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entist. Husband. Daddy. --- TOLLE. LEGE
외부자료의 인용에 있어 대한민국 저작권법(28조)과 U.S. Copyright Act (17 USC. §107)에 정의된 "저작권물의 공정한 이용원칙 | the U.S. fair use doctrine" 을 따릅니다.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모든 글과 번역문들에 대해 (1) 복제-배포, (2) 임의수정 및 자의적 본문 발췌, (3) 무단배포를 위한 화면캡처를 금하며, (4) 인용 시 URL 주소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후원 | 운영] [대문으로] [방명록] [(구)방명록]
블로그 내부검색
[© 최광민] 바울은 {호세아} 6:2를 임의로 왜곡해 "3일째 부활"의 개념을 유도했을까?
라벨:
비교신화/종교
이메일로 전송BlogThis!X에 공유Facebook에서 공유
작성
© 草人 최광민 2025-12-30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글들에 대해 저자의 동의없는 전문복제/배포 -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를 금하며, 인용 시 글의 URL 링크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 최광민] 바울은 {호세아} 6:2를 임의로 왜곡해 "3일째 부활"의 개념을 유도했을까?
순서
- 비판 (이병태)
- 바울의 {고린도전서} 15장 전문
- 예수의 "요나의 표징"과 {시편} 22편
- {이사야} 53장: 고난의 종 = 예수
- {이사야} 53장에 대한 중세기 이전 유대교의 해석: {탈굼}, {탈무드}, {미드라쉬}: 고난의 종 = 메시아
- {호세아} 6:2 본문
- {호세아} 6:2가 "3일째" 부활이라 해석한 교부들
- {호세아} 6:2를 "3일째" 부활이 아니라 해석한 교부들
- 마르틴 루터 vs 장 칼뱅
- 정리: 톨레. 레게.
_fol._79v_1_Cor_2,_11%E2%80%933,_5%20(1).jpg)
# 질문 (구사)
*** [최광민] 이 글에서 다룰 내용은 붉은 색으로 하이라이트 함.
성서를 비판적으로 세심하게 분석하고 읽어 본 사람들은 기독교의 교리를 대부분 뼈대를 만든 자칭 사도 바울이 얼마나 궤변론자(詭辯論者)인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4절에서 "성경(구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언급했을 때, 학자들은 바울이 염두에 둔 가장 유력한 '성경' 구절로 호세아 6장 2절을 꼽는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세아6:2)...배경의 이해 없이 보면 바울의 주장처럼 예수의 삼 일만의 부활을 예언한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호세아 선지자(BC 8세기)가 활동하던 당시,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위협 속에 있었고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영적으로 타락해 있었다고 호세아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호세아 본문의 '우리'는 메시아 한 사람(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받아 상처 입은 이스라엘 공동체(북이스라엘/에브라임)를 지적하는 글이다.
여기서 "살리시며", "일으키시리니"는 죽은 시체가 무덤에서 나오는 생물학적 부활이 아니다. 이는 전쟁이나 재난으로 인해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인 국가적 위기에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회복되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히브리 문학(구약)에서 "이틀 후"와 "셋째 날"이라는 표현은 숫자 2와 3을 나열하여 "아주 짧은 시간 내에" 혹은 "속히"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시적 관용구다. 즉, 하나님이 징계하시더라도 우리가 회개하면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기대감을 나타낸 글이다.
바울은 이글을 삼일만에 예수 부활을 구약이 예언한 것으로 원래 문맥과는 전혀 다르게 인용하는 해석으로 자신의 신학을 만들어 낸다.
상당수 구약학자들은 호세아 6:1-3의 고백이 호세아 선지자의 진심 어린 권면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피상적이고 가벼운 회개를 풍자하는 말이라고 본다.
근거는 바로 이어지는 6장 4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탄식한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돌아가자! 그러면 금방 낫게 해주시겠지(이틀 뒤, 삼일 째)"라고 가볍게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런 '값싼 회개'를 거부하신다는 문맥이다. 즉, 원래 본문은 "하나님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백성들의 안일한 태도"를 보여주는 구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성서학자들의 해석이다.
바울은 해당 구절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다음 문장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결론적으로,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징계를 받아도 하나님이 속히(3일쯤에)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다소 안일할 수도 있는) 기대를 말했지만, 바울은 이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예수를 문자 그대로 3일 만에 다시 살리심으로써, 참된 회복을 시작하셨다"는 구속사적 성취로 재해석했다. 그럴싸한 문장만 찾으면 족했던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해석을 미드라쉬(Midrash)와 페셰르(Pesher)라는 성서의 해석에 관한 기본 개념들에 근거하고 있다. 과거 (특히 종교적) 글들을 읽을 때 현대의 역사적-문법적 해석(원저자의 의도 파악)과는 다른 두 가지 주요 방식이다.
A. 미드라쉬 (Midrash): "현재적 의미 찾기"는 히브리어 동사 '다라쉬(darash, 찾다/구하다)'에서 유래했다. 고대 텍스트의 틈을 메우거나, 현재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여 적용하는 방식이다.
문맥을 넘어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거나, 숨겨진 영적 의미를 캐낸다는 것이다. 예를 보자. (갈라디아서 4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내 사라와 하갈 이야기를 인용하며 이를 "이것은 비유(Allegory)니"라고 선언한다. 그는 하갈을 '시내산 율법'으로, 사라를 '자유 있는 예루살렘(복음)'으로 재해석한다. 이는 창세기의 원래 문맥과는 전혀 다른 해석이다.
B. 페셰르 (Pesher): "이것이 곧 그것이다 (This is That) '페셰르'는 '해석' 또는 '꿈의 풀이'라는 뜻으로, 특히 쿰란 공동체(사해 사본)와 초기 기독교가 즐겨 사용한 종말론적 해석법이다.
이 해석법의 핵심 원리는 다음과 같다.
1. 구약 예언자들은 자신이 쓴 글의 '진정한 의미(비밀, Mysterion)'를 몰랐다.
2. 이 비밀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세우신 '의의 교사'나 '메시아'를 통해서만 풀린다.
3. 따라서 구약의 텍스트는 "지금 우리 공동체에서 일어난 이 사건"을 예언한 것이다.
바울에게 호세아 6장은 단순한 이스라엘의 회복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텍스트는 수백 년간 '봉인된 비밀'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 '페셰르(진정한 의미)'가 드러났다고 본 것이다. 어떻게? 성층권을 뚫고 그 위의 천국을 다녀온 본인에게 신이 직접 계시를 통해 밝혀준 진리라고 주장한다.
날카로운 지적이다.
하지만 이 비판은 일종의 "허수아비 공격" 오류에 가깝다. 공격의 목표는 바울이라기 보다는, {호세아} 6:2를 주석한 후대의 기독교 신학자/주석가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 바울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 바울의 {고린도전서} 15장 전문
바울은 1세대 기독교 복음의 핵심요소, 즉 예수의 대속적 죽음과 3일째 부활이란 (1) "복음", 그리고 사도들과 제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부활한 예수를 목격한 (2) "증언"을 코린트의 기독교도들에게 보낸 첫번째 서신의 첫 1장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을 일깨워 드립니다. 여러분은 그 복음을 전해 받았으며, 또한 그 안에 서 있습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복음으로 전해드린 말씀을 헛되이 믿지 않고, 그것을 굳게 잡고 있으면, 그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도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3 나도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4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5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6 그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세상을 떠났지만, 대다수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7 다음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8 그런데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9 나는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사도입니다. 나는 사도라고 불릴 만한 자격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1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할 것 없이, 우리는 이렇게 전파하고 있으며, 여러분은 이렇게 믿었습니다.
그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 무덤에 묻히셨다
- (성서에) 기록된 대로 3일째 부활했다.
- 게바/베드로에게,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났다
-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났다
- 다음에 야고보에게 나타났다
- 그 다음에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났다.
- 마지막으로 바울에게도 나타났다.
여기서 맨 마지막 바울 본인의 이야기를 뺀 앞의 모든 진술들은 바울이 아직 유대교도 시절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자신이 경험한 1차경험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활동했던 사도들과 다른 1세대 기독교도들의 전승을 바울 "여기 전해 받아 전한 ὃ καὶ παρέλαβο" 것이다. 아예 본인이 그렇게 적었다.
여기서 "κατὰ τὰς γραφάς· 기록된 대로"라고 쓴 부분은 바울이 임의로 {구약성서}의 구절을 찾아보고 자신의 관점을 투사해 삽입한 것일까? 가령, "3일째 부활"은 바울 본인 {호세아} 6:2절을 끌어와서 억지로 가져다 붙인 것일까?
아니면 "κατὰ τὰς γραφάς· 기록된 대로"라고 쓴 부분, 다시 말해 예수에 대한 예언들 조차 사도/제자들에게서 통째로 전승받은 것일까?
무엇보다도 이 "기록된" {구약성서}의 구절들이 무엇인지, {호세아} 6:2이든 뭐든 바울은 언급한 적이 없다.
# 예수의 "요나의 표징"과 {시편} 22편
그런데 막상 예수 본인이 "3일째 부활"과 관련해 {구약성서}에서 가져온 모티프는 {호세아} 6:2가 아니라 구약성서 {요나}에 등장하는 예언자 요나 이야기였다.
{마태복음}에서 발췌한다.
12:38 그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표징을 보았으면 합니다." 3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표징 밖에는, 이 세대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40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땅 속에 있을 것이다.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아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다. 그는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부터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아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16:1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느라고,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징을 자기들에게 보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저녁 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 하고, 3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요나의 표징 밖에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남겨 두고 떠나가셨다.
또 {복음서}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시편} 22편 역시 예수의 수난에 대한 예언으로 {복음서}의 수난장면에 다수 삽입되어 있다. 예수 본인이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외친 것 부터가 바로 다윗의 이 {시편} 22편의 내용이다.
{시편} 22편이 {복음서}에 그대로 레퍼런싱 된 내용을 붉은 색으로 하이라이트 해보겠다.
1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그리 멀리 계셔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나의 간구를 듣지 아니하십니까? 2 나의 하나님, 온종일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밤새도록 부르짖어도 모르는 체하십니다. 3 그러나 주님은 거룩하신 분, 이스라엘의 찬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4 우리 조상이 주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믿었고, 주님께서는 그들을 구해 주셨습니다. 5 주님께 부르짖었으므로, 그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믿었으므로, 그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았습니다.6 그러나 나는 사람도 아닌 벌레요, 사람들의 비방거리, 백성의 모욕거리일 뿐입니다. 7 나를 보는 사람은 누구나 나를 빗대어서 조롱하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면서 얄밉게 빈정댑니다. 8 "그가 주님께 그토록 의지하였다면, 주님이 그를 구하여 주시겠지. 그의 주님이 그토록 그를 사랑하신다니, 주님이 그를 건져 주시겠지" 합니다. 9 그러나 주님은 나를 모태에서 이끌어 내신 분, 어머니의 젖을 빨 때부터 주님을 의지하게 하신 분이십니다. 10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주님께 맡긴 몸, 모태로부터 주님만이 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11 나를 멀리하지 말아 주십시오. 재난이 가까이 닥쳐왔으나,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12 황소 떼가 나를 둘러쌌습니다. 바산의 힘센 소들이 이 몸을 에워쌌습니다. 13 으르렁대며 찢어 발기는 사자처럼 입을 벌리고 나에게 달려듭니다.14 나는 쏟아진 물처럼 기운이 빠져 버렸고 뼈마디가 모두 어그러졌습니다. 나의 마음이 촛물처럼 녹아내려, 절망에 빠졌습니다. 15 나의 입은 옹기처럼 말라 버렸고, 나의 혀는 입천장에 붙어 있으니, 주님께서 나를 완전히 매장되도록 내버려 두셨기 때문입니다. 16 개들이 나를 둘러싸고, 악한 일을 저지르는 무리가 나를 에워싸고 내 손과 발을 묶었습니다. 17 뼈마디 하나하나가 다 셀 수 있을 만큼 앙상하게 드러났으며, 원수들도 나를 보고 즐거워합니다. 18 나의 겉옷을 원수들이 나누어 가지고, 나의 속옷도 제비를 뽑아서 나누어 가집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3일째 부활"이 {구약성서}에 예언되어 있다고 처음 제시한 사람이 사실 예수 본인이었다.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15:4에서 바울이 진술한 것처럼, 바울은 그것을 예수와 함께 했던 사도들과 제자들에게서 전해 받았다고 볼 여지가 많다.
{마태복음} 16:13-23을 보자. 그동안 자신의 정체를 가급적 감춰왔던 예수는, 베드로를 통해 자신이 "메시아/그리스도"라는 것을 사도/제자들에게 드러낸 직후 이를 외부로 공개하지 말것을 명하고, 대신 자신의 수난과 죽음과 "3일째 부활"에 대해 명시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한다.
16:13 예수께서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가운데에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1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18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20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엄명하시기를,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21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따로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하고 말하면서 예수께 대들었다. 2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16:21의 원문은 "그가 반드시 ὅτι δεῖ αὐτὸν" 수난당하고 죽고 3일째 부활해야만 한다는 취지의 발언이다. 즉, 성취되어야 하는 예언이란 암시다.
다음 내용은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내용이니 "공상적"이라 볼 사람도 있겠지만, {마태복음} 16장의 연장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첫 부분은 예수의 처형 후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부활한 예수가 만나 한 말이고, 두번째는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다시) 가르친 내용이다.
누가24:25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니 말입니다. 26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27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하여 써 놓은 일을 그들에게 설명하여 주셨다.
누가24:4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45 그 때에 예수께서는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곧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이며, 47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 하였다.
그럼 (바울이 아닌) 예수는 여기서 {호세아} 6:2를 들어 "3일째 부활"을 이야기 한 것일까? 아니면 이미 여러번 등장한 "요나의 표징"을 말한 것일까? 후자일 확률이 훨씬 높다.
여담으로, (통상적인 해석에서) 금요일 오후에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왜 "사흘 밤낮"에서 한참 모자라는 "3일째"인 일요일 새벽에 부활한 것인지를 둔 여러 논쟁들이 있다. 굳이 문자적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면, 예수의 고난주간에 있던 "유월절의 정체"에 따라 최후의 만찬일과 처형일을 앞당겨 수/목으로 잡으면 문제가 다소 풀리긴 한다.
# {이사야} 53장: 고난의 종 = 예수
그럼 예루살렘 교회를 시작으로 기독교가 시작된 후, 예수의 사도들과 제자들은 {구약성서}에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라는 근거로 무엇을 즐겨 들었을까?
예루살렘의 7집사 중 한 명인 빌립 (필립포스)가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유대교도 내시를 전도하는 {사도행전| 8장을 읽어보자.
26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빌립에게 말하였다. "일어나서 남쪽으로 나아가서,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거라. 그 길은 광야 길이다." 27 빌립은 일어나서 가다가, 마침 에티오피아 사람 하나를 만났다. 그는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고관으로, 그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내시였다. 그는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 돌아가는 길에 마차에 앉아서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다. 29 성령이 빌립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마차에 바짝 다가서거라." 30 빌립이 달려가서, 그 사람이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읽는 것을 듣고 "지금 읽으시는 것을 이해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31 그가 대답하기를 "나를 지도하여 주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올라와서 자기 곁에 앉기를 빌립에게 청하였다. 32 그가 읽던 성경 구절은 이것이었다. "양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이, 새끼 양이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것과 같이,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33 그는 굴욕을 당하면서, 공평한 재판을 박탈당하였다.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겼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이야기하랴?" 34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였다. "예언자가 여기서 말한 것은 누구를 두고 한 말입니까? 자기를 두고 한 말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두고 한 말입니까?" 35 빌립은 입을 열어서, 이 성경 말씀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36 그들이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니, 내시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거리낌이 되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37절 없음) 38 빌립은 마차를 세우게 하고, 내시와 함께 물로 내려가서,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39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니, 주님의 영이 빌립을 데리고 갔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었지만, 기쁨에 차서 가던 길을 갔다. 40 그 뒤에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났다. 그는 돌아다니면서 여러 성에 복음을 전하다가, 마침내 가이사랴에 이르렀다.
예언서 {이사야} 53장은 "고난의 종"에 대해 이렇게 진술한다. 이 고난의 종에 대한 예언은 52장 13절부터 시작된다.
52:13 나의 종이 매사에 형통할 것이니, 그가 받들어 높임을 받고, 크게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14 전에는 그의 얼굴이 남들보다 더 안 되어 보였고, 그 모습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상해서, 그를 보는 사람마다 모두 놀랐다. 15 이제는 그가 많은 이방 나라를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 앞에서 입을 다물 것이다. 왕들은 이제까지 듣지도 못한 일들을 볼 것이며, 아무도 말하여 주지 않은 일들을 볼 것이다."
53:1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3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4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6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7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8 그가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 세대 사람들 가운데서 어느 누가, 그가 사람 사는 땅에서 격리된 것을 보고서, 그것이 바로 형벌을 받아야 할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느냐?
9 그는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악한 사람과 함께 묻힐 무덤을 주었고, 죽어서 부자와 함께 들어가게 하였다. 10 주님께서 그를 상하게 하고자 하셨다. 주님께서 그를 병들게 하셨다. 그가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여기면, 그는 자손을 볼 것이며, 오래오래 살 것이다. 주님께서 세우신 뜻을 그가 이루어 드릴 것이다.
11 "고난을 당하고 난 뒤에, 그는 생명의 빛을 보고 만족할 것이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할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자기가 짊어질 것이다. 12 그러므로 나는 그가 존귀한 자들과 함께 자기 몫을 차지하게 하며, 강한 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겠다. 그는 죽는 데까지 자기의 영혼을 서슴없이 내맡기고, 남들이 죄인처럼 여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졌고, 죄 지은 사람들을 살리려고 중재에 나선 것이다."
빌립이 에티오피아 내시를 전도하던 이 시절 바울은 아직 기독교도 조차 아니었다. 그는 {사도행전} 9장에 가서나 등장한다. 그러니까 바울 등장 이전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사용한 예수의 수난/회복 관련 예언의 대표주자는 {이사야} 53장이었다고 봐도 무방하고, 심지어 예수가 "자신에 대해 기록된 말씀"이 라고 할 때의 대표문서가 {이사야} 53장이라고 볼 이유도 충분하다. 단 "3일째 부활"이란 모티프만 이 안에 없을 뿐.
여기에 예수가 사용한 "요나의 징표"까지 더하면, 이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언급된 (성서에 기록된) (1) 예수의 대속 (2) 죽음 (3) 3일째 부활 모티프는 굳이 {호세아} 6:2 없이도 다 충족된다. {호세아} 6:2에서 끌어오지 않고, 이미 기독교도들이 활용하던 "증거" 만으로도 충분하단 뜻이다.
그럼 이런 "예언적 구절"들은 죄다 기독교도들이 후대에 지어낸 왜곡과 신화인 것일까?
그게 또 그렇지가 않다. 여기에 {이사야} 53장의 특별함이 있다.
# {이사야} 53장에 대한 중세기 이전 유대교의 해석: {탈굼}, {탈무드}, {미드라쉬}: 고난의 종 = 메시아
사실 중세기 초기까지만 해도, {이사야} 53장은 유대교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메시아의 고난"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되었다.
가령,
히브리어 {맛소라}본 52:13에서는 나의 종 (아브디 עַבְדִּי) 이란 명칭으로 등장하는 "고난의 종"은 이렇게 묘사된다.
הֵן יַשְׂכִּיל עַבְדִּי יָרוּם וְנִשָּׂא וְגָבַהּ מְאֹד׃
52:13나의 종이 매사에 형통할 것이니, 그가 받들어 높임을 받고, 크게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럼 도대체 이 고난당하는 "종"은 누구란 말인가?
그런데 아람어 {예루살렘 탈굼} 52:13에서는 "메시아"가 추가되어 "나의 종 메시아 עַבְדִּי מְשִׁיחָא"로 그 고난 받는 종이 바로 "메시아" 임이 명시된다.
הָא יַצְלַח עַבְדִּי מְשִׁיחָא יְרוּם וְיִסְגֵּי וְיִתְקַּף לַחֲדָא׃
보라, 나의 종 메시아가 형통하리니, 그가 높이 들리고 크게 번성하며 매우 강해지리라.
또 랍비 유대교의 핵심인 {바빌로니아 탈무드} 속 [산헤드린 98b]에서는 메시아의 이름을 두고 여러 랍비 문파들의 학생들이 토론하며 각자 성서에 기초해 그 이름을 제시하는데, 대표 랍비들은 그 메시아의 이름을 "칩바라" - 즉, "(나병)환자"라 정리하며 그 근거로 {이사야} 53장을 제시한다.
메시아의 이름들 (Sanhedrin 98b)
מַה שְּׁמוֹ?
그의 이름은 무엇인가?
דְּבֵי רַבִּי שֵׁילָא אָמְרִי: שִׁילֹה שְׁמוֹ, שֶׁנֶּאֱמַר: עַד כִּי יָבֹא שִׁילֹה.
랍비 쉴라의 문하생들이 말하기를: 그의 이름은 '실로(Shiloh)'이다. 이는 성경에 "실로가 오시기까지"(창세기 49:10)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דְּבֵי רַבִּי יַנַּאי אָמְרִי: יִנּוֹן שְׁמוֹ, שֶׁנֶּאֱמַר: יְהִי שְׁמוֹ לְעוֹלָם לִפְנֵי שֶׁמֶשׁ יִנּוֹן שְׁמוֹ.
랍비 얀나이의 문하생들이 말하기를: 그의 이름은 '인논(Yinnon)'이다. 이는 성경에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해와 같이 그의 이름이 전해지리로다(인논)"(시편 72:17)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דְּבֵי רַבִּי חֲנִינָה אָמְרִי: חֲנִינָה שְׁמוֹ, שֶׁנֶּאֱמַר: אֲשֶׁר לֹא אֶתֵּן לָכֶם חֲנִינָה.
랍비 하니나의 문하생들이 말하기를: 그의 이름은 '하니나(Chanina)'이다. 이는 성경에 "내가 너희에게 은혜(하니나)를 베풀지 아니함이라"(예레미야 16:13)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וְרַבָּנַן אָמְרִי: חִוָּרָא דְּבֵי רַבִּי שְׁמוֹ, שֶׁנֶּאֱמַר: אָכֵן חֳלָיֵנוּ הוּא נָשָׂא וּמַכְאֹבֵינוּ סְבָלָם וַאֲנַחְנוּ חֲשַׁבְנֻהוּ נָגוּעַ מֻכֵּה אֱלֹהִים וּמְעֻנֶּה.
그리고 랍비들은 말하기를: 그의 이름은 '랍비 집안의 나병 환자(Chivvara)'이다. 이는 성경에 "실로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나구아, 나병에 걸려)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이사야 53:4)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구약성서 {룻기}에 대한 유대교 미드라쉬 {룻 라바} 5:6 에서는 해당 구절을 메시아적으로 이렇게 해설한다.
Ruth Rabbah 5:6 (Messianic Section)
הַמִּדְרָשׁ אָמַר: "וַיֹּאמֶר לָה בֹעַז לְעֵת הָאֹכֶל גֹּשִׁי הֲלֹם וְאָכַלְתְּ מִן הַלֶּחֶם וְטָבַלְתְּ פִּתֵּךְ בַּחֹמֶץ".
미드라쉬는 이르기를: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이 빵을 먹으며 네 빵조각을 초(vinegar)에 찍으라 하였다."
"גֹּשִׁי הֲלֹם" — זוֹ הַגָּשַׁת הַמַּלְכוּת... "וְאָכַלְתְּ מִן הַלֶּחֶם" — זוֹ לַחְמָהּ שֶׁל מַלְכוּת. "
이리로 오라" — 이는 왕권에 가까이 나아간다는 뜻이며... "떡을 먹으라" — 이는 왕권의 양식을 의미한다.
"וְטָבַלְתְּ פִּתֵּךְ בַּחֹמֶץ" — אֵלּוּ הַיִּסּוּרִין, שֶׁנֶּאֱמַר: "וְהוּא מְחֹלָל מִפְּשָׁעֵנוּ מְדֻכָּא מֵעֲוֹנֹתֵינוּ".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 이는 (메시아의) 고난을 의미하니, 성경에 이르기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이사야 53:5) 함과 같다
이런 유대교의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 해석이 "메시아" 개인이 아닌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으로 바뀌어 해석되기 시작한 것은, 이 내용이 "너무 기독교적"이란 인식이 랍비들 사이에 퍼진 중세기 때부터다. 후대의 랍비 유대교가 의식적으로 '메시아적' 해석을 배제하게 된 것이다.
# {호세아} 6:2 본문
{호세아} 6:2를 예수의 "3일째 부활"로 왜곡(!)한 용의자가 바울 (혹은 예수 본인)이 아니라면, 그럼 도대체 누가 왜 그런 해석을 펴게 된 것일까?
그럼 히브리어 {맛소라}본과 그리스어 {70인역}이 어떻게 진술하는지 문법적으로 한번 살펴보자.
우선 "3일째".
יְחַיֵּנוּ מִיֹּמָיִם בַּיּוֹם הַשְּׁלִישִׁי יְקִמֵנוּ וְנִחְיֶה לְפָנָיו
ὑγιάσει ἡμᾶς μετὰ δύο ἡμέρας· ἐν τῇ ἡμέρᾳ τῇ τρίτῃ ἀναστησόμεθα καὶ ζησόμεθα ἐνώπιον αὐτοῦ.
이틀째/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고, 사흘째/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니, 우리가 주님 앞에서 살 것이다. -- 한국어 새번역
히브리어에서는 בַּיּוֹם הַשְּׁלִישִׁי (bayyôm haššlîšî), 그리스어 {70인역}에서는 ἐν τῇ ἡμέρᾳ τῇ τρίτῃ (en tē hēmera tē tritē)가 "3일째"를 뜻한다.
다음은 "부활".
이틀째의 사건인 히브리어 יְחַיֵּנוּ (yehayyênû)는 "살린다"는 뜻이고, 3일째의 יְקִמֵנוּ (yeqimēnû)은 "일으킨다"는 뜻이다. 그리스어 {70인역}에서는 이틀째 사건이 "ὑγιάσει ἡμᾶς (hygiasei hēmas)" 즉 "치유"이고, 3일째 사건은 부활해 ἀναστησόμεθα (anastēsometha), 살아가는 것이다 καὶ ζησόμεθα (kai zēsometha).
"부활"인가 아닌가?
그런데 유대교 아람어 {예루살렘 탈굼}은 그날을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날"로 명시했다. 이틀/사흘은 "곧/장차 올 미래"란 숙어로 처리했다.
יְחַיֵינָא בְּיוֹמֵי נֶחָמָתָא דַעֲתִידִין לְמֵיתֵי בְּיוֹם אֲחָיוּת מִיתַיָא יְקִימִנָא וְנִחְיֵי קֳדָמוֹהִי׃
"그분께서 장차 올 위로의 날들에 우리를 살리실 것이요,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리로다."
자, 그럼 "부활"을 의미한다고 치고, 이걸 "예수의 3일째 부활"로 해석할 수 있을까?
그런데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여기엔 결정적 문제가 있다. 히브리어 {맛소라}든, 그리스어 {70인역}이든, 아람어 {탈굼}이든 회복/치유/부활되는 당사자는 복수로서의 "우리"다. 그런 이유로 특별히 시리아/안티오키아 학파에 속한 문자주의 해석을 선호하는 교부/신학자들은 {호세아} 6:2을 예수의 "3일째 부활"의 입증예언으로 보는 해석을 기각했다.
그러니까 {호세아} 6:2를 예수의 "3일째"와 연결시키는 해석에 대한 비판은 이미 고대교회에도 있었던 것이다. 뒤에 자세히 다루겠다.
# {호세아} 6:2가 "3일째" 부활이라 해석한 교부들
그런데 특별히 풍유/알레고리 해석을 발전시킨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교부들이나 이에 영향받은 라틴교부들이 그런 식으로 {호세아} 6:2를 주석했다. 그런데 이들이 {호세아} 6:2의 "3일째"와 예수의 "3일째"를 1:1로 대응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 사이에 3이란 어떤 패턴에 주목해 소위 "모형론 typology" 해석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고린도전서} 15:4에서 {호세아} 6:2를 직접 인용했다고 주장한 주요 교부들의 주석은 아직까진 읽어보지 못했다.
몇몇 교부들의 예를 들어보자.
지중해 서부 라틴어권인 이탈리아-북아프리카-히스파니아 교회의 신학에 큰 영향을 준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교부인 테르툴리아누스 (AD 155 – 220)는 {호세아} 6:2를 예수의 "3일째 부활"의 예언으로 명시한 첫 교부다. 바울이 아니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의도를 이해하는게 중요하다. 그는 영지주의 마르키온파와 상대하고 있었는데, 이 그노시스 이단의 창시자인 시노페의 마르키온은 유대교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유대인의 신 야훼를 물질적이고 악한 신으로 보고, 유대인의 신과 기독교의 성부가 다르다고 봤으며, {구약성서} 전체를 부정하고 {신약성서} 중에도 유대교의 때가 덜 묻은 바울서신 일부와 {루가복음} 정도만 기독교의 정경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예수의 행적이 {구약성서}에 이미 예언되어 있기에 마르키온이 {구약성서}를 부정한다면 자가당착이란 논리로 구약성서}의 정당성을 방어하였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마르키온 반박} 4:43-44에서 인용한다.
Habes et apud Osee: 'Post biduum vivificabit nos, in die tertia resurgemus.' Secundum haec enim et dicit: 'Oportet filium hominis multa pati et reprobari... et post tertium diem resurgere'."
{호세아}에서도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볼 수 있다.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이 말씀에 따라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아야 하며...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하신 것이다."
Cuius est dies tertius, nisi eius cuius fuit et primus et secundus? Aut si ad alium pertinet resurrectio, quare eam ex praedicatione creatoris expungit?"
첫째 날과 둘째 날을 소유한 분이 아니라면, 누구에게 '셋째 날'이 속하겠는가? 만일 부활이 다른 신(마르키온의 신)에게 속한 것이라면, 왜 그(=마르키온)는 창조주의 예언에서 부활의 증거를 지우려 하는가?
그런데 막상 테르툴리아누스가 "3일째 부활"을 {호세아} 6:2과 연결시킨 내용은, 바울의 {고린도전서} 15:4이 아니라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 말이었다.
예수가 그 발언에서 연결시킨 것 역시 {요나}였지 {호세아}가 아니였음을 모를 리 없는 테르툴리아누스는 바로 그 앞에 이런 진술을 하긴 했었다.
Ionae quoque in uentre ceti triduanus exitus hanc habuit figuram. Sicut enim Ionas fuit in uentre ceti tribus diebus et tribus noctibus, ita erit et filius hominis in corde terrae."
고래의 배 속에 삼일 동안 있다가 나온 요나의 역시 이와 같은 모형을 가지고 있었다. 요나가 밤낮 삼일 동안 고래의 배 속에 있었던 것과 같이, 인자도 밤낮 삼일 동안 땅의 심장부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풍유/알레고리 해석법의 대가(!)인 알렉산드리아 출신 교부 오리게네스 (AD 184 – 253 AD) 은 그의 {요한복음 주석}에서 그의 다른 {출애급기} 설교를 인용해 이렇게 적는다. "3일"이란 모티프의 "의미"를 찾아 그걸 특정 문구에 대한 해석으로 쓰는 전형적인 "모형론적 해석"이다.
Ἔλεγον γὰρ οἱ υἱοὶ Ἰσραὴλ τῷ Φαραώ· 'Ὁδὸν τριῶν ἡμερῶν πορευσόμεθα εἰς τὴν ἔρημον, καὶ θύσομεν Κυρίῳ τῷ Θεῷ ἡμῶν'."
이스라엘 자손들이 파라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을 가서 우리 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 하나이다"라고 했다.
Ὁ δὲ Φαραὼ οὐκ ἐᾷ αὐτοὺς ἀπελθεῖν, οὐδὲ τὴν ὁδὸν ταύτην βαδίσαι συγχωρεῖ· οἶδε γὰρ ὅτι ὁ βαδίσας τὴν ὁδὸν ταύτην, τῆς αὐτοῦ ἐξουσίας ἐκφεύγει."
그러나 파라오는 그들을 보내주지 않았고, 이 길을 걷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길을 걷는 자는 누구든지 자신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다.
Τίς οὖν ἐστιν αὕτη ἡ ὁδός; Ἄκουε τοῦ Σωτῆρος λέγοντος· 'Ἐγώ εἰμι ἡ ὁδός'."
그렇다면 이 길은 무엇인가? 구세주께서 "내가 곧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들어보자.Οὐκοῦν ἡ ὁδὸς αὕτη τῶν τριῶν ἡμερῶν, ἣν βαδίσαι δεῖ τοὺς ἐξιόντας τῆς Αἰγύπτου, ὁδός ἐστιν ἡ πίστις τοῦ Χριστοῦ, δι' ἧς ἀφικνούμεθα ἐπὶ τὴν ἀνάστασιν.
그렇다면 이집트를 떠나는 자들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이 '사흘 길'은 바로 그리스도의 믿음의 길이며, 우리는 이 길을 통해 부활에 도달하게 된다.
ὑγιάσει ἡμᾶς μετὰ δύο ἡμέρας, ἐν τῇ ἡμέρᾳ τῇ τρίτῃ ἀναστησόμεθα.
[호세아5:2] 이틀 후에 우리를 고치시며, 제삼일에 우리가 일어나리라.
Ἡ γὰρ πρώτη ἡμέρα ἡ τοῦ πάθους ἐστί, καὶ ἡ δευτέρα ἡ τῆς εἰς ᾅδου καταβάσεως, ἡ δὲ τρίτη ἡ τῆς ἀναστάσεως, ἐν ᾗ καὶ ἡμεῖς συνανιστάμεθα.
왜냐하면 첫째 날은 수난의 날이요, 둘째 날은 음부로 내려가신 날이며, 셋째 날은 부활의 날이기 때문이다. 이 셋째 날에 우리 또한 그분과 함께 일으킴을 받는다.
또 다른 주요 라틴교부인 카르타고 주교 키프리아누스 (AD 210-258)가 쓴 {유대인을 반박하는 증거들 (Testimonies Against the Jews, 2권 25장에서 예수의 "3일째" 부활을 예언한 {구약성서}의 구절로 {호세아} 6:2와 {출애급기} 19:10-11을 들었다. 이 경우 역시 "모형론적 해석"이다.
Quod resurgere a mortuis tertia die deberet.
그분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점에 대하여.
Testimony (Hosea 6:2): Latin: "Vivificabit nos post duos dies, in die tertio resurgemus."
증거 (호세아 6:2):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Testimony (Exodus 19:10-11): Latin: "Et dixit Dominus ad Moysen: Descende et testificare populo, et sanctifica illos hodie et cras... die enim tertia descendet Dominus in montem Sina."
증거 (출애급기 19:10-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며... 셋째 날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셋째 날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라."
역시 카르타고의 히포 주교로서 라틴교회 계열 (로마카톨릭 +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아우구스티누스 (354 – 430 AD)도 그의 {신국론 De Civitate Dei} 18.28}에 이렇게 적었다.
Prophetia quoque Osee de resurrectione Christi, quae tertio die facta est, sicut eam oportebat impleri, altitudinem quandam praefert et dicit:
부활이 성취되어야만 했던 방식 그대로, 제 삼일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호세아의 예언은 어떤 깊은 심오함을 드러내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Vivificabit nos post duos dies, in die tertio resurgemus."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In eodem sensu apostolus dicit: "Si resurrexistis cum Christo, quae sursum sunt quaerite." Talia quippe non dicit, nisi eis qui iam resurrectionis pignus in fide tenent.
이와 같은 의미에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골로새서 3:1). 진정 이러한 말은 이미 믿음 안에서 부활의 보증을 소유한 자들에게만 하는 말이다.
{고린도전서} 15:4는 어디로 갔는가?
이들 "모형론적" 해석에서 {호세아} 6:2 원문의 부활 대상이 "메시아" 혹은 "개인"이 아닌 복수인 "우리들"이란 문법적 모순을 피해가는 해법은, 이를 구원받은 자들의 "부활"로 해석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이기에, 이는 곧 예수의 부활을 뜻하기도 하게 된다는 식이다.
# {호세아} 6:2가 "3일째" 부활이 아니라 해석한 교부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모형론적 풍유적/알레고리적 해석은 해석의 자유도를 증가시키고 풍부하게 한다는 꽤 매력적(?)인 장점(?)이 있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여러 신학자들과 주석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지만, 꼭 그런 사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알레고리적 해석의 위험은 생각보다 꽤 오래 전부터 비판의 대상이기도 했다. 사실 알레고리적 해석의 대가인 오리게네스 본인의 저작 몇몇이 이단판정을 받으면서, 그 스스로가 알레고리적 해석의 위험성을 노출한 장본인이 되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위대한 신학자이지만, 위대한 교부라고 불리지는 않는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와는 여러 신학적 논제에서 대립관계였던 시리아/안티오키아 학파는 성서의 보다 문자적 해석을 중시했는데, 그 학파의 대표 신학자들은 모형론을 사용해 {호세아} 6:2 구절에서 예수의 "3일째 부활"을 유도하는 해석 거부했다. 그들이 보기에 그 방법은 문법적으로나 맥락적으로나 옳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몹수에스티아 주교 테오도로스 (AD 350-428)가 있다. 테오도로스는 사후 그의 신학이 네스토리우스 양성파의 뿌리가 되었다는 이유로 칼케돈파 보편교회에서 그의 주요 저작물들이 사후파문되긴 했지만, 생전에는 안티오키아 학파를 대표하는 쟁쟁한 신학자였다.
테오도로스의 {12 소예언서 주석}에서 인용하겠다.
Προτρέπει δὲ αὐτοὺς ἐπὶ τὴν μετάνοιαν, ὡς ἂν ἐκείνης μόνης δυναμένης ἀπαλλάξαι τῶν παρόντων αὐτοὺς κακῶν. Ἐπειδὴ γὰρ αὐτός ἐστιν ὁ παιδεύων, αὐτὸς ἔσται πάντως καὶ ὁ τῆς τιμωρίας παύων, ἐὰν μεταγνόντες ἐπιστρέψωσιν ἐπ' αὐτόν. Διό φησιν·
그는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데, 오직 회개만이 그들을 현재의 악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징계하시는 분이 바로 그분이시기에, 만일 그들이 회개하고 그분께 돌아온다면 형벌을 멈추실 분도 분명 그분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Ὑγιάσει ἡμᾶς μετὰ δύο ἡμέρας, ἐν τῇ ἡμέρᾳ τῇ τρίτῃ ἀναστησόμεθα.'
이틀 후에 우리를 고치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라.'
[Before the verse] Οὐδὲν γὰρ ἐνταῦθα περὶ τῆς ἀναστάσεως αἰνίττεται, ἀλλὰ τὸ τάχος λέγει τῆς ἐπανόδου τῶν ἀγαθῶν, ὡς ἂν εἴποι τις· 'μετὰ μικρόν'·
여기서 그는 부활에 대해 어떤 암시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상태로 돌아가는 속도가 빠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누군가 "잠시 후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τὸ δὲ 'μεὰ δύο ἡμέρας' καὶ 'ἐν τῇ ἡμέρᾳ τῇ τρίτῃ' ἀντὶ τοῦ 'ἐν βραχεῖ' λέγει... οὐ περὶ τῆς ἀναστάσεως τοῦ Χριστοῦ εἴρηται.
'이틀 후에'와 '셋째 날에'라는 표현은 '머지않아(짧은 시간 안에)'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말해진 것이 아니다.
ἐπειδὴ γὰρ ἐν τῷ παρόντι βίῳ αἱ δύο ἡμέραι καὶ ἡ τρίτη βραχύς ἐστι χρόνος, τούτῳ κέχρηται τῷ ὑποδείγματι.
왜냐하면 이 현세의 삶에서 이틀이나 사흘은 짧은 시간이기 때문에, 그는 이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회복이 신속할 것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여기서 테오도레토스는 이틀째/사흘째란 단어를 "곧/머지않아"를 뜻하는 숙어로 간주하고 수적인 의미로 이해하면 안된다고 주석한다. '사흘째'란 말에 숫자 3의 의미가 없다면, 여기서 "3일 후 부활"을 유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며 일침을 가한 것이다.
또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였던 정교회의 주요 신학자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AD 347 – 407 AD)의 지적도 읽을만 하다. 여기서 그는 본문의 이틀째/사흘째에 어떤 숫자적 의미를 부여한다기 보다는 "신속"하게 회복이 일어난다는 숙어로 간주하면서도, 이를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시키기는 한다. 그런데 크리소스토모스가 보기에 이건 '그리스도의 부활'를 직접 뜻하는게 아니라, '구원받은 인류들의 부활'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머리가 '그리스도'이기에 이는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암시하기도 한다는 주석이다.
그의 {호세아 주석}에서 인용한다.
Ὁρᾷς πῶς πανταχοῦ τὴν φιλανθρωπίαν τοῦ Θεοῦ κηρύττει ὁ προφήτης; Οὐ γὰρ εἰς τέλος ὀργίζεται, ἀλλὰ μετὰ τὴν πληγὴν εὐθέως τὴν ἴασιν ἐπαγγέλλεται.
그리스도의 박애(Philanthropia)를 예언자가 어디서나 선포하고 있는걸 보는가? 그분은 끝까지 분노하지 않으시고, 치신 후에 즉시 치유를 약속하신다.
Διὰ τοῦτο λέγει· ‘Ὑγιάσει ἡμᾶς μετὰ δύο ἡμέρας’. Τὸ γὰρ βραχὺ τοῦ χρόνου σημαίνει τὸ τάχος τῆς μεταβολῆς ἀπὸ τῶν λυπηρῶν ἐπὶ τὰ χρηστότερα.
그렇기에 '이틀 후에 우리를 고치시리라'고 말한다. 이 짧은 시간은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더 나은 상태로 변화되는 속도가 빠름을 의미한다
Πλὴν τὸ κύριον τῆς προφητείας εἰς τὸν Χριστὸν ἀναφέρεται, ὅστις ἐστὶν ἡ ἀληθινή μας ἀνάστασις καὶ ἡ ζωή.
그러나 이 예언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우리의 참된 부활이자 생명이신 그리스도에게 돌려진다.
Σκόπει τὴν ἀκρίβειαν τῆς γραφῆς· οὐκ εἶπεν, ἐγερεῖ αὐτόν, ἀλλ’ ἐγερεῖ ἡμᾶς.
성경의 정확성(Akribeia)을 주목하자. 성경은 '그분(그리스도)을 일으키시리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인류)를 일으키시리라'고 말했다.
Ἐπειδὴ γὰρ ἡ κεφαλὴ ἀνέστη, ἀνάγκη καὶ τὸ σῶμα συνευρίσκεσθαι τῇ κεφαλῇ· ἐν γὰρ τῷ Χριστῷ πᾶσα ἡ φύσις ἡ ἡμετέρα συνανέστη.
머리(그리스도)가 일어나셨기에 몸(교회) 역시 머리와 함께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본성이 함께 일어났기 때문이다.
Οὐ γὰρ ἰδίᾳ ἀνέστη ὁ Δεσπότης, ἀλλὰ τὴν ἀπαρχὴν τῆς ἡμετέρας ἀναστάσεως ἐν τῷ οἰκείῳ σώματι κατώρθωσεν.
주님께서는 자신만을 위해 일어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 안에서 우리 부활의 '첫 열매'를 성취하신 것이다.
Διὰ τοῦτο καὶ ὁ Παῦλος βοᾷ ὅτι ‘συνήγειρεν ἡμᾶς’, ἵνα μάθῃς ὅτι τὸ τοῦ ἑνὸς κατόρθωμα κοινὸν γίνεται τοῦ γένους παντός.
그렇기에 바울도 그분이 '우리를 함께 일으키셨다'고 외치는 것이다. 이는 한 분의 성취가 인류 전체의 공동의 유익이 되었음을 당신에게 알게 하려는 것이다
비슷한 논리는 키프로스 주교 테오도레토스 (AD 393 - 458)에도 보인다.
Ὑποτίθεται αὐτοῖς λόγους μετανοίας, δι’ ὧν ἐκμειλίξασθαι τὸν Θεὸν δυνήσονται. Λέγουσι γὰρ, φησὶ, ‘Δεῦτε, καὶ ἐπιστρέψωμεν πρὸς Κύριον τὸν Θεὸν ἡμῶν’.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달랠 수 있는 회개의 말들을 제시한다. 그가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우리 주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라고 그들이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Αὐτὸς γὰρ ὁ τρώσας ἰάσεται, καὶ ὁ πατάξας μονονοὺχι χειραγωγήσει πρὸς τὴν ὑγείαν.
우리를 찢으신 그분께서 고치실 것이요, 우리를 치신 그분께서 친히 우리를 온전한 건강으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Δείκνυσι δὲ καὶ τὸ τάχος τῆς φιλανθρωπίας, ὅτι οὐκ εἰς μακρὰν ἀναβάλλεται τὴν βοήθειαν.
또한 그는 하나님의 자비가 얼마나 신속한지를 보여주며, 그분께서 도움을 멀리 미루지 않으심을 나타낸다.
Ὁ δὲ προφήτης τὴν ταχεῖαν αὐτῶν ἐπάνοδον προαγορεύει... ἡ γὰρ τῶν δύο καὶ τριῶν ἡμερῶν προθεσμία τὸν ὀλίγον δηλοῖ χρόνον.
예언자는 그들의 신속한 귀환을 예고하고 있다... '이틀과 사흘'이라는 기한은 짧은 시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Πλὴν αἰνίττεται διὰ τούτων καὶ τὴν τριήμερον τοῦ Δεσπότου Χριστοῦ ἀνάστασιν.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구절들을 통해 주 그리스도의 사흘 만의 부활을 암시하고(ainittētai) 있다.
Ἐν γὰρ τῷ Χριστῷ πᾶσα ἡ φύσις ἡ ἡμετέρα τῆς ἀφθαρσίας ἐπέτυχε, καὶ τοῦ θανάτου τὸ κέντρον ἐλύθη.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본성이 불멸을 얻었으며, 죽음의 가시가 꺾였기 때문이다.
Οὕτω καὶ ὁ μακάριος Παῦλος φησὶν, ὅτι ‘συνήγειρεν ἡμᾶς’, ἐπειδὴ τῆς κεφαλῆς ἀναστάσης, καὶ τὸ σῶμα τῆς ἀναστάσεως μεταλαγχάνει.
복된 바울이 "우리를 함께 일으키셨다"고 말한 것과 같이, 머리가 일어나셨으므로 몸 또한 부활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알레고리/모형론적 해석을 따르면 "3일째"란 숫자를 {호세아} 6:2에서 유출해 이것으로 예수의 "3일째 부활"에 연결시키지만, 안티오키아 학파의 해석법으론 {호세아} 6:2의 원문 속 "3일째"의 의미를 "곧"이란 숙어로 이해하기에 예수의 "3일째 부활"과 직접 연결하는게 무의미한 대신 원문에 등장하는 "우리"를 구원받은 자의 "부활"로 해석한다. 구원받은 이들의 "머리"가 그리스도로 이므로 이는 또 "그리스도의 부활"을 암시하는 구절로 이해될 수는 있다.
# 마르틴 루터 vs 장 칼뱅
그럼 "성서는 성서로 해석한다"는 프로테스탄트 원리를 강력하게 주창한 16세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은 각각 어떻게 이해했을까?
마르틴 루터의 {호세아서 주석}을 읽어보자. 루터는 대체로 알레고리 해석을 싫어했는데, 그래서 그의 해석은 크리스토모스의 주석과 유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3일째"에 숫자적 의미가 있고, 그레서 예수의 "3일째 부활"에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Hic locus varie tractatur, sed spiritualis intelligentia optima est. Non loquitur Propheta tantum de temporali liberatione populi ex captivitate, sed de victoria super mortem." "
이 구절은 다양하게 다루어지나, 영적인 이해가 가장 탁월하다. 예언자는 단지 백성들이 포로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해방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승리를 말하고 있다.
Haec est insignis prophetia de resurrectione Christi... Quia post biduum vivificabit nos, in die tertio suscitabit nos. Hoc ad Christum referendum esse nemo dubitat.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탁월한 예언이다...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라'는 이 말씀이 그리스도께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Nos enim in Christo resurreximus. Quia Caput resurrexit, membra quoque certissima spe resurrectionem expectant. Haec est consolatio afflictorum conscientiarum.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했기 때문이다. 머리(Caput)가 살아나셨으므로, 지체들(membra) 역시 가장 확실한 소망 가운데 부활을 기다린다. 이것이 고통받는 양심들에게 주어지는 위로가 된다."
한편, 장 칼뱅은 이보다 훨씬 조심스럽다. 그의 {호세아 주석}을 인용한다.
Hic locus communiter refertur ad Christum quasi prophetia sit de ejus resurrectione; sed hoc sensus mihi videtur argutior quam ut ferri possit. Hoseas hic loquitur de reditu populi ex captivitate et de eorum instauratione.
이 구절은 흔히 마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예언인 것처럼 그분께 적용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제가 보기에는 [문맥상]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억지스러워 보인다. 호세아는 여기서 포로 상태로부터의 백성의 귀환과 그들의 회복(갱신)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Tamen fateor hunc locum recte applicari ad personam Christi, quatenus resurrectio Christi est speculum vitae nostrae.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구절이 그리스도의 인격에 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 삶의 거울인 한에서 말이다.
Quia ergo Deus in Christo exhibuit perfectum specimen futurae gloriae, huc transferri potest quod Propheta dicit de populi liberatione.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장차 올 영광의 완전한 표본을 보여주셨으므로, 예언자가 백성의 해방에 대해 말한 내용을 여기(그리스도)에 적용할 수 있다.
Nos autem non debemus hunc locum violenter trahere ad Christum, sed potius statuere Deum sic restauraturum ecclesiam suam, sicut in Capite ostendit.
우리는 이 구절을 그리스도께로 억지로 끌고 가서는 안되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머리(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것처럼 자신의 교회를 회복시키실 것임을 확신해야 한다.
Itaque biduum vel triduum significat breve tempus, quo Deus nos in tenebris relinquit antequam lucem suam rursus ostendat.
따라서 '이틀이나 사흘'은 하나님께서 다시 자신의 빛을 보여주시기 전, 우리를 어둠 속에 두시는 짧은 시간을 의미한다.
Quamvis enim mors nos diu teneat, tamen Deus nos non deseret in aeternum: sed ubi tempus fuerit opportunum, statim porriget manum ad nos servandos
비록 죽음이 우리를 오랫동안 붙들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오히려 적절한 때가 되면, 즉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손을 내미실 것이다.
Ergo haec temporis brevitas nos docet ad patientiam: quia si Deus non statim succurrit, non debemus protinus desperare, sed expectare tertium illum diem.
그러므로 이 짧은 시간(이틀과 사흘)은 우리에게 인내를 가르친다. 만일 하나님이 즉시 도와주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곧바로 절망해서는 안 되며 저 '셋째 날'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뱅의 견해는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레토스와 유사한데, 문맥상 회복의 대상이 '이스라엘 백성'이란 점, 그리고 이틀째/사흘째가 숫자적 의미가 아닌 신속함을 뜻한다는 본다. 비록 {호세아} 6:2가 "예수의 3일째 부활"에 대한 직접적 예언은 아니라고 봤지만, 이스라엘의 회복은 예수의 부활로 완성될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지체 (신자)들의 회복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으로는 볼 수 있다는 견해다.
# 정리: 톨레. 레게.
바울 본인의 말을 다시 한번 인용하고 글을 정리한다.
3 παρέδωκα γὰρ ὑμῖν ἐν πρώτοις, ὃ καὶ παρέλαβον, ὅτι Χριστὸς ἀπέθανεν ὑπὲρ τῶν ἁμαρτιῶν ἡμῶν κατὰ τὰς γραφάς,4 καὶ ὅτι ἐτάφη, καὶ ὅτι ἐγήγερται τῇ ἡμέρᾳ τῇ τρίτῃ κατὰ τὰς γραφάς,5 καὶ ὅτι ὤφθη Κηφᾷ, εἶτα τοῖς δώδεκα·6 ἔπειτα ὤφθη ἐπάνω πεντακοσίοις ἀδελφοῖς ἐφάπαξ, ἐξ ὧν οἱ πλείονες μένουσιν ἕως ἄρτι, τινὲς δὲ ἐκοιμήθησαν·7 ἔπειτα ὤφθη Ἰακώβῳ, εἶτα τοῖς ἀποστόλοις πᾶσιν·8 ἔσχατον δὲ πάντων ὡσπερεὶ τῷ ἐκτρώματι ὤφθη κἀμοί.3 Tradidi enim vobis in primis quod et accepi: quoniam Christus mortuus est pro peccatis nostris secundum Scripturas:
4 et quia sepultus est, et quia resurrexit tertia die secundum Scripturas:
5 et quia visus est Cephae, et post hoc undecim:
6 deinde visus est plus quam quingentis fratribus simul: ex quibus multi manent usque adhuc, qu idam autem dormierunt:
7 deinde visus est Iacobo, deinde apostolis omnibus:
8 novissime autem omnium tamquam abortivo, visus est et mihi.
3 나도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4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5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6 그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세상을 떠났지만, 대다수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7 다음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8 그런데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톨레. 레게 (Tolle Lege)!
판단은 각자의 몫.
草人 최광민
이메일로 전송BlogThis!X에 공유Facebook에서 공유
라벨:
비교신화/종교
© 草人 최광민 2025-12-30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글들에 대해 저자의 동의없는 전문복제/배포 - 임의수정 및 자의적 발췌를 금하며, 인용 시 글의 URL 링크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목
[© 최광민] 바울은 {호세아} 6:2를 임의로 왜곡해 "3일째 부활"의 개념을 유도했을까?
순서
- 비판 (이병태)
- 바울의 {고린도전서} 15장 전문
- 예수의 "요나의 표징"과 {시편} 22편
- {이사야} 53장: 고난의 종 = 예수
- {이사야} 53장에 대한 중세기 이전 유대교의 해석: {탈굼}, {탈무드}, {미드라쉬}: 고난의 종 = 메시아
- {호세아} 6:2 본문
- {호세아} 6:2가 "3일째" 부활이라 해석한 교부들
- {호세아} 6:2를 "3일째" 부활이 아니라 해석한 교부들
- 마르틴 루터 vs 장 칼뱅
- 정리: 톨레. 레게.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4절에서 "성경(구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언급했을 때, 학자들은 바울이 염두에 둔 가장 유력한 '성경' 구절로 호세아 6장 2절을 꼽는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세아6:2)...배경의 이해 없이 보면 바울의 주장처럼 예수의 삼 일만의 부활을 예언한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호세아 선지자(BC 8세기)가 활동하던 당시,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위협 속에 있었고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영적으로 타락해 있었다고 호세아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호세아 본문의 '우리'는 메시아 한 사람(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받아 상처 입은 이스라엘 공동체(북이스라엘/에브라임)를 지적하는 글이다.
여기서 "살리시며", "일으키시리니"는 죽은 시체가 무덤에서 나오는 생물학적 부활이 아니다. 이는 전쟁이나 재난으로 인해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인 국가적 위기에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회복되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히브리 문학(구약)에서 "이틀 후"와 "셋째 날"이라는 표현은 숫자 2와 3을 나열하여 "아주 짧은 시간 내에" 혹은 "속히"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시적 관용구다. 즉, 하나님이 징계하시더라도 우리가 회개하면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기대감을 나타낸 글이다.
바울은 이글을 삼일만에 예수 부활을 구약이 예언한 것으로 원래 문맥과는 전혀 다르게 인용하는 해석으로 자신의 신학을 만들어 낸다.
상당수 구약학자들은 호세아 6:1-3의 고백이 호세아 선지자의 진심 어린 권면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피상적이고 가벼운 회개를 풍자하는 말이라고 본다.
근거는 바로 이어지는 6장 4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탄식한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돌아가자! 그러면 금방 낫게 해주시겠지(이틀 뒤, 삼일 째)"라고 가볍게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런 '값싼 회개'를 거부하신다는 문맥이다. 즉, 원래 본문은 "하나님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백성들의 안일한 태도"를 보여주는 구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성서학자들의 해석이다.
바울은 해당 구절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다음 문장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결론적으로,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징계를 받아도 하나님이 속히(3일쯤에)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다소 안일할 수도 있는) 기대를 말했지만, 바울은 이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예수를 문자 그대로 3일 만에 다시 살리심으로써, 참된 회복을 시작하셨다"는 구속사적 성취로 재해석했다. 그럴싸한 문장만 찾으면 족했던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해석을 미드라쉬(Midrash)와 페셰르(Pesher)라는 성서의 해석에 관한 기본 개념들에 근거하고 있다. 과거 (특히 종교적) 글들을 읽을 때 현대의 역사적-문법적 해석(원저자의 의도 파악)과는 다른 두 가지 주요 방식이다.
A. 미드라쉬 (Midrash): "현재적 의미 찾기"는 히브리어 동사 '다라쉬(darash, 찾다/구하다)'에서 유래했다. 고대 텍스트의 틈을 메우거나, 현재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여 적용하는 방식이다.
문맥을 넘어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거나, 숨겨진 영적 의미를 캐낸다는 것이다. 예를 보자. (갈라디아서 4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내 사라와 하갈 이야기를 인용하며 이를 "이것은 비유(Allegory)니"라고 선언한다. 그는 하갈을 '시내산 율법'으로, 사라를 '자유 있는 예루살렘(복음)'으로 재해석한다. 이는 창세기의 원래 문맥과는 전혀 다른 해석이다.
B. 페셰르 (Pesher): "이것이 곧 그것이다 (This is That) '페셰르'는 '해석' 또는 '꿈의 풀이'라는 뜻으로, 특히 쿰란 공동체(사해 사본)와 초기 기독교가 즐겨 사용한 종말론적 해석법이다.
1. 구약 예언자들은 자신이 쓴 글의 '진정한 의미(비밀, Mysterion)'를 몰랐다.
2. 이 비밀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세우신 '의의 교사'나 '메시아'를 통해서만 풀린다.
3. 따라서 구약의 텍스트는 "지금 우리 공동체에서 일어난 이 사건"을 예언한 것이다.
바울에게 호세아 6장은 단순한 이스라엘의 회복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텍스트는 수백 년간 '봉인된 비밀'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 '페셰르(진정한 의미)'가 드러났다고 본 것이다. 어떻게? 성층권을 뚫고 그 위의 천국을 다녀온 본인에게 신이 직접 계시를 통해 밝혀준 진리라고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 바울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 바울의 {고린도전서} 15장 전문
바울은 1세대 기독교 복음의 핵심요소, 즉 예수의 대속적 죽음과 3일째 부활이란 (1) "복음", 그리고 사도들과 제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부활한 예수를 목격한 (2) "증언"을 코린트의 기독교도들에게 보낸 첫번째 서신의 첫 1장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을 일깨워 드립니다. 여러분은 그 복음을 전해 받았으며, 또한 그 안에 서 있습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복음으로 전해드린 말씀을 헛되이 믿지 않고, 그것을 굳게 잡고 있으면, 그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도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3 나도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4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5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6 그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세상을 떠났지만, 대다수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7 다음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8 그런데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9 나는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사도입니다. 나는 사도라고 불릴 만한 자격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1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할 것 없이, 우리는 이렇게 전파하고 있으며, 여러분은 이렇게 믿었습니다.
-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 무덤에 묻히셨다
- (성서에) 기록된 대로 3일째 부활했다.
- 게바/베드로에게,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났다
-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났다
- 다음에 야고보에게 나타났다
- 그 다음에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났다.
- 마지막으로 바울에게도 나타났다.
# 예수의 "요나의 표징"과 {시편} 22편
{마태복음}에서 발췌한다.
12:38 그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표징을 보았으면 합니다." 3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표징 밖에는, 이 세대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40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땅 속에 있을 것이다.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아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다. 그는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부터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아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16:1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느라고,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징을 자기들에게 보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저녁 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 하고, 3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요나의 표징 밖에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남겨 두고 떠나가셨다.
{시편} 22편이 {복음서}에 그대로 레퍼런싱 된 내용을 붉은 색으로 하이라이트 해보겠다.
1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그리 멀리 계셔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나의 간구를 듣지 아니하십니까? 2 나의 하나님, 온종일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밤새도록 부르짖어도 모르는 체하십니다. 3 그러나 주님은 거룩하신 분, 이스라엘의 찬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4 우리 조상이 주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믿었고, 주님께서는 그들을 구해 주셨습니다. 5 주님께 부르짖었으므로, 그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믿었으므로, 그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았습니다.6 그러나 나는 사람도 아닌 벌레요, 사람들의 비방거리, 백성의 모욕거리일 뿐입니다. 7 나를 보는 사람은 누구나 나를 빗대어서 조롱하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면서 얄밉게 빈정댑니다. 8 "그가 주님께 그토록 의지하였다면, 주님이 그를 구하여 주시겠지. 그의 주님이 그토록 그를 사랑하신다니, 주님이 그를 건져 주시겠지" 합니다. 9 그러나 주님은 나를 모태에서 이끌어 내신 분, 어머니의 젖을 빨 때부터 주님을 의지하게 하신 분이십니다. 10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주님께 맡긴 몸, 모태로부터 주님만이 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11 나를 멀리하지 말아 주십시오. 재난이 가까이 닥쳐왔으나,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12 황소 떼가 나를 둘러쌌습니다. 바산의 힘센 소들이 이 몸을 에워쌌습니다. 13 으르렁대며 찢어 발기는 사자처럼 입을 벌리고 나에게 달려듭니다.14 나는 쏟아진 물처럼 기운이 빠져 버렸고 뼈마디가 모두 어그러졌습니다. 나의 마음이 촛물처럼 녹아내려, 절망에 빠졌습니다. 15 나의 입은 옹기처럼 말라 버렸고, 나의 혀는 입천장에 붙어 있으니, 주님께서 나를 완전히 매장되도록 내버려 두셨기 때문입니다. 16 개들이 나를 둘러싸고, 악한 일을 저지르는 무리가 나를 에워싸고 내 손과 발을 묶었습니다. 17 뼈마디 하나하나가 다 셀 수 있을 만큼 앙상하게 드러났으며, 원수들도 나를 보고 즐거워합니다. 18 나의 겉옷을 원수들이 나누어 가지고, 나의 속옷도 제비를 뽑아서 나누어 가집니다.
16:13 예수께서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가운데에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1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18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20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엄명하시기를,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21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따로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하고 말하면서 예수께 대들었다. 2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누가24:25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니 말입니다. 26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27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하여 써 놓은 일을 그들에게 설명하여 주셨다.
누가24:4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45 그 때에 예수께서는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곧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이며, 47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 하였다.
그럼 (바울이 아닌) 예수는 여기서 {호세아} 6:2를 들어 "3일째 부활"을 이야기 한 것일까? 아니면 이미 여러번 등장한 "요나의 표징"을 말한 것일까? 후자일 확률이 훨씬 높다.
26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빌립에게 말하였다. "일어나서 남쪽으로 나아가서,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거라. 그 길은 광야 길이다." 27 빌립은 일어나서 가다가, 마침 에티오피아 사람 하나를 만났다. 그는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고관으로, 그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내시였다. 그는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 돌아가는 길에 마차에 앉아서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다. 29 성령이 빌립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마차에 바짝 다가서거라." 30 빌립이 달려가서, 그 사람이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읽는 것을 듣고 "지금 읽으시는 것을 이해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31 그가 대답하기를 "나를 지도하여 주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올라와서 자기 곁에 앉기를 빌립에게 청하였다. 32 그가 읽던 성경 구절은 이것이었다. "양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이, 새끼 양이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것과 같이,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33 그는 굴욕을 당하면서, 공평한 재판을 박탈당하였다.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겼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이야기하랴?" 34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였다. "예언자가 여기서 말한 것은 누구를 두고 한 말입니까? 자기를 두고 한 말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두고 한 말입니까?" 35 빌립은 입을 열어서, 이 성경 말씀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36 그들이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니, 내시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거리낌이 되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37절 없음) 38 빌립은 마차를 세우게 하고, 내시와 함께 물로 내려가서,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39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니, 주님의 영이 빌립을 데리고 갔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었지만, 기쁨에 차서 가던 길을 갔다. 40 그 뒤에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났다. 그는 돌아다니면서 여러 성에 복음을 전하다가, 마침내 가이사랴에 이르렀다.
52:13 나의 종이 매사에 형통할 것이니, 그가 받들어 높임을 받고, 크게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14 전에는 그의 얼굴이 남들보다 더 안 되어 보였고, 그 모습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상해서, 그를 보는 사람마다 모두 놀랐다. 15 이제는 그가 많은 이방 나라를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 앞에서 입을 다물 것이다. 왕들은 이제까지 듣지도 못한 일들을 볼 것이며, 아무도 말하여 주지 않은 일들을 볼 것이다."
53:1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3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4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6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7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8 그가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 세대 사람들 가운데서 어느 누가, 그가 사람 사는 땅에서 격리된 것을 보고서, 그것이 바로 형벌을 받아야 할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느냐?
9 그는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악한 사람과 함께 묻힐 무덤을 주었고, 죽어서 부자와 함께 들어가게 하였다. 10 주님께서 그를 상하게 하고자 하셨다. 주님께서 그를 병들게 하셨다. 그가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여기면, 그는 자손을 볼 것이며, 오래오래 살 것이다. 주님께서 세우신 뜻을 그가 이루어 드릴 것이다.
11 "고난을 당하고 난 뒤에, 그는 생명의 빛을 보고 만족할 것이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할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자기가 짊어질 것이다. 12 그러므로 나는 그가 존귀한 자들과 함께 자기 몫을 차지하게 하며, 강한 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겠다. 그는 죽는 데까지 자기의 영혼을 서슴없이 내맡기고, 남들이 죄인처럼 여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졌고, 죄 지은 사람들을 살리려고 중재에 나선 것이다."
הֵן יַשְׂכִּיל עַבְדִּי יָרוּם וְנִשָּׂא וְגָבַהּ מְאֹד׃52:13나의 종이 매사에 형통할 것이니, 그가 받들어 높임을 받고, 크게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הָא יַצְלַח עַבְדִּי מְשִׁיחָא יְרוּם וְיִסְגֵּי וְיִתְקַּף לַחֲדָא׃
보라, 나의 종 메시아가 형통하리니, 그가 높이 들리고 크게 번성하며 매우 강해지리라.
메시아의 이름들 (Sanhedrin 98b)
מַה שְּׁמוֹ?그의 이름은 무엇인가?
דְּבֵי רַבִּי שֵׁילָא אָמְרִי: שִׁילֹה שְׁמוֹ, שֶׁנֶּאֱמַר: עַד כִּי יָבֹא שִׁילֹה.랍비 쉴라의 문하생들이 말하기를: 그의 이름은 '실로(Shiloh)'이다. 이는 성경에 "실로가 오시기까지"(창세기 49:10)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דְּבֵי רַבִּי יַנַּאי אָמְרִי: יִנּוֹן שְׁמוֹ, שֶׁנֶּאֱמַר: יְהִי שְׁמוֹ לְעוֹלָם לִפְנֵי שֶׁמֶשׁ יִנּוֹן שְׁמוֹ.랍비 얀나이의 문하생들이 말하기를: 그의 이름은 '인논(Yinnon)'이다. 이는 성경에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해와 같이 그의 이름이 전해지리로다(인논)"(시편 72:17)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דְּבֵי רַבִּי חֲנִינָה אָמְרִי: חֲנִינָה שְׁמוֹ, שֶׁנֶּאֱמַר: אֲשֶׁר לֹא אֶתֵּן לָכֶם חֲנִינָה.랍비 하니나의 문하생들이 말하기를: 그의 이름은 '하니나(Chanina)'이다. 이는 성경에 "내가 너희에게 은혜(하니나)를 베풀지 아니함이라"(예레미야 16:13)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וְרַבָּנַן אָמְרִי: חִוָּרָא דְּבֵי רַבִּי שְׁמוֹ, שֶׁנֶּאֱמַר: אָכֵן חֳלָיֵנוּ הוּא נָשָׂא וּמַכְאֹבֵינוּ סְבָלָם וַאֲנַחְנוּ חֲשַׁבְנֻהוּ נָגוּעַ מֻכֵּה אֱלֹהִים וּמְעֻנֶּה.그리고 랍비들은 말하기를: 그의 이름은 '랍비 집안의 나병 환자(Chivvara)'이다. 이는 성경에 "실로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나구아, 나병에 걸려)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이사야 53:4)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Ruth Rabbah 5:6 (Messianic Section)
הַמִּדְרָשׁ אָמַר: "וַיֹּאמֶר לָה בֹעַז לְעֵת הָאֹכֶל גֹּשִׁי הֲלֹם וְאָכַלְתְּ מִן הַלֶּחֶם וְטָבַלְתְּ פִּתֵּךְ בַּחֹמֶץ".
미드라쉬는 이르기를: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이 빵을 먹으며 네 빵조각을 초(vinegar)에 찍으라 하였다."
"גֹּשִׁי הֲלֹם" — זוֹ הַגָּשַׁת הַמַּלְכוּת... "וְאָכַלְתְּ מִן הַלֶּחֶם" — זוֹ לַחְמָהּ שֶׁל מַלְכוּת. "이리로 오라" — 이는 왕권에 가까이 나아간다는 뜻이며... "떡을 먹으라" — 이는 왕권의 양식을 의미한다.
"וְטָבַלְתְּ פִּתֵּךְ בַּחֹמֶץ" — אֵלּוּ הַיִּסּוּרִין, שֶׁנֶּאֱמַר: "וְהוּא מְחֹלָל מִפְּשָׁעֵנוּ מְדֻכָּא מֵעֲוֹנֹתֵינוּ"."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 이는 (메시아의) 고난을 의미하니, 성경에 이르기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이사야 53:5) 함과 같다
{호세아} 6:2를 예수의 "3일째 부활"로 왜곡(!)한 용의자가 바울 (혹은 예수 본인)이 아니라면, 그럼 도대체 누가 왜 그런 해석을 펴게 된 것일까?
יְחַיֵּנוּ מִיֹּמָיִם בַּיּוֹם הַשְּׁלִישִׁי יְקִמֵנוּ וְנִחְיֶה לְפָנָיוὑγιάσει ἡμᾶς μετὰ δύο ἡμέρας· ἐν τῇ ἡμέρᾳ τῇ τρίτῃ ἀναστησόμεθα καὶ ζησόμεθα ἐνώπιον αὐτοῦ.이틀째/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고, 사흘째/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니, 우리가 주님 앞에서 살 것이다. -- 한국어 새번역
히브리어에서는 בַּיּוֹם הַשְּׁלִישִׁי (bayyôm haššlîšî), 그리스어 {70인역}에서는 ἐν τῇ ἡμέρᾳ τῇ τρίτῃ (en tē hēmera tē tritē)가 "3일째"를 뜻한다.
יְחַיֵינָא בְּיוֹמֵי נֶחָמָתָא דַעֲתִידִין לְמֵיתֵי בְּיוֹם אֲחָיוּת מִיתַיָא יְקִימִנָא וְנִחְיֵי קֳדָמוֹהִי׃"그분께서 장차 올 위로의 날들에 우리를 살리실 것이요,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리로다."
Habes et apud Osee: 'Post biduum vivificabit nos, in die tertia resurgemus.' Secundum haec enim et dicit: 'Oportet filium hominis multa pati et reprobari... et post tertium diem resurgere'."
{호세아}에서도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볼 수 있다.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이 말씀에 따라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아야 하며...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하신 것이다."
Cuius est dies tertius, nisi eius cuius fuit et primus et secundus? Aut si ad alium pertinet resurrectio, quare eam ex praedicatione creatoris expungit?"
첫째 날과 둘째 날을 소유한 분이 아니라면, 누구에게 '셋째 날'이 속하겠는가? 만일 부활이 다른 신(마르키온의 신)에게 속한 것이라면, 왜 그(=마르키온)는 창조주의 예언에서 부활의 증거를 지우려 하는가?
Ionae quoque in uentre ceti triduanus exitus hanc habuit figuram. Sicut enim Ionas fuit in uentre ceti tribus diebus et tribus noctibus, ita erit et filius hominis in corde terrae."
고래의 배 속에 삼일 동안 있다가 나온 요나의 역시 이와 같은 모형을 가지고 있었다. 요나가 밤낮 삼일 동안 고래의 배 속에 있었던 것과 같이, 인자도 밤낮 삼일 동안 땅의 심장부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Ἔλεγον γὰρ οἱ υἱοὶ Ἰσραὴλ τῷ Φαραώ· 'Ὁδὸν τριῶν ἡμερῶν πορευσόμεθα εἰς τὴν ἔρημον, καὶ θύσομεν Κυρίῳ τῷ Θεῷ ἡμῶν'."이스라엘 자손들이 파라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을 가서 우리 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 하나이다"라고 했다.
Ὁ δὲ Φαραὼ οὐκ ἐᾷ αὐτοὺς ἀπελθεῖν, οὐδὲ τὴν ὁδὸν ταύτην βαδίσαι συγχωρεῖ· οἶδε γὰρ ὅτι ὁ βαδίσας τὴν ὁδὸν ταύτην, τῆς αὐτοῦ ἐξουσίας ἐκφεύγει."그러나 파라오는 그들을 보내주지 않았고, 이 길을 걷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길을 걷는 자는 누구든지 자신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다.
Τίς οὖν ἐστιν αὕτη ἡ ὁδός; Ἄκουε τοῦ Σωτῆρος λέγοντος· 'Ἐγώ εἰμι ἡ ὁδός'."그렇다면 이 길은 무엇인가? 구세주께서 "내가 곧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들어보자.Οὐκοῦν ἡ ὁδὸς αὕτη τῶν τριῶν ἡμερῶν, ἣν βαδίσαι δεῖ τοὺς ἐξιόντας τῆς Αἰγύπτου, ὁδός ἐστιν ἡ πίστις τοῦ Χριστοῦ, δι' ἧς ἀφικνούμεθα ἐπὶ τὴν ἀνάστασιν.
그렇다면 이집트를 떠나는 자들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이 '사흘 길'은 바로 그리스도의 믿음의 길이며, 우리는 이 길을 통해 부활에 도달하게 된다.
ὑγιάσει ἡμᾶς μετὰ δύο ἡμέρας, ἐν τῇ ἡμέρᾳ τῇ τρίτῃ ἀναστησόμεθα.
[호세아5:2] 이틀 후에 우리를 고치시며, 제삼일에 우리가 일어나리라.
Ἡ γὰρ πρώτη ἡμέρα ἡ τοῦ πάθους ἐστί, καὶ ἡ δευτέρα ἡ τῆς εἰς ᾅδου καταβάσεως, ἡ δὲ τρίτη ἡ τῆς ἀναστάσεως, ἐν ᾗ καὶ ἡμεῖς συνανιστάμεθα.
왜냐하면 첫째 날은 수난의 날이요, 둘째 날은 음부로 내려가신 날이며, 셋째 날은 부활의 날이기 때문이다. 이 셋째 날에 우리 또한 그분과 함께 일으킴을 받는다.
Quod resurgere a mortuis tertia die deberet.그분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점에 대하여.
Testimony (Hosea 6:2): Latin: "Vivificabit nos post duos dies, in die tertio resurgemus."증거 (호세아 6:2):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Testimony (Exodus 19:10-11): Latin: "Et dixit Dominus ad Moysen: Descende et testificare populo, et sanctifica illos hodie et cras... die enim tertia descendet Dominus in montem Sina."증거 (출애급기 19:10-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며... 셋째 날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셋째 날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라."
Prophetia quoque Osee de resurrectione Christi, quae tertio die facta est, sicut eam oportebat impleri, altitudinem quandam praefert et dicit:
부활이 성취되어야만 했던 방식 그대로, 제 삼일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호세아의 예언은 어떤 깊은 심오함을 드러내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Vivificabit nos post duos dies, in die tertio resurgemus."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In eodem sensu apostolus dicit: "Si resurrexistis cum Christo, quae sursum sunt quaerite." Talia quippe non dicit, nisi eis qui iam resurrectionis pignus in fide tenent.이와 같은 의미에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골로새서 3:1). 진정 이러한 말은 이미 믿음 안에서 부활의 보증을 소유한 자들에게만 하는 말이다.
# {호세아} 6:2가 "3일째" 부활이 아니라 해석한 교부들
알렉산드리아 학파와는 여러 신학적 논제에서 대립관계였던 시리아/안티오키아 학파는 성서의 보다 문자적 해석을 중시했는데, 그 학파의 대표 신학자들은 모형론을 사용해 {호세아} 6:2 구절에서 예수의 "3일째 부활"을 유도하는 해석 거부했다. 그들이 보기에 그 방법은 문법적으로나 맥락적으로나 옳지 않기 때문이다.
Προτρέπει δὲ αὐτοὺς ἐπὶ τὴν μετάνοιαν, ὡς ἂν ἐκείνης μόνης δυναμένης ἀπαλλάξαι τῶν παρόντων αὐτοὺς κακῶν. Ἐπειδὴ γὰρ αὐτός ἐστιν ὁ παιδεύων, αὐτὸς ἔσται πάντως καὶ ὁ τῆς τιμωρίας παύων, ἐὰν μεταγνόντες ἐπιστρέψωσιν ἐπ' αὐτόν. Διό φησιν·그는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데, 오직 회개만이 그들을 현재의 악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징계하시는 분이 바로 그분이시기에, 만일 그들이 회개하고 그분께 돌아온다면 형벌을 멈추실 분도 분명 그분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Ὑγιάσει ἡμᾶς μετὰ δύο ἡμέρας, ἐν τῇ ἡμέρᾳ τῇ τρίτῃ ἀναστησόμεθα.'이틀 후에 우리를 고치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라.'[Before the verse] Οὐδὲν γὰρ ἐνταῦθα περὶ τῆς ἀναστάσεως αἰνίττεται, ἀλλὰ τὸ τάχος λέγει τῆς ἐπανόδου τῶν ἀγαθῶν, ὡς ἂν εἴποι τις· 'μετὰ μικρόν'·여기서 그는 부활에 대해 어떤 암시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상태로 돌아가는 속도가 빠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누군가 "잠시 후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τὸ δὲ 'μεὰ δύο ἡμέρας' καὶ 'ἐν τῇ ἡμέρᾳ τῇ τρίτῃ' ἀντὶ τοῦ 'ἐν βραχεῖ' λέγει... οὐ περὶ τῆς ἀναστάσεως τοῦ Χριστοῦ εἴρηται.'이틀 후에'와 '셋째 날에'라는 표현은 '머지않아(짧은 시간 안에)'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말해진 것이 아니다.ἐπειδὴ γὰρ ἐν τῷ παρόντι βίῳ αἱ δύο ἡμέραι καὶ ἡ τρίτη βραχύς ἐστι χρόνος, τούτῳ κέχρηται τῷ ὑποδείγματι.왜냐하면 이 현세의 삶에서 이틀이나 사흘은 짧은 시간이기 때문에, 그는 이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회복이 신속할 것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Ὁρᾷς πῶς πανταχοῦ τὴν φιλανθρωπίαν τοῦ Θεοῦ κηρύττει ὁ προφήτης; Οὐ γὰρ εἰς τέλος ὀργίζεται, ἀλλὰ μετὰ τὴν πληγὴν εὐθέως τὴν ἴασιν ἐπαγγέλλεται.
그리스도의 박애(Philanthropia)를 예언자가 어디서나 선포하고 있는걸 보는가? 그분은 끝까지 분노하지 않으시고, 치신 후에 즉시 치유를 약속하신다.
Διὰ τοῦτο λέγει· ‘Ὑγιάσει ἡμᾶς μετὰ δύο ἡμέρας’. Τὸ γὰρ βραχὺ τοῦ χρόνου σημαίνει τὸ τάχος τῆς μεταβολῆς ἀπὸ τῶν λυπηρῶν ἐπὶ τὰ χρηστότερα.그렇기에 '이틀 후에 우리를 고치시리라'고 말한다. 이 짧은 시간은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더 나은 상태로 변화되는 속도가 빠름을 의미한다
Πλὴν τὸ κύριον τῆς προφητείας εἰς τὸν Χριστὸν ἀναφέρεται, ὅστις ἐστὶν ἡ ἀληθινή μας ἀνάστασις καὶ ἡ ζωή.그러나 이 예언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우리의 참된 부활이자 생명이신 그리스도에게 돌려진다.
Σκόπει τὴν ἀκρίβειαν τῆς γραφῆς· οὐκ εἶπεν, ἐγερεῖ αὐτόν, ἀλλ’ ἐγερεῖ ἡμᾶς.성경의 정확성(Akribeia)을 주목하자. 성경은 '그분(그리스도)을 일으키시리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인류)를 일으키시리라'고 말했다.
Ἐπειδὴ γὰρ ἡ κεφαλὴ ἀνέστη, ἀνάγκη καὶ τὸ σῶμα συνευρίσκεσθαι τῇ κεφαλῇ· ἐν γὰρ τῷ Χριστῷ πᾶσα ἡ φύσις ἡ ἡμετέρα συνανέστη.머리(그리스도)가 일어나셨기에 몸(교회) 역시 머리와 함께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본성이 함께 일어났기 때문이다.
Οὐ γὰρ ἰδίᾳ ἀνέστη ὁ Δεσπότης, ἀλλὰ τὴν ἀπαρχὴν τῆς ἡμετέρας ἀναστάσεως ἐν τῷ οἰκείῳ σώματι κατώρθωσεν.주님께서는 자신만을 위해 일어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 안에서 우리 부활의 '첫 열매'를 성취하신 것이다.Διὰ τοῦτο καὶ ὁ Παῦλος βοᾷ ὅτι ‘συνήγειρεν ἡμᾶς’, ἵνα μάθῃς ὅτι τὸ τοῦ ἑνὸς κατόρθωμα κοινὸν γίνεται τοῦ γένους παντός.
그렇기에 바울도 그분이 '우리를 함께 일으키셨다'고 외치는 것이다. 이는 한 분의 성취가 인류 전체의 공동의 유익이 되었음을 당신에게 알게 하려는 것이다
비슷한 논리는 키프로스 주교 테오도레토스 (AD 393 - 458)에도 보인다.
Ὑποτίθεται αὐτοῖς λόγους μετανοίας, δι’ ὧν ἐκμειλίξασθαι τὸν Θεὸν δυνήσονται. Λέγουσι γὰρ, φησὶ, ‘Δεῦτε, καὶ ἐπιστρέψωμεν πρὸς Κύριον τὸν Θεὸν ἡμῶν’.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달랠 수 있는 회개의 말들을 제시한다. 그가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우리 주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라고 그들이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Αὐτὸς γὰρ ὁ τρώσας ἰάσεται, καὶ ὁ πατάξας μονονοὺχι χειραγωγήσει πρὸς τὴν ὑγείαν.우리를 찢으신 그분께서 고치실 것이요, 우리를 치신 그분께서 친히 우리를 온전한 건강으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Δείκνυσι δὲ καὶ τὸ τάχος τῆς φιλανθρωπίας, ὅτι οὐκ εἰς μακρὰν ἀναβάλλεται τὴν βοήθειαν.또한 그는 하나님의 자비가 얼마나 신속한지를 보여주며, 그분께서 도움을 멀리 미루지 않으심을 나타낸다.Ὁ δὲ προφήτης τὴν ταχεῖαν αὐτῶν ἐπάνοδον προαγορεύει... ἡ γὰρ τῶν δύο καὶ τριῶν ἡμερῶν προθεσμία τὸν ὀλίγον δηλοῖ χρόνον.예언자는 그들의 신속한 귀환을 예고하고 있다... '이틀과 사흘'이라는 기한은 짧은 시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Πλὴν αἰνίττεται διὰ τούτων καὶ τὴν τριήμερον τοῦ Δεσπότου Χριστοῦ ἀνάστασιν.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구절들을 통해 주 그리스도의 사흘 만의 부활을 암시하고(ainittētai) 있다.Ἐν γὰρ τῷ Χριστῷ πᾶσα ἡ φύσις ἡ ἡμετέρα τῆς ἀφθαρσίας ἐπέτυχε, καὶ τοῦ θανάτου τὸ κέντρον ἐλύθη.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본성이 불멸을 얻었으며, 죽음의 가시가 꺾였기 때문이다.Οὕτω καὶ ὁ μακάριος Παῦλος φησὶν, ὅτι ‘συνήγειρεν ἡμᾶς’, ἐπειδὴ τῆς κεφαλῆς ἀναστάσης, καὶ τὸ σῶμα τῆς ἀναστάσεως μεταλαγχάνει.복된 바울이 "우리를 함께 일으키셨다"고 말한 것과 같이, 머리가 일어나셨으므로 몸 또한 부활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 마르틴 루터 vs 장 칼뱅
마르틴 루터의 {호세아서 주석}을 읽어보자. 루터는 대체로 알레고리 해석을 싫어했는데, 그래서 그의 해석은 크리스토모스의 주석과 유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3일째"에 숫자적 의미가 있고, 그레서 예수의 "3일째 부활"에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Hic locus varie tractatur, sed spiritualis intelligentia optima est. Non loquitur Propheta tantum de temporali liberatione populi ex captivitate, sed de victoria super mortem." "
이 구절은 다양하게 다루어지나, 영적인 이해가 가장 탁월하다. 예언자는 단지 백성들이 포로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해방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승리를 말하고 있다.
Haec est insignis prophetia de resurrectione Christi... Quia post biduum vivificabit nos, in die tertio suscitabit nos. Hoc ad Christum referendum esse nemo dubitat.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탁월한 예언이다...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라'는 이 말씀이 그리스도께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Nos enim in Christo resurreximus. Quia Caput resurrexit, membra quoque certissima spe resurrectionem expectant. Haec est consolatio afflictorum conscientiarum.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했기 때문이다. 머리(Caput)가 살아나셨으므로, 지체들(membra) 역시 가장 확실한 소망 가운데 부활을 기다린다. 이것이 고통받는 양심들에게 주어지는 위로가 된다."
한편, 장 칼뱅은 이보다 훨씬 조심스럽다. 그의 {호세아 주석}을 인용한다.
Hic locus communiter refertur ad Christum quasi prophetia sit de ejus resurrectione; sed hoc sensus mihi videtur argutior quam ut ferri possit. Hoseas hic loquitur de reditu populi ex captivitate et de eorum instauratione.
이 구절은 흔히 마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예언인 것처럼 그분께 적용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제가 보기에는 [문맥상]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억지스러워 보인다. 호세아는 여기서 포로 상태로부터의 백성의 귀환과 그들의 회복(갱신)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Tamen fateor hunc locum recte applicari ad personam Christi, quatenus resurrectio Christi est speculum vitae nostrae.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구절이 그리스도의 인격에 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 삶의 거울인 한에서 말이다.
Quia ergo Deus in Christo exhibuit perfectum specimen futurae gloriae, huc transferri potest quod Propheta dicit de populi liberatione.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장차 올 영광의 완전한 표본을 보여주셨으므로, 예언자가 백성의 해방에 대해 말한 내용을 여기(그리스도)에 적용할 수 있다.
Nos autem non debemus hunc locum violenter trahere ad Christum, sed potius statuere Deum sic restauraturum ecclesiam suam, sicut in Capite ostendit.
우리는 이 구절을 그리스도께로 억지로 끌고 가서는 안되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머리(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것처럼 자신의 교회를 회복시키실 것임을 확신해야 한다.
Itaque biduum vel triduum significat breve tempus, quo Deus nos in tenebris relinquit antequam lucem suam rursus ostendat.
따라서 '이틀이나 사흘'은 하나님께서 다시 자신의 빛을 보여주시기 전, 우리를 어둠 속에 두시는 짧은 시간을 의미한다.
Quamvis enim mors nos diu teneat, tamen Deus nos non deseret in aeternum: sed ubi tempus fuerit opportunum, statim porriget manum ad nos servandos
비록 죽음이 우리를 오랫동안 붙들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오히려 적절한 때가 되면, 즉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손을 내미실 것이다.
Ergo haec temporis brevitas nos docet ad patientiam: quia si Deus non statim succurrit, non debemus protinus desperare, sed expectare tertium illum diem.
그러므로 이 짧은 시간(이틀과 사흘)은 우리에게 인내를 가르친다. 만일 하나님이 즉시 도와주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곧바로 절망해서는 안 되며 저 '셋째 날'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 정리: 톨레. 레게.
바울 본인의 말을 다시 한번 인용하고 글을 정리한다.
3 παρέδωκα γὰρ ὑμῖν ἐν πρώτοις, ὃ καὶ παρέλαβον, ὅτι Χριστὸς ἀπέθανεν ὑπὲρ τῶν ἁμαρτιῶν ἡμῶν κατὰ τὰς γραφάς,4 καὶ ὅτι ἐτάφη, καὶ ὅτι ἐγήγερται τῇ ἡμέρᾳ τῇ τρίτῃ κατὰ τὰς γραφάς,5 καὶ ὅτι ὤφθη Κηφᾷ, εἶτα τοῖς δώδεκα·6 ἔπειτα ὤφθη ἐπάνω πεντακοσίοις ἀδελφοῖς ἐφάπαξ, ἐξ ὧν οἱ πλείονες μένουσιν ἕως ἄρτι, τινὲς δὲ ἐκοιμήθησαν·7 ἔπειτα ὤφθη Ἰακώβῳ, εἶτα τοῖς ἀποστόλοις πᾶσιν·8 ἔσχατον δὲ πάντων ὡσπερεὶ τῷ ἐκτρώματι ὤφθη κἀμοί.3 Tradidi enim vobis in primis quod et accepi: quoniam Christus mortuus est pro peccatis nostris secundum Scripturas: 4 et quia sepultus est, et quia resurrexit tertia die secundum Scripturas:
5 et quia visus est Cephae, et post hoc undecim: 6 deinde visus est plus quam quingentis fratribus simul: ex quibus multi manent usque adhuc, qu idam autem dormierunt: 7 deinde visus est Iacobo, deinde apostolis omnibus: 8 novissime autem omnium tamquam abortivo, visus est et mihi. 3 나도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4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5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6 그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세상을 떠났지만, 대다수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7 다음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8 그런데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톨레. 레게 (Tolle Lege)!
草人 최광민
Scientist. Husband. Daddy. --- TOLLE. LEGE
외부자료의 인용에 있어 대한민국 저작권법(28조)과 U.S. Copyright Act (17 USC. §107)에 정의된 "저작권물의 공정한 이용원칙 | the U.S. fair use doctrine" 을 따릅니다. 저작권(© 최광민)이 명시된 모든 글과 번역문들에 대해 (1) 복제-배포, (2) 임의수정 및 자의적 본문 발췌, (3) 무단배포를 위한 화면캡처를 금하며, (4) 인용 시 URL 주소 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후원 | 운영] [대문으로] [방명록] [ (구)방명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