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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민] 예수 vs 피타고라스: 물고기, 베시카 피시스,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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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 최광민 (Kwangmin Choi). 2010-10-30
 전문복사, 문맥을 무시한 임의적 발췌/수정, 배포를 금합니다.

제목

예수 vs 피타고라스: 물고기, 베시카 피시스, 153

순서
  1. 프리크/갠디의 {예수는 신화다} 속의 진술
  2. 얌블리코스와 포르피리우스의 {피타고라스의 생애} 속의 진술
  3. 신약성서 {요한복음서}의 진술
  4. 프리크/갠디의 자료인용과 논리전개의 문제점들
    1. 동일한 일화?
    2. "피타고라스는 153'을 신성한 수로 여겼다"?
    3. '베시카 피시스vesica piscis'
    4. 초기 기도교도들은 이 "베시카 피시스"의 기하학적 형태로 예수의 상징인 이크튜스/ΙΧΘΥΣ 를 그렸다?
    5. 물고기자리 (쌍어궁)은 예수를 상징한다?
  5. 결론



Images retailed from Muzio Oddi (1569-1639), Fabrica et uso del compasso polimetro, Milan 1633 (vesica piscis circles)


§ 프리크/갠디의 {예수는 신화다} 속 진술

우선 프리크/갠디는 예수가 피타고라스와 같은 방랑하는 스승과 치료자이었다는 점, 얌블리코스의 저술에 등장하는 "강과 바다를 잠잠하게 한" 피타고라스의 기적담이 예수가 갈릴리 호수를 잠잠하게 했다는 {마르코/마가복음서}의 내용과 같다는 점을 들어, 예수설화가 다른 이교도의 설화에서 온 것임을 주장한다. 이어서 프리크/갠디는 {요한복음서}의 한 일화를 다시 피타고라스 설화와 병렬시킨다.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갠디의 {예수는 신화다, The Jesus Mysteries}에서 해당부분을 인용하고 번역하겠다. (번역: 최광민)


T. Freke and P. Gandy, {The Jesus Mysteries}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는 그의 제자들이 기적적으로 엄청난 수의 물고기를 잡아올리게 했다. 이런 초자연적인 사건은 포르피리오스가 기록한 피타고라스의 일화에도 등장한다. 피타고라스는 잡게될 물고기의 정확한 수까지 정확히 예견했는데, 정확한 물고기의 수는 기록되지 않았다. {복음서} 속의 예수는 물고기의 수를 알아맞추는 그런 예견을 하지는 않지만, {복음서}는 잡힌 물고기의 수가 153마리였다고 적고 있다. 복음서의 저자가 단지 극적인 색채를 입히기 위해 이 숫자를 명시했다고 보기엔 타당하지 않다. 학자들은 이 부분이 신중하게 고려되었으며 그 숫자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결론지었다 (This seems on the face of it to be an irrelevant fact that the gospel writer included just for dramatic colour. But scholars have concluded that it is mentioned deliberately and is highly significant.)

피타고라스가 예견했던 물고기의 숫자는 정확히 153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It is likely that the number of fish that Pythagoras predicted would be caught was precisely 153.) 피타고라스 학파는 수학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153은 성스런 수로 간주되었다. [99] 이 수는 아르키메데스가 "물고기의 척도"라 부른 수학적 비율에 사용되었는데, 이 비율은 "베시카 피시스" 혹은 "물고기 (방광)기호"를 구성한다. 이 기호는 두개의 원이 교차하여 물고기와 같은 도형을 만드는 것이다. 이 도형은 고대 피타고라스 학파의 상징이었고, 또 초기 기독교도들이 그들의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었다.  (후략) --- {The Jesus Mysteries}, Freke/Gandy, Ch.3 (번역: 최광민)

꽤 그럴 듯한 추론이다. 그러나 이 추론은 몇가지 "결정적이지만 근거가 불분명한" 몇몇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중 몇가지는 사실에 일치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프리크/갠디의 이 진술은 (그들 자신이 처음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기술되어서는 않되는 성격의 것이다.

사실 프리크/갠디는 이 주장을  David Fideler의 1993년도 책 {Jesus Christ, sun of God: ancient cosmology and early Christian symbolism}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Fideler의 이 책은 매우 흥미로운 신비주의-수비학적인 주장들을 담은 책이다. 사실 매우 재미있기까지 하다. 다만 그 주장들이 너무 "엄청나서" 오히려 신뢰성을 반감시킨다고나 할까. 아무튼 이 책은 학술서가 아니라 유사과학 혹은 오컬트 서적으로 봐야 한다.


{Jesus Christ, sun of God: ancient cosmology and early Christian symbolism} --- David Fideler

얌블리코스와 포르피리우스가 전하는 피타고라스의 일화와 신약성서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장면을 인용하고 내용과 의도를 대비해 설명한 다음에, 아르키메데스의 저작을 인용한 후, 마지막으로 고대 기독교도들의 상징 중 하나인 물고기 문양, 즉 이크튜스를 설명하도록 하겠다.

위에 붉은 색으로 강조한 곳들이 주로 설명될 부분이다.




§ 얌블리코스와 포르피리우스의 {피타고라스의 생애} 속의 진술

우선 얌블리코스의 진술을 읽어보자.

"....One day, during a trip from Sybaris to Crotona, by the sea-shore, he happened to meet some fishermen engaged in drawing up from the deep their heavily-laden fish-nets. He told them he knew the exact number of the fish they had caught. The surprised fishermen declared that if he was right they would do anything he said. He then ordered them, after counting the fish accurately, to return them alive to the sea, and what is more wonderful, while he stood on the shore, not one of them died, though they had remained out of their natural element quite a little while. Pythagoras then paid the fisher-men the price of their fish, and departed for Crotona...." --- Iamblicus, {The Life of Pythagoras}

.... 시바리스에서 크로토나로 여행하던 어느날, 피타고라스는 해변에서 그물에 가득 잡힌 물고기를 끌어올리고 있는 어부들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는 어부들에게 그들이 잡은 물고기가 몇 마리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고 말했는데, 놀란 어부들은 만약 그 말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피타고라스가 시키는 뭐든지 하겠노라고 답했다. 피타고라스는 일단 물고기 수를 정확히 세고나서 다시 물고기를 산 채로 바다로 돌려보낼 것을 주문했다. 놀랍게도 물고기들은 한 동안 물 밖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물 가에 서 있는 동안 단 한마리도 죽지 않았다. 그런 후 피타고라스는 어부들에게 물고기 값을 지불하고 크로토나를 향해 떠났다. --- 얌블리코스, {피타고라스의 생애} / 번역: 최광민

이번에는 포르피리우스의 진술을 읽어보자.

".....25. While at the Olympic games, he was discoursing with his friends about auguries, omens, and divine signs, and how men of true piety do receive messages from the Gods. Flying over his head was an eagle, who stopped, and came down to Pythagoras. After stroking her awhile, he released her. Meeting with some fishermen who were drawing in their nets heavily laden with fishes from the deep, he predicted the exact number of fish they had caught. The fishermen said that if his estimate was accurate they would do whatever he commanded. They counted them accurately, and found the number correct. He then bade them return the fish alive into the sea; and, what is more wonderful, not one of them died, although they had been out of the water a considerable time. He paid them and left...." --- Porphyry, {The Life of Pythagoras}

.... 올림피아드 축제 중, 피타고라스는 그의 친구들과 점, 흉조, 신탁 등에 대해 논전하면서, 어떻게 진정한 신심을 가진 자가 신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그때 그의 머리 위로 암독수리가 날았는데, 갑자기 독수리가 멈추더니 피타고라스를 향해 내려왔다. 피타고라스는 독수리를 한동안 쓰다듬다가 다시 날려보냈다. 바다 깊은 곳에서 가득잡힌 물고기를 그물로 건져올리던 어부들을 만났을 때, 피타고라스는 어부들이 잡은 물고기의 정확한 수를 예견했다. 어부들은 그의 예상이 맞으면 그가 시키는 뭐든지 하겠노라고 말했는데, 어부들이 물고기를 세어보자 정확히 그 수가 맞는 것을 발견했다. 피타고라스는 어부들에게 물고기를 산 채로 놓아주라고 주문했는데, 더 놀라운 것은 물 밖에 한동안 나와 있었음에도 단 한마리도 죽지 않은 점이었다. 피타고라스는 물고기 값을 지불하고 그 곳을 떠났다....  --- 포르피리우스, {피타고라스의 생애} / 번역: 최광민 

얌블리코스와 포르피리우스가 남긴 기술은 거의 동일하다. 종합/요약하면 이렇다.

  1. 피타고라스는 올림피아드 축제 기간 중 시바리스에서 크로토나로 여행 중이었다.
  2. 어느날 피타고라스는 물고기가 가득 잡힌 그물을 끌어올리고 있는 어부들을 만났다.
  3. 피타고라스는 그물 속의 물고기 수를 예측했다. (그 숫자는 기록되지 않았다.)
  4. 어부들은 피타고라스가 에측한 수가 맞다면, 그가 내리는 어떤 명령이라도 따르겠다고 말했다.
  5. 세어보니 물고기의 수는 피라고라스의 예측과 정확히 일치했다.
  6. 이에, 피타고라스는 모든 물고기를 바다로 되돌려 보내라고 명령했다.
  7. 상당한 시간동안 물 밖에 나와있던 물고기는 단 한마리도 죽지 않고 바다로 되돌아 갔다.
  8. 피타고라스는 물고기 값을 지불하고 예정지인 크로토나를 향해 떠났다.

피타고라스의 이 방생설화는 대체로 육식을 금하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가르침을 뒷받침하는 일화로 많이 인용된다.




§ 신약성서 {요한 복음서}의 진술

그럼 이번에는 신약성서 {요한 복음서} 제 22장의 기술을 살펴보자. 한국어 {공동번역}에서 인용한다.

1. 그 뒤 예수께서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는데 그 경위는 이러하다.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는 토마와 갈릴래아 가나 사람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과 그 밖의 두 제자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 때 시몬 베드로가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그들은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갔으나 그 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이튿날 날이 밝아올 때 예수께서 호숫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이신 줄을 미처 몰랐다. 예수께서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아무것도 못 잡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들이 예수께서 이르시는 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고기가 많이 걸려들었다.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시몬 베드로는 몸에 겉옷을 두르고 그냥 물 속에 뛰어들었다. 나머지 제자들은 고기가 잔뜩 걸려든 그물을 끌며 배를 저어 육지로 나왔다. 그들이 들어갔던 곳은 육지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그들이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빵도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시몬 베드로는 배에 가서 그물을 육지로 끌어올렸다. 그물 속에는 백쉰세 마리나 되는 큰 고기가 가득히 들어 있었다. 그렇게 많은 고기가 들어 있었는데도 그물은 터지지 않았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들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중에는 감히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주시고 또 생선도 집어주셨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이것이 세 번째였다.--- 한국어 공동번역, {요한의 복음서} 22장


§ 프리크/갠디의 자료인용과 논리전개의 문제점들

# 동일한 일화?

두 가지 이야기를 비교해 보고, 프리크/갠디가 말하는 것처럼 "철학자 포르피리오스(AD 232-303)가 기록한 전설 속의 피타고라스도 이러한 재주를 선보였"는지 살펴보자.

  • 피타고라스가 어부를 만났을 때, 어부들은 이미 그물에 가득잡힌 물고기를 끌어올리는 중이었다
    • 반면,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지시에 따라 그물을 던졌고 그래서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 피타고라스는 이미 그물에 잡힌 물고기의 수를 예측했고, (비록 그 수는 기술되지 않았지만) 이 행위는 해당 설화에서 중요한 모티브다.
    • 반면 예수설화에서 예수의 명령으로 잡은 물고기의 숫자는 153으로 특정되어 있지만, 잡힌 물고기의 숫자는 이 설화에서 중요한 모티프가 아니다. 예수는 물고기의 수를 예측하지도 않았다. 숫자는 전체문맥과 무관하게 기술되어 있다.
  • 피타고라스는 철저한 채식주의자였고, 잡힌 물고기를 모두 방생했다. 이 방생의 모티프는 피타고라스의 이 일화에서 중요한 주제다.
    • 부활한 예수는 잡은 생선을 직접 구워 제자들에게 아침식사로 주었다. 심지어 부활한 예수 본인이 구운 생선을 먹은 사례는 {누가/루가의 복음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즉, 예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었고, 따라서 복음서에 방생의 모티브가 등장할 이유가 없다.
    • .......그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나타나 그들 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너무나 놀랍고 무서워서 유령을 보는 줄 알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발을 보아라. 틀림없이 나다! 자, 만져보아라. 유령은 뼈와 살이 없지만 보다시피 나에게는 있지 않느냐?" 하시며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셨다. 그들은 기뻐하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아서 어리둥절해 있는데 예수께서는 "여기에 무엇이든 먹을 것이 좀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예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잡수셨다.... --- 한국어 공동번역, {루가의 복음서} 24장

프리크/갠디도 언급했다시피, 피타고라스의 설화에는 그가 예측한 물고기의 숫자는 기술되어 있지 않다. 반면, {요한의 복음서}에는 153마리로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프리크/갠디는 갑자기 "피타고라스가 예견한 물고기 수는 분명 정확히 153마리였을 것이다"라고 근거없이 단언하면서 몇가지 그 이유를 제시한다.




# "피타고라스는 '153'을 신성한 수로 여겼다"?

피타고라스 혹은 그의 학파/종단이 153을 신성한 수로 여겼다는 주장의 출처는 명확지 않다. 153은 물론 여러모로 흥미로운 특성을 지닌 숫자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이 특징은 피타고라스 당시의 숫자표기법으로는 무의미하다. 가령, 153 = 1! + 2! + 3! + 4! + 5! 인데, 팩토리얼 계산은 당대에 없었다. 한편, 153 = 13 + 53 + 33 이긴한데, 당대의 그리스 대수법에서는 오늘날과 같는 10진법 자리수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시 당대인들에게는 무의미한 특성이다.

153은 삼각수(triangular numbers) 중 하나로서, 1부터 첫 17개의 정수를 더하면 나오는 값이기도 하다. 아래는 삼각수들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삼각형의 우측 사변에 있는 수들이 삼각수들로, 1, 3, 6, 10, 15, 21, 28,......., 136, 153,...... 등이 삼각수에 속한다. 즉, 삼각수란 1에서  n번째까지 정수를 더할 때의 합으로 n(n+1)/2와 동일한 수이다.



153, the 17th triangular number (Source: Wikimedia Commons)

153이 "17번째" 삼각수라면, 17이 신학적 의미를 가질까?

153과 17을 "신학적"으로 해설한 시도는 AD 4/5세기 기독교 교부인  북 아프리카 히포 주교 아우구스티누스가 펼쳤는데, 그는  153은 150 + 3이며, 150은 50을 3번 곱한 것인데다가 다시 3을 더함으로써 '삼위일체'를 상징한다고 보았다. {복음서}에는 17이란 수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성서에 등장하는 다양한 숫자들을 여러가지 방식으로 조합하여 17의 신학적 의미를 도출해 낸다.

아우구스티누스가 AD 440년 야뉴아리우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해당부분을 살펴보자. (여담이지만  공교롭게도 해당 내용은 해당 편지 "17장"의 31절에 등장한다. 물론 장/절 구분은 후대에 추가된 것이므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를 의도한 것은 아니다.)

31. Hence also, in the number of the large fishes which our Lord after His resurrection, showing this new life, commanded to be taken on the right side of the ship, there is found the number 50 three times multiplied, with the addition of three more [the symbol of the Trinity] to make the holy mystery more apparent; and the disciples' nets were not broken, John 21:6-11 because in that new life there shall be no schism caused by the disquiet of heretics.

31.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후 명령하시어 배의 우편에서 잡아올린 많은 물고기의 숫자 (=153)은 이 새로운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50 x 3 (=150)과 이에 다시 덧붙여진 또 다른 3 [삼위일체의 상징]이 있어 거룩한 신비 (=삼위일체)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중략].....  / 번역: 최광민

Then [in this new life] man, made perfect and at rest, purified in body and in soul by the pure words of God, which are like silver purged from its dross, seven times refined, shall receive his reward, the denarius; Matthew 20:9-10 so that with that reward the numbers 10 and 7 meet in him. For in this number [17] there is found, as in other numbers representing a combination of symbols, a wonderful mystery.

또 이 새 삶을 사는 인간은 신의 순결한 말씀에 의해 그 육체와 영혼이 완전하고 평화를 누리게 되는데, 이 순수한 말씀이란 마치 원광으로부터 7번 정련되어 나온 은과 같은 것으로, 이 사람은 데나리온의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상급으로서 [복음서의 비유에 나온 10시간 노동에 대한 10 데나리온의 보수] 10과 7이 이 사람에게 적절하다. 다른 상징들의 조합을 보여주는 숫자들에서 처럼 이 숫자 (17)에서도 놀라운 신비가 발견된다.  / 번역: 최광민

Nor is it without good reason that the seventeenth Psalm is the only one which is given complete in the book of Kings, because it signifies that kingdom in which we shall have no enemy.  For its title is, "A Psalm of David, in the day that the Lord delivered him from the hand of all his enemies, and from the hand of Saul." For of whom is David the type, but of Him who, according to the flesh, was born of the seed of David? Romans 1:3 He in His Church, that is, in His body, still endures the malice of enemies. Therefore the words which from heaven fell upon the ear of that persecutor whom Jesus slew by His voice, and whom He transformed into a part of His body (as the food which we use becomes a part of ourselves), were these, "Saul, Saul, why do you persecute Me?" Acts 9:4 And when shall this His body be finally delivered from enemies? Is it not when the last enemy, Death, shall be destroyed? It is to that time that the number of the 153 fishes pertains.

17번째 {시편}이 {열왕기}에 전체가 인용된 유일한 시편이라는 점은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인데, 그 {시편}은 장차 우리가 살게 될 적이 없는 왕국을 상징하기 때문이다......[중략]  / 번역: 최광민

For if the number 17 itself be the side of an arithmetical triangle, formed by placing above each other rows of units, increasing in number from 1 to 17, the whole sum of these units is 153: since 1 and 2 make 3; 3 and 3, 6; 6 and 4, 10; 10 and 5, 15; 15 and 6, 21; and so on: continue this up to 17, the total is 153.

17은 삼각형의 측면에 (= 17번째 삼각수) 있고 그 위로 17 열이 존재하는데, 이를 따라 1에서 17까지를 더하게 되면 총합은 153이 된다. ..... / 번역: 최광민

 ---- Letter 55 (A.D. 400), {From Augustin to Januarious}, Chapter 17,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Vol. 1. Edited by Philip Schaff.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7

동의하는가? 내가 보기에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은 과도한 의미부여일 뿐이다.



한편, 프리크/갠디는 피타고라스가 "분명 정확히 153"마리를 예측했을 것이라는 배경근거없는 "추론"을 확신에 차 제시한 후, 이 수가 너무나 신성해서 피타고라스 설화에서 그 수를 발설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또 하나의 확인되지 않은 두번째 가정/추론을 추가한다. 물론 이 역시 또 다른 가정에 바탕을 둔 추론이다.

그런데 153은 '특징적인' 수 임에도 불구하고, 고대사회에서 그토록 그토록 '신성하다'고 여겨져서 피타고라스 학파가 절대 발설하지 않던 수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는 피라고라스 학파가 절대 발설하지 않았던 "불길"한 숫자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17"이다. 왜 그런 것인지 AD 1-2세기의 그리스 작가 플루타르코스의 진술을 통해 읽어보자.

42 1 The Egyptians have a legend that the end of Osiris's life came on the seventeenth of the month, on which day it is quite evident to the eye that the period of the full moon is over.245 Because of this the Pythagoreans call this day "the Barrier," and utterly abominate this number. For the number seventeen, coming in between the square sixteen and the oblong rectangle eighteen, which, as it happens, are the only plane figures that have their perimeters equal their areas,246 bars them off from each other and disjoins them, and breaks up the ratio of eight to eight and an eighth247 by its division into unequal intervals. Some say that the years of Osiris's life, others that the years of his reign, were twenty-eight;248 368for that is the number of the moon's illuminations, and in that number of days does she complete her cycle. The wood which they cut on the occasions called the "burials of Osiris" they fashion into a crescent-shaped coffer because of the fact that the moon, when it comes near the sun, becomes crescent-shaped and disappears from our sight. The dismemberment of Osiris into fourteen parts they refer allegorically to the days of the waning of that satellite from the time of the full moon to the new moon. And the day on which she becomes visible after escaping the solar rays and passing by the sun they style "Incomplete Good"; for Osiris is beneficent, and his name means many things, but, not least of all, an active and beneficent power, as they put it. The other name of the god, Omphis, Hermaeus says means "benefactor" when interpreted.  -- Plutarch, {Isis and Osiris}, Vol. V, Loeb Classical Library edition, 1936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집트의 신 오시리스가 세트 (튀폰)에 의해 살해된 17일은 흉한 날로 여겨져 피타고라스 학파에서는 "17"이란 수를 기피했다는 것이다. 프리크/갠디의 주장에 따르자면 "153"은 "피타고라스 학파가 신성하게 여겨 발설하지 않았"다는 수다. 그런데 이 153은 "17번째 삼각수"다. 그리고 이 "17"은 피타고라스 학파가 불길하게 여겨 혐오하던 수였다. 뭔가 좀 엇갈리지 않는가?

자신들의 가정이 가진 헛점을 알기 때문인지 프리크/갠디는 보다 더 강력한 증거라고 생각한 두번째 주장으로 옮겨간다.




# '베시카 피시스 vesica piscis' ?

그럼 아르키메데스의 해당 저작인 {원의 측정에 대해서, On the Measurement of the Circle}을 들여다 보자 (Proposition #3).


http://www.archive.org/stream/worksofarchimede00arch




물론, 153은 등장한다. 그러나 153은 153/265라는 분수의 형태로 루트3의 근사치를 계산하기 위해 등장하며, 이후에 등장하는 모든 수식에 등장하는 153은 사실 바로 여기서 온 것이다. 아르키메데스는 왜 루트3의 근사치가 153/265인지는 증명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 분수형태는 당대에 꽤 잘 알려진 근사치였기 때문인 듯 싶다. 따라서 그다지 "비밀을 지켜야 할 정도로" 신비로운 수도 아닌 것이다. 각설하고, 아르키메데스의 이 저작 역시 신비적인 요소라고는 전혀없을 뿐더러, 153은 그 자체로서 아무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도대체 어떤 분수가 분모없이 분자 만으로 의미를 가진단 말인가?

게다가 만약 {요한복음서}의 저자가 루트3의 근사치로서 153/265를 염두에 두고 물고기의 숫자를 153으로 특정한 것이라면, 도대체 265는 어디에다 숨겨둔 것일까? 프리크/갠디와 유사한 주장을 펼치는 사람 중 어느 누구도 265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실 굳이 153과 관련된 이런 식의 수비학적이고 신비주의적 접근을 하겠다면, 피타고라스와 아르키메데스까지 갈 것 까지도 없다. 자, 이건 어떨까? 구약성서 {창세기}에는 신의 이름을 표기한 테트라그라마톤 (야훼, YHWH, יהוה)이 무려 153번 등장한다. 물론 예수의 제자들이 그물로 건진 물고기 숫자와 {창세기}에 등장하는 신의 이름 יהוה 이 왜 동수인가에 대해서는 또 다른 '심오'하고 '오묘'한 설명을 또 가져다가 붙이긴 해야겠지만.

출전 부분에서 프리크/갠디는 또 다른 실수를 했다. 아르키메데스는 자신의 저작에서 "물고기의 척도 (measure of the fish)" 혹은 "vesica piscis (물고기 방광)"란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이 용어가 처음 등장한 때는 1809년이고, 이후 프리메이슨들이 자신들의 저작에 종종 사용했다.

가령, 이 베시카 피시스를 프리메이슨과 처음 긴밀히 연관시킨 프리메이슨은 George Oliver 인데, 그는 이 문양의 기원을 기독교 이전의 고대 비밀결사와 연관지으면서 1875년 이렇게 말한다.

"....a universal exponent of architecture or Masonry, and the original source or fountain from which its signs and symbols are derived— it constituted the great and enduring secret of our ancient brethren." -- George Oliver, {Discrepancies of Masonry} 1875, p. 109

프리메이슨의 역사가 W.W. Covey-Crumps는 또 이렇게 진술한다.

"the Vesica Piscis had even from the time of the Primitive Christians possessed a sacred symbolical significance, though the purport of that significance was variously interpreted owing to the secrecy of its transmission." -- W. W. Covery-Crumps, {The Collected Prestonian Lectures}, vol. 1, pp. 146–47) 1931년

'베시카 피시스' 문양은 비록 그 의미가 비밀리에 전수되는 과정에서 다양하게 해석되긴 했지만,  심지어 초기 기독교 시절 때에도 신성한 상징적 중요성을 지녔었다.... / 번역: 최광민 

정말?

사실 두 원이 겹쳐진 vesica piscis 문양이 피타고라스 학파/종단의 상징이었다는 주장은 출처불명이다. 중세 때 이 모양은 종종 신 혹은 성자들을 묘사할 때 뒷 배경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모양을 따서 일반적으로 만돌라(mandorla)로 불렸다. 이탈리아에서는 아몬드라고도 불렸다.


Evangelistar von Speyer, um 1220, Manuscript in the Badische Landesbibliothek, Karlsruhe, Germany Cod. Bruchsal 1, Bl. 1v (출처: Wikimedia Commons)




# 초기 기도교도들은 이 "베시카 피시스"의 기하학적 형태로 이크튜스를 그렸다?

일반인에게도 잘 알려졌다시피, Ἰησοῦς Χριστός, Θεοῦ Υἱός, Σωτήρ (예수 그리스도, 신의 아들, 구원자)의 머릿글자를 따서 만들어진 단어 이크튜스는 (물고기)는 초기 기독교도들의 상징 가운데 하나였다. 일반인들에게는 대체로 아래와 같은 형식으로 알려져 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위와 같은 문양에 따라다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로, 로마정부로부터 핍박받던 기독교도들이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한 명이 땅바닥에 지팡이로 한 호를 그리면 다른 기독교도가 다른 호를 그려넣어 물고기 모양을 완성함으로써 피아를 식별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근세에 들어 생긴 일종의 도시전설 (urban legend)이다. 이런 주장은, 내 경우엔, 어릴 적 읽었던 헨릭 센케비치의 소설 {쿼 바디스}에서 처음 접했다. 위와 같이 두개의 호를 반대로 겹친 단순한 모양으로서의 이크튜스는 20세기에 들어서야 등장한 디자인이다.

그럼 초기 기독교도들이 상징으로 사용하던 그 '물고기'는 어떻게 생겼을까? 그 물고기는 vesica piscis로 표현되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아니라 그저 실감나게 그린 평범한 물고기 모양이다. 초기 기독교 유물 가운데 위와 같이 팬시한 형태의 기하학적 비율을 가진 도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Catacomb of San Sebastiano. (Wikemedia Commons)

혹은, 아래와 같이 바퀴살 속에 암호화 되기도 했다. (그리스도(X)와 십자가를 합친 것으로 보기도 한다.)


Early Christian ichthys sign carved into marble in the ruins of Ephesus, Turkey (Wikimedia Commons)




# 물고기자리 (쌍어궁)은 예수를 상징한다?

점성술 및 뉴에이지 쪽에서 20세기 내내 주장해 온 "보병궁 (물병자리) 시대" 이론이 있다.

이쪽 주장에는 여러가지 변형들이 있지만, 대략 그 구조를 말하자만 (1) 예수 이전의 모세의 율법이 지배하던 시대에 동물의 희생제물은 황도대의 10번째 별자리인 염소자리 마갈궁(磨羯宮, ♑, Capricorn)을 상징하며, (2) 예수의 활동기에 보여준 첫 기적인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술병(!)의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적"은 황도대의 11번째인 보병궁(寶甁宮, ♒, 그리스어: Ύδροχόος, "우드로코스", 라틴어: "Aquārius")을 상징하며, (3) 초기 기독교에서 '물고기 / 이크투스'로 상징된 예수는 곧 마지막 황도대의 별자리인 물고기자리 쌍어궁(雙魚宮, ♓, Pisces, Ἰχθύες)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탄생한 해가 "물고기자리"의 "시대"에 속해 있고, 또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해 "사람들의 어부"인 구원자로 등장한 유대교의 유월절 무렵이 춘분 직전 무렵이기 때문이란다. 

그럼 점성가들이 말하는 "점성학적 시대"는 도대체 어떻게 정하는가? 세차운동의 주기가 25860년이니 이걸 황도대 별자리인 12궁으로 나누면 2155년이 각 시대의 존속기간이 될 것이다. 문제는 그 경계다. 하늘을 올려다 보고 별자리들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하늘에 각 별자리가 펼쳐진 범위는 꽤 넓다. 따라서 별자리의 경계를 높고 도대체 언제부터 점성술상의 시대의 시작점과 끝점을 정하는지를 두고 점성가 간에도 정해진 답이 없다는 점을 기억하자. 가령, 어떤 사람은 "물고기자리"가 AD 1년 - AD 2150년이 물고기자리 시대라고 하는가 하면, 어느 누군 BC 6년 - AD 1994년이 그 시대라고 말하고, 또 누군 BC 138년에서 AD 2012년이 그 시대라고 한다.  혹자는 일단 2000년으로 그 기간을 느슨하게 잡고 필요에 따라 가감한다. 딱 봐도 알겠지만, "원하는 바에 맞춰 (예수의 탄생, 죽음, 마야달력 등등) 원하는 대로 늘리고 줄일 수 있다. 꽤 중요한 트릭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잘 눈여겨 보질 않는다.

각설하고,

물고기자리 = 이크투에스 Ἰχθύες ?? ===> 이크투스 ?

"물고기자리"를 뜻하는 그리스어 "이크투에스"는 왠지 Ἰησοῦς Χριστός, Θεοῦ Υἱός, Σωτήρ (예수 그리스도, 신의 아들, 구원자)의 머릿글자를 따서 만들어진 단어 "이크튜스는 ἰχθύς"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성립하기 곤란하다. 그 이유는 한국어 "물고기자리"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한자어 "쌍어궁" - 라틴어 "Pisces" - 그리스어 "Ἰχθύες"란 단어는 원래 "복수"형이기 때문이다. 즉, 이 "물고기자리"에는 "두 마리의 물고기"가 설정되어 있다. "쌍"어궁의 그 "쌍"이 말하는 바다. 

이 쌍어궁은 "물고기"로 표상되는 경우엔 동서고금의 점성술/천문학 역사 내내 늘 "줄로 묶인 두 마리의 물고기"로 표상되었고, 각국의 신화에서도 역시 "두 신화적 인물들"로 표상되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별들이 "두 방향"으로 뻗어있기 때문이다.


Pisces, Wikimedia Commons


Jehoshaphat Aspin. London. Astronomical chart, {Urania's Mirror}


로마, Santa Maria Liberatrice a Testaccio, Wikimedia Commons


프랑스, Saint-Lazare d'Autun, 현관장식, Wikimedia Commons


페르시아, The Kitab al-Bulhan / Book of Wonders, Wikimedia Commons

예수가 "쌍어궁"의 그 물고기라면, 또 다른 물고기는 어디로 갔는가? 

설마 (1) "두개의 물고기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각각 상징한다" 라거나 (2) 혹은 또 하나의 물고기는 영지주의 문건, 특별히 {토마스 복음서}에서 예수의 "쌍동이"로 불리는 사도 토마스/도마를 뜻한다"라고 말할 셈인가?





§ 정리

앞에 설명한 바대로 프리크/갠디의 진술은 여러가지 "확인되지 않은 가정"에서 출발해서 역시 "확인되지 않은 결론"을 도출해 냈다. 정확히는 그렇게 주장한 다른 책(들)에서 이 주장을 "빌어"왔다.

이들의 주장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베시카 피시스'란 단어의 기원은 적어도 고대 그리스의 아르키메데스 시절까지 소급된다.
  2. {요한의 복음서}에 등장한 153이란 수는 "의도를 가지고" 삽입된 것이다.
  3. 얌블리코스와 포르피리우스는 153이란 수가 너무나 신성한 나머지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4. 아르키메데스가 자신의 저작에서 채용한 루트3의 근사치 153/265 속의 153과 {요한의 복음서}의 그 153은 같다.
  5. 초기 기독교도의 이크튜스의 모양은 두 원을 겹친 vesica piscis와 같다.

따라서 프리크/갠디의 설명은 위의 가정들이 얼마나 정확한지에 달려있다. 위 가정에 대해 내가 판단한 가장 합리적인 설명은 아래와 같다.

  1. '베시카 피시스'란 단어가 사용된 첫 기록은 1809년이다. 
  2. 의도가 있었는지, 혹은 그냥 단순기술인지는 기록이 없어 아무도 모른다.
  3. 모른다. 사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이보다 더 신비한 수들도 표기해 남겼다.
  4. 그럼 265의 행방은? 예수설화 속에서 루트3의 의미는?
  5. 초기 기독교도의 이크튜스 문양은, 기하학적이기는 커녕 매우 현실감있게 그려진 그냥 물고기다.

만약, {요한복음서} 속의 153이 vesica piscis 를 뜻하는 것이었다면, 초기 기독교도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에 대해 암시를 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아있는 교부들의 문헌과 고고학적 유물은 기독교의 물고기/이크튜스가 vesica piscis와 비슷하다는 어떤 암시도 주지 않는다.

아울러 프리크와 갠디가 대변하고 있는 AD 2-4세기의 그노시스가 남긴 어느 문헌도 비슷한 암시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노시스들이 피타고라스의 교리에 매우 우호적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가?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암시는 신을 "위대한 기하학자"로 표상하는 19세기의 프리메이슨을 자처하는 인물들이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아마도 상식적인 수준에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판단은 각자의 몫.


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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