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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tist. Husband. Daddy. --- TOLLE. 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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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히브리 vs. 근동 설화 #1: 수메르 대홍수 설화와 "충격으로 미쳐 날뛴" 조지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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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Kwangmin Choi, 2011-05-20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글들에 대해 저자의 동의없는 전문복제/배포 -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를 금하며, 인용 시 글의 URL 링크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 최광민] 히브리 vs. 근동 설화 #1: 수메르 대홍수 설화와 "충격으로 미쳐 날뛴" 조지 스미스?

순서
  1. 조지 스미스
    1. 미쳐 날뛴 조지 스미스?
    2. 좋아 날뛴 조지 스미스.
  2. 기독교계의 충격과 공포?
    1. 그리스어 전승: 베로소스, 폴리히스토르, 아비데노스, 유세비우스, 신켈로스
    2. 표절의 "결정적" 증거?
  3. 맺음말

§ 조지 스미스

§§ "미쳐 날뛴" 조지 스미스?

한 블로거로부터 아래와 같은 내용에 대해 답해보라는 이메일을 받았다. 이 진술들의 원 출처가 어디인지는 잘 확인이 안되어, 구글검색 링크로 대신하도록 하겠다.


조지 스미스가 해독한 {길가메쉬 서사시}의 홍수설화 대목을 담은 점토판 K3375 --- 출처: Wikimedia Commons

"......1851 년에 발굴된 고대석판은 여기에 더 명확한 증거를 제시했다. 고대 바빌로니아어로 기록된 이 석판은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이십여년간을 대영박물관의 지하창고에 묵혀 있어야 했는데, 나중에 조지 스미스라는 사람이 석판의 내용을 해독하게 된다. 그는 석판의 내용을 읽고 나서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는데, 자신의 밝혀낸 내용이 성경의 내용과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그 석판이 바로 길가메쉬 서사시다..." --- 출처링크: {노아의 방주에 관한 4가지 미스테리}

.....노아의 홍수 사건은 수메르인들이 성경보다 더 앞선 시대에 기록한 '길가메쉬 서사시' 내용을 고스란히 차용한 것이다. 노아의 홍수뿐만이 아니라 에덴동산이나 천지창조, 바벨탑 이야기까지 성경에 기록된 각종 사건들이 길가메쉬 서사시에 기록된 내용과 너무나 똑같아서 길가메쉬 서사시가 적힌 점토판을 처음 해독한 조지 스미스란 사람은 발작에 가까울 정도로 미쳐 날뛰었다고 한다...." --- 출처링크: {혈액형별 성격론과 종교}

이 내용을 읽는 독자들은 아마도 {길가메쉬 서사시}의 홍수설화 내용을 처음 발견/해독한 앗시리아학 연구자 조지 스미스가 {길가메쉬 점토판}과 {창세기}의 내용이 너무 동일한데 충격을 받아서 저런 행동을 보였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런데 대동소이한 위의 두 진술들은, George Smith가 {길가메쉬 서사시}의 홍수설화를 담은 점토판을 해독한 후 왜 저런 반응을 보였는지의 맥락을 정말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조지 스미스의 저 일화는 같은 대영박물관에서 중근동학 연구자로 근무했던 Sir. Ernst Wallis Budge의 1925년도 책 {Rise and Progress of Assyriology, 앗시리아학의 서막과 발전}에 소개된 일화다. 1872년 11월에 있었던 스미스의 소위 "광란"의 전후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일단 벗지의 책에서 해당부분의 전문을 읽어보도록 하자. 일부 번역했다. (번역: 최광민)




E A Wallis Budge, {Rise and Progress of Assyriology}
https://archive.org/details/RiseAndProgressOfAssyriologyByEAWallisBudge

.....cool distilled water for several days at a time. Thereupon the " blooming " ceased, and both the bowls and the inscriptions on them were saved. Ready then took in hand several fragments of the baked clay tablets from Kuyunjik, which Norris had been trying to copy "; and by some means, which he did not divulge, he brought them back clean, with every character legible.

He also cleaned successfully many unbaked Babylonian tablets, and found the way to remove from them the patches of hard crystalline deposit without damaging the inscriptions. Meanwhile other officers in the Museum discovered Ready's value in cleaning and repairing miscellaneous antiquities, and by them more work was heaped upon him than he could possibly do. His skill in putting together pottery vases of all kinds was marvellous ; and many of the British urns and other vessels are as firm to-day as when he handed them back to the Departments to which they belonged. On looking back and considering the large number of tablets that he cleaned, it is clear that the debt Assyriologists owe to this silent and unrecognized worker on their behalf is very great.

레디는 또 구워지지 않은 바빌로니아 점토판도 성공적으로 세척에 성공했고, 새겨진 글자에 손상이 가지 않게 결정질의 퇴적물을 제거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유물의 세척이라든지 수리 같은 일에 레디의 가치를 발견한 박물관 연구관들이 그에게 더 많은 일을 맡기게 되었는데, 그래서 레디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만큼의 일방석에 앉게 되었다. ..... --- 번역: 최광민

In the case of George Smith this was especially the case, as one instance will show. When he was examining the tablets of the Kuyunjik Collection and searching for portions of tablets inscribed with the story of the Deluge, he found that the large fragment now numbered K. 3375 contained an important part of the legend. One side of it was easily legible ; but the greater part of the other was covered with a thick whitish lime- like deposit, which resisted all his brushings and attempts to remove it. It happened that Ready was absent from the Museum on private business for several weeks, and there was no one else to whom Birch would allow the tablet to be given for cleaning. Smith was constitutionally a highly nervous, sensitive man ; and his irritation at Ready's absence knew no bounds.

조지 스미스에게 레디의 능력이 얼마나 각별했는지를 말해주는 한 사례가 있다. 조지 스미스가 쿠유닉 컬렉션의 점토판을 조사하며 홍수설화가 기록된 점토판을 찾고 있을때, 그는 현재 K3375라고 번호가 매겨진 큰 조각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 면은 쉽게 읽을 수 있었는데, 다른쪽 면은 석회질이 침전물처럼 두껍게 덮혀져 있었다. 그래서 스미스가 아무리 솔질을 해서 제거하려고 해도 벗겨낼 수가 없었다. 마침 그 무렵 레디는 사적인 일로 몇 주간 박물관에 출근하지 않고 있었는데, 박물관에는 레디 이외에 점토판의 세척을 (분과 디렉터 겸 이집트학 학자 --- 필자 주) 버치에게서 허용받은 직원이 없었다. 스미스는 항상 몹시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사람이었다. 레디가 없는 동안 그의 짜증은 하늘을 찌를듯 했다. --- 번역: 최광민

He thought that the tablet ought to supply a very important part of the legend ; and his impatience to verify his theory produced in him an almost incredible state of mental excitement, which grew greater as the days passed. At length Ready returned, and the tablet was given to him to clean.

그는 점토판이 전설의 아주 중요한 부분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 이론을 입증하고 싶어하는 조급한 마음 탓에 그는 점점 거의 미칠 지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드디어 레디가 돌아왔고, 점토판의 세척과정이 다시 레디에게 맡겨졌다. --- 번역: 최광민

When he saw the large size of the patch of deposit, he said that he would do his best with it, but was not, apparently, very sanguine as to results. A few days later, he took back the tablet, which he had succeeded in bringing into the state in which it now is, and gave it to Smith, who was then working with Rawlinson in the room above the Secretary's Office.

점토판에 붙어있는 이물질들이 얼마나 큰 지를 살펴 본 레디는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결과를 아주 장담하지는 못했다. 며칠이 지나, 레디는 점토판을 아주 성공적으로 현재보는 상태로 복원해서 비서 사무실 위에 있는 방에서  (앗시리아 설형문자 전문가 --- 필자 주) 로울린슨과 일하고 있던 스미스에게 가져다 주었다. --- 번역: 최광민

Smith took the tablet and began to read over the lines which Ready had brought to light ; and when he saw that they contained the portion of the legend he had hoped to find there, he said, " I am the first man to read that after more than two thousand years of oblivion." Setting the tablet on the table, he jumped up and rushed about the room in a great state of excitement, and, to the astonishment of those present, began to undress himself !

스미스는 그 점토판을 받아들고 몇 줄을 읽기 시작했고 레디가 조명을 가져다 주었다. 스미스는 자기가 기대했던 전설의 부분을 찾아내고나서, "저는 2천년 이상 잊혀졌던 글을 처음으로 읽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점토판을 책상에 가지런히 놓은 후, 그는 몹시 흥분해서 펄쩍펄쩍 뛰면서 방을 뛰어다녔다. 그리고는 옷을 주섬주섬 벗기 시작해서 거기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 번역: 최광민

조지 스미스는 {창세기}와 {길가메쉬 서사시}에 등장하는 두 홍수설화가 (1) "너무 똑같은데" 충격을 받아" (2) "미쳐 날뛰었"는가?




§§ "좋아 날뛴" 조지 스미스

물론 그는 "날뛰었다".  단, "충격으로 미쳐" 날뛴 것이 아니라, "너무나 좋아서" 날뛴 것이다.

조지 스미스는 도대체 왜 저토록 흥분했던 것일까?  그것은 1872년 당시 32살이었던 조지 스미스의 개인사를 확인해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당시 앗시리아학은 신생학문으로서 영국 인문학계에서 다소 특이한 위치에 있었다. 이 분야는 설령 학벌이 낮더라도 명민한 두뇌만 있으면 보수적/귀족적/배타적인 인문학계에 진입할 수 있는 길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일단 진입하더라도 이 분야의 정규직을 찾기는 하늘에 별따기였다.

조지 스미스는 작업에 참여한 연구자들 가운데서도 좀 특이한 경력의 인물이었다. 런던 출신인 그의 공식교육은 14세에 끝났고, 이후 스미스는 은행어음 양각인쇄공으로 인쇄소에서 일했다. 고대역사에 강한 흥미를 가지게 된 그는 20세이던 1860년 대영박물관에서 비정규직원으로 새로운 경력을 시작했다. 예리한 눈썰미가 요구되는 인쇄공으로서의 경험은 점토판 조각들에 설형문자로 새겨진 파편화된 메시지를 재구성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앗시리아 설형문자 전문가인 Rawlinson (이하, 로울린슨)은 점토판 조각을 맞추는 스미스의 능력에 주목했고, 스미스를 점토판 조각을 맞추는 단순직업을 담당하는 정식직원으로 고용해 줄 것을 박물관에 강력히 건의했다.  벗지는 이 직업에 대해 "스미스는 목수장이나 석공장이 받는 것보다도 못한 임금을 받으며 수 년간 노예처럼 일했다"라고 적었다.

스미스는 앗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에서 발굴되어 대영박물관에 보내진 점토판들과 씨름하고 있었다. 기원전 7-8세기의 앗시리아 유물인 이 점토판들은 대영박물관에서 그동안 조각들을 맞춰가면서 조금씩 번역되어가고 있었다. 스미스는 이 기회를 통해 설형문자를 해독하는 기술을 배워나갔고, 1860년대에는 첫 "학문적인 발견"을 하게 된다. 그것은 앗시리아 인각 유물 속에서 고대 이스라엘 군주들의 이름을 찾아냄으로써 성서고고학의 연표를 보다 정밀하게 만든 것이다. 이 발견을 바탕으로 스미스는 1866년 첫 논문을 발표하는데, 그의 후원자인 로울린슨은 다시 박물관의 이사회에 강력건의해서 스미스를 자신이 담당하고 있던 학술지 {Cuneiform Inscriptions}의 편집조수로 고용해달라고 요청한다. 이를 통해 스미스는 1867년 비로소 공식적인 학계에 들어서게 된다.



이제 스미스는 "진짜" 고고학자, 즉 발굴전문의 현장고고학자가 되고싶은 열망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박물관 이사회는 대영박물관이 이미 충분한 앗시리아/바빌로니아 유물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유물의 분류/분석이 우선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스미스가 발굴원정단에 참여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낮은 임금으로 많은 가족을 부양하던 스미스는 자비로 발굴단을 조직할 수도 없었다.

1872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그는 영국정부가 "어떤 대단한 발견이 있기 전까지는 한 푼도 주지 않을 것 Government will not assist the movement in the least, at present, in fact I think they will not give a penny until something is discovered."이라고 절망적으로 푸념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스미스는 박물관에 아직 제대로 분류/분석되어 있지 않은 유물들을 - 특별히 그가 하고 있던 {구약성서}의 내용들과 아마도 관련된 자료들 - 을 샅샅히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1872년 가을, 그는 큐우닉 컬렉션 중 K3375로 분류된 한 점토판 속에서 홍수, 산 위에 정박한 방주, 마른 땅을 찾아 날려보낸 새들과 관련된 몇몇 단어와 마주치게 되었고, 위의 벗지의 책이 설명한 바대로, 복원전문가 로버트 레디의 도움으로 그해 11월 드디어 {길가메쉬 서사시}의 홍수설화를 해독하게 된다. (사실 조지 스미스는 "길가메쉬"의 발음을 "Izdubar 이즈두바르"로 읽었었다. 그 이유는 같은 설형문자가 아카드어와 수메르어에서 다른 음가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고, 표기는 아카드어지만 음가는 수메르어인 경우가 있다는 것을 당시에는 몰랐기 때문이다. 즉, 조지 스미드가 아카드어 "iz"와 "du"라고 읽었던 음가는 사실은 수메르어 음가인 "gis-ga / gil-ga"였던 것이다.)

1872년 12월 3일, 스미스는 성서고고학회 (Biblical Archaeology Society)에서 공개강의를 하게 된다. 이 날의 강의는 유대인이자 당시 총리였던 글래드스턴이 참석할 정도로 국가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편집인 에드윈 아놀드는 천 기니의 기금을 발굴기금으로 그 자리에서 쾌척했다. 하지만 영국정부는 발굴지원을 약속하지 않았다.

1873년 3월 2일, 마침내 스미스는 그가 꿈꾸던 앗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의 유적 위에 서게 된다. 여기서 그는 {길가메쉬 서사시}보다 더 오래된 또 다른 홍수설화의 유물들을 발견했다.


Smith, George, 1840-1876; Sayce, A. H. (Archibald Henry), 1845-1933, {The Chaldean Account of Genesis: Containing the Description of the Creation, the Fall of Man, the Deluge, the Tower of Babel, the Times of the Patriarchs, and Nimrod; Babylonian Fables, and Legends of the Gods; from the Cuneiform Inscriptions.} https://archive.org/details/chaldeanaccountcuneif00smit



K3375 점토판의 발견/해독은 스미스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그러니까 조지 스미스가 1872년 대영박물관의 한 소위 "미쳐 날뛴" (사실은 "좋아 날뛴") 행동은 2005년 톰 크루즈가 오프라 쇼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성격의 퍼포먼스라 보면 된다.



이 발견으로 32세의 스미스는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이미 세계적인 스타였던 44살의 톰 크루즈가 17세 연하의 처자를 만난 것만으로도 좋아서 저리 날뛰었는데, 32살의 별 볼일없는 경력을 가진, 그것도 7명의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무명의 한 가난한 연구자가 점토판을 받아들고나서 자신의 빛나는 미래를 직감했을때 그 기쁨이 어땠겠는가.

그러나 "좋아 날뛸" 때도 그는 정신줄을 놓지 않았다. 그 전에 우선 점토판 K3375을 책상에 안전하게 정리해 둔 후 뛰어다녔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스미스는 이 세기의 발견 후 4년 뒤인 1876년 제 2차 발굴탐사여행에서 감염성 장염에 걸려 36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의 인생의 정점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K3375는 그의 인생을 바꿔놓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의 삶은 너무나 빨리 거두어 간 촉매가 되기도 한 것이다.

조지 스미스의 삶과 {길가메쉬 서사시}를 비롯한 앗시리아학의 초기 발견에 관한 흥미진진한 뒷 이야기들에 대헤 읽어 본 최근 책으로는, 컬럼비아 대학교 영문학/비교문학 교수인 David Damrosche의 책 {The Buried Book: The Loss and Rediscovery of the Great Epic of Gilgamesh} 이 훌륭한 듯 싶다. 이 책은 그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대영박물관에 잠자고 있었던 조지 스미스의 많은 1차자료들을 공개하고 있다.


David Damrosch, {The Buried Book: The Loss and Rediscovery of the Great Epic of Gilgamesh}

일독을 권한다.




§ 기독교계의 충격?

§§ 그리스어 전승: 베로소스, 폴리히스토르, 아비데노스, 유세비우스, 신켈로스

한편, 스미스의 발견이 놀라운 고고학적 업적이긴 하지만, 바빌로니아의 홍수설화가 창세기의 그것과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은 {길가메쉬 서사시}가 대영박물관에서 처음 해독되기 이미 약 2000년 이전부터 역사가, 고전학자, 신학자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었다. 물론 스미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스미스는 전혀 새로운 (그래서 충격적인) "사실"을 처음 찾아낸 것이 아니라, 그동안 사본으로만 전해오던 바빌로니아 홍수설화가 기록된 원기록에 해당하는"유물"을 찾아낸 것이다. 이것이 조지 스미스의 발견이 가지는 고고학적 의미다.

예전에 어떤 방문자가 아래와 같은 내용을 이메일을 보내주셨다. 안티기독교 그룹에서 널리 무료배포되어 있는 {X-바이블 - 바이블의 진실} (이상훈 편저)라는 문건에서 인용된 것이었는데, '노아의 홍수' 항목을 전문인용해 보겠다.

이 글에서 다룰 내용은 붉은 색으로 하이라이트했다. 한번 읽어보자.

무료배포판 출처: http://xbible.com.ne.kr/3-01.htm


5) 노아의 홍수

구약성경의 노아의 홍수는 유태교나 기독교의 성서가 쓰이기 2000~3000년 전에 쓰인 수메르의 신화, 길가메시 敍事詩에서 따온 것이다. 구약성서의 저자가 살던 땅은 폭풍우나 홍수가 없는 지방이다. 성서의 대홍수 이야기가 성경을 편집한 유태인들의 독창적인 작품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이는 영국 국립박물관의 조지 스미스에 의해 바빌로니아의 서사시 {길가메시}의 열한 번째 점토판이 발견되고 판독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의 대홍수 신화도 사실은 수메르 {지우쑤드라의 홍수이야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홍수신화의 점토판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 기독교계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일신 여호와가 인류의 오만함을 징벌하기 위해 내린 노아의 대홍수가 사실상 타 민족(수메르) 신화의 복사판이라면 모세의 십계가 강조하고 있는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의 체면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모세와 연관된 것에까지 표절의 냄새가 풍기자 로마 교황청은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로마교황청은 어떤 곳인가? 교황을 필두로 한 수많은 성직자들이 완고함으로 무장한 보수의 발원지가 아니던가? 예컨대 멀리로는 地動說을 주장하는 갈릴레이를 이단으로 몰아 투옥하였고(1633년), 근세에는 1859년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하자 분개한 나머지 졸도한 성직자가 나올 정도였다. 교황청의 입장은 너무도 분명했다. 인간은 아담을 시조로 하여 창조된 것이며 결코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갈릴레이를 이단 심문에 회부했던 것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잘못한 처사'라고 사과한 것은 1983년의 일이다. 갈릴레이의 명예회복은 350년 만에 된 셈이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1996년 10월, 요한 바오로 2세는 놀랍게도 이렇게 공언했다. "인류의 조상은 아담이 아니라 역시 원숭이였다." 교황청은 바로 이런 곳이다.

그런데 조지 스미스가 발견하고 해독한 점토판은 {길가메시의 서사시}라 불리는 것으로서 고대 바빌로니아의 도시 우루크의 왕 길가메시의 놀라운 모험담을 기록한 것이었다. 이 서사시에 홍수 이야기가 들어 있는데, 여기서는 성경에 나오는 '여호와'가 '에아'로, '노아'가 '우트나피시팀'이라는 이름으로, '40일 낮 40일 밤'이 '7일 낮 7일 밤'으로, '방주는 7월 17일 아라랏 산에 머물렀다'는 내용은 '방주는 니실 산꼭대기에 머물렀다'로 되어 있을 뿐 기본 골격은 매우 비슷하다. 마지막 부분의 비둘기와 까마귀를 날려 보내서 육지를 확인하는 내용까지도 똑같다.

이러한 홍수 이야기는 수메르, 바빌론신화 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중국, 한국, 오스티악 족, 캄차달 족 등 중앙아시아의 알타이신화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중국의 요, 순과 고조선의 단군이 '9년 홍수'를 맞아 치수사업을 벌이는 이야기가 한국과 중국 고대사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최근 4천 년 전의 중국 漢나라 수도 유적 발굴에서는 홍수로 파괴된 흔적이 발굴되었다고 한다.(중국 고고학 잡지 {문물}) 그 당시에 홍수는 세계 도처에서 발생했으며, 유대민족은 이 홍수 이야기를 바빌론 포로 시절에 듣고서는 마치 자신들만이 겪은 것처럼,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수메르의 홍수 신화(지우쑤드라의 홍수이야기)의 모방인 바빌론의 홍수 신화(길가메시 서사시)로부터 차용해서 神의 섭리를 내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위에 언급한 {X-바이블 - 바이블의 진실} (이상훈 편저)이란 문건에 담긴 세가지 주장에 대해, 역사적이 자료해 기초해 내릴 수 있는 가장 정직한 결론부터 말하면 다음과 같다.

  1. {창세기}의 대홍수 이야기가 유대인 만의 "독창적 작품"이 아니며 바빌로니아의 홍수설화와 거의 똑같다는 사실은 조지 스미스의 K3375 해독을 통해서 비로소 처음 알려진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과 기독교도들은 그 설화가 자신들의 "독창적 작품"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을 뿐더러, 유대인과 기독교도들이 이 사실을 19세기 말까지 몰랐거나 은폐한 것도 아니다.
  2. 이 설화는 BC 3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거의 동시대인인 바빌로니아의 마르둑/벨 신관이었던 베로소스가 그리스어로 기록한 {칼데아의 역사}에 이미 자세히 언급되어 헬레니즘 세계에 알려져 몇몇 그리스 역사가의 글에 언급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AD 4세기 초에 카이사리아의 주교 유세비우스의 유명한 저작에 다시 인용되었다. 그래서 베로소스 버전의 바빌로니아 홍수설화를 후대에 전한 것이 다름 아닌 바로 "기독교도"였다. 유대인들과 기독교도들은 이들 내용을 은폐하기는 커녕, {창세기}의 설화가 수메르/바빌로니아의 그것과 "(거의) 동일하다"는 것들 보이기 위해 베로소스의 기록을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길가메쉬 서사시}의 홍수설화를 조지 스미스가 처음 발표했을 때, 기독교계는 파랗게 질린게 아니라 오히려 {창세기}의 내용과 유세비우스가 옮긴 베로소스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유물증거가 나왔다며 반색했다.
  3. 1996년 10월 26일 로마카톨릭 교황인 (이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청 산하 과학위원회에 보낸 메시지에서, 교황은 "인간의 조상은 아담이 아니라 역시 원숭이였다"라고 공언한 적이 전혀없다.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이 진술은 교황의 메시지 속에 담긴 교묘한 뉘앙스를 다소 오독한 결과이다. 별건으로 다루겠다.

이 점에 대해 우선 대영박물관의 Wallis Budge의 설명을 읽어보자. 그의 1921년 작 {The Babylonian Legends of Creation}에서 인용하겠다.


E.A. Wallis Budge, {The Babylonian Legends of Creation}

....Versions in Greek of the Legends found by George Smith had long been known to classical scholars, owing to the preservation of fragments of them in the works of later Greek writers, e.g., Eusebius, Syncellus, and others. The most important of these is derived from the History of Babylonia, which was written in Greek by BEROSUS, a priest of Bel-Marduk, i.e., the "Lord Marduk," at Babylon, about 250 B.C. In this work Berosus reproduced all the known historical facts and traditions derived from native sources which were current in his day. It is therefore not surprising to find that his account of the Babylonian beliefs about the origin of things corresponds very closely with that given in the cuneiform texts, and that it is of the greatest use in explaining and partly in expanding these texts...

....조지 스미스에 의해 발견된 전설의 그리스어 버전은 이미 오랫동안 고전학자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는데,  이는 후기 그리스어 저술가들이던 유세비우스, 신켈로스 등에 의해 부분적으로 보존되어 있었던 덕분이다. 이런 전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벨-마르둑 (=주님-마르둑)의 신관이었던 베로소스가 BC 250년 경에 저술한 {바빌로니아/칼데아 역사}에서 인용된 것들이 있다. 이 작품 속에서 베로소스는 그의 시대에 알려진 원 자료에세 근거한 모든 역사적 사실과 전통을 재구성했다. 그래서 베로소스가 전한 바빌로니아인들의 창조신앙의 내용과 설형문자 점토판에 새겨진 내용이 매우 유사하다는 점과, 이 텍스트들을 설명하고 내용을 증보하는데 매우 유용하다는 사실은,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 {The Babylonian Legends of Creation}, E. A. Wallis Budge, [1921] / 번역: 최광민



이 기록의 그리스어 단편을 재인용을 통해 후대에 최종적으로 전수한 인물이 누구였던가? 다름 아닌 서기 4세기에 활동한 카이사리아의 주교 유세비우스였다. 유세비우스는 이 내용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바빌로니아의 홍수설화가 {창세기}의 그것과 거의 동일하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이야기가 유세비우스에게까지 전수되는 과정에는 베로소스의 원작을 인용한 몇몇 그리스 역사가들의 저작들이 중요하다. 이들 그리스 역사가들은 서력 기원 이전의 인물들이었고 따라서 기독교도들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 이야기가 길가메슈 서사시 점토판의 발견과 함께 비로소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는 식의 이해는 사실에 적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유대교/기독교가 상기 내용을 2000년 간 억압해 왔다는 식의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사실 유세비우스는 바빌로니아의 홍수설화를 {창세기} 홍수설화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간주해서 이 자료를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카이사리아의 유세비우스가 {연대기} 5.8 에서 알렉산드로스 폴리히스토르의 {우주발생과 홍수에 관하여}를 재인용한 내용을 살펴보자. 폴리히스토르는 이 내용을 베로소스의 저작에서 인용해 왔다.

중근동의 홍수설화의 주인공들의 이름은 설화의 소스에 따라 다양하다. 즉 수메르어에서의 지우수드라, 아카드어에서의 아트라하시스 및 우트나피쉬팀, 히브리어의 노아를 들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의 베로소스가 바빌로니아/칼데아의 역사를 그리스어로 기록했을때, 그는 그가 전하는 홍수설화의 주인공을 Ξισουθρος 로 기록했는데, 이는 이 인물의 수메르식 이름으로 볼 수 있다. 베로소스는 그리스어권의 독자들을 위해 칼데아의 신들의 이름을 그리스 신화의 신들에 대응하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가령, 벨/마르둑은 크로노스가 된다.



유세비우스 (와 후대의 신켈로스)의 인용전문을 옮기고 필요한 부분은 번역하겠다. (번역: 최광민)

{FRAGMENTS OF CHALDÆAN HISTORY} by BEROSSUS:
FROM ALEXANDER POLYHISTOR, {THE COSMOGONY AND DELUGE}

BEROSSUS, in the first book of his history of Babylonia, informs us that he lived in the age of Alexander the son of Philip. And he mentions that there were written accounts, preserved at Babylon with the greatest care, comprehending a period of above fifteen myriads of years: and that these writings contained histories of the heaven and of the sea; of the birth of mankind; and of the kings, and of the memorable actions which they had achieved.

And in the first place he describes Babylonia as a country situated between the Tigris and the Euphrates: that it abounded with wheat, and barley, and ocrus, and sesame; and that in the lakes were produced the roots called gongre, which are fit for food, and in respect to nutriment similar to barley. That there were also palm trees and apples, and a variety of fruits; fish also and birds, both those which are merely of flight, and those which frequent the lakes. He adds, that those parts of the country which bordered upon Arabia, were without water, and barren; but that the parts which lay on the other side were both hilly and fertile.

At Babylon there was (in these times) a great resort of people of various nations, who inhabited Chaldæa, and lived in a lawless manner like the beasts of the field. In the first year there appeared, from that part of the Erythræan sea which borders upon Babylonia, an animal destitute1 of reason, by name Oannes, whose whole body (according to the account of Apollodorus) was that of a fish; that under the fish's head he had another head, with feet also below, similar to those of a man, subjoined to the fish's tail. His voice too, and language, was articulate and human; and a representation of him is preserved even to this day.

This Being was accustomed to pass the day among men; but took no food at that season; and he gave them an insight into letters and sciences, and arts of every kind. He taught them to construct cities, to found temples, to compile laws, and explained to them the principles of geometrical knowledge. He made them distinguish the seeds of the earth, and shewed them how to collect the fruits; in short, he instructed them in every thing which could tend to soften manners and humanize their lives. From that time, nothing material has been added by way of improvement to his instructions. And when the sun had set, this Being Oannes, retired again into the sea, and passed the night in the deep; for he was amphibious. After this there appeared other animals like Oannes, of which Berossus proposes to give an account when he comes to the history of the kings. Moreover Oannes wrote concerning the generation of mankind; and of their civil polity; and the following is the purport of what he said:

"There was a time in which there existed nothing but darkness and an abyss of waters, wherein resided most hideous beings, which were produced of a two-fold principle. There appeared men, some of whom were furnished with two wings, others with four, and with two faces. They had one body but two heads: the one that of a man, the other of a woman: and likewise in their several organs both male and female. Other human figures were to be seen with the legs and horns of goats: some had horses' feet: while others united the hind quarters of a horse with the body of a man, resembling in shape the hippocentaurs. Bulls likewise were bred there with the heads of men; and dogs with fourfold bodies, terminated in their extremities with the tails of fishes: horses also with the heads of dogs: men too and other animals, with the heads and bodies of horses and the tails of fishes. In short, there were creatures in which were combined the limbs of every species of animals. In addition to these, fishes, reptiles, serpents, with other monstrous animals, which assumed each other's shape and countenance. Of all which were preserved delineations in the temple of Belus at Babylon.

The person, who presided over them, was a woman named Omoroca; which in the Chaldæan language is Thalatth;2 in Greek Thalassa, the sea; but which might equally be interpreted the Moon. All things being in this situation, Belus came, and cut the woman asunder: and of one half of her he formed the earth, and of the other half the heavens; and at the same time destroyed the animals within her.3 All this (he says) was an allegorical description of nature. For, the whole universe consisting of moisture, and animals being continually generated therein, the deity above-mentioned took off his own head: upon which the other gods mixed the blood, as it gushed out, with the earth; and from thence were formed men. On this account it is that they are rational, and partake of divine knowledge. This Belus, by whom they signify Jupiter,4 divided the darkness, and separated the Heavens from the Earth, and reduced universe to order. But the animals, not being able to bear the prevalence of light, died. Belus upon this, seeing a vast space unoccupied, though by nature fruitful, commanded one of the gods to take off his head, and to mix the blood with the earth; and from thence to form other men and animals, which should be capable of bearing the air.5 Belus formed also the stars, and the sun, and the moon, and the five planets. (Such, according to Polyhistor Alexander, is the account which Berossus gives in his first book.)

(In the second book was contained the history of the ten kings of the Chaldæans, and the periods of the continuance of each reign, which consisted collectively of an hundred and twenty sari, or four hundred and thirty-two thousand years; reaching to the time of the Deluge. For Alexander, enumerating the kings from the writings of the Chaldæans, after the ninth Ardates, proceeds to the tenth, who is called by them Xisuthrus, in this manner:)

After the death of Ardates, his son Xisuthrus reigned eighteen sari. In his time happened a great Deluge; the history of which is thus described. The Deity, Cronus, appeared to him in a vision, and warned him that upon the fifteenth day of the month Dæsius there would be a flood, by which mankind would be destroyed. He therefore enjoined him to write a history of the beginning, procedure, and conclusion of all things; and to bury it in the city of the Sun at Sippara; and to build a vessel, and take with him into it his friends and relations; and to convey on board every thing necessary to sustain life, together with all the different animals; both birds and quadrupeds, and trust himself fearlessly to the deep. Having asked the Deity, whither he was to sail? he was answered, "To the Gods:" upon which he offered up a prayer for the good of mankind. He then obeyed the divine admonition: and built a vessel five stadia in length, and two in breadth. Into this he put every thing which he had prepared; and last of all conveyed into it his wife, his children, and his friends.

아르다테스 왕이 죽은 후, 그의 아들 크시수트로스가 18사리 동안 통치했다. 그가 통치하던 때 대홍수가 있었다. 그 역사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크로노스는 환상 가운데 크시수트로스에게 나타나서 대시오스 달 15일에 홍수가 있을 것이며 그로 인해 인류가 멸망하리라고 알려줬다. 크로노스는 그에게 역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해서 시파라에 있는 태양의 도시에 파묻어 둘 것과 배를 만들 것을 지시한 후, 크리수트로스와 그의 친구과 가족들을 배에 태우고 모든 동물 - 새들과 네발짐승들 - 및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배에 실었다. 깊은 바다까지라도 두려움 없이 갈 수 있을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그가 크로노스에게 어디로 가야할지 물었을때 "신들에게로"라는 답을 받고, 거기서 그는 인류를 위해 신들에게 기도를 바쳤다. 신들의 충고에 따라 그는 길이 500 스타디아, 폭 2 스타디아의 배를 건조하고 그 안에 그가 준비한 모든 것을 실었다. 맨 마지막에는 그의 아내와 자식들과 친구들을 태웠다. --- 번역: 최광민

After the flood had been upon the earth, and was in time abated, Xisuthrus sent out birds from the vessel; which, not finding any food, nor any place whereupon they might rest their feet, returned to him again. After an interval of some days, he sent them forth a second time; and they now returned with their feet tinged with mud. He made a trial a third time with these birds; but they returned to him no more: from whence he judged that the surface of the earth had appeared above the waters. He therefore made an opening in the vessel, and upon looking out found that it was stranded upon the side of some mountain; upon which he immediately quitted it with his wife, his daughter, and the pilot. Xisuthrus then paid his adoration to the earth: and having constructed an altar, offered sacrifices to the gods, and, with those who had come out of the vessel with him, disappeared.

홍수가 땅을 휩쓸고 지나간 후, 크시수트로스는 배에서 새들을 날려보냈다. 그러나 새들은 먹이도 쉴 곳도 찾지못해 배로 돌아왔다. 며칠이 지난 후, 그는 두번째로 새들을 날려보냈는데 새들은 발에 진흙을 묻힌 채 돌아왔다. 세번째 시도에서 새들은 마침내 배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땅의 표면이 드러났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는 배의 문을 열고 둘러보았는데, 배는 어떤 산의 측면에 닿아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아내와 딸들과 항해사들 데리고 나와 땅에 경의를 표한 후, 제단을 쌓고 그들과 함께 신들에게 제물을 바쳤다. 그리고는 사라졌다. --- 번역: 최광민

They, who remained within, finding that their companions did not return, quitted the vessel with many lamentations, and called continually on the name of Xisuthrus. Him they saw no more; but they could distinguish his voice in the air, and could hear him admonish them to pay due regard to religion; and likewise informed them that it was upon account of his piety that he was translated to live with the gods; that his wife and daughter, and the pilot, had obtained the same honour. To this he added, that they should return to Babylonia; and, as it was ordained, search for the writings at Sippara, which they were to make known to all mankind: moreover that the place, wherein they then were, was the land of Armenia. The rest having heard these words, offered sacrifices to the gods; and taking a circuit, journeyed towards Babylonia.

The vessel being thus stranded in Armenia, some part of it yet remains in the Corcyræan7 mountains of Armenia; and the people scrape off the bitumen, with which it had been outwardly coated, and make use of it by way of an alexipharmic and amulet. And when they returned to Babylon, and had found the writings at Sippara, they built cities, and erected temples: and Babylon was thus inhabited again.—Syncel. Chron. 28.—Euseb. Chron. 5. 8.




§§ 표절의 결정적 증거?

조지 스미스의 발견이 대중에게 알려졌을 때, {창세기}의 내용이 바빌로니아 홍수설화를 "표절"한 것이란 결정적이고 압도적 증거로 받아들여졌을까? 그래서 기독교계는"긴장"하고 "파랗게 질렸"을까?

글쎄, 사실 반응은 정확히 둘로 갈렸다. 보수 기독교계는 마치 요세푸스와 유세비우스가 베로소스의 기록을 인용할때 그랬던 것처럼 이 발견을 {창세기}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확신했다. 반면 (문서비평에 강력한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기독교계와 비-기독교계는 똑같은 발견을 {창세기}의 "차용 혹은 표절을 입증"하는 증거로 확신했다.

공식발표가 있은 1872년 12일 직후부터 이 양 측은 설교, 기사, 사설 등을 통해 격한 논쟁을 시작했다.  가령, 대서양 건너 {New York Times}의 1872년 12월 22일 1면 기사를 살펴보자. 조지 스미스의 [성서고고학회] 공개강연 직후의 상황을 담고 있다.

"....this discovery is evidently destined to excite a libely controversy. For the present the orthodox people are in great delight, and are very much prepossessed by the corroboration which it affords to Biblical history. It is possible, however, as has been pointed out, that the Chaldean inscription, if genuine, may be regarded as a confirmation of the statement that there are various traditions of the deluge apart from the Biblical one, which is perhaps legendary like the rest..."

"... 이 발견은 반드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현재, 정통파/보수파 기독교도들은 몹시 기뻐하고 있으며, 이 발견이 성서의 역사적 내용을 뒷받침해 준다는 생각에 푹 빠져 있다. 그러나 이미 예전에 지적되었던 바대로, 이 발견이 진짜라면 이 칼데아 문건은 성서의 홍수설화와 다른 다양한 버전의  (아마도 전설적인) 전통들이 존재한다는 주장에 대한 확인으로도 여겨질 수 있다..." --- 번역: 최광민

앞서 언급했다시피 {길가메쉬 서사시}의 홍수설화가 발표된 후, 보수파 기독교도들은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쾌재를 불렀다. 유대인들은 {창세기}의 기술에 따라 자신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출신지를 수메르 지역의 도시국가 우르로 믿기 때문에 {창세기}의 진술과 칼데아의 설화가 유사한 것이 매우 "당연하다"하고 여길 것이다. 반대로 {창세기}를 포함한 대부분의 {구약성서} 문서들이 이스라엘/유대인들이 앗시리아/바빌로니아에 패망한 후에 기록/첨삭되었다는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에겐 "차용/표절이론"이 타당하게 여겨질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주장은 {창세기}의 문서 작성시점과 전승의 정확성에 대한 결론이 나지 않으면 쌍방 간 공허한 논쟁이 될 뿐이다.


§ 맺음말

이것이 조지 스미스의 발견 전후를 둘러싼 역사적 "사실"이다. 이 글에서 소개한 자료들을 통해 그동안 인터넷 상에서 잘못 유포되어 온 일부 주장들의 오류가 충분히 교정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어떤 주장을 하기위해,
굳이 사실을 왜곡할 필요까지는 없다.

판단은 각자의 몫.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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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tist. Husband. Daddy. --- TOLLE. 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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