among yourselves more grievous still than those which continued in that country! so that you, through whose aid I had hoped to procure a remedy for the errors of others, are in a state which needs healing even more than theirs. And yet, having made a careful enquiry into the origin and foundation of these differences, I find the cause to be of a truly insignificant character, and quite unworthy of such fierce contention. Feeling myself, therefore, compelled to address you in this letter, and to appeal at the same time to your unanimity and sagacity, I call on Divine Providence to assist me in the task, while I interrupt your dissension in the character of a minister of peace. And with reason: for if I might expect, with the help of a higher Power, to be able without difficulty, by a judicious appeal to the pious feelings of those who heard me, to recall them to a better spirit, even though the occasion of the disagreement were a greater one, how can I refrain from promising myself a far easier and more speedy adjustment of this difference, when the cause which hinders general harmony of sentiment is intrinsically trifling and of little moment? 

I UNDERSTAND, then, that the origin of the present controversy is this. When you, Alexander, demanded of the presbyters what opinion they severally maintained respecting a certain passage in the Divine law, or rather, I should say, that you asked them something connected with an unprofitable question, then you, Arius, inconsiderately insisted on what ought never to have been conceived at all, or if conceived, should have been buried in profound silence.

내가 이해하기론 이 논쟁의 시발은 다음과 같다. 그대 (알렉산드리아 주교 / 필자 주 ) 알렉산드로스가 사제들에게 성스런 율법 (=성서) 및 여타 다른 문서의 어떤 문구를 그들이 어떻게 믿고 있는가를 밝힐 것을 요구한 것에 대해, 나는 그대가 불필요한 질문과 관련된 것을 사제들에게 요구한 것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또한 그대 아리우스는 생각지도 말아야했거나, 혹은 설령 그렇다더라도 영원히 침묵했어야할 내용을 사려깊지 않게 주장했다.....[후략]   / 번역: 최광민

Hence it was that a dissension arose between you, fellowship was withdrawn, and the holy people, rent into diverse parties, no longer preserved the unity of the one body. Now, therefore, do ye both exhibit an equal degree of forbearance, and receive the advice which your fellow- servant righteously gives. What then is this advice? It was wrong in the first instance to propose such questions as these, or to reply to them when propounded. For those points of discussion which are enjoined by the authority of no law, but rather suggested by the contentious spirit which is fostered by misused leisure, even though they may be intended merely as an intellectual exercise, ought certainly to be confined to the region of our own thoughts, and not hastily produced in the popular assemblies, nor unadvisedly intrusted to the general ear. For how very few are there able either accurately to comprehend, or adequately to explain subjects so sublime and abstruse in their nature? Or, granting that one were fully competent for this, how many people will he convince? Or, who, again, in dealing with questions of such subtle nicety as these, can secure himself against a dangerous declension from the truth? It is incumbent therefore on us in these cases to be sparing of our words, lest, in case we ourselves are unable, through the feebleness of our natural faculties, to give a clear explanation of the subject before us, or, on the other hand, in case the slowness of our hearers' understandings disables them from arriving at an accurate apprehension of what we say, from one or other of these causes the people be reduced to the alternative either of blasphemy or schism.

LET therefore both the unguarded question and the inconsiderate answer receive your mutual forgiveness. For the cause of your difference has not been any of the leading doctrines or precepts of the Divine law, nor has any new heresy respecting the worship of God arisen among you. You are in truth of one and the same judgment: you may therefore well join in communion and fellowship. For as long as you continue to contend about these small and very insignificant questions, it is not fitting that so large a portion of God's people should be under the direction of your judgment, since you are thus divided between yourselves. I believe it indeed to be not merely unbecoming, but positively evil, that such should be the case. But I will refresh your minds by a little illustration, as follows. You know that philosophers, though they all adhere to one system, are yet frequently at issue on certain points, and differ, perhaps, in their degree of knowledge: yet they are recalled to harmony of sentiment by the uniting power of their common doctrines. If this be true, is it not far more reasonable that you, who are the ministers of the Supreme God, should be of one mind respecting the profession of the same religion? But let us still more thoughtfully and with closer attention examine what I have said, and see whether it be right that, on the ground of some trifling and foolish verbal difference between ourselves, brethren should assume towards each other the attitude of enemies, and the august meeting of the Synod be rent by profane disunion, because of you who wrangle together on points so trivial and altogether unessential? This is vulgar, and rather characteristic of childish ignorance, than consistent I with the wisdom of priests and men of sense. Let us withdraw ourselves with a good will from these temptations of the devil. Our great God and common Saviour of all has granted the same light to us all. Permit me, who am his servant, to bring my task to a successful issue, under the direction of his Providence, that I may be enabled, through my exhortations, and diligence, and earnest admonition, to recall his people to communion and fellowship. For since you have, as I said, but one faith, and one sentiment respecting our religion, and since the Divine commandment in all its parts enjoins on us all the duty of maintaining a spirit of concord, let not the circumstance which has led to a slight difference between you, since it does not affect the validity of the whole, cause any division or schism among you. And this I say without in any way desiring to force you to entire unity of judgment in regard to this truly idle question, whatever its real nature may be. For the dignity of your synod may be preserved, and the communion of your whole body maintained unbroken, however wide a difference may exist among you as to unimportant matters. For we are not all of us like-minded on every subject, nor is there such a thing as one disposition and judgment common to all alike. As far, then, as regards the Divine Providence, let there be one faith, and one understanding among you, one united judgment in reference to God. But as to your subtle disputations on questions of little or no significance, though you may be unable to harmonize in sentiment, such differences should be consigned to the secret custody of your own minds and thoughts. And now, let the preciousness of common affection, let faith in the truth, let the honor due to God and to the observance of his law continue immovably among you. Resume, then, your mutual feelings of friendship, love, and regard: restore to the people their wonted embracings; and do ye yourselves, having purified your souls, as it were, once more acknowledge one another. For it often happens that when a reconciliation is effected by the removal of the causes of enmity, friendship becomes even sweeter than it was before. 

"RESTORE me then my quiet days, and untroubled nights, that the joy of undimmed light, the delight of a tranquil life, may henceforth be my portion. Else must I needs mourn, with constant tears, nor shall I be able to pass the residue of my days in peace. For while the people of God, whose fellow-servant I am, are thus divided amongst themselves by an unreasonable and pernicious spirit of contention, how is it possible that I shall be able to maintain tranquillity of mind? And I will give you a proof how great my sorrow has been on this behalf. Not long since I had visited Nicomedia, and intended forthwith to proceed from that city to the East. It was while I was hastening towards you, and had already accomplished the greater part of the distance, that the news of this matter reversed my plan, that I might not be compelled to see with my own eyes that which I felt myself scarcely able even to hear. Open then for me henceforward by your unity of judgment that road to the regions of the East which your dissensions have closed against me, and permit me speedily to see yourselves and all other peoples rejoicing together, and render due acknowledgment to God in the language of praise and thanksgiving for the restoration of general concord and liberty to all.

--- Preserved in Eusebius, {Life of Constantine} 2:64–72, Gelasius of Cyzicus, 2:4, Socrates Scholasticus’ {Ecclesiastical History} 1:7)

그럼 도대체 왜 세례도 받지 않은, 따라서 정식 기독교도도 아닌 콘스탄티누스가 이런 민감한 신학적 논쟁을 중재하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아리우스 논쟁이 촉발된 AD 323년 직전에 북아프리카 일대에서 벌어졌던 격렬한 도나투스파 분쟁의 처리과정에서 콘스탄티누스의 강경개입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 분쟁을 (비록 한동안이지만) 잠잠하게 만들었는지를 살피면 알 수 있다. 도나투스파에 대한 강경개입은 AD 321년에 있었고, 곧 이어 아리우스 논쟁을 일단락하는 니케아 회의가 소집되었기 때문이다.

큰 그림을 보자면, 아리우스 논쟁은 AD 303-305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한 북아프리카의 기독교 탄압과 그 후속결과 북아프리카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도나투스파 분쟁과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멜레티우스 분쟁의 연속선 상에 있다. 기독교에 대한 마지막 핍박이 있던 AD 300년 초반을 배경으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이해하지 않고는 아리우스 논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먼저 도나투스 분쟁을 살펴보자.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탄압이 벌어지던 때 카르타고 교회의 성직자들이 배교하는 일이 벌어진다. 여기서의 배교란 이교의 신과 황제의 상 앞에 희생제물을 바치고 분향한 행위를 대체로 말한다. 또 이 박해 때 로마정부는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교회가 보유하고 있던 성서의 사본을 내놓을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이때 성서 사본을 자발적으로 내놓은 자들도 배교자로 인식되었다. 탄압이 끝나자 이들 성직자들은 약간의 참회절차 후에 다시 교회로 돌아와 성직자로 재임명되었다. 이들 가운데 한 명인 카이킬리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리키니우스의 밀라노 칙령으로 박해가 끝난 AD 313년 다시 교회로 돌아와 카르타고와 일대를 치리하는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를 주교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측에서는 이에 맞서 마요리누스를 역시 카르타고 주교로 임명하였고, 그가 곧 사망하자 도나투스 마그누스를 주교로 임명해 맞섰다. 교회가 정한 참회를 마치면 배교자들을 받아들인 기존의 교회와 달리, 도나투스파는 배교했다가 돌아온 성직자들이 베푸는 세례나 성만찬같은 성사를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들의 성직을 무효로 간주하는 강경한 노선을 고수했다.

결과적으로 북 아프리카의 많은 도시와 마을에서 도나투스를 따르는 그룹과 기존의 교회를 따르는 두 분파의 교회가 등장하면서 폭력을 동반한 갈등이 심화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사안의 중요성과 갈등의 원인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카르타고의 교회재건 비용을 카르타고의 "카톨릭" 주교 카이킬리아누스에게만 보냄으로써 갈등은 폭발하게 된다. 즉각 도나투스파는 "배교자" 주교와 동등한 대우를 해줄 것을 콘스탄티누스에게 요청했다. AD 313년 콘스탄티누스가 최초에 시도한 조사위원회가 결렬되자, 그는 AD 314년에 보다 큰 규모의 회의, 아를르 공회의를 소집해서 이 문제를 다루게 위임했다. 여기서의 결론 역시 도나투스파에 불리하게 나오자, 도나투스파는 황제에게 사안을 직접 제소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양 측을 로마로 불러 입장을 듣고, 또 카르타고에 사절을 파견해 조정을 시도하려고 했으나, 도나투스측 강경파는 기존 주교와의 우호적인 어떤 타협안도 거절하면서 폭동을 수반한 시위로 실력행사를 벌였다. 그들은 여전히 로마황제를 "악의 상징"으로 간주하면서 의혹을 버리지 않았다. AD 317년 콘스탄티누스는 마침내 강경한 개입을 시도한다. 누구든 질서를 문란하게 하여 제국의 평화를 깨는 자는 사형으로 처벌하겠다는 포고령을 내린 것이다. 이어 콘스탄티누스는 도나투스파의 교회재산을 몰수하는 두번째 포고령을 발표하면서 이 포고령의 강제집행을 거부하는 카르타고의 도나투스파 성직자와 신자들을 더러는 죽이거나 혹은 추방시켰다. 이런 적극적인 개입조치를 통해 콘스탄티누스는 일시적으로나마 카르타고 지역을 안정화 시켰다.  그러나 도시가 아닌 지방을 근거로 한 도나투스파는 계속해서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카톨릭 주교들과 경합했고, AD 4세기 중반을 넘어가면서 부터 더욱 폭력적 조직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제 AD 310년 경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상황을 살펴보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좌는 아리우스가 이단의 주창자로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분쟁 속에 수 년간 놓여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전 주교 페트로스는 AD 311년 순교했는데, 알렉산드리아 대주교의 치리권 아래 있던 주교들 가운데 한 명이었던 리코폴리스의 주교 멜레티오스가 디오클레티아우스 황제 시절의 핍박 기간 중 신앙에 위배되는 행위를 한 자들을 다시 받아들인 알렉산드리아의 새 주교 아킬라스의 지위는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뜻에 동조하는 성직자들을 알렉산드리아 주교좌와는 독립적으로 주교로 선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특별히 핍박 중 배교했다가 핍박이 잦아들자 교회로 돌아온 성직자와 신자들을 교회가 허용할 것인가를 두고 매섭게 맞섰다. 멜레티오스는 문제가 된 알렉산드리아 주교가 사망한 후에도 알렉산드리아 측과 화해하지 않았고, 이집트 일대에 두 계통의 "카톨릭 주교"들이 생겨나 혼선을 빚기 시작했다.

바로 이 멜레티오스 분쟁으로 이미 난장판이 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가 아리우스 논쟁의 배경이 된다. 아킬라스 주교에 의해 사제로 임명된 아리우스를 AD 312년 새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된 알렉산드로스가 주요교회의 담당사제로 임명했다. 몇 년 후 알렉산드로스 주교와 아리우스가 극한의 대립을 시작한 점을 두면 꽤 아이러니한 일이다. 훌륭한 언변과 절제된 삶을 겸비했던 아리우스는 이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자신의 새 이론을 펴기 시작했고, AD 318년 무렵부터는 무시될 수 없는 문제로 대두된다.

이 새로운 가르침에 대해 알렉산드로스 주교는 이를 공개적으로 질타했고 아리우스는 일단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아리우스는 침묵을 명령한 알렉산드로스의 징계에 불복하고 이집트 외부에서 지원세력을 물색했는데, 이에 대해 알렉산드로스 주교좌의 치리를 따르는 100명의 주교단이 투표를 통해 아리우스를 파문하기로 결의했다. 98명은 파문에 동의했고, 2명의 주교와 그들을 따르던 성직자들은 성직에서 파면 혹은 강등되었다.

위협이 실제화되자 아리우스는 니코메디아 주교 유세비우스에 편지를 보내 사정을 호소한 후 니코메디아로 피신한다. 여기서 아리우스는 유세비우스의 지지를 힘입어 소아시아 일대의 여러 주교들에게 편지를 보내 지지를 호소하게 된다. 아리우스와 이 유세비우스는 원래 같은 스승 아래서 동문수학한 사형/사제 지간이었다. 그 스승이란 시리아 안티오키아의 루키아노스이며, 예수에 대한 아리우스의 새 교리는 바로 이 범-오리게네스 신학권에 속하는 루키아노스와 그의 제자들의 신학인 "양자론"에 뿌리를 둔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원래부터 신이 아니라 태초에 참 신에 의해 아들로 입양되었다"는 교리다. 물론 루키아노스 진영의 그리스도론이 성자/그리스도를 그저 '인간'으로 본 것은 절대 아니다. 그들이 보기에 신이 성자/그리스도를 아들로 "입양"한 시점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의 누이이자 동방의 아우구스투스인 리키니우스의 처인 콘스탄티아와 친분을 가져 제국의 황실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니코메디아의 주교 유세비우스가 아리우스에게 기운 점을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드로스가 매우 못마땅해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온 교회의 운명"이 유세비우스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이었다. 유세비우스는 자신의 뜻에 따르는 주교들을 소집해서 아리우스를 다시 복직시킬 것을 결의해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에게 편지한다. 이것은 당시 교회 관례상 월권행위에 해당한다. 한 지역의 주교는 타 지역의 주교의 치리권을 침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 알렉산드리아 주교는 로마주교를 포함한 가능한 모든 주교들에게 편지하는데, 최소한 70편의 편지의 사본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양측의 대결은 특별히 동방에서 치열하여, 전역에서 논쟁이 불이 붙었고, 종종 싸움과 약탈행위가 보고되기 시작했다.

이때만 해도 콘스탄티누스는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는 세밀한 신학적 논제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실제로 논쟁은 자신의 관할권이 아닌 로마제국의 동부영토에서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AD 323년 상황이 바뀐다. 그는 바로 그 해 매부인 동방의 아우구스투스 리키니우스와 전쟁을 개시했다. 다음해 7월에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의 영토로 진격하여 아드리아노플에서 리키니우스의 군대를 궤멸시키고, 그해 9월에 크리소폴리스에서 두번째 대승을 거두고 리키니우스는 사형당했다. 니코메디아에 입성한 콘스탄티누스에게 동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리우스 논쟁을 주지시킨 것은 마침 가신으로 합류하게 된 히스파니아 코르도바의 주교 호시우스였다.

이 무렵,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 돌아와 있었다. 니코메디아 주교회의와 다음에 열린 카이사리아 주교회의에서의 지지를 업고,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 주교좌가 자신을 다시 사제로 복직시켜야 한다고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 AD 324년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드로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를 비롯한 이집트 바깥의 주교들에게 보내는 서한을 통해 아리우스가 펼치고 있는 교리의 위험성을 재차 지적하고, 아리우스의 스승인 안티오키아의 루키아노스와 이미 전 세대에 이단으로 정죄된 사모사타 출신 안티오키아 (파문)주교 파울로스를 아리우스의 선구자로 명시했다.

콘스탄티누스는 호시우스를 현지에 특사로 파견해서 조사활동을 벌였고, 호시우스, 알렉산드로스, 아리우스로부터 각각 보고서를 받았다. 이 와중에 논쟁은 이제 로마제국의 제 3대 도시인 시리아 안티오키아로 옮겨 붙었다. 이 도시의 주교가 사망하자 안티오키아 주교의 치리권 아래 있던 팔레스티나, 아라비아, 시리아 등지의 주교들이 모여 AD 325년 1월에 후임자를 선출했다.

선출을 위해 도시를 방문한 주교들은 아리우스의 가르침이 도시를 휩쓸고 있는 것을 목도한 후, 호시우스 주재 하에 거의 만장일치로 (53:3) 아리우스의 교리를 정죄하고 잠정적으로 그를 파문했다. 라오디케아 주교 테오도토스, 네로니아스 주교 나르시소스, 그리고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가 반대표를 던졌는데, 호시우스가 각각을 불러 그들의 신앙관을 들은 후 이 회의는 그를 아리우스 동조자로 비난하고 파문했다.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와 니코메디아 주교 유세비우스, 그리고 아리우스 모두 루키아노스의 신학을 계승한 동문수학 지간이었기 때문이다.

이 회의의 의결사항은 회의의 정황을 둘러싼 정황설명과 함께 의결내용을 신조의 형태로 정리해 각 주교들에게 편지 형식으로 보내졌다. 그리스어 원본은 소실되었으나, 시리아어 사본은 남아있다. (Cod. Par. Syr. 62; Vatican Cod. Syr. 148; Mingana Syr. 8) E. Schwartz, “Zur Geschichte des Athanasius.” Nachrichten von der Königlichen Gesellschaft der Wissenschaften zu Göttingen, Philologisch-Historische Klasse (Gottingen: Luder Horstmann, Jahre 1905) pp. 271-79 에 그리스어와 시리아어로 소개된 내용의 영문번역을 (http://www.fourthcentury.com/index.php/urkunde-18)을 다시 한국어로 중역하겠다.

우리가 믿는 바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한 분의 신, 성부이자 전능하시며 불가해하시며, 불변하시며, 변성되지 않는 만물의 주재자이자 지배자를 믿는다. 그는 공정하고 선하며,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만물을 만드셨으며, 율법서와 예언서와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주님이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 주님으로 믿는다. 그는 독생자로서 무가 아니라 성부로부터 낳아진 분이다. 피조된 것이 아니라, 참 아들로 낳아진 것이다. 그의 출생은 표현되거나 설명되기에 불가능한데, 오직 그를 낳은 성부와 낳아진 성자 만이 그 출생에 대해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들 이외에는 아버지 (성부)를 알 수 없고, 아버지 (성부) 외에 아들을 알 자가 없다"는 말과 같다. 성자는 늘 존재했으며,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는 없었다. 이것은 우리가 성서를 통해 성자 만이 신의 유일한 형상이라고 배워온 것과 같다. 성자는 낳아진 존재인데, 이는 분명히 그가 (성서에서) 성부로부터 낳아졌기 때문이다. 이 (낳아진 성자로서의) 지위가 그에게 부여된 것이 아니다. 사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불경한 모독죄에 해당한다. 오히려 성서는 말하길, 성자는 실재했으며 진실로 낳아진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자 역시 불변하며 변성되지 않는 분으로 믿는다. 성자는 단지 성부의 뜻에 의해서 낳아져 존재하게 되었거나 혹은 이 지위가 그에게 부여되어 무로부터 출현하게 된 것이 아니다.....[중략]......이 분, 성자이자 산의 로고스는 또한 신을 낳은 마리아에 의해 육신을 입고 인간으로 태어났다. 고난받고 죽은 후, 그는 죽은 자 중에서 부활해 하늘로 승천하셔서 가장 높으신 신의 우편에 앉아 계시고 있다. 그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성서가 가르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우리 주님을 믿으며, 역시 성서가 가르치는 바와 같이 우리는 한 성령과 한 보편교회와 죽은 자의 부활과, 그가 인간으로 있을 때 한 일의 옳고 그름에 대해 보응받을 심판을 믿는다.

신의 아들이 피조물 (ktisma)이라고 하거나, (전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비로소) 존재하게 되었다고 하거나 (genētos), 생성되어졌다고 (poiētos) 하거나, 혹은 진짜로 낳아진 존재가 아니라고 하거나, 그가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선언하는 자들을 파문한다. (우리는 성자가 빛이었고 또 빛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울러 성자가 (그의 본질/본성상)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의지로 변성되지 않을 뿐이라고 (즉, 가변적일 수 있다 / 필자 주) 말하는 자, 또 성자가 낳아지기 전에는 본재하지 않았고, 성부가 본성 상 불변하는 것과 발리 성자는 본성 상 가변적이라고 하는 자들을 파문한다. 성자는 모든 면에서 성부의 형상으로 선포되어졌으며, 특별히 이 점에서 보면 성자는 불변하는 존재이다.---- AD 235년 초, 안티오키아 회의 결의사항 / 번역: 최광민

드디어 콘스탄티누스는 개입을 결정한다. AD 325년 봄, 그는 각처에서 주교들을 제국의 여름 휴양지가 있는 니케아로 초청하고 그들의 여행경비를 지불한다. 약 300명의 주교들이 참석했는데 다수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즉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지역에서 왔고, 이집트, 팔레스티나, 시리아, 소아시아, 코카서스, 일리리아, 페르시아 등지에서도 왔다. 갈리아, 아프리카, 히스파나나에서는 각각 한 명의 주교가 왔다. 연로한 로마주교는 대신 두 사제를 대표로 보냈다.

이것이 니케아의 여름황궁에서 AD 325년 5월 20일에 제 1차 에큐메니컬 공회의인 니케아 회의가 열리게 된 배경이다. 그럼 니케아 회의에 참석한 주교들의 면면을 보자.

AD 5세기 역사가인 테오도레토스/Theodoret의 기록이다.

...At this period many individuals were richly endowed with apostolical gifts; and many, like the holy apostle, bore in their bodies the marks of the Lord Jesus. James, bishop of Antioch, a city of Mygdonia, which is called Nisibis by the Syrians and Assyrians, raised the dead and restored them to life, and performed many other wonders which it would be superfluous to mention again in detail in this history, as I have already given an account of them in my work, entitled “Philotheus Paul, bishop of Neo-Cæsarea, a fortress situated on the banks of the Euphrates, had suffered from the frantic rage of Licinius. He had been deprived of the use of both hands by the application of a red-hot iron, by which the nerves which give motion to the muscles had been contracted and rendered dead. Some had had the right eye dug out, others had lost the right arm. Among these was Paphnutius of Egypt. In short, the Council looked like an assembled army of martyrs. Yet this holy and celebrated gathering was not entirely free from the element of opposition; for there were some, though so few as easily to be reckoned, of fair surface, like dangerous shallows, who really, though not openly, supported the blasphemy of Arius.

여기 기술된 테오도레토스의 기록이 신뢰할 만한 것이라면, 회의에 참석한 많은 주교들은 직전 세대에 있었던 탄압으로 인해 손발이나 눈을 잃은 노인들이 많았다. 이에 반해, 테오도레토스는 아리우스를 지지했던 주교들의 '준수한 외모'를 비꼬고 있다. 지난 번 황제 치하에서 고초를 당해 불구가 되고도 살아남은 불굴의 노인들이 이제와서 기독교도인 (혹은 기독교에 매우 우호적인) 황제의 위세에 눌릴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 물론 그럴 수는 있다. 그러나 사료가 전하는 정황은 꼭 그랬던 것 같지 않다.

게다가 대다수의 주교는 성부를 성자에 종속시키는 (그러나 결코 예수를 단순한 인간이라고는 절대 주장한 적은 없는) 오리게네스와 루키아노스의 신학적 영향권이 강했던 소아시아와 시리아 지역에서 많이 참석했다. 서방에서는 주로 북아프리카의 주교들이 참석했고 로마주교는 본인이 아닌 몇명 사절을 보냈을 따름이다. 이것은 초반에는 확실히 아리우스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아리우스는 주교가 아닌 사제 신분이었기 때문에 다른 주교들의 지지/후원을 받아 의견을 개진한 것으로 여겨진다.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의 최고맞수로 두각을 드러낸 아타나시우스는 당시에는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드로스를 보좌하던 부제 (프로테스탄트 식으로는 안수집사) 신분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회의를 로마원로원 회의처럼 진행시킨 듯 하다. 콘스탄티누스가 입장한 후 주교단이 자리잡았고, 의장의 지시에 따라 황제는 착석했다. 콘스탄티누스가 라틴어로 직접 개회사를 하고 통역이 이를 그리스어로 통역한 것으로 일반적으로는 되어 있지만, 테오도레토스나 소조메노스는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나 안티오키아 주교 유스타티우스가 대리로 연설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아마도 이들이 황제의 라틴어 연설을 그리스어로 통역했을 수도 있다. 역사가들이 전하는대로 콘스탄티누스의 그리스어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AD 5세기 역사가 소크라테스 스콜라티쿠스는 니케아 회의의 개회사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I give thanks to God for all things, but particularly, O friends, for being permitted to see your conference. And the event has exceeded my prayer, in that so many priests of Christ have been conducted into the same place; now, it is my desire that you should be of one mind and be partakers of a consentient judgment, for I deem dissension in the Church of God as more dangerous than any other evil. Therefore when it was announced, and I understood you were in discord, an unwholesome thing to hear, I was deeply pained in soul; and least of all does it profit you, since you are the conductors of divine worship and arbiters of peace. On this account it is, that I have called you together in a holy Synod, and being both your emperor and your fellow-physician, I seek for you a favor which is acceptable to our common Lord, and as honorable for me to receive, as for you to grant. The favor which I seek is, that you examine the causes of the strife, and put a consentient and peaceful end thereto so that I may triumph with you over the envious demon, who excited this internal revolt because he was provoked to see our external enemies and tyrants under our feet, and envied our good estate.”

나는 모든 것에 대해 신께 감사드리지만, 오 친구들이여, 특별히 그대들의 회의를 볼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특별히 신께 감사드린다. 이렇게 많은 그리스도의 사제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것은 내가 기도한 것을 뛰어 넘는 것이다. 이제 나는 여러분들이 하나의 마음으로 일치하여 합의된 결론을 내리는데 참여해 줄 것을 바란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 발생하는 불일치가 그 어떤 악보다도 위험하다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가 알려지고 내가 그대들 사이에 불화가 있다는 것을 이해했을 때,  그리고 이 유익하지 못한 사실을 듣게 되었을 때, 내 영혼은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대들은 신에 향한 거룩한 예배를 주관하는 자들이며 또 평화의 중재자들이기에, 이런 불화는 절대로 그대들에게 유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그대들을 그대들의 황제와 동료사제들이 함께 모인 거룩한 공회의로 불러, 우리가 함께 섬기는 주님이 용납하실 만한 나의 부탁을 그대들을 위해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내 부탁은 이런 것이다. 그대들이 다툼의 원인들을 검토하고, 합의되고 평화로운 결론을 내려줄 것과, 그래서 내가 이런 내부투쟁을 불러 일으킨 시기 가득한 악마를 그대들과 함께 정복하자는 것이다....--- 번역: 최광민

상당히 겸허하고 우호적인 분위기의 개회사임은 분명하다. 개회사에 이어 사람들은 두 파로 갈라져서 아리우스가 촉발한 신학적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때 신학에 정통하지 않았던 콘스탄티누스가 회의를 주도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는 대체로 방청자 입장에서 입회했다. 소크라테스가 전하고 있는 것처럼, 콘스탄티누스의 그리스어는 유창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핵심논쟁에 함부로 개입하기 보다는 회의의 진행상황을 꽤 신중하게 관찰해 가고 있었던 것 같다.

소크라테스의 기록이다.

The emperor gave patient attention to the speeches of both parties; he applauded those who spoke well, rebuked those who displayed a tendency to altercation, and according to his apprehension of what he heard, for he was not wholly unpracticed in the Greek tongue, he addressed himself with kindness to each one.... --- Chapter XX

황제는 양 측의 주장들은 주의깊게 경청했다. 황제는 훌륭한 논변을 편 자에게는 박수를 보냈고, 말을 바꾸는 경향을 보이는 자는 꾸짖었다. 황제는 그리스어에 아주 무지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가 들은 것에 대한 이해에 기초해서 각 사람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 번역: 최광민

자, 그럼 이번에는 니케아에 모인 사람들이 콘스탄티누스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한다.

소조메노스의 기록이다.

....And as was usually the case on such occasions, many priests resorted to the council for the purpose of transacting their own private affairs; for they considered this a favorable opportunity for rectifying their grievances, and in what points each found fault with the rest, he presented a document to the emperor, wherein he noted the offenses committed against himself. As this course was pursued day after day, the emperor set apart one certain day on which all complaints were to be brought before him.... -- # Sozomen, Of the Council convened at Nicæa on Account of Arius Book 1 Chapter 17 of his Ecclesiastical History, a 5th century source.

황제의 권위 앞에 숨도 못쉬는 분위기이기는 커녕, 회의의 초반은 질서가 잡히지 않은 아수라장이었던 것 같다. 참석자들은 이 회의를 자파의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기회로 삼고 황제에게 이런저런 논쟁점에 대한 의견서 혹은 상대에 대한 고소문을 제출했다. 며칠 동안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콘스탄티누스는 날을 잡아서 자기 앞으로 제출된 그런 고소장들을 다 쌓아놓고 다음의 연설을 한다.

소조메노스의 기록이다.

“All these accusations will be brought forward in their own season at the great day of judgment, and will there be judged by the Great Judge of all men; as to me, I am but a man, and it would be evil in me to take cognizance of such matters, seeing that the accuser and the accused are priests; and the priests ought so to act as never to become amenable to the judgment of others. Imitate, therefore, the divine love and mercy of God, and be ye reconciled to one another; withdraw your accusations against each other; let us be persuaded, and let us devote our attention to those subjects connected with the faith on account of which we are assembled.”

이 정도로 그가 겸양을 가지고 말한 것인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역사에 그렇게 기록하고 있으니 일단 사실로 받아들이자. 콘스탄티누스는 이 연설을 마친 후 자신에게 제출된 고발장들을 모두 불사른 후, 날을 잡아서 민감한 논점들을 토론하기로 정한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가 약속한 날이 오기도 전에, 주교들은 단독으로 모여서 아리우스를 소환해서 신학적 논쟁을 시작한다. 소조메노스에 따르면 이 신학토론에 있어서 주교들은 그 입장이 대충 삼분되어 있었다. 한 축에서는 전통적인 신앙을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용어를 도입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 있었고, 단순한 신앙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그냥 이전부터 믿어져 오던 대로 의심없이 덮어놓고 따르자는 입장을 피력했다. 반면 설령 전통적인 견해라 하더라도 철저한 검증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 있었다. 니케아 회의는 후자의 입장에 따라 진행되어 나갔다.



그런데 아리우스측에서 선수를 쳤다. 테오도레토스의 기록이다.

These and similar exhortations he, like an affectionate son, addressed to the bishops as to fathers, labouring to bring about their unanimity in the apostolical doctrines. Most members of the synod, won over by his arguments, established concord among themselves, and embraced sound doctrine. There were, however, a few, of whom mention has been already made, who opposed these doctrines, and sided with Arius; and amongst them were Menophantus, bishop of Ephesus, Patrophilus, bishop of Scythopolis, Theognis, bishop of Nicaea, and Narcissus, bishop of Neronias, which is a town of the second Cilicia, and is now called Irenopolis; also Theonas, bishop of Marmarica, and Secundus, bishop of Ptolemais in Egypt . They drew up a formulary of their faith, and presented it to the council. As soon as it was read it was torn to pieces, and was declared to be spurious and false. So great was the uproar raised against them, and so many were the reproaches cast on them for having betrayed religion, that they all, with the exception of Secundus and Theonas, stood up and took the lead in publicly renouncing Arius. This impious man, having thus been expelled from the Church, a confession of faith which is received to this day was drawn up by unanimous consent; and, as soon as it was signed, the council was dissolved.

아리우스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주교들이 단독으로 제출한 신조가 제출되었을때, 이들의 제안은 역풍을 맞게 된다. 제출된 신조는 찢겨졌고 다른 주교들의 격렬한 항의에 부딪치게 된 것이다. 중재안으로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오던 {시리아-팔레스티나} 신조가 제시되었을때, 콘스탄티누스는 이 신조 안의 모든 교리를 정통적인 것이라고 동의하면서 아울러 "동일본질"이라는 단어를 삽입하자고 제안한다.  카이사리아의 주교인 유세비우스는 다른 주교들과 함께 이 제안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니케아 회의를 마치고 카이사리아에 보낸 유세비우스의 편지를 보자. 테오도레토스의 {교회사} 11장에 삽입된 내용이다. 물론 이 신조에서도 인간 예수로 오기 전의 성자는 "신 중의 신" - 즉, 참된 신이며 "이 세상의 창조자"이다.

Epistle of Eusebius, Bishop of Cæsarea, which he wrote from Nicæa when the great Council was assembled.

You will have probably learned from other sources what was decided respecting the faith of the church at the general council of Nicæa, for the fame of great transactions generally outruns the accurate account of them: but lest rumours not in strict accordance with the truth should reach you, I think it necessary to send to you, first, the formulary of faith originally proposed by us, and, next, the second, published with additions made to our terms. The following is our formulary, which was read in the presence of our most pious emperor, and declared to be couched in right and proper language.

The Faith put forth by us.

'As in our first catechetical instruction, and at the time of our baptism, we received from the bishops who were before us and as we have learned from the Holy Scriptures, and, alike as presbyters, and as bishops, were wont to believe and teach; so we now believe and thus declare our faith. It is as follows:—

'We believe in one God, Father Almighty, the Maker of all things, visible and invisible; and in one Lord Jesus Christ, the Word of God, God of God, Light of Light, Life of Life, Only-begotten Son, First-born of every creature, begotten of the Father before all worlds; by Whom all things were made; Who for our salvation was incarnate, and lived among men. He suffered and rose again the third day, and ascended to the Father; and He will come again in glory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We also believe in one Holy Ghost. We believe in the being and continual existence of each of these; that the Father is in truth the Father; the Son in truth the Son; the Holy Ghost in truth the Holy Ghost; as our Lord, when sending out His disciples to preach the Gospel, said, ' Go forth and teach all nations, baptizing them into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Ghost. ' We positively affirm that we hold this faith, that we have always held it, and that we adhere to it even unto death, condemning all ungodly heresy. We testify, as before God the Almighty and our Lord Jesus Christ, that we have thought thus from the heart, and from the soul, ever since we have known ourselves; and we have the means of showing, and, indeed, of convincing you, that we have always during the past thus believed and preached.'

[카이사리아-팔레스티나 신조]

"우리는 전능한 아버지,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모든 만물의 창조자이신 유일한 신을 믿는다. 우리는 신의 말씀/로고스이시며, 신 중의 신, 빛 중의 빛, 생명 중의 생명, 성부에게서 나신 유일한 아들, 모든 창조물에 앞선 분,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성부가 낳으신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 분을 통해 세상이 창조되었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 분은 세상에 오셔서 사람 가운데 사셨다. 그는 고난을 당하시고 세째날 부활하여 성부께로 승천하셨고, 영광 가운데 돌아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우리는 또한 성령을 믿는다. 우리는 성부는 진실로 성부로, 성자는 진실로 성자로, 성령은 진실로 성령으로 각각 계시며 또한 영존하신다고 믿는다. ...(후략) --- 번역: 최광민

When this formulary had been set forth by us, there was no room to gainsay it; but our beloved emperor himself was the first to testify that it was most orthodox, and that he coincided in opinion with it; and he exhorted the others to sign it, and to receive all the doctrine it contained, with the single addition of the one word— 'consubstantial.' He explained that this term implied no bodily condition or change , for that the Son did not derive His existence from the Father either by means of division or of abscission, since an immaterial, intellectual, and incorporeal nature could not be subject to any bodily condition or change. These things must be understood as bearing a divine and mysterious signification. Thus reasoned our wisest and most religious emperor. The addition of the word consubstantial has given occasion for the composition of the following formulary:—

The Creed published by the Council: 'We believe in one God, Father Almighty, Maker of all things visible and invisible. And in one Lord Jesus Christ, the Son of God, begotten of the Father; only-begotten, that is, of the substance of the Father, God of God, Light of Light, Very God of very God, begotten not made, being of one substance with the Father: by Whom all things were made both in heaven and on earth: Who for us men, and for our salvation, came down from heaven, and was incarnate, and was made man; He suffered, and rose gain the third day; He ascended into heaven, and is coming to judge both quick and dead. And we believe in the Holy Ghost. Th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 anathematizes all who say that there was a time when the Son of God was not; that before He was begotten He was not; that He was made out of the non-existent; or that He is of a different essence and of a different substance from the Father; and that He is susceptible of variation or change.'

When they had set forth this formulary, we did not leave without examination that passage in which it is said that the Son is of the substance of the Father, and consubstantial with the Father. Questions and arguments thence arose, and the meaning of the terms was exactly tested. Accordingly they were led to confess that the word consubstantial signifies that the Son is of the Father, but not as being a part of the Father. We deemed it right to receive this opinion; for that is sound doctrine which teaches that the Son is of the Father, but not part of His substance. From the love of peace, and lest we should fall from the true belief, we also accept this view, neither do we reject the term 'consubstantial.' For the same reason we admitted the expression, 'begotten, but not made;' for they alleged that the word 'made' applies generally to all things which were created by the Son, to which the Son is in no respect similar; and that consequently He is not a created thing, like the things made by Him, but is of a substance superior to all created objects. The Holy Scriptures teach Him to be begotten of the Father, by a mode of generation which is incomprehensible and inexplicable to all created beings. So also the term 'of one substance with the Father,' when investigated, was accepted not in accordance with bodily relations or similarity to mortal beings. For it was also shown that it does not either imply division of substance, nor abscission, nor any modification or change or diminution in the power of the Father, all of which are alien from the nature of the unbegotten Father. It was concluded that the expression ' being of one substance with the Father,' implies that the Son of God does not resemble, in any one respect, the creatures which He has made; but that to the Father alone, who begot Him, He is in all points perfectly like: for He is of the essence and of the substance of none save of the Father. This interpretation having been given of the doctrine, it appeared right to us to assent to it, especially as we were aware that of the ancients some learned and celebrated bishops and writers have used the term 'consubstantial' with respect to the divinity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These are the circumstances which I had to communicate respecting the published formulary of the faith. To it we all agreed, not without investigation, but, after having subjected the views submitted to us to thorough examination in the presence of our most beloved emperor, for the above reasons we all acquiesced in it. We also allowed that the anathema appended by them to their formulary of faith should be accepted, because it prohibits the use of words which are not scriptural; through which almost all the disorder and troubles of the Church have arisen. And since no passage of the inspired Scripture uses the terms 'out of the non-existent,' or that 'there was a time when He was not,' nor indeed any of the other phrases of the same class, it did not appear reasonable to assert or to teach such things. In this opinion, therefore, we judged it right to agree; since, indeed, we had never, at any former period, been accustomed to use such terms. Moreover, the condemnation of the assertion that before He was begotten He was not, did not appear to involve any incongruity, because all assent to the fact that He was the Son of God before He was begotten according to the flesh. And here our emperor, most beloved by God, began to reason concerning His divine origin, and His existence before all ages. He was virtually in the Father without generation , even before He was actually begotten, the Father having always been the Father, just as He has always been a King and a Saviour, and, virtually, all things, and has never known any change of being or action.

"We have thought it requisite, beloved brethren, to transmit you an account of these circumstances, in order to show you what examination and investigation we bestowed on all the questions which we had to decide; and also to prove how at one time we resisted firmly, even to the last hour, when doctrines improperly expressed offended us, and, at another time, we, without contention, accepted the articles which contained nothing objectionable, when after a thorough and candid investigation of their signification, they appeared perfectly conformable with what had been confessed by us in the formulary of faith which we had published."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와 다른 주교들이 검토 끝에 내렸던 결론은 성부-성자의 동일본질(Homoousion)이 "신학적으로 옳고 건전한 교리"란 것이었다. 이것은 상당히 의외의 진술이다. 이것은 아리우스 측의 이질본질(heteroousion)이나 절충파인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내세울 유사본질(homoiousion)을 둘다 배척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이사리아의 유세비우스와 검토를 맡은 주교들은 '동일본질', '태어났으나 창조되지는 않은' 같은 용어들을 신학적으로 옳은 것으로 인정하게 된다.

아울러 아리우스파의 주장 중 하나인 '성자는 무에서 창조되었으며, 성자가 존재하지 않는 시점이 있었다'는 주장은 그들에게 전혀 친숙한 개념도 아니고, 실제로도 이전에 사용된 적이 없다는 점을 들어 이를 기각한다.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의 편지에서 계속 인용한다.

And since no passage of the inspired Scripture uses the terms ‘out of the non-existent,’ or that ‘there was a time when He was not,’ nor indeed any of the other phrases of the same class, it did not appear reasonable to assert or to teach such things. In this opinion, therefore, we judged it right to agree; since, indeed, we had never, at any former period, been accustomed to use such terms. Moreover, the condemnation of the assertion that before He was begotten He was not, did not appear to involve any incongruity, because all assent to the fact that He was the Son of God before He was begotten according to the flesh.

...또한 영감받은 성서 어디에도 (그리스도가 / 필자 주) "무로부터" (창조되었다 / 필자 주)라거나 혹은 "성자가 존재하지 않던 때가 있었다"란 구절들은 없으며, 또한 유사한 진술들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펼치거나 혹은 가르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합의를 결의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습니다: "우리는 이전에 이런 용어들의 사용에 익숙했던 적이 결코 없으며, 심지어 "(성부로부터) 낳아지기 전에는 성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한 정죄가 (이전의 가르침에 / 필자 주) 일치되지도 않는 것도 아닌데, '성자는 육체를 입고 태어나기 전에도 이미 신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에 우리 모두가 동의하기 때문이다..."  --- 번역: 최광민

앞서 말했다시피,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신조}와 거의 동일한 {시리아-팔레스티나 신조}가 담은 교리에 절대적으로 동의하면서 다른 주교들도 이 신조에 서명할 것을 권고하는 동시에 "동일본질"이란 단어를 삽입해서 새 신조를 작성하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검토를 담당한 주교단이 면밀한 신학적 검증을 하고나서 {니케아 신조} 초안이 나오고서야 콘스탄티누스는 비로소 성자의 영원성이라든지 하는 신학적 주제를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한 듯 싶다. 그래서 혹자는"동일본질"을 삽입하지는 콘스탄티누스의 제안은 그의 독자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그의 종교자문이었던 코르도바의 호시우스의 제안을 따른 것이라고 본다. 황제는 이 문구의 삽입을 "강제"하지 않았다.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 편지는 검토과정에 황제가 개입하지 않았고, 모든 검토는 신학적인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편지의 마지막 단락에서 유세비우스는 자신의 소감을 피력한다. 그는 처음에는 비록 '동일본질'이란 용어에 강경하게 반대했지만, 결론적으로는 그 용어에 신학적인 오류가 없었기 때문에 수용했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사실상 다른 주교가 계속해서 불편하게 생각했던 것은, 황제의 강압이 있었기 때문도 아니고, '동일본질'이란 용어에 신학적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들이 염려했던 것은 신조를 작성함에 있어서 성서 밖의 철학용어를 끌어왔다는 점과 이 용어가 이미 이단으로 정죄된 사벨리우스주의와 혼동되기 쉽다고 판단되기 때문이었다. 사벨리우스는 성부-성자-성령이 '동일본질'이며 그 구별은 한 존재의 서로 다른 양태(mode)에 불과하다는 이론을 전개했다. 즉, 마치 얼음-물-증기가 H2O란 존재의 다른 양태이듯, 성부-성자-성령은 실제로는 한 존재가 모습만 달리한 것이란 것이다. 그러나 니케아 신조는 사벨리우스와는 달리 '동일본질'의 세 독립적 신격을 말하고 있다.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는 편지에 적는다.

“We have thought it requisite, beloved brethren, to transmit you an account of these circumstances, in order to show you what examination and investigation we bestowed on all the questions which we had to decide; and also to prove how at one time we resisted firmly, even to the last hour, when doctrines improperly expressed offended us, and, at another time, we, without contention, accepted the articles which contained nothing objectionable, when after a thorough and candid investigation of their signification, they appeared perfectly conformable with what had been confessed by us in the formulary of faith which we had published.

사랑하는 형제들, 우리의 판단에 맡겨진 모든 질문들에 대해 어떤 검증과 조사가 이뤄졌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또한 이 (니케아 -- 필자 주) 신조가 부적절한 형식으로 제안되었을때 이 신조를 한때 강경하게 거부했을 뿐더러 심지어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거부했던 우리가, 그 중대한 의미를 철저하고 정직하게 검토한 후에는 이 신조들을 거부할 이유가 없으며 우리가 발표해왔던 신조들 속에 고백되어져왔던 내용과 완벽히 부합한다고 여겨 이 신조들을 수용하게 되었다는 점을 입증하게 위해, 우리는 이 모든 상황들 여러분께 전해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카이사리아의 유세비우스 / 번역: 최광민

아래는 콘스탄티누스가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를 비호한 니코메디아 주교 유세비우스를 비난하며 니코메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는 자신이 니케아 회의에서 엄정한 중립을 유지했다는 점도 아울러 강조하고 있다.

테오도레토스의 기록을 통해 콘스탄티누스의 편지 전문을 살펴보자.

“Who has taught these doctrines to the innocent multitude? It is manifestly Eusebius, the co-operator in the cruelty of the tyrants. For that he was the creature , originally a protected “runaway,” then protégé or client. of the tyrant has been clearly shown; and, indeed, is proved by the slaughter of the bishops, and by the fact that these victims were true bishops. The relentless persecution of the Christians proclaims this fact aloud. “I shall not here say anything of the insults directed against me, by which the conspiracies of the opposite faction were mainly carried out. But he went so far as to send spies to watch me, and scarcely refrained from raising troops in aid of the tyrant. Let not any one imagine that I allege what I am not prepared to prove. I am in possession of clear evidence; for I have caused the bishops and presbyters belonging to his following to be seized. But I pass over all these facts. I only mention them for the purpose of making these persons ashamed of their conduct, and not from any feeling of resentment. “There is one thing I fear, one thing which causes me anxiety, and that is to see you charged as accomplices; for you are influenced by the doctrines of Eusebius, and have thus been led away from the truth. But your cure will be speedy, if, after obtaining a bishop who holds pure and faithful doctrines, you will but look unto God. This depends upon you alone; and you would, no doubt, have thus acted long ago, had not the aforesaid Eusebius come here, strongly supported by those then in power, and overturned all discipline.As it is necessary to say something more about Eusebius, your patience will remember that a council was held in the city of Nicæa, at which, in obedience to my conscience, I was present, being actuated by no other motive than the desire of producing unanimity among all, and before all else of proving and dispelling the mischief which originated from the infatuation of Arius of Alexandria, and was straightway strengthened by the absurd and pernicious machinations of Eusebius. But, beloved and much-honoured brethren, you know not how earnestly and how disgracefully Eusebius, although convicted by the testimony of his own conscience, persevered in the support of the false doctrines which had been universally condemned. He secretly sent persons to me to petition on his behalf, and personally intreated my assistance in preventing his being ejected from his bishopric, although his crimes had been fully detected. God, who, I trust, will continue His goodness towards you and towards me, is witness to the truth of what I say. I was then myself deluded and deceived by Eusebius, as you shall well know. In everything he acted according to his own desire, his mind being full of every kind of secret evil. “Omitting the relation of the rest of his misdeeds, it is well that you should be informed of the crime which he lately perpetrated in concert with Theognis, the accomplice of his folly. I had sent orders for the apprehension of certain individuals in Alexandria who had deserted our faith, and by whose means the firebrand of dissension was kindled. But these good gentlemen, forsooth, bishops, whom, by the clemency of the council, I had reserved for penitence, not only received them under their protection, but also participated in their evil deeds. Hence I came to the determination to punish these ungrateful men, by apprehending and banishing them to some far-distant region. “It is now your duty to look unto God with that same faith which it is clear that you have ever held, and in which it is fitting you should abide. So let us have cause of rejoicing in the appointment of pure, orthodox, and beneficent bishops. If any one should make mention of those destroyers, or presume to speak in their praise, let him know that his audacity will be repressed by the authority which has been committed to me as the servant of God. May God preserve you, beloved brethren!” --- Chapter XIX.—Epistle of the Emperor Constantine against Eusebius and Theognis, addressed to the Nicomedians.

....[전략]...그대들은 (니코메디아 주교 / 필자 주) 유세비우스의 교리에 영향을 받았고, 따라서 진리로부터 이탈했다. 그러나 순수하고 신실한 교리를 지키는 새로운 주교가 부임한 후 그대들이 (다시) 신 만을 바라본다면, 그대들의 오류는 신속히 교정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오직 그대들에게 달려있다. ...[중략]...이 유세비우스에 관해 좀더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대들도 기억하다시피, 니케아에서 공의회가 열렸다. 내 양심을 따르기 위해 나는 그 회의에 참석하여 오직 모든 이들의 합의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열망 이외에는 어떤 다른 동기도 가지고 있지않았고,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의 어리석은 열정에서 비롯된 문제들이 논증되고 해소되는 것을 목도하였으며, 유세비우스의 어처구니 없고 위험천만한 공작을 겪은 직후 보다 완강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유세비우스가 얼마나 끈질기고 얼마나 추잡하였는지 모를 것이다. 그는 양심에 찔리면서도 보편적으로 정죄당한 거짓 교리를 계속 지지하였다. 결국 들통이났지만,  그는 나에게 자기를 대신하여 변호할 사람을 보내어, 자신이 주교직에서 쫓겨나는 것을 내 힘을 빌어 막아보려고 했다.   --- {니코메디아인들에게 보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편지} / 번역: 최광민

자, 역사의 아이러니는 여기서 시작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지금 니코메디아의 주교 유세비우스를 아리우스 지지자라며 비난하고 있지만, 몇 년 후에 그 유세비우스를 불러 세례도 받을 것이고 또 아리우스를 복권시키고자 노력하는 동시에 아리우스의 탄핵에 압장섰던 아타나시우스를 유배시킬 것이다.



§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정치적/종교적 구미에 맞게 "변개"된 {신약성서} "편집본"을 짜깁기하여 만든 장본인일까?

이 주장은 콘스탄티누스와 관련된 음모론 가운데 가장 중대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듯 하다. 그 이유는 명백한데, 기독교는 (이슬람에서도 공언하듯) "경전의 종교"인지라 만약 기독교의 교리를 구성하는 경전과 구성과 내용이 변개되었다면, 그것은 즉 기독교 자체의 변질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음모론은 콘스탄티누스에 대한 음모론일 뿐 아니라 AD 4세기 이후 기독교 자체에 대한 음모론이라고 봐야 한다.

이 음모론은 생각보다 훨씬 널리 퍼져있다. 가령 2000년대 초/중반의 베스트셀러인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제55장에서 티빙은 이렇게 말한다.

More than eighty gospels were considered for the New Testament, and yet only a relative few were chosen for inclusion - Mattew, Mark, Luke, and John among them.

"who chose which gospels to includde?" Sophie asked.

"Aha!" Teabing burst in with enthusiasm. "Thr fundamental irony of Christianity! The Bible, as we know it today, was collated by the pagan Roman emperor Constantine the Great."

“80개 이상의 복음서들이 {신약성서}로 간주되었지만, 오직 몇 개만이 선택되었다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등이 거기에 속하지"

"누가 복음서들을 골라낸 것인가요?' 소피가 물었다.

티빙은 흥분하여 말을 뱉었다: "아하! 그게 기독교의 기본적인 아니러니야!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성서는 이교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짜맞춘 것이거든.... --- Dan Brown, {The Da Vinci Code}, /  번역: 최광민

소설 {다빈치 코드}의 이 한 단락은 거의 모든 문장마다 오류를 보인다. 80개 이상의 복음서들이 "신약성서로 간주되었"을까? (누구에 의해?). 오늘날의 신약성서는 AD 4세기 초반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짜깁기된 변개된 문서일까? (근거는?)

"콘스탄티누스 경전 조작설"의 주연은 콘스탄티누스 황제 본인이고 조연은 {교회사}의 저자인 카이사리아의 주교 유세비우스이다. 유세비우스는 니케아 회의에서 조정역할을 담당한 인물로, 니케아 회의를 통해 파문된 아리우스 및 콘스탄티누스에게 세례를 준 니코메디아의 주교 유세비우스와 함께 루키아노스의 문하에 속했던 범-오리게네스 학파의 인물이다.

일단 이런 음모론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부터 살펴보자. 음모론은 아래의 "진짜 역사"에 문서적/사료적 근거없는 추론을 덧붙인 것에 불과하다.

아리우스를 파문한 니케아 회의 (AD 325년)로부터 6년 후이자, 니코메디아에서 사망하기 6년 전인 AD 331년, 콘스탄티누스는 그가 건립한 제국의 새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교회에서 사용될 성서 50권을 카이사리아의 주교 유세비우스에게 주문한다. 카이사리아의 유세비우스는 이 내용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생애, Vita Constantini, IV,36}에 기록해 남겼다.


Eusebious, {The Life of Constantine the Great}, tr. J. Fletcher
https://archive.org/stream/lifeconstantine00fletgoog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는 성서사본 (1) 50권을 (2) 양피지에 (3) 읽기 쉽게 (4) 간수하기 쉽고 옮기기에 용이한 형태로 (5) 철저하게 훈련된 전문필사자에게 필사시켜 (5) 로마제국의 새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조속히 보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읽어보자.

I have thought it expedient to instruct your Prudence to order fifty copies of the sacred Scriptures, the provision and use of which you know to be most needful for the instruction of the Church, to be written on prepared parchment in a legible manner, and in a convenient, portable form, by professional transcribers thoroughly practised in their art.

나 (=콘스탄티누스)는 보관용 및 교회에서 매우 필요한 교육용으로 50권의 성서 사본을 그대 (=유세비우스)에게 주문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해 왔다. 이 사본들은 잘 준비된 양피지에, 읽기쉽게 필사되어야 하고, 옮기기에 용이한 형태여야 하며, 필사기술을 철저히 훈련받은 전문 필사자들에 의해 제작되어야 한다.... --- 카이사리아의 유세비우스, {Vita Constantini, IV,37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생애}  / 번역: 최광민

주문을 받은 유세비우스는 자신이 황제의 요구사항에 맞추기 위해 한 작업을 간략히 설명한다. 이 내용은 이어지는 {Vita Constantini, IV,37}에 등장한다.

Such were the emperor's commands, which were followed by the immediate execution of the work itself, which we sent him in magnificent and elaborately bound volumes of a threefold and fourfold form

이것이 황제의 지시였으며, 이는 즉시 실행되었다. 우리는 3 혹은 4종으로 된 훌륭하게 공들인 코덱스 (장정본)을 황제에게 보냈다. --- 카이사리아의 유세비우스, {Vita Constantini, IV,37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생애}  / 번역: 최광민

마지막 구절의 해석은 다소 모호해서 역사가들은 조금씩 다르게 이 구절을 해석한다. 아마도 50권의 사본을 (1) 3권 혹은 4권의 코덱스로 제작했다는 뜻이거나, (2) 페이지 당 3컬럼 혹은 4컬럼으로 제작했다는 뜻일 것으로 가장 일반적으로 여겨진다.

왜 콘스탄티누스는 유세비우스에게 사본의 필사를 요청했을까?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는 범-오리게네스 학파의 일원이었고, 오리게네스와 그 후진은 많은 성서사본을 입수하고 비교분석한 것으로 유명했다. 오리게네스가 누군가? 여러 사본들을 대차대조한 성서인 {헥사플라}의 저자 아닌가! 유세비우스의 많은 교회사 관련 작품은 오리게네스 본인과 그 후학들이 설립한 카이사리아의 도서관 장서에 많이 의존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몇 년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아타나시우스 역시 유사한 주문을 받았다는 아나타시우스 본인의 기록이 남아있다. 그는 니케아 회의 뿐 아니라 이후에도 계속되는 아리우스 문제로, 콘스탄티누스 및 그 아들들과 불편한 관계 속에 있었다. 콘스탄티누스-파우스타 사이의 아들들인 콘스탄티우스(차남)와 콘스탄스(삼남/막내) 사이에 벌어진 정치분쟁 사이에서 고생하던 아타나시우스가 쓴 {콘스탄티우스에 대한 변론, Apologia ad Constantium 4 -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ries II/Volume IV}에는 그가 콘스탄스의 요청을 받고 성서를 포함한 코덱스(πύκτια)를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제국의 동부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지역을 담당한 아우구스투스인 콘스탄티우스 (2세)는 준-아리우스파를 지원했고, 제국의 중부인 이탈리아-달마티아-북아프리카 등을 담당한 아우구스투스인 콘스탄스는 니케아 신조를 따르는 카톨릭 교회를 지원했다.

This certainly is sufficient for proof, yet suffer me nevertheless to lay before you an account of my travels, which will further lead you to condemn the unfounded calumnies of my opponents. When I left Alexandria[1], I did not go to your brother’s head-quarters, or to any other persons, but only to Rome; and having laid my case before the Church (for this was my only concern), I spent my time in the public worship. I did not write to your brother, except when Eusebius and his fellows had written to him to accuse me, and I was compelled while yet at Alexandria to defend myself; and again when I sent to him volumes[2] containing the holy Scriptures, which he had ordered me to prepare for him. It behoves me, while I defend my conduct, to tell the truth to your Piety. When however three years had passed away, he wrote to me in the fourth year[3], commanding me to meet him (he was then at Milan); and upon enquiring the cause (for I was ignorant of it, the Lord is my witness), I learnt that certain Bishops[4] had gone up and requested him to write to your Piety, desiring that a Council might be called. Believe me, Sire, this is the truth of the matter; I lie not. Accordingly I went down to Milan, and met with great kindness from him; for he condescended to see me, and to say that he had despatched letters to you, requesting that a Council might be called. And while I remained in that city, he sent for me again into Gaul (for the father Hosius was going thither), that we might travel from thence to Sardica. And after the Council, he wrote to me while I continued at Naissus[5], and I went up, and abode afterwards at Aquileia; where the letters of your Piety found me. And again, being invited thence by your departed brother, I returned into Gaul, and so came at length to your Piety --- 아타나시우스, {변론, Apologia ad Constantium 4}

학자들은 유세비우스와 아타나시우스가 필사해서 각각 콘스탄티누스와 콘스탄스에게 보낸 이들 "성서사본"들이 오늘날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사본군에 속하는 {코덱스 바티카누스 / 바티칸 사본}와 {코덱스 시나이티쿠스 / 시나이 사본}와 같은 뿌리에 속할 것으로 여기고 있다.


Author: Abbot, Ezra, 1819-1884, {On the comparative antiquity of the Sinaitic and Vatican manuscripts of the Greek Bible} (1872)
https://archive.org/stream/oncomparativeant00abbo


Author: Lake, Kirsopp, {The Sinaitic and Vatican Manuscripts and the Copies Sent by Eusebius to Constantine} (January 1, 1918)
https://archive.org/stream/jstor-1507391/1507391

유세비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기록로부터 이들이 성서를 조작했다는 논리를 유추해 낼 수 있을까? 사실 이 기록들이 말하는 것은 아주 단순하다: (1) 황제는 사본을 주문했고, (2) 이 요구에 응해 유세비우스와 아타나시우스는 각각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사본을 필사해서 보내주었다. 더도 덜도 아니게 이 두 진술은 딱 이것만을 말한다.

콘스탄티누스와 콘스탄스가 보내달라고 요청한 여러 권 분량의 이 "성서사본"들에 대한 기록은 이 두 기록이 전부이다. 그럼 여기 어디에 황제와 유세비우스, 혹은 황제와 아타나시우스가 짜고 {신약성서}를 변개했다는 암시가 등장한단 말일까?

사실, 정경으로 인정되어온 27권의 {신약성서} 문서 가운데, AD 170년 경의 {무라토리 단편}의 정경목록은 이중 22권을 (5권은 언급이 되어있지 않아 정경여부의 견해를 알 수 없다), 오리게네스는 (논쟁 중인 네 권의 문서를 뺀) 23권을 이미 확실한 정경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럼 유세비우스나 아타나시우스가 필사하면서 내용을 변개했을까? 하지만 이 대중적인 음모론은 도무지 그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아울러 이들이 그렇게 해야했을 이유도 특별히 없다.

위에 설명된 "역사적 사실"은 댄 브라운의 "충격적 소설"인 {다빈치 코드}에서는 이런 식의 음모론으로 둔갑한다. 읽어보자.

"...Constantine comissioned and financed a new Bible, which omitted those gospels that spoke of Christ's human traits and embellished those gospels that made Him godlike. The earlier gospels were outlawed, gathered up, and burned...", Dan Brown, {The Da Vinci Code}, Chapter 55

"...콘스탄티누스는 새로운 성서를 의뢰하고 자금을 지원했는데, 인간적인 예수를 묘사하고 있는 이런 (그노시스 / 필자 주) 복음서들은 삭제되었고, 그를 신처럼 묘사하는 복음서들은 과장시켰어. 그 이전의 (그노시스 / 필자 주) 복음서들은 불법화되었고, 거둬들여져서 불태워졌어....."  --- 댄 브라운, {다빈치 코드} 제 55장 / 번역: 최광민

콘스탄티누스, 유세비우스, 아타나시우스는 과연 그 이전과 다른 뭔가 "새로운 성서"를 편집했는가? 그들이 그노시스 문서를 조직적으로 모아서 불태웠던가? 그노시스 문서에 대한 격렬한 비난은 콘스탄티누스의 시대보다 최소한 150년은 앞선 AD 2세기 말의 이레네우스의 일련의 저작들에 이미 등장하고 있었고, 콘스탄티누스의 시절 훨씬 전에 기독교의 정경목록에서 이미 배제되어 있지 않았던가? 잠깐. 댄 브라운이 그노시스 문서들을 정말 진지하게 읽어보기는 한 걸까? 그노시스 문서 속의 예수가 과연 "인간적"인 예수던가? 유세비우스와 아타나시우스가 콘스탄티누스에서 "필사"해 보낸 성서사본은 그 이전 세기의 사본과 비교했을때 예수를 보다 더 "신적"으로 과장해서 묘사하고 있던가?

도대체 댄 브라운은 무슨 사료를 근거로 저런 엉뚱한 주장을 펼친 것일까? 상상과 추론을 "역사적 사료"라고 생각한 것일까?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시대보다 250년 정도 이전인 AD 170년 경에 작성된 성서목록인 {무라토리 단편}은 아래와 같이 22권의 {신약성서} 정경문서들을 언급하고 있다. 수정/개정되지 않은 라틴어 원문과 한국어 중역을 옮긴다. Bruce Metzger가 라틴어 복원/개정본에서 영어로 번역한 것 ( {The Canon of the New Testament (Oxford: Clarendon Press, 1987}, pp. 191-201 )을 바탕으로 다른 번역본을 고려해서 한국어로 옮겨보았다.  줄 번호는 라틴어 사본의 줄 번호를 그대로 사용하겠다.

이 문서와 댄 브라운의 주장을 대조해서 읽어보자.

{무라토리 단편}, --- 라틴어/영어에서 중역: 최광민

[이전 소실]

1. ...quibus tamen interfuit et ita posuit
....그 (마르코/마가?)는 이런 내용들을 ....적어 넣었다.....

2. tertio evangelii librum secundo lucan
세번째 복음서는 루가/누가에 의한 것이다.

3. lucas iste medicus post ascensum XPi
의사였던 루가는, 그리스도의 승천 후

4. cum eo paulus quasi ut juris studiosum
5. secundum adsumsisset numeni suo
율법에 열성있는 제자로 바울이 데리고 다닐 때

6. ex opinione conscripset dnm tamen nec ipse
자기 (=루가) 이름으로 복음서를 썼다고 믿겨지고 있다. 그러나 본인은

7. vidit in carne et ide prout asequi potuit
주님을 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사건들을 확인하여

8. ita et ad nativitate iohannis incipet dicere.
자신의 복음서를 (세례자) 요한의 탄생부터 진술했다.

9. quarti evangeliorum iohannis ex decipolis.
네번째 복음서는 사도였던 요한이 쓴 것이다.

10. cohortantibus condescipulis et eps suis
요한은 그에게 복음서를 쓰도록 권고했던 다른 사도들과 주교/감독들에게

11. dixit conieiunate mihi odie triduo et quid
말하길, "오늘부터 3일 간 나와 함께 금식하고

12. cuique fuerit revelatum alterutrum
각자에게 무슨 계시가 주어지는지

13. nobis ennarremus eadem nocte reve
우리 서로 나누도록 합시다"라고 말했고, 그날 밤 계시가

14. latum andreae ex apostolis ut recognis
사도 가운데 하나인 안드레에게 주어졌는데,

15. centibus cuntis iohannis suo nomine
16. cuncta describeret et ideo licet varia sin
그 내용은 요한이 모든 일어난 일들을 요한의 이름 하에 기록하고, 모든 사람들 (= 다른 사도들과 주교/감독들)이 그 내용을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록 다양한

17. culis evangeliorum libris principia
요소들이 네 권의 {복음서}각 권들을 통해 가르쳐질 수 있긴 하지만,

18. doceantur nihil tamen differt creden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다양함이 신자들의 믿음에 어떤 차이점을 만들지는 않는데,

19. tium fidei cum uno ac principali spu de
그것은 모든 것을 주관하는 한 성령이

20. clarata sint in omnibus omnia de nativi
네 권 {복음서}들이 선언하는 내용들, 즉 그리스도의 탄생과

21. tate de passione de resurrectione
수난과 부활과

22. de conversatione cum decipulis suis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대화와

23. ac de gemino eius adventu
그의 두번의 오심(=초림과 재림), 즉

24. primo in humilitate dispectus quod fo
처음에는 사람들의 모욕을 당하게끔 낮게 오셨지만

25. it secundum potestate regali ... pre
26. clarum quod foturum est quid ergo
장차 두번째 오실 때는 왕의 권능으로 영광스럽게 오실 것임을 [한 성령이 / 필자 주] 선언했기 때문이다.

27. mirum si iohannes tam constanter
놀라운 점은 요한이 매우 일관되게

28. sincula etia in epistulis suis proferam
그의 서신들 속에서 이런 내용들을 언급하면서

29. dicens in semeipsu quae vidimus oculis
그 자신에 관해 말하길, "우리가 우리 눈으로 보았고,

30. nostris et auribus audivimus et manus
31. nostrae palpaverunt haec scripsimus vobis
또한 우리의 귀로 듣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것을 우리가 그대들에게 적어 보낸다"고 말한 것이다.

32. sic enim non solum visurem sed et auditorem
33. sed et scriptore omnium mirabiliu dni per ordi
이런 방식으로 요한은 이 내용들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고 들었다는 것을 스스로 증언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 (= 다른 사도들과 감독/주교들)의 요청/권고에 따라 주님의 모든 놀라운 행적들을 기록한 사람이 요한 자신임을 말하고 있다.

34. nem proftetur acta aute omniu apostolorum
나아가, 모든 사도들의 행적들은 (={사도행전})은

35. sub uno libro scribta sunt lucas obtime theofi
한 권의 책으로 씌여졌다. "고매한 테오필로스"를 위해 루가/누가는

36. le comprindit quia sub praesentia eius sincula
그가 목도했던 개별적인 사건들을 모아 적었는데,

37. gerebantur sicuti et semote passione petri
이 사실은 (= 즉, 이 내용들이 그의 목격담이란 것은), 그의 기록에 베드로의 순교내용이 빠져있다는 점과

38. evidenter declarat sed et profectione pauli ab ur
39. be ad spania proficiscentis epistulae autem
바울이 로마에서 (에)스파니아로 여행한 내용이 빠져있다는 점으로 알 수 있다.

40. pauli quae a quo loco vel qua ex causa directe
41. sint volentibus intellegere ipse declarant
바울의 편지들은 누가 수신자이며, 어디에서 씌여졌으며, 무슨 목적으로 씌여졌는지를 이해하기 분명하다.

42. primu omnium corintheis scysmae heresis in
다른 무엇보다도, 코린트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그들의 이단적 분열을 금하고 있고,

43. terdicens deinceps b callaetis circumcisione
갈라티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할례에 대한 반대를 담았고,

44. romanis aute ordine scripturarum sed et
45. principium earum ... esse XPm intimans
46. prolexius scripsit de quibus sincolis neces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구약)성서의 계획과 그리스도가 성서의 주요주제였음을 길게 설명했다

47. se est ad nobis disputari cum ipse beatus
우리가 이 편지들을 하나씩 논하는 것은 중요한데, 이는 복된

48. apostolus paulus sequens prodecessoris sui
사도 바울 본인이 그의 선임자인

49. iohannis ordine non nisi nominati sempte
50. ecclesiis scribat ordine tali a corenthios
요한의 전례에 따라 자신의 이름으로 다음의 순서를 따르는 단 일곱교회들에게만 편지를 썼기 때문이다. 그 순서는 코린트 교회로부터 시작해서

51. prima ad efesius seconda ad philippinses ter
에페소스, 필리피,

52. tia ad colosensis quarta ad calatas quin
콜로사이, 갈라티아,

53. ta ad tensaolenecinsis sexta ad romanos
테살로니카, 마지막으로 로마교회에게 보낸 편지가

54. septima verum corintheis et thesaolecen
55. sibus licet pro correbtione iteretur una
7번째이다. 바울은 코린트인들과 테살로니카인들에게 두번째 훈계의 편지를 썼다.

56. tamen per omnem orbem terrae ecclesia
57. deffusa esse denoscitur et iohannis eni in a
하나의 교회가 세상 끝까지 퍼져나간 점을 명백히 해야 한다. 요한은 또한

58. pocalebsy licet septe eccleseis scribat
{요한의 계시록}에서 비록 일곱 교회들에게 편지하는 것이긴 하지만,

59. tamen omnibus dicit veru ad filemonem una
60. et at titu una et ad tymotheu duas pro affec
사실은 모든 교회에게 말하고 있다. 바울을 또한 필레몬/빌레몬에게 편지 한 편, 티투스/디도에게 편지 한 편, 그리고 티모데오/디모데에게 두 편의 편지를 보냈고,

61. to et dilectione in honore tamen eclesiae ca
62. tholice in ordinatione eclesiastice
63. discepline scificate sunt fertur etiam ad
이것들은 보편교회의 높은 평가 속에 신자의 훈련/교육을 위해 성스러운 문서로 간주되고 있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문서 중에

64. laudecenses alia ad alexandrinos pauli no
65. mine fincte ad heresem marcionis et alia plu
{라오디케아인에게 보내는 편지}나 {알렉산드리아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바울의 이름을 빌린 마르키온 이단자들의 위조문서이며, 이와 비슷한 다른 문서들은

66. ra quae in catholicam eclesiam recepi non
보편교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

67. potest fel enim cum melle misceri non con
그것은 (쓴 / 필자 주) 담즙이 꿀과 섞일 수 없는 것과 같다.

68. cruit epistola sane iude et superscrictio
나아가 [예수의 형제 / 필자 주] 유다의 편지를 비롯해서 위에 언급된 두 권의 요한의 편지를 보편교회는 성서로 받아들인다.

69. iohannis duas in catholica habentur et sapi
70. entia ab amicis salomonis in honore ipsius
솔로몬의 친구 (= 아마도 "필론"의 라틴어 오역인듯)의 {지혜서}를 성서로 간주한다.

71. scripta apocalapse etiam iohanis et pe
우리는 {요한의 계시록}과 {베드로의 계시록}을 받아들이지만,

72. tri tantum recipimus quam quidam ex nos
우리 가운데는 {베드로의 계시록}이 교회에서 읽히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73. tris legi in eclesia nolunt pastorem vero
74. nuperrim e temporibus nostris in urbe
헤르마스는 이 도시 (=로마)에서 아주 최근에 {목자서}를 썼는데

75. roma herma conscripsit sedente cathe
76. tra urbis romae aecclesiae pio eps fratre
그의 형제인 피우스가 로마교회의 주교로 있을 때의 일이다.

77. eius et ideo legi eum quide oportet se pu
진실로 이 {목자서}는 교회에서 권장되어야 하겠지만,

78. blicare vero in eclesia populo neque inter
79. profetas completum numero neque inter
80. apostolos in fine temporum potest
이 책은 그 숫자가 확정된 {예언서}들이나 사도들의 저작들과 함께 공공집회에서 신자들에게 읽혀져서는 안된다.

81. arsinoi autem seu valentini vel mitiadis [?]
82. nihil in totum recipemus qui etiam novu
83. psalmorum librum marcioni conscripse
우리는 아르시누스나 발렌티누스의 어떤 저작이나, 마르키온을 위해 새로운 시편을 쓴 밀티아데스의 어떤 저작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84. runt una cum basilide assianom catafry
85. cum constitutorem ...
아울러 우리는 카타프리기아 이단을 아시아에 창시한 바실리데스의 저작 역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하 소실] --- 번역: 최광민

"보편/카톨릭"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이 문건은, 현재 27권의 신약성서 문서 가운데 22권을 담고 있으며, {히브리서}, {베드로의 첫째/둘째 편지들}, {야고보서}, {요한의 세째 편지}가 빠져있는 대신 {솔로몬의 지혜}가 정경목록에 들어있다. {베드로 계시록}은 논쟁적인 문서로 설명되고 있으며, {헤르마스의 목자서}는 정경보다 아래 수준의 권장서로 설명되고 있다.



§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국교화"했는가?

갈리아의 실권자이자 아우구스투스인 콘스탄티누스가 이탈리아에서 아우구스투스를 참칭한 막센티우스를 AD 312년에 격파하고 또 다른 아우구스투스인 리키니우스와 함께  AD 313년에 공표한 메디오라눔(현, 밀라노) 칙령은, 비록 막센티우스의 치하에 탄압받은 기독교도들의 신앙을 보장하고 탄압 중 압류된 재산을 돌려주는 등의 실제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도입부에는 이제 "기독교도" 뿐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의 신앙을 보장한다는 내용도 함께 등장한다. 이 "다른 종교인"의 대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가령 마니교도 등이 이 분류에 속할 수 있을 것이다.

밀라노 칙령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When I, Constantine Augustus, as well as I, Licinius Augustus, fortunately met near Mediolanurn (Milan), and were considering everything that pertained to the public welfare and security, we thought, among other things which we saw would be for the good of many, those regulations pertaining to the reverence of the Divinity ought certainly to be made first, so that we might grant to the Christians and others full authority to observe that religion which each preferred; whence any Divinity whatsoever in the seat of the heavens may be propitious and kindly disposed to us and all who are placed under our rule. And thus by this wholesome counsel and most upright provision we thought to arrange that no one whatsoever should be denied the opportunity to give his heart to the observance of the Christian religion, of that religion which he should think best for himself, so that the Supreme Deity, to whose worship we freely yield our hearts) may show in all things His usual favor and benevolence. Therefore, your Worship should know that it has pleased us to remove all conditions whatsoever, which were in the rescripts formerly given to you officially, concerning the Christians and now any one of these who wishes to observe Christian religion may do so freely and openly, without molestation. We thought it fit to commend these things most fully to your care that you may know that we have given to those Christians free and unrestricted opportunity of religious worship. When you see that this has been granted to them by us, your Worship will know that we have also conceded to other religions the right of open and free observance of their worship for the sake of the peace of our times, that each one may have the free opportunity to worship as he pleases; this regulation is made we that we may not seem to detract from any dignity or any religion.

Moreover, in the case of the Christians especially we esteemed it best to order that if it happens anyone heretofore has bought from our treasury from anyone whatsoever, those places where they were previously accustomed to assemble, concerning which a certain decree had been made and a letter sent to you officially, the same shall be restored to the Christians without payment or any claim of recompense and without any kind of fraud or deception, Those, moreover, who have obtained the same by gift, are likewise to return them at once to the Christians. Besides, both those who have purchased and those who have secured them by gift, are to appeal to the vicar if they seek any recompense from our bounty, that they may be cared for through our clemency. All this property ought to be delivered at once to the community of the Christians through your intercession, and without delay. And since these Christians are known to have possessed not only those places in which they were accustomed to assemble, but also other property, namely the churches, belonging to them as a corporation and not as individuals, all these things which we have included under the above law, you will order to be restored, without any hesitation or controversy at all, to these Christians, that is to say to the corporations and their conventicles: providing, of course, that the above arrangements be followed so that those who return the same without payment, as we have said, may hope for an indemnity from our bounty. In all these circumstances you ought to tender your most efficacious intervention to the community of the Christians, that our command may be carried into effect as quickly as possible, whereby, moreover, through our clemency, public order may be secured. Let this be done so that, as we have said above, Divine favor towards us, which, under the most important circumstances we have already experienced, may, for all time, preserve and prosper our successes together with the good of the state. Moreover, in order that the statement of this decree of our good will may come to the notice of all, this rescript, published by your decree, shall be announced everywhere and brought to the knowledge of all, so that the decree of this, our benevolence, cannot be concealed.

나 콘스탄티누스 아우구스투스와, 나 리키니우스 아우구스투스는 다행히 메디오라눔 (현, 밀라노) 근방에서 함께 만나 공공의 복지와 안전에 관한 모든 사안을 논의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이로운 것 가운데서도, 신(들)을 경외하는 문제에 관한 조치가 우선 분명히 처리되어야 하며, 그래서 기독교도들과 다른 종교인들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신앙을 지킬 완전한 권리를 부여하는게 좋겠다고 판단했다....(후략)   / 번역: 최광민

--- Lactantius, De Mort. Pers., ch. 48. opera, ed. 0. F. Fritzsche, II, p 288 sq. (Bibl Patr. Ecc. Lat. XI). Translated in University of Pennsylvania. Dept. of History: Translations and Reprints from the Original Sources of European history,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897?-1907?]), Vol 4:, 1, pp. 28-30. This text is in the public domain.

따라서 AD 313년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의 국교화와는 상관 없는 종교관용령에 해당한다. 사실 이 칙령의 공동발표자인 공동황제 (아우구스투스) 리키니우스는 그다지 기독교에 우호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이런 성향은 카이사리아의 주교 유세비우스가 기록한 그의 전기에도 등장한다. 기도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문건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종교는 강요될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상 콘스탄티누스의 종교정책은 기독교-이교도 간의 통일에 촛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각 분파들 사이의 통일에 관심이 맞춰진 것이었다.

인용한다.

CHAPTER LVI HE PRAYS THAT ALL MAY BE CHRISTIANS BUT COMPELS NONE

My own desire is for the general advantage of the world and all mankind that Thy people should enjoy a life of peace and undisturbed concord Let those therefore who are still blinded by error be made welcome to the same degree of peace and tranquillity which they have who believe. For it may be that this restoration of equal privileges to all will have a powerful effect in leading them into the path of truth Let no one molest another in this matter but let every one be free to follow the bias of his own mind Only let men of sound judgment be assured of this that those only can live a life of holiness and purity whom Thou callest to an acquiescence in Thy holy laws With regard to those who will hold themselves aloof from us let them have if they please their temples of lies we have the glorious edifice of Thy truthjjwhich Thou hast given us as our native home We pray however that they too may receive the same blessing and thus experience that heartfelt joy which unity of sentiment inspires.....For it is one thing voluntarily to undertake the struggle for immortality, another to compel others to do likewise from fear of punishment."

--- 유세비우스,  {The Life of the Blessed Emperor Constantine}: In Four Books, from 306 to 337 A.D.

기독교의 배타적 국교화는 콘스탄티누스가 한 것이 아니라, AD 4세기 말 황제인 테오도시우스의 작업이다.



§ 콘스탄티누스가 죽음에 임박해 세례를 받은 것은 그가 죽을 때까지 솔 인빅투스 신자였기 때문일까?

콘스탄티누스의 종교는 무엇이었을까?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를 인용해 보자.

"I thought Constantine was a Christian," Sophie said. "Hardly," Teabing scoffed. "He was a lifelong pagan who was baptized on his deathbed, too weak to protest. In Constantine's day, Rome's official religion was sun worship - the cult of Sol Invictus, or the Invincible Sun- and Constantine was its head priest...."  ---Dan Brown, {The Da Vinci Code}, Chapter 55

"전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도였었다고 생각했는데요"란 소피의 말에 티빙이 답했다. "거의 그럴 리 없지. 그는 평생 이교도였고 죽을 때 가서야 세례를 받았어. 너무 허약해져서 거부조차 할 수도 없을 때 말야. 콘스탄티누스 시절 로마의 공식종교는 태양숭배, 그러니까 솔 인빅투스 혹은 "정복당하지 않는 태양"에 대한 숭배였고, 그는 그 종교의 수석신관이었네..."  --- 댄 브라운, {다빈치 코드}, 제 55장 / 번역: 최광민

과연 그럴까?

댄 브라운의 이 진술을 "역사적 사실"로 덥썩 물기 전에 역사기록과 정황을 통해 콘스탄티누스를 둘러싼 진짜 "역사적 사실"을 이해해 보도록 하자.

밀라노 칙령이 공표된 후 AD 313년으로부터 3년 전까지만해도 콘스탄티누스의 공식수호신은 전쟁의 신 마르스였다.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이자 서방의 아우구스투스(정제)였던 콘스탄티우스 1세는 열렬한 솔 인빅투스 신자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 시절의 카이사리아 주교였던 유세비우스가 기록한 그의 전기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는 이교도를 가장한  기독교도였다고 하지만, 이 진술의 진위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AD 303년 로마제국의 최고 권력자인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선포한 기독교 박해조치에 대해, 콘스탄티우스는 자신의 관할령인 제국 서부에서 몇개 교회 건물을 허무는 정도의 극히 제한적인 조치만 취한 점으로 보아, 기독교에 대해 상당히 관대한 입장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아들인 콘스탄티누스의 생모이자 그의 전 배우자 (처 혹은 정부) 헬레나가 기독교도였던 점이 이런 관대한 조치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게다가 헬레나와 이혼한 후 막시미아누스의 딸 테오도라와 결혼한 후 낳은 5명의 자식 중 막내딸의 이름은 "아나스타시아 Ἀναστασία"였다. "아나스타시아"란 이름은 "부활"이란 뜻의 그리스어로, 당시 기독교도 여자의 이름으로 많이 선호된 이름이었다. 따라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자신의 관할지역에서 기독교를 공공연히 묵인했던 결정은 그의 집안에 기독교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충분히 추론해 볼 수 있다.

콘스탄티우스 1세의 선임자였던 막시미아누스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로마의 전통종교인 유피테르와 헤르쿨레스 신앙으로 되돌아 간 후에도, 콘스탄티우스 1세는 솔 인빅투스 신앙을 고수했다. AD 306년에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한 시점, 콘스탄티누스는 아직 서방의 아우구스투스(정제)로 공식인준받지 못한 카이사르(부제) 급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콘스탄티누스 스스로 아우구스투스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가 서방의 권력을 안전하게 확보한 311년 무렵, 콘스탄티누스가 발행한 동전에서 유피테르와 헤르쿨레스는 사라지고 태양신 아폴로와 동일시된 솔 인빅투스가 재등장하는데, 솔 인빅투스에게는 "온 세계를 다스리는 신"이란 호칭이 주어진다. 즉, 콘스탄티누스의 기본적 종교관에는 솔 인빅투스를 정점으로하는 Summus Deus (최고신)의 개념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아폴로/솔 인빅투스를 고수한 이유는 아마도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역대 황제들의 가문의 수호신이 아폴로였기 때문일 것이다. 즉, 이제 아무도 권좌를 넘보지 못하는 자신의 지위를 반영한 것이다.


Gold multiple medallion minted in Ticinum, 313 AD. Wt. 39.79 g. Busts of Constantine with Sol Invictus

콘스탄티누스가 발행한 동전들과 메달리온을 보면 밀라노 칙령이 있는 후에도 한동안 그의 초상은 솔 인빅투스와 함께 등장했다. 그럼 콘스탄티누스는 역시 이교도였던 것인가? 그러나 니케아 회의가 열린 AD 325년 경을 전후해서 그가 발행하는 동전에서 솔 인빅투스는 점차 사라지고 중립적인 도상으로 바뀐다.

콘스탄티누스보다 3년 정도 뒤에 사망한 동시대인인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가 기록한 {콘스탄티누스의 생애}에 따르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새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동전을 발행한다. 읽어보자.

How deeply his soul was impressed by the power of divine faith may be understood from the circumstance that he directed his likeness to be stamped on the golden coin of the empire with the eyes uplifted as in the posture of prayer to God: and this money became current throughout the Roman world. His portrait also at full length was placed over the entrance gates of the palaces in some cities, the eyes upraised to heaven, and the hands outspread as if in prayer. --- Eusebius, {Life of Constantine} 4:15 Translated by Ernest Cushing Richardson. From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cond Series, Vol. 1. Edited by Philip Schaff and Henry Wace.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90.)

성스런 믿음 (=기독교)의 능력으로 그의 영혼이 얼마나 감화되었는지는, 그가 발행한 금화에 자신이 신에게 기도드리는 자세로 눈을 하늘로 향하는 모습을 새기도록 지시한 점에서 아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화폐는 로마 전역에서 유통되었다. 어떤 도시의 궁궐 입구에는 그의 전신상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 역시 눈을 하늘로 향하고 기도하듯 두 손을 펼치고 있다   ---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제 4권 15장 / 번역: 최광민

아울러 그는 황제숭배의 관례를 금지시켜 버렸다.

In this manner he represented himself, even through the medium of painting, as habitually engaged in prayer to God. At the same time he forbade, by an express enactment, the setting up of any resemblance of himself in any idol temple, that not even the mere lineaments of his person might receive contamination from the error of forbidden superstition.  --- Eusebius, {Life of Constantine} 4:16 Translated by Ernest Cushing Richardson. From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cond Series, Vol. 1. Edited by Philip Schaff and Henry Wace.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90.)

그는 심지어 그림에서조차 자신이 기도하는 자세로 표현되게 했다. 동시에 그는 포고를 내려 어떤 이교사원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설치하지 못하도록  했다......  ---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제 4권 16장 / 번역: 최광민

또 로마군단의 병사들은 이제 일요일에 아래의 기도를 바쳐야 하고, 또 방패에 십자가를 새기고 전투에 임할 때는 금독수리 기장이 아닌 십자가를 표현한 기장을 앞세워야 했다.

With regard to those who were as yet ignorant of divine truth, he provided by a second statute that they should appear on each Lord's day on an open plain near the city, and there, at a given signal, offer to God with one accord a prayer which they had previously learned. He admonished them that their confidence should not rest in their spears, or armor, or bodily strength, but that they should acknowledge the supreme God as the giver of every good, and of victory itself; to whom they were bound to offer their prayers with due regularity, uplifting their hands toward heaven, and raising their mental vision higher still to the king of heaven, on whom they should call as the Author of victory, their Preserver, Guardian, and Helper. The emperor himself prescribed the prayer to be used by all his troops, commanding them, to pronounce the following words in the Latin tongue:

...황제 자신이 자신의 군단이 사용할 기도문을 직접 작성했으며, 라틴어로 다음의 기도문을 읊도록 명령했다  / 4:19 번역: 최광민

Chapter 20. The Form of Prayer given by Constantine to his Soldiers.

"We acknowledge you the only God: we own you, as our King and implore your succor. By your favor have we gotten the victory: through you are we mightier than our enemies. We render thanks for your past benefits, and trust you for future blessings. Together we pray to you, and beseech you long to preserve to us, safe and triumphant, our emperor Constantine and his pious sons." Such was the duty to be performed on Sunday by his troops, and such the prayer they were instructed to offer up to God.

"우리는 당신을 유일한 신으로 믿습니다. 우리의 왕인 당신께 우리는 도움을 빕니다. 당신의 자비로 우리는 승리합니다. 당신은 우리의 적들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당신이 과거에 주신 복들에 감사드리며, 당신이 장래에도 축복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함께 당신께 기도드리며, 우리의 보호와 안전과 승리와 또 우리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신심깊은 아들들을 위해 간구합니다"  그의 군단이 일요일에 이 기도를 올리는 것은 의무조항이었고, 이 기도를 (기독교의) 신에게 바치도록 지시되었다. / 4:20 번역: 최광민

Chapter 21. He orders the Sign of the Saviour's Cross to be engraven on his Soldiers' Shields.

And not only so, but he also caused the sign of the salutary trophy to be impressed on the very shields of his soldiers; and commanded that his embattled forces should be preceded in their march, not by golden images, as heretofore, but only by the standard of the cross.

이 뿐 아니라, 그는 은혜로운 표지 (=십자가)가 모든 병사의 방패에 새겨지도록 조치했고, 전투에 임하는 병력들은 진군 시 금 기장이 아닌 십자가 기장을 앞세우도록 지시했다 / 4:21 번역: 최광민

--- Eusebius, {Life of Constantine} 4:19-21 Translated by Ernest Cushing Richardson. From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cond Series, Vol. 1. Edited by Philip Schaff and Henry Wace.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90.)

따라서 그가 로마황제로서 국가를 대표하는 로마전통종교의 대사제 혹은 수석사제로서의 폰티펙스 막시무스라는 직함은 계속 유지했지만, 이것을 두고 그가 꼭 "솔 인빅투스" 혹은 "미트라스"의 신봉자로 죽기 직전까지 살았다고 말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가 "폰티펙스 막시무스"란 직함을 유지한 이유는 제국시절의 로마종교를 이해하면 이해할 수 있다. 로마공화정 시절의 국가종교를 이끄는 사제들은 콜레기움 폰티피쿰 (Collegium Pontificum)이란 일종의 국가공무원과 같은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이 조직은 대표격인 폰티펙스 막시무스, 한 명의 렉스 사크로룸, 그리고 15인의 플라멘, 그리고 베스탈레스 (성처녀)로 구성되어 전통적인 로마 16신과 관련된 공식적인 제례를 담당했다.

로마가 제국으로 탈바꿈하는 시절인 BC 12년 초대황제인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에게 폰티펙스 막시무스의 지위가 주어졌고, 이후 자동적으로 황제에게 이 칭호가 주어졌다. 가령, 로마황제 네로의 동전에는 아래와 같은 그의 칭호가 적혀있다.


NERO CLAVD(IVS) CAESAR AVG(VSTVS) GERM(ANICVS) P(ONTIFEX) M(AXIMVS) TR(IBVNICIA) P(OTESTATE) IMP(ERATOR) P(ATER) P(ATRIAE):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폰티펙스 막시무스 트리부니키아 포데스타테 임페라토르 파테르 파트리에

국부이자 민회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은 종신독재관 (=임페라토르)이자 수석신관 (= 폰티펙스 막시무스)인 황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게르마니쿠스

이런 관례는 로마에 기독교도 황제가 등장하고도 두 세대 후인 AD 376년까지 이어져,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이 호칭을 유지한 마지막 기독교도 황제였으며, AD 392년 경 기독교를 배타적으로 국교화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폰티펙스 막시무스란 지위를 공식적으로 거부했다. AD 440년 경부터 이 호칭은 로마주교, 즉 교황의 호칭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레오 1세가 이 호칭을 취한 첫번째 로마주교였다. 그럼 (일부 프로테스탄트 측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호칭으로 사용한 로마주교 레오 1세가 '솔 인빅투스'의 은밀한 신자였단 말인가? 레오 1세는 당시 솔 인빅투스 / 미트라스 신자였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로마인들이 여전히 태양숭배의 구습을 버리지 못한 점을 성탄과 관련 설교에서 강력하게 질타했던 인물이었다는 점을 기억하자. 

따라서 어떤 "기독교도 황제"가 "폰티펙스 막시무스"란 호칭을 자동으로 보유하고 있었다고 해서 그가 "솔 인빅투스"를 포함한 로마종교를 믿었다고 자동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가 죽을 때까지 "폰티펙스 막시무스"란 직함을 유지한 사실은 그가 계속해서 솔 인빅투스를 신앙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이 문제에 대한 또 한가지 오해는 "기독교도"의 정의를 현대인들이 혼동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기독교에는 세 단계의 신자가 있다. 하나는 입문자, 그 다음은 세례준비자, 다른 하나는 성찬식에 참석할 수 있는 세례자 신분이다. 고대에는 세례를 받을 때까지 교리를 학습하고 신앙과 삶을 검증하기 위한 현대보다 더 엄격한 긴 준비기간을 두었는데, 죽기 직전이 아니라면 보통 3년 정도를 기다려야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전기를 기록한 카이사리아 주교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는 AD 337년 부활절 직후에 큰 병을 앓았고, 요양 차 어머니 헬레나의 이름을 딴 헬레노폴리스에 가서 온천욕을 하러 갔다가 헬레나가 설립한 루키아노스 기념교회에서 기도하던 중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서둘러 세례준비자 신분이 된 후 콘스탄티노플로 돌아던 길에 니코메디아에 이르러, 그는 주교들을 소집하여 예수처럼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했다. 그러나 현실성이 없기 때문에 그는 당장 세례를 받고 죽기 전이나마 세례받은 기독교도로 살고자 니코메디아아 주교이자 준-아리우스파의 좌장인 유세비우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얼마 후인 오순절 축제 마지막 날인 3월 22일 니코메디아 교외의 별장에서 사망했다.

콘스탄티누스가 임종에 임박해서 세례를 받은 것은 당시 기독교 관습에서 아주 벗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세례가 세례 이전의 모든 죄를 '단번'에 면죄시켜 준다는 인식이 있었고, 일단 세례를 받은 후에 짓는 중죄에 대한 교회의 처벌이 파문 혹은 파문에 준하는 중징계였기 때문에, 신자들은 입문자나 세례준비자 신분을 유지한 채 가급적 세례를 뒤로 늦추고자 하는 풍조가 있었던 것이다.

가령 "탕자"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과 세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메디올라눔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는 어떤가? 로마의 기사계급인 그의 부모는 독실한 기독교도였으며, 부친의 경력을 따라 로마에서 교육받고 32세에는 AD 372년엔 지방행정관/총독으로 발령받았다. 그 역시 독실한 기독교도였다. 그가 관할하던 지역에 속한 메디올라눔 (=밀라노)의 주교 옥센티우스가 AD 374년에 사망하면서 이 지역의 종교적 긴장이 높아졌는데, 그것은 옥센티누스가 아리우스파였기 때문이었다. 다음 주교자리를 놓고 아리우스파와 반-아리우스 (카톨릭)파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양 측은 모종의 합의 하에 명망가의 자제인 암브로시우스를 강제로 주교로 옹립했다. 설상가상으로 황제인 그라티아누스가 이를 수용하는 바람에, 완강히 주교직을 거부하던 암브로시우스는 타의로 메디올라눔의 주교가 된 것이다. 문제는 그가 독실한 기독교도이긴 하지만 34살이 될 때까지 세례준비자 신분이기만 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주교로 지명된 지 1주일 안에 세례를 받고 사제로 임명되고 또 주교가 된 것이었다.

로마제국 영내에서 기독교를 단일국교화했던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또 어떤가? 히스파니아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본인이 열정적인 기독교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AD 380년 큰 병을 앓고 나서야 세례를 받을 결심을 했다. 테오도시우스가 AD 347년 생이었으므로 서른이 넘어서야 비로소 세례를 받은 셈이다. 물론 세례를 받기 전에는 그도 세례준비자 신분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이 있기 직전인 AD 306년 경, 오늘날 에스파니아 그라나다 근방의 엘비라에서 모인 회합에서 히스파니아 지역의 주교, 사제, 부제들은 세습적인 로마의 신관직인 플라멘이 기독교도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경우를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로마법에 따르면 플라멘의 가문에 속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그 신분에 머물러야 했다. 따라서 엘비라 회의는 기독교도가 되고자 하는 플라멘은 그 신분에 머물 수는 있으나 기독교의 교리에 벗어나는 일을 해서는 않된다고 명시한다.

인용한다. (번역: 최광민)

2. Flamens (a priest in a temple) who have been baptized but who then offer sacrifices will double their guilt by adding murder (if they organize public games) or even triple it with sexual immorality, and they cannot receive communion even when death approaches.

세례받은 플라멘이 이교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공공경기 (~검투경기)를 주관 살인죄까지 더하는 경우, 거기에 덧붙여 성적인 죄를 짓는 경우, 그는 죽음에 임박하더라도 성찬을 받지 못한다.  --- 번역: 최광민

3. Flamens who have not offered sacrifices but who have presided at public games have kept themselves from complete destruction and may receive communion when death approaches if they have done the required penance. If they commit sexual offenses after completing the penance, they shall be denied any further communion since receiving communion would make a mockery of the Sunday communion.

이교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지는 않았지만 공공경기에 참석한 플라멘은 철저한 죄악까지는 이르지 않았고, 따라서 요구된 참회과정을 거쳤다면 죽음에 임박해서 그에게 성찬을 줄 수 있다.  --- 번역: 최광민

4. Flamens who have been catechumens for three years and who have abstained from sacrifices may be baptized.

플라멘이 3년 간 세례입문과정을 거쳤고 이교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았다면, 그에게는 세례를 줄 수 있다. --- 번역: 최광민

55. Priests who continue to wear the secular wreath [as former flamens] but who do not perform sacrifices or make offerings to idols may receive communion after two years.

화환을 두른 플라멘의 옷을 입지만 이교의 신에게 희생제사를 집전하거나 우상에게 제물을 바친적 없는 플라멘들은 2년 후 성찬을 받을 수 있다.--- 번역: 최광민

이 원칙은 기독교로 개종한, 그러나 폰티펙스 막시무스의 직위를 유지한 상태에서 입문자 지위에 머문 콘스탄티누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폰티펙스 막시무스의 지위에서 그가 이교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거나 공공검투경기를 스스로 주관한 것만 아니라면 그에게는 세례준비자가 되어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그러나 일단 세례준비자가 되고 세례를 받게 되면, 그후 이교숭배 행위에 직간접으로 개입되는 중죄를 저질렀을 때 그는 파문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기독교가 국교화되어있지 않고 여전히 로마의 전통종교가 힘을 발휘하던 시절의 로마황제로서 그것은 꽤나 부담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종교자문이었던 호시우스는 히스파니아 코르도바의 주교였으므로, 그 지역의 합의된 원칙을 콘스탄티누스도 잘 알았을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다.



게다가 콘스탄티누스는 댄 브라운의 주장처럼 "너무나 허약해서 저항할 힘도 없을 때" (본의와 무관하게)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다. 이미 AD 330년부터 시작한 콘스탄티노플의 '거룩한 사도교회' 건설 프로젝트는 그의 치밀한 계획 아래 진행되었고, 그가 마침내 세례를 받은 후 AD 337년 죽은 후엔 준-아리우스파를 지원한 그의 후계자 콘스탄티우스 2세가 유지를 받들어 그의 시신을 이 교회에 안장했다. 이 교회는 원래 콘스탄티누스가 자신의 원형묘당 형식으로 설계되었으며, 각지에서 12사도의 유해를 모아 자신과 같이 안장하려고 계획된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대한 인간적이고 종교적 평가는 콘스탄티누스의 조카였던 율리아누스 황제의 평가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헬레나가 낳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이복동생으로 콘스탄티우스와 (막시미아누의 황제의 의붓딸인) 테오도라 사이의 아들인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를 아버지로 둔 율리아누스는 원래 부모의 종교에 따라 기독교도로 자랐지만, 나중에 그리스 철학자로 성장해 그리스/로마종교로 복귀한 후 미트라스를 자신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그는 콘스탄티누스 사후 그의 세 아들이 서로 분쟁을 벌이다 모두 죽은 후 어부지리로 황제 지위에 오른 후, 고대종교 복원을 지원하고 니케아공회의 이후 세력다툼을 벌이던 제파를 모두 허용하는 등의 방식으로 기독교를 억압하는데 노력을 쏟았다. 그런 이유로 "배교자 황제"란 별명을 얻게 된다.

율리아누스가 AD 361년 경 동지축제인 사투르날리아/크로니아를 기념하면서 쓴 풍자작품 가운데 {황제들}이 있다. 이 작품에서는 유명한 로마황제들이 등장해 자신들의 업적이 최고라고 자평하고 신들은 이들을 비평하면서 최고의 황제가 누군지를 투표한다. 알렉산드로스는 황제는 아니지만 영웅 자격으로 참가할 기회를 얻는다. 율리아누스의 숙부인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아들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들은 냉대를 받고 조롱당한다. 율리아누스는 특별히 그와 그의 자식들이 기독교도인 점을 조롱한다. 아울러 예수 역시 조롱당한다. 이것이 바로 "미트라스/헬리오스/솔 인빅투스"를 자신의 수호신으로 삼았던 율리아누스의 평가다. 과연 콘스탄티누스는 죽을 때까지도 솔 인빅투스 신자였다고 봐야할까?

읽어보자.




Then silence was proclaimed and the gods cast a secret ballot. It turned out that Marcus had most of the votes. After conferring apart with his father, Zeus bade Hermes make a proclamation as follows: "All you mortals who have entered this contest, know that according to our laws and decrees the victor is allowed to exult but the vanquished must not complain. Depart then wherever you please, and in future live every one of you under the guidance of the gods. Let every man choose his own guardian and guide."

정숙이 선포된 후 신들은 비밀투표를 했다.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가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권한을 위임받아 다음과 같은 선포를 했다: "이 경연에 참가한 너희 인간들 모두는 우리의 법도와 선포에 따라 승자는 기뻐하며 즐기되, 패자는 불평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알도록 해라. 이제 어디든 돌아가서 신들의 지도 아래 각각 살도록 하라. 각자 지도를 받을 자신의 수호신을 정하도록 하라" / 번역: 최광민

After this announcement, Alexander hastened to Heracles, and Octavianus to Apollo, but Marcus attached himself closely to Zeus and Cronus. Caesar wandered about for a long time and ran hither and thither, till mighty Ares and Aphrodite took pity on him and summoned him to them. Trajanus hastened to Alexander and sat down near him. 

이 선포가 끝나자, 알렉산드로스는 헤라클레스를 당장 골랐고, 옥타비아누스는 아폴론을, 마르쿠스는 제우스와 크로노스에게 귀의했다. 카이사르는 한동안 머뭇거리며 여기저기 찔러보아가, 이를 불쌍히 여긴 아레스와 아프로디테가 불러주었다. 트라야누스는 잽싸게 알렉산드로스에게 가서 근처에 앉았다. / 번역: 최광민

As for Constantinus, he could not discover among the gods the model of his own career, but when he caught sight of Pleasure, who was not far off, he ran to her. She received him tenderly and embraced him, then after dressing him in raiment of many colours and otherwise making him beautiful, she led him away to Incontinence. There too he found Jesus, who had taken up his abode with her and cried aloud to all comers: "He that is a seducer, he that is a murderer, he that is sacrilegious and infamous, let him approach without fear! For with this water will I wash him and will straightway make him clean. And though he should be guilty of those same sins a second time, let him but smite his breast and beat his head and I will make him clean again." To him Constantinus came gladly, when he had conducted his sons forth from the assembly of the gods. But the avenging deities none the less punished both him and them for their impiety, and extracted the penalty for the shedding of the blood of their kindred, until Zeus granted them a respite for the sake of Claudius and Constantius.

그 자신의 경력의 롤모델이 된 신들을 찾을 수가 없었던 콘스탄티누스는 "쾌락"의 여신을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하고 그녀에게로 갔다. 그녀는 그를 부드럽게 맞아 안아주었고 알록달록한 색의 옷을 그에게 입혀 단장시킨 후 다시 "방종"의 신에게 보냈다. 콘스탄티누스는 거기에서 여신과 함께 자리를 잡고 있던 예수도 발견했는데, 그 그리로 오는 자들에게 큰 소리를 외치고 있었다. "사기꾼, 살인자, 불경하고 악독한 자들은 두려움 없이 오라! 이 물로 내가 씻어주어 당장 깨끗하게 하리라. 다음 번에 똑같은 죄를 지어도, 그냥 가슴과 머리를 치면 나는 그들 또 다시 깨끗하게 하리라!". 콘스탄티우스의 경우 아들들은 신들에게로 보냈지만 본인은 기쁜 마음으로 예수에게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수의 신들은 그와 그의 아들들을 불경함을 이유로 징벌하였는데, 제우스가 클라우디우스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덕에 유예를 내릴 때까지 혈족 간에 유혈사태에 대한 벌을 내렸다.  / 번역: 최광민

"As for you", Hermes said to me, "I have granted you the knowledge of your father Mithras. Keep his commandments, and thus secure for yourself a cable and sure anchorage throughout your life, and when you must depart from the world you can with good hopes adopt him as your guardian god." and sure anchorage throughout thy life, and when thou must depart from the world that canst with good hopes adopt him as thy guardian god."

헤르메스가 나에게 (=율리아누스) 말했다. "너에게는 너의 아버지 미트라스에 대한 지식을 주겠다. 그의 계명을 지키고 네 일생 동안 너 자신을 밧줄과 닻으로 단단히 붙들도록 하거라. 네가 세상을 떠날 때, 너는 그 (미트라스)를 네 수호신으로 삼게 될 희망을 갖게 될 것이다." / 번역: 최광민

--- {The works of the Emperor Julian, The Caesars} -- tr. Wilmer Cave France Wright / 율리아누스 황제, {황제들} -- 영문에서 번역: 최광민

댄 브라운은 그의 놀랄만큼 성공작인 이 "팩션"을 쓰기 위해 많은 "픽션"을 도입했는데, "픽션"을 소설이니 그렇다치고 "팩션"의 한 축이자 "사실"이어야 할 "팩트"들이 당시의 사료와 상당히 어긋나니 그의 "팩션"은 이중으로 '허구'인 셈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시대의 독자들은 지루한 역사책을 읽느니 그저 소설책에 만족할 뿐.

판단은 각자의 몫.

草人

Scientist. Husband. Daddy. --- TOLLE. 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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